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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7 01:41:45 조회 : 739         
성전 속의 죽음 18012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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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1-28 22:58 
광주강의20180126a 마가복음11장 15절(성전속의 죽음)-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1장 15-17절입니다.

 

1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16절,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하시매

 

이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성전이 눈에 보이죠. 주께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철거하시려고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게 되면 중심이 돼요. 눈에 보이면. 눈에 보이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되죠. 몰린 이 사람들은 중심지를 찾는 셈이 돼요. 중심지를. “중심지를 찾았다.” 이렇게 돼버립니다. 중심지를 찾았다는 것.

 

사람들이 인생사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살 수 있는 안정된 중심지를 찾는 데에 있어서 자꾸 떠나고 또는 멈추고 하는, 그걸 반복해요. 집사님 댁도 이사를 가지만. 내가 가는 그것이 내 마음에 안심을 줄 정도로 어떤 고정된 중심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전이 어떤 고정된 자리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것으로 인해 흡족해하고 만족해하죠.

 

교회가 있다. 여기서는 성전인데, 오늘날 예배당으로 봅시다. 예배당 근처에 가게 되면 왠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 같고 은혜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내가 사는 동네에 절이 있다고 한다면 갑자기 이사 가고 싶은 생각이 들죠. 성전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의 가현적인 건물로써 비치게 되게 되면, 수평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안정을 제공하는 특정지점으로, 특혜 받은 지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아요.

 

창세기 6장, 7장에 방주가 나오죠. 방주. 방주에 올라타면 홍수의 심판에서 면할 수 있다. 방주에 올라타면. 홍수여 오라! 뭐 방주만 있다면 안심이다. 노아 같은 경우에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세월이 몇 천 년 흐른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받는 것이 되게 간편해 보이지 않습니까? 특정 배(방주)속에 들어가면 구원이 되니까. 구원이 얼마나 간결하고 간편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보면서 공갈, 협박, 핵폭탄 터질 때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그 마지막 최후의 방주 같은 것, 벙커죠. 방주 같은 것을 내가 구입해서 거기서 살고 있다가 최후의 심판인 핵폭탄이 지나가고 난 뒤에 헤헤거리고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아주 간결한 생각이 확 들어오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러한 사고방식을 지금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마가복음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장치가 되는 거죠. 매혹적인 장치. 마음에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그 장치라 할 수 있어요.

 

그 성전은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만들라고 한 그 성전에 내가 근접해서, 그 성전의 존재를 내가 인정하게 되면 나는 구원되고 천국 가는 사람이 된다. 얼마나 마음의 모든 잡생각이 다 해소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성전의 모습에 왜 그렇게 끌리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호수가 있고 호수 근처에 뱅 둘러서 집들이 있다고 칩시다. 호수가 있고 이 집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는데,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같은 데를 보면 멋진 호수가 나와요.

 

근데 이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는데, 뭐 잔디를 깎는다든지 무슨 결정을 하게 될 때, A라는 집은 누구한테 영향을 받느냐 하면, 자기 집하고 근접한 양쪽 집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어 있어요. 양쪽으로 있는 옆집이 잔디를 깎는다고 하면 이 집 사람은 잔디를 깎을 영향이 아주 많아요. 또 B라는 집 근처에 있는 양쪽 집이 잔디를 안 깎는다고 하면 그 집은 잔디를 안 깎을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가운데를 호수라고 한 이유는 뭐냐 하면 공백, 비어있다는 겁니다. 어떤 중심이 비어있을 때는, 사람들은 정보를,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되고 행동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반드시 옆에 있는 집을 커닝해서 모방하고 흉내 내는 식으로 사회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이 있다고 할 때, 원래 이렇게 가운데 호수처럼 성전을 비어놓게 되면 사람들은 옆집을 보고 잔디를 깎든지 안 깎든지 하면 되는데, 이걸 가지고 사회라고 하는 데에 적용시켜보면 인간은 옆 사람을 흉내 내고 옆 사람은 또 그 옆 사람을 흉내 내는 하나의 공통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추상이라고 합니다. 추상.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정신적 구조. 이 정신적 구조를 이번 수련회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데올로기라고 했습니다. 이념. 이념이라는 것은 곁눈질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곁눈질해서. 모방해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데, 3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서유럽 배낭여행을 휴가내서 간다. 또 이쪽도 유럽으로 간다. 그럼 본인의 희망사항은 이미 정해진 거예요. 둘 다 유럽으로 여행 가는데 자기는 동남아에 갑니까? 만약에 갔다 오게 되면 동남아에 갔다는 소리를 못해요. 인도에 갈까요? 인도에 가서 무슨 흉한 꼴을 보려고. 결국에 이쪽도 유럽가고, 또 이쪽도 유럽에 간다면 자기도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적어도 유럽을 가줘야 레벨이 맞잖아요. 동남아 태국에 간 것은 말도 못해요. 가만히 있어요. 무슨 우사를 당하려고. 그러면 뭐냐, 30대 초반의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들이 서유럽 배낭여행 가는 것이 하나의 이념이 돼버린 겁니다. 이념이.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보는 것은 옆 사람만 봤는데 그 사람의 정신구조에는 서유럽 여행 그것도 배낭여행, 좋은지 모르겠습니다만, 배낭여행이라는 것이 하나의 정신적 구조, 추상적 구조로 남는 겁니다. 빈자리에 정신이 딱 차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 동네가 전부 다 잔디를 깎는다면, 이 호숫가에 있는 동네에서 이 일은 옳은 일이 되고, 반드시 그래야 되는 일이 돼버립니다. 그래야 되는 일로. 그런데 만약에 호숫가에 집들이 있는데, A라는 집은 잔디를 안 깎아요. 근데 옆집 B라는 집은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왔기 때문에 항상 착실하게 잔디를 깎았어요. 또 C라는 옆집은 잔디를 안 깎아요. 물어볼 것이 아닙니까? “잔디를 왜 안 깎습니까?” “깎아봤자 또 날 건데. 그 뭐 힘들게 깎습니까? 한 번만 깎으면 되지. 뭐 추석하고 설에만 깎으면 되지.” “아! 그런 법도 있네.” 대번에 이념이 또 바뀌어요. 아, 그동안 잔디 깎는다고 애먹었는데, 이 동네는 안 깎아도 되는 동네였어요. 모방하는 겁니다. 닮아가는 겁니다.

 

이거는 부모가 자식들 키울 때 보면 형제간에 그대로 다 드러나잖아요. 이게 그 사람의 정신구조가 되죠. 결국 이거는 잔디 깎는 동네에서는 잔디 깎는 것이 이념이 되고, 중앙을 차지하고. 잔디 안 깎는 동네에서는 잔디 안 깎는 것이 중앙을 차지하는데. 그럴 때, 옆 사람을 보는 것이 그냥 흉내만 내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뭘 보느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나누어서 좋아하는 것은 끌어당기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고.

 

좋아하는 것은 끌어당기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는데, 좋아한다 또는 싫어한다를 인간들이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안심 놓고 바라보는 이념의 중앙, 호수가운데를, 이 중앙을,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이죠. 성전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중앙이라고 한다면 자기도 같이 좋아하게 되어 있고, 싫어한다면 같이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엠페도클레스(Ἐμπεδοκλῆς, 기원전 493년경~기원전 430년경)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이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모든 자연세계에서 행위가 나올 때 일치된 행위의 원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하면 끌어당기고 미워하면 밀어낸다는 거예요. 모든 게. 근데 이 사람이 연구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나름대로 사색을 많이 했겠죠.

 

그 당시는 과학이 발달이 안 되었으니까. 쭉 고뇌해보니까 아, 좋아하는 것은 끌어당기고 미워하는 것은 밀어낸다. 이것이 사람에게 뿐만 아니고 모든 동식물까지 되고요. 오늘날 과학에서는 뭐냐 하면 박테리아, 박테리아에 두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박테리아에는 두뇌가 없어요. 박테리아에게 두뇌가 없다는 말은 신경세포가 없다는 거예요. 신경세포가 없는데 박테리아는 살아 움직이거든요.

 

우리는 뭐든지 지시를 두뇌에서 내린다고 하는데, 실제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이런 데서는 두뇌가 없어요. 아메바도 마찬가지고. 그거는 뭐냐 하면 화학적인 물체가 왔을 때 반응을 나타나는데, 과학자로서 뭐가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 저 화학물질이 왜 자기한테는 좋다고 느껴지고, 왜 저 다른 화학물질은 안 좋다고 느껴지느냐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설탕을 주니까 좋다고 따라오는데 이건 무슨 신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근데 독성이 있는 것은 또 밀어내는 거예요. 왜 밀어내느냐 하는 겁니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이건 싫어하기 때문에 밀어낸다는 거예요. 왜 싫어해야 하는데? 과학으로 따지게 되면 이건 분자덩어리거든요. 분자덩어리에 같은 분자가 왔는데, 이게 같은 분자인데 왜 이쪽 분자구조는 싫어하고 왜 이쪽 분자구조는 좋아하는데? 이쪽 분자는 왜 끌어당기고 이쪽 분자는 왜 미워하는데?

 

딸이 시집갈 때, 딸이 한 서른다섯 쯤 되면 급하잖아요. 처음에는 교회 다녀야 한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남자면 다 된다고 해서 선을 막 보게 하는데. 뭐 급하니까 그게 뭐 문제입니까? 밥벌이만 하면 그냥 붙여주려고 하는데. 계모임 가서 사진 보여주면서 조건 맞는 후보자 물색해가지고 딸한테 선보라고 하죠. “딸아! 선 한 번 봐라.” 실컷 조건 맞춰서 했는데 딸은 나 혼자 산다고 해요. 나 혼자 산다고 하다가 엄마가 뭐 인센티브를 주니까 그거 받고 선보러 갔어요. 보고 와서 엄마가 어떠냐고 물으니까 싫다고 하죠. “싫어!” “왜 싫은데?” “싫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 싫어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인물도 내 타입이 아니고.” “너는 어떤 타입인데?” “나도 몰라. 무조건 내 타입이 아니야.” 말하는 것도 꼴 보기 싫고, 뭐 하나 싫으면 다 싫어요. 엄마로서는 답답하죠. 다음 후보자 찾는 것이 굉장히 곤란한 거예요.

 

그러면 엄마도 딸이 시집 안 가면 안 가는대로 놔두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엄마는 딸이 시집 안 가니까 싫은 거예요. “왜 싫은데?” “몰라.” 본인도 본인에 대해서는 왜 좋은 게 있고 왜 싫은 게 있는지 본인도 모르면서, “내가 시킨 대로 왜 안 했느냐.” 그게 또 싫은 거예요. 이게 지금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영원한 숙제가 되게 돼있어요. 가로막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맹목적이다 하는 겁니다. 맹목적 움직임이에요.

 

맹목적, 아무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데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자꾸 전진하는 겁니다. 전진 또는 헤매는 것. 전진한다. 헤맨다. 찾는다. 부지런하게 새로운 것을 구상한다. 이렇게 되는데, 성전이라는 것이 딱 고정되어 버리면 이 전진하고 헤매고 찾는 것이 여기서는 전부 다 스톱이 돼버립니다. 스톱이 돼버리니까 유대인들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이걸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다 찾았다. 인생 그만 헤매도 된다. 인생관에 있어서 더 이상 의심스러운 것은 남아있지 않아요. 해답을 알았으니까. 진리를 알았으니까.

 

마치 노아가 방주를 보면서, 방주 말고 딴 방법 없습니까? 라고 이러지 않고, 그냥 방주 안에 들어갔잖아요. 그래서 구원되었잖아요. 똑같은 방식으로 눈에 보이면서 최종적인 해답이 될 수 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 있다면 인생을 그만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줄 거예요.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인생을 헤매고 있고, 참 복잡하고 정리하기 힘든 인생관에 이 성전이 하나 있고, 이 성전에 수천 년 동안 무슨 이데올로기가, 무슨 이념이 여기서 쓰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 주셨고 그 주신 성전에서만 하나님과 만난다. 만약에 성전을 외면하면 하나님 앞에 저주받아서 지옥 간다. 따라서 성전이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고 천국백성이다. 이러한 이념, 옆에 사람이 다 믿으니까 거기에 같이 동조가 되어서 안 좋아도 같이 좋아지는 것처럼 강요받는, 추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요받는 그 분위기 속에, 성전이 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결집력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참 많이 도움이 되잖아요.

 

천주교 가정을 좀 알거든요. 일가친척 중에 천주교가정이 있는데, 안방에 가면 마리아상이 있어요. 그리고 마리아상 옆에 십자가상이 있는데, 그 십자가상에는 꼭 목걸이가 매달려 있죠. 십자가상은 꼭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상이에요. 그 십자가상에 묵주처럼 목걸이가 매달려 있어요. 그 옆에는 공동 번역된 성경책이 하나 있고. 가정주부들은 밖에 나갈 때 한 번씩 이 앞에 엎드려가지고 머리, 어깨 찍고 묵주도 한번 돌리고. 그래가지고 무사히 갔다 왔다고 또 하고.

 

자, 이게 일종의 가정제단이거든요. 제단. 제단이 있다는 말은 뭐예요? 이미 내 마음은 이 제단중심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거예요. 심리적으로 상당한 안정감을 주잖아요. 상당히 안정감을 주죠.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성당에서 형식과 제도에 대해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그것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게 수천 년 동안 모든 인간의 심리를 테스트해보니까, 추상적인 성경이야기보다도 눈에 확 띄는, 확 보이는 건물이 있고, 유별난 신부나 수녀 복장을 해가지고 거기서 상주하면서 사람들이 오면 상담해주고 위로해줄 때, 그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편리하고, 골치 안 썩고, 자기 마음을 쉽게 안정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없었던 겁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테스트하고, 테스트하고 테스트해서 얻은 결론이 그거에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보셨잖아요? 저는 한 스무 번도 더 봤습니다만. 그 영화에서 마리아가 기타치고 뭐 하면서 남자 주인공 트랩대령에게 자꾸 암시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돈 많은 미망인하고 결혼한다고 할 때에, 그 마리아가 삐져서 기타 던지고, 일곱 명 애들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들어갈 때에 복장이 벌써 달라요. 아주 정결한 복장으로 딱 있죠. 그러다 수녀원 원장에게 걸려서 한소리 듣죠. “네가 사랑하는 남자하고 잘 안 됐다고 여기 와서 도 닦는다고 도가 닦이냐? 차라리 빨리 도로 내려가라.” 비겁하게 사랑싸움에 미리 패배자가 되지 말고 붙어라 이 말이죠. 붙어가지고 돈 많은 미망인 쳐내고 자기가 일곱 명의 애들 엄마가 돼가지고, 나중에 2차 대전 때 알프스 산 넘어 미국으로 이민 와서 일곱 애들 합창단 만들어서 생활했잖아요. 실화입니다.

 

그러면 수녀가 됐다는 자체가 이미 복장부터가 다르잖아요. 복장부터가. 복장이 다르다는 것은 자기를 옥죌 수 있다는 이 말이죠. 자기의 불안한 모든 것을 정돈할 수 있는 거예요. 유니폼이. 그러니 이게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이고 위선입니까? 그 옷 하나가 뭔데? 수녀복이 뭐고 신부복이 뭔데? 그 옷 하나 입었다고 해서 바르게 된다는 말은,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비쳐지느냐에 자기의 모든 인생의 종착점인양 그렇게 여긴다 이 말이죠.

 

그렇게 신부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위선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안 하는 이유는, 그동안 줄곧 그런 것들이 이념으로서 세뇌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념으로서. 오스트리아가 가톨릭국가가 아닙니까?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제일 첫 장면이 뭡니까? 수녀가 놀고 싶어서 산에서 춤추고 있는데 저 산 밑에서 눈치도 없이 밥 먹으라고 종을 울리니까, 아이고, 기도시간이 됐다고 내려가는 그 장면이 나오잖아요. 인생을, 어떻게 거룩한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을 눈에 띄는 식으로, 임의로 구분 짓는다는 이게 얼마나 인위적인 거예요? 참 이게 인위적이잖아요.

 

성도가 되었다는 것, 복음을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교회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교회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 교회를 뛰어넘고라도 구원이 될 수 있느냐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녹취까지 되어 있으면 천하 농땡이들 교회 안 와도 된다고 좋다고 하죠. 일단 교회 안 오게 되면 기름 값이 빠져요. 기름 값 빠지고 헌금 빠지고. 기름 값 빠지고 헌금 빠지니까 쓸데없는 종교 쪽으로 돈을 안 쓰잖아요. 이거만 모아도, 복리로 계산해보세요.

 

사람의 모든 움직임은 그 마지막 대목에서 결국 돈입니다. 돈.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이념에서 나에게 좋은 것이 뭐고 미워하는 것이 뭔 줄 알아요? 다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돈이 유리하게 되면 좋고 돈을 쓰게 되면 미운 거예요. 인간은. 뭐 이렇게 선보는데, “한 달 수입이 나는 천만 원이 되는데 저랑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뭐 그런 남자도 별로 없지만. 그런 남자가 자기한테 대시하게 되면, “흥! 나는 사랑을 천만 원에 팔지 않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당신 같은 속물하고는 결혼 안 할 거예요.” 근데 그 다음 사람하고 선을 보는데, 한 달 수입이 일억이에요. “일억인데요.”하니까 바로 “아이고 감사합니다.”하죠. 천만 원은 튕길 수도 있어도 일억은 못 튕깁니다. 일억은 못 튕겨요. 일 년이면 십이억인데요. 일억 짜리 만나면 천만 원짜리 튕겨서 주께서 복을 주셨다고 할 거예요. 이게 자본주의의 이념이에요.

 

제가 자본주의를 이념이라고 하는 이유가 인간은 내가 뭘 좋아하고 내가 뭘 싫어하는지를 본인이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만, 캐보면 전혀 자기가 한 게 아니고 곁눈질해서 내가 흉내 낸 거예요. 몸에 습득된 거예요. 어느새 저항할 수 없이 쑥쑥 들어온 겁니다. 이 중심이 뭐냐 하면, 이 호숫가의 중심은 돈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옆집사람들과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돈에 의해서 된 거예요.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제가 왜 그렇게 호수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제가 왜 호수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게 중간이 비어있습니다. 공백입니다. 원래. 성전중앙이 비어있어요. 성전은 그게 있더라도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들어가면 안 돼요. 언약궤라는 게 있긴 있거든요. 성전 안에는 성소하고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나무 상자위에 금으로 조각된 천사들이 나란히 마주보게 되어 있고, 커튼은 천사그림이 네 가지 색깔로 수놓아져있고, 이래 되어 있습니다. 뭐 만들기야 사람이 만들었죠.

 

하지만 만들었다고 해서 자기가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못 들어갑니다. 굉장히 신기한 게 뭐냐 하면 온 천하를 만든 하나님께서, 특정지점에서 인간과 만나주신다는 점이 아주 특이해요. 왜 특이하냐면, 특이한 점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천하를 만들었기 때문에 산이든 들이든 바다든 관계없이 만나주는 것이 우리네 상식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 하나님이 만드신 넓은 들판, 어디에서 외쳐도 만나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 상식을 깨고 하나님은 안 만나줘요. 번개는 아무 데나 쳐도 하나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함박눈은 언제든지 내릴 수 있어도 만나주지는 않아요.

 

첫 번째가 일정하게 만나는 특정지점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만나주신다는 것이 놀라워요. 만나주신다는 점이. 왜냐하면 사람들이 카페에서 만난다면, 같은 키로 만나죠. 하나는 2미터고 하나는 3미터면 안 되잖아요. 하나는 5미터 되고 하나는 2미터가 되면 이래가지고는 만날 수가 없잖아요. 마음을 낮추어주셔서 같이 만나준다는 게 신기해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인간과의 만남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영광을 포기하시고, 아까 영광이야기를 했지만, 영광은 포기한 영광이 우리에게 다가온 영광이에요. 포기한 영광. 그 포기한 영광은 주님 쪽에서만 포기하면 안 돼요. 우리도 우리 영광을 포기해야 돼요.

 

어쨌든 간에 하나님이 만나주셨다는 것이 신기해요. 유대인들이 이걸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이렇게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너무 큰 분이시기 때문에. 이 하잘 것 없는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이건 도저히 인간의 아이디어로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정현이가 페더러를 만나요? 같이 시합을 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황제를 어떻게 신삥이(집단이나 조직에 처음 들어와 조직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가 만나서, 그것도 연습이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시합을 한다? 이게 어느 안전이라고 그게 허락이 돼요? 그러니 기적이죠.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1세트 패, 2세트에서 기권함). 감히 그걸 어떻게 만나요? 못 만나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수건이야기가 나옵니다. 못 만날 인간인데 하나님 쪽에서 어떤 처치를 한 겁니다. 처치. 하나님이 자기 처치를 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만나도록 주선을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알면 우리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 두 가지만 받아들여도 테니스 3대 0으로 지던 말든, 그리고 밀양에 세종병원 화재로 몇 명이 죽던 말든, 아무 큰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밀양의 세종병원은 제가 더울 때 들어가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쉬었던 곳입니다. 그 동네 좀 알아요. 좀 아는데, 불난 현장을 보니까 새로워요. 제가 아는 병원이라서. 그 가족들이 굉장히 마음이 상하겠죠. 아프겠죠.

 

하지만, 이거 두 가지를 알면 우리가 마음 상했다는 말조차도 너무 자기 분수도 모르는 건방을 떠는 것이 돼요. 감히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만나줬으면 내 인생에 어떤 굴곡이 있고 어떤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한 맺히고 가슴치고 할 그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만나줬는데. 그것 때문에 왜 한이 맺힙니까? 한 맺혔다는 말은 지금 본인이 노력해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하나님 어디에 있어요? 어디에 있어요? 마치 알프스 산을 돌아다니면서 요를레이~ 요를레이히요~♬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이 수녀 복장을 하고서 찾아드릴까요? 신부가 되어서 찾아드릴까요? 그런 시도밖에는 안 되거든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하게 되면, 지상에 눈에 보이는 중심은, 인간들이 그것을 찾는다는 것을 주께서 알지만, 절대로 눈에 보이는 중심을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슨 중심이냐, 성전중심이 아니고 성령중심이죠. 성령중심. “성전중심은 어떤 지정된 장소에 있고 성령중심은 어디에든 있다.”라고, 이렇게 정리하시면 안 됩니다. 안 돼요.

 

왜냐하면 성령중심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에요. 성전중심은 이 세상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기 위한 지점을 찾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하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성전중심이고, 이 성전중심으로는 만날 수 있지만, 성령중심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만날 수 있는 곳이 없다가 되어야 해요. 어디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도 인간은 만날 수 없다가 되는 겁니다. “너 혼자 백날 전진하고 후퇴하고 백날 해봐라. 결국 네가 애쓰고 노력한 그 헛수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생각해보시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셔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다 쫓아버리고, 돈 바꾸는 자들을 다 쫓아버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을 쫓아버리고, 의자 엎으시고. 점잖게 의자 좀 치워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본인이 손수 엎었어요. 예수님께서 땀 깨나 흘렸습니다. 엎으시느라. 안 다치셨는지 몰라요. 그리고 기구 들고 가는 사람까지 성전에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러면 이거 빼고 저거 빼고 차 떼고 포 떼버리면, 그러면 성전의 의미는 뭐냐 하면 결국 성전은 공백으로 비워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성전은 비워놓는 거예요.

 

인간들이 뭔가 거룩한 것을 찾고자 한다면 그거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죠. 성전 안에는 없잖아요. 없으면 그거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성전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성전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유는 곧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가 오늘 성도의 칼럼에 9년 전에 심재성 목사가 쓴 이근호 신학에 대한 비판의 글을 올려놨습니다. 9년 전에 한 댓글도 같이 올려놨는데, 올려놓고 댓글을 달아놨습니다. 사람이 5초 후에 죽는다면, 지금 5초 후에 숨이 넘어가서 죽는다면, 5초 전에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한번 쭉 돌아보세요. 살 때는 보람이 있었다, 뭐 했다고 하지만, 5초 후가 딱 되게 되면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인생이.

 

내 인생 자체가 부질없는 거고, 그리고 5초 지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돼요? 사라져버려요. 물건 남아 있는 것, 자식들이 후딱 전부 다 재수 없다고 불에 다 태워버립니다. 아예 흔적도 없이 다 치워버려요. 책 쓴 것이라든지 뭐 돈 되는 것은 모르겠다만. 무조건 돈이니까. 그 외에는 전부 다 불에 태우죠. 원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없는 거예요. 지금 사니까 있어 보이죠. 근데 세월에, 시간에 다 갉아 먹힌다니까요. 내 긴 꼬리가 야금야금 다 먹혀들어가고 있어요.

 

언젠가 제가 그런 강의했거든요. 촛불을 예로 들었거든요. 초를 하나 사게 되면 굉장히 길어요. 아이고, 어느 세월에 다 닳을까? 하죠. 초나 모기향. 모기향이 뺑뺑 돌아있어서 지겹다 하지만 아침 돼보면 이게 뭐가 되어 있어요? 재가 그 모양대로 남아있죠. 얄미워요. 흐트러짐이 없이 그대 모양대로 재가 되어 있어요. 그대로 재가 떨어져 있잖아요. 처음에 죽고 난 뒤에 한 6개월 동안은 그분의 업적이 뭐 어떻고 하지만, 6년만 지나보세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있다, 없다를 누가 정하느냐 하면 살아있는 내가 정해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정하느냐, 내 눈에 보이면 있는 거고 내 눈에 안 보이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보는 내 눈이 한 90년 되면 이 눈도 사라져요. 사라질 시선가지고 있다, 없다를 자기마음대로 판정하는 거예요. 자기가 영원히 살아있으면 모르겠는데, 자기도 이 땅에서 없어질 인간이 같이 없어질 인간보고 있다, 없다를 판정을 내리는 그 의미로는, 이게 제대로 진리 값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못하죠. 다 같이 사라져가는 마당에.

 

이쪽에서 향 피우면 연기 나오고, 이쪽에서 향 피워도 연기 나오잖아요. “나는 내 연기가 너무 멋있다.” “아니야. 내 연기가 예쁘다.” 근데 둘 다 바람 불면 다 날아가잖아요. 허공만 남고 연기는 다 없어지잖아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예수님께서 뭔가 성전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지적을 하실 때, “네 눈에 이 성전이 있어 보이느냐?”라고 이래 물어봐요. 그러면 만져보고, “있네요.”라고 하면 “이 성전이 너는 있다고 하지? 왜? 네가 살아있으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살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죽는다면, 내가 죽기 5초 전에는 있지요. 근데 5초 후에 죽는 인간에게, “성전이 있느냐?”라고 하는 이 자체가, 물음 이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자기의 죽음과 더불어서 그 의미는 취소가 되어야 해요. 근데 인간은 왜 죽느냐? 늙어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죄 값으로 죽어요. 그러면 내가 살아 있으면서 있다 없다 하는 이것이 어디에 포함이 되느냐 하면, 내가 죽는 원인으로서 이게 자꾸 추가가 된다니까요.

 

내가 죽는 이유가 뭐냐, 죄다. 내 죄가 뭐냐, 없어질 것도 있다고 우겼던,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정현선수가 이길까? 페더러선수가 이길까?’라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이게 우리가 죽을 이유에 합류가 된다니까요. 왜,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두느냐 이 말이죠. 테니스 게임에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뭣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제가 핀셋으로 빼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죠? 그게 뭐냐 하면 지고는 못 살겠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게임으로 간주하고 인생을 살아요. 모든 것을 게임으로 간주하고. 지고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남한테 이겨야 된다는 겁니다. 왜 이겨야 되는데? 뭐 거기에 대한 답변은 없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뭐냐, 이기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라고 합니다. 살아남는 것.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살아있으면 이긴 것이고, SNS에서 사라지면 그건 죽은 거예요. 그걸 사회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죽음. 사회에서 나를 요청하지 않을 때,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뭘 하느냐, 구멍이죠. 있음 판에다가 뭘 해야 되겠어요? 구멍을 내야 되겠죠. 빵꾸내야 됩니다. 풍선이 있다. 풍선을 없애는 방법은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되잖아요. 오늘 본문이 뭐냐, 바늘로 콕 찌르는 거예요. “이건 아무것도 없어야 돼!”하고 바늘로 콕 찌르는 겁니다. 그럼 풍선이 퓨우웅~하고 바람이 빠지면서 까불다가 아무소리도 안하고 축 처져있겠죠. 바람이 쭉 빠지겠죠. 구멍을 냈으니까, 이 성전은 구멍 난 성전이죠. 이 구멍 난 성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구멍 난, 또는 상처 난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버립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바꿔요.

 

그러면 이 구멍 난 건축구조물과 구멍 난 예수님의 몸 사이에 많은 논리가 필요하겠죠. 많은 논리가 깔려 있지 않습니까? 그걸 이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많이 어려워요. 어떻게 해서 구멍 난 건축물이 예수님의 창 자국 못 자국으로 이게 바뀌어져야 마땅한지를.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하다. 무다.”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제가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불교는 제로(0)바닥으로 환원하는 것이 불교에요. 그러나 복음은 뭐다? 마이너스(-)에요. 제로(0)을 뚫고, 없는 것보다 뭐가 더 없는 것, 없음보다 더 작은 것. 이 불교사상과 철학적으로 같은 것이 뭐냐 하면 들뢰즈 사상입니다. 들뢰즈 사상. 모든 것은 욕망의 흐름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영(0)보다 더 작은 것, 이거는 고대 헬라사상에도 약간 있어요. 구체적인 것은 아니고 약간 있어요. 무슨 뜻으로 했는지는 불분명한데, 이걸 제가 두 번째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해드릴게요. 영(0)보다 더 작은 것.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나는 헛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이건 복음을 빙자한 불교신자가 돼버려요. ‘이목사님이 교회를 이겨야 된다고? 그럼 교회 안 가면 되지. 돈 들고 기름 값 드는데 왜 가? 교회 안 가고 집에서 인터넷으로만 들어도, 인터넷 깔아놓은 것만 해도 돈 한 푼 안 들고 복음 다 얻고.’ 요런 괜찮은 것이 어디에 있어요?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거는 불교가 된다니까요. 불교가. 모이기에 힘써야 되는데 안 가는 거예요.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데 안 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몸은 세포로 되어 있어요. 세포의 본능이 뭐냐 하면 좋아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요. 이 말 자체가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앞뒤가 맞지 않아요. 정확하게 이렇게 해야 돼요. 받아들였으니까 다른 사람이, 외부의 관찰자가 보기에 ‘저건 좋아하는구나.’ 밀어내니까 ‘저건 싫어하는구나.’라고 하는 게 맞죠.

 

그러니까 좋아한다, 미워한다를 누가 판정 내리느냐 하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관찰하는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또는 다른 외부에서.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자기의 본능에다 자꾸 이퀄(=)시켜버린다니까요. “나는 그 사람이 싫어. 왜냐면 나는 저 타입이 싫은 모양이야.”라고 하는데, 만약에 저 타입 중에서 나중에 한 5년 뒤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내가 버린 패, 버린 화투 패에서 보물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려고?

 

이게 시편에 나오죠. 건축자들이 머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잖아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편118편 22절). 그게 성전인데, 그러면 우리가 성전이 되려면 예수님은 우리한테 싫어버린 바가 되어서 밀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다 나갔다, 복음 전했는데 다 나갔다, 복음 전했는데 나갔으니까 내 복음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복음 전하니까, 복음에 의해서 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해야 돼요. 복음에 의해서 나갈 수가 있다. 그러면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죠.

 

나갔으니까 나는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를 했잖아요. 수요설교 녹취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야곱은 자기가 모르는 원인으로부터 이끌려가고 있는데, 라반은 과거에 자기가 한 것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지금 야곱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동조해서 야곱도 그만 같은 레벨이 되어가지고, “내가 이십년 동안 일했는데 그냥 빈손으로 나가면 되겠습니까?”라고. 노동의 대가를 얻는 이것이 마치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인양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참, 이런 이야기를 무슨 취지로 하는지 잘 모르시겠지만, 두 번째 시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어쨌든 간에 이미 위에는 좋고 나쁜 게 있지만, 밑으로 들어가 버리면 내가 좋고 나쁘다는 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영(0)보다 더 낮은 차원에서 한 일의 결과로 인해서 우리는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근데, 구멍 난 성전이 상처 난 예수님의 몸으로 어떻게 바뀌게 되는가?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
 이미아(IP:122.♡.178.64) 18-01-28 23:16 
광주강의20180126b 마가복음11장 15절(성전속의 죽음)-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인간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서 추상적인 증거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증거, 그러니까 옛날에 성전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그들에게 구원받는데, 신앙생활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그들은 철석같이 믿었죠. 구체적인 증거가 있잖아요. 뭐 골치 아프게 성경을 공부해? 성전이 있는데. 성전 잘 돌아가고. 따박따박 거기다가 성전세부터 해서 십일조까지 내고, 돈만 내고 교회가 잘 돌아가면 그게 곧 자기가, 본인이 잘 되는 거잖아요. 아무 문제없죠. 그러니까 성전을 손댄다는 것은 이거는 용서가 안 돼요.

 

18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예수님이 죽게 된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뭐냐 하면 성전을 건드려서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죽을 때 쯤 해서 성전을 건드려요. 죽을 때 쯤 되어가지고. 이제 성전 건드리면 다 건드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 그들의 모든 행동을 왜 그런 식으로 했는지, 행동이 그렇게 나오는 정신적인 핵심, 정신적인 중심사상이 어디냐, 전부 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유지하는데, 거기에 다 집결되어 있었으니까.

 

거기서 성전이 왜 있어야 되는가를,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의 행동 같은 것이 나왔던 겁니다. 요즘 같으면 뭡니까? 교회, 예배당, 부동산, 그걸 왜 지켜야 되느냐. 그리고 거기에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들은 그게 자기의 직업이니까 성전을 지켜야 되겠죠. 이렇게 구체적인 증거를 찾고자 하는데, 첫째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구체적인 중심부를 왜 이렇게 찾고자 하느냐 하면, 이게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사 간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확고한 게 없잖아요. 어디서 멈추어야 되고 어디서 계속 또 움직여야 되느냐.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평생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있으면 좀 어떠냐, 여기서 푹 눌러앉아가지고 안심 푹 놓고 앉아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는데, 또 무슨 경제적인 바람이 불고 어려움이 오게 되면 또 짐 싸고 가게 되요. 근데 가봤자 거기서 또 언제라도 움직여야 돼요.

 

진득하게 한 곳에 앉아있으면 그게 제일 정서적으로 마음이 안정이 되잖아요. 내 마음이 평안할 때까지, 평안으로 찰 때까지 끊임없이 내가 몸 바치고 몸 둘 그곳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은 멈출 줄을 모르고 움직여나가는 겁니다. 중심을 향하여. 근데 그 중심이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곁눈질해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성전중심으로 모였다 이 말이죠. 성전중심으로 모이면 이거는 ‘이제 내 인생은 이미 확정되었구나.’하고 얼마나 안심을 놓겠어요. 굉장히 기쁘겠죠.

 

그래서 이 성전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이제 십자가 지기 전에 마지노선이라고 해서, 성전에 와서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행동을 과격하게 해버려요. 예수님께서 과격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너희들은 내 뜻과는 완전히 터무니없이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말로가 아니라 그냥 행동으로 보여준 거예요. 폭력적이죠.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나한테 입 떼지 마라. 나는 이렇게 폭력으로 나갈 테니까. 잡으려고 하면 잡고 죽이려고 하면 죽여라. 너희하고는 일말의 공통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걸 행동으로 보면 폭력이 되는 겁니다.

 

부모가 애를 말로 달래줄 때는 자식에게 어떤 여지가 있어요. 엄마하고 좋은 관계의 여지가 있는데, 아무리 나쁜 짓 했더라도 엄마가 몸을, 신체를 때려버린다고 할 때, 그럴 때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결별을 의미하는 겁니다. 결별을. 결별이 되게 되면 요새 애는 이제부터 DNA조사하고 그럽니다. ‘진짜 우리 엄마가 맞나?’ 애 바꿔치기 해서, 남의 애로 키우다가 20년 만에 다시 돌려줬는데 잘못 돌려줘가지고.. 드라마 황금빛 인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를 안 보니 뭐, 그런 내용이 나와요.

 

결국에 평생 인간은 안정된 자기 자리를 찾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이래 보시면 됩니다. 근데 그게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나가죠. 이렇게 나가는데, 구체적인 것에서 모든 추상을 다 끄집어내거든요. 이 구체적인 것을 누가 공격합니까? 예수님이 이걸 공격해버리죠. 공격할 때 뭐냐 하면 이 성전은 원래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곳이다. 아까 이야기한 호수 같은 거예요. 다 변두리에 있어야지, 여기에 누가 들어오면 안 돼요. 추상적이고 정신적이고 뭐든 간에 여기에 채워 넣으면 안 돼요. 텅텅 비어놓는 겁니다.

 

성전은 텅텅 비어있는 곳, 비어있다는 것은 경계선으로서의 성전이에요. 경계선으로서의 성전. 성전건물이 있다는 것은 텅텅 비어있다는 경계를 짓기 위해서 그냥 경계막, 테두리를 치는 겁니다. 테두리를 친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이 안으로, 언약궤 있는 안으로는 들어오면 안 돼요. 바깥에 나가있어야 돼요. 바깥에 나가있는데 바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납니다. 인간을 만날 때,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줘서 성전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복의 혜택을 줍니다. 복의 혜택.

 

지난 수련회 열왕기상에서 했죠. 솔로몬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게 되면 그들은 복을 받는다.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이야기. 복을 받고, 만약에 성전을 기피하게 되면 저주를 받는다. 이거는 이번 수련회 열왕기하에서 했죠. 왕의 임무는 뭡니까? 성전 경계밖에 나가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지킴이에요. “성전에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우리 이스라엘은 누가 알아서 한다? 주님이 알아서 한다는 그걸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이 주님의 할 일입니다.

 

만약에 저 이집트에서 백만 대군이 왔다. 백만 대군이 왔으면 왕이 해야 될 일은 뭡니까? 나가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백만 대군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성전의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백만 대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에요. 유다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에요. 유다나라에 뭐가 있어요? 성전이 있죠. 성전을 향해서 공격하는 것으로 여기고, 성전은 누가 지켜주죠?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지키잖아요. 거기서 그냥 손 떼면 되는 거예요.

 

손 뗄 때에 왕은 무슨 마음이 들어야 합니까? “성전은 내가 지킬 것이 아니고, 주님이 친히 지킵니다.”라는 마음가짐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는 텅텅 비어 있는 마음이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에 적용시키면, “나 구원받았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돼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포기하고, 텅텅 비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면 되잖아요. “나 안 했어요.” 이러면 된다 이 말이죠.

 

참, 구원 받기가 쉽죠. 어떻게 보면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구원받는 것이 너무 쉽죠. 참 쉽죠. 누구하고 게임 안 하면 되는 거예요. 게임을 안 하면 돼요. 테니스 할 때, 상대가 공을 치면 정현이는 그냥 ‘주께서 공을 치는구나. 막아야지.’ 그러면 된다고요. 참, 말은 쉬운데. 말만 쉬운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쉬워요. “나의 중심은 어딥니까? 나는 어디로 이사 가야 됩니까?”라고 하지 말고. 중심에 이끌리도록, 중심은 나의 결심이나 나의 선택이나 나의 의지와 무관함을 나한테 알려주는, 그것이 중심이에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것.

 

그러니까 진짜 복음을 알면 뭐가 없느냐 하면, 지킬 게 있다? 없다? 지킬 게 없어요. 이게 수련회 때 열왕기하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까? 왕은 자꾸 손을 떼라 이 말이죠. 다윗이 인구조사해가지고 사흘 만에 칠만 명 다 날아갔잖아요. 그걸 누가 부추겼습니까?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당신은 가치 있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래서 악마라고 하는 것은 딱 그거에요.

 

뭐가 악마냐, 자기 의가 있으면, 자기 의를 가지고 자꾸 찾아오게 되면 이것은 악마가 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뭐냐, 피+증인이에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피 증인이 되는 거예요. 불교는 뭐가 없어요? 증인이 없어요. 자기가 도도하게 모든 것을 비우고 자기가 포기한, 자기 자신을 증거 하기 때문에 이거는 불교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이근호 신학을 비판한 것을 보면 이거는 꼭 불교신자 같아요. 피 이야기하니까, “너는 네 증인해라. 나는 내증인할게.” 이거거든요.

 

지금 뭘 증언해야 되고 뭘 증거 해야 되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 하게 됩니다. “너만 잘났나?” 이게 안 된다니까요. 이게. 그거는 게임이 되죠. 그거는 내기가 되고 게임이 되는 겁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라는 것은 목요일에 KBS에서 4시에 하는 아이들 노래자랑이에요. 노래자랑. 손을 흔들면서 뽐내면서 하는 것 있죠. 그거는 노래자랑이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그 다음에 너희가 무엇이 되리라?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증인이 될 것을, 복음도 모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다 뭐냐, 복음을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도 닦는 용도로 복음을 자꾸 사용해요. 도 닦는 용도로. 안 되니까 그 다음에 뭐가 맺히고? 한 맺히고. “왜 우리교회는 복음대로 하는데 교회 안 커집니까?” 교회가 안 커지는데 한이 맺혔어요. “우리가정은 왜? 복음을 외치고 복음을 전하는데 집이 빨리 안 나갑니까?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전세이야기만 하고, 왜 집이 빨리 안 나갑니까? 복음 전하는데 좀 도와주시지.” 뭐 이런 것.

 

복음증거 하게 되면 지킬 게 없어요. 지킬 게. 자기과거사를 지키면 안 돼요. 자기 의를 지키면 안 된다니까요. 자기 의를 지키는 것은 마귀가 이렇게 시키는 거예요. 경계선으로서의 건물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것을 다 없애버리죠. 없애놓고, 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막11:17).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성전은 죽음이 있는 곳인데, 무슨 죽음이냐 하면 아들의 죽음이에요.

 

여기서 제가 죽음과 아들의 죽음을 구분할게요.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죽은 게 아니에요. 사람이 아파봐야 안다고 하는데, 사람이 아파 봐도 아픈 걸 몰라요. 왜냐하면 왜 아픈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 욥기에 그게 나오죠. 욥이 고난 받으면서 고난의 이유를 압니까? 고난 받는 인간이나 고난 안 받고 있는 친구들이나, 둘 다 뭘 모르느냐 하면 고난이 어디서 왔는지를 둘 다 몰라요. 고난 받는다고 해서 고난이 왜 오는지를 아는 게 아닙니다. 고난이 왜 오는지를 몰라요. 굉장히 욥은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상당히 억울한 거예요.

 

욥은 나중에 알죠. 고난이, 내가 과거에 한 행적 때문에 온 고난이 아니고, 내가 미처 모르는 다른 원인에 의해서 나에게 고난이 온 겁니다.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 시대에.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자기 자신이 지식을 습득하고 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복음을 안다고 구원받습니까? 구원은 복음으로 구원되지, 내가 복음을 알아 챙기고 그 정보와 지식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만 알면 그거는 도 닦는 불교신자지, 그건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복음을 아는 사람 말고, 복음에 의해서 구원받아요. 복음에 의해서.

 

내가 복음을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도, 이것도 일종의 마귀의 시험에 든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을 알게 되면 지식이 있을 것이고 그 지식이 나를 지킨다. 결국에는 뭡니까? 그 복음이 누굴 지킨다? 나를 지킨다. 이 ‘나’가 왜 들어가야 하는데? 나를 왜 지켜야 하는데? 지킬 게 있으면 안 돼요. 지킬 게 있으면. 우리는 자꾸 지킬 게 있으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전에 뭔가 착한 일이나 바른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문제는 나쁘게 행동할까요? 착하게 행동할까요? 지금 이 문제가 아니고, 뭘 증거 하느냐 하는 겁니다. 뭘 증거 하느냐. 이거 참, 30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진짜 많아요. “성도로서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바르게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쁘게 살면 안 되잖아요?” 나쁘게 살면 안 된다는 그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해요. “그러면 나쁘게 살까요?” 나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시키느냐? 누가? 그 일을 누가 시키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누가 시키느냐가.

 

모든 책임을 주님한테 미루세요. 모든 책임을.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이 책임을 미뤄야 돼요. 그거 못 미뤄서 지옥 간 사람이 가룟 유다 아닙니까? “주께서 밧줄 꼬아서 나무 위에다 매달게 하셨잖아요.”라고 했다면 구원받았을 거예요. 자기 양심에 가책이 되어가지고, ‘스승을 팔아먹고 내가 살아서 뭐하노?’ 자기가 알아서 자가기 죽었다니까요. 근데 그게 사탄이 들어있는 거예요. 자살할 때 아주 계획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자기계획, 자기포부가 있었던 거예요. 마귀가 최종적으로 아주 잘 보여준 거예요.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내가 끝까지 내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을, 내 자신의 증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것이 나의 유일한 존재의미고 그게 보람이라는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 이렇게 살았노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죠. 하나님 보시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노라.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마지막에 그랬잖아요. 수족관의 물은 누가 채웠느냐? 수족관의 물은 누가 채웠어요? 금붕어가 뻐끔뻐끔해가지고 자기가 채웠어요? 누가 채워줬어요? 이 찬 공기 누가 줬습니까? 북극에서 내려왔다고요. 북극을 누가 밀어냈는데요? 귀신입니까? 주님이 하셨잖아요. 왜 내려왔어요? 얼어 죽으라고. 얼어 죽으라고 내려온 거예요.

 

여름철 같으면 밀양 세종병원에 난로를 피웠겠어요? 안 피우잖아요. 뭐 난로 피워서 불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간에 간호사 탈의실 위층에서 지지직하면서 불이 났다는 거예요. 여름 같으면 그렇게 난로피우고 했겠습니까?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추우니까 불을 피웠죠. 왜 추워요? 북극성 찬 공기를 누가 밀어냈죠? 하나님이. 그럼 세종병원에서 37명이 죽었다면 누구 탓인데요? 하나님께서 하신 거죠. 그 정도도 못합니까? 물론 그걸 증거 할 때 기분 나쁘게 증거 하면 좀 수상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면 됐잖아요. 하나님께서 그만 살라고 죽게 하신 거예요. 지지직~해가지고 갑자기 전기가 합선됐는지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불이 나가지고 감기 걸린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죽었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제때에 죽은 거예요. 왜냐하면 참새도 주의 뜻이 아니면 안 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죽더라도 왜 죽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이 빈자리에다가, 아들의 죽음을 여기다가 씌우는 겁니다. 이게 구약의 어린양의 피에요. 어린양의 피를 묻히는 그 행사, 이벤트 하는 곳이 어디냐 하면 성소고 그게 성전이 된 겁니다.

 

내가 죽는다고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아드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죽을 때, 비로소 죽음의 의미도 그 분이 몰고 와서, “이게 바로 죽음이야,”라고 비로소 이야기해준 겁니다.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하다가 그냥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내가 이거 복음이라고 하지만 복음 믿는다고 진짜 구원받나? 피 믿는다고 진짜 오늘 밤에 천국 가겠나?’ 가보겠다고 노력은 하겠지만, 간다고 믿으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진짜로 가는 것하고 마음 편한 것하고는 다르거든요. 진짜로 가는 것하고, 가면 참 좋겠다는 것하고, 이거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러면 그 구체적인 어떤 증거를 뭐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바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십자가가, 십자가 사건이 눈앞에 보인다 이 말이죠. 십자가 사건이 뭐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건이잖아요. 사도바울은 그거부터 풉니다. 역사와 묵시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에서는 복음인데, 그 복음은 어디에 집대성되어 있어요? 십자가사건이에요. 십자가사건이 있는 것을 봐서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받고 부활된다는 것은 명백하게 확실한 거예요.

 

문제는 십자가 피에다가 내가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십자가 피가 그만큼 고귀하고 확실하다고 아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영,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십자가 영을 안 받아버리면 도 닦는 사람이 돼요. 십자가도 믿고, 언약도 믿고, 좋은 것은 다 긁어모아다 놓고, 그것을 어떻게 한다? 지키려고 해요. 지키려고.

 

치매 걸리기 전에 정신 바짝 차려서 일기장에 막 써놓고, 치매 걸려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 안 되니까, “치매 걸려서 예수님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거 생각하지 마세요. 정신 바짝 차려서 예수님 믿었습니다.” 이런 것을 막 써놓고 했는데, 치매 걸리면 그 써놓은 일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다 잊어버려요. 소용없어요. 계속 자기 자신을 자꾸 사수하려고 하고 지켜내려고 하는 거예요. 지켜내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부터는 자유가 아니고 항상 벌벌 떨면서 들어와요. 추워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동 똑바로 안하고 여기서 갑자기 탈선을 해버리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효가 되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 구원 못 받잖아.”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것을 여러분이 조금 지루하게 느끼셨겠지만,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가 봅시다. 첫 번째, 인간들이 자꾸 성전을 외치고, 성전에 가까이 가려고 하고,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눈에 보이는 성전과 함께 있음으로서 이걸 고정화시키고 싶은 거예요. 중심, 구심점, 중심점으로 삼고 싶은 거예요. 왜? 누구 좋으라고? 자기들 좋아라고 한 거예요. 나한테 유리하면 받아들이고 나한테 싫으면 밀죠. 나를 안정하게 해주는데 왜 이것(성전)을 밀어 내요? 받아들여야죠. 나를 안정하게 해주는데.

 

그러니까 이 성전, 요새 말하면 교회죠. 이 교회를 안 다니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겁니다. 만약에 해외여행 갈 때 기도한다고 하면 그냥 기도합니까? 우리교회를 향하여 기도하죠. 불교신자, 천주교신자들이 하는 거죠. 심지어 이슬람에서는 자동적으로 나침반 들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하여 하잖아요. 그게 얼마나 마귀적이에요. 주님께서 그 메카를 완전히 폭탄 터트려서 없애버린 거예요. 그 없애버리는 행동이 오늘 본문의 이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구심점을 찾는다. 이걸 주님께서 모를 리가 있어요. 아시고, 그걸 완전히 공백으로 비워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비어있는 곳을 너희들의 정신으로 채우겠다는 말은, 너희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내가 나를 지켜서, 지킨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는 그 종교적인 심보를 그대로 노출시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으니까 뭐 의자만 있으면 되겠네. 기도하는 게 또 나옵니다. 그럼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면, 주께서는 그 성전을 보존할 필요가 있겠어요? 안 그러면 로마군대가 와서 없앨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러니까 성전을 불태워줄 필요가 있습니까?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하는 집이라면? 당연히 지켜줘야죠.

 

근데 로마를 통해서 뭘 없애버립니까? 완전히 성전 자체를 불태워서 없애잖아요. 로마가 뭐냐 하면 짐승이에요. 짐승. 바벨론의 변형체가 로마거든요. 바벨론, 메대 파사(페르시아), 헬라 마케토니아(그리스), 로마. 로마가 왜 네 번째 짐승이냐 하면 예수님이 마지막 만나는 시대가 로마시대거든요. 예수님을 재판한 자가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아닙니까? 뭐든지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지 말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모든 정답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고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자살한다고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안 죽어도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뭐다? 죽음이라는 것은 바로 아버지께 버림받는 것. 저주죠. 다른 말로 하면 관계단절입니다. 관계단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이 말은, 인간이 사는 세상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죽음이에요. 그 자체가 죽음이라고요.

 

에스겔 37장에 나오는데, 우리는 그 자체로 그냥 마른 뼈에요. 그냥 마른 뼈에요. 그냥 먼지고. 그냥 흙이고. 그런 거예요. 뭐 살아있는 것 같지만 나이 들어보세요. 뼈 되고, 흙 되고, 먼지 되고, 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돼요.

 

성령께서 십자가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죽은 자였는데, 죽은 자 속에다가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담으셨으니까, 죽은 우리에다가 예수님의 피를 집어넣으셔서 우리의 죄를 뭐로 바꾸셨습니까? 의로 바꾸시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거예요.

 

영화 <메이즈 러너>라는 영화가 있어요. 스무 살 미만의 애들이 계속 도망 다녀야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져가지고 모든 인간이 좀비가 되는 그런 세상이 왔어요. 그런 세상이 왔을 때, 그쪽, 위키드 연구실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아직 젊은 피에다가, 그러니까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젊은 피(면역능력자)의 수액을 뽑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면역주사를 놓게 되면 죽을 사람은 죽고 좀비 될 자는 좀비가 되지만, 살아남은 자는 다시 한 번 인류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그 테마 입니다. 그 테마가 메이즈 러너인데, 이게 4편까지 나와야 하는데 장사가 안 됐는지 1편, 2편, 3편까지 하고 끝났어요.

 

그 3편의 마지막을 보게 되면 오직 뭐로만 구원을 받느냐 하면 오직 피로만 구원을 받아요.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그 피, 오직 주인공 한 사람만 이길 수 있어요. 걔 피만 있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외국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외국영화는 기독교적인 냄새가 있어요. 그런데 <신과 함께>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 이거는 부모한테 효도하고 착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메이즈 러너는 오직 피를 보고 찾아가는 거예요. 왜? 자기가 죽은 자, 좀비니까. 자기가 죽은 존재니까.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그 피. 죄를 이길 수 있는 그 피.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렇게 영화대로 한다면 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영화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너는 왜 좀비가 안 되어야 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없어요. 남은 좀비가 되어도 나는 좀비가 왜 안 되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답변이 없어요. 성경에서는 메이즈 러너 같은 그런 게 없고, 구원받아야 하는 그 이유가 없어요. 다 죽었어요. 다 죽었는데, 성경은 인간구원중심이 아닙니다. 누구 중심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가 되게 하시기 위한 중심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예수님의 피를 집어넣어서 인간 속에 언약 완성이 퍼지게 만들었어요.

 

모든 언약 완성이 퍼지게 되게 되면, 언약은 율법이거든요. 율법은 우리에게 뭐를 주느냐 하면 죄를 주거든요. 죄를 주는데, 죄 패를 뒤집어버리면, 죄가 있는 것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 반대편에 의가 있다고요. 죄가 제대로 들어오게 되면 그거는 의가 제대로 들어온 게 돼요.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죽었다는 말은 죄에 푹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죄에. 마치 알코올에 뱀이 품 담겨져 있으면 그게 무슨 술이 됩니까? 뱀술 되잖아요. 뱀술. 죽은 뱀술이 되죠. 우리는 죄 속에 푹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인이 돼요.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우리아 장군까지 죽였잖아요. 간음이나 살인하고 난 뒤에, 그것도 어떤 자격으로? 왕의 자격으로 하고 난 뒤에 나단선지자가 왔을 때에 그 다윗이 놀라운 것을 발견했죠. 한 번도 자기가 누군 줄 몰랐던 거예요. 한 번도. 왜냐하면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호숫가의 집처럼, 다윗은 어릴 때부터 누굴 자꾸 곁눈질해요?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나,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나, 같은 인간들끼리 곁눈질해서 거기서 어떤 이데올로기, 율법 지키면 구원받는다. 의롭게 된다는 뭐 이런 것을 습득한 거예요.

 

지금도 한국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있는데 교인들끼리 곁눈질하잖아요. 저 사람처럼 기도하면 되고, 이 사람처럼 찬양하면 되고, 헌금은 저 사람처럼 하면 된다고 하잖아요. 복음 전하는 오목사님이 와가지고, “이거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상처 난 몸이 교회입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어렵도다!” 어렵죠. 왜 어려우냐 하면 본인들이 평생을 내 것, 내 것 지키는 식으로 살아왔거든요. 잘 지키면 남한테 승리하는 거예요. 이기는 거예요. 이기면 결승에 올라가서 몇 등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게임에서 지기 싫은 겁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껏 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계속 지켜줘야 해요. 함부로 살지 않았고, 탈선하지 않았고, 바리새인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아니했다는 말을 왜 합니까? 지금 게임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바리새인은 옆에 세리 붙들고 게임하고 있는 거예요. 랭킹 56위에게 나는 지지 않았는데 랭킹 2위가 되고 뭐 이런 것. 결국 인간은 서로 곁눈질 하고 서로 견제하면서 살아온 겁니다. 어릴 때부터 다 그래 와요. 어릴 때부터 부모가 맴매하면서 “아이고 뉘 집 애는 안 그러는데 너는 왜 이렇노?” 맨날 뉘 집 애는 어떻고 뭐 이러고.

 

남편은 아내보고 옆집 마누라 좀 본받으라고 뭐 이렇게 하고. 옆집은 아침마다 국에다가 따박따박 밥해서 바치는데, 우리 집은 콘프레이크 우유타서 먹으라고 내놓으니까 좀 본받으라고 하죠. 그러면 그 아내도 가만히 있지 않죠. “저 집 남편처럼 돈이나 벌어와 봐라. 내가 니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지.” 그때는 니가 돼요. 니하고 싶은 대로. “으이그 니 땜에 내 인생 조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 참고 있는 줄 알아라.” 뭐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비교고, 지키기고, 경쟁이고. 여러분 힘들지도 않습니까? 힘들어도 우에 합니까? 다른 재주가 없는데. 다른 재주가 없어요. 그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걸 대리만족한다고 드라마 보면서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아직까지 지금 아들의 죽음이 성전 속에 있다는 그 이야기는 안 했어요.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다가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것이, 이 성전에서 제물이 죽어서 피를 내는 그것을 보여주는 계기로서 성전이라는 것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보여주는 계기로서. 그래서 성전에 일반인들은 못 들어와요. 왜냐하면 들어오면 죽습니다. 일반인들은 아직까지 젊은 건강한 자라고 할지라도 이쪽 성소에 들어오면 죽습니다. 성소에 들어오면 죽는다는 말은 이미 이쪽 세계는 무슨 세계다? 이미 죽어있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죽어있는 세계.

 

죽어있는 세계인데, 나이 들어서 죽어요. 나이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나이 들기 이전부터 이미 죽어있어요. 그럼 죽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됩니까? 여기에 들어오면 죽는 이 자리(성소)에 어린양이 매일같이 죽어나가고, 소가 죽고 염소가 죽을 때, 누가 죽입니까? 하나님이 죽이잖아요. 하나님이 이쪽을 이렇게 죽인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소 바깥에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죽일 수도 있는데, 대신 이쪽 제물을 죽임으로서 유보시키는 거예요. 바깥 인간들을 살려주는데 영원히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유보시킨다니까요.

 

유보시킨 동안에 뭘 발견해야 합니까? 성소에서 죽어가는 제물, 소와 염소와 양의 죽음과 자기의 죽음이, 관련성이 있음을 그들은 발견해야죠.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그냥 죽이시는 분이다. 왜 죽이느냐? 죽어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그걸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하는데 내 대신 다른 양이나 염소나 소를 죽임으로서, 너는 내가 보기에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그 관계가 무슨 관계냐 하면, 이게 바로 언약관계에요. 언약관계. 하나님의 약속관계에요.

 

이걸 누가 알아봅니까? 아무도 못 알아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걸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어느 자리에, 성소에 있을 분이 어디로 갑니까? 바깥으로 나가요. 성소 바깥에, 세상으로 나갑니다. 세상에 갔다가 다시 어디로 들어갑니까?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죽어버리죠. 치워라! 비워놓고 그 빈자리에 누가 끼어들어가요? 예수님 본인이, 본인이 들어가요. 본인이 들어갈 때 어떻게 들어가느냐 상처 입은 몸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시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세례요한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어린양이죠. 어린양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도착지점, 마감되는 지점이 어느 지점이에요? 어린양은 어디에서 죽어야 합니까? 성소에서 죽어야죠. 성전에서 어린양이 죽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죽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짜 성전, 예수님의 죽음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겁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냐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의 전.

 

그러니까 성령의 전은 어디에나 있다가 아니라 아무 데도 없는 곳이에요. 오직 성령을 주신 그 자리에서만 이게 성전이 되고 성소가 되는 거예요. 처소가 되죠. 그걸 처소라고 하는데,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되고,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되고, 성령이 우리와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안전처를 원한다. 쉘터shelter라고 하거든요. 피난처, 도피처. 내가 살 수 있는 영원한 곳.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 자체는 뭐냐, 누굴 지키는 거예요? 나는 나를 끝까지 지켜야 된다. 나는 나를 끝까지 살려내야 된다는 책임감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지켜야 할 이유나 권리가 있습니까? 그걸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연구하고 나를 자꾸 분석하니까, 나는 나 잘되는 것만 생각하지 내가 못되는 것은 아예 그 분석 자체에서 빼버리는 거예요. 자꾸 이걸 제켜버리는 거예요. 내가 저주받는 것, 이런 것은 아예 안 들은 걸로 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영이 왔다. 십자가 사건이 터질 때, 딱 보니까 내가 아무리 나를 지켜도 부질없는 짓인 거예요. 결국은 나이 90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힘없다고 해서 죽어버리면 내가 없어지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하셨죠. 영원히 안 없어지잖아요. 없어지지 않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죠.

 

이 아들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죽을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바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바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은, 이미 성령 받은 이 사람은 영원히 뭐가 된다? 아들인고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지금부터 영원토록 절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뭐 와야 말이지.

 

제가 수요일에 뭐라고 했던가요? 갈라디아서 4장하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더 이상 할 게 있다? 없다? 성령을 오라고 해서 왔습니까? 알아서 와놓고,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를 상속받아요. 상속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상속? 아버지가 부자면 자식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아버지의 재산 몽땅 인수받는 것. 천국을 우리한테 인수해주는 거예요. 왜?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주님과 더불어 인수인계 받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관건이 성령이 오느냐, 안 오느냐가 관건이잖아요. 근데 이미 성령이 왔으면, 추가해서 우리가 할 게 있어요? 없어요? 할 게 없죠. 이걸 다른 말로 해봅시다. 이제부터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윤리와 내 도덕성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착한 나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착하게. 그 착하게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수상해요. 내가 보기에는. 진짜 수상해요. 뭐지? 도 닦나. 도를 닦아? 사람이 도를 닦으면 그냥 닦는 게 아닙니다. 곁눈질을 하죠. 호숫가에 있는 집들. 옆집을 보죠. 오늘 제목을 호숫가에 집이라고 할까?

 

저 사람이 기도 두 시간 하면 나는 세 시간 하는 거예요. 도 닦을 때 그냥 하는 법이 없어요. 모델이 있어요. 저 사람이 어떻게 기도했길래 갈수록 부자가 되고, 나는 어떻게 기도했길래 집도 안 나가고. 기도도 안 했겠지만. 다른 집은 내놓자마자 웃돈 더 주고 팔았는데, 이거는 뭐 이천 만원 깎아도 안 나가고. 집 보러 와도 이상한 사람만 와서 보고 가고. 항상 우리는 모델이 있다니까요. 모델이. 모델이 없는 생각을 안 해요. 저 사람처럼 돼야겠다. 저 가정처럼 해야겠다. 모델이 있다는 말은 내 인생은 누가 지킨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내가.

 

그러면 그것은 자기 의가 되고, 자기 의가 되면 마귀한테 계속 시달려야 해요. 시달리게 되면 뭐가 없습니까? 감사가 없고 고마움이 없어요. 여러분 감사와 고마움이 없으면 이거는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억지가 돼요. 억지가.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고, 황공무지로소이다. 다 예스고 아니요, 라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안 되면 그 일 하지 마세요. 인간이 착한 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해야 착한 일을 해요. 그러니 그 억지가 얼마나 자기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조금 더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시편에 보게 되면 반드시 기도는 성소에서, 또는 성전에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뭐가 있느냐, 피가 있는 곳이거든요. 시편은 성전+다윗가문이 결합이 됩니다. 이게 시편이에요. 시편은. 시편은 대부분 무슨 노래냐 하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누가 짓습니까? 시편의 작사가가 누구에요? 뭐 박건호입니까? 박건호 라는 모닥불, 잊혀진 계절을 작사한 유명한 작사가가 있어요. 대부분의 작사가가 누굽니까? 다윗이잖아요. 다윗.

 

다윗이 성전에 올라갈 때 그냥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올라간 줄 알아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올라간 거예요. 자기가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다윗 언약에 의해서 성전과 접근이 돼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그러면 다윗언약이 살아있으면 성전도 살아있는 셈이 돼요. 그래서 시편은 예언요소들이 많이 있어요. 그때는 시온, 시온성, 시편에 나오는 시온, 시온성이 뭐냐 하면 다윗 때 세운, 예루살렘을 말하거든요. 모든 시편은 성전을 높이기 위한 찬양이에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찬양에 대해서 했죠. 최진사댁 셋째 딸. 그때 녹취하신다고 참 쉬웠죠? 인터넷에서 가사만 베껴 쓰면 되니까. 또 담뱃가게 아가씨. 전부 다 이게 서사구조가 아닙니까? 서사구조는 승자입장에서 이미 느긋한 마음으로, 이제는 더 이상 변동되지 않는 운명, 내가 변동해도 절대로 변동이 안 되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는, 다른 자리에 앉아서 찬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시편이에요. 시편. 시편에서 성전이 나오는 거예요. 기도하는 집이라고.

 

그러면 이 시편대로 기도하는 집이 결국 누구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겁니다. “헐어버려라. 46년 된 것 헐어버려라.” “그러면 성전이 없잖아요?” “내가 사흘 만에 지을게.” 그러면 이 소리 듣고 제자들은 뭡니까? 자, 제자들은 그때 성령받기 전이거든요. 사흘 만에 짓는다고 하니까,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구심점을 또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 성전만 붙들면 나는 구원받는다.’

 

근데 이 성전을 사흘 만에 지어야 한다면 알파고가 등장해야 해요. 알파고. 알파고에다가 십사만 사천 분의 작은 요정이 동원되어야 해요. 알파고가 설계하고 요정들이 노가다 해가지고, 하루 지나면 기초공사 끝. 이틀 지나면 건물 끝. 사흘째는 드디어 축하공연. 인간은 생각하는 게 그거밖에 안 돼요.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게 뭡니까? 항상 출발점이, 계시가 자기 몸부터 시작해요. 자기 몸부터.

 

성전을 지을 때 옛날에는 어떻게 지었습니까? 인간의 몸이 일했죠. 목수를 동원해서, 벽돌 구워서, 턱턱 받치고 하는 일을 한 네 시간 하면 새참이 오죠. 컵라면 먹고 한 두 시간 자고 일어나서 다시 하고. 항상 그걸 생각하겠죠. 46년 동안 그렇게 착실하게 지었는데, 어떻게 쓸어버리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느냐? 이거 뭐 속도를 빨리 하면 되겠어요?

 

인간들은 출발점이 자기 몸이기 때문에, 자기 몸의 그런 아이디어가 죄에서 나왔고, 그게 오류라는 생각을 아무리 해도 그걸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이 와야죠. 성령이 오게 되면 오류를 아는 것이 아니고 오류밖에 나올 게 없는 몸으로, 나를 지키는 식으로 구원받고자 쓸데없이 마귀한테 농락당했고, 앞으로 몸이 있는 이상은 계속 농락당할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성전을 향하여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라 이 말이죠.

 

그럼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주여,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망하게 된 죄인입니다. 나는 이미 죽은 인간입니다.”라고 그렇게 기도할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있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나오는 성전입니다. 참 쉽죠. 참 쉬운 거예요. 십자가에서 온 영이 와버리면, 십자가가 꽂혀버리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중심을 찾을 필요가 없이, 중심되라고 이미 나를 뽑아다가, 중심 되는 그 자리에다가 나를 섞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게임할 필요도 없고. 구태여 내 것을 지킬 필요도 없고. 내가 지켜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요, 우리는 치매 걸리면 실패해요. “예수가 누군데요?” 이러는데요. 지킬 필요 없어요. 성령주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드러내게 하시고, 치매 걸리는 것도 죄 값으로 마땅히 치매 걸려야 하죠. 치매 걸리더라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이렇게 감사해야 되고, 늘 고마워해야 되는데, 우리는 자꾸 어떤 모델을, 괜찮은 모델을 선정하는 이 죄악 된 본성이 또 발휘됩니다. 주여, 이것까지 이미 어린양의 피로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서, 되풀이해서 늘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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