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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9 02:21:15 조회 : 1034         
멕시코 감옥 16102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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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4.♡.78.33) 16-11-09 15:52 
광주 강의(2016. 10. 28) 32-1

지난 시간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해 같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알았지요. 해 같이 빛나는 모습은 좋은데 그 메시아가 이 땅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몰랐어요. 자신들이 모시는 스승이 해 같이 빛나니까 초월적 존재로 이해했겠지요? 예상 밖의 큰 영광을 본 겁니다.

영광을 봤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할 가능성도 컵니다. 영광을 봤을 때 무엇이 안 보이는가 하면, 본인의 모습은 안 보이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는 모르고,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진짜 나로 여기고 여기에 영광을 더하면 이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갈 때 자기 죄를 알기 위해 갈까요? 아니죠. 추가적인 혜택과 장래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기 위해서 가잖아요.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교회 가는 사람은 없어요.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예수님의 멋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현재 자신에게 주님의 영광을 추가하면 멋진 천국 삶이 보장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여주신 이유가 제자들이 실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공식이 성립되는가 하면, ‘주님의 영광 + 나 = 실망’이 됩니다. ‘내가 굉장히 가난한데 갑자기 큰돈이 생겨서 재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이건 인간들이 기대하는 공식이고, 하나님의 공식은 ‘내가 가난한데 큰돈이 생겼다. 그래서 불행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드라마 [질투의 화신]을 보면 공효진이 조정석과 또 한 남자를 좋아하는데, 시청자들은 공효진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 공효진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진짜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해서 살았다고 합시다. 그럼 행복할까요? 자기가 원했고, 또 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느냔 말이지요. 안 되잖아요. 여기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내가 이런 행복을 감당할 자질이 있는가?’ 이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지요.

사랑, 돈, 권력 등 무엇이든 나에게 오면 그 모든 것이 행복의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상상을 해요.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으면서 ‘나는 죄인이구나.’를 깨닫는 아이는 없어요. ‘빨리 어른이 되어 왕자님과 결혼하는 예쁜 신부가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요.

여기에서 어떤 요소가 빠져 있습니까? ‘내가 과연 그런 행복을 감당할 수 있을까?’ 또는 ‘내 행복이 깨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은 없지요. 일단 챙기고 보자는 심정뿐입니다. 그래서 가수들 중 인기를 얻었는데 그것이 감당이 안 돼서 제주도에 가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해 같이 빛나는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줬습니다. 베드로는 오해를 했지요. ‘영광과 내가 결합되어 예수님과 함께 살면 천국의 삶이 펼쳐진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갖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의 이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인데 땅에 내려와서 하신 말씀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는 것입니다. 보여주신 후 ‘봐서는 안 될 것을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주님이 보여주신 후에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감당이 안 되는 영광을 너희들이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의 영광을 감당하려면 그것을 본 제자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천국에 부합되는 인간성으로 바뀌어야 되겠지요. 오늘 강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살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천국의 영광을 미리 보여줬어요. 그래서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요. 그런데 주님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게 뭐냐 하면, 미래의 영광을 현재는 감당 못한다는 것입니다.

감당 안 되는 상태에서 미래의 천국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변화산의 영광 된 주님을 보았어도 십자가 지시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까지 했어요. 이게 꼭 필요한 과정이란 말입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 주님은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니까 천국이 좋다고 하는데 ‘정말 천국을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겠어?’ 우리는 감당 못합니다. 감당 못하는데 주님께서 강제로 집어넣어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변화가 이어져야 합니다. 감당 못하는 자를 감당하게 바꾸어주는 것이 꼭 필요해요.

그 바꿔주는 절차 가운데 “나는 예수 믿은 적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고,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고, 천국이 있다면 주님께 부탁해서 그곳에 가려고 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을 막는 장애물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한 나의 이상적 자아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막습니다.

‘이상 자아’는 ‘자아 이상’으로 바뀐다고 제가 라캉 강의할 때 언급했지요. ‘이상 자아’는 내가 상상하는 자아가 아니고 남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요구하는 거예요. 인간은 남들의 요구에 맞추도록 양육되었어요. 

우리나라 옛날 부부들을 보면 참 이상한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남편이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화를 내며 욕을 하지만 아침에 해장국을 끓어줍니다. 앞뒤가 안 맞아요. 이게 정인지 사랑인지 모르겠어요. 왜 이런가 하면, 예뻐서가 아니고 ‘당신이 원하는 아내 상은 이런 것 맞지?’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결혼을 해야 인간이 됩니다. 결혼을 해야 내가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휘둘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휘둘리며 사는 것을 ‘윤리성’이라고 합니다. 이 윤리성이 내 본질처럼 장착이 되면 이것을 ‘도덕’이라고 합니다. 집안에 식구가 많아 대가족인 경우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늘 눈치를 보면서 살기 때문에 행동이 어른스럽습니다. 그리고 두루두루 모든 상황을 고려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압니다. 이것을 ‘사람 사는 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손 가정에서 단출한 식구로 사는 집안에서는 아무래도 남을 배려하고 행동하는 것을 잘 배우지 못해서 미숙합니다.

‘이상 자아’는 남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자아 이상’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입니다. ‘자아 이상’에서 새로운 환경이 오면 ‘이상 자아’로 바뀌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치시킬 때 ‘자아 이상’이 됩니다. ‘나는 저렇게 되고 싶었어.’ “아이고, 네가 설거지를 다 하다니?”라고 하면, “나는 원래 그러고 싶었어요.”라고 합니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 주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상 자아’지요.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 이제는 나의 기쁨이 되는데, 이것이 습관이 되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아 이상’으로. 윤리와 도덕을 합치면 이것이 사람 사는 도리라고 했지요.

처음부터 나는 이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도리’와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제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그 집단의 기준, 표준으로 행세하면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동서 중 제일 연장자가 이런 자유를 느낍니다. “동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지.” “형님, 제가 아직 형님께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안 맏며느리의 행복이고 자부심입니다.

이런 인간세상의 ‘자아 이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겠습니까? 감당 못해요. 여기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으면 12제자도 구원 못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은 “너희들이 지금 시도하고 있는 ‘이상 자아’의 세계, 너 자신을 중심으로 벌이는 세계가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10절을 봅시다. “너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었지요.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세계는 죽음이란 간격이 있습니다. 단절된 거예요. 이쪽과 저쪽이 연결되지 않은 거예요.

인간에게 하나님의 세계는 닫힌 공간입니다. 닫힌 공간인데 여기에 권력적 이미지를 제공하면 갇힌 공간이 되겠지요. 우리가 아는 갇힌 공간의 대표적 장소는 감옥입니다.

천국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 천국에 칸막이를 세우시고, 이것을 ‘죽음’이란 단절로 말씀하셨고, 저는 이것을 ‘감옥’으로 표현했지요. 우리나라 감옥을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나라 감옥은 각각의 방들이 있어요. 5~7명이 같은 방을 사용하는데, 말썽을 일으키면 독방에 가둡니다.

이런 감옥 말고 옛날 멕시코 감옥은, 이 세상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해요. 멕시코 감옥은 칸막이만 있고, 이런 칸막이가 원형으로 여러 개가 있는데 군인들이 지키는데 이 칸막이를 벗어나면 총으로 쏴 죽입니다. 그런데 멕시코 감옥의 특성이 뭔가 하면,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어요.

멕시코 감옥은 밖에서 일거리를 제공해요. 주로 쓰레기 분류 수거하는 일입니다. 이러면 이곳은 일종의 산업체가 되지요. 바깥세상에서는 더럽다고 아무도 손대기 싫어하는 업무를 맡겨놓고, 겨우 목숨 연명할 만큼의 세끼 식사를 제공합니다. 갇힌 감옥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아파트가 생기고, 병원이 생기고, 손톱 손질하는 곳이 생기고, 위락시설이 생기고, 심지어는 파티를 즐기는 재벌급 인물들도 생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면, 일주일에 한 번 가족들이 면회를 올 때 사식정도가 아니고 돈이 들어와요. 그러면 죄수들은 그 돈으로 간수들을 매수해서 힘든 일에서 제외되고, 술과 담배가 은밀하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나름대로 휴식을 즐기는 공간도 있고, 매춘도 있고, 심지어는 간 이식까지 합니다. 여하간 별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곳을 벗어나면 사살됩니다.

이 감옥에서도 돈만 있으면 자유를 느낍니다. 이곳에서 권세를 부리고 왕으로 군림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모습입니다.

질문합니다. 감옥에서 재벌급 생활을 하는 죄수가 감옥을 벗어나서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감옥에서 계속 재벌급 생활을 지속하기 원할까요? 감옥 안이 좋아요. 이게 오늘날 인간 사회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있죠.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합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네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다.”라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다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 호의호식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며  즐겁게 살기 때문이지요.

부자는 이런 세상에서 떠나기 싫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는 이곳에서 나가기를 원할까요, 이곳에서 부자 되기를 원할까요? 부자 되기를 원합니다. 왜 그런가? 어릴 때부터 부와 권세를 누리는 자의 즐거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복의 내용을 자신들이 보고 듣고 소망한 것에서 찾기 마련입니다.

지난 수요 설교에서 꿈과 희망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고 했어요. 인생을 살면서 ‘저 언덕만 넘어서면 평안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넘어서면 또 언덕이 나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길을 가는데, 기다려도 내가 기대한 것은 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계속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메시아가 이미 왔다고 하니까 그들이 화가 난 거예요.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에 의미가 있지 그것이 완성되면 안 돼요. 완성되면 기다릴 필요가 없어지니 무슨 힘으로 삽니까? 어떤 부부가 12명의 자녀를 낳았어요.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왜냐? 자식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중독’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중독되어 있어요. 기도 중독, 돈 중독, 알코올 중독. 

‘자아 이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이상과 현재 부실한 나를 늘 바꿔치기 하겠다는 희망으로 삽니다. 나의 목표가 된 자아상과 지금의 허접한 내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오늘도 나를 살게 만듭니다. 삶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 ‘자아 이상’의 모델은 어디에서 정보를 수집한 겁니까?

이것을 ‘정보 누적’이라고 하는데, 정보가 계속 누적되면 감당을 못합니다. 새로운 정보가 계속 들어오니까. 그리고 거기에 일치해야 남들 앞에서 ‘나 어때?’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이 ‘이상 자아’지요. 내 모습이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여자들이 사진 찍을 때 그냥 찍지 않습니다. 50대 여자는 반드시 명품 가방이나 옷을 걸치고 사진 찍습니다.

아가씨들은 셀카 찍으면서 각도를 고려해서 최대한 선이 예쁘게 나오도록 찍습니다. 이것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내가 없어요. 남들이 만들어준 나와 지금의 못난 나를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저녁 7~8시 TV 홈쇼핑을 보면 주로 나오는 것이 서유럽 여행상품을 선전합니다.

서유럽의 대자연과 아름답고 고풍스런 건축물 속에 자신이 들어가면 꿈꾸던 ‘이상 자아’가 되기 때문에 여행사 광고에 관심이 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갇혀 있고, 우리 삶은 교도소 생활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바깥에 있습니다. 감당하겠습니까? 감당 안 됩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이 세상을 떠나기 싫어요. 심지어 교회에서 복음 전하면 ‘너나 천국 가라.’고 하면서 쫓아냅니다. 왜냐? 감당이 안 돼서 그래요.

자, 그러면 주님의 작전은 뭡니까? 우리 개개인을 설득해서는 설득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너희가 악한 권세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겠지요. “베드로, 요한아! 네가 있는 세상에 내가 들어왔는데, 세상이 너희들에게는 손대지 않고 나를 죽이려 한다.” 마가복음 9장 9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멸시가 뭡니까? 우리 동네 사고방식과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말과 행동과 의식이 안 맞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 구원 받아야 할 12제자도 감옥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헛소리를 했잖아요.

주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바꿔놓는 작업을 예수님이 이제 실시하십니다.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니까 제자들이 구원 받았지요. 이것이 우리가 주목해야할 지점입니다. “주님! 안 됩니다. 우리는 ‘자아 이상’ ‘이상 자아’ 외에 다른 꿈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태어났기에 이 땅에서 멋있게 살고 성공하고 싶어요.”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이 희망을 주님이 도와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여기지만 이 희망을 좌절시킨다면 주님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내가 요청하면 오시되 내 영역에 함부로 침범하지는 마세요.’라는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이런 완악함을 기어이 들춰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걱정이 될 거예요. ‘주님을 믿다가 실망해서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요한복음 13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랑의 주체자가 주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주님이지요. 주님이 약속했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끝에 성령이 오시지요. 성령이 오시면 끝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암세포처럼 점점 퍼집니다. 처음에는 몸에 암세포가 들어왔지만 나중에는 몸 전체를 암세포가 차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주님의 종, 성령의 종이 됩니다. 내 안에 들어왔던 성령이 그냥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점차 확대시켜 나갑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는데, 이 사랑은 자기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만약 끝까지 사랑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자기 사랑에 내가 포함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이 질문을 예수님께 드리면 어떻게 답하실까요? ‘넌 누구야, 나가!’라고 하실 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예수 믿는 나만 자각되고 느껴진다면 그는 다른 예수를 붙들고 종교적 씨름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씨름하는 자기 자신만 의식되기 때문이지요. 아까 이야기한 ‘이상 자아’ 중에 자신의 종교적 노력도 포함됩니다.

“엄마, 아빠는 내가 교회 나가고 예수 잘 믿으면 좋아하시겠지? 내 부모님이 이걸 원했어.” 그래서 ‘부모님이 원하는 것 해 드릴게요.’라고 한다면 이게 믿음입니까? 믿음 아니죠. ‘부모가 아무리 원해도 나는 절대 안 믿을 거야.’라고 다짐을 해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주님의 뜻일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도라면. 

이처럼 복음의 내용에는 자기의 모든 행함이 무용지물이란 것이 담겨야 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한 모든 것이 내 구원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느껴져야 돼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억지 춘향 격으로 하는 것, 이것이 ‘이상 자아’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예수님이 약속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내가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헛수고임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수긍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주님을 붙들 이유가 없고, 붙들어도 붙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존재는 깃털같이 가볍습니다. 내 인생은 없고 ‘주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하시는 일에 내가 포함되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내가 기관차를 모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모는 기관차 속에 한 개의 좌석을 배정받아 앉아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은, 예수님이 ‘내 사람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이 말씀을 실현하는 과정 속에 도구로 들어가 있어요. 성령이 오시면 본인의 신앙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제 나는 믿는다는 소리는 안 한다.’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서 보여주기 위한 쇼를 벌입니다.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어요.

‘옷이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머리 모양이 어색합니다.’라고 하면 화를 내는 이유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네킹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철학자 홉스가 ‘인간은 모두 이기주의자다.’라고 주장하니, 어떤 철학자가 반론하면서 ‘당신은 왜 모든 인간을 이기주의자로 몰아세우나. 이타주의자도 있다.’고 하니까, 홉스가 ‘당신은 밤에 잠잘 때 문을 닫고 자나, 열어놓고 자나?’라고 되물었어요. 이 한마디로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습니다.

문을 왜 닫지요? 누가 들어와서 자신의 것을 가져갈까 두려워서 잠그잖아요. 그러니 이기주의지요. 남을 위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밤에 문을 잠그고 잔다는 자체가 이기주의고, 밤에 자식이 늦게 올 때 걱정한다는 자체가 이기주의에요. 홉스는 말했습니다. ‘이기주의자 인간에게 남는 것은 경쟁뿐이다.’

이 말은, ‘살 놈을 살고 죽을 놈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이 평등합니까? 이건 관념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평등해요? 정주영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몇 사람에게 각자 돈 2천만원 나눠주고 몇 년이 지나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거지가 되어 있다고.

이 세상에 평등은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없는 평등을 주장하면서 출발하니까 생긴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가? 안 되니까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거예요. 조선소에서 배를 만드는데, 용접 기술도 없는 인간이 용접한다고 설치면 쫓아내야 됩니다. 그런데 쫓겨난 사람은 노동부에 고발하고 시위를 합니다.

그런데 기업주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사람은 추방시키는 것이 당연해요. 평등은 없고, 그 상황에 적합한 사람은 살아남고 그 외에는 죽든 말든 추방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평등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6. 11. 9. 15:16 녹취 마침)
 서경수(IP:61.♡.165.118) 16-11-23 08:42 
광주 강의(2016. 10. 28) 32-2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감옥에 갇혀서 세상 경쟁에 부닥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주시니까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한 거예요. 이제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되셨고, 우리는 그 분의 제자들이고.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이 영광스런 자리에서 내칠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은 인식할 때 그 예수는 ‘다른 예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 자체가 메시아가 아닙니다. 존재에서 기능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멸시받고 죽임당하는 기능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베드로도 존재를 포기하고 기능으로 분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방식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다.’라고 할 때는 ‘이상 자아’ 혹은 ‘자아 이상’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기능이 되면 ‘이상 자아’는 스쳐가는 하나의 풍경화 같은 거예요. 이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차를 타고 가면 풍경들이 지나가잖아요. 어떤 방향으로 달리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세상 풍경,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게 이끌림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이죠. 로마까지 끌려갔으니까.

예수님의 기능이 베드로에게 덮어씌워지면 복음의 전달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증인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흔히 교회에서 보면 자기 존재를 들이밀면서 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예수님 알면 제 인생은 어떻게 바뀔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건 ‘이상 자아’입니다.

남들이 기대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내 힘으로는 안 되니까 주님이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거예요. 마가복음 9장 18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려고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못 고쳤지요. 그러니 이건 예수님의 기능과 제자들의 기능이 다른 노선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제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못 쫓아냅니다. 귀신과 한 통속이니까 나갈 리가 없지요. 귀신들도 알아요. 예수님이 자신을 쫓아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자신들도 행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어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예수 믿는 것입니다. 복음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 예수님이 다 이루셨으니까. 운동도 할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정치도 할 수 있는데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무능한 자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무능하다는 말은 복음의 기능이 나에게 도달되어 발휘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무능해야 주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복음에 대해 유능하다면 복음의 증인이 아닌 나의 증인이 됩니다.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믿게 했습니다.” 이렇게 돼요.

사도 바울이 손수건으로 병든 자를 고쳤는데 사전에 바울이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알았습니까? 상상도 못했어요. 따라서 복음의 행적에 대해서 바울은 무능한 자가 되는 거예요. 계속 무능한 자로 있어야 복음만 증거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한 자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주하게 설치면서 뭔가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존재를 기능으로 바꿉니다. 제자들에게 뽑아낼 것은 뭔가? 죄를 뽑아내요. 예수님에게서 뽑아내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어 질 때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애굽 땅에 애굽 사람들과 히브리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린양의 죽임이 오니까 둘 사이가 나눠집니다.

지금도 세상과 성도가 갈라지는 것은 성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이 얼굴을 내밀면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나눠지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 말은 격리조치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격리조치 당하면 친구, 친척, 가족, 이웃이 차츰 떠납니다.

떠난다는 말은 평소 그런 자들의 존재가 나의 ‘이상 자아’를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경쟁에 내몰리게 했어요. 항상 경쟁해야 하고, 그들의 요구에 도달해야 하는데 힘이 부족하니까 변명하게 되고 그런 식이 된단 말이지요.

오늘 강의 순서는 이렇게 정해졌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존재를 기능으로 바꾼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베드로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해같이 빛나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 여기가 좋사오니 --’ 이건 예수님의 존재만 본 거예요. 존재를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기 등장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차 길 2개가 나란히 가다나 한 길은 광주로 가고, 한 길은 부산으로 갑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선이 2개가 아니고 1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가려면 예수님이 마련하신 연결고리, 즉 선지자 노선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말라기에 보면 이 선지자 노선에 등장하는 자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다리를 만들면 예수님의 자기 사람은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끝까지 붙들어요. 엘리야의 기능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와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이뤄지는데, 화목제물은 마지막 제사로 하나님께 바쳤던 그 제물을 하나님이 다시 백성에게 나눠줌으로 그것을 먹는 순간 하나님과 같은 양식을 먹는 것이 되어 하나님과 백성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하나가 되는데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것이 화목제물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화목제물의 떡을 나눠 먹음으로 주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떡은 주님의 몸이고, 주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서 그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백성들이 먹지요.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선한 신, 악한 신, 즉 선악적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신은 수용하고 악한 신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약속하면서 선과 악은 하나님 아들 차원에서 해석하는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선악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선악체계는 생명나무화 되게 하고 생명나무화 된 분이 오셔서 불쌍히 여김으로 영생 주는 방식을 아들이 이루시기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예수님의 주 되게 하심이 아버지의 뜻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심어놓고 마귀로 하여금 걸려들게 만든 겁니다. 선악적 개념으로 바르게 산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해서 구원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지자는 특별한 기능이 있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합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이 일을 하는데 그가 누구지요?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멸시했지요.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기다렸습니까, 엘리야를 기다렸습니까? 엘리야를 기다렸지 세례 요한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 온다는 말은 없어요.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아닌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먼저 믿어야 돼요. 세례 요한의 존재가 아닌 그분의 기능을 봐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재벌이고 인물 잘 났고 이런 것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란 점에서 다 평등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는 기능이 작용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끝까지 사랑하는 기능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왔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엘리야를 임의로 대우했어요. 이 말은, 주님 보시기에 이 세상이 둘로 나눠져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백성이 두 노선으로 갈라져 있다는 거예요. 누구 때문에 갈라졌습니까? 예수님이 개입하니까 둘로 나눠지는 거예요. 복음이 전파되니까 광주 시민이 둘로 나눠지는 겁니다.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은 둘로 나누겠다는 거예요. 둘로 나누면 숫자가 0이 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한 명도 없습니다. 0입니다. 세례 요한의 기능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구원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 될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주님은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낸 겁니다.

엘리야의 기능이 뭐라고 했죠?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죠. 그러면 자녀가 몇 명입니까? 없어요. 세례 요한을 배척했으니까 자녀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의 기능을 예수님이 인수 받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 세례요한’이냐, 아니면 ‘엘리야 = 예수님’이냐?

엘리야는 누구와 일치됩니까? 세례 요한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세례 요한이 실패한 일까지 예수님이 다 담당하십니다. 9장 12절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반드시 말리기의 예언대로 성취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지요.

구약 전체를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겁니다. 예수님이 엘리야가 되고, 메시야가 되는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엘리야 안에 메시야가 내포되어 있어요. 겉은 엘리야지만 속에는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엘리야가 어느 시대 사람입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 800년 사람입니다. 그런데 또 엘리야가 온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봐서 옛날의 그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또 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다윗이 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온 분은 다윗이 아니고 다윗의 후손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존재로 볼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봐야 합니다. 과거 다윗이 했던 기능을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한다는 것이지요. 다윗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활동하도록 설계한 분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이기도 하고, 또 다윗의 주가 됩니다.
 
엘리야가 왔을 때 백성들이 거부했다. 그러면 엘리야가 와서 실패로 끝났는데, 예수님은 실패로 보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는 일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린다고 했으니까, 자녀 만들기를 누가 실시하는가? 예수님이 실시하십니다.

없는 자녀를 만드는 거예요. 없는데 이것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생길 수 있음을 감안한 없음입니다.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이 땅의 천국 모습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 믿는 복된 자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이 땅에 없는 것을 있음으로 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보이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을 볼 때 땅에 속한 것은 이미 죽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바울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존재로 만난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만났습니다. 내가 핍박한 예수를 만나면, 장차 본인이 당해야 할 심판을 앞당겨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사울은 심판 받은 자리가 됩니다. 즉 사울이 지옥의 자리가 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말이 맞아요.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곧 지옥이에요. 본인이 지옥으로 심판을 받았으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필요한 요소가 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사울이 있는 죄의 자리가 없음으로 표현된 완성의 자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어서 천국 가겠다고 하니까, 즉 자기 존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천국 가려고 하니까 안 됩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해서 천국이 감당 되겠습니까? 그러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안 됩니다. 천국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경지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어떤 사람은 ‘성령 받으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도 있는데 목사님은 왜 자꾸 못 한다고 합니까?’라고 해요.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보다 더 지키기 힘든 것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없어요.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염려하는 것은 지옥 갈 이방인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염려하지 않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눈만 뜨면 염려합니다. 왜 염려하고 두려워하는가 하면, 우리가 길들여져서 그래요. 어릴 때부터 남들이 요구하는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만 남들에게 인정받는 세상 속에서 살아왔기에 늘 새로운 명령과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험이 없으면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이 이번 겨울수련회 교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물리학의 진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공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양자물리학에서는 진공 속에 무엇이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 힉스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가 왔을 때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했다는 것은, 엘리야가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예수님 노선이기 때문이고, 그 외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과 다른 노선입니다. 따라서 이쪽 노선과 저쪽 노선 사이는 끊어져 있어요. 임의로 대우했기에 끊어졌어요. 그런데 그 연결 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누가 하는가?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지진이 일어나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사랑을 ‘성령의 인 치심’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했지요. 약속이 먼저 있고, 다음에 성령이 도장을 찍어요. 약속이 뭡니까? 북쪽은 이스라엘 되게 하고, 남쪽은 유다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확정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하시는 일의 재료가 될 뿐입니다.

우리를 죽이든 살리든 주님의 완성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12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능이 펼쳐집니다. 마가복음 9장 9절에 보면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님의 기능은 죽었다가 살아나지요. 이 기능이 성령에 의해 반복됩니다. 우리는 그냥 늙어가고 있을 뿐인데 우리가 과연 죽었다가 살아났는가? 존재가 아니고 죽었다가 사는 기능을 반복해서 보여주면서 평생을 살아요. 그럼 예수님은 왜 죽었습니까? 말씀에 입각해서 죽었지요. 즉 죄 때문에 저주 받아 죽었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저주 받아야 하는데 긍휼을 입어서 구원 받는다.’는 이것이 우리의 남은 인생에서 반복됩니다. 그럼 우리가 할 것은 뭐냐? 내가 저주 받는 이유와 구원 받는 이유를 양쪽 다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그는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저주 받는 이유는 뭡니까? 이방인들이 하는 염려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주 받는 것이 마땅하지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몰라야 하는데 그게 안 됩니다. 기도해놓고 응답을 생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은 응답을 생각하며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대 없는 기도는 없어요. 모든 기도 속에는 기대를 품고 합니다. 기도는 기대와 같은 의미입니다.

땅의 노선에서 주님의 노선으로 갈아타려고 합니다. 언약이 요동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기능이 나옵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멕시코 감옥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 바깥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감옥 안의 세계가 전부입니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비유처럼.

멕시코 감옥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감옥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의 전부입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그곳에 갇혀 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꿈이고 소망입니다. 아는 것이 이 세상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했는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내가 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조금 짓고 많이 짓고의 문제가 아니고 죄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이 자체가 저주고 지옥이에요. 따로 지옥에 갈 것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 죽는 그 자체가 지옥이에요. 인간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지옥을 보는 거예요. 정치판이 전부 지옥입니다.

세례 요한이 왔다가 튕겨나갔지요. 왜 세례 요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선지자는 메시아가 아니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대속의 죽음이 없습니다. 죄인에게는 대속의 죽음이 없으면 하늘나라 못 갑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구원 못 받습니다. 누가 대신 죄 값을 치러야 구원 받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찼음을 보여주었지요. 세상은 예수님 노선을 싫어한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한 세례 요한을 죽였어요.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 자체가 죄에 갇혀 있고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들어오셨고, 또 탈출하셨습니다. 이런 능력이 성도에게 장착되어 성도의 기능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멕시코 감옥도 보여주고 예수님의 영광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복음의 광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괴롭게 했던 마귀가 이제 성도에게 달려들어 성도를 괴롭힙니다. 천국의 광체 앞에 이 세상은 감옥이란 사실을 폭로하고 감옥의 담을 허물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노선과 유일하게 통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죠. 복음이죠. 그래서 사단은 이 복음을 가로막습니다. 즉 ‘죄인이란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선악체계에 의해서 ‘헌금하는 것은 착하고 헌금 안 하면 나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헌금하는 것도 죄고 안 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런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떤 분이 제게 시비를 걸었어요. ‘왜 목사님 설교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십니까?’ 이 사람은 ‘자아 이상’에 빠져 있어요.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목사의 설교는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제 설교를 들어보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요. 그러니 ‘당신이 나에게 맞춰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서 제가 이해될 수 있게 설명했습니다. ‘나이 25세 때와 55세 때의 세상 보는 눈이 다릅니다. 젊은 시절에는 필요한 것만 알면 된다고 하다가 나이가 들면 세상이 이런 면도 있구나를 아는 것처럼 설교도 처음부터 다 이해할 수는 없고 자꾸 듣다보면 점점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겁니다.’

젊은 시절 이해하는 복음과 나이 들어 이해하는 복음이 달라요.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것이 다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 아무 필요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 주께서 매일 살려 주시는데 내 노력이 주님의 공로를 가린다는 점에서는 젊으나 늙으나 똑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희망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 어떤 희망을 갖습니까? ‘저 녀석들이 성공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저주 받아야 하는데 매일 용서 받음으로 내 안에서 예수님의 기능이 발휘되어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먼저 보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엘리야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모든 기능을 예수님이 하심으로 자녀가 생깁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없던 자녀가 발생되는데, 이 자녀의 특징은 모든 것이 주님의 능력임을 고백하고, 본인이 그 증거물인 것을 알지요. 이 사람은 천국 가기 전에 이미 천국에 입성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이기에 복음만 전하면 멸시당하고 미움 받는 기이한 현상을 당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11. 23. 08:1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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