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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5 23:50:00 조회 : 187         
멈춤 누가복음 3:16 20091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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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IP:175.♡.96.96) 20-09-22 11:51 
강남-누가복음 3장 16절 (멈춤) 200915a-이근호 목사



오늘 누가복음 3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 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라고 되어있지요.


왜 세례 요한은 일반인의 범주에 못 들어가는가? 그것부터 생각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오는 것은 사람들이 안 기다리고 왜 세례 요한이 오는 것은 사람들이 기다리는가. 처음부터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실력들이 있으니까.


사람의 범주, 사람의 범주는 무슨 범주냐 하면은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다의 범주에요. 있음과 있음의 범주에요. 이것은 일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그냥 살면 되지 않느냐. 왜 또 누구를 기다리느냐?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은 있음의 범주에서 없고 이것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없음의 범주에 해당돼요. ‘없음의 범주’.


그렇고 그런 인간들은 우리는 안 기다리고 싶다. 우리의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분을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 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늘과 땅, 인간들 세계에서 안 계신 분이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따로 계시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보여준다는 것은 이 인간 범주에 없음이 되는 분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는 개념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요한에 대해서 혹 그리스도이신가라고 해서 이 세례 요한을 없음의 범주 안에는 누구도 같은 묶음이 되느냐 하면은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과 같은 영역의 같은 집합으로 묶을 수가 있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례 요한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 말을 듣고 상당히 당황했어요. 왜냐하면은 자기들은 있음의 범주에 있잖아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 것이고 지금은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그분이 우리 속에 아닌 다른 엉뚱한 분을 보내셔서 선지자로 보내게 되면 우리 있음들은 현재도 있지만 나중에 구원받는 자로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그들이 뭘 오해했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 없음의 세계에서 온 세례 요한이 있음의 세계에 들어와버리면 사람의 있다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이게 없음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라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기본이 뭐냐 하면은 영구 없다 입니다. ‘나’가 내가 여기 없는 거에요.


만약에 내가 있어버리면 여기 있는 나를 잘 살리기 위해서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돼요. 그러면 신앙이 있으나마나 소용없습니다. 온갖 세상 걱정과 근심 전부다 자기가 건사를 해야 돼요. 관리 대상이 되어버려요.


그 목적은 뭐냐? 살아야 된다. 무조건 살아야 된다에요. 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아남아야 된다.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무슨 그런 신앙이 있어요. 그런 신앙들은 여기 있음, 일반이죠. 일반인 자기들끼리 얼굴 주고받으면서 고대했던 신앙들이에요.


하늘에서 주신 신앙이 아니고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면서 이게 신앙이겠지. 그럼 그게 신앙이지. 자기들끼리 납득이 되고 이해하는 수준 하에  신앙이 뭐냐? 여기 있는 나를 더 확실하게 있게 만드는 것. 죽어서도 있게 만드는 것. 그걸 사람들은 신앙이라고 하고 세례 요한은 그걸 초를 쳐버립니다.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있음의 인간의 있다라는 세계와 없다고 여기는 새로운 세계 하늘나라와 사이에는 뭐가 성경전체에 뭐가 경계선을 쳤느냐 하면은 이겁니다. ‘밤’. 영어로 하면 ‘night’, 밤이에요. 여기 창세기 32장에 야곱에게 천사가 언제 나타나죠? 대낮에 나타났습니까? 밤에 나타나죠.


마태복음 27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이 어둠으로 인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 됐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완전히 온 천지가 깜깜했어요. 이 밤의 의미는 뭐냐? 밤의 의미는 이걸 아셔야 돼요. 밤은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고통으로 짓누른다. 이게 밤의 의미입니다.


밤에 그냥 눈감고 자라 이 말이죠. 만약에 밤에 잠 안 오면 그 밤시간이 press가 대단한 press입니다. 왜 밤에 시간이 그리 안 가는지. 좀 됐다 싶어서 시계 보게 되면 30분 지나고. 좀 해보면 밤 10시 반. 실컷 잤다 싶으면 0시 25분. 이제 새벽이라고 일어나 보면 새벽 2시반. 새벽 두시반에 일어나서 운동할 일 있습니까?


밤에는 깨어있는 사람에게 고문이고 고통이에요. 이게 지옥입니다. 지옥은 더욱더 그 인간성을 팔팔하게 살게 만들어요. 아 이거는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들어요. 지상에서 부자로 살던 사람이 앞집에는 거지 나사로고 자기는 부자다. 부자가 이렇게 죽으면 좀 성질 좀 죽으면 좋겠는데 이 땅에 이 생에 가지고 있던 성질 그대로 다 노출시킵니다.


깨어있기에 고통스러운 거에요. 밤은 그런 겁니다. 밤은 그런 거에요. 밤과 함께 그냥 아무 소리 없이 눈 감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는 예수님을 아주 하찮게 봤던 사람이 지옥 가서는 그 낮에 봤던 그 주님이 아니고 밤을 통과한 주님을 봤을 때 그 주님은 우리가 함부로 상대할 분이 아니죠.


따라서 뭐냐 하면은 뭐가 원망스러우냐 하면은 이 밤을 통해서 그걸 느끼는데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 이스라엘 처음 시작할 때도 밤이에요. 유월절 밤이거든요. 살아있음이 원망스럽게 만들어줄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운 짓이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일반해석은 뭐냐? 어쨌든 살려고 하지요. 그게 도끼로 제 발등 찍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산 게 아니고 죽어있구나. 예수님만 살아있으면 되지, 하찮은 내가 왜 살아야 돼? 이렇게 마음먹으면 되는데 저 예수님 이용해가지고 이왕 살아온 것 악착같이 더 살아가겠다고 살아간다면 그 성깔을 지옥에서도 생생하게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또는 세례 요한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성도에 대해서 어떤 변화를 주느냐 하면은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로 전환시켜 버립니다. 네가 살아있다는 그 자의식은 거의 소멸하거나 거의 느끼지를 못하고 턱하니 내 앞에서 주님의 그 등치가 주님이, 또는 야곱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크게 느껴지는 거에요.


크게 느껴지고 나는 작게 느껴지고. 이게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사랑이 그런 거 아닙니까.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요. 자기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게 사랑이거든요.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왜? small. 왜 작아지는가. 그대 앞에 서면 왜 작아지는가. 남자 신랑 키가 160. 신부키가 박찬순처럼 190. 그래도 사랑하게 되면 여자는 160한테 매미처럼 매달려가지고 나는 그대 앞에 서면 왜 작아지는가.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대만 크게 있다면 그대만 존재한다면 나는 그대 안에서 나는 존재 안 해도 괜찮아 이거거든요. 내 걱정하지마. 당신만 생각해. 그게 내 소원이야. 한때 그런 마음 있었지요. 한때. 처음 죽고 못 살아 할 때 있었지요. 나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지금은 이렇게 나오지만.


그래서 이 없음의 세계와 있음의 만남에서 있음의 세계를 천국 보내주려면 있음을 뭘로 바꾸느냐? 없음으로 바꿔줘서 구원하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그 야곱 이야기에요. 야곱이라는 이름은 없어요. 이제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 생각하지 말고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러면 있음에서 없음으로 어떻게 바뀌는가가 중요해요. 어떻게 바뀌는가. 여기서 오늘 제목 나갑니다. ‘멈춤’이에요. 좀 어려운 한자말로 할까요? 정지하는 것, stop 여기까지 stop 한다. 그게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는 이 앞에까지. 더 나가지마. 자꾸 나가면 있음이 나가기 때문에 내가 허락 안 해.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지금 터널공사중이니까 차들 stop 하는 것처럼. 터널 앞에. 신종코로나19 앞에서 stop, 차들 전부 stop 시키는 거에요. 죽은 자로 전환 시키는 것, 성령을 통과해서 죽은 자로 전환시키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제목은 ‘멈춤’. 다른 말로 하면 ‘정지’. ‘stop’. 여기까지 stop이에요.


살아있는 것은 여기까지만 해라. 그 다음부터 없음으로 하는 것은 그것은 없음 하는 것은 네가 나대서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부터는 천사가 하시든지 성령이 하시든지 전문가가 여기서 너한테 관여할 것이다. 전문가가. 공항검색대로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잖아요. 딱 스탑시키고 그 다음부터는 힘 빼시고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통과시키든지 말든지 우리가 처리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있는 사람은 이 스탑하기 이전에 있는 사람은 본인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못 버리느냐 하면은 현재 있는 나를 천국 넘어서도 이대로 있는 내가 되고 싶은 그런 욕심이 있지요. 이것은 성경에서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이미 추방했기 때문에 추방 취지하고 충돌이 돼요. ‘충돌’.


충돌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리면 여기에 오늘 누가복음 3장 19절부터 보면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자기 배다른 남동생 부인하고 혼인했지요.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이게 뭐냐 하면은 충돌이에요. 무슨 충돌이냐 하면 헤롯은 힘과 힘의 충돌로 여겼던 겁니다. 힘에 대해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꽉 쥐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힘과 하늘의 권세의 충돌로 본겁니다.


있음에서 오는 힘과 없음에서 오는 힘의 마주침, 마추짐이 인간들이 이 땅에서 힘 있는 자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승리는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의 칼날을 가지고 악한 놈들을 전부다 쳐부셔서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어떤 실적 같은 것을 은근히 원하거든요. 이 땅에서 모든 절들은 다 불타버려라.


모든 절에 있는 불상들은 시한폭탄해서 다 터트려 버리고 천주교도 다 없애버리고. 마리아상부터 해가지고. 오직 교회만 되기를.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에요. 그걸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보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여기 예배당이 있는데 앞에 큰 강남의 봉은사라고 절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있는 교회가 새벽마다 새벽기도 해가지고 어느날 봉은사가 불나가지고 없어질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걸로 이해, 그런 식으로 이해하겠지요. 여리고성의 무너짐으로. 안 그러면 아파트 전체를 손으로 둘러가지고 가나안 정복사를 새로 쓴다든지. 그렇게 그런 승리를 원하는데 그건 바로 헤롯이 헤롯세계에서 하는 짓이에요. 헤롯세계.


그러니까 이게 교회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그것은 제가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교회가 생산적이어야 하는 시장경제논리에 같이 녹아졌기 때문에 다른 종교단체도 커지지만 우리 기독교도 커져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것가지고 선교의 승부를 걸려고 해요.


없어도 감사하는 걸로 승부로 거는 것이 아니고 거지 되도 고맙습니다로 승부 거는게 아니고 뭔가 손에 쥐어야 승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헤롯과 그리고 세례 요한을 기다렸던 모든 사람들이. 야 이제 선지자 왔으니까 이제 헤롯 죽었어 너는. 로마 너는 작살났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이런 것들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거에요. 근원적으로 있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죠.


그러면 있음은 어디서 성립되는가? 성령 안에서 스탑이 되야 돼요. 멈춤이 되야 돼요.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16절에 보면 성령과 뭐로써 오십니까? 불로써 세례 주죠. 세례는 통과. 터널같은 것. 살아서 들어가서 죽어서 나오는 거에요. 살아서 나갈 때는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통과하고 난 뒤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는 내 주인공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채 나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구약에서는 밤으로 되어있지요. 신약에 베드로전서에 보면 1장 3절인가에 피뿌림으로 되어 있어요. 뿌리는 거에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나와요. 피뿌림을 얻기 위해서 피를 뿌리는 거에요. 자, 피뿌림이 되게 되면 이거는 여러분 쉽습니다.


피를 뿌리게 되면 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있음은 피만 있고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 있느냐? 없지요. 피뿌림 앞에 죽었으니까 없는 거에요. 그런데 피 뿌리게 되면 거기에 뭐가 등장하게 되느냐 하면은 인간은 없는데 뭐가 드러나느냐 죄가 드러나는 거에요. 죄가 드러나요.


피뿌림으로 용서함 받는 게 아니에요. 피뿌림으로 용서함 받는 게 아니고 피뿌림으로 말미암아 죄와 연계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피하고 죄하고 연계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은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주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하신 일의 반복이 그게 마감이에요. 끝이에요. 십자가가 반복되면 돼요.


피 할 때 나오는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죄인에게 피뿌림을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에요. 나의 의는 있어요? 나의 의는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없으니까 나의 의가 있을 리가 없지요. 그냥 의죠 ‘의’. 의가 등장하는 거에요. 의가. 피뿌림으로 죄 안에서 의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되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입니다. 이 땅에서의 언약의 실체는 피와 연계되어 있는 죄, 이렇게 드러나는 겁니다. 피와 죄.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스탑시키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죄로 바꿔 버려요. 자기 백성을 죄로 바꾼다고요.


구체적으로 말로 이렇게 설명하기보다는 창세기 32장 한번 보겠습니다. 창세기 32장 26절에 보게 되면 야곱과 하나님이 만나는 대목이에요.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야곱에게 뭘 주느냐? 언약을 줬잖아요. 언약을 주는데 언약을 주고 왜 또 찾아오는가? 언약을 던져준 분이 알아서 완성을 해요. 던진 분이 완성을 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도마고 주님은 쉐프가 되는 거에요. 그럼 주님께서 뭘 하느냐? 도마 위에 고등어를 하나 던집니다. 도마는 그냥 가만 있을 뿐인데 뭐가 자꾸 치는 거에요. 탁탁 치는데 쉐프는 아 오늘 고등어찌개 맛있겠다 하면서 손질하면서 꼬리 쳐내고 지느러미 쳐내고 도마는 퉁탕퉁탕. 주님이 가져온 고등어를 주님이 손질하는 거에요. 어머니는 고등어가 싫다고 하셨어 뭐 그런 거 있습니까? 짜장면이 싫다고 했지.


야곱의 몸을 도마로 사용해가지고 본인이 던진 그 고등어 언약을 손질을 누가 하느냐? 언약 손질을 하나님이 나서서 하는 거에요. 이게 야곱이 그 점에서 몰랐던 모양이죠. 창세기 28장에 보면 나오는데 야곱이 잠을 자는데 돌 위에 돌베개 잠을 잤어요. 돌베개. 야곱의 돌베개 저 봤어요. 안 믿어요. 안 믿는데 무조건 돌베개라고 갖다놨으니까 사진 찍고 했는데 이스라엘에 가서. 야곱이 돌베개 잠을 잤다 이 말이죠. 여기서 어렵습니다.


언제? 낮이 아니고 밤에. ‘밤에’에요. 항상 밤은 뭐하는 거라고요? 중지시킵니다. 스탑시켜요. 있음은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없음의 소관이다. 있음은 여기까지만 해. 밤이 됐는데 거기서 뭘 하느냐 거기서 꿈을 꿔요. 꿈을 꾸는 거에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꿈이라고 하는 것의 특징은 본인이 거기에 본인의 저의적인 의도가 개입할 수 없는 낯선 현실이라는 겁니다.


꿈속에 현실은 펼쳐지는데 그 현실이 드라마가 시작부터 중간 마지막까지 어떤 식으로 그 꿈을 꾸는 당사자가 개입의 여지가 없어요.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요셉입니다. 요셉. 그러니까 그 요셉의 운명도 일대기도 본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있음에도 뭐로 바꿉니까? 없음이 있음을 막아놔야 되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가 거울 앞에 보면 우리가 있잖아요. 있는데 거울 앞에 우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거울 앞에 내 모습을 잘 비추어봤나? 네 잘 비춰봤습니다. 내가 너를 있어도 없는 자라 할게. 이렇게 돼요. 왜? 도마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오는데 꿈에 뭐가 바빠. 뭐가 바쁘냐 하면은 그 사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굉장히 자기들끼리 바빠요. 천사는 누구 말 듣습니까? 야곱 말 안 듣지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죠.


어제 밤에 11시 넘어서 우리 동네 그렇게 요란스럽고 바빠요. 우리 동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무려 6차선이에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6차선.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노태우가 대통령할 때 닦아놓은 길이기 때문에. 노태우 생가가 거기 있거든요. 6차선이에요. 6차선에 화요일날 되면 오토바이 이 차량들이 윙윙~~ 자기들끼리 왔다갔다 하는 거에요.


꼭 야곱의 사다리같애. 나는 잠자고 있는데 저들은 잠도 안자요. 분주해요. 굉장히 분주하다고요. 내가 거기 끼어들면 안되지요. 그냥 가만 있어야 돼요. 가만 있으면 그 오토바이들이 시끄럽게 한 것처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그것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뭔가 분주해요. 뭘 이루느냐?


나중에 이제 꿈에 이야기하는데 내가 너한테 준 언약을 내가 다 마무리 짓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해버립니다. 야곱에게. 야곱은 오해해가지고 자기 복이 자기 소유화될 수 있는 복인 줄 알았어요. 이게 복은 수혜자를 없애버립니다. 죽여버려요. 복은 수혜자가 복 스스로 수혜자를 만들지 우리보고 복을 갖고 있으란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시 복은 오게 되면 내가 복 받을 사람이라는 자체가 이게 날라가버려요. 복은 누가 받는가? 복은 주님이 복을 받아요. 주님이 복 주고 주님이 복 받는 하나님이 복 받는 거에요. 우리는 거기서 빠져야 돼요. 너는 빠져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언약에 개입한 자만 복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성취하는 거기에 개입한 자만 복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자기 이름이 날라간 사람이에요. 나의 영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내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사람. 주 안에 있는 사람. 주안이 인천 근처에 있지요? 주 안에 있는 사람만 복을 받아요. 주 이름 안에 있는 사람만 복 받는다 이 말이죠.


내가 평생에 내 일기장 썼다고 복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쓴 적도 없는 주님의 일기장, 생명책에 있는 자만 복 받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항상 주님의 복에 주님의 일관성이 있는 복의 수혜자 작업에 누가 방해자가 되겠어요? “복 주세요!” 하는 이런 인간들이 방해자 되는 거에요. 기도했으니까 복 주세요. 헌금 했으니까 복 주세요 이런 인간이 방해가 되는 거에요. 저 인간 빼라. 꼴보기 싫다 빼라. 죽여버려. 빼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복의 방해물이 되니까.


복은 복 받을 자에게만 주는 거에요. 복은 누구한테 오는가? 율법에 의하면 복은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는 자, 다시 말해서 의로운 자에게만 오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뭡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지요. 게임 끝났지요. 없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할 때는요 복 받을 생각하지마라 천국 갈 생각하지마라. 너는 해당사항이 안돼. 너는 천국에 갈 인간도 아니고 복은 더더구나 받을 위인도 아니고 그냥 너 하는 행세 있잖아 있음이 있음을 걱정하는 그것. 그대로 그 성질 그대로 살려서 밤의 세계, 밤이 얼마나 긴지 혹독하게 한번 체험해봐.


밤 되거든 성냥개비 눈에 집어넣어서 눈 감지도 못하고 눈 부릅 뜬 채 긴긴 밤을 영원토록 한번 보내봐. 고통은 바로 인간이 눈 감지 못하는 것, 안 죽는게 고통인줄 네가 알아야 된다. 죽음은 되는데 자살은 영동대교 자살은 되는데 죽어도 물에 빠져도 안 죽어. 이게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이게 얼마나 큰 불행이고 비극이에요.


괴로우면 그냥 죽으면 자살하면 좋은 방편 마지막 카드가 있잖아요. 마지막 카드가. 괴로우면 콱 죽으면 되잖아요. 가래 뱉듯이 콱 죽으면 되는데 이게 죽어도 살려내는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이게. 환장합니다. 살려내는데서 환장해요. 못 죽게 만드는데 환장한다고요.


잠은 자는데 아침 7시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해서 직장 퇴근해서 좀 잘려고 하는데 7개월 된 애가 젖 달라고 시계도 못 봐. 새벽 2시반에 젖 달라고 깨가지고 온 동네 아파트 다 떠나라고 울 때 정말 성질 급한 사람은 아파트 창문 열어놓고 애 집어 던져버려. 차마 자식이라서 못 던지지. 남 애 같으면 집어던집니다. 남의 애 같으면. 천하의 지금까지 날 건드린 위인이 없었다. 그런데 7개월 네가 나를 건드렸다. 그래서 애 낳아봐야 인간 된다니까.


세상만사가 잠도 못 자게 만들지요. 잠도 내 맘대로 못자요. 잠은 좀 자야 되지 않습니까 제발. 다른 건 몰라도 잠이라도 좀 자야 내일 일이라도 하지. 잠도 못자게 만들어요. 깨가지고 성질부리면서 애 좀 어떻게 해봐라. 네가 해라! 나 혼자 낳았어? 너도 같이 낳았지. 이렇게 해가지고 일주일동안 말 안하고.


바로 이 모든 것이 있음에 대해서 감당을 못해서 그래요. 있음에 대해서 감당을 못해요. 있는 게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게 원망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은 욥이에요. 욥은 자기가 태어나서 사는 걸 후회했습니다. 내가 이럴려고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해답을 좀 이야기 해보세요. 지금 왜, WHY 무엇 때문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러한 고통을 굳이 나같은 걸 뭘 밟을게 있다고 왜 저를 밟습니까 주님.


옆에 친구 셋 와가지고 야 그러지 말고 회개해봐라. 너 뭐 잘못한 거 있잖아. 곰곰이 생각해봐 잘못한 거 있어. 욥이 “너 주둥이 다물어라! 네가 내 고통을 알아?! 어줍잖게 아마추어가 프로한테 네가 내 고통을 알아? 아이고 잘났다 그래. 너 입 다물고 있어. 나는 하나님하고 이야기할게 너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여 왜 저한테 이런 고통을 줍니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라고 언급하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지만 모든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있음에 있어요. 있음. 있으니까 천국 가고 싶고 지옥 안가고 싶은 거에요. 그게 얼마나 일방적인 터무니없는 그게 망상인지를 있는 나를 본인이 감당을 못해. 본인이 감당을 못해. 처리가 안 되고. 분리수거 할 수도 없고. 내가 나를 있게 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게 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고맙게도 야곱한테는 야곱이 찍 날아가 버립니다. 세상에 얼마나 감사한지. 야곱 본인이 사라지는 게 야곱이 받은 복이에요. 여기서 유명한 말 영구 없다 에요. 영구 없~다. 내가 여기 내가 없는 거에요. 내가 여기. 나는 없고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나는 있긴 있는데 그리스도 밑에 뭐냐? 도마에요 도마. 도마 알지요? ‘도마’.


도마 위에 뭐가 얹어있습니까? 고등어. 하나님의 언약이 얹어져 있고 그 언약은 주님이 자기가 있는 언약을 나를 도마로 사용해가지고 뭐로 사용한다? 나를 죽음으로 사용해가지고 죽음으로 사용해가지고 죽음을 사용해서 왜 죽었느냐를 따지는 거에요. 인간은 왜 죽었겠어요? 인간은. 왜 죽었어요? 죄 지어서 인간이 죽습니까? 죄인으로 태어나서 죽습니까?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 짓는다는 사실을 언약을 통해서 알게 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네가 착해도 천국가기 글렀다는 것을 네가 살아있을 동안에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제대로 알아라 이 말이죠. 안 그러면 사기꾼한테 넘어가기 때문에.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요? 이거 말도 안돼요. 예수 믿는 것이 죄가 돼요. 왜? 우리는 나를 위해서 믿고자 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죄에요. 그것도 지옥 갈 죄에요. 예수 믿고 지옥 가는 거에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지옥 갈 것이다” 그 이야기. 사도행전 16장 31절. 예수를 믿으면 지옥 갑니다.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이거 하나 떼면 큰일 나요. 예수를 믿으면 지옥 간다 앞에 뭐가 붙느냐? ‘주’. 주 예수를 믿게 되면 이 믿는 자체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주인공에서 제공된 거죠.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언약 달성의 일부가 돼요 일부가.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언약 달성의 일부로 개입이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내가 안 믿고 싶어도 언약 때문에 내가 믿어야 돼요. 믿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사역형 또는 피동형이라고 하는데 이게 믿지 않을 수밖에 없는 거에요. 믿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믿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믿는 사람과 대조가 돼요. 교회 내에서. 믿는 다고 떠벌리는 그 인간들과 믿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결과적으로 같은 게 같은 게 아니에요. 그 과정 자체가 달라요. 하나는 내가 믿던 주인공 자기 주체가 주 자리에 있지만 저쪽은 뭐냐? 주 자리가 주님이 주 자리로 가지 마세요. 나는 아니라고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때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가지고 그것도 믿지 마세요. 예수님이 나를 믿게 했다 그런 말도 믿지 말고 어쨌든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리고 그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는 아니야. 지금 내일까지 살지 안 살지 그것도 내 소관 아니야. 모든게 내 소관 아니다. 내 소관 아니면 내 책임도 없는 거죠.


죄는 날 때부터 지었고 죄에 대해서 내 책임 없고. 세상에 이렇게 배짱 대단한 사람 봤습니까? 아니 내가 태어날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태어났게 했고 태어났는데 어떻게 태어났다고 했어요? 죄인으로 태어났죠.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죄만 내놓는 것은 그것은 당연한 거지요. 이상할 게 뭐가 있어요?


그 왕자표 크레파스 보세요. 거기에 길쭉한 게 4개 있어요. 노랑색, 하얀색, 까만색 이런 것은 많이 쓴다고. 그 까만색 크레파스 가지고 한번 그려보세요. 도화지에다가. 이건 가를 써도 까만색이고 나를 써도 까만색이고 나무를 그려도 까만색이고. 선생님께서 너 초가집은 왜 까맣냐? 물으면 선생님 까만 크레파스로 그리니까 까맣지요. 뭐 이상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상한 듯이 이야기합니까?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가능성만 줬어요. 그거는 지옥가는 거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걸 로마서 5장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아담에 속한 자’. 또는 ‘죄의 왕노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노선이 단 하나의 노선이에요. 브레이크가 없는 벤츠에요. 홍준표가 지었던 책 이름인데. 내리막길을 가는데 브레이크가 없어요. 그냥 중력에 의해서 꼴아 박지요.


그런데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만 있어요. 그 죄. 일체의 그 죄의 방향틀기나 또는 그걸 방향을 변경시켜서 방향을 반대로 하거나 그것을 할 수 있는 나의 역량은 일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약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나하고 하나님하고 약속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제 3자인 우리가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여지가 전혀 없어요.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그 사람 도마 위에 하나님의 언약을 실리는 사람이에요. 고등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이걸 아는 사람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다”. 아주 신나요 신나. 내가 내놓을 수 없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아주 신바람 이박사 신바람이 났어. 신이 나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는 게 신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언약 작업에 뽑혔다는 것. 거기 가담이 되었다는 이 사실. 언약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내가 거기에 간택되었다는 선택되었다는 이 사실이 신바람 나는 거에요.


도마 위에서 주님께서 고등어를 이렇게 내치던지 저렇게 내치던지 주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내가 가난에 취하던지 부자에 취하던지 그건 내 소관 아니에요. 그건 내게 능력이 주는 한 알아서 고등어를 펄펄 뛰게 하든 구워먹든 삶아 먹든 찌개를 해 먹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건 주님이 쉐프지 내가 쉐프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요리하시면 되는 거에요. 요리하시면.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멈춤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있는 자들아 성령 앞에서 스탑. 멈춰라. 성령께서 요단강에서 예수님 세례주시고 예수님께 주신 그 업무가 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령이 계속 이끄시는 거에요. 죽고 난 뒤에 부활도 해당되지만. 그 대표적인 것은 십자가 죽기까지 계속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그게 예수님이 마태복음 3장에서 내가 받을 세례다. 마지막 세례는 하나님의 진노의 세례. 그걸 불세례라고 해요. 이스라엘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진노하게 되면 불로서 진노를 보여주거든요. 하나님의 진노. 아까 누가복음 3장 16절에 나오지요.


그는 성령과 불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 거게요.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곳에 예수님도 아담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착착 줄 맞춰가면서 예수님께서 앞장 서가면서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그 장소에 쑥 들어가지요.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 갈라디아서 3장 13절 기억할겁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자! 아버지께서 주실 저주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이 죽을 인간아. 가자 이 말이에요. 주 안에서 우리를 주의 저주로 가게 하시는 거에요. 저주로 가야 우리가 살아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죄스러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서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이에요. 나의 죽음인데 정확하게 해서 예수님 것을 플러스하기 때문에 합쳐서 이게 뭐냐 하면은 우리의 죽음. 함께 죽음. 함께 죽으심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이름에 합류한 죽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주님이 죽었잖아요. 주님이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버스 운전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예수님 보고 예수님 잠깐만! 얘도 태워가세요 하고 주님이 운전대를 잡은 그 버스에 주의 이름으로 운행되는 그 버스에 401번 버스에 우리를 같이 태워서 우리가 맛 볼 수 없는 아버지의 저주가 있는 곳으로 함께 가게 하시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내가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


그러니까 같은 버스에 함께 탔으니 저주 쪽으로 가는 버스에 함께 갔다는 것은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도 죽고 나도 죽고. 다른 말로 하면은 나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그 다음에 살려내는 것은 내 이름으로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살려내지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따로 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통합해서 우리를 끄집어내요. ‘주의 이름’으로.


그러면 이름 하나에 몸 하나지요. 몸 두 개인데 이름 하나 그런 거 없죠. 이름 하나에 몸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의 몸의 이름은 주의 이름 단 하나이기 때문에. 그 주의 몸을 성령의 연합체를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교회라는 말 나오기까지 이렇게 길어요. 이야기가.


대한예수교 간판 걸고 홀 얻어서 하는 게 이게 교회가 아니죠. 교회라는 것은 주님의 언약으로 이뤄진 게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키운다든지 작아진다는 것은 교회에게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가족을 키우기 위해서 애 낳고 애 낳고 이러면 가족 큰 겁니까? 가족은 크지만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애 많이 낳았다고 가정이 더 커지는게 아니에요.


몸집이 커지는 게 아니에요. 두 식구라도 두 부부라도 가정은 가정이에요. 교회는 패밀리에요. 신의 혈통입니다. 가정이기 때문에 숫자는 관계 없어요. 두 세 사람도 나와 함께 있으면 주님께서 내 식구로 봐요. 이거 뭐 두 사람 밖에 없네. 이거 내 식구 아니다 이런 것 없어요.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이거는 주님의 식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게 언약에 속했기 때문에 교회는 미완성 교회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명이라도 그게 완성된 교회에요. 주님의 목회는 그렇게 하는 거에요. 항상 교회에 숫자 몇 명이 아니라 헌금 얼마냐가 아니라 뭐를 누구 때문에 모였느냐를 묻고 있어요. 누구 때문에. 지금 누구 작업으로 모였느냐를 묻는 거에요.


그거는 나는 죽어있는데 살아계신 주님께서 모이게 하심으로서 모이게 하셨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이제 지금까지는 약간 어려운 이야기고요. 특히 이게 본문에서 우리가 첫째 강의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있음에서 없음으로 전환하는데 이게 어렵다. 어떻게 어렵느냐 하면 우리의 있음은 멈추고 여기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개입되는 겁니다.


약속이 개입되는데 창세기 32장 다시 읽어 봅시다. 창세기 32장 2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26절 아니고 29절.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게 질문이 성립이 안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름을 물어도 주님 쪽에서 물어야지 인간이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은 야곱은 해서는 안 되는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29절에 보면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라고 하지요. 자, 있는 자는 있는 자리에서 이름을 묻습니다. 이름 묻는다는 말은 나는 여기 내 이름 따로 있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인데 여기 바깥에 있는 당신은 당신의 영역은 이름을 뭐라고 호칭하면 됩니까? 라고 나와 너의 관계에 있을 때는 서로의 이름을 물을 수가 있어요.


나 따로 너 따로가 되면 이름을 물을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통합이 되어버리면 이미 야곱의 이름은 누구 이름으로 흡수, 통합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통합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이름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에요. 누구 이름이냐? 찾아오신 주님의 이름이에요. 주님이 앞으로 이스라엘처럼 기능을 하게 될 거에요. 그게 언약이거든요.


언약이 흡수될 때는 주여 누구십니까? 묻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합류돼요. 회사가 흡수 통합되듯이 이미 주께서 나를 안아버린 거에요. 어린애가 태어나가지고 어린애가 응애응애 하면서 태어나가지고 말도 못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트여가지고 아줌마 이름이 뭐에요? 이렇게 물으면 안돼지요. 엄마가 이름을 엄마가 지어주는 거에요.


없는데서 있음의 확장으로 연장으로서 너는 우리 둘이 해서 너를 만들었다. 우리 둘의 연장선에서 우리 집안의 사람으로서 만들었다 해서 성을 우리 집안에 있는 아빠의 성을 따라서 그대로 이름을 짓는 거에요. 이래서 너는 한 가족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어줬으면 그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이름 지어주신 주님 자신의 이름이에요.


10분 쉽시다.
 홍민희(IP:175.♡.96.96) 20-09-22 11:51 
강남-누가복음 3장 16절 (멈춤) 200915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성령의 세례 요한이 옴으로 말미암아 없음의 세계에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정지되었다라고 했는데 정지. 이걸 다른 말로 바꿔 봅시다. 막힘. 막혀버렸다. 인간의 있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막아놨어요. 아무도 주의 나라에 갈수 없도록 막아놨습니다. 더 나아가지 말라. 더 진격하지 말라. 더 시도하지 말라는 거에요.


이렇게 막혀놓고 그 다음에 주께서 창세기 32장에서 우리가 봤듯이 교체를 하는 겁니다. 교체작업. 무엇의 교체 작업? 이름을 교체해버리죠. 결국은 언약은 어떤 기능이 있다? 교체 기능이 있다. 그 교체 기능에 우리 보고 하라 하든지 내가 해줄게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교체가 어떻게 되는가를 주님께서 먼저 근거를 마련해요.


하나님께서 같은 하나님인 자기 아들에게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죽은 하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게 함으로서 그것이 원형이 되게 만들어요. 모든 판권이 되게 하지요. 그 다음에 주께서 언약대로 하는 것은 예수님께 완료된 그것을 그대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우리 몸에다가. 그냥 찍어버려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예수님의 영이 하는 거에요. 네가 너한테 손대지 말라. 내가 그냥 가서 찍어줄게. 그게 뭐냐 하면은 아까 세례 요한이 말한 성령 세례에요. 그가 오시면 그냥 성령으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자, 이 작업을 그러면 구약에서는 그것을 구약에서도 그런 암시가 낌새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있어요.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나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약간 복잡하게 되어 있어요. 4장 25절에 보게 되면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는 도중에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모세를 만나사 죽이려는 이게 모세는 지금 룰루랄라에요. 신났어.


하나님이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해주니까 자기는 지금 애굽의 사명을 감당하니까 하나님께서 너를 도와주시겠지 하고 자기는 사명감이 충만해서 가는데. 그런데 같은 동업자인데 아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셨다 이 말이에요.


어떻게 죽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목 조른다고 칩시다. 잠을 자는데 갑자기 손이 나타나서 목을 막 이렇게 죽이려 한다 이 말이죠. 같이 자고 있던 옆에 부인이 그걸 봤어요. 보고 난 뒤에 뭐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뭐라고 대책을 세웁니까? 하나님이 와서 죽인다는데 어떤 대책을 세웁니까?


여기서 모세와 하나님 만나면서 아까 첫째시간에도 했지만 모세는 도마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여기 뭐를 이룬다? 하나님의 언약, 이걸 고등어라고 했지요 고등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마로 사용해서 자기 고등어를 언약을 완성을 시킨다 이 말이죠.


완성시키는 작업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는 거에요. 모세를 만약에 목을 조르면 모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죽음이 나와요. 죽음이 나온다고요. 그런데 죽음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뭐가 있을 경우에 죽음이 나오느냐 하면은 죄가 있을 경우에만 죽음이 나옵니다. ‘죄’.


모세가 죄 지은게 아니고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안에 죄가 있어요. 짜보면 나와요. 치약 짜듯이 보면 죄가 나온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모세를 죽였고 여기서 부인되는 십보라가 자기 남편이 모세잖아요. 자기 남편이 모세인데 모세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인다면 이것은 십보라 여자에게 남편이 있어요? 없어요? 남편이 이제 없는 거에요.


전에는 얼마 전까지는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 남편을 죽여 버리면 자기 옆에 남편은 이제 없지요. 십보라가 뭘 생각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룬다. 그러면 모세가 약속을 이루는 죄가 된다면 그러면 약속과 틀어지는게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우리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 약속이든 무슨 약속과 그 틀어지는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부인이 하는 그 처방은 뭐냐 하면은 할례 언약이었습니다. 할례 언약. 할례 언약은 그 내용이 뭐냐 하면은 관계 단절이에요. 끊어버리는 겁니다.


언약의 세계와 그리고 인간의 태어난 육의 세계와 완전히 끊어진 경계선을 보여준 것이 할례언약입니다. 로마서 2장에 보면 할례 언약에 대해서 신약적인 의미는 이래요. “네가 마음을 끊어라”. 마음의 할례라고 합니다. 인간은 모든 생각이 자기 마음 씀씀이에서 나오잖아요.


행동이든 태도든 걱정 근심이든 또는 좋음이든 나쁨이든 행복이다 불행이다 나한테 기쁨이다 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와요. 그 마음을 끊어버리는 거에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는다 안 받는다? 받지를 않아요. 내가 좋다고 해서 하나님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슬프다 해서 하나님 슬픈 게 아닙니다. 그거는 네 동네에요. 너의 동네야. 네 동네와 이 동네를 분명히 하는 거야 분명히.


그럼 십보라 남편이 누구입니까? 모세잖아요. 이걸 끊어버리는 거에요. 이제 남편 없는 거에요. 당신은 피 남편이다 이 말이죠. 피 동네. 그래서 할례 언약에 경계선이 피를 내니까 할례하면 피를 내잖아요. 피의 세계에 속한 남편, 피 남편. 남편으로 나타난 피의 세계. 이거 뭐 흡혈귀도 아니고 흉측합니다.


남편의 모양새로 나타난 비로소 구체화된 언약의 세계, 또는 피의 세계. 그 피는 뭐를 부른다? 반드시 죄와 연합되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이래줘야 뭐냐 하면은 인간들은 다 빠져버리는 거에요. 언약 있는데 있어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언약에 가담할 수 없고 그러면서도 언약에 들어오려면 이 죄에 대해서 죄에서 구원하려면 이 피가 있어야 되는데 이 피에 관한 것은 이것은 할례 언약에 담당자가 할 담당이에요.


할례 언약의 담당자가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할례 언약의 담당자. 따라서 경계선. 인간은 자기 동네에 살기 때문에 자기 동네 밖에 몰라요. 내 동네 말고 다른 영역에 대해서 알려면 이쪽 영역 저쪽 영역 다 아시는 분이 와야 돼요. 그 분이 저쪽 영역에 살 땐 피를 안 흘리다가 이쪽 인간 세계에서는 피를 흘림으로써 그 피를 통해서 다른 세계 있음을 알려주는 그 당사자만이 할례 언약의 완성자가 되는 겁니다.


피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가 없어요. 뭐 이 세상에서의 언약의 완성?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뭡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한글로 딱 한자로 끝나요. ‘피’. 피로써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다르다. 윗동네에 대한 어떤 결정이나 그 진행과정에서 아랫동네는 일체 관여 못합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뭐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뭐 이웃을 배려하고 이웃사랑하고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마세요. 교회가 먼저 모범적으로 마스크를 써야 안 믿는 사람들이 아 저 교회는 훌륭한 교회다 해가지고 코로나 끝났는데 교인수 한 두명 더 늘고 그런 통밥 되도 않는 계산하지 마세요.


이웃사랑이다 이웃배려라 하는 것은 날 때부터 죄인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내 미래에 대해서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손댈 구석은 전혀 남겨둔 적이 없어요. 그냥 뒈져라 이놈의 인간아. 그냥 살다가 뒈져 죽을 때까지 뒈져. 그냥 죽으면 끝나는 거에요. 그래도 다른 애는 몰라도 내 딸만은 건져야 되겠습니다. 쓸데없이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전도는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죠. 왜냐하면 성령을 배급 주는 분은 주님이 배급 주지 내가 배급 줍니까? 내가 김정은입니까? 배급 주게. 주시는 분이 본인이 줄 사람 주고 말 사람 마는 결정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저 애 아는데요 제가 잘 아는 사이거든요. 실은 내 딸인데 어떻게 좀 안되겠습니까? 안된다. 안된다 하면 끝나는 거에요.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게 네가 뒤에서 빽 쓰고 뭐 엄마 찬스? 엄마 찬스 아빠 찬스 소용없어요. 카츄사도 안돼요. 법무부 장관도 안돼요. 휴가는 몇 일 갈지 모르지만. 이게 천국에 넣어주는 소관은요 인간의 선을 넘어버렸어요. 기도하면 오겠지. 기도해봐야 기도 자체가 죄에요. 기도 실컷 하고 나면 죄 많이 지었나? 막혀 있습니다.


인간이 쏘아올린 모든 기도 미사일, 헌금 미사일, 전도, 선교, 아프가니스탄 간다고? 혼자 놀러나 가라. 쓸데없는 모든 것들. 지도 놓고 너는 이제 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해서 너는 러시아 선교를 위해서 백날 선교해서 쭉쭉 나눠서 해본 적 있어요? 자기가 여호수아도 아니고. 그거 소용없습니다. 괜히 뭔가 믿는 신앙인인 것처럼 환각 상태에 빠져버려요. 환각 상태.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내가 신앙생활을 손질을 하다보니까 만약에 어떤 사정이 있어 가지고 엄마 돌아가시고 사흘 동안 뭐 기도를 못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내가 기도 안 한만큼 나한테 저주가 오는 것처럼 자기가 착각을 하게 만들어요. 자기 장단에 자기가 놀아나는 거에요. 웃기지도 않아요. 주님께서는 응?! 주님 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어.


본인이 본인을 갖고 아주 용을 쓰면서 자기가 자기를 정죄하고 벌 내리고 벌 세우고 맴매하고 난리도 아니야. 자기 자신이. 우리가 자기 자신한테 충분히 속아 넘어가야 돼요. 충분히. 충분히 속아 넘어가야 됩니다. 그 출애굽기 4장에서 십보라가 자기 자식의 피를 내야 되니까 할례를 행해서 피를 내가지고 그 잘랐던 고추 끝을 바로 모세 사타구니에 던져요. 모세 생식기에다가 툭 던지니까 하나님께서 그 때 하나님께서 놓아주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놓아 주셨다 이 말은 이 십보라와 모세 가정과 모세를 주께서는 언약으로 분리를 시키는 겁니다. 주님의 납치에요. 네 남편 내가 데려간다. 십보라 하는 말이 당신은 피 남편이다. 요즘말로 하면 당신은 복음밖에 몰라. 그런 소리 많이 듣지요? 당신은 나도 모르고 결혼도 모르고 당신은 복음밖에 모르지? 이런 핀잔을 받는 것처럼 모세 가정이 분리가 되는 겁니다. 당신은 피 남편이다. 당신의 영역은 피에 속한 영역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언약이 피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까 첫째 시간 한 것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있음에 해당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피와 내가 있어요. 그리고 없음에 해당되는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없는 존재에요. 없으니까 이 피와 죄의 관계에 관여하지 말아라. 내가 사용할테니까. 내가 사용할테니까 관여하지말아라.


그러면 우리는 또 이런 생각 들지요. 주께서 나를 사용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잖아요. 죽은 놈이 사용하고 안하고 네가 거기에 왜 나대냐 말이죠. 사용해주세요 할 권리가 없을 정도로 너는 죽은거야. 저를 사용해달라고 요청하지마. 주여 저를 쓰시옵소서 그런 소리하지마. 쓰고 안 쓰고는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런 예가 민수기 23장에 나옵니다. 오늘 성경 좀 많이 찾지요. 다른 날보다 유난스럽게. 민수기 23장 10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발람이라는 선지자 나타나고 여기 발락이라는 모압의 왕의 등장하는데 돈을 주고 막대한 돈을 주고 발람을 가지고 자기 진영을 지금 들어오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당신이 선지자니까 당신에게 축복과 저주권이 있다고 평소에 큰소리 쳤으니까 저 민족을 저주하게 해달라. 내가 막대한 돈을 줄테니까 저주해달라.


그러니까 발람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하니까 “하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 하는데 그 기도할 때 23장에 보면 발람이 노래를 지었은즉 쭉 합니다. 하는데 발람의 노래 가운데 10절에 보니까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나의 종말이.


갑자기 발람에게서 종말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말. 끝을 발람이 미리 본거에요. 끝을. 끝을 미리 봤다는 것은 끝이 되기까지 끝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의인으로 인정하는 그 마지막 모습 될 때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체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이끄시는 그들의 실세와 같이 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발람이 예언한 것은 주님의 예언인데 네가 천국갈 때까지 네가 하는 일에 네가 보탠 것은 일체 없게 만들게. 네가 착한 일을 하든 나쁜 짓을 하든 뭘 해도 너의 어떤 행위와 관계없이 너는 이미 하나님의 의인이니까 의인의 집합체가 되니까 의인의 집합체 되게 해줄게 라고 이야기하시는 분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 말입니다. 이게 발람의 예언입니다.


그래서 성경 소위 복음을 좀 안다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한테 이야기해도 그 사람들이 잘 안 믿겨지는 이유가 성도한테는 모든 죄가 의가 된다는 겁니다. 뭐 없이? 회개 없이. 반성 없이 의가 되는 죄가 의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거기서 막 반박해요. 내가 죄를 알고 그 다음에 죄를 회개하고 회개가 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은 모든 하늘나라의 의미 체계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마감을 했다는 것을 이걸 인정 안하고 내가 내 쪽에서 뭔가 보태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회개한다든지 반성한다든지 뭐 보태야 어떤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결과를 손에 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손에 쥘 필요 없어요. 이미 죽은 자가 뭘 손에 쥘 게 있어요. 죽은 자는 아무것도 쥘 게 없는데. 안 쥐어도 괜찮아요. 나에 대해서 일체 이제는 관심을 끊으세요.


첫 번째 강의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뭐라고 했던가요? 사랑은 상대가 너무나 엄청나서 내 생각은 생각이 안 나야 그게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대 앞에서면 나는 왜 small이 되는가. 상대는 big이 되고 나는 왜 small인가. 점점 더 작아져요. 박찬숙이라도. 키가 195라도. 점점 더 작아져. 상대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나는 덩달아 안 위대해도 돼. 나는 못나도 상관없어. 나는 못나도 괜찮아.


어떤 가수가 꼬마 가수보고 네가 동원이니? 동원참치에 나오는 그 아이. 네가 동원이니? 그러니까 정동원이 모르고 아줌마 누구세요? 할 때 그 때 그 기성가수가 아주 진짜 복음적인 이야기했어요. 나 몰라도 돼. 그 린이라는 여자가수거든요. 린. 그 여자 뭐 불렀어요? 유명한 노래. 무슨 ost 불렀는데.


그 린이라는 가수가 나이가 40이 되면서도 동원이한테 아줌마 누구세요? 나 몰라도 돼. 나같은 건 몰라도 되고 나같이 하찮은 건 몰라도 되고 너하고 악수나 해보자 이렇게 나왔거든요. 사랑의 콜센터에서 그렇게 했다 이 말이죠. 주님만 알면 돼요. 주님 앞에 내가 현재 수입이 얼마며 내 인생에 몸이 어디가 아프며 암이 5기가 되고 4기가 되도 그거 몰라도 돼요. 내가 코로나 걸리고 말고 그런 거 몰라도 돼요.


그것조차도 누가 하시는 것이다? 주의 언약의 절차니까. 주의 언약 과정의 절차이기 때문에 내가 몰라도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미 종말을 아는 사람, 나의 마지막을 이미 캐치한 사람에게만 나올 수 있는 기쁨이죠. 아 나는 저들의 종말에 내가 합세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 의인의 죽음에 죽기를 원한다. 그들이 의인 되서 죽는다면 내가 죽을래. 나도 같이 끼어 죽을래. 그들의 종말에 같이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발람이 언급을 했습니다.


그렇게 했던 그 이스라엘 아주 신이 났지요. 자기들 택함 받았다고. 성경 말씀을 곡해해가지고 자기가 선택받았으니까 구원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제 3성전, third temple 세 번째 성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교파 가운데서.


하나님은 문자적으로 일하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물 건너 간 것이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구원되고 여분의 남아있는 것을 이방인과 합류해서 온전한 이스라엘 된다. 로마서 11절 25절 그렇게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파가 있어요. 제 3성전이라고.


그 사람들은 맨날 뭐하냐 하면은 이스라엘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이스라엘 위해서. 맨날 기도가 이스라엘 위해서 기도하자. 브래드티비인가 그런 단체 만들어가지고 열심히 이스라엘 회복 위해서 하자. 그래서 조금의 정치적인 이슈가 나오면 이거 봐라 이게 에스겔의 완성이고 시편의 완성이고 요한계시록의 어떤 모조리 전부다. 제 3성전.


예루살렘에 메시아가 감람산에 올 때 그날을 기다리는 거에요.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면 마징가 제트입니까? 감람산에 황금돔에 왜 와요? 분명히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주님을 사랑하면 돼요. 그대는 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이러면 돼요.


그게 3성전이고 2성전이고 666이 오든 뭘 받던지 뭘 찍던지 아무 상관없어요. 예수님을 사랑하면 되는 거에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 있지, 신앙은 없어요. 신앙생활 체계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어줍잖게 신앙이라는 것을 자꾸 구성을 하지 마세요. 성도는 그냥 주님을 사랑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뭐든지 사랑하면 돼요. 성령을 통해서 사랑하면 돼요.


교회 가든 말든 코로나 있으면 오지마세요. 안가면 되고 죽고 싶으면 오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뭐 내 행동과 무슨 관여 있어요? 이스라엘은 근원적으로 망하도록 된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죄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죄로 해서 망하기 위해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 이에요. 이스라엘은 없어져야 됩니다. 이스라엘 없어져야 돼요. 그래야 뒤에 가리워져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라.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기를 신명기 21장 23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냥 시체가 아니고 나무 위에 달리는 시체는 무엇의 표상이다? 하나님의 저주 받음의 표상이다.


자, 하나님의 저주가 너희들이 보고싶냐? 보고싶어? 그래 말해줄게. 나무 위에 시체 달리거든 저주의 끝으로 여겨라. 저주의 마감이다. 인간으로서 나무 위에 달린 시체 그것보다 더 저주스러운 모습은 없어. 라고 신명기에서 이야기했어요.


자, 그렇다면 그 당시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어쨌든 간에 나무 다 없애버려. 저주가 없는 땅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줄 때 바로 그런 취지가 아니란 거에요. 네가 저주를 인위적으로 네가 개입을 해가지고 이 땅에 저주를 없애라고 준 율법이 아니에요. 저주를 저주되게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겁니다.


율법을 법을 준 것은 날 때부터 저주 받기에 딱 맞춤 인간으로 태어난 게 저주에요. 율법이 먼저 있고 율법의 저주를 알리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거에요. 얼마나 주께서 솜씨가 좋은지 몰라요. 아주 맞춤 저주에요. 맞춤 저주. 저주의 유니폼들을 입혀놓은 거에요. 저주의 유니폼들.


축복 없어요. 축복은 모든 말씀을 항상 언제든 다 지켜야 축복이지. 52년동안 다 지켜도 53년째 어겨버리면 다 날라가죠. 아니에요. 왜? 왜냐하면 율법은 모든 사람을 재끼고 한 사람만 찾아가는 기능 때문에 율법줬어요. 너 아니야. 너 아니야. 너 아니야. 선택이라 하는 것은요 누굴 꼬집어서 선택이 아니라 나머지를 선택해요. 나머지를.


나머지 = 뭐다? 선택이에요. 선택은 나머지를 통해서 나타나요. 선택받았다하는 사람은 다 잘라버립니다.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그래도 자르고 마지막 남아 있는 아 이것은 자르지 않고 남아 있으면 그분. 그분이 누구냐? 예수죠. 그래서 선택은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합니다. 그걸 가고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 안에서 선택했다.


칼빈은 이걸 몰랐어요. 칼빈, 루터 아무도 몰랐어요. 인간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선택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제대로 선택된 분은 단 한분인 것을 나타납니다. 선택된 사람은 한 몸이고 한 분이에요. 이름이 하나 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만 선택됐고 주의 몸만 선택됐어요. 성도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선택된 사람은 주님의 선택 앞에서 무엇의 선택을 포기해야 돼요? 나 구원받기 위해서 선택을 거론한 그 질문 자체를 이게 바로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죠. 내가 되지도 않는 쓸데없는데 꽂혔구나. 성경 가운데서 나에게 유리한 게 무엇일까? 어?! 창세전에 예정되었다고? 이거 내가 간직해야지. 간직하는 그 자체가 깨어져버리는데. 그 말씀이 그렇게 그 소유하려는 그 그릇을 깨버려요. 소유한다고 깬다고요.


이 예가 적당한 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뭐 이렇게 그냥 참 저급스러운 예라고 여기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손예진이 결혼을 안했어요. 대구출신인데 손예진. 탤런트. 결혼을 안했다고. 결혼을 안했는데 어떤 사람이 들이댄다 이 말이죠. 비록 내가 북한의 대위는 아니지만 내가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그렇다면 나하고 결혼하면 월 한달 수입이 최소한 2천만원에다가 강남의 아파트 한 채에다가 적어도 롤스로이스 차 몇 대하고 우리 식구, 친정식구 모든 행사 대소사 행사 다 참석하는 조건하에 조건 만족하면 하겠습니다 하잖아요. 그러면 손예진한테 반한 사람이 앞뒤 안가리고 오케이 하겠습니다. 그날부터 이 모든걸 시행하겠습니다. 결혼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손예진은 그 다음부터 뭘 보는 거에요? 수입이 과연 한달에 2천만원 되는가 그걸 계산하겠지요. 차 제대로 되는지 계산하겠지요. 안되면 어떻게 됩니까? 잘라버립니다. 잘라버려요. 왜? 조건에 안 맞으니까.


예정이라는 것은 주 안에 선택이 예정이 안 되버리면 아무리 예정 천당 가는 길이 탐이 나더라도 그 조건에 안 맞으면 그 말씀 자체가 율법적 기능을 해가지고 너는 죄인이야 의인이 아니야라고 이런 명분으로 이걸 잘라버린다고요. 잘라버리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나는 나에게 잘려나가야 되지요.


나의 원수가 누구냐 하면은 나의 원수가 나였다는 사실을 몰랐지요. 주님을 알고부터 내가 나의 원수인 것을. 남 탓하지 마세요. 세상 탓하지 마세요. 내가 나의 원수에요. 자꾸 나를 구원할려는 구원은 주님이 해준다는데 믿지를 못하는 거에요. 왜 그걸 믿느냐. 구원은 주님이 해줘요. 그런데 그걸 못 믿으니까 그 못 믿는 빈자리에다가 뭐로 채워야 되지 않습니까. 뭐로 채웁니까? 내가 열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채우는 거에요.


윤복희가 하는 유명한 노래 있지요. 윤복희가 노래로 묻잖아요. “누가 나의 기쁨이 될까” 물어요. 다른 사람들 아무 소리 안했는데 윤복희 자기 혼자 “여러분~~” 이런다고요. 벌써 질문을 하면 안돼. 우리는 질문 할 권한이 없습니다. 질문을 하면 안돼요. 나 어떻게 천국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 부채도사처럼 해가지고 나 천국 가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돼요.


물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자꾸 묻는다고요. 왜? 죄인이기 때문에. 성령은 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죄로 바꿔줘요. 자꾸 내가 묻는게 아니고 이 육신에 남아있던 죄가 죄답게 나를 포기를 못하는 거죠. 나를. 마귀가 나를 안 놓듯이 자꾸 나로 하여금 네가 그만하면 천국가지. 공사 그만큼 했으면 천국가야지. 그만큼 일한 보람이 있어야지. 교회 60년 다녔는데 지옥가면 되겠어? 자꾸 내가 나한테 격려와 독려와 그리고 위로를 해준다고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마귀의 자식들이 여러분이지 뭐.


다시 이야기합니다. 모든 개념은요 십자가 달린 그분의 재생이에요. 그분이 원본이고 원본에서 성경말씀 해석은 새로 시작해야 돼요. 모든 개념, 전도든 천국이든 모든 개념은 예수님이 다 이뤘다 부터 새로운 개념이 거기서 솔솔 이렇게 뽑아져 나와야 돼요. 출발점이 나부터 하면 안돼요. 그거는 죄가 되는 거에요. 죄가.


신종코로나가 왜 있습니까? 그건 뭐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거지 뭐 어려워요? 쉽잖아요. 우리 교회는 열심히 기도하고 우리 교회는 열심히 복음만 전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신종코로나 걸린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이렇게 하면 바이러스가 웃습니다. 일곱 바이러스 데려가요. 이번에 대구 우리 교회 쳐들어가자. 저 건방진 거 봐봐. 쳐들어옵니다.


걸리겠다는데 안 걸릴 재간이 있습니까? 다음 달에 우리 딸내미 시집가는데 그전까지는 내 몸이 천식이 없어야 됩니다. 그거 누구 맘대로에요? 우리 맘대로 안되잖아요. 피가 죄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피가 피 되기 위해서 죄를 파트너, 파트너로 삼아요. 상대역으로 삼아요. 왜? 피가 주연이기 때문에. 삼습니다. 죄를 상대역으로 삼기 때문에 피가 상대역으로 삼아야 피가 피답게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율법이 이루어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선악과나무는 사실은 아담이 보기에 없는 나무로 여겼어야 했었었어야 돼요. 따먹지 말라고 한다면 아예 그 나무는 없다고 여겨야 돼요. 그런데 악마가 어디로 데려갑니까? 유독 저기 나무 있다로 데려가는 거에요. 자꾸 있다는 거에요. 뭐? 선악과나무가 있다는 겁니다.


있는데 보니까 먹음직이 있고 탐스러움이 있고 보암직이 있는 거에요. 그게 선악과가 있어 보인다는 말은 그 시선을 보는 누가 있다? 내가 있음이 돼요. 내가 있음이 되어버리면 이미 이거는 범죄에요. 내가 있음. 그냥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계시면 됐어요. 그걸로 충분한데 굳이 내가 있어야 돼. 예수님이 있고 예수 믿어주는 내가 굳이 있어야 돼.


그런데 그 예수 믿는 것 치매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자기가 있는 줄도 몰라. 치매 걸리면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몰라요. 나이 들게 되면 누구나 정신이 오락가락 해가지고 오락가락 하면은요 내가 여기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확인하는 방법은 외부에서 찔러 보는 방법 밖에 없어요. 사람이 외부에서 작업을 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아가 발생됩니다.


그냥 열심히 공부할 때는 시간가는 줄도 몰라요. 밥 먹자 하는 순간 아 내가 여기 있네 느끼는 거에요. 내가 여기 있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교회가 있음, 모든 있음은 뭐냐 하면은 유혹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있음이 아니고 없음. 실제로 찾아갈려고 해도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요. 없음이 그 없음으로 인하여 사는 사람. 그게 바로 성령으로 사는 사람. 주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멈춰있기 때문에. 멈춰있다는 것은 이것은 동결된 거에요. 동결이라는 뜻은 안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 실제적으로 움직이시는 분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만 움직이지 말씀만 움직이지 인간은 안 움직이거든요. 인간은 움직여 봐야 미사일 쏴봐야 2000km밖에 안날라가요. 해봐야 도로 땅에 떨어져요. 모든 것은 거기에서 거기에요. 모든 것은.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세계를 구분하실 때 언약을 할 때 언약을 있음으로 표현할 때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표현을 해요. 죄가 있는 곳에 피가 있고 피가 있는 곳에 죄를 유발하거든요. 죄가 있는 곳에 피가 있고 아까 했지요. 피 남편이라고요.


죄를 발각시켜야 주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죄를 발각시켜야 십보라가 피 남편 피+남편, 피 영역에 속한 남편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죄가 있어야 피가 있고 그 다음에 피를 피답게 하기 위해서 죄를 유발시키는 거에요. 이것만이 고정된 거에요.


바둑에 보면 이런 좋은 예가 있어요. 바둑에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은 패라는게 있습니다. 여자분들 바둑 못 두지요? 패가 뭔지 잘 모르겠지요. 패라는 것은 빈곳에 두면 되는데 서로 상대가 번갈아 가면서 백과 흑을 따낸데다가 따낸데 두고 또 따내고 그 자리가 흑과 백, 백과 흑 계속 바뀌는 거에요. 계속 바뀌죠.


그러면 바둑이 안 끝나잖아요. 그래그래 다른데 두고 이제 패 싸움 안하고 다른데 한 번 더 두는 거에요. 바둑에 그런 게 있어요. 우리 현장인데 나는 매일같이 육신 생각 하다가 영 생각하다가 영 생각하다가 육신 생각하다가 주님 생각하다가 돌아서가지고 아 복음이 너무 좋아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 주님 앞에 나는 왜 작아지는지 5분도 안 지나가지고 이러니까 나 구원받지. 갑자기 ‘나’가 등장해버렸어.


주님 생각하다가 주님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 거에요. 아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이제는 뭘 해도 죄 아니야. 뭐든지 하나님의 의야. 신난다 나쁜 짓 해볼까 하다가 벌써 그게 나쁜 짓이야. 매일 고정되었어요. 고정됐는데 한국 살다가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못가지만 미국 가서 살까? 한국에 새는 바가지 미국가도 새거든요.


자기 딴에 옮겨 봤는데 자기 딴에 삶의 환경을 바꿔 봤자 그놈의 그 주인공이 거기 미국 가서도 매일 육신 영, 영 육신 바꾸기 하는 거에요. 매일 패싸움 다른데 가서도 패싸움하고 있는거에요. 패싸움. 평생토록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해부되야 돼요. 히브리스 4장의 말씀처럼. 우리의 골수가 늘 쪼개는 이유가 말씀만 살았지 우리는 말씀의 지적질 당하는 고정된 조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말씀으로 쏘아대고 또 쏘아대다가 주여 죄인 맞습니다 하면 그게 의가 되고 죄인 맞으니까 나 구원받았죠 하면 그게 죄가 되고. 그게 죄가 되고 하는 거에요. 죄인의 특징은 내가 나와 결별을 못한다는 것이 죄가 되는 거에요. 나는 주님의 소관인데 자꾸 최종관리자가 본인이에요. 자기 관리를 포기한 사람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이게 이름은 세자인데 앞에 형용사가 붙어요. 뭐냐하면 불의한 청지기.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런 어르신도 구원받았으니까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 마지막 날 제대 앞두고 기름 훔쳐내는 북한 병사같이.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불의한 청지기가 왜 지혜가 있느냐 하면은 그 사람은 끝까지 자기 육신의 죄를 그대로 보여주거든요.


회사 다닐 때나 회사에서 나올 때나 뽑아낼 거 다 뽑아내는 거에요. 좀 뽑아냈어요? 나올 때 장부 조작해서 좀 뽑아내야 되는데.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변함이 없는 거에요. 자신이 자기를 가리지 않아. 겉과 속이 똑같애. 다같이 죄인이야. 겉도 죄인이고 속도 죄인이고. 내가 나를 포기할만한 있음이 내가 있다면 그건 포기되야 될 있음이지 나는 내가 내 몸 가지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사람, 그걸 절감하고 있는 사람. 주께서 성령께서 늘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자, 다시 누가복음 돌아가 봅시다. 누가복음에 3장에 보게 되면 사람들은 요한이 오기를 바랬는데 요한은 역시 우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자기를 없애버리죠. 없애버리고 나 말고 내 뒤에. 나 말고 내 뒤에. 오늘날 성도의 사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네가 대단하다. 나 아니고 다른 분. 그럼 너는 왜 있느냐? ‘아니고’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는 거에요.


내 신앙 아니고 예수님 믿음. 내 사랑 아니고 주님의 사랑. 내 소망 아니고 주님의 소망.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지신 분을 십자가에 공통점을 가지고 따라가는  거에요. 그 길이. 십자가 없는 사람은 거기에 못 끼어들어요. 십자가 없는 사람은. 십자가 진다는 말은 내가 죄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위장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꾸며봐야 안 통한다 이건 소용없다는 것을 명심하는 사람이에요. 명심하는 사람.


못난 놈이 못난 짓하는 것이 당연한거지 못난 놈이 잘난 짓 해석하는 그 해석이 이상한 해석이 되어버리죠. 그래서 기도하면 응답받는 게 아니고 기도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에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와가지고. 답답하니까 기도하는 거죠. 기도하는 가운데서 이 기도가 얼마나 내가 위선자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요한이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 말고 다른 분이 오는데 너희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구분해봐라. 나는 물로써 세례를 준다.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물로써 세례를 준다. 세례가 뭐냐? 이 전체가 ‘나’라면 나 속에 차단막이 이렇게 들어 오는게 세례거든요. 차단막이. 주님이 들어오는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영이 들어와버리죠. 주님의 십자가 들어옵니다. 물론 주님이 들어온다는 언약적 기능의 완성이 언약 완성이 뭐냐 하면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 효과가 들어오는 거에요.


십자가 효과가 들어와버려서 나와 나 사이를 아주 관통해버립니다. 자, 물세례라는 것은 물이 내 안에 들어오는 거에요. 그럼 이거는 뭐냐 하면은 경계선이죠. 이 경계선에 내가 항상 이렇게 분리되는 겁니다. 이 ‘나’는 아담에 속한 내가 되고 이 ‘나’는 아담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속한 ‘나’가 되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어떤 작용을 하기 때문에 죄가 반성하면 의가 되는게 아니고 죄는 안 짓고 싶어도 주께서 죄 짓게 해요. 그 일을 하는데 열심히 하는 자가 있어요. 악마의 도움으로 우리는 죄 짓게 되어 있습니다. 악마는 항상 유혹이고 우리는 이 경계선을 없애버리는 거에요.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하지 뭐 비겁하게 주님께 의지하느냐 이런 식으로.


이미 들어와버렸으면 들어온 자에게는 이 ‘나’ 중심이 되면 안됩니다. 이건 큰 오해고 위에 있는 ‘나’ 중심이 아니고 여기에 집중해야 되지. 여기서 ‘나’로 가면 안됩니다. 그러면 나의 증인 돼요. 나 구원받았다의 증인되니까 안되고 여기에 집중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게 아예 없는 사람은 집중할게 없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자기만 자랑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성령 받은 예수의 증인되지. 나의 증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계속해서 성령께서 이걸 이렇게 하시는데 물세례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는 물에 빠져죽었다 그런데 물에서 건짐 받으면 우리는 새사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언약의 종결이 아니에요. 세례 요한에 의하면 내 뒤에 또 오시는 거에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이 프레임, 이 붕어빵 틀, 틀이거든요. 틀. 이 붕어빵 틀에다가 앙꼬를 붓고 밀가루를 붓는 것은 누구 몫이다. 내 몫이 아니다.


물세례 받고 있는 여기 지점에다가 뭐 오느냐 하면은 여기에 불이 오고 성령이 오고 성령이 와버리죠. 불이 오고 성령이 와버리죠. 그러면 십자가가 불이 오고 성령이 온다는 말은 불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먼저 불과 성령의 세례가 누구한테 옵니까? 예수님한테 왔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불이니까 진노죠. 하나님의 진노에서 성령을 받아서, 진노에서 부활 천국으로 이미 옮겼던 그것이 중간에 박혀있는 겁니다.


박혀있으면 우리는 여기서 이미 죽은 자로서 나는 죽었지만 내 안에 들어온 성령 예수님은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거에요. 언약이 살아있어요. 언약이. 제사장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그 딸랑딸랑하는 방울소리 때문에 아는 것처럼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것은 피의 효과가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죽어도 산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골로새서 3장 3절에서는 “너희는 이 땅에서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다”. 이걸 그대로 응용하면 되겠지요.


자, 하늘과 땅은 어디 있느냐? 여기의 하늘과 땅이 아니고 예수님 있는 곳이 하늘이고 우리의 육이 있는 곳이 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적 개념이 아니고 십자가로써 새로 만들어진 개념이죠.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고 예수님이 없는 곳은 그것은 지옥이고 땅이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문자적으로 해가지고 감람산에 주님께서 마징가 제트처럼 두 다리 걸치고 내려오고 자꾸 그렇게 보는데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춘천강의 때 몇 번씩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다음에 춘천강의에 오라는 이야지 뭐. 춘천강의에서 분명히 했지만 시간과 공간은 한 인물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완성은 한 인물로 전부 다 흡입되고 빨아드렸어요.


그래서 무슨 시간을 계산하고 무슨 때를 계산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걸로 오늘 죽어도 천국이에요.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어떤 인물을 사랑하는 거에요. 인물을. 자, 그렇게 강의를 끝냈는데 끝내면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이 말이에요. 인물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인물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믿습니까. 안 보이는데 보이면 쫓아가서 제일 먼저 믿지요.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됩니까.


그 정답은 창세기 32장에 보면 혹시 누가 물어보면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32장 32절 누가 마지막인데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창세기 32장 32절.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31절은요.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절었더라. 절뚝거렸더라. 이 김대중 친필처럼. 이거 김대중 친필 맞아요? 김대중처럼. 절었더라. 절뚝거렸더라. 내가 정상이 아니야. 나는 환자야 라는 인식. 성령 받은 거에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다른 힘에 의해서 나를 아주 작살내버린 거에요.


내가 정상이 아니에요. 절뚝절뚝 저는 거에요. 저는데 그게 기뻐요. 감사해요. 주님이 아니면 누가 나를 망치겠어요. 작살내겠습니까. 너 망했어 인간아. 너는 태어날 때부터 너는 인간 아니야. 자꾸 때릴 때에 야곱의 증거는 뭐냐? 다리를 저는 거에요. 얻어맞았다 이 말이거든요. 얻어맞았다. 얻어맞았는데 거기 브니엘 있지요 브니엘. 얻어맞았는데 얻어맞았다는 말은 죽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죽었는데 주께서 살려줬다. 다리 저는 것은 문제도 안돼. 이제는 죽은데서 살려준 게 되니까 내 인생이 환자가 되든 가난하게 되든 내 인생이 차 사고 나서 진짜 다리를 절든 상관없이 이미 우리 생명을 얻은 것에 대해서는 내 인생을 탓하지 않고 주님 앞에 원망하지 않고 이 자체로 주께 찬양하는 것. 그날 어떻게 됐다? 해가 떠올랐다.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에게 주었던 언약, 모세에게 주었던 언약, 그리고 오순절날 성도들에게 주었던 그 언약, 십자가로 객관화 지어서 이렇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떤 경우라도 그것이 주의 솜씨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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