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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8 23:48:21 조회 : 355         
무산된 꿈 19010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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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75.♡.96.96) 19-01-15 14:54 
강남-요한복음 20장 1절(무산된 꿈)190108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1절부터 보게 되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도 요한’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라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나 그 뒤에 나오는 베드로나 또는 사도 요한이 뭐를 몰랐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요소를 우리가 여기에 배울 수가 없어요. 내가 배운 지식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정도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이 언제 부르더라도 이거 내놓으면 주께서 오! 그게 내가 원했던거야. 그래 이제 천국 와. 이런 경우는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계속해서 불신의 상태로 계속 내려가줘야 해요. ‘불신의 상태’. 그럼 불신의 상태가 됐는데 불신자로서 계속 주님께서 이끌어 가신다면 그러면 우리가 언제쯤 신자가 되느냐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언제쯤 신자가 되느냐 하지요.


우리가 신자가 되는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신앙이 나타나죠. 우리가 신자가 될 필요는 없어요. 우리 속에서 없던, 없는 신앙이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면 되는거예요. 그 차이가 굉장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내가 만약에 신앙을 가져버리면 그 신앙의 주인공이 누가됩니까? 내가 되지요. 그러면 성경에서 자기를 부인하라하는 그 말에 이게 충돌이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에 충돌이 되요. 다른건 부인해도 이 신앙만큼은 부인 못하겠다 버티게 돼요. 그건 신앙이 아니고 자존감이죠. 자존심이죠. 그 자존심은 반드시 남과 비교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네가 신앙이 많냐? 내가 신앙이 많냐? 비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쟁하게 되어 있어요. 그거는 누가 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했지요. 그걸 가지고 주님께서는 교만이라고 했어요. 우쭐댐. 우리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이 옆에 세리보고 한 이야기가 이미 견주고 비교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니까 우수하니까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초반부터 어려운 이야기 나옵니다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호 주관성’이라고 합니다. ‘상호 주관성’.


상호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그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어떤 신앙이라든지 소망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뭐 성령의 구원을 이렇게 특히 이렇게 오늘 본문 같으면 부활을 할 때는 누군가 우리 앞에 누가 등장해야 돼요. 누가 등장해서 서로가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이게 차이난다는 사실을 이게 밝혀져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의 상호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상호 교제하는게 아니고 의기투합하기 위해서 서로 만나게 되지요. 의기투합하기 위해서. 의견을 같이 합치기 위해서.


그래서 개인이 뭐냐? 사회를 구성하잖아요. 유대사회가 유대사회가 그렇게 구성되거든요. 예수님이 어떤 특정 개인에 의해서 돌아가셨습니까? 아니면 유대사회에 의해서 돌아가셨습니까? 바라바를 이렇게 예수님 대신 죽이고 예수님 살려내겠다는 전략을 빌라도가 그렇게 마지막 배려하는 차원에 그렇게 했을 때 빌라도가 예상 못한 일에 봉착했지요.


저 질 나쁜 사람과 그리고 대중들에게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예수님 사이에서 선과 악 사이에서 사람들이 악은 배제하고 보다 남에게 착한 일한 예수님은 살려둘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예수님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마지막 카드를 준비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반대로 뒤집어졌지요. 선한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인간은. 특히 자기보다 더 선한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상호 주관성이니까 타인이 없으면 나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는가를 측정할 길이 없어요. 반드시 남과 비교하고 학교에서 시험치는게 그거거든요. 순서를 매기는. 남과 비교해서 내가 어느 지금 위치에 있고 레벨에 있다는 그것을 가지고 자아 정체성. 나는 지금 이것이 바로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하는 겁니다.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여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여기 7절에 보게 되면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되어 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부활을 이야기 하면서 뭘 보여줬느냐 하면은 빈 무덤 보여줬지요. ‘빈 무덤’. 빈 무덤을 보여준거에요. 빈 무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부활의 흔적이 됩니다. 부활의 흔적. 빈 무덤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안장되야 될 이유는 모든 인간이 상호주관성이니까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타인을 요청하니까 인간들에 있어서 확인할 길은 뭐냐 하면은 마지막 모습은 이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 무덤이잖아요. 그러면 무덤은 필히 뭐가 있어야 무덤이 무덤 값을 합니까? 여기 누가 있어야 돼요? 죽은 자 시체가 있어야 되지요. 시신 또는 시체가 여기 무덤에 있어야 되지요.


무덤에 시체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있다면 모든 인간이 생각한 그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는게 돼요.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말은 무덤에 시신이 있을 때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얼추 그다지 틀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 무덤에 무덤인데 분명히 죽으신 분을 무덤 여기에다 안치했는데 무덤에 시체, 시신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평소에 살아있을 때 생각하는 모든 것이 틀어진 잘못되게 인생을 통합적으로 잘못 인생을 살아온 것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이 좀 어려우면 좀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요한복음 20장에 부활 이야기 나오고 다른데 마태복음도 나오고 다 나오잖아요. 부활을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우리 친척들이나 교회 안 다니는 이런 사람에게 사람이 부활을 이렇게 언급을 해버리면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했다 이렇게 언급을 해버리면 그들이 굉장히 당황스럽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부활했다는 말은 사람이 현재 무덤에 있어야 될 분이 지금 살아 돌아다닌다는 말이 되지요. 그렇죠? 그러면 지금껏 내가 눈에 보이는 산 사람하고만 상대해서 나에게는 별 하자가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뭐를 놓친겁니까? 죽었는데 살아돌아다니는 그 분과는 지금 상대를 안한 채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인간들하고 상대해놓고 최종 결론을 내려놓고 나 인생 괜찮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죽었는데 살아계신 분이 그런 나를 뭐라고 규정할지 뭐라고 심판할지 뭐라고 지적할지 그걸 완전히 놓친게 되지요. 그러면 인생은 헛 산게 되는거에요. 산 사람하고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과 상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도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어이 살아계신 하나님 나한테 좀 와바라 요청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 이야기 빼고 갑시다 이러는 거에요. 부활절이 뭐냐? 제사 지내는 날이에요. 이거는 산사람끼리만 이해하고자 부활절이라는 제삿날을 마련한 겁니다. 부활절이라는. 물론 봉투 돌리고 헌금 챙기지만 돈 때문에 하는거지만. 부활이란 말은 부활절이란 말은 뭐냐 하면 그냥 희망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라는 희망을 교회가 상품으로 희망을 제공하는 거에요. 이거 부활 받고 헌금내시라 돈 이쪽 교회에 내시기 바랍니다. 그거 하려고 부활절 만들어 놨거든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산 사람에게 제일 모독적인게 뭐냐? 제사 지내는 겁니다. 그날을 기념하는 거에요. 우리가 기념한다는 말은 뭐냐? 당신은 제발 산 사람 이 동네에 좀 오지말라는 뜻이에요. 이 동네는 우리한테 맡겨놓고 우리 살아있는 사람끼리 일임하도록 맡겨놓고 죽었으면 좀 이렇게 뒷방 시어른처럼 그냥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괜히 산 사람 끼어들면 우리 하는 일이 난처하지 않습니까? 하는 식이에요.


그 이유가 부활의 세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게 그게 옳은게 아닙니까? 그게 옳잖아요. 그게 믿음이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행하는걸 믿음이라고 이미 믿음의 내용을 이미 선점해놨어요. 뭘 이렇게 기도하든지 헌금하는걸 믿음이라고 보는 거에요. 악바리처럼 살아가는 걸. 악에 받쳐서 살아가는 걸. 오기에 받쳐서 살아가는걸 믿음이라고 하는거에요.


벌써 믿음 개념이 벌써 두 가지 나왔지요. 그런데 이 믿음 개념이 두 가지 나오기 전에 벌써 예수님께서 유대사회에서 마주치면서 제자들과 마주치면서 예수님 믿음 개념이 두 가지 나온거에요. 유대사회가 믿음의 사회입니다. 여호와께서 약속대로 아까 누가 이야기했는데 약속대로 언약대로 우리를 이 나라를 반드시 구원할 것이란 것 그들은 믿었지요. 그걸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희망’이라고 했지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희망으로 살아요. 희망으로. 희망을 둘로 한번 나눠봅시다. 희망이 둘로 나눌 수가 있어요. 희망이라는게. 둘로 나누면 영어로 써서 죄송합니다. ‘aim’ 과 ‘goal’, 희망입니다. 희망인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aim, 목적이라고 하고 이걸 goal, 목표라고 해요 목표. 목표는 최종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목적은 최종적인 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기대성, 달려감 이런걸 목적이라고 하거든요.


지금 제가 목표와 목적을 나누고 있어요. 목표와 목적, 희망, 이거는 뭐냐 하면 아직까지 미완료지요. 달성되지 않은 것 미완료. 인간이 그냥 인간으로 조용하게 사는게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미흡함을 느끼는 거에요. 그 미흡함을 느끼는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욕망’이라고 합니다. 욕망. 욕망은 지금에 만족하게 되면 욕망이란게 생기지 않아요. 왜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시큰둥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천국에 가게 되면 모든게 완료가 되기 때문에 뭐가 없어요.


천국 가면 꿈도 없고 자신의 열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욕망이 없어요. 이 땅에서는 천국 간다 나 좋은 나라 간다는 희망 때문에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거 극복하면서 힘든 고생도 감수해가면서 이렇게 고생하는 덕분으로 하나님이 나를 천국 보내주실거라는 그런 자기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것이 실효성이 있는데 만약에 목적이 희망인데 목표가 있고 goal, 목표가 있고 그 다음에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기 열의, 그걸 이걸 목적이라고 하거든요. 유명한 책 있잖아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이거는 꿈과 희망으로 이끄는 삶이라 이 말이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돈 좀 있다고 그게 사는 재미가 아니고 이 꿈과 희망으로 살아가요. 이 꿈과 희망이 좌절되면 인간은 뭐하느냐 하면 자살합니다. 자살하려고 시도하게 돼요. 자살하려고. 밥이 없어 빵이 없어 돈이 없어 자살하는게 아니에요. 꿈이 없을 때 자살해요 꿈이 없을 때. 인간은 꿈이 없을 때. 꿈이 없다는 말은 기분 좋다는 말이에요? 기분 나쁘다는 말이에요? 기분 더럽다는 말이에요. 누구 기분이 더럽다? 내 기분이 더럽다는 겁니다. 과연 우리가 인간이 자기 기분이 더럽다고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 자격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신도 아니면서 신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겁니다. 신은 곧 나는 자아는 신의 흉내를 냈는데 신이고자 하려고 하니까 너무 모자라고 미흡한게 많고 아직까지 신인데 몸도 아프고 이러니까 암 걸리고 이러니까 짜증나잖아요. 그러니까 신이 신답게 살기 위해서는 희망이라는 것을 걸고 그 희망에 파트너로써 누굴 요청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요청, 신을 요청하는거예요.


제가 주일날 설교할 때 혹시 들어 봤습니까? 어려운 대목이 있어요. 인간에게 영원한 수치성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을 나하고 의논 없이 만든다는게 그게 인간이 굉장히 수치심을 느껴요. 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서 신을 믿지요. 신을 믿는데 그건 신을 좋아서 믿는게 아니고 신에게 따지고 싶어서 믿는거에요. 왜 내 인생인데 왜 주제넘게 당신이 왜 개입했습니까? 나는 재벌집에서 태어나고 싶은데 왜 우리 집은 가난하게 태어났습니까?


이게 두고두고 당신한테 따질거야 라는 그 외람된 것을 순화하기 위해서 그래도 당신을 인정하고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인정해주잖아요 이런 식으로 아부에 나서는 겁니다. 좋은게 좋지 않으냐. 당신 하는 이야기 다 믿어주고 당신의 약속 다 믿어줄테니까 나를 이 정도되는 나는 적어도 이 정도 되니까 나를 키워주세요. 나를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현재 자기 자아로서는 만족스럽지 않고 아주 불만투성이라는거에요. 불만투성이에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재벌집 그 초등학생 개인 운전사까지 있는 초등학생이 그게 만족스럽습니까? 어느 재벌집 초등학생 아이는 자기 개인운전해주는 운전사한테 “아저씨 똑바로 운전 안 해? 이러니까 아저씨는 맨날 운전사나 하지” 이런 식으로 초등학교 3학년이 나이 50넘은 사람한테 그렇게 했거든요. 그때 내가 운전했다면 걔는 죽었어. 당장 내려. 너 안 맞아봤지? 나한테 한번 맞아봐. 너 운전사한테 한번 맞아봐.


왜 그렇게 불만이에요? 걔가 왜 그렇게 불만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되기 전까지는 불만이에요. 신이 되기 전까지는. 목 마를 때에 물 마시면 만족이 되잖아요. 그러나 갈증 자체에서 오는 그 요구는 해결책이 없어요. 목마를 때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 4장에 목 마를 때 물 길러 오는 것은 좋지만 계속해서 갈증 자체가 내 안에 장착되어있다는 이 문제는 해결 못 하는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항들은 자기 꿈에 달성과 관련되어 있고 자기 희망, 자기 목적과 목표를 성취시킬 재료로서만 자기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나를 살아있는 채로 천국에 하나님께 신과 함께 합류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누구하고 이렇게 하나가 될 때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달라진게 없이 합체가 될 수 있을까요? 달라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갑니다. 뭔가 달라져야 돼요. 만약에 내가 내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는데 누구 친구 만났다. 친구 만나서 커피집에서 수다를 떨면서 수다 떨면서 서로 견제하는게 뭐냐 하면은 네 꿈 접고 내 꿈의 밑으로 오너라 하는 이거는 내 이야기고 저쪽 이야기는 네가 양보하면 안 되느냐? 내 꿈에 의해서 네가 나한테 도움 되는 사람이 되라 라는 이야기가 한시간 두시간 이야기해도 계속 이야기 하고 있는거에요.


특히 아줌마들 뭐 아무 것도 아닌데 수다 떨면 3시간 4시간까지 계속 하잖아요. 남자들은 이상한게 도대체 3시간 4시간 이야기할게 뭐가 저리 많은지. 그런데 그 이야기 내용이 뭐냐 하면 내 꿈에 대해서 펼쳐놓고 당신 이야기 듣고 있는 친구들은 나한테 어떻게 동조하고 나를 위로하고 힘을 보태주고 협조할 것이냐를 요청하는 거에요. 그럼 저쪽에서 그거 듣고 네 꿈만 있냐?! 내 꿈도 있다. 따라서 우리 적당선에서 협상하자. 딜하자 딜. 이거 해주면 이거 해주고 이거 해주면 이거 해주께. 결국은 정치적 협상에 3시간 4시간 가는거에요. 현재 협상이.


그렇게 되게 되면 나는 달라진다? 안 달라진다? 절대로 안 달라져요. 왜냐하면 나는 꿈과 희망 없으면 나는 죽어야 되니까. 조건이 뭐냐 하면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게 조건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0장 들어오면서 19장에서 이미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 그 당시에 열두 제자의 꿈이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배신했기 때문에 일찍 자기 자신을 알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탈락하고 열한 제자의 꿈이 예수님이었거든요.


그 꿈이 자기 현장에서 돌아가신거에요. 그걸 닭 쫓던 개 신세가 된겁니다. 그동안 3년 동안 자기 청춘을 모두 바치면서 자기 직업도 포기하고 고기 잡는 것도 포기하고 그냥 올인한거죠. 거기 몰빵을 한거죠.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높아질 수 있습니까? 할 정도로 잔뜩 주님이 하는 일들을 봐서 그게 믿음입니다. 주님이 하는 일이 저한테 나한테 도움이 되고 내 꿈과 이상을 꿈을 실현시킬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나 믿음이란게 있어요. 불신자라는 말이 잘못된 겁니다. 신자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태어나면서 신자에요.


그 신자가 달라져야 돼요. 뭐로 달라져야 돼요? 불신자로 달라져야 구원을 받습니다. 내 믿음은 천국에 안 통한다는걸 알아야 돼요. 내가 주님을 발목 잡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살아있는 내가 산 채로 천국가기 위해서 발목 잡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목적, 목표가 없어지지 않거든요. 꿈이 없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 속에 내가 미처 모르는 갈급증이 계속 생기니까요.


사람이 뭔가 어떤 대상에 접근하게 되면 가까이 접근이 가능한게 아니고 대상에게 접근하게 되면 그 접근하는 거리가 접근한 만큼 점점 더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그걸 아셔야 돼요. 예를 들어서 나치가 누굴 학살했습니까? 천만의 유대인들을 천만유대인을 학살했지요. 뭐 팔백만 오백만 하는데 천만 보면 돼요. 했을 때 그 유대인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잔당이 더욱 더 강해져요. 숫자를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남아있는 숫자가 전에 있는 개인적인 그 강도보다 더 위협이 되는 요소가 돼요. 희한하지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보게 되면 어떤 우주선이 광속도로 달리게 되면 그게 뭐 달려가면 달려갈거라 생각하겠지만 속도가 증가하게 되면 우주 자체의 질량이 무한대로 늘어나요. 그래서 그 빛의 속도에 어떤 물질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논리입니다. 물리에서 이야기하는거예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갭은 커지는거에요. 멀리서 보면 가까이 가지만 그게 합체될 수가 없는거에요.


왜냐하면 우리 쪽에서 달라져야 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달라져야 되는데 우리는 안 달라진 채 이 몸 이대로 안 달라진 채 내 꿈과 희망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은 나의 비전이요 꿈이요 드림이요 하면서 달려가는거에요. 지금 달려가는 그게 그야말로 인간의 하는 말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한 자로 이거에요. 한 자로 ‘꿈’ 입니다. 꿈. 진짜 앞에 뭐 하나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개꿈’. 그냥 개꿈이에요. 우리가 예수 믿는게 개꿈이라고요 개꿈. 실효성이 하나도 없어요. 이유는 뭐에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산 자는 천국에서 안 받습니다. 원서 접수가 안돼요. 원서 접수 자체가 안돼요. 살아있는 사람은. 왜냐하면 그냥 목을 숨 쉬면서 살아있는게 아니고 살아있다는 말은 온갖 것이 다 죄가 더불어 살아있는거에요. 내가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되지 않고서는 내가 만족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부터 살아있어요.


꿈은 뭐냐 하면 꿈은 뭐냐? 움직이지 않는 운동입니다. 뭔가 열심히 운동해요. 배드민턴 동호회에다가 밴드 취미생활로 밴드하고 또는 나이 좀 이렇게 50되가지고 아줌마 되가지고 등산 취미 있어가지고 등산하고 하루 일과가 빡빡해요. 굉장히 움직이는데 제자리 뛰기에요. 산에 올라가도 살아있지요. 살아있는 내가 산에 올라가지요. 교회 가도 내가 살아있지요. 배드민턴 쳐도 내가 살아있지요. 드라마 볼 때도 내가 살아있지요.


배드민턴 하면서 꿈꾸는 거에요. 이번에 지역예선 나가야되는데 그 꿈꾸는 거에요. 이번에 등산할 때 이번엔 난코스라고 해가지고 먼저 올라가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요. 특히 그 저 산에 등산 동호회 있잖아요. 등산 동호회. 등산 동호회 처음에는 회비 얼마 안 되니까 하지요. 그거 다 꿈이 있어요. 괜찮은 남자 만나고 괜찮은 여자 만나는 꿈이 있어요. 산에 갈 때 이게 불륜인지 아니면 부부인지 아는 방법은 딱 두 가지 있습니다. 각자 배낭 메고 있으면 불륜이에요. 100%. 왜냐하면 각자 집에서 등산 간다고 나왔기 때문에 배낭이 두 개에요.


그런데 부부는 나올 때 배낭을 한 개만 있어요. 남자가 남편이 배낭 메고 여자는 그냥 털래털래 올라가면 돼요. 또 한가지 증거는 뭐냐 하면 여자가 물건 살 때 남자가 가만있으면 불륜입니다. 그러나 부부는 여자가 뭐 살 때 남자가 그거 사지 마라 집에 있다. 어디 가도 반드시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어디 가도. 왜? 내가 살아있으니까. 그런건 적어도 괜찮아요. 구별법 이런 것.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된 채로 제자들에게 나왔다는 것은 너희들이 고생하면서 3년 동안 따라다닌 것 다 헛것이다 그런 뜻이에요. 아무 소용 없었다. 뭐 배우고 보고 기적 일으키고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하고 다 아무 소용없는거에요. 왜? 아직 본인들은 안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도 주께서 함께 죽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제자들의 문제점은 제자들이 죽어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죽어도 죽음에 이르지 않아요. 이게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이게 나의 주님께서 준비한 그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에 그 죽음에 합체되지를 않아요. 죽음이라는 개념은 이거는 누가 성취하느냐 하면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만이 성취할 수 있는 개념이에요. 이 죽음이.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죽음이 아닙니다. 이 죽음 안에 뭐가 들어있어야 하느냐 하면 저주가 있어야 되고요. 심판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목숨 하나 끊으면 그만이지 이거거든요. 살다가 자기가 힘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살할 때 좋아서 자살하는 사람 없어요. 힘들기 때문에 자살하거든요. 그러니까 힘들단 말은 뭐냐 하면 그만큼 욕심이 많다는 뜻이에요. 욕심이 많다는 말은 현재 내 형편 내 인생이 내 맘에 안 든다는거에요. 한번 적어볼께요. 얼마나 이게 중요하고 어려운 말인지. “내 인생이 내 마음에 안 든다”. 안 든다. 내 인생이 내 마음에 안 들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내 인생이 누구 맘에 들어야 된다? 내 마음에 들어야 되요. 내 인생이 내 마음에 들려면 어떤 권력, 어떤 자격이 있어야 되냐 하면은 온 우주를 자기를 마음대로 세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에 한에서만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주관할 수가 있어요. 온 세상을. 이번에는 둘째는 딸 낳아야 되고 이런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내 마음대로. 김정은이는 중국 갔다오면서 차 사고 나서 죽어야 되고 이런거 있잖아요.


모든걸 내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다 되어야 돼요. 이 자체가 모순이죠.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거 같으면 내가 여기 나는 작은 나고 여기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우주보다 더 큰 게 내 마음이거든요. 천문학 하는 사람 보세요. 우주가 넓지만 그 우주를 넓다고 이야기하는 내 마음은 우주보다 더 크잖아요. 그러니까 천문학을 하는 거에요. 안드로메다가 백날 있어도 다 보여 너 다 보여. 이게 안드로메다 보다 더 큰 거에요.


우주보다 더 크기 위해서는 우주보다 더 멀리 달려갈 필요 없어요.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면 그만이에요. 이거는 불교에서 이야기하거든요. 내 마음이 우주의 중심이 되면 그만이란 말이죠. 그러면 어떤 것보다도 내가 중심이니까 중심에서 퍼져있는 어떤 것도 중심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내 마음이 더 큰 겁니다. 이미 인생이 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나는 뭐다? 나는 곧 뭐다? 중심이다 우주의 중심이다. 나는 뭐다?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내가 신이라는, 내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니체는 ‘초인’이라고 했지만 이게 내가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모든게 자기 뜻대로 안되잖아요. 자기 뜻대로 안되면 겸손할까요 아니면 불만을 터뜨릴까요? 불만을 터뜨리잖아요. 누구 멱살을 쥐고? 하나님 멱살 쥐고 터뜨리는  거에요. 하나님이면 다냐! 하나님이면 하나님답게 굴어. 사랑이라며. 날 사랑해봐 날 사랑해봐! 내가 믿어줄게. 헌금할게. 교회 다녀줄게. 전도해줄게. 날 사랑해봐. 지금 이러고 있는  거에요 이러고.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불신자가 아니고 인간은 신앙인입니다. 누굴 믿어요?


내가 곧 신이라는 철두철미한 신앙인이고 이 신앙은 교회 백날 다니고 성경 봐도 이 신앙은 변할 가능성이 있다? 없다? 변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죽기 전까지는 변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교회가 나오고 내 교단이 나온거에요. 내 종교가 나온거에요. 앞에 내가 붙는거에요. 남의 교회 죽든 말든 내 교회 부흥되면 그만인거에요. 남의 자식 내 자식만 서울 의대 들어가면 그만이에요. 코디 붙여가지고. 나만 잘하면 되요. 하버드 대학을 가고 내 자식만 잘되면 그만이다. 그 하버드 대학 가짜인줄도 모르고. 드라마 이야기는 그만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께서 뭐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일부러 무덤에 들어갔어요. 무덤에 들어갔는데 앞에 뭘 하느냐 빈 무덤을 만들었어요. 빈 무덤. 빈 무덤을 만들었어요. 그럼 빈 무덤에 가서 제자들이 막달라 마리아 쫓아갔지요. 쫓아가면서 자기 본색 다 드러냈지요. 어?! 무덤은 있는데 시신은 없네! 이게 인간세계의 한계입니다. 무덤에 죽은 자가 있어야 되는데 없네! 그러니까 부활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부활을 잘라버리고 부활 떼어내버리고 나머지로 진리가 우리가 믿을만한 진리로 구축, 옳은 진리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고 생각한거에요. 부활 떼어내버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게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최선’, 최선이거든요. 최선이니까 ‘최’자 괄호하면 ‘선’이잖아요. 나는 지금 옳게 살아왔는데 옳게 살아왔는데 여기다가 뭐만 갖다붙이면 된다? 제자들 생각은 제자들 오늘날 우리 생각도 마찬가지에요. 뭐만 붙이면 돼요? 옳게 살아왔는데에다가 뭐만 추가하면 된다? 국밥에 숟가락 하나만 추가하면 먹을 수 있잖아요. 부활 하나 추가하게 되면 이것도 옳았고 부활도 옳았으니까 나는 더욱 더 더 옳은 인간으로 발달했다고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사람들은.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빈 무덤을 제시한거에요. 빈 무덤을.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빈 무덤에 옴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이 자체가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세계에 접근하지 못하고 들어설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다는 자기의 본연의 모습을 빈 무덤으로 고발한겁니다. 빈 무덤으로 고발한거에요.


다른 사람은 다 죽으면 무덤에 시체 있는데 예수님은 무덤에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이해하려면 이쪽 인간세계에서 어느 세계까지 넘어와야 돼요? 예수님의 부활까지 넘어와야 되는데 이렇게 넘어올 안목을 가진 인간은 그런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에요. 단순히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이건 인간이 잘못 살아와서 그래요.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틀어져서 그래요. 인간성 자체가 왜곡되고 틀어졌어. 뭔가 모든 체험은 잘못 되서 그래요.


그렇다면 제 이야기가 지금 옳다면 내가 달라져야 된다면 어떻게 달라져야 돼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인생에다가 부활 하나 더 추가해서 지식 하나 추가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고 어디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까? 시작을. 우리도 뭐부터 해야 돼요? 빈 무덤부터 시작해서 다시 인간 세계를 봐야 되겠지요. 이게 바로 예수님이 오신 이 땅에 오신 절차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공생애가 이런 안목을 가지고 시작하신 거에요.


그러니 요한복음을 봐도 요한복음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거에요. 우리 안목은 우리 쪽에서 하늘나라로 가고자 하는 안목인 반면에 그거는 십자가 부활로 빈 무덤으로 가로막혔잖아요. 반면에 주님은 주님 쪽에서 이미 아시고 찾아오는 거에요. 그러면 이 안목이 이 절차가 있다면 이 절차는 눈에 안보이지요. 보통 겨울에 수증기가 있으면 여름에는 안 보이는데 겨울에는 유리창에 보면 뭐가 서리 끼잖아요. 수증기가 끼잖아요. 그 절차의 뭐냐 하면 ‘응결’. 이게 바로 뭐냐 하면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흔적을 자국 하나하나 다 남기는 것, 말씀이라든지 또는 오병이어라든지 갈릴리 바다나 하나 남겨놓게 되면 그거는 대구강의에서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안목으로 봐야 되느냐 그 징조와 그 증거물을 주께서 다니시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찍어서 보여준거에요.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세례요한이 물이 들어갈 때 남들 보기에는 그냥 물 속에 들어가는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물속에 들어가는 걸로 보지 않고 뭐 속에 들어갔다고 봅니까? 죄 속에 들어간거에요. 죄 속에.


죄 죽고 산 채로 천국 가는게 아니고 죄와 더불어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세례라는 것은 누구 쪽에서 준비한 겁니까? 누구 쪽에서 마련한 절차에요? 하나님 쪽에서 마련한 절차지요. 세례 요한 예수님 줬으니까. 그 절차에 의해서 죽은 자를 도로 부활시키는 그 절차가 세례라는 절차입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했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몸으로 하는 거에요. 그 몸으로 하는 그 세례를 요한복음 6장에서는 뭐냐? ‘나와 함께 죽고 그 다음에 나와 함께 사는 자’여야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에요.


대구강의에 했잖아요. 의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고 완전한 죄 속에서 있을 때만 의가 만들어져요. 죄에서 벗어난 의는 없어요. 죄 안에 있어야만 의가 만들어져요. 왜? 죄가 더욱 더 죄 되는 것과 의가 의 되는 것이 이게 병행, 동반해서 같이 성립되기 때문에. 부활이 되려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아니고 부활이 되려면 부활의 의미를 주님의 관점에서 새로 정립해야 돼요. ‘아 이게 목숨 끊어지는게 죽는게 아니고 살아있어도 이게 죽은 자가 되는구나’ 새로운 정립에 나서야 돼요.


그 살아있으면서 죽게 되는걸 가지고 로마서에서는 “죄에 의해서 죽었다”. 갈라디아에서는 “너는 율법에 의해서 이미 죽었나니”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었나니. 계속해서 뭐를 잘라내는 겁니까? 달라져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자,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는 걸로 해봅시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인간은 안돼요. 기존의 제자들 같으면 그냥 부활 필요없어요. 그냥 하던 것처럼 배워주면 돼요.


자, 진도 나가자. 제 16강 제17강 이렇게 해가지고 배워주면 돼요. 그러면 노트정리해가지고 그거 들고 시험 쳐서 그거들고 천당 가면 되는 겁니다. 안식교에서 그렇게 하는데 조사심판이라고 해서 시험 치니까 안식교. 그런거 잘 모르죠? 몰라도 돼요. 행함으로 구원받는 종교거든요. 다 마찬가지지만. 어디서부터 어디로 달라져야 되느냐? 달라지는 것. 어디서부터 어디에서부터 무엇으로 달라져야 되거든요. 어디서부터 달라져야 되는가 하면 바로 선악체계로부터 달라져야 돼요.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걸 따먹었기 때문에 문제가 여기서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뒤끝 있다고 절대로 하나님은 자기 따먹은 것을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지 않아요. 끝가지 추궁해요. 내 다리 내놔 하는 것처럼 전설의 고향처럼.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 왜 따먹었냐고 계속 계속 끝까지 가는  거에요 끝까지.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목숨 끊어지는게 죽는게 아니에요. 제대로 된 죽음은 이 십자가에서만 예수님이 보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때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에 의해서 죽음은 이게 죽음이다하고 십자가에 죽거든요. 그걸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다음에 뭘 받으사 되어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뭘 받으사? 그냥 죽어 돌아가신게 아니에요. 목숨 끊어진게 아니라고요. 여기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저주”를 받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저주를 평생 해도 저주가 뭔지를 몰라요. 우리는 저주를 알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어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무슨 경험을 합니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체험, 저주를 체험하게 하는 거에요. 그 저주가 뭐냐 하면 바로 ‘인과응보’에요. 인과응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인과응보가 뭡니까? 원인과 결과잖아요.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보상받거나 벌 받는다 그거잖아요. 이게 꼭 불교라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기본요소가 선악체계요소가 뭐냐 인과응보입니다. 양심이 우리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아 나쁜 짓 했으니 나 벌 받아도 싸지. 이번일이 잘못된 거 보니까 내가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아 이렇게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하니까 이번 주에 무슨 좋은 일이 있을거  같애. 아이고 이거 참 내가 복음 전하는 그런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파카라도 이렇게 하나 얻어걸리는게 아닌가. 이게 인과응보. 하나의 예가 확실하지요?


자, 아까 이야기 해봅시다. 인간은 미흡하지요. 애가 성적이 좀 내려간다든지 몸이 좀 아프다든지 가정에 남편이 일이 좀 안된다든지 할 때는 이거 분명히 뭐로 생각합니까? 인과응보로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주님께 소홀 기도를 소홀히 했다든지 성경 보기를 소홀했다든지 뭐 주님에 대해서 생각을 안했다든지 헌금에 좀 인색했다든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저주입니다. 그게 인간이 안 바뀌어졌다는 뜻이에요. 악마가 완전히 쌈 싸먹듯이 완전히 쌈 싸먹은 악마의 손바닥위에 쌈 싼 그 안에 그대로 거기서 뭐냐?


자기가 부지런히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길가에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뭔가 운동을 하는데 그 운동이 무슨 운동이라고 했습니까? 움직이지 않는 운동이에요. 꿈이에요 꿈. 달라진 것 없이 있는 재료 가지고 잡채 만들든지 뭘 만들든지 있는 재료 가지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 가지고 만드는 그런 프로도 있잖아요. 요리 음식프로. 그런 것 하듯이. 안 봤으면 넘어가요. 냉장고 열어가지고 쉐프들이 하는 프로 있어요 음식프로.


있는 것 가지고 써먹는거에요. 계속 써먹는거에요. 7살 애는 7살 나름대로의 인과응보. 12살은 12살 나름대로의 인과응보. 21살 먹은 애는 21살 나름대로의 인과응보에요. 저렇게  말 안 듣던게 군대가가지고 “엄마가 보고플 때~~~~” 이게 뭐냐 하면 나름대로의 인과응보에요. 왜? 군대가 고생스럽거든요. 어머니 생각하게 되면 좀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반드시 그런게 있어요. 군대를 안 가보니 모른다.


율법 안에 있는게 저주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 안에 저주 있다는 말은 잘 되고 못 되고간에 그게 저주다. 잘 되도 저주고 못 되고 그게 저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익숙해져 있습니까? 저주받는거 외에는 우리는 익숙한게 없어요. 전부다 모든게 인과응보 안에서 우리는 탈탈 털리고 있는거에요 악마한테. 계속 뭔가 하고 있는거에요.


자, 거기에다가 목사가 하는 말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자,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과응보 중에서 악함이에요? 선함이에요? 선한 일에 속한다고 생각하겠지요? 예수 믿었으니까 그 다음에 우리 집안 술술 잘 풀린다고 생각하겠지요? 복 받는다고 그렇게 사기를 치니까. 복 받는다고 하지요. 그게 저주 그런 생각이 들어왔다는 자체가 저주고 저주받은거에요. 그런 생각이 들어갔다는게.


그럼 여러분들 저한테 묻고 싶어요. 그럼 목사님 그런 생각 말고 다른 생각 어떻게 합니까? 다른 생각은 없어요.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또 신이 되려고 하는거에요. 우리는 이미 확정된거에요. 인과응보 저주 안에 있음을 확정됐으면 저주에서 약간의 다른 생각의 미진한 여분이 없어요. 여분의 자리는 없다고요.


다른 생각을 만약에 우리가 하겠다는 그러한 의도를 한다면 그 다른 생각은 뭐가 되느냐 하면 나에게 선이 되는 겁니다. 제가 바꾸세요 하지 않았어요. 바꾸는 식으로 구원받거든요. 그러면 바꾸는 식으로 하면 대번 느끼는게 뭐냐? 그럼 바꿔야 되겠네 이러거든요. 바꾸게 되면 이게 선이 돼요. 이거는 우리 힘으로 우리 아이디어로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냥 저주 받으면 돼요.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 그것도 죄거든요. 그렇게 죄인으로 살면 돼요. 복 받은 사람은 빨리 죽고 이 땅에서 저주 더 받을 사람은 오래 살고 온갖 약 좋은거 다 먹어가면서 오래 살고 일찍 떠날 사람들은 편하게 제대할 사람들은 제대하고 사도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도가 외치는 것은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들으라고 하는 외침이지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못 알아듣습니다.


나쁜 일하면 착한 일로 그걸 땜질하려고 온갖 땜질하려고 합니다. 저도 새벽기도 수십년동안 해봤거든요. 해보면 평소에 늘 잠 안와서 오시는 분들 있어요. 그런 분들은 정기적으로 오셔요. 꼭 깨는게 새벽 5시라서 할머니들 와가지고 기도하는지 아직 남은 잠을 주무시러 왔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꾸벅꾸벅 조시면서 있는데 갑자기 들어닥친 분 있잖아요. 집안에 큰 탈 났습니다. 이거는 아주 악을 쓰면서 정말 울고불고해요. 자기 주제파악도 안 한 채. “왜 내 인생을 이렇게 꼴아박습니까?” 하는데 네 인생이 어때서?


어떤 노래 보면 이런게 있습니다. 한번은 울었으면 한번은 웃어야지요 하는 노래가 있어요. 그래야 견딜만하니까. 그 노래 제목은.. 잊어버렸어요. 잠자는 공주라는 노래에 나와요. 트로트입니다. 거기 보면 가사가 나와 있어요. 한번은 울었으면 한번은 웃어야지요.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악마는 어떻게 됩니까? 악마는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나오죠. 4장에 보면 악마는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못 미치게 하기 위해서 인과응보대로 결과를 제공합니다. 악마가. 거봐 기도했더니 복 받았잖아. 헌금했더니 복 받았잖아. 십일조 안 빠뜨리니까 30배 60배 100배 갚아줬잖아. 이게 계속 유발해가지고 계속 복음을 못 보게 해요. 그럼 복음을 어떤 식으로 보느냐 그럼 복음 보고  난 뒤에 인과응보에서 어떻게 달라지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홍민희(IP:175.♡.96.96) 19-01-15 14:55 
강남-요한복음 20장 1절(무산된 꿈)190108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있다면 그거였습니다. 빈 무덤을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보였다는 사실. 빈 무덤을. 빈 무덤을 의도적으로 보였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가 한계를 모르고서는 자기 자신을 몰라요. 얼추 주님 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 싶어서 시키는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시키는대로 다 할 수 있어요.


심지어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가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자식이 죽는데 자식 대신 몸 던지는 부모들 많잖아요.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인간이 수천만명 죽고 수억명이 죽어도 그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에 합체가 안돼요. 왜? 죽음을 보여주려면 언약이 장착된 분의 죽음이여야 이게 죽음이고 언약에서 배제된 인간의 죽음은 천날 백날 죽어도 그거는 진정한 죽음을 못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은 너 죽으면 살려줄께가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거에요. 죽음이 뭔가를 보여줄 때. “나 죽으면 살려줄거죠?” 이렇게 계산치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죽음이란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다 떨어져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떨어져야 돼요. 이게 빈 무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장담했던 그 인간도 베드로도 딱 눈으로 두 눈으로 빈 무덤을 보는 순간, 순간 주님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비로소 내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내가 여기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내가 탈출할 수 없는 내 스스로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새로운 영역 안에서 오해한거죠. 예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한겁니다. 잘못 생각한거에요.


나 잘되기 위한 가상적인 예수를 믿은겁니다. 제자들이.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제자들도. 서구에서는 방탈출 게임이라는게 벌써 8년전부터인가 있었답니다. 방탈출. 뭐냐? 하도 얼마나 자극적으로 게임을 하고 싶었으면 일부러 어떤 방에다가 밀폐된 방에다가 집어넣어놓고 어떤 암호같은 것 어떤 단서를 잡아가지고 무사히 방에서 탈출 나오게 되면 뭔가 어떤 승리감에 도취되는 것. 하는데 폴란드에서 10대 소녀 5명이 방탈출 게임을 하다가 불 나가지고 방탈출 못해서 다 죽었어요. 어제. 게임에 탈출을 못했어요.


탈출했냐 못했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유일하게 탈출한 분 딱 한 분만 있으면 다 드러납니다. 유일하게 주님께서 죽음에서 벗어났으면 나머지는 탈출이 안 된 채 갇혀있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장 한번 봅시다. 20장 9절에 보면 제가 천천히 읽어보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게 있어요.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습니까 아니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어요. 예수님과 그 외의 모든 사람을 대비시키는 겁니다. 인간들이 죽음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 있잖아요. 그 아이디어는 왜 엉터리냐 하면 살아있으면서 끄집어낸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그게 엉터리가 되는거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착오를 일으키면서 죽음은 이런 것이라고 이렇게 설명하고 철학적으로 설명하는거 이거 전부다 죽음 아니에요.


부활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 라고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면 죽은 선지자들이 살아서 춤추는 세계라고 보시면 되요. 죽은 선지자들이 나와서 살아서 춤추는 세계. 이게 변화산에서 그런게 있지요. 모세와 엘리야가 모세와 엘리야 그들이 살았어요? 죽었어요? 이쪽 인간 세계에서는 죽은 분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살았지요.


그럼 제대로 한번 정리해봅시다. 부활 또는 죽음인데 부활. 부활이란 또는 죽음이란 인간들은 내가 죽는 것을 죽음, 내가 다시 사는 것을 부활로 보잖아요. 그러나 이 선지자들은 ‘내가’로 출발하지 않고 상황이 그 환경이 부활의 환경이면 그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죽든 살든 살아있는 사람이고 내 환경이 죽은 환경이라면 죽든 살든 그 사람은 죽은 자가 된다는 이것이 바로 성경을 통해서 정리할 수 있어요.


환경이 선지자들이 살아난 것은 그들이 우리처럼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주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가 아니에요. 그들을 감싸고 있는 환경이 하나님의 신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 신안에 누가 작용하느냐? 예수님이 작용하거든요. 그럼 환경개선을 누가 하느냐? 선지자가 하는게 아니에요. 선지자와 예수님이 협조해서 하는게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 그 환경 자체를 언약 안에 있는 조건하에 언약 자체 환경을 뭐로 완성시키느냐 하면 십자가 부활로 완성을 시켜버리면 그게 성령인데 성령으로 완성을 시켜버리면 그 안에 잠자는 죽은 자는 다 주 안에서 산 자가 되어버려요.


인간들의 내 개인으로부터 나온 출발한 모든 논리와 모든 철학적 논리와 모든 과학적 논리는요 전혀 성경을 근처도 성경을 이해도 못하게 만들어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계시록 20장 한번 읽어보세요. 요한계시록 20장 4절부터 6절까지 좀 긴데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첫째 부활 나오지요?! 첫째 부활이 있다는 말은 무슨 부활이 있다는 말입니까? 세컨드 둘째부활이 있지요. 첫째 부활하고 둘째 부활이 있는거에요. 첫째 부활이 있어서 그들은 목 베었지만 주님보시기에는 뭡니까? 목 베어도 그들은 산 것이 돼요. 언제? 완성된 나라. 그걸 숫자로 천년이라고 표시한거에요. 완성된 나라에서는 천년이라는 말은 언약적으로 완성된 그 완성된 상태를 숫자로 표시하면 천년이에요. 또는 1000, 천년이란 말이죠.


언약이 완성이 되어 버리면 모세와 엘리야는 죽어도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유령들이 춤춘다는 말을 그렇게 한거에요. 지금 선지자들이 모여 부활의 세계는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모여서 지금 춤추고 있는거에요. 이쪽에서 보면 죽은 자잖아요.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는 그들이 함께 이미 변화산에서 함께 잠시 잠깐 맛보기로 보여준거에요.


그래서 제자들은 분명히 한사람 만나기 위해서 다볼산 그 변화산 올라갔는데 막상 산 정상에 가보니까 한사람이 아니고 몇사람이 왔었습니까? 세사람이에요. 이거는 다니엘 세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들어갈 때 세명 들어갔는데 들어간 불속에 몇 명입니까? 네명이에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해놓은 겁니다.


지금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우리 성도보고 사나 죽으나 너는 내것이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는 너 육체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는 그딴거 신경쓰지 마라. 지금 나로 하여금 믿지 못할 사실을 믿게 하게 한 그 성령의 세계, 성령이 작용하는 성령이 역사하는 그 새로운 영역 새로운 공간에 들어온 것으로 기뻐하라 이 말이죠. 왜? 이미 부활되었기 때문에. 그게 첫째 부활이에요. 첫째 부활.


육체가 살 때 그게 둘째 부활. 육체는 이 육체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형수술했는데 나옵니까? 그러는데 부활의 세계는 남자로 태어났는데 뭐 여자로 바꿔지나 그거 필요없어요. 부활의 나라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남자 여자 있을 때 살아생전에 남자 여자 역할 잘하세요. 이걸로 마감합니다. 곧 마감 죽으면 남자 여자 없어요. 호르몬 작용해가지고 나중에 나이들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 안된다. 남자는 여자되고 여자는 남자되고. 결혼생활 오래하면 남자 여자 막 바뀌지 않습니까? 부부가 사는게 아니고 두 사람이 살지요. 남녀 구분이 없어요.


둘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형상. 첫째 몸은 아담에서 나왔거든요. 둘째 몸은 부활에 먼저 가 계신 예수님의 원형입니다. 예수님의 영광된 몸으로 우리가 그 몸을 받아요. 왜? 주님이 아담이기 때문에. 아담은 인간들은 아담은 새끼를 까잖아요. 주님도 아담이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까요. 그 아들을 낳을 때는 그 원형을 그래도 본 받아서 깝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이 된 지체가 되고 몸이 된다. 그게 전부다 성령으로 인하여 연관성을 가져요. 연결고리 거미줄처럼 성령으로 짜임새 있는 겁니다.


그럼 성령은 뭐냐? 성령은 뭐라고 표현 못하고 뭐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가 접근을 합체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라고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성령은 뭐냐? 인과응보로 사람을 따지지 않습니다. 인과응보로. 그 지긋지긋한 인과응보. 나쁜 짓하면 벌 받고 착한 짓하면 복 받는다는 그 지긋지긋한 인과응보에요.


시편 1편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 받아서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되어 있어요. 그거는 굉장히 역량을 두고 이야기하는 역량으로 솜씨를 발휘하는 말이 아니고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완성태’, 완성 상태가 된 그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present,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거에요. 성령은 선물로 주어지거든요.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거에요. “내 믿음 버려”라는 뜻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믿음을 버려야 돼요. 우리는 불신자가 되어야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거는 어떤 의미나 가치를 줘서는 안돼요.


이번 아가서 수련회를 하는데 그 아가서 여러분 한번씩 읽어 보셨지요. 또 참석 안한다고 안 읽어보고 하지마세요. 거기 보면 나와요. 거기 보면 어떤 가사냐 하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 궁전으로 오라” 하는게 나와요. ‘내 궁전으로’. 이걸 보면서 요근래 내가 좋아하는 노래 이 비슷한 노래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바람불면~어디론가~떠나가는~나의 조각배야”. 이게 누가 불렀느냐 하면은 카더가든이 불렀던 명동콜링이란 노래에 있어요. 들어봤어요? 카더 옛날 미국대통령 카더. 카더가든이 불렀던 명동콜링. 명동콜링의 그 가사 내용. “오 달링”부터 시작해요. 아까 잠깐 들어봤지요? “떠나가는” 이렇게 하거든요. 명동에 눈 오는데 커플이 누구 약 올리는 있는데 여기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나의 궁전으로.


이 가사가 우리에게 딱 맞는데 이 아가서의 내용은 특징이 뭐냐 하면 계속 사랑하는 장소가 옮겨다닙니다. 계속 옮겨요. 이게 뭐냐? 공간이 사랑을 유발한다는 뜻이에요. 공간이. 우리 둘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에요. 이 공간이 새로운 사랑을 일으켜주는 거에요. 나의 궁전으로. 궁전이 뭐냐? 솔로몬 왕의 궁전이에요. 솔로몬은 누구의 소산물이냐 하면은 다윗 언약의 소산물입니다.


다윗 언약은 누구하고 누구하고 체결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체결한 것이 다윗 언약이에요. 그 흔적이 다윗이라는 인물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이에요. 그 인물을 가지고 언약의 흔적이 있는 인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라고 이야기해요 인자. 사람의 아들이에요. 다윗 이야기에 최초로 나왔던 인자를 예수님께서는 자기 호칭으로 정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영원한 왕국의 왕의 왕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거에요. 그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모든 새로운 부활의 첫째 부활의 공간에서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겁니다. 다윗처럼.


내 솜씨가 아니라 어떤 특정 공간의 변화로 인하여 또는 언약의 완성으로 인하여 나는 그 공간의 일원으로써 하나의 요원으로써 지금 파견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사도행전 8장 1절에 나오는 “성령이 네게 임하면 네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 이야기에요. 내 것을 이야기하면 안돼요. 나에게 찾아와서 나를 거덜냈던 그분의 작업을 증거해야 돼요. 나를 거덜냈던 것.


그래서 제가 여기서 보는게 뭐냐 하면은 보고 싶다 예쁜 그대, 예쁜 그대 있잖아요. 예쁜 그대를 한번 보면, 수련회를 미리 하면 안 되는데. 예쁜 그대. 예쁜 그대니까 어떤 사람이 예쁜 그대 할 때는 어떤 표준이 있어요. 예쁘다 안 예쁜다 하는 것은 그 표준이 뭐냐 하면 인간은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부터 어른이 되잖아요. 어릴 때 예쁘다는 것은 외부에서 누가 부모로부터 예쁜 것을 제공했지요.


자, 여자아이에게 부모가 준 크리스마스에 주는 예쁜게 뭡니까? 예쁜 인형이겠지요? 예쁜 인형. 예쁜 인형이라면 어른이 되서라도 예쁘다 안 예쁘다 기준이 뭐겠어요? 어릴 때 봤던 그런 바비인형이 하나의 표준이 되는 겁니다. 표준이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비인형이 전혀 없는 북한 아이들에게 예쁘다는 의미가 뭐냐? 그들은 북한영화에 나오는 통통한 또는 늙은 여자 아나운서 있잖아요. 요즘 죽었는지 어쨌는지 그렇게 통통한 김정은 부인같이 얼굴 통통한 그게 북한의 미인이라면 미인형이라면 걔들에게 만약에 바비인형을 쫙 줘보세요. 애들이 미의 기준이 바뀌겠어요? 안 바뀌겠어요? 다 바뀝니다. 다 바뀌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본다? 추하게 본다? 예쁘게 본다? 예쁘게 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 그런 경험 있습니까? 특히 여자분들 같은 경우 어릴 때 인형 갖고 노는데 집안에 개 한마리쯤 있지요. 개가 와서 잠자고 나오니까 개가 인형 다 쥐어뜯었다. 그때 인형 속에 내장이 다 튀어나오지요. 그때 인형 속은 뭐였던가요? 심각하죠. 다시 말해서 삭막하지요. 겉은 이쁜데 속은 다 뜯긴거에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게 인간이라고. 성령께서 우릴 다 쥐어뜯는거에요. 성령이 ‘개’ 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외형적으로 굉장히 이쁘게 봐요. 굉장히 이쁘게 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보내지요. 전에 여러번 했지만 아가서의 여자가 특징이 뭐냐 하면 시간이 멈췄다는 거에요. 시간이 멈춘거에요. 이거는 현실적 여인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시간이 멈췄기 때문에. 아무리 이쁜 사람도 고소영이 어떻고 뭐 이렇게 고소영이라 달콤한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이쁜 사람도 이영애도 마찬가지 산소같은 여자하는데 산소인지 일산화탄소인지 모르겠지만. 산소같은 여자라도 세월이 덮쳐버리면 세월이 가버리면 물론 나름대로의 원숙미가 있느니 위로는 되겠지만 원숙미 할래? 젊은 여자 할래? 딱 까놓고 원숙미 할래? 젊은 여자 할래? 하면 젊은 여자지요. 철 없어도 젊은 여자에요.


그 대사에 그런 대사 나온다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박보검이 나오니까 대사에 그런게 있어요. 직장에 여자 동료가 하는 말이 박보검 신입사원 박보검이 인물이 너무 이쁘니까 놀래가지고 저 정도 인물 같으면 인성이 개판 되도 괜찮지 않느냐? 자기들끼리. 나는 저 정도 인물 되면 인성 아예 안보겠다는 거에요. 그 정도로 이쁘면 우리 이성적인 판단 자체를 완전히 흐리게 만들어요. 흐린게 아니고 그걸 완전 무시하게 만들어요.


성경에 그게 나옵니다. 에스더. 에스더에 보면 유대인 종교의 문제가 아니에요.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이런거 묻지도 않아요. 그냥 미스 바사 대회 해가지고 거기서 진선미 뽑았는데 최고의 미인이 바로 에스더였습니다. 이름도 얼마나 이쁩니까? 이름도 별이에요 별. 에스더, 별. 자기 사촌이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어디 가도 인물만 내세워라. 저 남자 너의 남편 되는 왕 아하수에르 왕은 네 인물에 뻑갔다. 따라서 쓸데없는 종교 그건  말할 필요없다. 끝까지 인물로 밀어붙여라. 끝까지 인물로 밀어붙여라.


끝까지 인물로 밀어붙여가지고 하만 작살났잖아요. 결국은 인물로 하만을 이긴겁니다. 인물이 권력을 이긴거에요. 충동을 이성을 이겨요. 이성을. 남자가 반해버렸어요. 그 인물에 반해가지고 나라의 반을 준다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부동산 반을 주는 겁니다. 나라의 반을 나라의 반을 주겠다. 너무 이뻐서. 충동은 창세기적입니다. 충동은 인간의 통제 대상이 아니에요. 왜 좋으냐? 그걸 왜 물어요? 그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과응보가 아닌데요.


우리가 지금 해야 될 일이 지금 산더미 같이 많은데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저주에서 못 벗어납니다. 갇혀있으니까 탈출이 안돼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3년 동안 배워도 다 소용없어요. 탈출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은 되는가?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덮어씌우면 되죠.


자,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죄로 인하여 저주받았잖아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그냥 죽으면 ‘단독 죽음’이 되요. 그런데 아까 요한복음 20장 9절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어디서 살아서 어디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았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러면 죽은 자들 가운데 택한 백성 있다면 주님의 절차 가운데서 절차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다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음을 그대로 우리에게 덮어씌우면 비록 우리가 죽은 자라도 괜찮아요. 왜? 그게 절차에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은 자가 된다는 그 자체가 주의 일에 그게 재료가 된다니까. 주의 일에 근거가 되요. 자꾸 우리의 힘으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안돼요. 그러면 주의 일이 주의 일과 다른 노선이 되어버려요.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나쁜 짓을 해서 죄 지은게 아니에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아담의 죄 안에서 태어난거에요. 여러분 이거 위로가 안됩니까? 그동안 여러분들이 악마한테 속아가지고 “아이고 내가 그거 나쁜 짓을 안 할건데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자꾸 악마한테 속아가지고 자기 탓, 천주교처럼 맨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천주교인들 퍼렇게 멍 다 들어서 차 뒤에 붙여가지고 내 탓이요 하는데 네 탓 아니야! 어떻게 자기 탓이에요? 자기 탓 아니에요. 주께서 죄인으로 태어나게 한 것은 주님 탓이지 어떻게 자기 탓이에요. 후회하지 마세요. 우리는 후회할 자격 없습니다. 후회한다고 달라질게 없어요. 후회해서 달라질게 있으면 후회하라고 하겠는데 후회할 수도 없고요 반성한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부모님 아프니까 아 또 뭐 잘해주겠다. 아이고 잘해줄 거 없어요. 아프게 한 것도 주님이고 농땡이 부린 것도 주님의 뜻인데. 어떻게 자꾸 자기한테 의미를 주려고 하지마세요. 우리는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별 개기일식 뭐 개기일식 이런데 책임 없어요. 주께서 하시는 것이지 “누구야! 나 보는 해를 네가 가렸어?!” 말이 안 되거든요.


옛날에 조선시대 때 나라에 가뭄이 들었어요. 가뭄이 들었을 때 나라의 임금이 했던게 뭐냐 하면 전국에 있는 결혼할 연령이 됐는데 안 한 사람 총각 처녀를 강제로 다 혼인시키는 일을 했어요. 왜냐 하면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음양의 조화가 결합이 안됐다고 보는 거에요. 그러면 음양의 조합이 결합 안됐으면 땅에서 음양의 조화가 결합되게 되면 그게 촉발이 되가지고 하늘에서 아이고 인간들도 음양됐으면 우리도 가만있으면 안되지 우리도 결혼하자 해가지고 하늘에서 비가 온다는 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조선시대서는 진리고 과학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들으면 어떻게 많이 불편하지요? 이 이야기가 백일의 낭군에 보면 나오는 대사에 나와요. “불편한가? 나만 불편한가?” 도경수가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보세요. 인간들이 왜 강제로 나랏님이 강제로 왜 혼인을 시키는 겁니까? 요새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갑자기 명령 내려가지고 전부다 운동장에 모여가지고 전부다 짝 안 맞추면 징역살게 만든다. 한사람씩 다 짝 맞춰서 하도록 그러면 절로 뭐예요? 절로 인구의 인구문제는 해결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대통령으로 안 뽑지.


뭐라도 해봐야 인간은 뭐라도 해봐요. 답답하니까. 결핍되니까 해보는데 그게 인간이 뭐라도 해보게 하셔요 주께서. 해보면서 그것과 주님이 남기신 흔적과는 전혀 안 맞다는 것 연결이 안 된다는 것. 코드가 맞지를 않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원한 불신자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아요. 안 믿어도 돼요. 믿어봤자 죄인 되기 때문에. 믿으나 안 믿으나 죄가 됩니다.


그런데 지난 낮설교 시간에 했지요. 제가 이런 말했어요. 안 믿으려고 노력을 해야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우리가 불신자 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기도를 해야 기도가 소용이 없다는걸 알잖아요. 기도가 노력 아닙니까. 헌금을 해 봐야, 헌금을 해 봐야 헌금이 죄라는 것을 헌금하는 것도 노력인데 이 노력은 자기 딴에 인과응보의 정신에 의해서, 설마.. “성령에 의해서” 꼭 들어와야 돼. “성령에 의해서 감동으로 한 헌금은 주께서 받으시겠지”. 이런 멘트를 날리면서 해봤자 소용없어요. 이거는 내 기도 아니야 성령의 의한 기도라고 해봤자 소용없어요.


그냥 너 죄 짓는 것도 성령의 일이에요. 가만히 있어도 죄 짓는 것도 성령의 일이에요. 성도한테는 모든게 성령의 일이 되는 이유가 우리가 원래 그래서가 아니라 환경이 성령이 주어진 그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개념을 부활 이후의 안목으로 안목에 맞춤에서 나오는 환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해도 주의 일이 되게 하셔요. 주의 일이.


그걸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대구강의 제목이 뭐였던가요? 과거재편이에요. 과거재편입니다. 어떤 이 순간 A라는 순간에서 B라는 현재까지 왔을 때 A라는 순간이 B라는 순간으로 왔을 때 우리는 인과응보로 봐요. 내가 그 때 좀 잘했을걸 또는 그 때 잘했으니까 내가 열심히 일했으니까 오늘날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지. 인과응보로 보는데 여기 십자가 와버리면 지나간 내가 해석했던 과거해석이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야만 되는 이유에 의해서 연결이 이런 일들이 꼭 일어났어야 되는 거에요. 내가 그때 태어나야 됐고 그 집안에서 이씨 집안에서 태어나야 했고 결혼할 때 누구를 만났어야 했고 그래야 이 복음이 복음답게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는 주님의 환경, 새로운 부활에 첫째 부활의 환경이 부합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창세전부터 예정해서 이끌어왔다는 거죠. 그럼 이끌어왔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구원받은 거죠? 이게 B입니다. 그런데 죽 당겨서 C로 가지요. 그러면 나는 구원받았다 이런 것이 C의 관점에서 어떻게 됩니까? 재편되지요. 재편되지요.


왜냐하면 나는 그때 구원받았다 하는 순간 그 순간이 나의 중심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중심은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는데 야 그때 주여 기도할 때 영감님 오셔가지고 나는 예수다. 막 바이브레이션 나는 예수다아아아~~ 너는 나의 종이 되어야 된다. 아멘! 했던 그 순간이 나의 획기적인 계기의 순간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완전히 유병언하고 똑같은 거에요. 구원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묻는거랑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그 사건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중심사건은 뭐냐? 십자가 사건이 중심이에요. 우리는 사적인 단선적인 인생 이 자체가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환경이란 어떤 나 개인의 단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들은 전부다 주께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이는 선이지 나 잘났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이는 나의 인생의 단선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러면 아직까지 계속 제가 미루고 있는 이야기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부활에 갈 수 있느냐?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에 보면 거기에 탁구대 상품이름이 하나 나올거에요. 누가복음 24장 1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여기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지요. 글로바 외에 한명, 두명이 지금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엠마오라는 촌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엠마오가 어디쯤 되는지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예루살렘 자체가 고산지대니까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이 말이죠. 내려가는데 물론 지역적으로 내려간다는 것도 있지만 수도이기 때문에 제일 높다고 보지만 하여튼 약간 지역적으로 내려가 있어요.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그때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지요?


자, 이것을 설명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몇 년 전인가 몇 년 전에 대전 강의 하면서 요한계시록 하면서 했던 단어가 있어요. ‘중복현실’. ‘중첩현실’. 이제 여러분들은 그 단어 쓴 것을 이해되십니까? 중복현실이에요. 예수님은 살아 멀쩡히 살아계십니다. 모세 살아있지요? 아브라함 살아있고 다 살아있어요. 귀신인가요 그럼? 중복현실이에요 중복현실.


중복현실인데 현실 따로 그것 따로 있는게 아니고 현실에 같이 들어있어 엮어져 있으니까 중복현실에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증강현실’. 증강현실. 알함브라 궁전에 보면 나오지요 증강현실. 지금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가가지고 그라나다에 가가지고 칼싸움하는 드라마 있거든요. 다른 사람 뭐하고 있는데 주인공 혼자 이러고 있다고요. 왜? 또 다른 현실에 속하기 때문에. 진우씨는 405번째 입장했습니다 그런거 나와요. 드라마 보면 나온다니까. 채널 17번 아예 안 보는구나.


증강현실. 증강현실 얼마전에 스마트폰에 뭐 떠가지고 왔다갔다 찾아다닌다고 게임하는거 있잖아요. 이름 뭡니까? 포켓몬이라는거 그게 증강현실이거든요. 현실인데 현실은 그대로 있고 현실에다가 또 하나 현실을 얹어버린거에요. 진짜 인간들 생각하는 인공지능에 의해서 생긴 증강현실이 벌써 지금 예수님 당시에 부활세계로서 증강현실 되어버린거에요.


눈을 가리니까 못 봤는데 지금 그러니까 현빈하고 같이 다니는거에요. 그 주인공 드라마 주인공하고 같이 있는거에요. 어느 것이 우세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어주는 겁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피동적이에요? 눈을 떠있을 경우에는 눈 뜨고 눈을 못 뜨면 못 뜨는거에요. 완전히 종속적 존재에요. 동등된 현실이 아니고. 이쪽은 이쪽에 따로 노는게 아니고 이쪽에서 이쪽에 종속된 하위현실, 하위현실.


중첩현실인데 그걸 참 중복현실이라고 했지만 다중현실인데 한쪽 현실이 한쪽 현실을 누르고 있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 신학교에서는 이렇게 인공지능 안 가르쳐주지요. 증강현실 안 가르쳐 주지요. 그러면 신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느냐 이걸 가르쳐요. 이거 이거 윤리와 도덕. 이거 이야기하잖아요. 성령 받았으면 말씀 지켜서 착하게 살아 이거 가르친다고요. 착하게 살면 뭐 받는다? 인과응보에 의해서 뭐 받습니까? 착하게 살면 뭘 받고? 복 받고 좋은 일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자, 이걸 왜 가르치느냐 하면 지금 이걸 신학교에 있는 학생들이 졸업해서 목사가 되가지고 나가게 되면 자본주의 사회에 고객들이 있지요. 종교 고객들이 진리를 원합니까? 아니면 이미 자기들이 진리라고 여깁니까? 자기가 진리지요. 그러면 교회가 고객이 왕이니까 고객맞춤 설교를 해줘야 되는거에요. 이 인간들이 이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아까 무슨 이게 제목인데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삭막한 존재라고 이름 붙였잖아요. 인형 다 찢어놓은거.


인간도 아닌게 인간으로 버티고 있는 인간들이에요. 이 세상에 인간이란 없어요. 인간 같아야 인간이지. 인간 아니거든요 이거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잖아요. 악마에 속해가지고.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감추기 위해서 기어이 우리도 존엄성이 있다 인격이 있다 인권이 어떻고 맨날 인간성을 주장하거든요. 그 인간성 사람들이 뭐냐? 교회 돈 내는 고객들이라고요 고객들.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인과응보거든요. 이왕 착한거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쉐마 쉐마 해가지고 들으라 들으라 해가지고 이 말씀대로 지키게 되면 뭐가 주어진다? 30배 60배 100배 주어진다고 간증했던 목사들이 번갈아 가면서 강단 서가지고 헌신예배했다 이 말이죠.


감사헌금 안 했더니만 이렇게 집안 이 꼴 났는데 감사하고 난 뒤에 진짜 나는 안 믿었는데 60배 딱 계산해보니까 빠진게 6000만원 빠졌는데 들어온게 정말 그때부터 하나님 말씀이 진짜인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간증을 막 해댔다 이 말이죠. 인과응보에요. 고객들이 그걸 원한다고요. 그러면 신학교에서 맞춤 신학교가 프랜차이즈 아닙니까? 처갓집치킨. BBQ아닙니까 BBQ. 교단이다 교단. 교단에 상납금주고 건물 세우죠. 이게 하나의 기업이거든요. 고객을 만족케 해주면 기업이 된다. 장사되거든요.


선교 못하거든 간접적으로 선교하는 방법이 뭡니까? 선교헌금 내는 거죠. 헌금 내게 되면 30배 60배 100배 갚아준다고 하는거에요. 왜? 하나님의 소원은 뭐냐? 이 땅 끝까지 하늘나라 확장되는데 이거 확장되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기여한 만큼 기여 더 하라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것이 이 논리상 맞다는거에요 그게. 지금 인간이 달라졌습니까? 안 달라졌습니까? 전혀 안 달라졌지요. 산 채로 천당 가겠다는거에요.


지금은 조금 윤리 도덕적으로 밑이지만 성화가 된다면 말씀대로 산다면 성령께서 더욱 더 거룩하라 거룩하라 해가지고 거룩하게 되면 나중에는 진짜 A등급 서울 의대 들어갈만큼 되는 거에요. 코디가 누구냐 하면 코디가 부흥사 코디 붙여가지고 요령 기도하는 요령 헌금하는 요령해가지고 붙여주면 이거는 진짜 전국 0.1%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 가는데 그때 천국에 팬티바람으로 부끄러운 구원받는게 아니고 상급을 듬뿍이 받는 그런 천국에 간다는 거에요.


천국에도 계급이 있다는 단테의 신곡이라는 그 책에 나오는 르네상스의 첫째 작품에 보면 나와 있어요. 단테의 신곡. 기독교가 그렇게 나오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쟁이보다 내가 더 착하다 이 말이거든요. 너희들은 가난한 아프리카에 우물 물 안 나오는데 돈 줬느냐? 유니세프에 돈 줬어? 너희들은 교회 키우는데 돈 썼잖아. 우리는 기독교는 아니지만 내가 교회는 안 나가지만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소아마비 약 되라고 거기에 다 헌금 다 하고 보냈다는 거에요.


한평생 돈 가볍게 써야 된다 이래가지고 어려운 사람들 고아원 사람들 우리가 돈 줬으니까 나는 교회 안 나가도 내 뜻대로 헌금 이웃사랑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계시면 반드시 나에게 설마 이렇게 착한 인간을 어느 종교에서 내가 지옥 간다고 할 종교는 없다고 보는 거에요. 왜? 종교는 똑같이 전부다 사업하는 동네이기 때문에. 그 밥에 그 나물이기 때문에 없어요.


교회가 고객들이 오고 교회에 돈 들고 오도록 만들면 교회라는 부동산은 반드시 크게 지어지게 되어 있어요. 콘크리트 말고 홀 말고 빨간 건물로 고딕체로 세워지게 되어 있어요. 주차장 넓히고. 왜 그렇게 하게 하십니까? 탈출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탈출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평생 너는 인과응보에 갇혀 죽어라. 네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평생을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래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성령이 하신 말씀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을 건지는 것과 그리고 자기 백성 아닌 사람을 지옥보내는 거에요.


둘 다 공통점은 뭐냐? 둘 다 기어이 신자 아님을 내가 평생 너를 두고 평생에 내가 다 까발릴거야. 네가 평생에 신자된 적이 없음을 말씀을 통해 탁탁 까발려주는 거에요. 신자 안 됐기 때문에 지옥 간다? 그거는 인과응보거든요. 나는 신자 되고 싶은데 주께서 신자 안 되게 해줬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나를 사용한다는 뜻이에요. 누구처럼? 열한제자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저주한다고 했지요. 그 고백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왜? 이게 덮치니까. ‘절차의 응결’이니까. 우리가 하나의 응결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어느 성경 나와 무관한 성경 없어야 돼요. 바리새인 이야기, 가룟 유다 이야기 그리고 저 사울왕 이야기 전부다 오늘날 욥의 이야기, 욥의 친구 이야기가 다 나에게 나의 현실로 작용되어서 주어지는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입니다.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 경험은 지금 우리의 21세기 자본주의를 통해서 충분히 지금 체험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통해서 충분히 체험해요. 전에도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 나고 돈 난게 아니에요. 그거는 세상을 몰라서 그래요. 돈 나고 사람 났어요. 이 말은 돈 없으면 무슨 취급 못 받는다? 사람 취급 못 받아요. 십자가 마을에 뭐 좋은 글 올려도 소용없어요. 돈 없으면 세상을 명확히 봐요. 뭐 십자가 마을에 좋은 글 올려도요 그래가지고 한 달에 얼마 버는데? 


많은 사람을 그렇게 복음 전하고 개척교회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수입이 지금 얼마래? 돈 나고 사람 났어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럼 혹시 그럴 사람 있지 않겠습니까? 이럴거에요. 그럼 주님께서 앞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만약에 네 오른 눈을 잘못하거든 빼버려라”. 하는 그 대목 나오지요? 혹시 그런 사람 진짜 돈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애꾸되든지 손모가지 날라가든지 뭐 있어야 돼요. 멀쩡한데 그런 사람 없어요.


그리고 옷을 겉옷은 다 벗어줘서 내복으로 다니는 사람 되야 돼요. 왜? 겉옷은 다른 사람 다 줬으니까. 그리고 맨날 일과가 뭐냐 하면은 맨날 10리 뛰는 사람. 맨날 조깅하고 있어요. 왜?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야되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겨냥해서 이야기한거에요 주님께서. 네가 저주를 받아도 제대로 받아봐라는 말이죠. 어설프게 율법을 적용하니까 아직도 내안에 윤리 도덕이 쌩쌩하게 살아있잖아요. 제대로 한번 저주 받아봐요 제대로.


지옥에서 지금 웃으면서 앉아있는 것도 참 복입니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이렇게 버틴것도 큰 은혜에요. 주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이것은 공격용입니다. 지금 교회 안 나오고 복음 거부하는 사람 있지요? 그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고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 누구 힘입니까? 주님 주시는 힘, 은혜지요. 그거 뭐로 보상하겠습니까? 어떻게 보답했어요? 보답 안하고 있지요. 그들은 교회 안 나오고 예수 모르고 복음 모르는 것을 자기 자랑으로 여긴다니까요. 그런데 성도의 자랑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자랑은 뭐지요? 십자가지요 갈라디아서 6장, 잘 이해하고 있네.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게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은혜는 받아놨는데 보답한 것은 있다 없다? 전혀 없게 된 것을 자랑하는거에요. 왜? 그걸 십자가 아니면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누가 알게 하겠어요? 주께서 나를 인간 만들어 줬으니까 인간 됐지 내가 인간 될려고 노력한다고 인간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됐다는 사실. 이거는 부활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결정된겁니다.


아까 누가복음에서 우리가 봤잖아요. 그들은 수동적이에요. 심지어 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23절에 나옵니다. 24장 30절.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 다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봤거든요. 자, 한번 보세요. 봤거든요. 봤지요? 그 다음에 예수님 어디 갔습니까? 떠났지요? 과연 떠났을까요? 아 이게 보통 믿음 아닙니다. 증강현실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신자가 뭐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거에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보이는 나를 믿는다? 안 믿는다? 보이는 나를 쓰레기로 여기는 겁니다. 아까도 길에서 이야기 했는데 신호 기다리면서 이야기했잖아요. 쓰레기는 아무데다 버려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쓰레기인줄 모르고 꼭 은그릇 금그릇에 담겨야 나 답다고 여깁니다. 아파트 적어도 60평짜리 이상 되야 나 답다고 여기고 내 자식은 적어도 하버드 정도 다녀야 교육시켰다. 쓰레기라는 사실을 자꾸 생각 못하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내가 쓰레기라면 어떤 점이 좋냐 하면 모든 게 감사로 이어지죠.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아직도 목사 못되고 전도사로 빌빌 기어도 지옥 같은 이 세상 아직 살아남은게 어딥니까? 우리가 죽은 것이 두려워 아까워하지 마세요. 지금 살아있다는게 이게 신기할 정도로 기적입니다. 왜 살아있어야 되지요? 예?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가다가 왜 물에 안 빠졌습니까? 배 타고. 그때 배 안탔구나. 그 완도 근처에서 그 무슨 항이죠? 하도 유명하죠. 노란거  붙여서 세월호 있잖아요. 팽목항 근처에서 왜 안 죽었어요 그때? 여러분 그때 전라도 쪽에 놀러 안 갔습니까? 그때 죽어 오시지 왜 살아서 멀쩡하게 돌아옵니까?


이게 산다는 것이 우리의 솜씨가 아니고 우리가 착해서 사는게 아니에요. 인과응보로 사는게 아니고 주께서 은혜를 주신 겁니다. 살려줬는데 너 나한테 뭐했나? 공격용이에요. 한거  뭐 있어요? 없지요 뭐. 뭐 있습니까? 나 잘났다 외에는 없지요. 그러니 이 은혜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이 엄청난 은혜를.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잘났다를 증명하는게 아니라 지금 다른 현실에, 증강현실에 주님이 살아있으니까 날 좀 보지 말고 주님이 나를 날마다 죽이는 그 보이지 않는 그 손길을 너희들이 느껴라 이 말이거든요.


수련회 좀 참석했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전부다 증강현실을 모르고 다 현실에 속하다 보니까 인과응보에 의해서 주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바라기는 수련회 때 그저 살아서 참석하고 돌아갈 때도 살아서 돌아가게 되길 여한이 없습니다. 갑자기 지붕 무너져서 집단으로 압사할 수도 있는 문제고 그뿐만 아니고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이 참새 뜻이 아니듯이 우리가 참새보다 더 나은거  없어요.


참새는 주께 영광이라도 돌리지 우리 인간은 그것보다 더 못해요. 우리가 개새끼 욕하면 개가 화를 내야 됩니다. 우리가 화 내는게 아니고. 어디 더러운 인간을 나한테 비유하냐 이렇게 되어야 돼요. 가장 낮은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라는 새로운 현실로 덮쳐서 반드시 내 백성은 성령을 줘서라도 눈을 뜨게 한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 우리는 감사 외에는, 찬양 외에는 우리는 할 소리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와 고마움만 나와야 될 우리의 입에서 공포와 두려움과 벌벌 떰과 생존에 대한 염려, 걱정, 근심, 육의 열매가 왠 말입니까. 온유와 화평과 성령의 열매가 십자가를 자랑하면서 덩달아 자신만만하게 당당하게 지옥을 밟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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