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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6 01:25:37 조회 : 906         
모의고사 161125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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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4.♡.78.120) 16-12-01 10:21 
광주 강의(2016. 11. 25) 33-1

마가복음 9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고쳐 달라고 부탁했는데 못 고치니까, 이제 예수님께 찾아왔어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은 귀신들렸다고 단정을 했고, 그 귀신을 나가게 해달라고 했고,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이 세대’로 바꿔요. 이 세상은 공간적 범주인데, 이 세대라고 하면 이 세대 말로 다른 세대에서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렸다가 나갔다는 것은 오는 세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이 세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세대의 문제점은 귀신 들린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귀신 들린 것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이 세대’라는 말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19절에 보면, 이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하면 ‘믿음이 없는 세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오시기 전 인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똑똑한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부자냐? 할 때, 이 세상 외에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을 전부로 보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고,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는데 어떻게 찾는가? ‘나는 여기 있다. 그러니 그냥 살자.’ 이렇게 하지는 않아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어요. 그래서 사는 보람도 느낍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만들고 구성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점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철없는 유치원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는데, 예수 믿는 할아버지가 “너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갈 건데 열심히 공부해서 뭐하니?”라고 했다면, 말은 맞는데 다른 가족들이 ‘아멘’하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결과가 뻔한데 왜 세상 살면서 웃고 즐기면서 삽니까?

대통령이 하야한다고 천국 되는 것이 아닌데 왜 하야하라고 데모를 합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데 그들은 나름 행복과 보람을 찾는 것이 신기해요. 직장 동료에게 질문해 보세요. “당신은 왜 사는가?”라고. “나는 그런 것 생각 안한다.”라고 할 거예요. “오늘 웃으시는데 왜 웃습니까?” “고3 아들이 수능을 잘 쳤습니다.” “그게 웃을 일입니까?” “그럼요. 당신 같으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할 겁니다.

‘사람들은 왜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자들의 담당입니다. 그들은 연구를 했어요. 그래서 하는 소리가 ‘별자리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도 나오지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오지요. 우리는 이 세상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지만 인간은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포근한 집으로 보는 거예요. 갇혀 있다고 하면 어떤 점이 좋은가 하면, 죽으면 흙이 되니까 좋고, 살아서는 별 자리 뒤에 별을 만든 신이 있겠지요.

신께서 포근한 집을 만들어 주셨으니까 우리는 여기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는 거예요. 창세기 2장, 3장과 전혀 빗나가고 있지요. 창세기 2, 3장에서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갑니까? 아니지요.

이런 이야기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알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다른 이방 민족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그들은 이 세상이 안정화 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안정화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안정하면 행복해요. 행복한데 무엇을 더 원해요?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 “우리 집안 편안해요.”라고 합니다. 편안하고 행복한데 예수는 왜 믿어요? 본문에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기 위해 다급해서 제자들에게 찾아왔고, 안 되니까 예수님께 데려왔잖아요. 이 아버지는 평소에 예수님을 그리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안정이 깨어진 거예요. 아들이 귀신들리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찾아올 필요 없지요. 그러면 아들이 귀신 들리기 전에 그 사람은 사는 의미가 무엇이며, 존재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냥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거지요. 결혼식 끝난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면서 “저희 부부 앞으로 행복하게 살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안정화 되는 것은 별자리가 안정적으로 반복해서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정된 질서를 찾겠지요. 동방박사가 왜 갑자기 움직였습니까? 안정된 질서에 파격적인 이탈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그 이탈 현상을 동방박사는 무엇으로 봤는가? 이스라엘에게 준 예언의 성취로 본 겁니다. 

노선이 안정적으로 가면 거기에 행복과 평안이 있어요. 그런데 그 노선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행복과 의미가 전부가 아닌 거예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아니죠. 자기 삶이 평온할 때는 안 찾다가 갑자기 적들이 와서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그 때 하나님을 찾지요.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반겼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모세를 거부했지요. “나가긴 어딜 나가? 우린 여기서 살래!” 왜냐? 안정화 되었으니까요. 이들은 애굽에서 안정된 질서를 찾았고, 그 질서 속에서 살 때 행복합니다. 제가 별자리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하늘의 해, 달, 별의 질서 체제 아래 있는 거예요.

해와 달은 누가 움직입니까? 하나님이 움직이죠. 그러면 옛날 사람들에게 물어봅시다. 해와 달은 누가 움직입니까? 신이 움직이죠. 그러면 그들이 신을 믿는 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해와 달의 변화를 파악해서 씨 뿌리를 때 뿌리고, 거둘 때 거두고 모든 것이 안정화 속에 있으면 그것이 신의 뜻에 부합되는 겁니다.

신에 뜻에 부합되면 죽어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되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땅에서 안정되게 살았잖아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아침 먹고 -- 이런 식의 리듬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한 평생 규칙적으로 자연의 질에서 따라 살았다면 내세는 보나마나 합격이라는 거예요.

자신이 믿는 신을 우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교 신자는 부처를 믿는 것을 우상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나오는 108가지의 참회 목록이 있어요. 10년 전에 이창섭 목사님이 올려놓은 것이 있어요. 그 내용이 기독교의 성화론과 유사합니다. 아주 섬세하게 죄의 항목을 다 적어놓았어요. 바리새인 못지않아요.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부처님의 은덕에 귀의하게 하옵소서.” ‘은덕’이란 말이 나와요. 자신이 부처를 믿고 안정되면 다른 신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 “나는 부처 믿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왜냐? 부처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시니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지요.

법륜스님이란 분이 있는데, 그분이 상담하는 내용을 보세요. 이분 주장은 ‘당신이 행복하면 그것이 진리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관여치 말아야 될 일에 관여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관여치 말아야 될 일에 신경 끊고 주어진 환경에 대해 부처님 은덕이라 여기고 만족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담 잘 한다고 댓글이 수천 개 달리고 인기가 대단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복음적 관점에서 법륜스님의 주장을 평한다면 ‘놀고 있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불교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경고했어요. 어떻게 이 세상이 당신들 행복을 위해 있는 세상이냔 말이지요. 창세기 2, 3장을 아예 짓밟고 무시하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왜 믿습니까? 내 행복을 위해서?

이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행복하게 되면, 지금 내가 보기에 내가 괜찮은 것 같으면 지금 죽어도 나는 괜찮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엉망이라면 죽어도 구원을 보장할 수 없는데 지금 평안하고 행복하니까 지금 주님이 나를 좋게 보고 계시다고 여기는 거예요.

모의고사 80점 나왔으면 본고사도 80점쯤 나온다고 보는 거지요. 모의고사에서 80점 나왔는데 본고사에서 10점 나올 리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을 모의고사로 보는 거예요.

고대 종교는 이런 것입니다. 신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고, 신이 비를 토지에 뿌려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따라서 고대에는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그들은 당연히 신께 빌어야지요. 모든 질서는 신이 움직이니까 신에게 빌면 효과를 본다고 생각해서 신에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본인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어요.

이런 종교적 행위를 하면서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 존재 의미는, 신이 만든 자연세계에서 질서 있고 조화롭게 돌아가는 것이기에 이것을 신의 계시로 여기고 잘 적응하면 이 땅에서도 평안하고 죽어서도 좋은 나라에 갈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 질서를 깨는 사람은 범죄인이 되겠지요. 범죄인은 모의고사 성적이 50점도 안 돼요. 흉악범들은 5점, 우리나라 대통령 지지도는 오늘 현재 4%까지 내려갔어요.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천국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화를 낼 거예요. 모의고사에서 4점 받았는데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여깁니다.

박근혜가 지옥 갔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본인의 점수는 누구 매깁니까? 이 세상에서는 다수의 의견이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다수의 힘이 질서의 근거가 돼요.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다수가 동의하는 정치체제 속에서 근대국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분제도였습니다. 왕이 지시하는 대로 백성이 따라야 했습니다. 왜냐? 왕은 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신의 명령을 위반한 것이고, 햇볕과 공기를 주시는 신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나라에서 능지처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 신의 질서체제를 어지럽히는 것을 용납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고 죽어도 지옥 갈 것이 분명하다고 여깁니다.

사람은 자신이 혼자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성된 세계관과 윤리 도덕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래야 남과 충돌이 없고 서로 융화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혼자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어울려서 사는 세상에서 살기 힘듭니다. 그리고 힘이 센 자가 있으면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결국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인간에게 이것은 지울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뭔가? 내가 행복한 것, 내가 편한 것이 진리입니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는 남과 다투면 안 되지요. 요즘 촛불집회 하는데 어떤 사람이 글을 썼어요. 자신이 촛불집회에 갔는데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어요. 대통령 하야해야 한다는 것에 부부가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러다가 남편과 정들겠다.”고 했어요.

연애할 때와 결혼한 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애할 때는 헤어지기 쉬운데 결혼하면 헤어지는 것이 복잡해요. 왜 연애할 때는 헤어짐이 쉬웠는데 결혼하면 헤어짐이 어려운가? 내 편한 것 때문에 그래요. 결혼이 뭐라고 거기에 얽매입니까? 옛날 신분제도에서는 제사를 드려야 하고,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해요. 가문을 지켜야 할 사명을 띠고 시집 간 거예요.

요즘은 가문이 진리가 아니고 내가 진리예요. 옛날에는 자식을 못 나으면 제사는 누가 지내냐고 하면서 이것이 허물이 되었는데, 요즘은 자식 낳아도 제사 안 드리고, 제사 드리는 것이 별 소용없어요. 내가 편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주고 옹호해주면 그것이 사는 보람이고 기쁨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취지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진리관과 행복관이 구축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 아이가 귀신들렸습니다. 낫게 해주세요.’라고 할 때, 이 사람은 전제가 ‘우리 아이가 이 세상 보편적은 사람과 다르니까 보편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해와 달은 우리 바깥에 있지요. 하늘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으면 땅에 묻히니까 바알 종교에서는 우리가 다시 부활된다는 거예요. 씨앗을 뿌리면 언젠가는 열매 맺듯이 인간도 죽으면 어느 시점에 가서 다시 산다는 것이 바알 종교의 주장입니다. 바알 종교는 부활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행위가 모의고사가 되어 장차 칠 시험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니까 지금 잘 살고 행복하면 미래도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닌 모든 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이러한 인간의 행복관에 동의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거부하면서 ‘세상’이 ‘세대’로 바뀝니다.

이렇게 바뀌면서 ‘세대’ 앞에 부정적 용어가 붙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대’ 또는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어요. 오늘 본문 마가복음 9장 19절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결국 무엇을 언급하는가 하면, ‘네가 세운 인식의 틀에서 존재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틀이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둘이 연결된 것이 아니고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동영상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도 기록되어 있고, 말씀하신 것도 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의 사건을 A라 하고, 그 뒤의 사건을 B라 하고, 그 다음 사건을 C라고 한다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은 A와 B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촘촘히 기록해도 그 사건 사이에 빈 간격이 있겠지요? 그 빈 간격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것이 이번 겨울수련회에서 언급될 내용이고, 수련회 교재에 이것이 실려 있어요. ‘물리학자들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있음’은 신이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있기 전에 ‘있음’을 있게 하는 원형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뭔가 있음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암흑 물질’ 또는 ‘암흑 에너지’라고 합니다. 암흑 물질이 우주의 85%를 차지한답니다. 현대 과학이 이 암흑 물질 찾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이 계속 이어져 있다고 보지요. 지속입니다. 지속과 기억의 차이점이 뭡니까? 지속은 느끼지 않고 지나가는데 그 지속을 경과한 후에 기억에 남는 것은 따로 있지요. 몇 개의 중요한 것, 충격적인 것, 이런 것만 기억되지요. 이렇게 되면 중간에 지속의 대부분은 놓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어제 점심 때 어떤 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나는 밥을 먹을 때 옆 테이블에 있는 분이 무엇을 먹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가 밥 먹을 때 옆에 누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밥을 먹었겠지요. 하나님이 밥 먹게 했지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내 옆 테이블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가 밥 먹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옆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 옆에 앉은 사람은 조폭이었어. 그 사람이 너를 해치지 않게 내가 조치를 했어. 그것에 대한 감사는 왜 하지 않니?” 라고 하시면, 우리는 “저는 몰랐습니다.”라고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기억하는 내용 중 골라서 감사하지요. 또 회개하는 것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죄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밟아 죽인 풍뎅이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러나 생명체를 밟아 죽이는 것은 잔인한 일로 보지요. 풍뎅이 입장에서는 사람이 모르고 밟으나 일부러 밟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지요. ‘내가 오늘 잔인하게 풍뎅이를 밟아 죽였다.’ 그러면 잔인함과 인자함 사이에는 잔인하지 않았습니까? 잔인한 행동을 한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그가 언제 잔인하고, 언제 인자합니까?

그래서 지속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것을 ‘기호’라고 이름 붙입니다. 기호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폭력에서 생겨요. 강제로 부닥치는 중에 생깁니다. 지속에 부닥침이 없으면, 이것을 지속의 ‘응축’이라 하는데, 응축이 없으면 우리는 기억나지 않고, 기억나는 것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면 지금 나에게 그것이 의미 있는 기호가 되고, 이 기호가 모이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나’가 됩니다.

그러니 ‘나’라는 것이 얼마나 일방적인 것인지 알겠지요. 나에 대한 관대함과 호응도에 부응해서 내세우는 ‘나’일 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헛살았어요. 전부 가짜입니다. ‘나’라고 내세운 것도 가짜고, 우리는 지속을 따라 잡을 수 없어요. 계속해서 변해가는 나를 따라 잡을 수 없고, 곳곳이 사건에 의해 부닥치면 “이것이 나인가? 아니야, 이건 내 모습이 아니야.”하면서 그 중에서 안정감을 얻고 ‘나는 행복하다.’고 하면서 스스로 최면을 걸어 없는 행복을 만들어 냅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청년이 “목사님, 저는 군대에서도 행복했어요.” “그래? 그럼 군에 한 번 더 갈래?” “아니요.” “군 생활 행복했다면서?” 과거 그 시절이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행복했다고 우기는 것뿐입니다. 비급한 변명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의미를 ‘이 세대’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찾아요.

주님의 모든 기적과 말씀이 우리에게는 폭력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는 거예요. 해체시키고 부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아이에게 건포도가 박혀 있는 빵을 주니까 아이가 배가 불렀는지 빵은 안 먹고 건포도만 골라 먹습니다. 표면에 있는 건포도는 다 먹었어요. 그러면 아이는 이제 손가락으로 빵을 파서 속을 봅니다. 그러면 빵은 해체되겠지요.

주님께서 해체된 기차에 십자가를 깔아버려요. 십자가를 깔기 위해서 빵이 필요한 거예요. 이 음란한 세대가 필요하고, 마귀가 필요했고, 귀신 들린 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이걸 헤치고 들어와서 바닥에서 세상 전체를 저주하는 근거를 깔아버립니다. 해물탕 재료를 냄비 안에 넣고 가스 불을 올려 끓입니다. 그러면 먹을 수 있는 해물탕이 되지요.

주님께서 십자가 자체를 ‘내가 받을 불세례’라고 했어요. 불은 심판이고 저주입니다. 아버지가 내게 내릴 저주가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결국은 십자가가 밑에 깔려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을 두루마리 휴지로 본다면, 십자가 밑에 깔린 것이 뭔가? 여기서 뱅뱅 돌리면 화장지가 풀리겠지요. 이게 밑에 깔려 있는 거예요.

깔려 있으니까 냄비 안에 있는 이 세대는 악하고 음란하며,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밑에 깔았으니까 이 세대를 옹호하지 않고 이 세대와 충돌을 일으키는 말씀과 사건이 일어나야겠지요. 필히 일어나야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으니까요.

아버지가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잖아요. 그 아버지가 생각하는 정상은 뭡니까? 귀신들리지 않은 자식이지요. 귀신 없는 아이는 천국 갑니까? 아니지요. 아버지나 자식이나 12제자가 지금 예수님께 못 미치는 부분이 뭔가 하면, ‘불행한 내가 행복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가?’ 이런 사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거예요.

제자들, 귀신들린 아버지, 아이 모두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무엇이 깨어져야 합니까? 아이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정상이고 귀신 들린 것은 비정상이야’ 라는 구조가 깨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야기는 인간의 이런 잘못 된 틀(구조)을 허물기 위함입니다.

이런 틀(구조)을 주님은 ‘세대’라고 하고, ‘믿음 없는 세대’라고 지적했지요. 내가 언제까지 이런 것들을 보고 참아야 하는가?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막9:19).”고 하십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찾아갔지만 제자들이 못 고친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린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1-2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지요.

귀신이 아이를 물과 불에 던져 넣었지요. 이것을 아버지는 두고 볼 수 없었어요. 귀신은 정상이라고 여기는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상태를 보며 참을 수 없고, 주님은 이 세대의 상태를 보고 참을 수 없고 참는 차원이 달라요.

예수님께서 이런 사건을 유발시킨 이유는 장차 십자가 사건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앞당겨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면 주께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지고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용어를 사용하시면서 예수님의 세계와 이 세대를 비교하시는지 10분 쉬고 계속 살펴봅시다.

(2016. 12. 1. 09:47 녹취 마침)
 서경수(IP:175.♡.38.179) 16-12-08 21:59 
광주 강의(2016. 11. 25) 3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과 인간이 만나는 것과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은 달라요. 아버지와 귀신들린 자식, 그리고 12제자와 예수님이 나오는데, 먼저 아버지와 12제자가 만나지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내가 요구하는 것을 당신이 들어줄 때 당신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내가 요구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그물망으로 뒤집어 씌워놓았어요. 그러니까 그물 코 하나하나에 예수님의 행하신 모든 것이 전류가 흐르듯이 전달되겠지요. 그리고 매일의 삶이 내가 만든 그물과 주님이 만든 그물 사이에 늘 다툼이 일어납니다. 내가 만든 그물은 나의 위신과 체면과 행복을 위해서 내가 애쓰는데, 이 과정에서 주님의 그물은 가려지겠지요. 그 때 주님은 내 그물을 찢어버립니다. 그러면 나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납니다.

내가 시작한 모든 목적을 좌절시킴으로 주님이 우리를 이미 점령한 것으로 알면 됩니다. 좌절을 통해서 우리는 기쁨과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감사가 나오지요. 나의 목적과 기대가 예수님의 복음을 요청한다고 해도 이것이 주님이 던진 그물망이 아니에요. “예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날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해도 은근히 노리는 것이 있어요.

‘이 정도로 완벽하게 포장을 잘 했으니까 주님이 내 노력을 가상히 여겨 조그마한 것이라도 들어 주시겠지.’ 이런 기대는 접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은 “저는 목적 없이 그냥 삽니다.”라고 하는데, 목적 없이 그냥 사는 사람은 없어요. 목적 없이 산다는 사람은 자신의 지나온 일을 기억해서 그래요.

원래 지속 자체는 예수님의 희생과 피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속되는 예수님의 희생을 우리가 외면할 수가 없어요. 다만 내가 이만큼 잘 났고 믿음 좋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뽑아서 갖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뽑을 때 다 목적이 있어요. ‘주님이 주신 은혜로 삽니다.’ 이런 멘트를 날리는 것도 그 때 기억이 나서 그런 거예요.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이 세대 속에서 만든 관계망 속에 주님의 관계망을 투입시킵니다.

그렇다면 귀신들린 아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 제자들과 아버지의 만남, 이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은 이 세대가 악하고 음란하며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것을 폭로시킵니다. 9장 18절을 봅시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 제자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할 때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 아닙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의 아버지는 이런 요청 자체를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본인도 믿음이 없으면서 제자들이 귀신 못 쫓아내니까 믿음 없다고 예수님께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대목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해요. ‘제자들이 믿음이 있었다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을 텐데.’라고.

제자들은 절대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있고, 기도를 하고, 권능을 받아도 제자 이름으로 절대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귀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제자들 능력으로 귀신이 물러간다면 그것은 귀신이 아닙니다. 귀신은 악한 세대를 지배하고 있어요. 지배자가 민중들이 대모한다고 물러갈까요?

이 세상 자체가 악마의 관계망이에요. 즉 인간들은 뱀의 후손의 관계망 속에 갇혀 있어요. 여기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싸움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사단에 장악된 인간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니 제자들을 찾아간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잘못 된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니까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관계망을 적용하기 이전에 인간들이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것이라고 여기기에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십자가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없는 거예요.

19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너희’를 예수님 제자들로 봐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귀신 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 12제자, 그리고 귀신까지 포함해서 몽땅 믿음 없는 자로 봅니다.

21-22절에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귀신이 아들을 물과 불에 자주 던지지요. 그러면 아버지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자신은 멀쩡하다고 생각하지요. 왜냐? 자신은 불에도 물에도 안 들어가니까. 즉 자신이 있는 세상 전체 는 문제가 없는데 일부가 귀신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데 귀신이 나타나서 날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니까 예수님 도움 받아서 귀신 없던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면 만사가 형통한 것이고 그것이 행복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했지요. 전체를 아울러서 귀신들린 아버지도 믿음 없음에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나는 교회 안 가고 절에 간다.’고 할 때, ‘불쌍한 인간아!’라고 하면서 나는 교회 다니니까 절에 가는 저 사람과는 달리 천국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은 이 땅을 안 떠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신이, 단이는 취직도 해야 하고, 결혼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오 목사님과 사모님은 지금 세상 떠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지금 죽으면 내 손녀 자라는 것을 못 보잖아요. 내가 관계된 이 세상, 내가 중심이 된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귀신 들린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대해 호감을 갖고 애착이 있다는 것이 마귀에 사로잡힌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내가 사는 세상, 나의 관계망 속에서 예수님은 배척하고 천시하겠지요. ‘주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조금만 더 놀다 갈게요.’ 이렇게 되지요. ‘예수님이 당장은 필요치 않습니다.’ 라는 우리 마음을 당시 유대인들이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해서 저쪽에서 용서가 날아오면 다른 것은 더 필요 없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날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셨다면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아쉬울 것이 없지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세상을 떠날 때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었습니까? 아니지요. 아쉬워 한 것은 엘리야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엘리야를 찾겠다고 3일을 뒤졌지만 결국 못 찾았어요.

엘리야나 엘리사나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 용서와 함께 천국의 그물망이 그들에게 덮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못 느끼는 것은 너무나 강한 기존의 그물망 때문에 주님의 복음이 질식되어 있어요. 우리는 눈만 뜨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궁리를 합니다. 성장한 자식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살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러니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가 합당치 않다.”는 성경 말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내 자식, 내 가족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예수님은 포괄적으로 전체 다를 치십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자의 아버지는 제자 탓을 하고 있어요. ‘당신 제자의 무능함을 당신이 책임 지셔야지요. 그동안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이런 투로 예수님께 말합니다. 귀신 들린 아들 둔 것이 자랑도 아닌데 당당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빼놓고 ‘나와 상대하자.’고 하십니다.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너의 정신상태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의 반대말은 ‘못 할 수 있다’가 아닌 ‘해야만 한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의 그물망에 걸리면 자식이 귀신 들리는 것은 필히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귀신 안 들린 아들’을 상정합니다.

‘내 아이는 남들처럼 귀신 안 들리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 가정은 귀신 들려야 할 만큼 나쁜 가정이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자폐증 아이를 둔 부모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 ‘수많은 아이들 중 하필이면 내 아이에게 자폐증이 있다니?’ 이것은 자기 아이를 의외로 보는 거예요. 안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주님은 “너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대가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 저는 아직 50도 되지 않았는데 흰머리가 이렇게 많습니까?” “그 몸은 너의 것이 아니다.” 결국 이것입니다. 이 몸이 내 것이 아닌데 우리는 내 것이라고 여깁니다.

대전에 김 권사님이 머리가 많이 하얗게 되었어요. 염색을 안 해서 희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하얗게 될 때가 되어서 흰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김 권사님이 이걸 아시고 염색을 안 하시는 것인지, 귀찮아서 염색을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악한 세대라고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정상인은 없는 거예요. 우리도 정상인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뭔가? 자꾸 정상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나는 반듯해야 돼. 나는 착해야 돼.’ 들뢰즈는 신의 심판에 반항했습니다. 왜냐? 신의 심판은 법이기 때문에 이것이 도덕이 됩니다.

들뢰즈가 내린 결론은, ‘네가 즐거운 것이 진리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네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라.”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의식이 딱 맞습니다. 현대인은 시간을 포기하고 역사를 취했는데, 이제 역사도 포기했어요. 그러면 점(點)이 됩니다. 점이 되어가는 인간이 현대인입니다.

점은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이쪽 점과 저쪽 점을 제 마음대로 낚시를 던져 연결하려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결혼입니다. 내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은 결혼식을 진행하면서도 ‘내가 남자를 제대로 골랐을까?’ 의심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들은 ‘내가 꼭 결혼을 해야 되나?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합니다.

이것이 점과 점의 만남이에요. 이 관계는 성경구절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해도 점과 점일 뿐입니다. 그래서 상대는 내가 필요할 때까지만 찾지 필요 없으면 즉시 떠납니다. 점은 제 편한대로 살겠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귀신 들린 아들은 둔 아버지가 정말 정직한 말을 했어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 말의 의미는, ‘내 생각에는 어려운데 그래도 주님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니까 잘 하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너는 믿음이 없으면서 제자들을 탓했다. 물론 너도 믿음 없고, 제자들도 믿음 없다.’ 즉 전체 다 믿음 없는 세대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이 믿음 없다는 생각은 안 하고, 이 세상(모의고사)에서 무탈하게 살면 나중(본고사)에 좋은 점수를 받아 천국 갈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세상에서 무탈하게 살았다는 것은 주님이 날 괜찮게 보셨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나중에도 천국에 넣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의고사에서 0점이라고 우리를 공격하십니다. 믿음 없다는 티를 어떻게 내면 됩니까? 어릴 때부터 귀신 들린 자식을 만들면 되지요. 그 역할은 이 세상에 있는 귀신이 해야 되지요. 그 귀신 들린 인간은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지요. 이것은 인간이 막지 못하지요. 즉 인간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아저씨와 12제자는 자신들은 마치 귀신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해서 어떤 수단을 강구하면 귀신이 나갈 것이라고 여겼어요. 귀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본인이 귀신에게 붙잡혀 있으면서 무슨 귀신을 쫓아낸단 말입니까. 이 세상을 악하다고 보신 주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주님 그물에 걸리면 구원 받는 것이고, 아니면 귀신과 함께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과 우리의 존재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 구세주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25-2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귀신을 쫓아냈습니까, 기도 안 하고 쫓아냈습니까? 기도 안 하고 쫓아냈지요.

28-29절에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기도하고 쫓아 낸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는 왜 기도하면 안 됩니까? 그 아버지가 왔을 때 예수님이 ‘기도하면 쫓아낼 수 있다.’는 말을 왜 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와 귀신들린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증거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렸다가 나았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연극 무대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것뿐입니다. 배우가 악역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까? 아니죠. 그냥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한 것뿐이지요.

제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절대 귀신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거죠. 그럼 우리 힘으로 안 된다면 예수님 혼자 다 하시면 되는데 제자들은 왜 뽑아 놓았어요? 12제자가 해야 될 일이 바로 예수님만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하도록 부른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12제자를 보내시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지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제자들을 보면서 어떤 착각합니까? 마치 제자들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한 것처럼 착각하지요. 하지만 본인들은 알아요. 절대로 자신들의 능력으로 귀신이 나간 것이 아니고 자신들은 우편배달부 역할만 했다는 것을.

이런 장면은 사도행전에서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기도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자신들의 능력으로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 이름이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름으로 바꾸면 될 것 아닌가 라고 하는데, 바꾸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행했던 모든 것을 실패하게 하고, 그 속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내 기도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내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이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기도해도 안 되면 기도할 필요 없네.’라고 해요. 기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답답한데. 사람이 편하게 살면 행복을 느낍니다. 이 땅에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에 우리는 잘 적응되어 있어요. 그러나 택한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주님은 사건을 일으켜요.

주님이 일으키는 사건은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노력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이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인데 내가 호들갑을 떨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마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인 것처럼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경계선 저쪽에서 넘어온 주님의 것으로 잠시 이 땅에 살다 가는 주님의 지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젖어서 내 몸이 나의 것이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도에게는 주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말씀 주신 것은 주님의 몸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사태와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주님의 관계망 속에서 정리하라고 주신 말씀인줄 압니다. 이 믿음이 없는 세대로 동참되어 있는 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죄 된 모습을 다시 돌아보면서 이 죄를 일찌감치 용서해 주시기 위해 오신 십자가의 사랑을 감사하게 하시고 그것만을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12. 8. 19:3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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