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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2 01:45:58 조회 : 932         
허무한 기대 17042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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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211.♡.22.39) 17-05-11 09:10 
광주 강의(2017. 4. 21) 38-1

마가복음 10장 17-1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질문한 사람의 취지에 맞게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고, 꼭 시비를 거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했으면, “ ~하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하면 좋은데, 호칭문제를 거론해요.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이여!”라고 한 것에 대해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했지요.

이 말은, “네가 보기에 내가 선한 이로 보이느냐?”라는 뜻은 아니고, 나에게 선하다고 한 그 말을 평소에 하나님께도 같이 사용했는지 묻는 겁니다. “선한 선생이여” 또는 “선한 하나님이여”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 사용한 선하다는 말과 하나님께 사용한 선하다는 말이 같은 질이 되겠지요.

부자 청년이 그런 식으로 선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겁니다. 청년이 예수님께 사용한 선하다는 개념을 평소에 하나님께도 같이 사용했다면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누군지 모른다는 말은 곧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도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엉터리라는 점을 기정사실화 시킵니다. 우리가 보기에 ‘선하다, 선하지 않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깊은 문제로 봅니다. 제가 문장을 서술하면 무슨 뜻인지 말해 보세요. “거기 거기가 없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곧 그 순간에 내가 의도한 현실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기’라고 해 봅시다. 내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만나기 전에 예수님과 내가 만나는 것을 예상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예상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호칭하면 되지? 하나님이 선하시니 그 선하다는 표현을 예수님께 사용해서 ‘선한 선생이여’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는 하나님과 내 앞에 계시는 선생님과 같은 편이고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라고 만들 수 있는 ‘거기’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의 의도를 아시고 ‘선한’이란 단어의 의미 조정에 나섭니다. 즉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선함과 나와 같이 있다고 경솔하게 이야기했다.’고 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하나님께 사용하는 단어(선한)를 선생님께 사용한다면 나의 겸손함을 봐서라도 예수님은 내 질문에 답변해 주실 것’이라고 부자 청년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초를 쳐버렸어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선한’이란 단어를 나에게 붙이느냐고 했어요. 옛날 사극에 보면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과도한 호칭을 남발하는 경우가 있지요. 인사를 할 때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면 되는데, “존경하는 스승님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뭔가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지요. 이런 사람을 만나면 경계를 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과도한 호칭을 사용하니까 주님이 수정하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곧 ‘네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 ‘거기’가 없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고 어떤 현실을 구축할 때는 그 속에서 본인이 기대한 것을 예상하기 때문에 본인은 다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동질성 유지’라고 하지요.

자기의 동질성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로 사람을 만나요. ‘오늘 밤에 내가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말은, 나의 본질을 알겠다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을 만나면 현재 괜찮은 나의 힘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을 다치지 않고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초를 쳐서 내가 기대한 현실이 성립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기’가 없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늘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하시면 내가 기대한 현실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한 나가 가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짜의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뭔가? 인간의 진리는 자기의 경험을 융합해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본문에 나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할 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전부 경험했다는 겁니다.

사람의 경험은 무엇을 얻기 위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란, 이미 어떤 일을 겪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의도하고 기대해도 실재로 주어지는 결과는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질 때가 대부분입니다. 차를 몰고 길을 가면서 ‘혹시 길이 막히면 내가 터널을 뚫어서라도 산을 넘어야지.’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지는 않아요. 가다보면 길이 있어요.

차가 통과하기 위해 터널을 뚫어 길을 만들어서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오늘은 이것을 해야지.’ 이 말은 ‘오늘은 터널을 뚫어 길을 만들어야지.’라는 소리와 같아요. 실재로 차가 길을 달리다보면 터널도 나오고 차는 그 터널을 통과할 뿐입니다.

하루하루 갈 길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길을 통과하는 식으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통과하는 그 길(현실)을 누가 만들었어요? 이것을 부자 청년은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서 “내가 지켰나이다.”라고 해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이 부자청년의 사고방식과 유사하게 살아가요.

우리가 내 갈 길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로 통과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는 말이 ‘나는 경험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살았다.’고 해요. 이것은 제가 아까 ‘거기’라고 했지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개조하기 위해서 ‘네가 생각한 거기에 너는 없다.’고 하십니다.

없으면 우리는 주님 앞에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말이 없어요. 사람이 말이 많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들의 알맹이는 반성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반성하는 이성이다.’라고 칸트가 말했지요. 왜 반성합니까? ‘내가 이런 잘못과 이런 오류와 이런 나약함을 보였구나.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이것입니다.

반성은 꼭 못해서만 반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합격에 기쁨도 있지만 ‘7급 시험을 쳤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후회를 합니다. 거기에 ‘거기’는 없어요. 이런 식의 후회를 한다는 것은 7급이라는 새로운 ‘거기’를 자꾸만 상정합니다. 그런데 그 안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본인이지요.

그 본인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이 정도 존칭을 붙여드렸으면 나를 내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에, 이것도 ‘거기’를 구성하는 요건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말을 말아야 돼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겠다는 탐욕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선한’이란 단어 하나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이유를 알겠지요? 예수님은 이미 부자 청년을 잘 알고 있어요. 그가 주님의 말씀이 그리워서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려고 왔음을 아십니다. 부자 청년의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제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찾아가서 불러냈지요. 따라서 제자들은 부자 청년과 같은 경험이 없어요. 따라서 제자들도 자진해서 주님 앞에 나온다면 이 부자 청년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일단 예수님께 좋은 이야기를 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얻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르면서 마음을 낮추면서 나갔다면, 주님도 거기에 걸맞게 ‘너는 참 겸손하구나.’라는 식의 칭찬이 있어야 형평성에 맞지요.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아비멜렉이 사라와 동침할 뻔했지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징벌도 태가 닫히면 안 되고 닫힐 뻔해야 되지요. 이게 형평성에 맞아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기’ 현실 재구성을 위해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총 동원해서  끌어들이는 겁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괜찮은 현실 구성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부자 청년의 생각이나 12제자의 생각이나 같아요.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여기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와 있는 거예요.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 교회 와서 주님께 충성했다. 그러면 천국 가서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주님께 충성한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절대 죄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주님께 충성했는데 이것마저 죄라고 여기는 사람은 성령 받은 자 외에는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착한 일을 하듯이 주님께 합니다. 어떻게? “선한 선생이여!” 이렇게 나오지요. 주님을 향한 이런 호칭이 자신은 지금 착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지적질을 하신 거예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적질부터 먼저 시작하신 거예요. “너 지금 나에게 뭐라고 했어? 선한 선생이라고. 하나님만 선한 분이야. 네가 나를 제대로 알고 선한 선생이라고 했느냐?” 이렇게 시작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것이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배척하거나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전도 방식은 접촉을 통해서 수용하거나 배척하지요. 즉 상대의 의견을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내 갈 길은 내가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것이지요.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아 왔는데, 이것도 본인의 영생을 위한 거예요.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몰라요. 즉 예수님이 어떤 기능으로 일하시는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배척함으로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알려주신 거예요. 이처럼 전도란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시는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예수님만 하시지 사람이 전도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건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진 적이 없어요.

인간은 터널을 통과하듯이 삽니다. 그런데 터널을 통과하면서 남들에게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차가 터널을 통과하는데 힘듭니까? 터널을 뚫는다면 힘들어요. 그런데 어느 인간도 터널을 통과했다고 생각지 않고 ‘내 인생은 내가 개척했다.’고 생각해요.

‘개척교회’란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 할 거예요. 홀에서 언제 벗어납니까? 전세방 신세를 언제 면하는가? 자기 건물 없다고 이단인줄 알고 떠나버린 교인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반듯한 예배당을 짓고 싶어요. 반듯한 건물이 있으면 교인들이 찾아 올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건 식당 찾아가는 것과 똑같아요. 이왕이면 주차장도 있고, 사람 많이 찾는 곳에 가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교회를 찾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자기 살 길을 찾는 것이고, 예수님을 찾는 것도 스스로 찾아가야 되지요. ‘주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라는데 내가 성의를 표시하면 주님이 날 아껴주실 것이다.’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마음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요? 배척받았지요. 배척 받을 때 부자 청년은 굉장히 섭섭했을 거예요. 하지만 주님은 이런 부류의 인간을 배척해야 돼요. 왜냐? 배척해야 주님이 심판주로 제대로 일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인간은 배척해야 되는데, 여기에서 벗어난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배척받아야 될 자들입니다.

지금 부자 청년의 잘못은 뭐냐? 자진해서 예수님께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고,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은 ‘자진해서 교회 오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제가 성경 구절을 알려드립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은 반드시 실천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전도입니다.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지요. 이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간의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12제자에게 화투를 나눠줘도 소용없어요. 화투를 여러 사람이 잡고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만 화투를 칩니다.

두 분만 재미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죽을 지경입니다. 길이 있다고 여겨 길을 가면 막혀 있고, 길을 뚫었다 싶은데 또 바위로 막혀 있고, “나는 길이요”라고 해서 주님이 길 인줄 알고 갔는데, 그 개념 자체가 선악구조와 같은 엉터리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갈 길을 찾으려는 이유는, 스스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아니라면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라고 해서 예수 믿었고, 삼위일체를 믿어야 된다고 해서 그것도 믿고, 전도하고 헌신하라고 해서 그것도 했고, 시킨 대로 다 했는데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이런 자들을 향해 ‘막 사세요.’라고 하니까 “막 살면 구원 됩니까?”라고 또 물어요.

‘막 살아라.’는 말은, ‘당신은 어떻게 살아도 막 살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그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아요. 왜냐? ‘내 살 길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할 때, 내가 살아야 한다는 근거가 뭐냐 하면, 나는 선하기 때문에 살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던 부자 청년은, ‘내가 선에 대해서 좀 압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하나님만 선한 분이면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닌가? 예수님이 선한 분이 아니라면 악한 분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은, “네가 아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하나님을 거론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몰라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부자 청년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예수님 옆에 있는 제자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제자들이 왜 예수님 말씀에 놀랐지요? 제자들 마음이 부자 청년의 마음과 똑같아요. ‘내가 예수님 말씀에 잘 순종하고, 그분을 성실히 따르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없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주님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좀 심한 말이라고 여긴 거예요.

예수님은 마치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 말 알아듣지? 너희에게는 해당 되는 말이 아니야. 근심하여 도망친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야.’라는 투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저쪽 뒤를 향해 던진 말이 사실은 이쪽 주님과 같은 편이라고 여긴 제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합니다. ‘더 이상은 못 지킵니다. 이제는 어찌할꼬?’

자기 안전, 자기 몸조심. 이것이 부자 청년을 만나고 난 뒤 제자들이 새롭게 알게 된 자신의 본심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어떻게 내 것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

BC 324년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를 공격해서 정복합니다. 그리고 인도까지 점령해서 인도 스승 브라만을 만나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는가?” 질문이 더럽기 짝이 없어요. 이 말은, 나는 인간으로 살기 싫다는 거예요. 즉 인간은 인간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니까 인간답게 살자.’ 이것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이 인간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신처럼 되지요.

브라만 스승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신이 됩니다.”라고 했어요. 이로부터 10년 알렉산더는 자신을 신격화 하는 일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신전을 건립합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는 욕망이 크지 않습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9급 공무원에 합격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지만, 합격하면 그것으로 욕망이 끝납니까?

지금부터 2,000년 전 진시 왕 때에 자기 무덤을 만드는데 사람과 똑같은 크기의 병사를 진흙으로 만들어 무덤 속에 같이 묻었지요. 자신을 호위하도록. 인간은 자신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누가 이 사실을 알려줘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가가 중요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너는 흙이야!’ 진시 왕의 무덤에 수많은 병사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흙으로 만든 거예요. 얼른 보면 사람 같지만 사실은 흙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흙이 ‘나 사람이야!’ 라고 했다면 진짜 놀라겠지요.

주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 때, 이미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가 있어요. 그 요소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들어갈 때 그는 사람이 됩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사람이 돼요. 그런데 따먹었어요. 이것을 안다면, 우리가 권총으로 나를 죽어야지요. 죽이면 내가 죽는 것입니까, 진흙덩이가 부서지는 겁니까? 진흙이 부서지지요.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뭐라고 했지요?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야, 네가 어떤 계획을 갖던 너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야.’ 이런 뜻입니다. 맡은 역할이 악역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터널을 통과할 뿐입니다. 만들어진 터널이 뭔가 하면, 인간을 빼고, 법과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터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 하셨지요.

이건 율법입니다. 법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율법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어요. 왜? 스스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그러면 부자 청년은 현재 자신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지만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몰라요. 아는 방법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가는 길을 보면 돼요. 죄인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속성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란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17. 5. 11. 08:40 녹취 마침)
 서경수(IP:59.♡.105.91) 17-05-24 09:00 
광주 강의(2017. 4. 21) 38-2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든지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자신에 대해 증거하는 책이죠. 아까 고스톱 이야기했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의 기대나 소망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명령에 순종하심으로 주가 되시는 것뿐입니다.

냉철하게 이야기하면 이것뿐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새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낼 뿐 나머지 모든 요소들은 거기에 빨려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자기 사명 완수를 위한 재료, 도구들이죠. 인간들이 ‘나는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라는 시도까지도 예수님의 주되심에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런 일들을 허용하시고 유도하십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드러났지요. 내 일을 내가 알아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군가를 드러내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수용 또는 배척을 하는데 주님이 부자청년을 배척할 때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즐거워했습니까, 당황했습니까? 당황했지요.

왜냐하면, 부자청년 뿐 아니라 제자들도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천국 간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늘날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닌 무당 집입니다.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 올리지 말고 대나무를 세워놓아야 격이 맞습니다.

무당 집에는 누구 있습니까? 무당이 있지요. 무당이 하는 일은 굿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찾아온 사람은 살풀이를 하고. 한을 풀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정성 드리고 착한 일하면 복 받는 줄 알고 착한 일을 시행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꼴이잖아요. 교회를 소개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가까운 굿하는 집을 소개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여기에 가는 이유가 주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다시 말하면 주님께 배척받은 적이 없어서 자신이 얼마나 큰 하자가 있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권총으로 자신을 쏘세요. 이 말은 자신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아는 거지요. 권총으로 자신을 쏘면 구멍이 생기겠지요.

인간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총으로 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성경을 100독, 1,000독을 해도 자기 앞에서 멈춥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떠나면서 가져간 것이 뭡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왜? 소중하니까.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께 자신을 가지고 와서 영생을 추가하려고 했다가 안 되니까 다시 자신을 챙겨 떠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자기 자신은 남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자신을 총으로 쏘아 구멍을 내라고 했지요. 구멍 낼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의 갈 길을 지시하고 움직여야 하니까요. 스스로 자신을 구멍 낼 마음이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가 되는 조건은 뭡니까? 자신에게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누가 뚫습니까? 고맙게도 주님이 구멍을 뚫어줍니다. 주님으로부터 구멍이 뚫린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을 구멍 낸 권총은 십자가입니다. 권총의 총알은 십자가에서 나온 부활 또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찾아오면 부활하신 주님이 오십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서 찾아오시잖아요.

제자들은 도망쳤는데 주님이 찾아오셨어요. 이것이 수용이지요. 자기 사람으로 받아주시는 겁니다. 구약 아가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나는 그에게 속하고 그는 나에게 속했다(아2:16).” 이게 사랑의 절정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 되는 것이지요. 창세기 2장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고 나오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것이지요. 사랑이 있으면 하나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 몸밖에 없어요. 이런 자는 누구를 만나도 자기 잘되는 것만 챙기려 하지요. 심지어 예수님을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만나서 자기 챙길 것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서 얻는 것만 있었습니까? 아니죠. 잃는 것도 있었지요.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좋은데 바리새인들에게 불려 나갔지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나오는데, 나사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목숨을 잃었어요. 다시 얻었지만. 잃었다가 얻는 것이 좋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그냥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까? 잃었다가 얻으면 혼 줄납니다. 만약 죽었는데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사고방식에 구멍이 나야 합니다. 구멍이 뚫려야 한다는 말은, 주님이 구멍을 낸다는 말은, 수용이 된다는 말은, 구멍 난 인간조차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구멍 뚫릴 사람은 뚫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멍 뚫린 부분을, 우리의 마음을 주께서 공격을 하겠지요. 성도란 그 사람의 마음에 주님이 들어가 있는 자입니다. ‘아바타’란 영화가 있어요. 거대한 기계가 있는데 기계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조종을 하면, 기계 스스로 움직이는 것입니까, 사람이 움직이게 한 것입니까? 사람이 움직이게 하지요.

이 형식을 갖추는 거예요. 겉모습은 옛날의 나인데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와서 조종합니다. 성령이 임한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요즘 인공지능, 또는 4차 산업을 예로 들면 적합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있다고 하면 끝납니까?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게 어떤 변화가 있는가? 내 스스로 산다는 것을 겨냥해서 주님이 쳐들어 온 것을 알지요. 성도는 매일 이 싸움이 벌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이루려 하고 주님은 이런 나에게 시비를 걸지요. ‘왜 너는 그것을 소망하니?’ ‘좋잖아요.’ ‘왜 좋아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남이 모르는 질문이 주어집니다.

산을 넘었더니 넘기 전에 보이지 않았던 산이 새롭게 보입니다. 언제까지 나의 만족을 찾아야 합니까? 어느 선에 서야 만족이 있겠어요? “아이 성적이 올라 행복합니다.” “네 행복을 버리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주님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부자청년에게 던진 질문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지는 거예요.

“제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목숨 바쳐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뭔데?” “행복을 원합니다.” “그 행복 나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느냐?” 우리는 내가 이 정도 하면 이런 현실이 올 것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과 예수님 따른 것을 자꾸 바꿔치기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바꾸지 나중에 그렇게 하는가? 이것은 우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앞장세워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만약 내가 생각한 구원에 내가 안착하면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소중한 분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챙겼는데 더 이상 주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기대한 것을 이미 챙겼으면 됐지.

‘연발성’이란, 계속 총을 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계속 쏩니다. 딸을 결혼시킨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부모로서 이제 할 일 다 했다.’고 했는데, 주님께서 ‘할 일 다 했으니 잘했냐?’라고 성령의 총으로 우리를 쏘는 거예요. 아버지답게 산 것과 예수님과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반대로 ‘나는 이제 인생 살맛이 안 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의 안정을 기구하는 그 생각과 예수님을 바꾸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논리를 더 진척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과 나쁜 일 전부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일이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몇 번 떨어졌어요. 떨어질 때마다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지요. ‘돈도 들고 시간과 노력도 투자했는데 아무 성과가 없구나.’라고 불평하면, 주님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네가 원하는 것을 꼭 얻어야 하냐?”

이 말은, 내(주)가 누군가를 증명하며 살면 되지, 꼭 네가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이정도야!’라는 것을 누구한테 증명하려고 하느냔 말이지요. 자기 주재파악도 못하면서. 내 존재를 남들에게 증명해 보기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본래의 일,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명하는 일을 가로막는 거예요.

이게 악마에 속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활용하는 것이지, 우리 좋으라고 찾아오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성령이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예수님 생각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잠도 안 자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있습니까? 못 살지요. 그런데 천사는 어떻습니까? 먹는 것, 잠자는 것과 무관하게 삽니다. 같은 피조물이지만 천사는 잠도 안 자고, 안 먹어도 돼요. 왜 우리는 인간이 원형이라고 생각합니까?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이 왜 합당한 것이라고 여깁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잘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거예요. 철저하게 인간 자신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에게 물 마시고, 밥 먹고, 잠자게 하는 거예요. 이것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고 40일을 보냈지요.

그 때 사단이 달려들어 유혹하지요. “먹어야 살지.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라도 먹어야지.”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먹고 마실 자격도 없다는 것으로 출발하는데, 사단에 사로잡힌 모든 인간들은 먹고 마시는 것은 기본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사단을 붙여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는 것은 기본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사단이 심어준 것임을 폭로한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지옥가면 그만인데, 예수님이 등장한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등장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는 성령이 오신 게 문제입니다. 사울이 율법에 흠이 없고,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으로 잘난 맛에 그냥 살면 되는데 성령이 찾아와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나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면서 설치고 다니니 사람들이 감당할 수가 없어요. 교회는 친목단체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경건과 거룩은 다 뽑아내서 ‘천국 들어가세!’ 라고 외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에 정성을 더하고 의지와 신념을 더해서 사람을 모으고 단체를 키우는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교인이고.

그 친목단체 사람들이 자신을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보면 가관이에요. 얼마나 사단에게 길 들여졌으면 그런 반응을 보이겠어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문제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문제가 많았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신약의 예수님이 만들 이스라엘은 문제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구약의 멸망당한 이스라엘 말고, 영생 얻을 이스라엘을 예수님이 만들잖아요. 만들면서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럼 12제자가 보여 줄 것은 ‘우리는 같은 인간이라도 이스라엘과는 달라.’ 이러면 안 되고, 멸망한 자들과 똑같은 인간이었는데 누가 손을 대는 거예요. 그렇다면 12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여줄 것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래서 망했다.’ 그 망하는 실습 장소에 조교가 등장했으니 그 중 하나가 부자청년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할 이유를 부자청년이 보여주었고, 그것을 지켜본 자가 12제자들이고, 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오랜 시간 주님과 동행했으니 더 이상 알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새로운 면이 보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신감이 떨어져요.

초장에 예수님께 능력 받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때는 좋다고 따라다녔는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아졌어요. 예수님은 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고 죄를 사하기 위해 오셨어요. 그러면 죄를 알아야지요.

21-2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제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은 사랑해서 이야기했지만 부자청년은 결국 떠나버렸지요.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것입니다. 근심하며 떠난 부자청년은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데 재물이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있는 재산 다 바치고 예수님을 믿어야 참 신앙입니까?

부자청년은 자신의 재물이 어떻게 해서 생겼다고 생각합니까? 본인이 율법 잘 지켜서 받은 복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평소에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했던 모든 짓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걸 부자청년이 감당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떠난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배척하신 거예요.

23-2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쉽다고 해야 합니까, 어렵다고 해야 합니까? 어렵다고 하면 안 되고 쉽다고 해야 돼요. “누가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했지요. 이 말을 왜 먼저 말씀하지 않았지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신다.’고 처음부터 말씀을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왜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셔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십니까? 예수님만 하나님을 알고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이것을 알려면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을 폐기처분해야 돼요. 인간이 원하는 것을 폐기처분한다는 것은 곧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영생은 없다.’ 이미 주께서 확정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안 보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 이런 말씀을 의지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어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심이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새언약이지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성경 해석이 귀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구절 말고 다른 구절도 있잖아요.”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몰라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인간들이 유발시켰습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날 죽인 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간단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너는 지옥 가야할 죄인이었다.’고 하시면서 죄인 됨을 보여주는 삶으로 이끄시는 그런 관계,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목사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해요.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구멍 뚫리지 않은 거예요. 남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다 끌어와서 내 것으로 만들어요. 복음을 전하면 들은 후에 “목사님, 복음 알면 아들 낳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이 말은, 결국 복음을 내 소원 이루는데 접목시켜 활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려고 해요. 그러니 복음을 이해할 수 없지요. ‘내 것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사단의 마음이 주님의 복음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자기를 챙기려고 하는 마음에 구멍을 뚫립니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구멍이 뚫리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나를 위해 살아온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납니다. 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악이 주님의 의의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욕심이 올라와서 ‘주님의 복음을 믿었으니까 내 소원도 하나 들어주세요.’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늘 이런 것이 올라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죄와 더불어 삽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고 성경도 읽으면서 일이 잘 성사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마음이 다 자기 욕심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죄악이지요. 그러면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데, 죄는 나쁘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도 아닙니다. 우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을 주님은 죄로 바꾸기 때문에 하든 안 하든 우리는 바뀝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늘 바뀝니다. 우리는 그냥 터널을 통과할 뿐입니다. 통과하면서 자신이 만든 터널을 꿈꾸면서 살아가요.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꿈이지만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됩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꾸는 꿈을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혼자 미치면 이상하지요. 그러나 다 같이 미치면 정상이 됩니다.

촛불을 혼자 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100만 명이 같이 촛불을 들면 자랑스러워요. 마귀가 우리에게 ‘너는 가치 있어. 소중한 존재야.’라고 계속 속삭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연속적으로 우리에게 구멍을 냅니다. 그러면 그 구멍으로 바람이 불어오게 되고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너무 과격합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자들도 참 힘이 들었어요. 참고 주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의 본색을 다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하고 더러운 우리 자신이 폭로되지요.

그러나 장차 성령이 오게 되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께서 다뤄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10:21).” 이 말씀을 성령 받은 바울, 베드로에게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할 거예요. 왜냐?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다 이루시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신자입니다.

내 자식이 어떻게 되든, 내 집안이 어떻게 되든 주께서 주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면 됩니다. 감사는 ‘주가 말씀대로 하실 겁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도가 보여 줄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특징은 누구를 만나도 모든 공로를 남편에게 돌립니다. 주님은 성도를 이렇게 만들어요. 이것은 본인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구원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희귀한 일입니다. 그 희귀한 일을 매일 느낀다면 세상에 이런 복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달라고 애원하는 자에게는 안 주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복이 주어지니까 이건 희귀한 것이지요. 희귀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 할수록 기쁜 일입니다. 남과 싸울 때, 남을 욕하고 싶을 때 예수님의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 ‘나는 남에게 욕할 자격도 없고, 내가 욕을 듣는다고 해서 화 낼 입장도 아니고, 내가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통곡할 일도 아니고 이것마저도 내가 누구인가를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란 점을 깨닫게 되면, 성령이 주신 온유와 화평이 절로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자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인 줄 알았는데, 제자 아닌 자들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본인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주님이 누구신지 보여주는 사건임을 깨닫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5. 24. 08:5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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