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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7 01:37:56 조회 : 1193         
세대 속의 자아 16082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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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75.♡.227.22) 16-09-08 14:19 
광주 강의(2016. 8. 26) 30-1

마가복음 8장 38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목숨도 바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목숨 버려 얻을 것이 있다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잃으면 아무것도 소용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어요. ‘그 나라 의’는 어떤 상태, 경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없는 상황, 없는 경지를 만들어 나가실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는 사람은 그 나라 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가 하면, 이런 염려들을 하지 않으면 천국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는 이미 천국에 온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고 납득하는 상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 있는 나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고,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 말씀이 어떤 취지에서 하신 말인지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아, 이정도로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내가 주의 말씀을 지켜서 천국 간다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치 않도록 예수님이 보장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하게 될 것이고, 주님은 이런 조건을  만족시켜주지 않습니다. ‘월 수입 오백만원 정도 주시면 제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 염려하지 않고 천국 가겠습니다.’ 이런 조건은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게 된 사람은 ‘수입이 오십만 원이든 오백만 원이든 염려할 문제는 아니구나.’ 이걸 이해합니다. 그럼 그 이해가 뭔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획득한 사람에게는 그동안 내가 목숨 부지하기 위해 애쓴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짓임을 납득하게 된다는 겁니다.

‘목숨 바칠만한 가치는 (   )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뭔가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란 것입니다. 이 빈자리는 9장 1절에 나옵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절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지요.

변화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를 염려했습니까?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애섰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왜냐?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으면 ‘천국이다.’라고 하겠지만, 제자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태냐? 이런 세계가 다 있어?’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목숨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천국’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천국이다’라고 하지 말고, 목숨 바칠만한 가치는 ‘주님이 주신다.’ 또는 ‘주님과 함께하는 상태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정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자기 목숨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려고 했던 변화산의 상태가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중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없어요. ‘이렇게 하세요.’라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이렇게 하면 천국에 넣어줍니까?’ 이렇게 나와요. 인간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에 목숨을 버리는 것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너희들이 모르는 목적이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그 목적을 달성해서 너희를 그 속에 넣어줄게.’ 라는 주님의 자기 스케줄을 이야기한 거예요.

갑자기 편해졌지요? 물론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들은 노래인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그 가사가 굉장히 섬뜩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제가 신학교에 입학해서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결국 천국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어요.

‘목숨 버릴만한 가치는 주께서 주시는 천국이다.’ 라고 하지만, 실제 천국이 주어질 때는 ‘주님을 알고 있나?’ 이것을 묻는 겁니다. 주님이 천국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시체를 넘고 넘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변화입니다. 8장 34절을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3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씀을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목숨 바칠만한 가치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따로 준비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우리는 “그럼 그것 저에게 주세요.”라고 하겠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라다녔으니 그만한 혜택은 받아야 하잖아요.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해서, 목숨 버릴만한 그 무엇이 주어지면 필히 놓아야 하는 것이 있어요. 그동안 애지중지하고 귀히 여기던 목숨을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것이 있는데 추가적으로 더 주는 것이 아니라 교환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당신 천국 얻었지요. 그럼 이제 당신 목숨은 전혀 귀하지 않지요?’라는 질문이 되는 겁니다. 천국을 얻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이렇게 된 자는 바꿔치기 한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질문을 다시 해봅시다. “천국 얻었습니까?” “예” “그럼 먹고 마시는 것은 별 걱정 안 되지요?” “그래도 걱정 되는데요.” 이러면 바꿔치기가 안 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꼼수를 쓰지요. “그러면 입는 것, 먹는 것 포기할 테니 천국 주세요.”라고. 하나님과의 이런 흥정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천국이 아무리 좋아도 내 목숨을 포기할 위인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챙길 것 챙기되 목숨을 기본으로 깔고 챙깁니다. 내 목숨을 포기하고 뭔가를 챙긴다는 것은 너무 큰 도박이라 그런 모험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롯데 2인자라는 분이 자살을 했습니다. 제 고등학교 5년 선배인데, 뭘 지킬 것이 있다고 목숨을 버립니까? 어리석은 짓이지요.

저는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이런 분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 구하는 위인 되지 말고 자기 가정이나 잘 챙겼으면 좋겠어요. 남들 보기에는 대단한 사람 같지만 자식입장에서는 자기와 놀아주는 아버지가 최고 좋은 아버지입니다. 자기 가정 잘 챙기는 것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걸 잘 못하니까 밖으로 돌면서 핑계를 댑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어려운 것이 가정을 잘 돌보는 일입니다. 이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나왔습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주님이 주시는 미지의 X가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나옵니다. ‘목숨보다 천국이 더 귀하다면 순교하고 천국 가지 뭐.’ 이런 발상 자체가 틀려먹은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사기입니다. 이런 인간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남들이 순교했다고 말은 하지요.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내가 벌인 사기에 남이 곱게 안 속아주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는 겁니다. 사기를 쳐야 돈이 생기는데 내가 벌인 사기에 안 넘어 가는 거예요. 그 종교적 사기가 뭡니까? ‘나는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이건 정말 큰 사기입니다. 이런 인간은 없어요.

외국인 천주교 신부가 처음 일본에 복음을 전할 당시, 사무라이 대장은 포르투갈이 일본을 집어삼키려고 이런 사람을 보냈다고 오해해서 신부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이면서 하는 말이 “이래도 네가 예수 믿나? 네가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아라.”고 위협했어요. 처음에는 안 밟고 버티다가 나중에는 밟았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중요하다고 보이는 인간을 초월할 위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목숨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목숨은 줄 수 있어요. ‘사자야 날 뜯어 먹어라. 나는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 이게 뭐냐 하면, 사실은 목숨을 버린 게 아니에요.

자아의 가치, 나의 자존심을 살리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나의 자아는 포기 못하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때려 죽여도,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아를 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이야기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고상해 보이고 순교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자신의 가치, 자아의 위대함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IS 대원들을 보세요. 죽어서 천국 간다고 하니까 아낌없이 자기 몸을 바치잖아요. 어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십일조를 내라. 그러면 낸 만큼 돌려받는다.’ 이건 보람상조에 가입하는 것이고, 곗돈 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나님이 안 받는 이유가 뭔가 하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걸려요. 오른손으로 십일조를 하면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이게 안 됩니다.

내가 냈다는 말은 나를 바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흥정하고 거래를 한 거예요. 이렇게 하면 자신이 한 것이 누적되어 보상을 기대합니다. 망가진 자기 인생을 빠른 시간 안에 만회하는 것이 보상입니다. 야구 선수가 수비에 실수를 했다면 다음 공격에서 홈런을 쳐서 만회하는 것처럼.

자신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이 있는데, 인생을 살다보면 그 기대에 깨집니다. 그 때 빨리 하나님께 요청해서 그 기대한 바를 채우면 하늘나라에서 인정받은 괜찮은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아가 두개입니다. 자아 1과 자아 2가 있는데, 바깥으로 보여지는 것은 자아 2인데, 나올 때 자아 1과 친밀성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서 자아 2와 만나는 모든 타인들은 자아 1을 원만하고 이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탬이 되는 자를 만나요. 메슬로우가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최고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가장 원초적인 욕구는 생존의 욕구이고 마지막 욕구는 자아실현입니다. 내가 원하는 나라야 나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는 어디에서 만들어집니까? 어릴 때 엄마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집니다. ‘너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야. 그래 잘 했어.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이런 것들이 나중에 법 감정으로 형성됩니다.

엄마, 아빠로부터 배운 것이 자아로 구축되고, 1.8개월부터 24개월까지 자아가 형성되고, 형성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자아성의 증거 수집에 나섭니다. 이정도 되니까 나답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친밀성입니다. 철학자 헤라클레토스는 주장했습니다. ‘세상 것들 중 나와 친밀한 것은 나에게 달라붙고 안 친밀한 것은 나와 멀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은 사랑과 미움인데, 미움은 밀치는 것이고 사랑은 당기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런 이론을 타당한 것으로 수용합니다. BC 5세기의 철학자가 어떻게 이것을 알았을까?

어쨌든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목숨이 더 귀하다.’고 했을 때, 이 말은,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네 자아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것 내놓으면 내 것(천국) 줄게.’ 이런 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너는 그냥 있어라. 천국이 와서 너를 덮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 덮쳐올 때 우리는 그림자가 됩니다. 그림자는 상징, 또는 표상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말은 실체가 있다는 말이지요. 만약 실체가 전봇대라면 그 전봇대의 그림자가 있겠지요. 인간의 존재는 마지막 아담의 긴 그림자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촐랑대고 까부는데 그러면 주님도 우리처럼 촐랑댄다는 말인가?’ 주님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심판과 긍휼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촐랑대고 까불고, 남은 생각지 않고 나만 챙기는 모습은 주님이 심판 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가 ‘남은 생각지 않고 나만 챙기는 것은 철없는 짓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이것은 예수님의 긍휼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늘 출렁입니다. 좋았다가 슬펐다가, 웃다가 울고. 이런 것을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본문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목자를 치니 양은 흩어진다.’ 예수님께 일이 벌어지니까 12제자가 모두 도망쳤어요.

도망 칠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단 말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도망치는 것도 구원 받을 성도가 갖추어야 될 소양에 해당됩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지키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베드로가 할 때 본인은 진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진심을 몰라요. 즉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서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끝까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채 천국을 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내가 반듯하게 살고, 절제하고 조심해서 행동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전혀 달리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자신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어김없이 다 이루리라(마5:18)’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같은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그 말씀을 가로채는 거예요. 옛날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중에 호루라기처럼 된 것인데 훅 불면 펴졌다가 다시 감기는 것이 있었어요.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돈을 빌리려고 하는 자에게는 그저 주어라.’ 등등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착시 현상을 일으킵니다. 이 말씀을 내가 지켜야 될 숙제처럼 여기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라 장난감 호루라기처럼 말씀하신 그분에게 되돌아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십니다.

9월 5일 미국에 가는데, 그곳에서 강의할 주제는 ‘복음이 무엇인가?’ 본문은 요한 1서입니다. 예수님이 내뱉은 말씀을 예수님이 알아서 다 이루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시현상을 일으켜서 이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지요. 지난 수련회에서 ‘시차적 관점’을 말씀드리면서 어려워서 지구의 공전으로 설명했어요.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도는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돕니다. 돌 때 지구 가까이에 별이 있다면 이 별은 청색 편의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멀어질 때는 적색 편의가 일어나요. 이것을 도플러 효과라고 합니다. 베셀이 이것을 증명함으로 지구가 공전한다고 주장했어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 같지만 이것은 겉보기 운동이고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거죠.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시각적 차이가 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보는 시각과 우리가 보는 시각이 달라요.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지켜서 따라붙으려 합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가 있어요. 계모가 아이를 쫓아내니까 아이가 돌멩이나 식빵을 던져놓았기에 그 흔적을 보고 집을 찾아오지요.

사람들은 어떤 착각을 하는가 하면,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을 주셨기에 이 말씀을 지키는 분량에 따라서 점점 더 자기의 착함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오해란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들인데 예수님은 이들에 의해 죽임 당했습니다.

카스트 제도에서 제일 바닥에 있는 자들이 수드라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계층이 아닌 제일 낮은 계층으로 오면 어느 쪽이 거룩입니까? ‘잘 지켰다.’가 거룩이 아니고 ‘저는 못합니다.’ 이것이 거룩이란 말이죠. 자아를 버리란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아를 못 버립니다. 도를 닦아 자아를 버렸다는 것은 자아 2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자아 2가 자아 1의 조종을 받아서 연출하는 거예요. 

자아 1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인데 이것은 버릴 수가 없어요. 인간의 자아는 예수님의 자아와 어떤 대립관계에 놓여 있는가를 안다면 너는 천국 관계망 속에 들어온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면 착할수록 주님의 값없이 주시는 용서가 모독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먹는 것, 입는 것 염려할 필요 없다는 겁니다.

천국 갈 때 돈이 있어야 들어가는 곳이 아니잖아요. 미모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한 것 모아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아 1을 숨기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을 괜찮은 자아 2로 조작한 것입니다. 조작할 때 모델이 있는데, 그 모델은 역사에서 수집합니다. 역사적 인물 중 괜찮을 사람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어요. 기독교인이 읽어야 할 필독서처럼 되어 있어요.

이것이 뭔가 하면, 내가 아닌 내가 되려고 꼼수를 부리는 거예요. 사람은 평생 살면서 입에서 거짓과 사기만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자본시장이고, 여기에 각자 자신의 점포가 있어요. 점포는 손님을 기다립니다. 손님은 돈을 가지고 오고.

“저 어떻습니까?”라고 마치 창녀촌에서 창녀들이 화장을 하고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우리는 창녀를 욕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창녀는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하고 있는 거예요. 돈을 위해서 나의 전부를 바치는 거예요. 자본주의의 민낯을 최전선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모델들이 창녀입니다.

‘제 몸 하룻밤 가지시고 돈 주세요.’라는 창녀나, 롯데 그룹의 2인자로 비자금 마련한 사람이나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인간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돈이 권력입니다. 제가 수련회에서 마태복음 강의한 것을 책으로 내려고 제목을 ‘지극히 작은 권력’으로 정했는데, 제목이 너무 길다고 압력이 들어와서 ‘미미한 권력’으로 바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무런 권력이 없었어요. 빌라도가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을 풀어 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고 할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위에서 주지 아니하시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권력은 자아 1을 감추고 자아 2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교체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덮쳐서 교체하고 천국 백성 만드는 일과는 정 반대의 모습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시킬 때 자기 부인이 꿈자리가 시끄럽다고 벌벌 떨었어요. 최고의 권력자가 두려워 떤다는 말은 자아 2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예수님 앞에 서니까 자아 2는 부끄러워서 숨고 자아 1이 표면이 등장하지요.

주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어찌할꼬--” 권력이나 돈이 있더라도 이것은 나를 감추기 위한 방패요 가면이고 실제로 나는 겁도 많고 두렵습니다. 라고 할 때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 비로소 납득이 됩니다. 주님은 온 천하를 얻는 권력(자아 2)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밑에 숨어서 ‘이것만큼은 아니 되옵니다.’하고 벌벌 떠는 것 있잖아요.

이 도령이 춘향이에게 ‘우리 이 밤을 함께 지내자.’라고 하면 춘향이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하잖아요. 이처럼 우리가 ‘이것만큼은 못 내놓겠습니다.’ 라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것 내놓지 마세요. 율법은 ‘아니 되옵니다.’라는 것까지 찾아와요. 그러면 우리는 율법 앞에서 저항하고 반항하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찾으려고 하십니다.

과학수사대는 범인의 지문이나 증거를 찾지요.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착한 인간으로 달라지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반항하고 저항하는 그 요인이 누구인가를 들춰내는 것입니다. 나도 몰랐던 나의 자아, ‘에고’라고도 하는데, 에고는 슈퍼에고와 이드가 중재해서 그때그때 만들어 내는 것이 에고입니다.

이드(동물적인 욕망)와 슈퍼에고(윤리, 도덕)가 내 안에서 그때그때 균형을 맞춰 에고(자아)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이 자아는 결국 우리가 못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항하는 그것이 진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주님께 순종했습니까? 아니죠. 배신했어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지더라.’ 나는 양이라고 하지 마세요. 도망갈 때 양이 됩니다. 우리는 아직 도망치지는 않았잖아요. 그럼 아직 양이 안 된 겁니다. ‘나는 내 것 가지고 평생 살래요. 따라오지 마세요.’하고 도망칠 때 이것이 바로 12제자가 보여줬던 가장 양다운 모습이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제자들이 보여준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구원 받았다면 너희들도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본문에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2016. 9. 8. 09:34 녹취 마침)
 서경수(IP:175.♡.227.69) 16-09-22 10:13 
광주 강의(2016. 8. 26) 30-2

누가복음 8장 38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세대를 거대한 창고 또는 체육관으로 봅시다. 시간에는 3종류가 있는데, 아이온, 크로노스, 카이로스 이렇게 셋입니다. 왜 시간이 3종류가 있는지 따지고 싶지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가는 단선이 시간이지 어떻게 시간이 세 종류가 있는가?

단선으로 가는 것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아가지요. 물리학,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은 크로노스입니다. 그러면 크로노스만 있어도 전혀 사는데 불편이 없는데 왜 세 가지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인생의 끝에는 죽음이 찾아오지요. 나만 죽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다 죽지요. 그러면 그동안 사람들이 살았던 시간이 각자 있지만 이것은 삶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시간이지 죽은 후에는 뭐가 있는지 모른단 말이지요. 이 안의 범주 이것을 아이온, 우리말로 하면 ‘세대’입니다. 38절에 있는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할 때 저는 이것을 하나의 창고나 돔구장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과거 - 현재 - 미래가 의미 없어져요. 의미가 없어지면 스트레스도 걱정, 근심도 없어져요. ‘나는 과거에 이정도 기대했는데 현재는 요모양 요꼴이구나. 앞으로 내 장래는 어떻게 될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고민이지요. 개인적인 고민의 해답을 어떻게 찾는가?

나보다 많은 세월을 산 사람들에게서 힌트를 얻어요. ‘인류의 스승인 공자, 석가모니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이들 삶을 본받아야지.’ 라고 하는데, 이들이 인류 전체는 아니잖아요. 내가 괜찮은 사람 10명을 뽑아서 이들을 본받겠다고 하지만, 그 10명이 인류 전체입니까? 아니죠.

현재 세계 인구가 약 70억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대해 안다? 70억을 다 알아요? 내가 1,000명을 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는가는 1,000명이 보는 것이고, 10,000명이 보는 나는 다를 수가 있단 말이지요. 그리고 70억이 보는 나는 또 다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쉽게 정답을 내릴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든 예외 없이 다 적용되는 원리 속에, 어떤 체육관, 돔구장 속에 우리가 놓여 있으면 그게 바로 제대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면, 그 사람이 읽은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알지만 그 외의 것은 모르겠지요. 책이 한 두 권이 아니기에 다 읽지는 못하잖아요. 그 때는 ‘나는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하지 말고 ‘도대체 이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이것을 알게 되면 모든 인간은 그 세대의 영향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 행복에 연연하지 마세요. 자신의 인생 망가진 것을 보상받기 위해서 설치면 본인이 힘들어요. 자기 인생 때문에 자신이 힘든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게 됩니다. 내가 나의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이 모두가 시간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거에 얽매여 ‘나는 잘난 인간인데 왜 이렇지?’ 이런 생각을 해요. 모두 다 그렇습니다. 

수련회 때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했지요. 성냥의 한계 속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는 불행하고, 따뜻한 집 안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그들은 행복합니까? 아니죠. 어느 누구도 문제없는 사람은 없어요. 왜? 같은 세대에 속했기 때문이죠. 집의 벽돌 칸막이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가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지 넓은 집안에서 산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족쇄에 매여 사는 사람은 힘듭니다. 그래서 크로노스의 단선적 시간관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맙시다.

그러면 다른 시간은 뭡니까? 아이온과 카이로스가 있지요. 카이로스는 ‘때’를 말합니다. 한자로 ‘時(시)’입니다. 때는 사건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사건의 다발입니다. 제과점에서 식빵을 사면 ‘잘라 드릴까요?’ 물어요. 덩어리 채로 가져오면 뜯어 먹여야 합니다. 잘려 있으면 먹기 쉽지요.

잘라진 작은 식빵 하나하나를 사건으로 보면 됩니다. 오늘 아침 6시에 일어났다면, ‘6시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도 6시에 일어난 사건이 벌어졌구나.’ 7시에 식사를 하면 ‘오늘 아침은 된장찌개를 먹는 사건이 발생했구나.’ 9시부터 일을 하면 ‘일하는 사건’입니다.
말썽꾸러기 학생이 등교하면 선생님들이 “저 녀석은 오늘 또 무슨 사건을 일으킬까?” 라고 하지요.

그 학생만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매일 사건을 일으켜요. 사람들은 내가 보는 것만 생각하지 상대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잊을 때가 많아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다 사건으로 봅니다. 그렇게 보는 것도 여러 사건 중 하나입니다. 카이로스는 전도서 3장에 나오지요.

1절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이 구절에서 ‘때’는 ‘카이로스’입니다. 2절에 ‘날 때, 죽을 때, 심을 때, 뽑을 때’가 있고 3절 이후에 계속 때가 거론되지요. 이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전도서에서는 모든 것을 한 덩어리로 보지 않고 칼로 자르듯 하나하나를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면 내가 50년을 산 것이 아니고 하루라는 사건이 50년 누적된 것이 나의 삶입니다. 그러면 이런 반론이 가능합니다. ‘하루하루 50년을 사나, 50년을 한 묶음으로 사나 결국은 같은 것 아닌가?’ 라고.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50년을 살았어도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얇은 식빵이니까. 오늘 사는 것도 중대한 사건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감사케 합니다. 성도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감사가 나오면 성도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수련회 참석하고 해도 하루하루 감사가 없으면 성도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감사할 사건을 이미 부여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대상이 있지요. 그런데 성도 아닌 자는 감사의 대상이 없기에 자신에게 감사하는데, 이렇게 되면 자아 1이 자아 2를 질책합니다. ‘똑바로 해! 정신 차리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내가 나에게 매일 꾸중하고 벌을 세우고 채찍질 합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건입니다.

내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펼치시는 사건으로 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어떤 사건이든 주신 그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시간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과거 - 현재 -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은 잊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얽매이면 과거의 미련 때문에 현재를 감사하지 못하고, 내가 나를 구박합니다. ‘이 바보야. 그동안 뭐했니?’ 이렇게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카이로스는 뭐냐? 모든 것을 사건의 다발로 보기 때문에 내일을 보장 못해요. 내일 죽을 지 살지 몰라요. 어떤 사람이 졸음운전을 해서 내 차를 추돌하면 나는 죽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최근에 새벽 3시에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낮 2시에 지진이 일어났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사건이지요.

이 사건을 누가 예측했습니까? 아무도 예측 못했어요. 주님만 알고 계시지요. ‘하루하루 사는 것은 사건이다. 내일을 보장 못해.’ 주님은 이미 계획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당해봐야 압니다. 당하면 ‘사건을 당했구나.’ 이렇게 알면 되는데, ‘그 집에 놀러 안 가야했는데.’ 하면서 또 과거를 뒤져서 돌이키려 하고, 그 때만 피했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자신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자식 그렇게 키우는 것이 아닌데?’ 자식 키우는 것도 사건인데 왜 우리의 책임을 거론합니까? 교사들을 보면 1년 2년 된 분들이 책임감을 많이 느껴요. 10년 넘으면 별 책임감이 없어요. 교사 초년 시절에는 한국의 교육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 잘 못 가르치면 한국의 미래가 없다고 여깁니다.

크로노스를 생각하지 말고 카이로스를 생각하세요. 하루하루 주신 것 감사하며 사세요. 안 주셔도 되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또 주셨습니다. ‘또 하루를 살게 하시는구나.’ 사건은 주어진 것이기에 내가 책임을 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카이로스는 사건의 다발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자아는 손대지 말라’고 했지요. 이번 시간에는 ‘자기 일에 대해 자기가 책임지지 마세요.’ 

시간의 세 번째는 ‘세대(아이온)’입니다. 세대의 특징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일률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대입니다. 서로 비교하지 마세요. ‘저 사람은 참 성격이 좋다.’ 아직 나쁜 성격이 안 나올 상황이기에 좋은 성격으로 보입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은 DNA를 부여받았습니다. 나쁜 성질, 좋은 성질 다 같고 있어요.

과학적으로 70%는 유전적 요인이고, 30%는 환경적 요인에 의해 달라진다고 합니다. 사람이 상황이 달라지면 점잖은 사람도 어떤 짓을 알지 몰라요. 멀쩡한 레지던트 여 의사가 부모도 친구도 없는 곳에 오니까 배가 고파서 남의 집에 들어가서 라면도 끓여 먹고, 돈도 훔쳤어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배가 고프니까 평소에 하지 않던 돌발 행동이 나오는 거예요. 장발장도 배가 고프니까 도둑질을 한 거예요. 배가 고프면 그에 따른 범죄가 나오고 배가 부르면 배부르기에 나오는 범죄가 또 있어요. 그래서 범죄의 질을 가지고 따지면 안 돼요. ‘더 악랄하다. 참 못됐다.’ 따지는 것은 같은 세대 안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욥기에 나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이 “네가 정신 차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했다.”고 하는데, 이건 크로노스 관점입니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징벌로 이어진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욥의 관점에서는 맞지 않은 이론입니다. 욥이 하는 말이 “너도 나처럼 되어봐라. 하나님 원망 안 할 수 있는지.”

“네가 지금 배가 부르고 건강하고 자식들이 안 죽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 너도 나처럼 병들고, 자식 죽고, 재산 다 불타면 하나님께 원망이 나온다.” 이것이 욥의 말입니다.

성경에서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자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가 아픈데 손님이 왔다면 그 손님에게 희락과 온유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을까요? 손님 오는 것 자체가 짜증납니다. 오랜만에 손자, 손녀가 찾아오면 반갑고 좋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피곤합니다. 그래서 가면 더 좋습니다. 이게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카이로스는 사건입니다. 그럼 아이온은 뭐냐? ‘세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는데, 시간의 질, 시간의 성질을 언급할 때 ‘세대’로 표현합니다. 성경에서는 크로노스를 언급하지 않아요. 아이온(세대)과 카이로스(때)를 이야기합니다.

38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에서 ‘세대’와 ‘때’를 언급했어요. 예수님은 ‘카이로스’와 ‘아이온’으로 나타나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크로노스) 개념으로는 ‘때’를 마중 나올 수 없습니다. ‘때’는 우발적으로 들이닥칩니다. 갑자기 차사고 나는 것처럼 예상을 못해요. 성령의 오심이 이와 같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그동안 교회에서 헌금하고, 전도하고, 충성한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냥 성령이 오는 것으로 인하여 의인이 되어 천국 갑니다. 세리, 강도, 창녀 이런 사람들이 평소에 한 일이 뭡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기 위해 살았지요. 그런데 ‘때’가 되어 성령이 임하니 그들의 행위를 일체 따지지 않고 구원되었습니다.

수직적 은혜가 임한 것이지요.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듯이 위에서 은혜가 내리면 그 순간 믿음이 발생되면서 그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 얻은 사람의 과거는 뭐가 됩니까? 행함이죠. 과거에 무엇을 했건 ‘카이로스(때)’가 오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가 완전히 갈라지면서 그 안에 있던 음흉한 자아가 노출되는데, 주님의 긍휼이 나의 더러운 자아를 덮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속죄로 의인이 되어 구원 받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 되기 위해서는 나를 가르는 사건(때)이 있어야 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나의 과거에 행했던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아는 순간이 옵니다.

‘세대’는 시간의 성질이고 성격입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인간의 행위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네가 이런 인간밖에 안 돼!”라고 지적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이겨 낼 수가 없어요. 그 상황에 따라 적응합니다. 인간은 자아를 몰라요. 자아는 유동적입니다. 자아 1은 반발하는 욕망이고, 자아 2는 그때그때 유동적입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신하기 때문에 본인도 자신의 변화에 대해 놀랍니다. 사장 없을 때는 사장을 욕하다가 사장이 오면 아부의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본인도 사전에 예측 못해요.

성도다운 행위는 뭔가? 마지막에 도망치는 것, 이것이 가장 성도다운 거예요. 법적으로 따져서 이기려 하지 말고 도망치면 돼요. 제 말에 여러분들이 공감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이미 도망쳐 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도망치면서 자존심은 있어서 욕을 하지요. 마음은 이미 도망쳤어요.

성도는 도망치면 돼요.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속이거든 차라리 속아줘라.’ 이것이 바울이 성도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시비를 걸지 마라.’ 잘, 잘못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어차피 지옥입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표현했고.

여기에 속해 있는 모든 인간들은 음란하고 죄 많은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그 지배 아래 있고, 그 상황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자기가 속한 상황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이 보여줄 것은 뭐냐? 악하고 음란한 죄만 보여준다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악하고 음란한 죄만 보여주는 자다. 요한아, 너도 악하고 음란한 죄만 보여주는 자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공자, 히틀러, 나폴레옹, 슈바이처 가릴 것 없이 모든 인간은 악하고 음란한 죄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악하고 음란하다는 지적은 평소에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와는 너무 다르지요? 우리의 평가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자기보다 못 난 사람과 비교하면서 밝혀져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남과 절대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합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할 때, 과거에 내가 가졌든 세상관과 지금의 내가 가진 세상관과 비교해요. 이게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난 고향을 10세에 떠났는데 60세에 방문을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옛날에는 동네 골목이 굉장히 길었는데 나이 들어 가보니 너무 짧아요. 골목에서 본 먼 산은 동화책에서 읽은 왕자님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자신이 동화책에서 읽은 내용들로 산 너머를 꾸미게 되어 있어요. 꾸미는데 나쁜 것들은 전혀 없어요. 나에게 사랑을 준 아름답고 착한 분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거예요.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어른들의 이야기는 웃기고 재미가 있어요. 어릴 때 상처받는다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희망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실망을 느끼면 그 아이는 성장해서 큰 상처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때는 대부분 아이들이 귀염 받고 살지요. 그 귀여움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거예요. 루이 암스트롱이 불렀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누가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 갑니다. 서울 가면 누가 살 집을 줍니까? 수없이 많은 빌딩과 고층아파트가 즐비해도 내가 쉴 곳은 없어요. 그 때 보이는 것이 ‘서울의 달’입니다.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시골에서 서울로 왔는데 갈 곳이 없어요. 결국 서울 변두리 경기도 쪽으로 갑니다. 서울보다는 집값이 싸기에 일단 그곳에 터를 잡고 차후 강남 입성을 노립니다.

이때는 어릴 때의 꿈같은 세상은 깨집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꿈은 남아 있어요.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아름다운 세상, 이웃 아주머니는 전부 내 어머니 같고, 이웃 아저씨는 내 삼촌 같아서 어른들은 다 착하기만 했어요. 그런데 나이 50이 넘어서 현재 내가 보는 아저씨, 아줌마는 전부 사기꾼으로 보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기꾼 아닌 사람이 없어요.

입만 열면 거짓말입니다. 누구를 만나면 저 사람은 어떤 사기를 칠까 쳐다봅니다. 거짓말 하지 않고 진실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 정신이상자 아닌가? 저렇게 해서 밥 먹고 살까?’ 걱정이 되는 세상입니다. 누가 이렇게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까?

‘누가’에 본인을 포함해서 나와 똑같은 인간들이 작당해서 만든 세계가 악하고 음란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가 없어요. 너는 너 환경 속에서, 나는 내 환경 속에서 사건(카이로스)이 터져서 하루하루 살아왔을 뿐입니다. 삼십 초반에 아이를 낳고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너는 절대 여우같은 인간이 되면 안 돼!’라고 해놓고 20분 후에 옆집 아줌마와 싸울 때, 엄마가 여우로 변해서 싸웁니다. 아이는 이 모순점을 어떻게 해소합니까?

‘아기야, 동화는 동화고 현실은 냉혹하단다. 너도 강하게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점점 더 개인 점포를 가지고 시장터로 나서게 됩니다. 개인 점포를 가지면 이웃과 경쟁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스트레스와 피곤은 누가 해소해 줍니까?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 땅에서 네가 바르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착하고 바른 삶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너 자신을 몰라서 일으키는 착각이고, 주어진 환경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는 살아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자체가 죄의 유발자입니다. 부부가 같이 식사를 해도 방구 끼면 짜증나요. 여름 열대아가 지속되는 밤에 아무리 다정한 부부라도 같은 침대에서 잠자는 것은 고통입니다. 떨어져 자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지요.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자기 몸이 힘들 때 주변에서 귀찮게 하면 죽이고 싶어요. 칼로 죽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으로 죽이고 싶어요. 이것은 참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인내를 선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늘을 봐요. 악하고 음란한 죄 많은 세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제발 네 스스로 죄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창고에 갇혔는데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해결책이 없어요. 예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인간은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예수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 믿는 예수는 우상입니다.

제가 지금 시비를 거는 것이 뭔가 하면, 내가 어릴 때 동화 속의 세계에 빠져 모든 것이 아름답고 착하게 보였다는 자체가 우리 자신을 모르고 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더 가중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존재 자체가 죄를 유발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우리 삶은 아이온과 카이로스의 만남입니다. 모든 인간을 세대(아이온)에 가두어 놓고 사건(카이로스)이 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사건인데 그 사건은 단독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뜨개질을 할 때 같은 동작을 반복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TV를 보면서 뜨개질을 해요. 대나무 젓가락처럼 생긴 두 개의 막대기가 실을 감으면서 천이 짜여지면서 면적을 채워나가지요.

인간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라면 이것은 온갖 사건들이 얽혀서 밀도가 증강됩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업이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얽혀서 사건화 됩니다. 밀도가 증강되지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자기 촉매’라고 하는데, 즉 자기는 변하지 않으면서 남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개인 중심으로 볼 때는 이 말이 맞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때(카이로스)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8장 끝에 보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조세계가 있게 한 근원적인 사건(카이로스)은 여기에서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피조세계 자체에서는 찾을 수가 없고, 이것은 하나의 세대에 불과하고 이러한 세대를 있게 한 원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비로소 모든 그물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짜여졌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38절 중간에 보면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이라고 했는데,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한 것인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부끄러운 거예요. 왜 부끄러운가 하면, 이 세상에서는 크로노스, 즉 과거에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따라서 현재 그 결실을 따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버리라고 했지요. 남과 비교하면 스트레스만 쌓이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건입니다. 사건이 몰아세우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건은 어떤 성질이 주어지는데, 부끄러울 수밖에 없단 말이지요. 주님의 영광과 거룩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주님의 영광 앞에서는 내 삶이 ‘악하고 음란하게 나만 챙겼습니다.’라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혜택이 있어요. 뭐냐? 주님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렸지만 사실 내가 달려야 할 자리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심을 내가 저주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이미 심판이 지나갔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몽당 책임을 졌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인간밖에 안 되니까 주께서 대신 책임을 지신다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오는 세대’의 천국 백성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은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해주셨습니다.

인간은 천하를 얻어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 원인은 이 세대에 영향을 입기 때문이지요. 이 세대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제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곧 죽어도 잘난 체해야 만족해요. 있는 척하고, 가진 척하고, 아는 척하고.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비교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지요. 미리 실컷 부끄러워한다면 나중에 천국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께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이 사건은 역사상 어떤 인간에게도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사건인데 그 사건에 준해서 볼 때에 주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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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있어서 답변을 드립니다.
38절에서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했는데, 왜 목사님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부끄러워하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다르게 이야기하십니까? 라고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상당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질문을 당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오순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그들은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세대에 속하지 않고 오는 세대에 속하게 됩니다. 오는 세대에 천국이 있는데, 오는 세대에서 이 본문을 다시 해석하게 되면 이 본문이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의 진면목이 예수님 말씀에 의해서 노골적으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자신들이 주의 말씀을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세대에서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해서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는 세대에서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인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차이점을 마가복음을 통해 전하는 것입니다.

(2016. 9. 22. 08:4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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