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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5 23:55:43 조회 : 550         
예수님의 옆자리 180515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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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21.♡.203.222) 18-05-26 19:20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예수님의 옆자리)180515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17장 2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지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입니다. 이런 기도할 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 할 때 어떻게 기도했느냐 하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그렇게 흘렀다 했지요. 그런데 막상 이 내용보면 그렇게 애 안 써도 술술 나올 내용인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못 보고 뭘 빠트리고 있어서 이 내용을 하는데 그렇게 땀방울 핏방울처럼 그렇게 애씀이 필요할까라고 생각하지요.


예수님의 그 모든 생애를 감성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입니다. 딱 한마디로 이거예요.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 자체가 고통이죠. 하늘의 영광을 포기 했거든요. 지상의 하늘의 영광을 포기한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뭐냐 하면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데 그냥 막연하게 죽을것 같으면 그냥 뭐 번개탄 피워서 자살하면 되요. 그런데 죽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생겨야 될 모든 고통을 자기 쪽으로 다 칭칭 감고 수렴한 채 돌아가셔야 되요. 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이 그냥 말이 아니라 온 육체로서 몸소 그걸 다 자기로 집중이 되어야 해요. 그야말로 지옥의 고통이죠. 그걸 이제 성경에서는 저주의 고통이라고 하는데 저주라고 하는데 그 저주의 고통을 온몸으로 다 자기를 향하여 다 끌어 오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 그 고통도 같이 동반해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올 때. 십계명 같은 율법이 올 때. 그러면 우리는 뭐 지킬만하면 지키고 바쁘면 못 지키고 뭐 편할 때 지키지 이렇게 하는데 온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게 되면 모두 위반한게 돼요. 모두 위반한게 된다면 율법이 제공하는 그 징벌, 그 징벌을 우리가 마땅히 다 받아야 돼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삼척에 가면 은총교회라고 아주 작은 교회 있는데 그 교회에서 얼마전에 가스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가스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그 지역에 와서 착한 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선한 일을. 어려운 사람 돌보고 그 교회 관계없이 방과후 공짜로 애들 가르쳐 주고 이렇게 해서 좋은 신망을 얻은게 교회인데 그 날도 사모되시는 분이 애들 주일학교 애들한테 호떡 구워준다고 가스를 틀다가 가스가 샜는지 어떻게 폭발해서 사모는 전신 3도 화상 애 하나도 전신 3도 화상 그리고 9명 아이가 2도와 1도 화상 당했고 그 중에 안 믿는 애들도 많이 있고. 교회는 교인수가 적어서 거의 자립이 안 되는 교회. 그래서 여기 성심병원인가 거기서 하는데 치료비가 3억, 들어가는 것만 3억이랍니다. 그리고 전신화상이예요. 그것도 3도.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남편은 마침 출타중이라서 남편은 뒤늦게 왔는데 그 화상 입을 때에 고통이 보통 아니거든요.


자, 우리가 그 가스 틀어서 화상 입은 사모 당사자라 생각합시다. 그럴 때 그 입장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통을 주십니까? 내가 무슨 죄 짓는게 있는가를 다 끄집어 낼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끄집어 내도 전신 3도 화상에다가 치료비 한 푼도 없는데 3억이라는 치료비를 앞으로 계속 나오고 더 곤란한 문제는 불신자 가정에서 소송이 들어오거든요. 안 믿는 가정에서 우리 애가 몇 살 때까지 살 때까지 모든 생활비까지 다 내라는 소송이 들어왔다 이 말이죠. 교회를 상대로 소송하겠지요.


그러면 이것은 감당이 됩니까 감당이 안 됩니까? 감당되지 않지요. 이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가 보통 아프다 고통하면 제일 먼저 뭐냐 하면 이 고통이 왔지만 내가 보다 더 착한 일하고 하나님 섬겨서 고통이 없는 식으로 이걸 극복하거나 좀 줄이는 방향으로 좀 면제되는 방향으로 내가 한번 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져요. 고통은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는게 아니고 고통이 오게 된 것은 여기 반드시 고통의 원인이 있는데 나쁜 일을 했을 때 나쁜 짓을 했을 때 거기에 합당한, 걸맞는 그러니까 이게 용량이 얼추 비슷한 나쁜 짓의 비슷한 고통이 주어지게 된다 그러니 고통이 왔을 때는 뭔가 신호가 되고 이거는 징벌이 되고 징계가 되고 정신 차리라는 어떤 싸인일 수도 있고 그래서 이걸 계기로 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보다 그 보다 잘 살았지만 바르게 살았지만 보다 잘 살도록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들을 고통 중에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욥기에 보면 고통은 이게 뭐냐 하면 감당이 안 됩니다. 감당 될 수가 없어요. 우리 이 점을 사람들이 몰라요. 예수님에게서의 영생은 고통이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보는 영생은 신나는 겁니다. 와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 영생 기분 좋다. 우리는 기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요. 영생의 내용이 뭐냐를 이렇게 풀어볼 생각을 안 해요. 영생이라는 그 결과물만 홀딱 내가 이렇게 마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 수박이 너무 맛있다. 아 진짜 맛있거든요. 수박이 찢어지는 아픔은 몰라요. 그 당분을 내가 마시면 난 기분 좋은 거예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공짜로 영생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다가 뭘 붙이냐 하면 그걸 가지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야~ 진짜 사랑의 하나님 진짜 멋있다. 공짜로 막 주고 우리를 거의 아는 구절 있죠.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그 구절 있잖아요. 상투적인 구절 성경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 구절을 도입해가지고 영생을 구매하는데 있어서 장애되지 않도록 방해되지 않도록 순수하게 하도록 여러 가지 성경적 단어를 갖다가 여기다가 앞뒤에다가 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영생은 바로 고통이었습니다. 그럼 이 고통은 예수님이 거부할 수 있느냐. 거부하면 영생이 없어요. 그래서 고통이에요. 고통이 율법의 징벌이 저주가 너무 아프잖아요. 그런데 아프다는 이유 때문에 그걸 피해버리면 영생이 날아가 버린다니까. 영생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영생을 얻겠다고 이 저주를 받아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기 감당이 안 되지요. 감당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도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이죠. 아버지 뜻으로 이 잔을 마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어요. 왜 아버지가 없느냐 하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자리에 아버지가 나와요. 아들이 아닌 사람은 아버지가 없다 이 말이죠. 인간들이 믿는 신들은 다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건 전부다 우상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앞에 어떤 형상을 붙여도 전부 다 우상이에요. 성령께서 오셔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할 때 예수님에게만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외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유대 사회에서 봤던 그 여호와는 뭐냐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냥 상상의 관념적인 철학적인 신들이죠.


예수님만이 아버지가 알고 다른 사람은 아버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을 부여하니까 비로소 성령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때에 그 전에 내가 알던 하나님은 이거는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받아들이게 돼요. 망상이었다. 그 이러한 끊어진 것을 이어가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감당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것은 감당되지 않는다면 이 고통을 면제해 보려고 좀 줄여보려고 모든 한 모든 시도는 다 헛된 시도가 되는 겁니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고통이 왔을 때 이 고통이 너무 참기 힘들어서 아까 제가 이야기 하다가 말았습니다만 욥같은 경우에 욥이 고통이 오니까 욥은 가만있었어요? 감사했습니까 ? 아니면 하나님께 분풀이 했어요? 화를 냈습니까? 욥이 그만큼 두꺼운 이유가 뭐냐? 그 두꺼운 내용 하나하나 전부다 차츰차츰 하나님께 대드는 그 고통의 신음소리가 그렇게 욥기의 내용을 차곡차곡 채웠잖아요. 그 욥이 내뱉는 고통 속에 모든걸 내뱉을 때 이것은 일종의 인간을 하나의 그릇으로 보면 그 안에 내용을 다 긁어내는 거예요. 다 쏟아내는 그릇에서 쏟듯이 다 긁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욥이 그 당시 인간의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대표자가 되어서 내가 미처 모르는 내 안의 어떤 것들이 어떤 성격들이 들어있는지를 욥이 대신해서 그걸 전부다 다 드러내 보여주는 겁니다. 쭈욱 이렇게 나열하는거예요. 이런 저런 것 쭉 나열했지요. 자, 그렇게 나열했을 때 나열하니까 어떻게 욥이 좀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고통이 좀 수그러졌습니까? 어떻습니까? 전혀 차도가 없지요? 전혀 차도가 없어요. 이게 바로 중요한 겁니다.


고통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차도없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차도가 없는 또는 달라지지 않는 속성이 곧 누구다? 자아다. 나다. 나다 이 말이죠.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 다니고 아무리 해도 인간은 어떤 짓을 해도 그 짓이 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욥이 대신 다 보여주는 겁니다. 욥이. 그런데 이 욥은 그 당시 무엇과 대조되느냐 하면은 욥의 친구와 대조가 되요. 욥의 친구한테는 고난이 안 왔잖아요. 그 고난이 안 오니까 요즘말로 하면은 그들은 배부른 소리하고 있습니다. 이 배부른 소리를 분석해보는 거예요. 욥 하나에 친구가 네 명 달라붙지요? 그러면 마지막 엘리후 빼놓고 욥 하나에 앞에 있는 친구 세 명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들이 내뱉는 신학이 어떤 신학이냐를 분석해 봐야되요. 욥의 친구들이 내뱉는 신학이.


욥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욥보고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친구가 잘못되었으니까 그 친구의 죄를 위해서 욥이 네가 대신 재물을 드려서 욥의 친구들의 죄를 용서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결론을 미리 알았으니까 그걸 가지고 욥의 중간 지점에 친구 나오는 지점부터 하나하나 거기에다가 대비를 해보는 거예요. 대비를 해보면 소위 욥의 친구들이 내뱉는 그 신학이 뭐를 모른다? 하나님도 모르고 배부른 자의 소리, 망상이죠 망상.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자기 자신도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내뱉는 그런 신학들이 나옵니다. 그 신학이 무슨 신학이냐 하면은 바로 악마의 신학이죠.


자, 악마의 신학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첫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한다예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요. 악마가 하나님을 하나님인줄 알지요? 야고보서 2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한 분인줄 아느냐? 마귀도 그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두 번째 신학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런 나부터 출발해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나는 하자가 있다 없다? 나는 잘못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잘못이 없다가 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잘못이 없다. 잘못이 없다 부터 나오면서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선과 악이 나옵니다. 선의 리스트가 쫙 나와요. 이렇게 이런 이런 것이 선이다. 그중에 하나가 악마의 신학 중에 하나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게 빌닷의 이야기에 나오지요. 그 다음에 선은 이렇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악은 이렇다고 쫙 나열해요. 이걸 오늘 식으로 하면 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이 나와요. 어디서? 배부른 자의 소리에서. 욥의 친구에서. 이게 쭈욱 나와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세 번째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선을 했으면 뭘 받느냐 하면은 보상을 받고요 악을 했으면 뭐냐 하면은 징벌을 받아요. 이게 악마의 신학입니다. 이게 배부른 자의 욥의 친구의 신학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정리된 본인의 신학을 가지고 누구한테 적용시키느냐 하면은 바로 욥에게 욥을 질타하고 욥을 공격하는데 이 신학을 그대로 동원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욥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전체 주제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뭘 안다? 인간들은 누굴 안다? 네모를 안다. 뭘 안다? 인간들은 신을 알고 있다고 내부적으로 자기 내부로 그렇게 주장한다죠. 신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이 신으로부터 나온게 뭐냐하면 아까 세 번째에도 나오죠.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윤리와 도덕이에요. 그리고 이 신과 윤리 도덕을 이어주는 중심에 누가 있다? 본인들이 있는 거예요 본인들이. 이 본인들이 완벽하다고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나는 행동이 완벽한게 아니고 뭐는 완벽하느냐 하면은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악이라고 구분할 줄 아는데 완벽하고, 그 다음에 선을 행했으면 보상이 되고 악을 행했으면 징벌받는다가 그걸 아는거예요. 그럼 이걸 하나의 뭐로 보느냐 이걸 하나의 체계, 프레임이라고 하는데 또는 구조. 구조라고 봅시다.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봅시다. 이 구조를 이렇게 했지요.


그러면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면 되겠지요? 그렇죠?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면 누구한테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게 사람들은 선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윤리 도덕을 기본적으로 집어넣고 뭘 집어넣느냐 하면은 예수 믿기를 집어넣어요. 예수믿기. 나는 예수를 믿는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보상으로 어디 간다? 천국 간다가 됩니다. 길에서 만난 구원파들이 뭐라고 합니까? 구원받았습니까? 묻지요? 구원받았느냐 묻는 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기는 있는데 우리가 전하는 정보가 부족해서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욥기에 있어서 욥기에서 이 구원 문제가 욥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은 이런게 참 제가 설명하면서도 어려운데 욥이 아까 누굴 위해서 제사드린다고 했습니까? 욥이 욥의 친구를 위해서 그게 아니야 그건 엉터리야라는 행위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져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정보를 내가 성경을 잘 모르고 있는데 성경을 누가 알려주는 그 정보를 내가 습득하고 확보해서 구원 얻는게 아니고, 누군가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등장해야되요. 내 앞에. 나 말고 내 앞에. 누군가 억울한 사람 등장했고 그 억울한 분의 고통과 고난 받은 그분이 그 다음에 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서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죄사함의 제사를 드려줘야되요. 아 복잡해요.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입니까? 나빼고 얻어진거예요. 나빼고 얻어진거예요. 따라서 이 말은 뭐냐? 나는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는 권리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그런 권리가 없어요.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지 아들도 아닌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나설 문제가 아니에요.


자,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이제는 실습에 들어가보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욥의 친구들한테 이야기 해본다 칩시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나는 구원될 자격도 없었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위해서 이미 씻어줬습니다 라는 이 이야기를 욥의 이야기를 가지고 욥의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해보자 이 말이죠. 욥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이게 무관한 이야기라고 훼방을 놔요. 하나님의 존재하심.


왜냐하면 방금 내가 어떤 누구하고 욥이 고난받고 죄씻는다는 것은 이게 기능의 속한 문제지 존재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계시다 이게 문제가 아니고 계신 분이 이 땅에서 뭔가 뭘 했던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존재함 자체는 전혀 이거는 구원하고 상관이 없는거예요. 욥의 친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어쨌든 저쨌든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맞잖아. 그건 내가 인정하잖아. 이렇게 되요.


두 번째 보게되면 신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기에 나는 반드시 구원 받을 그런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한데서 보상 받아 버리면 이게 윤리적으로 모순이 되어 버려요. 뭔가 한게 있어야 보상이라는게 의미가 있지. 한 것도 없는데 보상 주어진다 하면 이거는 좀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는 오류에 빠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뭔가 해야 되는 거예요. 뭔가 하는데 예수 믿어주기라는 착함을 누가 한다? 내가 그걸 믿는다는 행함을 행할 때 비로소 보상차원에서 주어진다 이게 그들에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왜? 나는 나의 행함에 대해서 나한테 문제 있다는 생각을 이 사람들은 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못 해봐요 근원적으로. 좋으나 싫으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 인생 살지 못나도 내가 내 인생 알아서 잘나도 내가 알아서 한다이지 못나고 잘나고 내가 나한테 손 댈 권한 없다는 말을 도저히 우리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럼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지옥가면 어떠냐 하잖아요. 성경자체가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지옥만 가야돼요. 이게 내 뜻이 아니고 아담의 뜻이거든요. 아담이 범죄할 때 이미 모든 인간은 죽었잖아요. 죄로 인해 죽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지옥만 가야돼요. 그리고 더 이상을 욕심내면 안 돼요.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은거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갈라디아서 3장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저주 받아야 되죠. 저주 받아야 되면 저주 받을 값을 해야지 왜 딴 소리 나오느냐 이 말이죠. 못 지키면 지옥가는게 당연한데 왜 좋은데 보내주세요 라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신이 달라서 그래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나 잘났다에서 파생된 하나님이에요. 나 훌륭하다에서 파생된 하나님, 나는 완벽하다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훌륭하다에서 파생된 하나님이에요. 무슨 수로 이걸 바꿀 수 있습니까? 잘났다는데. 나한테 하자가 없다는데 이걸 무슨 수로 바꿀 수 있습니까? 못 바꾸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사람들은 악마가 시키는대로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둘둘 감습니다. 교회와서 윤리 도덕 이야기만 뽑아서 들어요. 이 말은 뭐냐 결국은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홀로 있다. 이게 문제입니다. 사람은 홀로 있어요. 혼자서 구원 방법을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어요?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인간은 혼자 있어요. 혼자 있으니까 필요한 것들을 갖추기 위해서 뭐로 감느냐 하면은 율법으로 감아요. 윤리 도덕으로. 자기를 혼자 있는 여기를 이게 만약에 구리라면 자석이라면 구리로 감는 거예요. 전기 생산 되겠다. 자석에다 구리를 징징 감는거예요. 전자석이죠.


사람은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는게 아니에요. 자기 잘난 맛이 둘둘 감아져 있어요.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잘난 맛이. 만약에 두 사람이 이렇게 카페에 모였다. 그냥 모인걸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둘 감았어요. 여기서 자기 첫째딸 이야기 나오면 첫째 아들 나오죠. 우리 딸내미 유학 갔다하면 나는 우리 아들 셋 다 의대 다닌다. 우리 남편 한달 얼마다 나는 얼마다. 전부 이렇게. 몇 평 산다 몇 평 산다. 이게 나와요. 둘둘 감았다니까. 그런 이야기 왜 하느냐. 이게 다 착함의 보상으로 주어진거예요.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신께서 이런 보상을 줬으니까 너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느냐? 서로 대조하고 대결하고 비교하는거예요. 자기 의가 많은 사람한테는 그만큼 보상이 많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자기가 한 짓이 더러우면 주께서 전능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전부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욥의 친구에서 나온 이야기예요. 욥의 친구가 하는 이야기예요 욥의 친구가. 우리 친구가 아이가 이 친구. 욥의 친구가 하는 말이 욥아 네가 그렇게 아픈 것은 네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 이건 욥을 위로하는게 아니예요. 자기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는 그만한 고난을 안 받았으니까 나는 너보다 항상 정당하게 살았다는 것을 이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티를 내는구나. 지금 자기 자랑하고 있는거예요.


처음에 다시 돌아가서 처음에 예수님의 영생은 뭐라고요? 고통이에요. 이 땅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심지어 예수님도 감당 못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넘어가게 하옵소서. 그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율법 100개중에 99개 지켜도 소용없습니다. 하나 어기면 지옥가요. 우리가 지금 사태 파악을 해야됩니다. 지금 천당 가는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역사라는게 있어 가지고 역사책에 기록됐지만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세상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져야돼요. 예수님의 고통을 가지고 세상을 다시 봐야 됩니다. 십자가를 다시 봐야돼요.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다시 봐야돼요. 나 살아있다 예수님 살아있다 같이 맞먹을 생각하지 마시고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음으로. 예수님이 저주 받음으로 모든 인간은 다 지금 다 사는게 저주예요.


다시 그 삼척 은총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제가 만약에 그 사모한테 찾아간다. 찾아갈 때 빈손으로 찾아가면 욕 되게 얻어먹겠죠. 3억 나왔다는거 뻔히 알면서도 위로금 봉투에 조금 넣어가지 그냥 빈 손갔다. 그러면 그 사모나 목사한테 우리가 해줄 말이 뭐가 있습니까? 손 만지는척 하면서 해야죠. 참 훌륭하십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내가 화상 당해도 마땅함을 당신이 대표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어디 나오냐 하면은 바로 누가복음에 나와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지요. 그거 왜 죽었게요? 왜 죽었습니까? 뒤에 주님의 해설 붙지요. 망대 넘어져 죽은 사람, 요새 말로 하면 세월호 빠져 죽은 애들 그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네가 저 사람보다 죄가 없는 줄 아느냐?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세상을 똑바로 보지 아니하면 너도 이 꼴 된다는 거예요. 너도 똑같은 저 꼴 이 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18명 왜 죽었습니까?


정답은 그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앞당겨 보여주는 거예요.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축하드릴 일입니다. 축하드릴 일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고통의 세계거든요. 저주의 세계이기 때문에 주의 뜻에 의해서 저주에서 빨리 빼내줬으니까 축하할 일이죠. 제대 빨리 했으니까. 마르다 마리아 오빠 이름이 뭐지요? 나사로.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누가 화내느냐 하면은 마르다 마리아가 화를 내지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 울었습니다. 왜 화를 냅니까? 그들은 살아있어야 이게 자기의 가치에 부합된다고 보는 거예요. 지금 우리를 죽이는 것은 두 번 죽이는 것이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를 죽이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을 섬겼던 거기에 합당한 대우가 아닙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지금 마르다 마리아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래오래 사시는 분이십니까? 지금 이 땅에서 저주 받고 죽으시는 분이예요? 예수님 자신이 저주 받고 죽으신 분이예요. 그러면 영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가신 길에 있지요. 노선이 달라요 노선이 달라요. 오늘 동대구역에서 수서까지 오는데요 아 오늘 가슴아픈 일이 있었어요. 이때를 위함인지 모르겠습니다만 70 한 80가까이 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있어요. 몸이 굉장히 불편해요. 그래서 참 기차 여행이 힘들거든요. 계단 올라갔다 내려갔다 힘들다 이렇게 했는데, 그냥 내가 기다리면서 책보고 있었는데 언뜻 듣기에는 안내양하고 이야기 하면서 안내양이 당부를 해요. 13번 거기에 가서 타세요 라고 했어요. 내가 13번으로 들었어요. 있는데 보니까 12번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13번은 새마을이고 12번은 SRT인데 거기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뭣도 모르고 가는데 오지랖이 있어가지고 남의 일에 간섭한다 해가지고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해 가지고 물었어요. 저 할아버지 새마을 탑니까? KTX탑니까? 자기는 새마을탄대요 그러면 이쪽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하는데 벌써 기차가 왔어.


제가 그걸 뭘 느꼈느냐 하면은 갈 길이 달랐다. 내가 세상 사람을 볼 때 이 세상사람보고 외치고 싶은 것이 그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착해서 보상받아서 가는 그 길은 지옥가는 것이지 천국가는 길이 아니예요. 천국 가는 길은 주님 가신길이 천국가는 길이예요. 주님은 이 땅에 어떻게 통과했느냐 하면은 이거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계속 기어들어 갔어요. 그러면 목사님 저보고 고통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까? 어느 누구도 못해요. 감당해봤자 못해요. 감당이 안돼요. 그래서 즐거운 겁니다. 복음이 가벼운거예요.


만약에 이 율법으로 칭칭 감아 버리면 율법 칭칭 감으면 조금만 집안 일 잘못되고 안되면 이거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 해가지고 더 선한일 자기가 생각하는 욥의 친구들 선한 일을 총동원 시켜서 빨리 옛날에 그 손해를 만회해가지고 부도난거 만회해가지고 다시 나봐라 나 착하니까 이렇게 복 받았잖아 그것 자랑하기 위해서 하다 보니까 이게 뭐냐하면 스스로 악마에게 약점을 노출해버리는 거예요. 혼자 사니까. 율법으로 하니까. 악마가 주는 저주를 주는 그 율법을 자진해서 자기가 요청을 해버려요. 그래 가지고 교회가 뭐하냐 하면은 목사 설교 들으면서 목사 설교에서 뭘 뽑느냐 하면은 내가 선할 수 있는 요소를 다 뽑아요. 다 뽑고 이거 이번 주 내에 이거 다해가지고 다음 주 올 때는 지금보다 더 괜찮은 인간으로 자랑거리를 내세울만한 그런 보상받은 티를 내면서 교회오고 다음 주일날 하고 싶은거예요. 가는 길이 뭡니까? 가는 길이 새마을호. 그거는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지옥으로 가고 있는거예요. 그런데 배운 가락이 이것밖에 안 배웠어요. 배운 가락이.


왜냐하면 세상에 살다보면 세상에 신이 있지요. 세상 신이 뭐예요? 고린도후서 4장에 이 세상 신을 뭐라고 합니까? 악마 아닙니까. 악마가 세상 신이예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누구한테 일임했어요? 악마한테 일임했기 때문에 악마이름이 세상 신이예요. 그럼 세상 신이기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누구한테 양육받았습니까? 세상의 같이 살기 위해서는 누구의 방식을 내 방식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어요? 마귀가 시켜주는대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둘둘 감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런 원칙과 이런 자세로서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간다는 거예요. 지금 지옥 갈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어요? 그럼 천국 간 사람은 있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간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17장 2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그 다음에 뭡니까? 만민을 다스리는 그 다음에 뭐죠? 권세죠. 이 권세는 우리의 권세가 아니고 외부에서 주어진 권세지요. 권세가 동원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우리가 개과천선을 할 수 있다 없다? 안되죠. 배운 가락이 그것밖에 없어요. 배운 가락이 마귀가 가르쳐준대로 이 땅에 사는데 적합한 방법만 우리가 알고 있어요. 이 땅에서 오래살기 남기위한 필요했던 모든 요령과 재주는 다 갖고있어요 우리가.


어려울 때는 기도하면 되고 뭔가 돈에 욕심내지만 헌금을 하게 되면 자식대대 복을 받고 모든 것이 잘되는 거예요. 그 잘된다는 것이 잘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이에요. 잘된다하고 같은 말이 뭐냐? 안정적이다. 안정성이 있다. 그러면 가장 안전적인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게 뭐겠습니까? 한자로. 돈이잖아요. 돈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로또됐는데 울고불고 난리난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돈 되기 위해서 애들 교육시키고 유학 보내고 가정교육시키고 다 하잖아요. 행동 똑똑히 해라. 똑똑히 하면 대기업 간다 이런 것.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어 돈이 안정감을 줘요. 이 방식이 누구한테 배운겁니까? 바로 이 세상 신 악마한테 이걸 배운거예요. 악마한테 배운 심성을 가지고 어디 갑니까? 교회가요. 교회가서 기도내용부터 해가지고 모든 헌금부터 모든 봉사에 결국 우리가 은근히 뭘 노리느냐 하면은 이렇게 할테니까 우리로 하여금 안전빵으로 이 세상 안전하게 사는데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돈 좀 아슬아슬하게 주지 마시고 좀 이렇게 편안하게 여생을 여유롭게 연금도 좀 많이 이렇게 되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하고 할 뿐이예요. 그리고 교회가서 봉사했다하면 그 보상은 돈으로 환원되어서 오기를 바라지요.


그러면 교회에서는 목사는 이야기 합니다. 마음을 낮춰야한다고 그러면  교인들은 마음 낮추면 돈주십니까? 마음 낮추면 돈 주십니까?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아야 돼. 그럼 주를 위해서 고난 받으면 돈 주시겠습니까? 인간이 달라질 수가 있겠어요? 없어요? 안 달라집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바로 혼자 살지 말고 같이 사는 거예요. 같이 사는 것. 우리를 뭐라고 하느냐 성도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지요. 여자의 위치는요 그냥 여자 혼자 여자 위치를 챙기지 않아요. 누구의 옆자리가 여자 자리예요. 누구의 옆자리 맞지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나오니까 누구의 옆자리가 여자예요. 우리는 신부잖아요. 우리가 신부가 되려면 우리의 옆자리가 권세자가 우리의 옆자리가 되어 있어야 되요. 그분이 갑이 되고 우리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안 되느냐. 모든 권세를 우리한테 준게 아니고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께 다 줘버렸잖아요. 줘버렸으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악마의 속성 자체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법 지켜서 착해서 착함에 대한 보상으로 잘되고 만약에 조금이라도 우리가 자세가 흐트러져가지고 실수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징벌 때문에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느니라 해가지고 징계받아갖고 뭐 그런 식으로 산다. 전부 논리가 선악 논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못 고칩니다. 죽을 때까지 못 고쳐요. 그러면 우리의 자리는 혼자 있는게 아니니까 신랑되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바꿉니다. 바꾸는데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은 그 바꾸는 방법은 우리가 그릇이라면 그릇에서 우리의 속성을 끄집어내요. 주께서 권세니까 모든 사태죠. 모든 사태를 주셔가지고 다 끄집어내요. 아까 제가 고통이라고 했는데 여러분한테 문제를 한번 내볼께요.


자, 아까 은총교회 사모 3도 화상 전신화상 입원비 3억 지금 당한거에 플러스 알파, 이게 고통스럽니까? 아니면 내가 물어볼테니까 그때 답변하세요. 제가 옛날 영주 동부 교회 전도사로 있었는데 거기에 과장이 과장이 일이 뭐냐 코카콜라 영주 영업소 과장이었습니다. 그 사람 항상 교회 올 때 항상 얼굴이 시커매요. 왜 시커멓냐 하면은 밀어내기 하기 때문에. 밀어내기가 뭐냐 하면은 공장에서 코카콜라 만들잖아요. 그러면 영업소에다가 강제로 떠맡겨 버립니다. 팔리든 안 팔리든. 우리가 아는 상식은 뭐냐? 영업소가 코카콜라를 팔고 오! 몇 병 안 남았네? 전화해가지고 몇 병 보내주세요. 이렇게 해가지고 이거 팔고 수수료 얼마 먹고 이게 우리의 상식인데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계속 줘가지고 이거는 코카콜라도 마찬가지고 몇 년전에 있었던 요플레 그것도 마찬가지고 몇 일전에 뉴스에서는 된장, 된장도 마찬가지예요. 영업소는 팔리든 안 팔리든 네가 알아서 그걸 네 돈으로 사든지 모르겠고 무조건 밀어내게 해요. 그러면 이거는 어쩔 수 없이 안 팔리면 자기가 그 돈 주고 사야돼요. 마찬가지예요. 다단계가 아닌 것처럼 다단계같은. 정수기.


자, 제가 묻는 질문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고통스러울까요? 같지요. 정답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제일 고통스러워요. 내가 하는 일이 제일 고통스러워요. 어떤 노동자들 데모하더라구요? 데모한다고 임금체재 임금도 안주고 이렇게 잔업시키고 데모하는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렇게 힘들면 네가 부장해봐라. 자기가 한번 부장해보지요? 더 힘들어요. 사람은 얼마나 모든 일이 힘들면 10년 20년 해보지 아니하면 손에 이렇게 숙달되지 않으면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힘듭니다. 모든 인간은 다 힘들어요. 심지어 가정주부도 놀러다니는 가정주부도 골프치러 다니는 가정주부도 힘들어요. 홀인원 안 될까바 다 힘들어요.


왜냐? 이 세상 자체가 힘들라고 만든 세상에 살기 때문에. 다 같이 힘듭니다. 힘든데 중요한 것은 힘든 것을 벗어나는 그 방식이 주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바로 마귀적인 방식들이 이 땅에 회자되고 있고 서로 유통되고 있고 통과되고 있습니다. 네가 당한 이 저주를 벗어나려면 우리에게 오너라. 우리에게 와서 기도 좀 하고 하게 되면 헌금 좀 하고 하게 되면 너는 앞으로 전에 잃었던 것 다 보상 30배 60배 다 보상해주고 다 해준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그거 보이스피싱입니다. 그거 완전 사기꾼들이예요. 이 땅에서는 우리 어떤 경우라도 고통은 우리에게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길을 가게 만들어요. 뭐냐 하면은 전에는 어쩔 수 없이 졌던 십자가가 죄는 죄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하면서 십자가가 이게 가슴 쓸어내면서 아이구 다행이다. 이 다행이라는 이 기쁨을 성령을 통해서 점점 더 주시는 겁니다. 그거뿐이에요. 이런다고 살림살이 더 나아지는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살림살이 나아지는게 아니예요. 지금 바꾼다고 더 편해지는 것도 아니예요. 아무리 재미난 일도 몇 개월 하게되면 전부 다 식상해요. 시들해지고요 해봤다가 꽂꽂이 해봤다가 난 쳐봤다가 뭐 그 뭡니까? 다도? 그거 해봤다가 시간 때우고 싶어가지고 때울거 없나 싶어서 웅변도 해봤다가 검도 해봤다가 태권도 해봤다가 백날 해봐도 결국 인간은 시들해지고 식상해집니다. 은퇴하고 난 뒤에 백날 등산가도 몇 개월 안 되서 재미없고요 그냥 등산복만 버리고 해외여행 가봤자 피곤만 하고요. 어디에도 고통 없는 곳은 없어요.


고통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당연한거예요. 고통이 면제되다니요? 없어요.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성령의 기쁨. 혼자 살지 않는다는 기쁨, 그 기쁨밖에 없습니다. 아이고 다행이다. 그 다행이다가 언제 크게 등장하고 기쁨이 언제 등장 하느냐 하면은 자신이 정말 구원받을 가능성이 제로였다는 것을 알 때 바로 내 자리에 쳐들어오신 주님의 권세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주께서 세리와 창기가 율법 징징 감은 소위 도 닦은 사람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고 이야기 한겁니다. 그들은 자기가 한 것을 자기가 잊지를 못해요. 이거 내가 했다. 이거 내가 해서 복 받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대해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마귀가 가진게 뭐냐? 자기 연민이었어요. 위로해도 내가 위로해요. 지옥가도 용기를 주실 분은 마귀밖에 없어요. 지옥가도. 어떤 경우에도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나를 격려합니다. 우리가 배운게 평생 몸으로 익힌 것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익힌게 없어요. 내가 안 믿으면 구원 못 받고 내가 뭘 하지 않으면 어떤 효과 없다는 그 철칙, 그 철칙으로 평생을 버텨온거예요.


권세라는 것은요 적절함 또는 합당함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이야기하고 쉽시다. 먼저 물어볼께요. 권세가 가시적 결과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눈이 보이는 결과가 있어요? 없어요? 권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이 세상이거든요. 이 세상의 권세를 인간은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아까 제가 이 세상 신이라고 했지요. 권세라는 눈이 있어요.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눈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현실. 현실 또는 사실 또는 다른 말로 있는 그대로. 이게 전부다 권세입니다. 그런데 그 17장 2절에 이 모든 권세를 누가 줬다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일임했지요? 예수님한테 일임한거예요. 예수님한테. 예수님한테 일임한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권세아래 있는 사람가운에서 영생 받기로 작정된 사람에게 이 세상 권세로부터 벗어내기 위해서 예수님한테 이 권세를 일임한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내가 망가져도 상관없고 내가 망해도 상관없고 내가 죄지어도 상관없고 그렇게 사태에 상황에 몰아붙인 것은 누구의 권세란 말입니까? 바로 나 말고 내 옆에 계신 분, 나는 그분의 여자 신부거든요. 그 분의 여자이기 때문에. 나를 여자로 칭하시는 그분이 하시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무대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얼마나 이거는 엄청난 긍정적이에요. 굉장히 긍정적이죠.


만약에 우리가 혼자 산다고 한다면 우리가 기대하는바 때문에 죄가 진다는 것 때문에 깜짝 깜짝 놀랍니다. 이걸 비롯해서 내가 집안이 망하는게 아닌가? 내가 이런 실수를 통해서 앞일이 어떻게 꼬이는게 아닌가? 지례짐작 겁을 먹고 있잖아요. 이거는 혼자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추스르고 단도리 해주면 누구도 내 인생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까 나라도 열심히 성경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 지키고 교회 나와서 이만큼 착했습니다 티를 내줘야 그 다음에 약간은 안심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욥의 친구의 악마의 신학에 속아넘어가신거예요. 10분 쉽시다.
 홍민희(IP:121.♡.203.222) 18-05-26 19:21 
강남-요한복음 17장 3절(예수님의 옆자리)180515b-이 근호 목사


권세가 실체가 된 것이 국가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다니엘이 나와요. 다니엘서에. 네 짐승이 나옵니다. 네 짐승이 나오니까 괴물인줄 알지만 괴물 아닙니다. 네 당당한 제국들이예요. 바벨론, 메대-바사, 헬레마카토니아, 로마. 우리가 그 성경을 덮고서 역사책을 보게 되면 역사책을 보고 그들을 짐승이라는 것을 찾아내라면 못찾아 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약손 작은 국을 잡아먹는 그 기세 작은 국가는 잡혀 먹으면서도 그 잡아먹는 나라는 부러워해요.



여러분들이 역사를 볼 때 오해하지 말아야될 것은 일제시대 때 일제 강점기 뭐 이렇게 하잖아요. 용어 바꾸기 싫은데 그냥 일제시대 때 일본에 항거한 사람이 많겠어요? 순응한 사람이 많겠습니까? 순응한 사람이 많아요. 많은 사람들이 조선을 삼켰던 일제의 선진 기술이 그렇게 탐이 난거예요. 목수를 해도 목수의 용어가 다 일본말 아닙니까? 문방구를 해도 그 문방구 경영하는 기술이 다 선진기술이에요. 모든 구석구석에 새로운 선진 기술이 도입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보고 일본아 물러가라가 아니라 한수 가르쳐 주세요. 대부분 사람들은 한수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거기에 이렇게 대든 사람은 거의 극히 소수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우리나라 조선을 점령할 때에 그다지 큰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기. 3.1운동해봐야 거기에 몇 명 참석했다고요. 손가락 건드리니까 소리 못하고 그다지 그렇게 한거예요. 그러면 누가 반발했는가? 소위 가진 자들이 반발했습니다. 왜냐 몽땅 다 빼앗기니까. 몽땅 다 빼앗기니까 그 일제때 그들은 결국은 나라 회복이 문제가 아니고 옛날 자기가 이 조선 땅에서 잘나가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운거예요. 따라서 이 인간의 권세라는 것은 성경에서는 짐승이지만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나라의 바벨론처럼 될까? 우리는 언제 메대-바사처럼 될까? 우리는 언제 헬라마카토니아처럼 될까? 우리는 언제 로마처럼 그런 거대한 나라가 될까?



오히려 부러워했지 이 짐승아 물러가라 이 악마야 물러가라 인간의 생각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되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은 권세의 자식. 권세가 유발한 그 백성들. 권세의 백성들입니다. 다니엘에서 그 제국을 가지고 짐승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은 거기에 다른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런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인자의 나라가 금신상이 있는데 금은동철 그리고 섞인것 이게 넘어뜨리면서 나오는 제국, 그거는 인자의 나라거든요. 영원한 인자의 나라. 인자의 나라와 비교해볼 때 이 세상은 더러운 짐승이예요.



그러면 인자의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고 그걸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뭐가 현실이겠습니까? 비교 대상이 없을 때는 이 세상이 전부예요. 이 세상이 전부라는 말은 이 세상 권세가 전부예요. 이 세상 권세가 전부란 말은 권세를 많이 가진 쪽은 우수한 사람이고 권세의 눌려 사는 사람은 이거는 인생 실패한거고 말아먹은거예요. 저주받은 거예요. 기준이 없을 때는.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 나온다면 권세는 이 땅에 뭐를 세운다? 권세는 기준을 세운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권세의 많음과 적음으로 결정하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자, 교회 3천명 교회가 있고 3명 교회있다. 여기 목회자가 있고 여기 목회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어느 목회자를 성공한 목회자로 봅니까? 3천명이죠. 이게 어디서 나왔습니까? 권세. 권세라는게 어려운 말이니까 그냥 힘, 인간은 힘의 자식. 힘 많은 것을 부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뭐냐 하면은 목회자 성공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목회가 실패했다고 보는 겁니다. 딱 나오잖아요. 더럽거든 기분 더럽거든 출세하던지. 기분 더럽거든 출세하든지 이렇게 된다니까요.



자, 그러면 제가 이야기한게 뭐냐 권세는 눈에 보인다 안 보인다? 눈에 보이죠. 문제는 영생은 눈에 안 보인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눈에 안 보이는게 있어요.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에 안 보이는게 있어요. 안 보이는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바로 고고학 발굴현장에 보면 있습니다. 고고학 발굴 현장에 보면 분명히 신라시대에 묻혔는데 흙에 묻혀서 안보이거든요. 그러면 그걸 안 보이는 그 고고학 유물을 보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위에서 파내야 되지요? 뜯어내야 되겠지요.



그 일을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영생은 안에 있고 영생을 누가 덮고 있다? 보이는 힘, 이 현실이라는 세력이 덮고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영생을 알려주기 위해서 보이는 것을 뜯어내는 거예요. 보이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을 다 보이는 것들의 부정적 의미를 다 집어넣는겁니다. 지금 영생을 질식시키는 요소로써 영생을 덮고 있으니까 주님이 뜯어내는데 이 뜯어내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인간의 힘으로 돌파는 안돼요.



마태복음 12장에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어떤 도둑이 있는데 그 도둑이 그 세간을 가져가지 위해서는 먼저 도둑이 담을 타고 들어와서 주인을 어떻게 한다? 밧줄로 꽁꽁 묶어 놓고 그 다음에 그 세간을 가져간다 라고 예수님이 이야기 하시면서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같다고 했어요.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 자신이 도둑이고 현재 인간들을 세간으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누구다? 악마가 그렇게 꼼짝못하게 하고 있고. 세간은 악마를 이긴다 못 이긴다? 지금 못 이기는 상태에 있어요. 못 이기는 정도가 아니고 사이가 너무 좋아. 이 세상 출세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요. 떨어질 생각도 없어. 모든 것은 전부 다 그 주인한테 다 배운거예요.



이 땅을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비법과 방법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릴 때 가정교육부터 다 교회에서부터 다 배웠어요. 마귀 뭘 떨어져 나가? 여기서 성공하고 싶은데. 그것을 어떻게 한다? 담 넘어온 도둑이 주인을 꽁꽁 묶어 놓았어요. 꽁꽁 묶어 놓으니까 악마는 체포된거죠. 악마가 체포당하고 난 뒤에 세간이 지가 알아서 기어나옵니까? 자기는 연고도 몰라요. 어찌 이런 일이? 그런데 그 도둑이 와서 가자! 어디로? 모르죠. 그건 도둑만 알지요. 우리를 보쌈해가지고 원래 있던 나라로 데리고 갈 때 누가 갔습니까? 평생토록 같이 묶여 있는 주인이 낯이 익어요? 아니면 도둑이 낯이 익습니까? 주인이 좋지요? 주인이 정들었고 그러니 자력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이 이미 내 안에 장착되어 있는 세상사는 원리가 있잖아요. 세상 사는 기준이 있고 목표가 있다 이 말이죠. 그 기준과 목표는 뭐냐 하면은 바로 권세 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성공하는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하루 아침에 그걸 포기한다? 그걸 포기한다면 다른 기준이 나와야 하는데 그걸 대처할 기준이 없잖아요. 하나님 믿고 잘 먹고 잘 사는거죠. 자식들 잘되고. 인생 뭐 있어요. 그거지. 인생 그게 전부라고 본겁니다.



그러면 영생은? 아이고 영생은 죽으면 가겠지. 그 몸 가지고? 안 달리진 채? 그 몸 가지고 간다말입니까? 옆에 누가 있다는 말은 그냥 있는게 아니예요. 주님이 그냥 있는게 아닙니다. 그 옆에 계신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냥 이렇게 가만 앉아 이렇게 있습니까? 앉아가지고? 뭐하는거예요? 말도 안하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게 성령이 와가지고 성령이 우리에게 주도권을 행사하지요. 행사하면서 나오는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그런것들이예요.



아까 제가 첫째 시간 끝에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혼자 있음의 특징. 혼자 있는 특징은 뭐라고 했던가요? 자기 연민이라고 했지요. 자기 연민이란 무슨 뜻입니까? 자기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 어디 있느냐? 이 세상에 나보다 너 고생하는 사람 어디 있느냐 나보다 더. 모든 인간은 이렇게 마지막 자기에게 한 표 던집니다. 꼭 마지막 표는 꼭 자기한테 던져요. 아이고 불쌍한 인간. 애썼다 산다고. 그래 힘내라.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나. 그래 나에게 충실해야돼.



모든 그 처세술에 나오는 용어들이 자기 격려와 자기 긍정이예요. 하면 된다 이런거. 혼자 있다는 특징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권세를 성공 실패 이것은 권세라는 기준을 세우니까 결국 이야기는 간단하게 이 기준말고 예수님이 사셨던 예수님의 기준이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준이 들어가게 되면 이건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면 영생이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아들을 믿지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저주가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장에 나오지요?



예수님에 대한 이 기준은 세상권세 기준에서 이걸 빼내는 우리는 못 벗어납니다. 마귀가 준 기준가지고 마귀의 힘을 벗어날수가 없어요. 물에 빠졌는데 물에 빠진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자기가 거꾸로 뒤집어지지 그게 빠져나옵니까? 해볼까요? 자기가 자기를 연민해서 자기가 자기를 채찍질해서 못 빠져 나와요. 그렇다면 이 기준을 빠져나오려면 이미 이 세상에 빠져나온 기준이 있어야되겠죠. 이 세상에서 빠져나온 기준. 돌파에 성공했던 그 기준. 그 기준이 뭐냐하면 바로 율법을 이긴거예요 율법. 율법을 이긴다 했지요.



아까 인간은 뭐가 있다? 아까 욥의 친구들은 뭘 감았어요? 자기의 선악적인 체제 율법적인 체제 있지요. 율법을 이겼다는 말은 율법에 저촉함에 대해서 기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나오지요. 사랑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이걸 다른말로 하면 법에는 뭐가 생기나니? 두려움이 있는거예요. 내가 따라잡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따라잡았다 싶으면 벌써 나보다 먼저 빨리 저만큼 더 가있어요. 이만큼하면 나는 착한 일 하는데 새로운 착함 이정도 되야 착하지 라고 더 약을 올리듯이 또 앞에 뭐가 또 있다니까요. 아무리 지키고 지켜도 계속 사람 약을 올리듯이 이만큼 되야돼. 이만큼 되야돼 계속 새로운 기준이 추가되는 겁니다. 따라잡을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 기준은 뭐냐 하면은 이 권세를 통과하는 기준을 세웠는데 그 기준이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피와 그리고 부활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기준이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여기에는 몇가지가 있는데 율법을 이기고 그다음에 죄를 이기고 그다음에 죽음을 이기고 그 다음에 악마를 이기고 이 네가지 이겼던 그 이겼던 결과가 뭐냐면 바로 성령입니다. 이겼던 그 결과가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줘버리고 자기 백성에게 줘버리면 성령은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자기의 주도권을 쥐고 가면서 뭘 구경해야 되냐 하면은 뭘 실습해야 되는가. 율법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악마를 이겼다는 사실을 평생 성도가 평생 살면서 실습을 하고 체험을 해야되요.



예를 들어서 내가 남한테 사기를 쳤다. 그러면 옛날 같으면 뭡니까? 사기를 쳤기 때문에 우리 애가 벌 받을거야. 이런거 있잖아요. 국제전화 해가지고 야 요새 니가 공부가 잘 안되는 이유가 내가 아빠가 누구 사기쳐서 그렇다 그러니까 내가 회개할테니까 너도 같이 회개하고 너 못난거 다 아빠 탓이니까 나를 원망하고 너 자신을 원망하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이 막 들어요. 나쁜 짓을 안 할 때는 없는데 나쁜 짓을 하는 순간 반드시 여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뭔가 때릴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게 뭐냐하면 그게 마귀 이야기고 죽음 이야기고 죄의 이야기고 율법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을 경험 안 한다가 아니라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런 생각할 때 우리에게 뭐가 오느냐하면 두려움이 오지요. 두려움이 오는데 사랑에는 뭐가 없습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는거예요. 배짱에도 이런 배짱이 없습니다. 자기가 나쁜 짓 해놓고는 뭐가 없다? 나쁜 짓 해놓고는 뭐가 없는거예요? 징벌이라는 것은 없다고 없다는 거예요. 무슨 기준이 이런 기준이 있습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 기준이예요. 이게 예수님 기준이라니까. 사람이 성도라고 이땅에서 고통가운데 사는 것은 이거는 징벌차원에서 고통스러운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땅에 실습하라고 지옥 실습하라고 주께서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게 만듭니다. 실습하라고 어떤 실습? 네가 전에는 죄 지어가지고 얼마나 힘들었고 전에는 율법 어긴다고 전에는 얼마나 마음속에 벌벌 떨었느냐. 전에는 네가 악마한테 고개 숙였다고 얼마나 벌벌 떨었느냐 이말이죠.



심지어 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대구 동안사 같은데 보면 거기 가면 비빔밥 주거든요. 그 비빔밥을 배고파서 먹었다. 그런데 그 비빔밥이 보니까 부처한테 받치고 난 비빔밥이다. 세상에 내가 예수 믿는 성도가 우상숭배한 밥을 먹다니. 갑자기 큐티하는데 보니까 고린도전서 나와요. 귀신에게 섬긴것도 먹지라고 되어있는. 주여....



그리고 군대에 갔다와서 예수 믿었는데 성경에 보니까 군대 가기전에 총각 뗀다고 해가지고 친구가 술 먹여가지고 사창가 데려가가지고 그만 그때 창기와 한몸이 되고야 말았어요. 왜냐하면은 창기와 합하는 것은 너와 한몸인걸 니가 알지 못하느냐 되어 있거든. 그럼 그 창기와 결혼해야 되냐 이 문제. 상견례해서 결혼해야 되겠어요? 보통문제 아니거든요.



또 그런게 있어요. 화를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마라. 그런데 부부싸움 하다보니까 4시 시작한 부부싸움이 해지는것도 모르고 5시 40분까지 보니까 5시에 해 져버렸어. 세상에 40분간 죄졌네.



야...그리고 야고보서에 이런게 있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니까 믿기는 믿는데 행함을 빠뜨려서 행함을 못행했어. 과부를 돌보라 했는데 과부를 바빠서 못돌봤어. 그러면 그것 때문에 이번 토요일날 바이어 만나기로 했는데 계약 깨지겠다. 큰일났다. 벌벌 떠는거예요. 또 교회에서 굶으라고 했는데 안 굶었어. 그리고 금요일날 금 모은 것은 북한에 보내라했는데 그거 안보냈어. 그러니까 벌벌 떠는거예요.



십일조 하라 했는데 십일조 늘 했는데 뭔가 잘못되가지고 계산 잘못해가지고 5월달 빠트렸어. 이런것들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들쑤셔 놓는지 몰라요. 그게 뭐냐 하면은 실습입니다. 그래서 지옥갈 너희들을 예수님의 피로 구원했다는 것. 지옥가는 것을 모르면 십자가의 피를 기쁨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하던대로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간 떨어지게 만들어요. 벌떡 벌떡 놀라게 만들어요. 성가대 연습할 때 30분 늦었으니까 그 다음에 헌금 천원짜리 하나 더 보태고 그게 내 마음이 편해.



주일학교 교사하는데 교사 그만 잊어버리고 못 갔어. 그 주에는 만원하나 더 얹어 가지고 심적으로 균형을 균형있죠. 눈감으면 정의의 여사 균형 맞추는거 법원에 가면 있잖아요. 그처럼 뭔가 내 마음에 선과 악, 악과 선의 균형을 맞춰야 내가 마음이 편해.



그게 뭐냐하면 바로 악마가 준 기준입니다. 그 기준이 죽을때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이게 계속 살아 있어요. 그리고 이 기준은 어느 창구에 비축이 되느냐하면 나의 창고에 비축이 되요. 내 창고에 보면 내 잔고가 있거든요. 내 잔고에 보면 내 한평생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고 그렇게 살았는가 그 잔고가 있고 가끔가다가 실수해서 과속하고 누구 욕하고 그런거 가끔있지만 대부분은 95%는 나 잘한것만 기억나고 못한 것도 기억나지만 이런 장부에 비축이 되요.



이게 뭐냐하면 바로 자기 의 아닙니까. 결국은 자기 내신성적인데 결국은 교회 다닌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하면 내가 어느정도까지 경건할 수 있는가라는 자기의 실력 신앙 실력을 저울질하고 남앞에 과시하고 심지어 타인들 앞에 그걸 드러내는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논리가 급작스럽게 갔습니다만 중간에 뭐를 알아야되냐하면 권세라는게 세상 권세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권세는 발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영생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발명이 아니고 발견되는 거예요. 발명은 인공적입니다. 발견은 뜯어내야 비로소 보이는 거예요. 영생은 있어요. 우리가 못봐서 그래요. 우리가 세상권세 사는 식으로 살다보니까 자꾸 인공적으로 내 착함과 내 위대함에 거기에다가 밑천드리고 거기에 몰두하고 거기에 신경쓰고 남하고 대조해서 더 착해져야한다 이런 강박관념이 있다 보니까 갈수록 점점 더 뭐가 발견되느냐 하면은 영생이 발견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지는 거예요.



뜯어내야 될 것을 뜯어내야할 거기에다가 온갖 퇴비를 더 두껍게 삼겹살 오겹살 있지요? 기름을 더 많이 얹어 놨는데. 나한테. 자 그럴때는 이것을 왜 이것을 이야기 해야 되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무엇을 뜯어내느냐를 설명하는 겁니다. 여기에 발명은 인공적이라고 했지요 인공적. 인공적이란 말은 뭐냐하면 바로 행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함을 다 뜯어내요. 제일 뜯어내기 힘든게 뭐냐? 나 예수 믿는다는 그 행함. 내가 예수 믿는다는 행함을 뜯어내야 되요.



성경에서 믿음은 주님이 주신 믿음인데 내가 믿는 신앙이라고 보죠. 주님이 주어인데 우리는 평소에 내가 주어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이게 뜯어져 나가야되요. 내가 믿는게 아니고 성령의 선물로. 뜯어 나가야 되요. 뜯어져 나갈 때 뭐를 뜯겨져 나가는가. 그것은 이제 권세를 가지고 설명.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권세는 가시적으로 국가죠. 국가는 다니엘서에 뭐라고 했습니까? 짐승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또는 중국에서 아 북한은 교회 없으니까 중국에서 교회가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뭐 삼자교회 그래서 제가 속으로 웃었어요. 교회같으면 다니엘서를 반드시 가르칠게 아닙니까?



그 다니엘서에 국가가 뭐라고 되어 있어요? 짐승이죠. 악마의 앞잡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중국에서 용납이 될까요? 중국은 국가주의입니다. 국가주의인데 교회를 용납한다? 안되지요. 그래서 중국에는 삼자교회 있지만 더 많은 숫자가 서민들 교회가 있어요. 서민들 교회. 얼마 안 되는 서민들 교회 십자가 뜯어 냈어요. 서민들교회 동영상을 본적이 있거든요. 마술이 있는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가면 뭐에 빠지냐 하면 하나같이 황홀경에 빠집니다. 마치 우리나라 60년대 부흥회하는거 있잖아요. 그대로 해요 그대로. 박수 막 치고 노래부르고 끝이예요. 누구 말씀전하는 사람 복음 전하는 사람 없어요. 그래서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무릎쓰고 왔습니까? 그저 기뻐요. 기쁠 수밖에. 그렇게 땀 냈으니까 기쁠수 밖에요. 박수치고 노래부르고 박수치고 노래 부르고 나는 주님과 함께 있어 기쁩니다 이러거든요.



그럼 주님의 내용은 없어요. 다니엘서도 없고 누가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어요. 성경책은 있는데 그 내용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은 없어요. 복음이 있는게 아니예요. 감정적인 요소가 많아요.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제가 지금껏 하는 것은 이 권세가 인간에게 작용했는가 그것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경제적 주체와 정신적 주체로 되어 있어요. 인간의 그 국가라는게. 국가라는 것은 경제적 주체와 정신적 주체로 되어 있는데 정신적 주체라는 것은 법률로 가는 것이고 경제적 주체라 하는 이것은 알다시피 자본 돈, 돈에 관한 겁니다. 그런데 이 경제적 주체와 법률적 주체가 이게 서로 옛날에는 서양의 19세기 이전까지는 이것이 차이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정신을 누가 주느냐 하면은 네 정신을 귀족이 갖고 있었고 왕이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려시대 조선시대. 지금 이제 실제 이야기 합니다. 지금 바벨론 메데파사 헬라 로마 이야기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 했을 때 그들은 왕이 있지요. 왕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겁니다. 한번 보세요. 왕이 명령을 합니다. 왕이 명령을 하게되면 백성은 명령을 거기에 순종하지요. 그렇죠?



이 체계가 권세의 흐름이 권세체계가 이렇게되는 겁니다. 명령하고 순종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18세기 19세기 들어와서 경제적 주체가 먼제 왕체제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빠져 나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이거는 상식이니까 성경 아니니까 상식 들으세요.



12세기부터 11세기 12세기부터 십자가 운동이 일어났고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에서 패권을 잡는 전쟁을 벌렸어요. 이태리에서 오스만해서 터키 이란 그 지역을 잡아 오스만에서 전쟁을 벌렸단 말이죠. 여기에 마지막까지 버틴 것이 1453년까지 코스탄노플 제 동로마 제국이 버티고있었거든요. 지금 권세 이야기 하는겁니다. 종교사업처럼 보여져요. 종교사업처럼 보이지만 사실 종교사업은 아니예요. 지중해에 있는 무역권에 있는 경제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 누가 주도했느냐 하면은 바로 왕과 귀족들이 주도한거예요. 경제적 주체가 왕과 귀족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14세기 15세기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지중해에 격돌이 없어졌어요. 왜그러냐 하면은 1492년에 바로 신전을 발견하면서 이 지중해가 장이 아니고 저쪽 현재 브라질 남미 멕시코 저쪽으로 옮겨 갔어요. 이거는 상대를 안합니다.



저쪽에서 제국주의 그다음에 19세기 제국주의가 벌어지거든요. 기술차이가 벌어집니다. 2차대전때 여기 이슬람 제국 완전히 망했어요. 독일과 영국한테 다 잡혔어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부 영국이 차지했고 터키는 독일이 차지했구요. 그들 종노릇했습니다. 영국에서 일방적으로 1차대전때 유대나라 줘버리까 남은나라 유대인들이 와가지고 팔레스타인 나라 확 쫓아냈잖아요. 지역에서 싸우고 이런일이 벌어진다 이말이죠.



지금 방금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권세 이야기입니다. 제가 권세 이야기 하니까 여러분 생각하기는 목사님 권세 이야기 아니고 현실이야기잖아요.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거예요. 현실 이게 뭐냐하면은 악마의 나라 짐승의 나라예요. 중국에서 다니엘서 이야기한다면 이상해. 그러면 중국에서는 모가지 날라가요.



이게 성경이야기가 교회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안에서 어떻게 예배하느냐 그건 아무 소용 없어요.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이 권세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교회 다니면서 예배순서 이벤트 순서 따라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설교듣고 집에 오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지금 우리는 짐승의 나라에 속해 있는데 거기서 가르쳐 주는 데로 사는데 그게 전부인데. 그게 전부 아닙니까 그게 전부거든요. 북한 이게 전부잖아요.



우리 교회 이야기 나옵니까? 안나오잖아요. 기독교 방송도 안나오는데.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MBC에서. 기독교 방송도 복음 안나와요. 어느 권세 어느 교회가 크냐 그 이야기 나와요. 복음 이야기 하면 기독교 방송 망해버려요. 경제적 주체가 귀족이 갖고 있는 경제적 주체가 잉여 생산이 많아 지면서 여기 중간을 부르주아라고 합니다. 브르주아 도시에 사는 브르주아가 경제적 주체로 나타나기 시작한거예요.



자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이 짐승의 권세가 경제 사정이 좋아져서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해체되었습니까? 아니면 모습이 바뀐거예요? 모습이 바뀐거예요. 옛날에는 왕이 경제를 쥐고 경제적 주체를 쥐고 있다가 이제는 서민들까지 확대된겁니다. 서민들까지 확대되면서 정신적 주체도 경제적 주체까지 같이 확대가 된거예요. 이 뭐냐하면 돈 있는 분이 바로 양반이 되는 겁니다.



바로크 로코코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바로크 로코코 문화있거든요. 서양 귀족 문화라고 하는데 원래 귀족 문화는 귀족만 누리는 거예요. 그런데 서민들이 돈이 없어서 그걸 살 수가 없어요. 그 당시 모든 수입품들은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돈이 많아지고 보니까 귀족 놀음을 우리도 하고 싶다 해서 생긴 그 문화가 로코코 문화라는 겁니다.



이게 서양사에 보면 나와요. 바로크 문화가 변형된 것이 로코코 문화고 서양 옛날 그러한 그림들이 옛날 로마 그리스 그림들이 이제는 서민 가정에서도 로마 그리스 그림들이 있었어요. 그걸 신고전주의 미술 신고전주의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쭉 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뭐냐하면 경제적 주체가 정신적인 지주 그러니까 누구로부터의 간섭받지 않고 돈 있는 사람이 힘을 행세하는 시대가 등장한겁니다.



그걸 가지고 근대국가의 등장이라고 해요. 옛날 19세기 유럽만 그랬어요. 지금은 21세기 들어와서는 전세계 220국 나라가 전부 다 근대국가 다 되고 말았습니다. 행정법이 다 유입했기 때문에 거기서 다 배웠기 때문에. 경제적 주체만이 정신적 주체가 된다는 식으로 다 배운거예요. 그러면 제가 묻는 권세는 어디 갔습니까? 권세. 자 권세 어디갔습니까? 권세가 어디 갔지요? 현재 오늘날 누가 우리한테 권세로 간섭하면 기분 좋아요 기분나빠요? 옛날에는요 아이고 나리 이렇게 했어요. 지금은 그런거 없지요.



자 권세 어디 갔습니까? 대통령 권세 다 어디 갔습니까? 권세가 바로 각자 개인속에 들어간거예요. 이게 더 무서워요. 임금이 옛날에 조선시대 임금이 백성한테 이야기 하면 눈가림으로 해주면 되요. 그리고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요. 그런데 우리안에 권세가 율법이 들어와 버리면 이제는 뭐냐하면 내가 알아서 선과 악을 결정해 버립니다. 이게 정말 이게 참 무서운 말인데요. 자율적 권세라고 하거든요.



이 자율적 권세가 되어 버리면 두 가지의 엄청난 부작용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내가 선과 악을 결정해요. 이게 뭐냐하면 이게 천민 자본주의라는 말 들어봤지요? 그 매 때려놓고 줘패놓고 한 대당 백만원 주는거 있잖아요. 조현아, 조현민인가. 때려놓고 내 돈가지고 내 맘대로 썼는데 네가 왜? 이거 잖아요.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썻는데 네가 왜 말이 많아. 내 돈가지고 뿌리든 불지르든 내 돈 가지고 내가 썻는데 내 돈이야 내 돈. 이게 뭐냐 하면 사유성. 내 돈 가지고 내가 썼는데 네가 왜 그래? 이게 뭐라고요? 이게 바로 짐승. 짐승의 권세예요.



짐승의 권세가 내재적입니다. 바깥에 있는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인간을 이렇게 바꿔놓았습니다. 두 번째가 더 심각한 문제예요. 뭐냐하면 남 눈치 봅니다. 내가 뭐가 좋은지를 내가 결정 안 해요. 예를 들어서 그 밥집 찾아가다가 꽁보리밥이 유행하게 되면 나도 꽁보리밥 먹어요. 왜? 좀 사는 사람들은 꽁보리밥 먹는데 그 당시 취미가 유행이 되버리면 남들이 그렇게 하는 그것이 곧 내가 같이해야 나도 괜찮은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남 눈치보면서 사는 거예요. 남 눈치보면서 남이 하는걸 모델로 삼아서 따라해야 얼추 나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이거 있고 내 돈 내 맘대로 쓴다 이거 있죠. 자율적 권세인데 이게 무슨 권세라고 했지요? 짐승으로부터 온 권세예요. 짐승의 보편화. 경제적 주체와 정신적 주체가 나라에서 합체가 되는 겁니다. 짐승의 보편화, 짐승화, 보편화 되겠죠. 그래서 이렇게 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자녀교육. 자 자식 교육할 때 모델이 있죠. 너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돼 할 때 그 이런 인간이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기준가지고 자녀교육 세웁니다.



너 어디가도 때리면 때렸지 얻어맞고 오지 마라. 너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야되. 네가 최고야. 나는 너를 그렇게 키워. 누구한테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기를 원해. 이게 우리 가정교육이야. 하면된다.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 1번 이야기 합니다. 2번 이야기해야죠. 네가 할 때는 네가 남들한테 욕 얻어먹을 짓하면 안돼. 그러면 우리 집안 욕 얻어 먹어.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 잘해가지고 남들한테 인정받는 사람이 될 때 너는 훌륭한 사람 되는거야.



자 1번 2번 나오지요. 여기에 영생의 기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녀교육에 영생의 기준 들어갔어요? 안들어 갔어요? 안들어 갔지요. 제가 첫 번째 강의 영생은 뭐라고 했습니까? 영생은 고통이죠. 영생의 고통을 자식한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없어요? 이미 집안꼴이 짐승의 집안꼴인데 거기에다가 자녀에게 주님을 위해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노래부르는 것도 안돼요. 이렇게 할 수가 있겠어요? 못하지요. 영생은 보이지 않게 파뭍혀있다 이 말이죠. 누가 누르고 있어요? 누가 이렇게 누르고 있어요? 짐승의 권세가 영생을 꽉 누르고 있는겁니다.



자, 교회 봅시다. 교회에서 아까 원칙 경제적 주체가 되지 않으면 뭐가 안된다? 정신적 주체가 되지 않지요. 교회가 돈이 없으면 교회가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교회는 누가 알아줍니까? 교인들이 알아주지요. 교인들이 이런 권세 자율적 권세에 살고 있으니까 이것을 장려하고 격려해주게되면 고객들은 돈을 내거든요.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는것대로 시키는대로 그걸 주께서는 축복주십니다. 이렇게하시면 복받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럴 때 돈이 모인단 말이예요. 돈이 모이면 돈이 점점 더 모이면 교회가 예배당도 짓고 주차장도 넓히고 교육관 하고 선교사 보내고 CBS, 계속 교회에서는 교회는 이정도면 됬다 이런게 없어요. 계속해서 끝없이 끝없이 된다 이말이죠.



3000명 나왔다. 3000명 나왔는데 어느날 보니까 2000명 나왔다. 두렵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예? 1000명 됬는데 어느날 2000명 되었다. 두려워요? 기분 좋아요? 기분 좋지요. 숫자가 같은 2000명이예요. 같은 2000명인데 3000명인데 2000명 됐다. 두렵지요? 왜? 두렵다 하는 것은 아까 요한일서 4장에보면 왜 두렵지요? 뭐가 없기 때문에 두렵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없어서 두려운거예요. 사랑이 없어서. 다시 말해서 영생의 권세가 영생을 기준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혼자 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겁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3000명 끌어 모았다 합시다. 4000명이 또 기다리고 있지요. 5년째 4000명 안되면 두려워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짐승의 권세가 경제적 바탕에 정신적 바탕으로 전부다 내재적으로 전부다 하여튼 다 버려놨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이게 조작된거예요? 현실이예요? 현실이예요. 짐승이라는게 현실이라니까요.



다니엘서가 현실입니다. 다니엘 뭐 짐승이야기 할 때 보니까 뭐 666이야기인데. 666이야기 할거 없어요. 지금 그냥 사는게 이게 짐승이예요 사는게. 자 이제 요한복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 16장 왜 예수님께서 고통스럽게 기도하시는가 아시겠죠? 2절 다시 봅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건 아니예요. 아시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건 아닙니다.



9절 한번 봅시다 17장 9절 한번 읽어볼까요. 17장 9절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가 비옵는 것은 뭐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했습니까?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나와있지요?



그러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 요한복음 3장 16절 외운 사람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그렇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전부를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예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세상이 아니고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이게 분리되는 거예요. 점점 더 분리되는 거예요. 세상을 사랑하는게 아닙니다. 세상 속에 있는 자기 백성. 그런데 그 백성은 본인은 몰라요. 왜? 주께서 주님께서 옆자리를 밀어내가지고 너는 내 옆에 있어라 할 때만 알아요. 내가 세상에 마귀 권세에 빠져서 돈 밖에 모르게 된  것은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전 코스가 되는 겁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이렇게 구원받는게 아니고 나는 세상도 못 이기고 죄도 못 이기고 율법도 못 이기고 마귀도 못 이기고 그냥 타고난 태생이 이렇게 생겼다. 태생이 이게 악마하고 결탁되어서 사는게 우리 태생이예요. 따라서 내가 스스로 알아서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종이예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할게 없어요. 남들처럼 자기연민에 빠져가지고 자기 밖에 모르면 그렇게 사시면 되요. 사시면 되는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걸 지켜보는 눈이 있음을 알고 성령을 안받은 사람은 지켜보는 눈이 없고 혼자 살기 때문에 아니야 내가 이렇게 살면 지옥갈까 싶고 아니야 정신 차려야돼. 정신차려봤자입니다. 정신차려도 안돼요. 소용이 없다니까요.



오늘날 권세는요. 자본주의가 가속화 됩니다. 자본주의는 브레이크가 없어요. 자본주의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이게 왜그러냐 하면요 자본주의 원리가 이겁니다. 보통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구조가 뭐냐 하면은 땅 위주의 경제구조예요. 땅에서 농경생활하잖아요. 자본은 산업화 되어서 거기서 이윤이 나온단 말이예요. 땅은 땅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자본은 그런게 없어요.



자본은 미래의 될 것이라고 갖고 그들을 앞당겨서 돈으로 바꾸는 거예요. 미래가 계속 있는 한 돈이 생기고 만약에 미래가 닫혀버리면 자본주의는 내려앉는거예요. 북한이 북한문제까지 나왔는데 북한이 항복을 한 것은 미래가 끊어졌기 때문에 항복한거예요. 미래가 앞으로 잘 된다면 무슨 구라를 치고 거짓말을 해도 나라는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자본이라는 말은 현재 현찰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신용이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잘할게. 앞으로 갚아줄게. 그게 바로 펀드고 그게 바로 투자잖아요. 어디 중소기업 장사해가지고 월급 받아서 돈버는게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부동산 하고 뭔가 딴짓을 해야지 돈 벌게 되어있어요. 광고 보면 나와있지요.



병장 봉급으로 부었는데 제대할 때 시급 받아 주식투자 해가지고. 미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부 다 사기예요. 그런데 그 사기가 사람을 살게 만듭니다. 희한하게 사람을 살게 만들어요.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못살아요. 지금은 굶어 죽어요. 죽으면 안돼요. 굶고 있어도 내일의 해가 뜨면 나는 꾸역꾸역 하나님 믿고 세상 삽니다. 자살하지 않고 버팁니다. 자식 봐서라도 안죽어요. 그런데 자식 없으면 생각 달리 하겠지만. 미래가 있는 한 인간은 안 죽어요.



이게 바로 그래서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 한 자본주의는 더욱더 가속화됩니다. 권세는 길고 인생은 짧아요. 권세는 길어요. 따라서 인간은 죽든말든 이 세상 권세는 계속 이어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 권세가 누구 것이라고 했습니까? 그 권세가 예수님이 주신 권세죠.



예수님이 주신 권세는 끝이 있습니까? 끝이 없습니까? 끝이 있어요. 예수님은 마지막이 있잖아요. 끝이 있습니다. 모든게 마무리되면 철수합니다. 모든걸 철수해요. 철수라는 말 하지만 저는 회수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땅 끝에 있는 자기 백성들 다 끌어 모아서 그냥 데리고 가 끝내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에서는 끝이 있지만 세상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세계에서는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종말 하면 이단인줄 알고 있어요. 광신도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끝이 어디냐? 십자가가 끝이예요.



자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하기를 경제적 주체가 되지 아니하면 뭐가 안 된다? 정신적 주체가 안되요. 밥이라도 입에 들어가야 교회 예수도 믿지 밥도 안들어가는데 무슨 교회를 나갑니까. 정신적인 주체 돈이 좀 있어야 남 자랑하지 돈도 없는데 남한테 바른 소리 해봐야 먹히지도 않아요.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들어갑니다. 정신적 주체가 주님께서 먼저 주셔버려요. 정신적 주체에서 뭐냐 자본주의는 미래라고 했지요. 이거는 미래가 없어요. 십자가 아는 순간 우리는 시간이 정지되어 버립니다. 미래라고 해봤자 현재의 반복이지요. 현재의 반복하고 미래하고 다릅니다. 미래는 희망이 있고 현재의 반복은 그걸로 그 가치로 줄곧 가는 것이 현재의 반복이예요. 내가 죽더라도 살더라도 세상은 달라진다? 안달라진다? 안달라져요. 그것이 십자가가 최종 기준입니다.



이걸 새언약이라고 하는데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뭐가 없다? 영생이 없다 그 기준은 이거는 앞으로 5천년이 지나도 만년이 지나도 이 기준은 바뀌지 않습니다.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느냐 했거든요. 3장 1절에서. 바뀌지 않아요. 이런 정신적 주체가 확립되고 난 뒤에는 이 경제적 돈 문제 돈이 우리에게 더 이상 기쁨이나 희망이 되지를 않습니다. 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수십억을 가져도 십자가 때문에 기뻐하지 수십억 가지고 기뻐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주체라 하는 것은 이 십자가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거는 마귀의 시험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의 시험이고 유혹이고 그렇습니다. 돈 없다고 울고불고 할 때 그거는 뭐냐하면 바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이것에 위배되지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삽니까? 이렇게 사시는거예요. 지금 제대해도 되는데 왜 또 살려주십니까? 왜 이렇게 죽는 것이 좋은데 사도바울의 소원이였으니까 죽는 것이 좋은데 아이고 또 살게 하시는구나 뭐 주님 증거하고 살아야지 이게 성도고 성도가 아닌 사람은 혼자 사는 사람은 하나님 믿고 예수 믿을테니까 자식 봐서라도 지금 죽으면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주께서 재림하시면 아직 결혼 안한 딸내미가 있는데 시집도 못가고 재림하시면 안되잖아요. 시집보내고 재림하시고 구름타고 오시던지 항상 그런 세상보는 버릇이 경제적인거 따지고 그 다음에 정신적 거기에 맞춰 사는데 십자가의 영생을 얻은 사람은 그 때부터는 세상에 대해서 내려다보고 살아요. 죽기 위해서 마련된 권세 악마의 권세도 나를 살리기 위한 권세가 아니고 죽이는 권세인데 왜냐하면 이미 영생을 얻었기에 권세가 있기에 이까짓 것 껍데기 같은 이런 것은 벗어도 괜찮다. 그게 바로 두려움이 없고 자유 아닙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권세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복음하고 상관없는 세상인줄 알았는데 바로 세상 신의 세계 악마의 세계인 것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그들의 기준에 맞춰 살지 않게 해주시고 십자가 기준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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