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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8 00:13:14 조회 : 412         
예수님의 과제 180727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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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07-29 09:22 
광주강의20180727a 마가복음12장 26-27절(예수님의 과제)-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26-27절.

26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아주 열심히 성경말씀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사활을 겁니다. 그게 전부죠.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상적으로 돈도 별로 없고 권세가 없다고 할지라도 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여하는 그러한 일을 하기 때문에 자부심을 갖는 겁니다.

이들이 어떤 자부심을 갖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자기들은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왜 없어야 되느냐, 만약에 모르는 것이 남아있으면 남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잖아요. 전문가라는 것이 뭡니까? 모르는 것이 없어야 되죠. 전문가. 전문가는 돈 문제 또 권세문제도 있지만, 자기 전문분야에서 무식하다고 하는 순간, 자기존재의 의미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하나의 전문가로서 행세를 하려면 거의 모르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떤 라이벌처럼 등장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거든요.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놓고 언급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급을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성경말씀을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은 익히 아시죠. 그러면 이 성경말씀 자체가 어떤 한 부분에 대한 것을 가지고 전체를 점령하듯이, 꿰뚫는다고 이야기를 하죠.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전체를 설명을 했을 때, 다른 대목을 가지고 그 설명체제의 모순점을 지적해버리면 처음에 시작한 것이, 이렇게 중심점으로 삼았던 것이 결론적으로 문제 있음으로 드러나죠. 설명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오늘 본문 말고도 사도바울 편지에서 십자가도 있고, 부활도 있고, 승천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고, 사도바울 편지에 이런 것이 많이 나오잖아요. 근데 사도바울이 이런 것을 많이 언급을 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했다고 언급해버립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의 인간이 여러 가지를 다 가지게 되면,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여러 주제를 다 가져오게 되면 왜 이 주제와 이 주제는 통합을 왜 안 시켜줬느냐에 대해서 해명을 해줘야 해요. 주제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쯤 된다면, 이 다섯 개를 나눌 때 왜 일과 이는 구태여 나눠야 하고, 왜 이와 삼은 왜 구태여 나눠져야 하고, 왜 삼과 사는 나눠져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보통 시험 칠 때 제일 중요한 문제가 국영수죠.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닙니까? 그 다음에 사회, 과학도 있지만. 왜 국어하고 영어는 나눠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같은 언어인데. 그리고 영어하고 수학은 여러분 상식에는 떨어진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떨어진 게 아니에요. 프레게라든지 러셀 학자에 의하면, 언어는 논리학 이름으로 수학과 통합이 됩니다. 진리를 어떻게 언어라고 표현하느냐는 겁니다. 수학은 언어거든요. 물리학 같은 것도 조금 수학식으로 나오죠. 수학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물리학자들에게는 자기 언어에요.

그러면 자기 언어라면 그 수학은 뭐로 승부를 보느냐 하면, 논리로 승부를 봅니다. 자기 논리로 승부를 걸거든요. 그러면 국어, 영어가 논리가 있어요? 없어요? 논리 없는 언어가 왜 있어요? 논리 없는. 문법이라는 것이 왜 있는데요? 문법을 뒤죽박죽으로 바꿔버리면 이거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구태여 사람들이 국영수를 나누죠. 이걸 통합하게 되면 깊은 학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나 통합을 하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로 통합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이게 상상이 되는가? 상상이 안 되죠. 지금 우리가 보는 본문이 죽은 자의 살아남이죠. 그럼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가 상식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어떤 분이 죽었는데 살아났구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겁니다. “죽은 자에서 살아남의 그 의미가 포함이 안 된 채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해석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죽은 자에서 살아남의 그 의미의 내용이 포함이 되지 않는, 그것에 기초하지 않는 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그것은 무조건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틀려먹은 겁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어제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 그게 무슨 의미냐? “무슨 의미라고 할 것도 없이 집에 같이 있다가 고양이가 지금 안 보인다. 뭐 그 의미지.”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왜 슬퍼하느냐?”라는 겁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고양이가 있었는데 집을 나갔다면, 이게 남의 고양이 같으면요, 아무 감정 없이 이야기를 해요. 근데 우리 고양이가 오년동안 살았는데 집을 나갔다고 할 때에, 그걸 다른 사람에게, 다른 형제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 정도로 슬프다는 것을 니가 좀 동참해 달라, 알아달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게 오스틴의 ‘언어행위론’이라고 하는 거예요. 언어행위론. 언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행위를 유발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돌이 무겁다. 돌이 무겁지 가벼울 리가 있나? 이 말을, 그냥 돌이 무겁다고 하는 것과 앉아서 돌이 무겁다고 하는 것과 공사장에서 돌이 무겁다고 하는 것은 돌에 깔렸다는 뜻이에요. 빨리 치워달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말을 할 때 의도 없이 말을 할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언어행위론 입니다.

그런 해석이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인간의 말도 그렇게 모든 인간들이 말을 할 때에는 무심코 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코. 심지어 꿈속에서도 무심코 무슨 행동을 하지 않거든요. 행동한 것은 말로 옮기고 말한 것은 어떤 행동을 지칭하고. 그리고 어떤 액션을 벌인 것은, 그거는 언제든지 말로 표현이 가능한 액션이기를 원하고 있고.

만약에 이게 매직인데, 매직을 이렇게 툭 던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만약에 모르는 사람 같으면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근데 만약에 지하철 탔을 때 앉아서 매직을 툭 던졌다. 옆에 친구가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한다면, “니 심심해? 뭐 손이 근질근질해?”라고 말을 한다니까요. 말을. 나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행동을 했을 뿐인데, 저쪽에서 말을 한다 이 말이죠.

아침에 아내가 설거지를 하는데, 평소하고는 달리 설거지하는데 툭탁툭탁 막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죠. “뭐? 나한테 뭐 불만 있어?” 그럼 아내가 대번에 하는 말이 “내가 뭐 했는데?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막 던지면서 설거지를 하고. 이렇게 싸늘하게 나온다고요. “아니, 말을 해!” “뭐?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뭐?”라고 하면서 던지고.

행동이 언어에요. 행동이 언어. 세상은 뭐로 만들어졌어요. 말씀으로 만들어졌죠. 그 말씀이 행위로 나타나는 겁니다. 빛이 있어라 해서 빛이 있었잖아요. 하나님 말씀 자체가 행위를 나타낸다 이 말이죠. 그걸 누가 닮았냐 하면 인간이 닮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주는 것이 뭐냐 하면, 지나가는 동물들을 보고 이름을 지으라는 이야기를 맨 먼저 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닮았으니까.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두 사람이 통합이 되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통합이 돼요. 두 사람이 통합되는 것은. 그래서 입 다문 것도 언어에요. 행동의 통합이니까. 그래서 행위가 언어고 언어가 행위라는 것이 오스틴의 언어행위론 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행위를 하면서, 인간들은 행위를 하잖아요. 인간이 행동하는데 인간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중심점이 없어요. 중심점이. 하나에서부터 열이 있다면 거기서 하나의 일관성이, 뭔가 나와야 하는데 그 하나를 못 찾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하는 어떤 말이나 행위에서 중심점이 없는데, 근데 여기에다가 모세율법을 주니까, 자기의 중심점이 없는 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석을 한다고 해석을 해대니, 이 해석이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본인 자체가 우왕좌왕이니까. 본인 자체도 우왕좌왕이니까 이쪽에서 성경해석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도바울이 그 많은 말을 해도 사도바울의 핵심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고전2:2),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만.  자기가 뭐 부활한 것도 있고, 죽음도 있고, 시민권도 있고, 나그네를 섬겨라, 뭐 어떻게 온갖 서로 사랑하라, 그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많은 이야기가 내가 그 중심이 안 된 채로는 그거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편지를 아무리 줘도 그 편지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니 구심점 있나? 니 중심 있어? 니 중심 있어? 없어? 중심도 모르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런 뜻이라 이 말이죠. 참 이게 어렵죠. 사도바울의 편지가 신약성경의 뒷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죠. 그럼 사도바울의 편지 이전에 앞에 두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가복음도 있고 마태누가요한복음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이 내용이 뭡니까?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과 누구의 만남, 그 당시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주요내용이 예수님과 그 당시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일 때, 이 만남은 뭐냐 예수님이 말씀하는 율법해석과, 그들이 해석과의 만남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진공상태가 아니에요. 나름 율법해석을 하고 있었거든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이죠. 율법을 통해서. 구약을 통해서.

그들의 해석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이 같았어요? 달랐어요? 틀렸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의 일관성과 예수님의 일관성이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그럼 일관성이 합치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이용은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그런 사람들이죠. 예수님을 이용해서 천국가려고 할 수는 있지만, 하지만 가장 바뀌어야 할 부분, 핵심적인 중심부분, 가장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 바뀌지 않는 한, 결국은 제자들도 예수님을 내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50년, 60년, 교회 열심히 다녔는데, 정작 사도바울이 말한 핵심이야기를 하니까, 화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용했다고 하는 말은 그들의 일관성 속에, 중심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그들은 믿음소망사랑 다 이야기하죠. 하지만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가 들어있죠. 자기 자신이. 나가 들어 있어요.

왜 그걸 장담할 수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부인을 하려면 부인할 내용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누구를 부인한다?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나를 부인하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은, 중앙에 뭐가 들어있다는 말이에요? 나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성경해석을 뽑아온 거예요. 성경해석 그렇게 해서 나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에 모든 인간들이 다 동조를 한 거죠. 다 합세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지도자로 여기죠. 예수님은 인간들 속에 나가 들어있으니까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장에 광야에서, 이야기를 할 때는 인간 속에 나가 들어있어서, 인간은 나가 들어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지만, 사실은 그 나로부터 시작을 하도록 부추긴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이 있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광야에서 예수님은 사람하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사람하고 만나서 일을 해야 될 분이 사람하고 만나지를 않았어요. 이것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어디로 갑니까? 아라비아로 가죠. 사람을 안 만나요. 아라비아에서 누굴 만났겠어요? 아라비아에 혼잔데 누굴 만났겠어요? 주님 만난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도.

사도바울이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이 사람들(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이미 믿음이라는 내용이 있어요. 믿을만해서 믿은 게 있어요. 믿을만한 게 뭐냐, 내가 잘 된다는 것이 유일하게 믿을만한 거예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냐 하면 믿을만한 게 없어요. 믿음이란 근거가 없는 거예요. 근거가 없는 것을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음의 근거가 돼버리면 그거는 믿음이 아니죠.

왜냐하면 발화의 주체하고 발화행위의 주체가 달라요.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어렵다고 하니까, 다시 쉬운 예를 들게요. 아주 쉬운 예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당신은 목사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선서해놓고, 목사 돼서 지금은 부정합니까? 라고 재판정에서 나한테 이야기를 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성경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우선입니까? 성경이 우선입니까? 성경이 우선이죠. 그러면 나는 웨스터민스터보다 성경이 우선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해서, 성경이 우선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당신들은 지금 웨스트민스터를 안 지켰다고 나를 면직을 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믿는다 하는 것하고 웨스트민스터에서 성경이 제일 우선된다고 하는 것하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건데요. 발화의 주체는, 예수님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이게 발화의 주체다. 발화라는 것은 말하는 것의 주체에요. 발화가 어려우니까 말하기로 쉽게 합시다.

말하기(발화)의 주된 내용이 예수님이 주시다 하는 것이고, 말하기(발화)행위의 주체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를 내가 말하고 내가 믿는다는 거예요. 이게 발화행위의 주체에요. 다르죠. 성경이 최고다 하고, 성경이 최고다 하는 그 웨스트민스터를 내가 믿는다 하고는 다릅니다. 발화의 주체는 예수님이지만, 한쪽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에게 대들었던 바리새인들은 발화행위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겁니다.

근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뭐냐 하면 내가 사는 게 아니에요. 그럼 내가 사는 게 아니라면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내가 살지 않는다가 되는 겁니다. 그럼 내가 살지 않는 것이 모든 해석의 중심이에요. 내가 살지 않는다. 그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었다가 성경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혼자 죽으면 안 되겠죠. 예수님과 같이 죽어야 되죠. 그래서 모든 죽음은, 예수님이 나하고 함께 죽음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점, 구심점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 사도바울이 그렇고 그런 믿음 하나 가진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아까 포도 드셨잖아요? 포도 드셨는데, 포도재배를 한 농부가 하는 말이, “나는 포도 외에는 의미가 없어. 포도가 나의 전부야. 나는 포도 없이는 못살아.”라고 했다면, 이럴 때는 지금 자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지금 포도에 미쳤고, 포도 때문에 귀촌했고, 포도농사에 30년을 보냈고, 뭐든지 지금 뭘 증거 하느냐 하면 포도를 자랑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옆에 있다가 너는 지금 포도농사 해서 니가 살라고 하지?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지금 포도에 빠져있는 그 사람의 본심과 안 맞죠. 서로 안 맞는 거예요. 이쪽은 포도를 자랑하고 있는데, 니는 포도농사해서 그저 밥이나 먹고 살자고 한다 해서, 그냥 남들처럼 자기 사는데 급급한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사람은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포도 없이는 못 살아.”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포도 없이는 차라리 죽는 게 더 좋아.” 이렇게 할 정도로.

흔히 드라마에도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나 당신 없으면 죽을 거야.” 뭐 이런 이야기. “나 당신 때문에 내가 존재해.” 이런 거. 남자가 한 여자한테 푹 빠져서 모든 일이 그 여자한테 다 쏠리죠. 그리고 여자한테 일이 벌어지면 김비서가 왜 이럴까? 이러고. 김비서가 왜 이러지? 왜 그럴까? 또 친구한테 가서 김비서가 왜 그럴까? 하고 물어요. tvn에 이런 드라마가 있어요. 재벌 2세가 그 비서한테 빠져가지고 하는 내용입니다. 어제로 끝났어요.

발화행위의 주체하고 발화주체가 이게 다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런 말이 있죠. 달을 가리키니까 달은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고 하는 그런 취지의 내용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발화행위의 주체에서 발화주체로 인간이 스스로 바뀔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뀔 수가 없어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자기위주에요. 인간은 자기위주다 이 말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인간 자체가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위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런 마음을 준 것은 악마에 의해서 이미 우리가, 너가 뭐처럼 되리라?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이미 나가 나오잖아요. 나는 뭐다? 나의 서술은 신이다. 왜?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이 문장, 서술자체가 시작점, 구심점입니다. 나는 뭘 해도 갇혀있다. 나는 뭘 해도 의롭다. 나는 정당하다. 조폭이 되도 정당해요. 나쁜 짓해도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어요.

남들이 아무리 아까워도 소용이 없어요. 나는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어요. 오천만원 먹었다. 그래서 나는 우사스러워서 자살했다. 뭐 어쩌라고? 아이고 아까워라 당신이 죽은 것은 노동자의 죽음이고, 뭐 난리도 아니에요. 삼만 오천 명의 조문객들이. 나라 혼자서 다 한 것처럼. 그 사람 없으면 나라 안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도대체 무엇이 진정 슬픈 겁니까? 이야기하고 나니까 참 재밌네. 지금 사람들의 모든 발화행위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무엇이 진정 슬픕니까?” 이것과 같은 말이, “무엇이 진정 두렵습니까?” 이게 인간의 행위를 낳는 거예요. 인간이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인간이 행동을.

휴가 돼서 놀러간다. 놀러 갈 때 그냥 놀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아시아나 탔는데 아시아나 기내식이 없다고 해서 이게 문제가 되고. 라오스에 놀러갔는데, 댐이 터졌는데 댐 밑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을 수도 있는 문제고. 또 식구 세 명이 갔는데 그 중 한명이 배 아프다고 해서 다시 집에 갈란다고 할 수도 있는 문제고.

모든 행동을 할 때는 그 바닥이 곱게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고 두려워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것은 이미 뭘 설정을 했느냐 하면, 나는 완벽해! 나는 완전해! 아니 완전해야 돼! 왜? 나니까! 나는 무조건 흠 없어야 되고,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되고,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돼! 이유는? 나니까! 나는 무조건 천국에 가야돼! 나는 천국 가고 싶어 하니까!

이런 것들이 뭐냐 악마로부터 두려움과 슬픔의 표적이 되는 겁니다. 이건 아무리 해도 스타트가 나에요.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복음을 믿어도 누가 믿어요? 발화행위 주체가 누구냐 하면 나라니까요. 나.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믿음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믿음의 주체죠. 예수님이 성령을 선물로 줘서 믿게 됐잖아요. 그럼 누가 빠져야 돼요? 나는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장로님! 답변해보세요. 답변이 간단한데요.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빨리 진도 좀 나갑시다.    

주님이 믿음의 주체라면 나는 믿음의 주체가 아니죠. 그럼 내가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되잖아요. 그게 믿음이 아닙니까? 장로님이 맨날 저는 안 믿긴다고 하잖아요. 안 믿기는 게 믿음이에요. 왜 자꾸 발화행위의 주체가 되려고 합니까? 빵꾸나야지. 여기 혹시 양말 빵꾸난 사람 없습니까? 빵꾸나야 돼요. 내가 안 믿어야 돼요. 내가 믿어버리면 사단 나는 거예요. 더운데 지옥이나 가라. 믿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믿어서. 얼마나 안 믿었으면 믿으려고 할까요?

그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왕 어렵게 한 거 어렵게 합시다. 외재적인 것이 내재적인 것으로 삽입이 될 때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초, 기반이 되는 겁니다. 나 말고 외부에서 날아온 것이 내 내부에 있을 때, 비로소 그 내부가 신실하고, 튼실하고, 탄탄한 내부가 되는 겁니다. 그 외부가 없으면 또 내가 내 내부를 더 내부적인 나로 내가 관리해야 해요. 이거는 슬픔과 공포, 항상 공포스럽고 슬퍼해야 할 대기상태로 있는 겁니다. 5분대기조처럼. 깜짝깜짝 놀랄 준비를 해야 돼요. 집에 청심환, 물로 된 것이라든지 준비해놓고 먹을 생각을 해야 돼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 라는 마지막에 보면 결혼식을 하는데, 그 남자가 평소에 남자는 대단하다, 완벽하다, 나는 수천 명 앞에서도 연설할 수 있다고 이렇게 큰소리를 쳐놓고는, 막상 자기 결혼식에서는 자기 부인 김비서한테 떨지 말라고 해놓고는 자기는 막 떨고 있어요. 그러니까 김비서가 청심환 하나 드릴까요? 지금 청심환이 어디에 있어요? 비서기 때문에 항상 가방에 준비를 해놓고 있으니까. 청심환 먹고 겨우 안정이 된 거예요. 진정이 된 거예요. 항상 벌벌 떨어요. 꼭 우리교회 기도순서 돌아오면 벌벌 떠는 것처럼. 이야기 들어보면 다른 교회에서 30분 동안 기도했던 사람들이랍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기도하면 찬스가 왔다고 해서 10분, 20분은 그냥 넘어갔던 사람들이에요. 근데 우리교회에 와가지고는 떨고 있어요.

그게 정말 다행스러운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겁니다. 이제야. 우리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상태가 될 때, 그래도 그렇게 되는 그것이 주께서 원했던 목표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 성도를 만들 때 개뿔도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할 때 최고의 작품입니다. 최고의 작품이에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린애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 외손녀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죠. 외손녀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어요. 집에 있을 때는 엄마가 다 해주니까, 음~! 음~! 이러면 다 해줬어요. 그런데 유치원을 딱 가니까, 유일하게 한국애에요. 독일 애들 중에서. 거기서 밥을 주고 할 때는 줄을 서거든요. 자기보다 나이가 다 많아요. 가만히 눈치 보니까 이거는 자기가 알아서 하거든요. 그때부터 방언이 터져요. 한국말 열 개를 해가지고, 자기가 독일 애들한테 가자! 가자! 인솔해서 줄서고 했대요. 이제는 가만히 있어서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요구를 해야 되고, 발화행위를 해야 되는 거예요. 발화행위를 하지 아니하면, 행위라는 이름의 언어를 발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사회성을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말을 하지 아니하면 얻을 게 없다는 거예요. 말을 한다는 것은 바로 해석을 의미하고 그 해석은 나를 위한 해석일 뿐입니다. 모든 해석은. 행동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성경의 모든 해석을 모순 없이 완벽하게 율법을 해석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어디를 대번에 건드리느냐 하면, 본문 26절을 한번 봅시다. “너희가 모세의 책 중에서” 어느 대목을 이야기했습니까? “가시떨기에 관한 글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죠.

자, 주님께서 정말 어려운 숙제를 그들에게 준 거예요. 가시덤불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활을 논하라는 문제를 출제하신 거예요. 출애굽기 3장에 있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에서 부활을 끄집어내라는 질문을 한 겁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죠. 이거 맞춘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서울대학생들도 못 풉니다. 왜 못 푸느냐 하면 인간은 주어진 재료가지고 재료를 도출하는 거예요. 이미 있음 가지고 있음에서 있음을 통합시킨 내용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이야기를 해요. 있음을 가지고 없음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내라는 질문을 던진 겁니다. 있음에서 없음을 끄집어내려면, 이 문제를 풀려면 이 있음을 뭐로 전환시켜야 하느냐 하면, 이 있음을 없음의 일종이라고 여길 사람만 여기서 통합된 없음이 나와요. 이 통합된 없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있는 것도 하나의 없음에서 전부 다 파생된 것이라는 논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 근거를 미리 제시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사람들의 일상 가운데서 그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 아주 독재자적인 그런 성품을 갖고 있는 회사 사장이 직원들 앞에 놓고, “왜 꿀을 내 앞에 안 갖다가 놔!”라고 하면서 갑자기 꿀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꿀을 가져오라고 사전에 지시했다면, 있음이죠. 그러면 그 비서가 꿀을 왜 안 갖다가 놓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일 없다가 갑자기 꿀을 내 앞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비서가 “그런 지시가 없었는데요?”라고 하죠. 그럼 사장이 “내가 지금 무릎이 아픈 게 안 보여?” 이런다고요. 무릎 아프면 약 발라야지 꿀을 왜 발라요.

그러나 지금 이 사장은 일방적이에요. 나이가 칠십이 넘어가지고. 옛날 민간요법을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는 것을 가지고 알도록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냥 억지를 부리는 거죠. 여러분들이 아시죠?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서에서 억지를 부린 거 아시죠. 꿈을 이야기하고 해석을 하라고 하면 구라라도, 어떤 구라라도 해석을 할 수가 있는데, 꿈을 지가 꿨잖아요. 내 꿈 찾아내라는 거예요. 꿈이 물건입니까? 지 꿈인데. 그걸 어디서 찾는데요? 아니 자기가 꾼 꿈을 쟤들이 왜 찾아요?

그래서 밑에 있는 신하들이 하도 너무해서 반발을 하죠. “임금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하나님 말고는 임금님이 꾼 꿈을 알아낼 재간은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그 임금이, 요새 말로 하면 사장이 하는 말이 “니가 그러면 월급을 왜 받아먹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월급을 왜 받아먹느냐? 니들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나한테 전달하는 짓을 했잖아. 그런데 같은 하나님이 한 일에 너희들이 난색을 표하면 그동안 나한테 사기를 치고 월급 받아먹은 것밖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장이 화가 나서 다 죽여 버렸잖아요. 그 말은 뭐냐,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 이름 빙자해서 돈 빼먹었습니다, 라는 말은 대신 한 거예요. 그렇다면 너희들 같은 존재들은 필요가 없으니까, 내 꾼 꿈 해석을 하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그걸 아무렇게나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꿈 당사자가 무슨 꿈인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하면 새롭게 기억이 난다 이 말이죠. “그래, 맞아 그 꿈이야!” 이렇게 할 공산이 많거든요. 그게 뭐냐, 내재성이 될 경우에만 이 세상에 어떤 변화에도 구애받지 않는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변화에서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경우에도 슬퍼해야 할 필요성이 없고, 어떤 경우가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외재성이니까.

내가 나 잘되기 위해서 계획을 잡은 것이 아니고, 나를 없는 요량하고 쳐들어온 그 무엇이거든요. 외재성은 나를 무시하고 들어왔어요. 외재성이 와서 내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이제는 내가 바깥에 나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먼저 와서 나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뭐로?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없는데서 만들게 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고 주님을 찾아가는 그런 모든 방식은 그 앞에서 사정없이 작살이 나야 됩니다. 부정되어야 해요.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나는 부정하다.” 이게 아니고, 그동안 내가 시도한 발화의 행위의 주체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주신 것과 이게 같이 동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믿음이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해요? 없애야 돼요. 소망이 있는 것은 없애야 돼요. 사랑한 것도 그건 사랑이 아니고 미움이었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모든 것은 추방되어야 합니다. 뭐로? 배설물로. 다 빠져나가야 하죠. 빠져나가게 되면 처음에는 “아이고, 오! 아까워라. 내   게 빠져나갔네.” 이러는데, 그게 내 게 아니고 주님께서 들어오기 위한 자연적인, 결과적인 현상이죠. 들어왔기에 빠져나간 거예요. 들어왔기에. 주님 것이 들어왔기에 내 것이 배설물로, 쓸데없는 것으로 빠져나간 겁니다. 자식이 내 자식이었는데 내 자식이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었습니다. 내 아내, 남편, 모든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신 문제의 물음을 그 당시 사람들이 풀 수가 없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하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뭐 인정하나 인정 안 하나 관계없이 예수님의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26절을 다시 봅시다. 풀 수 없다고 하니까, 풀 수 없는 것에 서서히 도전의식이 생기죠.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이래 되어 있어요. 죽은 자가 살아 난 것을 의논할진대,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의논할 때에 두 가지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첫째 견해가 뭐냐 하면은, 1. 죽은 자가 살아난다. 둘째는 2. 죽은 자는 살아나지 않는다. 1번은 바리새인 견해고, 2번은 사두개인 생각이죠. 얼른 보면 서로 반대가 되어야 될 입장이죠. 반대가 되겠죠. 그러면 주님은 어느 쪽입니까? 주님은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니에요. 둘 다가 아니에요. 주님은 지금 사람들이 아무리 해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요. 주님의 이야기에 결론은 나와 있어요. 너는 모른다. 이게 결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믿지 않는다. 너는 사랑할 수 없다. 너는 소망을 가질 수 없다. 너는 모른다. 이게 결론입니다.

너는 모른다는 그런 결론을 이미 가지고 주님은 우리한테 추궁을 해요. 니가 너를 모르는데 니가 만약에 너를 안다면 너가 모른다는 결론을 내봐라 이 말이죠. 이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미리 정답을 이야기할게요. 뭐냐 하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에요. 인간들이 예수님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은 자가 어떻게 삽니까? 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누구한테? 바리새인은 사두개인한테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사두개인은 바리새인한테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한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예수님한테. “어떻게 죽은 자가 삽니까?”(사두개인 입장) 또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그 정도는 내가 인정합니다.”(바리새인 입장)라고, 예수님보고 둘 다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결론은 뭡니까? 니가 1번을 하든, 2번을 하든 니는 부활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이에요.

부활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은 뭐냐 하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봤다고 해서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모든 죽음이나 부활이나 뭐든지 항상 출발점은 외재성, 예수님부터 출발을 해야 해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이건 한꺼번에 다 알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 나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앎으로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나를 알고 아버지를 알면 구원받아요.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돼요.

그럼 예수님을 안다고 제대로 알게 되면 무엇에 대해서 모르는 게 됩니까? 제가 아까 질문을 했잖아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 무엇에 대해서 모른다? 나에 대해서, 내가 누군지는 모르는 거예요. 몰라야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 인생이 너무 힘들고 빡빡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자식에 대해서 힘든 것은 내가 자식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내가 미리 힘든 겁니다.

노회찬 죽었다고 왜 슬퍼합니까? 노회찬한테 어떤 기대를 갖고 미련을 갖고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슬퍼한 거예요. 슬퍼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기대를 했어요. 뭔가 기대를 했기 때문에 슬퍼한 거예요. 무서워하는 것도 뭔가 은근히 기대를 했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겁니다. 내 집, 내 가정, 내가 가진 재산, 이 모든 게 다 없어지면 어떡해? 뭔가 유지해야 된다는 기대가 있다 이 말이죠. 기대가 있으니까 그게 계속 누수가 되고, 깨지고 없어 질까봐 겁나는 겁니다.

근데 주님의 방식은 뭐냐, “니가 없어도 돼! 이 바보야! 원래, 니 것도 아니고 남의 건데 니 것이라고 우겼던 니 자체가 실수한 거야.” 니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거든요. 두 자로 이야기하면 후딱 이거든요. 후딱. 살긴 살았는데 후딱 지나간 거예요. 장로님, 지금껏 사시면서 후딱 갔죠? 이야기하게 되면 산 생활보다 오래 지났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후딱 간 거예요. 왜? 뒤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 현재 내 몸밖에 없어요. 내 몸밖에 없어요.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들뢰즈가 시간을 언급하는데, 시간에 세 가지 종류가 있어요. 1. 현재의 경험과 시간이 맞지를 않는다. 내가 경험한 것과 흘러간 시간과 안 맞는 것. 2. 과거라고 하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지속된 순수기억. 인간은 현재는 모르고 항상 과거 것을 가지고 현재라고 우겨요. 과거의 표상이 현재에요. 현재는 몰라요. 모르는데 자꾸 현재라고 우겨요. 내가 현재라고 우기는 시간관념과 경험은 과거경험이거든요. 이 둘 사이가 삐거덕거리는 거예요.

슬프다, 즐겁다, 기쁘다, 좋다, 아프다, 행복하다, 전부 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경험한 것 때문에 생긴 거예요. 경험한 것과 지금의 내가 안 맞아서 내가 슬프고 더 오버되면 기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현재가 되게 부산스러워요. 되게 바빠요. 과거는 아무리해도 뚝뚝 떨어져있는데, 그 단편적인 경험의 과거를 돌아보면 전부 다 한데로 이어져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돼버렸어요. 아무 상관도 없이 일어난 일도 돌아보게 되면 전부 다 하나로 편집되어 있어요. 하나의 스토리, 이야기로.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내가 5일 전에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거든, 왜 만났는데? 왜 만난 것은 모르겠고. 어떻게 만났는지는 모르겠고 하여튼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치 내가 원해서 필히 동창생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해석이 돼버려요. 나로 인하여 흩어져 있는 과거가 하나로 이어진다니까요. 자기 자신의 자아가 한 덩어리잖아요. 한 덩어리 된 자아를 자기 잘남과 정당성을 이야기할 때는 과거가 하나로 이어져야 됩니다.

예를 들면 광산김씨, 광산김씨 모르죠? 인터넷 치면 나와요. 노끈 장사 광산김씨, 한국의 표준적인 허세와 허풍을 갖고 있는 광산김씨. 부인은 자체적으로 이뻐. 아들 둘은 하나는 성인이니까 안 들어오는 백수, 하나는 가게 준비하는 백수, 하여튼 둘 다 백수에요. 이 광산김씨가 꼭 과거이야기를 하는 것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전부 다 자기가 이만큼 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이야기만 해요. 하나의 이야기가 자기 존재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아내를 꼬실 때,  라면 먹으러 갈까? 해서 꼬셨다고 하고. 그럼 부인한테 왜 그런 남자하고 결혼 했는가? 라고 물으면, 나 아니면 죽는다고 해서 남자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내가 결혼해줬다고 하는 겁니다. 남자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진짜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근데 과거는 이렇게 하나로 이어집니다.

세 번째, 3. 미래인데, 미래는 뭐냐 하면 순수과거와 그리고 순수 과정을 표상하는 그 표상과의 차이가 벌어질 때에 이게 미래다. 다시 말해서 순수과거는 항상 뭘 유발하느냐, 망상을 유발합니다. 헛된 망상. 이게 미래에요. 이게 바로 들뢰즈의 세 가지 시간의 종류입니다. 핵심은 뭐냐 하면 인간은 시간을 다룰 수가 없다.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할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말하기를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반복되고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일리가 있죠. 그렇잖아요.

일상을 보세요. 같은 일을 또 하죠. 왜냐하면 안심되는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이미 안심된다고 하니까 그 일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장사는 단골장사가 아닙니까? 단골이 끊어지면 그 가게는 문 닫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반복이 안 돼요. 그래서 계속 꾸준히 오니까, 가게 문을 닫고 싶어도 못 닫아요. “장사 안 합니까?” 이럴까봐 겁나가지고. 인간은 하던 일을 계속 해요. 그걸 참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인생의 지루한 반복을 참아내야 한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8-07-29 09:24 
광주강의20180727b 마가복음12장 26-27절(예수님의 과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다른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지도 않고 또 살아날 대상도 아니고 그런 겁니다. 왜냐하면 거의 하나님이 “너희들이 나를 아느냐?”라는 식으로 지금 예수님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은 예수님 본인이에요. 예수님 본인을 앞두고 지금 왈가왈부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인간들이 왈가왈부하면서 해석하는 이유가 예수님과의 접점이 안 된 상태에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그러니까 누구 말이 맞는 겁니까? 부활을 안 믿는 사두개인들의 논리가 맞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죽었다가 부활해버리면 그 앞(막12:20-23)에 뭐냐 하면 죽은 일곱 형제가 있는데, 형이 후사가 없이 죽고 그래서 시동생하고 또 결혼하고, 하다보면 결국은 하늘나라에 여자는 하나인데 남편은 몇 명이 돼요? 일곱 명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논리를 봤을 때, 그건 불합리하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은 없다고 사두개인이 지금 부활 없음의 근거에 도전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바리새인은 거기에 답변이 됩니까? 안 됩니까? 답변이 안 되죠. 그냥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해버리는 것이죠. 근데  사두개인처럼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이런 불합리한 사태가 벌어진다고 그렇게 하는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냐 하면, 지금 이 사람들이 부활한다면 그런 경우가 있겠죠. 근데 사람들이 부활할리는 없어요. 부활은 누구한테만 해당된다? 예수님한테만 해당이 되기 때문에. 자기들은 지금 자기들이 부활한다고 우기면서 부활이 될 경우와 안 될 경우, 이 두 경우 중에서 논리적으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지금 진리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이죠. 부활당사자는 예수님인데.

그래서 25절에 봅시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이야기를 진즉에 하시지. 진즉에. 이 이야기를. 지금 이 이야기를 누가 제일 먼저 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는 이 이야기를 누가 제일 먼저 언급한 거예요? 구약에 그런 것 없어요. 예수님 본인이 언급한 거예요. 그럼 예수님 당사자만 부활을 알아요.

그럼 부활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뿐이에요. 다른 사람의 부활은 없어요. 왜냐하면 부활 때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영어로 마델Model. 예수님의 몸이 부활이에요. 근데 자기들은 뭐냐 하면 아담의 몸을 가지고 부활을 논하고 있는 겁니다. 아담의 몸이 부활을 할 거냐? 아담의 몸은 부활이 안 되죠.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잖아요. 흙에 속한 것은 흙으로 끝나요.

지금 사도바울은 몸을 두 개를 제시하는 거예요. 그러나 두 개의 몸을 제시하는 것은, 지금 구약만 있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입니다. 왜? 그들에게는 두 개의 몸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가 있다. 하나님이 부활하면 우리가 부활하고 하나님이 부활이 없다고 하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과 내 몸 하나, 그게 전부에요. 제 3의 몸이 끼어들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 3의 몸이 끼어들지 아니하면 해석이 안 된다는 겁니다. 구약 전체의, 율법 전체의 해석이. 이 끼어든 몸을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외재성이라고 한 겁니다. 외재성. 외재성이, 외부에 있는 것들이 내 내부에 꽂히지 아니하면 이 내부는 외부와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무슨 몸도?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왜? 근거가 뭐냐, 예수님의 죽은 몸이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되었던 그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죽을 몸도 살아난다 이 말이죠.

근데 그 몸이 살아나느냐? 아니에요. 이 몸이 어느 몸으로 바뀌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부활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땅에 속한 형상이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바뀐 것이 부활이에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면 그 몸이 어떤 몸이다? 곧 내 몸이에요. 성도 본인 몸이에요. 성도 본인 몸이라니까요.

제가 군에 있을 때, 남자들은 압니다. 우리는 군 생활을 3년 가까이 했어요. 34개월 했으니까. 4개월 훈련받고 30개월 남은 채로 자기가 근무할 부대, 자대라고 합니다. 자대에 딱 오니까, 옛날 제대할 때는 개구리군복이라고 해서, 예비군복을 미리 딱 줘요. 그러면 제대 사흘 전부터 그걸 다려 입고 자기 후배들한테 다 다니면서 자랑질을 해요. “야, 니 몇 개월 남았냐?” “예! 30개월 남았습니다.” “나 같으면 죽어버린다. 아이고, 인간아! 니 30개월 우에 할라고?” 이게 격려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약을 올려요.

그러면 후배로 온 군인들은 언젠가는 세월이 지나면, 봄여름가을겨울, 또 봄여름가을겨울, 또 눈 오고 아지랑이 피고 날씨 덥고 낙엽지고 이러면 가겠지. 언젠가는 오겠지. 언제? 예비군복을 입을 때가 오겠지. 그랬는데 제가 예비군복을 입을 때가 왔어요. 옛날 기억이 나는 거예요. 선배들이 예비군복 입고 약을 올렸을 때 졸병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알고 저는 군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어요. 이게 자기 의인데. 군복을 입지 않고, 아무도 안 보는데서 입고 그냥 나와 버렸어요. 그 사람들의 사기진작에 지장을 주어 국방에 해가 되면 안 되기 때문에. 혼자 제대해서, 눈 오는 날, 3월 24일 하여튼 잊지도 않아요. 혼자 나왔다 이 말이죠.

현재 이 몸은 포기해야 될 몸이고 버려야 될 몸이에요. 당뇨에 걸렸든지 뭐 관절이 안 좋든지. 이 몸은 흙에서 생산이 된 거예요. 재료가 흙이라니까요. 재료가 흙인 것은 하늘나라에서 부활을 안 해줍니다. 사람들이 뭘 모르는가 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며 무덤을 열고 나온다고 하니까, 화장하면 안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매장해야 되고, 무덤을 여니까. 고기한테 물려서 상처 나면 안 되고. 근데 박테리아에 의해서 다 분해가 된 그 이야기는 안 해요. 그래서 화장하지 말고 그냥 묻으라고 해서 후손들의 애를 먹이는데.

흙으로 난 것은 흙으로 그냥 가야 돼요. 왜냐하면 지금 우리 몸이 흙이기 때문에 그래요. 흙인데 이쪽은 약간 흰 흙이라니까요. 우리의 모든 게 다 흙이에요. 문자적으로 보세요. 저는 지금 말하고 있는 흙덩어리에요. 창세기 3장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흙으로 났으니 뭐다? 흙으로 가잖아요. 흙으로 났으니 그 경과도 흙이고, 20년 살아도 흙이고 50년 살아도 흙이고, 90을 살아도 흙이고, 돌아갈 때도 역시 흙이고. 그냥 끝나요. 외부성이 없으면 그냥 내부적으로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그냥 가야 돼요.

흙이 무슨 고민을 하고, 흙이 무슨 슬퍼해요? 흙인데. 착각도 보통 착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흙이라서 흙(흑)! 흙(흑)! 흙(흑)! 거리면서 웁니까? 자살하던 뭘 하든 흙이에요. 그건 자살하기 전부터 이미 죽은 자에요. 노동운동을 하던 뭘 하든 흙(흑) 흙(흑)거리면서 살아야 돼요. 하여튼 장례식이 미워요. 이 장례식 때문에 복음 다 깨놨어요. 장례식을 어느 정도로 반겨야 되느냐 하면, 결혼식만큼 반겨야 돼요. 왜? 자기의 진짜 본 모습은 장례식을 통해서 알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도서 7장 2절에 나오잖아요. 결혼식에 가지 말고 차라리 장례식에 가라 이 말이죠. 그게 니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강의는 쉬워요. 모든 말씀은 흙한테는 해당이 된다? 안 된다? 해당이 안 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오셔서 흙을 흙이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물론 그전에 창세기 3장에서 흙을 흙이라고 이야기를 했죠. 근데 흙인 인간이 자칭 인간이라고 이 말을 안 믿는 거예요. 나는 저 개보다 낫고, 우리는 인간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고, 존엄성을 갖고 있다고, 이 돼먹지도 않는 소리를 하면서 자기는 흙이 아닌 줄로 알고 있어요.

주님이 오셔서 “니는 이래도 흙이 아니야? 니는 이래도 죄인이 아니야? 이래도 니는 안 죽어야 돼? 죽어야 돼!” 뭐, 천국이고, 소망이고, 뭐 어디서 그런 주제 넘는 욕심을 내면 안 돼요. 흙은 천국이고 지옥이고 지 소관으로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주님 저는 남자로 태어나게 해주시고, 여자는 왜 안 됩니까? 왜 여자냐? 왜 남자냐? 왜 우리 집은 애가 왜 셋입니까? 둘입니까? 쓸데없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6장에 주기도문의 앞에 보세요. 이방인들의 하는 기도가 뭡니까? “이것주세요. 저것주세요.”라고 하잖아요. 같은 마태복음 6장을 보면 들풀도 키우고 참새도 키우고. 어디서 달라, 달라고 하느냐 이 말이죠. 달라고 하는 그럴 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키워주니까 크는 거예요. 들풀이 기도하는 거 봤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기도라는 것이 뭐냐 하면, 기도란 주께서 쓰시옵소서! 주의 원대로, 뜻대로, 마음껏 주가 쓰시는 대로 헌신케, 일임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에요. 모든 기도가. 그래서 기도할 때 뭐라고 합니까? 기도는 니 뜻대로 하지 말고 누구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내 아버지와 아들이 간 그 뜻대로 하면 모든 것을 이룬다. 뭔가 이룬다는 말은 그 뜻이 합당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주 안에서 기도하라고 해요. 그걸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고 해요. 성경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도 이게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은 자꾸 자기 자신부터 출발을 하려고 해요. 자기 자신부터. 모든 성경말씀 대로 그냥 흙으로 가면 되는데. 자, 우리 인간의 출발이 흙이에요. 흙인데, 인간이 마귀의 시험에 들어가지고 흙이 아니고 자기가 뭐라고 우깁니까? 인간이라고 우기잖아요. 인간이라고 우기는 것도 주께서 용납을 해줘요.

이걸 왜 용납을 해주느냐 하면 언약 때문에 그래요. 아담과의 언약 때문에 인간이라고 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잠시. 하지만 더 근원적인 원칙이 있죠. 흙으로 돌아갑니다. 언약 때문에 잠시 인간으로 다루지만 아담과 예수도 뭐 인간이잖아요. 그거는 뭐 언약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잠시 인간되었다가 흙으로 다시 환원이 되는데, 그럼 흙으로 그냥 가면 되는데 왜 언약이 오느냐, 흙속에 언약이 투입이 되게 되면 언약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언약을 완성하신 분이 들어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흙으로 만든 육신을 투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무덤에 있을 수가 없어요. 다윗은 무덤에 있어도 예수님은 무덤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어떤 무덤이냐 하면 빈 무덤이에요. 빈 무덤. 그럼 인간은 뭐냐, 우리 성도는 뭐냐, 예수님을 위해서 빈 무덤을 제공하는 존재가 우리에요.

성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을 모시는 빈 무덤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냥 성도는 무덤이에요. 빈 그릇이에요. 빈 그릇. 빈 무덤인데, 안에 내용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죠. 주님께서 쓰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써 성도가 된 겁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도 쓰일 거고. 떨어지지 않아요. 주께서, 외재성이 나를 점령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악한 짓을 해도 이게 안 떨어져요.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이게 조립이 되어 있기 때문에 떨어지게 되어 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물건은.

그러나 초월적인 체계가 되면 안 떨어지는 겁니다. 안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초월적인 체계에서. 우정, 사랑, 낭만, 이런 것은 안 떨어진다고요. 그걸 무슨 수로 분해해서 떨어지게 합니까?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될 때, 그 한 몸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서 한 몸이 된 게 아니에요. 그냥 한 몸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남자, 여자로 분해되는 것이 한 몸이 아니에요.

그 한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잠시 한 몸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남자, 여자, 아담과 하와를 빌려온 거예요. 사실 이 이야기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은 이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하는 이야기라서 그런다고 저는 좋게 생각합니다. 어려운 건 아니에요. 자식이 있으면 자식을 사랑하게 되어 있죠. 그럼 자식이 내 말을 안 들으면 자식이 갑자기 미워집니까? 그때는 미움도 사랑이에요. 자식이 있어서 생겨버린. 자식이 없을 때는 생기지도 않는 자식사랑이에요.

자식이 없어져도 뭐는 남아 있어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세월호가 6억 받아놓고도 계속 개기잖아요. 4억에다가 2억 더 줘서 6억이란 말이죠. 교통사고도 그런 교통사고가 없어요. 그렇게 끈질 긴 교통사고가 없어요. 그래서 뭐냐, 죽으라면 단체로 죽어라. 그래야 오래 간다. KAL카알기858기에서 죽었던 사람도 돈 더 얻겠다고 지금 데모하고 있잖아요. 마유미(김현희)를 고소하고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이 오게 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괴물이 돼버려요. 언약 안에서.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언약이 들어있으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해코지하는, 예수님께 근원적으로 대드는 주의 원수가 인간을 통해서 재현되어야 합니다. 발휘되어야 해요. 인간이 전쟁의 중심 터에서, 예수님과 악마는 인간을 전쟁터로 삼아서 악마와의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은 뭣도 모르고 멍청하니 있고.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수련회에서 할 것이라 하기가 아까운데 특별히 해드려야죠. 마태복음 12장에서 고정되어 있어요. 세간살이는 그냥 자기 자리에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날고뛰고 뭘 해도 인간은 그냥 제자리에요. 하나님의 언약 체계의 구조에서는 인간은 꼼짝달싹도 못하고 제자리입니다. 그냥 제자리에 박혀있는 거예요.

인간의 주인은 따로 있어요. 악마에요. 악마를, 아까 뭐라고 했어요? 외재성, 바깥에 존재하는 분이 오셔서 담 타넘고 와가지고 이걸(악마를) 묶어놓고 여기에 고정되어 있는 것(세간살이)을 빼가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12장 31절을 한 번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게 뭐냐 하면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이잖아요.

3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구분했죠. 이 세상에서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나 오는 세상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성령이 오는 세상이 오게 돼버리면 인간은 흙으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지옥으로. 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그 구조 내용이 확대됐기 때문에.

그냥 예수님이 안 오면, 불교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불교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그냥 화장을 하죠. 성철스님 불태웠잖아요. 그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이 언약의 내막을 다 모를 때는 눈에 보이는, 나타나는 가시적인 것으로 수습해가지고 인간의 진리 체계를 구성한 거예요. 이 세대는. 그래서 이 세대는 예수님을 거역해도 사함을 받는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확대를 시킨다? 성령까지 오게 해버리면 이거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오는 세대가 돼버려요. 오는 세계는 언약이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상식과 기본을 더 능가하는 세계에요. 외재성이 내재성을 완전히 점령하는 시대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가는 겁니다.

흙이라면 차라리 못 살면 죽으면 되죠. 흙인데.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흙인데. 만약에 제가 나이 90넘어서 고통스럽다, 흙일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링거 다 뽑고 자살하죠. 누구처럼 창문 열고 뛰어내리든지. 자기가 암이 걸린 걸 알고 창문 열고 뛰어내린 유명한 철학가가 있어요. 들뢰즈. 총 가지고 자살한 유명한 까뮈도 있잖아요. 장총가지고 자살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자살하라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자살 안 하고, 누구보고 하느냐 하면 그 유명한 시인 고은. 알아서 자살하라고 분위기 잘 맞춰줬는데도 자살은커녕 10억 내놓으라고 고소하고 미투 그 이야기에요. 죽으라는 놈은 안 죽고, 누군 조금 자존심 상한다고 죽어버리고.

이래나 저래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단순히 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한 그 사람들은 뭐냐, 단순히 흙이 된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만 눈을 지그시 감으면 된다는 거예요. 눈 감지 말고 안경에다가 거미줄을 쳐놨는지, 하여튼 나 하나 눈 감으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없어지겠지. 그래서 자살한 겁니다.

근데 그럼 지옥은 어떻게 할 거예요? 지옥은? 요새 이렇게 더운 것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이거든요. 제가 장담합니다. 덥더라도 아마 겨울은 올 거예요. 희망은 있잖아요. 더워도 겨울이 온다는 것. 12월에도 40도 될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아무리 열대성 고기압이라도 12월까지는 머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온갖 빽을 다 써도 안 돼요. 거기서 아무리해도 못 빠져나와요.

부자가 뭐가 아쉬워요? 물 한 방울이 그리워요. 지옥에서.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생수 물 한 방울을 살 거예요. 이 의미는 뭐냐 하면 부자는 실은 거지라는 뜻이에요. 부자는 실은 거지다. 부자가 되게 큰 부자 같지만, 언약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주님 안에서 보면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어요. 왜? 물 한 방울도 없으니까. 물 한 방울의 의미를 모르니까. 이게 얼마나 천국 가서 귀한 것이라는 것의 의미를 모르니까.

사실은 성령언급을 할 때 이 이야기를 할 거예요. 왜냐하면 사도행전 본문에 성령이 나오기 때문에. 다만 앞에 붙어줘야 돼요. 주께서 허락하시면. 단단히 들어야 됩니다. 이걸 놓치면 안 됩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하라고 해도 에어컨 나가 버리면 못하죠. 다시 마가복음 12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26절), 이거는 예수님 본인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이야기한 거예요. 모든 말씀은 인간이 가져갈 것이 아니고 누가 가져가야 돼요? 예수님 본인한테 가져가서 본인이 나중에 완성이 되거든, 그때 성령이 오시거든, ‘아! 말씀은 이 몸 살리려고, 이 몸이 잘 되기 위해서 이 몸이 행위로 지킬 말씀이 아니었고,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셔가지고 혼자서 다 이루시고, 그 다음에 그걸 은혜로 주신 자는 천국에 가고, 은혜 안 주게 되면 그냥 평소에 사는 대로 지옥 가는 거구나.’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오는 세대는 천국이고,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오는 세대에 지옥 가는 거죠. 문제는 성령이 오고 안 오고가 문제에요. 그럼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성령을 받느냐,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성령은 불신자나 신자에게 공평해요. 둘 다 뭐냐 하면 심판을 해버립니다. 신자도 심판해버리고 불신자도 심판해버려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기본 재질이 흙이기 때문에. 흙이라는 말은 아까 이야기를 했죠. 언약 안에서는 어디로 가야 된다? 지옥가야 될 존재. 같은 말이에요.

따라서 성도는 지옥가야 하는데,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은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본인이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외부에서, 외재성이 그냥 용서가 되어서 용서가 그 사람 속에 잠입되어 들어온 거예요. 오지 말라고 해도 그냥 들어온 거예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이쪽은 안 왔죠. 그럼 주신 분 맘 대로죠. 오야(두목)맘 대로죠. 안 받았다고 해서 받은 사람을 보고 화내고 그러면 안 돼요.

어제 저녁에 고기를 먹는데 고기가 맛있었어요. 수요일에 우리교회 집사님이 더운데 수련회 잘 하라고 고기를 주셔가지고 그걸로 만들었어요. 아내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맛있지? 이거 무슨 고기인줄 아나?” “이거 뭐 소고기.” “양고기다.” “헉!” 양고기하면 선입견이 뭐냐 하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인데, 전혀 냄새가 안 나고 너무 맛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냥 또 지나가면 안 되잖아요. 부부사이가 틀어지잖아요. 바로 유월절을 나타내는 양이라고 언급을 했어요.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유월절에 양고기를 먹었어?” “먹었지.”

피는 바깥에 바르고 그 피에 동참한다는 뜻으로 양고기를 먹어야 돼요. 피를 둘러쌌던, 피를 흘리게 했던, 그 피를 내게 했던 그 본체에 참여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결국 양고기를 먹는다는 말은, 우리가 양이기를 원한다는 뜻이에요. 그럼 뭘 포기하는 거예요? 독자적인 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나는 인간이 아니올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어도 믿음이 없어야 되고, 소망도 없어야 되고, 사랑도 없어야 돼요. 왜? 그게 다 누구 좋아라고?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없어야 되는 겁니다. 장로님, 이제 안심 푹 놓으세요. 믿음을 믿지 마세요. 안 믿어서 기분 좋거든 믿음이고, 안 믿어서 찝찝하거든 그건 믿음이 아니고. 그건 외재성이 없는 거고.

자,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뭡니까? 예수님의 해석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떨기나무에 있었던 부활하고 예수님하고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이게 어려워요. 떨기나무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 이게 떨기나무와 어떻게 연관이 있느냐 하면 이게 모세가 물었어요.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내가 한다.” “그럼 바로한테 갈 때에, 내가 누구의 하나님으로 왔다는 것을 말을 해야 할 텐데, 누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저한테 말을 해주세요.”(출3:13)라고 하니까, “나는 이름을 알리지 않는다.”

출애굽기 한번 봅시다.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설득을 시킨다? 안 시킨다? 사람에게 설득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그 예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기 전에 지금 누굴 만났느냐 하면 아브라함 만났고 이삭 만났고 야곱을 만났거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하나님께서 만날 때에 그들과 의논을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슨 언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예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해요. 언약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그 조상한테 약속하신 하나님이에요.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룬 것도 아니고 이삭이 이룬 것도 아니고 야곱이 이룬 것도 아니죠.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신 결과물이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은 부활이 됩니까? 이삭은 부활이 됩니까? 야곱은 부활이 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부활이 안 돼요. 안 되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부활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은 부활이 되고, 야곱의 하나님은 부활이 됩니다.

그 예가 마17장에서 변화산에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예수님이 나타났죠. 엘리야하고 모세가 부활이 되느냐? 안 되죠. 그래서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별세,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부활이 되게 되면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재료로 같이 흡수통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엘리야, 모세가 부활이 돼요. 예수님 부활에 말려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조그만 집이 있는데, 집은 사물이기 때문에 집을 지어놓으면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까? 안 움직이죠. 근데 거기 한 가운데로 태풍이 지나간다, 집이 움직여요? 안 움직여요? 아예 날아가 버리죠. 날아갈 때, 나는 날아간 집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부활이 되는 것은 본인들이 부활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부활이 되니까, 그 부활됨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같이 그 부활의 영역에, 그 회오리바람에 같이 흡수된 거예요. 말려들어간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몇 명이죠? 열두 명이죠. 그 중에 하나 가룟 유다가 빠지고. 열한 명의 제자가, 그러면 그 제자들을 왜 불렀습니까? 그게 어디에 해당이 되느냐 하면 바로 야곱의 하나님에게 해당이 돼요. 야곱은 나중에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을 부활시키는 식으로 예수님이 부활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반대로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왜냐하면 야곱의 하나님이니까. 예수님이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야 하니까.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과제고 숙제다 이 말이죠. 숙제를 하기 위해서 구원했잖아요. 우리는 숙제거리고. 뭐 어쩌라고? 우리는 주님의 주님다움을 증거 하는 숙제거리에요. 우리가 왜 믿음이 있어야 되죠? 주님 믿음만 있으면 되잖아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만 우리를 사랑하면 돼요. 주제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마세요. 이 사랑에 대해서 이번 주에 할 거예요. 사랑이 무엇인지는. 사랑의 역사를 다 끄집어낼 참이에요.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지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 보면 세계역사에 나오는 모든 사랑은 다 종합되어 있습니다. 그걸 요약한 것이 철학과 신학의 허상(2009년 6월)이라는 것으로 십자가마을에 나와 있어요.

흔히 말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없어요. 우리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필요가 없고, 사랑이 성립이 안 됩니다. 이번 겨울수련회에 아가서를 할 건데, 그 아가서에 보면 여자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누가 집적거립니까? 남자가 계속 집적거리는 거예요. 여자는 사랑을 몰라요. 남자만 알고 있으면 돼요. 우리는 천국이 몇 킬로인지 몰라요. 몰라도 돼요.

포도원에 아침에 부름 받은 사람, 오후에 부름 받은 사람들은 포도원이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몰라도 괜찮아요. 그냥 일만 하면 돼요. 포도원 경영은 누가해요? 포도원 주인이 해요. 종이 왜 걱정을 합니까? 주인이 따로 있는데. 제가 지난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열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몇 달란트가 됐습니까? 열한 달란트가 됐죠. 그럼 열한 달란트가 된 사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잘린 사람의 달란트가 거기에 포함이 된 겁니다. 그럴 때 열 달란트의 의미가 안 잘리는 거예요. 주님에 의해서 잘려도 되는데 안 잘라준 거예요.

그럼 열 달란트는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혜택에 의해서 열 달란트를 번 게 된 겁니다. 얻어 챙긴 게 되고, 저쪽은 주께서 아예 제켰으니까. 안 제켜준 은혜가 열 달란트에요. 지가 노력해서 한 게 아니고. 그래서 천국은 어떤 세계냐 하면, 참 이게 중요한 건데, 천국이란 어떤 재능도 필요치 않는 세계, 어떤 달란트도 필요치 않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재능? 재능기부하지 마세요. 그거 저주받은 재능이에요. 재능은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 됩니다. 교회에 피아노재능, 꽃꽂이재능.. 그런 쓸데없는 재능발휘하지 마세요.

부산에 계신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제가 첫날에는 참석을 못하고 둘째 날에는 참석을 하는데, 이번에 사도행전의 주제가 뭡니까? 라고 물어요. 제가 답변을 했죠. 선교는 없다. 선교는 없어요. 선교는 없다가 이번 사도행전 주제입니다. 누구 말대로 막가자는 이야기입니까? 정말 성경해석을, 제가 첫 번째로 이야기 했잖아요. 성경해석에서는 출발점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출발점이.

그게 사도바울에게는 뭐냐, 나는 예수님 죽은 거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그게 성경해석뿐만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 더위까지,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 그게 있어줘야 쓸데없이 슬퍼하는 것이나 불안감이나 공포감이라든지, 그거는 전혀 주제 넘는 일이고, 그것을 가질 이유도 없어요. 흙으로 와서 흙으로 가면 그거는 너무나 주께서 참 조치를 잘 하신 겁니다. 그거면 됐지, 열심히 땀내면서 땡볕에 일한다고 해서 자기 가치가 뭐 달라지고 이런 것 없어요.

하나님이 스스로 말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난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언약을 줬거든요. 이삭에게 언약을 줬죠. 야곱에게 언약을 줬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그거는 앞으로 너희들이 나 예수가 어떻게 죽고부활이 되는지 지켜보라는 거예요.

왜? 따진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만 알면 돼요.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죽음과 그리고 부활. 그거 두 가지가 아니에요? 라고 하는데, 두 가지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부활의 의미는 언약을 가지고 죽은 자의 부활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의 부활은 부활에 해당이 안 됩니다.

이런 게 어려워요.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니고,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에요. 그 나머지기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부활에 해당이 안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을 때 일어났던 사람들은 부활에 해당이 안 돼요. 인간에게는 부활이 있다? 없다?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에게는 부활이 없어요.

인간에게 부활이 있다면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말려들어간 거예요. 우리가.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를 위해서 그 다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고 하잖아요. 그 첫 열매에 계속해서 우리는 부속되는, 거기에 같이 엮여져 있는, 합류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 부활에.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죽고 주의 이름으로 부활하는 겁니다. 뭐가 빠졌어요? 내 이름. 내 이름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자, 그렇게 보시고 25절부터 다시 봅시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 이거 외재성이죠. 인간들은 천사를 손에 포착할 수 없습니다. 천사는 나타나되 나타난 천사를 붙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천사는 존재로 움직이지 않고 사건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건은 한 번 일어나고 나면 두 번 다시는 그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잖아요. 사건이 아니고. 그래서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는 말은 외재성이니까 우리가 알 수가 없죠. 오늘 제목을 외재성이라고 할까요?

26절에 보면,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왜 안 읽어봤어요? 수천 번 읽어봤죠.  27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말이 너무나 어려운 말이에요. 제가 적어볼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고, ~이다. 뭐는 아니고 뭐는 이다. 그러니까 ~이다. 이것은 뭐가 형성이 될 때만 ~이다가 나온다? ~는 아니고, 라는 사항을 먼저 인지하고 있고 알고 있을 경우에만 ~이다가 비로소 나와요. 지옥에 있지 아니하면 뭘 모릅니까? 천국을 몰라요. 날씨가 덥지 아니하면 시원함을 모르듯이. 죽음에 있지 아니하면 생명도 모르고. 죄 속에 있지 아니하면 의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점점 더 어디로 몰아세웁니까? 죄 짓게 해요.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니까. 아주 즐겁게 죄를 짓는다는 말은 이미 그 속에서 의가 나오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면 의가 두 가지가 나오죠. 주님의 의가 나오면 싱글벙글이고, 그리고 자기 의를 그냥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죄 지은 것에 대해서 변명과 변명으로 일관하죠. 변명과 변명으로.

나는 김부선이 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김부선에 대해서 그거는 내가 안 썼다. 주진우기자가 그렇게 했죠. 김부선이 저게 미쳤나? 왜 양아치처럼 왔다갔다 딴소리 하느냐? 이러고 있다고요. 모든 인간은 자기 의의 노예에요. 죄인이 되도 되는데, 이상하게 마귀가 죄인 안 되게 만들어요. 악마는 자꾸 인간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요. 할 수 있다! 아빠 힘내세요! 뭐 이런 것. 힘 안내도 되거든요.

아까 배웠잖아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간다? 하던 일대로 살아가요. 힘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는 일이 힘나게 되어 있어요. 아는 일이니까. 아는 일을 반복해요. 그거는 힘하고 관계가 없어요. 아는 일이니까, 익숙한 일이니까 하죠. 늘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이 농사를 못 짓는 이유가, 하는 행세가 정치였기 때문에 또 나옵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하고서 또 나와요.

모든 인간은 이유도 모르는 채, 그 하는 일만 그냥 반복할 뿐이에요. 그 자체에서, 광산김씨 이야기는 그만 해야지. 이게 ‘~아니고’를 없애버린다고요. 직접 ‘나는 ~이다’라고 자꾸 우겨버립니다. ‘~아니고’가 없는 상태에서. 부활을 언급할 때는 ‘~아니고’를 거쳐야 돼요. ‘~아니고’가 본문에서 무슨 ‘아니고’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지 않는다. 그럼 뭐냐, 하나님은 오직 산자만 살린다. 산자만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살릴 필요가 없죠. 살아있으니까. 산자와 함께 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이 산자라는 말을 하려면 어디에 있어야 된다? 아까 그 공식에 의하면 어디에 있어야 되죠? ‘~아니요’에 있어야 되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한 사람만 산자로 찾으시는 겁니다. 산자는 누가 산자입니까? 바로 니가 왜 산자를 죽은 자에게서 찾느냐?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에 전혀 근처도 안 간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은 것과 부활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속이는 자의 속임수에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 빼놓고 다 속이는 자에요. 서로가 서로를 속이거든요. ‘아니요’를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해요. 근데 ‘아니요’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돼요. ‘아니요’에서 지가 기어 나오면 안 돼요. ‘아니요’에서 막 기어 나오면 안 돼요.

해외토픽에 보면 애가 한 10개월 쯤 됐는데, 높다란 울타리가 있는 침대에 애를 눕힌다고요. 설마 애가 거기서 기어 나올까? 방안에 카메라가 장착이 되어 있어요. 보니까 애가 한 번 두 번 반복하다가 요령이 생겨서 그 높은 울타리를 넘어서 애가 내려와 있었어요. 큰일 날 뻔 했어요. 저거 어떻게 해서 나왔지? 자꾸 해보니까 요령이 생겨가지고 울타리가 있는 나무침대에서 내려온 거예요.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그래서는 안 되거든요. 주께서 나오지 말라고 한 거예요. 주께서는 살지 말라고 하는데 계속 본인은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교회가 뭐냐 하면, 교회는 속임수에요. 교회자체가. 교회자체는 다가오는 불상사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겁내는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가 교회에요. 다가오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서. 행여 잘못돼서 지옥가면 안 되잖아요. 그걸 예방차원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는 뭐냐 하면 자기한테 필요한 거죠. 교회에 목숨 걸지는 않아요. 잠시 필요한 거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자기를 죽은 자로 보지 않고, ‘아니요’에 있지 않고 어디에 있다? ‘~아니고’에 안 가고, 뭔가 자꾸 ‘~이다’로, 이대로 계속 우기는 겁니다. 줄곧 ‘~이다’를 쥐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한 십자가는 뭐냐, 성령은 뭐냐, ‘~이다’가 고집한 것을 어디로 옮긴다? ‘~아니고’로 옮기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제자들로 하여금 나를 떠난 자로 만들어버려요. 다 배신자로 만들어버려요. 목숨 바쳐도 안 돼요. 거기에 뭐가 작용하느냐, 닭이 작용해버려요. 닭이 세 번 울어버리잖아요. 닭이 펜스fence, 장벽이에요. 닭소리를 넘어 설 수가 없어요. 닭 안에 저쪽에 있어야 해요.

그 다음에 처소가 예비 되면 누가 데려갑니까? 없는 쪽에서 있다는 쪽을 데려가는 식으로, 약조물을 찾아오는 식으로, 자기백성을 찾는 식이에요. 왜? 예수님의 과제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과제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예요.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과제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냥 무심코 자기 과제를 가지고 일을 했는데, 구원받은 사람은, “주여! 제가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죄인 되었기 때문에 구원해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자기 과제를 하기 때문에, 과제에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뭘 포기하느냐 하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을 해줘야 해요.

아까 김밥 먹었잖아요? 김밥 먹고 뭐 먹는 것도 주님의 과제에요. 주님의 과제. 제가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골프치고 크루즈여행가는 것도 무슨 일이다? 주의 일이다. 아직까지 그런 혜택은 안 왔습니다만. 그것도 주의 일이에요. 심지어 몸 아픈 것도 주의 일이고. 모든 것이 주님의 자기 과제라니까요.

지금은 여러분들이 희미하게 여기지만, 나중에 일단 죽어보세요. 죽고 난 뒤에 되돌아보세요. 요한계시록 4장 11절 말씀처럼, “어느 것 하나 주의 뜻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의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와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가 머리로는 안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우리가 그걸 놓쳤습니다. 이제는 꾹꾹 눌러 담듯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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