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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01:30:13 조회 : 772         
환상과 현실 171124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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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211.♡.182.111) 17-12-06 15:58 
광주 강의(2017. 11. 24) 45-1

마가복음 11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님의 명령을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인간들의 마음을 아시고 늘 비켜 가십니다. 즉 예수님 말씀(명령)은 인간들이 지키고자 하는 법테두리 바깥 영역이 있다는 것을 폭로시킵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기대했던 마음으로는 주님에 의해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지시와 명령에 대해서는 의미 포착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것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어요. 왜 그런가? 자아와 주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주체 둘 다 ‘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중첩’이란 표현을 씁니다. 자아와 주체가 겹친다는 거예요.

“나는 40년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며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자아’지요. 이 ‘자아’는 또 다른 ‘나’가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왔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라고 할 때의 그 ‘나’는 ‘자아’입니다. ‘주체’가 아닙니다.

‘자아’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는 율법적입니다. 따라서 법이 주어지면 항상 그 법을 성취하려는 욕망을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숙제를 내는 것과 같아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숙제를 내는 선생님과 숙제를 내지 않는 선생님은 달라요. 한 번도 숙제를 안 내주는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숙제를 내는 순간 ‘숙제를 주신 선생님’이 됩니다.

숙제를 주신 선생님에게는, 내가 이 숙제를 완성했을 때 선생님과 내가 어떤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질지 고대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고 싶은 이유가 뭔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숙제를 내가 완수하면 그 이후 하나님은 내가 쥘 수 있어요. 시킨 대로 했으니까.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면 이것은 법입니다. 법을 주실 때 내가 그 법을 지키면 이제 그 하나님은 내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가 있어요. 왜? 숙제 다 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 왔으니까 이제 큰소리 칠 수가 있어요. 이걸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나를 ‘주체’와 ‘자아’ 둘로 나눴는데, 나누지 않으면 그냥 ‘내가 율법을 지켰다’ 이렇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이 출생하면서 갖게 되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나 타인을 상대할 때는 법이 매개가 되어 관계를 형성합니다. 법이 매개가 된다는 말은, 법을 지켰다, 혹은 안 지켰다는 사실이 기억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십일조를 받치라.’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일조를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9%와 11%의 차이를 알아요. 자기가 십일조를 내면서 내가 9%를 냈는지, 11%를 냈는지 본인이 알지요. 이 체험이 누적된 것이 ‘나’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으니까, 어느 선을 넘으면 간음이 되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빠, 손만 잡고 잘게.” 이건 간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10개월 후에 아기가 태어났다면 이건 분명히 선을 넘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선’을 기억합니다. 내가 선을 안 넘은 것은 몇 개이고, 넘은 것이 몇 개인가를 본인이 정산을 합니다.

이것이 누적된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야.” 왜 이렇게 당당한가 하면, 기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당당한 거예요. 뉴스에서 친구 딸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노합니다. 왜냐? 자기는 그런 선을 넘지는 않았기 때문이죠. ‘내가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그 정도 악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음주 운전으로 경찰에 잡힌 사람이 “나는 술을 조금 마셨지만 음주운전에 걸릴 정도는 아니야.”고 큰소리치는 사람을 보면서 “저런 인간은 당장 감옥에 가둬야 돼.” 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법을 기억하고 있어요. 이 법이 나를 형성하니까 나를 쪼개보면 그 속에는 법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셔서 인간이 기대하는 법을 주실까요, 다른 법을 주실까요? 기대하지 않은 다른 법을 주셨지요. 인간들이 지킬 수 없는 다른 법을 제시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앞에 두고 “너희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지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해야지요.

지금 어른이 되어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뒤늦게 어른을 왜 부릅니까? 어린 아이 때 부르면 천국 갈 수 있는데. 그래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제가 무리한 논리를 전개합니까?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면, 천국 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어린 아이를 찾아가서 불러서 데려가면 되잖아요.

니고데모가 오죽 답답했으면 예수님 말씀에 반문을 했겠습니까? “어떻게 늙은 이 몸이 어린 아이가 될 수 있습니까?” 정말 궁금했기에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었어요.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지 십계명은 왜 줬습니까? 아담을 창조한 직후 창세기 3장에서 말씀을 하셔야지 한참 후 요한복음 3장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거론하느냔 말이지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간들이 생각합니다. 이것을 지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그 매개가 뭡니까? 율법이죠. 그래서 주님이 법을 주십니다. 로마서에서는 법을 주신 이유를 죄인 만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맛있는 과일인줄 알고 먹었는데 그것이 시한폭탄이었어요.

인간은 저주를 유발하는 법들을 자랑인양 여기고 한껏 모아놓은 거예요. 인간들은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나의 역사는 개인사지요. 인간들이 하는 일이 내 인생사를 펼쳐놓는 것, 이것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자식 잘 키웠다.’ 이런 것.

인간은 법을 원하고, 주님은 법을 주셔서 인간을 저주한다면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아야 돼요. 그럼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법을 주시면서 저주 받을 인간에게서 생명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흙이 된 인간이 여자의 후손을 만남으로 생명으로 전환됩니다.

육에서 영이 되는 방법은,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언약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그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노아의 특징은 뿌리가 없습니다. 만약 노아의 뿌리가 멀쩡하다면 내가 토대가 되어 나를 구원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노아는 자신이 근거가 되어 의인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방주 밖에 있는 사람과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차이점이 없어요.

홍수가 그친 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과 새를 잡아 번제를 드렸지요. 정결한 그 제물은 노아와 동승해서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노아의 토대가 노아의 행함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과 동승했다는 것이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럼 노아의 뿌리가 뭔가? 정결한 짐승이 노아와 그 식구를 살려낸 겁니다. 이것이 노아 언약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고 하셨어요. 노아도 어려서부터 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착하냐, 안 착하냐는 것은 언약적으로 의미 없는 말입니다. 다만 노아는 언약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무당집이 된 이유는, 교회 온 사람들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기 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식으로 설교를 하고 모든 행정을 추진합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질문을 하면, 목사는 그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노골적으로 복을 기원하는 방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는 주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속으로 복을 기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다 같은 부류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신앙이란 자기 증거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미국의 유명한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 됩니다.’라는 것이에요. ‘자기를 부인하세요. 회개하세요. 주를 위해 충성하세요.’ 이런 고상한 것들을 다 거론하는데 결론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 증인 되면 구원 받습니다.’가 아닙니다. 예수님 증인 되는 것으로 끝입니다. 아프든지 가난하든지 관계없어요. 예수님 증인으로 마감됩니다. ‘내가 주님 원하는 것을 하면 주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이방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이런 것입니다. 모두가 ‘나’를 위한 것이지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취지가 뭔가 하면, ‘모든 인간은 지옥 가야 돼.’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요.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아니에요. 주님께서 이방인들은 이렇다고 지적하신 것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말씀하신 겁니다. ‘상황 종료’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죠. 내 결심과 노력이 내 운명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되는 사람은 주님에 의해서 상황이 종료된 것이 다가와야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습니다. 수능시험이 11월 23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11월 24일) 아침 8시에 수능시험 친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문제지 받고 시험 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이미 정답이 발표되었기에 그 후에 시험을 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내가 정답을 기억하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됩니다. 예수님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어느 창고에 쌓입니까? 나에게 쌓이잖아요. 그러면 나를 어떻게 지옥 보낼 수 있습니까? 나는 이미 정답을 아는데.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왜 알아야 됩니까? 천국에 합격하려고. 이렇게 되면 상황 종료가 아닙니다.

십자가 지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이미 죽은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 자아는 살았어요, 죽었어요? 죽은 거예요. 나는 이미 죽은 거예요. 내가 죽었으면 산 나는 어디 있는데? 주님의 몸에서 나온 주체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이것 때문에 제가 ‘자아’와 ‘주체’를 나눈 겁니다.

성도는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야 마귀가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죽였으며 죽은 나를 누구 살렸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겁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자아 안에는 기억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기억에는 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상황이 종료되었기에 법으로 가득 차 있는 나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셔서 저주 아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죽어야 마땅한 자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는 것도 내 안에 들어오면 법으로 바뀌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고요. 그럼 포기해야 될 나를 절대 포기 못해요. 포기 안 되는 나를 기어이 포기하도록 밀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붉은 색 당구공이 있는데 다른 공이 와서 치면 붉은 색 공은 다른 곳으로 가고 그 공을 친 다른 공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처럼 주체가 자아를 밀칩니다. 그런데 그 주체는 자아에서 나온 것이 아니죠.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이죠. 정결한 짐승에서 출발한 새로운 나(주체)가 법을 알고 기억하는 나(자아)를 밀쳐낼 때 밀려난 나를 볼 수 있어요. 이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이며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지요.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상황 종료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내 안에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주체가 나타나면 나는 죽은 자이지만 산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9-10절 말씀처럼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수요일 창세기 설교하면서 계속 언급한 ‘중첩’이란 것입니다. 겹쳐진 거예요.

언약 받은 사람은 기존의 육과 영이 함께 있어서 육에서 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에 있기 때문에 육이 바깥으로 계속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은 형을 만나 일곱 번 절을 하지요. 용어도 달라졌어요. ‘형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여’라고 불렀어요.

형은 어차피 지옥 갈 사람이기에 ‘주’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야곱은 이런 마음으로 형을 대하는 겁니다. “형은 하나님 만나봤어? 못 만났지. 만나면 죽어. 우리의 자아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의 장자가 되기 위해 싸워 이기고 지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어.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아야 해.”

그 하나님이 신약에 오면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으로 상황 종료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미 죽은 자임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여도 죽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유령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뿌리를 알지요. 그래서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어요.

‘이방인들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며 자기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너희는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성도의 특징은 관심사가 달라요. 왜 감사와 찬송이 없는가 하면, 자아를 꾸준히 기억하기 때문에 감사와 고마움이 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자기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 어떻게 살았습니까? 열심히 살았지요. 열심히 살았기에 감사와 고마움이 안 나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십니까?’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속에는 이런 불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 모를까요?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말썽을 일으키면 정말 화가 납니다. “하나님, 왜 자꾸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저는 나름대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원망과 불평이 생기지요.

계속 자아에 주목하는 겁니다. 자아밖에 기억하는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법적인 매개체가 기억나니까. 그래서 주님이 ‘나귀를 끌고 오너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나귀와 일치시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탔지요. 사람이 무엇을 타면 그 탄 사람을 주목하겠지요. 가마에 대감마님이 탔고, 사람들이 절을 하면 대감마님에게 절을 하는 것이지 가마에게 절하는 것은 아니지요.

나귀 타지 않는 주님과 나귀 탄 주님을 달리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나귀를 타나 안 타나 같은 주님으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알고 있는 법적인 체제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 영광 돌려야지.’ 이러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내 뜻을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변화를 시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변화에 제자들이 같이 따라와야 합니다. ‘왜 갑자기 나귀를 타시지?’ 그런데 예수님이 나귀를 탄다는 것이 제자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나귀를 타겠다고 선언하셨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귀 타신 것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법의 노선에서 이탈 된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기대에서 벗어난 거죠. 주님이 제자들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이탈한 것인데, 이것을 통해 주님은 인간들의 생각과 틀을 벗어난 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서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죠? 금지시킨 겁니다. 그러면 그 후에 하나님이 나타날 때마다 계속해서 법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익히 아는 법을 거론한 것이 아니고 전혀 예상 못한 추가적인 법이 계속 주어져요. 그래서 금지의 역영이 점점 확산됩니다.

금지가 차츰 확산되면 나중에는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내가 하라고 했잖아.” 또는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이야기해요. 이렇게 되면 계속 금지가 살아 있는 거지요. 법 안에서. 그래서 법이 농축된 것이 금지입니다. ‘하지 말라’고 율법을 준 것은, ‘내가 평소에 하라고 했지.’라는 금지가 ‘하지 마라’에 포함되어 있어요.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왜 했어?’라는 금지가 포함된 채 ‘하라’가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자체가 ‘너는 심판 받아야 마땅해.’라는 것을 의식하고 준 거예요. 그 원리에 의해서 나귀를 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탔다는 것은 새로운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너희들 머리에서는 내가 나귀 탄 것이 나올 리가 없지?’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금지를 요청하는 새로운 지시를 내립니다.

나귀를 타시고 성전에 가시는 것이 끝이 아니고 나중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모든 것이 종결되지요. 여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까 한 것 다시 해 봅시다. ‘내가 너를 죽었다고 했잖아!’라고 선포하는 것이 십자가 지심의 의미입니다.

‘네가 나쁜 짓해서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죽어야 마땅한 나쁜 놈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했지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사단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런 행동을 했지요.

사단은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단이 가룟 유다의 등에 올라타서 나무에 목을 매어 죽게 했다면 남들 눈에는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가룟 유다와 함께 있다가 떠난 자가 있습니다. 누구죠? 사단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며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 십자가의 영이 찾아오면 죽은 자임이 밝혀지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어요. 보통 인간에게는 죽음이 끝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이란 새로운 공간이 이 현실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살았다고 우기는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죽음 안의 세계에 공존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성령 받은 자들입니다.

‘너희는 너의 자아가 살아 있는 것을 자랑하는데,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잖아요.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죽은 자이고,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죽은 자고.’ 이게 뭐냐 하면, 살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벌써 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도 살겠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런데 성도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임을 압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통하려면 유령끼리 대화를 해야 됩니다. 유령과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대화가 안 돼요. 죽음은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겁니다. 아이들 비눗방울 만들기 놀이 알지요? 공기 중에 후 불어서 생긴 비눗방울 같은 거예요. 공기 중에 비눗방울이 따로 떠 있지요. 막 때문에 안과 밖이 나눠지지요. 바깥이 지옥이라면 안은 천국입니다.

바깥은 저주가 유발되는 곳인데 법이 없으면 저주도 없어요. 안은 이미 법으로부터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완성하심)이 있어요. 주님 안에는 사랑의 법만 있어요. 이 둘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바깥은 ‘자아’고, 안은 ‘주체’입니다. 성경에서는 바깥을 ‘옛 사람’이라고 하고, 안은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겉은 날마다 후패하지만 속은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이런 내용과 ‘나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제자들이 도무지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나귀는 제자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nothing이죠. 무(無)입니다.

그런데 나귀 탈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제자들은 nothing이 돼요. 무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심으로 말미암아 겸손, 낮아지셨는데, 낮아진다는 것은 없는 것과 같아요. 모든 존재는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 더 높아집니다. 그래서 ‘없다’는 것을 ‘낮아짐’으로 표현했어요.

10분 쉽시다.

(2017. 12. 7. 11:05 녹취 마침)
 서경수(IP:211.♡.182.111) 17-12-12 10:39 
광주 강의(2017. 11. 24) 45-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곧 나귀다.’ 라고 한다면 논리적 비약이 심하지요. 논리적 비약이 심하지만 틀리진 않은 이유가 예수님이 자기 가진 것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 자신을 주시지. 자기 가진 것이 많은데 그것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을 우리에게 줘요.

우리들 생각에는 하나님이 워낙 많이 가졌기 때문에 많이 나눠줘도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잘못된 인식이 오병이어에서 나타난 겁니다. “야, 주님은 참 솜씨도 좋아.”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이유가, 주님을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이 자기 솜씨를 발휘했다고 해서 임금 삼으려고 했어요.

임금 삼으려는 자들을 향해 주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들은 식인종처럼 예수님을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발휘하는 솜씨의 혜택을 누리려고 온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너무 오버해서 ‘그래, 내 살 뜯어 먹으라. 하여튼 딸들은 다 도둑이야. 날 죽여라!’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예수님은 좋아하실 것이다. 펜들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오해가 점점 더 깊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 간격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고 더 멀어지는 거죠.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인간들은 수집된 체험을 기억하는데 이것이 자아(나)가 되고, 수집된 체험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감사하거나 고마워할 때는 그 근거가 있어요. 이미 수집된 것과 비교해서 그보다 훨씬 좋아 보이면 그 때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뭔가 주신다는 것은 기존의 자기들이 수집한 그 체험을 개무시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남녀가 사귈 때 힘들면 상대에게 맞춰주려고 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고 “이러려면 우리 헤어져!” 헤어지기 바빠요.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게 더 쉬워요. 어려운 것은 마음 낮추기. 마음 맞추기. 이것이 힘든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인생을 힘들게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시옵소서.’

저에게 이런 소리하는 사람 참 많이 있어요. “주님이 왜 나를 안 죽이고 살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데려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 중에 연세 드신 분은 저를 만나면 자주 이런 말을 해요. ‘빨리 데려가셨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이건 얍삽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나의 낮아짐을 너희가 따로 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상 못한 낮아짐, 요즘 말로 하면 ‘꼴아 막음’이죠. 이 비참함에 올 수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왜 자꾸 주님께서 잘 되는 쪽, 영광스러운 쪽으로 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니까 --

인간들이 수집한 체험은 육의 체험입니다. 사람들은 이 육의 체험, 자아를 무엇으로 바꾸는가 하면 영적 체험이라고 자꾸 위장해요. 그리고 실제로 주님께서 영의 체험을 하게 하시면 며칠 지나서 영의 체험이 자기를 위한 육의 체험으로 달라지고 말아요. 이게 뭔가 하면, 인간이 모든 체험들을 굴비 엮듯이 이것을 하나로, 중심체에 어떤 괴물이 있어서, 인간의 육  속에 사단이 있어서 인간 자체를 자랑질하라고 편집을 해내고 있어요. ‘역시 네가 훌륭해. 네가 잘났어.’

그런데 인간은 자기 중앙에 자기가 있고, 자기 말고 사단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것을 밝혀내는 주님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귀 같은 것인데, 나귀를 불러서 낮아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하나의 예인데, 인간의 자아는 기억 덩어리고 뭘 기억한다고 했습니까? 법을 기억하지요.

법은 내가 하나님 앞에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매개, 연결고리로 축적되어 있지요. 매개란 9%와 11%의 사이를 아는 것. 주여 내가 계산 잘못해서 12%나 헌금 했습니다. 이건 십일조가 아니고 좀 더 간 것 아시지요? 이렇게 되지요. 혹은 9.9% 냈는데 주님, 반올림합시다.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하여튼 중간에 매가가 있어서 이것 지키면 지킨 것이고 이것 안 지키면 어긴 것이라는 그 매개를 알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모든 법적인 것은 저주 받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아까 말씀드렸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아가 자기 관리에 나섭니다. 그러면 뭘 모르는가 하면, ‘나는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해요. 이 말은 뭐냐? 내 마음을 알면 내가 회개라도 하고 반성을 하든지 다시는 한 하겠습니다 하든지 아니면 감사가 나올 텐데 내 마음이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데 무슨 감사가 나오고, 내 마음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데 새삼스럽게 회개할 것이 있습니까?

인간의 모든 육적인 것이 영적으로 전이되고 영적인 것은 육적으로 전이되고 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해요. 자아가 그런 짓을 하거든요. 이 시간 잘 나오셨습니다. 자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혼자 버스를 타고 가는데 술 취한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정신병자가 탔구나.’하고 참고 “아가씨, 예쁘네!”하고 말을 걸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일을 기억하지요. ‘술 취한 사람이 나에게 부당하게 시비를 걸었지만 나는 주의 은혜로 참았다.’ 갑자기 영적 체험으로 그 사건을 기억해요. 자아는 영이 아니고 육입니다. ‘오늘도 화나는 일이 있었는데 성경에 분을 품지 말라고 하셨기에 참았습니다.’ 이것 역시 영적 체험으로 기억해 둡니다.

버스에 혼자 탔으면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 어린 아이한테 취객이 시비를 걸면 엄마가 참을 수 있습니까? 못 참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마지막으로 책임지는 것이 바로 자아에요. 아무리 참고 또 참아도 이것은 못 참아. 하고 나오는 것. 밀어내는 것. 이게 뭐냐 하면 ‘이것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겠습니다. 내가 지키겠습니다.’ 하는 것.

‘나는 죽어도 좋은데 내 자식만큼은 손대지 마라. 이건 못 참는다.’ 이걸 만약 못하게 만들면 아버지는 미쳐버리고 엄마는 돌아버리죠. 이들에 세월호 가족들입니다.

평소에 아빠가 “딸아,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지켜 줄 테니 걱정마라.” 엄마도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고 네가 좋은 데 시집 갈 때가지는 너를 보살필 거야. 아무 걱정 말고 공부만 해라.” 인간들은 자기보다 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게 자기 딸일 수 있고, 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 하나님일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사단입니다. 그게 자아의 핵심, 티눈 같은 것입니다.

이걸 없애면 되지 않느냐? 이게 계속 조립이 돼요. 그러니까 회개했다고 해서 티눈이 사라지지 않아요. 티눈을 파내면 또 새롭게 돋아납니다. 내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 자존심이죠. 궁극적으로 책임지고 싶은 것.

이것을 내가 45세 때 알 수 있고, 55세 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죽을 때가지 우리 안에서 계속 생산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안 죽으면 우리는 마귀에 이끌려 지옥 가는 거예요. 내가 지울 수가 없어요. 회개했습니다. 라고 하면 또 누구 무슨 이야기를 하면 새로운 알갱이가 생겨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기 전까지는 그들이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심지어 제자들 마음속에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이 훌륭하신 스승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지키겠는가? 이런 마음으로 자진해서 보디가드 역할을 하면서 누가 예수님을 헤치지 않나 하고 살폈어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지금 정상적인 관계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이야기했듯이 “제가 주님을 책임지고 지켜드리겠습니다.”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예수님의 핵심과 자기 핵심이 일치되는 것 맞지요? 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겁니다.

자아를 가지고 예수님과 맞먹으려고 설친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면, 그들로 하여금 생각이 같다고 여기는 그것을 어긋나게 만들어 버려요. 내가 나귀를 타야겠다. 이 아이디어는 제자들 속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것은 주님께서 새롭게 조성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행동, 말씀 하나하나는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 테두리, 그 자아의 테두리 바깥에 새로운 현실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자아를 다른 말로하면 테두리입니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면 법, 매개, 기억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영적으로 해도 이 테두리가 같이 늘어나고 있지요.

테두리가 늘어났다는 말은 테두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못 나오면 그 안에 있는 전체가 자아가 되고 우리한테 어떤 것이 주어져도 자아의 증인이 됩니다. 이게 역사가 되면 개인사가 됩니다. ‘나는 몇 살 때 예수 믿었고, 몇 살에 장로 되었고 --’ 이 모든 것이 결국 자아의 테두리 안에서 노는 거예요. 이 테두리를 가위로 끊어버리면 좋겠는데 이걸 끊을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바깥에 있는 것들이 확 들어오지요.

이 테두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외곽에 있는 것들이 확 들어오는 것이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도 같이 망하는 거예요. 마치 방천 둑이 터진 거예요. 방천 둑이 터지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확 들어오지요. 그러면 어디를 향하여? 자아를 향하여.

이사야가 ‘내가 14세 때 잘못 했다, 42세 때 잘못했다.’ 이것이 아니고, 어느 대목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 온 자체, 그 전부가 ‘화로다 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마치 다윗이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시51:6)’고 하는 것처럼.

제가 수요일 설교하면서 다윗의 경우에는 참 희한하다고 했지요. 보통 여자 둘에 남편이 하나였잖아요. 야곱도 그렇게 아브라함도 그런데, 다윗은 반대가 되어 여자 하나에 남편 둘이지요. 그러니까 보세요. 여자 잘 만나서 육의 남편 다윗이 영의 남편이 되잖아요. 이 이야기는 미리 하면 안 되는데, 다음 수요일에 할 건데 조금만 하겠습니다.

육이 영됨을 어떻게 아는가? 당신은 다윗처럼 은혜를 받아서 아는가?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있기 위해서 부모가 먼저 있는 겁니다. 여디디아가 누굽니까? 솔로몬이죠. 솔로몬이 있기 위해서 다윗은 간음한 여인과 결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 그래야 자기 죄의 자식이 하나님의 사랑의 자식으로 전환되었음을 언약적으로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간음한 여인과 아이를 낳겠습니까? 왕의 입장에서. 마치 공개적으로 온 백성에게 다 욕을 먹는, 오늘날 최순실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다윗은 그런 여인과 결혼했고 아기를 낳았는데 이름이 여디디아. 이건 상상하기도 싫은 이상한 구조지요.

이렇게 주님은 구조를 비틀어가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아 테두리 전체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문제가 있으면 공격 대상이 되지요. 결국 우리는 저주의 공격을 받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키는가 하면, 제자들은 자기 자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아를 끄집어내는 방식 중 하나가 계속해서 자아 자체가 기억을 하고 겁을 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서 기억의 숫자가 늘어나게 해요.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혜 입은 것이 자아 속에 있는 괴물로 인하여 점점 더 테두리 속에서 굳어지는 겁니다. 실컷 은혜 받았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잖아요. 그러면 나귀 정도가 아니고 그보다 더 낮아져야 돼요. 어디까지 낮아지느냐? 마지막은 십자가죠. 십자가까지 낮아지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괴물에 본인이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도망침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다 뿐이지 사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어떤 막이 있어요.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막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아쿠아리움(수족관)이라고 하는데, 아쿠아리움의 특징은 유리벽을 중간에 두고 물속의 상어와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요. 고함을 친다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천국에는 엄마가 있고 지옥에는 딸이 있다면 둘 사이에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죽어야 천국이 있다는데 제자들은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하면서 높은 자리만 생각하는 거예요. 목사는 복음을 외치는데 뒤에 앉은 교인은 ‘오늘도 목사님이 고함을 치네.’ 이러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진 이유가 우리가 끄집어내지 못한 것에 항상 발목 잡혀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깁니다.’하면서도 감사와 고마움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 이유를 몰라요. 왜 감사와 고마움이 안 나오는지. 나는 영적으로 사는데 왜 안 나오지?

이미 살아온 모든 것이 영적체험이 아니고 육적체험으로 번역을 다 해놨어요. 누가 그렇게 한 겁니까? 마지막 나다움을 사수하라고 계속 부추기는 힘이 있어요. 그 힘의 정체는 마지막 십자가 앞에 서면 노출됩니다. 아쿠아리움을 지나가면 상어도 직접 보고 다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상어였어요. 내가 유리벽 속에 갇혀 있는 상어를 보면서 ‘불쌍한 상어야, 갇혀서 고생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상어였는데 인간이라고 속아 넘어가서 인간 행세를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마치 산 것처럼 행세한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악마가 우리 속에서 작동해서 우리 자신이 쌓아놓은 아성이 무너질까봐 두렵게, 두려움을 발생시킵니다.

두려움이 발생될 때 악마는 우리에게 이 두려움을 없다고 여기게 담요 같은 것으로 덮어씌우는데, 그 담요가 뭔가 하면 환상이에요. 저는 이 환상을 현실로 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환상인데, 이 환상으로 두려움을 두 겹, 세 겹 덮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외조카가 수시를 봤는데 문자가 왔어요. 이화여대 합격했다고. 제 아내는 좋아했는데 --

이화여대가 현실입니까, 환상입니까? 환상입니다. 왜냐? 주님의 세계에는 이화여대가 없어요. 이화여대 자체가 환상이에요. 여러분, 밤에 꿈을 꾸지요? 아주 나쁜 꿈일 때 꿈에서 빨리 깨어나기를 원하지요? 꿈에서 깨어나면 뭐가 되지요? 현실이 되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꿈은 현실이 힘드니까 생겼고, 현실을 지탱하기 위해서 꿈으로 미리 경험케 해서 ‘이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해소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꿈을 꾼다고 해요.

이건 정 반대로 이야기한 거예요. 꿈을 견디기 위해서 가상적인 현실을 사는 겁니다. 우리가 힘든 꿈을 꾼다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평소에 누르고 있던 힘이 약화되었을 때에 꿈에서 나타나잖아요. 기분 나쁜 꿈 중에 하나가 똥통에 빠지는 꿈이 있지요. 그리고 너무 피곤에서 방에 들어가 자려고 하는데 내 침대를 다른 사람이 차지해서 자고 있는 것. 이것을 다 합치면 군대 이야기입니다.

힘들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왜 죽는 것이 싫지요?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죽음이 따라오면 우리는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죽는 것이 왜 싫은데요? ‘그러면 너도 한 번 죽어봐라.’ 이렇게 답변하지 말고. 죽음이 따라오고 우리는 그 죽음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세상에서 하하호호 하면서 삽니다. 이것이 바로 환상입니다. 환상으로 근원적은 공포를 억누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현실이 환상이냐 하면, 현실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자체 만족이 안 됩니다. “엄마, 이번 시험에서 전교 2등 했어!” 그 말을 들은 엄마가 “야, 내가 너를 키운 보람이 있네. 책임지고 내가 너를 지켜줄게.” 그런 후 3일이 지나서 “다음 시험에는 1등 해라.”고 합니다. 갑자기 현실 자체가 달라졌지요?

구닥다리 환상으로는 늘 찾아오는 공포를 덮는데 한계가 있어요. 이제 더 두꺼운 담요로 덮어야 돼요. “엄마, 내가 재벌 3세와 결혼해.” “정말 기쁘다.” 그래서 결혼을 했어요. 분명히 기뻐했는데, 이제 “아들 낳아라. 그래서 주식을 물려받고 미래를 보장 받아야지.” 주식 물려받는 것이 왜 기쁩니까? 죽음과 멀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럼 여기서 따져봅시다. 환상의 변화, 현실의 변화를 누가 인식하는가? 나의 존재가 인식하지요. 그러면 새로운 현실이 와야 더 만족한다는 말은 존재가 달라지는 거예요. 존재가 어디까지 달라지는가? 네 가지를 생각해 봤어요. 첫째는 기술공학. 이름이 거창한데, 이게 뭔가 하면, 보톡스.

보톡스를 왜 맞는가? 기술공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자기의 피부를 기계로 바꾸는 거예요. 신장도 이식하고 근육도 이식하고 나중에는 두뇌도 이식할 거예요. 인공지능으로 바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원래 존재를 좋아한다 하면서도 존재가 그냥 존재가 아니고 뭔가 쫓기잖아요.

존재가 자아라고 했지요. 자아는 이상하게 죽음의 공포에 쫓깁니다. 쫓기기 때문에 법적으로 대응하잖아요. “나는 착하기 때문에 오래 살아야 됩니다. 내 딸은 훌륭하기 때문에 죽으면 안 됩니다. 세월호가 침몰해서 죽다니.” 이런 것. 이게 뭐냐 하면, 죽음에 쫓긴다는 거예요.

쫓기니까 존재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대체하겠지요? 대체하는 방법은 스스로 존재를 변형시키는 겁니다. 뭘 대비하는 변형? 죽음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변형하는 거예요. 이게 기술공학이에요. 성형 수술하는 겁니다. 대수술을 해서 안 늙은 것처럼, 젊어보이게 하는 겁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정신병입니다. 정신병은 아이큐가 20이하에요. 바보, 병신이 되는 거예요. 스트레스도 안 받아요.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해. 정신지체 1급 정도 되는 사람들, 15년 동안 일을 시키고 월급을 안 줘도 희희 웃으면서 염전에서 일하고. 이런 경우가 있고.

세 번째가 뭐냐? 스스로 자기 존재를 피해버리는 겁니다. 도피지요. 자살입니다. 자살 한다는 말은 찾아오는 죽음을 자기가 앞당겨 처리하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문제인 것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살아 있으니까 자살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반대인 죽음을 인식하지요.

자살을 하는 것은 진짜 죽는 것이 아니고 인식하는 본인을 죽이는 거예요. 살아 있다, 죽어 있다를 모르고 그냥 자기가 바보, 병신이 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진해서 바보, 등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그것만 지워버리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자살의 예비 단계가 뭐냐 하면, 술을 마시고 그 후에 자살해요.

술을 왜 마시는가? 이 고통을 이 순간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에요. 필름이 끊어졌다는 거예요. 타조가 맹수를 피하는 방법은 얼굴을 땅에 쳐 박는데, 자신이 안보면 상대도 안 보이는 줄 알아요.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내 인식이 고통스러우니까 인식만 잊어버리면 될 것 아닌가. 이게 술을 먹는 이유입니다.

술을 마시든지 아니면 도박하든지. 정신병으로 가는 방법은 여기서 마약을 하면 돼요. 마약을 하면 미친놈이 됩니다. 마약이 퍼지는 이유가 자기 죽음은 따라오고, 죽음이 따라온다는 말은, 내 고통을 덮을 수 있는 담요가 부족한 거예요. 돈 많으면 술집에 가서 돈 뿌리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데, 뿌릴 돈이 있어야지.

돈이 있으면 벤츠타고 돌아다니겠는데, 벤츠는커녕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 자랑할 것이 없단 말이죠.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남들은 담요 10개로 자신을 덮고 담요 위에서 하하호호 즐기고 있는데, 자신은 종이박스를 덮고 지하철에 누워 있으니 덮을 것이 없는 거예요. 마누라 도망갔지, 자식도 욕하고 떠났지, 제 한 몸도 덮을 것이 없잖아요.

술, 담배도 돈이 있어야 사지 공짜로 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자기 명의 빌려주고 대포통장 만들어준 대가로 돈 받아서 마약해서 그 짧은 순간만큼은 내가 왕이다. 하면서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세상 자체가 뭔가 알 수 없는 내 내부를 계속 덮는데, 담요가 계속 투입되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담요는 돈입니다. 돈이 계속 투입되어야 해요.

돈이 투입되어 돈 자랑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따라오는 죽음의 공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데 그것이 없어서 그래요. 오늘 낮에 뉴질랜드 어떤 교회 부교역자가 왔어요. 그분이 하는 말이, 자기교회 담임 목사가 뉴질랜드에서 목회를 하는데, 호주 큰교회에서 청빙해서 교인들에게 말도 안 하고 100일 동안 기도해보니까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당회에서 그 사실을 알리면서 좋아했다는 거예요.

왜 목사가 큰교회를 좋아하지요? 담요가 두껍기 때문이죠. 교인이 10명인데 1년 지나서 3명만 남았다. 담요가 그의 없잖아요. 그럼 내 존재가 쫓기겠지요. 자아의 테두리가 쫓기겠지요. 돈이 없으니까 그 때 기도를 많이 하거든요. 교인 수 적어졌는데 목사가 기도는 왜 합니까? 첫째는 교인들 많아지기를 기도하고, 둘째는 교인 수 적더라도 주께서 돈을 주시든지, 자식이 성공해서 아버지 용돈 많이 주면, 연금이 100만원 이상 되니까 교인 수 100명 되는 것과 수입이 비슷하게 돼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면 해답이 나옵니다. 중학교 동창 만나서 ‘나는 교인은 얼마 없지만 자식이 잘 되어서 매월 100만원씩 용돈 받는다. 마누라가 손녀 봐주고 용돈 받는다.’ 이렇게 자랑질을 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다른 친구는 ‘너는 좋겠다. 우리 아들은 공부도 안 하고 만날 힙합 한다고 돌아다니고 스웩을 한다고 야단이다.’ 이러고 있고. 돈 못 버는 자식은 부모에게 담요 값을 못하는 거예요.

어떤 목사는 개척교회 하는데 엉망진창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를 잘 해서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영어교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목사 딸을 만나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그 목사가 아들, 며느리 불어서 하는 말이 “이제 너희들 수입은 내가 관리한다. 왜냐? 네가 대학졸업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할 때까지 내가 뒷바라지 했으니까 네 수입은 내가 보관하고 매월 너희들 필요한 용돈을 내가 줄게.” 이렇게 나온 거예요.

바보, 등신 같은 며느리는 시집을 왔으니까 시부모에게 사랑 받겠다고 멋도 모르고 ‘예’라고 했어요. 친정 식구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이 바보야, 부모를 떠나서 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네가 돈을 시부모에게 다 준다고? 네 시부모는 양아치냐, 앵벌이냐?” 도저히 못 참아서 사돈을 찾아가서 수입을 다 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용돈 얼마 주는 것으로 협상을 봤어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면, 담요가 얇아요.

세 번째 자살인데, 자살도 안 되는 이유가 술 먹는 것이 자살입니다. 제가 남자가 술 먹거든 결혼 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허세거든요. 또는 허풍. 잘난 척하는 거지요. 이것은 사수할 것, 지킬 것은 못 내놓겠다는 뜻이에요. 젊은 아이들이 왜 랩에 빠집니까? 자기 역영에 들어오지 말라는 겁니다. 젊은 아이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랩입니다.

네 번째가 죽음인데,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존재가 예수님께 오라고 이미 빈 존재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마귀에게 쫓기도록 하셨어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나를 따라 와서 나귀 타는 취지를 알란 말이지요. 나귀 타는 취지가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나귀를 타고 십자가로 가잖아요.

아무도 따라오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 죽음에 찾아가면 되는가? 찾아가지를 못해요. 우리는 담요 두꺼운 것 주시면 그것으로 죽음을 겁내지 않고 찾아가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부러 우리를 죽음에 쫓기게 만들어요. 그래서 해서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찾아오시면 십자가만 달랑 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동반해서 진짜 현실이 나타납니다.

현실이 오면 모든 인간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임을 뚜렷하게 노출시키는 일이 일어나요. 성도의 인생에. ‘내가 1, 2, 3번 짓을 하고 있구나.’ 이것을 노출시킵니다. 우리는 1, 2, 3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남자들은 힘들면 술 먹고, 담배 피우면서 자살 행동을 하지만 여자들은 쇼핑을 합니다.

여자들이 쇼핑하고, 찜질방 가고, 수다 떨고,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자살입니다. 현재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자체가 현실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내 속에 있는 죽음에 쫓김을 안 들키고 없는 것처럼 덮으려고 하는 거예요. 전화기 들면 2시간씩 통화를 해요. 예전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내 나이가 60대 중반에 접어드니까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 심정이 이해가 돼요. 욕할 게 아니구나. 아 이렇게 스트레스를 푸는구나. 하하호호 웃으면서 연예인들 이야기하고 — 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현실은 무엇을 숨기는가 하면, 주님의 말씀을 숨기기 위해서 현실은 환상인데 현실이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우리 자아가. 야고보서 4장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할까 라는 자체가 의미 없어요. 우리의 결정이 우리 운명을 절대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진짜 내 모습을 보게 되면 내가 결심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결심이 나를 찾아오면 나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죽음에 쫓길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제 우리가 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죄의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면 돼요.

‘주님께서 이렇게 만들었고, 그래서 나는 주님 덕분에 구원되었다.’ 예수님 십자가의 진짜 현실 됨을 우리가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많지요. ‘먹는 것, 입은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인간에게 신은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신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을 믿지 맙시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사단은 믿어야 돼요.

사단만 믿으면 진짜 하나님은 사단과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우리가 신을 믿으면 사단을 개무시하게 됩니다. 마치 사단이 없는 것처럼, 사단은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사단을 선택할거냐, 하나님을 선택할 거냐? 나는 너무 단단히 결심을 해서 사단 대신 예수님을 선택했다고 자부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사단을 먼저 믿어야 돼요. 내가 사단에 속해 있었는데 그 사단이 사단으로 드러나게 하신 것은 배후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진짜 현실은 십자가 앞에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는 그 음성이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이 되도록 주께서 십자가 앞까지 계속해서 이끌어 왔다는 것을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어진 내가 어떤 자아든 간에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십자가 앞에 있을 때 현재 우리 당황스런 이 모습까지 감사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시도, 이벤드를 벌였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 십자가에 선행적인 행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자신이 그동안 환상 속에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듯이 저희들도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12. 12. 10:3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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