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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5 01:47:21 조회 : 925         
숙주 17022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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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75.♡.225.182) 17-03-08 08:59 
광주 강의(2017. 2. 24) 36-1

마가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 2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묻는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항상 예수님에 먼저 질문합니다. 유대의 모든 사상체계를 자신들이 평정했고, 그 사상체계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질서가 잡혔습니다. 국가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사고방식이 일치될 때 나라가 안정을 취하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생각을 하나로 만들어 통합시켜야 각자가 1로 포섭이 됩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기계의 질서는 자동화시키면 되는데, 인간은 사고방식이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하나를 바라보면 됩니다. 질서가 하나를 추구할 때에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에 하나가 되면 그 공동체는 질서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을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였습니다. 큰 나라라는 말은 숫자가 많다는 뜻이고, 이 나라가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요. 질서가 있는 이유는 왕이 말하는 선과 악에 온 국민이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선과 악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의 존재입니다.

모든 질서는 왕의 입에서 나옵니다. 왕의 말이 법이 되고, 그 법을 위반하면 악, 법을 지키면 선이 됩니다. 애굽 나라는 바로 왕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애굽의 선과 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애굽 나라에 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히브리인들은 빠져나왔는데 다른 민족은 왜 못 빠져나왔지요? 빠져나오려고 하면 바로 왕이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바로 왕의 말을 듣지 않고 탈출하는 민족이 있다면 바로 왕이 질서 유지를 위해서 군대를 보내서 처단하겠지요? 애굽에서는 이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애굽 나라에서 탈출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 나라의 정의를 위해서 군대가 와서 처단합니다. 그동안 그 사람들이 아무소리 못하고 그 질서에 종속된 이유가 뭡니까? 바로 왕에게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 힘이 무서워서 따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도 힘이 무서워서 빠져나올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출애굽을 누가 제안했습니까? 이것은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이 아니고 바깥에서 투입된 모세입니다. 그러면 출애굽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뭡니까? ‘네 힘으로 네가 사는 세상에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이란 없는 것이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구원이 아닌 행복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구원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행복에 대해 설교하는 것 중 어느 때가 잠이 덜 올까요? 구원을 설교하는 목사는, ‘아내나 자식이나 소유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할 것이고, 행복을 설교하는 목사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면 자자손손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겠지요? 어느 목사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연히 행복 쪽이겠지요.

이런 교회는 결국 구원되는 단체가 아니지요. 이 세상과 결탁해서 사는 곳이지 주님 가신 길을 가고자 하는 단체가 아니겠지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1)입니다. 이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지요. 왜냐? 모든 공동체가 하나를 추구하니까 질서가 잡힌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어떤 사람이 복음을 외치면 그들 입장에서는 복음이 악이 되는 겁니다. 비록 그곳이 교회라 할지라도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노라!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찾아와서 이야기할 때, 하나(1)가 뭡니까? 유대 나라에는 왕이 없어요. 그 왕의 자리에 법이 있어요. 그 법이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율법을 세 부류의 전문가들이 담당했는데,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입니다. 이 세 분류가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선과 악을 규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에 대해서 유대 공동체가 지금 동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당신은 우리 편이야, 우리 편 아니야?’라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하나(1)의 가치관, 율법을 지키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여기에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리고 10절 이하에서 묻는 질문은, 예수님 당신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점검 차원에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점검 차원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경우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한국 사회는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의 동질성은 율법이죠. 애굽 사회는 왕이 있지만 유대 사회는 왕이 없고 율법이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의 해석입니다. 율법의 해석이 유대 사회를 동질화 한 거예요. 사회의 해석과 다른 사람은 악인이 되고, 같은 해석을 하는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건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언급했어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은 서기관, 바리새인을 통해서 유대 사회가 규정한 거예요. 율법으로 동일화, 동질화가 되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된 사회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가 만나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적용을 시키려면 유대 사회의 동일성과 오늘날 한국 사회의 동일성을 연결시켜줘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민주사회이기에 각자의 개성이 있습니다.’ 라고 하지 마세요. 하나로 일치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돈입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금 우리는 마가복음 10장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저쪽은 율법의 동질사회에요. 우리는 돈의 동질사회입니다.

돈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어요. 교회, 직장, 가정, 학교 그 어느 곳도 전부 돈의 동질화로 되어 있습니다. 돈을 매개로 하면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합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그 바탕에 돈이 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돈을 바라면서 믿어요.

돈의 동질성과 율법의 동질성이 안 맞으니까 이걸 이해하려면 중간에 무엇을 삽입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마가복음 10장은 의미가 없어요. 10장 초반 내용이 뭔가 하면, 아내와 헤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아내와 헤어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는 여유 자금을 주시겠습니까?’ 이것이 반드시 따라붙게 되어 있어요.

말씀에 순종했는데 사업이 망했다면 순종할 마음이 안 생깁니다. 아내와 헤어지지 말라고 해서 안 헤어졌는데 ‘아내가 계속 사치하고, 바람피울 때 그래도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전혀 순종할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 말씀은, 배우자의 어떤 조건도 보지 말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바람피우고, 사치하고, 자식을 학대해도 헤어지지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끄집어낸 자체가 조건부로 순종하지 무조건 순종할 의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남편에게 “네가 더 나쁜 놈이다.”라고 하십니다. “순종할 마음도 없으면서 조건을 내걸고 순종하려 했지?” 라고 묻으면 그 남편은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중간에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제자들이죠.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요? 유대 사회는 율법을 지켜야 돼요.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돈이 최고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동행이 없어요. 왜냐? 율법을 내가 지키니까.

팀웍(teamwork)을 이뤄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잖아요. 율법을 내가 지킬 때 지킨 만큼 나의 의로 돌아오는 거예요. 즉 나의 모든 행동은 결국 나에게로 환원된다는 것입니다. 다 나 좋으라고 하는 행동입니다. 이웃을 사랑해도 결국 나를 위해서 한 일입니다. 현대인들도  교회도 가고 성당도 가요. 무엇을 위해? 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 홀로 행복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율법에 대해서 질문하니까 예수님 답변은 ‘혼자서는 행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삽니다. 왜 하나님이 성(性)을 하나로 만들지 않고 남,녀로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자 신도 있고, 여자 신도 있어야 해요. 형상은 유사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원판이고 인간이 복사판이라면, 복사판에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기에 원판에도 남자 신이 있고 여자 신도 있어야 하잖아요. 안산홍 집단은 이런 논리로 어머니 하나님을 주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면 지킨 만큼 의가 마일리지처럼 쌓인다는 사고방식으로 나올 때 예수님은 1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2를 이야기하죠. 남자와 여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부에 관해서만 2를 말씀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율법에도 전부 2가 있는 것입니까?

모든 율법에 대한 예수님 해석은 단독으로 자기 의가 될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율법은 예수님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율법의 내막을 알고 율법을 지킨다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성을 믿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 2절에서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약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법을 아들이 다 지킬 때 생긴 효과가 복음이에요. 그래서 이 복음이 성령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 관계성이 성령에 의해 확장되면 우리는 율법을 전혀 못 지켜도 이미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간주됩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의인이 되지요. 그런데 율법이 100개라면 그 중 99개를 지켰는데 1개를 못 지켰으면 저주를 받아요. 왜냐? 율법은 양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탈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귤이 완전한 원형이 아닌데도 둥글다고 말합니다. 귤이 시들어도 귤이고, 못생겨도 귤입니다. 그런데 만약 귤에 사과의 요소가 있다면 이것을 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귤이 아니죠. 복음은 일점일획이라고 복음 외에 다른 요소가 섞이면 안 됩니다. 복음은 아들이 혼자 다 이루었어요.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 수 없어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분을 예비하시고, 그 예비하신 분이 오셔서 약속을 다 지킴으로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복음은 자동적으로 무엇을 배격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 외에는 전부 부정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요. 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복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 구원 용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유대인들 가운데 12명을 제자로 뽑았어요. 그럼 제자들이 알고 있는 율법은 어떤 것일까요? 그 당시 유대인이 율법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귤이 많이 담겨있는 바구니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뽑으면 귤이 잡힐 뿐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입니다. ‘네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택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잘났다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뽑았기 때문에 뽑힌 너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단독으로 비교하면 안 돼요. 나는 구원 받을만해서 구원 받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 받을만한 사람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신앙에 매진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샘플이 뭡니까? 표본입니다. 샘플이란 말은 다른 사람과 같다는 뜻인가요, 다르다는 뜻인가요?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옥 가는 사람과 같아야 합니다. 이 논리에 문제 있습니까? 그래야 택함의 샘플이지요. 선택받은 샘플이잖아요. 잘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선택되었다면 우리의 모델은 불신자여야 하지요. 왜 자꾸 믿는 사람 티를 내려고 합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스승이어야지요.

‘예수를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 이게 복음을 알게 된 자의 심정입니다. 제자들은 샘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누가 공격합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인들 다 공격했지요. 그런데 이들이 공격할 때 어떻게 공격했습니까? 예수님을 저주했지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외면하고 저주했어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지요.

‘연애인 지망생 베트남 아가씨가 공항에서 뚱뚱한 남자(김철)에게 장난삼아 얼굴을 문질렀는데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라고 북한에서 주장할 때,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고 외국 아가씨가 장난쳐서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으니까 우리에게 책망을 묻지 말라고 하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인 부담이 적은 거예요. 거기에 제자들도 동조를 한 겁니다. 그것이 제자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돈이라는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교회 충성하고, 선교회비 내고, 철야기도하고 이렇게 25년을 했는데, 의대 본과 4학년에 다니는 외동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하겠어요? 절대 아닙니다. “왜 돈의 동질성을 공격합니까?” 이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원망할 때 그것이 바로 잠복되어 있던 자신의 본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선택 받았다고 설교를 하니까 자신은 딴 사람으로 변한 줄 알았지요. 그런데 주님이 내 아들 죽이니까 옛 모습이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자신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복음을 알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옛 모습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복음을 멋대로 해석해서 그래요. 실재로는 나온 적이 없어요. 처음 복음을 알 때고 언제고 자신에게서 나온 적이 없어요. 아들 죽었다고 하나님께 원망할 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제 원망 다했나?” 이것이 바로 구약 욥기의 내용입니다.

“다 했어? 원망할 것 더 끄집어내 봐.” 욥은 실컷 원망한 뒤에 “할 말 없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것은 뭡니까? 욥의 믿음은 욥이 소유할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믿음은 욥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데려가기 위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오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믿음 주신 분 안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요. 그것을 ‘예수 안,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강의 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결국은 돈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자녀에게 유산을 남겨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부모의 도리를 다했다고 흐뭇해하지요. 유대사회는 율법입니다. 내가 구원 받을 만한 의를 확보하면 그것이 목적이고 행복이에요. 현대 사회는 돈이 최고고.

이 둘이 사실은 동일해요. 동행이 없지요. 결국은 혼자예요. 가까운 친구도 돈 떨어지면 다 떠납니다.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돈 보고 오는 거예요. 동행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고 4층 건물을 지어 1층은 부모가 살고, 2층은 장남 가족이 살고, 3층은 차남 가족이, 4층은 딸 가족이 살았습니다. 과연 행복할까요? 1개월이 지나지 않아 다툼이 일어납니다. 6개월 지나면 떠나기 시작합니다. 같이 못 살아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이런 인간 세상에서 예수님은 12명(제자들)을 샘플로 부릅니다. 12제자의 특징은 뭔가? 다른 사람들은 홀로 살지만 12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했지요. 이 말씀의 뜻은, ‘너희가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짓을 해도 안 버려요. 저주를 하고 떠나도 안 버립니다. 왜 12제자를 이렇게 대우하는가 하면, 12제자는 이스라엘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가 예뻐서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 보면 자기 택한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12명을 택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축한 겁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행하실 때의 율법 해석과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 해석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위한 율법 해석과 오늘날 돈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율법 해석은 다를까요, 같을까요? 같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려면 이쪽 해석, 저쪽 해석 둘 다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 해석이 돼요. 즉 예수님의 공생애를 따라서 해석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경 해석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환경을 받았습니까, 핍박 받았습니까? 핍박 받았지요. 심지어는 제자들에게도 버림 받았어요.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들의 율법 해석은 결국 해석을 배척하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해석이 2절에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 왜 내어버리는 것부터 질문을 하지요? 결혼식에서 주례하는 사람이 신랑에게 질문합니다. “옆에 있는 신부를 내버릴 때 문서 써주고 버리겠습니까?” 이런 질문과 같아요. 왜 결혼식에서 헤어질 이야기부터 거론하느냔 말이지요.

유대인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먼저 했을까요? 이혼을 하더라도 율법은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부부가 마음이 맞지 않을 때는 힘들어서 갈라설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수는 없거든요. 즉 이혼은 했지만 천국은 가겠다는 심보지요. 왜냐? 자기를 위한 천국이니까요. 끝까지 자기는 손해 안 보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이혼은 했지만 천국은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지만, 사실은 틈만 나면 이혼하고 새장가 가려고 궁리를 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율법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 율법을 해석하는 한계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인간들의 율법 해석에 의해서 예수님 해석은 외면을 당하게 되는데, 이런 해석이 예수님 해석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은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와 목적과 동기에 방해되는 해석이 예수님의 해석이 됩니다. 이 해석은 반드시 십자가를 바탕으로 합니다.

십자가 빠진 성경 해석은 엉터리가 됩니다. 예수님 본인의 해석은 없어요. 예수님 본인의 해석을 내놓으면 인간은 그 해석을 자신을 위해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기에 갈라설 수 없다는 해석을 예수님이 했다면, 사람들은 그 해석대로 어떤 경우가 와도 이혼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구원 받기 위해서.

이런 인간들의 해석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포기할래, 종교를 불교로 바꿀래?”라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교회 다니는 아가씨가 시집을 갔는데 “우리 집안은 불교 신자이기에 교회는 못 간다. 이제 교회는 가지 말고 절에 가자.”고 할 때, “어머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교회 가야 됩니다.”라고 자기 나름대로 복음에 대해 해석하겠지요.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가 뭡니까? 1) 주님을 위해서. 2) 자기 구원을 위해서. 어느 것입니까? 자기 구원을 위함이지요.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교회 간다고 괴롭히는 시어머니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그 시어머니를 누가 보냈습니까? 주님이 보냈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샘플일 뿐입니다. 이 손이 주님의 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 손이 다른 곳에 가면 안 되고 나에게 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바로 개인적 구원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을 배격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남은 지옥에 가도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주여, 저는 주님 영광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라고 자랑을 해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말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어떤 남편도 아내를 이해할 수 없고, 어떤 아내도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주님의 사랑은 상대방 속에 새로운 둥지를 마련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만 살아있다면 내가 따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이란 그 사람 속에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풍선이라면 내 바람을 집어넣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풍선 속에 집어넣으면 나는 껍데기만 남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 안에 다른 것으로 가득 찬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내 가슴이 아파도 나는 행복합니다.’ 이런 노래가사가 있어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슬퍼도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런 사랑 없습니다] 이승철이 노래했지요. 하나님이 짝지어 줬다는 말은, 짝지어 준 것을 지킬 위인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라고 하는데, 그게 안 헤어진 것입니까? 서로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건 결혼이 아니고 동거입니다. 이들은 틈만 나면 헤어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헤어질 꼬투리가 없어서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아내는 밥을 잘 한다. 나는 밥을 못한다. 밥 해주는 것이 편리해서 같이 사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부부라는 것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부부는 돈과 관련해서 편리를 위해서 같이 살 뿐입니다. 따로 사는 것보다 같이 살면 월세를 아낄 수 있고, 분업화하면 일의 효율도 생깁니다. 아내는 밥하고 빨래하고, 남편은 일해서 돈 벌고.

레비나스는 말하기를 ‘애무란 미래의 사랑으로 이끈다.’고 했어요. 여자를 만짐으로 자기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미진한 것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계속 지연되는 거지요. 그 지연된 결과가 ‘자식’이라는 겁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10분 쉬고 계속 합시다.

(2017. 3. 8. 08:17 녹취 마침)
 서경수(IP:14.♡.78.77) 17-03-24 08:38 
광주 강의(2017. 2. 24) 36-2

사랑이란 자기를 포기하고 상대가 되는 것, 그대 안에 나를 장착 시키는 것입니다. 아가(雅歌)에 보면 사랑에 필요한 절차가 있어요. 그것이 뭔가? 죽음입니다. 자신이 죽지 아니하면 상대방에게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말이 말장난처럼 들리지요? 내가 죽었다면 없어졌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상대방에게 들어갔다? 이게 말이 됩니까?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있어요. 죽도록 충성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면류관을 누구한테 준단 말입니까? 그럼 죽기 직전까지 충성하라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아가 8장 6절에 보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건 결국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내 목숨 빼앗을 때 “목숨 주세요.”라고 하겠어요? ‘진즉에 너는 죽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거야.” 이렇게 말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근거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죽은 존재가 되지요. 그럼 죽은 존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특징이 있어요. 죽었기에 살려고 합니다. 교회 왜 나옵니까? 살려고 나오지요. 주님은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를 향해서 ‘살려는 그 모습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을 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살려고 합니다.

교회에 가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도 살려는 종교적 욕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않을 때,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분하게 실험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하면서 시험했고, 전쟁하면서 시험했고, 안식일을 지키며 시험했는데 그들이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죠.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셔도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그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그리스도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숨은 악마적 동기가 유발됩니다. 이런 작용에 대해 예수님은 숙주의 원리를 사용하십니다. 기생체가 자신을 계속 번성시켜 존속하기 위해서 숙주(기생 생물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생물)를 이용해요.

예를 들면, 기생충이나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 혹은 짐승의 몸에 들어가서 사는데(이 때 몸이 숙주입니다), 기생충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숙주를 죽일 수도 있고, 약하게 만들 수도 있고, 태평스럽게 만들 수가 있어요.

아담이 악마와 만나서 선악과만 따먹었겠습니까, 아니면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화 되었겠습니까? 악마의 품성이 이미 아담에게 들어와 버렸어요. 그 들어온 것이 뭔가 하면, 선과 악을 아는 지혜, 또는 지식입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선악적 지식이 인간 내부에 들어올 리가 없지요.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가를 따진다는 자체가 이미 악마의 숙주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가 숙주를 계속해서 번성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가인을 낳고 아벨은 낳는 거예요. 그 후손의 특징은 어떤 경우라도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내가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농부가 비가 많이 오면 ‘이 비로 농사를 망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결국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교회 가서 은혜를 받아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미 숙주의 마음으로 달라져 있습니다. ‘오늘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번 주는 복을 받으며 살겠지?’ 이런 생각을 해요. 이런 염려를 없애기 위해 신께 기도를 드립니다.

목회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처를 제공하고 커미션을 받아 챙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교인들이 기도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매일 새벽기도 하고, 수요기도 하고, 금요일 철야기도, 주일도 기도하고. 목사는 기도하는 것에 대해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긍정적으로 호응해 주면 그에 대한 대가로 커미션 받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구조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관심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 받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선을 행해서 복을 받겠다고 나서는데, 이것이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마음입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여 기도하지 말라(마6:31)’고 하셨지요. 제가 지난 수요일 기도 제목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보조자’라고 했지요.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주인이 계시는데 보조자가 왜 걱정을 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잡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보조자가 주인 앞에 얼쩡거리니까 주님이 만든 우리 인생을 우리 자신이 훼방하고 있어요. 우리는 악마의 숙주이기 때문에 악마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에서 ‘죄의 왕노릇’이라고 합니다. 신하가 왕을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죠. 이것은 인간 자체가 누구에게 통치 받고 있는지를 주님이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귀신이 쫓겨나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메시야입니다.”라고 해요. 그러면 주님은 ‘입 다물어라.’고 하십니다. 왜?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귀신이 나갔다고 구원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병 고쳤다고 구원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병에서 나은 것을 구원 받은 것으로 오해하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병 고치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어요. 주기도문에서는 ‘죄’를 ‘빚’으로 봤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이렇게 해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원래 의미는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시고’입니다. ‘빚’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책무가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악마의 권세에게 못 벗어나는 이유는 선악체계에 의해서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감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10장 4절을 봅시다.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자기 책무에서 벗어났습니까? ‘모세가 시킨 대로 이혼증서를 써줬으니까 이혼한 것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책임을 벗어난 것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더 큰 빚을 지게 하겠지요.

그것이 뭐냐? 9절 봅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나누지 못한다고 했는데 인간은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혼이 나눠진 것입니까, 안 나눠 진 것입니까? 안 나눠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하세요. 이혼해도 이혼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이혼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까요? 아닙니다. 지금 마귀가 계속 추궁하는 것이 뭔가 하면, “너는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천국에는 못가. 천국 가려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선한 일을 하고,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지고 이렇게 해야 복도 받고 자녀도 성공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이런 식으로 마귀가 지금 ‘책임과 그에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뭡니까? 로마서 8장에서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남을 미워했고, 마음속으로 살인했고, 이혼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할까요? “그게 원래 네 모습이야.”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이 살인했어요.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귤 바구니에서 끄집어낸 하나의 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씀의 궁극적 의미는 복음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신부로 삼아요. 당신은 신랑이 되고. 인간 사회에서는 신부가 있고 신랑이 있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신랑도 신부도 없어요.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의해서 신랑도 아닌데 신랑이 돼요. 신랑이 되면서 병행해서 없었던 신부가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느껴요. 그런데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목사가 ‘죄가 있는 사람을 복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억지로 죄를 기억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나는 죄들은 이미 예수님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죄밖에 없어요.

그런데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없는 죄도 만들어서 회개를 또 해야 합니까? 이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식은 동행입니다. 주님이 신랑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신랑의 되면서 신부도 만들어져요. 혼자 신랑이 될 수는 없잖아요. 신부가 있어야 신랑이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신부를 만드는 작업을 하시는데, 작업을 하면서 죄책을 해결하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부가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에게 죄를 유발시켜요. 그리고 죄를 회개하는 것을 차단시킵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처음에는 반성하고 뉘우치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죄를 지으면 반성문을 설 수가 없어요. 전쟁이 없는 시절은 평화롭습니다. 그 때는 남에게 배려할 수도 있고 이웃을 살펴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 건빵 한 봉지를 발견했어요. 내 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옆집 아이 생각해서 건빵을 나눠 줄 수 있습니까?

엄마는 자식 챙기기 바빠서 이웃 아이를 챙길 여유가 없어요. 여기에 무슨 율법이 있습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그래서 굶주림이 심해지니까 여인들이 서로 약속했습니다.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왕하6:28).”고 해서 내 아이를 먼저 삶아 먹었는데, 그 후에 네 아이를 먹자고 하니까 여인이 그 아들을 숨기고 내놓지 않았어요.

여기에 무슨 율법이 있습니까? 우선 살고 보자는 식입니다. 모든 인간의 저변에는 우선 살고 보자는 마음입니다.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교사를 하든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이런 마음은 이성적으로 따져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 우리 몸의 본성입니다. 이걸 외면할 수가 없어요.

주님이 일으키는 모든 일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를 꾸준히 생산해 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동행하시는 모습입니다. 회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손 놓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막 사는 것’입니다. 막 사는 것과 다른 삶의 경계선이 없습니다. 만약 경계선이 있다면 그건 선악적 사고입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것 자체가 주님이 보시기에는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우깁니다. 이런 모습은 사단이 인간을 숙주로 만들어서 기생충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생충을 제거할 수가 없어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DNA는 살고 보자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어요.

과학적 관점에서는 DNA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악마입니다. 예수님과 충돌할 때 비로소 귀신은 나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원래 연약한 자이니까 ‘죄를 범해도 봐주세요.’ 이것이 가능한데,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봐주세요.’가 성립이 안 됩니다. 철저하게 죄인으로 끌고 갑니다.

그럼 주님은 말씀을 지킵니까? 지킵니다. 주의 말씀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신부가 되지요. 신부될 사람은 지금 엉망진창입니다. 왜? 악마의 숙주가 되어 있기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은 상대방 속에 내 것을 장착하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는가 하면, 장착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숙주는 계속 살아야 돼요.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는 본성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악마의 적이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다른 것은 용납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음이거든요. 이미 악마가 온 천하에 ‘네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승자다.’라는 것을 심어놓았어요. 아무리 좋은 명분이 있어도 ‘죽으면 소용없다.’ 이것을 우리에게 심었습니다.

죄가 가인에게 덮쳤어요. 그러면 가인은 죄가 시키는 대로 행합니다. 그것이 악마의 숙주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동생입니까, 하나님과 관련 된 동생입니까? 하나님과 관련 된 동생이지요. 평소에 형이 동생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 하심으로 하나님과 관련 된 거예요.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원수가 아닙니다. 가인을 덮친 악마의 원수가 아벨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럼 아벨을 죽이면 누가 살아남지요? 가인이지요. 죽을 자는 죽고 살아남은 자의 세계가 악마의 세계입니다. 악마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그 원리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너, 죽기 싫지?” “그래. 살고 싶다.” 이것입니다.

북한에서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김정은을 절대적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정말 김정은이 훌륭하고 위대한 존재라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죠.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내 사랑의 결실인 자식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자식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김정은이 치사하고 더러워도 참고 있는 것입니다. 김정은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살아야 해!” 이것이 마치 심장이 뛰듯이 계속 작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숙주가 된 모습입니다. 누굴 탓하겠습니까? 김정은을 탓해요?

예수님이 오신 후 나타난 사실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된다든지, 아이가 아프다든지, 취직이 안 된다든지 할 때 그것 해결하려고 교회 나와요. 그런데 누구도 하나님께 이런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이라야 메시아답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말하면 교회 몇 명 남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교회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또 죽이라고 세워놓은 곳입니다. 

교회 다녀야 해요. 다니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폭로당해야 됩니다. 그러나 구원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심으로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사함으로 구원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더 깊이 알아가야 해요. 예수님이 오셔서 부딪힐 때 예수님 말씀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모델 삼아서 어느 정도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보다 더 쌘 게 들어와요. 내가 돈도 좀 있고 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때는 이웃에게 구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상황인데 친척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 친척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몸이 건강할 때와 몸이 아플 때 어느 쪽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가 나올 가능성이 높겠어요? 몸이 아파 죽을 지경인데 온유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도의 명령과 권유는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 받으면 오히려 반대가 되지요. ‘내가 행했다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죄였구나.’ 이렇게 죄를 깨닫게 됩니다.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궁핍하다가 채워지면 이 말씀을 받아들일 것 같은데, 풍족하게 되면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눌 수 없다고 할 때 인간은 악마의 숙주가 되어 있기에 주님이 시키는 대로 가능하면 이혼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말씀을 잘 못 해석한 바리새인의 해석에 불과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이제 지쳤다. 헤어지자.” 젊은 사람들 이런 소리 자주 하지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한 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같이 살게 하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고전7:8).’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결혼한 자들에게는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네가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네 한 몸도 간수 못하는 것이 건방지게 다른 몸까지 챙긴다고?’ 이런 느낌으로 말했어요.

사람들이 바울에게 결혼에 대해 상담을 했겠지요.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할까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해라.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자면 이혼해라.’고 했어요. 이 말 듣고 복음 잘 듣고 있는 남편에게 “당신 복음 싫어하지? 이혼하자.”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떤 정당성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방식은 뭔가? 대신 죽음입니다. 이것은 신비인데, 어떻게 남이 내 속에 들어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가 2,0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어요. 남이 어떻게 내 속에 들어옵니까?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몇 명입니까? 2명이죠.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이것을 ‘한 몸’이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 보세요? 두 사람이 어떻게 한 몸이 됩니까?

오늘날 과학이 놀랍도록 발전을 했는데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없어요. 2가 어떻게 1이 되지요? 두 사람인데 어떻게 한 몸이 될 수 있습니까? 이건 과학적으로 풀 수가 없어요. 과학적으로 안 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풀 수 없다는 말이지요. 신학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설명 할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했다. 어떻게? 몰라. 그냥 믿자. 예수님 당신이 내 죄를 가져갔습니까? 그래. 정확히 언제 가져갔습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누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설명해 줄 수 없어요. 두 사람이 한 몸 되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 문제는 거꾸로 풀어야 돼요. 남자의 몸, 여자의 몸이 아무리 같이 살아도 한 몸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창세기 2장에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율법을 누가 만들었어요? 예수님이 만들었지요. 그러면 해답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만드신 분이 갖고 있지요. 출제한 분이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것에 대한 해답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갖고 있죠. 그렇다면 출발을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 몸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여자가 나오고 남자가 나왔다면 이것은 각자 딴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늘어난 거예요. 이것이 바로 관계인데, 이 관계가 나중에 언약 관계가 됩니다. 노아언약, 모세언약, 아브라함 언약 이렇게 쭉 나오겠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방주가 있습니다. 방주에 몇 명이 들어갔지요? 8명이지요. 이 사람들은 왜 구원 받았지요? 사람들은 방주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방주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면 나중에 방주가 없어지면 이 사람들은 구원이 안 되는 수가 있어요. 방주 때문이 아니라 동승한 정결한 짐승이 있어요. 각 7쌍이 들어갔지요. 정결한 짐승을 보여주기 위한 한 식구가  노아 가족 8명이 되지요. 이 관계가 노아언약입니다.

노아언약은 한 곳에 담겨있는 내용을 다양하게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8명의 식구가 굶고 있는데 미군이 와서 밀가루를 주었다면 8명이 먹는 밀가루가 다른 밀가루입니까, 같은 밀가루입니까? 한 사람의 미군이 와서 준 동일한 밀가루지요. 그러면 밀가루 1의 숫자부터 헤아려야지 8명의 숫자부터 헤아리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헤아림의 대상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나부터 헤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데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하려면 우리를 제거해야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작업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죽은 자에게는 헤아리는 숫자에 의해서 새로운 운명이 주어집니다. 죽은 자에게 미래를 이야기하면 안 돼요. 죽은 자를 죽은 자라고 호칭하는 그분께 모든 것을 일임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예수 안과 예수 밖, 즉 사랑과 미움으로 나눠집니다. 사랑은 주님과 하나가 되고 미움은 주님과 떨어짐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설명하면, 두 사람이 하나 되는 원칙은 애초에 성립이 안 돼요. 처음부터 하나 아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악마가 설쳐대는 바람에.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오신 후에 우리가 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 속성이  날아가고 묵시적 속성으로 우리가 주와 함께 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가?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욥기 마지막을 보면 할 말을 잊어버려요. 앞부분에서는 욥이 많은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욥이 재를 뒤집어쓰고 유구무언입니다. 욥이 앞부분에서 질문을 많이 했는데, 이때는 자기로부터 출발을 했어요. 자기가 납득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지요. ‘내가 믿을 만하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나 복음을 믿는다, 혹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오해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런 오해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책임지십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어요. 주님이 주신 답변이 무엇입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2:9).’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일부러 내 몸에 가시를 넣었다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알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가시를 빼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 가시를 빼달라고 했지요? 몸에 가시가 있으면 사는데 불편해요. 그러나 우리의 편함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이 이유가 아닙니다. 불편해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안 불편해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지옥에 가도 주님의 뜻으로 가는 것이기에 감사해야 돼요.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 중 그런 사람은 없어요.

천국 가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내가 원했는데 주님이 천국에 넣어주신 것이 아니고, 내 뜻과 상관없이 주님의 자기 뜻에 의해 천국으로 이끄셨기에 ‘아, 주님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구나. 지금 이대로 천국 가고 있구나.’를 확인할 뿐이에요. 그런 바탕에서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됩니다. 그러면 ‘동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사랑’이란,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요일3:10)”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사랑 받은 사람에게만 나올 수 있는 말이란 점입니다. 사랑을 안 받으면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주님이 캥거루라면 우리는 캥거루 주머니 속에 담겨 있는 자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들과 내가 똑같은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고, 우리를 죽였고,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성령이 오니까 이것이 확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캥거루 주머니 속에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벌이신 일에 누가 토를 달겠습니까?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시간이 모자라고, 벌써부터 시작된 천국 생활이 감사의 생활인데 우리는 거저 죽어서 천국 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된 천국을 감사하고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3. 24. 07:5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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