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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23:57:54 조회 : 416         
나를 넘어선 의미 190604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음성1              음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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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59.♡.122.247) 19-06-17 13:37 
강남-요한복음 21장 1절(나를 넘어선 의미)190604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1장 하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세 번째 나타나신 거에요 세 번째.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총 7명인가 아마 그럴거에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시고 제자들은 현재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에 거기에 계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 뒤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육지에서 거기서 불과 50칸 한 칸이 3m니까 150m쯤 되는데요. 150m 상당히 멀지요? 남자가 100m 빨리 달리면 15초. 빠른 사람 15초요. 여자들 100m 달리기하면 25초 내지 30초. 그러면 150m 달릴거 같으면 상당히 오래 걸리네요. 적어도 1분 이상 달려야 되는데. 해가지고 뭐 이렇게 달렸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21장 이 내용이 왜 등장해야 되는가? 지금 요한복음 21장의 이 내용은 고기 잡으러 갔다는 내용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고 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을 누가 만들었느냐? 일을 누가 유발하느냐? 일을 주님이 유발하지요. 유발하신다. 일은 세상 일은 주님이 유발하세요.


제자들은 그냥 소극적으로 고기 잡으러 갔을 뿐이고 그러면 예수님이 일을 유발하시는데 이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이미 죽으셨던 예수님이에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냥 부활하면 안 되고 ‘죽음 + 부활’이죠. 죽었다가 부활하셨다 이 말은 지금 제자들은 안 죽었지요? 안 죽었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은 여기에 안 죽었다.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 그러면 예수님 사이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것은 장벽, 차단막이 형성되어 있지요. 차단막이. 장벽, 차단막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이쪽은 죽었다가 산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와 달라요. 이것은 죽기 전에 버티는 세계거든요. 그냥 육신의 목숨 버티는 세계고 이미 이쪽 예수님 세계는 죽었는데 다시 사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이렇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마지막에 뭐냐 하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차단막이 있을 때에 제자들이 기껏 하는 것은 여기서 상상력이 동원되는 겁니다. 과거에 자기의 추억이라든지 이런걸 생각해서 옛날에 함께 있었던 그때 좋았던 시절의 예수님의 모습을 내가 그때를 연상시키면서 “믿습니다 따릅니다 기다립니다 어서오시옵소서” 뭐 온갖 생각들을 다 하겠지요. 이게 과연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냐 하는 겁니다.


그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아니에요. 그건 상상하고 조작하는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복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이 되려면 보고 믿었던 사람이 누굽니까? 도마지요. 도마가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도마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보고 믿는다는 이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그런 변화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변화가 있다면 이 변화를 그대로 이 차단막 이쪽에 인간들 사는 열한 제자가 사는 이곳에 끌어당겨 봅시다. 그러면 이 열한 제자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믿음이라고 자꾸 상상하려고 할 때에 여기는 “보지 않고 믿겠습니다 저 상상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하겠습니다 회상하겠습니다” 하는 그러한 자세는 변화된 자세에요? 변화 안 된 자세에요? 변화 안 된 자세지요? 변화 안 된 자세에요.


자기가 변화가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예! 안보고 믿겠습니다” 해도 그 믿음은 주께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쳐주지를 않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되려면 이 차단막, 이 장벽을 뚫고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주님 쪽에서 이쪽에 찾아와야 되는 거에요. 찾아오고 그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을 보여줘야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 예수님 일하시는 것을 봤다 해서 나는 믿음이다. 이렇게 하면 안돼요. 왜냐? 그럼 보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보여주기는 보여줬는데 그 보여준 것을 뭐로 전환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그 보여준 것을 통해서 나는 보지 않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로 전환되는 변화가 제자들 내부에서 일어나야 됩니다.


무지무지하게 복잡하지요. 무지하게 복잡한거에요. 그 이유가 있어요. 이 장벽, 이 차단막, 이 장벽이 이 장벽에 대한 두 세계가 나뉘어졌을 때 이 장벽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조차도 죽지 않고서는 이쪽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그럼 제자들이 “뭐 믿습니다 상상합니다 주님 좋아했잖아요 그때가 그리워요” 해도 그렇게 말을 내뱉는 그 자신이 어떻게 돼요? 죽어줘야 돼요 그게. 그럼 죽은 자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고 말해봐야 소용도 없어요. 끽하고 죽는데 뭐 옛날이 좋았습니다 그리웠습니다 주님이 풍랑일 때 주께서 도와주셔서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백날 해봐야 그렇게 그런 기억을 품고 죽어야 돼요. 그게 없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죽지 않고서는 주님조차도 죽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갈 수 없다면 제자들도 죽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으로서 보여줬다는 말은 이 보여줌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멀쩡한 제자들도 죽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겁니다. ‘죽게 하는 효과’.


그러면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죽는 장소가 있어요. 오늘 제목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그게 소실점이죠. ‘소실점’. 르네상스에 원근법에서 보면 그림에 보면 소실점이 있어요. 원근법 최초로 나올 때. 이태리에서 나올 때. 그림 속에 소실점을 넣고 해버리면 그림이 입체적이 되는 겁니다.


그림이 입체적이 됐다는 말은 보는 시각이 인간 중심이에요. 내가 보기에 이차원 평면 속에 삼차원의 입체감을 인간이 그렇게 보고 싶다 해서 원근법을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그 전까지는 뭐냐 하면 인간이 건방지게 뭘 세상을 봐. 세상 해석은 주님이 보는 관점이라야 세상의 정답이다 해서 중세신학에 의해서 하나님의 보는 관점이기 때문에 그 그림들이 전부다 의도적으로 인간 보는 관점을 적용해버리고 주인공만 이렇게 평면적으로 원근감 없이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있어요. 삼위일체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우리 시각은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우리 시각은. 그렇게 르네상스가 되고 무역이 발달하고 십자가전쟁 이후에 교회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으로 넘어오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그런 사람이지요. 넘어 오면서 핑계가 이런 핑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계를 맘껏 고백해서 주님께 찬미 드리세 핑계는 그런 핑계죠.


그런데 자신이 갖고 있는 이성과 감정과 욕구를 화폭에다 담겠다는 노골화가 된거에요. 그게 ‘노골화’. 그림은 사람이 좋아야하지 뭐 하나님이 좋은지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사람이 좋아야 된다는 것을 은근슬쩍 이제 끼워넣기 시작합니다. 슬슬 눈치봐가면서 슬슬 끄집어 내는 거에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품고 있는 그거거든요. 예수님을 품고 있을 때에 남들 보기에는 참 믿음 좋은 마리아가 예수님 슬퍼하는 모습이죠. 중세는 그런 인간의 감정을 노출시키는 것을 굉장히 억제해왔어요. 인간의 감정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삼위일체 계시로 구원받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데 서서히 교회에 돈 많은 자본가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섞어 넣기 시작해서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접근하겠다 그게 르네상스의 새로운 세계관의 시작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극대를 표현하는 것이 주께 영광이다 그렇게 보는거죠. 모나리자도 마찬가지고.


예수님께서 장벽을 죽음을 통해서 부활했기 때문에 다시 이 장벽을 통해서 오신다면 예수님 다시 오신다면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해당 안 되지만 이 사람들에게 이 장벽을 통과해서 주와 함께 있으려면 이 사람들에게 뭘 제공해야 됩니까? 예수님이 겪었던 그 노선 따라 죽어야 돼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그냥 자살하면 안돼요.


주님이 겪었던 주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 길, 죽음의 길 아닙니까. 그 죽음의 길을 그대로 적용시켜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제자들이 자기 힘으로 죽어요? 못 죽어요? 죽으면 안돼요. 주께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데 주님의 방식으로 죽어줘야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겁니다.


자,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간단하지요. 성령 받았습니까? 예 받았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여러분에게 일하겠네요? 네 일하십니다. 그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십니까? 물으면 방금 우리가 이렇게 공부한 이론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시려고 이제 팔 걷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되야지요?! 죽이시려고.


죽이시려고 팔 걷고 나서는데 죽이는 방법은 이거는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방법은 안돼요. 주님이 유발하시는 일로 우리가 죽어야 돼요. 주님이 유발하시는 일로. 왜냐하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완성이란 말이죠. 완성. 그 완성된 코스가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져야 돼요. 덮쳐지면 이 제자들로 하여금 소실점, 다시 말해서 구멍이라고 보면 돼요. 또는 블랙홀 그쪽에서 전부다 몰아넣는 겁니다.


어떤 범죄영화 같은데 범인이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치우려고 하지요. 어떤 집에 아파트에 범인이 들어와서 자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거실에서 죽였다고 합시다. 그럼 이 사람은 이제 피 흘리고 뻗어있겠지요? 그럼 이 사람은 들키지않기 위해서 여기에 안 보이는 창고에다가 할 때 창고가 소실점입니다 소실점. 할 때 시체는 뻗어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보고 빨리 일어나서 걸어가 이렇게 합니까? 아니지요. 이 사람이 두 다리는 잡고 질질 끌고 가지요. 질질. 질질 끌고 소실점으로 끌고 가겠지요. 요한복음 21장 18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원치 않는 것은 사람이 생사람을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버리는 겁니다. 죽음의 길로 가는 거에요. 죽음의 길로. 아까 일은 누가 유발합니까? 주님이 유발하지요. 주님이 유발해요. 성도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이 유발하는 일입니다. 그 유발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더 살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이미 십자가가 확실했다면 십자가로 가야 돼요. 그럼 그 질질 끌고 갈 때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플러스되는 거에요. 플러스되게 되면 제자들로 죽이는데 어떻게 죽느냐 하면 늙어죽게 하는게 아닙니다. 늙어죽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처음 태어났던 태생에 근원, 태생의 자리로 끌고 가서 죽이게 하는 겁니다. ‘태생의 자리’.


그러면 살아왔던 그들의 생애를 리마인드하는 거에요. 동영상을 거꾸로 반복 돌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기 전에 그들의 직업이 뭐였습니까? 어부였잖아요. 어부라는 그 기억을 이제는 그냥 기억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러한 기억으로서 재편을 해주는 겁니다. 편집을 해버려요. 우리가 살아왔던 것을.


늙어봐야 우리에게 나올거 뻔해요. 차라리 과거로 과거로 되돌려서 처음 네가 시작했던 그 지점, 그 지점은 출생의 지점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과 처음 만났던 그 지점. 예수님과 처음 만났던 그 지점. 예수님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그 지점. 어부로 살 때는 별로 의미 없지요. 그러나 어부가 되었는데 예수님 찾아와서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때 그때 의미가 있을거 아닙니까.


그 의미를 주님 손에서 편집을 해요. 그때 그 만남은 내가 의도했던 만남이라는 것. 무엇을 의도했느냐 하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 모든 믿음은 보지 않아야 된다는 것.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고기 잡게 해가지고 고기 숫자가 나와요. 153마리.


거기 숫자도 세는데 11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얼맙니까? 153마리죠. 153마리.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 만날 때 그물에 가득 찼지만 그때는 숫자 셀 겨를도 없었어요. “주여 죽여주옵소서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라고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거꾸로 회상하면서 분명히 확실하게 고기 숫자가 얼마인 것까지도 기억나게 만들어 버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내가 무심코 지나간 나의 과거를 근원부터 새로 따지면서 근원부터 따지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베드로가 예수님 만날 때부터 이미 자기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으로 만난 거에요.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으로. 그동안 너무 까불었어. 주의 일 하겠다고. 그냥 죽으면 되는데 안 죽고 주의 일 하겠다고 계속 까부는 거에요. 주의 일 하겠다고 수제자 되겠다고.


그래서 네가 까부는 그 모든 것, 그 까분다는 것은 뭐냐? 보고 믿겠다는 것도 포함되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찾아와서 내가 살아온 과거를 아무리 깨어있는 상태에서 보고서도 아무리 해석해도 해석해서 ‘내가 죽어야 마땅합니다’를 뽑아낼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 과거라고 하면서 ‘이런 인간은 죽어야 마땅합니다’를 뽑아낼 수가 없어요. 이만큼 열심히  살았으니까 나는 살아야 마땅하다 이게 튀어나오는 거에요.


주님께서 죽어야 마땅함을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어요. 죽는 놈이 뭘 보고 들어요. 그냥 죽어줘.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까불지도 말고 죽어줘. 죽어줬을 때 비로소 그 관계가 보지 않고 믿은 믿음이에요 그게.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구원받는 것. 그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라고요.


자기가 펄펄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보탬 기여해야 되는데 행위를 착한건  해야되잖아 이렇게 나대게 되면 아무리 해도 그건 보고 믿는 믿음이에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고 믿는 믿음이에요. 보지 않고 믿어 버리면 그 사람은 죽을 수가 없어요.


왜? 괜찮은 것이 자기 기억에 섞였기 때문에 그걸 차마 부정할 수가 없고 부인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이만큼 착했고 이만큼 성실했는데 그걸 죄라고 모른척하면 저는 곤란하죠 이렇게 나오죠. 여전히 자기가 벌떡벌떡 살아가지고 자기가 잘난 척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잡혔을 때 제자들 다 도망갔지요. 사도 요한도 도망갔지 다 도망갔어요. 일종의 뭐냐? 수치스러운 겁니다.


자, 인간의 수치가 어디 있느냐? 인간들은 자기 하체에 수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지난 오후설교인가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수치는 하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올라온다고요. 하나님과 얼굴을 맞댈 때 가장 수치스러워요.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피해버려요. 모세의 얼굴은 영광스럽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그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어요. 이게 이사야에 나옵니다. 저 사람의 얼굴은 왜저리 흉측하지? 라고 예언해놓고 그 흉측해진 얼굴이 누구 때문인데?! 라고 이야기해요.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자기가 망쳐놓고 엉망진창 만들어놓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라고 지적하면서 다가서는 것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맞았잖아. 채찍 맞았잖아. 그게 사도 바울에게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는 사람이다”와 같은 원리에요. 너는 네가 한 짓을 모른다. 네가 한 짓을 몰라요. 왜? 우리는 너무 아름다운 자기의 과거에 사로잡혀가지고. 지난날 내가 잘났던 것에 완전히 매료되어서 거기에 완전히 빠져가지고 자기가 훌륭한줄 알고 있어요. 훌륭하니까 예수 믿고 더 훌륭하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여러분 아시지만 다시 한번 정리할께요. 주님께서 인간 세계에다가 홀로 장벽을 뚫고 주님 세계에 갔을 때 이 장벽 뚫을 때 그냥 어디 카퍼필드 마술하듯이 멀쩡하게 통과한게 아니고 일그러지고 채찍 맞고 그야말로 흉하게 돌아가셨잖아요. 그 흉하게 돌아가신 그 흉한 모습 그대로 여기 다시 등장하신거에요.


물론 지금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흉측하지 않지만 이제는 그 모습을 누가 재현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제자, 열한 제자들이 복사판으로 뒤집어씌여야 되는 거에요. 자기 고생만큼 흉측한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고 누구 얼굴인가? 주님의 의해서 재편된 이제는 내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사람화된 주님의 사람이 된 그러한 증거물로써 주님 가신 길 그 희망길을 가는 거에요.


여러분 주님 십자가 달릴 때 발가벗었지요? 그게 그렇게 수치스럽습니까? 수치가 어디있느냐 하는 거에요 수치가. 주님을 만나지 못한 그것이 수치에요. 주님이 찾아오지 않는 그 자체가 수치입니다. 교만한 것이고 뻔뻔스러운 것이에요. 자기 쪽에서 뭐 해보겠다 하는 것이 이게 수치에요. 그거는 진정 죽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잠시 여기서 제가 죽음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인간의 죽음 뭐냐? 이거는 성경 아니면 인간의 죽음을 몰라요. 인간의 죽음이 뭐냐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예언하기를 20세 이상 애들 다 죽인다고 했어요. 20세 이상 애들. 그 논리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홍해 건너와서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다 죽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40일 동안 뺑뺑이 돌리게 한다 광야에서 사막에서 돌리게 한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러면 죽음은 뭐냐 하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살고 싶다고 안 죽고 뭐 죽고 싶다고 죽는게 아니고 죽음은 의도적으로 주와 함께 있다는 조건이 나를 압박해줘야 죽어요.


주님한테는 납득이 되는데 우리한테는 납득이 안 될 때 그게 죽음이에요. 죽음과 함께 동행하는 광야 동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환경이 여전히 자기 위해서 존재하는 환경이라고 아직도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방해돼요? 주의 일이 계속 방해되는 거에요.


주님이여 왜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마실 것을 것을 주지 않습니까? 고기 먹고 싶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주님을 위한 환경인데 고집을 부리기를 무슨 고집을 부리느냐 하면 내가 나를 위한 환경이여야 참된 주님이잖아요 우기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죽음이 뭐냐 하면 주의 뜻을 모르는게 죽음이죠.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 중심주의가 죽음이에요 그게.


특히 다 죽는다는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열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 나오지요. 걸어서 저 끝까지 올라가기도 많이 올라갔어. 지금은 저 시리아 북부까지 터키까지는 안 갔지만 그 정도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내려와서 참 살기 좋았더라 하지만 우리는 못 들어간다. 사람들 엉엉 울었지요. 그 울고 난 뒤에 너희들 믿지 않으니까 다 죽인다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자기 생각한거에요.


자, 그게 죽음입니다. 죽음부터 먼저 설명했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한 조성된 환경 속에서 이게 자기가 살아야 될 환경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가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죽음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죽음을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죽음은 주님이 조성된 환경이 죽음을 이야기하지 주님이 주신 환경을 모르면 자기 죽는 것도 모르고 죽어요. 죽는 이유도 모르고 죽는다고요.


자, 그러면 죽음이 정리되었으니까 생명은 뭐냐? 거기서 면제되는 사람이 생명이에요. 누구냐 하면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환경을 통해서만 생명이 나와요. 그 외에는 생명이 안 나와요. 왜 나는 왜 살지? 의아해해야 이게 생명이다. 의아해해야 생명이다 이 말이죠.


물론 이런 이야기를 로마서 5장에서는 아주 포괄적으로 다뤄놨어요. 그래서 로마서가 구약보다 어려워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가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거는 주님이 주관이 되는 주님이 주인이 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장벽이 있고 가나안 땅 사람이 등치가 크고 뭐 어떤 강력한 무기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죽은 자는 거기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죽은 자답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어차피 함께 있는게 주님과 함께 있잖아요. 그러면 그쪽 세계도 누가 보장하고 누가 책임지는 겁니까? 주님이 자기 약속대로 보장할 뿐이지 우리가 거기서 가타부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구원될 때는 선악의 가치를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기를 선악 때문에 범죄했잖아요.


그럼 구원받은 사람은 뭐에서 탈피해야 돼요? 나 행동 잘했나, 못했나에 대해서 탈피하라고 구원한겁니다. 구원해놓고 자기 선악을 논한다는 것은 이게 뭐에요? 도대체. 도대체 구원받은거 맞아요? 목사님 보고 이야기하는거 아닙니다. 선악이 그대로 있다고 하면 그건 구원이 안 된 상태잖아요.


창세기 3장 이야기가 왜 있습니까? 2장 이야기가 왜 있습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지옥갔잖아요. 그러면 천국갔다는 말은 뭐에 구애를 안 받는다? 상관없다? 신경 쓸 필요없다? 죄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에요 죄. 선과 악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에요. 선하면 내 인생 피고, 악하면 내 인생 꼴아박는다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에요.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 이 중요한 거.


자, 요한복음 21장 왜 썼다고 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은 분명히 요한복음 20장에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이야기 끝나버렸어요. 그럼 우리 생각에는 그래 상상해서 예수님 그때 좋았던 시절 상상하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아니에요. 이미 장벽을 쳤잖아요.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시고 지금 부활한 상태고 제자들은 뭐냐 하면 뚱한 상태에 있단 말이죠. 예수님 잡힐 때 도망쳤잖아요. 도망치고 뻔한 상태에 있는 거에요. 이거는 장벽을 못 뚫었어요. 그러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그 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 장벽을 뚫고 도로 이쪽에 온 겁니다.


도로 이쪽에 와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보지 않고 믿게 하는 그러한 자를 되게 하는데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시던 인생길이 예수님 인생길이 아버지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의 노선이었던거에요. 그렇다면 그 제자들에게 가는 곳마다 사태를 유발시켜줘야 되는 거에요.


그들은 고기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불러냈습니까? 누가 찾아갔어요? 예수님이 알아서 찾아갔잖아요. 예수님이 알아서. 알아서 찾아갈 때에 그때는 자기가 예수 믿었던 좋은 시절을 추억하는게 아니에요. 실제로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겁니다. 재현하면서 뭘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동안 예수님을 버렸던 이유가 이게 옛날에 광야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기 잘 먹고 잘 살라고 자기 위주로 하나님을 거론했던 그러한 오류 있잖아요. 그러한 오류를 제자들이 똑같이 하는거에요.


그런데 그게 아무리 상상하던 눈으로 보던 그게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들은 예수님이 살았던 예수님이 통과했던 그 세계가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게한 상황이잖아요. 그 상황이 어디로 다시 그대로 제자들에게 그대로 덮혀져야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예수님과 합류가 돼요. 안 그러면 합류가 안됩니다.


장벽을 들고 그대로 오기 때문에. 주님께서 통과했던 그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장벽이 있잖아요. 장벽을 계속 장벽 채로 덮쳐야돼요. 장벽을 이해하고 분석해서 구원받는게 아니고 아예 장벽 자체가 덮쳐야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고생하고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다 누구 탓입니까? 우리의 죄 탓이죠. 우리의 죄가 뭡니까? 아까 했지요. 광야에서. 독자적으로 나 살 궁리하고 나 구원받을 궁리하는게 그게 바로 죄가 된겁니다. 나를 위한 세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를 나 중심을 포기를 못하는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상황을 유발시키되 예수님께서 상황을 유발시킬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가 죽어 마땅함을 늙어서 아는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부터 너는 죽어야 마땅한 존재였구나를 깨닫는 식으로 주님께서 만났던 시절의 과거를 주님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재편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고기잡을 때 찾아오신거에요. 찾아오신거에요.


따라서 제자들 입장에서 구원이라는 문제는 내가 내 쪽에서 내 세계 같으면 내가 얼마나 성실하냐 실수를 줄이느냐 죄 안 짓느냐 문제인데 예수님께서 이미 이 장벽을 뚫고 들어오신 분이 친히 왔다는 말은 구원해주겠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구원은 뭐냐? 선악에 이제는 더 이상 구애받지 않는 상태로 건지시는 거에요. 선과 악이.


“행동 똑바로 해” 이걸 묻는게 아니에요 이제는. 왜냐하면 상황은 누가 의도적으로 만든다? 상황은 주님이 만들어요. 물론 우리들이 제자들이나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떤 행동해놓고 반성하고 다시는 안 해야지 이렇게 하지만 그 상황이 주님이 만든 상황인줄 모르고 내가 실수해서 생긴 상황이라고 원인 결과를 그렇게 연결시키는 거에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와서 딱 보니까 아 이 상황은 내가 일부러 만들려고 한 상황이 아니고 주께서 내 인생을 그렇고 그런 인생, 백날 살아봐야 똑같은 반복되는 인생을 주님께서 구원받는 인생으로 주님의 인생으로 편집을 다시 짜서 내게 유발시킨 그러한 시간들을 우리가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을 벌리는 거에요. 여기 고기잡을 때 처음 만났던 상황. 처음 만날 때는 그때는 자기가 정신을 못 차렸지요. 뭐 죄인입니다 하다가 지금은 뭐냐 하면 고기잡으러 와서 잡수시는 이 모든 것은 베드로 자신이 어떻게 잘 되볼까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주께서 일방적으로 실시하시고 뽑아내 가는. 주님의 죽음에 동참시키는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키는 상황 속에 그들이 놓여있다는 겁니다. 놓여있는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하여튼 베드로는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는 거에요.


그러면 로마서 5장에서는 이걸 포괄적으로 크게 생각한다는데 크게 생각한다는게 뭐냐? 아까 다시 보기 위해서 40일 동안 20세 이상 다 죽이죠? 다 죽일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면제가 된거에요. 죽어야 되는데 면제가 된 거에요. 믿음으로 영생을 뽑아낸게 아닙니다. 면제된 거에요 면제. 내가 죽어야 마땅함은 똑같아요.


다만 죽음 속에서 면제됐다는 말은 이제 면제된 사람만이 모든 공로 모든 그 결과를 누구 탓으로 돌리겠습니까? 주님 탓으로 돌리죠. 주께서 구원 영생주셔서 영생 얻었습니다. 내가 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거에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보고 뭡니까? 갈렙과 여호수아가 믿음이 있어서 구원받았다고 하거든요. 그게 아니라니까. 믿음이 있어서 구원받은게 아니고 소급해서 믿음 있는 걸로 쳐준거에요. 그 관계 때문에. 주님께서 면제해주니까 그게 결과적으로 그게 믿는 관계가 되어버린거에요.


우리는 항상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마세요.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의 믿음이 의미가 있는거에요. 내 믿음이 의미가 있는게 아니고. 항상 내 믿음 발로 밟아버리고. 주님의 소망이 소망이고 주님의 사랑이 사랑이지 내 사랑은 사랑도 아니에요. 죽은 놈이 무슨 믿음 소망 사랑 나타냅니까. 나타내봤자 또 잘했나 못했나 또 스스로 또 측정해서 또 말썽꾸러기 되어서 안돼요.


광야에서 놀라운 점은 바로 그렇게 너희들 다 죽인다 해놓고 그때 이야기가 끝나는게 아니고 신명기에 보면 그 다음부터는 그들이 그 죽어야 될 20세 이상 어른들이 계속 원망해요. 참 재미있지요. 죽어야한다면 섭섭하지만 막상 주께서 유발한 상황을 몰아넣으니까 그들이  죽어 마땅할 수밖에 없는 증거물들이 40일 동안 계속 터져나와요. 죽여놓고 죽는 이유를 이야기해요.


그리고 영생 얻은 사람은 영생 얻어놓고 영생 얻을 이유를 우리를 통해서 증거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러니까 천당가자 이러니까 천당가자. 저쪽에서는 저리니까 지옥가자 저리니까 지옥가자 이렇게 되는거에요. 참 불공평한 하나님이십니다. 일체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책임을 묻지 않는거에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아니한다.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아니한다. 이렇게 개념 등장하지만 무슨 뜻인지 잘 와닿지 않지요? 머리 좋은 사람 빼놓고요. 이게 뭐냐 하면 같은 종이에다가 한쪽은 흑이고 한쪽은 백이라면 이거 분명히 구별되었지요? 이쪽 영역은 흑이고 이쪽은 백이다. 구별되었지요? 하지만 같은 종이잖아요.


종이 재질이 같은 종이잖아요. 분리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지옥이 있는 것은 천국 때문이고 천국이 있는 것은 지옥 때문이에요. 버림받은 자가 있어야 택함이 의미가 있고 택함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꼭 버림받아야 돼, 저 사람들은. 이것은 선악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닙니다. 선악 이전의 문제에요. 그래서 구원받는 것도 우리가 잘나고 못나고 관계없는 이전의 원리로서 구원되는 겁니다. 잊지마세요~~ 잊지마세요.


자꾸 행동해놓고 반성하고 자꾸 그러지 마세요. 물론 반성되는 상황을 누가 유발했겠어요? 주님이 유발했겠지요. 그래도 우리가 얼마나 믿음 없는 것을 또 티내게 만들지요. 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주님을 상상해서 보지 않고 살아있음을 믿고 상상해야 되는데. 상상해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애가 성적 내려가는 것을 보여주고 그걸 보면서 우리의 속마음이 톡 튀어나오게 만드는 거에요. 아 내 탓이야. 아차 그게 이게 바로 죽어 마땅함.


다시 말해서 왜 내 인생을 내가 편집 못하고 주님 일방적으로 주님의 인생으로 편집되야 될 이유. 주님의 인생에다가 합류되는 식으로 실려가는 식으로 구원되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뭐냐? 자기 뜻 말고 주의 뜻대로 인생을 몰고 가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거에요.


그럼 로마서 5장에서는 이게 어떻게 포괄적으로 되느냐? 여기서 이렇게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제 강의나 설교를 듣고 아직도 여전히 붙들고 질문하는 질문들이 있어요. 그 질문을 제가 한번 정리를 해드릴게요. 그 질문이 뭐냐 하면 목사님 그래서 이스라엘이 단체로 구원되는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로 어린양으로 구원받는 것 이해되는데 그것을 알려줄 때에 개인적으로 옵니까 집단적으로 옵니까? 이걸 물어요.


내가 이해하겠는데 해놓고 물어요 이해하겠는데. 개인적으로 옵니까? 이게 집단적으로 옵니까? 아무리 집단구원이라고 해도 개인으로 오게 되면 개인구원하고 같은 원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거에요. 아무리 예수님 이야기해도 자기 구원에 관심있는 모양이에요. 그 점을 제가 어제 있었던 일로 쉬운 예로 하겠습니다.


US 오픈 LPGA 골프대회 있었지요? 거기 누가 우승을 했느냐 하면은 이정은6가 우승을 했다고요. 이정은6. 그래서 내가 알아봤어요. 우리나라 여자 골프 여자선수중에 이정은이 몇 명되는가? 6명이라는거에요. 1번째 이정은이가 43세였고 2번째 이정은이가 42세였고요. 3번째가 34였고 32세였고 31세였고 우승한 이정은이는 23세였습니다. 이정은1, 이정은2, 이정은3, 이정은4에요.


사람들이 자기 구원에 관심있기 때문에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 하면은 나 구원하는 예수로 믿어요. 그러면 예수1의 나1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예수 믿지요. 다른 사람도 ‘나’가 되겠지요. 그 사람 본인에게. 나2에 예수2가 되는 거에요. 이 예수 다 달라요. 또 나3에 예수3가 되겠지요. 사람 100명이면 예수 종류가 100가지가 되어 버려요.


이런 관심사가 관심사입니다. 여기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이정은이가 1,2,3,4,5,6중에 6이 우승했는데 여기서 참석한 사람은 US 오픈에 참석한 사람은 이정은5와 6가 참석했어요. 5가 몇 등 했느냐 하면 오늘 신문에 보니까 34등했어요. 6이 1등 했고.


주님은 어떻게 로마서 5장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정은 1,2,3 아니라 전부다 이걸 하나의 이정은으로 만들어버려요. 하나의 아담과 하나의 예수님을 하나의 아담과 연결을 시켜요 아담과. 그러면 여기 이정은 1,2,3는 이거는 아담이 여기 들어가야 되잖아요.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님과 아담이 연결시키는 이 계약은 죽어야 들어가요.


나 죽을 때 누가 죽어요? 내가 믿었던 예수도 같이 가짜로 작살나야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성령받은 성도에게 누굴 죽이느냐 하면은 내가 믿는 예수가 가짜라고 그걸 죽여버려요. 죽이는 방법은 날 죽이면 다 죽어요. 주께서 나를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지가 알아서 예수를 죽여요. 지가. 예수 한번 갈아타기 해볼까? 이제는 다른 예수 다른 목사 찾아서 돌아다닌다니까.


내가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한 예수는 나를 위한 예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예수 아니에요. 로마서 5장에서는 그걸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죄’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한 아담과 한 예수가 연결되는 그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전부 다 죄고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죽은 자 대우해주겠다는데 뭐가 그게 섭섭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죽는다는 것은 굶어죽는게 아니고 100평짜리 아파트 살고 그래도 괜찮아요. 중요한 것은 나의, 나 자체가 지금 주의 하는 일에 지금 방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에요. 참 이런 말 어렵지만 여러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 제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테니 공통점을 찾아보세요. 이번에 이정은이가 US오픈 우승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경리단길이라는 곳이 있어요. 이태원 근처에 서울에서 카페 많고 임대료 비싸가지고 경리단길 장사가 안돼요. 너무 올려서. 그 경리단에 경기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이번에 수능에 난이도가 높아진다는 거에요. 이 세가지 이야기에 공통점이 뭐겠습니까? 또 하나를 보탤까요? 헝가리에 빠져서 30명 죽었다.


자, 이 네가지의 이야기의 공통점. 골프 이야기, 경리단길 임대료 놓였다는 이야기, 수능 이야기 우리 애 아프다는 이야기. 자, 이런 이야기 공통점이 뭡니까? 전부다 예수님의 일을 최우선 일로 간주하지 않고 막아섰다. 막는게 중요해요. 막아선거에요. 왜 막아섰느냐 하면은 그 일로 인하여 내가 혹시 수치스럽게 될까바 염려해서 거기에 관심을 두는거에요.


우리 애가 아프면 엄마가 되서 뭐했어? 애가 아픈 것도 모르고 그런 욕 얻으면 누가 수치스러워요? 내가 안 수치스러워야할 내가 수치스럽게 될까봐 걱정하는 거에요. 그 걱정이 결국 나의 예수를 따로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저 뒤에 주님이 있는데 앞에 얼쩡거려요. 자꾸.


오늘 본문에 제자들은 고기잡으러 간다고요. 왜 고기잡으러 갔습니까? 주님은 물 건너갔어요. 이제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닙니까. 고기잡으러 간거에요. 재주가 그 재주밖에 없어서. 그런데 그게 주님의 일을 차단하고 있고 보이지 않게 가려버리는 거에요. 최우선 관심사가 아닌거에요.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잘되는 내 구원에 관심이 있고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내 구원받을까가 주님 일에 훼방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자기 구원받으려고 반듯하게 살면 천당간다고 율법을 지키는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도 그것을 아시고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 틀렸습니다. 다 틀린거에요 주님한테. 너 까불지 마라. 마음속의 간음도 간음이다. 다 틀린거에요. 다 틀려도 그들은 예수님을 결국 어떻게 했다? 살해해버렸다.


지금 그 이야기가 성경에 왜 있느냐 하면은 내 구원이 누굴 막습니까? 진짜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그러한 사태밖에 안돼요. 내 구원이. 내 인생문제 고민하는 그것이. 우리 동네에 어떤 주유소가 있어요. 사적인 이야기지만 적절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적인 이야기지만.


주유소가 있고 큰길이 여기 있는데 우리 집에 온 사람은 아시겠지요. 우리 집에 안 와봤어요? 주유소가 있고 우리 집이 여기 있거든요. 여기 버스 정류소가 이렇게 있고 이쪽에 버스정류장이 이렇게 있어요. 여기서 한 400m쯤 되는가? 400~500m쯤 되요. 이 도로에 이쪽에 사람이 높으니까 헉헉해가지고 뛰어 올라가가지고 빨리 401번이 급행이 오는지 봐야된단 말이죠.


봐야되는데 이 주유소가 턱하니 1512원해가지고 벌겋게 해가지고 이걸 딱 가로막네. 아무리 키가 보통 키 가지고는 안 보인다고. 빨리 뛰어야 될지 늦게 뛰어야 될지 그 다음차 몇 번 오는지 모른다고요. 내가 여기 주민센터 가가지고 무려 세 번이나 이거 치워달라고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안 들어요. 도청에 이야기하라고.


그래서 그것도 주의 뜻이라고 포기했지요. 독일 갔다오니까 치워져있어요. 뭐냐 하면 내 장사 잘 보이게 들어오라고 자기 입장만 고수하면서 하는거에요. 자기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을 생각 못 한겁니다. 구원 우리가 받습니까? 우리가 합니까? 우리 뒤에 누가 있어요? 주님은 주님의 방식대로 구원하는거에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주의 일에 방해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 못 합니다. 왜? 나는 살아야 된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살아야 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살하지 마세요. 주께서 죽이는 방법은 그냥 죽이면 구원이 안돼요. 주님이 당했던 방식으로 죽여줘야 돼요. 그 죽이는 방식이 뭐냐 하면은 바로 선악으로 벌벌 떠는 우리를 구애받지 않게 이제는 선과 악에 그걸 능가한 원초적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그 소실점으로 다리부터 질질 끌고가는 거에요. 그 구멍 속으로 소실구멍 속으로.


너는 여기서 창세전부터 선악과 상관없는데서 출생했다는 것을 계속해서 통보해주면서 끌고가는 거에요. 신나죠 우리는 신나. 우리가 언제 자유를 얻습니까? 그 과정이 뭐냐 하면 내가 내 식대로 나 잘못한 것 때문에 벌벌 떨면서 내가 다음에는 벌 받을거다 이런 식으로 벌벌 떨면서 떠는 그런 상태를 유발시켜주는 것부터 하는거에요.


이렇게 내가 나쁜 짓 했지만 내가 예수 믿어야 돼. 그러고 또 믿기 시작합니다. 믿는게 문제에요 믿는게. 안 믿어도 되는데 계속 믿는 거에요. 왜? 상태를 회복하려고. 정상코스 들어가려고. 믿습니다. 이제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하지마! 충성하지마! 충성하지마!!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네꺼 받지도 않아! 더러운 것을 누가 받아요? 안 받아요. 가리지나 말아라 가리지나. 안 받아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장벽을 들고 오는데 뭘 받아요. 장벽에 우리 것을 행함을 첨가할 수 있습니까? 첨가제인데요. 맛 다 버리는데. 백종원한테 욕 얻어먹는데. 인공조미료 친다고. 로마서 5장에서는 한 아담의 문제지 우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아담이 우리를 하수인 만들어가지고 계속 끼어드는거에요 그게.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행함이 아니고 믿음은 나중 문제에요. 일단 행함이 아니고를 네가 알 때 비로소 행함이 아니라면 곧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이삭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어요? 행함이 아니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그거는 너의 일이라고 하지 않고 주의 은혜 주의 선물로 준걸로 했다는 것을 소급해서 결과적으로 그것을 두자로 ‘믿음’이다. 그 믿음이 바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에요. 늘 보고 있으면서도 안 봐요. 늘 보고 있으면서도 주님이 하셨음이 믿어지는 것. 이게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IP:59.♡.122.247) 19-06-17 13:37 
강남-요한복음 21장 1절(나를 넘어선 의미)190604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이 살아있음에 모든 관심사가 자기로 마감되거든요. 모든게 자기로 마감되기 때문에 그 주님은 주님의 십자가 부활의 세계로서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그걸 골키퍼처럼 막아서면서 “주님 제발 저 살게 해주세요” 라고 막아서버리면 결국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배열을 하느냐 이게 주님의 스토리가 아니고 나의 대한 스토리로 다 전락하고 말아요.


특히 목사님들 아시겠지만 자기 목회 잘했는가 교회 잘 키워내서 부흥시킨거 그걸로 마감되겠지요. 자기 사업이니까. 또 장사한 사람은 그렇게 하고. 또 뭐 이렇게 TV 나오는 연예인들은 자기 노래하고 하면 되는데 사업하고 망했다고 쫄딱 쓰디쓴 맛을 보았다고 이야기할 때 그 모든 이야기를 사람들이 듣고싶은 거에요. 네 인생을 어떻게 망했느냐. 왜? 비교하고 싶어서.


그런데 건짐 받은 사람은 비교대상이 없습니다. 비교대상이 없어요. 왜냐하면 경쟁해서 구원받은게 아니기 때문에. 애써서 먼저 앞장서서 따낸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타고넘어왔잖아 그 장벽을. 아무리 뚫어도 뚫을 수 없는 장벽을. 아예 타고 넘어왔고 아예 앞장서서 밀고 들어왔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이 아까도 동영상했지만 예수를 자랑하는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자랑해요.


예수 자랑하게 되면 우리 주님 예수님이다 그거 자랑할거에요. 그게 아니고 십자가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주님이 와서 그걸 깨우쳐줬다는 것 그 사실. 주님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의미에서 십자가만 자랑하지요. 그 사건, 인간의 충돌 주님과의 충돌.


이 모든 관심사가 자기로부터 이게 마감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참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요 예수님께서 오늘 21장에서 제자들 찾아온 것은 제자들 구원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신의 믿음 그 행하심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자기 사람들을 죽음으로 유도한거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고유의 가치 가지고 대들지요. 주님은 좋겠다만은 나는요?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베드로는 오늘 본문 21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를 않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15절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참 이 대목 읽어보면 과거 이야기가 솔솔 떠올라요. 도대체 교회에서 헌신하면서 얼마나 이 대목을 들어왔고 울려먹어 왔습니까. 이 대목하고 로마서 12장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헌신하라. 헌신예배 때 하는거요. 얼마나 우려먹었어요 이 대목을. 네?! 이 설교를. 이제부터 예수 믿었으니까 주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이 대목은 뭐냐 하면 너는 가치 없다는 거에요.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너는 애초부터 가치없는 거고 아니 찾아와서도 너의 가치는 없어요. 오직 주님의 가치만 돋보이기 위해서 베드로가 거기에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납치당한거에요. 그냥 편입된거에요. 이게 ‘택함’의 의미에요.


하나님의 창세전의 비밀은 뭐냐 하면 ‘예수 안’ 입니다. 예수 안의 비밀이에요. 예수 안에 모든게 통일된 비밀이거든요. 이 비밀을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게 어떤 방향이 되느냐를 같이 이제 경유하여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선악과를 따먹게 해가지고 죽음에 이르게 했고 우리 보기에는 참 ‘아~~그 때 안 따먹을건데’ 후회하지만 천사들 보기에는 세상에 저런 복이 어디 있느냐 죽음을 아는 피조물이 되다니. 우리는 죽음도 모르는데 저들은 죽음을 아니까.


죽음을 아는 쪽이 오히려 죽음 자체가 창조의 비밀이니까. 상대적으로 천사는 배제되는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이 죄인들의 집합인 이 교회의 진리가 나중에는 하늘의  천사의 영역까지 장악한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있는거에요. 모든 비밀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믿음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주님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그 죽음은 우리가 아는 죽음 말고 주께서 갔던 코스대로 우리에게 가게하시는 겁니다. 가게하실 때 뭐는 죽고 뭐는 사느냐? 선악을 아는 나는 죽고 생판 내가 모르는 나, 창세전에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한 내가 그 현장에 톡 튀어나오는 겁니다.


몇 초 가지도 못하지만. 다시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죽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선악을 아는 나는 무가치하고 그게 가리워졌거든요. 아까 그 광고판 이야기했지요. 주유소 광고판. 이게 가리워져 있으니까 뒤에것이 안보였던거에요. 선악이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죽어버리니까 뒤에 비로소 주님이 창세전에 준비된 바로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이죠.


앞에 있는 광고판은 나고 뒤에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나고 이게 다시 연결되는 겁니다. 물론 그 나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 대표해서 ‘나’라고 보면 돼요. 하나의 아담. 이정은5, 6 필요없어요. 어디가도 이정은이고 이쪽은 어디가도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이 우리를 동일하게 보는 겁니다. 그 원리로 보는거에요.


그렇게 하는 작업에서 베드로로 하여금 처음부터 무슨 어부가 되게 했습니까? 여기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했지요.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였습니다. 어부인데 베드로가 뭘 잡았느냐 하면 고기를 잡았거든요. 고기 잡는데 잡는다는 것은 유지시켜주고요 그 프레임은 주님이 유지시키고 내용은 고기 잡지 말고 사람 잡아라 하는거죠. 프레임은 있고 형식은 있고 내용은 주님이 알아서 일방적으로 교체해버립니다.


그러면 자기가 어떤 나의 인생은 이렇게 살겠다고 하면서 형식 갖추고 내용은 자기 따로 생각한 바가 있을거 아닙니까. 이게 강제조치로 이게 교체된다 이 말입니다. 강제조치로. 프레임은 그 프레임이고요. 그래서 고기 잡는 것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데 그러면 고기를 잡을 때 구원받는 사람을 이렇게 낚느냐? 그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에요.


주님의 방식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13장을 누가 한번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13장 47절 48절 49절 50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고기 잡을 때 좋은 고기만 잡습니까? 나쁜 고기도 겸하여 잡아요? 나쁜 고기도 겸하여 잡는거에요. 나쁜 고기도 겸하여 잡아요. 베드로가 전도했지만 그 전도한 사람이 좋은 것 나쁜 것 하지 않고 다 그대로 베드로 좋아한다 했고 따라다녔지요. 아까 이야기한 것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따로 있는게 아니고 분리되지 않아요.


나쁜 고기가 없다면 좋은 고기도 없어져요. 나쁜 고기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좋은 고기라는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몇 명이었어요? 한 명 아니었어요. 우리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강도만 달리게 하면 참 경제적이죠. 값을 싸게 먹히잖아요. 등장인물 배우 두사람 말고 한사람 쓰면 되잖아요. 그런데 두사람 쓰지요.


이게 천국과 지옥은 주님의 양면성을 가진 속성을 그대로 결산을 하기 때문에 그게 지옥되고 천국되는 거에요. 공의롭게 심판하는 동네 지옥, 사랑으로 봐주는 동네 그게 천국. 그릇 만들 때 한 종류로 만드는게 아니에요. 진노의 그릇 그리고 긍휼의 그릇. 이것이 주님의 솜씨고 그 솜씨가 지상에서 그대로 발휘하고 그 발휘한 것을 베드로를 통해서 그대로 역할을 맡고있는 거에요.


여러분 나쁜 고기도 좀 건지세요. 나쁜 고기도. 아마 돌아설 사람도 많이 아마 생겼을거에요. 좋은 고기 그거 몰라요. 뭐가 좋은 고기인지 자기 본인도 좋은 고기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무슨 좋은 고기를 건져요. 주께서 유발한다니까요. 어떤 사태든 주께서 유발해요. 성도의 일은요 주께서 지시를 주님께서 시작한 일을 그 다음에 우리에게 지시란 형식으로 깨닫게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지시는 주님을 드러내는데 내가 그 성질 급해서 내가 “주께 충성하겠습니다” 나서는 것은 꼭 가치가 ‘나’로 마감되어 버려요. 나로 마감이 되면 그러면 우리는 꼭 결산에 나서요. 내가 착했었나? 나쁜짓 했었나? 내가 충실했나? 자꾸 선악적인 논제로 자꾸 결산을 시키니 이게 주의 일에 방해된다니까요. 나로 모든 의미가 마감되면 안돼요. 나를 차고 넘쳐 넘어서야 돼요. 나를 밟고 방해하지 말라고 나를 짓밟고 나서야 돼요.


자, 좋은 고기 나쁜 고기라고 하는데 마태복음에 인간을 고기로 봤으니까 같은 고기로 봅시다. 자, 인간은 어떻게 있느냐하면 동물하고 달라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시공간을 휘두르고 나타나요. 시공간. 용어는 어렵다만은 시간과 + 공간을 갖고 나온다고요.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에요. 내가 주인공. 시간과 공간을.


인간은 자기가 여기 있다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저 뒤에 계시는 주님 보시기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건이에요. ‘사건’.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사건이다 말이죠. 사건인데 인간은 사건으로 볼 마음이 없어요. 너무 허무하니까. 존재로 보게 되면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비로소 최종 의미를 자기한테 최종 의미를 자기한테 부여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뉴브강. 다뉴브강 어디 있겠지 우리는. 어디 있겠지요. 흐르고 있겠지요. 뭐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노래도 있고 있겠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우리 이모가 어디 유럽에 놀러간다고 여행사 했는데 좋은 여행사 했는데 잘못 만나가지고 이모부하고 이모하고 여행 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구조자 명단에는 빠져있고 실종됐다는데 말이 실종이지 아직 안 나온거 보니까 이거 죽은거잖아요. 실종되었으면 뭐 걸어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다뉴브강이 내 이모, 이모부라는 그것 때문에 갑자기 다뉴브강이 갑자기 뭐로 등장했습니까? 내 존재 의미에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를 주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이게 일방적으로 이게 편입이 되요. 인간이라는게. 인간이 그냥 무심코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인데 사건같으면 내가 무산되고 내가 해체되어도 상관이 없는데 우리는 절대로 나를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영원한 존재로 굳히기에 들어가요 굳히기에. 유도에서 목 조르고 굳히기. 굳히기에 들어간다고요.


그 좋았던 다뉴브강도 우리 이모를 삼켰던 다뉴브강으로 돌변해버려요. 미워! 다뉴브강!! 이렇게 되버린다고요. 다뉴브강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가만 있는데. 선장이 잘못했지. 가만있는 다뉴브강 욕먹게 되었어요. 나 헝가리에 놀러 안갈거야 이런 식으로. 내 존재가 존재로부터 출발한 계시된 의미에 네가 뭔데 훼손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마귀지 이게 인간입니까? 괴물이지요. 이거 괴물이지요. 다같이 괴물이니까 괴물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거 주님께서 용납 안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 인간은 동물하고 달라서 바깥 세상을 분석하고 해석해요. 분석하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귀에 용어만 딱 들어와도 그 용어를 그냥 용어로 마중 나가지 않아요. 내가 잘 되야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용어에 접합니다. 목사가 설교하는데 설교에서 막 단어가 막 나오잖아요. 그 단어 전부다 쏙쏙쏙쏙 그러니까 내가 구원되는거 맞지요? 라고 전부다 일방적 자기 존재 좋아라고 일방적인 해석을 해버리는게 인간이에요. 일방적인 해석을 해버리는게.


인간들이 이게 시공간성입니다. ‘시간과 공간’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앞으로 어디 갈거다. 천국에 내자리 하나 마련해 놨다. 전부 이런 식으로.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한적 있지요. 인간의 거처는 소유할 수 있어도 시간은 소유하지 못한다고요. 거처가 중요합니까? 거처가 위에요? 시간이 위입니까? 시간이 우위죠. 아무리 좋은 아파트 살아도 늙어죽는 것은 이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잖아요. 내가 늙어서 시간 따라서 점점 없어지는 것. 이거 안되잖아요. 어쨌든간에 인간은 자기의 시공간성을 포기를 못하고있는 겁니다.


자, 장벽이야기 장벽. 예수님 여기 계십니다. 먼저 십자가 부활하고 먼저 와 계십니다. 제자들 여기서 고기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그들의 대답, 그들이 느낀 느낌, 그들의 감정 이거는 그냥 나오는게 아니고 자기의 시공간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해석된 단어가 나오겠지요. 이것은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못 놓겠다는 거기서 나온 뭐냐? 의미 행위다. ‘의미’. 자꾸 자기한테 의미를 주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되면 존재니까 계속 나는 계속 살아야 한다가 되겠지요. 살아야 한다. 많이 피곤하시죠. 조금 참으세요. 살아야 한다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하는데 주님께서는 죽었잖아요. 죽고 난 뒤에 다른 모습으로 살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예수님 나름대로의 뭐가 있겠습니까? 시공간이 있을거다 이 말이죠. 이 시공간을 제자들에게 덮치는거에요.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참 이해하기 난처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가 용감하게 해드려야 되겠습니다. 이거 빼면 안 되니까. 그거 하기 전에 아까 한 것 다시 해봅시다. 고기를 잡을 때 고기를 잡는다 여기는 뭐가 있다? 좋은 고기 있고 뭡니까? 나쁜 고기 있지요. 나쁜 고기는 어디 갑니까? 지옥가고 좋은 고기는 천국가지요. 그럼 고기를 잡는 것은 누가 잡는다? 베드로 사도가 하겠지요.


그럼 사도가 뭘 갖고 있느냐? 시공간을 갖고 있겠지요. 내 말 들으면 구원받을거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미가 어디서 마감됩니까? 베드로에게 마감되겠지요. 그러나 베드로 뒤에 뭐가 있다 했어요? 예수님의 나름대로의 시공간이 있지요. 예수님의 시공간과 이것이 연결이 되지요. 연결될 때 중간에 누가 낍니까? 인간이 끼어들지요. 인간이 끼어들지요. 이게 지금 우리 이야기잖아요 우리 이야기.


내가 설교 좀 못했다고 사람들 지옥가는거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느낌은 그래요. 진짜 구원받을 영혼을 못 가게했구나. 지가 목사가 설교해놓고 지가 스스로 생각한다니까요. 교회 복음 아는 엄마가 자식한테 잔소리해놓고 지옥가면 어떡하지 걱정한다 이 말이죠. 중간에 자기 시공간, 자기 의미성이 끼어드는거에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쉬운 예를 들면 여러분 이제 복잡한 것이 이해 될거에요. 여러분들이 김유신장군하고 계백장군하고 전쟁을 벌였어요. 이게 무슨 전쟁이냐 하면 황산벌전쟁을 했지요? 황산벌 경기도인가 제천인가 아무튼 황산벌전쟁을 했지요. 그때 황산벌전쟁을 했을 때에 한번 상상해보세요.


김유신장군 계백장군 칼싸움하고 있는데 저와 여러분들이 양복, 슈트빨 딱 챙겨가지고 여러분 양장 원피스 이쁜거 공수해가지고 그 현장에 한번 가보자 이 말이죠. 그럼 한번 상상해보세요. 이런 재미난 상상이 있어요. 지금 김유신 막 칼싸움하다가 잠시 옆을 보는 거에요. 우리가 서서 구경하고 있으니까. 누구세요? 어느 별에서 왔어요? 이렇게 되잖아요 지금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싸워봤자 계백 지고 김유신 이겨.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장소가 중첩되었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장벽과 그 벽을 넘어서 이쪽 벽에 계시는 분이 그 쪽 상황을 시공간을 가지고 우리 시공간 아닙니다. 그쪽 시공간을 오게 되면 의미가 내 의미 아닙니다. 주님의 의미 최종적인 주님 중심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이미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5G가되는 거에요. 5G가.


5G 얘기 잠시 해볼까요? 젊은 사람 둘이 지금 야구중계보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한 50대쯤 과장쯤 되는 사람이 보고있다. 야 이게 안타가 되겠나 안되겠나. 그거는 안타다. 어?! 어떻게 알지? 응 알지. 야 도루하는데 도루가 세이프 됐나? 그 도루가 세이프되지. 세이프야 그건 아웃 아니야 세이프야. 어떻게 알지?!! 5G거든. 속도가 전송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중계방송이 빨리 되기 때문에. 시간이 그게 선전이에요. KT 선전나온다고요.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알아요. 뭘 아느냐 하면은 주께서 택한 백성은 건진다는걸 다 알아요. 그리고 우리는 항상 우리의 구원은 쓰잘데기 없고 그것은 갖고있으면 고민거리만 될 뿐이지 그걸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 그걸 알아요. 아는데 계백 장군은 모른단 말이에요. 이건 죽기 살기로 내일을 모르니까 저 계백이나 김유신이나 저걸 죽이지 않으면 내가 못 살아요. 그래서 이 세상은 뭐냐? 죽기 살기로 살아요.


요리해가지고 백종원 골목식당해가지고 한번 살아볼라고 욕 얻어먹어가면서 청년들 돈가스 이렇게 하고. 모든 세상 돌아가는 일이 일등해볼라고 미스트롯해서 일등해서 상금 3000만원 탈라고 또 송가인 나와가지고 노래 부르고 홍자 모르죠? 모르면 치워버려요. 세상에 어느 구석에도 진짜 서울대학 갈라고 애쓰고 뭐 모든 것이 아니야 몰라 우리는 장래를 모르는거야 내가 잘되야 돼. 누가 잘된다? 의미 모든 의미가 어디로 마감됩니까? 우리 쪽으로 마감되는 거에요.


내가 잘되는 것이 주의 축복이라고요. 누가 그런 소리해요? 우리는 예수님 성공했으면 더 이상 거기에 추가해서 집어넣지 맙시다. 쉽게 말해서 여러분 이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안 알아줍니다. 자, 유명하다는 말은 뭐냐? 인간의 각자 나름대로 시공간에서 영웅처럼 보일 때 유명한거에요. 각자의 시공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때 영웅이라는 말을 붙이는거에요.


그런데 하나도 안 부러우면 영웅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인생 그냥 즐기는 거죠. 그리고 우리의 시공간을 낭비하는거에요. 오랜만에 좋은 말 했네. 우리의 인생을 그냥 낭비하면 됩니다 ‘낭비’. 겁이 많아서 낭비를 못하지 사실은 낭비해도 되는 거에요. 낭비해도. 그냥 소모해도 상관없어요.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이 우리를 죽이자고 덤벼드는 상황이기 때문에. 살기를 촉구하는 상황이 아니고 그만 손 놓지 그만. 가드 내리지 그만. 이렇게 하지말고 손 놔. 그냥 놔. 내가 살던대로 그냥 살면 돼. 이게 주의 뜻이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공격하지 말란 말이죠. 지킬게 지킬 가치가 없다 이 말 아닙니까. 아니 몸 아파도 어떤 사람이 누구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어떤 사람이 병든 남편을 진짜 전신마비 남편을 봉양하는데 그 남편은 육체는 마비되었는데 자기의 정신 모든 정신은 자기 시공간은 자기 두뇌에 쏠려있어요.


아내가 그만큼 수고해서 봉양하면 고맙다는 소리는 안하고 맨날 욕이라. 맨날 심한 욕을 해요. 고통스러우니까 그거 해소한다고 자기를 옆에서 봉양하는 사람에게 모든게 불만이고 불평이고 발로 차고 욕하고 던지고 그래놓고 요양병원 가라하면 죽어도 안 가겠다. 내가 어떤 인간인데 거기에 왜 가요. 제가 그랬죠 모든 수치는 어디에 모여 있다고요?


하체가 수치스러운게 아니고 어디 있다고요? 인간의 낮짝이 얼굴이라는 말도 안돼. 인간의 낮짝이 수치스러워요. 인간의 낮짝은 날 좀 알아달라는거에요. 늙어빠진거 볼 거 뭐 볼 거 뭐 있다고. 날 알아달라. 그 알아달라는 입과 코로 나오는게 뭐냐? 자기를 사수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외부에게 뭘 퍼붓는다? 욕을 퍼붓는거에요.


사람이 욕을 자꾸 하는 이유는 자기가 지금 이런 식으로 나를 지켜야 되겠다는거에요. 시공간이 수상해요. 이 수상한 것은 마귀가 너는 신처럼 되리라. 너는 의미있어. 너를 네가 안 지키면 누가 지켜. 이것이 조립된 조합된 내용이 꽉 차있는 것이 시공간입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시공간뿐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바르게 하라 반듯하게 하라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내용은 그거에요. 자, 베드로야 도 닦아라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지. 그걸 이야기 하는게 아닙니다. 지금 이 이야기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베드로에게 사도에게 열두제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니까 평소에 예수님만 생각하라 이걸 요구하는게 아니고 뭐냐 하면 이거에요. 사명이에요. ‘사명’. 목격자. 사명. 사명은 자기 일이다? 아니다? 완전히 자기 일이 아닌 거에요. 애 키우고 남편하고 살고 이거 자기 일 아니에요. 사명이라니까. 어떤 사명? 다 잊어버렸지요.


좋은 고기 그 다음에 무슨 고기? 나쁜 고기. 필히 나쁜 고기를 집어넣으세요. 그래 나는 사명 받았으니까 천당 갈 사람만 뽑아야지.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나쁜 고기 좋은 고기 다 건져올려야돼요. 복음으로. 그래야 천국과 지옥이 대비될게 아닙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구별되되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따로따로 노는게 아니에요. 분리되지 않아요.


도 닦아라 이야기 아닙니다. 지금 요한복음 20장은 자 정신 차리고 앞으로 그런 실수 하지 마라 그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양을 맡긴다. 사명을 맡긴다. 사명이에요 사명. 그럼 사명은 내 일이다? 아니다? 내 일이 아닌거에요. 내 일이 아닌거에요. 그런데 목회자뿐만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전부다 일을 해놓고는 그 평가를 마치 자기가 숙지해야 되는 것처럼 평가 내리는 오류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기 숫자까지 딱 언급했다.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주님이 파놓은 함정이고 미끼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짜 고기는 이 요한복음 21장 가지고 어떻게 해석하느냐라고 미끼를 던진거에요. 153이라는 숫자가 나오니까 거기에 그 숫자풀이하면서 자기의 숨겨있는 자기의 시공간적인 자기로서의 의미가 자기한테 마감이 되는 의미들이 마구 해석되고 마구 쏟아나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베드로는 고기 잡는 사람이었다. 사람 낚는 어부였다. 그렇다면 그 어부의 고기가 153이라는 것은 사도행전 시대로 가서 주께서 153이라는 상정숫자에 합한 사람들을 건져올리라는 주님의 예고다라고 그렇게 해석한 거에요. 모든 주석이. 이 이천년 넘는 기독교 역사가. 그 다음부터 뭐냐 하면 사람을 좋은 고기 만들기 위한 수작에 나서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미끼라고 해야겠다. ‘미끼’.


어떤 사람은 모나미 153이라고 모나미 회사 처음 출시될 때. 뭐라고? 153. 1963년 5월 1일 해가지고 숫자를 153 그래서 모나미. 이렇게 붙일 수 있어요. 모나미가 153되는건 좋은데 모나미 그 볼펜 153하고 주의 일이 무슨 관계 있습니까? 모나미 사장을 칭찬하는 거에요. 모나미 사장 이거 하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거 해가지고 주께서 이처럼 많은 주의 일이 크게 되길 원해서 했다는거에요.


그러면 아까 했지요. 성공이라는게 뭐라고 했습니까? 성공이라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시공간 속에서 성경을 엉터리 해석한거죠. 그게 미끼라니까요. 성경을 준 것은 ‘네가 나쁜 고기 맞잖아’를 티내기 위해서 성경을 준거에요. 지옥 갈 사람을 뽑아내기 티내기 위해서 노출시키기 위해서 성경준 거에요. 성경 해석을 그렇게 할 줄 알았지롱~ 이런 식이란 말이죠. 성경 해석을.


사람들이 목사들이 그걸 거론하는 이유가 뭡니까? 카네기 이야기. 카네기가 두 사람이 있는데 카네기 이야기하는 것은 십일조 이야기하고 싶어서 카네기 하잖아요. 카네기 인생관, 카네기 십일조. 이게 뭡니까? 카네기 십일조 해가지고 복 받았다 그 이야기하려고 끄집어낸다는 자체가 목사가 십일조하게 되면 우리 교회 부흥되고 재산 많아진다. 교회 짓는다. 그걸 자기 무의식중에 노출, 무의식중이 아니라 노골적이지만 노출시켜버린 거에요 그걸.


옆에서 간음한 사람을 자식이든 누구든 욕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 죽기 싫다는 거에요. 내 인생 책임지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나 이렇게 누구 잃을 그런 남자 아니야. 그런 남자 아니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에요. 미쳤어요. 진짜 껍데기만 사람이지 속은 괴물 들었어요. 갑자기 봉준호 감독이 생각나네. 괴물. 그게 인간입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데.


도대체 그래가지고 어디 천당을 가요. 미쳤어요? 천국을 다 괴물 모여주게. 봉준호 감독도 천국가겠다 이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 보고 얼마나 우려먹는냐 하면 수석이 등장해요. 집에 물이 다 차가지고 수석 하나 들고 옵니다. 수석이 뭐냐하면 자연을 인공적으로  이렇게 가둬논거에요. 이거는 인간의 장래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획이 없어, 무계획이거든요. 혹시 기생충 보신 사람? 무계획이다. 아버지의 무계획에 반대해서 아들이 계획에 나서서 그 수석 가지고 지하 밑에 또 지하 있는 그 우리 정체를 아는 그 인간을 때려죽일려고 들고 가는 것이 아들의 계획입니다. 대책 없는 이 세상에 유일한 계획은 폭력이다 뭐 이런 식으로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또 제 평 보고 아예 영화 안 보는 사람은 없는지. 그걸 영화를 보여줬어야 되는데.


인간은 사람들이 그걸 처음 볼 때는 재미있었는데 나중에는 불편하더란 말이죠. 불편. 이 복음이 불편한 거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불편한 것을 진짜 기쁜 소식으로 다 바꿔놨어요. 물론 가짜이지만. 여러분 구원받고 싶어요? 이 153의 비밀만 풀어버리면 여러분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꼬시고있는 거에요. 거기에 걸려든거에요 결국. 주님이 던진 가짜 고기 티를 내기 위해서 뽑아놓은 153, 거기에 다 걸려든거에요.


사람들이 배운 사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를 보게 되면 153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분명히 사람을 낚는 거니까 베드로가 사도가 되어서 사람을 낚을 때 베드로가 낚은 사람의 숫자에 153은 넘을 거고 그러니까 베드로가 구원한 사람들의 총괄이 또는 제자들이 했던 총괄이 153일테니까 이 153을 그냥 풀게 되면 이게 신의 숫자가 신의 숫자답지 않다는 거에요.


신의 숫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언가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숫자에 숫자 + 신 +학문. 이게 유대교에 많이 하는데 이게 뭐에요 이게. 우리는 영적으로 풀어야 된다는 거에요. 영적으로 푼게 어떤 퍼즐풀 듯이 푼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153이 어디서 나왔는가? 153은 1의3승 + 5의3승 + 3의3승 하면 되는데 3은 뭐냐?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이래서 153이라는거에요.


그러면 그걸 보고 저렇게 오묘하다니 아이고 은혜받는다 이렇게. 인간으로 출발해서 찾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비밀을 손에 쥐면 구원받겠다는 거에요. 이거는 십자가 부활을 내쪽으로 손톱이 빠지더라도 기어 올라가면 뚫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지금은 아닌거 같지만 여러분들이 그동안 얼마나 원했고 이런 식으로 얼마나 들었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숫자 맞는거 보니까 거기 진리 있겠지. 숫자 많은데 왜 중국 안가고 돈 떼어먹고 도망가는데 조희팔인가? 회원수 많아가지고 돈 다 떼어 먹었는데. 또 어떤 사람은 뭐냐 하면 153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17의 연속수가 된다는 거에요. 17의 연속수가 뭐냐 하면 1+2 이거 더하면 3이 되거든요. 1하고 합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1,2,3, 다 합하면 뭐가 되냐면 6, 이거 다 합하면 뭐가 됩니까? 10. 이렇게 해가지고 몇차례? 17차례하게 되면 나중에 153이 된다는겁니다.


하여튼 시간이 남아돌아. 그럼 17이 왜없느냐? 10은 완전수고 7도 완전수라는거에요. 두 개 완전수가 합쳐져서 이걸 풀이하니까 이렇게 됐다. 하나님의 오묘하고 심오한 것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해가지고 요한복음. 153이라고 숫자를 확실히 이야기 한 것은 베드로가 고기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숫자의 고기수를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로 새롭게 기억되고 부곽되기 위해서 하는거에요.


내 일이 아니고. 내가 관리할 일이 아니고. 이제는 주님의 일에 +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에 사명자 또는 목격자가 되는 겁니다. 목격자라는 말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에 보면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요한복음의 사도들이 무슨 도 닦았습니까? 이제는 도를 닦아야지. 인격을 수양해야지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뭡니까? 내 일은 있다? 없다? 아예 내 일이라는 것은 없어요. 왜? 주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합니까?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해요. 다만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살아있음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거고 주님의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고 주님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관계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있는 거에요.


우리는 그걸 순간순간 알 수는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유발시키는 사건은 처음부터 그걸 알게 하는 사건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가 어떤 자리에 놓여있다는 것을 지독하게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요. 어떤 일을 벌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내가 이거 신앙생활 똑바로 한 징후다 해가지고 또 혼자 고민에 빠지게 만들어요.


사람은 돌아서면 자기를 몰라요. 다시 한번 내가 어느 자리에서 어디에 얽매였던가? 선악이라는 구조에 얽매였음을 반복해서 그걸 느끼면서 거기서 다시 정신 차리고 보니까 아 내 일은 아예 없고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백장군 이제 그만합시다. 김유신도 그만 합시다. 그만 합시다. 유명이라는 것은 비교될 대상이 이 땅에 없어요.


아까도 했지만 유명인사라고 하는 것은 그거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맙시다. 질투하지 맙시다. 누가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거기에 얼마나 예민했습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 오랜만에 아파트 쳐들어와가지고 반찬 냉장고 관리 이따위로 할거야! 이따위로 할거면 너희 집 가! 성질 급한 불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면 어머니가 가세요. 요새 그런 겁 없는 그런 시어머니 잘 없지만. 당신 아들하고 살아주는 것만해도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계속 쏘아대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인간이야 그거에요. 기본이 뭐냐 하면 너 살아있잖아. 산 값을 해야지. 이게 세상 교회가도 그 소리 듣고 세상에서도 그 소리 들어요. 너 때문에 남 해 입으면 안 되잖아. 그런 이야기. 윤리 도덕 이야기가 계속 쏟아 져요. 누가 그렇게 유발합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유발하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왜? 우리가 사명, 사명 하다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의미가 ‘나’로 마감됐어요. 주님 나 이번 사명 잘 감당했지요? 다시 사명해놓고 마감이 나 잘했다는 마감 오니까 주께서 흔들어놓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시 흔들어놓는 거에요. 제가 옛날에 화학과 출신이라서 공장에 화학 실험실에 있었던 적이 있는데 거기 가면 뭐하느냐 하면은 화학실험실에 주로 아가씨들이 근무를 해요. 나는 정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실습하러 갔는데 하루 종일 뭐하느냐 하면 이거 해요.


이게 뭐냐 하면 그때 원심분리기도 없을 때 시약을 해놓고 그게 혼탁하잖아요. 그거를 앞에 가라앉는 액과 떨어지는 액을 분리하기 위해서 계속 흔들어 대요. 주님께서 계속 흔들어 대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영생 갈렙과 여호수아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위에것과 우리를 분리시킨단 말이죠. 그런데 놔두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섞여버려요. 섞여서 고민, 고민 혼자 고민 다 하고있어요. 인과논리를 자기가 다 구상하고 있어요.


사명이라는 것은 뭐냐? 사명이라는 것은 주님의 우위성, 주님의 하시는 십자가 부활의 우위성이에요. 위에 있는 겁니다. 아까 그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자, 계백장군하고 김유신이 신라시대 백제시대 그 당시 시대에 열심히 복장을 하고 싸우고 있다 이 말이죠. 우리는 슈트입고 양장입고 원피스 이쁜 것 입고 참관자로 관람자로 끼어 있는거에요. 물론 화살 오면 잠시 피하면 돼요. 피하면 되니까.


왜? 우리는 이미 그 시대 화살 꽂아도 통과해버려요. 그 시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태어난 적이 없기에 죽는 적도 없어요. 그냥 유령처럼 관람할 뿐이에요. 성령받은 사람이 오늘날 이 시대의 삶이 그런거에요. 이게 금방 안 되서 문제지만. 마치 화살이 내 화살이고 돈 1억 오천 나가면 내 돈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내 돈 아니거든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인데 그건 이론이고 실제는 제목이 뭐였던가요? ‘가상현실’ 아닙니까.


가상 3D로 놀이동산 해봤는데 알아요. 가짜인줄 알면서도 다 피해야돼요. 미치겠어요. 다 피해야되고 안 그러면 죽어요. 가상인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세상이 예수님께서 죽어버린 이거는 지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쓰고요 막 미워도하고 싸우고요. 한푼이라도 아낄려고 안 질려고 하고요 남하고 비교 안하겠다고 하고 또 비교하고 나 우수합니다 자랑질하고싶어하고 그래요.


계백장군 여기서 할 때 우리는 심정이 어떤 심정이냐 하면은 그냥 가만있으면 안되고 증거를 해야되거든요. 뭐라 해야 되냐하면 끝났어. 신라가 우승했어. 신라가 이겨. 너 백날 계백장군 잘하는데 소용없어. 어떻게 어떻게 해도 신라가 이기게 되어 있다고. 그게 바로 뭐냐? 이미 ‘종말의 영’, 종말의 영이 임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래 울어 울고 싶으면 울고 웃는데 그거 구원하고 아무 상관없어. 니 잘못한거 알고 네가 잘한 것도 있는데 그거하고 구원하고 무슨 관계 있어? 구원은 그걸 아예 생각하지 않는게 구원이야 라고 이야기하라고 요한복음 끝나고 사도행전 보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이게 세 번째 나타남이거든요. 12번 안 나타나고 세 번째 나타나고 끝나요. 이 말은 지금 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열한제자지만 나중에 열두제자입니다. 열두제자. 예수님께서 성령을 준 자기 백성을 만들어요. 백성을 만드는데 이 백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백성이 없어요. 왜? 다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없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없는 죽은 12제자가 12이라는 의미 때문에 12제자가 없어야 될 자리에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나중에 사도 바울이 여기 오는데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시공간이 내가 만든 시공간에 주님이 함께 주님 안에서 만들어낸 형성된 시공간에 참여하다보니까 내 시공간을 말하는게 아니고 주님의 시공간이 현재 이렇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복음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로 나는 죽고 지금 십자가의 생생한 위력만 살아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우리보고 이야기하라고 하면 우리는 예언대로 이야기해요. 예언대로 해도 소용없어요. 가상현실의 이것 이것은 가상이라고 해도 소용없듯이. 우리는 성경 배우고 외우고해도 소용없어요. 하지만 실제로 주님께서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걸 느끼는 순간이 후딱 지나가지만 어떤 순간이 화들짝 그걸 느끼는 순간이 올 거에요. 내가 지금 연극하고 있다는 것. 내 팔자와 내 운명과 지금 내가 해석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 내가 지금 느끼는 것과 실제로 나의 운명과 관계없는 거에요.


다시 한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 시달렸느냐? 나보다 잘된 사람을 나보다 행복한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인간의 모든 수치는 어디에 몰려 있다고 했습니까? 눈, 코, 입 얼굴에 있지요. 우리는 봅니다. 듣습니다. 냄새 맡고 합니다. 부러워하지요. 눈으로 봤으니까 본 모든 정보는 두뇌에 쏠리죠. 모든게. 이 팔, 다리 잘라도 입만 살면요 아파가지고 욕한다고 했지요. 완전히 집결되어 있습니다. 욕이.


우리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도 평소에 별명이 천심이었습니다. 하늘의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치매 걸리고 어디서 배웠는지 욕이 나와요. 여러분 자녀가 집에서 너무 착하지요. 몰래 학교 가서 한번 보세요. 욕이 막 나와요. 우리가 뭐냐 하면 우리 몸 자체가 세상의 시공간과 하나가 되었어요 이미. 안 듣고싶어도 들려와요. 따라서 우리가 죽어도 할 말 없어요.


모든 의미는 내가 행복하면 끝, 만족하는 거에요. 이거는 죽어 마땅한 짓이에요. 그걸 알고 죽어 마땅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그 말 해봤자 소용없어요. 우리는 내가 도 닦으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주의 일을 하라고 사명을 맡긴거에요. 따로 내 계산 하지 마세요. 오늘 내가 수입이 얼마나 되나? 따로 계산시 누르지 마세요. 이렇게 해도 또 누를거야.


착한일 했으니까 내일 복이 올거야. 누를거에요. 착한일 많이 해놓고. 내일되면 착한일한 그 복을 받고 우리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 친근해요. 그게 우리의 원함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 그게 주님의 자기 일이기 때문에. 연속된 장벽을 가지고 오시는 자신의 연속된 일이에요. 보지 않고 믿는다는 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 상상한다는 말이 아니고 실제로 많은 무수한 보이는 것들 속에 우리가 휘둘리면서 믿음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실은 이게 조작이구나 하는 것. 내가 내 잘남을 위해서 내가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다고 여기면서 조작한거에요.


우리는 계백장군 김유신 만났다고 양복 벗고 원피스 벗고 옛날 여자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힐 하등의 이유 없습니다. 주님 주신 그 그리스도의 옷으로 그냥 입고 그냥 살면 돼요. 그쪽에서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하든지 나는 먼 별에서 왔다고 얘기하시고 먼 별에서 왔다고 얘기하시고 이미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거 맞아요. 덮친거에요.


제 이야기 아니고 골로새서 3장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따로 있다. 계백장군하고 김유신이 우리에게 물을거에요. 너 실례지만 양복 입으신 분 양복인 줄도 모르지 이상한 옷 입으신 분 혹시 지금 사시는 동네가 저 한양 쪽? 그때는 한양도 아니지 저기 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가야 쪽입니까? 하고 물을거에요. 어느 쪽이냐고.


우리는 미래에서 온 코난입니다. 우리는 미래에서 온 코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장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이 복장 그대로 가겠습니다. 예수의 옷을 입은 자는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사도가 요한복음도 그렇지만 사도가 참 납득하기 힘든 성령 안 받으면 납득하기 힘든 희한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쳐 놓은 미끼 함정 우리가 그동안 빠져있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 말씀 이용해서 천당 가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습니까? 주께서 찾아오셔서 사명을 줄 때 그것이 이제는 주의 일이 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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