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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4 23:52:38 조회 : 372         
탈출의 경로 누가복음 1:2 200204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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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59.♡.122.247) 20-02-17 22:21 
강남-누가복음 1:2 (탈출의 경로)200204a-이근호 목사



먼저 오신 분에 대한 보너스. 수련회 첫 시간 제목이 ‘추락’이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전혀 추락이라는 감을 못 잡잖아요. 우리가 어디서 추락이라는 느낌을 떨어지는 느낌을 받느냐. 사실은 그 질문이 나왔어야 되요. 떨어진다는 것은 be+ing. 현재진행형이거든요.


멈추지 않고 계속 떨어진다. 계속 떨어진다는 이 생각과 현실에 비추어 볼 때는 사람들은 떨어진다고 이렇게 수직적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은 못하고 수평적으로 이렇게 살다가 뭐 이사 가고 일본에 이사 가고 미국에 이렇게 수평적 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요. 수평적 이동.


그게 이번 주일 낮 설교 때 할 때에 인간이 자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시간과 공간성에서 인간의 공간성이 하늘이 없으니까 인간은 하늘이 없으니까 옆으로만 이동하는 거에요. 옆으로만. 인간의 공간성은. 물리학자들이 천문학자들이 하늘을 보는 것은 사실은 위를 보는게 아니에요. 옆으로 보는 거에요. 지구 바깥의 옆으로 보는 거다 이 말이죠.


가면 갈 수 있는 어떤 곳. 그리고 제가 오후설교 때 했지요. 오후설교 때 뭐냐 하면은 김민기의 봉우리라는 노래 이야기 했지요. 봉우리. 노래가사 한번 본적 있습니까? 자기가 쟁취했다는 것이 자기 집의 언덕배기에 불과했다는 거에요. 자기는 봉우리를 쟁취했다고 여겼지만. 언덕배기에 불과하죠.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이게 수평적 개념의 공간적 개념이에요.


그러면 이 수평적 공간 개념을 이것이 틀렸다 아니다 그래서 아니야 그래서는 안되는거야 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단, 예수님께서 빌립보서 2장에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없지요.


시간과 공간을 그걸 뭉개버리고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된 그 자아를 뭉개버릴 때 예를 드는 것이 주일날 설교에서 누굴 예를 들었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예를 들은 거에요. 이스라엘은 바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본 겁니다.


약속의 땅으로 보고 수평적 이동을 하는 거에요. 나 바벨론에 잡혀갔다. 그러면 수평적 이동에 되게 되면 무슨 희망이 있느냐 하면은 잡혀가더라도 다시 수평적 이동으로 오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희망이 생기지요.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서 시나이반도를 건너서 수평적 이동을 하지요. 뭐 계단 올라가고 이런 것 없잖아요. 바로 거기서 거기 옆에서 옆 아닙니까. 공중에서 인공위성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죠. 이집트 있고 이렇게 이스라엘 가나안 땅 있고. 이동이 가능한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옆에서 옆으로 이동이 그냥 가능하다는 그러한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여기에다가 뭐냐 하면 옆인데 살아서는 못가는 두개의 갭을 만든 겁니다. 하나는 홍해고 하나는 요단강이죠. 아 까짓것 옆에서 옆으로 못가? 이게 따라오던 애굽 군사들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서 이집트에서 시나이반도까지 홍해를 못 건넌다. 못 건넌다 하는 이 건널 수 없다는 이 갭이 있다는 말은 헤엄을 못 쳐서 건너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누가 개입을 하느냐 하면은 여기 모세의 지팡이가 개입하지요.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못 건넌다.


그러니까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갈수 있는 곳이 인간의 시간, 공간 개념으로 갈수 없는 곳이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시간 개념은 뭐냐 하면 언젠간 약속대로 이 땅에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 시간개념 공간개념이 이스라엘 망하게 한 거에요. 지금도 인간들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시간개념 공간개념을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락이라고 제가 한 것은 바로 뚝 뭔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 이 떨어지고 있다는 그 경로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여기에 이 세상에 합류했잖아요. 인간 사는 세계에.


합류해놓고 빌립보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떨어져서 합류했다고 보는 거에요. 떨어져서. 예수님이 추락했다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의 원래 자리는 뭡니까? 하나님 계신 자리죠. 하나님이 계신 자리로 갈려면 예수님이 대신 올라가는게 아니고요. 하나님 계신 옆에 오른쪽에 가버린다고요. 내려올 때는 이렇게 내려왔지만 갈 때는 오른편에 가버려요.


그러면 이 추락 개념이 없는 사람은 상상하는 하나님의 천국 개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오른편의 자리가 천국이다라는 이런 개념은 어떤 인간의 머리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추락한 그 경로를 볼 때 인간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경로에 따라서 추락중이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더 내려간 음부까지 내려간거죠. 우리 보기에 십자가에서 멈춘게 아니고 사실은 더 내려간거에요. 하나님이 저 음부까지 내려간거에요. 사도신경에 나오지요. 저 아래쪽까지 내려갔다가 그 아래쪽에 내려갔는데 그쪽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우수수 주룩주룩 우수수 떨어지는 그곳입니다.


그 떨어지는 방향을 인간이 스스로 바꿀 수가 없어요. 중력이 떨어지는 그 중력을 스스로 못 돌려가지고 알아서 가봤자 갈 곳이 없어요. 왜? 이곳은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특수한곳이기 때문에 떨어져서 갈 데가 없어요. 계속 떨어질 수 밖에 없어요. 그 떨어지는 그 추락의 자리.


그 마지막 최후의 추락의 자리가 이미 어린양이 죽은 성전의 자리로서 철렁하고 그물로 받아주게 되면 바로 그것이 최후의 추락의 자리인 동시에 인간이 현재 떨어진 장소인 동시에 결국은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천국의 모형으로서 우리에게 성전이 그렇게 마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추락이라는 말한거에요. 인간들은 추락이라는 말을 못 느끼는 이유는 예수님의 경로를 생각 못하고 자기 몸을 자기가 알아서 움직일 수 있다 미국 이민가면 되잖아. 호주가면 되잖아. 호주에 산불 나라. 자꾸 어디 가서 내 몸 하나 이동할 수 있고 그리고 시간은 언제 오겠지 하는데 이 시간은 시간의 어떤 그곳으로 가기 때문에 시간을 기다려봐야 기다림뿐이죠. 그냥 기다림 자체를 기다릴 뿐이에요. 기다림 자체를. 막연하게. 갈 때까지 가보자.


자, 이제 본격적으로 누가복음 해보겠습니다. 이거는 수련회 때 여러분들이 궁금해할까 싶어서 왜 추락이냐? 나는 추락을 못 느끼고 중력을 못 느끼고 멀쩡하게 옆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왜 자꾸 추락이라고 하느냐?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하느냐?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떨어지는 감을 성도만 알게 하는 거에요. 추락할 때 앞에 형용사를 하나 넣었죠. ‘현기증 나는 추락’. 그래야 이게 현재진행형이 살고 있죠. 현기증. 확실히 빈혈같은거 있으면 막 떨어지는. 주가 떨어질 때 같이 쭉쭉 떨어지는 그런 거 못 느꼈습니까.


자존심 확확 떨어질 때 현기증 못 느꼈어요? 이게 어디까지 꼴아박는가 한번 보자. 그게 맞는 장소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성전이 죽어야 마땅한 대신 죽으신 분을 찾아가는 그 죽으심이 찾아가는게 아니고 죽으심이 나를 땡기는거에요.


너 대신 내가 죽었다는 사실,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지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오른편에 가실 분과 합류하기 위해서 지금 가고 있으니까 그 떨어짐 우리 떨어짐이 얼마나 반가운 떨어짐인지 몰라요.


자, 누가복음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누가복음을 보면서 여기에 누가 그 다음에 복음이라는 말 나오지요.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인데 왜 이게 기쁜 소식과 소식을 구분해야 되요? 그냥 소식을 하면 이 판단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판단을 해버려요.


저게 기쁜 소식인지 슬픈 소식인지 내가 알아서 판단해서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내가 판단하겠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나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소식과 반대가 됩니다. 예상 밖의 소식이에요. 예상 밖의. 내가 판단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거에요.


그러면 이 복음이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왔잖아요. 신약은 세상의 끝날이 신약입니다. 시간을 관장하는 것은 언약이지 우리의 시간개념이 아니에요. 마지막 언약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총정리, 총마감이 되어버립니다. 마감.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한 지점에 대해서 이렇게 다 응집이 되어있어요. 볼록렌즈에 햇살이 쫙 응집되듯이 초점이 모아지듯이 쫙 당겨버리죠. 총정리가 되는 거에요. 신약이. 누가복음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지만 세상에 있는 유일한 특별한 세상의 모든 사실을 다 포함시킨 책. 그게 무슨 책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그리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책의 기록을 위하여 일어나야만 하는 그 책. 무슨 책입니까? 성경이죠. 그 성경의 최종 마감이 이 복음 안에 응집되어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복음 안에. 이 복음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을 총정리했다 이렇게 되지요.


그 한국에 느와르 영화 소위 깡패들 싸움하는 영화 보게 되면 사채업자들이 못된 사채업자들이 돈 안 갚으니까 삽 하나 던져주고 "정리해." 이 말이 뭡니까? 갖다 묻어버려 이거 아닙니까. 그 정리에요. 그 정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조폭이 되어가지고 삽 하나 예수님보고 총정리해버리라는 거에요.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란 인간은 어디 막혀있느냐? 인간은 살아있는 살아있다는 몸에 스스로 막혀있거든요.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누가복음에 담았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인간이 몸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는 죽음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누가복음은 삽질해가지고 정리한거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거에요.


알려주게 되면 이 정리에 준해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이 정리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일어날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이대로 앞으로 이 설계대로 앞으로 시작되어야 될 거에요.


누가복음이 물론 일어난 일도 있습니다만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장차 그렇게 될 일도 써놨어요. 어차피 마감이니까요. 마감되는 일이니까. 이걸 아주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공동묘지 재방문.


삽으로 묻었으니까 사채업자가 모두 죽여버렸으니까 공동묘지가 되어 버린 볼록볼록 세상 모두가 공동묘지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성령 받은 성도로 하여금 이걸 재방문시키는 겁니다. 볼록볼록한 이거 잔디밭 밟고 다니라고 밟고 다니는 거에요. 세상. 안 죽은게 없이 다 죽었어요. 모든게.


마지막에 모든게 다 죽어있거든요. 그 죄값으로 다 죽어있단 말이에요. 죽어있는 공동묘지를 이렇게 재방문시키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람들이 성도들이 재방문의 기회를 줍니다. 재방문의 기회를.


주께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존재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은 사명이 우선이에요. 존재보다 사명이 먼저 있었고 그 사명을 위해 너는 태어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 원칙이. 존재보다 사명이 우선돼요.


그 사명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성과를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과를 알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어떻게 살거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전할거냐가 문제에요. 나 어떻게 살지? 그런 질문을 하면 삽으로 묻어버려야 돼. 아직까지 끝났는데 아직 끝이 아니라고 지금 혼돈스러워하는 인간이에요.


볼록볼록한 공동묘지를 다시 방문한다는 이 말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국민학교 다녀놓고 저는 초등학교란 말 싫어요, 저는 국민학교 다녔어요. 국민학교 다녀놓고 40년 후에 다시 2학년 2반을 가보는 거에요. 이미 오후 한 6시 되서 애들 다 하교하고 난 뒤에 가보면 거기에 키 작은 걸상과 의자만 빈티지 모습을 띠면서 그냥 나란히 거기에 있지요.


애들은 없고 옛날 같이 하하호호 하면서 했던 급우들 있잖아요. 옛날 같이 공부했던 그 자리에 그 급우들은 한명도 없고 그냥 나이 60 넘어가지고 그냥 방문해보는 거에요. 50년 뒤에 국민학교 가보면 그 같은 교실 말이죠. 그대로 책걸상 있을 거 아니냐는 말이죠. 물론 키가 커서 앉지는 못하지만.


그러면 거기에 급우들 하나도 없지요? 공동묘지 아닙니까 그래. 공동묘지. 떠들던 기억, 선생님 없다고 얼마나 떠들었습니까. 왁자지껄. 그런데 그 소리도 안 들려. 왜? 공동묘지는 다 죽었으니까. 선생님도 물론 죽고. 걔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건 모르겠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애들이 떠난 빈자리. 죽은 그 뒤의 자리.


그것만 쳐다보면서 아 주께서 삽질했구나. 다 묻어버려. 모든 인간을 죄값을 다 죽여버렸구나라는 사실을 통보하는 일을 하는 거에요. 이 일은 보람상조보다 더 쉽습니다. 한번 참석해야하는데. 이 일은 보람상조보다, 보람상조도 귀찮아. 장례식도 끝났어요. 보람상조보다 더 쉽다니까요.


유족들하고 의논할 것도 없어요. 계약대로 하면 차 3대 보낸다고 했는데 두 대 밖에 안 보냈습니다. 그런 이야기할 필요 없어 그냥 끝났어요. 여러분 그것도 못합니까? 공동묘지 뛰어다니는 것도 못해요? 그게 바로 누가복음 내용입니다.


자기 백성 보내가지고 증거케하는 거에요. 누가복음과 같은 누가복음 쓴 사람이 쓴 책이 무슨 책이냐 하면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성과를 전하기 위해서 성령받은 거에요. 성령을 그냥 공짜로 준게 아닙니다. 공짜로 준게 아니고 예수님의 성과죠.


예수님의 성과에서 누구는 빠져야 되요? 선교하고 전도하는 내 성과는 절대로 끼어들면 안되겠지요. 용납이 안되지요. 예수님의 성과를 전달하는 임무 때문에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해가지고 세상 보는 것을 뭐로 보느냐? 집단공동묘지로 보는 안목을 줘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설득을 한다든지 죽은 사람을 무슨 설득을 해요? 설득을 한다든지 아부를 해가지고 교인 몇명 더 꼬셔볼까? 그러한 노림수는 성령한테는 용납이 안됩니다. 성령한테는 용납이 안되지요.


그러면 다 죽었는데 해가지고 천국 갈 사람을 어떻게 그러면 여기서 모집합니까? 할 때 여기서 공동묘지에서 다 죽었다 하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존재, 존재가 되겠지요. 존재들이죠. 존재들의 뭐가 떨어지느냐 하면 사건이 떨어집니다.


이번에 수련회할 때 여러분들이 한번 이렇게 배웠던 것 해봅시다. 1,2,3,4,5,6,7 자연수입니다. 벌써 수학 나오면 아 골치 아퍼. 토하고 그런거 아니겠지요? 2n. 제일 뒤에 n이 있죠. 그러면 여기에 2를 곱해보면은 2가 되고 4가 되고 8이 되고 2n이 되겠지요. 여기 만약에 이걸 제곱을 해버리면 이거는 1은 1이 되고 2는 4가되고 3은 9가되고 되겠지요.


분명히 1,2,3,4로 헤아릴 수 있는 하나의 존재, 두개의 존재, 3명 공동묘지에 넷, 묘자리 네개 다섯개 이렇게 하다가 1,4,9 이렇게 이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 나타나면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사건입니다.


똑같은 평수인데 다섯평 자리인데 사람은 다섯명 들어갔는데 사건은 다섯 곱하기 다섯 25가 될 수도 있어요. 오히려 3제곱이 될 수도 있고. 제한된 공간에 사건은 무한. 이게 뭐냐 하면 진무한입니다.


진무한. 진짜 무한이라고 하는 것은 1,2,3,4 끝에 오는 것이 아니고 제한됐는데 사건의 수는 끊임없이 많아지지요. 설교 본문은 하나인데 그 설교 가지고 1년 하라고 하면 1년 내내 새로운 것이 나오지요. 왜? 설교는 주님이 만들어내는 사건이기 때문에.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거 읽어보면 그 본문은 안 달아야 됩니까? 끝나는거에요? 이해 다 되신거에요? 그게 아니고 저녁 먹는 것도 창세기 1장과 관련되어 있고 목욕하는 것도 창세기 1장에 관련되어 있고 어디 놀러가는 것도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도 창세기 1장관 관련되어 있어요. 전부다.


관련지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관련지을 수가. 내가 애들 말 안 듣는다고 나무라면서 "야! 생각의 의자에 앉아 있어. 불 끄고." "아버지 미안해요." 찔찔찔찔 울고. "앞으로 네가 잘못했을 때는 네가 알아서 자동적으로 생각에 의자에 앉는다." "예."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모든게 다 관련되어 있는 거에요. 모든게.


그래서 말씀은 언어가 아니에요. 사건이 이렇게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두가지 세가지가 아니라 제곱이 아니라 무한대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 말씀이에요. 사람은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얼마나 포개져 있는가를 본인이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지켰다고 해서 지키는게 아닙니다. 그 깊이와 높이를 다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사건을 유발해서 그 사건이 또다시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되지요. 그 사건이 된다는 말은 주님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의미가.


다 죽었으니까 죽음이라는 의미밖에 없어요. 무의미해요. 무의미한 공동묘지를 그 아주 철부지 천진난만한 애들이 막 뛰어노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영국에서 만들어져가지고 애들 유아하는게 있지요?


어떤 무덤같은 집을 짓고 애들 KBS 오후에 보면 나오는거 있잖아요. 텔레토비 있지요? 4명입니까? 그 장면 생각해보세요. 공동묘지에 잔디밭을 순진무구한 애들이 막 뛰어 다니는 거에요. 그걸 누가복음에서는 성령 받은 성도들이 등장해서 뛰어다니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과 관련되어 있지요. 오순절날 사도들이 뛰어다니는 거에요. 뭘로 뛰어다니겠어요? 자기가 알아서 어떻게 실적 얻겠다 뛰어다닙니까? 아니면 뛰어다니는 자체가 사건이겠어요? 뛰어다니는 자체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본인이 본인을 그 사건을 기억을 못해요.


성전미문에 앉은뱅이 앉았다. 앉았는데 그거는 그 다음 지시가 주어져야 돼요. 어떻게 할지는 그거는 성령께서 주께서 그 자리에서 그 다음 중첩된 사건을 주어지게 되면 앉은뱅이가 듣기 참 섭섭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네가 원하는 돈과 은은 내게 없다. 미안하다.


돈 있어도 나는 안줘.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마침 돈이 없어요. 돈이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내게 있는 사건을 네게 주노니 나는 너를 사건화하겠다. 하나님의 성령을 줘서 성령으로 하여금 이제는 자기가 앉은뱅이냐 몸 아프냐 거렁뱅이냐가 하는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존재라면 나 이렇게 잘 살았다 하고 남에게 자랑질을 하겠는데 이미 존재는 이미 사건 앞에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부자든 뭐든 얼마나 서울대학 나온 것과 관계없이 전부다 죽은 자에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네 성과가 아니고 예수님의 성과에요.


예수님의 성과를 네가 지금 몇살 살았어? 사는 동안에 계속 사건화시켜서 전파하게 하는 거에요. 물론 남을 약올리는 것이 사람은 포섭하거나 설득하거나 교회 오도록 만드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를 의미를 더 키워주는게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니까 목사님 저는 꼭 천당가야되요. 천국가야되요. 그건 자기 의미를 버리지 않고 그 의미를 천국까지 키우려는 시도거든요. 그러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공동묘지라는 취지가 날라가버려요.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가 날라가버리고 나만 살았다가 되어버리니까 이런 것은 하나님의 언약 원칙에 위배되는 겁니다.


그건 누가 좋아하느냐? 악마가 되게 좋아하지요. 악마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거 구라다. 나는 착하거든. 이게 악마가 흠집내는 거잖아요. 예수님의 성과같은 소리하고 있네. 예수님은 실패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 이룬거 아니야. 다 이룬게 아니고 모자란게 있어. 이게 이제 악마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시비거는 겁니다.


지난 지난번 낮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십자가 때 양쪽에 강도 있지요. 그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예수님을 의심하는 이유가 그거에요. 다 이루었다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에요. 다 이루었다는 꼬라지 봐라. 이게 다 이룬거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다 죽고 난 뒤에 되어질 일을 사건화시켜서 성령을 통해서 성도한테 주는 거에요. 죽고 난 뒤의 일. 그러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뭘 알았어요? 죽고 난 뒤의 예수님이 낙원에 가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 그 사실을 그 강도가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주의 나라 임할 때에 저를 기억해달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았다는 말은 살아생전의 내가 보자 애 합격하겠습니다. 이번 앞으로 5년 뒤에 출산하고 이걸 아는게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나는 지금 어디가 있느냐를 성령을 통해서 미리 지정해주는 겁니다. 그것을 주 안에서라고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주 안에 있다 주 안에. 인천 주안 말고. 주 안에.


주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옛아담은 죽고 이제는 새아담의 몸으로서 지체로서 살아가는 거에요. 이걸 죽기 전에 미리 알게 된 거에요. 죽기 전에 미리 알게 된 겁니다. 시험지 유출된 거에요.


합격통지서 미리 유출되서 미리 빼내버렸어. 물론 우리가 빼낸게 아니고 성령께서 특혜를 줘서 빼내가지고 너 명단 있다. 생명책에 네 명단 있어. 봐. 하고 집어준거에요. 집어주면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단순히 그게 기쁜게 아니고 그것도 기쁘지만 그게 아니라 세상은 어떻게 잘난 인간들도 전부 다 죽어있다는 공동묘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옛날 국민학교 2학년 2반 교실에 불과한 거에요. 애들 다 컸어. 이제 늙어서 그 키 낮은 의자, 책상과 걸상밖에 없어요. 한때 인간들이란 이름을 가진 존재자들이 한때 여기에 살았었었었다를 알려주는 거에요. 왜? 이미 죽은 이후의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좋은 소식이 아니고 기쁜 소식이죠 이게. 놀랠만한 소식이에요. 아 내가 그전까지는 예수 믿었는데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하는데 유지해야 천당 가는데 아이고 그런데 만약에 치매 걸리면. 아 안돼 안돼 치매 걸리면 안돼.


자꾸 자기 자신을 존재를 살릴려고 이렇게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가짜라는 거에요. 그게 가짜에요. 이미 산거에요 이미. 이미 완료가 되어 버린거에요. 내가 어떻게 살거냐가 아니고 어떻게 구원받을거냐가 아니라 무엇을 증거하느냐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렇게 구원시킨 그분의 성과 있잖아요. 그 공로를 증거하는 거에요.


공동묘지에 텔레토비처럼. 보라돌이 이렇게 해가지고 잔디밭에 뛰어다니면서 으음~~~하면서 돌아다니면서 삐지고 돌아다니면서 그 일 하는 거에요. 그 성령 받은 사람치고 사명 없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의 구원의 존재보다도 사명이 우선이에요. 사명을 위해서 구원받았지 내 구원받기 위해서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그 소위 신학자들 총신이고 뭐 장신이고 신학자들, 그 신학교에서 배출된 목사들의 생각은 어떤 생각이냐? 여기에 대해서 제가 71회 다니엘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논문발표한 그 현장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현장에서 제가 서론부분을 시간에 하도 제약 시간을 하도 짧게 줘요. 아주 반칙이라. 일부러 이야기하지 마라고 하는 것 같애. 절차가 불공정해요. 누구 말대로. 절차가 불공정한 절차를 만들어 놓고 이걸 보고 그 두꺼운 것을 다 하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제가 제일 중요한 서론부분을 다루었어요.


서론부분이 뭐냐 하면 성경은 믿으라고 준게 아니고 믿지 못하게 하려고 줬다. 이 대목입니다. 성경은 어떤 인간도 구원되지 못함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을 준거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길이 있다? 없다? 길이 없는 거에요. 길이 없는 거에요. 길이 없어. 구원의 길이 없는 겁니다.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데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때 그 바늘구멍은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길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늘구멍을 등장시킨 거에요. 예수님께서.


만약에 그 바늘구멍이 길이라고 한다면 바늘구멍 코가 이만해야 돼요.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이야기를 현장에서 들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들었느냐 하면은 길이 없음으로 제대로 알고 들은 거에요.


그래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에요. 그래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할 수 없어요. 길이 없어요. 천국 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볼록볼록 공동묘지에요 전부다. 이미 죽은 거에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어떤 사람도 길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왜 이 서론부분을 왜 거기서 이야기 했느냐 하면 이 한국교회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길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길이 있다고. 그러면 길이 있다고 여기는 그 신은 어떤 신이에요? 성경에서는 길이 없는 거에요. 낙타 바늘구멍처럼 길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할 수 없다고 했거든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내용이 이 책의 내용이에요. 믿을 수 없는 내용만 있는 거에요. 믿을 수 없는 내용만.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뭐냐 하면은 교회에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뭐를 하느냐 하면 할 수 있다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할 수 있다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럼 할 수 있다로 이야기하려면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뭐를 하느냐?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인간 쪽에서 시도하게 되면 여기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가르칠 수밖에 없지요. 그게 오늘날 목사들 머리 속에 있는 신학 속에 있는 이게 악마적 요소죠. 사기죠 사기. 사기입니다. 사기를 친 거에요. 길이 없는데 있다고 가르친 거에요.


그러면 길은 어디 있느냐? 길은 여기 있다가 아니라 길=예수님이 되요. 예수님 오셔서 두가지를 했는데 하나는 길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길이 없음을. 네가 아는 하나님하고 내가 아는 아버지는 다르다. 이거 대구강의에서 했거든요. 여기서 다시 하지는 않겠습니다.


네가 아는 하나님하고 내가 아는 하나님하고 다를 뿐더러 더 나아가서 네가 아는 하나님은 그게 뭐냐? 악마가 되는 거에요. 악마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길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해서 길을 열어준 거에요.


아 나는 구원받지 못했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라고 하는데 그건 엄살입니다. 인간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본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만큼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이미 악마가 그렇게 인간에게 그렇게 부추겨놨어요. 마음을 붕 뜨게 만들어 놨어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왜냐하면 내 마음 내가 몰라요. 내가 부인하고 싶어도 마귀가 나를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어 가지고 왜 네가 성급하게 자기를 포기해. 포기하지마. 너는 가치 있는 존재야. 자꾸 내 안에서 격려를 해주기 때문에 악마는 하나님께 네가 잘 보이면 그 댓가는 주어진다는 거에요. 그런 희망을 가지라는 거에요. 자꾸만 격려하는 거에요.


성경말씀 있잖아. 성경말씀 원어 연구하고 문법, 문맥상 해석하게 되면 여기서 뭔가 진리나오고 그거 네가 확보하게 되면 네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뭡니까? 길이 없다는 거에요. 그게 길이 없다는게 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길이 없는 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 버림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버림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속한 이 세상자체가 이미 버림받았다고 선언을 당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는 버림을 받아야 되지. 손들고 구원해주세요 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어요. 완전히 막혀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시간을 많이 보내가지고 서론부분을 그렇게 강조한겁니다.


역사 끝에 뭐 있겠지. 역사 끝에 뭐 있겠지가 아니라 역사 속에 누가 들어있어요? 자기가 들어 있잖아요. 내가 아는 역사와 네가 아는 역사 다 달라요. 말로는 역사 안에 있다 역사 끝에 있다 하는데 역사가 어떤 내용이냐 하는건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서 들어갈 내용과 뽑을 내용을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요.


중요하다 싶은건 뽑아내서 자기 역사 만들고 안 중요한 것은 버려버리고. 안 중요한 것이 또 남한테는 중요하거든요. 사람마다. 10사람이면 10사람마다 역사가 다 다르다니까요. 10사람 역사가. 북한에서 보는 일제강점기 역사와 한국에서 보는 일제강점기 역사는 다 달라요.


역사 속에서 본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를 미화시키고 긍정하고 자기 존재를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지나간 기억들을 해석해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과거도 믿지 마세요. 길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로 길을 해서 완전히 인간과 끊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갈려고 해도 갈 수가 없어요.


두번째. 두번째 이 길이 끊어졌는데 길=예수님이죠. 예수님 자체가 길이 된다는 말은 죽음은 인간에게 죽으면 끝이죠. 나의 죽음은 나의 끝입니다. 맞지요? 나의 죽음은 나의 끝이라고요. 모든게 죽어서 공동묘지 되었는데 여기 죽음에서 삐질삐질 틈이 생겨요. 갈라짐이 생긴다고요.


그럼 길은 뭐냐? 길은 곧 길은 뭐가 되요? 길은 예수님이 길이 되요. 예수님이 다리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Bridge Of Trouble Water 이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틈을 벌어지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없던 길이 예수님 자체에서 길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없는데 예수님 쪽에서 길을 십자가 길을 만든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지혜도 막혀있고 모든 기적도 막혀있는데 오직 구원받는 자에게는 십자가만이 뭐가 돼요? 구원이 능력이 되는 겁니다. 무엇이 올바름입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진리에요. 무엇이 생명입니까? 예수님에게서 영생을 얻는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에요.


나라는 인간은 주님하고 거래하지 마세요. 그러면 내가 안 죽은게 돼요. 이미 죽어서 없어졌어요. 없어지고 예수님이 자신의 성령으로서 죽어 없어진 이 자리에 예수님의 확대가 일어나요. 예수님의 지체가 일어나게 되면 여기서 길이 생기고 여기서 진리가 생기고 생명이 생기는 거에요.


이것이 뭐냐? 이것이 성도란 말이죠. 이게. 죽은 자 속에서 예수님이 들어와서 주께서 구원사건을 일으켜요. 사건을. 그리고 그것이 누구 성과입니까? 예수님 본인의 성과가 된다 이말입니다. 예수님 본인의 성과.


그러면 매일이 뭐냐 하면은 매일이 놀랄 소식이죠. 그게 매일같이 복음이 되는 거에요. 내가 복음을 믿는게 아니고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버린다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던 조건하에. 혼자 또 복음되면 내가 예수인가? 이렇게 되는게 아니고.


예수님이 만든 그 틈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우리가 틈이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들었잖아요. 똑같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의 말을 사도행전 28장의 말씀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해야돼요 이게.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설득하는게 아니고 주님이 나에게 찾아온 것처럼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사람 자체가 예수님이 만들어준 함께 있음의 틈이 되어야 되거든요. 틈이라 하는 것은 틈이 생기기 전까지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징후도 징조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손을 대버려서 여기서 갑자기 균열이 일어나면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 예수님의 손바닥이 나오고 손길이 나오는 거에요.


시편 8편 한번 봅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라고 되어 있죠. 해와 달과 별을 뭐로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주님의 핑거 주님의 손길. 주님의 손으로 만들었지요.


어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이고 하는 것은 사람은 호흡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호흡을 취해버리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요?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그래서 수 헤아릴 가치가 없다고 했지요.


인간이 주도적으로 어떤 숫자를 헤아릴 권리가 권한이 없고 누가 구원받을지 구원 안 받을지 숫자 헤아릴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 주님한테 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들은” 그 다음의 말이 재미있어요. “다 믿더라”. 다 같이 믿더라. 다 같이. 누락이 없이, 빠짐이 없이. 숫자의 훼손됨이 없이. 숫자가 이렇게 결함이 없이. 온전하게 다 되더라.


그럼 누구 작품이란 말이죠? 성도는 없는데 이 없는 성도를 있게 만드는 거에요. 없는 성도를. 따라서 성도만이 알아요. 내가 성도될 수 있는 어떤 여건이 내 쪽에서는 발견되지를 않았는데 주님 쪽에서 주님이 예수님의 성과에 의해서 성도가 되었음을 공동묘지에다가 텔레토비처럼 전하는거에요.


오늘 제목을 텔레토비로 할까. 텔레토비처럼 증거하는 거에요. 증거하는 것. 증거할 때 그냥 증거하게 되면 이건 강의시간이 되고 사건으로 다가오는 사건 자체가 주님 증거하는 모습으로 나와야 되요. 두 사람이 만약에 마주치게 되면 한쪽은 내 성과는 이만큼 살았다고 버틸 거에요. 내가 스스로 행동 조심해서.


그런데 성도는 뭐라고 합니까? 지금 어떤 사건 속에서 누굴 증거해요? 예수님의 성과를 증거하겠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주께서 하게 하셔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수직적으로 내려와서 가시는 그 경로를 얻은 자. 경로를 성령에 의해서 얻게된 자의 그 스토리, 그게 예수님과 성도들의 그게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빠져나갈 수 없는데 빠져나가는 경로를 보여주고자 성령 받은 성도들과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사도행전하고 같이 사도행전도 주님과 사도들의 그 움직임과 활동이죠. 그것처럼 누가복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거기에 광야에서 양치는 들판에서 양치는 목자 나오지요?


목자가 목자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알려준 경로가 나오지요. 누굴 봐야 됩니까? 베들레헴에 가서 후딱 누굴 봐라? 베들레헴에 난 아기를 보라. 지난 낮설교 때 했지만 누가복음 2장에 28절 오후설교였구나.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그래서 제가 이렇게 했지요. 어떤 아주머니가 아기 안고 있는데 아기 안고 있는 아주머니 버스타도 만나고 지하철 타도 만나고 다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시므온이 어떤 아주머니가 애기 안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앞에서 시므온이 무슨 고백을 하느냐 하면은 2장 27절에 보면은 시므온이 무엇에 감동으로 되었어요. 2장 27절 성령의 감동이죠. 왜 자꾸 누가복음에서 성령에서 계속 성령이 어떤 조건처럼 계속 선행되느냐.


이건 길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으로 감동해서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으로 감동해가지고 이 땅에서 탈출할 수 없는 세상의 탈출의 경로를 보여주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여 이제 종은 편안하게 놓아주시는 군요. 이제 종을 편안하게 놓아주시는 군요. 참 이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어떤 아주머니 애기 안고 있는데 한번 실험해보게 세번째 애기 들고 한번 와보세요. 아빠가 애기안고 있는데 보자마자 "아이고 이제 해결됐다. 이제 모든 인간의 인생의 모든 난제가 해결됐다!" 이게 무슨 이런 조화가 있어요. 이런 조화가.


아 왜 그래야 돼지요? 이것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흉내내지 마세요. 나도 따라해야지 하지 마세요. 시므온과 아기 예수 사이에 점점점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이게 바로 구원의 탈출의 경로가 되는 겁니다. ‘탈출의 경로’. 오늘 제목을 탈출의 경로해야 되겠다.


탈출의 경로를 보면서 그 경로 나도 알고 있는데 이렇게 공감을 한다면 같은 성도란 말이죠. 나도 시므온처럼 나도 항상 이제 종을 놓아주시는 군요. 해놓고는 또 누구 하나 만나고 난 뒤에 화가 나서 정신이 혼란스러워서 나 이제 지옥갈거야. 악마가 나를 잡아죽이는구나.


자꾸 성경에 나오는 것을 성경에 나오는 연기를 본인이 연기를 할려고 하는데 연기가 안 해도 돼요. 그것은 보이는 거잖아요. 보이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관계. 상상도 못한 관계. 망가져도 상관없는. 왜? 나는 존재가 되면 안 되니까. 그 사건. 이런 사건을 사건되게 복음사건되게 하는 보이지 않는 관계성.


그게 바로 이 종을 편안히 놓아주는 군요. 그래서 이런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특징은 뭐냐 하면은 뻔뻔함의 극치. 뻔뻔함의 극치에요. 이걸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이걸 두자로 뭐라 하느냐? 이게 자유에요. ‘자유’. 사도행전 그야말로 뻔뻔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잖아요.


그런데 성령받은 사람들은 이미 우리는 죽었고 죽고 난 뒤의 상황을 성과를 전도할려고 이제 떠나도 되는데 안 떠나고 계속 이 땅에서 남겨지고 있는 거에요. 성과를 전하는 존재가 아니고 성과를 전하는 사건이 되라고 내 자체가 하루하루 사는게 사건이 되라고. 언제 죽어도 괜찮은데 사건인거에요.


여러분들 살아있는게 기적입니까? 내가 죽는게 기적이에요? 죽은 인간에게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게 기적처럼 느껴져야돼요. 어?!아직도 살아있네. 살아있는게 당연시 여겨지지 않고 기적으로 여겨져야 됩니다. 그걸 성령받은 사람은 그걸 알고 안 그런 사람은 모르지요. 성령 받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맨날 생각하는 것이 구원받을려고 굉장히 애를 써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누가복음에 보는 해석의 안목은 어떠해야 하는가? 아주 보다 냉정하고 냉철하고 냉혹해야 돼요. 왜? 공동묘지로 보기 때문에. 그게 정확합니다. 이게 정확한거에요. 이게 초과적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성과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거에요. 이건 그걸 넘어선거에요.


이런 성도의 갖고 있는 지위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초월적 지위라고 해요. ‘초월적 지위’. 초월적 지위라고 합니다. 이 땅에 없는 지위, 영어로 하면 포지션.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보면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성령 안에서. 초월적 지위.


그러니까 보다 냉정하게 보고 냉철하게 봐야 돼요. 세상 성령 받지 않는 사람들이 보는 가장 냉철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돈이 더 확실한 현찰이 더 확실한 그거다. 그러면 베네수엘라한테는 그런 소리 못하죠. 그러면 거기는 금이 더 확실하다 이렇게 되겠지요.


가장 확실한 것은 재산이 전부다. 인간은 돈이 인간을 만든다 하는 그들의 마지막 냉철함은 그게 전부에요. 까짓것 뭐 하나님이 돈 생기나. 교회가 돈 생기나. 그러나 초월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더 냉철하게 보는 거에요. "너 돈 가지고 죽잖아.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지 알아?" "몰라." "너 모르잖아." 모른다고. 전부를 모르는 거에요.


그걸 모르는게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모르면 다 모르는게 돼요. 왜? 죽고 난 뒤의 사실을 모르면 모든 것이 악마의 사기극에 말려든 거에요. 사기극에. 중국 가서 죽었다는 유명한 사기꾼 이름이 뭐에요? 수조원 사기친 사람 있잖아요. 하여튼 조희팔이죠. 조희팔한테 속아 넘어간거에요. 세상 사람들이 악한 영에. 왜냐하면 돈이 최고의 가치는 돈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걸 알고 시편에서는 뭡니까? 돈이 너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라고 되어 있지요. 잠언에서도 나오고. 돈이 너를 천국 보내지 못한다. 돈이 죄를 사하지 못 한다 되어 있지요? 십일조 바쳤는데. 십일조 가져가! 던져 버리고.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박사가 3개 4개 되도 모른다고요.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냉철하게 보면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이게 누가복음이 이게 바로 진리라는 사실. 그 들판의 있던 목자가 이 세상의 어떤 철학박사나 과학박사보다도 노벨상 받은 사람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초과적인 것이니까.


그리고 시므온이 아기 예수 보고 남들은 그냥 애기인데 그 사람보고 이제 내 영혼을 편히 쉬게 해주셔서 주여 감사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알기에 성령의 감동이죠. 얼마나 알기에 이제 편안함을 느낄까요. 그 다음부터 두 번 다시 시므온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소설 쓰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됐느냐 그 관계.


아기 예수가 지니고 있는 그것만이 내가 아니고 그분이 진리고 길이고 생명이고 그분이 없는데서 틈을 만들어 준거에요. 그 틈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는 안목은 성령을 받아야 눈이 마주쳐요. 눈이. 저쪽 틈에서 나온 주님의 그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딱 마주침. 까꿍.


여기서 까꿍. 오바 까꿍. 둘 다 까꿍이 된거에요. 다 이룬 거에요. 죽은 자가 영안이 열린 겁니다. 다시 산 거에요. 내가 영생을 받은 것이 아니고 영생이 나를 만드신 거에요. 내가 사랑을 한 게 아니고 나를 사랑되게 한 거에요. 주님이 나를 사랑되게 소망되게 믿음 되게 하신 거에요.


복음의 신발이 되게 하신 거에요. 구원의 투구가 되게 하셨고 진리의 띠로 다루시는 겁니다. 철갑옷이 안에 사람도 없는데 밤에 박물관을 돌아다닌다니까요. 철갑옷이. 철커덩 철커덩. 박물관이 돌아왔다 영화보세요. 밤중에 혼자 돌아다닌다니까요. 안에 보면 사람도 없는데 투명인간 같애.


우리는 이미 투명인간이에요. 나를 움직이는 것은 내가 갑옷을 움직이는게 아니고 갑옷이 나를 움직인다니까요. 병행을 하는 것. 갑옷이 붙어있던 이 몸은 육의 몸에 붙어있는데 이 자석은 안쪽에 있는 주님의 자석과 서로 당기니까 주님의 움직임에 같이 움직이는 거에요.


우리는 이 육은 죽을 때까지 있는 이 육은 나풀거리는 커텐의 천처럼 우리는 육이고 육 바깥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깥의 영에 맞닿아있지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죄만 생각하고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 맨날 고민하고 절망하고 낙담하는 이 바깥의 그렇게 된 그 육을 주께서는 사용하셔서 바깥의 이런 복음의 비밀들을 발산하는 기능으로 역할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거에요.


여기는 우리 2년 뒤 5년 뒤 없어요. 그냥 정지화면. 하나의 화폭에 다 담겨 있어요. 하나의 화폭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있다고요. 이게 주 안에서 일어난 사항. 주 안에서.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강조한 것은 뭐냐 하면은 노력하지 말라고 했지요. 사건이 노력 안 해도 차가 들이받는 것처럼 사태와 사건이 들이받는다고요.


자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서면 또 자아가 또 생겼어요. 생기니까 차가 와서 박으니까 아야~하는 거에요. "내 마음 너무 아파요 주님." 아이고 자아가 또 생겼구나. 아파하는 자아가 또 발생됐구나. 네가 있는게 아니고 존재 네가 있는게 아니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네가 또 잊어버렸구나. 네가 아픈게 아니고 아파도 내가 아프지. 너는 하나의 아파야 될 사명이라면 아파라 이 말이죠.


아파도 괜찮기 때문에. 슬퍼해도 괜찮거든요. 어쨌든 우리가 전한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 뒤에 일어날 일을 복음이란 명칭으로서 쫙 적는 겁니다. 텔레토비처럼 돌아다니는 거에요. 이 누가복음 전체를. 10분 쉽시다.
 홍민희(IP:59.♡.122.247) 20-02-17 22:22 
강남-누가복음 1:2 (탈출의 경로)200204b-이근호 목사



자, 누가복음 1장 1절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목격자라고 되어 있지요. ‘목격자’. 목격자 앞에 뭐가 있습니까? 앞에 뭐가 있지요? 말씀이 있지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공동묘지 세상에서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말씀만 있어요. 말씀만 있습니다. 타인이 있는 그 자리가 말씀이 있는 자리에요. 그 사람의 덩치를 보지 마세요. 키가 170인지 180인지 보지 마세요. 그 사람이 있는 곳에 말씀이 있는 거에요.


아까 유투브할 때 이야기했지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게 아니고 죽음 이후에 지옥이 있을 것인가 천국이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만들어 놓은 거에요. 섞여서 살게하는 거에요. 지옥 갈 사람, 천국 갈 사람.


그러니까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가 가야될 길을 가게 하는 겁니다. 이게 잠언서 16장에 나오지요? 어떤 사람은 그 사람 가는 길은 필경은 반드시 무슨 길이다? 사망의 길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사람은 이 땅에 살아야 되고 어떤 심지어 심하게 말해서 나와 같이 부부가 되어야 되요. 사망의 길.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인생이 어떤 길이 있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어떤 길? 사망의 길과 천국, 영생의 길. 길은 달랑 몇 가지 밖에 없다? 딱 두개밖에 없어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요. 비켜봐. 너 어느 길인지.


그 사람보고 하는게 아니고 "잠깐만 비켜보세요." "조국 잠깐만 비켜보세요. 조국." 당신이 중요한게 아니고 당신이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느냐에요. 어느 길로. 멸망의 길이냐? 넓은길로 가느냐? 아니면 있지도 않은 좁은 길을 가느냐. 좁은 길은 없는 거에요.


틈이 만들어 질 때 좁은 길 돼요. 또 좁은 길로 가지마세요. 그거 좁은 길이 넓은 길 됩니다. 순번 뽑아서 돈 있는 사람만 가고 안돼요. 아예 길은 없고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사건이. 다시 말해서 모든 세상은 공동묘지 있는 자체가 뭐냐 하면 전부다 세상의 말씀화에요. ‘세상의 말씀화’. 말씀으로 엮어져있어요.


그 사람 있는 자리가 지옥을 보여주기 위한 말씀이 있기에 그 말씀에 준해서 그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돼요. 말하는 행동, 태도, 모든 주장하는 것, 외침. 그 모든 주장은 그 사람의 위치에 있는 그 말씀이 지옥 보내기 위해서 말씀에 위배됨을 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말씀에 위배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언약이라고 합니다. ‘비언약’. 언약이 아닌 것. 비언약에 지옥 갈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고개 숙입니다. 고개 숙이죠. 왜? 살기 위해서는. 언약이 아닌 것에 고개 숙입니다. 언약이 아닌 것에.


하나의 예를 들면 연초에 교회에서 계약직 뽑지요? 부목사, 전도사, 강도사 계약직 아닙니까? 계약직 뽑을 때 그 당회장 목사가 “너 뽑아줄테니까 너 담당 주일학교 몇 명이야?” “56명입니다.” “나는 이야기 안하는데 우리 장로님들이 자꾸 이야기해서 내가 전하는데 100명 채워라.” 100명 채워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집을 쫓아다니든 네가 영어를 가르쳐주던 꼬시든 간에 100명 채워. 나는 그런 생각 없는데 우리 장로님들이 자꾸 말이 많으니까 너를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지켜주겠어." 내가 아니면 이명직 목사님 누가 지켜주겠습니까. 낼름거리는 이 독사의 말. 너도 애가 셋이잖아. 살아야지. 살아야지.


전혀 죽음 뒤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고개 숙이기를 독촉하죠. 담보는 안 그러면 너 죽는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너 굶어 죽어. 너 인간 사람 대우 안 해줄거야. 친구 다 떠나버려 라는 협박 공갈로 이야기하겠지요.


이게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이게 말씀에 포함되어 있어요. 말씀에 포함되게 되면 말씀은 언약과 비언약이거든요. 말씀 안에 언약과 비언약, 이스라엘과 이방민족 있는 것처럼 교회와 교회 아님이 있는 것처럼 바로 말씀이 말씀되려면 두 가지 다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부활이 말씀이 아니고 십자가가 말씀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부활 될 때 안 믿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때 양쪽에 강도가 나뉘어지잖아요. 십자가로 나누어지는 거에요. 사도가 전한 것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하잖아요. 십자가가.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랑하는 것은 부활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자랑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어요. 부활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여기에 갇혀있음을 이런 세상의 악마에 갇혀 있음을 십자가로 이게 점검이 된다니까. ‘점검’. 누전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검침원들이 와가지고 이게 지금 또 가스 새는지 이런거 기계 가져와 가지고 삐비빅 삐비빅 검침하잖아요. 그 검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 뭐냐 하면 부활이 아니고 재림이 아니에요. 십자가에요.


재림, 부활은요 얼마든지 인간의 상상력과 호응이 가능해요. "그래 죽고 난 뒤에 산단다. 믿어야지 예수님을. 주께서 오신단다. 기다려야지. 하얀 소복입고. 흰옷입고." 얼마든지 가능해요. 나를 안다치고 나를 부인하지 않더라도 얻어 챙길게 있다고 엮을 수 있는 것이 부활이고 새생명이고 뭐 이런거란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나를 무슨 자로 만듭니까? 구원이고 자시고 구원받을 바탕 자체를 날려버려요. 너를 부인하라. 네 구원과 십자가는 매치가 안된다는 거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구원 받을 사람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십자가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십자가란 말이죠.


삽으로 다 사채업자가 다 묻어버렸어요. 묻는데 손가락 하나 내밀고 이거 다 소용없어요. 흙으로 다 덮어버리는데. 다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누가 구원되고 누가 구원 안 되고는 그 권한은 순전하게 흙에 묻혀있는 헥헥 거리는 우리는 권한이 없어요.


우리는 입에 막 흙 들어가가지고 살려주세요 목소리 외친다고 구원받는게 아니에요. 그냥 다 없어요. 낙타가 바늘구멍 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어요. 사람은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그 다음 뭡니까?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이게 어렵게 들리면 곤란합니다. 강의도 못해요.


정말이지 내가 내 구원에 기여한 바는 앞으로도 없을거고 지금까지 없었어요. 회개 백날 해도 이웃사랑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내가 내 구원에 전혀 기여한 바 없습니다. 그래서 뻔뻔함의 극치에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너 어떻게 구원받았냐?" "나한테 묻지마.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어." "그런데 너는 왜 이 꼴인데도 웃는데?" "기분 좋거든." "나는 슬픈데." "나는 기분 좋아."


누구한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요. 고개 두 번 숙인다고 구원 더 해주는 것도 아니고 주님 찬미한다고 구원해주는게 아니거든요. 이미 인간들은 악마한테 고개 숙이는게 버릇이 되가지고 그 버릇을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주님한테 고개 숙여요. 주님한테 상상한 주님한테 고개 숙이면 구원해줄 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독일에 이렇게 라인강을 따라서 여행한게 있는데 그게 독일에 18세기 16세기부터 옛날 저택들이 오래가요. 돌로 지었는데. 18세기 19세기까지 지은 저택을 이렇게 저택을 구경하면서 이렇게 돌아서면서 거기에 와플 파는데가 있어서. 여기 와플 맛있어요.


와플가게 기억나는데 그 저택이 바로 바로크에요. 바로크의 양식의 스타일의 저택은 천장에 뭐냐? 천국을 다 그려놨어요. 화가가 막 누워서 그린다고요. 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성당 그리듯이. 그림 잘 그려놨어요.


하지만 아무리 잘 그려놔도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거에요. 미켈란젤로 그대로 해도 가치가 없어. 왜냐하면 최초는 미켈란젤로가 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다빈치 그림 있잖아요. 그 특징이 뭐냐 하면은 성 베드로 성당 가보세요. 그 특징이 뭐냐? 최후의 심판, 천국의 모습, 삼위일체 그림이 다 있다고요.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려놓고 그걸 상상하는 거에요. 아이고 죽은 자가 솜씨도 좋아. 그런다고 그 사람이 삽니까? 살겠어요? 아니지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미켈란젤로가 마지막 때에 내 모든 작품은 죄입니다. 내 모든 작품. 내가 한 모든 작품은 이것은 조작이고 어리석음입니다. 나 같은 죄에서 나온 죄의 증거들뿐입니다. 주님은 이런 걸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를 없애지 않고 나를 구원하는 방법은 주님한테 없어요. 우리는 뭡니까? 살아있는 내가 주님 덕분으로 살고자 하지요. 벌써 언약적이 아니고 희생물을 통과하지 않고 희생물이 있으면 비켜가는 방법으로 구원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정말 구원받았으면 내 안에 누가 있어야 되요? 희생물이 들어와야지요. 이번에 다섯번째 강의 희생물이었습니다. 그 희생물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그걸 보고 있는 거에요.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성령이 너한테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관심이 너한테 있는 성령에 관심 있어요. 주님께서.


아기 예수를 보고 시므온이 어떤 보이지 않는 관계,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찌릿 관계가 옴으로써 뭐냐 하면 내 자신의 구원 자체가 이것이 내가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데서 오는 그 자유함. 내 구원을 내가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시므온이 좋았던 점은 뭡니까? 자기 구원을 유리쟁반을 한 2m에서 탁 놓을 때 그 쾌감. 와장창 박살날 때의 그 즐거움. 천국에서 돌멩이 날라 올 때 다 깨지는 그 즐거움. 뭔가 깨어져야돼요. 자아가 깨져야돼요. 왜? 자아는 악마를 비추어서 확산시켜나가는 렌즈역할밖에 안되니까. 보이지 않는 영이 보이는 인간의 육체를 통해서 악마의 정신이 온 세상에 누리, 온누리에 퍼져 온누리에.


악이 관여하지요. 죽음이죠.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여기에 뒤에 다 전쟁이 끝났어요. 끝나고 난 뒤에 시체들 있는 전쟁터에 주께서 목격자를 보내셔가지고 완전히 약올리듯이 뛰어다닙니다. 아 이래서 인간들이 죽어야 마땅하구나. 이래서 죽어야 마땅하구나. 그리고 그 중에 누가 포함됩니까? 나도 죽은 자 가운데 하나였구나.


그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이 단어가 중요해요. 죽음에서 부활이 아닙니다. 어디서 부활이냐 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이에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음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말해서 부활되고 난 뒤에 모든 인간들은 다 죽어있는게 맞다 이 말입니다.


개인적인 죽음에서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첫열매로 살아났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지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첫열매”. 약올리는거죠. 죽음의 동기생 다 죽어있는데 인자되신 주님 오셔서 에스겔은 인자가 에스겔이지만. 인자되신 주님이 오셔서 뭘 줘요? 말씀을 줘요. 우리가 원하는걸 안줘요. 우리에게 기도응답을 주는게 아니고 말씀을 줘버린다고요.


그러면 내가 살아나는게 아니고 나는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 나를 통해서 발현해버리죠. 말씀이 살아나기 위해서 나를 매개체로 사용하는 거에요. 숙주로. parasite 기생충. 나를 하나의 기생충으로 하는 거에요. 기생충으로. 주님은 계획이 다 있어요.


그러니까 타인을 볼 때에 그 사람을 보지 말고 덩치를 보지 말고 말씀을 보라니까요. 아 말씀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저렇게 지옥 가도록 하시는구나.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그 사람들도 본인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고백을 그 사람들이 해요.


복음을 실컷 저녁까지 사주고 다 이야기하니까 "참 아름다운 소식, 참 귀한 깊은 진리고 이건 몰랐다. 그런데 안 믿어지는걸 어떻게 하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지." 그게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그게 마땅한 거에요. 그걸 오히려 기뻐해야 돼요.


점심값까지 오늘 24,000원 아 아까워라 이러지 마시고 주께서 나도 옛날에 나도 그렇게 한거에요. 나 자신도. 내가 나를 관리해서 복음을 받아들인게 아니라니까요. 이거는 아기 예수를 보고 편안하다 하는게 이게 내 노력입니까?


예수님보고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예수를 보라. 천사가 와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뻐하는 평화로다 할 때 그 아기 예수 보면서 "주여 봤습니다. 뭐 어쩌라고요?" 이렇게 나온다면 그건 이상한 거에요.


이거였구나!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아기 예수가 아기 예수를 위해서 내가 그 사건에 휘말리게 된 하나의 말씀을 아기 예수에 관련한 말씀을 증거하라고 목격자로서 나를 이 땅에 목동으로 살게 했구나. 그것도 15년 6개월동안. 찬바람 야근까지 해가면서.


한평생 살아가는 모든 것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목격자로 살아온거에요. 목격자로. 주님의 성과를 증거하라고. 우리의 그라운드 존재의 바탕은요 나의 과거가 아니고 과거보다 더 나은 창세전에 말씀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구원받거든요.


창세전에 예정된 자 그리스도의 그냥 예정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된 거에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하나의 퍼즐조각을 하나 우리가 분양받은 겁니다. 나는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조기에 부모 돌아가셔야 되고 이렇게 아파야 되고 애는 셋 낳아야 되고 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게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이 타이밍 그 타이밍이 어느 한순간도 내가 될 수가 없어요. 사막에 보세요. 사막에 있는 모래동굴에 개미가 지나가다 빠질 수밖에 없지요. 블랙홀처럼. 말려들 수밖에 없어요. 친구를 잘 사귀라고 하는데 친구 사귀고 싶은게 아니고 그 친구가 우연히 와가지고 술먹자 해가지고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도박에 빠지잖아요. 이거는 잡아당긴거에요.


다시 말해서 유인할 수 있는 세상과 내 속에 있는 아담의 몸 안에 있는 악마가 집어넣어준 것과 바깥에 형성되어 있는 세상과 죽이 잘 맞아요. 죽이 잘 맞아. 여러분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하면 교인들이 막 아멘! 해요. 은혜 받았다고.


그러니까 내가 잘되야 돼 라는 그 잠복되어 있는 내 생각과 세상 돌아가는 그 모든 것이 죽이 잘 맞아요. 할 수 있다 긍정적 사고방식 희망을 주고 꿈을 주고.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라 하는 그것이 격려가 되고. you raise me up 나를 높은 곳에 세운다는 것. you raise me up~~있지요. 그 노래가 감동이 오고 주께서 내 손 잡아 주시네. 이런 노래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 노래는 좀 그거하다만은 그 노래 말고 희망적인거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가슴에 와닿는다는 말은 어쩌면 우리 속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질식시키고 목 조르고 말씀 위에 우리의 큰 엉덩이 가지고 지금 예수님 죽으라고 밟아놓고 예수님 말씀이 뭐 중요해 내가 중요하지 하고 내가 이렇게 마네킹처럼 버티고 있는 그 순간일 수도 있어요.


자꾸 나한테 좋은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하는 그 자체가 나에게 그 자체가 뭐냐 하면은 사실은 나가 아니고 누구여야 돼요? 아담이거든요. 아담인데 악마는 자꾸 나를 자꾸 부각시키고 있어요. 비언약이. 그런데 언약은 희생물, 어린양 일찍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을 주인공이기 때문에 나 자리에 옛아담 때문에 목숨을 바치고 죽게 된 새아담이 내 자리를 차지하는 겁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 내가 세상 만들지 않았고 네 속에 있는 예수님을 위해서 너를 목격자로 사용한다. 그 이야기가 바로 목격자에요.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목격자. 이걸 목격자인데 성경 누가복음 쭉 보면 이걸 성령 받은 자. 이걸 저는 초과적인 지위, 또는 초과적인 내용. 또는 우리의 직분은 초월적 지위. 포지션.


우리의 자리는 지금 원래 자리는 하늘에 있고 우리는 이 공동묘지에 재방문한거죠. 나의 살던 고향은 이렇게 개판이었다. 이렇게 죽어 마땅했었다. 난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다. 이렇게 다시 한번 웃으면서 회한에 잠기는 시간이죠. 아 이것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셔야 됐구나. 그런 내용이죠.


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님 십자가 부활하고 난 뒤에 뒤돌아보면서 쓴 책이죠. 이러면 화면보는 사람들이 굉장히 어지러운데. 누가 이야기하는데 당신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 중요하지 자꾸 동영상 보는 사람 배려하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배려가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비언약요소의 특징은 뭐냐? 자기 전공을 살려요. 자기 전공을. 마지막에 도망가는 곳이 뭐냐 하면은 자기 전공 분야에 도망가가지고 거기서 자기전문분야적인 자기지식 가지고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나는 믿음은 없어도 농사는 잘 지어 이런거 있잖아요. 자기 농사짓는 사람들.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나는 내가 교회 건성건성 다녀도 내가 공직생활하면서 IMF 위기 때 한국을 살린 사람이라고 이런거요. 자꾸 자기 전공분야를 말해요. 이래도 내가 믿음은 없지만 내가 청소년들을 내가 무려 400명이나 거둬가지고 바른 길로 가게 했다 이런거 있잖아요.


나는 신학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내가 요새는 고아원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보육원 차려가지고 부모가 버린 아이를 내가 벌써 1500명이나 다 자수성가해서 다 잘됐다 이런거 내세우는 이런거요. 그런 보육원하면 구원받습니까?


그 사람들은 뭘 지금 누르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말씀이 없는 거에요. 말씀이 있을려면 내가 죽고 난 뒤에 말씀이 있는데 자꾸 내가 있고 말씀 지킬려고 하니까 살아있는 내가 말씀을 잘 지킬려고 하는 거에요.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잘 지킬려고 하는데 그렇게 지키는건 구약에나. 구약시대도 실패했어요. 구약에도.


말씀 지켜서 말씀 지킨 나를 구원시킬려고 하는 거에요. 나는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를 지켰다. 십자가 피 믿으라는 말을 지켰다. 맨날 나, 이 나를 맨날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예수님의 말씀을 되게 하지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게 아닙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와있거든요. 그게 누가복음에도 나와 있어요. 마태,마가,누가복음,요한복음 네개 다 나와있는 것도 여러가지인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씨 뿌리는 비유라는 겁니다. 갑자기 장담 못하겠다만은 그냥 한번 내질러봅시다.


누가복음 계속 봅시다. 여기에 보면 텔레토비 하나 나옵니다. 텔레토비 나오는데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지요?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15절 봅시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장부터 막 성령 막 나오지요.


원래 성령은 제2의 누가복음이라고 하는 사도행전에 2장에 오순절 정리되어 있는데 누가복음 처음부터 막 성령이 나와요. 이 말은 누가복음 자체가 이미 오순절 성령 받고 난 뒤에 차후적으로 한거에요. 기록하신 겁니다. 목격자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요? 이거 초과적이죠? 사가랴의 솜씨나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성령이 사가랴를 이용한거죠. 뭐대로? 말씀의 목격자. 세상은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것. 하등의 빈틈이 없이.


자, 누가복음 1장 70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말씀하신 바와 그 다음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의 활동이나 성도들의 활동이 어느 하나도 성도들의 활동 저와 여러분의 활동도 말씀 없이 되어진 일은 단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아 이빨이 아프다. 말씀대로 되신 겁니다. 말씀대로. 어느 것 하나. 그 말씀은 뭐냐?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을 사명자로 부름 받음. 내가 구원을 챙겼다가 아니라 구원이 나를 갖고 노신다 이 말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나를 갖고 노는 거에요.


머리가 좀 아프고 기침해가지고 신종 코로나? 신종 코로나 걸려서 죽어도 말씀대로 죽는 거에요. 중국 탓 하지 마세요. 우한 탓 하지 말고 그냥 죽을 때 돼서 죽는 거에요. 모든게. 마스크 쓰지 마라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요. 마스크 쓰는 것도 쓸 때 되서 쓰는 겁니다.


누가복음을 보시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많이 이야기해가지고 다 기억 못할거 같은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절대로 인간은 이 성경말씀은 믿지 못하는 말씀이에요. 이것을 알아서 구원되는 그것을 오히려 거부하는 말씀이 이거에요.


그래야 성령이 오신다는 그 취지가 살게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으면 성령이 왜 왔겠어요. 성령 왔다 이 말은 인간은 이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이 안 되는 존재였다. 꽉 막혔다. 끝났다. 죽었다. 죽어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죽었다 살아난 그 능력을 죽음 안에 갇혀있는 죽음 안에 꽉 막혀있는 그 안에 능력을 줘버리니까 이미 경로가 탈출경로가 확보되었잖아요. 확보된 경로 따라서 성령 와버리니까 그 사람은 탈출된 경로를 발산하면서 뻔뻔스럽게 그걸 자랑질하면서 빠져나온거에요.


그 자랑질이 뭐냐? 나는 십자가로 구원받았다 하고 자랑질하는 거에요. 십자가로 구원받았다. 너한테는 어리석지? 어리석어도 할 수 없고 어쨌든 나는 십자가의 능력이야. 내 능력 아니야. 내 능력은 십자가 앞에서 모두 능력이 아님이 전부다 완전히 다 들통난거에요. 내가 어떤 기도나 헌금이나 어떤 능력도 성경공부한 것도 어떤 것도 십자가 앞에서는 그거는 쨉도 못되고 그 앞에 견줄 수도 없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이 말씀으로 올해도 살아보겠습니다 하는데 올해도 없어요. 이 사건이 끝난다니까요. 내일 또 내일 사건이 뭐가 있는지 몰라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낙담해가지고 오늘은 믿는데요. 오늘 믿는데 내일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다고요.


어떤 정신병자가 말하기를 자꾸 닭이 나를 모이인줄 알고 따라오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니까 당신은 옥수수가 아니고 모이가 아니고 당신은 사람입니다. 됐지요? 예. 나가면서 또다시 병원으로 뛰어들어와요. 왜 뛰어들어옵니까? 벌벌 떨면서. 나는 내가 모이가 아니고 사람인줄 알겠는데 저 닭이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느냐. 아이고 골치야. 아이고 골치야.


주님은 이미 구원됐는데 나도 그걸 인정하겠는데 주님이 안 알아주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골치야. 여전히 인간은 자기의 목격자가 되고 싶어 해요. 주님의 목격자 아니고 나 이렇게 구원받은 자아를 자랑질 목격할라고 남한테 상대적으로 기 안 죽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기 안 죽는 것은 경쟁의식이기 때문에 그러지 마시고 좀 뻔뻔스러워라. 좀 뻔뻔해야돼요. 개뿔도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되게 자유로워. 왜 그런지 모르겠어. 몰라도 돼. 너는. 나는 알지요. 내가 몸이 아프더라도 주의 뜻인 줄 아시고 모든 것이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하나의 절차니까 탈출경로에요. ‘탈출경로’.


북한 있고 남한 있는데 철원에서 폐광을 통해서 사람들이 남자들이 우르르 넘어왔어요. 현빈도 넘어오고 현빈이 중대장에 있던 거기 병사들도 다 넘어오고. 손예진 만나러왔다고요. 서울에 다 모였어. 손예진 회사에 다 모였어.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그 드라마 하고 있잖아요. 다 내려왔어요. 지금 근데 못 가게 됐어요. 들통나가지고. 경찰들이 알아가지고. 조철강도 내려와가지고 조철강이는 몰라도 돼요. 그건 손예진 잡아죽일라고. 잡아죽이는게 아니고 손예진 체포해가지고 드라마 이야기 왜 하고 있나 갑자기. 현빈 집안을 망하게 할려고 하는.


내려오는 탈출경로가 있어요. ‘탈출경로’. 우리는 하나의 경로를 통과한 주님의 경로를 통과하는 경로의 성사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주님의 사인, 주님의 성공담을 적어놓은 하나의 사례가 우리 하나하나이다 이 말이죠. 참 예는 쉽다만은. 이게 누가복음이에요.


이미 공동묘지 됐는데 자기 백성 보내가지고 약올릴라고 신나게 한번 마당놀이 한번 해 보는데~ 한번 놀아보는데~ 하고 장구치고 노는 거에요. 실컷. 십자가 노래 부르면서 찬미하면서 노는 거에요. 왜? 우리는 이미 누가복음 십자가 이후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막상 누가복음에 등장한 인물들은 발발발 떨었지요. 왜냐하면 여기에 보면 아기를 못 낳아요. 아기를 못 낳는데 천사가 와서 여기 천사 가브리엘입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와가지고 그 사가랴에게 네가 자식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는 거에요. 타이밍이죠.


여기 13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있는데 엘리사벳이 누구의 아내냐 하면 사가랴의 아내입니다. 엘리사벳. 등장인물 사가랴 그다음에 부인의 이름은 엘리사벳 그리고 두 사람이 애기를 못 낳거든요. 애기를 못 낳는데 애 주면서도 잠시 막간을 통해서 어떤 애기를 낳을 것인가를 중간에 개입을 함으로서 이 세례요한 이 애기가 단순히 보통 여느집의 부모가 자식 낳는 그 자식이 아니라는 거에요.


말씀에 의해서 예언자의 입에서 성취하기 위해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만 말씀대로 된 것이 아니고 세례요한 낳기 위해서 애기 못 낳는 엘리사벳도 말씀에 그 하나님의 드라마에 조연으로 이미 캐스팅된 거에요.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17절에 보면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하지만 막상 이 이야기를 듣는 사가랴나 엘리사벳의 입장에서는 그건 됐고 모르겠고 무조건 아들 낳는다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아들 낳다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겠지요.


그러나 여기에 엘리야의 심정 이것은 부모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고요. 어린 세례요한 불러놓고 너는 엘리야다 이렇게 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엘리아의 심령이 되게 하실거에요. 되게 하시는데 부모한테는 섭섭해서 그러는지 부모한테는 네가 낳은 자식이 장차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미리 이야기를 안 해주죠. 꿈속에라도 이야기 안해요. 쟁반에 목 따여가지고 죽는다는 것.


자, 세례요한이 왜 처참하게 죽었을까요? 비언약에 고개 숙일 군번이 아니라는 사실. 군번이 아니다. 비언약에 고개 숙일 그런 시절이 아니다. 이미 그 시절은 지나간 시절이에요. 너무 미리 앞장선게 문제에요. 이 세상에 없는 세상을 만든 거에요. 이 세상에 없는 세상을.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이 세상에 없는 세상을. 세례요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여기에다가 그냥 드론 띄우듯이 띄워버린거에요. 우리를.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지금 이 이야기를 안 믿는 사람 들으면요 "저것들 우낀다. 자기들끼리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다." 맞아요. 그들이 그렇게 우리를 평한다면 내가 늘 우리 자신을 그렇게 평할 수 있어요. 우리는 다 아니까. 육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양쪽이 아니까. 우리 자신도 우리가 어느 정도 미쳤다는 것, 미쳐도 초과적으로 미쳤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고 보니까 그 이야기를 마무리를 안했네. 그 교회에 계약직 전도사 강도사 할 때 나는 아닌데 100명 안채우면 계약 안된다 할 때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고개 숙여야 돼요? 예 100명 채우겠습니다 이렇게 해야됩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점점점 하고 하는거에요. 그러면 목사가 불러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지구는 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한 이야기 있잖아요. 그래도 아직도 지구는 돈다. 그런 얘기 안했다는 유력한 설이 있지만.


고개 숙였잖아요. 갈릴레오가. 숙였지요. 예 잘못되었습니다. 태양이 중심이 아니고 지구가 중심이다 해놓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 궁시렁 궁시렁 거렸던거죠. 그게 그냥 우스개 소리가 아니고 오늘날 교계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바로 목사들의 설교를 그런 쪽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려야 돼요. 목사는 첫째도 교회부흥 둘째도 교회부흥 셋째도 교회부흥이에요. 왜냐면 자기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주의 종이라는 것을 확인길은 뭐밖에 없다? 내가 담당한 교회가 커질 때 내가 주의 종이라고 확인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십자가가 없어요. 십자가 알았으면 목사 짤렸지요. 짤리거나 자기가 따로 노회 만들거나 뭐 하겠지요. 십자가 모릅니다. 자기 모르니까 조희팔이거든요. 자기가 모르니까 사기꾼, 교인들 다 사기꾼 만드는거에요.


그렇게 하시는 것도 누가 하셨다? 주께서 하시는 거에요. 왜? 그거 아니면 대안이 없기 때문에. 천장에다가 천국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어요. 꽉 막혀 있으니까 다른 무슨 어떤 몸부림 쳐봐야죠. 몸부림 치는게 그거에요.


악마한테 복종하는 식으로 예수님한테 복종하는 거에요. 주님한테 복종하는 것은 뭐냐? 사전에 나한테 올 재앙을 미리 아부해가지고 대비하겠다는 거에요. 주님이 좋은게 아니에요. 내가 나 안 다치게 하겠다는 그런 것을 교회에서 배우는 겁니다. "아이고 헌금 안내면 우리애들 사고나서 다치는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렇지 또 헌금 한번 안냈다고 신종 코로나에 걸리게 하다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아기 예수보고 이미 완료가 된 사람은 더 쎈 놈 없나? 더 쎈 놈. 아이고 시시하게 이런거 말고 더 쎈 시험 없어? 쎈 유혹 없습니까? 이렇게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살아야 돼요. 여기에 19절에 보면 가브리엘이 무슨 소식?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은 여기서 좋은 소식을 사가랴가 오해했지요. 사가랴는 좋은 소식을 없던 아들 생겼다고 본거죠.


그러니까 사가랴가 뭘 모르느냐 하면은 없던 말씀이 새로 생겼다는 생각은 못하고 말씀이 아니고 내 새끼 생긴 거에요. 내 자식 생긴 거에요. 아들을 원했더니만 아들이 생겼고 딸을 원했더니만 딸이 생기고 백퍼 백퍼 100%. 아이고 우리 기도하는 권사님 용하다 하거든요.


그런데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네가 그 다음에 뭡니까? “믿지 아니함이라”. 자, 이제 누가복음 아까 서론 이야기한 것이 확실해 졌지요? 지금 사가랴는 자기 집안 존재 생각하는 거에요. 꼭 아브라함 같애. 자기 존재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들 줬다 하니까 신난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아들 준 게 아니고 말씀을 줬는데 일종의 벌칙을 받은 거죠. 자, 벌칙을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없는데 구원받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거기에 누가 개입한다? 바로 믿게 하시는 성령이 개입하게 되면 그래서 구원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령은 항상 제 능력으로는 안됩니다라는 것을 계속 되풀이해서 반복시키는 겁니다. 되풀이해서. 말로만 나 안됩니다. 안됩니다. 하면 주님께서 물어요. 네가 그냥 나한테 아부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진짜 네가 뭐가 안 되는지 알기는 아냐?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자꾸 흉내내지 말라는 거에요.


나는 부인한다. 나는 모자란다. 자꾸 흉내 내지 마세요.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낙심하고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흔들리고 말이 안돼. 늘 흔들리고. 늘 흔들리고 늘 주님보다 늘 돈 좋아하고 하늘나라보다 이 땅에서 성공했다는 그것 티낼려고 늘 항상 자기 행동을 예민하게 가져가고. 늘 always 항상이죠.


그때마다 난데없이 주께서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 거죠. 내가 말씀 지키는게 아니고 말씀이 나를 데리고 다닌다는 사실. 그래서 이제 벙어리가 됐습니다. 되니까 친척들이 와가지고 아~~좋은 이름 있잖아요. 아까 이름 워라고 했습니까? 다온이? 이름 주다온하고 고상한 이름 있잖아요. 했는데 안돼요. 이미 이름은 정해졌습니다. 요한이라고. 석판에다가 썼지요. 말은 못하고 쓴 거에요.


그래 이런 과정이 뭐냐 하면은 성령이라는 것은 우리보고 갖고 놀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성령은 우리의 구원받은 자의 죄를 들추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격이 된다는 것은 자기 성과를 버린다는 것은 가만히 있다고 버려지는게 아니고 항상 우리를 지적을 해줘야 내가 누구인지를 우리 예상을 파악을 해줘야 자기 성과를 자랑질을 안하게 되지요. 지식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일은 까불락 거리는 우리를 망가트리는 겁니다.


중국에서 교회 십자가 막 부수고 하는 그런 동영상 같은거 막 뉴스에 나오잖아요. 중국이 기독교를 핍박한다고 하지만 중국에 있던 사람은 말해요. 왜 중국에서 십자가를 왜 그렇게 공개적으로 부수느냐? 그 교회가 많이 까불었답니다.


교회 까부는건 뭣땜에 까불겠어요? 교인수 많고 헌금 많다고 하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중국 중화민국공화국을 통해서 박살내버린 거에요. 교회가 세력화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요. 까불어요. 자꾸 까불어요. 교회가 복음을 가진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우리교회 교인수 많다. 늘어났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까부는 겁니다.


교회 전체가 하나의 개인처럼 움직이죠. 우리 개인도 언제 까붑니까? 맨날 망가지고 흔들릴때 까불던가요? 좀 편안할 때 무탈할 때 까불던가요? 뭐 까불 여유가 없나? 성령께서 얼마나 잘 다루시는지 까불 건덕지가 없어요. 까불 건덕지가. 수련회 참석하는데 차 고장나버리고. 까불 건덕지가 없지요.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을 이렇게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딱딱 안된다는 것을 이렇게 알려주시니 참 복되어라. 이 뻔뻔한 자들이여. 천사가 와서 자꾸 천사가 개입되요. 그러니까 인간은 들러리고 계속 천사가 개입되는데 천사의 주특기는 냉혹, 냉혹한 킬러. 냉혹한 킬러.


저는 그걸 뭐냐 하면은 등에 칼을 맨 사무라이. 얼굴에 마스크 쓴 사무라이 있잖아요. 일본 사무라이 알지요? 칼 해가지고 닥치는대로. 신발 게다 신고 엄지 발가락만 딱 나온 게다 신고 다니면서 밤중에 그것도 달이 훤하게 뜬 밤중에 지붕마다 돌아다니면서 애들 다 죽여버리는 거에요.


유월절 애들 죽이는 그거거든요. 그게 천사가 죽였어요 천사가. 천사가 죽였다고요. 천사가 사무라이 칼 긴 칼 들고 죽일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르고 야곱은 이길라고 들이대니까 나중에 천사가 사무라이 칼이 있었던 모양이죠. 살려달라고. 이길 수 없는 분을 이겼사오니 내 처지가 이제는 작살났습니다.


이게 정말 야곱의 남들이 모르는 불신자가 모르는 초과적인 새로운 현실에 눈이 떠버린거에요. 현실에. 그게 바로 뭐냐 하면은 바로 종을 편안히 놓게 한거에요. 아기 예수가 예수가 왜 태어났느냐? 아 이 세상은 반쪽 세상일 뿐이다. 반을 놓친 거에요. 이제 시므온은 반을 마저 본거에요. 


이미 끝나고 난 뒤의 그 다음부터 구원될 자 지옥 갈 자를 아기 예수가 일방적으로 정해버린다는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으니까 그냥 구원받은 거에요. 그냥 구원받은 것. 그냥 천국가게 된 거에요. 그냥. 그러니 이 행운을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네 이거. 미쳤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


복권이야 긁는 수고라도 하지 긁는 수고도 안했어. 토요일날 보는 수고도 안했어. 그냥 합격이에요 그냥 합격. 난데없이 이유도 모르고 그냥 구원받은 거에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지금 나한테만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약속대로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는게 아니고 그 주님의 구원에 말씀에 역할로 사명자로 부름을 받은 거에요 우리가. 사명이 내 존재보다 우선이 된다 이 말입니다. 30절 봅시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인사를 뭐라고 했습니까?


가브리엘 와가지고 인사를 하지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하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이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왜 주님이 나와 같이 있느냐 하니까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또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주님이여 저는 기도 열심히 했는데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왜 저한테 지난 밤중에 철야할 때 새벽 2시 46분에 왜 이런 일이 나에게는 안 일어납니까? 너무 불공평합니다.


엘리사벳은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마리아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왜 나에게는 천사를 안보여 주십니까? 이것도 입 대빨 튀어나올 일이야. 누구는 보여주고 누구는 안 보여주고. 그럼 네가 한번 불임여성 한번 되어 볼래?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정도의 애기 낳고 이정도가 아닙니다. 기쁨이요 살아있는 내가 추가적으로 더 플러스 되는게 이게 기쁨입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는게 기쁨입니까? 어느게 기쁨이 더 큽니까? 죽은 자가 살아난게 기쁨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죄인된게 더 기뻐요. 내가 점점 더 의로워지는게 기쁜게 아니고 점점 더 죄인되는게 더 기뻐한다니까요. 왜? 그만큼 사함받은게 많으니까. 고마움의 고마움의 떡칠을 하는 거에요. 추가 고마움의 고마움. 뭐든지 감사와 고마움부터 시작해서 항상 끝도 감사와 고마움. 여러분을 만난 것도 감사하고 고마움이에요. 다음에 헤어지더라도 할 수 없어요.


아까 누가 저보고 그런 이야기했어요. 요새 목사님 설교 점점 이별할라고 하는데. 나는 항상 나와 작별해야 돼요. 작별이 안 되면 말씀 쪽으로 안 넘어가요. 안녕~~빠빠이~잘가~ 항상 나한테 작별인사를 하세요. 나한테 작별인사.


그것도 잘난 나하고 작별하지 말고 못난 나와 작별하고. 잘난 나는 작별이 잘 안돼. 못난 나와 항상 내가 너무나 못났거든 작별을 하세요. 안녕~빠빠이~see you later. 다음에 보자 이런 식으로 자기하고 이별하세요. 헤어지세요. 같이 놀 상대가 안됩니다.


그런데 다음날 되면 또 생기거든. 그럼 그날 저녁에 또 작별해야죠. 말씀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자꾸 내가 등장하는 거에요. 멋있는 나. 잘 될 수 있는 나. 여기 마리아는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 안에 누가 중요하다? 천사가 와서 냉혹한 천사가 말하기를 너 말고 네 안에 있는 예수. 너는 보조역할. 예수님 보조역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수발 든 마리아 같은 신세인 것을 이 기적을 성령을 통해서 얻어진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주의 불임을 받고 주의 사명자가 된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음을 또한 감사합니다. 세상에 악한 영들이 고개 숙이라 할 때에 저희들 그러한 소리마저도 공동묘지에서 나오는 죽음의 소리인 것을 알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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