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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00:10:54 조회 : 475         
바꿔치기 18062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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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06-24 15:43 
광주강의20180622a 마가복음12장 18-27절(바꿔치기)-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18-27절.

 

1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19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0절,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절,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절,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절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이래 되어 있죠. 부활은 원래 없는 거잖아요. 부활은 사두개인들만 없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상에서는 부활은 원래 있을 수 없는 겁니다. 태어났다 죽으면 그만이에요. 왜냐하면, 부활이 있다면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 돌아다녀야 돼요. 너무나 단출한 이야기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증조부가 돌아다니면 누가 부활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돌아다닌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이 없는 것이 맞잖아요. 오히려 부활이 있다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로 왔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하느냐 하면, 어설프게 예수님 쪽에 서면 안돼요. 사두개인 편에 서서, 그쪽에서 봤을 때에 예수님은 얼마나 구라를 떠는지를 봐야 해요. 예수님이라는 그 분이. 부활이 없는데, 조상가운데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사두개인은 필히 그 근거를 제시하라고 할 거예요.

 

근데 그 근거가 말이 안 됩니다. 죽고 난 뒤에 살아있으면 따로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어요. 눈으로 보면 되니까. 죽기 전에 살아있는 이 무리에서 무슨 증거를 끄집어낸다? 부활의 증거를 끄집어낸다는 이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에요. 공동묘지에서 끄집어내면 돼요. 근데 공동묘지가 아니고 지금 안 죽어 본 사람들 중에서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이건 희망사항일수도 있지만, 희망사항은 근거가 되지 못하잖아요. 근거가.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자기가 예수님의 편에 있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좋은 분인 줄 알고 그냥 일단 챙기고 보자는 식이죠. 그러나 성경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 반대한 사람이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그 시대에 반대할만해서 반대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안 믿을만해서 안 믿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도 안 믿을까요? 바리새인들 자기들은 철석같이 여호와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믿되 누구는 못 믿겠다? 예수는 영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래야 논리적인 일관성이 수립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이거는 일관성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데 거기에 하나 더 플러스가 된다, 이거는 그 시대의 입장에서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 중의 하나에요. 하나님을 안 믿든지, 예수님을 안 믿든지 둘 중의 하나해야 해요.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었잖아요. 사울이었을 때 누굴 믿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죠. 하나님에 대해서 그냥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라는 그 사람의 행동하나하나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충성을 다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순종을 다할까? 그것이 본인의 사명이었고 자기존재이유였어요. 존재이유. 내가 여기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존재이유다 이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예수님의 자리는 없는 거예요. 현재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리는 없는 거예요. 이래야 논리의 앞뒤가 맞는 겁니다. 사울 자기가 믿던 그 하나님 때문에 누구의 적이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내가 예수님의 적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 쪽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고 적이 돼버린, 자기가 섬기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섬기던 그 하나님과 이게 대척관계가 되어 있죠. 서로 충돌되는 관계에 있죠. 사울은 뭘 경험했느냐 하면은, 충돌을 경험하고서 비로소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천국의 백성으로 이 지점에, 이 지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충돌의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충돌을 통해서.

 

나는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4). 그냥 예수가 아니고 핍박하는 예수를 믿게 된 거예요. 핍박을 의도적으로 하던 안 하든 핍박이 되었다는 그러한 사실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고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자기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제대로 알게 된 겁니다. 나는 어느 대학 나왔다가 아니라 나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는 게 죄에요. 사는 게 죄. 이 땅에 살아있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살다가 죽은 사람도 죄가 돼요. 죄 짓다가 죗값으로 죽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거는 생각지도 말아야 되겠죠.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살아있으면서, 사는 게 죄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아무리 연구하고 부활의 소망, 소생의 희망을 가져봤자 그거는 진짜 부활하고는 전혀 안 맞는, 충돌되는, 그 자체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어도 죄고, 부활을 안 믿어도 죄고. 부활을 안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이고,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꼼수가 되는 겁니다.

 

이래나 저래나 부활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죄인 된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식겁하고 달려들었죠. 지금 여기 와서 주께서 그냥 돌아가시면 십자가마을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식이죠. 전부 다 예수님 때문에 모였는데, 죽어버리면, 자기의 청춘을 바치고, 모든 삶을 바치고, 부름을 받았다는 그런 하늘나라의 기대가 가득 차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잘 되어야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을 것 같으면, 까짓것 로마 군병 같은 것은 손보면 한꺼번에 다 날아가게 되어 있고, 그러면 이 나라, 옛날에 선조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이 제대로 꽃 필 수 있는 희망의 고지가 그 앞에 있어요. 다 왔어요. 다 왔다 이 말이죠. 살아계셔서 옛날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강력한 힘으로 로마를 쫓아내고 다시 옛날 다윗, 솔로몬시대처럼 융성하게 되면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구약성경에 있는 문자적인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따라다니는 거예요. 다 왔는데, 이참에 죽어버리면 이거는 목표가 좌절되는 거거든요. 죽는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자들의 현실 속에서 죽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살아있는 자들에게 끼어들지 못하잖아요. 끼어들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접수할 수 없죠. 죽어버리니까. 이 세상에 끼어들 수 없다면 이거는 일종의 추방된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을 베드로는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서 별 볼일 없이 추방된다.” 그러니까 누가 다급했느냐 하면 베드로 자기가 나서서 지켜주겠다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죠.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척관계에,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두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등장한 것은 참 좋은 질문을 한 거예요. 우리가 뭔가 질문하고 싶은데,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못한 질문을 이 용감하신 사두개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마구마구 질문을 해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부활의 의미라는 것은 뭐냐 하면, “너가 왜 꼭 신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가 있는가?”라고 묻는 거예요. 니가 꼭 신자 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만약에 어떤 사람보고 “당신은 신자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예 아니에요. 신자가 아닌 것을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이러면 되는데, 신자 아니라고 하면 “내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 읽고 했는데?”라고 하면서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꼭 신자 되어야 해.’라는 이런 욕구 같은 것이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는 게 죄죠. 사는 게 죄인데, 이 죄가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자꾸 설치게 돼요. 인간이 설치게 되면 설친 그 모든 것이 뭐냐 하면 내 위주의 세계가 따로 마련됩니다. 내 위주의 세계가. 지금 tv에서 월드컵 하잖아요. 메시 이야기를 어떤 여자아나운서가 소개를 하는데, 메시 이야기를 하면 지금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몰라요.

 

메시가 아르헨티나 대표선수로서 세계에서 축구를 제일 잘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여자아나운서가 “저번 게임에서는 못했지만 이번 게임에서는 메시가 아주 잘할 겁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에, 그걸 듣는 순간, 어떤 아주머니가 축구를 몰랐는데 그 방송에서 메시라는 축구선수 이야기를 듣는 동시에 메시가 축구를 잘하나 못하나가 나의 세계가 된다니까요. 인간에게는 나의 세계가 돼요.

 

엄마가 자녀들에게서 스마트 폰, 컴퓨터 다 없애버리면 그 애들은 컴퓨터게임이라든지 스마트 폰 게임을 아예 할 줄을 모르죠. 아예 없애버렸으니까. 간혹 보면 그런 가정들이 더러는 있어요. 세상에 있는 학교에 안 보내고 대안학교에 보내가지고, “세상 썩었다. 진화론 안 가르치고 우리는 창조론 가르친다.” 해가지고, 모든 걸 다 끊어버리고 tv도 없이 득도하듯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애들에게 일체 안 주는 그들의 세계는 무슨 세계냐, “컴퓨터게임이 뭐고?” 이래 되죠.

 

그런데 우연히 옆에 애들이 컴퓨터게임 하는 것을 보는 순간, 그 게임이 자기세계 속으로 쏙 들어온 거예요. 자기세계 속에.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부모가 원하든, 자녀가 원하든 계속 살아가면서 주변의 환경에 접속되는 동시에 그 환경은 자기세계를 구성하는 자기위주의 환경으로 이미 접속이 되어 있습니다. 컨택contact 접촉되게 되어 있어요. 연결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많은 세계 가운데 내가 80, 90살면서 접속한 세계가 있는 이상, 그 접속한 그 세계에서는, 이미 접속한 세계가 내 위주의 세계기 때문에, 잘 들어보세요. 내 위주의 세계죠.

 

그러면 이 세계가 있는 한 나는 쓸쓸하게 실패자로 죽을 수는 없는 겁니다. 내 세계가 다 끊어져나가면 나는 자살하면 돼요. 그때. 뭐 기분 좋아서 자살하는 사람 없잖아요. 내 뜻대로 되어서 자살하는 사람 없어요. 내 세계가 다 안 될 때에, 메시도 뭐 두 번째에서 뭐 좀 해볼까 했는데 엉뚱한 데 차가지고 동네축구보다 못한다고 욕 되게 얻어먹고. “메시도 집에 가라. 동네축구야!”라고 비난을 받았죠.

 

메시의 세계가 뭐냐 하면 수억의 패를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이쪽 반대로 돌아서면 그런 메시가 또 뭘 했느냐 하면 남의 나라에서 세금을 탈세하는 혐의로,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로 걸린 거예요. 메시가 한 푼도 세금포탈한적 없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또 걸렸어요. 자칫하면 메시가 자살할 수도 있는 건데, 자살까지는 안 나가겠지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내 세계가 형성되어 있는 이상은, 내가 형성되어 있는 세계에 나는 종으로서, 이 세계를 위해서라도 나는 거기에 매여살 수밖에 없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세계는 누가 주느냐, 누가복음 4장을 한 번 봅시다. 누가복음 4장 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뭡니까? 천하만국을 다 보여줬죠.

 

그렇게 한 뒤에 약속이 뭐냐 하면, 6절에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했다 이 말이죠. 어떤 인간이 태어날 때 자기는 어떤 한 가정에 소박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두 살, 세 살이 되면서 자기고유의 자기만의 세계를 계속 형성해나갔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형성한 그 자료들을 누가 제공했냐 이 말이죠. 그거는 모르죠.

 

백 살, 천살을 살아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때는 지상에서는 모르고, 평면에서는 모르고, 위로,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해요. 누가복음 4장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잡아당기는 겁니다. 잡아당기니까 뭐가 보입니까? 현재 악마가 갖고 있는 모든 게 다 보이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천하만국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천하만국의 영광. 인간은 그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들이 수준이 있기 때문에 오늘 강의를 좀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이거는 뭐 쉽게 할 수가 없어요. 천하만국을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이걸 세상신이라고 했죠. 악마가 쥐고 있죠. 악마가 쥐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걸 창세기 3장에서 보면 누구하고 누구하고 계약해서 이걸 악마가 쥐고 있습니까? 창세기 3장에 누가 나옵니까? 아담이죠. 그러면 악마가 쥐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 세상 인구가 72억에서 75억이라고 하는데, 인구가 빨리 불어나니까, 이것을 각기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 성경말씀이 풀리지를 않아요.

 

하나로 뭉쳐야 됩니다. 뭐로 묶을까요? 아담으로 묶어내야 하죠.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욥기 31장 33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타인은 히브리어에 보면 아담이죠. 욥은 자신과 아담을 동일시합니다. 욥이.

 

욥은 친구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알아요. 근원적인 것을. 친구들은 뭐냐 하면 출발점이 각자의 사고방식, 나로부터 출발해요.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신자가 되어야 하고, 성도되어야 된다는 생각부터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처럼.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죠.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너는 하나님을 안 믿어, 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이 화를 낼 거라 이 말이죠.

 

바리새인보고 “너는 나중에 가난하게 될 거야.” 이러면 보통은 기분 나쁘지만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안 건드렸어요. “뭐, 살다보면 가난하게 되지.” 이런 식으로 하는데, 너는 아예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해버리면 바리새인은 화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소의 모든 설교가 자꾸 내용이 뭘 담고 있는가 하면은, “너희들은 신자가 아니야.”라는 뉘앙스를 계속 풍기면서 말씀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신자가 될 가능성에 넣어주게 되면, 예수님의 지시를 받았던 그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그렇게 욕을 하지 않죠. 벌써부터 분리를 안 시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그것이 “너희들은 마귀새끼다. 마귀자식들이다.” 이렇게 해서 자꾸 바리새인 쪽과 자기 쪽과 떼어놓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해요.

 

그러니까 예수님 보기에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악마가 알거든요. 악마가 있는 세계 안에 있는 인간들은 이거는 필히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전부 다 아담이 되어야 해요. 아담이. 어떤 아담이냐 하면, 범죄 하기 전의 아담이 아니고 범죄 한 후의 아담이 되어야, 악마의 지배가 최초의 언약에 합당한 조건을 구성하는 겁니다. 합당한 조건을.

 

출발점을 이거만 생각하면 돼요. 내가 신자 되겠다는 이것도 뭐가 된다? 이게 악마의 지배 밑에 있는 인간들의 하나의 행세, 속성이라 이 말입니다. 내가 신자 되겠다는 것이.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뭐냐 하면 부활 안 믿어도 충분하게 신자다 이 말입니다. 자기들은. 부활이 없다 하는 거예요. 부활 같은 것은 생각 안 해도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충분한 신자가 되는 거예요.

 

사두개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약에 부활까지 고려해서 이걸 믿어버리면 사람들에게 자기들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파할 때에 설득력이 반으로 뚝 떨어져버리죠. 왜냐하면 부활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부활의 증거가 없잖아요. 그들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실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현실 속에서 뭘 끄집어내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증거들과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근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만약에 부활이 있어버리면 이미 죽었던 사람이 돌아다녀야 된다니까요. “아이고, 아버지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니는 부활도 믿지 않는구나!” 이렇게 돼버리죠. “아! 부활 맞네. 부활 맞구나.” 정말 하나님께서 부활이라는 그 귀한 좋은 소식을 자기백성, 우리 유대인들에게 주려면, 하나님께서 그런 증거를 주변에 풍성하게 쫙 깔아놓아야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라 이 말입니다.

 

어떻게 자기백성을 사랑하면서도 부활의 증거를 하나도 안 줄 리가 있겠느냐, 이건 부활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만 인간의 기대사항이 되지만, 뭐 마지막 때에 메시아가 와서 부활이 되는 것, 그렇게 될 때는 그거는 뭔가 달리 해석해야 해요. 그들 입장에서는. 왜냐하면 마지막 때까지 믿음의 증거가 부활신앙이라서 그런 거예요. 제 논리가 참 어렵죠.

 

이게 바로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의 논리가 그 논리였어요. “마지막에 부활되겠죠.”(요11:24). 그러니까 나중에 부활되는 쪽과 지금 부활이 없다는 쪽과 생각이 같은 거예요. 어차피 증거는 없잖아요. 갈 때까지 가봐야 되겠다는 것은 긴가민가 하는 수준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빠 나사로가 아픈데 일부러 안 가요. 죽여 놓고, 부활이 없다고 하니까 부활의 증거를 주기 위해서 오빠를 살리지 않습니까? 살리거든요. 강남강의에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오빠가 돌문을 손톱가지고 긁으면서 “내보내주이소!” 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안 했지만, 그냥 있었는데 나오라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 이 말이죠.

 

오늘 제목을 일단 이렇게 적어보겠습니다. ‘낯선 소리’ 부활의 소식이 낯선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인간이 부활을 접수하게 되면, 이 부활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부활이 아니에요. 그리고 부활을 믿은 자들이 누굽니까? 사두개인들의 반대파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었잖아요. 그럼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부활은 없어요. 인간이 만약에 부활이 된다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또 다시 죄인을, 죄를 부활시키는 논리와 똑같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항상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서야 됩니다. 그래야 충돌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올 수 있기 때문에. 스무스(smooth,매끈)하게 믿어버리면 이건 뭔가 넘어오지도 않았으면서 넘어오는 척 지금 시늉을 하고 있다는 이런 감이 굉장히 강하게 들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어떤 사람,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99마리의 양 보다도 1마리의 양이 더 중요하죠. 그럼 이 말씀을 우리가 들었으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1마리의 양다워야 해요.

 

한 마리의 양답다는 말은, 천하에 수천 명의 교인들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기죽지 않아야 해요. 그게 한 마리다운 거예요. 혼자 믿어도 아주 신이 나야 해요. “외롭습니다.” 이래 나오면 안 돼요. 그걸 영어로 유니크unique라고 해요. 유니크라는 것은 우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독특함을 이야기하고 유일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죠. 베토벤은 어떤 사람이냐? 음악가 중에 최고의 음악가가 베토벤이다. 그럼 모차르트는 어떤 사람이냐? 모차르트는 유일한 음악가이다. 실컷 띄어 올려놓고, 그 집합에 포함되지 않은 따로 나온 집합, 독특한 것, 그러니까 이것은 기존 것과 차별화되는 속성이 예수님의 성도가 되어야 돼요. 지금 이 과정에 사두개인들로부터 부활이 있으면 이런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공격을 받는 겁니다. 사실은 이런 공격을 사두개인이 우리 대신 해준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 때 그 질문을 사실은 해야 되는 겁니다. 미룰 게 아니에요.

 

자, 다시 묻습니다. 지금 사두개인은 이쪽 자기편에 있어요. 자기편이라는 것은 아까 강의를 했죠. 인간은 태어나 살아가면서 환경에 접속이 되게 되면 그게 무슨 세계에 들어가느냐 하면 자기위주의 세계가 되죠. 자기위주의 세계. 자기위주의 세계가 돼버리면 이미 여기는 악마에 매인바가 되죠. 그 세계가 있는 한, 자기위주의 세계가 구성되어 있는 한, 자기는 거기에 하수인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내 위주의 세계 같으면 내가 갑이 되어야 하는데, 막상 어떤 경험을 해버리면 그 경험이 나를 질질 끌고 갑니다. 이게 인생이에요.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흔히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있잖아요. 차라리 니 같은 남자를 몰랐으면 좋았었겠다고 하는데, 그 남자를 알았기 때문에 옛날로 못 돌아가요. 옛날 나 혼자 살았던 그 행복을 못 느낍니다. 이미 그 세계가 나의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요소로써 이미 침범해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얽매일 수밖에 없어요.

 

둘이 살다가 이혼했다. 니는 니 인생 나는 내 인생이다. 서로 도장 찍었다. 얼마나 깔끔하게 일이 마무리되었겠습니까? 우리 생각은 그렇잖아요. “아이고, 지긋지긋했다. 이제는 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살아야겠다.” 이래 했는데, 그렇게 둘이 깔끔하게, 속 시원하게, 아쌀하게(깨끗이)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난 뒤에 그 전 남편에게 돈이 한 200억이 생겼다. 근데 지가 새로 좋아하는 남편은 월급 한 300만원 받는다. 속에서 불이 나서 못 살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헤어지기 전에 돈 벌지 헤어지고 난 뒤에 잘 되도 더 잘 됐어요.

 

그리고 지보다 더 예쁜 여자하고 결혼했어요. 예쁜 여자라는 말은 나이 적은(젊은) 여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 띠 동갑하고 재혼한 거예요. 분명히 그 소식이 안 들리면 행복한데, 그 소식을 듣게 되어 있다고요. 듣게 되니까 화딱지가 나는 거예요. 날 버리고 간 사람은 십리도 못 가서 다리가 절든지, 허리가 아프든지, 다리가 부러지든지 해야 되는데, 십리가 되자마자 벤츠타고 가버렸어요. 벤츠타고 가버렸다 이 말이죠. 이게 인생입니다.

 

이미 형성된 세계이기 때문에 그걸 뒤로 미룰 수가 없어요. 나는 그 세계 잊는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이고, 참 인생이라는 것이...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악마와 아담의 관계가 그런 관계에요. 한 번 선악과를 맛봤잖아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해요. 그 선악의 세계에서 악마가 제공하는 그러한 세계에서, 헉헉거리면서 자기위주의 세계를 따로 장만하는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발을 뺄 수가 없어요. 조폭에 가담했는데 엄마가 애쓴다고 해서 그 조폭에서 발을 못 빼는 것처럼.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종교, 교회 다니는 것으로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근데 이런 종교라는 것을 믿으려면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이 근거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이미 자기 세계의 근거를 잡고 가지고 오거든요. 마귀가 제공하는 근거를 믿고 그걸 신앙이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 소속이 안 되어 있죠. 그럼 이쪽 편(악마와 인간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따로 계시죠. 따로 계시니까,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게 부활이에요. 내가 곧 부활이에요. 내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부활이에요. 예수님이 계심 자체에서 앞으로 부활도 나오고 십자가도 나오고 재림도 나오고 다 나올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길이고 생명이고 진리고.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라니까요. 나는 곧 부활이고 생명이다.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느 인간도 자기의 죄에서 벗어나서 나를 믿을 사람이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이 땅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모든 것은 아까 유니크, ‘유일한’이라고 했죠. 99명 대 1, 99마리의 양은 놔두고 1마리의 양이에요. 주님의 모든 체제는, 너희들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그걸 목표로 말씀을 전하십니다.

 

사도바울도 그대로예요. 사도바울의 복음은 니가 백날 믿어도 믿는 자가 아니야, 라는 그것을 들추어내고, 통보시키는 식으로 말씀을 전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하나 붙들어서 신자 만들려고 하는 그게 아니에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예수님마저도 아버지가 택하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손 못 대는 거예요. 아버지가 택한 자만 예수님이 구원해야지, 이건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약속이에요. 아버지가 택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의 뜻과 달리 일방적인 자기 뜻대로 건지고 하면 안 돼요. 그럴 수가 없어요. 단독행위가 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택한 자는 예수님한테 올 때 어떻게 오느냐, 그것은 그들 힘으로 예수님께 나올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와 함께 관계된 그 관계성,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연결된 그 관계성이 있죠. 그 관계성을 그대로 따라야만 그들이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다. 그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내게 보내주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요6:44).

 

자, 그 말씀을 분해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다.’ 이거하고 ‘예수님이 부활이다.’ 이거하고의 차이가 뭐냐 하면,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이래돼버리면 내가 있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이게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버려요. 이건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나 위주의 세계관을 따로 형성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내게 보내주지 아니하면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은, 최종지점이 뭐냐, 신자의 최종지점은 본인한테 돌아가는 것이 최종지점이 아니고, 예수님께 오는 것이 최종지점이에요.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으니까.

 

아버지가 보낸 자는 누구한테 간다? 예수님에게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내뱉는 모든 언어의 개념은 내가 믿는다는 것의 내용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예수님에게서 나올 다양한 것들, 예수님에게 장착되어 있는 다양한 요소가 그게 개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곧 부활이고, 예수님이 곧 길이고, 예수님이 곧 생명이 되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예수님이 부활되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내 자리가 없어요. 주님의 자리만 있으면 내 자리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원래 없어져야 될 것이기 때문에. 원래 없어도 괜찮은 거거든요.

 

이런 원리를 아까 했던 욥기를 통해서 보면, 욥은 자신과 아담을 동일시해서,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옛날 인간의 대표자 아담이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욥기 31장 33-34절에서. 아담은 죄인이죠. 따라서 이 세상 인간들은 죄인이라 하는 것을 욥기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원리가 창세기 2장 3장에서 세월이 훨씬 지나가도, 세월이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엿가락을 그냥 늘어트린 거예요.

 

물렁물렁한 엿이 있다면, 엿을 힘주어 땡겨버리면 엿의 경계선이 늘어지잖아요. 엿이니까, 점성도가 있으니까 쭉 늘어지잖아요. 그렇죠. 역사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 원리가 시간 따라서 축 늘어진 것뿐이에요. 손 놓으면 휙 하고 다시 원위치 되는 겁니다. 이 원리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원리에요.

 

이 이야기는 상당히 어려워서 제가 이번 여름수련회 때 할까 했는데, 특별히 여기서 해야 되겠죠. 왜 살기 좋다는 낙원에 죽음의 요인이 의도적으로 삽입되어야 하느냐 이 말이죠. 차라리 죽음이 없었으면 안심 놓고 살 수가 있잖아요. 도시 한 가운데에 공원을 만들어놓고, 그 이름을 ‘아이들의 공원’이라고 해놓고, 거기다가 독사 한 천 마리 풀어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독사나 해충이나 독거미는 빠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다가 뱀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거기다가 마귀 집어넣고 뱀 집어넣고 낙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이게 낙원이냐? 인간위주의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뭐 위주냐 하면, 생명나무위주의 세계에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생명나무의 위주인데, 생명나무가 갖고 있는 본질은 반드시 뭘 통해야 하느냐 하면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이 생명답게 이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 죽음에 합류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이 죽음이라는 것을 인간은 살아있는 한 모르잖아요. 모르는데, 이 선악과라는 것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 아담에게 기호가 돼요. 기호. 선악과나무 자체가, 이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아담이 동물과 다른 점은 아담은 동물에게 이름을 짓죠. 추상적인 언어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인간이 하는 행위를 하나님이 그대로 나중에 모방을 하게 되는데.

 

욥기의 내용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하는 주장과 욥의 주장이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죠. 욥기에 보면.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먼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있는데, 엘리바스와 빌닷의 질문가운데 욥이 대답하고, 빌닷과 소발 질문가운데 욥이 대답하고, 소발과 엘리바스 질문가운데 욥이 대답하고, 이래가지고, 한 순회, 두 번 순회, 세 번의 사이클cycle,순환적인 주기로 욥기가 짜여져 있습니다. 계속 질문하고 답변하고, 질문하고 답변이에요. 욥이 왜 고난을 받는가? 그 문제를 두고.

 

그런데 그것은 욥기 1장에 보면 그게 가리어져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악마가 내기했다는 사실은 천으로 가려버리고, 자기위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끼리, 각자 인간들끼리 해봐라 이 말이죠. 인간들끼리 하니까 거기에 어떤 대표자가 없는 거예요. 왜? 다수죠. 다수를 단수로 만드는 겁니다. 욥기에서. 욥기의 마지막은 뭐냐 하면 다수가 단수가 되는 거예요. 욥이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면 욥의 친구들은 저주받는 겁니다. 다수에서 단수를 끄집어낼 때는 반드시 이유 없는 고난을 통해서 고난 받는 자가 대표자가 돼요. 그게 욥입니다. 욥기에요.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욥이 응답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욥의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논리를 그대로 모방해서 이야기합니다. 모방해서 너희는 악하고 나는 의롭다고 이야기를 해요. 욥이. 근데, 욥기 32장부터 엘리후 나오고 그 다음부터 하나님이 나오는데, 이 관점이 뭐냐, 욥의 논리를 흉내 내서 욥을 공격해버려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한 박자 쉬고 일하신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인간에게 뭘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그래서 니가 저주받는 거야. 벌 받는 거야.”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생명나무의 본질은 선악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발견되는 겁니다. 그때에는 생명나무의 의미가 뭔지 몰라요. 선악과에서 생명나무를 차단시켜버릴 때 비로소 생명나무의 가치가 나오는 겁니다. 이거는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요셉이 가야 될 세계는 없어요. 요셉이 가야 될 세계는 없는데, 요셉의 형들이 추방시킴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발생된 세계가 요셉의 꿈과 더불어 동행하는 세계에요. 오히려 없는 세계인데.

 

그래서 요셉이 가면서 생산해내는 것이 뭐냐 하면, 요셉이 사는 세계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꿈과 인간과의 경계선, 그 윤곽을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윤곽이 발생되는 그러한 쪽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경계선상에서 요셉은 산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경계선 위에서. 오늘날 성도가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뭘 얻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고 뭘 새롭게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 믿는 것 그게 전부에요. 그냥.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뭘 얻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기꾼들이에요. 예수 믿고 뭘 얻을 게 하나도 없어요. 예수 믿고 된 것은, 주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하나의 천국과 지옥의 기준점으로 사용한다는 것, 달랑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욥기의 주제는 뭐냐, 지혜가 어디에 있느냐? 지혜는 욥기 28장에 보면, 은은 나는 광이 있어 거기서 은을 캐듯이, 이 세상의 광산은 땅을 파들어 가면 뭔가 광석이 있기는 있는데, 그러면 지혜의 광산은 어디에 있느냐?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욥기의 주제는 이 지혜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인데, 이 지혜는 바로 욥 자체가 지혜에요. 욥 자체에서 고난 나오고 거기에 하나님이 접속하고. 그동안 인간들이 접속한 것은 자기위주의 세계인데, 욥이 접속한 것은 그동안 자기기 접속했던 자기위주의 세계가 아니고 낯선 세계에요. 그게 낯선 소리, 낯선 세계. 전혀 경험하지 않은 낯선 사건에 의해서, 성도가 뭘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성도를 얻은 거예요. 성도는 주님의 작품이고 그 자체가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나는 있지만 성도는 내게 없죠. 있는 것을 성도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원래 있는 나와 그리고 하나님이 만든 성도, 이것이 성도가 죽을 때까지 늘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늘 갈등을 일으켜요. 우리가 우리한테 물어야 돼요. “니 누구고? 니 예수 믿고 그만큼 챙긴 것이 뭐가 있노?” 없지요. 없어요. “없으니까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럼 믿지 마! 저리 가! 가!”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아무리 복음 알고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해도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거예요.

 

더 나아가서 나라는 것은, 나는 미지의 나에요. 그림자에요. 그림자를 본체라고 보면 안 되죠. 다른 본체 때문에, 사실은 주님인데, 주님이라는 본체의 그림자가 오늘날 성도라는 이름의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보낸 자는 부활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부활과 함께 살고 있죠.

 

그렇다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그 관계있잖아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의 영광 받고, 그 모든 것이 성도에게 그대로 되풀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모양 형태가 상당히 다수가 되는 것은, 아담이 한 사람이지만 아담의 후손은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그 다수가 결국은 성질이 아담으로 모인 것처럼, 성도가 모양 다르고, 사는 환경 다르고, 얼굴 다르고, 어떻게 다 다르더라도, 그들이 고백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스도에게 다 모이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제가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는데 다 사소한 일이거든요. 지극히 사소한 일이에요.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다 사소한 일이에요. 이것들이 죄가 되는 이유는 이런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게 뭐냐 하면 자기위주의 세계관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바깥의 세계관은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사랑.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간음이고 살인이고 도적질이고 거짓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 부부간에 사랑하지 않는, ‘저거 언제 뒈지나?’하죠. 그래서 누가 죽었다. ‘아이고 그래 잘 됐다. 잘 죽었다.’ 제발 죽어줬으면 하는 그게 뭔가 공범자 노릇을 한 셈이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가 와도.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는 그 모든 게 살인이 되는 거예요. 심지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아는 것도, 이게 나쁜 짓이 되는 이유는 항상 그 근원이 뭐냐 하면 내 위주의 세계를 못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내 위주의 세계를.

 

그래서 바르게 살겠다는 것도 결국은 뭡니까? 돌아보게 되면 주님이 바른 것이 아니고, “주님 덕분에 내가 바르게 됐다. 내가 의롭게 됐다.”라고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 편에 서 있지 않은 사람, 성도 아닌 사람들이 내놓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8-06-24 15:46 
광주강의20180622b 마가복음12장 18-27절(바꿔치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시다. 마가복음 12장 18절부터 지금 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는 근거를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죠. 근데 그 말씀이 바로 언어죠. 언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동물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기위주의 세계를 형성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이라는 언어에 의한 계시를 준 거예요. 그건 동물에게 안 줬죠.

인간에게는 십계명이라는 돌판에다 글을 써서, 글을 썼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어를 통해서 건지는 이유가, 이미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의 정신이 통합되면서, 바벨탑을 통해서 언어가 통합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그 인간이 하는 행동을 모방하시는 겁니다. 모방하면서, 뒤따라오면서 전부 다 지적질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주께로부터 구원받는데, 구원되고 난 뒤에 내가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외우고, 어떻게 언어로 해서 구원됐겠습니까? 아니면 언어 없이 구원됐겠습니까? 나중에 언어 없이 구원되는 거예요. 언어 없이 구원됐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되었다. 예수님의 공로로.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공부를 해버리면, 이거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내가 최종 종착점이 돼버리죠.

이것은 언어화된 예수님을, 언어적으로 조립된 예수님으로 내가 받아들여서, 내 지식이 되어서 그 지식이 나를 구원했다. 이래 되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신학을 했으면 그 신학이 죄라는 것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자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아요. “이 신학이 죄입니다.” 하는 그게. 그 신학자 중에서 오늘 본문에 나온 신학자가 누굽니까? 사두개인들이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언어전문가에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는 그 하나님의 율법을, 구약성경이죠. 율법을 전문적으로 다루어서, 그 다루게 된 것을 언어로 포집된, 정보화된 그 체계를,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언어로 교류되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머리에 저장된 정보를 언어, 말과 가르침을 통해서, 글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전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그게 이전이 됩니까? 이전이 돼요? 어쨌든 간에 그들은 그렇게 해서 유대사회를 말씀으로, 다른 말로 하면 율법으로, 다른 말로 하면 언어로, 다른 말로 하면 기호로 하나가 된 거죠. 주님이 거기에 제시하는 기호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느냐, 죽어라! 에요. 그냥 죽지 말고 저주받고 죽어라! 나처럼 하나님한테 일찍 저주받고 죽으면 그 사람만이 더 이상 내게로 돌아올 내 자리가 없게 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나에게 돌아올 나의 자리가 없어지는 사람, 그게 십자가 안에서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가 사니, 내 자리는 없어지고 누구 자리만 계속해서 움직인다? 주님의 자리만 계속해서 움직이니 그게 바로 아들의 나라, 그게 천국이 아닙니까? 천국은 내 자리가 없고 예수님의 자리에요. 그러면 천국에 가는 나는 뭐냐, 예수님으로부터 제공된 예수님의 연장선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진 ‘나’가 바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 연장될 때 예수님과 새로운 다수, 아까 다수했죠. 그 다수를 요한계시록에서는 뭐냐 144,000, 기호로 이야기하고, 여기에 관계된 이 숫자는 바로 야곱언약 ‘12*12*1000’, 야곱언약의 완성이에요. 1000이라고 하는 것은 완성이니까. 야곱언약의 완성이 되는 완성자,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완성은 예수님이 홀로 이룬 거예요. 그래서 이들은 내가 예수 믿었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믿게 하셨잖아요.”라고 모든 시선을 예수님께로 두는 겁니다. 그래서 면류관을 누구한테 바치느냐 하면 주님 발 앞에 도로 반납하게 되어 있어요. 면류관을. 아까 첫째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뭐냐 하면 바로 부활이에요. 예수님이 진리고.

그러나 인간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물었잖아요. 진리가 무엇이냐? 니가 아는 진리를 언어를 통해서, 말을 통해서 설명해주면 니가 아는 진리가 나에게로 이렇게 이전될 수가 있다고 본 겁니다. 그렇다면 이전이 돼버리면 빌라도가 어떻게 돼요? 빌라도는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정보가 쏙 들어온 셈이 되죠. 빌라도는 안 다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빌라도는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뱀과 결탁한 뱀의 분신이다 이 말이죠. 뱀의 분신에게 진리가 같이 합치될 수는 없어요. 이게 충돌되고 배격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빌라도에게 진리를 이야기 안 합니다. 말을 안 해요.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제자들에게만 이야기를 해요. 아버지께서 보낸 자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곧 진리다. 그 진리라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데, 13장 끝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진리가 자기한테로 넘어올 줄 알고 내 목숨 바쳐서 가겠다고 할 때, 주님께서는 끊어버리죠. 니 목숨 바쳐서 오지 못하는 곳, 없는 곳입니다. 갈 수 없는 거예요. 아버지하고 예수님의 관계문제지 베드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

그 다음에 나중에 처소가 만들어지게 되면 거기에 베드로가 예수님에 의해서 초청되는 겁니다. 그 자리에.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그 자리에 베드로는 주와 함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겁니다. 성경이 지금 그 방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는 이유를 설명할 때, 이걸 그대로 예수님께서 먼저 들어주시고, 그러니까 죽음이 먼저에요. 죽음이 먼저 있고, 죽어야 될 이유가 드러났을 때 그 배후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선악과나무가 훼손될 때 비로소 생명나무의 가치가 그제야 드러나는 거예요.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죽음을 통하지 않으면 누가 중요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해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 외손녀가 우리 집에 왔을 때에, 돈이 있었는데 돈을 이만큼 쥐었어요. 쥐고 난 뒤에 어떤 놀이를 하느냐 하면 돈 세는 놀이를 해요. 돈을 세는 것을 어디서 봤는가 봐요. 돈 세는 흉내를 내요.

근데 과자가 있다. 돈이 있다. 과자에 손이 가죠. 왜냐하면 자기가 접속된 그 기호적 의미가, 과자가 상당히 감각적이거든요.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두세요. 정신분석학이나 의학에서는 인간을 동물의 연장으로 봅니다. 동물보다 우수한 동물로 봐요. 동물은 뭐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세포로 구성되어 있죠. 그런 점에서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 같아요. 간이 안 좋다, 신장이 안 좋다고 하면 돼지 신장을 집어넣어도 되니까. 이게 가동이되니까. 그래서 인간과 동물이 동일한 세포라는 점에서는 단절점이 없다고 본 거예요. 세상과학이.

이게 얼마나 마귀적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대목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과학에는. 의학에는. 의사가 만지면서 “아이고 이거 하나님의 형상을 건드렸네!” 이런 것 없어요.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세포작용의 효과로 보는 겁니다. 효과. 효과 그 자체는 없어요. 실체도 없고. 실체는 따로 있고 실체가 움직이는 부대현상, 이걸 정신으로 본 겁니다.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은 사실 뭘 따지느냐 하면 인간을 동물의 세포로 보는 겁니다.

세포는 뭐냐, 세포 하나하나가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죠. 그게 인간에게는 욕구가 아니고 욕망이 되는 겁니다. 인간 세포가 살고자 하는 것. 외부에서 세균이 왔을 때 우리 몸에서 뭐가 마중 나가서 싸운다고 했습니까? 백혈구가 나가서 싸우죠. 그게 없는 것은 면역성이 떨어졌다고 하잖아요. 자, 그러면 백혈구가 싸울 때, 이 백혈구는 누굴 위해서 싸웁니까? 백혈구 자기 기능을 위해서 싸우죠. 백혈구는 언어니 자아니 그런 거 없어요. 없다 이 말이죠. 그게 자기 욕구에요. 욕구들이 모여서 인간이 되는데.

결국 이게 뭐냐, 동물들은 이성이 없고 동물들을 뭐로 보느냐 하면 감각으로 보죠. 그래서 프로이드는 인간이 감각에 따라 정신이 생긴다고 해서 감각에 순서를 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입의 감각을 쾌락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항문의 감각, 그 다음에 성기의 감각, 성적인 욕구죠. 처음에 애기가 젖을 빨 때 입으로 빨죠. 그 다음에 똥오줌가리죠. 배설하면서 쾌락을 느끼죠. 그 다음에 커서 나오는 것은 종족보존, 자식을 낳아야 하니까 동침을 하죠. 이런 식으로 발달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원활하게 되지 않으면, 이렇게 되면 동물의 세계가 되잖아요. 동물의 왕국이 되잖아요.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그것도 그냥 윤리가 아니고 전통윤리, 그 집안에서 내려오는 윤리가 이러한 동물적 감각을 억누르는데, 억누르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이게 억압을 받죠. 이 세상을 살면서 억압을 받는 것이 느슨해지게 되면 병에 걸린다는 거예요. 심신미약.

심신이 미약하여, 술 먹고 불질러놓고 나오지 못하도록 출입문을 대걸레로 막아버리는, 다 죽어라! 이 말이죠. 심신미약, 음주운전 이런 것을 하게 되면 동물이 되니까. 술 먹고 터지게 되면 이게 사회적 범죄가 되고, 이 사회적 범죄는 대구강의에서 리스크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리스크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보험입니다. 보험이에요. 리스크를 통계화시켜요. 전에는 일 터지고 했는데, 이 보험은 예방적 차원에서 하는 겁니다. 리스크가 되면 범죄는 없어요. 다만 손해를 누가 대신 갚아주면 되니까. 돈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화분을 던졌다. 1억 주면 돼요. 가위 던졌다. 1억 주면 되는 겁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결국은 사회라고 하는 것은 이런 동물적인 감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억누르느냐, 그게 정신세계라고 본 겁니다. 여기에 무슨 예수님의 십자가가 포함이 됩니까? 인간들에게 이런 방식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을 해요. 왜냐하면 욥기에서는 악마와 내기를 하기 때문에. 악마는 자신만만합니다. 어떤 인간도 이 범죄에서는 못 벗어난다. 그만큼 악마는 이 세상은 모든 인간의 정신세계를 쥐고 있으니까. 근데 하나님께서는 욥을 봐라, 욥은 니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순전한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그 순전한 사람이라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욥에게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여기서 벗어나는, 이 인간세계에서 자기위주로 도저히 해명되지 않는 사건을 하나 집어넣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유 없는 고난이에요. 이유 없는 고난. 이유 없는 고난이 옴으로써 욥은 그 시대에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리스도의 존재 같은 기준점이 되는 겁니다. 이유 없이 바람피우잖아요.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의도한 것은 있어요. 남들처럼 보란 듯이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두 살 되는 애가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우유 따뜻하고 과자에 아이스크림 있으면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근데 그 애가 세 살, 네 살 되게 되면 그 잘 먹고 잘 산다는 의미가 점점 더 세상적으로 확장이 되다가, 나중에 사십 대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메시가 한골 넣는 거예요. 메시가. 메시는 한골도 못 넣고 호날두는 몇 골이나 넣었잖아요. 메시는 한골을 넣는 것이 자기가 그 축구를 좋아하면서 새롭게 접속된 자기의 정신적 쾌락이에요. 쾌락입니다.

그동안 젊은 사람들이 문재인이 대통령이 안 돼서 얼마나 자기 욕구충족을 못했습니까? 촛불집회해서 됐잖아요. 박근혜 쫓아내고 문재인이 됐잖아요. 이제 남아있는 게 뭐가 또 남아있는지, 이제는 남북통일이 남아있네. 이미 뭔가 알았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갑질하는 거예요. 내가 그걸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걸 알았다는 그 사실에 내가 완전히 종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마귀의 종노릇이에요. 마귀는 안 나타나요.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계속 세상부귀영화, 인간의 욕망만 장악하면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하다보면 뭔가 사람들이 감을 잡죠. 이 세상에서 내가 뭘 해도, 아무리 내가 돈이 많고 뭘 해도 내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고 하겠죠.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부정입니다. 전부 다 작살내고 파괴시키는 겁니다. “에이 세상 니 죽고 내 죽자.” 불 지르는 겁니다. “더러워서 못 살겠다.” 세상을 부정하는 거예요.

제가 부정 써놓고 그 밑에 빈칸을 남겨둔 이유가 있어요. ‘부정’과 전혀 다른 말이 뭐냐 하면 ‘부인’입니다. 이거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부정은 뭐냐, 세상 더럽다. 확 바뀌어버려라. 이거 부정이에요. 전면 부정하는 겁니다. 니 죽고 내 죽자. 자살이죠. 부인은 뭐냐 하면 견디는 거예요. 버티는 거예요.

뭐냐 하면 세상을 고치고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세상 그렇지 뭐. 그게 세상이지.” 잠잠히 거기서 견디는 겁니다. 이 부정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실 일이고, 부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모습이 부인입니다. 세상 알죠? 지옥인 것을 알면서도 그걸 감내하는 거예요. 죄 없으면서도 마치 죄인이 받는 죄를 본인이 다 짊어져야 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아까 인간은 육체죠. 동물적 육체입니다. 육체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럼 육체라고 하는 것은 뭐를 움직인다? 욕망을 움직여요. 욕망. 욕구.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살고자 하는 욕망인데, 프로이드는 여기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죽고자 하는 욕망, 죽음충동도 끄집어내었어요. 근데 사실은 둘 다 같은 겁니다. 죽고자 하는 것은 자살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파괴본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행동은 두 개의 서로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같은 인간인데 일관성에서 모순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는 세상을 부정하는 것과 세상을 부인하는 것. 이걸 사디즘이라고 하고 마조히즘이라고 해요. 사디즘은 가학증세 라고 하고 마조히즘은 피학증세 라고 해요. 마조히즘은 얻어맞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고, 사디즘은 남을 때림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겁니다. 사디즘은 전두환, 마조히즘은 술 먹고 들어오는 남편한테 얻어맞는 천사 같은 교회 다니는 집사. 절에 다니는 시어머니한테 머리 뜯기면서 내심 쾌재를 부르는 천사 같은 며느리. 3분의 1은 머리가 뜯겼는데, 뜯기면 뜯길수록 기분이 좋아. 천사표로 점점 드러나니까.

두 가지의 본성이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정신분석학에서 두 가지의 본성이 있다고. 강자한테는 마조히즘, 약자한테는 화분던지기. 사디즘. 누구나에게 이게 다 들어있는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착증세 라고 합니다. 도착증세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흘러가야 되거든요. 흘러가게 되면 시간자체가 과거는 과거로 돌리고 현재는 미래를 기다리면서, 그 현재가 다음 되면 과거가 되고 또 새로운 미래에서 현재가 나오고 이렇게 돼야 하는데, 쭉 가다가 어느 시점에 그걸 절대화시키고 그걸 고유화 또는 유형화, 형체를 만들어서 우상처럼 딱 스톱을 시킬 때 이게 도착 증세가 되는 겁니다. 이런 증세가 나오는 것을 도착증세 라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주를 위해서 살다가, “주를 위해서 삽시다. 하나님을 위해서 삽시다.”라고 이렇게 설교를 했더니만 교회가 커졌어요. 그 다음부터는 뭐냐 그 교회가 도착증세가 되는 겁니다. 도착증세 라고 하는 것은 성적인 변태 같은 것인데, 어떤 여성을 노골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여성옷 가게에 가서 스타킹 같은 것을 더듬으면서 어떤 성적인 쾌락을 느끼는 것을 가지고 페티시즘fetishism, 도착증세 라고 하잖아요. 도착증세 라는 원래의 뜻은 제 코스가 아니고 엉뚱한 코스로 우회해서 자기쾌락을 찾는 것을 도착증세 라고 하는데, 그 모든 과정들이 뭐냐 반드시 어떤 형태가 있어요.

그래서 프로이드는 우상숭배를 도착증세 라고 보는 겁니다. 맞는 말이죠. 우상숭배를. 인간대신 사물을 대체하고 대신해서 그것을 인간화시켜서 붙든다 이 말이죠. 결국 이 도착증세 라고 하는 그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원인은 자꾸 화살표가 나에게로 돌아와서 그래요. 타인을 사랑하면 그냥 타인을 사랑하면 되는데, 타인을 사랑하는 나는 얼마나 멋있느냐, 이게 자기 자신을 도착증세로 보는 겁니다.

지금 여기 사두개인이 그런 현상을 보여요. 사두개인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렇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제시하는 그 증거가 그 뒤에 나옵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를 들기를, 본문 마가복음 12장 19절에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죠.

이게 어디에 되어 있습니까? 이게 모세율법에 되어 있죠. 모세율법이니까 이거는 예수님보다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과거죠. 과거의 것에, 거기다가 신고한다는 자체가 이게 도착증세가 되는 겁니다. 과거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을 고정화시키는 거예요. 고정화. 이 도착증세를 자꾸 정신병이라고 해서 우리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마귀에 속한 모든 아담의 자손들은 정신병자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녀가 결혼한다. 이건 예입니다. 조정석이하고 거미하고 결혼한다. 이건 하나의 예니까. 거미라고 해서 기어 다니는 거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수 거미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그 사람들은 5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뭘 갖고 있느냐 하면 도착증세를 갖고 있는 거예요. 변하는 상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그 모습 그대로를 결혼 내내 줄곧 바라면서 결혼이라는 결단을 내리는 겁니다. 그렇죠?

처음에 “니 나한테 반했나?”라는 그 모습. 여자가 일일이 나한테 바로잡아주는, 넥타이 비뚤어졌다고 바로해주고, 김비서가 미쳤어. 왜 그럴까? 하는 것처럼. 뭐든지 나한테 다 해줄 때, ‘나는 이 여자하고 결혼해야 돼.’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스톱시키는 거예요. 이걸 딱 동결시켜버리면, 그게 자기 이상 속에 ‘나는 이 여자하고 결혼한다.’라고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그 여자가 방귀뀌고, 늙어가고 있고, 라면도 못 끓이고, 전에는 라면 잘 끓여서 집에 자주 가려고 했더니만 라면도 못 끓이고, 이거는 뭐 돈만 주면 되는 김치녀가 되어서 전부 다 백화점에 가서 쇼핑백 한 30, 40개 양손으로 들고, 이명희 딸처럼. 그리고 싱가포르에 가서 북한합주단이 쇼핑해가지고 가는 것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돈 쓰는 재미로 살고.

그렇게 할 때, 그러면 사랑을 한다면 그 흐름까지도 사랑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이미 도착증세가 되어가지고 뭘 기준으로 합니까? “처음에 니 안 그랬잖아.”가 스톱이 된 거예요. 그러면 결혼을 하면 같이 움직여줘야 하는데, 한쪽은 지금의 아내를 현실로 보지 않고 그때 그 모습의 아내와 나는 결혼했다는 겁니다. 참, 이 이야기하면 목사님, 안 그런 남자가 어디에 있어요? 하는데, 그러니까 정신병자에요. 전부 다 정신병자라니까요. 그러지 말고 당신이 아내한테 잘해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하는데, 이게 안 되면 ‘안녕하세요’라는 TV프로에 나와서 온갖 소리를 다하고 그러는 겁니다. 하여튼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정신병자만 다 나왔다고 보시면 돼요. 조재현이부터 해가지고, 트럼프, 김정은이부터 해가지고, 털이 난 정신병자에요.

근데 이게 성경적으로 맞아요. 이 세상은 정신병자들만의 세계에요. 전부 다 도착증세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야 된다고. 돌아볼 내 자리가 없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부활이 되려면 주께서 뭘 먼저 합니까? 돌아갈 내 자리부터 없애는 작업을 하겠죠. 그냥 없애면 없어집니까? 내가 없어졌다고 또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나를 없애되 내가 없어졌다는 것을 없애려면, 나를 예수님께서 받아주셔서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를 없애야 돼요.

그럴 때 우리 성도는 뭐냐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나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이 계속 살아있어요. 말씀이라는 것은 관계니까. 그 관계가 계속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그 관계를 모르니까 모르는 사두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는지를 보자 이 말입니다.

19절에,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20절,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절,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절,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지금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는 근거로써 제시하는 시형제결혼법을 이렇게 설명할 때,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과 시형제결혼법하고 도무지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걸 예수님한테 왜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들이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뭐냐 하면 이 부활을 육의 부활로 본 겁니다. 육의 부활로. 부활할 수 있는 실체가 있어서 그 실체가 예전처럼 다시 부활된다고 본 겁니다.

만약에 여자는 하나인데, 결혼한 남자가 일곱이 된다면, 여자 하나에 남자 일곱이 육을 살았던 역사라면, 전개라면 그것이 그대로 부활이 될 때 하늘나라가 시끄럽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시끄럽지 않느냐? 일곱 명의 남자가 있는데, 여자 하나가 부활이 되니까, 일곱 남자가 다 달라 들어서 “여보! 여보!” 이럴 경우에 하늘나라가 심란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경찰이 동원되든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복음적으로 정답을 말씀드립니다.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의 부활이죠. 예수님의 부활이에요. 우리 부활이 아니에요. 성도가 나중에 새 몸을 입는데, 그 새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광된 몸을 부여받게 돼요. 예수님의 영광된 몸을.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변화산에 왔잖아요. 변화산에 있는 엘리야하고 모세의 모습, 그게 엘리야하고 모세의 최종점입니까? 아니에요. 엘리야하고 모세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입을 때까지. 그들에게는 더 주어질 주님의 혜택이 아직도 남아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으로.

그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48-49절에 나옵니다. 흙에 속한 형상은 흙에 속하고 하늘에 속한 형상은 하늘에 속한다. 아담이 흙에 속한 형상을 입은 것 같이  새로운 성도는 어디의 형상을 입는다? 흙의 형상을 더 이상 입지 않고 하늘의 형상,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다. 이래 되어 있어요.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에요. 아담은 산영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했어요(고전15:45).

그렇다면 우리의 육과 예수님의 육과의 관계는 새언약 관계입니다. 우리의 육은 재료가 되고 예수님의 육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새언약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피를 흘리신 분이 되죠. 피와 죄인의 만남에서 새언약이 완성됩니다. 그 완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로써 우리가 의를 이루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게 에스겔 37장에 보면 해골 나오죠. 축축한 해골이 아니라 바짝 마른 해골. 그 해골이 어떻게 돼요? 인자의 말씀이 오니까 그게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고요. 하나님의 군대.

그래서 군대가 되니까, 개별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집단화된, 집단적인 부활이 되는 거죠. 그래야 군대가 형성되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돼요.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집단이 되는 겁니다. 다수가 되는 거예요. 개인의 자격으로 개인이 부활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부활이 되는 거예요. 그게 언약관계입니다. 144,000. 니 구원 내 구원이 아니라 144,000 전부가 구원이 되는 겁니다. 부활이 되고.

144,000을 엮어가는 풀, 엮는 관계는 언약관계에요. 새언약 관계에요.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에 동참한 자들만, 직업과 얼굴과 관계없이, 출신성분과 관계없이, 전라도 경상도 관계없이 전부 다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는 겁니다. 몸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간, 쓸개가 따로 있지만 전체가 움직일 때는 한 몸 안에서 움직이잖아요.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움직인다. 이래 보시면 돼요.

탱크가 가는데, 이게 에스겔 1장에도 나옵니다. 장갑차 탱크. 탱크가 가는데 천사들이 어떻게 달라붙어 있습니까? 천사들이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사자, 소, 독수리, 사람의 기능이 있잖아요. 그 기능을 가지고 하나같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요.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움직일 때 지휘본부가 그 안에 들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에요.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여서 가는 거예요. 움직여나가면 지금까지의 성전은 고정된 성전, 공간적 성전이라면 에스겔이 예언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무빙템플moving temple, 성전이 움직여요. 근데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 한 덩어리가 되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23절에 봅시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자, 이 사두개인의 증거가 뭐냐 하면, 부활이 없는 이유는 말씀 자체에서, 시형제결혼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하나님의 지시, 모세의 지시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서 이 세상과 별개의 세상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두개인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을 부정한다면, 율법이 그런 식으로 떠나라고만 이야기했지,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라는 명령을 줄 리가 없다는 겁니다. 설득력이 있죠. 문제는 사두개인들이 그런 말을 할 때에 뭘 노리고 그 말씀을 철석같이 믿느냐 하면, ‘나’ 혹은 ‘우리’죠. 지금 나, 우리를 세상은 부정해도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예요.

사두개인들이 이런 사고방식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의 일이 뭐냐 하면, 나 안 다치고, 나 흠집 안 나고, 진짜 하나님이라면 나를 아끼고 싶은 이 나를, 하나님도 같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서 아껴줄 때, 그게 우리가 믿을만한 증거를 제시하신 하나님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평소에 내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나를 챙기는가를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그런 식으로 살고 있고, 거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주께서 화답을 해줄 때, 그때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어떤 관계다? 아주 정상적이고 원활한 관계가 된다. 이러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가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망가지려고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 무너지려고 가지는 않잖아요. 지금도 살아있지만 더 편하게 안심 푹 놓고 여유 있게 하고 싶은 것 마음껏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여력을 제공할 수 있는 하나님이기를 기대하면서 교회에 간다 이 말입니다.

그게 사두개인들이에요. 오늘날도 부활을 생각하니까 내 부활 생각하는 거예요. 내 부활. 내 부활을 생각하니까, 만약에 지금 딸이 복음을 모른다. 그러면 거기서 약간의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나는 천국 왔는데, 딸은 보니까 지금 지옥에서 “엄마!”하고 울고 있다는 겁니다. 세월호도 아닌데. 지옥에 빠져가지고. 그럼 어미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안 편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지옥에 떨어져도 마음 편하도록 독하게 마음먹을 수밖에 없죠.

바로 그런 아이디어, 천로역정 같은 그런 아이디어, 단테의 신곡 그런 소설이 있잖아요. 너무나 인간적인 것. 혹은 톨스토이의 작품으로 부활, 안나 카레니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에 가서 언급했던 그런 소설가들. 그런 사고방식이 바로 사두개인식 사고방식입니다.

24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했다는 말은, 시형제하고 결혼한 이 대목이 있잖아요. 이 대목에 대해서 잘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맏이, 다른 말로 하면 맏물의 의미를 이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형이 자식이 없이 죽고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다는 말은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단절을 통해서 단절을 제공하고, 그 단절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맏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법이 시형제결혼법이에요. 생각해보세요. 형은 죽었다. 형수가 있는데 아들이 없고 나는 지금 총각이다. 근데 총각 같으면 자기가 원하는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잖아요. 형수는 중고 아닙니까? 뭐 렌트한다면 모르겠지만 신품이 아니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도 아닌데 중고하고 왜 결혼해야 돼요? 그것도 늙은 사람하고 왜 결혼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하라는 거예요. 누구를 위해서? 죽은 맏이를 위해서. 그러면 동생이 “아니, 맏이는 죽었잖아요? 죽은 자의 자식을 왜 놓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거에요.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은 세계가, 그게 너희들이 꿈도 못 꾼, 악마에 속한 인간들이 도저히 생각 못한 천국이다 이 말입니다.

죽은 자의 세계. 그 죽은 자의 세계에서 자식을 놓으면 누가 죽어야 됩니까? 시동생 삼촌이죠. 동생이 자기 자체를 부인해야 되죠. 자기주장을 펼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오직 형을 위해서 존재하는 동생이다.” 이런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되는데, 그게 인간에게서 가능합니까? 그것도 산영도 아니고 죽은 영. 살아있으면 나한테 보탬이 되지만 이미 죽어버린 형을 위해서 내가 왜 살아야 하는데요?

그 형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형의 자리에 와서 돌아가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누구도 시형제결혼법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없다?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에게로 오직 자기 외에게로 가지를 않습니다. 더구나 죽었던 사람한테는 갈 필요가 없죠. 그래서 시형제결혼법은 아무도 못 지키고 누가 지키는가? 율법을 주신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이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겁니다. 그 성취시키시는 분으로 오신 분이 누구다? 예수님이 바로 맏아들(맏물)로서 오신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었다면, 그럼 동생들은, 지킨 동생들이나 그 어떤 패밀리family가 생기지 않겠죠. 그러면 왜 생기지 않습니까? 단절을 거부하기 때문에. 나 이대로 구원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겪었던 단절을, 동생 된 우리에게 단절을 심어줘 버려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합류해서 너의 세계는 없다는 거예요. 이 형의 세계, 예수의 세계만 천국이지 너의 세계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니까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실 때에 사두개인들은 물론 못 알아듣고요. 옆에 있는 제자들도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들어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이렇게 돼버리면, 여기에서 사두개인들은 뒤집어지는 거죠. 왜냐하면 사두개인들은 하나님나라하고 이 땅하고 서로 거울상이에요. 이 땅에서 결혼한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결혼한다는 뜻으로, 결혼하는 것을 인정했다고 이래 보는 겁니다.

지상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있는데, 하늘나라에는 그게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있을 것을 염두 해두고 지상에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허락하셨을 것인데, 이게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면, 이 땅에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이렇게 허락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처음부터 시집가고 장가가지 말고, 처음부터 여성남성이 없이 하나의 성으로 굳어버리면, 동성이 되면 결혼할 일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지금 과학자들이 암컷수컷이 왜 있는지 그것도 굉장히 헷갈려하고 있어요.

왜 모든 것이 통일이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심지어 물리학 양자이론에 있어서 빛이라는 광자는 질량은 적은데 성질은 파동성과 입자성, 두 개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파동성과 입자성. 그게 왜 그러는데요? 그리고 소립자를 보면 하나하나가 열 두 개인데, 이 열 두 개의 회전이 서로 반대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른쪽 돌면 왼쪽이 돌고, 위가 돌면 아래가 돌고. 업다운, 위위아래아래, 좌우로 대칭되듯이. 아미노산도 오른쪽 형(形)과 왼쪽 형(形)이 다 달라요. 그렇다 뿐이지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요. 하나로 통일이 안 된다니까요.

통일이 안 될 때는 과학자들이 약이 올라가지고 그 두 개가 나온 원천 1, 그 1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쓴다고요. 근데 그 1이 없어요. 1이 없고 뭐 밖에 없느냐 하면 0밖에 없겠죠. 없으면서 둘이 생겼어요.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1이 누락이 되었다니까요. 1을 안 거치고 갑자기 0에서 2가 되어버렸어요.

근데 성경에는 1이 나오죠. 아담이 하나고, 아담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여자가 나왔잖아요. 그리고 결혼하고. 결혼에 대해서 이 사두개인들은 결혼을 잘 하라고, 주의 뜻대로 결혼을 잘하라고, 언약의 가문을 이루라고 시형제결혼법을 줬다고 이래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결혼 자체가 부정 안 되고 상당히 긍정이 돼버렸죠.

긍정이 된다는 말은 결혼생활을 잘 할 때 하늘나라 가는 것에 유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난잡하게 해버리면 천국에서 “이놈!” 이 거룩한 제도, 많이 듣던 이야기, 하나님의 성스러운 제도 이걸 결혼 또는 가정의 성스러움, 흔히 개혁주의신학에서 많이 하잖아요. 문화명령해가지고 경건한 자식을 놓고. 거룩한 가정제도. 훌륭한 가정이 되어야 한다. 훌륭한 가정이 되면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 훌륭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나 위주인데, 내가 내 위주로 살면서 훌륭한 가정이 되겠어요? 부부가 평생 살아보세요.  상대방을 이해하는가. 이해하겠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터무니없는 망상입니다. 이해 안 되는 사람끼리 붙어사는 거예요. 왜 붙어사느냐? 딴 대안이 없기 때문에 붙어사는 겁니다. 대안이 있으면 떨어집니다. 대안이 없어요. 갑자기 돈을 많이 번다. 뭐 이런 게 없어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때는, 자기한테 이익이 안 가면 선택을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몰라요. 자기가 경험한 그것을 모아서 사랑이에요.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사람이에요.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본인들이 다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야곱은 요셉이 죽었을 때 야곱은 죽은 거예요. 야곱이 죽었을 때 이삭은 죽은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을 때 아브라함은 죽은 거예요. 모리아산에서.

이삭 같은 경우에는 형 에서한테 자기의 축복을 밀어줬는데,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거든요. “니 축복해줄 테니까 나한테 선물 가져와라.” “무슨 선물이요?” “나는 사냥한 고기를 먹고 싶다.” 이거는 뭐냐 하면 완전히 일방적으로 에서를 밀어주는 거예요. 이거는 투표하나마나에요. 이거는. “나는 순대 좋아하거든. 순대.” 근데 둘 중에서 순대를 만드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어요. “순대 만들어주는 조건하에 내가 복 줄게.” 이 말은 그냥 주는 거예요. 그냥.

이삭은 그 뜻에 다 실은 거예요. 다 실었는데 누가 패를 바꿔치기 했습니까? 하나님이 바꿔치기 했을 때에 이삭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잡는구나!’ 야곱이 나를 속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삭을 속인 거예요. 그래서 그걸 인정을 해버리는 거예요. 인정하니까, 뒤늦게 헉헉거리면서 에서가 맛있는 고기를 만들어가지고 왔다고 하죠. 이삭은 원래 밀어주려고 했던 큰 아들 에서에게 저주를 다 줘버리잖아요. 이것은 내가 개입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패를 바꿔치기 한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날 때부터 서로 싸우고 태어난 그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언약의 하나님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꿔치기 하는 작업에, 거기에 관여된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은 바꿔치기 하는 하나님이다. 바로 그거에요. 죽은 맏이도 둘째 동생들을 바꿔치기 하려고 시형제결혼법을 준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악마의 세계니까, 이 악마의 세계와 같이 몰락하고, 폭삭 건물이 무너져서 같이 죽어버리고, 부활의 세계, 언약의 세계를 따로 마련해놓고, 죽은 자에게 쳐들어와서, 죽은 자에게서 자기백성을 건져가지고 부활의 세계에 집어넣겠다는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에요.

그러니까 죽은 자가 부활을 원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런 말씀이나 부활이나 모든 능력은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있다? 예수님 본인에게 이 언약을 이루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로 거뜬히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이 세상에서는 어떤 해석도 이 해석에 옳지 않다는 것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두개인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흔쾌히 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받을 자격도 없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도 우리의 권리가 아니고 주님의 권리라는 것, 주님 언약의 달성과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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