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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8 01:37:33 조회 : 805         
마음의 할례 17102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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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4.♡.78.239) 17-11-12 09:29 
광주 강의(2017. 10. 27) 44-1

마가복음 10장 46절부터 봅시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이야기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이 본문을 잘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주시는 분이다. 아쉬운 것 있냐? 주님 앞에 나와라.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이렇게 본문을 설교하지요.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어요. 이 말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 내 처지를 아뢰면 불쌍히 여겨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적으로 들려질 수가 있어요. 왜냐? 주님은 값없이 모든 것을 주신다는 성경 말씀과 합치되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이 예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사랑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과 통합니다. 그런데 주일학교 학생들이 구약의 내용을 잘 배우지 않기 때문에 몰라요. 좋으신 하나님을 구약에서는 ‘엘’이라고 합니다. ‘엘’은 바알 신의 아버지입니다.

‘엘’은 가나안 토착민들이 믿는 신입니다. 엘, 바알, 아세라 등의 신이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신인지 설명이 없어요. 그냥 ‘바알을 섬겼으니까 너는 저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은 나오지만, 왜 저주를 받으면서도 바알에 끌리는지 그 이유는 잘 모릅니다. 저도 옛날 복음을 몰랐던 시절에 성경을 보면서 이런 부분이 굉장히 답답했습니다.

누가 설명을 좀 해주면 좋겠는데 목사도, 교사도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바알은 우상이니까 섬기지 마라.’ 이런 말만 했어요. 목사님이 저에게 이야기하듯이 그 당시 선지자들도 이런 말을 많이 했겠지요.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서면 또 바알을 섬겼어요. 이게 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하고 있는가?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도 보았으면서 왜 자꾸 바알에게 마음이 끌리는가? 그 이유는, 바알은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알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1929년에 시리아에서 우가릿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에 가나안 종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엘, 바알, 아세라가 어떤 신인지, 어떤 방법으로 신을 섬겨야 하는지, 그리고 신의 계율 등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이 내용을 보수 신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고, 진보 신학을 하는 통합, 기장, 감리교 신학교에서는 이 내용을 가르칩니다. 진보 신학자들은 이런 내용으로 학위를 많이 받아요.

이들은 성경은 믿지 않고 고고학을 믿는데, 이런 자들이 신학 교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신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박살내는 사람만이 신학교 교수가 될 수 있어요. 희한하지요?

우가릿 문서에서 바알을 어떻게 기록해 놓았는지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엘’ 신이 등장하는데, 문지방에 발을 딛고 왕관을 씌고 앉아서 자기 왕을 향해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입니다. 미국에서 수입된 치킨 할아버지 모습, 또는 금복주 소주에 등장하는 노인을 생각하면 됩니다. 인자한 노인의 모습이죠.

그러니까 ‘엘’ 신은, 인간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가장 인자한 어른의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엘’은 노인이니까 활동은 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데, 자기 대신 아들을 보내 활동하게 합니다. 이 아들이 ‘바알’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누이동생이며 아내인 ‘아세라’ 혹은 ‘아스다롯’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를 ‘하늘의 왕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구약 성경을 읽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이유는 자신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구나.’ 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 섬기는 자를 저주한다면 우상이 문제가 아니고 우상 숭배자가 문제입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상 섬기지 않으면 되겠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미리 선수를 치는 거예요. 이사야에 보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어요. 그럼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인데 우상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어요. 그럼 우상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뻔합니다. 인간에게서 나왔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때에 뱀의 후손은 인간들 속에 작동을 해서 인간 속에서 우상도 함께 등장합니다. 결국은 인간들이 우상을 만든 거지요.

제 말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패가 있어요. 왜냐? 분명히 조건이 인간들만 있다고 했잖아요. 그 인간에게서 우상이 나온다. 즉 신이 나온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이 우상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신을 섬기면 되니까요. 메소포타미아가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인데, 그곳에서 등장하는 신을 조사해 보니까 1,500 가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1,500 종류의 신은 가족관계입니다. 왜냐? 이 모두가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간들 중에는 신을 전담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1,500 가지의 신들을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 이 다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이 말은, 신이 아무리 많아도 친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 다섯 가지로 분류를 하는데, 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이유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인간들이 신을 만들 때 신의 존재는 후발주자입니다. 인간 존재가 우선입니다. 존재는 있음이죠. 내가 있기에 신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 교회나 가서 설교를 들어보세요. 그 설교의 주제는 ‘신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를 후원해 줍니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이 나의 존재를 확고히 하는 후원자로써의 전문직을 행사하란 말이지요. 옛날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 이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가나안 신들이 그리스 신으로 이동해요. 그러면 그리스 신화는 1,500 가지는 아니지만 여기에도 수가 만만치 않습니다. 수백 가지는 됩니다. 이들은 서로 친밀한 정도가 아니고 서로 연애하고 결혼하고 질투하고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 신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독자적이 아니고 가족을 이룬다는 겁니다. 한 곳에 모여야 뇌물 바치고 제사 드릴 대상이 고정이 되잖아요.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면 신들이 알아서 나눠 먹으란 것이지요. 처녀를 바치고, 술과 떡을 바칠 테니까 신들끼리 싸우지 말고 적당히 나눠 먹고, 폭풍이나 전쟁,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이럴 때 인간들은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왜 갑니까? 정신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갑니다. 교회 안 가면 불안해요. 인간의 정신은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처음에는 ‘뇌물 드릴 때니까 복 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발달하게 되면 개인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서 범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과학이고 철학입니다. 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할까? 이렇게 나오지요.

이 모든 것은 가나안의 바알 종교가 이미 행한 것인데, 그 후손들이 조상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엘’은 어른이고, 모든 실행은 ‘바알’이 합니다. ‘바알’은 특히 폭풍의 신인데,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닙니다. 우가릿 문서에 보면 ‘바알’은 구름을 타고 다닙니다.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았을 때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기의 신을 불렀잖아요. 백성들은 여기에 기대를 걸었고.

이것은 평소에 이런 신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3년 6개월 비가 내리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평소에는 그들이 기도를 하면 비가 내렸어요. 그리니까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미 과학자들로 인정받았어요. 문자를 해독했고, 자연의 이치를 어느 정도 파악했고, 또 신에게 기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에게 신임을 받아야 그 종교는 오래 갑니다. 큰 교회가 계속 크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신의 효과를 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예배당을 크게 지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즉 신의 도움으로 교회가 크게 되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면 그 위에 신뢰가 쌓이고 또 쌓이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구약을 보면 알겠지만 여호와는 별로 인기가 없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부터 바알 종교가 인기를 얻었습니다. 왜냐?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잘 사니까. 이스라엘은 철기문화가 아니에요. 철 농기구를 만들려면 블레셋에 가서 그들의 기술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나라가 잘 산다는 것은 제대로 된 신을 신봉하기에 잘 산다고 여겼습니다. 바알은 폭풍의 신인데, 태양, 달, 죽음, 전쟁 이 모든 것을 주관하면서 실효성 있게 비를 내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다른 민족이 바알을 섬기는 이유가 편리하거든요. 시키는 대로 제사하면 되고, 요구하는 대로 드리면 됩니다.

일반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무엇을 하면 복 받겠습니까?’ 이것입니다. 바알 종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고 검정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종교는 우발적입니다. 여호와도 기적은 베풀었지만 이것은 선지자가 희생한 덕분에 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순간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사사들은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사사가 없는 시절에는 바알을 섬기는 겁니다. ‘기드온’이 무슨 뜻입니까? ‘바알과 싸운다’는 의미입니다. 기드온은 본인이 원해서 사사가 된 것이 아니라 천사가 찾아와서 그를 사사로 세웠습니다. 만약 천사가 안 찾아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알을 섬기든지 뭘 하든지 관심도 없어요.

기드온에게 천사가 찾아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을 섬긴 거예요. 여호와는 없어요. 마치 기독교 나라 영국의 런던 시장이 이슬람 신자인 것처럼. 시장이 파키스탄 출신입니다. 정치만 잘 하면 되지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해서 그가 시장으로 당선된 겁니다.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돈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여호와가 나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돈 20억이 내 손에 들어오면 강 같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목사에게 주님의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돈 많은 교인이 교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여, 이제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제 말은 존재한다는 것이 화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싸우는데, 엄밀히 따지면 ‘내가 살아있나, 네가 살아있나?’ 이 싸움입니다. ‘네가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냐?’ 이 다툼이 구약의 내용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음으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사는데 위기를 발생시킵니다. 사사기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안정되고 평안하게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 불안의 요소를 유발시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몰랐어요. 사람들이 힘든 것은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고 문제가 뭔지 몰라서 힘듭니다.

20대 젊은이들은 답을 찾으려고 해요. 취직은 어떻게 하고, 결혼은 누구와 할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찾을 답인 줄 압니다. 왜 취직을 해야 하며, 왜 결혼을 해야 합니까? 취직 못하고 결혼 못하면 본인이 사는데 불편하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물어요.

주님은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어요.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지점이 어떤 지점입니까?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존경의 대상이 된 상태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은 죽기 위해 오셨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이 소리 듣고 사람들은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자기 존재가 우선인데 어떻게 자기를 부인합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은 내가 사는 것이 질문이고, 답은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사는가 이것이 답이다. 그 답이 궁하니까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만들어진 것이 기독교, 교회입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를 생각한 적도 없는데 지상의 교회는 이런 모습입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싸우는 우상은 없는 거예요. 우상은 그냥 돌멩이고 나뭇조각일 뿐인데, 그 우상의 이미지가 생겨서 인간들이 장인들에게 어떤 형태의 우상을 주문해서 만들게 하지요. 그러면 다양한 우상들이 만들어지겠지요. 그러면 이 신들 사이에는 친밀성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어떤 신이든 존중의 대상이 됩니다. “너는 이 신 믿나, 나는 저 신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화목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유명한 성당이 있어요. 그 성당 때문에 바르셀로나가 밥 먹고 사는데, 그 이름이 ‘성 가족’ 성당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지은 건물입니다.

제가 이 성당의 이름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거룩한 가족’의 성당이 무슨 뜻일까? 결국은 바알 종교와 결부되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이 가족을 소용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신들도 서로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신이 친근한 신이 됩니다. 이것을 ‘아날로그’라고 합니다.

아날로그란 유비인데, 유사성을 틴 비유란 뜻입니다. 아날로그는 서로 지역이 다르고 구조가 다른데 유사성이 있어서 1대 1로 대응되는 요소가 많을 때 아날로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아날로그대로 만들었다.’ 성경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형상’을 ‘유비’로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 통하는 것이 의, 거룩, 사랑 이런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웠지요? 공유적 속성(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은 비공유적 속성이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공유적 속성이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한탄하사”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공유적 속성,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는 것은 비공유적 속성. 이런 식으로 분류합니다. 신학이.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이 끊어지지 않는 공통점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알셀무스는 ‘존재의 유비’라고 해서 이 주장을 발전시켜 오늘날까지 천주교에서는 이런 신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낙태를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왜냐? 생명이니까.

그리고 모든 인간(불교 신자든, 이슬람 신자든)을 형제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하나님의 진노나 저주 이야기를 그의 하지 않습니다. 완악한 인간, 여러 번 기회를 줬는데 계속 완악함을 고집하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지옥을 보내지만, 처음부터 지옥 보내기 위해 태어난다는 로마서 9장의 말씀은 상상도 못하지요.

만약 처음부터 지옥 보내기로 작정이 되었다면 전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도 하나 안 하나 지옥 갈 자는 지옥 가고, 천국 갈 자는 천국 가는데 왜 전도를 하는가?’ 이렇게 나오지요. 이것은 감리교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장로교 신학도 여기에 따라갑니다. 가능하면 지옥, 저주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손님 안 온다고.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은 저주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지요. 인간은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나는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면 돼요. 즉 인간은 자기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입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 있기에 저주 받는다.’는 말씀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 받을 짓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은 합당하고, 이 저주가 대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설교 시간에 이런 말을 하면 교인들은 그 교회에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그 이유는 우상 숭배가 원인입니다.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인간이 만든 거예요. 인간이 있기에 인간에게서 우상이 나오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어요.

주님이 이런 조치를 취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상 섬기는 자이고,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탐심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모든 인간은 탐심을 가지게 되어 있고, 그 탐심의 진원지는 내가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살아야겠다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지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난 알아요.” 내가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있는 것을 계속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것도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지요. 베드로후서 1장 5-7절에 보면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이 모든 나열에서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존재지요. 본문은 그것이 아닌데 말씀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이 말씀을 봅니다.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강의 초반에 제가 뭐라고 했지요? 소경 바디매오가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하니까 주님이 불쌍히 여겨 앞을 보게 했다는 식으로 나오잖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신다.’는 말은 합당치 않지요. 그리고 인간을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도 인간이 주님께 천국을 넣어달라고 요청하지 않아서 지옥을 가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지옥으로 몰아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주일학교 때 이런 식으로 배운 기억이 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우상 숭배자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결국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 존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갑니다. 우리는 살고자 하는데,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이유는 다 죄 때문입니다. 물론 본인의 죄가 아닌 우리 죄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했다는 말은, “주여, 불쌍히 여겨 살려주세요.”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았던 소경 바디매오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하면, 나의 있음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면 될 것 같은데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럼 우리를 있게 한 분에게 책임을 돌리면 되겠지요? 누가 우리를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이죠. 우리 죄를 유발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유도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죄에 대한 최종 책임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마귀가 들어있기 때문이죠. ‘내가 죄를 짓게 된 것은 하나님 책임도 있잖아요.’ 이렇게 나옵니다. 사단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래서 ‘왜 죄의 책임을 나에게만 묻고 사단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까?’라고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동양 철학에서는 신을 안 믿어요. 공자, 맹자는 신을 안 믿습니다. 윤리, 도덕은 인간이 책임져야 합니다. 신이 결부되면 모든 책임을 신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 철학에서는 신은 없고 자연을 말합니다. 사람이 늙고 아픈 것은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반칙입니다.

자연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자연이 저절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답을 몰라서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이고, ‘저희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한다(롬1:21).’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하나님을 다 갖고 있어요. 하나님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를 정당화 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법을 준수하는 겁니다. 그럼 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는 것은 어떻게 판별하는가?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을 통해서 내 생존에 유리하게 돌아가면 복을 받은 것이고, 불리하게 돌아가면 벌은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바울 종교에요. 이스라엘 주변 모든 나라가 바알 종교를 가지고 있었어요.

인간은 결국 바알 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믿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몸은 바알 종교를 믿을 수밖에 없도록 타고났어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교제의 대상이 아니지만 바알은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치면 바알은 복을 내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 바알을 섬기는 식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엉터리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폭로됩니다.

‘너희들이 무수한 기름과 무수한 제물을 바쳐도 주님은 안 받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신 거예요. 육신의 할례는 칼로 양피를 잘라내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잘라내지요?

마음을 잘라내는 것은 자아를 도려내는 것인데, 자아는 신체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나무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했지요. 예전에는 아담, 하와가 한 마음이었는데, 이제 독자적인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마음을 스스로 지키고 변호하고 변명할 때 그 안에 이미 자아가 구축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주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디매오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본래의 사명과 관련되어 이 병을 낫게 해 준 거예요.

10분 쉽시다.

(2017. 11. 11. 17:53 녹취 마침)
 서경수(IP:211.♡.182.111) 17-11-23 17:42 
광주 강의(2017. 10. 27) 44-2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6).”라고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는 자신이 소경이며 거지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남들은 건강하고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상태입니까?’ 라는 불만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불만이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런 태도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는데, 이 말은 기적에 해당됩니다.

바대매오의 말에는, 현재의 내 상태가 나에게 합당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가 자신을 위함이 아니란 의미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소경이 되었는데, 여기에 나의 기대와 소망을 담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마음 중심에 자신의 욕심이나 탐욕이 아닌 주님의 뜻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래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했어요.

그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하면 예수님은 그를 구원해 주시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5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좇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힘든 이유가 나름대로 목적을 만들고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에 힘들어요. “이번에는 꼭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자기 자신을 힘들게 만듭니다.

이 때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부합되지 않는 경우를 발생시켜서 우리의 목표가 와해되도록 하십니다. 이 때 새롭게 발생한 난관을 해결하다보면 기존의 자기 목적은 무너지고 새로운 사건에 휩쓸리게 되지요. 여기서 믿음이란 개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세례와 십자가 중간에 하신 일은 뭡니까? 초반에는 갈릴리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일을 했지요. 이 때 사람들이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이 몰려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와 목적이 있겠지요? 이 목적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나는 병만 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목적이 결부되어 있겠지요.

이런 경우가 요한복음에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 5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바디매오가 소경에서 눈을 떠서 집으로 갔습니까? 아니지요. ‘길에서 좇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 목적 이뤘으면 집으로 가지 왜 예수님을 따라 갑니까? 뭔가 자기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는 거예요. 예초의 목적 말고 다른 목적이 생긴 거예요.

눈을 떠서 보겠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점점 어디에 가까워지는가 하면, 예수님이 원래 이 땅에 오신 목적에 점점 접근해 가는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우리 중에 누가 하늘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이 질문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십자가 지신 그 중간에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 때 제자들이 잠자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왜 깨웠을까요? 살고 싶어서. 그럼 현재 자기가 사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운 것을 그들은 믿음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깨어나서 하신 말씀은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하셨어요.

풍랑이 잔잔하게 된 후 제자들은 “이분이 누구시지?”라고 관심사가 예수님께 쏠렸지요. 믿음과 짝이 되는 내용이 뭔가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 그러니까 최소한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산을 옮길 수 있지요. 여기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믿음과 인간들의 믿음을 대비시키면 인간들이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인간들이 말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인간들 마음에서 나왔지요. 그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그 마음 그대로 간단 말이죠. 그런데 바디매오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는 눈 뜨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시니까 갑자기 눈을 뜨겠다는 종전의 마음에서 새로운 마음이 발생된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아까 마음의 할례를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점차 파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마음과 예수님 마음이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찢어집니다. 습자지가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에서 바늘로 찌르면 습자지가 찢어집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에 십자가의 바늘이 꽂히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말씀하실 때 ‘겨자씨만한 믿음’을 거론하심으로 우리는 믿음을 양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짜 믿음은 질적으로 표현이 돼요.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9절을 보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세상의 철학, 과학, 교육학, 정치학, 그 외 모든 학문은 다 미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고 했어요. 이 말은, 소용없다, 쓸데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 했어요.

우리 마음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가야 되는가 하면, 2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잖아요. 그러기에 세상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바디매오가 이것을 알았으면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겠습니까? 눈 뜨게 해달라고 올 필요가 없지요.

눈 안 떠도 주의 것이고, 눈 떠도 주의 것입니다. 못 보면 불편한 것은 있지만 ‘긍휼히 여겨주소서.’라는 요구조건이 필요치 않지요. 왜냐? 소경된 그 자체가 주님의 긍휼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소경에서 눈을 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네가 구원되었다.”고 하시니까, 바디매오는 소망했던 것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이게 뭔가 하면, 바디매오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보통 의사는 환자를 고쳐주지 자기가 환자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요. 의사들이 주사기로 환자의 몸속에 약물을 투입해서 통증을 치료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떻게 고치는가 하면, 그들 속에 죄를 삽입시켜요.

제임스 0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고. 복음만 전한다고 상당히 인기 있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단의 소리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죄를 짓게 하시는 분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더욱 더 어두움으로 드러나지요. 갑자기 시부모님이 집에 찾아오시면 난리가 납니다. 평소에는 구석구석 다 치우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잔소리꾼이 오시면 치워야 됩니다. 왜? 자기가 보기에도 더럽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독감 예방주사입니다.

독감 균을 주사로 집어넣는 거예요. ‘너는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지? 알려줄게.’ 하시면서 죄의 원천을 집어넣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모르는 죄까지 주께서 대신 짊어짐으로 죄의 원천이 우리 속에 독감 예방주사처럼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내가 구원 받겠다는 마음은 악마가 시킨 거예요. ‘네가 착하게 살면 구원시켜 주신다. 네가 지은 죄보다 의를 더 많이 행하면 의인으로 인정받아 천국 가는 거야.’ 이게 바알 종교입니다. 사단이 이런 것을 속삭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왔는데 우리는 안 죽고 살아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사단이 우리 속에 들어와 속여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죄가 뭐냐? 그냥 단독적인 죄는 없어요. 구원의 성격과 결부해서 죄가 밝혀집니다. 노아 시대에 심판의 양상은 양식이 없는 심판입니까, 물로 심판 받았습니까? 물로 심판 받았지요. 그러면 구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방주로 들어가 물에서 구원 받는 방식이지요. 예수님이 구원자지요. 그럼 구원 받아야 할 자들은 죄인이어야 하겠지요.

따라서 구원 받을 자는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그것이 전부 죄라야 하겠지요? 그래서 내 행위는 의미 없고 예수님의 행위, 그분의 언약만 높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내가 천국 가겠다고 나옵니다. 그게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바알종교 식의 예수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예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온 성도는 죄를 안 짓는다고요? 개혁주의 신학의 이단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죄 짓자.’는 말을 이해 못해요. 왜 우리가 본격적으로 죄를 지어야 하는가 하면, 구원 문제가 우리 손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대로 안 해서 구원이 안 될 것 같으면 우리가 조심해야 되는데, 구약을 지나 신약에 오면 구원 문제가 우리의 손을 떠났어요.

잘해도 구원 안 되고, 못해도 구원 안 돼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세리처럼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은 수시에 합격했습니다. 수시는 실기만 봅니다. 이론은 안 봅니다. 세리는 실기에 강해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일과 십자가 사이에 바디매오도 들어가지만 세리와 온갖 죄인들이 다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들어간 모든 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담겨있어요. 모두 우발적 사건들입니다. 이것은 시작과 끝을 다 알아야 해석이 가능해요. 주께서 죄로 잠수해서 의로 나와요.

박태완 선수는 물에서 잠수하면 50m 정도 갈 동안 물에서 올라오지 않습니다. 호흡이 길어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죄 속에 잠수해서 가는 기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활동하시면 예수님의 존재 때문에 안 밝혀진 죄들이 다 밝혀집니다. 그때그때 죄에 대해서 주님은 문자를 날립니다. “네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라고.

백부장한테도 말씀하셨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말씀하셨지요. 귀신 들린 여자가 귀신이 나가는 것으로 구원 받는다면, 귀신 안 들린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 받은 것입니까? 이런 아이디어가 생기잖아요.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마음의 찢어짐이 있었어요. 마음이 찢어졌다는 것은 주님 믿음의 일부가 하나의 샘플로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속에 온 거예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딸이 귀신들린 것에 대해서 원망합니까, 원망 안 합니까? 인간은 조금의 어려움만 있어도 원망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는 것이 힘들면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윤리관은 내 존재가 기초가 되기 때문에 왜곡된 일이 벌어집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될 때는 하나님을 안 찾습니다.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자기 힘으로 안 될 때 주님을 찾아요.

우리가 볼 때는 ‘이제 인간 됐구나.’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인간 된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평안해지면 또 주님을 떠나 바알을 섬깁니다. 인간의 본성을 달라지지 않습니다. 태생자체가 오뚝이처럼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즉 주님을 섬겼다가 다시 우상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은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다른 말하지 마세요.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죄인이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지 평안한 것이 당연합니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박근혜 이야기하는 겁니다. 매트리스 2장 깔고 자면 됐지 얼마나 더 있어야 됩니까? 감옥이 호텔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이유는 뭡니까? 곧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죄인이 행복을 왜 찾습니까? 바디매오가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주셨어요. 그 때 알았어요. ‘내가 쓸데없는 것을 주님께 요구했구나.’ 주님은 지금 죽음으로 가시는데 자기는 살 궁리를 했어요. 이게 마귀지 뭡니까?

나의 모든 행동은 결국 나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먼저고 주님은 나중이잖아요. 아닙니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마음이 문제죠. 주께서 마음의 할례를 행해라고 하셨는데, 무슨 수로 마음을 잘라냅니까? 인간이 어떤 것에 욕심을 줄이면 다른 것에 더 욕심이 생기는 법이지 절대 욕심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너무 몰라요. ‘마음의 할례’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기에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의 할례가 돼요. 주님의 마음이 내 중심에 박히는 거지요. 이것을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을 찢는 작업이 있어야 됩니다. 찢는 작업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굴러 가게 하시는 거예요.

세상은 주님의 뜻대로, 십자가 복음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그물망에 걸린 우리는 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새삼스럽게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 임하게 되면 예전에는 죄가 아니라고 여긴 것까지 죄로 드러나게 됩니다. 만약 내가 죄를 짓게 되면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죄를 지었기에 자신의 죄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되면 주님께로 말미암아 주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구조가 주님의 공생애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서 죽으시고 부활하는 과정을 내 마음에서 반복시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반복 과정에서 우리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마음의 체계가 잡히면 반드시 목적이 나옵니다. ‘주여, 이것만은 꼭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런 것이지요. 제가 ‘맥아드 장군의 기도문’을 읽은 후, 이것이 얼마나 비복음적인가를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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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드 장군의 기도문]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소서

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하소서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아들에게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 아버지는 어느 날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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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힘을 달라’고 했는데, 이 약함은 탐심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약해야 됩니다. 내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는 자체가 탐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함으로’ 이렇게 기도했는데,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마음고생을 해야 돼요.

‘정직한 패배, 정직한 승리’라고 했는데, 인간은 승리, 패배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해야지 패배했다고 찡그리고 승리했다고 좋아하면 안 됩니다. ‘그가 바라는 소원을 행동으로’ 소원을 갖는다는 자체가 죄입니다. 목적이 있다는 자체가 마음의 할례를 안 받은 거예요.

‘주님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미워해야 돼요. ‘그를 안위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이런 것을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주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해야지요. ‘도전과 고난 속에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극복 못하면 안 하면 되지 왜 꼭 극복을 해야 합니까? 극복하겠다는 말은 극복하기 전과 후를 구분해서 극복 후를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욕심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견디게 하시고 패배한 사람에게 긍휼을’ 누구도 긍휼을 베풀 자격이 없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목표를 높게 하옵소서’ 죄인 주재에 감히 이런 것을 요구하다니 참 가관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인간의 모든 기억은 편집된 것입니다. 현재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억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거론한다는 것은 자기 잘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머를 알게 하시어’ 유머 감각을 원하는 것은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는 거예요. ‘진정한 위대함은 성실이란 것’ 위대함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탐욕입니다. 제자의 엄마가 자기 아들을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와 같은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 마음 자체가 찢어져야 되는데 뭘 열려요. ‘진실함과 온유함이 있게’ 온유함은 자기 부인입니다. 맥아드는 자식이 우상입니다. 자식을 위한 제대로 된 기도는 ‘주여, 내 자식을 죽여주십시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것입니다.

교인들 가정에 [맥아드의 기도문]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은 사람이 많아요. 자식 잘 되면 나에게 영광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가 없는 상태로 자기 목적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매슬로의 5욕구설] 이론이 있는데,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를 주장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고 나중에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했는데, 이건 잘못입니다. 자아실현의 욕구가 먼저입니다. 인간은 밥 먹고 편히 쉬는 것이 욕구의 우선이 아니고 자기라는 이미지가 먼저입니다.

나이기에 먹어야 하고, 나이기에 잠을 자야 한다는 거예요. 잠이 안 오면 주께서 잠자지 못하게 하신 거예요. 마음이 할례를 받아 찢어져야 하는데, 안 찢어지면 내 만족이 주님의 만족인 것으로 생각해요. 이건 아날로그, 유비라고 했지요. 이게 우상입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주님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래요.

바디매오가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은 주님을 잘 모라서 한 소리입니다. 이런 바디매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가 훌륭해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믿음을 심어주셔서 구원하신 겁니다. 고추 튀김에는 고추 속에 고기를 다져 넣어 튀긴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욕심을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 안을 깨어보니 그 안에 구원이 들어 있고, 믿음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구원과 믿음이 들어갔기 때문이고 이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바디매오의 마음을 찢어버리고 그 속에 주님의 마음을 샘플로 집어넣는 거예요. 주님은 바디매오를 하나님의 계시의 용도로 마가복음 10장에 집어넣은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들은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님께 구하면 주께서 들어 주시겠지.’라고. 주님이 십자가 질 때까지는 계속 이런 오해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1인분 도시락으로 5,000명을 먹였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만 계시면 더 이상 굶주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따른 겁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시작은 누구나 이런 식으로 출발해야 됩니다.

바디매오처럼 자기 욕망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얻어먹고 와해가 됩니다. 기도에 응답받은 후에 ‘이것이 바로 나의 욕심이었구나.’라는 것이 들통 나게 하십니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주님께 감사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신학생 때 등록금이 없어서 고생할 때 권사님이 등록금을 주셔서 공부했고, 목사가 되는 순간까지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주님이기에 앞으로 목회생활 역시 주님이 인도해 주실 줄 믿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은 자신이 정당하기 때문에 주님이 도와주신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내 존재의 정당성이죠. 인간은 항상 자기 존재를 증명하면서 삽니다. 모든 말과 행동, 심지어 숨 쉬는 것까지 자기 정당성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사단이 항상 자기 존재증명을 위해 움직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존재증명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누가 살아있습니까? 복음이 살아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습니까? 복음이 살아 있고 주님이 살아 있어요. 우리는 안개입니다. 우리는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살려주시는 것은 우리를 바디매오로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너는 기껏 이런 것 원했잖아. 너 존재 증명한다고 이런 것 기도했잖아.”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사람은 마음의 할례를 받았고 그 속에는 예수님의 영이 있습니다.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지요.

마귀는 끝없이 선악과로 흔들고 우리는 육신을 가졌기에 여기에 말려듭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벌을 받을 것이다. 벌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을 하는데, 뒤돌아보면 내 마음이 체계가 잡혀 있어요.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했기에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다.’이런 것이죠.

그러면 또 이 체제에 부합되지 않는 생소한 사건이 터져서 내 마음이 재정비되고, 이 모든 과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드러내기 위한, 그것과 연동해서 나에게 죄가 발생되는데 이것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존재증명을 위해 평생을 살았습니다. 바알종교를 복음인줄 알았습니다. 죄인 안 되면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죄인 되는 것이 구원의 완성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11. 23. 16:5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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