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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1 23:54:10 조회 : 313         
인간공간, 하나님 공간 19100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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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75.♡.96.96) 19-10-11 17:55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요한복음 8장부터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을 다하고 다시 요한복음이 길기 때문에 계속 요약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시간에 요한복음 1장에서 6장까지 또는 7장 중간까지 했는가 제 기억으로는 그런데요. 오늘 7장 후반부부터 하겠습니다.


7장에 보게 되면 인간의 공간과 예수님의 공간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간. 인간의 공간. 인간의 공간은 대표적으로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거는 바리새인들이 대표로 보여주죠.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이 고맙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생각의 범위를 그들이 미리 앞서서 다 보여주니까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바리새인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한계에, 한계선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7장 49절에서 이런 이야기해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들은 저주받은 자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저주 받았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그들은 지키지 않는다고 그렇게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그들의 극한, 그들의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하여 할 수 있는 그 목표는 뭐냐 하면 바로 ‘모세율법을 지키자’.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바운더리에요.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라는 그러한 의도 이게 인간이 만든 정신적인 공간이 되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자하는 것.


그러면 이 인간의 공간에는 누가 필히 생생하게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인간+율법이 모세의 율법이 이렇게 이 두개가 인간의 공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자라고 했을 때 이것은 율법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율법이 인간을 보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복 받은 상태에요? 저주 받은 상태 입니까? 아니면 중립적인 상태 입니까? 중립적인 상태겠지요.


지키면 복 오니까 안 지키면 저주받고. 저주에도 해당 안 되고 복에도 해당 안 되고. 지키기만 하면 복이 오게 되고 안 지키면 저주 받으니까 안 지켰다 하는 경우에는 회개 반성해가지고 다시 죄를 용서받고 복 쪽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것은 한마디로 뭐냐 하면 ‘조율’이라는 것. 본인의 운명에 대해서 누가 조율한다는 겁니까? 본인이 조율하는 거에요. 본인이. 징계받을지 또는 안 그러면 복을 받을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조정을 하게 되기 때문에 조정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데 집중합니다. 자기 실력을 발휘하는데.


지금 내가 잘못되고 있다 싶으면 대번에 착한 일을 해가지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면 되고 그렇게 해서 뭘 유지하느냐 하면은 조율해서 뭘 유지하느냐 하면은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는 거에요.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는 것.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최종적인 목표가 뭡니까? ‘나 건전하다. 나 괜찮다.’ 이렇게 되게 되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누가 누구를 조율해서? 내가 나를 조율해서 구원받지요? 그러면 내가 조율하는데 남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내 운명 내 팔자는 누구 손에 달린 겁니까? 자기가 자기 실력 발휘에 어떻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에요. 혹시 자기가 실수했으면 금방 반성하고 회개하면 되니까. 이걸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바운더리. 범위라고 했지요. 이걸 제가 인간의 공간이라고 한거에요. ‘인간의 공간’.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고맙지요?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이런 식으로 살거든요. 자기 조종하는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까 자기가 건전하단 말이에요. 이렇게 하다보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7장 3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있다가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그다음에 7장 34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그 다음에 뭐에요? 나를 찾아도 그 다음에 뭡니까?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공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주님의 공간, 천국이죠. 하늘나라와 만납니까? 못 만납니까? 만날 수가 없는 거에요. 만날 수가 없어요. 만날 수가 없으니까 이것은 헛짓한 거에요. 전부다. 뭔가 건전하게 하긴 했는데 거룩하고 경건의 경건을 향하여 열심히 애를 썼는데 결과는 뭐냐 하면 만날 수가 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 주님이 만약에 저 호남선 대전에서 광주 쪽으로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간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노선이 뭐냐 하면 경부선 부산 가는 쪽인 거에요. 제가 여러번 하지만 갈 길이 달라요. 갈 길이 달라요. 가는 길이 달라요. 방향이 달랐어요. 바리새인하고 예수님 가는 길. 인간들이 가는 길하고 예수님 가는 길이 달라요.


그걸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는 뭐냐 하면 천국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 했어요. 모성애??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착하고 성실하고 건강하고 이쁘고 굉장히 조심스럽고 그렇게 사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조건을 일체 인정을 하지 않는다. 열심히 고3때 공부는 했는데 대학시험에 한 문제도 안 나왔어요. 공부한거는 한 문제도 안 나왔어요.


안 나온 것을 계속 30년 40년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한 거에요. 천국에서 요구하지도 않는데. 천국에서 요구하지도 않는 것을 인간들은 왜 하느냐? 인간들이 자기가 문제를 낸 거에요. 자기가.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좀 더 건전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경건한 모습으로 내가 달라질까. 그렇게 되는 것은 무슨 여기에 뭐가 동원됐습니까?


자기 실력으로 할 수 있는 발휘할 수 있는 그 문제를 주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하늘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은 "보자 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가 한번 보자." 이런 내용을 출제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의 실력을 한번 보자는 거에요. 네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고 정신 바짝 차리면서 살았느냐. 이렇게 본다는데 정신 차려도 안돼요. 정신 차려도 못 만나요. 만날 수가 없는데요.


두 친구가 대전에서 차를 탔는데 대전에 있을 때는  둘이 같이 가는 줄 알았죠. 기차가 동시에 들어와가지고 한쪽은 경부선 부산가는 기차타고 한쪽에는 광주 가는 노선을 탔으니까 이게 대전역에 보면 노선이 달라요. 철도. 다르다고요. 부산 가는 것은 12번이라고요. 제가 하도 많이 타서. 11번 12번 둘 중에 가거든요. 광주 가는 건 몇 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간다 이 말이죠.


처음에는 친구하고 이렇게 있을 때는 기차가 처음 출발할 때는 그 기차도 와 있고 있으니까 눈보고 이야기가 되는데 이게 시간이 5분 10분 지나면 이미 갈 길이 다르기 때문에 안보여 서로가 서로가 보이지를 않아요. 길이 다르기 때문에. 가는 길이.


경부선 탄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들은 열심히 기차 안에서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뭐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여기 광주 천국 가는 사람은 내가 원한게 아닌데. 열차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네. 자꾸 이상하데. 뭔가 낯설다는 거에요. 풍경이. 내가 예상하지 않은 풍경으로 가버려요. 낯선 풍경 즐기기에 바빠가지고 내가 지금 수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돌볼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에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33절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오지도 못한다라고 잠시 살짝 보여주고 떠나는 거지요. 살짝 보여주고 가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 예수님의 공간이 따로 있다라고 이야기 할 때 이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공간에 속한 인간들은 뭐라고 이해를 했느냐? 이렇게 이해를 해요. 36절부터 유대인들이 서로 이야기하는데 저 사람이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는데 ‘아 이방인들, 헬라인들 가는 곳에 가는 모양이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 사회를 공동체를 떠나서 저 헬라인한테 가니까 우리 유대인들이 안가는 곳이니까 가서 못 만난다. 그렇게 그런 이야기하는구나 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 공간, 인간의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면 수직이 아니고 수평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여기 유대인 사회인데 유대인 사회를 떠나서 헬라인 사회로 예수님이 자기들 떠나서 갈 모양이다 이렇게 하니까 유대인 사회나 헬라인 사회나 사실 따지고 보면 같은 육지, 땅 아닙니까. 땅이니까 이거는 단절입니까? 아니면 연속성입니까?


단절이 아니고 연속성으로 보는 거에요. 자기도 조금 멀리 외곽으로 나오면 만날 수 있다 헬라인 사람들 만날 수 있으니까 멀리서 안 보인다 뿐이지 가기만 하면 만난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수평적을 말하는게 아니고 못 만난다는 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수평이 아니고 수직적이죠. 수직적.


이 수직적을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초월이라고 하는거에요. ‘초월’. 주 예수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된 존재죠. 그 초월된 존재에서 또 하나의 공간이 있으니까 이걸 초월로 가서 뭐냐 하면 일반화시켜요.


일반화 시킨 것을 더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또 초월이 되고 또 그것이 일반화가 되고 또 초월이 되고 일반화되고 이게 바로 성도의 가는 삶입니다. 성도가 처음에 성령 받아서 예수님을 알 때는 조금 알아놓고 나는 초월했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그 초월한 것을 일반화 딱 시켜버리니까 그 일반화된 그 보편화된 그것을 마치 다 알은 것처럼 여긴 거에요.


또 다시 새로운 예수 믿고 한 5년 뒤에 또 다른 비약 또 다른 초월을 줘버려요. “아 그런 뜻이었었어?! 야 이제야 나는 알았다.” 하고 다시 개마고원처럼 일반화되버리는 거에요. 초월해놓고 다시 평평하게 되고 또 초월해놓고 평평하게 되고. 에베소서 사도 바울이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에베소서 3장에 보면 3장에 사도 바울이 기도를 해요.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은 3장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방금 배웠으니까 바꾸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초월자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고. 초월자가 우리 마음에 계시니 우리는 누구의 공간입니까?


인간의 공간이 아니고 누구 공간이에요? 예수님의 공간이죠. 왜? 초월이니까. 우리가 만든게 아니고 주님이 와요. 우리 안에 들어와버렸으니까. 초월의 공간이죠. 초월의 공간이니까 끝이에요? 아니죠.


“너희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넓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다음에 19절에 “그 넓이와” 넓이, “길이와” 길이, “높이와” 벌써 3차원이죠. 깊이, 높이 위쪽과 아래쪽에 깊이. 이러한 그야말로 아까 제가 이야기한 공간이죠 ‘공간’.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구하노라”. 기도한다 이 말이죠.


그럼 기도한다는 말은 공간에 구석구석 돌아보게 하옵소서에요. 구석구석 돌아보게 하옵소서. 나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 말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뭘 준비했는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구석구석 보는게 전부다 인간의 공간에 예상도 못한 것이기 때문에 낯선 풍경들이기 때문에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그 낯섦이 주는 기쁨같은 거에요. 아 이런 것이었었어?


그런 것을 늘 새롭게 깨달으면 뭐가 나오겠어요? 감사와 기쁨이 계속 나오겠지요. 아 공간이 이렇게 깊었어? 이렇게 넓었어? 이렇게 높았어? 이렇게 충만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해가지고 여러분이 감을 못 느낄 거에요.


이게 어느 정도 좋은지 감을 못 느낄 거에요. 그걸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인간의 공간과 대비를 시켜서 그걸 확 절감하도록 확 깊이 깨닫게 하는 건데 아까 인간의 공간에서는 제가 아까 강의의 초반에 벌써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공간은 뭐든지 자기의 건전함으로 돌아온다고 했지요? 자기 건전함을 도모하지요. 건전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자기 실력을 발휘해야 되겠지요. 실력을 발휘할 때 자기 행동을 조율하는 겁니다.


이거 하면 나쁜 일, 이거 하면 좋은 일. 나쁘게 하면 저주 오고 아까 바리새인들 했지요. 좋은 일 하면 복 오고 나쁜 짓하면 징계 받을 각오하고 있고 이게 바로 인간의 공간이거든요. 인간의 공간이 우리 몸 자체가 인간에서 나온 육체로써 있는 이상은 거기에다가 주님의 공간이 같이 겹쳐졌으니까 이게 대비가 되는 거에요.


대비가 되면서 이 몸은 경부선 지옥 가는게 이 몸은 지옥 갈 몸을 가지고 지금 어디 가고 있다? 천국 가고 있으니까 왜 천국 가는 것이 내 아이디어에서는 예상하지 못할 것들만 주어지는지를 깨닫는거에요. 왜? 우리는 항상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


그래서 벌 안 받기 위해서 내게 행운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굉장히 행동에 조심하겠지요? 스스로 자기를 늘 테스트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테스트가 쓸모없는 거에요. 초월을 하고 나서 초월을 해놓고 이것을 일반화시키기 위해서는 여기에 인간의 공간에서 습득한 그게 그런 내용들이 여기에 포함이 되면서 주께서 이걸 충분히 이용하면서 초월을 일반화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쓰레기같은 우리 육체가 필요없는게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질질 끌고 가야 되는 겁니다. 옛날에 유명한 서부극에 보면 장고라는 사람이 나타나요. 완전히 거지인지. 진짜 모자 다 떨어진 것 쓰고 수염 기르고 망토 이렇게 모자 탁 쓰니까 눈도 안보여. 코만 삐쭉 보이고 망토 이렇게 쓰고 멕시코 망토 쓰고 뒤에 뭘 끌고 가느냐 하면은요. 항상 특징이 뒤에 어떤 관을 끌고 와요 관을. 관을 질질 끌고 와요.


관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빰빰빠바밤~ 서부의 무법자 노래, 장고의 노래 이거 아니지만.. 이렇게 가면서 관을 끌고 온다고요. 이 관에 뭐가 있느냐 하면 기관총이 있어가지고 다 죽이는데. 이 관을 죽은 우리의 육신으로 봅시다. 이 육신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아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 짓거리가 계속 나오겠지요? 바리새인들의 그 짓거리. 그런데 이것은 항상 뭐를 유발하느냐 하면 내가 벌 받으면 안되지. 우리 애도 있고 우리 가정도 있는데 잘 되야지.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조종하면서 계속 조종함을 계속 유발시켜요. 불안불안한 거에요.


다시 말해서 뭐가 없느냐 하면 기쁨도 없고 그 다음에 감사도 없고 고마움도 없는 거에요. 어떤 내가 행동을 내 착한 행동을 발휘해서 어떤 결과, 실적 같은 것 그런 것들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이걸 끌고 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초월을 일반화할 때 이걸 집어넣어버려요. 초월에다가 이걸 집어넣게 되게 되면 바로 이러한 의식 때문에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아까 자기 건전함 쉽게 말해서 ‘자기 의’라고 할 수 있지요.


자기 건전함, 자기 의가 결국 뭘 하느냐 하면 기쁨과 감사를 이걸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건전함은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예상되는 결과를 원한다. 내가 이만큼 착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집안에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예상되는 결과를 자꾸 추구하게 되지요.


예상되는 결과를 추구하니까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초조함이 발생되지요. 그거 안 해주면 어떡하지. 그거 때문에 기도 벌써 한달째 빡씨게 기도하고 있는데. 수능은 50일 남았는데 50일 안 남았구나 내가 빡씨게 새벽 기도하는데 수능점수 많이 나와야 하는데 벌써 초조함이 나오겠지요.


초조함이 나온다는 것은 뭘 잃어 버렸어요? 기쁨과 감사 이것이 훼손되는 겁니다. 이게 가짜 기쁨 가짜 감사로 자꾸 가리워지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겠어요? 바로 이것 자체에서 뭐가 일어납니까? 이것 자체에서 수직적인 초월을 가미해버리는 겁니다.


초월을 가미할 때 어떻게 하느냐? 초조함, 불안 이것을 주님께서 일부러 심화시킵니다. 그러면 이게 나중에 낭패가 되고 좌절이 되겠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초월을 해줄 때는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야 기쁨과 감사냐 하면 우리가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주식 폭락하는걸 뭐라 합니까? 바닥 쳤다 하지요. 바닥 쳤다 하잖아요. 오늘 주식이 2073인가 그래요. 관심 없는 사람은 몰라도 돼요. 그런데 어디까지 내려갔느냐 1900얼마까지 내려갔다고요. 사람들은 바닥을 쳤다 해요. 인간은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치게 되면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하고 나하고 별개, 전혀 접촉이 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이게 초월이에요. 내가 아는 초월은 내가 위대하게 뛰어넘는 높이뛰기 해가지고 2m20을 넘겠다. 이게 초월이 아니고 오히려 초월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리웠던 우리의 의와 자기 잘남을 우리가 바닥을 쳐버립니다.


바닥을 쳐버리면 비로소 이미 우리가 아무 나의 행함과 성실함과 관계없이 주께서 구원해주심이 새록새록 새삼스럽게 팍 뒷배경에 팍 등장하는 거에요. 뒷배경에. 여러분들이 김정은 있는 궁이 무슨 궁인지 모르겠지만 김일성 주석관. TV에 있는 것 보셨지요? 보셨어요? 김일성 주석관.


저는 기억에 남는게 뭐냐 하면 백두산 그림하고 금강산 그림만 보여요. 얼마나 그 풍경화를 크게 그려놨는지. 북조선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을거 아닙니까. 그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그것이 그게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그 공간은 누구 공간입니까? 김일성 주석 공간이죠.


그럼 지금 우리는 어디 와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어디 와 있습니까? 예수님 공간이잖아요. 예수님 공간에서 왜 우리가 초조하고 불안하고 벌벌 떨고 걱정과 근심은 사서 다 하는 겁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육신, 우리 육신이 자기 관리해서 그런 거에요.


내가 나의 건전함을 자체적으로 도모,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겁니다. 조율 한번 해주세요. 한경애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조율 한번 해주세요. 자꾸 자기 자신을 하늘보고 조율 해 달라고 조율하는 거에요. 하나님 이렇게요? 저렇게요?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저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조율을 왜 해요? 왜? 조율을.


뭐가 그렇게 초조해서 조율하는 거에요? 뭐가 불안해서 조율하는 거에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여 이러면 건전한 겁니까? 이러면 바른길을 가고 있는 것이죠?" 천국에서 출제하지도 않은 문제를 자기가 출제해가지고 자기가 푼다고 끙끙대고 있는 거에요.


3번이 맞습니까? 2번이 맞습니까? 어느 쪽이 맞으면 복 받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꿇어앉아서 기도할까요? 아니면 손 모으고 기도할까요 손 펴고 기도할까요? 자기가 문제를 내. 자기가. 인간의 공간에서 하는 그 짓거리 있잖아요.


요한복음 7장의 주제를 뽑으라 하면 두자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폭로’. 성도가 왜 그러냐. 성도가 구원할려고 성도로 살려주는게 아니고 폭로시키는 겁니다. 네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고 네가 살던 곳은 지옥이라고.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폭로를 시킵니다.


폭로를 시키면서 폭로 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면 뱀, 악마와 싸우는게 아니고 다윗은 골리앗하고 싸웠잖아요. 우리는 그건 구약식이고 신약식은 그게 아니에요. 아니고 우리가 뱀의 목안에 들어가요. 우리가 폭탄이다. 자살테러 있잖아요.


우리가 폭탄이어가지고 뱀 안에 들어가면 우리가 뱀 안에 들어가면 그걸로 마귀를 이긴 거에요. 마귀하고 한판 붙을 생각하지 마세요. 뭐 태권도 해가지고 하지 말고 아예 뱀의 몸 안에 폭탄을 집어넣듯이 우리가 마귀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요나가 마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들어와 버리면 그 폭탄이 무슨 폭탄이냐 하면은 그 악마한테 일부러 삼킨게 되지요. 일부러 우리는 악마한테 삼킴을 당할 때 우리는 폭탄으로 삼킨거에요. 악마가 잘못 삼킨거죠. 그게 폭탄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쉽게 이야기했는데 지금부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뭐 어렵다 해도 설명하면 쉽던데 쉬운거 아니에요. 진짜 어려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요 제가 예를 한번 들께요. 예를 들테니까 여러분들이 상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자동차 공장에 보면 조립하게 되어있어요. 부속품들을 하청업자가 가져 와가지고 그걸 조립라인에 집어넣어서 처음부터 없는데서부터 하나하나 조립해가지고 나중에 완성품이 저 조립라인 저 끝에 차가 완성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카메라로 찍는다고 봅시다. 처음부터 조립할 때부터. 처음에는 차체에다가 새것이죠. 새 차체에다가 핸들 집어넣고 하는 걸 카메라로 다 찍는 거에요. 쭉 찍어놨습니다. 하나하나 조립해놨습니다. 그래서 긴 조립안을 다 끝내놓고 보니까 완성품이 되었지요?


완성품이 되어가지고 차 한번 타볼까 싶어서 차문을 스윽 여는 순간 거기서 시체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걸 상상할 수 있지요? 시체 하나 떨어졌다고 상상할 수 있지요? 자, 그럼 묻습니다. 그 시체 어떻게 들어 있을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하지요.


이것이 히치콕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감독이 이걸 구상을 했어요. 포드 시스템 다시 말해서 포드 자동차에 자동차 라인을 카메라로 다 찍되 마지막 장면은 다 찍었고 다 없는데서 다 하나하나 조립했는데 차 문을 여니까 죽은 남자의 시체가 나왔다까지 촬영을 할 때 그 히치콕이라는 감독이 그걸 촬영을 하고 구상을 다 해봤는데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본인이 그걸 구성해놓고도 시체가 들어가는 논리를 구성할 방법을 모르겠는거에요.


제가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은 흙으로 만들었지요? 흙으로 만들었는데 왜 인간이 왜 죽습니까? 흙으로 만들었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잖아요. 없는데서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왜 인간에게 자아가 있느냐 이 말이죠. 그거 어디서 조립된 겁니까?


히치콕이 (나 너무 떠든다고 하는가?) 히치콕이요 그걸 자신감이 없어요. 그걸 찍을 자신감이 없는 거에요. 인간은 흙으로 되서 흙으로 돌아가면 간단한데 왜 인간 속에 물질요소 말고 다른 요소가 어느 조립라인에서 그게 들어왔느냐 하는 겁니다.


참 진짜 보통 어려운게 아니지요. 아니 죽음이 언제 들어왔어요? 죽음이라는게 언제 들어왔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권사님이 알고 있는 듯한. 하나님이 뭐라고 했어요? 네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들어온 거에요. 말씀이.


흙 + 물질 + 뭐? 말씀의 조립체에요. 말씀의 조립체. 그러니까 우리가 흙이 흙 주제에 뭘 한다 안한다가 의미가 없어요.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날 뿐이에요. 에서가 착한다고 해서 에서가 구원받습니까? 야곱이 거짓말 한다고 해서 지옥갑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뭐로 말미암는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죠.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참 듣는 인간 기분 나쁘지만 인간은 그냥 말씀의 표피에 지나지 않는다. 말씀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안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얇은 막 그게 성도고 또 불신자들은 안에 저주, 지옥, 심판을 보여주는 얇은 막이 불신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도가 천국가고 불신자가 지옥가는 것은 이것은 지옥가는 사람이 자기 운명을 못 말리고 천국 가는 사람도 천국 가는 자기 노선을 자기가 브레이크 걸거나 어떻게 반하고 죄 짓는다고 해가지고 그 방향을 운명을 바꿀 수가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씀의 담지체라고 하는데 어려운 말로 말씀을 담는 그런 것 밖에 안돼요.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에 말씀을 주면서 말씀을 주실 때 창세기 2장에서 하라 했습니까? 하지 마라 했습니까? 주안점이 어디에요? 이미 주안점이 ‘하면 영생을 얻고..’ 영생이란 말을 안 하지요?


다만 모든 것을 먹되 무엇에 강조점이 있습니까? 하지 말라에 강조점이 있지요. 하지 말라에. 이미 인간 자체 속에 주님께서 뭘 집어넣는다? 부정적인 의미의 말씀을 이미 인간 속에 담아둔 거에요. 인간은 뭐가 아니다? 인간은 영생이 아니다에요. 인간은 영생이 아니다. 인간은 생명이 아니다.


그걸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써 인간이 있는 거에요. 예수님을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인간 공간에서는 무엇이 강조되었습니까?

자기의 건전함, 자기의 실력, 윤리적 도덕적 실력을 발휘해가지고 자기 자신을 뭐를 도모한다고 했지요? 자기의 건전함을 늘 염두해 도모하는거에요. 그래서 건전하면 복 받고 불건전하면 벌 받는다.


이것을 계속해서 시도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시도하는 자체가 창세기 2장과 3장에 보면 이 자체가 뭐다? 이게 바로 부정적인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모습을 지금 우리가 인간의 육신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런 것은 그런 식으로는 안 받아준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교회에서. 없는 것이 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부정적인 요소, 따먹지 마라.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 그러면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인간에게 실린 것은 뭐냐 하면은 죽음이 들어와서 실린거에요.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어요? 새 차 문 열고 타려고 가보니까 뭐가 나왔다? 어떤 남자의 시체가 나왔다고 했지요. 그에 히치콕 감독은 멋지기는 멋진데 이건 논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조립라인에서 시체를 넣을 타이밍을 찾지를 못한 거에요.


어느 타이밍에서? 핸들 타이밍에서 시체를 넣을까요? 카메라가 그대로 찍는다는데. 히치콕 계획은 카메라 그대로 찍어가는 거에요. 들어간 적이 없는데 나오는게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안되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7장에서 나옵니다. 7장 34절 봅시다. 7장 3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이제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주님께서 갔다가 빠져도 인간들이 모르는 이유는 인간들이 죽음이 찾아오고 죽음이라는 모습으로 빠져나가요 주님이. 왜? 주님이 죽는 것은 생생하게 살아서 나가는게 아니잖아요. 뭐로 나갔습니까? 죽어서 나갔잖아요. 죽어서.


아 참 강의할 때 이렇게 하면 여러분 기분 나쁠지 알지만 복음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건 잘 안하는데. 여러분들은 비위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감기들 때 처음에는 기침이 나와요. 나중에 목에서 뭐가 나오죠? 아이고 내가 말하기도 미안하다. 가래 나오지요?


인간이 백날 살아봐야 죽는게 아니고 죽음을 만들어내요. 인간이 살다 죽는게 아닙니다. 죽음 자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 땅에 생일축하합니다 하고 태어난 거에요. 죄를 만들기 위해서.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죄와 합류해서 죄가 빠져 나갔습니다. 죄와 더불어 죽음이 왔다가 빠져나간 거에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모든 인간은 죄 속에 죽어야 마땅한 겁니다. 실력발휘하고 수능치고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고 해봐야 그 자체가 죄 짓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이 살아서 걷는 것도 교만이에요. 숨 쉬는 것도 교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숨 쉬는 것도 죄인데 죄 아닌게 없지요. 여자들 거울 보면서 머리카락 이렇게 하지요? 이것도 죄입니다. 아이고 왜 따갑지 이거 죄에요. 죄 아닌게 없어요. 전부다 죄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봐야 돼요. 그래서 7장의 주제는 폭로입니다. ‘폭로’.


자, 그렇다면 아까 인간의 공간은 폭로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는 짓이 곧 악마가 하는 짓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간에서는 이게 인간 세계에서는 있어요? 없어요? 없는 공간이죠. 주님도 없다고 했잖아요. 주님도 없다고 했으니까 인간들은 이것만 있어요. 예수님의 공간은 없습니다.


자꾸 교회 와서 교인들이 예수님을 찾는데 그것은 자기가 상상해서 성경을 참고로 해서 상상해서 하는거고. 인간의 공간에다가 예수님의 공간 망상을 해가지고 자꾸 이걸 억지로 덧붙이는데 예수님의 공간은 그런 식으로 생겨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간은 인간의 공간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도 죄라니까요. 그렇잖아요? 있지도 않는 예수 안 계신 예수를 찾고 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그럼 예수의 공간이 언제 나타나는가? 언제 나타느냐 하면 바로 37절부터 나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그 다음에 뭡니까?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성령 이야기하시죠 성령. 성령 이야기하는데 그 때가 있어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했다 했어요.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럼 예수님이 영광받으신게 언제입니까?


완전히 인간의 공간과 주님의 공간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 완전히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쓰고 예수를 부르고 예수를 불러도 인간에게는 전혀 영생도 없고 천국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그때, 그때 성령이 와버리면 이거는 내가 기도해서 성령 받았다느니 뭐 노력해서 했다는 소리를 못하겠지요? 왜냐? 끊어졌기 때문에.


주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의 공간과 인간 공간이 완전 떨어져나갔어요. 떨어져나갔다는 말은 어떤 연결점이 없는 거에요. 연결점이 없는 상태에서만 성령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새삼스럽게 우리 쪽에서 추가적인 착함이 필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죽은 놈한테 뭘 받아요. 죽은 사람한테 뭘 받겠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죽기는 죽었는데 용돈 좀 내라 뭐 이런거 없지요? 죽었는데요. 좀 착해라. 회개해라. 이런 거 안 받지요.


그럼 인간이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의 일이 되어야 돼요. 성령의 일이 되고 성령이 일이 된다는 말은 그 성령의 일을 통해서 우리가 뭐냐 하면 죽은 자로 새롭게 확인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하는 일이 뭐냐? 이 세상이란 거대한 공룡, 거대한 악마의 세계에다가 폭탄이 되가지고 의도적으로 마귀한테 삼킴을 당하는거에요.


마귀하고 한판 붙자 이러지 말고 아예 마귀 배 속에 들어가요. 목 속에 들어가라고요. 꿀떡하고 마귀가 삼키면 이미 죽었다가 이미 죽었기에 악마가 율법지켜야 돼. 십계명 해야 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 모든걸 쏘아대도 이미 죽은 놈 뭐 죽은 인간을 찔러본들 “아야~” 하겠습니까? 해당사항이 없어요 이게 율법이. 죽었잖아요.


율법에 이미 죽은 자가 무슨 죄를 더 지으리요? 로마서 6장에. 로마서 7장에도 나오고. 로마서 6장 7장 다 나와요. 죽은 인간이 더 이상 죽었는데 어이~임마 어이~. 죽었는데 뭘 죽은 자에게 죽음이 모든걸 다 긁어갔는데 뭘 요구하고 있겠어요. 요구할 수가 없는 거에요. 이게 바로 성령이 하시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아까 성령의 높이와 깊이와 성령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그 깊이를 알게 하죠. 그러면 그 감사와 기쁨은 뭐냐 하면 그냥 지식으로 하려고 하면 지식으로 감사 기쁨이 안 나와요.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하면은 우리가 죽은 우리 육신을 성령이 건드립니다.


육신을 건드리면 구원받은 자가 뭐하냐 하면 옛날에 내 식대로 천국갈라고 애썼던 신경 쓰고 막 근심, 걱정하는 그거 있잖아요. 그걸 이렇게 촉발해요. 촉발 왜 해야되느냐? 초월을 뭐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초월을 일반화로 바꾸기 위해서는 할 수밖에 없어요.


뾰족한 것을 평평하게 일반화시키기 위해서 초월했는데 이 초월이 여기 뭘 집어넣느냐 하면 바로 인간의 공간에서 놀던 가락, 놀던 버릇을 집어넣어버리면 아 이 모든 것이 내가 또다시 죽은 자에 불과하다. 내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서 주님의 일반적인 그 세계에 들어왔음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들어갈 때 누굴 이용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의 공간 할 때에, 악마도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우리가 잘난 체하니까 악마의 밥이죠. 그러니까 악마가 뭡니까? 더 열심히 기도해야지. 회개 안하고 뭐해? 회개해야지. 이번에 애 성적 내려간거 너 회개 안해서 그렇다고. 약을 자꾸 올리는 거에요.


우리는 얼굴 새파랗게 되가지고 그래 내가 헌금을 안했구나. 기도를 안했구나. 전도를 안했구나. 내가 신앙생활을 게으르게 했구나 이래가지고 벌벌 떨고 하지요. 그럼 악마가 또 약을 올리지요. 그런데 악마 배후에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악마가 천사거든요. 쓸모 없는게 다 쓸모 있어요.


그럼 우리는 벌벌 떨면서 시험들지 말아야지 시험들지 말아야지. 그 자체가 시험든건데. 시험들지 말아야지. 감사 나온지가 옛날이다. 기뻐한 것도 기억도 안 나고. 벌벌 떨 때 성령께서 모든걸 알게 했을 때 내막을 다 알게 했을때 야~ 다시 한번 초월의 일반화에 아 내가 또 내가 바닥을 쳐야 되는데 또 높았구나. 바닥을 치면 되는데 높아진 거에요.


겸손을 빙자한 교만이 되는거에요. 바닥 치면 되는데 이미 죽은 자인데 이제 살았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지. 본 건 있어가지고 또 깝죽대다가 주께서는 벌벌 떨게 만들어서 바닥을 치게 만들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집중하고 초점을 맞췄는가." 어떤 일을 할 때 나의 건전함과 내가 이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으로 돌아왔잖아요. 나에게. 성경에는 주를 위한다는데 주를 위한게 아니고 나를 위해. 이것은 나의 잘남의 증인이지 주의 증인이 아니거든요.


실컷 성령 받았다 해놓고 전부다 자기 잘남 남한테 과시하는 용도로 활용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에 구원받았을 때 바닥을 쳤을 때 모습이에요. 다시 바닥의 모습으로 우리를 우리 진 모습을 보이기 위한. 나머지 모든 초월은 오직 그 풍성함과 그 높이와 넓이에 대해서 감사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거에요. 고마움과 감사와 기쁨의.


다시 제가 야곱이 거짓말해도 구원받는다 이야기해 드렸지요? 야곱이 분명히 거짓말 했고 에서는 거짓말 안했어요. 거짓말 안한 자가 어디 간다? 지옥. 거짓말 한 자가 어디 갑니까? 천국. 왜 그렇게 뒤집어놓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뻔히 뭘 생각하는가 알거든요.


우리는 무에서 유로 조립하면서 중간에 뭐가 들어왔어요. 물론 말씀에 의해서 들어갔어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면서 악마가 같이 들어가버린 거에요. 그리고 계속 죽으리라 했으면 계속 죽으면서 죽는 이유를 모르면서 죽으니까 답답해서 뭐라고 합니까? 살려고  애쓰는 거에요.


그 사는 방법은 악마가 몸부림치는 그 몸부림에 같이 동조가 되어 버린 거에요. 악마가 뭐하면 같이 뭐하고 악마가 뒤에서 격려하면 같이 격려하고 우리가 설치는 모든 것이 배후에서 악마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여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적을게요. 말씀의 공간에서 나의 공간을 잊어버린다. 내 공간. "나는 그럼 어떻게 되는데?" 아예 이것을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죠. 납작하게. 이걸 가지고 저는 주일날 설교를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대패 삼겹살’.


대패 삼겹살이라고 했는데 오목사님은 대패 삼겹살을 잘 모르는 모양이라. 그래서 대표 삼겹살이라고. 고쳐놨습니다. 대패 삼겹살. 삼겹살인데 대패로 막. 그냥 인간은 마귀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룩덜룩한 얼룩무늬에 지나지 않아요.


자기 폭이 있으면 그걸 키울려고 하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밀고 또 밀고 또 밀어서 그걸 바닥에 딱 붙어 있는 바닥에 있는 죄에 불과한 그 껍데기를 가지고 얇은 투명한 그 만두피 불과한걸 가지고 주께서 일방적인 사랑으로 완전히 만두속을 다 채우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IP:175.♡.96.96) 19-10-11 17:56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요한복음 8장부터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봅시다. 요한복음 7장에 말한 너희가 나를 찾지 못하는 곳에 간다는 공간, 다시 한번 볼까요? 예수님의 공간과 그 다음에 무슨 공간이라고 했어요? 인간 공간이 계속해서 그 증거들을 예수님의 공간과 인간 공간의 그 존재의 근거와 그 차이점을 계속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흔히 말하는 이 간음이라는 것이 간음죄가 예수님의 공간에 필요한 간음죄냐? 아니면 인간 공간에 필요한 간음죄냐를 주께서는 구분하기 위해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등장하게 되지요.


예수님의 공간에서의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 믿지 않는게 간음이에요. 예수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그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간음자이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것이 곧 간음이기 때문에 예수님 공간에 못 들어오면 모두 다 뭐가 됩니까? 간음자가 되는 겁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간음한 여인를 잡아온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렇게 쉽게 풀립니다.


바리새인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왔어요. 그 말은 뭐냐? 자기들은 간음했다? 안했다? 간음을 안했다. 간음을 안했다는 거에요. 지금 이렇게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나 같으면 그 바리새인들이 여자를 끌고 차라리 예수님한테 안 왔으면 참 좋았겠다라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으면 계속해서 뭐가 돼요? 자기는 간음 안 한 자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간음한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 되고. 자기는 간음죄에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 복습해 봅시다. 왜 인간은 간음 안하기를 원할까요? 바리새인들은 왜 간음 안했음을 원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가 조율 한번 해주세요. 자신의 건전함을 계속 조율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 실력대로 시험 쳐서 천당 가겠다는 거에요.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고 얼마나 완벽하게 살려고 애를 쓴 그 실력을 좀 알아달라는 겁니다.


이게 수평적이라고 했지요. 수평적. 수직적이 아니고 수평적이에요. 인간의 바운더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바운더리. 아까 첫째 시간 복습 해 볼까요? 그런데 그 인간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누가 들어갔지요? 죽음이 들어왔지요. 그럼 인간은 죽음을 실어나르는 운반체라면 인간이 하는 내가 건전하게 살겠다하는 그 자체가 뭐다?


죽음을 유발하게 되고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그 저주를 유발했던 요인을 확정 짓기 위해서 뭐가 들어오냐면 율법이 들어온거죠. 율법이 들어오니까 율법 안에 뭐가 들었죠? 7계명 뭡니까? 간음하지 말라 들어가있지요. 간음하지 말라 들어 있으니까 사람들은 간음 안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율법에서 걸어놓은 경품이죠 경품. 율법대로 살면 뭘 받는다? 복 받지요. 그 복을 따내고 싶은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중립이니까. 자기는 저주도 아니고 온전한 저주도 아니고 온전한 복도 아니지만 내 실력 발휘에 따라서 복도 될 수 있고 저주 될 수 있다라고 믿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다 누굴 위해서다?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본인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겁니다. 그 선배가 누구에요? 그 선배가 한국교회고 한국교회 선배가 바리새인들이죠. 바리새인들이고 모든 인간들이 다 그거입니다.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전부 다 악마와 한통속이다. 악마의 품 안에 있는 자식들이다.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보면 돼요. 인간 자체가. 그들이 그 자체가 죄고 그런 거에요. 인간 공간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로마서 3장에 의하면 율법을 행한 것은 그들의 입을 막고 저주받게 하게 함이죠. 아까 동영상 첫번째 강의 뭐였어요?


욕심내기 위해서 다윗은 욕심 안내다가 욕심을 낸 게 아니고 처음부터 다윗은 욕심이 있었는데 그게 밧세바를 보는 순간 비로소 욕심이 발현된 거에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그 제목이 ‘욕심내기’에요. 욕심낼 때가 구원의 순간이죠. 욕심 안 내는게 아니고 욕심이 꾸준히 욕심이 있는데 그게 계기가 되게 되면 욕심이 욕심으로 툭 튀어나오는 거에요. 나중에 녹취 보세요.


인간 자체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하지말라에 하지말라가 인간 속에 가득 들어있습니다. 내가 하지말랬잖아 이 인간들아. 인간이란 뭐냐? “주께서 하지말랬잖아 이 존재들아” 가 뭉쳐져서 뭐가 된다? 인간이란 개념을 구성하는 겁니다. “뭘 해도 죽는다고 했잖아 너”. 이게 인간이에요. 어이구 인간아 할 때는 이런 뜻이란 말이죠. 실제로 성경에서 인간이라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인자라고 이야기해요. “인자야 네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되어 있지요. 네가 아무것도 아닌 인자. 헛되고 그림자 같은 인간들. 그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님께서 인자로 오셨잖아요. 세상에.


우리들끼리만 인간이어야 하는데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와버렸어요. 끼어들어 버렸어요. 그것은 뭐냐? 네가 누구라는 것은 네 선에서는 모르고 내 선에는 안다는 거에요. 외부에서 끼어들면서 비로소 아시는 거에요. 잠시 다녀갔잖아요. 다녀가고 단절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성령오지 아니하면 누구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왜 죽는지도 몰라요.


그러면 성령이 딱 오게 되면 아까 그 성령이 오게 되면 영광을 받아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능력으로서는 구원될 수 없었다를 이미 구원받은 기쁨 속에서 감사 속에서 그걸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 나는 내 힘으로 안돼. 그런데 그게 너무 좋아. 나 그게 너무 가벼워. 그것이 그대로 요한복음 8장까지 이어집니다. 간음을 통해서 등장하는 결과는 뭐냐 하면 이미 그 여자는 자유인이다. 자유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자유를 얻어라가 아니라 진리가 그렇게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진리가 진리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는 자유 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한테 필요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에게 필요한 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자유인이죠. 주님이 자유인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뭐 해야 돼요? 주님이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간음자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간음자 안되려고 애를 쓰잖아요. 잘나지도 못하면서. 간음 안한 것을 자랑이라고 여기고 있어.


만약 여러분들이 간음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간음했다고 치면 여러분들이 내가 간음했다 거기서 파생되는 그 결과에 대해서 여러분이 다 알고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한 가정이 파탄나지요. 한 가정이. 나는 내 즐거움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울게 되지요. 자기는 자기 좋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은 마음의 고통이 씻을 수없는 고통, 평생 씻을 수없는 상처를 주지요.


어떤 남자가 나는 너하고 헤어지고 나는 새로운 여자한테 가겠다 하면 여자가 남자보고 하는 말이 너는 네 생각밖에 안하나? 너는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 이런 말하겠지요? 그 말 듣고 가슴이 편하지 않겠지요? 괴롭겠지요? 이런 모습 있잖아요. 이런 도덕적, 윤리적 모습 모든 것을 다 고려하잔 말이죠. 고려하는데 그게 간음죄에요. 이게 간음죄라고요. 이게 상상이 됩니까? 표정들 보니까 강의 진도 못나가요. 7장 다시 해야 돼요.


자,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예수님의 공간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감사와 기쁨이 없어요. 왜 감사와 기쁨이 왜 없느냐? 이 초월받았다는 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이게 일반화되지를 않았어요. 일반화 되지 않을 때 주께서 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여자를 보고 음란을 품는 것은 무슨 죄다? 간음죄다. 이걸 율법에 집어넣어버렸어요.


집어넣으면 우리는 자신의 선량함과 건전함과 내가 훌륭한 남편으로서 가정을 이만큼 지켜왔다는 그의 노력과 그 하나의 여자로서 남자로서의 정절을 지켰다는 그런 노력들이 총 동원해서 내가 조율 한번 하는 거에요. 나의 건전함을 조종하는 거에요. 내가 이만큼 평생동안 간음하지 않고 살인, 남을 미워하지 않은 덕으로 그 보상으로 내가 가정을 이만큼 건사하고 산다라는 것과 결부를 시키고싶은 거에요.


그럼 그것은 결국 그것은 뭐를 유발하느냐. 초조함을 유발하죠. 왜? 쌓아놓은 모래성은 밑에만 탁 건드리면 다 무너지니까. 다 무너지까. 그런데 아주 건전한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유혹의 손을 내밀 때 남자가 뭐라고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겠지요. 내가 이 가정 꾸리기 위해서 수십년동안 했는데 네가 한방에 다 하느냐? 이 십자가 마을, 우리교회 이만큼 건사하기 위해서 얼마나 내가 노력하고 내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건전함을 유지했기 때문에 아 목사님 존경해요. 존경한다는 말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고 그래 더욱더 거룩해야 되고 그것도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지. 이러고 있을거라 이 말이죠.


그게 기쁨이에요? 그게 감사입니까? 아니면 마귀의 노예에요? 악마의 노예죠. 악마의 노예 다른 말로 그게 바로 간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거에요. 간음죄를 안 졌는데 계속해서 안 저질렀기 때문에 뭡니까? 계속 간음이 얼쩡거리고 있는 거에요. 계속해서 얼쩡거리고 있는 거에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면 "간음 저리가!! 간음 마귀 저리가 저리가!!"


제가 옛날에 박사교회 12년 동안 있으면서 여자 성도한테 악수 한번 안했어요. 왜냐하면 적어도 이정도로 지켜줘야 주께서 나를 쓰실 거 같아서. 그 행위 자체가 간음인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워낙 많이 선배 목사들이 여자 밝혀 망하는게 한방에 간게 하도 많으니까. 물론 작은 교회가 다 넘어가지 큰 교회는 끄덕도 없지만. 그것도 권력과 관계되가지고.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 그게 다 누굴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까? 누구의 건전함? 누구의 의? 나 자신이 내 실력발휘해서 천당가겠다는 그야말로 이미 내 안에 죽음을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을 내 실력으로 걷어내도 그걸 생명으로 바꾸자하는 그 노력자체가 선악적인 그 노력자체가 말씀으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절대화시키는 악마의 앞잡이 노릇한 것도 모르고 이래야 내가 훌륭한 목사다라고 누구 앞에 자기를 자부한다는 것은 결국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하겠다는 수법에 지나지 않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이미 선배들이 이 짓을 했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상대적으로 우수하고 상대적으로 착하다를 하기 위해서 누가 있어야 돼요? 간음한 여인이 필요했던 거에요. 그런 사례가. 왜? 그래야 확일하게 자기가, 우리는 바로 죄를 죄라고 지적할 정도로 우리는 얼마나 의로우냐 이 말이죠. 우리는 얼마나 오직 정의, 오직 정의밖에 모르는 거에요. 정의가 죽은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뭐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겠습니다.


누구 죄를 지적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지적을 했다는 자체가 나는 그 지적당할 죄에서 벗어나 있는 정의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를 어디 보냅니까? 천국 보내잖아요. 너희보다 먼저 천국가리라. 주님은 인간 공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 공간에는 어떤 식으로도 천국에 갈수 있다? 없다? 인간 공간 자체가 갇혀있는 거에요.


갇혀있다는 자체를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자유라는 표현을 쓰면서 표현하는 겁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씀으로서 바로 갇혀있는 모습이 바리새인이 하는 짓거리가 반복해서 매일같이 나오게 됐다는 거에요. 정말 간음한 여인을 체포하지 않더라도 지나가는 구경꾼이라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아휴 나는 간음 안해서 천만다행이다." 쓸어내린 자는 누구하고 한패에요? 바리새인과 한패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한패가 된다는 말은 이거는 갇혀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됐습니다. 너희는 어디서 났다? 아래에서 났지요. 아래라는 말을 예수님이 쓴다는 말은 아랫동네라는 말은 이거는 갇혀있다. 아랫동네라는 자체가 지옥이라는 뜻이에요. 그다음에 요한복음 8장 다른 분이 한번 요한복음 8장 44절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아멘.”


악마가 노리는게 뭐냐 하면 인간을 노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자기 수하이기 때문에 노릴 필요 없어요. 악마가 노리는 것은 인간을 내가 다루는데 예수 네가 뭔데? 내 자식을 빼내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에요. 인간은 못 빠져나오는데 못 빠져나오는 인간을 그냥 못 빠져 나오게 놔두지 왜 빼내느냐 하는 겁니다. 왜 그걸 빼내느냐에요.


주님께서 인간을 빼내는 방법은 나를 믿으라해서 빠지는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간음자가 될 때 빠지는 거에요. 우리가 그렇게 기피하는 간음자. 주님이 간음자가 되는 겁니다. 율법에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주님은 착한 분해서 율법에 선한 것만 했다고 생각하지요. 율법에 저주받는 것도 같이 했다는 생각은 못합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율법의 저주에요? 율법을 다 지켜서 그런 거에요? 율법을 율법에 저주마저도 율법의 지킴 속에 그게 항목으로 들어가 있잖아요. 율법에 위반해서 주어지는게 뭡니까? 저주지요. 주님이 다 지켰다면 저주받을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주님은 율법의 위반자로 들어온 거에요. 율법의 위반자. 거꾸로 들어가지요. 처음부터 뭐 예수님께서 간음하고 선지자 된게 아니고 저주부터 받아놓고 거꾸로 들어가는 거에요.


율법에 위반자 저주부터 들어가게 되면 여기 누가 기다립니가? 자기 백성이 지금 악마한테 사로잡힌게 보이겠지요? 이미 저주를 다 받았다니까. 예수님 쪽에서 다 받았어요. 민수기에 두번째 강의 들어보세요. 이미 예수님은 어린양은 이미 저주를 다 받았단 말이죠. 내가 대신 받은 저주에 해당되는 사람을 찾으러 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들은 뭐냐 하면 지금 이들은 저주아래 있잖아요. 율법아래 있단 말이죠.


그중에 한사람이 누구였다? 오늘 요한복음 8장에 누굽니까? 간음한 여인이거든요. 간음한 여인의 간음했다는 이 저주성을 예수님께서 이 저주를 품고 간음에 해당되는 저주를 품고 간음한 여인과 한패가 되어버린 거에요. 한패. 한패가 되지요. 한패가 되고 난 뒤 예수님 빠져나가 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그 간음한 여인이 뭐가 되버렸습니까? 자유인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자유인.


이게 이제 여기서 설명하려고 하면 긴데요. 길더라도 해야되겠어요. 자유라하는 것은 보통 그 전에 속박, 억압 이걸 전제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그 자유라는 언급을 하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요 8장 34절을 보게 되면 “예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되어 있지요?


아까 오늘 녹화한 첫번째 강의에 다윗이 욕심을 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욕심 안에 살고 있다가 거기에 노출된거죠. 욕심이 어떤 계기가 되어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노출된거죠. 그렇다면 이 말은 34절은 뭐냐 하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처음부터 죄 안에 있는게 티가 난거에요. 티가 났는데 이 여인은요 이 여인이 간음한 것은 이 여인이 간음할 수 있는 속성을 이미 지니고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간음에다가 누굴 집어넣느냐 하면은요 이 바리새인들을 다 갖다 집어넣은거에요. 간음 안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 다 집어넣은거에요.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글로 쓰시면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했거든요. 자, 돌로칠 때는 뭐냐 하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돌을 치게 되어 있어요. 이 바리새인의 율법관에 의하면 간음한자는 돌로 치게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럼 그 돌 맞는 현장에 누가 있습니가? 여자만 남아있지요. 여자만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여자 옆에다가 돌로 치는 당사자들을 다 집어넣고자 하는 거에요. 글 쓰면서. 그 글을 쓸 때 바리새인들이 글을 쓰니까​ 예수님께서 글을 쓰니까 그게 무슨 글인지 볼게 아니겠습니까? 그거 볼거니까 자기가 숨겨놓은 모든 과거의 죄가 거기 다 있더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말도 안했는데 네가 남편 5명 있는거 알지요.


또 요한복음 5장인가 나오지요? 왕의 신하가 아프다는 것을 미리 아시잖아요. 4장 끝에. 주께서는 인간에게 증거를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가 인간의 속을 다 아심이라 되어 있다고요. 다 알고왔다고 다 알고. 형사가 검사가 심문할 때는 다 아는 거에요. 그걸 자백하기를 고백하기를 원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찾아올 때 이미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 알고 들어왔기 때문에 “주여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이 말만 하면 돼요. 그 말도 하게 되면 하지마세요. 유구무언이다 하면 돼요 욥처럼.


믿습니다 말도 하지마. 뭘 믿어. 그냥 들켰다 하면 되지 뭘 믿어요. 믿는다고 해서 이쁘다는 소리 안와요. 주님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는 우리 들통날건 다 들통난거에요. 그 저주는 우리가 받을 저주잖아요. 이게 이미 단절된 상태에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실정을 한꺼번에 다 알려주는거에요. 이게 아까 초월이라고 했지요. 그 기쁨이 오래가면 좋겠는데 기껏 3초, 4초 간다고요.


다시 "야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이제부터 남은건 나는 복 받아야지." 이렇게 나가다가 또 바닥을 쳐야 될 우리가 다시 또 높아져 슬금슬금 또 높아지는 거에요. 네가 믿음 좋으냐 내가 믿음 좋으냐 이래 가지고 또 시합하는 거에요. 또 바닥을 치게 만들죠. 이 여자가 간음한 것에 다 집어넣어버려요. 다 집어넣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마저 이 여자의 간음 속에 들어가버립니다. 그러고 이야기합니다. “여자야 다 어디 갔느냐” 이야기하지요. 다 어디 갔느냐.


바리새인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율법을 사용했다는 말은 자기는 건전하다 자기는 건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못한 여인을 발견하고 아주 좋아라 하면서 거기에 돌을 던지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바리새인들이 그냥 돌을 던졌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건전함이 유지가 되는데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시비걸라고 일부러 질질 끌고왔더니 모세의 율법에 돌로 치라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칠까요? 말까요? 돌로 칠까요? 안 그러면 당신이 율법 어기고 풀어줄까요? 라고 이렇게 온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잘났다는 인간들을 글로 쓰면서 그들의 과거를 다 노출하면서 여자 돌 치거든 그 다음에 돌 맞은 그 여자 자리가 네가 한번 앉아라. 내가 쳐줄게.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죠. 그럼 죄 없는 자가 여기서 예수님이겠느냐? 아니죠. 예수님도 버림받았으니까 예수님은 충분하게 아주 충실하게 죄 있는 세계 속에 흠뻑 빠졌어요. 목만 내 놓고 발만 죄가 아니라 전부 다를 여기에 집어넣은 거에요. 전부 다를.


그 간음죄 속에 바리새인부터 예수님부터 여자까지 다 들어온거에요. 왜? 이래야 뭐가 생기느냐 하면 여기서 탈출이 되어야 여기서 여자와 함께 탈출이 되어야 이것이 바로 무슨 공간이냐? 예수님의 공간이에요. 이게 천국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없어요. 예수님의 나라는 없어요. 예수님 이 땅에 죄와 더불어 있어야 탈출이 되어야 비로소 생기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공간은 죄를 적시지 않으면 발생되지 않아요. 죄 없이 따로 있는 것이 예수님의 공간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는 예수님의 공간에 꼭 필요한 존재에요. 따라서 이 땅에서 우리는 간음죄를 지어야 되는 거에요. 왜? 무슨 무슨 공간 때문에? 말씀이 말씀되라는 공간을 위해서 주께서 타이밍 맞춰서 우리를 이 땅에서 몇년몇월부터 몇년까지 살도록 되어있는 겁니다.


그 살면서 한시라도 간음죄 아닌게 없고 살인죄 아닌게 없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니까. 10계명 죄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탐냈고 전부다 내 중심이 된 이상은 한순간도 10계명 하나라도 지켜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왜 그렇게 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의 공간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시는 거에요. 타이밍 맞춰서 사건 맞춰서.


그래놓으니까 우리라는 존재가 굉장히 중요한 존재지요?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거죠. 배역을. 되게 중요한 배역을, 간음한 배역, 탐내는 배역 좀 충실하세요. 빼지 말고. 내 공간 아닙니다. 내 위주 공간 나 잘났다 공간 아닙니다. 주님 잘났다 공간을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있는 거에요.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렇습니다. 이 여인이 간음했는데 좀 몰래 하면 좀 어때. 주께서 일부러 들키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아까 실컷 강의해도 소용 없는게 백날 해도 다시 돌아서면 다시 인간 공간으로 돌아와요. "아휴 들키면 안되는데. 내 인생 쌓아놓은거 다 무너지는데."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의 처지나 우리의 형편을 지금 고려하지를 않습니다. 성도는 말씀 공간만 드러나면 자기역할은 끝나는 거에요. 내 자존심, 내 체면, 위신 개나 줘버려라. 그딴거 필요 없어요.


얼마나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를 하고 내가 이렇게 하면 얼마나 주위 사람들이 좌절을 하고 실망을 하고 주님을 버릴 것이고 사람보고 버릴 거 같으면 애초부터 지옥으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내가 가정에서 잘해야 우리 자식들이 나를 본받아서 자식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데." 그런 되지도 않는 소설 쓰지 마세요. 구원 받고 안 받고는 우리 소관 아닙니다. 어디서 주님 핑계대면서 자기 건전함 유지할려고 합니까.


그래놓고 주님 우리가 이렇게 했습니다. 저렇게 했습니다. 그거 자기 성과로서 내밀려고. 이렇게 충성했습니다 그런거 내밀 생각했습니까? 내가 이만큼 착했으니까 내가 이정도로 가정 챙기고 살지. 자식 챙기고 살지 뭐 이렇게 자기 자화자찬하려고 하는 겁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지금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안 믿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러분 보고 이야기하는거 아닙니다.


제가 그 여행을 가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참석하신 분이 저를 기억하기를 마지막 공항 끝나면서 "목사님 이야기 중에 딱 하나는 기억납니다." "뭡니까?" "막 살아라." 그래서 "그렇습니다. 막 사세요. 막 사셔야 됩니다." 막 산다는 것은 뭘 버린거에요? 자기 체면, 자기 위신, 자기 자존심, 자기 자존감, 갖다 버려. 개나 줘버렸단 말입니다. 내가 개가 된다 할지라도 주위 사람들이 나를 간음한 여인이라 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공간에서 나온 해석이거든요. 주님의 공간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간음한 여인은 얼마나 중요한 연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연기 치고는 좀 괜찮은 연기로 보입니다만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감히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드러내잖아요. 하나님의 타이밍 맞춰서. 9장에 보면 또 나옵니다. 이건 간음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뭐냐? 날 때부터 소경된 거에요. 얼마나 재수 없겠어요.


남들 눈들은 멀쩡한데 왜 하필이면 영어로 why me. 왜 주여 why me. 주여. Lord 주여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고난 시련을 주십니까. 그 많은 사람 놔두고 왜 하필이면. 주께서 이야기해요. "그 역할 너 하라고 너 태어난건데."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 맞추기 위해서 네가 태어난 것이지 네가 있고 너 천당가라고 말씀 있는게 아니잖아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나 아니라도 각자 가정마다 사연들이 있어요. 사연들이. 혼자만 아는 그런 사연들이 있다고요.


그야말로 자기가 성도인 사람은 이런 소리를 안하게 되지요? 나 상처받았다. 이게 얼마나 건방지고 교만한 주장입니까. 네가 뭔데 상처를 안 받아요? 네가 뭔데? 예? 네가 뭔데 왜 너는 안 건드려야 되는데? 죄인 주제에. 죄인 주제에 얼마나 건방진 것도 아니고 시건방진거에요. 나는 상처받았다고. 주님 상처받은거 생각해봐요. 네 상처가 크나? 주님 상처가 크나. 인간 같지도 않은게 상처받았다고 찡찡대지 말고 주님이 주님 상처를 증거하기 위해서 너한테 상처온거에요. 네 상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간음죄가 들킨게 그게 뭐 그렇게 허물이라고 그거 허물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기능과 역할을 맡겨 줬다는 이것이 간음 속에서 간음 속에 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큰 기쁨이고 큰 감사함입니다. 지금 논리가 맞잖아요. 이게 맞는 논리에요. 헛된 논리 아닙니다. 바닥을 쳐야 내가 바닥에 주저앉을 바닥에 내리꽂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을 그것밖에 안되는 것을 알아야 그 뒷배경에 금강산 그림, 주님의 영광, 김일성 주석에 있는 그 큰 그림 다 보이죠.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알짱거리면서 그 그림 가리면서 얼쩡거리고 있다고요. 지 그림 보기도 좋지 않은 그림 가지고. 뭐 기도했니 뭐 헌금했니. 주저앉혀버려. 너는 간음한 자야. 너는 살인자야. 너는 탐욕자야. 주저앉아버릴 때 이런 인간을 그냥 구원해주신 그 주님의 그 십자가 그림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난 주일 낮 설교할 때 나도 헌금하고 마지막 설교가 이랬어요. 교회 때려치고 여기다 십자가 꽂아버리자.


주님의 조건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가야 돼요. 우리의 모든 태어남과 행위와 모든 노력은 십자가로 모이게 되어있어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고난이에요 우리가.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역할을 맡은 거에요. 2018년 역할 따로 있고 2019년 역할 따로 있고 2020년 그때까지 살지 모르겠습니다. 2020년 역할 따로 있어요. 전부다 각자 역할이 있고 그걸 저는 기성품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했습니까? 수제품이라고 했지요.


기성품은 흉내내면 되지만 수제품은 직접 다뤄요. 그 사람의 형편 따라 사정 따라 사연 따라 가정 따라. 출신이 서울 출신이냐 대구 출신이냐 따라 전부다. (너무 시끄럽다고 하는가 보다. 미안합니다. 가만있다가 복음 다 듣네. 상처 받은 모양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체포해온 것은 그들이 장차 예수님을 체포하는 의식과 동일선상에 있어요. 간음한 여인이 발생됨으로서 자신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 율법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왔던가가 들통나는 겁니다. 율법은 나의 잘남과 나의 건전함과 내 우수함을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율법이 동원된거에요. 그런데 그게 뭐냐? 죄에 갇힌 모습. 이게 죄에 갇힌 모습이라고 했지요 이게 죄에 갇힌 모습.


(이명직 목사님 지금 벽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벽이? 김치 냉장고 소리입니다. 아! 그게 김치 냉장고 소리에요? 그럼 좀 떠들어도 괜찮겠네요? 아이~ 이것도 하나의 역할이다. 괜히 쫄았잖아. 이런거까지 녹취하면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홍민희씨 이런거 녹취하면 재미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유발시킨 것은 간음한 여인이 일반 사람에게 돌에 맞아죽을 정도로 간음한 여인은 사람들에게 죄에서 못 빠져나오는 그런 역할을 보여주는 거에요. 너는 이 사회에서 매장 당해서 매장 당했다는 그 점이 뭐냐 하면 바로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결국은 죄에서 못 벗어남을 보여주는 표준 모습이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제품. 시제품. 먼저 시범적으로 모델로 내놓는 상품이죠.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요한복음 8장에서 말고 여러분 주변에서 간음한 여인을 봤을 때 간음한 남자도 아니에요. 간음한 여인이에요. 여자는 약하니까 있을 때 그를 보고 돌로 치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네가 바로 뭐다? 네가 바로 간음한 자다. 네가 인간의 공간, 율법을 가지고 내가 판단한 판단할 자격도 안되는게 판단하고 돌에 맞아 죽을 죄인이 죄 없는 자가 아니고 죄 있는 자가 과연 죄를 논할 자격이나 되냐 이 말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죄를 이야기할 자격이 되요? 안되지요. 예수님께서 일련의 연출을 하신거에요. 일부러. 간음하게 만들고 그것도 때마침 들키게 만들고. 우사스럽게 만들고 그걸 때맞춰 그걸 바리새인들에게 소문나게 만들어서 그게 하나의 드라마가 멋진 드라마가 되게 하는 거에요. 그 무대를 만드는 거에요. 무대를 세팅하게 딱 만들어놨지요.


세팅하게 만들어 놓고 거기서 뭐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는 이 주제를 탁 올립니다. 그럼 모든 인간들은 간음한 여인이 촉발한 이 죄 문제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못 빠져나오고 있다는 거에요. 빠져 나갈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거에요. 왜? 죄 없는 자가 간음한 죄 바깥에 나가서 돌로 쳐야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율법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한 말은 그것은 앞에 구약에 안 나타나있는데 앞에 예수님이 와서 제대로 앞에 미진한 부분을 마저 채웠지요? 뭡니까? 죄는 없는 자만이 돌로 칠 수가 있다는 조건이 신약에 와서 덧붙여졌지요. 덧붙인데다가 더 확연하게 모든게 완료가 완성된 채 다 드러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묻습니다. 간음한 자가 간음한 본인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간음한 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질책을 못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자체가 나를 위함, 나의 건전함을 위한 공간이 아님을 아니라 말씀의 공간임을 인식해야지요. 말씀의 공간임을. 야곱이 얍복강에서 누구를 만났지요? 하나님 만났지요. 너 죽고 나 죽고 싸웠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야곱이 자기를 질책해야 됩니까? 아니면 이 사건 자체를 주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봐야 돼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는 동시에 내가 나의 책임 나의 질책할 권한이 나한테는 애초부터 없었던 거에요.


그게 무슨 공간이냐 하면 이게 바로 자유의 공간인거에요. 내가 나를 정죄하지 않는 공간.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애초부터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 공간. 그게 나중에 요한복음 7장 전에도 말했지만 이게 단절되고 난 뒤에 주어진 성령이 올 때 우리가 이런 입장에 있다는 것이 그때 완전히 성령이 오게 되면 다 아는 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올 때는 반드시 십자가로 오는 거에요. 그 십자가 안에 누가 들어 있어요? 내 죄를 이미 다 처리했음을.


죄가 처리했으니까 내가 나를 처리하면 안되겠지요? 그럼 나는 왜 이 땅에서 육신으로 죄를 질 수밖에 없는가? 그게 역할이고 기능이기 때문에. 뭘 드러내기 위한? 말씀이 스스로 말씀에게 돌아간다는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고 나에게 그런 일을 유발시킨거에요. 소경이 날 때부터 뭐 됐다? 9장에서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거에요.


제자들이 모르고 저 사람은 조상 죄 때문에 소경됐습니까? 자기 죄 때문에 소경됐습니까? 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제자들은 뭐 됩니까? 본인이 소경이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 성령 오기 전까지는 다 소경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내빼지요. 보아도 몰라요. 성경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은 폭로입니다. 인간이 여기에 갇혀있음을 드러내는 폭로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여러분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여러분 잘 아시죠? 28장 마지막에 유명한 말씀. 사도행전 실컷 전도해놓고 초를 쳐버려요 초를. 사도 바울 본인이 초를 쳐버려요. 이 백성이 말하기를 듣기는 너희가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교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지옥임을 지옥이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지옥임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성도를 이 땅에서 만들어낸 거에요.


성도는 착하다가 아니라 완벽하다 아니라 철저하다가 아니라 성도만이 자기 자신이 이건 주님의 주님됨이 드러내기 위한 기능임을 아는 거에요.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다. 왜 앉은뱅이 되었습니까? 남보다 죄 더 지었습니까? 아니에요. 앉은뱅이 된 타이밍에 그다음 대목에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해서 낫게 하는 그 사건을 사건의 역할을 맡기 위해서 앉은뱅이가 되야 되는 거에요.


"사모님 왜 그리 멋있게 생긴거에요?" 정답은 다 주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또 목사님 또 좋아한다. 이쁜데 뭘 이쁜걸 뭐 일부러 흉하게 하지 마세요. 이쁜건 이쁜 티는 내세요. 나의 영광 아니란 말이죠. 이쁜 역할을 맡았는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쁜 역할을 맡았는데. 못생겨도 배역 잘 맡으면 돈 벌어요. 기생충 보세요. 자기 역할에 충실하세요. 자기 역할에. 우리 집안 거덜났다. 거덜나고 그게 하나의 시나리오에 들어있는 거에요. 주님의 시나리오의 역할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시나리오에. 다시 태어나면 그런 결정 안한다고요? 백번 태어나보세요. 똑같은 길 갈 수밖에 없지요.


사도행전에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네가 깨달으면 네 공로 아니고 네가 만든 기적 아니다. 이거는 난데없이 주어진 언약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물이에요. 이건 뭐 돈 주고 산 게 아니에요. 어디 가서 이 보물 자랑합니까. 그야말로 이 세상 이런 보물보다 더 큰 보물은 없어요. 가장 귀한 것은 그리스도, 그래서 자랑할게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제 실감 나십니까? (조용할게요.)


그 십자가 앞에서 나의 공간을 잠시나마 잊어버린거에요. 내가 어떤 여자며 어떤 남자며 그런 것은 그런 것 생각하는 자체가 악마의 시험입니다. 주님은 답답한거에요. 내가 맡긴 역할인데 네가 뭐 맘에 드니 안 드니. 이건 뭐 패도 안 되고 패버릴까 이거. 왜 또 들키게 했어요. 들키고 말고 들키는 것도 자기 맘대로 되는게 아니에요. 그 장, 그 간음한 여인과 바리새인의 만남 예수님의 끼어듦 이 모든 장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거에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주되게 하게 위해서 하는 거에요. 내가 왜 왔느냐 하는 거에요. 너희가 마귀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왔다는 거에요. 자유가 없으니까. 평소에 하는 것도 죄지만 계속해서 툭툭 터지면서 그 죄가 나오는 그래서 네가 죄에 갇혀있고 네 힘으로는 못 빠져나온다는 것. 죄 없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죄 없는 자가.


그럼 자유는 뭐냐? 자유란 본래의 자리에 안정되게 앉히는 겁니다 자유란. 본래 어떤 자리에 들어가는 거에요. 내가 자유를 소유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말씀 자유를 소유하지 마세요. 어떤 자리를 마련하는 거에요.


거기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네가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어떤 위상을 부여받는 거에요. 빛이라는 자리 소금이라는 자리. 썩어진 곳에 소금으로 버티고 있고 어떤 등경에 두지 않고 위에 선반에 그냥 빛으로 빛나고 있는 거에요. 빛나고 있을 때 내 영광이 아닙니다. 이거는 뭐냐? 말씀의 영광, 말씀의 공간, 주님의 공간을 빛내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하나의 기능이니까 나보고 뭐라 하지 마라. 네가 잘했다 못했다 나보고 그렇게 하지 마란 말이에요. 그걸 이제 안동인가? 씨부려싸지말라는거 있어요. 욕 아닌데 이상하게 듣기에 욕처럼 들리는게 있어요. 씨부려싸지 말라. 나보고 뭐라고 하지 말라는 거죠.


나는 뭘 해도 죄인이니까. 못했니 잘했니 칭찬도 할 필요도 없어. 내가 보여줄 것은 내가 못났는데 이런 기능으로 기능을 통해서 못난 나를 통해서 잘난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여기에 하나의 불꽃을 보여주는 심지로써 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떨기나무처럼 타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 너무 이 직분이 황홀해서 세상에 어떤 상금하고도 안 바꾼다 했거든요 사도 바울은. 내가 맡은 직분 자체가 상이라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까 간음한 여인처럼 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주님 좀 하게 하옵소서. 주위 사람들에게 들키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나는 아빠한테 실망했어. 난 엄마한테 실망했어. 돌을 막 던지게 하옵소서. 왜?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다시 요한복음 8장을 재현하는 거에요. 그걸 재현배역이라고 재현배우.


구원은 받아놨는데 요한복음 8장 역할을 맡았다 하면 이건 자기 역할에 충실하세요. 연기 잘해야 돼. 연기 잘해야 돼. 욕하면 얻어먹고. 요한복음 8장 8장 봅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해놓고 글을 두 번 썼어요. 두고 보자 하는 거에요. 전부다 어디 나올래면 나와 봐. 돌 들고 나오겠지요 누가. 나온 족족 보자. 너는 이런 인간이구나. 자 돌로 쳐쳐. 쳐쳐 하니까.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주님의 증인하면 핑계거든요. 자기가 저 여자를 우사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자기 죄가 남의 죄가 드러나는 것보다 자기 죄가 드러나는게 더 우사스럽잖아요. 차라리 퉁 치자. 도망가기 바빠요. 베드로가 도망간 이유가 거기에 있고. 우리 퉁 치는 걸로 하자. 내가 안 때릴께 퉁 치자. 그래서 도망치고만 겁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일부러 물어요. 아무도 없던 것을 알면서도 물어요.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다시금 이야기합니다. 이 여자는 자기변명이라든지 내가 어쩔 수 없이 바람피웠다는 소리 하면 안돼요. 그런 것은 안돼요. 그런 것은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거에요.


그런데 그런 소리할 수 있는 여자에요. 인간이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이미 다 우사스럽게 만들어놓고 입에서 나는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주님의 말씀을 위해서 연기했습니다. 그런 소리조차 안 나오게 만들어요. 그냥 고소당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고소한 사람이 없네요. 이건 뭐에요? 자기 의란 말이에요? 잘났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죠.


죽어 마땅하다는 말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아무도 안 들키고 아무도 고소함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돌에 백번 맞아도 쌉니다라는 것. "주님 연기해서 그렇잖아요." 뭐 그런 소리, 그건 주님이 할 소리지 네가 할 소리는 아니죠. 추가적인 주의 말씀을 반사시켜야 돼요.


“나도 널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아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라라는 말은 뭐냐? 착하게 살아란 말이 아니고 아직까지 이 사건으로서 오늘 할 일 다 했다는 말이 아니고 십자가 죽어야 될 일까지 남아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 용서받았다 그 죄가 그 죄의 전부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죠. 네가 만약에 십자가를 안다면 간음하지 않았을 때 바람피우지 않았을 때 착실하게 애들한테 젖먹이고 힘들게 일하는 그것 조차도 뭐가 된다? 바로 죄가 된다는 그 조차도 죄가 된다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네가 어떻게 할 게 아니라 예수님이 앞으로 네가 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증거하고 증명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죄였습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 공간에서 유일하게 죄가 아닌 의가 되는 거에요 이게. 의의 증인이기 때문에.


내가 죄 졌다 안 졌다가 아니라 주께서 의가 나오도록 주께서 나를 활용했다는 그겁니다. 나는 죄 안 지었습니다 하면 그건 자기 잘남이 되기 때문에 예수의 증인 아니잖아요. 끝까지 끝까지 주님의 의만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나오는 그 모습, 그것이 뭐냐? 죄 아닌 모습, 유일하게 최종적인 죄 안 짓는 모습이에요.


나를 잊어버리고 주께서 나를 활용하고 계시다는 예수의 증인되는 것, 그 역할을 최종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 여인에게 이런 사태를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그러면 우리가 밥을 먹는다.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이것도 역시 간음죄에 해당되죠. 왜?


예수님 증거하는 거니까. 우리는 그것을 잘났다 하니까. 에이 칠칠치 않게 여기서 냉면 먹다니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게 바로 죄 없는 자가 냉면 먹는 자 돌로 쳐라. 우리는 항상 자기는 오늘 예가 확실하죠. 오늘 중국집 왔으니까. 항상 뭐 할 때 나는 착한데 나는 선량한데 나는 건전한데 저건 나보다 못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간음죄고 살인죄고 이 자체가 십자가지게 된 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내 공간만 생각했습니다. 주님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주께서 이용함에 대해서 우리가 오히려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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