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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9 00:07:40 조회 : 548         
자기 조롱 18122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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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1-01 11:20 
광주강의20181228a 마가복음13장 9-1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9-13절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10절,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절,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가복음 13장 9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이래 되어 있죠. 상당히 문장은 굉장히 짧은데요. 이거 꺼낼 내용은 어마어마합니다. 제일 아주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나를 인하여”죠. 너 자신을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은, 그거는 별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을 인하여 고난 받아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예수님을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예수님을 증언하거든요. 증거가 돼요. 나를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만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고 고생인데, 이건 주님의 증거하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과 인간 스스로 밥 먹고 살려고 고생하는 것과의 차이점이 분명해지려면 세상 보는 이것부터 먼저 달라져야 되겠죠.

 

세상 보는 기준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 누굴 기준으로 할 것이냐. 첫 번째 성령 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봤을 때. 두 번째는 육의 사람이 기준이 될 때. 자, 육의 사람이니까 비교가 되려면, 성령 받은 사람이 기준이 된다면 이 육은 성령 안 받은 사람 또는 성령이 없는 사람이 되겠죠. 이렇게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안 받은 사람으로 기준을 나눈다는 자체가 이미 성령 받은 거죠. 이 나눈다는 자체가.

 

애들을 이렇게 가르칠 때 성령 받은 애와 성령 받지 않은 애로 나눈다는 자체가, 선생님 자체가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돈 있는 집안의 애와 돈 없는 집안의 애로 그렇게 나누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것과 성령 받지 않은 것 차이. 처음부터 참 어렵습니다.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과의 이 차이가 뭐냐 하면, 이 육의 사람은 공간적인 것을 양적으로 계산해요. 양적으로 분별합니다. 양적으로 판단하죠.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으로 판단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성령 받지 못한 육의 사람들은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 질이 아니고 양적으로 판단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여기 지구가 있으면 오세아니아, 태평양, 쭉 이렇게 나누잖아요. 이게 공간을 양적으로 분간하는 거예요.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러시아 사람이야? 중국 사람이야? 스리랑카 사람이야? 뭐 이렇게 나누는 것이 양적인 판단이 되는 겁니다. 전라도야? 경상도야? 뭐 이런 것. 어느 학교 출신이야? 뭐 이런 것. 전부 다 공간개념을 양적으로, 양으로 계산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질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양적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면 양적으로 판단했을 때, 판단하는 이것이 뭐가 잘못이냐? 세상 현재 모든 학문도 이렇지만 과학적 학문도 이렇게 양적으로 판단하거든요. 쓰레기와 쓰레기가 만나면 거기에 새로운 창조가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냥 쓰레기의 집합에 지나지 않죠. 쓰레기와 쓰레기가 서로 만나면. 근데 사람들은 쓰레기 하나와 쓰레기 하나가 만나면 어쨌든 쓰레기 하나와 또 쓰레기 하나가 만나니까, 1+1=2가 되잖아요. 그럼 쓰레기가 한 7600개가 있으면 7600으로 계산하는 거예요. 7600으로.

 

질은 전혀 따지지 않아요. 양적으로 얼마나 풍부한가로 자부심을 느끼는 겁니다. 한 달 수입이 연봉으로 3억이다. 유치원 원장처럼. 그럼 3억을 벌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는 그거는 일단 묻지를 않죠. 돈 50,00+50,000=100,000원이 되니까. 거기에 뭐 당신은 이 50,000원을 벌기 위해서 양심을 어떻게 팔았습니까? 그런 것을 일체 묻지도 않는 거예요. 그냥 양은 무조건 보태면 늘어나는 거예요. 빼면 줄어드는 것이고. 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것은 나쁜 짓이고 늘어나는 것은 축복이고. 줄어드는 것은 저주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육적인 사람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9절 가운데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어디에 넘겨주겠고? 공회에 넘겨주겠고. 공회죠. 공회. 요새 국회. 그 당시에 최고의 통치기관이거든요. 유대나라가 식민지 시대에 있었으니까. 유대 장로들의 집합소가 공회잖아요. 최고의결기관, 이거 공회입니다.

 

공회니까 뭐냐 하면 다수가 되는 거예요. 다수. 많다가 돼요. 하나하나 그 인간들 뒷조사하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여럿이 모인 결정은 개인이 내린 결정보다 더 실효성이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대사회라는 공간을 양적으로 보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결정한 그것이 힘으로 효과를 내는 거고. 개인의 소소한 의견은 그냥 다수의 의견보다 힘을 받지를 못하죠. 힘을 받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의 사람의 특징은 그냥 물리적이다. 물리적인 효과, 이것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물리적인 효과. 물리적인 효과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나무를 가지고 탁자를 만들 때 나무와 나무사이에 못을 박잖아요. 목수가 망치로 못을 박으면서 “나무야 미안하다. 많이 아프지?” 이렇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가구를 만들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아주 아이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두 살, 세 살 애라고 봅시다. “이거 못이고 이거 망치고 이거 나무거든.” 그러면서 치라고 할 때 애는 뭘 느끼느냐 하면 고사리 같은 손이지만 때릴 때 어떤 에너지를 느끼죠. 치면서 나무가 반발하는 그 힘도 느끼고, 그 반발을 이겨가면서 기어이 못을 망치로 때려주는 그 에너지를, 양편으로 자기 온 몸으로 다 느낄 것이 아니겠습니까? 느끼게 되면 애는 그 망치나 못이나 나무에다가 감정이입을 하게 되죠. “나무야 미안하다. 이건 내 뜻이 아니고 엄마의 뜻이야. 많이 아프지? 하지만 니가 의자가 되게 되면 내가 예쁘게 해줄게.”라는, 애들이 인형놀이 할 때 감정이입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물에다가 뭘 집어넣은 거예요? 개인의 정신을 집어넣은 거잖아요. 사물에다가 개인의 정신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런 게 없다 이 말이죠. 점점 어린애 정서로부터 이 세상의 어른의 정서로 점점 더 멀어지는 겁니다. 이 말은 질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것보다도 물리적인 그것이 대세가 되어가는 사회. 이걸 다시 말하면 집단의 의사가 무조건적으로, 개인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집단화돼버리면 그 자체가 진리로 행사되는 그러한 사회. 그걸 공간적인 영역으로 생각하자 이 말이죠. 공간적인 영역.

 

상당히 약간 좀 난해하죠. 이거하고 오늘 본문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어요. 지금 육의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고 제가 이렇게 단정을 지었는데,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이렇잖아요. 이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드물지 않겠는가, 라는 그런 생각이 들겠죠. 우선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밥 먹은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정신차려봅시다.

 

자, 육의 세계는 뭐냐 물리적인 효과기 때문에, 물리적인 효과는 모든 사물을 하나의 물체로 보는 거예요. 물체로 보면, 물체a+물체b=물체ab가 되는 겁니다. 화학반응이 아니고 물리적인 반응일 때 되는 거죠. 그러면 사람 하나 있고 또 사람 하나 있으면 두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과거가 어떻고 묻지도 않고 무조건 두 사람이에요. 만약에 1500명이 있다면 이거는 1500명의 사람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한명이나 두 명보다 월등하게 가치를 더 부여하는 겁니다.

 

여러분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몇 명이 우세해도 여러 사람, 대다수가 아니면 그거는 뜻이 관철되지 않는 겁니다. 그렇죠. 육의 사람이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그냥 물체덩어리와 물체덩어리의 만남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데, 이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성령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공간적인 사항을 양적으로 분할되고 합치되고, 분할되고 합치되고 그런 식으로 공간이 생겨지는 것이 아니고, 최초로 성령 받은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요단강에서. 그분은 개별자속에 보편자가 들어있어요. 개별자. 예수님은 한 분인데 모든 세계가 다 통일되어서 거기에 다 담겨있다 이 말이죠. 개별자속에 보편자가 들어있어요. 이거는 새로운 공간개념입니다. 새로운 공간개념이에요.

 

예수님 속에 계신 분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더 큰 거예요.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뭡니까? 이거는 공간적인 양적개념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판단 못하죠. 그 사람을 건드리면 누굴 건드리느냐면 주님을 건드리는 것이고. 더 비극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어떤 성도를 핍박하게 되면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야생 코끼리를 건드리는 것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성도 하나는 쓰레기 아니에요. 귀한 보배 같은 것이거든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나의 귀한 보배에요. 보배. 왜 보배냐, 뭐 생긴 것이, 착해서 보배가 아니라 그 안에 보배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주님이 들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육의 사람은 양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너는 나처럼 1일 뿐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라고 봅시다. 예수님은 지난 화요일에 그런 강의를 했거든요. 요한복음 8장 16절에서 내가 혼자 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다 했다 이 말이죠.

 

이게 물리적 양적개념으로는 도저히 서로 연결이 안 되죠. 물리적 양은 모든 것을 물체로 봐요. 매직 하나 있고 지우개 한 개가 있으니까, 이거 1이고 이거 1이고 해서 뭐가 돼요? 2가 되죠. 근데 매직하나가 단독으로 있으면서 2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단독으로 3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성도 안에는 1이 아니고 2가 들어있어요. 주님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공간적인 차원을 양적으로 파악 안 해야 될 이유는, 그렇게 되면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가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문장으로 정립될 수 있어요.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가 양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서는 도저히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끼리 있는 단일 집단 내에 아파트 관리사무소 광고가 치고 들어왔잖아요. 복합적이죠. 중복되어 있죠. 갑자기 우리는 강의를 잠시 멈춰야 된다 이 말이죠. 부모가 나를 태어나게 해서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여기에 이질적인 하늘나라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이게 바로 성령을 받음이에요. 성령 받은 거예요.

 

그러니,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이걸 환난이라고 할 수도 있고 고난이라고 할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죠. 결론 부분을 미리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환난을 주는 게 누구냐 하면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에요.

 

왜냐하면 ‘나’속에 육의 요소가, 개별자로 살고자하는 요소와 보편자로 살고자하는 요소가 있거든요. 천국백성으로 살고자하는 것은 보편적인 지위, 위치에요. 그러나 성경에서 뭐라고 하던 간에 다 귀찮고, 나는 내 배부르고 등 따시고 잠 잘 자고 나하고 관련된 사람이 아무 탈 없이 공부 잘하고 잘 뛰어놀면 더는 더 욕심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개별자의 의식이에요.

 

개별자의 의식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 공간을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양적개념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양적개념. “아니, 뭐 북한을 퍼주던 말던 나는 몰라. 나만 안 다치면 되지.” 나만 안 다치면 된다는 거예요. 6.25전쟁 때 강원도 산골에 아가씨가 머리에 꽃 꽂고 미쳐서 뛰노는 동막골이 있죠. 동막골 주민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묻지 말라는 거예요. 공산주의가 좋으냐 민주주의가 좋으냐 그런 것 없고 우리는 우리끼리 감자 캐면서 우리끼리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우리끼리.

 

자, 우리끼리니까 공간적 개념이죠. 우리끼리의 공간적 개념에 있어서 이질적인 요소가 없죠. 근데 공간적 개념인데 여기에 인민군이 들어오고 한국군이 들어와서 그들에게 뭘 요구합니까? “너는 공산당을 믿을래? 자유민주주의를 믿을래?” 이래 따지는 거예요. 자, 공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강원도 동막골입니다. 동막골은, 이거는 하나의 산에 갇혀서 제한된 거예요. 제한된 것이니까, 우리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똑같이 갖고 태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애들의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골목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거예요. 애들은 자꾸 자기가 컸던 이 안에, 요 안의 범위로 제한적이에요. 애들은.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애들은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사람들에게서는 안심을 하지만 낯선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굉장히 무서워해서 자기엄마아빠한테 대번에 피해버립니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애들한테 선물을 준다고 어떤 애의 아버지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분장을 했어요. 빨간 옷 입고 하얀 수염 달고 모자 덮어쓰고 목소리 굵게 내고 “에브리바디Everbody 칠드런Children’!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드디어 왔습니다.”라는 그 동영상을 제가 받아봤어요. 멀리 독일에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딸이 자기 아버지를 못 알아봤어요. 산타클로스할아버지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외손녀는 어떤가 하면은 산타클로스고 뭐고 없어요. 무섭다고 아빠 품에 안겨서는 선물 줄 때만 손을 내밀어서 선물을 가져갔을 뿐이에요.

 

애들 생각은 철저하게 개별자에요. 자기 익숙한 그것에만 안심을 하는 거예요. 물론 그 영역을 공간적인 영역으로 넓혀가겠죠. 자꾸 넓혀가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도 바깥에 나가지 않은 사람은 항상 꿈꾸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잖아요. 그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회라는 사람이 뭡니까? 공회라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집합체죠. 그러면 영적세계, 천국세계, 그런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전혀 모르잖아요. 모르죠.

 

누가 누굴 핍박한다고요? 그 육에 속한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필히 자기가 모르는, 해석이 안 되는, 자기 판단이 안 되는 쪽을 공격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걸 너희는 상당히 이상히 여겨야 하고 또는 당연히 여겨야 된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참 어려워요. 보통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통 이웃 같으면 친하게 지내려고 할 거예요. 그러나 주님에 속한, 그 새로운 공간에 속한 사람만큼은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극렬한 반대성향을 이상스럽게 그걸 토해낼 것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거예요.

 

그러면 이게 예수님의 예언이잖아요. 이 논리가 인간으로서 납득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납득이 안 되죠. 예수님만 알고 있는 논리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된다니까요. 근데 이걸 인간적으로 납득을 시키려고 한다면 이거는 엄청난 잘못된 겁니다. 지금 얼굴들을 보니까 취지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는 얼굴들인데.

 

논리성사가 되려면 두 가지에요. 하나는 그렇다면 환난을 피하는 방식. 또 하나는 그렇다면 환난을 유발하는 방식. 근데 이 두 가지 다 논리를 성사시키는 쪽에서는 둘 다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거예요. 환난이 있으니까 피하자. 피하는 방법은 뭡니까? 라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이참에 순교해서 빨리 천국가야지, 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환난에 끼어들 수 있는가? 환난의 폭풍에 뛰어드는 방법이 뭡니까? 라는 사람이 있죠. 두 번째가 더 까불고 있죠.

 

둘 다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이라는 논리를 자기가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예언은 논리가 됩니까? 안 됩니까? 논리가 안 되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퍼부었는데 무슨 논리가 있어요. 주님의 의지인데, 우리가 그걸 왜 알아야 됩니까? 당하면 당하는 거죠. 당하면 당하는 거예요.

 

아까 식당에 스테이크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죠. 스테이크가 없었다는 것을 감안했습니까? 감안해도 소용이 없죠. 그 집은 스테이크 집이 아니거든요. 그 집의 일방적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기대한 자체가 잘못이죠. 그런데 그 식당에서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환난을 받을 것이다, 라고 했다면 환난을 받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환난을 피하는 방법, 환난을 적극적으로 내가 유발해 받아서 신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 이러지 말고 그냥 주시는 대로 받을 뿐이에요.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면 환난 받으면 효과는 뭐냐, 그 효과는 우리가 바로 성령이 있는, 세상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 그런 사람의 종류라는 것이 확인이 되고 파악이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이미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말씀을 봐야 돼요. 자, 다시 한 번 봅시다.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벌써 ‘너희는’ 나오죠. 너희라는 이 말 자체를 설명하는데 벌써 20분 이상 걸렸어요. 물론 아파트광고 4분은 빼고.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라는 이 단어자체도 어려워요. 단어가. 너희라는 이 단어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단어지, 우리가 너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방법이 없어요. 환난 받으면 신자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 말씀도 환난을 피하라고 주는 말씀도 아니에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조심할 것도 없죠. 뭐. 다만 조심하라고 하는 말은, ‘아, 이런 차원에서 환난이 왔구나!’하는 것을 짐작하고 순순히 그걸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그런 뜻이죠.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여기에서 우리가 “그러시면 아니 되옵나이다.”라고 하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는 거예요. 이거는 하나의 운명 같은 겁니다.

 

성도가 가는 것을 라틴어로 이야기하면 아모르파티amor fati('아모르Amore'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파티’는 ‘파티(Party)'로 오해 할 수 있는데 파티는 ’Fate‘ 즉 운명을 말한다.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 아모르파티는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니체가 이야기한 거거든요. 김연자씨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니체가 이야기한 거예요. 운명의 파티다. 우리는 그냥 운명 지어진 존재에 불과하다. 운명 지어진. 그 파티가 그 파티인지 그냥 내질러봤는데 일단 그렇다 치고.

 

주님은 두 개의 공간을 생각하는 겁니다. 두 개의 공간을 생각하는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육적인 공간은 뭐냐 하면 분할되어서 겹쳐지고, 쪼개면 쪼개지고 합치면 합쳐지는, 엮이면 합쳐지는 그런 양적인 개념의 공간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공간이라고 한 것은 무슨 개념이냐 하면 개별자속에 천국을 집어넣는 공간이에요.

 

우리의 신체 속에 예수님의 죽음도 집어넣고 예수님의 부활도 집어넣죠. 우리라는 신체의 공간속에 죽음의 세계, 십자가의 세계와 부활의 세계를 다 집어넣을 수가 있어요. 꼬깃꼬깃하게 해서 다 집어넣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어떻게 들어옵니까? 라고 하면 또 양적인 개념이 돼요. 그렇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신체 속에 십자가도 들어있지만 또 뭐도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부활도 들어있죠. 그러면 우리는 부활의 운반체가 되죠. 그걸 좀 어려운 말로 부활의 형상체 라고 이렇게 할 수가 있는데, 부활의형상체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스마트 폰을 보면 배터리 있죠. 그걸 보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고 나면 자꾸 줄어들어 있잖아요. 그 스마트 폰 배터리 신세가 우리 신세가 아닙니까?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는 거거든요. 매일같이.

 

간만에 퇴직했다가 취직했다고 좋아하면 안돼요. 취직하면 뭐합니까?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는데. 배터리가 4개 표시되어 있다가 3개로 점점 더 막대기 칸수가 줄어든다니까요.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까?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선 세상적인 양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목숨은 처음에 100퍼센트 있었는데 죽으면 0퍼센트가 된다. 이게 양적개념이거든요. 질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양적개념.

 

그러한 우리 속에 새로운 중복된, 중첩된 사랑공간이 같이 엎어져있다면 우리는 뭘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목숨은 삭감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게 삭감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몸은 죽으면 죽을수록 뭣이 빛난다? 다시 사는 몸이라는 것이 점점 더 그 가치가 높여지죠. 우리가 살 수 있는 몸. 물론 살 때는 고물 없애고 신상으로 바꾸어서 삽니다. 부활됩니다. 똑같은 몸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몸이거든요. 근데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고 시집도 아니 가는 그런 몸으로 되어 있어요. ‘아, 이 몸이 장가 안 가는구나!’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거는 양적으로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대들 때에 이 땅에서 결혼을 일곱 번 한 사람이 있다면 나중에 천국가게 되면 누구의 남편이 되겠느냐, 라는 그 질문을 한 거예요.

 

그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천국개념을 양적 공간 개념으로 생각한 겁니다. 양적 공간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시작을 뭐로부터 했느냐 하면은, 나는 내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오고 내가 태어난 그대로로 가득 차 있다. 그걸로 끝. 이래 보는 거예요. 내 안에 다른 요소가 안 들어왔다. 이 몸은 이 몸뚱아리뿐이라고 여길 때는 양적 개념이 되는 겁니다. 내가 그렇다는 말은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이거든요.

 

여러분들이 모델이 있는 그림을 그린다. 화가가 모델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에, 모델을 보고 그냥 베껴서 그린다고 하겠죠. 그게 아니에요. 화가가 먼저 자기생각을 모델 쪽에다가 입혀버려요. 입히고, 자기가 모델을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생각하는 그림을 화가가 그리는 겁니다. 내가 여기 가만히 있지 않고,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덧입혀놓고, 덧입혀놓은 상태에서 그걸 그대로 가시적으로 종이위에다가, 천위에다가 물감으로 그리는 거거든요.

 

이게 화가만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뭐라고 할 때는 아내가 남편의 이야기를 그냥 듣지 않고, 아내가 남편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럴 때 아내는 남편이 그럴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관점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관점주의.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관점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냥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인간은 선입감이 있다는 것으로는 모자라요. 그 선입감이 어떤 선입감인데? 라고 할 때는 내가 나를 보는 선입감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이래보시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이거는 어린애가 부모를 볼 때도 마찬가지에요. 엄마보고 뭘 사달라고 하면 엄마는 “안 돼.” 애는 “그게 왜 안 돼?” 엄마는 “이게 뭐냐 하면 니가 관점주의기 때문에 그렇다.” 애는 내가 엄마라고 할지라도 그거는 허락이 될 텐데, 라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생각을 하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결론삼아 이야기를 했잖아요. 환난을 누가 줍니까? 내가 나에게 환난을 주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여기 성경에서는 누가 준다? 공회가 준다고 했죠. 공회가. 이 공회라는 것이, 지금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사회잖아요. 유대사회 앞에서, 공회에서 먼저 핍박의 모델이 되신 분이 계시죠. 누굽니까? 예수님이 핍박을 받아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잖아요.

 

그러니까 공회가 예수님을 공격했을 때에, 이 공회가, 우리가 공부한대로 하면 공간을 뭐로 본다? 양적 개념으로 보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공회가 모일 때 출석 체크하는 거예요. 몇 사람 왔다. 이래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인간다운 몇 사람 왔다가 아니라 무조건 몇 사람 왔다가 되는 거예요. 인간다운 사람 그런 거 따지지 않고 그냥 하는 거예요. 국회 투표할 때 표가 몇 표 나왔지, 인간다운 사람 표가 몇 표, 덜 인간다운 사람, 짐승 같은 사람 표가 몇 표, 이렇게 이야기를 안 한다니까요. 표라는 말이 그래요.

 

여러분 때 묻은 5만 원짜리하고 깨끗한 5만 원짜리하고 어느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똑같죠. 때 묻은 5만 원짜리로 깨끗한 손수건 5만 원어치 사는 것이나 더러운 5만 원짜리를 가지고 깨끗한 손수건 5만 원어치 사는 것이나 나중에 보면 손수건이 이만큼 되어 있다고요. 그게 교환수단이기 때문에 그래요. 교환수단이기 때문에.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자신을 보다 더 나은, 자기 자신이 시발점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 뭐냐 하면은 교환매개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그리던 나가 되기 위해서 나를 아낌없이 소모용으로 사용해서 더 큰 것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나를 소모용으로, 나를 매개로 사용해서.

 

공회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다수의 의견이 진리에 가깝다는 취지를 갖고 있는 것이 공회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몇 분입니까? 한분이죠. 일대 다수잖아요. 1 대 다수. 근데 이 공회 안에서 공격한 것이 예수님 혼자뿐이죠. 근데 앞으로는 나뿐만 아니고 나의 증인된 사람도 같이 당한다는 것을 지금 예언하고 있거든요. 그럼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럼 나는 예수님 편에 설래.’라고 생각하겠죠. 그런 인간이 없다니까요. 그런 인간이 없어요. 그럼 우리는 어느 편이냐, 공회 편에 서죠. 같은 인간이니까. 태생이 육으로 태어났잖아요. 그럼 공회 편에 선다고요. 공회 편에.

 

그러면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뭡니까? 공회의 여러 사람의 말이 옳다는 그런 성향을 내가 갖고 있어요. 육이니까. 근데 성령이 와버리면 예수님이 옳다는 예수님 편이 생기죠. 그럼 내 안에서 누가 누굴 공격해요? 공회 쪽에 서있는 나가 예수님 편에 서 있는 나를 공격하면서 뭐가 일어났습니까? 이게 바로 환난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봅시다.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죠. 매질당하면 다 순교자입니까?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 예수 믿는 사람인데, 마가복음 13장 9절처럼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예수 이름으로 내가 공회로부터, 안 믿는 사람으로부터 매를 맞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든지 혹은 ‘내가 중국에 와있는데, 북한에 와있는데 예수이름 믿는 사람으로서 핍박을 각오해가지고 성경책 다 째이고 나는 교도소에 가고 결국 사형당하는 일이 있구나. 이것이 주께서 주시는 환난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 마가복음 13장 9절의 말씀을 이룬 겁니까? 안 이룬 겁니까? 안 이룬 거예요.

 

왜냐하면 이거는 내가 공회에 속한, 육적인 나로서는, 육적인 인간은 주님의 계획을 사전에 눈치 챈다? 못 챈다? 못 채죠. 주님의 일은 뭐든지 우발적이고 사건이기 때문에. 내가 미리 그걸, 북한에 가고 중국에 가면서 은근히 내가 신자이고 싶어가지고, ‘이거 보안부에서 좀 나를 안 잡아가나’라는 것을 했다가 ‘옳다구나. 잡아가는구나. 드디어 마가복음 13장 9절의 말씀이 계시되었구나.’라고 생각을 하다면, 순교하고 싶은 나를 설정해놓고, 이미 성경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는 내가 그걸 소모시켜서, 그걸 매개로 해서 내가 되고 싶은 거룩한 순교의 모습, 상상한 순교의 모습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지금 수작을 부린 거예요.

 

아니, 이 대목을 가지고 하는 주석이나 어느 설교를 한번 들어보세요. 지금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수작을. “마지막 때 환난을 여러분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뭐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주께서 너를 신자라고 인정해줄 것 같아? 택도 없는 소리에요. 내가 나를 핍박해야 이게 순교자에요. 핍박하는 나와 핍박받는 나가 둘 다 있어줘야 이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애가 20대 중반도 아니고 20대 초반인데 벌써 결혼하겠다고 설친다. ‘자, 저걸 패버릴까?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할 때,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님, 아버님 이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게 더 미워. 좀 젊을 때 즐기지, 결혼하면 갑자기 행복이 절로 오고하는 것인 줄로 아는 것처럼. 이게 아까 관점주의라는 거예요. 아들을 보면서 또는 딸을 보면서 나를 보면서 자기가 생각했던 생각대로 되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겁니다. 그게 내 속에 뭐가 있기 때문에? 내 속에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기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억을 뭐로 하느냐 하면은 망각의 존재로 바꿔야 돼요. 근데 우리는 기억한 것을 망각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우리는 내가 기억한 노선 말고 다른 노선이 난입하고 침범해야 돼요. 그 다른 노선이 뭐냐 하면은 주님만 알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 그 길이죠. 그게 생명의 길이고. 내가, 일본말 써서 죄송합니다. 겐또けんとうkentou, 겐또가 우리말로 뭐라고 하죠? 어림잡아서. 내가 어림잡아서, 내가 겐또잡아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공로만 가치가 있지 거기에 섞이는 것을 싫어해요. 예를 들어서 주님께서 뷔페식당에 가서, 맛있는 거 있잖아요. 포테토하고 오뎅하고 이런 것. 맛있는 거 이런 거 쭉 접시에 담아왔는데, 앞에서 그걸 보고 서글프다고, “주님 이것도 잡수세요.” 해가지고 마음대로 집어넣고 이렇게 하면 주님이 저리 탁 치워 버리죠. 주님의 모든 세계는요, 주님의 원대로 뜻대로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끼어들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어요. “나가 있어!” 구원할 때만 건질 뿐이지 우리가 내 구원에 내가 관여할 게 일체 없다니까요. 일체 없어요. 오늘 제목을 겐또라고 할까? 그런데 마가복음 13장 9절을 가지고 자기가 지금 겐또 잡는 거예요. 자기가 구원된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 조작에 들어가는 거죠. 일종의 시나리오를 쓰는 거예요. 이 대목의 모든 설교가 다 그래요.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겠고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라.

 

제가 어제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저의 예가 약간 극단적인 것이 있긴 있어요. 그러나 다시 극단적인 예를 들게 되면 음주운전해서 비틀거려서 경찰한테 걸렸거든요. 근데 경찰이 하는 말이 “아이고, 어르신 음주운전 하셨네요. 조심히 운전해가지고 가서 가족 품에서 주무세요. 안녕히 가세요. 조심히 가세요.”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음주운전자가 어떻습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죠. 그렇죠.

 

그 예를 제가 화요일에 들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한테 좋게 이야기하면 다 점잖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음주운전을 해도 “아유, 잘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이 있었으면 한잔 걸쳤겠습니까? 어르신, 한잔만 했죠?” “(큰 잔으로)한잔만 했어요.” “조심히 가서 주무세요. 혹시 사고 나더라도 우리가 책임질게요.” 이래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좋게 해주면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더더더더.... 불라고 하니까 이만큼 화딱지가 나서 숨기려고 도망치는 겁니다.

 

성도가 골프 치다가 캐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캐디한테 한 잔소리하니까, 옆에 있던 신문기자가 그걸 알아가지고 사진 찍어서 갑질한다고 했을 때, 그게 뭐가 돼요? 그게 환난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위한 환난. 환난의 조건은 뭐다? 예상 못한 거예요. 우발적인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환난은 다 비켜가요. 내가 생각한 환난. 시집갔는데 시어머니가 아주 독실한 불자라서 교회 간다고 머리채 다 뜯어가지고 앞에만 남고 위에는 완전히 소갈머리처럼 다 빠졌다. 이게 환난이다. 환난. 이래가지고 간증집회하고. 그런 짓하면 안 돼요.

 

환난은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누구한테? 내가 나한테 환난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 믿고는 못 살겠다.”하고, 마귀가 구원받은 내 사람을 붙들고 그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니 예수 믿고 난 뒤에 수입이 얼마나 늘어났나? 니 예수 믿고 난 뒤에 집구석 얼마나 잘 됐는지 한번 봐라. 니가 이래도 예수 믿을래?”라고 계속 쥐어뜯는데, 내가 나를 쥐어뜯어요. “니 예수 믿고 난 뒤에 얼마나 건졌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승진을 했습니까?” 또 탈락. 그렇게 복음을 아는데 왜 안 되지?

 

예수그리스도는 뭐냐, 우리가 성장하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발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껍데기 쓰레기에다가 예수님의 고귀함을 거기다가 그냥 담아버리는 거예요. 아이스크림 과자 컵 있잖아요. 거기다가 그냥 아이스크림을 담는 거예요. 아이스크림 스코프로 뚝 떠서 툭 그냥 담는 거예요. 담을 때 그냥 거기 담기는 거지. 창녀라도 괜찮아요. 세리라도 괜찮아요. 강도라도 관계없어요. 무엇이 담기냐가 중요하거든요. 무엇이 담기냐가.

 

주님의 환난이 담겼다는 말은 주님이 담겼다는 말이고 성령이 거기 계셨다는 뜻이에요. 이거는 “아이스크림 담아주세요. 빈 통 가져왔습니다.” 이래가지고 담아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 통하고 아이스크림하고 둘 다 주님의 환난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의 자식이에요. 주님의 환난의 확대, 연장선입니다. 주님의 확대의 연장선이에요.

 

그럼 공회는 뭐냐 그거 들러리죠. 들러리. 공산당은 뭐냐 들러리라니까요. 북한에 지하교인들이 있다고는 저는 믿지를 않아요. 극동방송 들었는지. 혹시 성도가 있다면 요덕수용소에 갇혀가지고 예수 믿는다고 핍박받는다면 그거는 요덕수용소 소장부터 해서 못돼먹은 김정은이까지 이거는 전부 다 하나의 주님의 환난을 꾸미는 연극배우들이에요. 엑스트라들이에요. 엑스트라들.

 

왜?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환난이라는 드라마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 자기만 있으면 안 되거든요. 자기가 물론 주인공이지만 자기만 있으면 안 되거든요. 거기에는 나쁜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간사한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왔다 갔다 우왕좌왕하는,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그런 간신배도 있어야 되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세상에서 많이 만나지 않습니까?

 

여기 환난이란, 내가 나를 예상 못한 인생 또는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주님의 일관된 작업입니다. 내가 생각한 내가 아닌. 정말 이거는 말씀에 준해서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을 다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3장 9절을 우리에게 제공하신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 당시에 회당이 있고 공회가 있는 그 시대에만 해당이 되겠어요? 아니면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겠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갑질하는 사람이냐, 아니 갑질 을질이 문제가 아니고, 공간을 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뺑뺑 포위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그게 성도라 이 말입니다. 공간을 양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라고요?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게 뭐냐 하면 개별자 속에 보편자가 담기는 겁니다. 지극히 작은 자, 뭐 대수롭지 않고 뭐 웃기나 하는 그런 인간인데 그 안에 그리스도가 담겨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 물 한 컵 대접하는 것은 누구한테 한 것이다? 주님한테 한 거예요.

 

그런 사람이 누굽니까? 파악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걸 왜 파악해요. 그거는 관점주의라니까요. 관점주의. 파악 안 해도 돼요.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환난으로. 골프 치는 환난, 복권에 당첨되는 환난, 일찍 결혼하는 환난, 공부 잘하는 환난, 모든 게, 되어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겁니다. 합력하여 모든 일에 하자가 없을 거예요. 하자가.

 

9절을 다시 봅시다. 이 9절을 얼마나 해야 되는지 몇 시간을 해도 모자라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자, 너희는 조심하라고 했으니까 조심할 자도 나고, 조심이라는 꺼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나고, 그러니까 내가 나에게 환난을 유발하고, 내가 나에게 유발한 그 환난에 대해서, 그 내가 주는 환난 속에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래서 성도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것도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주께서.

 

그래서 비케어플be careful, 조심하라. 니나 조심해. 니가 니한테 괴물이야. 최후의 적은 누구다? 너 자신이에요. 너 자신. 핑계대지 마! 공산당이고 뭐고 핑계대지 마! 니 자신이, 가장 가까이 있는 니가 너의 최후의 적이다. 영화 석양의 무법자 보면 총 쏘고 하는데, 자기 배에다가 총 쏴버려요.

 

제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누가 11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11절,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보세요. 지금까지 한 게 이제는 이해가 되시죠.

 

개별자속에 뭐가 들어있다? 보편자에요. 아니, 개별자속에 개별자가 들어있는 게 아닙니까? 성령은 보편자에요. 성령은 모두에게 다 준 거예요. 나의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성도에요. 성령 받았으면 전부 다 한 몸이 되는 거예요. 한 몸이 된다. 주님에 의해서 전부 다 한 몸처럼 다루어지는 거예요.

 

일곱 교회를 전부 다 주님의 오른손에 쥐듯이. 내 교회 네 교회가 없어요. 전부 다 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성령 받았으면 전부 다 한 형제고 한 지체고 한 몸이고. 세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근데 그걸 누가 반대합니까? 내 믿음이 반대하고 내 세례가 반대하고 내 소망이 반대하는 거예요.

 

내가 그 보편적인 나를, 개별자 내가 반대하고 나서는 겁니다. 왜? 나는 나만 기억하기 때문에. 내 잘남만 기억하고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고 내가 우수하다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고맙게도 주께서 다른 사람, 육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핍박을 해주죠. 고맙게도.

 

그러면 어? 나는 그만큼 핍박받을 짓은 안 했는데? 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내 안에 다른 보편적인 주님의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도록, 이 세상 육의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를 위해서 충실하게 봉사해주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봉사를 잘해요. 성도에게 봉사하라고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도의 파급효과라고 합니다. 파급효과. 파급효과라고 하는 말은 어떤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이게 우물에 돌멩이가 하나 뚝 떨어지면 그 지점에서 파동이 전 사방으로, 우물 전체로 퍼지겠죠.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떴다. 만들어졌다. 이스라엘 때문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보면 옆에 있는 나라가 다 멸망해요.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그거에요. 이스라엘에만 관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파급효과를 언급한 겁니다. 예언서가.

 

“에돔아 너희들은 저주받아라.” 이게 말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주가. 왜? “너희는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속였기 때문에.” 이래 되어있죠. 전에 여호수아 설교할 때도 그게 나오죠. 민수기 같은 경우에 그들이, 모압과 암몬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한다(신23:3). 왜 그러냐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광야 있을 때 그들에게 대접을 잘 못했기 때문에(신23:4). 이게 이스라엘이 없었으면 그들은 저주받을 일도 없어요. 그들이 저주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밑도 끝도 없이 복 받은 민족이라고 덜렁 등장해야 됩니다. 등장해서, 등장함과 동시에 저쪽에서는 뭡니까? 저주되어야 돼요.

 

여러분 동영상 봤죠? 이거만 하고 쉽시다. 인도네시아 해일이 일어나는 동영상. 밴드가요, 뭐 기타치고 드럼치고 노래하고, 뭐 천막 같은 거 만들어가지고 열심히 했어요. 지가 퀸도 아닌 게 공연한다고 랄랄랄~~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대가 무너지면서 그 일곱 명이 다 죽었어요. 무대에서 다 죽었습니다. 해일이 등장하니까 그 파급효과가 죽음으로 되잖아요. 진즉에 인간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죽어가면서 이유를 몰랐는데 이스라엘이 등장하면서 알게 되고, 신약에는 바로 성령 받은 성도의 등장으로 그들이 죽는 이유를 알아야죠.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1-01 11:23 
광주강의20181228b 마가복음13장 9-13절(자기 조롱)-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환난을 줄 때, 9절에 보면 상당히 어려움을 당하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근데 어렵다는 것, 육체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어려운 것이지만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더 힘든 것이 정신적인 어려움입니다. 세상에서 수백억을 가져도 허무를 느낄 때, 잠도 못 이루고 허무를 느끼고 인생 왜 사는지 모르고 할 때 그게 해결이 될 게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고 홀로 살면 아무리 거창하고 넓은 집에 살아도 사람은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없으면, 주어진 것이 없다는 말은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 경전이 없죠. 경전. 주어진 경전이 없잖아요. 주어진 경전이 없다는 말은 절대 진리가 없다는 뜻이잖아요. 절대 진리가 없으면 인간들이 없는 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절대 진리를 본인이 만들어내야 돼요.

 

이게 바로 인문학, 과학, 철학하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이유가 만물의 척도가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만 관찰해서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 경전을 만들어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자기가 자기답게 사는 기준을 본인이 만든다는 말은 이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이야기에요.

 

본인이 만들면 참 좋기는 좋겠는데, 본인의 감정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고 늘 변해요. 변하는 인간이 내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백날 책상 두드리면서 주장해봤자, 그거는 본인이 본인의 의견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스러울 때는 뭐 대책이 없죠.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회에 있는 사람들, 특히 육적인 사람들이 그냥 있으면 허무해져요. 허무한데, 이 허무가 실제로 바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이미 경전, 말씀이 있고, 복음이 있고, 성령이 있는 사람은 절대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그들이 갖고 있던 허무가 공격성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다 같이 몰라야 되는데 니는 왜 알아? 이래 되는 거예요. “다 같이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해야지. 니는 왜? 인간으로서는 안 죽어봤으면 천국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모르는 거야. 모르는데 안 죽어본 니가 어떻게 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우기느냐?” 이래 공격이 들어와요. 그자체가 이미 핍박이에요. 그 자체가 핍박이거든요. 그럴 때 성도는 그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에게 뭐가 빠졌다? 그들에게는 절대 진리라는 것은 없구나, 성령을 안 받았구나, 확인하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됩니까? 니가 안 죽어봤는데, 니가 죽지도 않았는데 니가 어떻게 해서 천국이 확실히 있고 지옥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니가 어떻게 아느냐? 라고 다그치고 공격할 때, 그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대꾸했습니까? 니가 나이 50도 안 된 사람이, 50정도밖에 안 됐는데, 예수님이 굉장히 늙어보였던 모양이에요. 50도 안 됐으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너와 함께 있었다고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를 했던가요?

 

예수님의 답변은 한결같습니다. 인간들은 살아야 한다. 이거부터 시작하잖아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 죽어야 한다. 이거부터 시작해요. 죽어야 한다 했을 때에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겁니다. 죽음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 돼요. 왜냐하면 살아있기에 죽음이 생겼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는 죽음이 필요 없잖아요. 살아있기에 죽잖아요.

 

그렇다면 이건 뭐냐 하면 살아있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 있느냐 하면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있는 거예요.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근데 이 죽음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라는 게 자기가 일반사람들처럼 죽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왜 죽는가를 아는 사람이 성도가 되겠죠. 왜 죽는가?

 

그거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죄 값으로 죽는다. 다시 말해서 죄 값으로 죽는데, 그 죄가 뭐냐, 그건 율법에 의해서 파악이 돼요. 율법에 의해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아래에 있게 합니다. 율법이 저주아래 있게 한다는 것을, 율법을 열심히 상고했던 유대인들은 그걸 수용했습니까? 수용 안 했습니까? 수용 안 했죠.

 

그러면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저주아래 있다고 사도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그렇게 했는데,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관점이냐, 이미 십자가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저주아래 있다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성령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따라서 성도에게 “니가 안 죽어봤는데 어떻게 아느냐?” 하는 그 문제는, “나는 안 죽어봤어도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주님에 의해서 나는 이미 죽은 자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죽은 자로 다루고 있다면 매일매일 살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스러워야 돼요.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니고. ‘아직도 내가 할 것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가게를 냈다. 그 사람의 가게가 잘 되는 것이 정상입니까? 못 되는 것이 정상입니까? 근데 그 사람은 잘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잘 돼야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그럼 가게 차린 그 사람이 이미 죽었던 유령이라고 봅시다. 유령.

 

유령 같은 경우에는 재미로 가게를 꾸리기 때문에, 가게이름도 귀곡산장이라고 해가지고, 유령가게, 뭐 이렇게 해가지고, 뭐 손님 오면 오는 것이고, 뭐 장사 안 되면 문 닫으면 되고, 어차피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부담 없이 장사가 되는 거예요. 귀신이 하는 가게가 장사가 이렇게 잘 되는구나, 하고 그걸 신기해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평화롭다는 것을 사실 이걸 기적으로 봐야 해요. 기적으로.

 

환난이 정상이고 평화롭다는 것은 이상하게 비정상처럼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죄 안 지을 경우가 있다는 이게 이상해야 돼요. 잘못된 거라 이 말이죠. 발상의 전환이 되어야 되겠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때는, 이미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을 그런 식으로 봐야 됩니다. 산다는 것이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산다는 것이 이상스러워야 되고, 그러다가 죽게 되게 되면 자기의 본질에 부합되는 일을 만난 거예요.

 

가장 나다운 일을 만난 거예요. 음주차량에 끼어서 죽게 되면 그것이, 그동안 살아온 것도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였다. 덤이었다.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그런 생각이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육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과 대비되는 생각이 있죠. 내가 저 사람보다 뭐가 못나서 이렇게 어렵게 사느냐, 하고 또 버팀이 있죠. 두 세계가 우리 안에서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겁니다.

 

왜 그렇게 그 두 개가 화합되지 않고 싸우고 있느냐, 그래야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말씀이 나오고 십자가 사건의 가치가 계속 나오는 겁니다. 만약에 안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잘났다에 내가 증인이 돼요. 나 잘났다. 나 구원받았다. 나 훌륭하다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된다고요. 이거는 가짜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예수님이 반대하는 것과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기적처럼 생긴 그 둘 사이가, 둘 다 조건들이 형성되어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나’가 아니고 누굴 증거 한다고요?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겁니다.

 

며느리하고 시어머니하고 뭐 결혼 초부터 막 싸웠다. 근데 어느 날 며느리가 개과천선해가지고, “시어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순종하고 시키는 대로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일단 평화롭기는 평화롭지만, 그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저 애의 시어머니인지 아니면 엄마인지 분간이 안 돼요. 딸처럼 잘해주니까. 시어머니의 때가 그리운 거예요. 며느리가 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딸처럼 달려드니까 시어머니가 날아가잖아요.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누굴 자랑하겠습니까? 며느리를 얼마나 자랑하겠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가치를 누구한테 양보한 적이 없어요. 십자가의 가치를 누구한테 양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러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돼요. 이게 말씀 때문에 그래요. 말씀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그리고 9절 끝에부터 봅시다.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나를 인하여’에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를 빼버리고 이야기합시다.

 

나를 빼버리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 ))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중간에 뭐가 빠지고 지나갔죠? 뭐가 빠졌습니까? “나를 인하여”가 빠져버렸죠. 나를 인하여가 빠져버리면 순교당하는 자기 자신을 절대화시키고 우상화시켜버린다니까요. 나를 인하여가 빠져버리면. 그러면 나를 인하여를 집어넣어버리면 공회에서 핍박하고 매질하는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타이밍을 맞춰서 매질을 해야 됩니까?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니는 나 없이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한번 적어볼게요. 상당히 중요한 말인데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늘 속삭이시고 늘 당부하시고 늘 큰소리치시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너라는 것은 나, 예수님이죠. 나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 소리를 큰소리로 매일같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독자적으로 너 자신의 가치를 남 앞에 내세울 생각을 하라? 하지마라? 하지 말라는 말이죠. 나 성도라고 내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성도가 아니다. 이렇게 되어야죠. 주께서 매일같이 환경을, 성도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해준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내가 준비하고 내가 마련하고 내가 성의와 열심을 다한 것은, 결코 이거는 성도가 아니고 불신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위해 시도하는 모든 것은. 그게 성화론이 됐든 뭐든 간에. 기도가 됐든 뭐든 간에. 그거는 전부 다 불신행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게 불신행위라도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잖아요.

 

어렵게 이야기합시다. 죽은 자는 뭐냐 하면 죽은 이유가 나와요.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이 만약에 죽었다고 합시다. 어젠가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드러머 전태관이 죽었다고 하죠. 그럼 죽은 자죠. 만약에 죽은 자를 조문을 했다. 그럼 거기서 뭐가 나오겠어요? 죽은 이유만 나오죠.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안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우리 속에서 뭡니까? “나는 무조건 꼭 살아야 돼!”라는, 강권적인 자기 살 궁리만 자꾸 외부의 타인에게 그걸 강요하는 거예요. 자꾸 그거만 주장하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니가 왜 죽으면 안 되는데?” “나는 가치가 있거든.” “왜?” “컨설턴트, 나는 이정도 가치가 있단 말이야.” 주께서 다 조건을 마련해주신 것은 뭐냐 하면 죽은 자라고 확인하라고 하는데, 막상 그 일을 하다보면 갑자기 내가 산자가 되고, 또 한 건수하면 한 건수했다고 차비하라고 한 오백만원 주더라 이 말이죠. 차비하라고. 그럴 일 없겠지만. 오만원이겠죠. 오만원주면 뭔가 ‘나 이정도로 주께서 가치를 높였구나.’ 그게 바로 내가 나를 환난 핍박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내가 니 그럴 줄 알았어. 니 그런 속셈일줄 알고 내가 너를 드러내려고 유발시키고 끄집어 낸 것이다.” 그래서 너라는 인간은 십자가 외에는 가치가 없다가 되어야만 이게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예를 들었느냐 하면은 환난이라고 해서 꼭 매질하는 그런 것만 염두에 두지 마세요. 그거는 그쪽 시대에 사회지만, 요즘 시대는 오히려 우리를 오냐오냐해주고 가치 있게 해주는 그것이 큰 환난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에 11절 끝에 나옵니다. 너희가 무슨 말을 할까 염려치 말라고 할 때, 무슨 말을 할까 염려치 않는 경우가요, 나에게 제대로 말 안 하면 사형 당한다는 그런 협박 공갈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사돈끼리 상견례 할 때, 그때도 알아서 그런 육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딸이든 아들이든 볼모로 잡혀있으니까. 내가 말을 잘못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파토나면 안 되니까. 그냥 좋게, 좋게 말 한마디도 염려하면서 해요. 염려하면서.

 

그러니 성령께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조절한다고나 할까요? 조절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절하면서. 집사님, 요새 말 많이 하면서 돌아다녔죠? 한 건수라도 뚫어야죠. 돈 안 된다고 그만두면 안 됩니다. 자, 10절 봅시다. 10절,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했잖아요. 이것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걸 풀 수 있는 단어 하나가 바로 공시성이라는 겁니다.

 

공시성이라는 말은 시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감각,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는 겁니다. 이게 공시성입니다. 시대가 다른데. 인간의 몸으로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간 간 것은 흘러간 거예요. 아무리 이순신 장군 제사 모셔봐야 이순신 장군에게 감동이 안 와요. 그러나 성령은 어떻게 될까요? 성령은 그 안에 시간이 완결된 시간이기 때문에, 완결되었다는 말은 모든 시대에다가 그 내용을 분배하고 할당 할 수 있는 요소가 성령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나와요. 이미 선지자에게 누가 들어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있는 거예요.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욥 안에도. 모세 안에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난과 영광을.

 

아까 이걸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개별성 안에 들어있는 보편성이에요. 보편성이 뭐냐, 개별성이 아닌 거예요. 개별적으로 따로 개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개별적 관계없이 전부 다 통합할 수 있는 공통된 공유된 속성. 그게 보편성이거든요. 그럼 그건 한분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말이거든요. 성령이죠.

 

성령을 줬다는 말은 그 시대상도 예수님의 십자가, 더 나아가서 선악과 따먹는 그 순간, 아담이 선악과 딱 따먹은 순간, 잠깐 포즈취하고 가실게요, 라고 해가지고 사진 한번 찍는 그 따먹는 순간의 심정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공유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니 속에서 니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말한다? 공시성이 돼있는 분의 말이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복음이 전파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어떤 심보였는가? 그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어요. 선악과이야기를 잠시 해보면, 선악과라고 하는 것은 악마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현대말로 하면 “니가 법에 얽매이지 말고 아예 니가 법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라는 이게 악마의 제안입니다. 법을 만드는데 뭐로 법을 만드느냐 하면은 선과 악으로, 선과 악을 아는 법으로 니가 장착되어버리면, 선악과는 처음에 누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죠.

 

그럼 선악과는 누가 알고 있다? 하나님만 알고 있는 것을 니가 따먹으면, 니가 하나님처럼 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니가 자체적으로 니 잘남을, 절대성을 증거 할 수 있는 법을 니가 제정하면 안 되느냐? 니가 입법기관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 이게 악마의 주장이에요. 이게 아까 무슨 주의? 관점주의. 인간이 만물의 척도.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게 끝나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게.

 

그런 사람들이 모인 집합이 바로 양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차원이에요. 그게 공회에요. 공회. 그런데 그 공회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다 점잖은 사람인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거기서 어떤 성향을 보이느냐, 진짜 하나님을 향하여 죽여 버리는,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세계를, 이왕 따먹은 거 내 다리 내놔라는 자가 등장하면 그 내 다리 내놔라는 그 사람 목숨까지 빼앗아 가면 두 번 다시는 내 다리 내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 아닙니까? 채권자가 왔다, 돈은 없다, 그럼 방법은 뭡니까? 채권자를 죽여서 앞마당에다 파묻으면 되죠. 파묻고 주위사람들한테 내가 죽인 것을 함부로 발설하면 모가지를 비튼다는 그런 대사가 나와요. 붉은 달 푸른 해 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19금 드라마에 이 험악한 내용이 나옵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선과 악을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좀 맡겨주세요. 우리가 선과 악을 아니까 악은 버리고 선은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우리가 행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악마가 인간을, 아담보고 따먹으라고 할 때, 그때 마음이 이미 우리 속에 대대로 이게 우리한테 전달되고 있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사람이 충실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사람이 점잖아요. 사람이 점잖고 경우가 있어요. 인품이 되고 착실하고.

 

혹시 여러분 친구가운데 그런 분 안 계십니까? 경우 되고, 인품 되고, 점잖고, 남 배려할 줄 알고, 스스로 자기를 낮출 줄 알고, 어려운 사람 도와줄 줄 알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이 선악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정의가 나오죠. 근데 제가 화요일 강의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아는 사이에서는 정의가 필요가 없다고. 아는 사이에는 뭐만 있으면 됩니까? 사랑이죠. 사랑은 정의를 필요치 않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뭐만 증거 하면 돼요? 주님의 사랑만 증거 하면 되지, “나 간음해도 간음죄가 아니래.” 그런 소리할 이유도 필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자, 사랑과 정의의 차이점은, 정의는 나만 있으면 수립되는 것이 정의입니다. 사랑은 둘이 있어야 돼요. 둘이 있어야 되고 둘 사이에서 나를 집어넣으려면 나를 잊어버려야 돼요.

 

사랑만 보여야 되지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한다든지 니가 사랑한다든지, 라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거는 사랑이 아니고, 이거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우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사랑 받을 자를 사랑 못 받을 이유를 끄집어내는 식으로 사랑받을 자를 그렇게 다루죠.

 

그게 누구냐 하면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럼 형 에서는 왜 구원 못 받았는가? 속임을 당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사회정의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억울하게 일을 당해서 지옥가고, 억울하게 한 사람은 천국가고.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되는 겁니다. 이걸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지금 우리자신이 그만큼 주님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 세계에 있다고 느껴야 됩니다. 제 말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평소의 우리의 상식이 너무나 세상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돼요. 주님 쪽이 아니고.

 

제가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분들이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간음을 안 했기 때문에 간음죄에 해당이 된다고요. 목사님, 강의를 들었어요? 들었을 때 뒤에 말을 들으니까 이해가 되죠. 왜냐하면 계속 따라오니까. 간음하지마라고 계속 따라오니까. 간음을 한 사람은 자기를 뭐로 봅니까? 자기가 죄인이죠.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고개를 끄덕여요. “제가 간음했습니다.” 이래 되는데, 간음을 안 했다고 우겨버리면 “저 안 했어요.”하니까 계속해서 뒤에서 내 다리 내놔라~ 하고 귀신이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따라오니까 나중에는 귀찮으니까 죽여 버리죠. 그게 십자가 사건이 아닙니까?

 

나보고 가치 없다고 하니까 내가 화가 나는 거예요. 가치 없다고 하는 자를 목을 비틀어서 죽이고 싶은 거예요. 이미 아담이 옛날 처음 만든 아담이 아니에요. 우리가 맛이 간 아담이라니까요. 맛이 간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맛이 간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으시고, 전부 다 맛이 갔어요. 정상이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환자라고 하는데, 우린 환자의 왕국이에요. 환자의 왕국. 환자가 환자를 고친다고 달려들고요. 지난 대전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죽은 놈이 죽은 자를 재판한다고, 이게 말이 돼요? 둘 다 바보끼리 재판하고 있다고요. 바보끼리.

 

고린도전서에서 뭐냐 하면 성도가 천사도 재판할 정도기 때문에 세상 재판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거든요.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법정에다가 고소하지 말라고 했어요. 고소를 왜 할까요? 자기가 가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재산이 날아갔다, 그래서 고소했다, 왜 고소합니까? 그 재산이 내 것이 될 때 나는 그 정도는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그것이 나답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다 빼앗기게 한다면 그 다 빼앗긴 재산이 나다운 거예요. 지금 동의하기 힘들죠? 사기당한 사람은 동의하기 힘들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얼마나 내가 나를 꾸준하게, 그때는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굉장히 성실해요. 성실하게 꾸준히 나를 핍박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계속 못되게 굴고 나에게 나를 비난하고. 나를 조롱하고. 자기조롱이죠. 오늘 제목 자기조롱입니다. 자기핍박하고. 차갑게 시비 걸고. 자기에게 시비 거는 방법이 술 먹는 거죠. 과음하는 거예요. 내가 미워서 술을 먹고 술이 취해 알딸딸한 그것이 나답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술 취하지 말라고 했죠. 술 취하면 이거는 개죠. 개. 제정신이 아니죠. 이걸 자기를 잊어버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술 취하지 말고 뭐하라? 성령에 취하라. 성령에 취해도 뭡니까? 자기를 잊어버려요. 주님이 너무 좋아서 내가 어떤 몰골인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내가 얼마나 허접스러운지, 그딴 거 나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좋아요. 죽어도 좋아요. 이게 사랑이거든요. 사랑을 해봐야 알지 뭐.

 

그대 있음에 나는 없어져도 좋아요. 이게 사랑이잖아요. 장로님 안 그렇습니까? 나는 어떻게 되도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복음을 안다면 노숙자가 되도 상관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한분도 있어요. 깜짝 놀랐어요. 복음이 있다면, 십자가가 있다면 내가 노숙자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그게 몇 초 갔는지 모르지만. 몇 초 안 가지만. 어쨌든 간에.

 

자, 그렇게 보시고 12절을 보면 이해가 안 될 수가 없어요. 12절은. 그냥 쭉 수월하게 넘어갑니다. 12절,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12절을 세 글자로 이야기하면 신난다! 잘됐다! 좀 더 길게 이야기하면 그럴 줄 알았어! 이런 상황을 마치 기다렸다가 반길 수 있어야 돼요. 아, 이거 책임지지 못할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12절을 보면서 갑자기 염려와 걱정이 늘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13절 마지막 때문에 그래요.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조건이 붙었죠.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13절 마지막에 조건이 뭡니까? 나중까지 견디는 자. 결과는 뭐예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못 견디면 탈락이 돼요. 구원에 탈락이 된다는 거예요.

 

어떤 고문도 버텨야 되는데, 혀 뽑고 손톱 뽑고 발톱 뽑고 뽑을 것은 다 뽑았는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나는 주님을 믿을게요.”라고 하다가, 근데 갑자기 아무 죄도 없는 외손녀를 건드리니까 “아, 그것만은 안 돼요.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놈들아! 이 악한 놈들아! 죄 없는 외손녀를 왜 건드렸느냐? 그래 좋다. 니들 소원대로 해줄게. 나는 예수님을 부인한다. 예수님 화상에다가 침 뱉고 구둣발로 밟을게. 주여! 이래서 내가 탈락입니다.” 아주 쇼를 해요. 쇼를 해.

 

이 12절 본문을 보면서, 이걸 가지고 자기내부에서 이걸 각색해서 소설을 써요. 소설을. 뭔가 소설을 쓰고 드라마를 쓴다고요. 왜 그렇게 쓸까요? 이게 뭐기 때문에? 개별자가 오직 개별자밖에 없기 때문에. 보편자가 들어있지 않아요. 내 구원은 누가 책임져야 해요? 나 아니면 책임질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견뎌야 되는 거예요. 뭔가 견뎌야 되거든요. 견뎌야 되는데, 소설을 지가 각색을 하는 거예요.

 

개별자는 예상하면 안 된다고 했죠. 보편자가 이미 있어야 돼요. 이건 열두 제자도 안 돼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열두 제자도 구원 못 받습니다.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이 개별자가 스스로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데, 자기는 게이입니다. 프레디 머큐리처럼 게이입니다. 자, 게이가 기독교를 알고 복음을, 성경을 봤다 칩시다. 그래도 구원받는데 두려워한다면 이 사람은 천국에 못 가죠. 왜냐하면 본인이 어떤 성경을 보고 신앙생활 어떻게 참여하는지를 본인이 계산한다면 이거는 하나의 소설이에요. 소설.

 

결국 개별자는 개별자 본인밖에 없고 남들은 뭐냐 하면 완벽한 타인이에요. 완벽한 타인. 아무리 같이 있어도 니는 니고 나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이 말은 구원은 명사가 아니고 움직임이거든요. 움직임. 어디서 어디를 끄집어내는, 그런 생성되는 움직임이란 말이죠. 그 움직임 속에 개별자가 보편자에 의해서 거기에 참여된 거예요. 움직임 속에 뛰어 들어간 겁니다.

 

그러면 개인의 잘남을 증거 하겠어요? 아니면 나를 움직이시는 분을 증거 합니까? 나를 움직이는 분을 증거 하죠. 그 움직이는 분이 어떤 원리와 원칙이 있어요. 어떤 원칙이냐 하면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목표는 누구의 소관이에요? 나라는 개별자의 소관이 아니고 내 속에 들어온 보편자의 자기숙제에요.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주님이 요구를 하시고 주님이, 당사자가 그 요구에 충족시킨다고 했거든요. 이게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이게 감 잡아야 돼요. 이게 감 잡혀야 돼요. 사실은 성령이 있는 사람은 이걸 감 잡은 사람입니다. 주께서 먼저 시작을 하셨기 때문에, 시작하신 분, 주님이 마감도 알아서 하실 문제에요.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 뿐이죠. 우리는 매일의 일상이 주님의 손에 말려든 거예요. 그런 고백을 하려면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있다? 다른 분이 나와 함께 있어야 돼요.

 

제가 하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신학교수들이 알아듣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신학교 교수라는 안정직업을 얻기 위해서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이에요. 신학을 뭐로 채운 사람들이냐 하면 학위로 채운 사람들이에요. 신학을. 그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박사학위가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혹시 그들 중에 이 박사학위가 죄입니다, 라고 고백한 사람이 있다면, 거의 없는데요. 나는 없다고 보는데 있다면, 그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있어요. 수십 년 동안 돈 수억 들어가면서 했던 그것도 죄만 지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정도 같으면, 다른 일상생활이나 자기 태도나 세상보기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하죠.

 

그러나 제가 신학교수들한테 그런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이단으로 보는 겁니다. 저는 화 안 냈죠. 오목사님이 앞에 앉아서 화냈죠. 개혁신학 논문발표 할 때. 어차피 말이 통하라고 한 게 아니고 그들한테 일방적으로 외치는 자리기 때문에, 그쪽에서 화를 내도록 유도하는 거예요. 김영한이라는 그 교수가 일부러 화를 낸 거예요. ‘이쯤 되면 화를 낼 걸’ 그러나 나는 시간이 급해서 그것과 상대할 시간이 없었어요.

 

여기 13절 보세요. 13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무엇을 인하여 미움을 받을 것입니까? 무엇을 인하여? 누구 이름을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온 목적이 되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에게 온 것은 미움 받으라고 온 겁니다.

 

세상에 어떤 인간 치고 남한테 미움 받는 것을 소원으로 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 집 가훈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자! 이게 가훈이 될 수가 있습니까? 미움 받자! 이게 가훈이 되겠어요? 애들 가운데 가훈 써오라고 하면 그런 것을 써온 애가 있습니까? 미움 받기. 뭐 없잖아요. 사랑받은 아이 되기. 뭐 이런 것이 있죠. 어느 초등학교에서 미움 받는 아이가 되기. 이런 게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니까 개별자로 사는 사람에게 이거는 터무니없는 목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목표를 안 정했기 때문에 주님이 목표를 정한 겁니다. 그러면 티격태격 누구하고 싸우겠어요? 내 안에 계신 주님하고 나하고 매일같이 티격태격 싸우는 거예요. 이게. “주님은 나의 인생을 조지려고 아주 작정을 하셨군요. 주님은.” “니 이미 죽었잖아. 와? 정신 차려! 죽었어.” “아, 참 내가 죽었지. 내가 왜 이러지.” 평화가 당연한 게 아니에요. “왜 자꾸 이 가정에 혼란을 일으킵니까?” “평화로운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생각해보세요. 부부가 뭡니까? 남남이 아닙니까? 남남이 붙어살면서 조용하게 산다는 것은 이거 이상한 거예요. 어디 뭐 서로 계약 맺은 적 있습니까? 접근 20미터 금지하는 거 뭐 그런 거 있습니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면 인간은 화가 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화가 나는 이유가 기대함이 크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예요. “내가 키운 자식은 이 정도는 돼야 된다.” 자식이 있다가 “언제 키웠습니까? 내가 컸지.” 뭐 키운 적 있습니까? 니가 어릴 때부터 커나간다고 애 많이 먹었다.

 

미움을 목표로 하여 주의 성령은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주의 뜻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처럼만 되라는 말이 있죠. 더도 덜도 말고 예수님처럼 미움 받아라. 예수님처럼 밉상 받아라. 밉상과 미움은 좀 다른데, 밉상은 가만히 있어도 미운 거예요. 더도 덜도 말고 미움 받아라. 인간은 절대로 미움 받도록 행동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미움 받도록 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본인도 의아해할 것입니다.

 

왜? 예상 못했기 때문에. 이정도 착했으면 칭찬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움이라면 오히려 그 이상한 분의 내재를 느끼면서 기뻐 감사해야 되죠. ‘내 그럴 줄 알았어. 주님이 날 안 떠날 줄 알았어.’ 그 미움을 받을 때, 아까 인간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했죠. 하나는 육적인 자아와 주님이 생각하는 내가 따로 있죠. 야곱이 있고 이스라엘이 있다 이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람이 있고.

 

눈물을 보게 되면 육의 눈물은 뭡니까? 내 처지가 서러워서 우는 눈물이에요. 내 뜻대로 안 돼서 흘리는 눈물. 그런데 주님의 이름으로 흘리는 눈물은 어떤 눈물이냐 하면은 주님이 떠나지 않고 이렇게 살아 계시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흘리는 눈물이죠. 주님이 좋아서 흘리는 눈물은 눈 다래끼가 없어집니다.

 

이거는 믿지 마세요. 이거는 제가 지어낸 겁니다. 다래끼가 왜 생기느냐 하면은 자기를 위한 눈물을 흘릴 때 다래끼가 생기거든요. 주님이 좋아서, 보고 싶어서, 주님이 함께해서,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은, 이거는 인위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그냥 쏟아져 나와요. 가끔 찬송가 듣다가 흘리는 눈물도 있을 거고.

 

그런데 육의 눈물은 퀸의 프레디 머큐리 노래 듣다가 흘리는 눈물이에요. Love of my life라는 노래를 듣다가 흘리는 감정의 눈물이나, 딴딴딴딴땅~~~하면 우와!! 막 음악 나올 때 나오는 눈물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거 듣기 위해서 무려 수천 킬로를 비행기 타고 와서 입장료 수십만 원 내고 왔는데, 드디어 내 그리운 눈물, 내가 예상한 대로 맞아떨어질 때는 육의 눈물이고.

 

이거는 미움의 눈물이 아니에요. 역시 나는 가치가 있어. 아직도 살만해. 나는 복을 쥘만한 그런 권리가 있는 거야, 하고서 자기 확인이 될 때 흘리는 눈물이고. 이 주님의 눈물은 나 같은 것은 진즉에 없어져도 되는 존재라는 것을 이제 새삼 알려주시면 어떡합니까? 진즉에 알려주셔야죠, 하고 내가 사라진 것에 대한 감사. 가벼움. 그것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에요. 고맙고. 내 자신이 누군지 제대로 알려줄 때, 그때 주님의 은혜에 대해 흘리는 눈물이죠.

 

물론 제자들이나 사도들에게는 이것이 교차되고 반복되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야, 너 이거 견디나?”하는데, 견디고 컨디션이고 간에 이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주님의 자기 목표에 우리가 말려들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의 자기 목표에. 그래서 주위에서 미움을 받거든 횡재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세상적으로 흘린 눈물은요, 나중에 뭐로 채워지느냐 하면은 이게 기억이 돼서 이게 욕심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더 감격스러운 일을 또 찾게 돼요. 팬에 머물면 되는데 이게 스토커가 된다고요. 스토커가 돼가지고, 그냥 멀리서 놀아주면 되는데 이제는 막 찾아가고 난리치고 사생활방해하고 이런다고요. 과도하게. 그 자극으로는 기쁨의 눈물이 벌써 시들어졌으니까 더 짜릿한 것을 계속 찾는 거예요.

 

아마 복음폐인도 그런 쪽에서 있지 않는가, 더 새로운 것을 자꾸 찾아보게 되면, 새로움을 찾다보면 기존의 복음에 대해서 시답지 않게 시시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만” 이러면 그걸로 감사해야 되는데, “그거 다 아는 건데.” 이렇게 되면 갑자기 마음이 교만해졌다는 징조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12절을 한번 봅시다. 12절,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자, 형제자매자식부모, 이 사람들이 형성해서 만들어낸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육적인 공시성이에요. 공시성이라는 것은 그 시대를 같이 사는 겁니다. 육적인 공시성.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은 영적인 공시성, 예수님하고 공감하는 것 또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하고 공감하는 것.

 

그러나 이 형제자매들은 곧 같은 공시성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같은 습관과 같은 습성을, 전통을 공히, 같이 여기에 맞추어서 인생관이 정립된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왜냐, 늘 한통속으로 한집에서 하다보니까 그 자체가 선악으로 규정이 돼요. 이렇게 하면 선이고 이렇게 하면 악이라는 것에 같이 전부 다 한 울타리가 되는 겁니다.

 

집안의 가장이 뭔 사업을 도박하듯이 했는데 안 된다. 노래 부르면 히트 칠 것이라고 남편이 매니저까지 했는데 노래가 못 떠서 집안이 전부 다 날아가게 되었다. 뭐 드라마에 보면 나오잖아요. 차달래 부인의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그런 내용이에요. 그럴 때 같은 공간에서 같이 살기 때문에 그들은 운명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돼버리면 자기 집안이 하나의 우상이 되는 겁니다.

 

아까 공회라는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공회. 공해가 아니고 공회. 송해의 ‘해’자가 아니고 공회. 공회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의당 그게 옳은 줄로 알고 있는 그런 사태. 그럼 누가 방해가 되겠어요? 형제자매자식부모가 방해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들어온 그 사고방식에 부모형제들이 굉장히 실망을 하는 겁니다. “니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이래 되거든요.

 

대한항공 조양호 그 집안이 밀수집안 아닙니까? 마누라 하나에다가 딸 둘해서 밀수했잖아요. 우리 집안이 밀수집안이거든요. 밀수해도 그들의 전통과 습관에는 그거는 하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갑집하는 것, 컵 던지고 갑질하는 집안이거든요. 그리고 심지어 어떤 음성을 틀어줬는데, 조선일보 사장 외손녀인데 열 살 먹은 초등학생이 “당신같이 사니까 우리 집 운전기사밖엔 못하잖아.” 이런 식으로 열 살 먹은 애가 나이 50넘은 운전사한테 그렇게 했답니다. 걔가 한 그게 그 집안의 전통이고 습관이에요. 처음에는 강요당했지만 나중에는 그게 생활이 되게 되면 이게 자기 몸의 일부가 된다니까요.

 

우리한테는 그런 게 없을까요? 누구나 다 있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공시성을 찢어놓습니다. 같은 집안이라도 차원이 다르고 시대가 다른 사람. 이미 모든 시대를, 성령이 계시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과 천국가려고 애쓴 사람의 차이죠. 이미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으려고 애쓰면서 탈락된 사람. 구원받으려고 애쓴다는 것은 그건 탈락이라는 뜻이거든요. 왜냐하면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되니까. 자기가 경험했던 것, 아는 것을 다 사랑해야 되니까. 이거는 육적인 거죠. 왜냐하면 개별자밖에 없으니까. 보편자가 없으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이란 우리가 배우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이제는 저희가 받아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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