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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00:09:28 조회 : 472         
자아정립의 세월 19041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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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75.♡.96.96) 19-04-27 16:00 
강남-요한복음 20장 28절(자아정립의 세월)190416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0장 28절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대목을 푸는데 있어서 도마가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우리가 책을 보면서 우리가 도마처럼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요? 그런 충동 또는 흉내내기 이 모든 것을 거부하는 그 모습이 29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도마의 고백을 놀랍게도 도마의 고백을 뭐라고 하느냐. ‘믿음 없음’으로 간주해버려요. 도마의 이 고백을. 도마처럼 고백하는 것을 흉내내도 소용없는 거에요. 도마가 고백을 할 때에 도마의 본 뜻은 모르고 도마처럼 이렇게 흉내내고 주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죠 사람들은.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믿음이 없음이 돼요. 놀랍게도.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보통으로 생각하면 누가 이렇게 바르게 정답을 내리면 칭찬이 따라오는게 정상이죠. 아이고 훌륭하구나 아이고 대단하다 하는데. 믿음이라는 것을 내가 추가적으로 제시하지 아니하면 이런 고백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이러한 도마의 고백을 주님께서 믿음이라고 규정을 지으려면 반드시 뭐를 거쳐야 되느냐하면 보고서 믿는 믿음을 경유하면서 그것이 부정당하면서 믿음에 도달되는 겁니다. 보고서 믿는 것. 그러면 우리는 안 보고 믿으면 될 거 아닙니까 하지만 안 보고 믿는 경우는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해당이 안돼요. 모든 인간은 믿음 없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도마로부터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에 이 믿음을 도마는 그냥 고백을 했을 뿐이죠. 고백을 했으면 너는 보고서 믿으니까 믿음 없다는 규정을 이렇게 따로이 제시했다면 제시하면서 예수님께 믿음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제시하면서 이렇게 한바퀴 도는 겁니다. 한바퀴 돌고 오거든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렇게 규정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도마가 어떤 고백을 했는데 예수님은 그걸 자기가 예수님 자신이 정의하는 믿음의 정의, 믿음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도마를 한껏 이용하신거에요. 나는 믿습니다 하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나는 믿습니다를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불신으로 보는 겁니다. 그럼 나는 안믿습니다 하는 것을 불신으로 보는거에요.


규정을, 믿음 규정을 네가 낼 자격이 없다는 거에요. 믿음 규정을. 도마를 통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철저히 일방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만 이렇게 정립을 하시려고 도마와 상대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의 소위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면 그럼 그것은 뭐냐?


인간이 내뱉은 모든 행동과 태도 그런 자세 그런 행함은 전부 다 자기정립이에요. 인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정립의 세월이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은 자기가 기억한 것 자기가  체험한 것 이 모든 것을 다 될 수 있는대로 버리지 않고 다 끌어모아서 무슨 결론을 내리느냐 하면 그래서 나는 이런 존재다라고 자기정립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아담에게 악마의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악마가 이런 짓을 하고 있거든요 악마가. 악마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대적하는 자거든요. 또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고 대적하는 자. 대적을 하려면 독자적인 세계가 필히 구축되는 것을 전제로 해야 돼요. 누가? 대적하려면.


남자애들 장난치면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 한판 붙을까? 이렇게 하지요? 이 주먹 쥔 이것은 자기만의 영역이에요. 저쪽도 그래 한판 붙자 하면 저쪽의 영역이죠. 각자의 고유의 영역이 따로 있는 거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리될거에요. 행동은 한판 붙을까? 이게 인간이 밥먹고 세수하고 잠자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긁어모아서 한번 붙어볼까?의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행위들입니다. 행위들.


이것보다 더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어요. 존재에 대해서 아주 쉬운 방법은 지난 모임에서 예를 들면 아주 쉽게 할 수 있는데 보람상조 직원의 청색 유니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아직 참석 안하셨는데. 남자의 그 정장이 청색이 된다는 것은 유니폼이거든요. 유니폼이 된다는 말은 내가 어디 가서 어떤 짓을 해도 내 존재는 보람상조다. 고정화시키는 겁니다. 왜냐? 유니폼이 청색 그 정장이 그걸 말해주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 나에 대한 신분정립이에요. 나는 이거다. 나의 정립은 뭐냐? 나는 뭐다. 나는 뭐뭐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모든 사건과 사실도 인간에게는 전부다 다 긁어모아서 최종적으로 뭐냐 하면 나는 보람상조다 라든지 나는 무엇이다에 다 모이게 되어 있어요. 거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기의 집약이 되고 움추려지는 것이지 자기 포기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눈에 보인다? 그 보이는 것은 내가 주님의 믿는 자 되게 한 자기정립의 일환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든 정보라든지 지식을 긁어모으는 것은.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예수님 앞에 이게 뭐냐 하면 ‘믿음 없음’이 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음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는 내편 아니라는 뜻이에요. 너는 나의 원수라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께서 무슨 개념을 만들어내고 무슨 말을 하실 때는 이것은 오늘 31절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되어 있지요?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뭐가 없다는 말이에요? 생명이 없다는 말이에요. 상당히 엄중하고 진지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건 만약인데 만약에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면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 나온 도마같은 사람이죠. 도마같은 사람에게 약점이란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약점. 생명을 얻었다면 도마에게 생명을 얻었다면 그 생명을 얻은 믿음이 있는 도마에게 남들이 도마의 너의 약점은 이런거야 라고 질책하거나 지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에요.


약점이 없으면 위협받거나 공격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걸 두자로 ‘자유’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자유. 그 누구로부터 비난받을 이유도 없는거에요. 왜? 챙길거 챙겼고 얻을거 다 얻었으니까요. 사람이 자유를 얻게 되게 되면 못할 짓이 없습니다. 주저할 일도 없고 못할 일도 없어요.


평소에 남편이 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구원을 얻었어요. 영생을 얻었어요. 생명을 얻었어요. 아내가 “여보 형광등 갈아줄래?” 못할거 없는거에요. 의자가지고 형광등 가는 거에요. 왜? 못할게 없기 때문에. 형광등 가는 것도 “너 이거 처음하지? 나보다 못하네” 라고 무슨 비난을 들어도 상관없어요.


더 중요한 것은 나의 행동과 나의 결과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내 행동과 나에게 도출된 나에게 주어진 결과가 전혀 무관한거에요. 어떤 생각 어떤 말 어떤 태도를 해도 생명을 얻었으면 이것은 자유고 특히 나로부터의 자유가 되야 돼요. 나로부터. 나한테 구애되지 않아야 돼요. 이러한 그 생명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


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필히 뭐냐 하면은 인간의 자아정립의 세계 불신의 세계를 거론하지요.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은 곧 자유가 주어지는 기쁨이거든요.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면 이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되어 있거든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생명으로 옮겼다면 생명을 얻었다면 이제는 남아있는 것은 신나는 빰빠라 빰빰만 남아있는거에요. 빰빠라 빰빰만 남아있든 빠라빠라 빠라밤만 남아있든 하여튼간에 어떤 것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영생을 얻지를 못하고 구원을 받지를 못하게 되면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람을 찾아요. 나 좀 위로해 달라고. 나 외로워서 못살겠다 이런 식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여전히 자기정립의 세월에서 발을 못 빼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믿음은 뭐와 같으냐? 보람상조의 유니폼과 같아서 그 옷을 입는 순간 빰빠라 빠빠빰이 뽀빠이는 아니지만 뭐 그거 입는 순간 더 이상 내 행동에 의해서도 어떤 것도 우리는 구애받을 필요없이 자유를 얻은 거에요.


그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너는 믿음이 없다 너는 믿음이 있다라는 통보 자체에 우리가 포함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주님의 규정 자체에 우리가 놓여져버리기 때문에 따로이 나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자체를 이제는 우리가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님이 생각한대로 이미 주님은 생각한 그대로 하는 순간 이미 그대로 되어버리는 거에요.


“빛이 있으라” 하는 그 순간 2.5초 뒤에 빛이 있는게 아니에요. 빛이 있으라 하는 순간 그게 시작과 동시에 이미 결말이 지어져 버리는 거에요. 네가 믿는다 네가 영생을 얻는다고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창조적 행위에요. 빛이 있으라나 네가 믿는다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 믿음에서 발을 못 뺍니다. 우리가 영생있다하는 순간부터 영생에서 못 벗어나요. 생명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개차반 같이 행동해도 그게 생명이고 그게 자유고 그게 주의 일이 돼요.


그래서 뒤에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을 해드리면 도마가 고백을 했다 했지요. 주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을 했을 때에 우리는 이 고백을 막 흉내내고 싶지요. 나도 그런 고백을 해서 그런 원인을 해서 주님 앞에 칭찬받고 너는 믿는 자다 이런 칭찬을 우리는 따라하고 싶지요.


주님의 이 고백은 불신앙입니다. 왜 불신앙이냐 하면은 보는데서 나왔기 때문에. 보는데서 나왔기 때문에 불신앙이에요. 그럼 안보고 믿는 것은 뭐냐? 안보고 믿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보고 믿는 것도 불신앙이고 안보고 믿는 것도 불신앙이에요. 망상이죠 망상. 상상한 것을 믿는 것. 이래도 저래도 불신앙인데. 뭐냐? 신앙은 뭐냐 하면 신앙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없고 신앙은 주님께서 신앙이라고 규정을 해주는, 해 줄 때 비로소 신앙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 = 신앙’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개념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이 신앙이고 예수님 자신이 믿음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믿음이에요. 이것을 성경에 실제로 이걸 적용시킨 대목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는 거니까 그냥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게 되면 바라던 것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믿음이라는 그 자체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그러니까 믿음을 뭐로 집어넣어야 되느냐 하면은 믿음을 예수님으로 바꿔넣으면 되요. 예수님이 바로 실상이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예수님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벨이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아벨 속에 예수님 계셨고 노아가 믿음이 있는게 아니고 노아라는 형태로 예수님이 일하신거에요.


아브라함이 믿는게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주님이 들어가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을 증거한거에요. 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까. 바라는 것은 허구거든요. 인간이 바라는 것은 다 허구에요. 인간에게서 나온 허구에요. 실상에 접근하고 실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건 뭐냐? 예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라게 한거에요.


그래서 도마라는 이 존재, 도마의 있음 이거는 파괴됩니다. 파괴되고 도마는 예수님이란 존재에 합류가 돼요. 예수님 안에 있는 신앙에 도마가 이용당하면서 합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신앙을 자기 자신이 실상이다 신앙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믿음 없는 도마를 한껏 이용하신 거에요. 이용하시고 뭐가 남느냐 하면 결국 그 근거만 남아요. 그 과정만 남아요. 어디서부터 어디로 왔느냐를 그 흔적을 딱 만들어내지요.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하게 되면 도마라는 존재, 이 존재와 예수님의 존재가 둘이 됐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그 일을 발생시켜서 존재는 완전히 깨지죠. 분해가 되지요. 존재는 소멸되고 여기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사건화돼요. 사건화. 사건화되면서 예수님의 존재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합류하게 되면 이 사건화가 뭐냐? 이 세상에서는 어떤 식이냐? 돌발성. 돌발적으로 일어나요. 돌발적이라는 것은 비연속적이에요 비연속적.


내가 내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면 그건 실패합니다. 세상에서는 보람상조 유니폼만 입으면 돼요. 오늘 보람상조 이야기 너무 많이 나온다. 청색 유니폼만 입으면 뭘 해도 보람상조가 되지만 우리 이 세상에는 걸칠 수 있는게 없어요. 어떻게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 붙잡으려면 내가 존재가 해체되는게 아니고 내가 존재로 유지해야 자아정립하는 그 평소의 버릇에 그대로 그게 계속 지속되거든요.


그럼 평소에 해서 자기 존재가 있으면 존재가 둘 되어버리면 아무리 예수 믿는다고 해도 이건 누굴 증거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의 위대함과 장함과 멋짐과 대견함을 증거하는 용도의 예수님이 되어버려요. 내 잘남을 빛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있어버리게 되고 평소의 나는 죽도록 나만 사랑하는데 주께서 나의 사랑에 편드는 것밖에 안돼요. 잘한다. 그래 너는 훌륭한 사람이다 이것밖에 안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게 성립이 안돼요. 자기를 부정하라. 나를 부정하라는 말이 이게 얼마나 말이 모순되는지 몰라요 이게. 나를 부정하라는게. 나를 부정하려면 결국은 그게 뭐가 없어져야 돼요? 나 자체가 없어져야 돼요. 나를 부정하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존재에서 또다시 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리면 그 사이에 전혀 부정이 안되어 있어요. 그 존재가 그 존재거든요. 이게 불교의 딜레마에요. 불교의 딜레마. 불교의 딜레마가 철학의 딜레마고 과학의 딜레마 오늘날 모든 인간들의 딜레마가 이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딜레마이기도 하고. 자기 낮추고 또 낮추고 또 낮추고 하는데 몇 번 낮췄습니까? 3번 낮췄어요. 4번 안됩니까? 4번 낮췄으니까 됐습니까? 7번 낮춰야지요. 7번 낮췄으면 됐지요? 7번의 7번 더 낮춰야되는데. 백날 낮춰봐야 지하실 또 있는데요. 결국 그렇게 낮춘 세월이 25년 이라면 그 25년의 세월은 무엇의 세월이라고 했습니까? 아까?


자기정립의 세월이죠. ‘나 잘났다’를 뽐내는 세월. 나 잘남을 부인하고 잊어버린 그것도 나 잘남의 하나의 요소로서 기억이 돼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나 그때 부정했다 하는 그것도 기억에 남는다니까. 그게 안 없어져요. 달아나질 않는다니까요. 노틀담의 곱추에 나오는 그 성당있지요? 성당 불났지요? 파리 시민들 울고 기도하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그 성당이 멀쩡할 때는 생각이 안나요. 불탈 때 생각난다고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잊었다 하지만 나와 유관한 관련된 뭔가 어떤 갑자기 동창생을 만날 때는 내가 잊어버렸던 그 때 그 시절에 교복입고 놀았던 그 시절이 한꺼번에 확 다가와요. 한꺼번에 확 다가온다고. 옛날에는 가수였지만 지금은 목사가 되어 있다. 015B에 어떤 사람이 있다. 불타는 청춘에 보면 목사된 친구 또 까불면서 춤추고 있다고요. 특별공연 하면서. 옛날 놀던 가닥 없어지지 않아요.


주님께서는 도마가 믿는 자로 보지를 않습니다. 믿는 자는 오직 믿는 자라고 할 사람은 예수님뿐이어야 돼요. 다른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믿는 자가 된다는 절차가 필요한 존재들 대상자에요. 절차가. 그렇다면 인간에 있어서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은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경유하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사건 그 다음에 사건 그 다음 사건 유발되기 때문에 이 사건을 하나로 통으로 이렇게 꿰뚫는 나의 존재를 따로 설정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용납을 하지를 않습니다.


나는 2년 전에 예수 믿었다. 지금은 예수 믿고 난 뒤에 지금은 내가 바르게 산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2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를 계속 이어져가요 이 존재를 계속 이어져가야 된다고요. 그러면 뭘 믿느냐 하면은 예수를 믿는게 아니고 내가 예수 믿었다는 나 자신을 또다시 그 존재를 보든지 안 보든지 그걸 보고 믿는 거에요. 다시 뇌 순환구조, 뇌폐쇄순환구조로 돌아가게 되요. 뺑뺑이. 내 안에서 뺑뺑 돌고있는 거에요.


예수님을 경유해버리면 나는 믿는 자가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신 자가 되어 버려요. 주께서 믿게 하신 자는 주님이 믿음의 실상이기 때문에 주님이 믿음의 실상인 것을 증거하는 그냥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바로 아벨이고 노아고 에녹이고 그런 사람이에요. 에녹 붙들고 당신 구세주하면 안돼요. 노아 붙들고 구세주하면 안돼요. 마찬가지로 믿을 것은 주님이지 노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습니까? 이거는 분명히 악마의 악마가 그동안 기독교를 가지고 장난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믿음을 훼손하기 위해서 방해하기 위해서 교회를 앞장세워가지고 그 짓하고 있었던거에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해가지고 자꾸 우리 존재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당신은 위로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이죠.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그분이 있는데 은사 또 도사들이 왜 그리 많은지 은사 몸이 아파서 있으니까 또 암을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우리한테 기도 받으셔야 되고 봉투 돌리고 헌금하시고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 주께서 당신의 죄가 어디서 죄 짓는가 기억하게해서 그걸 회개하게 되면 당신의 병을 주께서 일어나게 해주십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는데 초대교회가 어디 있어? 지금.


초대교회가 어디 있어요 지금 교회는 하나밖에 없지 무슨 초대교회가 따로 있어요? 그때는 그때고.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아요. 무슨 초대교회가 있어요? 왜 자꾸 뭔가 낭만을 자꾸 부추기는 겁니까? 그래서 저한테 이런거 고자질 하길래 그랬어요. 그 사람한테 가서 나는 저주받고 천벌 받겠다고. 좀 내버려둬 천벌 받게. 주님 주신 천벌이라면 나는 그것도 감사할 일이죠. 주님을 증거하는 용도이기 때문에.


아까 그랬잖아요. 도마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도마는 영생을 얻고난 뒤 뭐가 없다? 약점이 없어요. 약점이. 여러분이 수사 드라마나 스릴러 드라마 보세요. 꼭 누구 뭐 이렇게 형사가 바르게하려고 하면 형사 뒤에 또 약점 잡아가지고 “너 애 몸 아프잖아. 입원비 모자라지” 뭐 이래가지고 돈 주고 해가지고 비리 못 캐게 만들고. 그것도 안 되면 “너 지금 아이가 미국에 지금 유학 가있지? 걔가 지금 아마 일주일 뒤에 죽어서 나올걸” 해가지고 또 사진 조작하고 이렇게 하지요.


사람이 악마한테 잡힐 때는 꼭 약점이 있어요. 약점을 누가 쥐고 있어요? 본인이 쥐고 있는  거에요. 본인이. 왜 본인이 쥐고 있습니까? 악마한테 배운 가락이 뭡니까? 나는 근사한 자아가 되어야 된다는 자리정립의 세월을 보내게 되다 보니까 마귀가 바보입니까? 자기한테 배운 수법인데 그걸 모를 리가 있어요? 악마의 약점을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악마나 다른 인간한테는 겁 안내는데 누구한테 겁냅니까? 주님한테는 벌벌 떠는 거에요. 따라서 악마가 겁내는 자는 주님의 붙잡힌바 다시 말해서 존재로 다가서는게 아니고 주님의 존재를 알리는 돌발적인 사태로서 사건으로서의 나서게 되면 악마는 재미없다고 안놀아줘요. 약점이 있어야 뭐 협박 공갈을 할 수 있는데 “너 이러면 지옥간다” 그러면 “갈게 갈게” 이러고 끝나잖아요. “갈게 갈게”


왜냐하면 성도는 지옥가도 괜찮은 것이 성도라는 존재는 이미 십자가와 함께 지옥 갔다 다녀온 사람들이에요. 죄와 저주를 받고 온 사람들이에요. 나의 존재는 저주받고 심판받고 그 다음의 존재는 뭐냐? 그리스도의 존재에 합류한거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이에요. 전에는 어느 안? 아담 안이었어요. 아담 안에 있는 존재는 저주 받고 심판받고 미리 당겨서. 미리 당겨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은 겁니다.


영생에서 영자 빼면 뭐가 되지요? 생. 그냥 생까는거죠. 우리는 생으로 살아 그냥. 그냥 생으로 사는 거에요. 사람이 약점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 뭐가 보이냐 하면 모든 인간의 약점이 다 보이는 거에요. 마귀처럼 영안이 열려버렸어. 모든 사람이 살고자하는 자체가 약점이에요. 살고자하는 자체가. 전부 다 악마로부터 공갈 협박 받고있어요. 아무리 뭐 재벌이고 소용없어요. 유명인사고 뭐고 소용없어요. 전부 다 지금 당하고 악마한테 당하고있는 중입니다.


그들의 인간들의 악마에 속한 존재들의 소위 믿는 자 되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의 자기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맨날 하는 것이 전진. 전진 전진 삽으로 우물을 파는 것처럼. 전진하지요. 계속 그들은 전진하지요. 더 높은 단계. 용두산 계단 올라가듯이 더 높은 단계로 밟고 끝까지 가보자. 계속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는 더 높은 곳 더 전진 더 질적으로 변화 더 성화된 모습.


그러나 주님이 우리 성도를 인도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거에요. 빽 도. 빽 도 예요. 인간은 주님 보시기에 방향성 때문에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인간이란. ‘방향성’. 너는 어디서부터 어디로 가느냐? 네가 추구하는 방향과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 됨을 포기하고 영광을 포기하고 십자가 달리는 방향과 같은 방향을 견주어 보는 겁니다. 천벌 받아도 괜찮고 지옥 가도 괜찮고 나 지옥 갈래 이 방향이 십자가로 가는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이에요.


어차피 우리 존재는 심판받을 존재가 없거든요. 내가 산다는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은 살 이유가 없는데 살게 하신 것은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살렸다는 것을 현재 있게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은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아주 주님한테 된통 얻어터질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전에 우리 강의할 때 했지요.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도를 5장에 보면 누구든지 5장 10절에 보면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이거는 마치 천주교에서는 마치 사제들 건드리면 죄사함을 받는다. 그런데 그게 확대되었어요. 사제가 아니고 모든 성령 받은 사람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우리 대단하라고 가르치는게 아니고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시시하게 보는 우리를 건드렸는데 주님 자신이 시시하지 않은 분이에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고 그 기준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소자한테 하지 않는 것이 곧 네가 지옥 갈 자라는 것을 완전히 티를 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이 사건이라는 것이 결국 주께서 주신 사건화된 존재죠. 사건이라는 것은 벌써 심판을 개시했다는 뜻입니다.


‘사건화’. 이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믿음’. 믿음 사건이에요. 믿음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돌발성’이죠. 돌발성이란 말은 뭐냐 하면은 소유대상이 안돼요 믿음은. 소유대상이 되려면 믿음을 가져야 될 존재를 따로 설정해야 됩니다. 인간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건과 사건을 연결할 수 있는 그러한 몸이 제공받지 못합니다.


사건과 사건을 내 몸이 했다면 이것은 나를 증거하기 때문에 이것은 탈락이죠.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키고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몸이에요. 그럼 예수님의 몸이 어디 있는데? 키는 몇 센치냐? 체중은 얼마냐? 꿈에 봤는데 예수님이 허옇게 영감처럼 나왔다. 전부 다 구라고요. 그런건 믿지 마시고 예수님은 몸은 이것은 사건과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으로 등장하는 이것을 제가 주일 낮설교에서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전류 이야기해가지고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저항체라고 했지요 ‘저항체’. 눈에 보이는 탁탁 마주치는 저항체를 통해서 바깥에 보이지 않는 흐름의 역선 힘의 필드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겁니다. 그 수요일 설교하면 마태복음 28장 이야기했잖아요. 세상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땅 끝까지 내 제자를 삼고 하라. 정작 그러면서 본인은 안 보여요. 안 보인다는 말은 보이는 존재가 가짜고 보이는 존재는 그냥 가짜요 그냥 사건일 뿐이고 진짜 몸은 이런 사건을 유발시키는 진짜 몸은 말이 어렵습니까?


그럼 이런 행동을 하신 진짜 분은 안 보이시는 쪽으로 따로 계시는 거에요. 이게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인생은 뭐냐? 자기정립의 세월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자기 존재 자기정립이 있다는 그 자체가 성도의 눈에 또 악마의 눈에 주님의 눈에 그게 약점인거에요 그게.


아이고 참 영생도 없는 인간들이 자기 지키기 위해서 아주 몸부림 몸부림치고 있어요. 나를 무시하지마라고. 나를 무시하지마. 어릴 때부터 우리는 그걸 배웠어요. 어릴 때부터. 백설공주 그러하고 신데렐라 전부 다. 두 살 때 네 살 때 만화영화부터 전부 해가지고 전부 다 자기존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부 다. 안 그런게 어디 있어요?


뽀빠이 한번 보세요. 뽀빠이 보면 브루터스 짐승같이 생긴. 꼭 연약한 빼빼마른 야윈 영어로 thin 바짝 마른 이름은 올리브입니까? 올리브 또 목은 얼마나 긴지 목잡고 돌리고 목잡으면 하체가 흔들흔들 빨래가 바람에 날리듯 흔들려요. 꼭 약한거 하나 있는데. 이게 견디고 견디다가 “뽀빠이 도와줘요” 하잖아요. 뽀빠이 도와줘요 도와줘요 하면 이제 그냥 못 도와주고 시금치 먹고 하면 갑자기 근육질 돼서 이상용 나와서 한방 치고. 그런데 브루터스 인간 안돼요. 그 다음날 또 달려들지요.


존재와 존재의 싸움 이걸 가지고 우리가 성경에서 그 이긴 편 다윗, 우리를 다윗으로 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거는 아니에요. 이길 때만 다윗이지 그럼 쫓겨날 때도 다윗 할래요? 진짜 빌어먹고 미친 짓까지 한 그것도 한번 해 보실래요? 인생에서. 구태여 우리가 그러한 억지스러운 순교를 흉내내거나 연기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도는 사는 것 자체가 주의 앞의 고난에 참여한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어떤 널널하고 할 일없고 백수처럼 살더라도 그게 고난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선교사로 가서 고생고생해도 자기 존재에 대해서 어떤 미련을 갖고 있으면 그건 순교 아닙니다. 그거는 고난이 아니고 뭐냐 하면 고생이죠. 천하의 딱한 사람입니다. 살아서 고생하고 죽어서 지옥가고 이게 무슨. 참 가련하기 짝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네 맘대로 살아라” 왜? 결코 네 맘대로 살되 어느 한순간도 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네가 알기 때문에. 그 어느 순간도. 윤리 도덕이 왜 이단적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누구신가가 빠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누구신가? 윤리 도덕을 행할 때마다 사람은 항상 윤리 도덕의 주체자로서의 자기를 상장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잊어버리고 윤리 도덕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게 함으로써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실제 이익은? 내가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참고 견디면 주께서는 어느 정도 보상해줄겁니까? 주여.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기도 열심히 하면 독해. 그 형상 꼭 마귀같애. 악바리 같이 달려들어. 꼭 세월호 유족같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어요. 전 국민을 상대로.


그동안 살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주님께 감사했습니까? 아니거든요. 본전 내놓으라는 거에요 본전. 아이 키우는데 3억 들었는데 3억 내놓으라. 고등학교까지 키워놨는데. 거기에 온 국민이 편승한다는 자체가 이 세상은 곧 지옥인 것을 증명한거에요. 인간은 물에 빠진 적이 없어요. 이미 빠졌기 때문에. 이미 지옥에 푹 빠졌어요. 물에 빠진거 하고 지옥 빠진거하고 지옥 빠진거 물에 빠진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옥 빠진게 더 심각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악마는 인간의 약점을 알기 때문에 너 애 물에 빠졌다고 깜놀 깜짝 놀라게 만들어요. 정작 자기가 지옥에 빠져있다는 것 그것도 헤어나지 못하는 것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심각한 것을 대체안으로 대체해놓고 성경말씀을 자꾸 주의 살아있음을 훼방질하려고 해요 훼방질. 교회 나오는 교회 목사부터 노란리본 있잖아요 이거. 노란리본이 꼭 그거 같애. 목매어 자살한 사람 같애.


이런거 달고 와가지고 뭐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듯이 주께서 하신 그 고난을 보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감사하게 살아가는지 깨달읍시다 이 짓하고 있는 거에요. 이거는 뭐냐? 보이는 거잖아요 이게. 이게 보이는거란 말이죠. 보여서 뭘 정립하느냐? 나는 이것을 애통해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나는 뭐가 된다? 나는 무엇무엇이다. 역시 뭐로 끝나요? 자기정립으로 끝나는 겁니다. 나 잘났다 이 말입니다.


결국은 이 세상의 교회든 절이든 이 세상 뜻이 하나가 되어서 외치는 것이 하나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결국은 믿는 자 없다는 것을 외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그 점에 동의해야 됩니다. 맞아요. 믿는 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 속한 자는 자기 자력으로 아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굴레에서 벗어날거 같으면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왜 도마에게 창자국 왜 보여줬겠습니까? 네가 알아서 노력하면 천당간다고 일곱번에 일흔번씩 용서하게 되면 베드로 네가 천당 간다고 왜 그런 윤리 도덕적인 이야기를 그걸로 왜 끝나지 않고 왜 그런 이야기하시면서 왜 자기의 창자국 못자국을 왜 보여줬습니까? 시작은 너부터 시작하는게 아니라는 거죠. 시작은 누구부터?


진짜 원천 마지막 시작점 중심점 구심점은 이 세상에 오직 믿음이라는 것도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이 믿음이라고 할 경우에만 믿음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전의 인간은 뭐냐? 믿음 없음이 되야 돼요. 어떤 고백을 하든 믿음 없음이 되야 돼요. 베드로가 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해도 결국 베드로 얼마 안 가서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 듣지요.


사람은 뭐 고백을 하고 칭찬을 받으면 다시 어디를 붙잡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붙잡고 있어요. ‘야~~내가 이정도로 대단하구나.’ 자기 자신에게 종속되어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연속성을 지탱할 수 있는 어떠한 원리도 어떠한 능력도 없어요. 왜냐하면 매 순간순간마다 주께서는 사건화시켜서 회 치듯이 잘라버려요.


밤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라. 날이 있다는 말은 Day by Day 날마다 날마다. 날이 있다는 말은 Week by Week 주마다 있다는 말은 이게 마디가 있다는 거에요. 이게 창조의 원리에요. 창세기 1장에 마디를 왜 줬습니까? 불연속성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다음에 살리지 않으면 오늘 너는 오늘 밤으로서 인생 끝이다라는 거에요.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는 거에요.


이걸 날, 달이라고 하지 말고 초단위로 나눠 봅시다. 우리는 매순간 나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할 권한도 없고 그러한 자격도 없고 그러한 이유도 없는 자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계속 칸막이를 지음으로서 그 칸막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믿음, 칸막이 자체에서 주께서 사건화시켰죠. 사건화시키면 사건화시키고 그 다음 사건 올 때까지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믿음 없는 자가 되어버려요 어느새.


왜? 다시 내 중심으로 돌아섭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믿음의 주인공이 네가 아니고 예수님인 것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기에서 따로 끊어진 것을 이때 우리 믿음 좋아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끊어져야 될 것을 주께서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이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 부정적인 것이 누구한테 오게 되느냐 하면은 나라는 존재가 다 떠맡게 돼요. 나라는 존재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입장이 되고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그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 역할이 바로 구약에서 무슨 역할이냐 하면 바로 율법을 위반했을 때에 주어지는 처벌이 뭡니까? 율법을 위반했을 때 뭐가 오지요? 들어가도 뭐 받고? 들어가도 저주 받고 나가도 저주 받고.


이것이 바로 우리한테 해당된 사항이에요. 율법이라는 것이 저주도 있고 복도 있다는 두가지 양상을 우리 자신을 가지고 율법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을 증명해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에요. 우리는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놀아나는 겁니다. 말씀이.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잘났다가 아니라 “아! 말씀이 그대로 되어지네.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네.” 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마치 뜻밖인 것처럼 마치 예전에는 몰랐던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거에요.


이런게 어려운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로 가지 말라 나오지요. 넓은 길은 멸망하는 길이다. 이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다 알지요. 다 아는데 이게 뜻밖으로 새삼스럽게 새롭게 인식되는 경우는 이거는 사건이 터져야 되지 내 머릿속에 공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따라서 말씀을 좁은 길로 가거라 그게 영생의 길이다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 우리가 예측 못한 우리에게 일어나는데 그게 꼭 나를 부수고 나를 정죄하는 쪽으로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영생 줬더니만 본전 내놓으라는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살았지? 그게 바로 넓은 길이야 라고 딱 지적할 때 이미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영생에 속한 사람이에요. 거기에서 예상 못할 여분의 기쁨이 나오지요. 이거는 내 고민 갖고 끙끙 앓을 때는 예상 못할 기쁨인데.


“내 고민 해결하면 나는 기쁘겠습니다. 원수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라든지 날 쫓아내다니 발병 나던지 벼락맞아라. 내 속이 다 시원하겠다. 위청수 필요없어. 원수가 망하는거 보면 나는 속이 다 시원하겠어.” 우리가 예상하는거죠. 내 존재가 예상하는거죠.


그래서 인간은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서도 안되고 용서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라는 것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용서해서 우리 앞에 붙여주죠. 그럴 때 내 용서가 아니고 주님이 이미 용서했다는 거에요. 이미 용서한거에요. 여러분들이 대중가요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연희. 우연희가 불렀던 우연히. 나 벌써 용서했다고. 오랜만에 나이트 클럽에서 만났어요. 안아주었지. 그 남자는 또 찔찔찔 울고 있다고 나 벌써 용서했다고. 얼마나 은혜되던지. 네가 용서받지 못함가지고 얼마나 마귀한테 약점 잡혔는지 나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어? 이런 생각한다는 자체가 여전히 자기 존재 걱정하고 있다는거에요.


그러나 사건 터져버리니까 용서받았기 때문에 주의 일에 합류가 된거에요. 용서받은 채로. 다만 우리가 건망증이 심해가지고 또 내 행함에 의해서 어떤 용서가 되는 줄 알고 또 착각을 한거에요. 옛 버릇이 남아서. 그럴 때 이 모든 주체자가 내가 나한테 잘해서 내 조정과 내 절제 잘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주님의 자기 개념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홍민희(IP:175.♡.96.96) 19-04-27 16:00 
강남-요한복음 20장 28절(자아정립의 세월)190416b-이근호 목사



그리스도의 몸이 보이지 않을 때 왜 안보이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 몸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대립시켜야 될 이유가 주님과 도마의 만남에서 도마가 창자국 못자국 만지고 믿었잖아요. 도마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거에요. 보고 믿는 거에요.


따라서 보고 믿는다는 그 사실 때문에 창자국 못자국이 발생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야’라는 말을 하시기 위해서. 만지고 보고 믿는 것은 이것은 네가 하늘나라에서 인정한 믿음이 아니야를 하시기 위해서 아니야를 충분하게 여기에 사건화시켜서 도마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따라서 도마는 그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만진다는 것은 평소에 도마가 자기 몸을 만지듯이 만졌거든요. 결국 도마가 그 몸을 만져서 ‘야 이제 믿겠습니다’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 몸을 만졌던 그것이 하나의 전제가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럼 그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이게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이죠.


믿음이 아니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방식은 믿음이 아닌 것을 내용을 할 때 이게 믿음이 되어버려요. 믿음이 아닌 것을 빼버리는게 아니고 믿음이 아닌 것을 이걸 포장을 해버리면 이게 믿음이 돼요. 아닙니다가 믿음이 되는 거에요 이게.


도넛 있잖아요. 도넛에 앙꼬가 이만큼 들어있습니다. 앙꼬가 들어있고 여기 밀가루로 튀겨가지고 있지요. 믿음 없음을 내용을 할 때만 이게 믿음이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지지 않으면 주가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 악마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주님이 아니시거든요. 주님만이 악마의 주님의 원수를 현실화시켜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 언약이 있는 사람 선지자들 활동 보세요. 전부 다 그 때마다 누가 등장합니까? 복음을 전할 때는 꼭 진짜 인간의 배후의 사상이나 그런 악마적인 요소가 그 때 그 현장에 출현하지요. 복음이 있는 그 장소에 악마가 나와요.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만 악마가 반응을 나타내요. 인간이 나타나면 악마는 반응을 안 나타내요.


그렇게 해줘야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어야 예수님이 주가 될 수가 있어요. 인간의 역할을 이제 아시겠지요?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짓지 아니하면 죄를 짓지 않겠다고 버티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죄 짓는 이것이 도넛의 앙꼬 역할을 해요. 만두의 앙꼬 역할을 해요.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사함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기 때문에.


그동안 죄 안지으려고 하는 그자들이 바로 사실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반듯하게 바르게 살고 성령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의 행동과 말씨를 통해서 주께 영광을 돌리세 하는 이것들이 바로 악마에 속한 거에요. 그건 바리새인들이 다 했던 거에요.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안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는 말씀에 의한 현실과 직접 주님이 말씀을 적용하는 현실과 그 현장에서 얼마나 이게 대조가 되고 우리가 엉터리라고 하는 것을 발각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성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내가 적용하는 말씀과 주님이 적용하는 말씀이 너무 다른 거에요.


사도가 사도 바울이 도마가 고백한 것과 도마와 사울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되지요. 사도 바울의 고백의 차이점을 한번 봅시다. 도마는 뭡니까? 주는 나의 주시고 그 다음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그 사도 바울은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되어 있지요. 어느 것이 더 원천적이고 더 보편화된 일일까요? 더 일반적일까요?


어느 쪽이 내가 그동안 주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어느 쪽이 더 근원적이냐 말이죠? “주여 누구십니까?” 되묻는 것이 더 근원적이죠? 그렇지요? 더 근원적인 동시에 더 사상이라고 할까요. 그 진리의 깊이가 바다 끝까지 간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누가 물어요? 사울이라는 존재가 묻지요. 그럼 존재가 직접 주님과 만나면 나오는 공통적인 고백은 뭐냐 하면은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예상 못한 낯선 분으로 오신 분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요. 내가 아는 테두리 바깥에서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내가 상상한 삼위일체 내가 상상한 하나님 내가 상상한 주님 그거 아니고 엉뚱하게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이미 우리가 상상했다는 말은 상상한 그것이 나에게 뭐냐? 나의 잘남과 나의 의로 이미 재료가 되어 있는 상태에요.


15년을 믿었으면 15년 믿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경을 봤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그것이 아까 무슨 세월이라고 했습니까? 모정의 세월? 아니에요. 자기정립의 세월. 자기정립의 세월이에요. 자기정립의 세월을 그 다음 사건이 다 부숴버리는 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매일같이 주여 누구십니까? 매일같이 우리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는 거에요. 바닥을.


가난하게 된다고 가난하게 되었다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거에 아니에요. 내가 고생한다고 신앙 좋아지는게 아닙니다. 자기 바닥을 쳐야 돼요. 자기 존재라는 자체의 바닥을. 존재를 사건으로 완전히 해체시켜버리는 그런 만남이 지속되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시는가? 그 일을 성령님이 하시게 되는 거에요.


성령님의 특징의 활동은 특징은 뭐냐 하면은 ‘우발성’이다. 아까 우발성은 아까 뭐가 안된다? 소유의 대상이 안돼. 우발성은 소유의 대상이 안됩니다. 성령님은 우발성으로 왔는데 우발성으로 들어닥치는 순간이 전에까지는 몰랐던 주님을 새롭게 아는 순간으로 만들어 버려요. 새롭게 아는 순간. 하루 가고 그 다음날 가면 또 마찬가지지만. 새롭게 아는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새롭게 아는 순간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사건이 돼요.


존재 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시간이 들어있어요 시간. 시간의 연속성이 들어있습니다. 나 이 믿음 내일까지 이어가야지. 내일이라는 미래와 어제라는 과거가 ‘나’라는 존재 안에 ‘나’라는 존재가 만든 시간 안에 들어있어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존재 만든 사건을 무시해버리고 무용화시켜 버립니다.


내일? 내일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한테 내일은 없어. 지금 이 순간 너는 이미 죽은거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 있어서 네가 지금 산다는 것은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그냥 사건의 일부야. 하나의 사태에 불과한거에요. 순간순간 사태에요. 여러분 주무실 때에 30분 뒤에 잔다 잔다 잔다. 그러다 진짜 잠들기 전에 2초전에 잔다 1초전에 잔다. 0초에 잔다. 역시 내가 잔다고 하니까 자는구나 이러면 그건 잠 안 잔거에요 그거는.


진짜 주무시게 되면 앞에 있는 자기 계산은 다 무효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의식이 없는거거든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시간이 없어요. 어떤 기억도 없고 시간도 없고 없어요. 다만 우리가 새아침이라고 하는 것은 깨어나고 난 뒤에 결과적으로 새로운 날이 되다보니까 새날이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시는 말씀이 이방인들의 문제가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왜 자꾸 생각하느냐 하면 내일의 그 양식을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살면서도 내일까지 생각하니까 이방인들이 무엇을 입을까 내일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계속 생각하는거에요. 제가 대구강의 할때 shelter라는 것 피난처 이걸 자꾸 이야기했다고요.


그걸 제가 하면서 정신적 은신처까지 언급을 했는데 사람은 자기 존재만 있는게 아니고 자기 존재를 담아놓을 그릇이라든지 쉼터같은 것을 항상 이렇게 경유해서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안 가면 되지요 뭐. 배가본드라 하는 ‘방랑자’. 늘 인간은 방랑자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디에 정착되야 되고 정착되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떠돌이 안 되니까.


그게 사람의 기본 소망이 뭐냐 하면 나의 안식처 찾는거에요 안식처. 안식처를 찾는거에요. 그런데 이미 사도 바울은요 주여 누구십니까 했던 사도 바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함과 동시에 이미 예수님은 사도에게 안식처를 제공했어요. 사도 바울이 제공받은 안식처는 뭐냐 하면은 놀랍게도 이거에요. ‘예수 안’입니다. 이거 말이 안되는 소리거든요.


너는 예수 안에 있다. 예수 안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십자가 안’. 같은 말로 ‘성령 안’. 다 같은 말이에요. 성령 안에서 기뻐하라 성령 안. 이걸 제가 여기서 하나 보탠다면 ‘무덤 안’입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인간을 관속에 있다고 이야기 했고 관을 좀 넓히라고 했지요. 위로 한 15km 아래쪽으로 50km 옆으로 한 2500km. 관이에요.


관은 관인데 너무 살기 좋아 관이. 꽃 피고 봄, 여름 다 있어. 미세먼지도 다 있어. 크루즈도 막 다니고 관 속에. 답답한 관이 아니고 친구도 왜그리 많은지 왜 친구 모임도 커뮤니티 모임도 왜 그리 많아요? 관 속인데. 그걸 너무 즐기고 세월 좋다보니까 그게 관인지를 몰라. 그게 무덤인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데 모르고 있거든요.


또 마귀가 좋다고 또 후원해주네요. 관에서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출세하라는 거에요. 그리고 돈 좀 있으면 아시아나 네가 인수하라는 거에요. 관 속에서. 인수해봐라. 또 뭐 남편들은 또 인수한다고 돈 모을까? 하고 있단 말이죠. 보람이라든지 희망, 기대가 전부 다 하는게 관 안에서 뺑뺑이 돌고 계속 추구하고 있는거에요 그게.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뭐냐 그냥 놀아버려라. 다만 관이라는건 알고 놀아버려라. 같이. 같이 투자를 하든 주식을 하든지 이왕 죽은 인간이 죽은 유령인데 망령이거든요. 죽은 귀신이 뭔들 못해요? 귀신인데. 귀신도 주식투자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귀신인 것을 알고 김귀신 최귀신 박귀신. 귀신도 머리 이쁘게 할 수 있고요 철마다 옷 입을 수 있어요.


입어봐야 귀신이지만 하여튼 이왕 귀신인거 때깔나게 입고 돌아다니고 놀러가고 하시되 자기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자기가 이미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이 뭡니까? 십자가 무덤이잖아요. ‘죽음’이죠. 죽음 안에 있다. 그래서 남들은 세상에서 노는 자랑하는데 우리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자랑하라. 내가 이미 죽은 자다.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은 놈이니까 두 번 다시 찌를 일 없어요. 죽을 일 없기 때문에 약점이 없는 거에요. 약점이. 협박이나 공갈 받을 필요가 없어요. 위협받을 필요가 없어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안식처를 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안에라는 안식을 줍니다. 그러면 예수 안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뭘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몸을 갖고 있는데 어떤 몸이냐 하면 고린도전서에서 보면 이게 무슨 몸이냐 하면 하늘에 속한 몸이에요. 아담은 무슨 몸입니까? 흙에서 출발했지요. 그렇지요? 흙에서 출발해서 흙에 속한 몸이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영광을 입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이 필요했으면 뭐냐 하면 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 몸이 흘렸던 피에 의해서 몸이 피 흘린 몸이 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 뭐냐 하면 죄를 받아들여서 죄를 원료로 해가지고 자기의 피를 매개로 해서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는 유일한 몸이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 몸은 안돼요. 우리 몸은 아예 안되기 때문에 폐기, 그래서 죽은 몸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자꾸 육의 본성에서 우리의 몸의 존재를 자꾸 의식하는데 죄를 통해서 나의 행함을 통해서 내 죄를 뭐로? 의로 바꾸어서 이렇게 되어버려요. 이 의는 뭐냐 하면 몸이 투입된 몸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이 의는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지를 않아요. 실컷 학교 다녔는데 학교 졸업장 안 나오는 것과 똑같애요.


실컷 뭐 했는데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 봉사 했는데 합격 통지서가 없네요. 합격 통지서가. 불합격된 거에요 그게. 유령, 부동산 회사랑 똑같은거에요.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다 부었는데 그게 사기집단이에요. 그게 사기집단인거에요. 거기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자기만 거기 빠진게 아니고 남편까지 자식까지 전부 다 거기에다 다 집어넣었는데 꼭 신천지같애.


다 집어넣고 보니까 전혀 합격 통지서가 안 나오는 거에요. 열심히 믿는 정도가 아니고 믿습니다!! 까지 했는데 소용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본인이 알아요.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고백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찾아갈게요 이것밖에 없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갑자기 나의 바닥을 거덜내시는 분. 나의 모든 것이 의미 없음을 통보해주는 분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 통보는 객관적 증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거든요. 그 잘난 분도 이 땅에서 죽었어요. 이 땅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훌륭하신 분도 이 땅에 속했다는 이유로 돌아가셨고 저주받았잖아요.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통째로 이것이 통째로 이것은 저주의 땅인데 저주의 세계인데 우리는 거기서 그 관 속에서 뭔가 잘 해버려고 자기  도를 닦으려고 인격을 함량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놈의 인격 2분만에 분노케 만들어버릴까. 그 점잔과 품위 인격 다 소용없어요.


30절에 봅시다. 약간 난해한 이야기 나와요.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여기 기적이라고 되어 있어요? 표적이라고 되어 있어요? 표적, 싸인이거든요 싸인. 싸인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입니다. 기호에요. 기호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뭐를 쥐고 있어라는 말이 아니고 훅 지나가버린 한순간의 사건이라는 뜻이에요. 한순간의 사건입니다.


태극기. 하나의 싸인이죠. 태극지 백날 분해 해봐야 섬유조직이지 뭐 태극기 안에 독도 안 들어있고 그냥 다른거 뭐 없어요. 그냥 천조각이잖아요. 그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천조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그건 붙잡을 것이 아니고 그냥 순간순간 변형되고 다른 것으로 교체될 것들이에요. 그중에 대표적인 싸인. 대표적인게 훅 지나가는게 뭐냐 하면 ‘나’라는 의식이에요.


어제 알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요. 오늘의 나를 몰라요. 왜? 그때그때 주님께서 변형시키기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켜요. 우리는 어제의 나 오늘의 나를 자꾸 이렇게 identity, 정체성이라고 하는데 자아 정체성. 꼭 하나라고 독립성을 갖고 있다고 우기는데 전혀 그럴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 어제 나를 변수들과 오늘의 나를 만든 변수가 달라요.


어제의 그 파리의 성당은 불 안탔지만 오늘은 탔잖아요. 그걸 새롭게 인식하는 나는 어제 그걸 몰랐던 나와 다른 나입니다. 나와 달라요. 그런 CF있지요. 뭐를 하기 전과 뭐를 한 후 아로나민 골드. 아로나민 골드를 먹는 날과 먹지 않은 날이 다르잖아요. 달라요. 그거 안 봐도 달라요. 변수가 그것 하나뿐이겠습니까?


박항서 베트남 감독을 아는 것과 모를 때와 다르잖아요. 베트남 그것도 축구야? 이렇게 하다가 박항서 오! 베트남도 축구할 줄 아네! 이렇게. 이게 달라요. 그런데 그걸 같다고 우길 때 그런 완전히 악마들린겁니다. 그게 바로 세월호 사건이에요. 세월호 사건입니다. 얼마나 이게 악마적인지를 아시겠지요? 5.18 이런거 전부다 삼풍백화점 무너진 것.


지난간 것은~지나간대로 보내버리세요. 나름대로의 의미 없어요. 그건 전인권이 오해한 거고. 지나간 것은~~에브리바디!! 다 없어진거에요. 어제의 나를 어디서 찾습니까? 빛바랜 사진 외에는 없지요. 어제의 나는 없어요. 어제가 무너져서 오늘이 되었는데 뭐가 어제가 있어요. 어디서 어제를 찾습니까? 그때그때 달라요~ 이 말이 맞아요. 그때그때 달라요 우리는.


그러면 그때그때 다른 나를 우발적인 나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는거에요 제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으면 안돼요. 그럼 일관적인 것은 뭐냐? 일관적인 것은 일관적인 사건에 성질, 본질이 드러나요. 그게 뭐냐? 주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 주님이 주님답게 하는 것은 항상 일관적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일관성.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 여기서 유명한 말. 내 다리 내놔라. 서산에 충청도. 꼭 왜 전설은 충청도가 많은지 몰라. 전설의 고향 보면 내 다리 내놔라. 어떤 효자가 무덤 파가지고 고기 먹고 싶다고 하니까 고기 해주니까 죽은 시체가 막 비오니까 막 따라오는거야.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꼭 오토바이 타고 오는거 같애.


내 다리 내놔라는 식으로 주님 죽은 줄 알았는데 주님귀신 따라오는 거에요. 내 다리 내놓으라고. 나 너 때문에 죽었잖아. 너 나 때문에 살았잖아. 왜 너는 너의 자신의 증인이 되야해? 그럴 필요 없는데. 그게 너의 약점이야. 너 잘남으로 살려면 그게 약점이라고. 한결같은 것은 물론 요리 못하는 가정주부의 미역국 그런 것. 일주일 내내 미역국, 일주일 내내 감자튀김, 감자볶음. 좋다며?


하지만 좋았더라도 다음날 되면 또 달라요. 내가. 입맛이 또 달라져. 입맛뿐 아니라 다 달라졌어요. 다 달라졌어요. 한달 수입이 700만원 정도 되면 좋겠다. 700만원 되보세요. 되본 적도 없겠지만. 되보세요. 시들해. 천만원 되야 좀 산다는 소리 듣지 이렇게 되거든요. 남자가 맨날 하는게 차 바꾸는 거잖아요. 옛날 남자들 말 바꾸는 것처럼 차 바꾸고 차보고 대견하다고 누가 흠집냈어!!! 미세먼지가 흠집냈는데 누가 흠집냈어?! 차에 미쳐있어요.


여자는 가방에 미쳤듯이 차에 미쳐있어요. 그런데 백날 미쳐도 얼마 지나면 또 바꾸자 이렇게 하고요. 식상하다. 안에 앰프 바꿨다가 온갖 것 취미가 그거에요 취미가. 한결같은 것은 항상 죽이신다는 것. 제가 언제 설교했지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죽이는 것. 죽여주는 것이에요. 죽여줘요~!!이렇잖아요. 얼마나 은혜로운 찬송가 입니까? 죽여주는 거에요. 우리를 아주 죽여버리는거에요. 죽어도 좋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거든요. 그게 사랑입니다.


자, 이제부터 제가 해야될 것은 주여 누구십니까? ‘주’. 주 개념입니다. 유대인이나 사울도 마찬가지고 세상의 모든 변화는 어디서 유입되었느냐 하면은 주님부터 유입된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한결같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게 성경 히브리서 7장을 한번 찾아봅시다. 7장 23절 24절 한번 읽어보세요.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절이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자, 여기서 제사장 나옵니다. 인간은 안돼요. 그러면 인간은 안 된다면 그 인간의 직분을 그대로 영원히 고수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어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다 했지요. 영원히 계시다면 그 영원히 계신다는 의미가 뭐냐?


영원히 계셨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어떤 현상이나 어떤 다양성이 있다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딱 하나의 원칙은 변치 않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힘입어. 자기를 힘입었다는 거거든요. 다시 오늘 본문 요한복음 20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20장 31절에 보면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뭡니까? “힘입어” 죠.


그러니까 30절에 보면 표적을 행한다. 싸인이거든요. 싸인에서 뭐가 주께서 싸인 또는 표적을 행한다하면 이건 뭐를 빼라는 이야기에요. 나를 나라는 존재를 삭제하라는 말이에요. 평소에 인간은 자기정립의 세월 아닙니까. 왜냐하면 자기정립이라는것은 내가 했다에서 멈추는게 아니에요. 내가 함으로서 나에게 돌아올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더 나 자신은 안정성 있게 괜찮은 나로 확실한 나로 결과물을 내가 소유할 수 있다까지 이어져야 돼요.


내가 멋있는 나, 잘난 나가 되는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어떤 행동도 결심도 하지 않는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 자체가 뭐냐 하면 그 자체가 주께서 싫어버린 바 되는 하나의 싸인이 되는 거에요. 왜? 표적은 싸인이라는 말은 이 싸인이라는 말은 인간이 곡해하고 오해할 거리를 앞에 제시했다는 거에요.


아! 예수님이 저런 분이니까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했던 자들이 12제자들이였어요. 물위를 걸었지요. 오병이어 행했지요. 전부다 표적이거든요. 표적인데 그 사람들은 뭘 보느냐 이걸 기적 또는 이적으로 본거에요. 야 우리 좋아라고. 내가 그걸 먹고 내가 배부른 까닭이다. 내가 도리어 윤택해지고 내가 더 안전빵으로 갈수 있다. 내가 점점 더 나는 내가 괜찮은 존재로 붙들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자기 보람으로 이게 어떤 결과물을 얻는 흐뭇함을 건질 수 있다는 그 희망을 자꾸 허락하는 그걸로 곡해한 거에요.


하지만 그 많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따라온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표적이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내게 생명이 없다 하니까 그들은 생명이 없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생명을 포기하지요. 생명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이 아니면 생명이 뭐라도 우리는 돌아서겠습니다. 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러면 요한복음 6장에 힘입었다는게 뭐냐 하면은 이렇게 표현해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 수학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폐구조 또는 폐곡선. 닫혀있는, 닫힌 공간. 주님에서부터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 닫힌 공간이에요. 심지어 12제자도 거기에 자력으로 끼어들 수 있다? 없다? 없어요.


닫힌 공간에 왔을 때 사람들은 이걸 기적으로 봤고 이적으로 봤어요.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는 이걸 뭐로 봅니까? 표적으로 본거에요. 기적에서 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재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게 있다면 주님께서 마지막 표적 다시 말해서 내 창자국 못자국을 도마에게 보여줄 이유가 없어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거에요. 너 때문에.


네가 왜 악마한테 벌벌 떨고 네 인생을 걱정하느냐. 그 죄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그 이야기거든요. 네가 뭔가 겁내지 말아야 하는 것에 벌벌 떨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 걱정하는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부터는 너 자체가 네가 날 믿을 생각하지 말고 너 자체가 내 믿음을 증거하는 내 표적으로 이제는 내가 삼으리라. 그래서 성령이 오신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천하에 믿음 없는 사람으로 아주 즐겁게 행세하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 있나?” “믿음은 무슨 내가 무슨 믿음이 있어.” “예수 믿나?” “안 믿어.” “너 주특기가 뭐야?” “하나님 안 믿는거.” 이런 이야기. 나는 하나님 안 믿는게 주특기고 예수님 안 믿는게 주특기에요.


예수님 왔을 때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여호와를 믿는다고 했거든요. 그들이 믿을 때 믿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간다고 생각한거에요. 하나님을 힘입어. 그런데 하나님을 힘입는다를 뭐로 바꿨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안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바꿨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주의 이름이 뭐냐 하면 언약을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 맹세와 언약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을 우리가 믿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가 주의 백성이기 때문에 약속들을 기다리게 되면 언젠가 로마에서 해방되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회복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지방교회처럼. 회복될 것입니다. 지금도 회복이라는 말 쓰잖아요. 뭐 잘났다고 회복. 회복되기를 믿었단 말이죠.


그럴 때 예수님을 그들이 뭐로 봤습니까? 자기가 믿음이 있는고로 예수님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심지어는 귀신의 대장이다. 악마다. 귀신의 오야붕으로 본거에요. 이단이고. 율법을 잘못 가르치는 사람이고. 그렇게 본거에요.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저쪽 권세를 두려워했던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 체포될 때 다 도망갔잖아요. 세상이라는 힘에서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다고 노력하는 것이지 예수 믿는게 아니었어요. 믿음은 도마고 뭐고 믿음 없어요. 믿음은 성령이 와야 되는 거에요.


존재가 사건이 되는 것은 성령이 와야 되지 열심히 주는 누구십니까 누구십니까?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사도 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했다고 사도 바울이 믿음 있는게 아니고 사도 바울에게 뭐가 임했느냐 하면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오고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자기가 부활을 보았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


여러분 부활을 보았다는 것이 편하게 생각합시다. 부활을 보았다는 것이 뭡니까? 오! 주님 살아계시네 이거거든요. 그럼 주님 살아계시면 나만 살아있는게 아니잖아요. 그럼 전에는 내가 살아있다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하다가 주님이 살아계시면 주님 살아계셔서의 저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는거에요.


주는 누구십니까?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질문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질문을 던졌고 그 답이 접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는 매일같이 주님의 답변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주님의 일의 결과물로 살아가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8절인가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어요. 우리가 소망 믿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이기 때문에. 사랑은 내가 받는게 아니고 사랑 자체가 사건화되야 돼요. 사랑의 사건화. 이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존재가 주님의 사랑의 사건화를 증거하는 사건이 되어 버리는겁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까불고 촐랑대는 거에요. 사랑은 여기 있다.


사랑은 뭐라고 합니까? 김세환이 부른 노래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고 이게 인간으로서 가능하지 않지요. 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게 과연 이게 늘상 우리 존재는 투기하지 않습니까? 하잖아요. 하지만 내가 죄인인 것을 십자가 앞에 알 때 우리는 투기하고 싶어도 투기가 뭐지? 이렇게 하게 돼요. 뭐지? 투기가? 사랑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 거짓말이 뭐지요? 거짓말이 뭐에요? 거짓말이 뭔지를 모르는거에요.


왜냐하면 자격 없으니까. 순간적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순간적입니다. 그딴 것 계산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극미의 간격이에요. 극미의 순간.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돈이 뭐에요? 의미 없어요. 디모데전서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뭐 이런거 나오잖아요. 사랑하는 순간에 그거 상관없어요. 그게 뭐죠? 자기가 누구인지를 오히려 물을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 0.003초인가.


짧은 순간에 자기가 기억이 나지를 않아요. 그걸 순간적으로 자기를 부인한 순간이에요. 자기를 자기가 부인한 '나'가 아니에요. 순간 사건화 우발적인 도발적인 사태가 일어난거에요. 갑자기. 갑자기 하다가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이러면 다시 정신 차려서 내 위주로 살지요. 내 위주로 살다가 또 마귀한테 실컷 농락당하고 또 고민고민 다하고 약 먹고 끙끙 앓고 띠 두르고 아이고 이놈의 집구석 걱정은 또 혼자 다하고요. 복음 들은거 다 날아가 버리고.


하나의 순환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죄라는 것을 경유해서 의가 나와요. 의는 어디서 나온다? 죄 안에 있을 때만 비로소 의가 보이고 죽음 안에 있을 때만 생명이 귀한 줄 아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이 귀한 것을 생명이 귀하다고 하지 않고 우리를 초죽음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나는 이제 자살할거야. 이제 나는 끝났어. 나는 인생 안 살거야. 하는 순간에 베시시 웃지요. 왜?


갑자기 그 순간 잠시 잊어버렸던 생명이라는 것이 주께서 나를 사용하는 그 과정 자체가 관계망 자체가 생겨나요. 생명을 소유하는게 아니고 생명이 나를 농락한거에요. 갖고 논거에요. 생명이 생명답기 위해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튀기게 만드는거에요. 치킨처럼. 죽음에 튀기게 만드는 거에요. 혼 좀 나게 만들었어요.


왜 그렇게 심하게 삽니까? 주님이 그래야 주님이거든요. 주님이 바로 죄 속에 경유해야 주님이 돼요. 주님도 주님이 겪었던 그 상황을 반복해서 성령께서 그대로 이제 네가 주님 되라 해가지고 주님 되기 싫은데 하여튼 주님이 겪었던 그 체험을 되풀이해가면서 주의 주 되심을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발현되도록 구체화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거에요. 성령께서. 성령께서는 오직 주님밖에 몰라요. 너를 통해서 주님 끄집어낼거야. 그 생각이 성령의 생각이에요.


마태복음 12장 한번 보겠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게 마태복음 12장에 이렇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31절 마태복음 12장 31절 32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뭐한다?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나를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되” 여기 나오죠. 33절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아주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욕할 수 있는데 성령을 받아놓고는 예수님을 욕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왜? 성령이 우리 욕보다 더 쎄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가 주님을 싫어하는 것보다 더 쎄요. 우리가 맨날 주님 싫어하고 반발해도 성령님이 그걸 뭐로 바꿉니까? 그걸 죄로 바꾸어서 그 죄와 주님의 죄사함과 자꾸 이렇게 재확인시켜주거든요.


사람이 몸이 아픈데 원망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살아온 몸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존재인데요. 컨디션 몸의 컨디션 있잖아요. 몸의 컨디션이 기분을 좌우하지 않습니까? 봄들 되면 전부다 살랑살랑 기분 좋지요? 꽃피고. 이놈의 꽃들!! 이런 사람 별로 없어요.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천만에. 꽃은 사람 기쁘게 하려고 꽃을 피우는게 아닙니다. 꽃은 인간과 비교해서 얼마나 초라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꽃을 피우는 거에요.


왜? 이게 시편에 나오지요. 모든 세상 만물은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주고받지만 유독 인간만큼은 하나님 자기 아비어미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죄악을 짓잖아요. 그런데 아무 죄도 없는 피조물이 인간 때문에 같이 신음하고 고통한다고. 로마서 8장에 나와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름다운 들풀과 그리고 참새가 짹짹 거리는 것은 우리의 처지와 대조하고 비교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친히 기르시잖아. 들풀도 내일 잘린다고 들풀이 거기서 짜증내고 있느냐? 그냥 짤리면 짤리라 이 말이죠. 내일 잘려도 오늘은 그냥 들풀로 그냥 존재하고 있는 거에요. 너는 왜 그렇게 못살아 가느냐 이거에요. 왜? 심보가 얼마나 뒤틀어지고 그 뱀이 몇 마리가 들었으면 그렇게 모든 심보가 딱 뒤틀어졌는가. 그거는 바로 뭐냐 하면 바로 자기위주 자기정립입니다. 자기 위주로. 악마를 닮아가지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나의 가치의 전부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렇게 못된 죄를 버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이게 싸인이 되게 하는 겁니다. 표적이 되게 해요. 나는 너희에게 베풀었지만 너희는 나를 찼다는 싸인. 그걸 매일같이 우리에게 되풀이 하는 겁니다. 우리한테 매일같이. 이걸 안다고 정신 차리자 하는 그런 헛소리 하지 마세요. 정신 차리는건 없습니다. 우린 정신 지금도 헤롱헤롱한데.


정신 못 차립니다. 정신 차리지 마세요. 정신을 차려도 주께서 차리게 하시지 내가 차리는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원칙에 의해서 힘입어에요. 모든 다양성은 결국 하나로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뭐냐? 언약체계고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각자 활동은 다르지만 힘입었다는 것.


힘입었다는 말은 뭡니까? 내 힘 가지고 안 된다는 말이죠. 주님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영원함 주님만 영원히 종속된 주님의 가치만 이미 확정 났음. 따로이 추가하거나 보탤 일 없음. 내 행함과 내 의가 나의 구원에 전혀 기여할 필요도 없고 기여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요. 그러면 주님의 힘입어가 이게 원칙이라면 주의 하는 일은 뭡니까? 간단하죠. 나에게서 나의 모든 의를 내 구원에 보탬되는 것은 전부 다 밀어버리고 잘라버리고 삭제해버리고 없애버리는 겁니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 뭐냐. 나를 부인하는 일을 하죠. 이만큼 했습니다. 이만큼 착했습니다. 이만큼 의로웠습니다. 또 반대로 나는 이만큼 악했습니다. 나쁜 짓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삭제해버리는겁니다. 제거해버리는거에요. 너는 애초부터 했다 안했다 자체를 논할 가치도 없어. 내가 살려줘서 사는거야. 그리고 네가 살고 싶어서 사는게 아니고 내가 너가 싸인으로 필요한 그 날까지 그 수명까지만 계속해서 너에게 나는 너를 부르고 사용할거다. 이런 조치가 나오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로 관련되는 생명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이제는 주님의 영생이 지금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 어두운 시대에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지금 살아서 일하십니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이름이 뭐냐? 작은 자라고 했거든요. 그 작은 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신 이유를 보세요.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하는 대상이잖아요. 심지어 본인도 몰라요. 내가 주님을 언제 섬겼습니까? 아 몰라야 돼요. 우리는 몰라야 돼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점수 채점하면 끝이에요. 한번 보자. 너는 100점. 제가 언제 100점했습니까?!!


너는 몰라도 돼. 내가 100점하면 100점이야. 내가 합격이면 합격이야. 따지지마. 너는 그냥 합격된 상태의 싸인이야. 하나의 신호이고 하나의 기호거든요 기호. 그냥 밥먹고 잠자는 기호란 말이죠. 움직이는 기호.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나도 알아요 소용없는 거 아는데 성경말씀이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도마가 무슨 믿음이 있습니까? 보고 믿은게 뭐가 있어요? 하지만 그 이적, 기적을 표적이 되게 하시는 능력이 다시 말해서 존재에서 사건이 되게 하는 능력이 이제 성령이 임하게 될 겁니다. 자, 요한복음 20장 여기 다시 봅시다. 20장 22절요.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역시 예수님이 창자국 보여줬거든요. 옆구리 보아라 해놓고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했지요.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를 아예 뭐로 봅니까? 의인으로 봅니까? 죄인으로 봅니까? 죄인으로 아예 간주해요. 왜? 예수님 빼놓고 다 죄인이니까. 아예 간주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오신다는 것은 이미 뭐냐 하면은 내가 오게 되면 이미 너에게는 죄사함이 있다. 죄사함 받았다. 그렇다면 네가 이렇게 모든 벌어지는 일은 죄 사함을 선포하는 거죠. 우리가 선포하고 나 꼬라지 이렇지만 죄사함 받았어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죄가 뭡니까? 모르죠. 본인이 어떻게 죄와 의를 구분합니까. 구분해봤자 선악적으로 구분할 뿐인데요. 인간은 일단 선이 없어요. 선이 없는데 선악지식을 아는 것은 자꾸 선이라고 우겨서 마귀가 우기게해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선이 없는데. 자기가 선악을 안다는 지식 때문에 이 선을 행할 수 있지 않겠냐고 자꾸 꾸역꾸역 다른 소리를 내는거에요.


이거는 선이고 이거는 악이라고 자꾸 자기가 구분을 짓는게 이게 악이에요 이게. 구분 짓는게 아니고 몽땅 악인데. 몽땅 악인데 ‘그래도’ 이러거든요. ‘그래도’ 그래도 헌금을 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헌금하면 선이 되지 않겠느냐 그 생각이 악이에요 그 생각이. 그래서 우리는 악만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악만. 왜냐? 선과 악의 가치 체계만 나와요. 가치 체계만.


선과 악의 가치 체계만 나오는데 가치 체계가 나온다는 자체는 우리 속에서 뭐냐?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누가?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구축합니다. 오늘도 복음 들었으니까 이거 설마 나쁜 일은 아니겠지? 나쁜 일 하시는거에요 오늘 . 뭐 복음 들었다고 갑자기 월급이 오르고 그런거 없습니다. 어떤 보상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흐뭇하죠. 이미 내 존재가 이미 형성되어 버립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거에요. 주께서.


선악에 대해서 먹지 마라고 했거든요. 알지마라 했는데 이미 알아버렸어요. 결국 이거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거는 갖고 가야 돼요. 선악이라는 이 난치병 이 불치병은 우리의 고질병이에요. 어떤 순간도 여기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 죄를 죄 되게 하는 것에 동반해서 죄사함이 돼요.


따라서 죄사함을 아는 순간은 철저하게 우리가 죄에서 못 벗어난다. 나라는 존재는 죄인이다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에서만 죄사함이라는 이미 결과로서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자기를 자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십니까? 성령이 하시는 거에요. 그렇다면 성령에 의해서 기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기도 내용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멋있는 것을 다 가지고 기도하지요. 어린아이부터 다 끄집어내지요.


그러면 성령이 이제 탄식하지요. 기도 꼬라지하고는. 그런데 우리가 재주가 그 재주 밖에 없거든요. 주여 제가 온 가정의 목숨을 바쳐서 주를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께서 놀고 있네. 네가 뭐라고 네가 재주도 없으면서 너 혼자 하나?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는 또 말하는 것이 자기 속내를 감추는 하나의 방식이거든요. 말이라는 것이. 말이 많다는 것은 나 좀 알아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자꾸 주님 앞에 말하는 것이거든요. 기도를 주께서 하게 하시고 그 응답은 누가 하십니까? 성령으로 응답하시는 거에요 성령으로. 그럼 그 성령의 응답은 뭐냐? 그거 딱 하나 밖에 없어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고마움과 감사가 없는 일은 성령의 일이 아니고 마귀의 일입니다. 곧 나의 일이고.


그리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오면 나쁜 짓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가본 교도소도 가보게 하고. 사실 교도소가 없어요. 세상 자체가 교도소거든요. 이미 옥에 갇혔는데 뭐 수갑을 또 채웁니까. 이런데도 가보게 하시고 다 주께서 새로운 사태를 일으키시는군요. 또 어떤 옥에서 어떤 복음적 사태를 일으키실지 제가 참 두근두근 거립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지만 진짜 인간이 영생을 얻었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주님은 진지하고 심각하고 엄숙하게 이야기 한 한마디가 우리는 나의 일에 바쁘다 보니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그 진지함이 참된 현실인 것을 깨우쳐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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