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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6 00:11:11 조회 : 282         
너희 하나님 19030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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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25.♡.152.223) 19-03-14 22:51 
강남-요한복음 20장 17절(너희 하나님)190305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16절에서 17절 18절 일단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선생님이라 하는 것은 학교 교사란 뜻이 아니고 극존칭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인간으로서 가리킬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하는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영혼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잖습니까. 자기 영혼을. 거기에다가 도박 같으면 거기에다가 모든 판돈을 다 거는 건데 판돈을 거는 입장에서 대충 한 다리는 이렇게 긴가민가 한 다리는 세상에 이렇게 걸칠 수가 없어요. 그 유대사회에 랍비라고 하는 것은 한 다리는 걸치고 한 다리는 나중에 뭐 제가 신임하고 싶으면 그때 오겠습니다 그런게 용납이 안돼요. 랍비라는 것은 종교 사회이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에 일반인 사이에 신과 인간 사이에 랍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랍비가.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성전이 깨지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끊어졌잖아요. 말라기 이후에 440년 동안 선지자가 없어요. 그 공백을 뭐로 메꿀 것이냐 하는 거에요. 신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빈자리를 뭐로 메우느냐 하면 기존의 신탁을 해석을 하게 되고 그 해석해 놓은 것을 그것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고 분석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도록 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닌 사람이 랍비들이에요. 랍비들.


물론 선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계시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안해요. 그러면 선지자가 왜 랍비가 그런 건방진 말을 못하느냐 하면 예언이라 하는 것은 그냥 내질러보고 보는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성취되어야 되거든요. 그 다니엘에 그런 내용 있잖아요. 남이 꿈을 꿨는데 해몽해 주는 사람. 그건 선지자 아니지요. 적당히 좋은 말 하면 되지요.


그런데 당신 어젯밤에 이런 꿈 꿨지? 나하고 권투하는 꿈 꿨잖아. 그걸 말도 안했는데 미리 알아채버리면 헉! 뭐지 이분은?! 랍오니 이렇게 되는 거에요. 너는 나의 영원한 랍비가 되는 거에요. 그 정도 되면. 랍비 이상이죠 선지자는. 그래서 그 시대에 있어서의 자신의 영혼을 담보할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랍비.


그 랍비가 그 당시 유대사회니까 이스라엘의 그 랍비가 있다는 것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대적으로 억압받는 가운데 있어도 그들은 행복해요. 여러분 행복이라는 것이 소유가 넉넉해서 행복한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소유가 넉넉해져 버리면 그걸 나중에 그 소유가 빠지거나 사단나거나 줄어들 수도 있고 자기보다 먼저 소유가 많은 사람이 있으면 배가 아파서라도 화나서 질투심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요.


인간이 진정으로 최종적으로 마감적으로 행복할 경우는 뭐냐 하면 내 영혼마저 갖다 앵겨도 그 사람에게 맡긴 내 영혼이 아마 빛이나고 미래가 잘된다는 보장이 있을 때 그때 행복해요. 그래서 매슬로우의 욕구설의 제일 마지막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라는게 있거든요. 그거는 심리적 안정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그때 선지자 누가복음 선지자 시므온입니까? 그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 맞지요? 시므온이 아기예수를 이렇게 안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재여~” 주님이여 이런 뜻이죠. 주님이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종을 평안히” 여기는 그냥 평안히 되어 있지만 제가 이렇게 운을 띄웁니다. ‘종을 평아~~~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런 경지에 이르는거에요 시므온이가.


하나님께 몇 푼 받았어요? 어디 취직했어요? 얻은거 없지요? 천식이 낫고 그런거 있었어요? 없어요. 종의 마음을 편안하게 기쁘게 편안하게 놓아주는 것은 자,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뭐를 본거에요? 아기예수를 봤잖아요. 아기예수를. 이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이 무슨 책이다? 누가? 그다음에 뭐에요? 누가? ‘누가복음’ 누가복음. 누가복음 2장 29절에 나오잖아요. ‘복음’.


그러면 교회가 교회가 해야 될 임무가 뭡니까? 교회 온 성도로 하여금 예전에 집에 불이 나고 부도 나고 애가 아프고 뭐 취직 안되고 결혼도 안하고 뭐 1억 5천 잃어버리고 사기당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옛날엔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 했고 그것에 휘말렸다 휘둘렸다 이 세상 사는 것이. 미세먼지만 해도 막 시달리고 뭐 물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런 것까지 가슴 덜컹 내려앉고 아파트 전세 올라가면 어찌 사노 그러한 휘둘리는 것, 이 세상 휘둘리다가 복음 자체가 우리에게 뭐를 제공해야 된다? 이제는 주의 영혼을 ‘평안~~히 놓아주는 거’에요.


실연을 당했든 모든 것이 주저앉든 남한테 웃사를 당하든 평안히~~~이것은 이게 바로 성령이 임해서 그랬다는거에요. 같은 성령이 임했다는데 왜 다른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성령이 임하는 사람은 그까이것 그까이것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까이것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 내에서 성령은 헌금 빠지면, 인원수 빠지면 덜덜 떨고 그런 성령이 어디 있어요 그런 성령이.


복음의 내용과 다를 때는 그건 뭐다? 복음이 기다? 아니다? 복음이 아닌거에요 그건 복음이 아닌거에요. 복음 이야기 나왔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우리가 지금 요한복음 하거든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하는데 제가 예를 든 것은 누가복음 2장 29절에 시므온이 아기예수 안아서 종을 평안히 놓아줬다 했지요.


뭐를 안았다고 했습니까? 방금 제가 뭐를 안았다고 했습니까? 아기예수, 아기예수죠. 이걸 오늘 요한복음 20장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몸이라고 하는거에요 ‘몸’. 몸이에요 몸. 이걸 칠판에 쓸 수 있는데 그냥 나직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 나직해서 좋으네 목이 안 아파서 좋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초월적 실체의 너희들이 아직 결합될 수 없는 몸이라는 뜻이에요.


“나를 만지지 말라” 했거든요. 초월적 실체의 몸이 따로 있고 그 몸과 질이 다른 몸이 바로 네 몸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초월적 실체의 몸과 네 실체, 흙의 속한 실체에 몸은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한 입장에서는 이것이 만져도 되는 사이가 아닌 겁니다. 만져도 되는 사이가 아니에요. 그 만지지 못한다는 말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어떤 몸이어야 되느냐 하면 죄인을 흡수해서 자기 안에 통합시키는 기능이 발현되는 그런 새로운 몸이 되어야 돼요. 아직은 아니다라는 거에요 아직은. 네가 전에처럼 내가 십자가 부활되기 전에처럼 네가 함부로 만지고 같이 잠자리하고 식사하고 그런 몸이 아니에요. 지금 어떤 중간에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 자체의 실체가 변형되는 과정을 오늘 본문 요한복음 20장 16절에서 18절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한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가만 있거라 나 홀로 다할게” 라는 뜻이에요. “가만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너희들이 네 자신을 변형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네가 변형돼봐야 그 몸에서 그 몸밖에 나올게 없어요. 사람이 기껏 자기 몸을 굴린다는 것은 자기 몸이 갖고 있는 한계를 기껏 한계를 보여줄 뿐인데 그 한계라는 것은 자기 몸을 굴려서 정신적으로 어떤 쾌감과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겁니다.


아주 쉬운 예가 바로 춤추는 거죠. 음악에 맞춰가지고. 음악에 맞춰서. 지금 다이어트하는 거기에서도 음악 틀어놓고 하지 않습니까? 잘 모릅니다만 음악 틀어놓고 하지요? 음악 틀어놓으면 뭐가 반응한다? 몸이 반응하고 가만있을 수가 없지요? 예민한 여성의 몸으로서는 가만 있을 수가 없지요. 흔들다 보면 땀 빠지고, 땀 빠지면 증발되고 증발되면 기분 썩 괜찮고 살 빼고 기분 좋고 오늘도 돈값 한거지요. 회비 낸 값을 하는거에요.


그 다이어트 하는 그 클럽이 얼마나 또 강사가 친절합니까. 또 잘생겼지 젊지 친절하지. 이미 결혼했습니다만. 그러니까 회원수가 곱빼기 부흥이 되는 거에요. 그냥 있기만 해도 부흥이 되는 거에요 있기만 해도. 교회는 부흥 안되고 하여튼 거기는 부흥되는 거에요. 왜? 몸을 몸에서 엔돌핀이 나오도록 그걸 상품화시킨 거거든요. 조치를 취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몸은 다른 몸을 흡수할 수 있어요? 없어요? 통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혼자 즐거워. 자기만 즐거워요. 자기만 댄스 춰요. 댄스 추고 춤춰요. 안동역이란 노래에 맞춰가지고. 안동역 앞에서 몸을 흔들어. 신나. 혼자하면 재미가 없어. 라인댄스를 해야돼요. I ‘can't stop loving you’ 그 노래에 맞춰가지고 잘 추는 사람 앞에 세워가지고 라인댄스 알아요? 컨츄리 음악에 맞춰가지고 미국에서 하는거 있어요. 안 그러면 유투브 찾아보세요.


몸의 쾌락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그냥 운동에너지를 가해서 굴리면 되는 겁니다. 자기만 즐거워요. 자기만 즐겁다고요. 제가 왜 댄스이야기 자기 즐거움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은 사람들 쪽에서 다가가는 것 주님이라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다가가는 것 그게 한계가 있습니다. 이번에 수련회 때 아가 했잖아요. 아가의 내용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하면 다가가는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는 겁니다. ‘다가오는 사랑’이어야 한다예요.


다가올 때 다가오는 사랑이었는데 다가오는 그 사랑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가 다가가는 쪽으로 나설 때 그건 항상 실패로 끝나요. 그런데 아가에 보면 실패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난데없이 바람이 불고 향기가 넘치고 그래서 주변의 대자연이 두 사람이 결합하도록 도와주지요. 심지어 그 여자친구까지 도와줍니다. 그 여자친구가 어디에 소속됐느냐 예루살렘이 소속된 여자들이에요. 신부를 혼례 올리도록 도와주지요.


그 친구들의 춤을 무슨 춤이라고 하느냐 마하나임의 춤이라고 했어요. 아가에. 그것은 바로 천사들이 추는 춤이에요. 춤은 어디서 춘다?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다윗언약에 의해서 의미있게 자리잡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랑이 거기서 시작이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랑의 출처가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 왕이 여자를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남자가 다가가도 여자가 다가가도 이게 쉽게 성사되지 않아요. 늘 실패로 끝나요.


하지만 여호와의 질투심 그래서 거기 아가 마지막에 여호와의 불같은 질투심이 죽음보다 강한 질투심이 결국은 그 왕에 합당한 신부로서 혼례를 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대자연은 그걸 후원해주고 도와주고 천사 기능하는 여자친구들도 도와주고. 그래서 아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일상 중에 하나가 아니라 사랑이 최종목표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사랑이 최종목표다. ‘힘’이 아니고 ‘사랑’이다.


제가 지난 오후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을 삶의 일부로 보는 거에요. 왜 그러냐 하면 힘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을 가질 수밖에 그까이것 사랑, 돈 있고 힘 있는데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이처럼 사랑을 뒷전으로 만드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사랑의 반대말이에요. ‘힘’이에요. 힘입니다.


그건 누구의 힘? 본인이 갖고 있는 힘이지요. 목사가 교회를 가졌다. 이거 힘이잖아요. 가장이 빌딩을 가졌다? 이거 힘이란 말이죠. 나는 돈은 없지만 아이들을 8명 낳았다. 이것도 힘이다 이 말이죠. 나는 내 친구가 많다. 영구 친구도 있고 이것도 힘이다 이 말이죠. 여자혼자 살기 힘드니까 힘 있는 남자만나겠다는 거에요. 돈 주고 사겠다는 거죠. 그게 다가가는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욕망이 있는 사랑은 실패로 끝나고 충동에 의해서.


주어지는 사랑이 되면 바로 그 사랑 앞에서 나라는 것은 사랑의 아이스크림 녹아지듯이 내 자신이 녹어져버려야 돼요. 내가 녹아지게 되면 뭐가 남는다? 나와 너가 있는게 아니고 중간에 뭐가 피어나요? 사랑만 피어난다. 이것이 아가서의 전체에 있는 분위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니 좀 기억이 좀 나십니까? 두 사람의 몸은 없어져 버려요. 없어지고 두 사람의 몸에 의해서 발견된게 있어요. 그게 ‘사랑’이다. 아가에 나오죠.


그런데 여기에 그렇다면 그걸 신약에서 너무 성급하게 적용하면 예수님의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다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할 수 있겠지요. 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바로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고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하잖아요. 로마서 7장에도 나오고. 너무 성급하게 그렇게 이뤄버리면 중간에 중요한게 확 빠져버려요.


뭐가 빠지냐 하면은 오늘 본문이 빠져버린다고. ‘만지지 말라’가 빠져버렸어요. 만지지 말라를 저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위반의 요소가 현재 주님과 결합할 때 그 위반의 요소가 우리 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까먹은거에요. 만지지 못할 몸을 가지고 우리가 우리 부모한테 태어났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쳐버리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내 쪽에서 왜 다가갈 수 없는가? 위반의 그 주님의 몸과 합의를 하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거는 주님께서 부활한 몸을 마리아가 랍비여 랍오니여 선생님이여 하면서 만지려고 할 때 만지지 말라고 그 단절성을 다시한번 새롭게 부각시키는 취지가 바로 그 취지예요. “너는 네 자신을 아직도 모른다.”


우리 같으면 뭡니까. 주님 우리 아는 사이잖아요. 이렇게 나올거에요? 아는 사이하고 몸이 하나의 몸이 되는거하고 달라요. 우리는 또 이럴거에요. 주님 우리 아가 봤는데요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고 신부니까 주께서 능력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예, 능력으로 해내요. 성령오시면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을 놓치면 안된단 말이죠. 과정이고 뭐고 결과적으로 한 몸되면 되지. 아니요.


그러면 그것은 내 사적 구원용이 되어 버려요. 사적. 나만 챙기면 그만이지. 사적 구원 그것은 마귀의 주장이고 우리는 내 구원받기 위해서 성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거에요. 개인적 구원 챙기면 우리는 코웃음치고 돌아설 인간들입니다. 주께서 만지지 말라 할 때는 우리는 약간의 불만 요소가 있을 수 있어요.


좀 만지면 어때? 그거 좀 만진다고 주의 일에 어떤 차질이 일어납니까? 차질이 일어나는데. 무슨 차질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너는 너를 모른다는 거에요. 너무 나댔어. 너무 함부로 예수님을 함부로 생각한거에요. 마리아가 오늘 본문에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일거에요. 마리아가 그냥 반가운 마음에 만지려고 했지요.


왜 그랬느냐 하면은 마리아의 마음은 자기 몸이 있잖아요. 인간의 몸은 내부적으로 어떤 단절성을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그 몸하고 지금 내 몸이 동일한 동일 실체라고 본거에요. 어제 주님을 만났으니까 오늘도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누가복음 8장 4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러분 잘 들으면 잘 아실 말씀이에요. 43절에 42절에 중간에 후반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호하더라” 여기에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여자가 12년 동안 피를 흘리며 하혈하는 그러한 아주 비참한 병을 참혹한 질병을 앓고 있었어요.


여자가 뒤도 와서 그 옷가를 손을 대매 혈루증이 즉시 즉시 그쳤다고 되어 있어요. 즉시 그쳤다. 자, 몸 만졌습니까? 옷 만졌습니까? 단지 옷만 만졌을 뿐인데 즉시 혈루증이 그 저주받은 그 질환이 즉시 나았어요. 즉시 나았다는 말은 이 병 고침이 여자의 건강회복에 의미를 두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짐작하겠지요?


즉시 나은 거에요. 차츰차츰 좋아진게 아니고. 차츰 원기회복한게 아니고 즉시 나았다고 하는 것은 12년이에요. 12년과 즉시를 한번 비교해보세요. 12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참 고생했거든요. 남자들은 그냥 남자 아니고 군에 갔다온 남자들은 이걸 알아요. 우리할 때는 거의 3년이었거든요. 34개월. 36개월 34개월 동안 했다구요. 34개월 했다고요.


34개월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거에요. 내 자유시간 갖고 싶다. 국방부가 준 스케줄말고 내가 내 임의대로 초이스할 수 있는 선택하고 정할 수 있는 내 자유를 얻고 싶다 그게 34개월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달력에다가 가위표치고 이럽니다. 빨리 죽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너무나 허망하게도 제대날이 오게 되면 부대에서 빨리 나가라고 합니다. 즉시. 그러면 기다린 보람이에요? 아니면 국방부의 명령이 더 셉니까? 어느 쪽이에요? 취지가.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만큼 기쁨이 오는게 아니에요. 이거는 있으라 하면 있고 제대하라면 제대하는 그 명령에 우리는 그 제대군인은 종속되어있는 거에요.


즉시 나가야 돼요. 오래 있으면 안돼요. 오래 있으면 또 내일의 밥은 제사과에서 제사과라 하는 것은 밥하고 이런거에요. 제사과에서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밥이 안 나옵니다. 즉시로 나가야 돼요. 3월 23일 제대를 했는데 내 군대 이야기를 왜 하나? 그런데 눈이 펄펄 오죠. 3월말에 눈이 와요. 제대한 사람이 나 혼자 밖에 없어요. 서글프기 짝이 없어요. 뒤돌아보니까 고생했던 그 부대. 처량하기 짝이 없어. 그 의미를 몰랐는데. 내 운명이 내 열심과 내 인내와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구나. 나의 미래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12년 했느냐 15년 했느냐 묻지 않고 38년 동안 병 들었느냐 묻지 않고 딱 믿기만 하면 즉시로 그만 ‘꺄르륵’ 합격. 주님의 주저 없는 조치에요. 나하고 사전에 조율하거나 의논하거나 협상한 적이 없습니다. 일방적, 그냥 국회에서 세 번 두드리는 것처럼 그냥 선포로 끝나버려요. 너는 해방이다. 너는 해방이다. 그런데 이 방금 누가복음 8장 42절이 어느 책에 있다고 했습니까? 어느 책에 있다고 했어요? 어려운 문제 아닌데. 이거 어느 책에 있다고 했어요? 누가복음에 있지요. 누가 복음이잖아요 “복음”.


복음은 뭐다? ‘즉시’. 아까 누가복음 2장 이야기는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그리고 누가복음 8장은 즉시. 그럼 교회에서 외쳐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즉시로 종이 편안한 것. 구하면 되잖아요. 즉시로. 아무것도 안 해도 즉시로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으로서 이제 종이 편안한 것. 뭘 더 아이큐를 굴리고 요모조모 뭐를 더 따집니까? 봉사했는데 앞으로 복을 얼마 더 받나? 쓸데없는 그 계산을 왜 해요. 할 필요 없어요.


소유해서 종이 평안하지 않습니다. 즉시로 해방되어서 평안한거에요. 그런데 여기서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옷을 만졌다. 옷가를 만졌다는 거에요. 주님의 몸에 근접되어 있지만 몸은 아니지만 어쨌든간에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을 만졌는데 즉시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은 그러면 그 12년 동안 병 들었던 그 여자 몸에 무슨 효과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여자는 너는 이제부터는 따로 네 몸이 아니고 너는 내 몸과 통합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통합된 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든 자도 꺄르륵 웃을 수 있는 환경이 하나님의 예수님의 몸이에요. 예수님의 몸입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요. 그런 설교하니까 진짜 몇십년만에 처음 태클이 들어왔어요. 제가 대구강의에 했잖아요.


“어떻게 천국 가서 자기 죄를 잊어야지 자기 죄를 언급해가지고 꺄르르 웃느냐? 그런 천국은 없다 목사님 너무 막나갔습니다” 라고 그렇게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서 그런 이야기했던가요? 그 이야기 안 했구나. 오늘 강의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 사도 요한이 벌거벗고 도망쳤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사도 요한이. 예수님 팔리실 때 다급해가지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지요. 그 이야기를 자기가 쓴 요한복음에 거기에 기록이 되어 있지요. 그거 왜 기록합니까? 자기 수치심인데.


베드로의 비서가 마태잖아요. 마태복음에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태클 걸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 나오지요. 마태복음에 나오지요? 그 이야기가 왜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게 포함되어야 그게 복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포함되어야. 그래서 대구강의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말씀은 나 구원받으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의 죄조차도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형성에 이미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죄를 지어도 그게 예수님의 계시가 된다 했지요?


주님은 계시 만들기에 집중할 뿐이에요. 네가 어떤 죄를 지었는가는 그런 것은 네가 알 바 아니에요. 내가 내 관리하거나 내가 나 단도리 할 그런 권리도 없고 그런 입장도 못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된다는 거에요. 나같은 인간도 증인되는 거에요. 그래서 강의할 때 의인 중에 천하의 의인인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천하의 괴수 됐잖아요. 꺄르르 안 웃을 수가 없어요. 기분 좋아서. 웃으란 말은 감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감사’.


오늘 본문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했잖아요. 좋다고 하는데 “이씨 만지지마 어디”. 물론 “이씨”라는 말은 안했습니다만 비타민씨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만은 “만지지 말라.” 그럼 사전에 그런 이야기 해야지 사전에. 만지려하기 전에. 주의사항 나는 부활했을 때는 너희 흙에 속한 몸은 일단은 만지면 안 됩니다 뭐 이렇게 붙이던지.


그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만지지 말라고 그 의미가 소중한거에요. 그걸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려고 막달라 마리아는 일단은 허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만지지 말라고 단절을 거리를 두신거에요. 그러면 주님의 몸은 얼마나 대단한 몸으로 될 것입니까 라고 우리는 궁금해 하겠지요. 도대체 주님이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 대단하게 만들 것인가 이렇게 관심을 두는데 쓸데없이 주의 몸에 관심두지 말고 도대체 우리 몸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가를 생각해야지요.


자기는 멀쩡하다고 우겨요. 자기는 아무 몸이나 만져도 된다고 우기고 있어요.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몸은 어떤 몸이냐 하면은 이미 죽음을 포함한 몸입니다. 죽음을 포함한 몸이에요. 그리고 죽음을 포함 정도가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그걸 경유해서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힘을 이기시고 살아난 거에요. 인간의 몸으로서는 그 표현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까 그 아가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이야기해볼게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가를 하면서 제가 강의 중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아가 교재를 쓸 때 이런 이야기했지요. 상징은 상징에 담긴 의미는 문자로도 다 마저 표현하지 못한다. 교재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고 강의할 때도 그걸 약간 언급 했어요. 뭔가 있는데 표현하려고 하니 그 표현이 늘 미흡해. 미흡해서 또 다른걸 또 대타로 집어넣는다? 그래도 또 미흡해요. 다른 걸 또 바꿔도 또 미흡한 거에요.


육개장 맛이 달달하네. 그 달달한게 뭔데? 달달하다는 것은 속 시원하면서도 매콤하면서도 약간 단맛 있다는 그 뜻이다. 그런데 그게 뭔데? 그건 말이야. 아 말로 하란 말이야 그렇게 된다고요. 아 참 남자한테 좋은데. 말을 못하겠네 얼마나 좋은지를. 표현을 못 하는거에요.


그것은 인간이 평소에 모든 의미를 언어에 담아서 이야기했고 그 언어에 담긴 의미는 인간이 자기 몸을 충분하게 검증하는 용도로 핑계로써 내 몸은 아직도 의미가 가치 있는 의미다. 내 의미는 올바른 의미라는 것을 그걸 과시하는 용도에서 단어들을 낱말들을 계속 타인을 향하여 같은 인간들을 향하여 쏟아내고 왔다는 거에요.


“랍비여”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몸을 누구한테 몸을 만지는 것도 마찬가지고. 아마 막달라 마리아로서 내 몸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마 처음일걸요. 사람이 뭔가 시도할 때는요 그만큼 나는 시도할 권한이 있고 그러한 나는 그만한 자격이 된다고 시도하거든요. 단어를 내뱉을 때도. 아가의 내용에 보면 아가의 남녀가 서로의 몸을 표현할 때에 온갖 단어를 다 동원하지요. 그런데 그 표현을 다 동원할 때 그 표현은 이미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에 있는 식물같은 것 또는 인공물이나 식물 이런 것들을 가지고 붙여놓은 거에요.


그런데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내 여자는 이 여자들 중 제일 이쁘다고 했지요? 어느 정도 이쁘냐하면 백합화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의 우리 일상적인 인간세계에 속한 사람은 성경을 보면서 이쁜 여자를 알기 위해서 백합을 뜯어서 이렇게 그 여자하고 한번  비교해보려고 시도할거에요. 백합만큼 이쁘냐? 할 때에 백합만큼 이쁘다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백합꽃 자체가 그게 이쁜 꽃이냐라고 정리 안 된 사람이 많아요.


나는 백합이 영 이쁘다는 생각 없는데. 차라리 나는 가느다란 나는 오히려 그 코스모스도 있고 향기 나는 라일락 아카시아가 투박스러운 면이 있지만 코스모스도 괜찮잖아. 산소같이 하늘하늘하니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건 사람들 취향마다 다 다른거에요. 언어로도 표현을 못한거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사랑’이란 문자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사랑이란.


그게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나와있어요. 고린도후서 3장 6절에. 6절에 보면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언어 분석? 히브리어? 헬라어? 그거 죽이는거에요. 문법 죽이는겁니다. 문법에서 성령 안 나타나요. 그래서 원어가 없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그 바탕이 있어요. 그 바탕이 자기 몸에서 나온거에요. 그러면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성경의 계시는 어디서 나왔느냐? ‘문자 따져 봐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거에요. 만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거에요. 그럼 만지지 말라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내 몸에서 나오는 그 성경 문자를 너의 더러운 네 몸에서 나온 의미로 풀지 못하는 겁니다. 해석 불가능이란 뜻이에요. 곧 불가능이란 구원의 불가능이에요 이거는.


네가 안다는 것은 네가 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제가 아까 했지요. 위반의 요소.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몸과 우리 몸 사이를 주목해봐야 돼요. 만지지 말라 하는 가운데서 움찔하겠지요. 그럼 예수님 몸 따로 있고 막달라 마리아 몸 따로 있지요. 그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단절성이 있는 거에요.


그럼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뭘 강조한다? 단절성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앞으로 내가 너에게 성령을 주고 계시를 줄 때 그 단절성을 빼면 안 된다. 그 단절성을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 안에 인간 안에 위반의 요소. 주의 몸과 만지지 말라 정도가 아니고 주의 몸과 통합이 안 되게 하는 요소가 인간 속에 나도 모르게 인간 속에 여기에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잠복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네. 우리교회 의사 집사님이 제가 천식 걸렸다고 주사 맞고 이렇게 링거 놓고 하면서 지금 약 먹고 이렇게 좀 낫다고 나은게 아닙니다. 잠복되어 있습니다  그랬거든요. 그냥 천식은 잠복이 안 되지만 알레르기 비염에 의한 천식은 잠복이 되니까. 늘 미세먼지 있을 때 마스크 하시고 마스크 하시고 약 꾸준하게 챙겨 잡수시고 찬바람 할 때는 따뜻하게 하셔야 됩니다. 잠복되어 있다는 거에요.


잠복되어 있다는 말은 아까 동영상할 때 은닉되어 있다고 했지요? 숨겨져 있잖아요. 숨겨져 있으니까 잠복은 언제 나오느냐 하면은 내가 행동해서 그게 실패로 나에게 다시 돌아올 때 비로소 위반의 요소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뭐가 잠복되어 있는지 몰라요. 강의를 열심히 하고 목소리를 높일 때 콜록콜록 기침이. 가짜 기침입니다 또 강의 그만 하자 하지 말고, 가짜 기침.


이렇게 날 때 아하 잠복되어 있구나 티 나듯이 뭔가 인간 쪽에서는 여전히 주님과의 우리 몸과의 단절이 계속 일어나줘야 돼요. 그래야 내 몸에 의미를 더 이상 기대를 안 하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나를 안 믿는게 ‘믿음’입니다. 나를 기대 걸지 않는게 믿음이에요. 예수 믿었다는 그 믿음이 엉터리라는 것을 아는게 믿음이에요.


왜?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단어와 표현과 같은 것이 내 잠복된 위반의 요소가 발현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만지지 말라하는 요소를 우리는 마치 자랑인냥 여겨서는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헌금할 때도 그게 죄라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은 또 화가 났는지 성령으로 헌금했는데 왜 그것도 죄냐?


성령으로 헌금하는 사람, 진짜 내가 아는 상식에서는 도저히 믿지를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태복음에 이야기하기를 오른손이 하는걸 왼손이 모르게 했다고요. 그러면서 성령으로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단 수술해가지고 뇌를 두 개 잘라야 돼요. 잘라서 오른팔은 좌측 뇌에 가고 왼팔은 우측 뇌에 가거든요. 뇌에다가 여기에 철판을 심어가지고 이쪽 정보가 이쪽 정보에 전달하지 않도록 한 가운데서 오른손으로 후딱 내고 치워버려.


뇌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후딱 치우면 내가 뭐했지? 내가 뭐했지? 그게 바로 자연적인 치매 현상 아닙니까? 꼭 치매 받아야 그럼 성령받았다는건 치매를 의미하는가? 사람이 인간의 몸에서 자아 정체성이 나온다고 흔히 이야기해요. 정체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나라는 인간이 새로 이렇게 되어 있다는 자기의 체계를 만들어요. 자기 체계.


그런데 자기가 헌금을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게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은 헌금하기 전에 자아체계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헌금하고 난 뒤에 자아체계에서 이게 재편됩니다. 헌금한 나가 되요. 헌금 한 나, 헌금 안한 나. 그게 또 하나의 폐쇄적 자기의 스카이캐슬이 돼요 이게. 하나의 성체가 된다고.


그러니까 또 무엇을 착한 일 하나 하면 또 재편되어서 그거 추가된 착함이 자랑거리가 되고 자기 의가 되는 새로운 의가 되는 자아가 단단하게 구축이 돼요. 단단하게 구축이 된다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몸을 만지지 말라는 말은 너는 어떤 것을 해도 네가 단단한 성체는 성벽은 깨지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석을 아무리 이쪽에서 해석을 해봐야 이미 확정된 내 나와바리 내 영역에서 나온 해석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나 잘났다. 이게 항상 모든 의미 안에 함유가 되어있어요. 나 잘났다. 진짜 나 지옥 보내면 그건 하나님 잘못이다. 이게 항상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교회에서 누구보고 기도하라고 해보세요.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고 나면 기도하고 난 뒤에는 항상 잘했냐 못했냐를 항상 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이거는 우리 안에 위반의 요소가 주님 보시기에 남들 보기에가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항상 문제점이 있는 요소가 나를 그렇게 또 새로운 나로 만들어 내요. 내가 기도하는데 남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이만하면 남들한테 욕 얻어먹을 기도는 아니잖아. 혼자 지금 두시간 기도하고 있어 남들은 점심 먹고 있는데. 그게 자기 철저화거든요. ‘자기 철저화’. ‘자기 완벽함’.


성경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그걸 깨뜨려줘야돼요. 깨뜨려주게되면 사실은 내 몸이 내 주인공이 아니고 위반의 요소가 실제적인 내 몸을 갖고 놀았다는 괴물이죠 마귀죠. 내 몸을 엉뚱한 놈이 다뤄왔다는 것을 또다시 깜놀, 깜짝 놀래는 거죠. ‘아 나한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라는 것. 또다시 깜짝 놀래면서 그걸 확인할 수 있어요.


시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살아온 너의 열심도 아니고 오직 나의 의다” 라고 되어 있어요.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미 인간들이 악마에 의해서 선악 논리에 의해서 계속해서 뭐를 생산하는 중에 있어요? 이만하면 나는 의롭잖아. 이만하면 꿀리지 않잖아.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의로움이 내 창고 안에 가득가득 들었다는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의와 내 의가 충돌될 수밖에 없지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보면 내 몸과 의가 되는 창고니까 내 몸과 주님의 몸이 충돌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만지지 말라고 하는거에요. 네가 만질 잽이 안 된다는 거에요 그 몸 가지고. 만질 잽이 안 된다. 그럼 언제쯤 만질 수 있습니까? 못 만지지요. 그 몸 가지고는 안 되지요. 사람은 안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누가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거 마태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정리해봅시다. 즉시로 돼야 복음이고 종을 편안히 놓아주는 것도 복음이고 어떤 요소? 사람은 헌금 기도 예배참석 소용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게 인간이고 할 수 없게 만들어서 하게 하시는게 이게 복음이고. 교회가 이야기하는게 그거잖아요. 기존교회에 그렇게 외치면 대번 쫓겨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만지지 말라는 말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모든 본문 말씀의 해석은 마지막은 뭐냐? 드디어 네가 만질 수 있다 그게 끝이죠. 해석의 끝. 못 만져야 되는데 못 만지는게 당연한데 주의 몸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못 만져야 될 몸인데 그 드러운 몸인데 그 몸이 주와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은 결국은 우리 쪽에서 다가가는 사랑이 아니지요.


만지지 말라. 아직까지 내가 나한테 할 일은 남아 있다. 그 일이 무슨 일이냐 하면 여기에 17절에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혼잣말 같아요. 혼자만 알고 있는 혼잣말. 예수님 혼자만이 해석할 수 있지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그 말을 지금 막달라 마리아에게 해주는 겁니다. 내 알아 들었지? 시키는 대로 행하라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지키라가 아니라 내가 내뱉은 말 그대로 나한테 이루리라 그 뜻입니다. 이룰 것이다.


네가 이루고자 하고 난 뒤에 그때 그 말을 기억해보라. 내가 못했는데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하셨구나. ‘꺄르륵’ 하고 주의 일이구나.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써의 구원이다. ‘주의 일로써’.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혼잣말을 이렇게 한다는 이 자체가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이 말은 막달라 마리아가 해석을 해냅니까? 현재 그 상태에서는 해석이 안돼요. 나중에 성령 오게되면 해석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는 오순절 우리 지금 오순절날 다락방 같지요. 다락방에 성령오지 않은 이상은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받았다고 해석이 되는게 아니에요. 성령은 하나의 우발적 사건이기 때문에 백독 천독한다고 해석되는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할 때만 해석이 돼요. 그리고 해석이 될 때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해석해냈다!!” 이게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나를 자기 해석에 나를 사용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뭐가 깨지느냐 하면 철벽같은 내 성벽이 날마다 새롭게 재편되는 내 그것이 주님의 해석에 의해서 와르르 무너지고 거기서 무엇이 주님을 못 만지게 했던 위반 요소인가 그게 깊숙이 있던 위반요소가 발각되어야 돼요. 아 나한테 이런 암조직이 있었네. 나한테 이런 요소가 있었구나 그걸 다시 한번 우리가 이렇게 육체의 아담의 몸, 흙에 속한 몸인 이상은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서는 계속 그것이 남아있어야 됩니다. 발각당해야 돼요.


아 그래서 나는 예수 믿었다고 해놓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살아가는구나. 내가 예수 믿어놓고 세상과 달리 살 수 없는 이유가 이 강력한 위반의 요소, 쉽게 말해서 주님의 복음을 시시하게 여기게 만드는 그게 뭐 돈이 중요하지 그게 뭐가 중요해라고 틱틱 거리는 평소에 하던 그 행세 있잖아요 관습. 내 몸 살리는게 중요하지 뭐 예수 이야기 남의 이야기잖아 라고 틱틱 거리는 그 요소, 성령이 아니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IP:125.♡.152.223) 19-03-14 22:52 
강남-요한복음 20장 17절(너희 하나님)190305b-이근호 목사



우리는 성경의 전체를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성경내용 다 압니다. 본인이 출제했기 때문에 그래요. 출제위원이 문제를 낼 때는 반드시 뭐도 압니까? 정답을 혼자서 알지요. 야고보서에 나오지요. 100점짜리는 없다고요. 99점은 안돼요. 전체 율법의 다 지켜야 이게 천국에 합격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가치, 우리 구원은 관계 없어요.


말씀의 가치만 높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말씀의 가치에 합당하지 않는데 얼쩡거리면 무엇이 와서 쳐버리겠습니까? 율법이 와서 죽여버리죠.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광주이야기를 제가 예를 들었지요. 그 넓은 그 18차선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 16차선인가 그 넓은 도로에 한가운데 5만원짜리 있다면 보는 사람이 임자지요.


줍고 싶은데 주우려고 하니까 쌩쌩 달려오는 차들이 주우려고 하는 내 몸짓을 그냥 치고 넘어가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영생 구원 흔히 교회에서 그렇게 흔하게 세일되는 영생 구원 천국은 뭐냐 하면 율법 그물 안에 놓여있는 거에요. 그걸 쥐다가는 율법의 저주가 가만두지를 않는겁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면 악마가 알아요.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문제를 자꾸 풀라고 하는 거에요. 어떤 해석을 하느냐? 선과 악을 갖고 있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이미 너는 지식을 알았다. 지식을 가졌으니까 그 지식가지고 도전해보라는 거에요. 합격할 수 있는 그런 의로움을 향하여 네가 의지를 불태워라 이 말입니다.


꼭 이런 이야기가 기존 교회 목사이야기와 똑같아요. 독수리처럼 올라가라 뭐 성화되라니 뭐 거룩에 거룩을 더하라니 뭐 그런 류의 이야기죠. 도전하라 그리고 쟁취하라 그 영광은 너에게 뭐 이런거 있잖아요. 마귀를 이겨라. 마귀가 바보입니까? 세상에 마귀의 마음을 가진 인간이 무슨 마귀를 이겨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여러분 환자가 의사를 이기는거 봤습니까? 요새는 그런 사람 많아요. 하도 TV에서 민간요법들이 많이 나와가지고 의사보다 더 많이 알아. 처방도 자기가 다 내려버리고 의사 입도 못 떼게 만들어요. 자기가 말 다하고요. 요새는 내과 갈 문제가 아닙니다. 전부다 정신과에 들어가야 돼. 비뇨기과 산부인과도 정신과로 가버려야 돼 전부 다. 자기 자격증도 없으면서 의사보다 더 많이 알아.


인간은 이 세상의 해석을 모릅니다. 그래서 대구강의에 그런게 있지요. 내가 나 되는거에 대해 변수에 대해서 내가 다 모르겠다요. 욥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욥이 내가 이렇게 고난받는 것에 대한 여기에 투입된 여러 가지의 정황들이나 변수에 대해서 자기가 왜 고난받는지를 모르지요. 모르면 입 다물어라 하는 것이 주의 뜻이거든요. 모르는게 왜 자꾸 아는 척을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네가 의로워? 네가 무엇이 근거해서 의로우냐? 무엇에 근거해서? 기껏 그런거 안다고? 출제 중에서 46개 안다고? 네가 안다고 될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정말 아시는 분은 유일하게 악마로부터 이긴 분 벗어난 분이 모든걸 아시는 분이에요. 딱 한 분 이 세상에 딱 한 분 있어요. 주의 이름 오직 그리스도만이 악마로부터 벗어난 분입니다. 딱 한 분.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마지막 한 분이었다 그걸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한 분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은 전부다 실패했다는 거에요. 문제는 인간이 자기가 실패자라는 것을 인정을 안 한다는 그 고집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직업을 어릴 때부터 쭉 보고 있으면 자기가 그 직업을 따라갈 확률이 많아져요. 엄마가 가수다. 그러면 아들이 별 공부도 재미도 없고 할 때는 어디 갈 확률이 많습니까? 가수될 확률이 많은거에요. 원래 가수 집안에 가수들이 많아요. 옥경이 불렀던 누굽니까? 태진아부터 해가지고 많잖아요.


립스틱 무지무지하게 짙게 바른다는 이름은 몰라도 돼요. 임주리, 그 아들도 전부다 많아요. 영화배우 아들이 영화하고. 그런데 그 애가 왜 그쪽을 하느냐 하면은 흉내를 내지요. 흉내를 내는데 문제는 아버지의 인기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거에요. 흉내는 내요. 후광을 입습니다만은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 그 사람하고 그 사람하고 아들이 그 사람이 아닌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합니다. 그런데 전부다 아들이래. 전부다. 왜 그걸 가르쳤습니까? 랍비가 가르쳤어요 랍비가. 아까 랍비 이야기 했지요?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면 선지자 끊어진 상태에서 빈 공백시간을 그냥 맹숭맹숭 보낼 수 없잖아요.


그때는 선지자의 해석에 의해서 가장 진리에 가까운 해석들을 학문적으로 탐구해서 괜찮다 싶은 것은 다 끌어모아서 오실 메시아와 끊어진 선지자 사이를 그 다리를 이어줘서 이 시대에 있는 우리들도 이거 믿고 천국백성 되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랍비죠. 랍비는 유대의 그 탈무드 보면 랍비는 어느 정도 레벨이냐 하면 부모보다 더 높아요. 왜 이유가 뭐냐?


부모는 나를 천국에 못 보내게 하지만 랍비는 나를 천국에 보내게 하는 거에요. 그 정도로 높은 레벨이 랍비에요. 그래서 극존칭이라니까요. ‘영의 아버지’가 돼요 영의 아버지. 그래서 오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보고 뭡니까? 랍비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자기 딴에는 그 시대에서 성의를 다 표현하신거에요. 그런데 그들이 말한 그 해석, 그 해석으로 무장된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의 인식으로 무장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고 거부당했다는 이 말은 앞으로 네가 잘해라는 뜻은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앞으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 그런 뜻은 없어요. 선악체제와 다른 식으로 해석이 되어야 된다는 거에요. 해석을 할 때 성경말씀을 해석을 할 때 인간이 악마가 주는 선악 가지고는 해석이 이게 안된다 이게 해석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해석은 아까 첫째시간에 그 해석은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기존에 있는 내 몸에서 내 몸을 긍정할 때 나온 거에요. 내 몸을 나는 나쁜 것도 있지만 선한 것도 내 안에 있을 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거에요. 그걸 제가 주일 낮설교 때 그걸 가지고 보조발전기라고 했는데. 간 보다가 여차하면 딴걸 또 시도하는 거에요. 선택과 판단은 어디까지나 누구한테 있다? 나한테 있으니까 그게 랍비였어요. 랍비. 그게 바로 성령 오기 전에 제자들이 그런 식으로 간을 본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들의 해석 +예수님의 해석을 추가해서 결합이 됩니까? 안 됩니까? 결합이 안 되지요. 몸과 몸이 결합이 안 되는 거에요. 옷을 만졌는데 12년 동안 즉시로 나았다는 말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마무리 지을 상태에서 주어진 믿음을 몇십년 혈루병 여인이 그걸 주님의 뜻에 의해서 잠시 보인거에요.


그러면 12년동안 혈루병 걸렸다는 말은 여자가 얼추 괜찮다는 몸입니까? 망가져도 아주 된통 망가진거에요. 엄청나게 망가진거죠. 자기 힘으로 회복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죠. 그럼 우리 몸에다가 아예 몸에다가 매직으로 써야 돼요. 불가능한 몸. 불가능한 몸. 어디에 불가능한? 천국가기에 불가능한 몸. 구원 받기에 불가능한 몸. 해석하기에 불가능한 몸이 돼야 돼요. 이건 자기 악마성을 노골적으로 그냥 보여준거에요.


내가 내 힘으로 악마의 힘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는 이런 가련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라고 이걸 보여주는데 누구한테 보여주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 앞에서 그걸 보여줘야 된다는 거에요. 남들 앞에서 같은 인간끼리 보여줘봐야 그것도 자랑이고 주님 앞에서 보여줘야 되는데 아직 그 몸을 보일 때가 안 된거에요. “만지지 말라.”


왜냐하면 지금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 일이 마무리 되지를 않는거에요. 그러면 주님의 일이 마무리 된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어떻게 무슨 요소가 추가될 때 마무리 된다고 했습니까? 어떤 요소가 될 때?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이게 마무리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돼요. 그런데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먼저 여러분들께 질문을 한번 던져 볼께요. 질문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사회 구성원입니까? 아니면 인간입니까? 여러분들이 사회 구성원 입니까? 인간입니까? 이게 말 안 되는 질문이 아니라 말 되는 질문이에요. 직장 가게 되면 여러분 사회 구성원이죠. 그리고 가정도 사회구성원이에요. 가정이라는게 혼자 있는게 아니고 식구들 있으니까.


가정이 중요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더 중요합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어떤 연극이 있는데 여자가 50에 바다를 보았다라는 그런 연극이 있어요. 나이 50때 까지 외부에 주변에서 가정주부에게 요구하는 것을 열심히 다 준수해서 지켰어요. 그래서 흔히 가정주부는 이러해야 된다는게 뭐냐 하면 남편이 따박따박 월급주면 그거 가지고 살림 알뜰하게 살아서 자식한테 교육 잘 시키고 자식들 다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면 그게 주부로서 최고 주부다. 주부 자기일 다 했다라고 전통적으로 사회에서 그걸 요구하지요.


그러면 가정주부지만 뭡니까 사회 구성원이 되는거에요. 왜냐하면 사회 눈치를 봐야 되니까. 그런데 그 연극의 주제가 뭐냐 하면 그렇게 아들 장가 취직 보냈어요. 그런데 자기 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골병들어 망가졌어요. 그럼 나는 뭐냐? 나는. 나는 뭐냐? 지금껏 나는 누구의 엄마였고 누구의 아내였고 누구가 지켜본 주부였지 누구 빼버리고 내가 질문하는 나는 누구냐? 내가 질문하는 나는 누구냐? 도대체 나는 그동안 나를 위해서 살아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는거에요.


자기 성찰, 자기 질문을 해보는 겁니다. 여성해방 연극이죠 여성해방. 여성해방 운동. 너를 잃고 남 좋은들 약간의 환갑됐다고 유럽여행 보내주고 그런거 있지만 그것조차도 여행가는 것 조차도 이제는 어머니 이제 효도 받으소서. 아니 효도 받는 것도 거절할 자격도 없어요. 효도 여행가고 크루즈 여행가는거야 뭐 시키는 대로 해주면 수고했다 이러면 되는데 나중에 자기가 몸이 아파 죽고 싶은데 호수 이거 뽑고 싶은데 강제로 효도시험대상이 되어 가지고 안락사 되지도 못하고 이거는 자식들 우사 안 시키기 위해서 끝까지 자식을 위해서 충성한다고 자기는 암이 주는 고통 암세포가 주는 고통을 다 감내해야 돼요.


이 무슨 평생을 살아도 내 인생은 10초도 안돼요. 10초도 안 되는 거에요 도대체. 왜 살았어요? 누구를 위해서 종은 울리나라는 것처럼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했는데. 젊을 때는 왜 이런 질문조차 허락이 안 되느냐 하는 그 이야기죠. 사회구성원인가 인간이냐 할 때에 사회구성원 맞습니다. 하지만 잠복되어 있는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인간이고자 하는 그 생각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습니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뭐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너희들은 내 아버지를 모른다. 제자들아 세상 사람들아 너희는 내 아버지를 모른다.” 내 아버지를 모른다는 말은 너 자신부터 해가지고 나에서부터 세상에 대해서 네 안에 누가 있는지도 괴물이 있는지도 악마가 있는지도 전혀 너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거에요.


그래서 주께서 일을 하려면 조건이 먼저 바탕을 깔아놔야 돼요. 택지조성하는 것처럼 깔아놔야 돼요. 너는 아무것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게 항상 이런 결과가 도출돼야 돼요. 쉽게 가겠습니다. ‘나는 너를 건졌으니까 옛 너는 없어졌다’가 아니라 그거는 구원론이에요. 그건 구원론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고 ‘너는 이런 인간이었어’가 생생하게 본격화돼야 돼요.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나는 악마한테 농락당한거 외에는 할 줄 아는 재주가 없다. 마귀한테 농락당해서 나는 신도 아닌게 신인 양 행세한 거 그게 외에는 다른 기술이 없다라는 것을 즐겨 ‘꺄르륵’ 거리면서 그걸 즐겨 그 대목을 우리가 기쁘게 감사한 마음으로 이제 눈을 뜬 상태에서 내가 이 정도였어 눈뜬 상태에서 그걸 가볍게 그걸 받아들이면 되는 거에요 그게.


구원받았으니까 과거는 잊자 이렇게 나오면 안돼요. 그거는 자기 챙길 것 챙기겠다는 노림수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 몸을 무슨 몸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 몸을 주의 몸이라고 해요. 그 몸을. 자, 그러면 여기서 약간 난해합니다. 지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만날 때는 아까 제가 그 공식을 한번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모르니까 예수님 잡힐 때 도망치고 내빼고 한거에요. 부활도 안 믿고 시체 찾으러 온거에요. 아무도 몰랐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아직도 몸이라는 것을 안 받아들여요. 왜냐하면 옛날 살던 행세가 뭐냐 하면 몸은 실체이기 때문에 물리적 조건 있잖아요. 몸이라는 물리적 조건, 키 얼마고 몸무게 그 범주 내에 안에서만 이게 몸이 돼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은 에베소서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은 확장이 되거든요. 물리적 조건을 넘어서서 이게 확산이 된다고요. 그걸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성령에 의해서 확대가 돼요. 확산이 된다고요. 아 어렵지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설명하는 것도 참 설명하기도 참 어려워요.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의 허리도 인내가 다 되고 엉치뼈도 인내가 다 된지 알겠지만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21절부터 보면 20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되어 있지요.


여기 모든 나온 단어가 뭐냐 하면 물리적 개념이고 벽돌 개념이고 부동산 개념이고 건물 개념이에요. 단어가.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물리적 개념가지고 아무리 짜맞추려고 해도 그게 어디 있는데요? 그게 어디 있습니까? 라는 질문밖에 없어요. 하나의 예를 들께요. 여러분 십자가 마을이 교회가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실체. 마치 벽돌같은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십자가 마을. 교회. 십자가 마을 교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실체가 없잖아요. 그냥 온라인 상태의 그저 모임이잖아요 모임. 그런데 실제로 있어요. 안산에 가면. 십자가 마을 있어요. 나라장로교회라고. 내가 그 교회에서 안산에서 한 몇 년간 제가 강의했지요. 그 교회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마을이 그곳에 가면 되네. 그럼 그게 전부에요? 아니지요. 우리의 몸을 가지고 구원을 받고자 하니까 우리는 뭐냐 하면 내 몸의 실재성 그게 내 몸을 그렇게 해석하는 그것을 포기를 안 하고 내가 내 몸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런 주님 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우리가 지울 길이 없지요.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의 몸을 자기 몸하고 똑같이 본거에요. 주의 몸을. 내 몸 내가 관리하듯이 여기에 주의 몸 있으니까 내가 손으로 같은 몸이니까 같은 근육 단백질로 되어 있으니까 만지면 만질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내가 사랑한 사랑 가지고 다가서게 되면 그 사랑에 주님이 응답하고 같이 하나가 될 줄 알았던 거에요. 다가서는 사랑은 안돼요.


왜냐하면 그 사랑의 의미가 내 몸 챙기겠다는 그 의도를 담뿍 안고 가거든요. 위반의 요소가 계속 유지된 상태로 가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 쪽에서 십자가 진 이유가 뭐냐 하면 만지지 말라고 십자가 진거에요. 왜냐하면 너는 시체거든요. 주님이 우리 몸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선점해서 죽으신 분이에요. 죽게 되면 죽은 자를 뭐라고 합니까? 시신이죠.


시신을 만져버리면 뭐가 됩니까? 레위기에 보면 부정 타지요. 레위기 22장 8절. 이러다가 또 천식 안 걸리나 몰라. “시체나 찢겨 죽은 짐승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죽음의 인간의 몸에다가 율법입니다. 레위기 22장. 인간의 율법에다가 주께서 언약을 포함시켰으면 살아있는 몸이에요. 안에 언약이 들어 있으니까. 언약이 살아있는 몸인데 언약이 살아있는 언약의 취지가 언약의 어떤 취지냐 하면은 내가 언약에 함께 했으면 이게 죽음의 세계와 나는 결별이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죽음과 접촉하지 말라.


접촉하게 되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이 ‘분리’를 의미하잖아요. 분리됨이 희석되어져 버려 의미가. 언약 때문에 따로따로인데 언약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언약없는 것과 접속을 하고 관계를 한다는 것은 이것은 언약 자체에 대한 모독으로 보겠다라는 것이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성경 구절 고린도후서에 나오는데 여러분 들으면 아 그 이야기하고 대번에 아실 거에요.


고린도후서 6장 읽어보게 되면 6장 14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되어있지요? 또 몸의 확대잖아요 ‘몸의 확대’.


이게 어렵다 이 말입니다. 보통 어려운게 아니에요. 십자가 마을 안산에 있잖아 이러면 해석이 안돼요. 안산에 십자가 마을 교회 있다는 말은 지금 우리의 그 사고방식 해석 자체가 문제가 있는거에요. 교회는 두 개가 정답이에요. 교회는 없다도 정답이고 있다도 정답이에요. 없다도 정답이고 있다도 정답입니다.


루터가 고민한게 그거에요. 마틴 루터가 고민한게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은 의인이다. 둘다 정답인데 이거를 본인이 그걸 설명할 길이 없네. 설명을 못했어요. 할 수가 없어요. 알려드릴까요? 알고 싶어요? 그거 설명 어떻게 하는지? 내가 죽으면 교회가 있고 내가 살아있으면 교회가 없어요. 내가 죽으면 의인이 되고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 여기에 목숨 건다. 목숨 걸어요.


그리스도 안에 십자가 죽으면 우리 의인이지만 산 채로 십자가를 보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은 나의 의가 아니고 나의 악마적 의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나를 계속 살려고 하는 살고자 하는 그러한 악마적 욕구를 증강하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네가 아는 몸이 아니다 라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는 알 리가 없지요. 그냥 스톱! 스톱시켜라. 스톱시키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야 돼요. 올라가셔야 돼요.


올라가지 않으면 예수님한테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왜 권한이 없느냐 하면 율법의 완성이 시편 110편에 이루어져야 되거든요. 시편 110편에 뭐냐 하면 원수를 깔끔하게 게임오버 처리했다는 처리했을 때에서는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되는데 그 결과가 무슨 결과냐 하면 하나님 우편에 앉는 결과예요.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는 제가 어느 낮설교 때 잠깐 언급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이거 설명하면 설교 시간 다 지나가기 때문에 잠깐 언급했어요. 하나님 우편의 자리는 존재의 자리가 아니고 기능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세요. 존재가 아니고 기능의 자리에요. 주님 어디계시냐고 물을 자리가 아니고 주께서 거기서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을 자리라고 어떤 일을 하십니까.


왜 존재를 물어서는 안되느냐 하면 우리 주님의 기능에 우리가 도달하게 되면 우리의 존재가 존재라고 할 자격이 없는 죽은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놈이 입 다물어 이 말입니다. 그 입 다물라 하잖아요 그 입 다물라.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지 왜 말이 많아? 그게 광야의 생활입니다. 떡 달라 뭐 떡이 먹고 싶어요. 고기 먹고 싶어요. 그 입 다물라. 메추라기 주면 고기인줄 알고 만나 주면 떡인 줄 알고. 어디서 짜장면 시키신 분 그걸 왜 찾아요. 짜장면을 왜 찾고 짜파게티를 왜 찾습니까? 짬뽕을 왜 찾아요.


내 몸이 좋아하는걸 왜 찾습니까? 기도할 때 내 몸이 좋아하는걸 왜 찾아요. 이번 주일학교 녹취 올린거 강원도 목사님 어디 놀러갔는가 녹취 안 올라왔는데 주일학교 것까지 녹취하려니 얼마나 부담되는지 모르겠어요. 주일학교 설교내용이 뭐냐 하면 이방인 기도는 내가 아쉬울 때 결핍될 때 내가 요구하는 거고 주기도문은 뭐냐 하면 아버지 입장에서 ‘너희들은 이쪽 길로 가야 돼’ 주님의 길로 가야 될 내용이 주기도문 내용이에요.


주기도문 내용을 한다는 것은 주께서 나에게 주의 길을 가도록 주께서 매일같이 조치하십니다를 고백하는거에요. 그 주기도문에. 그 안에 뭐가 나옵니까? 일용할 양식 있잖아요. 하루살이 밖에 안 된다는거에요. 이틀치는 욕심이라는 겁니다. 내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모자라고 그거는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다 이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맨날 뭐합니까? 주세요 주세요.


네가 율법을 다 알아? 네가 출제문제 다 알아? 하나님이 의를 어떻게 쟁취하고 악마의 굴레에서 어떤 수로 빠져야 빠져나오는지 네가 그 길을 아냐 이 말입니다. 욥도 몰랐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모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몇 개 안다 하지 마세요. 몇 개 모르는 것은 전혀 모르는거에요. 99점이 안 통합니다 그게. 하늘나라. 완전한 100점이 아니면 거룩하지 않아요. 어설프게 성화는 없어요 거기에.


완전한 거룩인데 거룩은 얻어지는 것이지 쟁취하는게 아닙니다. 히브리서 10장 나오지요. 거룩함을 어떻게 합니까? 얻었노라. 그걸 제가 낮에 선물이라고 했어요 선물. ‘꺄르륵’하는 선물. 선물로 받는거에요 선물로. 저한테 이런 선물을. 주니까 받아라 너는. 저한테 이런 선물 하지마세요.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남 앞에서 면전에서 미안하다는 소리하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당신 음주운전해가지고 저 집안 거덜났잖아요. 미안하다 해. 나는 벌은 받겠지만 사과할 의사는 없다. 그게 인간이라니까요. 그게 위반의 요소인데 그 음주운전한 그 사람만 그럴까요? 아니면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남한테 사과한다는 것 그게 주기도문에 나오거든요. 사과한다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해요. 그 대목에만 미안하다는 것은 사과 아닙니다. 그 대목에만 미안하다는 것은 사과 아니에요.


아버지의 연금을 다 뜯어먹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그건 사과 아니에요. 사과는 이렇게 하는 거에요. 아버지 저 죄인이에요. 아버지 앞에 아니라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죄인인데 내가 딱 보니까 아버지도 만만치 않네요. 이게 바로 진정한 아버지를 향한 사과입니다. 다 갚았어요. 말 한마디에. 말 한마디에 돈 날린거 다 갚았다니까요. 참 쉽죠 잉? ‘ㅇ’ 붙어요. ‘ㅇ’ 붙습니다 ‘ㅇ’ 떼면 안돼요. 주님한테 애교 부릴 수밖에 없어요. 뿌잉뿌잉 할 수밖에 없어요. ‘ㅇ’ 들어 갑니다. 주님 앞에 사과를 한다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돼요.


그 기능이 뭐냐 하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여기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런 사과가 아주 웃음, 감사로 나오는 거에요. 오늘 본문 봅시다. 오늘 본문 20장에 보게 되면 아버지께로 가는데 그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로 끝났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게 나의 아버지 끝이에요 아니에요? 너의 아버지죠.


다시 말해서 에베소서 2장 7절인가? 하늘에 앉혔잖아요. 우리는 뭐 예수님 잘나서 예수님 혼자 앉았는지 알았지요? 아니지요. 너희들도 같이 하늘에 앉아있다는 말은 그거 안 믿으면 그거 예수 안 믿는 겁니다. 예수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세요. 지금까지 예수 버리세요. 예수님 계시는 하나님 우편에 누구도 함께 있다? 예수님만 달랑 계시는게 아니라 누구도 함께 있다? 나의 아버지 곧 누구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


우리 성도들도 함께 앉아있는 거에요. 성도도. 그럼 내 존재가 앉아있습니까? 하는데 그 우편은 존재를 말하는게 아니고 기능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럼 우리 존재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죽어가고 있지요. 우리 존재는 죽어가고 있잖아요. 이리 보아도 죽어가고 저리 보아도 죽어가는 거에요. 그러나 죽어가는 모습인데 주님 보시기에는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이에요.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뒷태를 보자. 아장아장 걷는거 모든게 행동이 똑바로가 아니라 모든게 사랑이 덧입혀지니까 이리 걸어도 저리 걸어도 전부다 사랑 사랑 사랑 전부다 사랑이에요. 찬송가 들어가야 돼 춘향가 사랑가가. 찬송가 415장 들어가야 돼. 전부다 사랑이에요. 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사랑이래. 그냥 사랑이래. 나도 몰라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준답니다. 김사랑 최사랑 박사랑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준대요. 기뻐하심을 입었대. 우리는 무슨 영문도 몰라 왜 그런지.


참 이거 황당하다 할까요. 남자를 몰라요. 아직 남자와 동침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배가 불러옵니다. 이거는 황당 곱하기 황당 제곱이에요.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의리가 있어가지고 입 다물고 그냥 조용히 결별선언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이런 일은 없기 때문에. 여자가 처녀가 임신했다고 하는 것은 누구야? 어떤 남자야? 뭐 이렇게 나올건데 그 말하지 않아요. 굉장히 신사다워요. 신사다우면 천당갑니까? 신사다운 지옥가지요. 신사다운데 지옥가요.


천사가 찾아오지요. 그리고 천사가 마리아한테 이야기 합니다. 일방적이다.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 네가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가의 다락방같이 여기 좁지만 어떤 사람이 이 난처한 지경을 보고 쫓겨난 난민들 마치 그 저 시리아에서 이태리 바닷가에 몰래 숨어들어가는 그런 난파선 배 밑에 앉아있는 처지를 보고 몇 푼 15억도 안되지만 이거 해가지고 강남에 가게 얻어라 할 때에 우리가 기뻐해야 됩니까? 황당해야 됩니까? 예가 너무 터무니 없나. 황당해야 됩니까?


주여 우리를 죽이시지 않으시고 왜 이렇게 우리를 살려주십니까? 정말 이렇게 또 고생시킬겁니까 미세먼지 속에서. 이렇게 나올까요? 아니면 할렐루야 나올거에요. 그 자체가 황당해야돼요. 왜 내가 예측도 못하고 왜 내가 예상도 못한 일을 왜 하십니까? 예측 못하고 예상 못한 것을 세자로 ‘선지자’에요. 그게 선지자에요. 자기 뜻이 안돼요. 마지막 때에 그렇게 선지자가 폭발적으로 많을 줄 유대인 사회는 상상도 못했을거에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풍선에다가 바람 넣어놓고 입구를 꼭꼭 싸맸지요. 고무줄을 확 풀어버렸어요. 샴페인 터트리듯이 뚜껑을 막 흔들어 해놓고 억지로 참고 있다가 뚜껑을 딱 열면 폭발하지요. 기능이 우리 성도 후진 우리 몸과 우리의 사고방식과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를 통해서 성령이 그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폭발하듯이 터져나와버려요.


그걸 제가 오후설교때 하교길에 애들 교문 앞에 나올 때 초등학교 애들 한꺼번에 터져나오듯이 물론 학원 차들이 쫙 대 있지만 태권도 이런거 있지만 터져 확 쏟아지듯이 이 복음이야기를 누가 막습니까. 누가 했어요? 누구라는 존재를 이야기할 때는 꼭 주님 이름이 나가요. 우리는 우리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다? 주의 몸이에요. 주님에게 합세된 통합이 이미 성사된 몸이에요. 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몸이 아파도 천식 걸려도 어쨌든간에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대학 병원 가든지 말든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니까요. 주께서 그렇게 기능적으로 쓰시는 거에요. 어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편에서 ‘꺄르륵’ 거리면서. 네가 그거해도 구원받네? 그런 질문 잘못된 질문이에요. 구원을 받고자함이 아닙니다. 구원파 구원론 그거 다 잘못된거에요. 구원파만 구원론 잘못되었습니까? 한국교회 전체 다 잘못되었어요. 13만명 다 잘못되었어요. 전부다 구원론이에요 전부다. 왜? 고객이 원하니까.


옛날 절에 가서 아이고 우리 가정 올해 그냥 행복하고 사업 잘 되고 아이 건강하고 공부 잘 하겠습니까. 그럼 부채도사가 한번 보자 아이고 이렇게 넘어지는구나. 부채도사 개그가 이게 언제적 개그인지 모르겠습니다. 보자~~ 이렇게 하듯이 내가 나중에 천당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 보자~~~믿음은 성령으로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이렇게 나오네. 점괘가. 점괘가. 광주에 차가 쌩쌩 받아버리는 것도 모르고 그냥 멀쩡한 몸 가지고 믿으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게 내 소유 믿음 소유하고 천당 소유하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몸 자체가 박살나야 되는데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뭐라고 가르치는 줄 알아요? 랍비들이. 구원은 믿음으로 복은 행함으로.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서기관들이고. 인간 아이디어 같이 악마입은 동기생끼리 그 아이디어가 그 아이디어에요. 모든 종교적 아이디어는 전부다 그런겁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기도와 행함으로 찬송 돌린다. 하나님의 의의 일꾼 13만명의 목사들 지금도 외치고 있어요. 그 마귀 복음을 외치고 있어요. 존재를 따지고 오면 안돼요. 존재는 반드시 교회를 이용하게 됩니다. 내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인줄을 알아야 돼요. 지금까지 내가. 왜 은혜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모르냐 하면 내가 꼭 천국 가야 돼 못가야 돼? 그것도 관심이 없어.


정말 남들처럼 그렇게 사회 구성원으로 살면 되지. 그게 내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다움이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구성원입니까? 인간입니까? 실컷 성경공부 하다가 갑자기 제가 질문이 뭡니까? 사회 구성원입니까? 인간입니까? 제가 물었잖아요. 성경 안의 이야기 하다가 성경 바깥의 이야기하니까 여러분 전혀 낯설지 않지요? 굉장히 친숙하지요? 그걸 가지고 뭐냐? 그걸 가지고 ‘친숙한 이방인’이라고 해요. 우리 자아를.


자아는 친숙한 이방인이에요. 성경적으로 보면. 이게 남인데. 그것도 내놓은 자식이거든요.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이 뭐냐 하면 거들떠보지 말라는 뜻이에요. 자꾸 내 것이라고 자꾸 회수하지 마세요. 집에 동네에 있는 치매 걸린 할머니가 동네에 있는 빈 병 해가지고 매직가지고 이 병은 내 것 쓰면 그거 완전 치매현상 아닙니까. 그렇지요?


버려도 우리는 이미 소유주가 누굽니까? 내 소유가 아니고 낯선 이방인 소유가 아니고 친숙한 이방인 소유가 아니고 누구 겁니까? 주님의 것이잖아요.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의 것에 주의 말씀대로 채울까요? 아니지요. 주님의 것이라는 자체가 주님의 기능이 있으니까 사나 죽으나 앞으로 내일 어떻게 될지는 그거는 내일 미세먼지 있고 없고 그거는 기상대의 역할이 아니고 주께서 얼마나 미세먼지를 많이 깔아놓느냐 그 역할이에요.


내일 노후 화물차 다 탔다 이제. 미세먼지 체감법을 가동시킨다고 하니까 체감하는 법을 가동시킨다고 하니까.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데 나라는 존재는 편입되어 있어요. 그런 몸이 있잖아요. 그리스도의 몸이죠. 몸인데 저 몸하고는 다릅니까? 몸에 실체가 확대됐다니까요. 이게 집단적 의식인데 아까 예를 든게 있어요.


십자가 마을이 교회가 몇 개입니까? 질문이 잘못된 거에요. 존재를 십자가 마을은 기능이기 때문에 존재를 물으면 안돼요. 이스라엘 전체가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이스라엘이 몇 개입니까 물으면 안 된다니까요. 교회는 하나에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에베소서 4장에 나오지요. 세상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라고 했지요. 하나되려고 애쓰면 안돼요. 그거는 네존재 내 존재가 억지로 끼워 맞추는 거에요. 그러면 흉내내는 것밖에 안돼요 흉내. 저 사람 선배 따라가면 그 선배하고 같이 되는거 아니잖아요.


이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개뿔도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고 그 모르는 상태로 계속 가야 돼요. 모르는 상태 또 다른 말로 하면 죄인 중에 괴수. 죄인보다 더 무서운 말이 아무것도 모르는 거에요. 죄인들 같으면 자기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지. 그러나 실제로 나중에 여러분들이 배고파보세요. 배고픈 것도 전부다 남 탓이고 나는 잘났는데 사위가 아파서 나 배 곪고 있다고 남 탓해요.


마지막에 믿는 것은 자기 존재뿐입니다. 자기의 의로움뿐이에요. 절박감이라고 하잖아요. 사회적 절박감. 자기 있는 보조 발전소. 세상 깜깜한데 자기는 밝다는 것. 이런 것 주장하잖아요. 십자가 뻘겋게 해놓고. 스마트 폰에 그림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 긍정은 이건 위반의 요소입니다. 그걸 없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기능적으로 사용하시는 거에요.


네가 하는 행세에 대해서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내가 밥을 먹을 때 감사하는 겁니다. 잘해서 밥 한끼 얻어 먹는게 아니고 그냥 이쁘다고 그냥 주시는 거에요. 이쁘다고. 왜 이쁜지는 모르겠어요. 그거는 주님 마음을 우리가 거기다 시비 걸 이유는 없잖아요. 예배처소 하라고 15억 줬는데 이제 와서 이거 가져가세요. 미쳤어요. 왜 가져가세요 그게 얼마나 좋은건데. 주신거 받으면 되는 거에요.


오늘 결론은 그겁니다. 주거든 뭐하라? 그냥 받으면 안돼요 넙죽. 이름 바꿔야 되겠다. 김넙죽 최넙죽 박넙죽 허넙죽. 우리는 평소에 넙죽 안 받아도 한평생 넙죽 받은 인생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거 밖에 없어요. 모든게 진작에 죽어야 되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되가지고 죽지도 않아. 내 몸 같으면 자살하면 되는데 이건 자살하는 것도 이게 지시가 와야하는데 주님이 자살하라는 지시를 내리겠어요?


치매 걸려서 아무거나 먹다보니까 죽은거 말고 의도적으로. 자살할 때는 뭐냐 하면 자기가 강렬해서 그래요. 주님 내가 평생을 주님 살라고 했는데 제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네요. 평생에 자기 사랑가지고 다가가는 사랑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주님 복음에 돌아섭니다. 십자가 마을에 한 트럭 넘을걸? 돌아선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죽읍시다” 거기까지 동의해요. 그러나 “예수 믿고 죽는 것도 죄다” 거기에 다 돌아섭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다 갔어요. “끝인가보오.” 그런 노래 있지요? 편지라는 노래.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끝인거에요.


오늘 정리하겠습니다. 만지지 말라 할 때에 경계선을 주목하셔야 됩니다. 경계선. 막달라 마리아가 만지지 말라고 해서 안 만졌으면 막달라 마리아는 지옥갑니다. 시키는 대로 해도 지옥가요.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네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천당 갈 나라가 아니다. 왜냐하면 악마를 이긴 최후의 승자는 오직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주님의 육체가 확대되지 아니했으면 우리는 주님만 천당 가고 우리는 아무도 못갑니다.


성령을 통해서 막 쏟아지는 거에요. 그 육체 안에는 이스라엘이 들어 있어요. 예수님이자 곧 이스라엘이에요. 요한복음 1장 마지막처럼 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야곱처럼. 예수님 자체가 이스라엘인데 다수를 의미합니다. 다수가 하나로 대표이름으로 움직이는게 이스라엘이거든요. 여러 가지 움직이지만 지체로 움직이고 우리는 문어발처럼 움직이고 그러나 그 몸통은 그리스도 몸 하나 밖에 없어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때 존재로서 그걸 파악하려고 하면 이건 우리의 한계를 넘어 섭니다. 기능적으로 하되 몸에 속했다 안 속했다 어떻게 속하지 아느냐. 나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왜? 10년 20년을 복음 전해도 지금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담아주지 아니하면 주께서 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 자아를 또 재편합니다. 이정도면 하면 괜찮은 자아상이잖아. 또 제3의 제5의 제 n의 자아상의 매일같이 형성하고 있을거에요.


주께서 어제 준 은혜 말고 오늘 준 은혜 가지고 바늘로 그 풍선을 팍 터뜨려 버려야죠. 어제 준 은혜 말고 일용할 양식이니까. 또 내일 되면 내일 또 주신 은혜가 있을 거에요. 그 은혜가 뭐냐 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처럼 날마다 챙겨주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내 구원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음을 누구 덕분에?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는 그것을 증거하라고 우리를 충실하게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18절 봅시다. 내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할 때에 이 이야기가 이게 예수님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의 이야기일까요? 이 이야기가 예수님만의 이야기가 되고 동시에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나의 이야기가 곧 누구의 이야기다? ‘너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제가 그 이스라엘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지금 그 이야기하면서도 감격스러워요.


예수님 죽으신 시체를 뉘었던 그 바위, 반질반질한 그 바위 사람들이 흑흑거리고 울고 대부분 사람들 그 앞에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 키스를 해요. 이 말은 십자가 우리 죄를 다 지시고 시신을 눕혔다는 그 모습을 볼 때에 이걸 빼놓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도대체 인생을 헛산 거에요. 그 현장에 갔던 저. 그동안 이 땅에 태어나서 1900 분명한 날짜를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물론 생일이 6월달이라는것도 제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뭘 볼라고 했습니까? 무엇이 종을 평안히 놓아줘서 쉬는 거에요? 시므온이. 아기예수 안았지요. 그것이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나를, 구원을 보고 기뻐하는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실 일에 뿅간 거 그게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증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방적으로 해대시던 그 일, 우리는 이제 받기만 했을 뿐입니다. 나는 이제 소유했다가 아니라 은혜 받으면 받을수록 내가 죄인이며 아무것도 할게 없음을 더욱더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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