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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01:35:12 조회 : 262         
해독제 19090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강의전 질문과 답변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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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75.♡.96.96) 19-09-15 11:04 
강남-요한복음 21장 19절(해독제)190903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1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18절 여러분 아신다고 치고요.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이렇게 되어있지요?


영광 돌리는 방법이 베드로에게는 뭐였지요? 죽음이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이 말할 때 베드로가 상당히 끔찍하게 생각할거에요. 왜냐하면 보통 상식에서는 하나님께서 살려주고 살았다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살아있는 그 시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일반 인간들의 상식 부합됩니다. 상식에.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이유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오늘 나오는 베드로의 잘못인데요. 자기 구원욕구 중심으로써 자기 인생을 연관을 시키는게 이게 문제거든요. ‘자기 구원욕구’. ‘내가 어떤 일을 해서 결국은 천국에 골인하면 그만이 아니냐. 나 구원받으면 되지’ 라고 하는데 지금 베드로는 자기 구원론을 챙기고 좋아할 그거 생각할 입장이 안돼요.


왜냐하면 양을 쳐야 될 주님의 양을 쳐야 될 목자로 부름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베드로처럼 사도같은 경우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어야 돼요. 양의 요소도 있어야 되고 목자의 요소도 다 있어야 돼요.


그리고 양이라는 것이 목자가 있어야 양이 연결, 형성되기 때문에 이 말은 목자의 체험이 무슨 체험이 되느냐 하면은 양의 체험이 되어야 돼요. 양의 체험. 목자의 체험이 양의 체험되어야 돼요. 목자의 체험이 양의 체험되려면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이 체험이라는 말 했으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지금 양이 뭔지 목자가 뭔지 지금 그거는 몰라요.


예수님이 찾아와서 이제 실시하겠다는 거에요. 네가 띠 띄고 원치 않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베드로가 옛날부터 해왔던 겁니까? 아니면 앞으로 베드로가 해야될 일을 예수님께서 지금 예고하는 겁니다. 예언, 예언하고 있지요. 그럼 베드로에게는 목자 체험이 없지요? 자기 인생 속에. 자기 인생 속에는 자기 구원만 신경 쓰고 있지 뭐 자기 하늘나라 높은 자리에 앉을 그것만 생각만 있지 주님께서 요구하는 목자의 체험, 양의 체험 그런 것은 없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기이한 현상이 나는 거에요. 앞으로 베드로가 베드로의 체험은 자기의 과거 체험이 아니고 경험하지 않은 미래 체험을 해야 되는 거에요. 미래 체험이라는 말은 이건 성립이 안 되지요? 미래 체험이 좀 말이 좀 어려우면 좀 비슷하게 어렵지만 다른 말로 해볼게요. 미래의 기억. 더 어렵지요? 미래의 기억을 이제는 부여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럼 지금 베드로는 미래라는게 없잖아요. 지금 현재에 있으니까 미래 없지요? 그러나 미래의 기억과 미래의 체험은 누구의 체험이냐 하면 결국 예수님의 체험이 베드로에게는 미래의 체험 미래의 기억으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미래의 기억이 오게 되면 무엇과 베드로 내부의 무엇과 충돌을 일으키겠습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살아왔던 과거의 체험과 충돌을 야기하겠지요? 충돌을 야기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여기서 뭐가 생기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 어긋남. 어긋남이 발생되겠지요. 어긋남이.


필히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누가 되든 인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사람이 체험하지 않는 이야기를 이야기에 근거해서 이야기 해버리니까. 예수님 체험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예수님 체험이 일방적으로 앞으로 자기 인생 안에 미래를 장식하고 그걸 채워넣는다 이 말이죠.


여러분 고추튀김 있지요? 내가 좋아하는 고추튀김. 고추튀김 안에 고추씨를 파내고 그 안에 다른 돼지고기라든지 당면 다져넣은 것 이거 두부 다져가지고 튀기잖아요. 그러면 원래 이 내용이 고추 내용이 아니고 고추 자기 씨는 밖으로 다 튀어나가고 없어요.


그럼 외부에 있는 이 이질적인 내용이 그 형식만 고추지 안에는 다른 다진게 들어오잖아요. 속 내용이. 예수님이 베드로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목자 체험이 있어야 베드로가 지상에서 목자로 목자기능을 할 수 있어야 돼요.


그 목자기능을 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목자고 베드로는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양이 되어야 된단 말이죠. 그럼 양 체험 이꼴(=) 뭐가 돼요? 목자 체험 되는 거에요. 양 체험은 양 하겠다고 손드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목자라는 개념에 필히 맞은 편에 무슨 자리가 마련됩니까? 양이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지요.


목자라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무엇과 이렇게 연관을 지었지요? 내 양이 있다는 거에요. 그 양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베드로가 일단은 예수님의 양이 되고 양에다가 목자 심정을 집어넣으면 베드로는 양인 동시에 목자로서 살게 되는 겁니다. 안에 내용은 완전히 베드로가 체험한게 아니고 예수님 자기 체험을 쑤셔 구겨넣는 거에요.


지금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 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 네가 원치 않는 네가 원치 않는 마지막에 네가 늙어서는 원치 않는 죽음을 볼 것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베드로가 원하는 죽음이 있을거에요. 원하는 죽음. 원하는 죽음이 있을거 아니겠습니다. 이거는 베드로가 원하는 죽음은 지금까지 자기 인생을 살면서 나는 이렇게 죽고싶어 라는 것이 이게 살아가면서 누적되어 있을거란 말이죠. 죽음은 삶의 끝이니까.


그 중간에 있던 살다가 살다가 그래 죽을 때는 이렇게 죽어야지 이런게 있다 이 말이죠. 95세까지 남한테 전국 노래자랑 해가지고 95세까지도 계속 일하면서 남한테 인기 얻고 송해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는 그냥 자는 잠에 돌아가셨나? 안 가셨나? 모르게 자다가 얼마나 좋겠어요?! 그건 우리가 원하는 죽음이다 이 말이죠. 이게 자기구원론이죠.


이런 것은 목자도 아니고 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은 이미 죽은 인간이에요. 베드로는 뭐냐? 원치 않는 죽음이다 이 말이죠. 원치 않는 죽음. 원치 않는 죽음이니까 베드로 속에 누구 요소가 들어간다? 예수님 요소가 그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베드로가 여기서 반박 아닌 반박이나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어! 이건 내가 대비하거나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어떤 재료 같은 것은 내 쪽에서 준비할 수가 없지요. 재료를 왜 준비해요. 말씀 준비하는데 왜 준비운동을 왜 하는 겁니까? 지금 주님은 우리하고 흥정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할 수 있는걸 지금 말씀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너는 네가 할 수 있고 없고 차원을 떠나서 일방적으로 밀어넣으면 이거는 그대로 가야되는 거에요. 가면서 뭘 알아야 돼요? 이것이 내 뜻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구겨 쑤셔넣은 주님의 뜻이라는 것. 내 뜻이 아니라는 것. 항상 삑사리 난다고 하지요. 어긋남이에요 어긋남. 비틀어짐 어긋남이 항상 성도 인생은 그게 있어요.


그 어긋남에 대해서 베드로가 그 평소에 생각했던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에 20절, 21절에 보면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이니까 묻던 자니라.” 사도 요한이죠.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바로 이렇게 다른 제자들에게 관심을 둔다는 자체가 이게 삑사리에요. 이게 잘못된거에요. 몸이라 하는 것은 아까 강의 전에 질문 나왔어요. 몸이라 하는 것은 그냥 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시간 + 공간. 이게 플러스 알파인데 시간과 공간이 이렇게 발산 돼요. 시간과 공간이.


옛날 노래 들으면 옛날 노래를 듣거나 옛날 영화를 보게 되게 되면 그때 그 모습이 그리운게 아니고 그때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그리운거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니까. 그때만 주인공이겠습니까? 매일매일 내가 주인공이죠. 우리는 한번도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대해서 이 현실에 대해서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주인공 되는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 기억과 그러한 장소만 생각을 하고 그걸 과거의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꼬깃꼬깃 내 깊숙한 이 해마 기억장치에다가 다 담는거에요. 다 담는거에요.


그 캄보디아에 크메르 루즈에 의해서 캄보디아 인민들이 얼마나 죽었습니까? 기억도 안나요. 자료보면 40만 죽었다고 되어있지요. 그거 왜 기억해요? 기억 안 나지요. 국민학교 5학때 담임선생님 이름 기억합니까? 기억 안 나지요. 그런데 “너 그 선생님한테 맞아가지고 너 이빨 나갔는데.” “아!!! 그 선생님!!” 이렇게 하지요. 평소에는 자기 몸과 무관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뭔가 나와 관련성을 하게 되면 “아~기억나.”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구원론이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서 오직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거든.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에요. 나만 행복하고 나만 주인공 되면 그만인거에요. 이러니까 주님이 목자, 주님의 양됨이 전혀 무관한 존재로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만 챙기는데 그게 무슨 목자고 자기만 챙기는게 무슨 양입니까.


내가 개척교회는 100군데를 하고 10군데를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한국교회 다 하지. 왜 100군데 밖에 못했어. 인간이 말하는 그 태도와 말은 항상 그냥 내가 이렇다가 아니라 그 앞에 생략된게 있어요. 내가 주인공인데 나는 내 행복이 제일 중요한데 그래서 이 말을 던진다 라고 하는 것이 중간에 생략되어 있어요.


그걸 왜 생략하느냐 하면 상대방이 너무 힘들어 상대방이 듣는데 너무 힘들어 할까 싶어서 자기만 챙긴다고 욕할까 싶어서 그건 빼고 이야기하지요. 인간의 몸과 시간과 공간 이거는 자기중심 입니다. 자기중심. 자기중심은 항상 자기 구원만 챙기게 되어 있어요. 자기 구원.


지금 하루 하루 살았던 이 시간들이 모여서 천국에 그대로 입성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이런 천국도 없고. 따라서 주님께서는 양이 양답고 구원받은 양이 구원받을 양답고 목자가 목자다우려면 수정이 필요하겠지요. 어떤 수정이 필요하냐 하면은 상관없다 다른 말로 하면 관계없다가 돼요. 관계없다. 이걸 쉽게 말하면 조건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께서 대답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했지요? 올 때까지니까 이건 무슨 개념이냐 하면  이건 시간개념이에요. 시간개념이란 말이죠. 베드로야 네가 네 중심의 시간은 버려라 이 말입니다. 그건 네 나름대로의 과거 기억이지 그것은 내 중심의 시간계산이 아니다 이 말이죠. 계산법이 아니다 이 말이죠.


관계가 상관이 없다는 말은 무슨 상관있느냐 사도 요한이 어떻게 되든 너는 너 할 일만 하면 되지 거기에 신경 쓰냐 이 말이죠. 그러면서 베드로가 평소에 그 인간 됨됨이에 있어서 그 인간 나는 이렇다 할 때 뭐를 참조를 해서 나는 이렇다고 자아정체성을 구성했겠어요? 라이벌이 되는 사람이 있겠지요. 사도 요한이죠.


누가 누가 더 사도답나. 누가 누가 하나님 앞에 사랑 받나? 그런 질투도 있을 것이고 시기도 있을 것이고 있을거란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되버리면 베드로는 뭐냐 하면 베드로는 아직도 자기가 산 자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합니까? 네가 마지막에 뭐 된다? 네가 원치 않는 그 다음에 뭐죠? 원치 않는 죽음이죠. 원치 않는 죽음.


사명을 감당하려면 양과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의해서 일단은 네가 죽자 이겁니다. 일단 죽자. 죽은 자에게는 뭐가 필요치 않습니까? 어떤 조건도 개입될 이유가 없지요. 죽은 자인데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아이고 멀쩡한 사람 왜 죽입니까? 하는데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예수님의 체험이 미래의 기억으로 들어온다고요. 그럼 베드로의 미래는 뭐냐? 이미 기어이 원치 않는 죽음으로 확정됐지요. 확정됐다는 그 상태에서 원치 않는 죽음에 확정된 베드로를 그 원치 않는 죽음의 그 시점에서 거꾸로 시간을 한번 되돌려보잔 말이죠.


그럼 죽을 때만 죽었습니까? 그 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간 거에요? 원치 않는 죽음으로 계속 수렴되지요. 수렴. 모아지지요. 그러면 그 수렴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목자가 목자답게 양이 양 다우려면 그 기준은 어디로 수렴되어야 됩니까? 원치 않는 죽음에 수렴과 관련이 있을 때만 목자답고 양 다운 거에요.


최후의 죽음이 원치 않는 죽음을 향하여 질주한다면 질주하는 과정도 뭐가 돼요? 목자가 되고 양이 되는 거에요. 그렇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려고 하면 죽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베드로가 하는 모든 일이 목자답지 않고 양 답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니까요 이게.


아까 다시 합시다. 예수님의 추억과 체험이 베드로 속에 고추튀김 들어오듯이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껍데기만 베드로지 속에는 뭐가 됩니까? 예수님 인생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 부러워가지고 야 너 좋겠다. 이랬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지요.


사도 요한이 오래 사는 거하고 예수님 자신이 죽는 거하고 그게 시기를 할 일입니까? 질투를 할 일이에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목자 양이라는 그 개념을 자기의 과거에 근거해서 해석하다 보니까 누가 시기되는 거에요? 평소에 하는 행세가 그대로 본성이 툭 튀어나오는 거에요.


나는 원치 않는 죽음 주고 아이고 요한 저거는 좋겠다 나처럼 빨리 나중에 더러운 팔자 안돼요. 이런 식으로 시기한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딱 잘라 이야기한거에요. 지금 네가 받은 사명은 사명이 얼마나 그게 중요한건지 그 사도 요한이 어떻게 되는건 그 조건이 너에게 붙을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죽은 자가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죽는데.


아니 그 저 1km 앞에 폐차장이 있어가지고 폐차하러 가는데 화물차 오래 되서 노후되서 폐차하러 가는데 어떤 가게에서 “어이 화물차 아저씨.” “예.” “수박 좀 배달해 주실랍니까? 배달비 5만원 줄께요.” “예, 실으세요.” 실으면 뭐합니까 1km 가다가 폐차하는데 실으면 수박까지 다 폐차하는데.


사명이 나 사는 것보다 우세해요. 우월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말이에요. 하나님 저를 이렇게 살려주셨사오니 더 이상 내 인생이 어떻다 왈가 할 필요 없게 해주시고 더 안 줘도 상관없어요. 그게 상관없는게 이 상관없는거에요. 내가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 세상에 추가적인 어떤 조건을 내가 굳이 달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 주께서 다루시기 때문에. 죽은 자가 뭘 더 필요합니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지요.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저 상관없어요. 왜? 살려주셨으니까. 영생을 주셨으니까. 그동안 우리가 인생 걱정, 근심하는거 다 어디서 나옵니까? 새로운 조건을 자꾸 달라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여기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그거는 사명이 없어서 그래요. 목숨보다 더 귀한게 뭐라고 했어요 방금? 사명이죠. 사명이 목숨보다 귀하기 때문에 사명 앞에서 내 목숨도 귀하지 않아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요. 내 목숨이라는게. 내 목숨조차도 나의 그 신발 안에 모래처럼 짜증스러운거에요. 이 산다는게. 사명이 살아있어야지 내가 살아 있으면 안되잖아요.


자,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왜 일체 베드로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야박하게 야박한건 아닌데 야박하게 하는지 왜 이렇게 상관없다고 일언지하에 너는 너 할 일해라. 무슨 상관이냐 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다시 베드로는 몸이 있지요. 베드로 몸이 있으면 베드로 몸은 사실 모든 인간의 대표라 할 수 있는데 몸이 있으면 자기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고요 남하고 시기질투하고 이 모든 것이 뭐냐? 누가 주인공이라고 했습니까? 누가 주인공이죠? 베드로에 대해서 누가 주인공입니까? 자기가 주인공이죠.


왜냐하면 살아온 모든 과거가 체험이 내가 주인공이다 내가 주인이야 내가 행복해야 돼 중심으로 다 살아온거에요. 그러니까 상당히 이건 개인적이죠.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개인적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악마를 염두해두고 악마가 이 모든 세계에다가 치명적인 바이러스, 저주의 바이러스를 악마가 심어놨어요. 저주를. 심어놔가지고 이게 그 증상이 모든 인류에게 확 퍼진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보는거에요. 주님께서. 그럼 악마의 바이러스에 대한 악마가 집어넣고 그 바이러스 집어넣은 정서가 뭐냐 하면 오직 악마 말에 충성하게 되어 있어요. 악마의 말에. 죽기를 무서워서 그러니까 헤매는 것처럼. 그렇게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모든 인간을 죽음 안에 전부다 두려워하도록 악마가 이미 바이러스를 다 집어넣은거에요. 다.


물론 잠시 안 무서울때가 있어요. 잠잘 때. 졸음할 때. 어쨌든간에 이게 죽음이라는 바이러스를 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해독제가 필요한거에요. 해독제가. 해독제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이거 외에는 해독제가 없어요.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내 살과 내 피가 없으면 해독제가 없으면 너희들은 이미 죽어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본인이 죽어있다는걸 몰라요. 죽어있다는걸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살려고 하는거에요. 죽음은 기피하고. 그래서 너에게 원치 않는 죽음을 준다 할 때에 이걸 해독제를 갖고 오신 주님의 해독제가 왔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베드로는 뭘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 사도 요한보다 일찍 죽는게 이게 상당히 분하고 상당히 애통하고 절통하고 좀 졌다는 느낌. 재수 없다 이런 생각 드는거에요 이런 생각을.


그걸 누가 간파하고? 예수님이 간파하고 베드로야 사도 요한이 나 재림할 때까지 살아있다 할지라도 너하고 무슨 상관 있느냐 이 말이죠. 개인적인 것을 생각하느냐 이 말이죠. 사실 개인적인 것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악마가 집어넣은 병의 증상입니다.



첫 번째 증상 나만 생각한다. 두 번째 증상 그래서 지옥간다. 두 번째 증상이 죽는게 무섭다. 세 번째 증상이 결국 무서워하면서 다 지옥간다. 그게 세 번째 증상 아닙니까. 자, 여기 제가 이런 말했지요? 그러면 이런 말 듣고 여러분 사명이 뭡니까? 갑자기 내 구원은 이거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고 내 사명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내 오른손에 뭘 쥐면 된다? 해독제를 갖고 있으면 될 거 아닙니까 해독제.



내가 어느 대학 나왔냐? 내가 집안 잘 사냐? 이건 문제거리 되지 않아요. 집안 잘 살면 뭐합니까? 자기 딸내미 의대 가면 뭐합니까? 해독제가 없는데. 주님보시기에 해독제가 없는건 인간도 아니에요. 그거는. 저주받을 인간이지. 아까 했잖아요. 사명이 뭐보다 더 우세하다? 내 목숨보다 더 우세한 거에요 사명이.



성경 그렇게 보니까 되게 간단하죠? 성경해석. 그동안 성경해석 왜 헛갈렸습니까?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주인공 삼아서 자기의 과거체험. 윤리적 도덕적 체험 그것 가지고 더 착하게 살아서 천당가려고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고 또 그런 식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해독제도 없는 교회에서 노골적이다.


해독제도 갖춰지지 않은 유사 해독제. 없어 해독제도 없는데 착하면 천당 갑니다. 그거 하나 가지고 착하면 복 받습니다 그거 하나 가지고 악마가 집어넣은 유사품 그거 가지고 교회 부흥됐느니 뭐 이러고 있단 말이죠. 거기에 단디 속았던 이유가 있지요. 단디. 경상도 말로 단디. 대구은행 신용카드 이름이 단디에요.


왜 단디 속았겠습니까? 마귀가 바보입니까? 지혜로운데. 너 뭘 원해서 교회 나오는지 뻔히 다 알거든요. 천당 가려고 교회 나왔지요. 천당 보내줄게. 예수 믿어라 이거잖아요. 그게 해독제입니까? 그거 믿으면 누가 좋은데? 그거 믿으면 내가 주인공된게 사라집니까?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 말씀이거든요.


예수님 오게 되면 너는 너 죽음도 네 마음대로 못해. 내가 이렇게 죽겠다. 이렇게 살겠다. 하는 것도 네가 주인공되기 위해서 네가 억지로 조건들을 내가 주인공에 필요한 조건들을 네가 이 세상 돌아가는데 골라잡은 거에요. 그게 나의 시간이고 나의 공간이에요.


교회 집사가 되어가지고 국회의원 세 번이나 해먹는 사람. 예능프로 국회의원이 나와가지고 마이 웨이 부르면서 인간성 좋다고 서울 송파구인가? 강남에 국회의원 세 번이나 해먹은 사람. 그 사람 몇 달 전에 자살했잖아요. 이름 모르겠다만. 있지요? 교회 집사고.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이 서울대학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동안 나의 나 다움의 조건을 자기 체험 속에서 계속 끌어모으는데 급급했어요. 결국은 내가 보기에는 한마디로 뭐가 없어요? 내가 이 땅에 태어날 사명이 없어요. 사명감이 없어요.


이거 감당하면 구원받는다 이런 사명 말고 구원과 상관없는 사명 있잖아요. 내가 주인공인 것과 상관없는 사명. 주님이 주인공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일방적으로 나를 사용하시는 그 사명. 그 사명이 없으니까 너무 괴로우니까 다른 도피처가 뭐냐 하면은 지가 죽는 수 밖에 없어요. 아내야 미안하다 하면서 죽었어요.


베드로는 자살할 수도 없어요. 자살. 사명이 베드로보다 우세하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예수님께서 못 죽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살하는 것도 자기가 원하는 죽음이잖아요. 베드로는 자살 다 했어요. 자살 할 때 나 안하는데 이런거 없잖아요. 베드로에게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을 준다 이 말은 이미 베드로는 누가 손아귀에 있다? 주님이 죽는 것도 지 마음대로 못한다 이 말이죠.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은 그 죽음을 향한 모든 일어나는 인생사는 모든 일어나는 일도 내 마음대로 아니지요? 내 마음대로라면 사는 쪽으로 자꾸 옮길거 아닙니까. 원치 않는 죽음으로 이미 방향이 정해진 것이 주님의 일방적인 정함이라면 그 정한대로 가야될 모든 그 사건들도 내 소원이 아니고 베드로 소원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이다 이 말이죠.


베드로는 이런 횡재를 한거에요. 횡재를.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내가 원치 않는 일이니까. 어떤 짓거리를 해도. 주님의 말씀은 맨날 이래요. 상관하지 마라. 상관하지 마라. 상관하지 마라. 조건 달지마. 조건 달지마. 너는 조건 달지마. 조건이 필요치 않아.


그것은 베드로가 해독제를 쥐고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베드로 자체가 해독제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20장 22절. 21절 보게 되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 다음에 보세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라고 되어 있지요? 베드로가 훌륭하다는 말이에요? 훌륭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베드로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이 일조차도 누구를 사해주면 사해주고 이 일조차도 베드로 본인의 결정입니까? 아니지요.


튀긴 고추 안에 이미 거기 다른게 들어 있으니까 주님이 베드로를 가지고 하는 거에요. 껍데기만 베드로지 속에는 주님이 일하시는 거에요. 그게 뭐냐? “성령을 받으라” 에요 성령을 받으라. 그럼 성령은 어디서 나오는가? 20절에 봅시다.


요한복음 20장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지요? 손과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어요? 손과 옆구리에서 쏟아진게 뭡니까? 해독제 아닙니까 해독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오지요. 해독제라는 이런 생각 그 자체가 세상은 온통 악마가 뿌려놓은 그 질병에 오염되어 있는 완전히 세상 전체가 정신병동 세상 전체가 병동이에요 병동. 전부다 미친 인간들이에요 미친 인간들. 사람도 아니지요. 좀비들이죠.


시신인데 세상 모든 인간들이 시신인데 눈뜬 시신. 눈뜬 시신. 눈은 떴는데 시체에요. 왜? 이미 병원 환자니까요. 왜 환자냐? 해독제가 없으니까. 그 해독제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서 나오지요. 그럼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서 나오려면 무슨 사건이 나와야 되요? 십자가 사건이 나와야 돼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보인다 하니까 해독제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그걸 가리겠어요. 오염시킨 그 당사자가 누굽니까? 주동자가 누굽니까? 악마 마귀지요. 악마는 모든 것을 용납하되 일체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로 마귀는 용서가 안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마귀가 한 짓거리 지 짓거리를 아니까.


그래서 이 땅에는 목자도 없고 양도 없어요. 왜? 전부다 악마 손에 있으니까. 정신병자가 목자, 양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악마가 어떻게 합니까? 목자 만들고 양 만드는 거에요. 진짜 목자 양 생각하지 말고 돌아보지 말라고 얼마든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목자 양 만들 수 있는데요. 삼위일체 만들어 냈지요. 마귀가. 다 만들어내잖아요.


해독제가 있어줘야 뭐가 보이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 내부를 알아요. 모든 인간 내부에 악마의 흔적을 갖고 있는데 그게 뭐냐? 요한계시록 13장 17절,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대구 강의 때 했는데요.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라.” 짐승의 이름이 있지요. 짐승의 이름이 인간내부에 있지요?


그런데 숫자 이름이 뭡니까? 666이죠. 모든 인간이 666이 다 들어 있는거에요. 태어나면서부터. 뭘 새삼스럽게 뭘 받아요. 다 태어날 때부터 다 갖고있는데. 모든 인간 666있는데 그 666이라고 알 수 있는 사람 누구 밖에 없어요? 사명을 받은 자 외에는 다 몰라요. 그 사명을 받은 자가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감람나무 아닙니까. 엘리야와 모세. 두 증인.


뭘 새삼스럽게 바코드 안 받는다고. 그거 안 받아도 다 있어요. 안 받아도 666 다 있다고요. 그거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알기는 돈 못 벌고 매매 못하면 벌벌벌 떨고. 왜 떱니까?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죽기를 무서워 한다는 말은 이미 악마에 짐승에 힘이 이미 다 거기에 오염되어서 바이러스가 다 퍼져있고 퍼져있는 그 숫자가 666이에요.


안에 666 요소가 다 들어있고 그 666끼리 서로 매매를 하니까 소통이 되지요. 그놈의 소통, 소통 인문학 강좌 맨날 소통이 되니까 이야기가 된다고요. 이야기가. 돈 이야기. 돈 이야기하면 다 잠 깬다. 돈 이야기하면. 아무리 졸아도 돈 이야기하면 다 와요. 돈 번다는 이야기하든지 하면 깰 수도 있고 당신 돈 날라간다 돈 내야한다 하면 또 다 깨고.


설교시간에 우리교회는 예외입니다만은 설교시간에 설교 안 들어요. 사람들. 해가지고 설교 중간중간에 그래서 한 구좌씩 200만원 내야된다고 하면 잠 다 깨어있어요 벌써. 잠 다 깨어있다고요. 얼마나 돈 문제가 민감한데요. 소통이 된다니까요. 말이 돼요. 말이 되니까 모든 인간이 75억이라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17장에는 뭐로 봅니까? 75라는 숫자가 의미가 없지요? 1, 한, 큰 성. 바벨론. 딱 하나의 성.


하나를 하나의 성을 3분의 1로 작살을 내는 이만만이고 3분의 1이 다 죽어요. 마병대 숫자가 2만. 그게 딱 하나에요 전부다. 같은 성질의 것이 그러니까 악마가 누굴 공격한다? 악마가 악마를 공격하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조정하신 거에요. 왜냐하면 서로 물고 뜯으면 망할 때는 그렇게 망해야 돼요.


집안이 서로 물고 뜯어야 망한다고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지요. 악마가 악마끼리 서로 싸우고 아마겟돈 전쟁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래서 다같이 무너지는 거에요 다같이. 이스라엘이고 뭐고 다같이 무너지는 거에요. 진짜 이스라엘은 하늘에 가 있는데 뭐 하늘에 앉혔는데 뭐.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요한계시록 겁내지 말라고. 골로새서 3장 4절에 이미 이 땅에서 우리는 뭐에요? 이미 죽었잖아요. 죽은 자가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주여 더 이상 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에게 어떤 수모와 고생을 한다 하더라도 저를 살려 줬으면 그걸로 저는 됐어요. 상관없습니다. 돈 없어도 관계없어요. 혼자 살아도 관계없어요. 상관없어요 주여.


이렇게 세상에 해독제를 줬는데 뭐 줄 거 다 받았는데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받는 순간 우리가 주인공이 아닌 것을.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우리는 예수님이 주인공 됨을 드러내는 양이요 목자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진도 나가 봅시다. 제가 아침에 오늘 아침에 이렇게 운동을 하는데 운동이 아니고 빨리 걷기를 하는데 새벽 6시쯤 되기 전에 하는데 뭔가 차가 트럭이 하나 지나가는데 뭐라고 써있느냐 하면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어두운데도 잘 봤어요. 잘 보이던데. 초심불망. 초심만 가지면 망하지 않는다. ‘초심불망’.


자, 여기서 이걸 보고 생각하기를 문제는 이겁니다. 무엇이 초심이냐 하는거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준게 뭐냐 하면 원치 않는 죽음이 초심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한테 어떤 지시를 받은 현재 이 수준의 내 마음이 초심인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베드로의 초심은 필요치 않습니다. 왜? 베드로는 해독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해독제거든요. 베드로는 어떤 죽음을 죽더라고 베드로의 그 죽음은 절대로 해독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제목을 해독제로 할까. 베드로는 절대로 해독제가 될 수 없어요.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죽어도 그거는 남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초심은 바로 예수님이 지정한 원치 않는 죽음 그 지점이 초심이에요. 그러면 그 죽음이 되면 베드로가 죽잖아요. 베드로가 죽어버리면 베드로가 없어지잖아요. 죽으면 베드로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초심이라는 것이 뭡니까? 결국 나는 있어도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떤 없으니까 어떤 조건도 붙일 수 있는 주께 붙일 수 있는 본 종이가 없는 어디가 갖다 붙여요? 없는데.


뭐 밥 주세요. 강도의 도적을 피하게 하시고 바다의 위협도 없게 하시고 사도 바울이 하지 않는 이유가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굶기도 하고 그게 왜 사도 바울에게 그게 별 신경 안 쓰는 이유가 원래 자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기피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날마다 나는 예수 죽으심을 짊어짐은 나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나는 괄호( )다 나는 네모다.


나는 뭐라고?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짐을 예수님의 미래의 체험이 나에게 주어지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됐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함이라. 진짜 튀긴 고추 한번 보여주면 좋겠네. 튀긴 고추 없나. 겉으로는 고추인데 안으로는 고추가 아니에요. 예수님이에요. 사명이 내 삶보다 더 우세합니다. 사명이. 내 사명이.


자, 그렇다면 베드로가 왜 베드로의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가야합니까? 베드로도 몸을 가졌잖아요. 한 고집하거든요. 옛날 자기 이 몸으로 겪었던 그 기억이 한순간에 다 날라가지 않습니다. 베드로 알아들었냐? 옛썰! 알아들었으니까 제가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하도록 놔두지를 않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베드로가 모르는 초심으로 데려갑니다. 베드로가 알지 못하는 초심.


자, 초심이 들어간다면 뭐가 필요없느냐 하면 이게 필요없어요. 마지노선이 필요없어요. 2차대전때 독일이 왔을 때 프랑스가 왔을 때 네덜란드 근방에다가 이거 철통같은 방어선을 할 때 마지노선이에요. 설마 이건 넘어오겠는가 했는데 넘어왔다고요. 우리가 예수님 말씀 듣고 내가 주의 목자로 양으로 산다고 하면서 주여 초심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는데 그 초심이 주께서 점차 데려가는 초심이 아니고 내가 결정하는 초심같은거 있잖아요.


그 초심을 뭐로 무장되어 있느냐 하면 이게 마지노선 이게 윤리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어요. 어떤 선을 넘지 않겠습니다. 이게 뭐에요 이거. 이게 마지노선이라는 말은 주여 이것마저 넘으면 주여 나는 못할 이거잖아요. 그럼 주님이 놀고 있네. 기껏 이게 마지노선이야? 네가? 기껏 이게 도덕으로 무장 이게 마지노선이래. 자기가.


이정도로 착하니까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거는 어떤 목사가 잘못 가르친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태생이 그래요 태생이. 아 이것만큼은 허락 하소서. 이것만큼은. 임재범이가 제가 이거 몇 번 이야기했는데 이제 식상하다 임재범 예도 이제 식상하다. ‘고해’라는 노래. 이제 미안해서 이야기 못하겠다.


다만 임재범이 예수 잘 믿는다는 예수 잘 믿는지 교회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예수 믿고 여자 때문에 예수 믿고 우울증에서 벗어나가지고 했는데 그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가도 제발 이 여자만큼은 허락하소서. 허락하소서. 그게 초심이에요? 그게? 허락하소서가? 예? 남자들 그 노래 임재범 노래 부르지도 못하면서 불러가지고 초반에 잘 보이려다가 목청 다 나가고 올라가지도 않는데 왜 그 노래 불러가지고.


여기에 이 초심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걸 잠시 설명하고 쉽시다. 우리가 찾지 못하는 초심. 그럼 주님이 찾아가시겠지요. 찾아내시잖아요. 이미 주님이 초심을 줬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는거에요. 성령께서 알게 하시는데. 그 초심 찾기 과정 속에서 선지자의 도리 또는 선지자의 자세에 대해서 구약부터 계속 이어져왔어요. 구약부터.


에스겔에 보면 선지자를 뭐라고 하느냐하면 목자라고 해요. 그러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목자라면 다른 선지자는 뭐가 되느냐하면 가짜가 되겠지요? 그걸 삯꾼 목자라고 합니다. 가짜. 엘리야 엘리사가 선지자라면 그 당시에 바알 아세라는 가짜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 유명한 엘리야도 초심을 어디까지 받습니까? 초심을 잘못 측정했지요. 그 850:1로 이겼잖아요.


그런데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참하다만은 이세벨이 와가지고 현상수배 때려가지고 엘리야 보거든 죽여버려라 이랬단 말이죠. 그러면 나 살려라 도망갑니다. 도망간 사람 말이 뭐냐 하면은 나만 남았다는 거에요. 엘리야가. 이 세상에서 기독교 신자 나 밖에 없다 이 말이랑 똑같애. 성도 나 밖에 없다고 한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자기의 과거의 추억을 추억이라는 백과사전을 뒤집어 보니까 제대로 믿는 사람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은 자기 체험에 준해서는 맞는 이야기에요. 주님께서는 모르는 이야기를 던져 버립니다. 남은 7000명. 그러니까 엘리야조차도 나만 남았다가 굉장히 순수해 보이고 이건 자기의 마지노선이라고 봤는데 뭐가 됐어요? 그 마지노선이 허물어져버린 거에요.


너는 아직도 메시아다? 아니다? 너는 메시아가 아니에요. 그래서 엘리아가 지옥 갔습니까? 잘못 측정해가지고? 어디 엘리아 지옥 갔어요? 마태복음 17장에서 모세하고 누가 나타납니까? 엘리야 등장하잖아요. 구원 받았잖아요. 엘리야가 허튼 소리했는데 천국가지요?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왜 천국 가 있지요?


바로 그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바꿔주기 작업을 계속 해왔던 거에요 계속 선지자에게. 바꿔주기 작업. 너가 아는 그게 바이러스 악마의 병균체를 갖고 있는 너를 주님께서 그때 시대에 필요한 해독제를 조금씩 주면서 그 해독제의 본질과 본 모습을 선지자의 계획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진짜 초심에게로 접근시키는 겁니다. 그게 구약의 계열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초심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거죠. 그러고 뭐합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이죠.


오늘 아까 요한복음 21장에 뭡니까? 네가 원치 않는 죽음. 그래 그 죽음이 사실은 초심이 뭡니까? 베드로가 경험했거나 예상한게 아니고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체험한 그 체험을 베드로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집어넣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도를 건드리면 저주받는다고 했지요? 성도 건드리면 저주받는 이야기나 아까 요한복음 20장에 네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네가 그냥 두면 사함이 없을 것이란 그 이야기가 똑같은 차원이거든요.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뭐겠어요?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삼촌이 필요합니까? 죽은 대통령이 필요해요? 죽은 자에게 필요한게 뭡니까? 나를 눈뜨게 해서 깨워주신 분만 있으면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살면서 주님이 깨워준다면 주님 외에 주님의 살과 피 그 해독제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우리에게 필요한게 없습니다. 아무것도. 정부미도 필요없고. 정부미 알아요? 정부미도 필요없고 배급제도 필요없고 아무도 필요없어요.


아니 죽은 자를 깨워줬으면 그걸로 됐지 뭘 더 원해요?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놀립니다. 기독교를 막 욕해놓고 화내니까 “어! 기독교에 보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네가 화를 내네? 왜 너 사랑 안해? 너는 왜 원수를 사랑 안해?” 이런 식으로 이제 골려먹을라고 그런 소리 하는데 원수 사랑이 뭐냐 하면 “너 지금 병들었어.” 그게 사랑이에요.


“아버님 병들었어요.” 이게. 시어머니 시아버지에 대한 최고의 사랑은 추석이라고 봉투에 돈 넣어주는게 아니고 “예 갔습니다. 예 벌써 물이 빠졌네요. 끝났습니다. 지옥갑니다. 아버님. 아버님 지옥가시고 어머님 지옥가시고. 두 분 아니면 지옥가는걸 어디서 발견할까.” 뭐 이런 식으로. 그게 최고의 사랑이에요.


죽을 때 되어가지고 자식들 다 불러놓고 자식들은 좋아가지고 아버지 힘내세요. 이제는 집은 누구 주겠나? 땅은 누구 주겠나? 평소에 오지도 않는 지 마누라까지 데려와가지고 꿇어앉으라 해가지고. 자 한번 들어보자 야야 목사님 같으면 그럴 거에요. “너는 죽었다. 병들어 마귀의 병들어 죽었어.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다. 간다 나. 자러 간다.” 꼴까닥.


10분 쉽시다.
 홍민희(IP:175.♡.96.96) 19-09-15 11:05 
강남-요한복음 21장 19절(해독제)190903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초심이 어디까지 초심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그 초심을 이끄시는데 있어서 주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 인간들, 사람들을 통해서 그건 초심이 아니야 아 그것도 초심이 아니야 더 더 가야해 아니야 아니야 결국 초심을 제대로 초심으로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제대로 된 선지자 없고 제대로 된 메시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약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 선지자가 없다는 말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요. 그 아무도 없다면 그 해독제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결국은 멸망당하는 것이 처음부터 악마의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저주받는 것은 그냥 코스에요 코스.


그냥 코스대로 갈 뿐이지 뭐 안달부리고 뭐 재롱부리고 앙탈 부린다고 코스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흔히 인생 살면서 주여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하는데. 시험, 다른말로 하면 유혹이죠. 시험을 이기는 것은요 이것만 있으면 다 이겨요. 영원한 것. 영원한 것에 복속이 되고 거기에 속해버리면 영원한 것만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시험은 시험거리가 없지요.


아 죽겠다는데 다른 조건 필요 없다는데 무슨 시험들 여지가 없지요. 영원한거니까. 자꾸 일시적인 해결책을 달라고 하면 안돼요. 그거는 그 다음은 또 유혹이 들어오면 이길 수가 없어요. 자, 그렇다면 그동안에 영원한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누가 메시아 될만한 그런 자들이 없었다. 그러면 목사님 구약을 잊읍시다. 아니요 구약을 잊으면 안돼요.


그들이 뭐 때문에 진짜 그들은 제대로 된 선지자 예수님처럼 되지를 못했는가를 찾아내야 돼요. 왜냐하면 그들이 했던 그 어설픔이 그대로 지금 베드로 요한에게 주어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 몸이 떠날 때까지 이 근본 몸이 우리의 후패한 몸이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 이야기, 우리 이야기로 계속해서 채워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한번 대목을 볼께요. 열왕기상 13장 한번 봅시다.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거기에 이름 모를 선지자 나오죠. 이름 모를 선지자. 그 이름 모를 선지자는 무슨 선지자냐 하면 사자한테 lion한테 물려죽은 선지자에요. 그 선지자.


자, 이것이 오늘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고 구약에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적어볼께요. 무엇이 유혹이냐 무엇이 시험이냐. 시험을 이기지 못했거든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조건을 달게 되면 자기 정당성에 신경 쓴다. 조건을 달게 되면 자기 정당성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어요. 나 건드리지 마라. 나 선지자야 이거 있잖아요. 조건을 달게 되면 자기 정당함 나 선지자 맞아 라고 신경을 쓰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신경을 쓰게 되면 나의 나 선지자 됨을 요새 말로 나 신자 됨을 지키기 위해서 아까 이야기한 마지노선을 항상 자기가 제작해요. 시험을 외부에서 시험한 것도 맞지만 내부가 우리의 이미 옛 몸 아담의 몸이 자기 정당성을 사수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떤 법칙과 규칙을 자기가 제정을 해가지고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요한계시록에 있어서에 악마의 나라가 왜 허물어진다고 했어요? 자기가 자기끼리 싸움하지요. 싸움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지정한 법칙과 내가 그걸 따라잡아야 될 내 욕구와 맨날 그 싸움한다고 앵그리버드가 돼. 화난얼굴을 하고 다니고 돌아다닌다고.


“미쳤어 미쳤어 내가 왜 그랬지.” “뭐?!! 왜 네가 네 몸을 치고 난린데. 네 몸 아니고 주의 몸 네가 왜 치는데.” 아~~초심을 유지해야 되는데 초심불망. 초심을 유지하면 망하지 않는다. 초심해서 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초심 지켜가지고. 일방적 초심이에요. 지가 지 맘대로 초심이에요.


그 초심이 뭡니까?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는 초심이기 때문에 그 초심을 가지고 자기 정당성 이라고 하고 자기 의라고 합니다. ‘자기 의’. 쓰잘데기 없는걸로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이건 유혹이야. 유혹이라니. 네가 네 맘대로 유혹해? 지가 유혹이라고 자기가 규제해놓고 마치


그 저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 돈키호테. 돈키호테 있잖아요. 돈키호테가 자기가 미쳐가지고 네덜란드의 풍차 있잖아요. 풍차보고 이 사탄아 물러가라. 자기가 무사 되가지고 싸워도 아주 용감하게 싸우데요. 미친 자에요 전부다. 마귀가 갖고 온 바이러스 퍼져가지고 미쳤어 전부. 미쳐가지고 자기 정당성 싸움하지요.


기자들 다 불러놓고 8시간 동안 두 시간 쉬어가면서 돈키호테 놀음하고 있어요. 나는 관대하다. 이거는 영화 300에 나오는 이야기.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관대하다. 평소에 그 사람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평소에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악마가 집어넣어준 병균체의 증상입니다. 병균의 증상이 그런 증상이에요.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이 마지노선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사자 이름도 없어요. 해가지고 그 남쪽인데 북쪽 가가지고 하나님의 예조, 예언을 들으라 징조를 들으라 해가지고 재가 쏟아지고 거기서 북쪽 왕이 여로보암 왕이 저놈 잡아라 하니까 손이 다시 뭡니까? 뻣뻣해졌어요. 놀라운 기적 아닙니까.


뻣뻣해지니까 이것도 펴주세요 해가지고 또 간절히 부르짖어 가지고 6절에 또 하니까 또 펴졌다 이 말이죠. 펴주니까 8절에 뭐라고 제시하느냐 하면은 한 의리 하는 사람이거든요. 왕쯤 되면 의리 좀 하잖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지금 전반적으로 좀 괜찮았지요? 야 이거 대단한데 메시아 아니야 이 사람? 대단하네. 야 이 사람 초심을 유지했네. 초심불망인데. 정말 이건 안 망하겠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게 악마가 나도 같은 계시 받은 선지자다 이 말에 그만 다 넘어가버린거에요.


그러니까 사자한테 물려 죽은 이 선지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추가적인 다른 변수를 생각 못한거에요. 자기 나름대로의 초심이 자기가 과거에 살아온 것 중에서 괜찮은 것 전부다 끄집어내가지고 이정도면 지키면 나도 한 선지자 하잖아 라고 버티는 거에요. 이정도 하면.


그리면 이거는 뭡니까? 이 포괄적인 이 전 세계가 다 악마의 병이 들었다는 그런 포괄적인 인식을 못하고 자기는 선지자라는 그 자기의 자존감, 나는 선지자니까 주의 말씀 들으면 벌 당한다 안 당한다? 남이야 죽던 말던 나만 벌 안 받으면 되지 그런거.


또는 다른 말로 해서 주님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탓해도 저 탓하면 안돼요. 이게 저의 자존심의 마지노선입니다. 이러고 있다가 주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다른 선지자가 “아이고 나도 계시 받았습니다.” 그 한마디 하고 갔어. 나도 계시 받았다. 내용에 보면 나오지요.


열왕기상 13장 1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어떻게 자료가요 역사 고증학적 자료가 똑같은 자료인데 자료가 두 개가 나왔어요.


자,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이 말했어요. 모든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했어요. 내가 옳다면 무조건 옳다. 내가 아니라면 무조건 아니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옳다 그르다의 최종적인 판단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인간은 자기 정당함을 유지하는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해석을 하는게 아니고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 누가 뭐래도 나 구원받았어. 너만 구원받나? 나도 구원받았어 라는 그런 심보로서 성경을 보게 되어 있어요. 그 신앙을 무슨 신앙이라고 하냐면 여러분 똑바로 한번 보세요. 그 신앙을 무슨 신앙이라고 하는가. 좀 길어요.


이게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결국은 무슨 신학인가. 악마가 집어넣은 신학이에요.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이성으로서 이 신학 말고 다른 신학이 없다는 거에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신학의 마지막이에요. 정통 개혁주의 신학.


옳고 그름은 역사가 알아서 재단해줄거다. 한꺼번에 옳다고 할 수 없지만 계속 주어지는 사태를 통해서 잘라낼 것을 잘라내고 수정할 것을 수정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걸 진리라고 보는 거에요. 그러면 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선배가 있어요. 선배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탈무드. 유대신앙이에요 유대신앙.


아브람부터 모세가 준 계시를 가지고 역사를 통해서 수용할거 수용하고 고칠거 고치고 보탤거 보태서 가장 이거는 누가 봐도 천사가 봐도 하나님 봐도 이거는 이것만큼은 하자 없이 옳다는 것만 엑기스를 골라서 골라서 계속해서 하는 그 일을 랍비라는 자들이 거기 전문가라서 고이 그 전승들 귀한 진리의 전승들을 간직해온겁니다.


그 간직한 사람이 그 관여한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 말씀대로 성전 관리한 사람이 사두개인이고 그 말씀을 직접 이렇게 모집하고 하는 하부기관이 서기관들이고 세트 아닙니까?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그 세트가 무슨 세트지요? 예수님 죽이는 세트지요. 그 세트가 보탰어요. 정통 개혁주의 신학 보탰어요.


자, 정통 개혁주의 신학 복습합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 시작은 뭐다? 말씀을 대할 때 전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려고 성경을 보는 거에요. 그러면 그런 경우에 본인은 그렇게 말 안하고 이렇게 합니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성경 본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초심인지 도대체.


에베소서 2장 요한계시록 2장에 뭡니까? 네가 첫사랑을 버렸노라 되어 있지요? 그 첫사랑이 어떤 첫사랑? 뭐 12살 때 첫사랑? 16살 때 첫사랑? 그게 어느 첫사랑인데. 나이 60 되서 첫사랑도 있을테고. 뭐 어떤 첫사랑?


주님 만날 때. 주님 7살 때 만날 때하고 그 주님하고 17살 때 주님하고 어떤 주님? 24살 때 만난 주님 어떤 주님인데? 주님이 한두가지여야지요. 그 보니까 그거 생각난다. 이소룡 영화. 용쟁호투라는거 있지요. 마지막 방에 가면 거울이 쫙 있거든요. 용쟁호투에서 싸움을 하는데 적이 거울에 비치니까 적들이 한 50명 돼 50명. 거울 때리고 있어. 거울이 온 사방에 다 비추는 거울인데.


그걸 환상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인간이 환상이 없으면 본인이 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환상이 없으면 인간이 주체를 정할 수가 없어요. 환상과 환상을 연결시켜야 내가 ‘나’라는 상징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환상을 실제로 보는걸 가지고 정신분열증이라고 이야기 하고요 아예 환상이 없는걸 가지고 신경증세라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사람은 적당한 비전과 적당한 꿈으로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정상으로 보는거에요. 나는 꿈도 없다 하면 나가 죽으라 해요. 적당한 환상 속에 있어야 그걸 꿰어가지고 되든 안되든 관계없어 그걸 해줘야 내가 살맛이 나. 지금 내가 살 보람을 느껴요.


아이고 자식 앞에 놓고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본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아버지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자식이 아버지 엄마의 환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환상. 그런데 진짜 애가 아프다고 해서 애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 바친다면 이거는 정신분열증 환자에요. 환상이 실제인줄 알고 있어요.


엄마와 딸이 있다. 엄마와 딸이 “엄마 나 사랑해?” “사랑해.” “그럼 엄마 나를 위해서 모든 재산 바칠 수 있어?” “바칠 수 있어.” “에이고 엄마 구라치기는.” 다음날 되니까 엄마가 쫓겨났어. 집 팔고 딸한테 다 넘겨가지고. 그거는 그 딸이 엄마를 좋아하겠습니까? 정신병자로 보겠어요? 정신병자죠.


농담으로 한걸 진담으로 여겼어. 나는 나폴레옹이다 이거 미친 사람 아닙니까? 우리가 내뱉는 것은 전부다 환상이에요. 우리가 농담 아닌게 없어요 인간은. 솔직하게 하는 것이 농담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자기 솔직히 어느 정도 솔직인지 몰라요. 자기 솔직도 모르는데 자기 솔직이 무슨 솔직인지.


취중진담? 술집에서 앉아서 노래부른다? 술을 먹었어도 뭘 먹었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데 무슨 솔직한걸 알아요 몰라요? 퍼도 퍼도 나오는게 솔직. 솔직을 한두번 해야지. 뭐 이건 양치는 소년도 아니고 늑대다!!늑대다!! 거짓말하고.


이 이름 모를 선지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선지자 노릇에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이 진짜 선지자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겠다지만 인간이 지식 외의 것을 추가적으로 어떤 변수나 내가 모르는 사항이 주어져버리면 그것까지 버텨낼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인간의 초심은 악마를 이길 수 없었다를 증명해주는 거에요.


인간의 어떤 윤리도덕 어떤 낮아짐도 하나님의 원하는 천국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부합되지 않으면 자기 딴에 초심이라고 우기면서 말할 때는 필히 그 결과가 뭐로 나옵니까. 자기 정당성으로 나오지요. ‘자기 정당성’. 결국은 이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핑계대서 나의 의를 이렇게 고취시켜서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시키는 거에요. 이런 것이 바로 유대사회였습니다. 선배니까. 유대사회죠.


그 유대사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봅시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43절.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요”. 이 대목이 어려워요. 아까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한다고 합니까. 보통 사람들은. 나 구원받은거 맞다. 나의 구원받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보는 거에요. 나 천당가는거 맞지요?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칩시다. 우리 보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어디서 귀인됩니까? 예수님이 갑자기 귀인되었다가 예수님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뭐다? 예수님 영접하지요.


그러니까 사람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봐 나한테 잘하란 말이야. 나를 영접하는 것이 주를 영접하는거야 라고 하는 거에요. 이 목사한테 새 차 사주고 목사 사택 잘해주고 하는 것이 곧 누구한테 하는 것이다? 주님한테 하는거에요 주님한테. 그러면 나를 험담하면 뭘 받아요? 저주 받지요. 뒤에서라도 험담하지 말란 말이죠. 나를 돈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꽃으로 때리는 정도가 아니고.


선지자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고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인에게 냉수 한그릇을 준 것이 내게 한 것이죠. 자, 이 말씀을 십자가 전입니까? 십자가 후입니까? 십자가 전이죠. 십자가 전에 이야기 할 때에 이걸 누구 듣느냐 하면 제자들이 듣고 있지요.


그 제자들이 들을 때 신이 났어 신이 났어. 왜? 왜냐하면 자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제자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나 제자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누구한테 잘해주는 것이다? 주님한테 잘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제자들은 현재 그 수준에서 십자가 전 수준에서 예수님하고 자기하고 한패인줄 한통속이라고 자부하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자기들 구원받았다고 자부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죠.


원어를 따지고 뭐 백날 따져 봐도 원어 따지고 번역 따져봐야 별 다른 추가적 내용 나올 이유 없지요. 딱 보면 모릅니까? 나한테 대접하는 것이 누구한테 한다? 주님께 대접한다. 거기 무슨 이의를 걸 수 있어요? 히브리어 헬라어 백날 갖다 대도 거기서 거기에요. 뭐 다른 큰 의미의 차이 못 느끼죠.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전부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십자가 달릴 때 제자들은 다 떠나고 말았지요.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43절 무효가 되어 버린 거에요. 왜? 한패가 아니고 따로 노니까 그 무효가 된거에요. 나를 대접한게 주를 대접한게 아닌게 되어 버려요. 왜? 내가 예수님을 떠났으니까.


그러면 그들이 뭐냐하면 뭐 없는 예수였습니까. 십자가 빠진 예수님이죠. 십자가 빠진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성경 모든 말씀을 어디서 이루느냐. 십자가에서 이루지요. 그러면 성경 해석은 내가 구원받은거 맞다고 해석하면 안되고 십자가를 가지고 도로 찾아오는 식으로 우리가 성경을 봐야 돼요.


십자가 도로 찾아오게 되면 도망간 제자 누굽니까? 바로 내가 도망간 제자예요. 내 속에 내 아담의 본성을 일찌감치 알아서 미리 시범적으로 보여준 자들이 제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들이고 서기관들이에요.


왜냐하면 메시아가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십자가에서 겟세마네 기도에 마지막 기도가 뭐였지요? 겟세마네 기도에. 이럴땐 참 여러분 이스라엘 한번 가야되는데. 같이 한번 갈까요? 겟세마네 동산이 있어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참 그 기도가 이게 말만 흉내낼 수는 있지만 삶 전체가 그런 삶이 될 수가 있을까요? 안되지요. 안되니까 십자가 피를 흘리신거에요. 안되니까. 우리가 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십자가를 드러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사명은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가 내 안에 박혀 해독제가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다가 드러나게 되면 그게 성령의 일이에요. 해독제가 살과 피가 이 정도야. 더는 다른거 필요 없어. 예수님의 살과 피만 있으면 돼. 왜? 워낙 우리가 개판이니까.


워낙 우리가 사자한테 물린 선지자 아이고 그 정도 우리는 사자한테 물린 선지자 그 정도도 안가요. 나라의 반을 줄까? 예~~~혹시 뒷말할까 싶어서 예예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랬을거에요. 폼내가지고 안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 뭐 사모펀드? 사모펀드 그거 다 헌납할테니까 법무부 장관이나 시켜주세요. 나라에 반납할테니까.


항상 이렇게 자기의 주고받음 실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런 의도. 이거 뭐 남 욕할거 없지요. 우리가 평소에 이익 없이 실제 이익 없이 주고받는 무슨 그런 식으로 삽니까. 그런 식으로 안살지요. 다 우리 그러면서 살자나요.


자, 그다음에 선지자 제자들은 선지자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미 탈락했어요. 십자가 헤어질 때 끝났습니다. 진짜 선지자는 진짜 초심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꾸역꾸역 이제 제자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집어넣는거에요. 아시겠지요?


그 다음 진도 나가봅시다. 중요한 문제. 베드로가 수제자입니다. 수제자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수제자라면 베드로가 원치 않는 죽음을 주님으로부터 시범적으로 목자다움을 묻는다면 이건 뭐냐 하면 기존에 있던 제자들을 관계가 베드로를 통해서 재수입되는 거에요. 재정립되는 겁니다.


그걸 위하여 요한복음 21장 오늘 본문한번 다시 봅시다. 돌아가서. 제가 아까 삑사리난다 했지요. 베드로가 오해한다고 했지요. 베드로가 지금 요한보고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물었다고 했지요. 아직까지 지금 사도 요한과 베드로 사이에는 예수님의 사명이 게재된 상태에서 이게 연결되어 있지 않고 있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저 사람은 어떻다 하는 것은 너의 공간과 나의 공간은 나는 따로 놀고 싶다 이 말이죠. 나 너하고 나하고 엮이기 싫어. 그런 뜻이거든요. 나만 구원받으면 되지 너 구원받는거 신경쓰기 싫어. 이러면 수제자라는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제자들이 어떻게 되야 되느냐? 하나가 되야 돼요. 하나가.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사명받는 그 현장에서도 하나입니까 하나 아닙니까? 안하지요. 나는 이렇게 처참하게 죽는다는데 처참하게 네가 원치 않는 띠 띄고 죽는다는데 그럼 사도 요한은 질투나네 정말. 쟤는 나처럼 안되니까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거에요. 이건 경쟁자에요. 라이벌 관계라고 라이벌 관계. 이러면 이거는 따로따로 노는 거에요.


그럼 주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순차적으로 했다면 그럼 베드로가 어떤 입장에 있습니까? 베드로에게 주어진 그 주의 일이 그동안 멀어졌던 소원했던 제자들의 관계도 하나로 모이게 되겠지요. 하나로 모이죠? 그 모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


여기 오늘 본문 21장 20절 봅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그 사랑하시는 그 제자”.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 요한 보고 이야기잖아요. 사랑하는 제자. 그냥 제자 아니고 사랑하는 제자에요? 그럼 이렇게 보면 목사님 사도 요한만 사랑받았네요.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사도 요한만 사랑받은게 아니고 사랑은 누가 받았다 하면 안돼요. 단체가 받은거에요. 내 사랑 따로 쓰면 안됩니다. 공동이름으로 받은건데 난 주님께 사랑받았다하고 거기에다 나를 집어넣어버리면 너하고 나하고 따로 노는게 되요. 그러면 한 몸이 안돼요 한 몸이.


여러분 지체라는 것은요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지체는 뭐냐면 머무는 지체는 지체가 아닙니다. 지체는 반드시 뭐를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바로 한 몸을 지향, 몸을 필요로 하는 지체가 되지 지체를 위한 지체는 필요 없어요. 성도가 됐으면 남의 인생 부러워하지 마세요. 남의 인생. 그것도 같은 성도라면 그건 그 사람이 할 역할이고 나는 내 역할 따로 있는 거에요.


자, 예를 한번 우습게 한 예이지만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거는 우스개 이야기이니까요. 새우하고 고래하고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비긴다? 둘 다 진다? 한쪽이 이긴다? 어떻게 되겠어요? 누가 이기겠어요? 새우가 이겨요. 왜냐하면 새우는 깡으로 버티고 고래는 밥으로 밥이기 때문에. 아 아재개그인데. 심한 아재개그. 깡이 밥이니까 맨날 지는 밥이니까 깡이 이기죠. 그런데 실제로 이건 우스개 소리고 실제로 한번 봅시다. 실제로.


이런걸 예상문제로 내면 참 재미있거든요. 제가 예상문제 한번 내 볼게요. 베드로와 인도 금융시장과의 관계를 써라. 베드로와 인도 금융시장의 관계는? 이거 강도사 시험에 이거 내고 싶어요. 여러분 이거 관계 없는겁니까? 인도 금융시장 상황을 알려면 트럼프의 행정부터 해가지고 영국의 주가부터 다 따져야 되겠지요.


그 상황과 그걸 왜 따집니까? 우리가 사는 세계 이 세계잖아요. 만약에 브라질 펀드에 넣어놓은게 있다. 내가 직접 넣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우리 은행을 통해서 펀드 했는데 그 펀드가 나도 모르게 브라질 거기에다 펀드 집어넣었는데 브라질 펀드가 브라질 경제가 떨어지니까 펀드 전화 오잖아요. 마이너스 20% 났습니다. 그거하기 전에 은행 가가지고 손해나도 감당하겠습니까? 다 쓰고 한다고요.


그러면 아무리 성도가 교회 50년 다녀도 현실은 뭐에요?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이 이 성경이 이게 해독제가 되려면 병든 사회의 생리와 구성에 대해서 우리가 몰라라 할 수 있어요? 알아야 되잖아요. 베드로와 금융시장의 관계는? 이쪽은 뭐가 돼요? 이쪽은 죽음의 병동이고 이쪽은 뭡니까? 해독제. 해답 들으니까 참 쉽죠 잉. 참 쉽죠?


평소에 성경공부 할 때만 복음이 아니에요. 평소에 우리가 몸 담고 있는 모든 현장이 복음의 현장인겁니다. 그들이 무슨 수로 어떤 정신 어떤 병균 바이러스 들린 심정으로 나한테 지시를 내리고 나한테 명령을 내리고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제는 성도됐으면 감을 잡아야지요. 무슨 수로 한다고? 어떤 취지로 그런 결정을 하는건지.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그들은 일단 무서워해요. 뭐든 다 무서워해. 벌벌  떨어요. 아닌척하면서 밤중에 회사에 가서 술먹는 이유가 뭡니까? 무섭다. 한 아이가 무섭다 그래요. 두 아이가 무섭다 그래요. 무서우면 무서운대로 술 먹고 마약 먹듯이 술먹고 하는 거에요. 실제 이 세상의 현실 특히 도시 같은거. 도시의 현실 속에서 오늘의 복음이 이 양과 목자 이 복음이 적용이 되야 되는 겁니다.


인력사무소에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두 사람이. 찾아왔는데 둘 다 이제 약간 30분 일찍 온사람과 30분 늦게 온 사람이 있어요. 30분 일찍 온 사람이 자기가 인력사무소에 소장 행세하면서 “당신 어디에 취직할려고?” “예 어디에 취직할려고요.” “그래? 복장 그래서 안돼.” 이러거든요.


하자마자 진짜 관리소장 와가지고 자!자! 하면서 진짜가 나타나니까 뒤에 온 사람이 속았어. “어?! 당신도 노는 사람?” 어쨌든간에 뭐냐 엑스트라였어요 엑스트라. 실제로 있는 이야기에요. 엑스트라. 엑스트라인데 한사람 뽑습니다. 한 사람. 뭐냐하면 매 맞는 역입니다. 매 맞는 역.


“매 맞는 역인데 자! 4만원!” 이렇게 나왔다고요. 그러니까 어느 사람이 “아! 4만원에 매 맞겠습니다. 회초리는 맞지요?” “회초리로 맞는게 아니고 몽둥이로 맞습니다.” “아 그러면 6만원 받아야 겠습니다. 6만원. 6만원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6만원 됐습니다.” “때리는 사람이 누굽니까?” “때리는 사람이 자식이 늙은 아버지를 때리는 장면입니다.” “아~~이거는 안되는데. 이거는 천륜을 어기기 때문에 8만원 올립시다.”


그럼 벌써 4만원에서 8만원 됐지요? 8만원 됐는데 그 다음에 “자, 때릴 때 어떻게 때립니까?” “그 사람이 야구선수가 되가지고 심하게 방망이로 때립니다.” “아 야구선수 같으면 때리는 스윙폼이 있기 때문에 10만원 더 올려야됩니다.” 그렇게 됐는데 8만원에서 10만원 됐는데 그 사람이 “그 야구선수가 메이저입니까? 국내입니까?” “메이저입니다.”


메이저 같으면 강도가 쎄기 때문에 20만원 받아야 된다는 거에요. 옆에 그걸 듣고 있던 사람이 내가 메이저든 몽둥이든 4만원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4만원에. 20만원 불렀잖아요. 늦게 온 사람이 4만원 불렀어요.


자, 한번 보세요. 어느 것이 초심입니까? 지금 제가 현실문제 이야기하는 거에요 현실문제. 현실문제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어느게 초심이겠어요? 그 3만원 받고자 하는 사람은 지금  자기 애한테 3만원 받아서 뽀로로 사줄려고 3만원 받아야 돼요. 뽀로로가 초심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망가지던 메이저리그 나온 사람한테 망가지든 말든 관계없이 자기는 무조건 자기는 3만원 줘도 하겠다는 거에요. 3만원 이상만 주면.


자, 이 현상을 한번 봅시다. 이 현상이 뭐냐 하면 변화지요 변화. 제가 무슨 이야기 했느냐 하면은 인간은 초심을 간직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늘 이렇게 유동해져. 매일같이 달라지는데 나는 내가 상상합니다. 엑스트라에 매 맞는거 나는 할 수 있다. 일당 4만원이면 한다. 이거는 그쪽에서 그 관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듣기 전에 일방적으로 내가 정한거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 사명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내일 이런 일이 있더라도 저는 감수하겠습니다. 이게 되도 않는 엑스트라 인력 사무소에 온 백수 상태에요.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터져버리면 내가 이런 맘을 가졌어? 자기도 이정도 까지는 몰랐는데. 뭔가 요구조건이 계속 나오는 거에요. 요구조건이.


자, 묻습니다. 그 요구조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그 요구조건 어디서 나온거죠? 자기의 병이 어느 정도로 심한지는 본인은 몰라요. 나는 천국가도 뒷자리 앉을 정도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지옥 갈 정도까지 내가 막 되먹은 존재는 아닐 것이다. 왜? 선하니까. 성품이 착하니까.


도와줄 사람 도와주고 나쁜 짓은 내가 아예 가담을 안 하니까 지옥 간다는 것은 너무 심하고 천국 가서 욕심내서 앞자리 앉겠다 그건 베드로보고 차지하라고 하고 나는 천국 가서 뒷자리만 있어도 고맙겠습니다 이정도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새로운 변수가 주어질 때는 자기가 어느 정도 변할지 자기는 몰랐던 거에요.


지금 여기에 지금 여기 변수가 오기 전까지 지금 이 사람 인력사무소에 온 사람은 강도짓한 사람이에요? 살인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직업으로서 온 사람이에요. 착해요. 노는 것보다 자기 직업 찾아서 일 하는게 얼마나 착하고 대견합니까? 하지만 막상 새로운 사태가 주어지니까 20만원 받고 하겠다든지 뭐 이런 식으로 그런 소리하는거 봐서 누구한테 미쳤습니까? 3만원한테 미쳤지요.


그 이야기가 바로 누가복음 방금 이 이야기가 두 군데 나옵니다. 한 군데는 마태복음 20장 그건 제가 설명 길게 안 할께요. 다 아는 이야기라서 여러분 지겨울거에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비유 나오지요? 지금 포도원 비유를 제가 성경에서만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실제로 제가 실제 인력사무소의 풍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자, 미장이 이거 7만원이다 아니 5만원이다. 아 2만원 쓰라고 하세요 뒤에서. “2만원 좋습니다.” 나온단 말이죠. “2만원 좋습니다.” “아~2만원 받고 할 걸 괜히 뻐기다가. 뒤에 미장이 있는지 몰랐지.” 아 그런 경우가 한두갭니까 한두개.


누가복음 18장인가 거기 나오지요. 여러분 18장에 성전에서 두 사람이 나오지요. 하나는 바리새인 나오고 하나는 세리 나왔잖아요. 바리새인 뭐라고 제시합니까? 나는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했다 했잖아요. 자, 하나님 콜?! 이런 거에요. 콜?!! 여러분 바리새인이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바리새인 얼마나 욕합니까?


그런데 그 바리새인을 욕하지만 왜 그 바리새인을 등장시켜놨겠어요? 이게 누구 이야기란 말입니까? 낮춰놨다고 낮춘다는 우리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고개를 못 들었어요. 고개를 못 들고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온 거에요.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것도 어떤 인생도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살려준다면 어떤 인생이라도 저는 손해볼 거 없어 이런 식이에요. 그런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누가 당해요.


왜 주님께서는 세리를 구원할 수 있는데 왜 바리새인과 대비시키죠? 오늘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풀어야할 내용입니다. 왜 그 사람을 구원하면 되는데 왜 대비를 시키느냐? 왜 이렇게 나란히 대비를 시키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제자들이 12제자 있잖아요. 1제다 날라가고 12제자. 하나 새로 뽑았고. 이 제자들을 묶을 때 협상과 타협으로 이게 묶어질까요? 이게 안 묶어질까요? 묶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럼 안 묶어지면 따로 놀면 되지 않느냐? 따로 놀면 이게 몸이 아니에요. 뭐가 되느냐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두 사람이 모여서 그 과정을 통해서 생산된 거거든요. 혼자 사랑해도 소용없어요. 혼자 사랑하면 짝사랑이지 뭐. 소용없는 거에요. 둘이 있어야 돼요. 둘이 사랑해야 돼요.


둘이 사랑한다면 나에게는 ‘나’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나’가 되겠지요. 이 두 개의 ‘나’가 아무리 해도 절대로 새로운 ‘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 없다고 장담을 하느냐? 성경에 나온 제자들부터 구약에 나온 모든 사람이 이게 안돼요. 되지를 않는다니까 되지를. 될 수가 없어요.


자, 오늘 본문 20장 24절 봅시다. 20장 24절 말고요 요한복음 15장 내가 지금 얼른 찾으려고 하니 안 찾아지네요. 16장입니다. 미안합니다 15장은 좀 있다가 찾고요 16장 봅시다. 자, 좀 어렵습니다 16장 20절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너희가 곡하고 애통한다는데 자 곡하다 애통한다 할 때에 개인적으로 아파서 곡합니까? 뭔가 자기 말고 다른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곡하고 애통합니까? 다른 분이 자기 죽음도 아닌데 자기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다른 분이 죽었지요? 그렇다면 우리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내 죽음이 나한테 아픔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세상을 몰라 주는게 아픕니까? 라고 제가 물을 때에 나는 예수님이 세상을 몰라주는게 해독제 있는 분도 몰라주는게 아파요 하면 당신이 아파요? 그럼 나도 아파요. 너도 아파요? 나도 아파요 이러면 그건 자연스럽게 뭐가 형성 돼요? 한 몸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한 몸이 되기 위해서 다른 외부적인 이미 1로 완성된 1이 쪼개지지 않고 1이 그대로 살아있는 채 각 사람마다 전부다 부여해야 되는 거에요. 그게 뭐냐? 오순절 성령강림이란 말이죠. 오순절 성령강림. 하나로 와서 갈라지잖아요. 하나로 와서.


너 어제 받고 오늘 받고 이게 아니고 하나로 와서 그게 상당히 상징적이다. 시사적이다. 시사적이다. 표준적이다. 표준적이다 이 말이죠. 앞으로 어제 너 받고 오늘 나 받더라고 그것은 뭐다? 시공간을 떠나서 동시에 한번 받은거고 한 장소에서 한번 받은거고 따라서 우리는 한 몸이란 것을 알라 이 말입니다.


이걸 뭐냐 하면 ‘단회의 반복성’이라고 합니다. 참 말이 다른 적당한 말이 없어요. 한번 일어난 것이 반복된다는 거에요. 반복되는 것. 한번을 유지하면서 1을 유지하면서 단번에를 유지하면서 반복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말 자체가 모순됐죠. 단번은 한번이고 끝나는거고 반복은 되풀이 되는 것이 반복인데 한번 끝난 것이 끝남이, 끝남이 반복되니까 너 잘났다 나 잘났다 마지노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어요. 없다고요. 그러니까 집안식구가 자식이 자식이 아니에요. 새롭게 잉태치 못하는 자식이 그렇게 발생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1장 20절 보세요. 애통했지요. 곡하지요. 너희는 근심하였으나 근심은 기쁨이 되는데 그 기쁨은 무슨 기쁨이냐? 22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해산한 여자를 누굴 보고 해산한 여자라고 합니까? 바로 너희들이 각자 해산한 여자가 아니고 너희들이 하나라는 조건하에 오직 하나의 해산하는 여인이 되는 겁니다.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은 한 몸으로 보는 거에요. 여럿이 보는게 아니고. 한 몸이기 때문에 한 몸 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지요. 한 몸 될 필요 없지요.


형제를 사랑하자. 사랑하자 아니고 사랑을 사랑해야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버리면 이거는 내 의로움이 되니까. 이미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잖아요. 이게 에베소서 4장에 나온다고요. 이미 하나된 것을 확인하는 차원이지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고 이미 사랑인데 이미 주어지는 거에요.


이걸 제가 옛날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없어서 옛날식 화장실 수세식 화장실을 예를 들은겁니다. 옛날식. 뒤에 물 누르는거 말고 물통있고 볼일보는데 뭔가 줄이 있지요? 잡아당기면 이미 고였던 물이 내려오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시설 안 좋은 화장실 가게되면요 잡아당기면 물이 저쪽으로 나와야 되는데 물이 위로 나올 수가 있어요.


화장실 갔다가 완전 샤워하고 나온 사람. 아 그런거 있어요. 물통에 물이 넘쳐가지고 쭉쭉 떨어지는 거 있어요. 어쨌든간에 한 기쁨 한 소망.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새롭게 태어난 기쁨.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이 내가 누굴 사랑한게 아니고 사랑이 나를 다루지요. 사랑이 나를 새로운 인간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기쁨.


그 기쁨이 이게 나의 사랑이 아니잖아요. 한 몸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으로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들 다른 제자들 수제자니까 다른 제자들과 드디어 12제자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 구원하려고 예수님 오신게 아니에요. 사도 요한 구원하려고 온게 아니고 전부다 하나의 사랑으로 묶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주께서 예언한거에요.


요한복음 15장 18절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뭡니까? 1인칭으로 하지 말라 1인칭으로 하려면 누구한테 해라? 예수님 1인칭 해야지 너 1인칭으로 가져오면 안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너는 네 몸이 아니고 너는 지체이니까. 네가 왜 1을 너한테 적용시키냐 이 말입니다. 주님한테 1을 적용시켜야지. 우리는 뭐냐? we에요. 너희 중에 하나일 뿐이지. 진짜 하나는 예수님만 하나지. 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했어요.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최종적인 죽음이 있다. 그 죽음은 뭐다? 해독제를 갖고 있는 사람의 위상입니다. 해독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해독제를 갖고 있는 내가 갖고 있는게 아니지요. 우리가 갖고 있는 거죠. 그 해독제를 중심으로 해서 사랑 안 할 수밖에 없어요.


“너도 그 살과 피를 마셨어?” “마셨어.” “나도 마셨어.” 그 이야기할 때 살과 피를 제공하지 않는 너와 나는 거기서 빠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너한테 사랑했잖아. 제공했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의 살과 피는 소용없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굴 만날 때 그 사람이 내 소유물인가 생각하지 마세요. 물론 우리가 성도니까 그럴 리 없겠지만 세상 사람과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력사무소라든가 현실에 가게 되면 상대를 나 위주로 나 필요한 위주로 소유의식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형제를 대할 때는 저 사람이 뭘 바라보게 해요? 해독제.


살과 피를 바라보는 쪽으로 하게 되면 누가 흐뭇해야 되고 누가 감사해야 돼요? 내가 기뻐해야 되죠. “아이고 저 사람 기적 받았네.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모든 근원적인 문제를 다 해결해버리느냐. 야 진짜 주님이 저 사람을 되게 사랑하네.” 그럼 저 사람이 “너도 만만치 않아. 주님이 당신도 사랑했잖아.” 이게 바로 성도와 성도의 교류입니다. 하나됨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됨을. 우리는 의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자, 요한복음이 서서히 어떻게 끝나는지를 아시겠지요? 왜 베드로에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수제자이기 때문에 그렇고 그 베드로 중심으로 제자가 뭐 된다? 아까 요한복음 15장 16장처럼 하나 되기 위해서. 그것을 두자로 ‘사랑’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아까 21장에 주님이 베드로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거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거기서 베드로가 내가 사랑한다 하지 않지요. 바톤을 누구한테 넘깁니까? 주님한테 넘겨버려요. 주님이 저희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주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자, 한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합니까? 사람 상대 안 하는거 맞지요? 하나님 상대하지요. 그렇죠?


진짜 우리는 시시한 사람 상대 안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기에 성령 받았잖아요. 하나님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 입장에서 주님을 생각하세요. 뭐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거 해주세요 이거 하지마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지마세요. 건방지게 주님을 사랑하는데 죽어도 좋아요. 죽어 마땅하고. 그저 주님 주신 살과 해독제만 있다면 그게 우리의 보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치 사람 상대하듯이 주님 사랑했습니다. 이용할라 했습니다. 나한테 이익을 얻으려고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주여 이 어리석음이 정신병인 것을 악마의 병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이 주신 살과 피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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