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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23:03:09 조회 : 354         
지속의 혹 18102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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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10-28 16:16 
광주강의20181026a 마가복음12장 38-13장 2절(지속의 혹)-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38-44절

 

38절,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절,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절,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절,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마가복음 13장 1-2절

 

1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몸이 있고, 예수님의 몸은 하나죠. 근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예수님의 몸에서 두 개의 종류의 몸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몸 있고 그 앞에 있는 몸을 빗금으로 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실재성, 또는 말씀이 말씀답게 되기 위해서 새로운 몸을 상정하죠. 상정, 또는 설정하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몸을 가치가 돋보이게 해요. 내 몸과 다른 몸을 너희들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과 다른 몸을.

 

그러면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 몸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나옵니다. 새로운 세계의 전개. 만약에 예수님 배꼽 속에 뭔가 종이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걸 마술사가 입에서 색종이 뽑아내듯이 주님께서도 새로운 세계를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뽑아내기 전에 예수님의 세계는, 예수님이 뽑아내기 전에 예수님의 몸 안에 이렇게 담겨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세계를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전혀 모르겠죠.

 

예수님이 나타나서는 그냥 너희들 사는 세계에 같이 살자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타나서 내가 품고 있고 내가 소개할 이 세상은, 기존의 세상이 어떻게 된 세상인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이 병행해서 이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이런 세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반드시 이런 세계와 대치가 되는, 대척이 되는, 반대가 되는 세계를 예수님 말씀 속에서 이렇게 뽑아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그냥 인간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 세계는 나쁘다, 좋지 않다고 우리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엉망이야, 라고 이렇게 겸손을 떨지 말라 이 말이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규정을 해도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규정을 해야지, 겸손 떤다고 자기를 비루하게 만들고,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를 나쁘게 본다고 해서 ‘주님의 세상보기’하고 일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 죄를 알고, 뭐 자기를 때리고,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 이것은 주께서 보기에는 이거 오버하는 거예요. 이거는 연기부리고 있는 겁니다. 손도 안 댔는데 아프다고 혼자 뒹구는 거 있잖아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시작을 항상 예수님부터 시작해야지, 인간이 마중 나가면 안 돼요. 주님은 아마 이런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 내가 미리 연출을 벌이면 안 되는 겁니다. 그냥 평소에 제가 말씀한 것처럼 그냥 사시면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규정하지 말고. “주님한테 매 맞기 전에 알아서 기자.” 이러지 말라는 말이죠. 그거는 주님에 대한 곡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너의 세계는 나쁘다고 이야기할 경우에도 예수님 쪽에서 먼저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야지, 주님은 거룩한 분이고 하나님이기 때문에 의당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세계가 얼마나 개판이겠느냐, “주여, 저는 개판입니다. 손들고 나옵니다.”라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조작하지 말라 이 말이죠.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죄와 주님이 생각하는 죄가 달라요. 내가 생각하는 죄는요, “나는 죄인이다.” 이걸 내가 미리 짐작해서, 여기에 맞추기 위해서 나는 죄인이라는 죄를 죄다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나는 이래서 죄인이라는 겁니다.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죄라고 할 때는, 예수님이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하면 죄인일거라고 이렇게 아양을 떨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아무리 연출을 해도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수고함에 대해서 하등의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 자신에게 니가 평하지 마라. 니는 니 자신을 평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 이겁니다. 평을 해도 주님이 평을 해야 돼요. 주님의 평은 너는 이렇다가 아니라 니가 이러한 것을 하기 때문에 너를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나는 이렇다는 겁니다. 그게 목적이 되어야 되지, 그게 목표거든요.

 

예수님은 예수님 본인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누군지를 이야기 안 한다 이 말이죠. 우리의 관심사는 나는 주님 보시기에 어떤 인간인가? 여기에 우리의 관심이 꽂혀있는데, 주님은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 어차피 피조물은 창조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피조물이 이렇다고 그걸 독자적으로 규정하려고 피조물이 태어난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뭔가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는데, 이 새로운 세계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새로운 세계가 아닌 세계는 어떤 세계냐를 예수님께서는 언급하시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한 말을 여러분들이 인정한다면, “나는 ~이다. 이 세상은 이렇다.”라는 것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 세상은 좋다, 나쁘다, 그런 것도 의미 없고, 이 세상은 멸망 한다 조차도 의미 없어요. 항상 의미는 뭐냐,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가 중요한 겁니다. 어떤 인도네시아에 지진이 일어났잖아요. 주님께서 지진이 일어나게 하셨다. 얼른 들으면 정답 같은데 그 말 자체가 자동적으로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주께서 이렇게 하셨다, 라고 했을 때 그 어감이, 아무리 똑같은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 똑같은 이야기를 할지라도 그게 같은 뜻이 아니에요.

 

이것을 참 주목해야 하는데, 언어는 의미에서 마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언어는 사건에서 종결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아까 잡수신 것이 부추에다가 오징어를 넣은 부침개죠. 부추에다가 오징어를 넣어서 집사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배부른 사람은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수고하셨네. 근데 뭐 어쩌라고? 약간 중간쯤 배고픈 사람은, 야, 그거 맛있겠네. 한번 먹어볼까? 하죠. 아주 배고픈 사람은, 그게 부침개인지 부추인지 뭐든지 관계없이 먹고 싶어 하는 거예요.

 

같은 단어에 사건이 몇 가지가 일어나느냐 하면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세 가지 사건. 사건이란 뉘앙스는 내가 미리 짐작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어떤 것을 예상해버리면 이거는 사건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나의 짐작한 의미가 돼버려요. 인간은 고집스럽게 자기에게 의미가 되는 것으로 자꾸 정신이 팔리는데, 주께서는 의미를 피해 가버립니다. 그래야 우리는 의미조차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한 이야기가 상당히 좀 어렵다 싶은데요, 그러면 쉽게 갈 타이밍이 왔죠.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맞는 말 같이 느껴지죠. 그러나 아까 사건을 그대로 동원해버리면, 자기가 나는 죄인이라는 사람에게는 “나는 이거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쩌라고?” 이래 되겠죠. 그리고 중간쯤 나는 죄인이고 의인일 수도 있는 사람에게는, “아! 내가 다시 한 번 죄인이구나. 나는 앞으로 건방떨면 안 되겠구나. 앞으로 잘난 체 하면 안 되겠구나.” 이래 되겠죠. 그리고 의인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내가 생각한 것하고 주님이 생각한 것하고 다르구나.” 이렇게 되죠.

 

방금 세 가지의 사건이 일어났죠. 이 사건이라는 말을 일반 사건하고 다른 점에서 이걸 언표라고 해요. 언표. 잘 안 들어보셨죠. 언표라는 것은 없어요. 비-물질적이에요. 언표라고 하는 것은 그 분위기를 새롭게 드러내게 하는 단어의 기능을 언표라고 합니다. 분위기를. 그러면 십자가 앞에 나는 죄인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잊었다. 이게 바로 주께서 원하는 진정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께서 이야기한 것은 도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너는 내 앞에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예수님 본인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만 그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진정한 죄인 같으면 나는 죄인이다, 라는 이것도 잊어버려야 돼요. 나는 내가 뭐라고 할 어떠한 권리도 없는 겁니다. 어떠한 권리가 없어요.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이렇게 죄인인데, 목사님 보시기에 지금 이게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그 의미와 맞는, 일치되는 죄인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잊지를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국종 교수 알아요? 장로님, 혹시 이국종 교수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들어봤죠. 중증외상센터장. 그 사람이 뭘 했느냐 하면, 갑자기 뜬 이유가 탈북 하다가 북한군에게 총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사람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살려냈잖아요.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 됐습니다. 이국종 교수 기억나시죠.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한테 좋은 사람이 되겠어요? 탈북 하다가 총 맞아서 거의 죽게 된 북한군 그 사람이 이국종 교수를 좋아하겠죠. 왜? 그 사람 덕분에 자기의 목숨을 건졌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 앞에서(십자가 앞에서), 그 북한 군사가 나는 이렇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겠죠. 나는 이런 이익을 얻어야 돼, 나는 의미가 있어야 돼, 이런 것 자체가 없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분 때문에 내가 살았기 때문에. 이국종 교수만 있다면 자기는 언제 어떻게 되도 자기는 상관없는 거예요. 왜? 죽은 자를 살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가 그 나라에요. 예수님이 품고 있던 것이 풀려진 나라의 백성의 특징이 바로 이 특징이에요.

 

죄인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왜? 주님 관심 갖는데 바빠 가지고 자기 자신한테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한테 관심이 없으면 뭐가 관심이 없느냐 하면 남들이 자기한테 하는 평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또 나는 누구에 대해서 평을 하는데 관심이 없어요. 바로 우리 광주모임 성도님들처럼. 전혀 남들에 대해서 평을 안 하잖아요. 관심이 없어요. 이게 뭐 비비꼬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의 걱정근심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매일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평을 하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자기 자신을 평하다보니까, 내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에 또 신경 쓴다 이 말이죠. 누굴 만나러 가는데 옷을 뭘 입고 나가야 하는지. 머리는 뭐 들깨머리인지, 깻잎머리인지. 하여튼 뭐든 게, 하루 온종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다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자기표현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남들이 내 표현에 장단맞춰주지 않고 약간의 험담을 한다면 그걸 참을 수 없는 거죠. 괴로워서 못 견디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제가 수요일에 자기만의 세계라고 한 거예요.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세계가 된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잊을 정도로 괜찮은 분을 못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내가 지금 허름한지, 가난한지, 부한지, 똑똑한지,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인생이, 내 운명이, 미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런들 저런들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안 쓸 정도로 너무나 대단한 이국종 같은 사람. 그 분 아니었으면 나는 진즉에 죽었다는 것을, 온 느낌이 그 분 앞에 서면 늘 느껴지는 사람.

 

주일 낮에 설교대로 한다면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요20:15).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너는 누구를 찾느냐? 이 한 마디입니다. 누구를 찾느냐? 모든 인간은 자기를 찾아요. 하루도 쉬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자기 자신을 찾습니다. 왜? 찾아서 잘 관리하고 다듬어야 남 앞에 내세울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우리 광주가족들한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언제 남 신경 쓴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배에서 나온 새로운 세계의 백성은 뭐냐 하면, “아무개야(막달라 마리아)! 너는 누구를 찾느냐? (너 말고 또 찾을 사람이 있재? 그쟈?)”라고 묻는 거예요. 너에게 너는 너 따위에 해당이 돼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살든, 내가 몇 년을 더 살든, 내 형편이 어떻든 간에 상관이 없어요. 나는 내가 아는 것은 나를 잊게 만든 그 분이에요. 이국종교수. 오늘 제목을 이국종 교수라고 할까? 그분. 나라가 북한군 어떻게 할까에 신경 쓸 때 오직 저 사람, 이국종 교수는 무조건 살린다는 이유 때문에 그 비싼 장비를 다 동원해가지고 며칠 간 매달려서 7군데 이상 총상을 입은 죽어가는 탈북자를 살렸거든요. 이국종 교수 쳐보세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도대체 나 같은 것을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의아해해야 합니다. 이게 성도로서 정상이에요. 주님, 나 같은 것을 비싼 의료장비까지 동원해서 왜 저를 살려냅니까? 오히려 의아해해야 돼요. 제가 의아해해야 한다는 말은,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려내는 방식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살릴 때는 뭐냐, 남들 앞에 그럴싸한 존재로 살려내는 거예요. 나를 잊는다는 것하고는 정반대에요. 나를 좀 알아달라는 식의, 그것이 내 자신에게 모델이 되는 겁니다. 이상적인 내 모습이 돼요.

 

그런데 정작 나를 구원했던 예수님은 뭡니까? 그것마저 사치라는 사실. 그것마저 내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 되면 괜찮겠다는 그러한 인식마저 이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나에게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나에게서 모를 정도로. 내가 누구냐 라고 규정할 필요조차도 없는 그런 존재. 나에 대해서는. 그러다보니까 나의 소망과 기대자체가 이게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오늘 강의 준비하면서 제가 먼저 묻고자 하는 질문이 있었어요. 우리는 무엇에 울고 무엇에 웃느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평소에 무엇에 울고 무엇에 웃습니까? 어떤 상황이 되면 울고 어떤 상황이 되면 웃습니까? 그러면 어떤 이런, 이런 상황들이 되면 좋겠다고 하겠죠. 부추전이 오는 상황이 오면 좋겠다. 뭐 이런 것. 이것 자체가 아직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게 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 것에 울고 웃지 말고 예수님에게 울고 예수님에게 웃어야 된다, 라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할 때에, 그런데 이 정리는 잘못된 관리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우실 때 울고 웃을 때 웃으면 돼요. 왜? 울라고 우는 일이 생겼고 웃으라고 웃을 일이 생겼는데, 그게 뭐가 탓할 문제입니까? 그게 뭐가 문제가 돼요. 주님 보시기에 이런 인간 원하시잖아요? 그죠? 라고, 자기한테 신경 쓴다는 자체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은 이런 사람을 원한다고 설정해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춰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맞춰나가려고.

 

제가 만약에 막장드라마 작가라고 했을 때, 저는 이런 것을 생각해보거든요. 막장에 막장을 보여주리라. 어차피 막장이니까. 준재벌집 아들하고 어떤 여자하고 사귀는 씬scene부터 출발해요. 만원버스를 타고 내려서 허겁지겁 면접을 보러가다가 건물 앞에서 어떤 남자하고 부딪혀서 커피를 다 쏟았는데, 남자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해가지고 서로 싸우는데, 여자는 남자를 팔 꺾어놓고 싸웠는데, 근데 그게 바로 재벌집의 아들이었다. 시작을 그렇게 해요. 근데 그 아들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집의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 말이죠.

 

근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 아가씨가 회사에 들어와서, 어려운 회사였는데 회사를 다 일으켜서 둘이 마지막에는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할 때 반드시 남아있는 게 있어요. 결혼을 하는데, 그 시어머니 입장에서 며느리잖아요. 며느리가 아니고 자기 딸이라면? 그리고 아들이 사실은 자기 아들이 아니고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들이고, 진짜 찾고 있었던 딸은 이 며느리가 딸이었다면? 이렇게 할 때 시청자는 아무도 예상 못하겠죠. 물론 예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뻔할 뻔자다. 여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다 예상하겠죠.

 

이게 뭐냐 하면 며느리가 아니고 딸이 될 때, 이 여자주인공은 내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더는 없죠. 그렇잖아요. 며느리를 해야 될지, 딸을 해야 될지, 어머니라고 해야 하는지, 엄마라고 해야 하는지, 자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더 이상 손 댈 게 없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만들어낸 우리 인생의 반전입니다. 주의 품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의 구성원이에요. 백성이에요. 내가 더 이상 나에게 손 댈 건더기가 전혀 없게 만들어요.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다. 우리는 거기에 맞춰드려야지. 이렇게 하면 주님의 백성이 되겠습니까? 주님의 아들이 되겠습니까? 딸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조절할 때에, 이것은 오늘 본문 전체의 성경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제가 지금 계속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사시라는 말이 그냥 하는 투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니까 막 죄인이 되려고, 없는 죄 막 찾아내가지고 세밀한 것까지 예민하게 하는 그런 짓도 하지 마세요.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의 일부지, 내가 이해하는 의미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냥 산다는 자체가 주님이 일으키는 사건이어야 해요. 그렇게 될 때 이 사건의 목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입니다. “너는 누구를 찾는가? 너는 누구를 찾지? 너 생각하지 않고 너는 누구를 찾는 거야? 니 주제파악 못하고 누구를 찾는 거야?” 이리 묻는 거거든요. “니 주제에 감히 나를 찾아?”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니가 어떠냐가 아니라 찾고 있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그게 신앙의 끝이잖아요. 신앙의 완판이에요. 자기 자신을 생각 안 하는 신앙보다 더 좋은 신앙이 어디에 있어요. “주여,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매일같이 이런 것 묻지 마시고, 그냥 북한 탈영병이 이국종 찾는 것처럼 나를 안 찾는 거예요. 나를. 근사한 나를 안 찾는 거예요.

 

이쯤해서 여러분들이 이해한다고 치고, 강의를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우리의 상식은 예수님이 계시면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이건 생각하지 말라고 했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 품고 있던 새 세상, 두자로 하면 천국이죠. 천국을 끄집어냅니다. 천국을 끄집어내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은 악하다, 이 세상은 지옥이다, 라고 하는 이 의사를 반영해주지 않습니다. 이건 자기가 뭔가 자기한테 의미가 있어가지고, 믿음이 좋아지라고 하는 조작된 연출이거든요.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서 새삼스럽게 새로운 세계, 천국과 반대되는 속성의 세계를 새롭게 끄집어내요. 새롭게 끄집어낼 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천국이야기와 병행해서 새롭게 끄집어내는 이 세계에 주목을 하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맞추어주려고 하지 마시고, 맞추어주려고 하지 마세요. 부탁해요~~ 우리가 주의 말씀에 맞춰 들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보게 되면, 왜 자꾸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이는지, 제가 심히 좀 답답해요. 맞추려고 하는데, 맞추려고 해봤자 그것은 자기 자신을 못 잊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새롭게 제시한 나라가 어떤 나라냐 하면, 38절 봅시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절,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이래 되어 있죠.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규정하니까,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서 누굴 보느냐 하면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자와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자들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와 판결이 중한 자들을 이렇게 보겠죠. 그렇죠. 계속 이렇게 볼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남한테 이렇게 규정했다고 해서 본인도 주님과 똑같은 뜻으로 규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컵이라고 했다고 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예를 들어서 “이 컵은 하얗게 생겨서 나쁜 컵이다.”라고 하면 “저도 그렇게 봅니다. 이 컵에 있는 물 마셔서 배탈이 나서 이 컵이 기분 나쁩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님하고 내 생각하고 똑같습니까? 아니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컵을 욕하면 이 컵과 우리는 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누굴 욕하면 덩달아 같이 욕을 한다고요. 욕을 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우리가 누구 편이 된다? 주님과 같은 쪽에 서 있다고 착각들을 하는데, 예수님 쏙 빼놓고 나머지기는 주님 편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새로운 나라와 결부해서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내야지, 없는 데서 만들어내야지, 주님께서는 있는 것을 백성으로 받아주지 않아요.

 

죄인들을 오라고 한다고 해서, “저 죄인입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안 받아줍니다. 내가 생각한 죄인이 따로 있고 니가 스스로 생각한 죄인이 따로 있어요. 날마다 주님께서 새롭게 만들어주셔야 되는 겁니다.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 만들어주는 그 대상을 주님께서 이렇게 펼쳐주게 되면, 바로 이 이야기가 특정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수용을 해야 됩니다. 받아줘야 돼요.

 

우리는 전에 이 성경을 보게 되면, “나쁜 사람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람들!” 바로 이렇게 흥분해가지고, “이 착하고 거룩한 분을 이들이 오해를 해서 죽였구나!”하고 길길이 날뛰잖아요. 그렇게 흥분해서 주님을 이렇게 도와주면, 주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니 나하고 한패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해줍니까? 안 해줍니다. 괜히 우리가 주님한테 좋게 보이려고 설쳐대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기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과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이런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시장에서 문안 받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 어렵다고 늘 용돈주고 장난감 사주고 책받침, 참고서 다 사주던 어질고 착한 우리 삼촌이라면 어떻게 할 겁니까? 나에게 너무 잘해주고. 정말 나한테는 이국종 같은 분인데, 주님보시기에는 저 인간은 긴 옷을 입고 다니고 폼 재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중간에 붕 뜨죠.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이게 뭐냐 하면 나와 결부된 것은 좋게 보는 우리의 못된 습성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보셔야 돼요. 주님이 욕한다고 같이 편들어서 욕한다고 한패 먹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 그러면 우리가 계속 진도를 나가면서 해야 될 것은 뭐겠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이들을 이렇게 공격하느냐 하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되겠죠. 주님의 몸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새 세계가 나오죠. 인간의 몸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헌 세계가 나오겠죠. 인간의 몸에서는 헌 세계가.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요.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다고요. 인간이 행동할 때. 정신병자 같으면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서로를 보기에 당신은 참 정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당신의 행동이나 말하는 것은 다 그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행동한 것이라는 것을 서로서로 인정해주겠다는 뜻이에요. 정상적으로 보는 거예요. 정상적으로. 이 모든 것이. 그럼 정상적으로 볼 때, 인간이 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헌 세계지만, 이 ‘헌’자를 빼면 뭡니까? 이 세계잖아요. 이 세상.

 

이 세상을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고, 가정주부 같으면 뭡니까? 가정이에요. 가정. 기업인 같으면 회사겠죠. 학교, 교회, 이런 단체들. 그들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바지하고 노력하는 이것이 뭐가 나쁩니까? 자식들 키우기 위해서 시장, 난전에 나가서 감이라든지, 고구마 이만 원, 밤 한 되 오천 원 팔거든요. 오늘 아침에 여수 교문시장에 갔다 왔거든요. 갔을 때 제가 봤어요. 아침부터 나와서 저렇게 애쓰는데 저거 뭐하려고 하느냐, 그게 나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행위들이에요. 나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

 

그러면 나의 세계라는 것이, 가정이라든지 회사라든지 여기에 이렇게 최선을 다하잖아요. 근데 나의 세계라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욕망에서 나왔고, 이 욕망의 밑이 어디냐 하면 에너지의 흐름입니다. 에너지의 흐름의 속성이 뭐냐 하면 지속이에요. 지속. 지속이라는 것은 하는 것대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달아 이어짐이 하나의 욕망의 속성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 이유가 있잖아요. “왜 당신은 우산을 씁니까?”라고 하면, “지금 비가 오기 때문에 우산을 씁니다.”라고 하잖아요.

 

그럼 주님 보시기에 비 올 때 우산을 쓰면 구원받습니까? 어떻습니까? 비 올 때 우산을 쓰면 구원받습니까? 안 받죠. 그러면 비 오는데 우산을 안 쓰면 그것은 조현병, 미친놈이에요. 그건 정신병자죠. 그럼 비 올 때 인간들의 세계에서의 합의된 의사가 뭡니까? 합의된 정상은 뭐냐 하면 비 올 때는 우산을 쓰는 거예요. 그럼 우산을 만들어내야 되겠죠. 그럼 우산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있어야 되겠죠. 우산공장 사장, 간장공장 공장장은, 뭐 비슷하게 우산공장 사장은 왜 우산을 만듭니까? 자기 가족을 위하고자 하는 욕망의 지속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속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지속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의 흐름이에요.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플럭스flux라는 것인데, ‘끊어짐이 없이 연이어’라는 뜻입니다. 애들을 보세요. 애들이 놀 때, 장난감가지고 놀다가 장난감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죽어버립니까? 아니죠. 장난감가지고 놀다가 휙 치워버리고 다른 것, 서랍을 뒤지죠. 이게 에너지의 흐름, 내 욕망의 지속성이라니까요. 지속성.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여수 검은 모래 해변을 구경했습니다. 가만히 있습니까? 왔다 갔다 하죠. 자꾸 가만히 있지를 않고 움직인다고요. 이 에너지의 흐름, 욕망, 에너지의 흐름이 이렇게 흐르잖아요. 그런데 이것에 혹(혹뿔, 혹의 방언 경상도 사투리)이 났다. 혹이 났을 때 이것을 가지고 자아라고 합니다. 이게 서기관들이에요. 이게 긴 옷을 입는 겁니다. 상석에 앉는 사람이고 시장에서 문안을 받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혹부리입니다. 혹부리 영감. 또 가다보면 혹이 있어요. 이 같은 혹끼리 나중에 보면 둘이 동창생이에요. 또 혹이 옆집에 사는 이웃이에요. 작은 혹은 어릴 때 제자에요. “쌤요~~” “아이고, 이 녀석 많이 컸다.” 이래 되는 거예요.

 

전부 혹이에요. 밑에는 뭐가 흐릅니까? 에너지의 흐름,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육. 육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이어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혹이 난 이 하나를, 나라고 하는 이 자체를 주님께서는 공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육을 공격하는데, 인간들은 육이라고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불거진 나 자신이, “주님, 제가 어떻게 할까요?” 이래 나오는 거예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자기를 잊지를 못해요. 자기 자신을 잊지를 못해요.

 

부산 일가족 살인사건을 보면 여자 친구의 아빠, 엄마, 할머니, 사귀었던 전 여자친구, 다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 지도 자살해버렸고. 왜 죽였는가? 결혼은 안 했지만 사위라고 봐줬는데, 여자 친구가 “나 이러려면 너하고 못 살아. 헤어지자.”라고 하니까, 거기에 격분해서 그 여자 친구 가족을 다 죽였어요. 여러분들이 배웠으니까 그대로 여기에다가 적용해봅시다. 그 청년은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은 혹을, 독자적으로 자기 의미를 포기를 못한 거예요. 그냥 불룩 튀어나온 혹에 불과한데,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4명 죽이고 자살한 32살 먹은 청년이 4살 때부터 그 집안 식구를 죽이려고 미리 사전에 계획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그 사람이 군에 안 가고 칼만 갈아서 32살 되면 나는 사람 죽일 거라고 미리 예상했습니까? 없죠. 분출된 에너지라니까요. 분출된 에너지. 하나의 사건, 아까 언표라고 했잖아요. 하나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갖가지 변수가 이게 복합적으로 다 집어넣어진 거예요.

 

니만 안 만났으면 내가 32살 때 내가 자살을 안 한다. 너를 만나서, 너를 만났더라도 좋게 지내면, 헤어지자고 말만 안 했어도 내가 니 집안 식구 안 죽인다. 근데 헤어지자는 말을 하게 했다 이 말이죠. 그게 여자 혹이에요. 나도 처음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안 하고 싶었는데, 니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그때 술 한자 먹고 헤어지자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어느 것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모든 매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자 친구를 밀친다, 밀치는 것하고 칼 들고 죽이는 것하고는 다르죠. 그러면 밀치지 말고, 뺨 때리지 말고 칼 들고 다 죽이겠다는 그러한, 두뇌에 피가 역류해 올라가서 갖가지 갖고 있던 과거정보를 종합해가지고, 나는 도저히 죽이지 않으면 못 참겠다는 것이 나오려면 그 청년에게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조각난 경험들이 집대성되어야 했겠어요? 과거에 주고받던 그 모든 것이 하나같이 낭비입니까? 낭비 아니에요? 하나같이 이게 사라져요? 안 사라져요? 집대성되었으니까 안 사라지죠.

 

그 안 사라지는 것이 모여서 뭐냐 하면 사람들을 죽인 겁니다. 그리고 지도 죽었어요. 자, 4명 죽었죠. 지금 좋은 예에요. 좋은 예. 자기까지 5명 죽었어요. 자, 화장을 해가지고, 화장하면 어디로 갑니까? 흙이 되죠. 에너지 아닙니까? 잠깐 흙으로 와서, 약간 나를 왜 안 알아주느냐고 까불고 설치다가, 도로 어디로 가요? 도로 죽죠.

 

김윤식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김윤식. 서울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나이 82세, 오늘 죽었거든요. 우리나라 최고 평론가에요. 이어령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죠. 이어령 선배쯤 되는 사람이죠. 이 사람이 숙환(오랫동안 앓은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하겠죠. 그렇죠. 김윤식씨는 훈장 받은 사람이에요. 상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학문적으로 굉장히 많은 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까 32살 청년은 상은커녕 여자 친구 가족 다 죽이고 지도 자살했죠.

 

근데 둘 다 어디로 가요? 둘 다 어디로 갑니까? 물질로 가죠. 물질이 뭐냐 하면, 땅에 이렇게 흙, 먼지가 있으면, 바람 불면 이쪽에 있는 먼지가, 흙이 저쪽으로 옮겨지죠. 옮겨지면 바람에 날려서 저쪽 에베레스트 히말라야로 가겠죠. 히말라야로 가면 등산하는 사람이 올라가다가 눈사태가 나가지고 거기에 또 묻히겠죠. 묻혀서 복합이 돼가지고 화산이나 지진이 되어서 또 나오겠죠. 그래서 그게 어디에 섞이느냐 하면 식량에 섞여서 그 식량을 어떤 아줌마가 먹고 애를 낳겠죠. 애를 낳으면 그 애 안에 뭐가 있습니까? 죽었던 물질이, 에너지가 묻혀서 있겠죠. 그 애는 자라 혹이 나서 세상에 돌아다니겠죠. 이게 바로 육의 세계에요. 이게 과학적으로 에너지 세계 아닙니까?

 

사람들이 뭘 오해를 하느냐 하면은, 나만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그게 근원적인 오해에요. 거기다가 주님이 오시니까, “주님, 저 어때요?” 뭐 죄인 돼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저, 죄인입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십자가에서 난 죄인입니다.” 어디서 폼 잡고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보고 뭐 하라는 것이 없어요. 해봤자, 혹이 폼 내는, 지가 지 스스로 폼 재는 것밖엔 안 돼요. 이 혹, 주께서는 아예 기대를 안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인간들이 이렇게 망친 것을, 망치게 한 이 세상 모든 전체의 변화가 인간 전체를 망치게 했다고 결론 지우고, 예수님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육이 되신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자, 다시 해볼게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무덤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세상 자체가. 웃고, 즐기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이 모든 자체가 무덤이 되려면, 이걸 무덤화시키고 무덤으로 규정하려면 여기에 누가 끼어들어야 합니까? 누가 끼어들어야 하죠?

 

바로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셔야 되죠. 그리고 이 들어가시는 무덤은 나중에 보면 무슨 무덤이냐 하면 빈 무덤이 되는 겁니다. 빈 무덤. 무덤인데 어떤 무덤? 빈 무덤 되죠.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세상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자체가 이게 헛방이죠. 잘못된 의미를 부여한 거예요. 세상은 뭐냐 하면 그냥 육이에요. 그냥 저주의 세계에요. 세상 자체가 죽음이라는 겁니다. 무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새로 부여하는 거예요. 의미를. 내가 아는 세상은 너희들이 까불락, 까불락 하는 세상이 아니고, 무덤 자체가 들썩거리는 그것과 비교해서 예수님은 새로운 천국을 자기 몸을 통해서 구성해내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만들어낸다면, 그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수십 번 이야기를 한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별반 관심 없는 사람이에요.

 

인간이 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누구한테 관심을 두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막달라 마리아한테 물어보세요. “막달라 마리아! 당신은 어떤 여자입니까?” “관심 없어요.” “막달라 마리아 당신은 누굴 찾습니까?” “예수님 찾아요.” 내가 어떤 여자이며 어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에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질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바로 그것이 천국백성입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나라는 이거에요. 예수님한테 꽂힌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누구이시냐에 꽂힌 사람.

 

자, 이거 비교하고 첫째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자기를 살리신 분만 기억한다.’ 자기를 살리신 분만 기억한다고 할 때에, 자기를 살리신 분만 기억하는 것, 이것은 바로 천국이죠. 이것은 뭐냐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과거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죽음으로 다 집어넣기 때문에, 이미 죽었던 과거에요. 내가 그걸 끄집어내도 소용이 없어요. 이미 주님께서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었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라는 자체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냐 하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모르는 눈치인데,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 자기 백성을 새로 만드시는 거예요. 나하고 타협하고 의논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 만들어내는데, 그 새로 만들어내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가 혹처럼 나타나도 이거는 없는 과거에요. 자꾸 없애요. 어제를 없애고, 오늘 되면 또 어제를 없애는 거예요. 과거에 대해서 끄집어낼 이유가 없어요. 과거에 대해서.

 

과거에 뭐 교도소를 7번, 8번 왔다 갔다 했는지, 뭐 부부싸움해서 접시가 몇 개 깨졌는지, 그게 다 주님한테는 무덤속의 과거로 다 없어진다니까요. 거기에 비해서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 바로 나를 기억하는 세상이에요. “제가 어떻게 하면 천당 갈 수 있습니까?” 이걸 기억하는 세계. 이걸 기억하세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8-10-28 16:17 
광주강의20181026b 마가복음12장 38절-13장 2절(지속의 혹)-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주장. 내 주장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본인도 알아요. 주장한다면, 자기주장은 쉽게 말해서 기도죠. 주여, 저는 기도를 해서 내 의견과 이런 주장을 합니다. 뭐 울고불고 하는데, 기도하면서 뭔들 못하겠어요. 하죠.

 

근데 할 때에 바로 그 주장이 여기에서 말한 예수님이 비난했던 사람과 같은 류類라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몸은 예수님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 몸만 죽었다가 부활하신 몸이지, 다른 몸은 그냥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갈 몸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긴 옷을 입고 문안 인사를 받고 하는 그것을 누굴, 특정사람을 지적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다시 묻죠. 왜 이 사람들은 인사를 받고, 긴 옷을 입고, 상석에 앉고, 이렇게 서기관들처럼 왜 하느냐? 그거는 현재 구성된 이 사회를 지속하기 위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겁니다. 왜, 그 사장님이 큰 의자에 앉고, 이번에 거북선을 봤는데 거북선 안에 이순신 장군의 방이 굉장히 좋아요. 왜, 장군은 그래야 되는가? 그거는 장군이 자기를 티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이 거북선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본인은 그러한 기능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옛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아까 이 옛 세계를 두자로 뭐라고 했죠? 무덤이죠. 원래 무덤이 그런 거예요. 인간이 아는 무덤은 죽었다가 묻히는 것을 무덤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왜? 산 사람보고 죽었다고 왜 못하느냐 이 말이죠. 산 사람보고 죽었다고 못하는 것은 너희들끼리 서로 의견이 투합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목숨 붙어 있는 것을 살았다고 치자.” “어. 그러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숨 끊어지면 죽었다고 치자.” “어. 그러자.”

 

이미 인간세계에서 죽었더라, 살았더라, 자기들 마음대로 그렇게 규정을 지었고, 그것의 지속, 그러한 의미와 개념이 자식을 낳으면 그걸 그대로 알려주는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보고 니는 죽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울산의 황전도사님 빼놓고는 없어요. 애한테 그렇게 가르쳐요. “너희 아버지 죄인이다.” 이거는 특별한 사람 빼놓고는 없어요. “아버지 얼마나 훌륭하시고, 어머니 얼마나 훌륭하시고, 니 키워준다고..., 전부 다 이거는 혹, 또는 혹뿔, 같은 혹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집념을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그걸 정당화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 높은 사람은 긴 옷을 입어야 되고 높은 사람은 인사를 받아야 해요. 왜? 그래야 사회 질서가 돌아가니까. 주님께서 욕했다고 해서 우리도 갑자기 긴 옷을 안 입고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는 이런 짓은 하지 말자 이 말이죠. 주께서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거기에 맞춰서 자기를 연출하지 말라는 그것을 아까 처음 강의시간 초반에 이야기했죠. 그러지 말라 이 말이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해서, 우리가 죄인 만들기 위해서 먼저 수작을 자기한테 부리지 마세요. 주께서는 그런 차원이 아닌 거예요.

 

자기주장이 없으면 여기에 뭐가 없느냐 하면 원한이라든지 복수라든지 이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복수할 게 있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복수할 게 있기 때문에. 원한과 복수한다는 이 말은 내가 니 좀 손봐야 되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나의 지속성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러면 다시 말해서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삶의 의지를 니가 가로막기 때문에 니는 용서가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떤 전남편이 이혼한 아내를 죽였어요. 그래서 잡혀갔는데, 살해 후에 정신병원에 가요. 왜냐하면 심신미약으로 형량을 줄일까 싶어서, 죽인 다음에 빨리 정신병원에 가서 약을 타내는 거예요. 심신미약은 딴 게 아닙니다. 술 담배, 이거 하는 사람은 심신미약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심신미약입니다. 심신미약이 아닌 인간이 아무도 없어요. 다 심신미약입니다. 무서운 영화를 보고 놀라면 그게 심신미약이에요. 여자들 밤늦게 가다가 누가 따라와서 놀라면 그게 심신미약입니다. 어떤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다 심신미약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럼 죽음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지속성이 멈춰지는 것을 가지고 그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숨 쉬는 것이 멈춰지는 것. 처음에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에다 숨을 불어넣어, 생령, 사람이 됐잖아요. 숨을 불어넣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원래 흙이라는 거예요. 흙을 사람 되게 하신 요소는 이미 만들어진 인간이 가질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살 권리는 나한테 있다? 없다? 없어요. 내가 살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너무 몰라. 내가 살 권리가 없기 때문에 누가 나를 해친다고 해서, 거기서 내가 그 사람을 복수할거라고, 옆에 점하나 찍어 넣고 복수할 그런 권리가 없어요.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한테는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분만 알고 있으면 돼요. 뭐냐 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 주님, 구원주, 또는 심판주, 예수님만 알고 있으면 돼요. 그게 바로 우리 피조물이 해야 될 역할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과 제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내렸던, 오직 피조물이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알면 된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 3절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실까요? 요한복음 17장 3절. 뭐, 심심한데 성경이나 보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영생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같이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과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인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15절에, “막달라 마리아야!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니가 어느 정도인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제키고, 나는 이렇다는 그것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지금 누구를 지향하느냐, 누구를 찾느냐 이 말이죠. 그게 피조물이에요. 그게 피조물의 역할입니다. 그게 영생이에요. 피조물에게 주신 영생이에요. 아버지를 아는 것, 어떤 아버지? 아들을 보냈던 그 분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아는 것.

 

다시 오늘 본문에 돌아와 봅시다. 자, 그런 사실을 주의 말씀 속에서 징후를 내비치기 시작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40절에 보면,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형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이래 되어 있죠. 아니, 길게 기도하는 것이 뭐 그리 나쁜 일이라고, 왜 그걸 아주 저주의 판결을 내리시는 겁니까? 그리고 형식으로 길게 기도한다고 하는데, 아니 기도치고 형식으로 기도 안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전부 다 형식이에요.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안 그러겠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기도하라고 하면 전부다가 지금 주님은 의식이 되지 않고, 내 기도를 듣고 앞에 앉아있는 저 집사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저 인간 기도는 저렇게 해놓고 행세하는 것은.. 아이고, 기도하는 내용하고 니하고 너무 안 맞다.’라고, 나에게 구시렁구시렁 거릴까봐 지금 막 눈을 뜨고 싶은 거예요. 기도하는데 화장실 속에서 저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교회에서 기도하잖아요. 앞으로는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걸 무덤에서 기도한다고 생각하세요. 무덤에서.

 

에브리바디everybody전부 다 무덤인데, 무덤에서 기도하는 식으로 교회에서 기도하시라 이 말입니다. 왕왕 울리게. 주여여여~~~~ 믿습니다다다~~~~지금 기도를 듣고 있는 저희들 시체입니다다다~~~ 사람들 개무시하고 기도를 할 줄 알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 개무시하고. 그리고 나한테 할 때는 나를 개무시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돼요. 기도는 성령께서 하시게 하셔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기도가 안 돼요. 자꾸 조작하거든요. 연출하고.

 

그런데 예를 들어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고 하는데, 과부의 가산을 빼앗는 것이 아니고 도와주려고 하는 그런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불쌍한 과부를 더 도와주려고, 재산을 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재산을 보태가면서 자립하려고 하는 과부를 도와주는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구원받는다? 안 받는다?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부채도사한테 묻는 것처럼. 어떻습니까? 안 되죠. 어떤 과부를 762일 동안 도와줬다. 과부가 자립했다. 근데 나라에서 그 과부가 잘 된 것은 나라 덕이라고 하고 니는 빠지라고 하면 기분이 나빠요? 안 나빠요? 또 점 하나 찍고 복수할거라고 나오겠죠.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뭔가 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자기행위의 지속성이, 마치 불고기 먹고, 라면 먹으면 냄새가 배기는 것처럼, 인간은 모든 게 배기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행동은 지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에너지의 발휘거든요. 사용이거든요. 자기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이걸 잊을 리가 있습니까? 근데 제가 여러분 자신을 잊으라고 하니까 이건 기가 찰 일이죠. 자기 자신을 잊어서 천당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분이 들이닥치게 되면, 나 같은 것은 생각하나 안 하나 이것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과부의 가산을 탐한다, 형식으로 남이 듣도록 길게 기도한다, 이런 것을 나는 두 번 다시 안 해야지, 안 해야지, 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나의 본성을 향하여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덤 속에 있는 인간은 마찬가지에요. 니나 나나 할 것 없이 똑같은 것들의 에너지의 덩어리 속에 똑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지금은 안 그렇지만, 만약에 10년 뒤에 이럴 수도 있고, 20년 뒤에 이럴 수도 있고, 우리가 이런 인간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빌딩 지을 때요, 빌딩 지을 때나 어떤 공장을 지을 때 누가 고생했어요? 집 지을 때 누가 고생했습니까? 가정집 지을 때 타일공사, 콘크리트 공사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새벽부터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 하다가 손가락 다치고, 철근 자르다가 손가락 다치는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준공식에 참석합니까? 안 하죠. 작업복 입고 참석 안 하죠.

 

어떤 사람들이 하냐 하면 슈트입고 슈트 핏 쫙 나는 사람들, 기관장들 오고,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기관장들 부인들, 그 사람들 왜 오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이 가위로 테이프 끊고, 지들이 뭐했다고, 들어오지 마라! 이걸 끊고 그 다음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거기에 인부들은 참석 못합니다. 기껏 현장소장도 들어가려나, 건설회사 과장급쯤이나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발주처가 누구냐 하면, 그 사람들이 돈 낸 그 사람들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다 하고 시켜서 월급 받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폼 내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꼴이 또 안 돼요. 어떤 조직사회가 성숙이 안 된다니까. 조직사회가. 축사 때, 이번에 남구청을 이렇게 준공한 것은 지역 사회 덕분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콘크리트 했던 미얀마 사람이 말도 못 알아듣는 소리로 제가 했다고 이렇게 나오면, 그거 뭐 엉망이 되죠. 준공식이. 나도 테이프 끊는다고 집에 있는 가위들고 와서 지도 막 끊고 그러면 엉망진창이잖아요.

 

그래서 이 말이 뭐냐, 사회는 사회 자체가 납득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과부의 가산이나 이렇게 지적질 하는 지적질을, 우리가 그 기능의 일부를 할당받고 거기에 그것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할당받은 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취직됐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우리 아들 취직됐어요. 우리 딸내미 취직됐어요. 과부의 가산을 탐내는 일을 하면서도 자기는 취직이 됐대요. 외식으로 기도하는 기능을 하면서도 자기는 취직됐다고 하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품에 있는 천국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 자체가,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든지 간에 관계없이 한꺼번에 그걸 그렇게 규정해버리는 거예요. 주의 말씀에 의해서 규정하는 거예요. 무조건 길게 힘써 기도하는 너희들이 너희들이고, 그런 자가 너희들이고, 과부의 가산을 탐낸 자들이 너희들이고, 똑같은 한 종류다 이 말이죠. 주께서는 우리를 보고 하나 하나 면제해서 “니는 아니고 너는 되고”하는 그게 아니라, 한꺼번에 그렇게 규정하시는 그것이 주님이 천국 만드는 절차에 필수 단짝이에요. 하나의 조건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안 해야지, 라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렇게 규정하면 그렇게 따라줘야 해요.

 

그 다음에 봅시다. 과부이야기 나오고, 41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또 과부 나오죠. 제가 처음 시작할 때 이렇게 운을 뗐습니다. 육밖에 없는, 죽음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주님은 자기백성을, 자기 세상을 어떻게 그걸 형성하느냐, 그들은 주님을 거부하고 자기들밖에 모르는 혹 같은 존재들인데, 자아만 챙기는 사람들인데, 자기만의 세계만 챙기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주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기천국을 만드시는가?

 

제목부터 적을게요. ‘세상보다 높은 세상.’ 이 세상을 내려다 볼 때에 밑에서는 안 보이는 세계지만 위에서 보면 너무나도 제대로 파악되는 세상. 예수님의 세상이 위에 있다면 이 기존의 인간세상은 아래에 있어요. 이 두 개가 서로 있는데, 특징이 뭐냐 하면 위에서는 아래의 내막이 보이는데 아래쪽에서는 주님의 세계가 안 보이죠. 안 보이기 때문에 특이성이에요. 이 지상에서 이게 특이성으로 나타납니다.

 

그 특이성을 봅시다. 42절,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많이 넣었다고 했죠. 자, 앞에 주께서 지금 지켜볼 때에 여러 부자들이 연보궤에 돈을 넣었죠.

 

그러면 이 사람들이 돈을 많이 넣었습니까? 아니면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개의 액수가 많은 거예요? 과부가 많이 넣었습니까? 부자가 많이 넣었습니까? 이 아랫동네에서는? 이 인간세계에서는? 부자가 많이 넣었죠. 부자가. 과부의 돈이 몇 푼 된다고요. 얼마 안 되는데요. 푼돈인데. 그런데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그걸 듣는 제자들은 여기서 많다는 이 단어의 뜻을 뭔가 교정 받아야 되고 수정해야 될 필요를 받는 거예요. 많다? 그러면 부자를 봅시다. 부자는 많은 액수의 돈을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연보궤를 털어보면 99,99퍼센트는 부자가 넣은 거예요. 그리고 부자가 넣고 과부가 넣었다면 과부는 0.001퍼센트밖엔 안 넣었습니다. 이 99.99퍼센트가 많고, 과부는 적어도 대단히 적은 거죠.

 

근데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이 0.001퍼센트밖에 안 되는 이것을 많다고 할 수 있는 이 안목, 그런 생각은 어디에 본부를 두고, 어떤 원천이 있기에 이것이 많다는 새로운 개념이 나왔는지를 제자들이 이제는 숙제로 떠안게 된 거예요.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었는가? 정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44절에 나옵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이래 되어 있죠.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지속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부자는 지속될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헌금을 해도 자기 지속에 지장이 없어요. 근데 이 특이성이 있는 과부는 뭡니까? 이걸 헌금을 해버리면 자기의 지속성 자체가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없는 거죠. 그러면 과부는 죽어버리는 겁니다. 본인이 사라지는 거죠.

 

누가 자진해서 자기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을 사라지게 한다면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헌금이니까, 하나님에게 많은 만족을 드리는 헌금이 된다는 규정을 주님께서 내리신 거예요. 이게 성립이 되려면 인간은 주의 일에 방해물이 되는 거예요.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주님을 방해하는 내가 쪼그라들든지, 없어지든지, 사라지게 되면 누가 정면에 등장하겠습니까? 백퍼센트 전부 다 예수님께서 등장하겠죠. 예수님의 헌금이 뭐냐 하면 백퍼센트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헌금일 때 헌금이에요.

 

주님이 백퍼센트 만족이 되려면 그 헌금을 분석해가지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나 같은 것은 하나님에게 방해꾼이 된다는 것을 아는 자의 헌금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과부의 헌금이에요. 근데 부자는 뭐냐 하면 기존세계에서는 혹들과의 비교기 때문에, 내가 이런 헌금을 하는 행동을, 하나님에 대해서는 몰라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 “저 사람이 헌금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복 받을걸.”하는, 그 평가가 자기의 하나의 장점이라든지 이 세상 살아가는데 에너지가 더욱더 융성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겠죠.

 

“이번에 교회 예배당 짓는데 목사님이 자진해서 오천만원을 내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럼 두 가지 반응이 있겠죠. “참, 목사님은 우리가 생활비를 얼마 드리지도 않는데 오천만원을 내시는 것을 보면 평소에 사모님이 얼마나 아끼고 하셨으면, 그 사모님과 목사님이 의견이 하나가 되어서 내셨을까?” 목사가 하는 말이 “여보!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목사가 솔선수범해야 이게 주의 종이고 주의 뜻이 아니냐.”

 

이렇게 해가지고 사모님도 “주의 종인 남편이 하는 일이니까 무조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니까, 교인들이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아이고, 역시 우리 목사님 가정은 모범적인 가정이야.”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도대체 목사가 뒷구멍으로 돈을 얼마나 수십억 챙겼으면, 오천만원은 돈도 아니야. 그런 푼돈 내놓고 생색을 내느냐.” 이럴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문제는요, 헌금한 그 목사가 헌금을 하면서 자기는 헌금을 한 게 아니고 나의 죄를 내놓았다고 한다면, 헌금한 이것이 나의 죄라고 한다면 이거야 말로 복음을 아는 목사에요. “저 죄 지을 테니까 같이 죄 지읍시다.”라고 하는 식으로. 헌금하는 것이 죄 짓는 거예요. 왜냐하면 헌금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금을 내가 한다는 자체가, 헌금이라는 그 안에서 나는 뭐로 개입되고 관여되느냐 하면은 죄인으로 관여될 경우에만 이 헌금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금이라는 거예요.

 

그럼 이 헌금은 세자로 뭐가 되겠어요? 헌금 자체가 십자가지는 기능에 하나의 양상으로 헌금이 되는 겁니다. 헌금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믿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는 것. “나는 십자가 앞에 내 돈 있음과 낸다는 이 자체도 나는 잊어야 되고 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래 되어야 해요. 그렇게 해야 되죠. 그러니까 이 과부 같은 경우에는 가족도 별로 없잖아요. 과부 혼자 사니까. 부자는 자기가 헌금해놓으면 자기 친구도 많고, 같이 노는 사람들도 많고, 골프 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과부는 헌금하나 안 하나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르겠죠.

 

또 심심할 테니까 성경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장을 한번 봅시다. 겸손하지 말고 용감하게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여기서 충격적인 믿음이 뭐냐 하면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에 앉아있게 된 것이 본인의 결정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아시고 있는 일, 주께서 그렇게 조성하신 일이 나다나엘을 그렇게 무화과나무아래에 몰고 가셨다는 겁니다. 니는 참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의 뜻은, 나다나엘 본인이 간사한 게 없다는 것이 아니고, 간사한 것이 없는 진짜 참 이스라엘이 되게 하는 작업이 이미 주님 쪽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주님 몸에서 천국이 개시가 되고 천국이 전개가 되는 겁니다. 전개될 때 주의 백성은 뭐냐 하면 의아해하는 거예요. 마태복은 25장에서 니가 나에게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고 할 때에, 오른쪽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여! 언제 제가 그렇게 했어요?” 본인이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본인이 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될 정도로 모든 것은 주님의 관할 하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제가 언제 이렇게 했습니까?”

 

한번 적어볼게요. 지금 제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적어보면 참 쉬워요. 너, 나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한번 보세요. 자, 주님 쪽은 “너는 나를 이렇게 했다.” 주의 백성 쪽은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뭔가 이상하게 대화가 되죠. 주님이 해놓고 반대로 이야기해요. 너는 나에게 이렇게 했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내가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생각해서, 내가 기억하면서 무슨 행동을 하거든요. 그걸 주님께서는 피해가겠다는 거예요. 니가 생각한 그 일이 주의 일이 안 되게 내가 피해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일이 주께서 하게 하신 일로 해서 결과적으로 내 존재 자체가, 내 혹 자체가, 나의 모든 지속자체가 이미 주님의 일에 편입이 된 거예요. 주께서 그런 식으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너는 나를 이렇게 했다가 원인이 되면 결과가 뭐가 나와야 됩니까? 아, 내가 했구나! 이게 아니라, 내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되묻는 것이 하나의 결과로 나오는 겁니다. 이 되물음 속에서 뭘 잊어버립니까? 나는 주님의 받으시는 그 행위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아는 바가 없는 거예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했을 때에, 이 법칙에 의해서 내린 결론은 내가 얼마나 하느냐, 내가 전 재산을 바칩니다, 라는 생각을 했다? 안 했다? 없어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전 재산을 그냥 넣고 싶은 거예요. 장렬하게 죽고 싶다는 어떤 계획적인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 그냥 한 거예요. 제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과부가 있는데, 과부가 200원을 넣었습니다. 200원을. 200원인데 그게 자기의 전 재산이에요. 200원을 넣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칭찬했습니다. 근데 과부가 나중에 어떤 행운을 만나가지고 200억이 되었어요. 200억. 200억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200억 전부를 주님께 바치고자 할 때에 과연 이게 가능할까요? 이게 어렵죠.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무심코 한 거예요. 무심코. 근데 정말 200억 다 바칠 수도 있어요. 바칠 때에, 이건 누가했습니까? 그냥 무심코 한 거예요. 무심코. “내가 얼마 냈는지 몰라. 기억에 없어.” 무심코 한 거예요. 이래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될 때에 이 과부는 동일인물이 되는 겁니다.

 

항상 자기로서는 결과로서 나타난 존재,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몸에서,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그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경유해서 비로소 현실화된 내 몸. 이래 되는 겁니다. 원인은 주님한테 있고 나는 그 주님의 결과물. 주의 말씀의, 주의 선언의 결과물. 이게 바로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 따라서 이 과부 같은 사람은 우리한테 있다? 없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200억을 갖다가 바친들, 우리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눈치 채게 돼요. 나는 바쳤다. 왜 바쳤느냐? 마가복은 12장 44절에 은혜를 받아서 바쳤다. 이렇게 하면 이미 조작된 거예요. 이건 엉터리인 겁니다.

 

그냥 20억을 바치든, 2만원을 바치든, 이것은 그냥 하고 싶어서 했다. 이 정도만 의미를 두지, 더 이상은 의미를 두지마세요. 그리고 지나가면 그게 과거가 되어서, 과거는 어디로 들어갑니까? 그냥 죽음 속에서 다 미끄러져 내려가는 겁니다. 없어지는 거예요. 내 존재가 주님의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내 생각이 주의 생각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내가 익히 알기를 바랄뿐이죠. 나라는 것이 주의 일에 훼방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을 늘 찾는 생각을,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그런 모습. 높은 데서 보는 거예요. 2층, 두 개의 층, 높은 세상과 아래 세상을 항상 세트로 해서 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의 요령인데요, 또 요령도 기능으로 발휘하지 마시고, 그냥 위에서 볼 때에 아랫동네하고 윗동네의 이 모든 개념이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서로 반대가 되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자, 13장을 봅시다. 13장을 넘어가기 전에,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과부 같은 생각이 됩니까?”라고 하는데, 과부가 되려면 남편이 죽어야 돼요. 이 과부가 남편이 살아있을 때 이렇게 할 가능성은 없어요. 과부되게 하기 위한 변수, 그리고 재산이 많으면 이렇게 안 할 거예요. 재산이 많은데 200원 내면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산이 있더라도 그걸 다한다면 이 모든 조건은 원인자가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해놓고, 주님이 해놓고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과부인 니가 나에게 이렇게 했다고 남들에게 자랑질 하는 모델로, 시범조교로 그렇게 사용하신 거예요. 그 기능을. 그럼 과부는 “나는 그런 뜻이 아닌데요?”, “니는 입 다물고 있어. 니가 너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라고 과부한테 그렇게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의미를 주거나 기억하거나 하지 마세요. 해봐야 그거는 지 잘난 체하고 조작하고 연출하는 그런 모습에 불과하지, 우리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항상 “주님이 그렇게 하셨죠?”라는 그런 쪽으로 우리를 몰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됐죠. 그러면 되잖아요.

 

저기 시계가 있잖아요. 시계의 초침이 가잖아요. 시계가 말하기를 “낑낑 오늘도 초침을 올리세!” 초침이 내려갈 때는 “야! 이거 내리막길이라서 시원하구나!” 또 올라갈 때는 낑낑대고. 우리 인생은 맨날 시계 배터리를 지가 채우는 줄 알고, 지가 시침과 초침을 지가 옮긴다고, 열심히 살아야하고, 칠순 때는 칠순잔치해서 기념하고, 환갑 때는 일본으로 놀러간다고 하고, 전부 다 자기 축하, 자기 칭송, 이거 되게 애매하잖아요.

 

근데 누가 그렇게 살게 하셨습니까? 여러분 일가친척 가운데서 사위가 칼 들고 안 쳐들어왔잖아요? 왜 그렇게 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장인장모를 죽였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왜 안 죽였느냐? 모든 상황은 내가 걱정한다고 될 상황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니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는 그 상황을 계속 유발시킨 겁니다.

 

“나다나엘아! 니가 간사한 것이 없구나.” 나다나엘에 괄호를 비워놓고 거기에 여러분들의 이름을 집어넣어보세요. 나씨 말고 다른 이씨나 뭐 그런 것을 집어넣어보라 이 말이죠. 오늘 식사하다가 제가 좋은 이름을 찾아냈어요. 앞으로 여자이름을 지으면 이런 이름을 짓고 싶은데, 이름이 꽃담, 꽃담에 어울리는 성은 명씨고. 명꽃담. 얼마나 참합니까? 가만 보니까 참하긴 참한데, 꼭 식당이름 같아요.

 

이름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이름에다가 이근호니 뭐니 아무 의미 없어요. 이 이름을 빼버리고 여기에다가 누구 이름을 집어넣느냐 하면, 주님, 주께서 그렇게 간사한 것이 없다고 주님 쪽에서 규정을 하신 거예요. 주님 쪽에서. 그래서 내가 내 규정에 신경 쓰지 말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에 대해서 주님 찾고 주님 바라보게 되면 그게 바로 성도다 이 말입니다. 어렵지 않죠.

 

근데 이런 원칙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맨날 나를 점검하는 내 자신이 주의 일을 지금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전 재산을 바쳤는지, 아니면 반을 뺐는지, 맨날 이러고 있다고요. 아니, 반을 빼도 주의 일이고, 20원 줘도 주의 일이고, 50원 줘도 주의 일인데, 왜 자꾸 니 행동에 니가 신경을 쓰냐 이 말이죠. “나는 과부처럼 되어야 하는데...,” 과부처럼 재산 바치려고 하지 마세요. 폼 보니까 바칠 사람도 없고. 그냥 주께서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살게 하셨다고 왜 그렇게 못합니까? 나 말고 누구 하나 상정하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나 말고. 진짜 오뉴월에 개 팔자처럼 살면 안 되겠어요?

 

13장 봅시다. 그렇게 사는데 제가 괜히 나무란 것 같은데 일단 공식적으로 죄송합니다. 1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너질 것 같으면 애초부터 지을 때에 지진 강도 7.2정도로 오게 해서 못 짓게 하면 되잖아요. 다 짓고 난 뒤에, 그것도 멋지게 거창하게 다 짓고 난 뒤에 왜 무너뜨립니까?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이유가 인간의 죄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신 거예요. 인간의 죄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지속성, 자기가 어떤 건물을 할 때에 기와 한 짝, 어릴 때 절에 가면, 이번에 가보니까 기와 한 장에 만원이었어요. 예상보다 값이 헐값이에요. 보셨어요? 못 봤어요? 저는 그런 것만 보이는데. 사람이 뭔가 벽돌 하나 교회에 기부할 때 잊지를 못합니다. 제가 아까 과거를 잊으라고 했잖아요. 잊지를 못해요. 자기의 기여도를 생각한다고요.

 

죄가 뭐냐 하면 나를 기억하고 나를 생각하는 그게 죄에요. 그러면 이 죄를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요, 그 죄를 죄 되게 하신 그 원인자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간사한 것이 없는 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항상 우리가 간사한 것이 없는 것은 원인이 주님 쪽에 있을 때, 주님의 규정이 우리 자신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이고 우리 고유의 것을 내세우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깨닫게 하는 능력 있잖아요. 그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고개 끄덕이면서 만족스러워 하면서, 내가 진짜 만족스럽다고 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달리 이야기하면, 이번 수요일에 그냥 지나가듯이 이야기한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운명이란, ‘운명이라는 것은 거스를 때 진가가 나온다.’ 만약에 어떤 건물 앞에 돌로 만든 사자상이 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저거는 진짜 사자다.” “아니야, 돌로 만든 가짜야.” 이렇게 서로 이야기할 때, “우리 한 번 건드려볼까?”하고 건드려봤어요. 돌로 만들었는데 건드려보니까, 으르렁하고 깨어났다면, 그거는 가짜 사자가 아니고 진짜 사자겠죠.

 

운명이 살아있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되고, 창세전에 어떻게 되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고 하는 이거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우리는 운명을 거스르라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좋은 소리를 할 때는 한번 적어놓으세요.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주의 뜻을 거스르라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주의 뜻을 거스르는 이것이 주의 뜻인 것을 아는 것이 성도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주의 뜻을 우리가 맞춰드릴 수 있다? 없다? 못 맞춰드리는 이것이 주의 뜻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운명을 미리 당겨서, 운명을 내 소유화 시켜서, 내가 이만큼 뭔가 됐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정시키고 싶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정시키고 싶은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유대인들이 성전을 짓습니까? 이게 주의 뜻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왜 성전 짓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주의 뜻입니까? 주의 성전을 짓는 것이 하나님 보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죠. 그러면 성전을 지을 때,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은 누구한테 있다고 봅니까? 본인들에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성전 지으라는 명령에 따라서 그들은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여력과 재산과 이런 것을 자기들이 해낼 수 있다고 자신감을 주게 된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해놓은 성전이라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행함으로 할 수 있다는 그것 때문에 주의 일에 훼방자가 된다는 결과를 유인하게 하는 그것이 주께서 정해놓은 하나의, 하나님의 운명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정하신 뜻을 안 건드릴 수가 없어요. 건드리면서, 그래서 우리는 내 뜻대로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닌 것을 날마다 깨달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뜻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 주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한 이 사실을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어떤 주장이나 권리로서 행사하지 않아야 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이만큼 해주셔야 한다고 하는, 자기 자신의 이익이라든지, 장기라든지, 장점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뭔가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아예 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는데, 막달라 마리아를 보세요. 지난 주일부터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직업이 안 좋잖아요. 남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겠어요?

 

강도가 주님을 찾을 때, 구원받은 강도가 주님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 직업을 계산했습니까? 안 했죠. 보세요. 얼마나 자기의 과거인 강도짓을 잊어버렸습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그 사실,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주님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그럴만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게 바로 신자잖아요. 그렇죠. 맨날 내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자꾸 자기가 나오지 말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에요. 됐잖아요. 그럼 됐으니까, 이 정도로 이제 끝내도 괜찮겠죠.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오늘 강의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살 수 없는 나를 누가 살린다던가, 살렸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인생 전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아까 이국종 교수하고 북한 탈영병이야기를 했지만, 그 사람의 경우에는 어떤 계기가 있어요. 자기는 북한에서 내려왔고, 7발이상의 총상으로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국종 교수가 나를 살렸다는 계기가 있는데, 이런 계기, 어떤 지나간 사건, 이런 것 생각하지 말고, 우리 인생 전체가 어떻게 꼬이든, 잘 됐든, 어떻게 망치든, 실망스럽든, 아니면 망신스럽든, 내가 남의 것을 부러워하든 관계없이, 인생 전체가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이런 인생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누가 누굴 건져요? 주님이 나를 건지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던, 그건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인생에 대해서 근심걱정 할 필요가 없죠. 남이 나를 시비 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화가 난다, 그래서 복수하고 싶다, 이런 것들은 나와 상관없이,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 관계없이 주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꾸 잊어버리고, 주님 생각하다가 도로 누구생각으로 꽂히는 거예요? 나한테 꽂히는 거예요.

 

말씀을 준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성전을 지었던 돌이 다 남지 않는다는 이 말을 성전에만 해당시키지 말고, 내가 만든 기업체라고 해보세요. 그리고 또 내가 만든 개척교회라고 봅시다. 이 교회가 다 날아가고 교인들이 다 떠난다고 할지라도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식이 10명인데, 하루아침에 다 죽은 사람이 있죠? 누굽니까? 욥이죠. 욥에게 자식이 10명 죽고 재산 다 날아가도 그게 욥(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주신 분도 주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잖아요.

 

한 순간의 계기보다 인생 전체를, 의도적으로 이런 인생을 가게 하신 것은, 그 인생을 건지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본인이라는 것을 알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주제가 뭐냐,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이 뭐냐,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죽었다가’라는 과거는 없애고 ‘살았다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죽었다가 살아났음을, 계속해서 사도들은 되풀이해서 설교하는 겁니다. 모든 설교는 그것뿐이에요. 너 말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면 이 세상은 그게 어떤 세계이든 무덤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무덤이고, 거기서 살았다는 말은 그 중에서 자기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예수 자신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과 관계 지어져서, “아, 주님은 자기백성을 건지시는데 능하신 분이구나!” 그래서 그 능력 앞에서 내가 이만큼 했다, 안 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사시면 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을 따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그 모습 자체가 믿음인 것을 왜 이제까지 우리는 몰랐습니까? 따로 믿음을 연출하지 말고, 자기를 조작하지 말고, 이 못난 인생이지만, 못난 것조차도 주님 앞에서는 이유가 있었음을 아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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