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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3 01:34:23 조회 : 492         
호산나 17122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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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1.188) 17-12-29 01:00 
광주 강의(2017. 12. 22) 46-1

마가복음 11장 9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절,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장 9절에서 10절을 보게 되면, 찬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를 의식 안 하죠. 자기의식이 없이 자기 말고 앞에 있는 특정인에 대해서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우리에게 굉장히 난해한 것은, 지금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죠. 그런데 막상 지금 그 대중들이, 그 백성들이 찬양하는 그 대상자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니고 구체적인, 자기하고 키가 비슷한 특정인물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대해서 찬양하는 겁니다.

이게 성립이 될 수 있느냐. 사실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 그 분에게 찬양을 해야지,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 찬양을 하면 안 되죠. 하나님이 받을 찬양을 사람이 접수하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근데 이스라엘에서는 예외가 있어요. 메시야가 왔을 때는 찬양받아도 되는 겁니다. 메시야가 왔을 때는.

근데 메시야가 왔을 때는 지상과 천상의 높이가 일치가 돼요. 이게 같이 돼버리는 겁니다. 하늘이 내려앉았다고 할 수도 있고, 그 분이 하늘만큼 높아졌다고도 할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지극히 높으신 분과 지상의 메시야가 같이 찬양의 대상이 되는 그 순간이 오는 겁니다. 눈꺼풀이라고 해도 되고 입술이라고 해도 되는데, 입을 벌릴 때는 아랫입술, 윗입술 두 개로 입술이 벌어지잖아요. 근데 입을 다물면 두 개의 입술, 위아래의 입술이 하나가 되죠. 서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대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찬양을 해버렸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마땅히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과 지상에 오신 분이 그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것이 합치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가 되어 나타났을 때, 어떤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게 9절에 나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그 다음에 누구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이니까 메시야인데,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찬양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늘을 향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응답 되는 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러면 뭐냐 하면 그 통로라는 것이 있어요. 통로.

지정된 사람, 지정된 장소, 그 분을 경유해서 하나님께 찬양도 받으시고 하늘에서 복도 내리시는 겁니다. 그게 유명한 야곱의 사다리가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그걸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야곱 이후에는 누가 유명 하느냐 하면 모세가 유명하죠. 그래서 모세가 그 유대사회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겁니다. 모세는 떠났어도 모세가 남겨준 율법이 있는 한 하늘과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 유대나라와의 관계는 돈독하다. 끊어지지 않는다. 접속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율법에 의해서 메시야가 와야 되는데, 메시야가 오게 되어 있어요. 메시야가 올 때 그들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어요. 시편 118편 26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 하였도다”

오실 분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데, 주의 이름이라는 말을 해도 되고 다른 말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해도 된다는 겁니다. 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어쨌든 간에 여기서 이방민족인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유대인들은 뭘 믿느냐 하면,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 일을 추진시키고 그 모든 일의 추진에 끝장을 보고 완성을 보게 되면 그냥 완성했다고 하늘에서 고함지르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어떤 분을 이 땅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일이 끝났다고 보는 겁니다. “아하! 이제 끝났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시간의 마감이라고 합니다. 모든 시간의 마감. 시간의 마감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마감도 돼요. 시간의 마감이라는 말을 풀이하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진척시킬 모든 이유는 없어졌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더 끌어갈 하등의 필요성은 다 없어졌다. 손 털었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하면 “끝났네.”하고  손 터는 것. 그걸 유대사회에서 유대인들이 굉장히 고대하고 있었던 겁니다. 힘들고 힘든, 이렇게 로마한테 배척받는 이 고난의 길, 이제 메시야가 왔으면 손 턴 거죠.

예수님께서 이정도의 평가를 받을만한 그러한 이유는 돼요. 왜냐하면 갈릴리에서 워낙 유명했으니까.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이정도로 대우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감히 흉내도 못내는 엄청난 일들을 했어요. 귀신 쫓아냈죠. 특히 유명한 게 오병이어에요. 오병이어. 오천 명을 먹였을 때,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충족시키고도 남잖아요. 이 어려운 경제사정, 생존에 필요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윗의 자손 메시야만 온다면, 주의 이름으로 온다면 그 모든 것은 이제는 본인들이 걱정을 안 해도 되죠.

특히 이 다윗의 자손에게 담긴 그 의미가 뭐냐 하면, 다윗의 직업은 왕입니다. 직업이 왕이죠. 다윗 왕이잖아요. 그러면 다윗이 왕 노릇 했을 때, 그때 이스라엘 사회는 주변에 다른 민족들에게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있었습니까? 대단한 위치에 있었죠. 그 다윗의 위세는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아들 된 솔로몬까지 이어져서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영광을 지향하겠다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여망과 하나님의 뜻이 그들은 동일하다고 본 겁니다.

자신들의 유대나라가 크게 번영되는 그것이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뜻과 같은 뜻이라고 본 거예요. 쉽게 말해서 메시야만 오시면 그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놀아도, 떵떵거리고 사는 그 번영의 사회, 번영의 시대가 들이닥칠 거니까 그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고대했겠습니까?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어린아이가 사자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죠. 에덴동산보다 더 멋있는 낙원의 상태를 예고했을 때, 그 모든 예고는 누구하기 나름입니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다윗 때의 그 번영을 그대로 다시 회복시킬 그 자손을 뜻하거든요. 다윗의 자손. 그러니까 이런 분을 얼마나 학수고대했겠습니까? 좋아들 하죠. 근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메시야도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만 알고 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알고 있죠. 그들은 알고 있어요. 지금 대중들이, 민중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대중들은 왜 착각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오병이어,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했기 때문에. 그 소문이 어디서부터 부풀어졌다? 갈릴리에서 이만큼 팽배해졌다 치고, 그것이 드디어 어디로 옵니까? 유월절 맞추어서 남쪽 예루살렘까지 오니까, 예수님 혼자만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기대는 많은 대중들이 이미 소문을 많이 들었잖아요. 그래서 대환영일변도의 자세로서 자기들이 속내, 메시야를 간곡히 기다린다는 것,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그 메시야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속마음이 그대로 예수님께 노출이 되었겠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은, 이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이 원하는 낙원은 오지 않습니다. 자,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에 뭘 기대하느냐 하면 말끔하게 때 벗기고 피부를 보송보송하게 해가지고 나오는 것. 여자들은 한두 시간씩 하잖아요. 두 시간 후에 그렇게 되어서 나가기를 기대하겠죠. 근데 목욕탕에 들어갈 때에 불에 타죽는 것을 기대하면서 목욕탕에 들어갑니까? 그렇지 않죠. 들어갈 때부터 나갈 것을 예상하잖아요.

근데 이들이 하늘의 유황불을 맞는다면, 구체적으로 말해서 스티로폼의 불덩어리가 지하의 차 위에 떨어진다면, 그걸 떨어지기를 간곡히 기대하면서 차 주인이 거기에 댔겠어요? 제천화재현장에서. 아니죠. 이 세상이 메시야에게 불 심판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기대했겠습니까? 분명히 세례요한은 뭐냐 하면 회개하라고 했고, 너희들이 기대한 메시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에요. 메시야가 오는 날은 무슨 날입니까? 심판의 날입니다. 누굴 심판해요? 바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들을 심판하는 메시야에요. 세례요한이 그걸 외쳤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들을 때 자기가 기대한 것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기대한 것, 필요한 것만 들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안 들리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정신을 딴 데 팔면 식구가 와도, “왔나?”하고 누가 온지 몰라요. 정신을 한 곳에 팔면, 거기다가 집중하다보면 다른 사람, 누가와도 몰라요. 자기들이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지금 문제는 뭐냐 하면 본인들이 구원받을 그런 사람들입니까? 그럴 자격이 돼요?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의 일은 이중적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본질에 맞는 그러한 이벤트를 벌이면서 나귀 끌고 와가지고, 다윗이 왕이니까 그 자손도 뭐가 돼요? 왕은 세습제니까 왕이잖아요. 만군의 왕으로 오는 것을 충분히 하면서도, 이게 돈키호테 같은 그런 느낌 때문에, 그런 왕이라면 최고 좋은 말을 타고 와야 하는데, 말은커녕 몇 번 가다가 푹 넘어질 그런 연약한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 말이죠. 그럼 대중들이 뭘 타고 오긴 오니까 메시야가 맞긴 맞는데, 그 행색을 보니까 이거는 뭐 이도령 거지꼴도 아니고.

뭔가 자기들이 생각한 메시야이고 싶은데, 소문을 듣기로는 메시야가 맞는데, 딱 메시야인데, 오천 명 먹였으니까, 물 위를 걸었으니까, 소문은 또 부풀려지잖아요. 고대했던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스가랴의 예언대로 감람산에 오게 돼요. 그러면, 몇 미터 안 남았으면, 그대를 만나는 곳 백 미터 전, 몇 미터만 있으면 완전히 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늘나라, 거룩한 제사장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왕으로 와야 하는데, 이게 왕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나귀를 타고 왔다 이 말이죠.

그나저나 대중들은 나귀를 왜 탔는지 의미도 모르고 그냥 호산나! 하면서 자신의 기대를,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을 그냥 억지로 예수님한테 퍼붓는 겁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면서 인간들이 기대하는 왕의 모습이 아닌 이중적인 양태를 가지고 이벤트를 계속 돌리고 있습니다. 내가 왕이 아닌 것은 아니되 너희들이 기대한 그런 메시야는 아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잘못되었는가?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내 쪽의 잘못이 아니고 너희들이 잘못된 것이다. 자, 너희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 이야기가 뒤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이야기입니다. 무화과나무이야기.

무화과나무이야기가 때가 되지 않았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만드신 창조주로부터 저주를 받아요. 바짝 말라버립니다. 누가 놀랐겠어요? 제자들이 깜놀! 깜짝 놀랐습니다. 무화과나무 때도 안 됐는데 마르게 했다. 말라비틀어진 속도가 유난히도 빨랐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 무화과나무가 저주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그것도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는데, 예수님이 와서 약간의 짜증을 내면서, “어! 내가 시장한데 왜 열매가 없지?”라고 하실 때, 제자들 중 그 누구라도 이야기 안 했겠습니까? “주님 정신 차리세요.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무화과열매를 찾으십니까? 주님 아직 때가 아닙니다.”

때가 안 된 것을 예수님이 모를까요? 알면서도 열매를 요청했던 그 의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 의도. 무화과나무가 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보자~ 열매가 있나.” 그럴 때 갑자기 바빠야 돼요. 갑자기 성장호르몬이 나와 가지고, 비아그라를 먹든지 간에 “주님 여기 있습니다.”해가지고, 그것도 두 개나 필요 없어요. 한 개만 먼저 시범적으로 만들어내면 되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는지 무화과나무는 그냥 저주받는 겁니다.

“열매 맺을 때가 안 되었습니다.”라는 것이 인간들 생각하고 무화과나무 생각. 무화과나무 생각이 뭔지 모르지만. 그리고 예수님 생각은, “이것이 열매 맺을 때다.” 이것이 예수님 생각이에요. 이게 예수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을 때다.” 인간들은 “아이고, 아직 열매 맺을 때가 안 됐습니다.” “아니야. 열매 맺을 때야.” “이유가 뭡니까?” “내가 왔거든.”

예수님은 오심 자체가 시간의 마감을 같이 몰고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다니는 그 모습 자체가 드디어 모든 시간이 이제는 더 이상 진척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시간 자체가 흘러가는 것이 시간의 임무가 아니에요. 시간이 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열매 맺는 것은 무화과나무 일이다.” 그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죠.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의 할 일은 예수님이 열매를 요구했을 때, 열매를 드리는 그것이, 예수님이 열매를 요구했을 때 그때에 맞추는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할 일이라는 거예요. 귀신 씻나락(볍씨, 경상전라방언)까먹는 소리도 아니고 이거 뭐. 이거 제 탓 아닙니다. 저보고 닦달내지마세요.

14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 말씀은 무화과나무를 하나의 인간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처럼 다루고 있어요. 이게 일종의 징조가 되는데요,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하실 일이 뭐냐 하면, 하실 일을 무화과나무에게 시범적으로 보인 겁니다. 무화과나무를 뭐했습니까? 저주했죠.

예수님이 하실 일은 인간에 대해서 저주하시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시간이 마감이 되려면 저주작업을 시행하는 그것이 제대로 된 시간의 마감작업이라니까요. 저주하는 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 지상에 올 때 인간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자기들은 멀쩡하고 자기들은 건전하다고 보는 겁니다. “하늘에서 사다리 보내주시면 사다리 타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 생각은 뭐냐 하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그냥 빈손으로 내려왔겠느냐 하는 겁니다. 빈손으로 내려왔겠어요?

예수님께서 나귀를 부르고 난 뒤에 나귀에 올라탔잖아요. 그 나귀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귀를 왜 탔느냐 하면, 왕이라면 뭘 타야해요? 말을 타야 하잖아요.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탔다는 말은, 이런 변화에 대해서 그 책임은 누구한테 있다? 바로 이 세상이 정상적인 세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정상적으로 메시야를 메시야로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을 알아볼 수 있는 그렇게 되는 세상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 하소서”라는 뜻인데, 우리를 구원하라는 그 말은 취소하느냐? 아니죠. 그건 이중플레이라니까요.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인간들 생각은 뭐냐 하면 “멀쩡하니까 데려가주세요. 이것이 구원입니다.”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아니야. 너희들 멀쩡한 게 아니야.” 너희들을 저주하는 그것이 구원의 계시가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들이 구원을 받겠다는 그 심보가 더러운 심보가 되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세례요한이 도끼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오죽했으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들이라고 했잖아요. “너희들이 어딜 들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에라! 이 돌멩이가 들어간다. 이 돌멩이가.”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뭐 보다 못하다? 돌멩이보다 못한 거예요. 대한예수교장로회돌멩이교회. 그런 평가받아도 굉장히 그들은 고맙다고 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지금 그걸 아마 생각을 못하고 있을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그냥 하나의 나무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를 그렇게 갈궈야 되겠어요? 목마르면 시장에서라도 판다고요. 나무 그게 뭔데 상대해서 나무를 갈구십니까?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체체계에요. 그래서 오늘 호산나하고 둘이 연관시키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주체체계.

주체도 중요하지만, 주체는 많이 이야기했죠. 체계라는 말을 제가 오랜만에 쓰는 것 같습니다. 주체체계, 주체가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 스스로 나는 나다, 라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체계가 있는 거예요. 혼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혼돈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은 무질서로 보잖아요. 무질서. 대표적인 것이 어린손녀, 손자들이 노는 것. 상당히 무질서해요. 근데 어린손녀, 손자보다도 더 무질서한 게 뭐냐 하면 엄마 뱃속에서 아직 잉태하지 않은 그러한 형국. 그게 아주 무질서해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순수인데, 순수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의로움이 아니에요. 만약에 잡채를 만들기 전에 시장에서 오이, 당근, 버섯, 시금치, 고기, 당면을 사오잖아요. 그게 하나하나가 순수하잖아요. 순수하지만 그게 잡채입니까? 그냥 재료죠. 재료. 재료잖아요. 재료. 이 재료는 순수한데, 이게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에 그 모습이에요.

제가 가락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취지를 아담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어요. 더욱이 더 이해가 안 되는 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죠. 죽음이 뭔지를 뭐 경험한 사람 같으면 그게 경고가 되는데,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두 살 애한테 “니 자꾸 어질러 놓고 말 안 들으면 너한테 주식배당 안 해준다.” 그럼 두 살 먹은 애가 “엄마 그것만은 안 돼!” 이럽니까? 애들한테 지갑주면 돈은 다 버리고 지갑만 들고 가요. 돈 다 버리고. 돈을 보기를 물같이 봐요. 지갑이 중요한 거예요. 지갑이. 그게 순수에요. 의로운 것도 아니고 죄 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냐, 따먹지 말라는 금지를 준 거죠. 그러면 신약 때 법칙은 뭐냐, 금지라는 법은 무엇일 경우에만 주어진다? 사전에 뭐가 형성되어 있을 때는? 죄죠. 죄가 있을 때는 법이 주어져요. 죄와 법이 만나는 거예요. 죄가 더욱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창세기 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았죠.

하나님 나름대로 이게 법이 되고 말았어요. “나는 니 제사를 금지한다.” 가인은 왜 내 제사를 안 받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그 뒤에 추후적으로 뭐냐 하면, 바로 죄가 누굴 덮칩니까? 가인을 덮쳐요. 그러니 이게 지금 인간세계가 뭐냐, 내가 죄를 짓고 난 뒤에 내가 벌 받잖아요. 그게 아니고 벌 받는 사람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왜 벌을 받아야 되는지를 추후 확정짓기 위해서 죄가 덮치는 겁니다. 희한하죠.

에서나 야곱이 이 땅에 태어나서 뭘 꼼지락꼼지락해서 사랑 받고, 뭘 해서 미움 받는 것이 아니에요. 미움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둘 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한쪽은 미움 받고 한쪽은 사랑 받아요. 그리고 에서가 한 것은 그냥 우리가 보기에는 일상의 일인데 하나님 보기에는 뭐로 보이느냐, “그러니까 꼭 밉상이지. 미움 받을 짓을 하는구먼!” 이렇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려요.

근데 인간은 유, 있음부터 시작하잖아요. 있음부터 차근차근 따져서 나가기 때문에, 자, 있음부터,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있음의 윤리도덕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따진다. 이게 인간의 이성이에요. 칸트의 이성은 따지는 거예요. 누가 따지느냐 하면 주체가 있어서 내가 따지는 거예요. 내가 따질 때 목적이 있어요. 내가 따지는 것이 뭐냐 하면 악은 악 쪽에서 멀어지고 선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서 내가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 선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이 그게 원래 무죄 상태에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죄 짓고 난 뒤에 생긴 겁니까? 선하게 살겠다고 하는 그게? 선하게 살겠다는 자체가 이미 죄 속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혼돈, 여기 혼돈이라는 의미를 서로 싸운다는 개념 때문에 그냥 순수, 고요라고 봅시다. 이게 있는데 그걸 동그랗게 테두리 치는 거예요. 테두리 치고 난 뒤에 이것이 체계인데, 체계가 있고 난 뒤에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다들 담배 안 피우시니까 잘 모르시죠. 옛날 우리 집에서 담배 가게를 해서 잘 아는데, 담배 한 갑에 스무 개비가 들어있어요. 공장에서는 담배 개비가 수 백 개가 있죠. 근데 그게 포장과정에 들어가서는 스무 개비씩 딱딱 테두리를 치게 되면 이걸 한 갑이라고 합니다. 한 갑.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순수로 나와요. 순수로 나오면서 그 테두리의 윤곽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겁니다.

그게 1년 6개월부터 해서 2살 정도면 드디어 자의식이 생깁니다. 라캉은 1년 6개월부터 보거든요. 1년 6개월부터 왜 자의식이 생기느냐 하면 거울을 보면서 저게 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전에는 뭐냐 하면 엄마가 시장에 가버리면 이거는 자기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안 느껴지고 엄마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럼 나는 뭐냐, 엄마의 육체의 연장이 나에요. 그래서 엄마가 아프면 내가 울어요. 자의식이 생기기 전에는.

이게 분화가 안 됐다 이 말이에요. 주체가 없기 때문에 타자, 남이라는 것도 없어요. 그저 어디가도 같이 붙어있어야 되고. 물론 그게 급작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고 차츰차츰 그렇게 되어가요. 서서히. 그러다가 좀 크면 엄마랑 안 자려고 하고 자기 혼자 자려고 하지만. 지금은 뭐냐, 두 살 애는 전부 다 잠이 오면 엄마보고 재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 몸이니까 알아서 해달라는 거죠. 내가 지금 잠들고 싶은 것은 엄마가 잠들고 싶어 하는 것하고 똑같다는 겁니다.

주체가 형성되는 이걸,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일한 작업이라고 합니다. 동일한 작업. 동일한 작업 또는 동일화라고 하는데,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질적인 것, 역겨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 이런 것을 골라내요. 이런 것을 본인이 분류를 시키면서, 그 결과로써 나는 이정도의 동그라미 안이 바로 나다. 이게 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합산하면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죠.

그래서 목사가 그렇게 교회를 아끼는 거예요. 복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몇 십 년 동안 공들였던 교회를 지키는 겁니다. 그게 자아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불나면 ‘주님의 교회니까 주님이 알아서 불냈구나.’라는 이 생각이 안 든다니까요. “아이고, 내 교회 어쩌나! 어쩌나!”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아이고, 이 교회 불났으니 어쩌나! 지금 그쪽에 가려고 작정한 사람도 있는데 교회 불나면 안 돼! 부담되고 어쩌나!”하죠.

부모에게는 뭐가 지키고 싶은 거예요? 자식이죠. 자식이라니까요. 자기 장모, 자기 아내, 자기 딸, 오랜만에 부여 사는 사람이 친정 제천에 와서 다 죽었어요. 한 목욕탕에 갔으니까 다 죽은 거예요. 통곡을 하는 거예요. 그 남편이. 특히 아내 죽고 장모 죽은 게 뭐 그리 통곡이 되겠어요. 자기 딸 죽은 게 아까운 거예요. 평생에. 죽었다고 통곡한다는 말은, “주님 자식을 주님이 불에 태웠는데 뭐. 이 세상은 저주받아 마땅한데 뭐. 그게 주님의 할 일이잖아.” 근데 이런 사람 봤어요?

주체가 경계가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안목이 나와요. 세상 보는 안목. 현실규정을 본인이 해요. 나를 위한 현실이에요. 나를 위한 현실. 그래서 제천에 불났을 때 체천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은 그다지 정신적인 충격이 없어요. 충격이 없습니다. 그저 문재인 팬들은 말합니다. 박근혜가 규제를 풀어가지고 저렇게 됐다고. 낚싯배 그렇게 된 것도 박근혜, 제천에 불난 것도 옥에 곱게 가두어져 있는 박근혜 탓이라고.

그런데 제천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이 있다고요. 제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요. 백형진(?)강도사. 그분은 남자기 때문에, 남자목욕탕은 문이 잘 열렸었나 봐요. 그 시간이면 남자들은 직장에 가있으니까. 그게 오후였거든요. 그 시간에 누가 목욕탕에 가냐면 여자들이 가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있는 겁니다. 팩할 것 팩하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사모님도 직장에 가기 때문에 ‘아휴! 안심이구나!’했죠.

이게 뭐냐 하면 세상은 왜 내가 아는 사람 위주로 보느냐, 그런 안목이 왜 있느냐, 이게 선입견이거든요. 선입견. 인간은 주체가 있기에 선입견도 같이 동반해서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지금 누굴 믿는다고요? 다윗의 자손요? 뭐 주의 이름으로 호산나? 자기 딸 죽여보세요. 호산나 하는지. 주님이 오셔서 제천에서 우리 딸 죽였다고 하면, 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뭐 감사합니다? 그 소리 나오겠어요?

만약에 그렇게 자기 돈 떼먹고 가고 욕하고 했던 놈이 제천에서 헬스 하다가 죽어보세요. “정의는 살아있다. 정의는 살아있어! 주여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합니다. “그 사람만 죽이지, 다른 사람 죽인 건 아깝다마는. 나한테는 그 놈만 죽어야해. 혼자서 가서 혼자 헬스 하다가 혼자 죽어야 돼. 1명 죽고 나머지 부상. 이래 돼야 돼.”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나와 얼마나 밀도 있는 관계를 형성하느냐, 그걸 따지게 되어 있어요. 나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느냐.

그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인간들은 스파이더맨처럼 전부다 자기를 중앙로터리로 잡고 쫙쫙 뭘 쏘고 있다는 거예요? 거미줄을 쏘면서, 거미줄을 쏘고 난 뒤에 상상했던 거미줄의 망. 멀리가면 나와 관계가 좀 적고, 가까운 데는 나와 늘 주고받고 하는 가까운 사이고. 이런 두꺼운 거미줄로 형성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의 장이라고 해요. 주체의 장場. 이걸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념이라고 합니다.

아까 식사하면서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하여튼 북한사람들은 그렇게 당하고서도, 김정은한테 그렇게 놀아나고서도 무지한지 바보인지 모르겠다고 하거든요. 이 북한주민들은 지금 이념의 장이에요. 그게. 가장 이 세상에서 행복한 나라에요. 월드컵 못 나가도. 그렇게 행복해요. 나가면 더 좋고. 어버이 수령 모시고. 김정은 지나가면 눈물이 죽 흘러요. 여군들은 모자 삐딱하게 쓰고서 막 달려들어. 이건 뭐 방탄소년단 팬클럽보다 더 해. 샤이니 팬클럽보다 더 하고. 우린 안 그렇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혼돈인데,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둘러쳐있는 거예요. 뭐가 둘러쳐있는가, 창세기 3장에서. 바로 사탄이 둘러친 거예요. 악마가. 악마가 둘러쳤는데 세상에서는 악마라는 존재를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변의 상황과 경제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과 태어난 가정의 분위기가 그 사람을 주체로 만든다고 이야기해요. 그러한 세상적인 견해, 가정의 주변 환경이 그 사람의 주체를 만든다고 하니, 성경에 동의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동의합니까, 동의 안 합니까? 동의 안 하죠. 그걸 한자로 육이에요. 육.

그리고 성령이오지 않으면 자기가 육인 줄 알지 못해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인식된 주체가지고 거미줄을 쏘아서 호산나를 찬양하고,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렸고, 떡 주니까 좋다고 메시야가 왔다고 우기고,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니까 진짜 메시야인줄 알고. 그런 식으로 으쌰! 으쌰! 으쌰! 하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 “길을 비켜라! 비키세요!”라고 하면서 도왔던, 세례요한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했던 그들의 견해에, 이 주체형성에, 예수님께서는 이 테두리를 보는 겁니다. 사탄이 인간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의 주체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인간들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못 벗어날까요? 이 테두리에서. 못 벗어나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겠습니까. 갈수록 이 주체, 자아가 강화됩니다. 강화되면서 역겹고 더러운 것은 다 떠밀죠. 그 떠밀 때 그 떠밀리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 떠미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누구한테 떠밀린 줄 알아요? 열두 제자들한테 떠밀렸어요. 엄마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시신이나 잘 거두어 장례나 잘 치르자.” 그래서 들어간 거예요. 뭘 안 게 아니에요. 육이 육을 못 벗어난다니까요. 육이 육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성령세례 받는 경우 외에는 없어요. 육에 영이 찾아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육에서 영을 못 벗어납니다.

감사할 일은 이 유대사회가 육에서 영을 흉내 냈을 때, 어떤 것이 극한의 모습을 보이느냐를 아주 시범적으로 잘 보여줬다는 점에서 오늘날 유대사회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죠.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면 율법 잘 지켰다고 하니까, 남한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죠. 율법에 흠이 없는 자는 누구였습니까? 사도바울이죠. 사도바울에게 영이 찾아오니까 지킨 그게 뭐가 돼요? 배설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배설물.

육을 사탄이 둘러싸면서 이 주체가 있는데, 몰아세웠다고 할까요, 물고기 정치망(한곳에 쳐 놓고 고기 떼가 지나가다가 걸리도록 한 그물)같은, 그물에 폭 싸여버렸다. 이렇게 했을 때, 여기서 가해진 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 2장 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따먹었으니까 죽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죽으면 안 돼요.”라고 피라냐, 식인고기. 영화로 봤지만 입을 벌리는데 아주 이상해요. 인상이 못되게 생겼어요. 고기가 인상 나쁜 건 처음 봤어요. 얼마나 못돼먹게 생겼는지. 이빨도 날카롭고. 입을 쩍쩍 벌리고 있어요. 먹잇감을 찾아서. 인간들이 꼭 피라냐 같아요. 입을 벌리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이면 안 돼요.”라고 반항하는 거예요. 반항. “쌤요! 때리면 안 돼요.”라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반항하는 거예요.

그 반항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작용하겠어요? 사탄이 “짖어! 짖어! 니 죽으면 니 주체도 날아가! 그러면 안 되잖아.” 안 되는 이유도 모르는데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되는 그 모습이 뭐냐, “예수 잘 믿을게요. 십자가 믿을게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하나님 순종할게요. 이 성경말씀 지킬게요. 선교할게요.” 이 소리의 뒤 배후는 뭐냐 하면 ‘그래 이래서라도 살아남아야지. 이래서라도 나 죽으면 안 돼. 나도 가오(자존심)가 있고 위신이 있지. 이래서 죽으면 안 돼.’ 이런 것이 피라냐처럼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겁니다. 뭐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이걸 획기적으로 완전히 뜯어고칠 필요가 있죠. 획기적으로. 획기적인 뜻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왔다는 것은 시간이 마감된다고 했고, 시간이 마감됐다는 것은 시간이 더 이상 진척될 이유가 없다고 했죠. 그러면 시간이 마감되게 되면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향하여 하신 일이 있어요.

그게 심판입니다. 그게 저주거든요. 그러면 주님은 구원자 이전에 무슨 분으로 오셨다? 심판주로 온 거예요. 심판주로 오심에 대해서 동의한 사람만 구원받는 겁니다. “드디어 저를 치시려고 오셨군요. 반가워요.” 이래 되어야 돼요. “드디어 저의 죄 값을 저주하려고 오셨군요. 이제야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이래 되어야 된다니까요.

악마가 쳐놓은 이 테두리, 주체라는 이 테두리, 이것가지고 이 세상에 대해서 곡해하고 오해했던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주체체계, 체계라는 말을 집어넣은 이유를 아시겠죠. 체계라는 말은 주체를 구조화시키는 이 작업을 말합니다. 주체체계가 계속 이어지게 되면 바깥으로 뭘 보낸다? 나한테 안 맞는 역겨운 것, 더러운 것, 다시 말해서 순수, 나의 착함과 의로움에 표방되는 것은 다 바깥으로 밀어내는 성향을 보이는 겁니다.

밀어내면서 뭘 합니까? 내 것 지키면서, 죽기 싫어서 더 살고 싶어 하는 자기의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아직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그러면 제천에 불나서 죽은 사람들은 전부다 죽으려고 갔습니까? 때 벗기려고 갔죠. 때 왜 벗깁니까? 이왕 사는 것 말끔하게 살라고 하는 거잖아요. 불났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돼요.

불의 원인이 뭡니까? ① 차량. ② 스티로폼. ③ 부실한 마감재. ④ 예수님의 진노. 몇 번입니까? 우리는 불쏘시개 주체에요. 불타고 나니까 우리는 재료에요. 재료. 지금 많이 봐주고 있었던 거예요. 지난주 목욕탕에 갔을 때, 그때 불났어야 해요. 할 말이 없어요. 광주 어느 목욕탕. “아휴! 광주는 안 나서 좋다.” 이러면 안 됩니다. “목포는 빼주세요.” 뭐 이래 나오면 안 됩니다.

왜 우리는, 참새도 키우고 하듯이 우리를 매일 살린다는 사실을 왜 못하고 있습니까? 주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미줄 망이, 그 거미줄 망이 항상 탱탱하게 안 닫히고 보존되기를, 우리 속에 악마가 그걸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만은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그런데 악마가 제각각 그런 소리를 다하게 하고 있어요. 어떤 분이 이야기했어요. 우리교회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 오니까 느닷없이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악의 구조와 영의 구조가 같습니다.” 그분이 생각을 많이 하시는 분이신데, 그냥 함부로 이야기하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체를 보세요. 악(육)의 주체가 혼돈을 테두리 쳤죠. 예수님도 똑같은 방식이라는 거예요. 주체체계. 악(육)의 구조, 영의 구조가 같으니까. 예수님을 영으로 체계(테두리)를 쳐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체가 되죠. 그러면 주체에서 뭐가 나온다? 주체에서 영향력, 거미줄처럼 영향력이 나오겠죠. 어느 것이 현실이냐를 묻는 겁니다. 이 현실이 누굴 위한 현실이냐는 겁니다. 제천에 불이 난 게 누굴 위함이냐 이 말이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주체체계가 뻗어나가는 것은 예수님의 주체와 우리의 주체가, 누가 누구를 상호 흉내 내는지 모르지만 인간에게서 이게 나왔다는 것은 분명히 사탄이 그런 짓을 했고, 그 사탄이 하는 것과 같은 주체로서 예수님이 사탄이 하는 짓거리를 같은 구조의 몸으로서 같이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구조가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를 배제하고 태어난 자식.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남자를 소외시키고 나온, 그러한 여자의 자식이죠. 남자 없이. 왜 남자가 없어야 되죠? 이미 남자는 어디에 속했다? 흙이니까, 이미 죽음의 힘 앞에 맥없이, 꼼짝 마라는 식으로 잡혀 있잖아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81.188) 17-12-29 01:01 
광주 강의(2017. 12. 22) 46-2

주체체계를 이룬다. 주체체계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나는 나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세상을 내 위주로 다 바꾸어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다 바꾸고 있어요. 웃는 것, 즐거운 것, 기쁜 것, 전부다 자기 이익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 행복과 자기 불행과. 남들한테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데 본인한테는 그렇게 심각하다는 말은 벌써 주체체계에 자기가 말려든 겁니다.

근데 그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렸다고 이렇게 하거든요. 왜 참새는 우울증에 안 걸리죠? 왜 들풀은 우울증에 안 걸리죠? 인간이 그만큼 사탄에게 가깝게 밀착되어 있고, 사탄의 부림을 받고 있다. 이래보면 돼요. 아, 그놈의 우울증이라는 단어 세 개 가지고 모든 것이 정당화되어 버렸어요. 마치 안 나쁜 것처럼. 옳은 것처럼. 동성애와 똑같은 거예요. 나쁜데, 그거는 성적취향이 어떻고, DNA가 어떻고, 이래가지고 안 나쁜 것처럼. 무슨 퀴어 축제가 어떻고, 아휴, 정신병자들이. 미쳤다 하면 그냥 미쳤다고 해라. 차라리 그게 낫죠. 뭐가 부모 탓이고, 유전자가 어떻고, 동성애하고 유전자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뭐든지 유전자로 다 돌리면 안 돼요.

이 주체체계가 열 살 때, 스무 살 때 멈추는 것이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동합니다. 주체이동이에요. 계속 주변을 잡아먹습니다. 점점 커지다가 부도나면 조금 쪼그라들겠죠. 주체체계가 커졌다 작아졌다 커졌다 작아졌다가 그 주변에 따라서 괴물처럼, 암세포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늘어났다 쪼그라들었다가 하는 거예요. 많이 늘어나면 삼성그룹, 쪼그라들면 한강에 뛰어내리기. 파산. 비트코인. 뭐 이런 것. 비트코인 왜 합니까? 비트코인 해놓고 뭐 세상 탓이라고 하고. 

“부자 되세요~!”라는 그 말에 왜 말려드느냐 하면, 평소에 주체체계의 방향이 부자라는 방향으로 이미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픽셀이라는 게임이 있죠. 다 잡아먹는 것 있잖아요. 인간이 꼭 이래요. 돌아서면 잡아먹고 또 돌아서면 잡아먹고. 띠띠띠띠리릭~♬ 잡아먹으면 50점, 100점. 그냥 놀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해가지고 잡아먹고. 그러다가 또 잡아먹혀가지고 난리가 나고. 이러한 주체가 자기를 키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 이용하고, 하여튼 이용할 것은 다 이용해먹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일이 불러가지고 “니 이래 살면 안 된 데이~ 알았지. 가!” 또 불러가지고 “이래 살면 안 돼! 알았지.” 이렇게는 할 수 없잖아요. 그들 보기에 도대체 예수님은 뭐하시는 분이냐, 라고 대표자로 보이실 어떤 징조 같은 것이 필요했던 겁니다. 거기에 재수 없이 걸린 게 무화과나무에요. 그냥 하나의 무대 세트장에 서 있을 뿐인데, 스타일~! 해가지고 그냥 서 있을 뿐인데. 열매도 없어요. 열매가 있으려면 아직 몇 개월 남았어요. 근데 “보자~ 열매가 있는가 보자. 어? 열매가 없구나! 니는 영원토록 사람들 속에서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주체로서 무화과나무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근데 이유가 있어요. 앞에 보면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성경에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 11장 13절 끝에 되어 있죠. 자, 이거하고 아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제부터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열매를 얻고자 했잖아요. 열매를 얻고자 했어요.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체체계 안에서 나온 활동이 되겠죠.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이.

근데 열매를 얻고자 했을 때, 얻게 되면 이 주체는 그만큼 범위가 더 커지겠죠. 더 강화되고 힘이 더 모아지게 된다 이 말이죠. 이 테두리에는 마귀가 딱 있으니까. 근데 없으면 쪼그라들겠죠. 이미 누수가 일어나 주체체계가 쪼그라들겠죠. 예수님께서 때가 안 됐는데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누구를 흉내 내고 있느냐 하면 인간들의 주체적 행태를 지금 흉내 내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니가 누군지를 모르면서 얻고자 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얻고자.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잃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맞고 빼앗기고 그렇게 왔다는 거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어요. 다섯을 잃었을 때, 다섯이나 일곱이나 열이나 여섯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그것이 정작 얻었다는 것을, 얻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아는 순간이에요.

잃어버림으로서 나는 주님 앞에 얻은바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잃었기에 그 빈자리를 마저 채우는 것이 마저 채우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잃어버리면 안 돼!’라는 그 욕심에 가리어진 게 있는데, 그게 뭐냐 이미 우리는 주님의 주체를 위해서 주님 앞에 삼켜져 있는 존재, 이것이 주님 앞에 얻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그동안 내 욕심 때문에 가려졌고 몰랐던 겁니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그동안 몰랐던 얻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가 더욱더 증폭되는 겁니다. “주여, 지난번 잃어버린 그것까지 저한테 그냥 주신 거죠. 이제야 감사하다고 말을 하겠습니다.” 이러는 거죠. 감사를 얻는 거예요. 고마움을 얻는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주체가 중심이 되어 버리면, 이 주체체계의 중심이 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잃어버리면 누락된 걸로, 결핍된 걸로 간주해버려요. 빵꾸난 걸로. 그래서 기를 쓰고 더 착한일 해가지고 이것을 마저 채웠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성도라면 이것을 마저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잃어버리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주여, 언제든지 이것도 주께서 가져가셔도 그것이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아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태도가 바꾸어지는 겁니다.

무화과나무가 주께서 원하는 주체체계행태에 부응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았잖아요. 근데 제대로 된 무화과나무 같으면요, 주님하고 잘 짝이 맞는 한조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저주받는 역할을 하는 무화과나무. 그리고 열매의 때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 없다고 화를 내신 주님의 취지를 그대로 고스란히 잘 보여준 역할에 충실했던 무화과나무. 짝짝짝! 오늘 제목은 짝짝짝!

주님께서 나는 얻으러 온 게 아니고 잃어버리려 왔다고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하고 나하고 한패라고 자랑질 하지 말고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이 쓴 잔을. 아무도 마신다고 하는 사람이 없죠.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반드시 너희가 마시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너희의 모든 것은, 너희의 주체체계행태에서 나온 모든 것은 나로 인하여 다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치 내가 잃어버리고 목숨까지 다 잃어버리고 피까지 다 잃어버린 것처럼. 다 잃어버려요.

제가 가락 유튜브 동영상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찾아와주는 기적이 아니고 헤어지는 기적이라고 했어요. 요나하고 뱃사람이 헤어지듯이, 요나하고 세상 사람이 헤어지듯이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헤어질 때, 비로소 그것이 예수님은 누구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는 표적이 돼요. 표시를 하는 기적이 돼요.

예수님이 내가 시킨 대로 오게 되면 우리는 마치 내가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있어요. 근데 주님께서 나와 점점 떨어져갔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 자신이 내 생각을 할 자격조차 없는 그런 존재이면서 주님과 떨어지면서 아는 거예요. 단절의 중요성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림이 없으면 뭐가 없어요? 얻음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내가 알아서 되찾아온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잃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되찾는 몫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잃어버리게 하신 그 분이 잃어버린 채로 되찾아요. 그걸 채워줘서 되찾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채로 되찾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육을 영으로 바꾸는 것은 날마다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뭘 죽이냐, 이 주체를 죽이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마는, 잃어버림으로 얻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잃어버림으로.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단독적인 주체체계에 놓여있지 않고 이미 어디에 삼켜버렸어요? 주님의 주체체계를 확장시키는 확장작업에 우리가 이미 삼켜버린바 된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호산나로 돌아와 봅시다. 호산나가 이게 만만치 않아요. 예수님께서 왕이시면서 나귀 탔다고 했죠. 여기 나귀에 의미 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어요. 스가랴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겸손하셔서 나귀를 탔다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볼 사람은 누구만 알아보느냐 하면 예수님만큼 낮아진 사람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를 알겠죠. 아무도 모르죠. 아무도 몰라요.

그만큼 예수님이 나귀를 타심으로서 인간들의 방향은 낮아지려는 방향이 아니고, 인간들을 테두리 지었던 이 사탄이 인간들을 높이고, 높이고, 높이고, 계속 높이는. 높이고~ 높이고~♬ 높이고, 높이고 하는 그 식대로 가는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인간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내려가니까 거기에 그 어떤 접촉점도 형성될 수가 없죠.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자기를 잃어버리려 함이라.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대속물로 줬다는 그 결과를 내 주체의 행태 때문에 그걸 딱 내소유화시키려고, “믿습니다. 예수의 피를 믿습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얼마나 얄팍한 마귀적 성품이에요. “날 무시하지 마라. 나도 예수 믿는다.”라고. 그게 동일시하는, 동일시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괜찮으면 작업하고 나한테 필요 없으면 내갖다 버리는, 그 작업을 통해서 점점 더 자기가 자기를 구축하는 거예요. 악마의 얼굴이 돼가는 겁니다. 인간은 갈수록.

그래서 성도한테는 어떻게 합니까? 인간의 소원을 반대로 하다보니까 하는 일마다 막고 끊죠. 그렇게 끊으면 감사가 나와야 될 텐데, 잃어버렸다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잃어버렸다고. 자기 딸 죽고 난 뒤에 “주체를 불로 만들었다. 잘했다. 잘했어.”라고 이러면 진짜 머리에 해바라기 하나 꽂아야 해요. 진짜 미친 여자기 때문에. 완전 그 짝이죠. 왜 내 딸을 죽게 하느냐, 그게 내 딸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내 딸이 아니었어요. 내가 낳았다. 그래, 니가 낳았다.

육으로서 난 내 딸이지만, 육으로 그렇게 고집을 부려버리면, 그러면 영의 요소가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어느 구석에 지금 처박혀 있는 거예요? 없잖아요. 육을 도와주는 것은 영이 아니에요. 육과 비켜가는 것이 영이지. 왜 자꾸 내가 하는 육의 일을 신이,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그렇게 자꾸 고집을 부리느냐 이 말이죠. 얼마나 고집을 부렸으면 악에 받쳐서 기도를 해요. 그것도 좀 잘 안 되면 목돈 내가면서 기도를 한다고요. 돈 받아먹는 그 인간들만 좋다고 감사하죠.

근본적으로 우리가 뭘 모르느냐 하면 시간의 상실, 시간의 마감을 몰라요. 지금 주체행태가 돼버리면 인간은 자기가 살 길을, 지금까지 살았지만 더 살 길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무엇을 자꾸 고대하느냐 하면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내 시간이,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 계속 길게, 길게 뻗어나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시간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 겁니다. 예민해진다니까요. 시간에 대해서.

그래서 제가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개인사, 인생사라고 했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내가 이런 꼴 보려고, 내가 죽는 마당에 너희들 내 유산가지고 싸우는 꼴 보려고 내가 90까지 살았나! 너희들 다 나가! 그러니까 내가 죽기 전에 내 재산 안 내놓았지.” 이렇게 악을 쓰는 그런 집안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자식 다 필요 없다.” 그럼 뭐가 필요가 있다는 말이에요? “돈이 최고야! 자식보다 돈이 최고야!

자식은, 물론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내 주체형성에 역겹고, 더럽고, 꼴 보기 싫으면 자식이라도 내보낼 수밖에 없어요. 자식 셋 가운데서 고운자식 따로 있고, 미운자식 따로 있고, 뭐 중간쯤 되는 자식이 따로 있죠. 세 명이나 되니까. 저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골라잡을 것도 없어요. 그렇죠? 내 취향에 맞으면 좋고 내 취향에 안 맞으면 말은 못하지만 밉잖아요. “에잇, 떡이나 먹어라!” “어머님. 고맙습니다.” “미운자식 떡 주는 거야. 쟤는 어떻게 된 게 눈치도 없어. 눈치도.”

호산나라는 것이 뭐냐 하면 시간의 마감상실이에요. 호산나가 되려면 모든 시간은 드디어, 땡땡땡땡~♬ 수업이 끝난 종소리처럼, 모든 게 종이 친 상태로 호산나에요. 이 인간들은 뭣도 모르고 호산나를 외치고 있다고요. 뭣도 모르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뭣도 모르는 그 호산나를 여지없이 자기에게 그냥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래! 호산나다. 그래! 내가 다윗의 자손이다. 그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왔다.”라는 말은 “너희는 이제 죽었어. 너희는 이제 혼났어. 그 찬송 내가 받아 마땅해.” 하지만 너희들의 뜻대로의 그런 메시야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모든 주체행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저주의 안목으로 바라보고 계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감질 할 일은 뭐냐 하면 한 명, 한 명 남기지 않고 전부다 몽땅 다 저주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저주해버리면 인간의 뭐가 죽느냐 하면, 주체니까 주체를 한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나’죠. 주체와 주체로 있을 때 서로에게 뭘 불러주죠? 나와 나끼리 서로 뭐로 부릅니까? 이름 또는 관계를 부르죠.

그 이름과 관계는 주체에서 나왔던 그물망, 자기 주체의 영역을 서로 교환하는 거예요. 이제는 쉽게 하기는 틀렸으니까 제 마음대로 할랍니다. 언약, 다른 말로 계약, 또 다른 말로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교환의 의미에요. 교환의 의미. 상호교환. “이렇게 하면 뭐 해주시렵니까?”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들이에요. “이렇게 하면 뭐 해주시렵니까?” 서로 교환하죠.

동등한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한쪽이 한쪽의 명령을 하달 받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계약, 언약,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주체가 없으면 몰라도 이미 주체가 있는 이상은, “내가 주의 십계명을 지킬 테니까 주님은 이 주체한테 뭘 해주렵니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주체는 자기의 원인이 없어져버리죠. 본인이 본인의 원인이 되고 본인이 본인의 원인이 된 주체의 결과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내가 오늘날 나처럼 된 결과물을 낳았다고 보는 겁니다. 나가 나를 낳은 거예요.

이 말이 좀 이상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렇게 안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자기를 의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오늘날 나답게 했다는 이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여기에다가 언약, 계약, 약속, 무슨 소리를 해도....., 그렇다면 이것 지킬 테니까 뭘 해주렵니까? 예수님 믿었으니까 천국 넣어주실 거죠? 이게 교환개념 아닙니까? 교환개념. 주고받는 개념. “이만큼 해줬으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렇게 해주세요.”라는 거예요.

주님은 그 이름, 너희들의 이름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은 주의 이름에서 나온 거예요. 주의 이름에서. 그러면 인간의 모든 이름은 주의 이름에 종속되는 겁니다. “You belong to me. 당신은 내게 속했다.” 이 말이죠. “당신은 내게 속했어.” 모든 것이 주의 이름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 있어서 이름인데, 주의 이름이 전체적으로 우리의 이름을 쥐고 있으니까 주의 이름이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새겨 넣어야 할 거 아닙니까? 새겨 넣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아까 잃어버렸다, 뺏었다, 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이겁니다. 핫도그. 핫도그가 뭐냐 하면 나무막대기에 소시지를 끼운 후에 그 겉을 밀가루반죽으로 여러 번 두껍게 입혀서 튀겨낸 것. 또는 안에 막대기가 끼워있는 소시지가 들어있는 길쭉한 빵. 자, 그러면 이 소시지를 주께서 뽑아내면 어떻게 될까요? 소시지를 확 뽑아버리면 이거는 허물만 남죠. 껍질만 남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름은 속에서 자기 주체가 바깥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이 주체를 빼내고 여기다가, 원래 핫도그가 소시지인데 그동안 인간들은 오뎅, 오뎅을 집어넣은 것이 사탄인데, 오뎅을 집어넣어놓고 핫도그로 우기고 있었던 겁니다.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하여? 주의 이름이죠.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가장 높은 곳의 계획은 뭐냐 하면 모든 세상만물을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놨는데, 그게 사탄이 자기의 더러운 성질, 사탄의 성질은 뭡니까? “우리를 심판하지 마소서”가 아닙니까?

사탄은 누구로부터 심판받기 싫다는 거예요. 왜? 자기도 신이니까. 바벨탑의 목적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 이름을 어디까지 높이느냐, 하늘까지 닿죠. 그럼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께 당했던 것은 뭐냐 하면 하늘과 공격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랬으니까, 하나님의 이름까지 딱 닿아버리면, 이제는 굳건하게 인간으로 구축되어 있어버리면, 이건 뭐 인간도 신이 되었으니까, 뭐 같이 놀자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자. 목적이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어요. 높아질 때까지 높아져보자는 겁니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하듯이 계속 높아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사탄이 계속 높잖아요. 사탄이 어느 정도로 높으냐면 고관대신 급이 아닙니까? 천상회의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잖아요. 오뎅을 꽂아놓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뎅을 빼고 소시지, 예수님 자신을 집어넣는데, 집어넣을 때 어떤 물리적인 표시가 있어요.

물질적이고 실체적인 표시가 뭐냐 하면 ‘피’입니다. 죽음이에요. 피 흘림. 피 흘렸다는 말은 인간이 죽인 게 아니고 누가 죽였다? 뱀의 자손이, 뱀의 후손이 누구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었다. 이렇게 되죠. 근데 그 피가 나오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심판이죠. 그래서 심판한다는 말은, 제대로 심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이름, 속성, 하늘까지 높아지겠다는 그것을 심판하겠다는 이것이 곧 뭐가 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호산나가 되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우리를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함으로써 어디까지 몰아붙이시는가, 끝까지 몰아붙여요. 어디까지? 우리를 죽기까지 몰아붙여요. 왜? 주님 자신이 순종할 때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마지막 모습은 어떤가하면, 이제 그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날마다 죽노라”에요. 날마다. 날마다 늘 죽이고 날마다 늘 살리고. 날마다 죽이고 살리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처음에 선풍기에 종이가 빨려 들어갈 때는, 빨려 들어간 3분의 1정도만 파닥파닥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멀쩡하잖아요. 그런데 선풍기 날개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갔다. 선풍기 날개 돌아갈 때마다 종이가 퍼드득퍼드득하죠. 지금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까라하면 까고. 그냥 퍼드득거리면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라고 퍼드득거리면서 계속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뭐 이렇게 퍼드득거리면서. 근데 그걸 누가 아느냐 하면 마귀가 알아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시킨 대로 사는 거예요. 지금 시킨 대로 안 살아버리면 방금 제가 한 그것이 우리한테 뭐가 되느냐 하면 심각한 고민거리가 돼요. 심각한 고민거리. ‘지금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다가 지옥 갈지 싶으다.’ 성경은 이렇게 호산나 찬양했던 이 사람들, 정치적인 이슈도 못 살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호산나를 왜 죽입니까? 아무소리도 못하고, 끽도 못쓰고 그 세력에 의해서 별로 도움도 못주었던 이 사람들이에요. 어린아이가 무슨 도움을 줘요. 예수님 재판하는데.

중요한 것은 힘이 중요하지, 환영하는 이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엑소나 방탄소년단이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인기 있는데? 외국에서도 인기가 있다는데? 방탄하니까 뭐 탱크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수이야기에요. 샤이니 국무총리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옛날에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아이돌 가수가 대통령이 되고 국무총리가 되는 영화. 그래서 망했어요. 그걸 폭망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사람 같으면 아낌없이 거기다가 표를 던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왔습니까? 역겹다는 그런 모습. 역겹고, 꼴 보기 싫고, 전혀 보탬이 안 되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세상 권력에 대해서 매 맞고 있고, 누가 뺨을 치는지 알아맞히라고 해도 못 알아맞히고, 그렇게 도사, 도사하면서도 뺨치는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말은 안했지 사실은 알아맞혔지만. 어떻게 하는 일들이 예수님을 안 죽이는 방향으로 그렇게 애를 써도 기어이 죽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요.

빌라도부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남편한테. “당신 누구 재판하지? 그거 내가 힘들어죽겠다. 내가 어젯밤 꿈에 너무 힘들었다. 그러니까 당신 좀 대충해라. 대충해서 살려 보내라.”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또 남편들이 마누라 잔소리는 못 이기잖아요. 자기 나름대로의 수를 쓴 게 뭐냐 하면 그중 제일 흉악범, 풀어주면 또 성폭행하는 나쁜 놈. 바라바를 딱 세워놓고, 이거 극과 극이잖아요. 누굴 풀어주고 누굴 살릴까. 나름대로 수를 쓴 거예요. 살려주려고 애를 쓴 겁니다.

그래놓고 끝나고 난 뒤에서 세숫대야 물에 손 씻고. 자기가 이대목동병원장도 아니고. 그렇게 한다고 슈퍼박테리아가 없어지겠습니까? 죄가 없어지겠어요? 자기 나름대로 하는 행동을 보세요. 자, 세숫대야 물에 손을 씻는 이유가 뭡니까? 주체체계의 행태에요. 인간은 자기한테 더러운 것, 역겨운 것, 재수 없는 것, 귀신 막 달라붙는 것을 다 떼어내는 식으로 평생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때 제자들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뭐야! 우리? 지금 우리의 주체는 뭐가 돼?” 아무 죄도 없어 보이는 무화과나무를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무슨 저주받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주해놓고, 저주시켜놓고, “보자~ 저주할 게 뭐가 있나? 옳지! 열매가 없었구나.” 하나의 억지, 억지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정상적인 우리의 사고방식 가지고서는 뭐로 보인다? 억지로 보이는데, 억지로 보인다는 말은 둘 중의 누가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무화과나무가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이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객관식 둘 중의 하나잖아요. 무화과나무가 잘못됐죠. 왜? 까라면 까야 해요. 잘못됐으면 잘못된 거예요. 이유도 없이.

제가 지난 주일이 설교했잖아요. 우리가 죄인인데 이유가 없어요. 이유도 없이 죄인 됐는데 주님 좋아라고 이유도 없이 죄인 된 거예요. 그러면 됐잖아요. 뭘 더 원해요? 뭐, 주님하고 거래할 생각이 있습니까? 거래해서 뭘 얻겠다고 거래해요. 누구 좋으라고 거래해요. 마귀 좋으라고 거래합니까?

지금껏 살아온 것도, 우리가 뭐 시설 좋고 괜찮은 목욕탕을 골라서 살아온 게 아닙니다. 저는 목욕탕에 얼마나 다니는지 몰라요. 들어갈 때 문 한번 두드려보고 또 사우나실 안 막혔나 그거 보고 들어간 게 아니에요. 그냥 복불복이다. 다 죽으면 할 수 없고. 다 죽더라도 때는 벗겨야겠다. 그래서 간 거예요. 우리는 그냥.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심정으로 그냥 간 거예요. 목욕탕에.

지금 저만 그랬나? 다른 사람은 안 그런 것 같아요. 더 살고 싶어서 간 것 같아요. 저는 죽음의 장소로 생각하고 앞으로 갈 거예요. 이참에 유언 써놓고 가든지 무슨 조치를 해야겠어요. 아까 빼먹은 커피 한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혹시 독이 있을지. 있어도 상관없지만. 왜? 죄인이니까. 죽어야 되지만. 그래도 살려주시면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만. 이런 비장한 각오로 사약 먹듯이 먹어야 돼요. 이거 뭐 하늘보리인가 뭔가 이거 간접광고다. 

제발 심각한 걸 두지마세요. 우리가 심각할 그런 잽이 됩니까? 그런 자격이 돼요? 뭐가 그렇게 심각해서 촛불 들려고 나갑니까? 광화문 앞에. 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심각하다는 말은 주의 이름을 거부하는 거예요. 주님께 반항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무화과나무라면,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받아서 말라비틀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마 불타서 죽을 거예요. 왜? 열불 나서. “주님! 아직 3개월 남았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열불이 나서 주님한테 막 따지려고 하다가 자기가 타죽을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고스란히 주님의 저주를 수용했습니다. 왜? 이게 주님이 저주한 저주니까. 우리는 군소리 말고 그 저주를 받아들여야 돼요. 매일같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매일같이 저주받아도 합당하구나. 주께서는 그 합당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뭘 줬습니까? 법, 율법을 줬죠. 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뭘 받는다? 저주받죠. 하나라도 어기면. 그것도 매일같이 한시도 쉬지 않고 하나라도 어기면 우리는 저주받아요.

우리는 그런 육의 몸이에요. 육은 저주의 지배아래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하갈처럼 저주아래 있는 것이 육이에요. 저주를 저주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먼저 모세의 법을 보여주고, 인간들이 법이 오니까 저주받아야 될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야! 신난다. 지켜야지! 이참에 내 의를 가지고, 내 이름가지고 어디까지 간다? 주의 이름이 와야 될 그 경로를 자기 이름으로 더덕더덕 붙여가면서 그걸 기어 올라가서, 결국 하늘에 올라가서, “제 이름으로 왔는데에~” “한 뚝배기 하실래에?” 하는 것처럼. “제 이름으로 왔는데에~ 여기까지 제 의가 있는데에~” 이런 식으로 이제 천당 가려고 하는 겁니다. 갑자기 로버트 할리가 생각나네. 

예수님께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은, 시편118편으로 모든 것을 끝장내버려요. 그 대목 한다고 시간이 너무 많이 갔는데, 시편 118편 26절에 나온 말씀이지만 22절을 봅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누구 오뎅이 없나? 자기 이름을 빛내보세요. 건축자의 그 다음에 무슨 돌입니까? 버린 돌이죠. 그렇죠. 다 버려야 돼요.

예수님에 대해서 제자부터 모든 인간이 다 버려줘야 시간이 마감이 된다니까요. 예수님의 자기 숙제가 돼요. 제발 예수님을 좀 버려줘야 돼요. 예수님을 밀어내줘야 해요. 자기주체체계의 형성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고 밀어내야 하고, 예수님의 모습도 밀어낼 수밖에 없는,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그런 행색을 하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누가 알았으리요. 누가 믿었으리요. 없어요. 믿음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미리 앞당겨서 저주받는 것도 감사한 사람이 있었죠. 12년 동안 혈루병 앓던 사람, 그리고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밉상 받는 사마리아 여인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뭡니까? 예수님한테 칭찬받은 특징이 뭐에요? 이미 그들은 기존의 유대사회에서 나가놀아라~ 라고 해서 다 배제된 사람들이잖아요.

세리와 창녀, 그리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여인아! 너와 내가 같은 입장이다.” 같은 입장이다. 예수님께서 글씨를 쓰니까 그들이 뭘 느꼈습니까? 죄책감을 갖고 다 갔죠. 돌을 놓고. 글이라는 것은, 법이라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 죄를 죄 되게 확 올라오게 하는 거예요. 확 올라오는 것.

저는 이 경험이 없어서 잘 몰라요. 근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술 한 잔 먹으면 열기가 확 올라온다면서요. 여긴 술 먹는 사람이 없으니 말도 못하겠네요. 혹시 이 방송을 듣거나 보는 사람 중에 열기가 확 올라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술 먹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열기가 확 올라온답니다. 얼굴이 갑자기 벌개 진대요.

주님의 법을 보는 순간 우리가 확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근데 왜 사람들이 안 올라오는데요? 복음을 안 전했으니까 안 올라오죠. 복음 전해보세요. 확 올라오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 뜻을 다 꺾어버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상한 길로 안 가요. 예상한 길로 가지를 않습니다.

예상한 길은 우리의 주체체계가 발사되는 그러한, 스파이더에서 나온 줄, 거미줄이 이미 같이 따라가기 때문에, ‘역시 난 잘 선택했어. 역시 내 예상대로야. 역시 난 기도응답 받았어.’ 이래 돼버리면 이거는 확 올라올 게 없어요. 이거는. 성질날 게 없다고요. 우리가 주님을 미워해야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이 잃어버릴 대상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미워해야.

우리가 주님을 안 미워하는 것은 아직까지 뭐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뭐 예수님한테 관심 없어도 뭐 있는 돈 가지고 숨은 트고 살고 있다 이런 뜻이에요. 정말 막다른 길로 갔을 때는 찬양보다도 뭐가 나오겠습니까? 미움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호산나 찬양은 사실은 진짜 십자가 질 때, 그때 불러야 할 찬양입니다. 근데 이것을 못 부르고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호산나 찬양하죠.

자기 몸을 구원해달라고, 자기 육을 구원해달라고 할 때 부르는 호산나 찬양이나 주의 이름하고, 나중에 심판받아도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아는 상태에서 부르는 호산나 찬양이나 주의 이름하고 뭐가 다릅니까? 한쪽은 자기를 위한 찬양이고. 자기를 찬양하는 자기 이름을 하나님께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는 찬양이고. 저쪽은 뭐냐, 오직 주님 이름만, 주님 혼자 다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제대로 찬양하는 것이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죠.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영의 구조와 육의 구조가 유사한 거예요. 술 취하면 확 올라오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죠. 자기 자신을. 대충 말고 아예 취해버리면. 비틀거리면서 내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죠. 성령에 취해버리면 관심사가 자기한테 없고 어디에 가 있습니까? 오직 주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 분주하게 하고 있는 주님의 일에 관심이 있죠. 성령에 취해버리면.

그럼 성령에 취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그냥 감사와 고마움만 나오죠. 이 말은 심각한 게 없다 이 말입니다. 타이어에 빵꾸가 났다. 차가 가다가 스톱했다. 평소에 찬양하다가도,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뻥 소리가 나서보니까 운전 중에 타이어가 빵꾸가 난 거예요. “에이씨 내 차.” 방금 뭐가 나왔죠? 에이씨 그 다음에 주체 차. 내 차.

내 차 바퀴 4개를 바꾸는데 일제로 15만원 줍니다. 4개하면 60만원. 바꾸다 보면 라이닝 하나 바꾸라고 해요. 라이닝 하나에 40만원. 이건 현찰로 달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휠도 바꿔야 돼요. 20만원. 찬양하다 120만원 날아갔어요. 내내 기분 나쁘죠. “타이어뱅크는 어디가도 60킬로만 타면 다 다시 바꿔줍니다.” 온갖 소리를 해도 소용없다가, 성령을 받는 순간 ‘아! 주께서 지켜주셨구나.’ 내 이름을 지켜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켜왔던 것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 지킨다고 가려졌던 주의 이름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120만원의 돈을 날아가도록 잃어버리게 하셨던 겁니다.

호산나 찬양하리로다. 시편 118편은 절대로 이 말씀은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가릴 뿐이지 취소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22절을 다시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면서 시간이 중지가 됩니다. 이제는 그날이 그날이에요. 여기는 공간적으로 되어 있죠. 근데 24절을 보면 시간적으로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감 날이다. 그래서 안식을 기대하는 날이 안식이 아니고 안식이 완성된 날. 안식일이 완성되면 날짜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나와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거든요.

그래서 아까 선풍기 날개에 종이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예로 들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뭘 해도 심각함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데 왜 우리는 심각합니까? 차 빵꾸나는 것. 그것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우리 속에 육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육이 있잖아요. 육이 살아줘야 영의 고마움을 알죠. 내가 그냥 딱딱한 시멘트라면, “뭐 시멘트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시멘트 때문에 피를 흘려?” 이래 되잖아요.

육이 있어줘야 죄가 나오고, 그 죄는 율법에 의하면 우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또 다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근데 이걸 누가 벗어났어요? 이미 시간을 정지시켰어요. 시간을 정지시켰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할 게 없다는 겁니다. 현재 지금이 하나님의 나라에요. 이 순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성령이 함께 있어 그리스도의 처소와 함께 있는. 세상의 시간이 마감된 거예요.

마감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오늘밤에 죽어도 괜찮아요. 하루 더 살아도 괜찮고. 이틀 봐 줍니다. 이틀 살아도 괜찮고. 수십 년 살아도 괜찮아요. 어쨌든 간에 그거는 우리한테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의미가 없고, 주께서 우리를 주도적으로 주의 이름을 위해서, 호산나 찬양을 위해서 우리를 계속 살려주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육에서 영이 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올 수 없었던 놀라운 기적, “이미 구원은 끝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호산나의 작업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고 저주했던 주님의 철저한 그 구원의 작업, 그게 저주가 아니라 곧 축복인 것을 저희들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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