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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광주강의
2005-05-07 00:17:47 조회 : 3752         
Re..광주강의(실로암교회) 13 - 고린도전서 5-2 이름 : 서경수(IP:)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10 - 고린도전서5-2
                                                                05,04,22    강의: 이근호 목사

< 이 강의는 4월 23일 칠곡에서 한 강의입니다.  본 강의가 녹음이 안 되어서 대체합니다 >

◈ 인간의 욕망 - 성스러움의 소유화 !!

인간에게는 성스러움의 영원함, 즉 바깥에 있는 성스러움을 개인적인 성스러움으로 전화시켜보겠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즉 신의 거룩을 자기의 거룩함으로 전환시켜서, "신만 거룩하나 나도 거룩하다" 라고 싶은 것이에요.  이것을 성스러움의 소유화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성스러운 영혼의 자기의 성스러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종교를 갖고자 하는 유혹이라는 말입니다.

◈ 구원 - 예수님의 성스러움에 자기 자신의 성스러움을 포기한 사람만이 !!

이러한 유혹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십자가' 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스러움은 인간 몫이 아니고, 즉 성스러움은 결코 인간 것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움만 남고, 예수님의 성스러움에 자기 자신의 성스러움을 포기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 포기이고, 자기 모든 소유의 포기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말할 때, 세상 지혜로는 안다고 했나요, 모른다고 했나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설명할 때는 반드시 세상 지혜를 설명해야 되고, 그 세상 지혜와 십자가는 연결고리가 단절되어 있음을 설명해야, 비로소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하는 4가지 !!

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셨다.  
② 부활로 가기 위한 입구로서 십자가이다.  
③ 십자가는 구약의 완성이다.  
④ 십자가는 예수님의 신성이다.  

이러한 것이 십자가가 아닌 이유는, 이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내용이라고 흔히들 알고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은 이 세상 지혜에서도 도출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금 말한 방정식, 즉 세상 지혜로서는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했지요?  이 공식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세상 지혜로서는 십자가를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 지혜에서 이상의 네 가지를 끄집어낼 수 있어요.  그러기에 이런 것은 온전한 십자가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십자가는 모른다" 라는 것입니다.  이게 정답이라는 말입니다.

◈ 이 세상 지혜로서는 십자가를 절대로 모른다 !!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세상 지혜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위의 1번의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했다" 라고 할 때, 이 세상 지혜에서 생각하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생각하는 예수님과는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즉 이 세상 지혜에서 생각하는 죄와 십자가에서 생각하는 죄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지혜에서 말하는 '대속(代贖)' 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은데, 누가 내 죄를 좀 안 씻어주나?" 라는 식이라는 말입니다.  혹시 '부두교' 라고 아십니까?  아프리카에서는 양을 잡아서 죄를 씻는 의식이 있고, 파피아뉴기니에 보면, 닭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면 귀신이 물러가는 의식이 있어요.  이것은 전부 액운이 따르는 것은 자기 속에 죄가 남아 있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자기 죄를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해 버리면 액운이 왔다가도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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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두교(Voodoo) - 종교의 하나. 넓은 뜻으로는 서인도제도와 미국 남부의 흑인사회에서 볼 수 있는 악마숭배·주물중배, 주술적 치료 등을 포함하는 관행을 말하는 것이며, 좁은 뜻으로는 아이티에 퍼져있는 민간신앙과 의례의 총체이다. 쿠바의 산테리아교(Santeria)나, 브라질의 마쿰바교(Macumba)와 유사하다. 아이티의 부두교는 아프리카 서부에서 서인도제도로 팔려온 흑인노예에 의해 전개되었고, 초자연에 관한 그 근본적 관념은 아프리카의 종교에서 유래한다. 서인도제도 토착민의 독특한 종교적 요소와 함께 특히 가톨릭적 의식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부두교의 중심은 로아(Loa)라는 정령(精靈), 쌍둥이 및 죽은 영혼에 대한 숭배이다. 로아는 주로 아프리카의 신들인데, 가톨릭 성인이 로아와 동일시되어 숭배되기도 한다. 로아는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인간의 모습을 하기도 하나, 로아에게 신들린 신도가 황홀경의 상태로 빠지는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부두교에는 중앙조직과 성직의 계급제도는 없으며, 남성 또는 여성 제사(祭司)를 중심으로 자치적·자발적 집단을 형성한다. 의식은 대개 밤중에 이루어지며, 동물 등의 희생을 바친다. - 야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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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부두 종교의식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승려 재량에 따라 정해지며, 각 승려마다 여러 신들 중에서 자기가 특별히 모시는 신이 따로 있다. 즉, 일종의 분업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각 승려마다 다르긴 하지만, 피의 의식을 곁들이는 것이 보편적인 것 같다. 부두교의 신인 Loas가 피를 요구하기 때문인데, 제물로 바치는 동물은 갈갈이 찢기는게 보통이다. 종교 의식은 드럼과 심벌즈를 동원하여 광란의 현장을 연출해 내는데, 럼주를 내키는대로 마실 수 있고 춤과 음악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종교의식 도중 신 들린 현상 역시 자주 발생한다고 전하며, 춤과 술, 마약에 의해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 http://www.wowhunter.com/mistery/m2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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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교 - 메시야 덕분에 우리 좀 살자 !!

그런데 유대교가 뭡니까?  메시야 덕분에 우리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 공동체이니, 메시야 덕분에 우리 이스라엘이 삽니다" 라는 것이 유대교라는 말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는데 그 메시야가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메시야 덕분에 우리가 이 세상에 머리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유대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유대교에 의해서 돌아가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그 유대교에 최고 정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울이란 말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해서, 예수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이고,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주제에, 스타가 되려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군중들이 따르니, 이왕 이렇게 된 것 화끈하게 나가자고 해서, 그렇게 하니 군중들이 더 좋아하면서 '호산나' 하고 찬양하니까, 갈 때까지 가보자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구약을 펼쳐놓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저 목수의 아들은 분명히 아니다. 자기가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그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니 좋아하기는 하는데, 그러나 분명히 구약 전체를 봐도 그 어떤 대목도 그와 같은 것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만약 있었다면 아마 그들의 태도가 좀 달랐을지도...  아닌가요?

◈ 유대 신학자들 - 예수는 구약의 그 어느 대목과도 관련이 없다 !!

사실은 유대 신학자들이 잘 봤습니다.  예수는 구약성경의 그 어느 대목과도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자아도취에 빠진 그런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그렇게 설쳐대니 로마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한 사람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면 점점 더 많은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에 주둔하게 되지요.  그러면 작은 집회도 시위도 못하게 되요.  그렇게 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겨우 얻은 종교적 자유가 압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그리고 이렇게 말썽이 일어나서 군인이 오게 되면 단순히 군인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창녀들이 따라오고, 술집이 따라오지요.  또한 군인들은 직업군인으로 봉급을 받고 생활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따라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족들이 대부분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헬라종교라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외래종교가 수입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시대인 마카비시대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제일 염려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고난받는 것을 인정하겠는데 문제는 후손들이라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여호와 종교를 유지하지 아니하면 다 멸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가 들어온다는 것은 선진 문화가 들어오는 것이고, 선진 문화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기 때문에, 과거의 캐캐묵은 여호와 종교는 버리고 후손들이 선진문화에 동요될 경우에, 마지막 메시야가 올 때까지 여호와 신앙은 누가 지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썽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정치적 타협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는데, 그런데 누가 끼어 들어서 말썽을 부릅니까?  예수란 사람이 낀 거예요.  사실은 그 전에도 말썽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그때 마다 로마 군대가 적절히 대처해 주었고 말입니다.
  
◈  예수 - 로마의 정치적 타협을 위협하는 인물 !!

로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선지자를 너무 탄압해서 봉기가 일어나면 골치가 아파요.  그래서 특별히 로마에게 반항하지 아니하면 자기들 종교는 적당히 알아서 하되, 로마의 질서만 위배하지 말라는 정도로 가이사가 정책을 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과 동등하다" 등등, 그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로마의 질서만 안 어기면 용납하는데, 문제는 예수님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인데, 유대인 성직자들이 나서서 그들이 체포해서 본디오 빌라도의 제가를 받아, 빌라도 선에서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그렇게 정치적 타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기에 동조하고 그 일을 위해 열심히 충성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울이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예수가 메시야임을 전했던 사람은 스데반 집사였고 말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가담했던 사람도 역시 사울이라는 것입니다.

왜 사울이 그렇게 했습니까?  자기는 그렇게 예수를 더 이상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줄 알았고, 그 일을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데 그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요.  그리고 나서 그는 구약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즉 봉사가 되었다가 다시 눈을 뜨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예수가 아니라 누구입니까?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야가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속해 주는 것이 바로 구약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의 고난이 모든 구약성경의 완성이란 말입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메시야이고 또 메시야인데,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메시야 자리에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를 집어넣었으며, 그가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 죄 - 율법을 지키면 의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 !!

여기에서 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야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죄가 뭡니까?  죄라는 것은, 인간이 구약을 봐서 죄를 파악하고, 십계명을 보고 죄를 파악한다면, 과연 이런 것이 죄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십계명을 봐서, 즉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봐서 간음을 안 하면 의가 되고, 간음을 하면 죄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야를 통해서 죄를 속한다" 라는, 이런 것은 세상 지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예수라는 자가 있다고 하니까, 그것을 그대로 메시야의 자리에 집어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해놓고는, 그 내용을 보니 유대교와 같은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가 뭐냐고 물으면, 간음한 것도 죄고, 도적질한 것도 죄고, 자꾸만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윤리와 도덕적 죄를 말한다면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는 이 땅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방면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도사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릴 때 나쁜 짓을 했는데 이 죄를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 지옥으로 가는데, 하지만 "옳다. 예수님께 나아가서 용서받아야지" 라고, 이렇게 된다면 그것도 역시 그 자체가 전혀 십자가 의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예 처음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끝난 것이에요.  인간이 왜 죽습니까?  죄 값으로 죽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착한 것만 잘 고르고 다듬어서, 그 근거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임해서 부활된다는 것입니다.  

◈ 십자가 - 바꿔, 다 바꿔 !!

전혀 우리들이 착한 행실을 했다고 해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옛날 유대교에 열심을 낼 때의 그 사고방식과는 정반대로 모든 것을 다 바꿨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이고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1번 봅시다.  인간의 지혜로 예수님이 죄를 대속한다는 것은 틀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십자가를 안 상태에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나는 몰랐는데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죄가 뭔지 알아서,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라고,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비슷한 문장인데 뭐가 다릅니까?  "나는 몰랐었는데"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이 내게 들이닥쳐서 난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이야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 죽어서 좋은데 가야 하는데" 라는 문제가 아니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인간들이 만든 종교의 특징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한번 제대로 살자는 것이지요.  그런 식의 종교는 세상 지혜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를 모른다 !!

지금 이 강의에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를 모른다고 했는데, 문제는 뭘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지혜로서는 십자가를 모른다고 했지요?  이 점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성스러운 것이 뭐가 된다구요?  성스러운 것이 자기 영혼이 될 수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에요.  성스러움은 자기 바깥에 있어요.  만약 성스러움이 우리 것이 되면, 그 다음은 예수님이 필요 없어 밀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 에라스무스 - 인간의 능력으로 그 성스러움을 내 것으로 만들자 !!

'에라스무스' 라는 사람이 있는데, 혹시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이 사람은 루터와 한 바탕 싸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러한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의 거룩을 손으로 만진다고 해서 거기에서 무슨 능력이 나오느냐고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만져서 거기에서 능력이 나온다면, 예수님과 입을 맞춘 사람이 있는데 누구입니까?  가룟 유다지요.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는 말입니다.  

에라스무스가 당시의 천주교를 공격하면서 "어떻게 그 떡에서 능력이 나오나?" 라고 했어요.  아니, 포도주가 어떻게 피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미를 모르고서 왜 성상을 숭배하고 하느냐고 굉장히 질책을 했습니다.  사실 이상은 옳은 주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또 말하기를 "인간의 능력으로 그 성스러움을 내 것으로 만들자" 라고 해서, 루터와 서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성스러움이 나를 건지는 것은 되는데, 그것을 내 성스러움으로 만들어서, 내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전혀 성경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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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 1466∼1536) - 네덜란드 인문학자. 로테르담 출생. 어려서부터 성직자 교육을 받아 사제가 되었고 1488년 스테인의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만년에는 교황에게 청원하여 성직을 포기하였다. 94년 교회의 원조로 파리에 유학하여 고전라틴문예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99년 제자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T. 모어·J. 콜릿 등의 인문학자와 사귀었다. 특히 콜릿의 바오로 서간 연구에 자극을 받아, 다음해 파리로 돌아와 그리스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성서연구에 전념하여 그 연구결과인 《그리스도교 전사필휴(戰士必携, 1504)》를 저술하였다. 또한 1506년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여행하던 중에 착상하여 영국의 모어에게 쓴 희문(戱文) 《우신예찬(愚神禮讚, 1511)》이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여신>이 세상에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 많은가를 열거하며 자랑하는 형식으로, 철학자·신학자의 공허한 논의와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해 예리하게 풍자한 것이다. 16년에는 그리스도교 군주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적 평화가 체결된 것을 절망한 《그리스도교 군주의 교육》을 공간하였고, 또한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최초 인쇄교정본을 출판하고, 《히에로니무스저작집》을 공간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 <인문학자의 왕>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조국으로 귀국한 뒤 스위스의 바젤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정신으로의 복귀를 설파하였는데, 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배출되었다. 그 자신도 처음에는 M.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였지만, 그 광적 행동에는 찬성하지 않아 《자유의지론(1524)》을 써서 그와 논쟁을 벌인 뒤 결별하였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주의에 입각한 바오로의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보다 실천적이며 무엇보다도 사려와 절도를 중시하였다. 에라스무스는 W. 딜타이에 의해 <16세기의 볼테르>라고 칭해졌듯이 세계적 정신의 소유자로 근대자유주의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F. 라블레를 비롯한 프랑스 문예사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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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지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유대인의 기적이고, 또 한 가지는 헬라인의 지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보면 나오지요.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에 공식이 있는데, 십자가가 뭐는 아니라구요?  유대인의 기적과는 연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믿고 난 이후 돈을 벌었다든지, 십자가 믿고 난 후에 병이 나았다든지 하는, 이런 눈에 띄는 기적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십자가에 대한 오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십자가는 너무 조용하고 너무 볼품없어요.  길에 떨어진 코 묻은 손수건 하나 주어서 자기가 기적을 경험했다고 하는 자 없듯이, 십자가는 인간들이 가장 외면하고 싶고 가장 싫어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에는 이것을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복종했다" 라고 하지요.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십자가 - 나와 함께 죽자 !!

미친 늙은 여자가 길가고 있는 자기를 붙들면서 "내 신랑이 되어주세요" 라고 한다면 얼마나 기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십자가는 이보다 더 찐득이 라고 보면 됩니다.  "나와 함께 죽자!" 라는 겁니다.  아니,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나를 물고 늘어지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피해서 도망가지요.

◈ 과연 무엇이 기적이고, 기적이 아닌가?

그런데 유대인들은 기적과 기적 아닌 것을 나눴어요.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는 곧 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통해 기적과 기적 아닌 것을 구분했습니다.  홍해 갈라진 것은 기적이고, 그런데 아이성이 작살난 것은 기적 아니라고 말입니다.  물론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기적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파멸한 것은 기적 아니고,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기적이고, 또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은 기적 아니고 말입니다.  이렇게 분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장차 메시아가 오면 이런 기적을 통해서,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대로 만국의 머리가 되는 국가로 만들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런 사고에 젖어 있어요.  "메시아는 오신다. 구름 타고 오셔서 이 나라를 우뚝 세울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6장에도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행하실 때에 사람들은 갑자기 눈을 확 뜨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리신 기적이다" 라고 생각하고, "우리 임금이 되어주세요" 라고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진정한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렸다고 보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모세가 만나를 내린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하나님의 기적에 속하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5,000명을 먹였으니까,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 나머지는 가라" 라고, 이렇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 참된 성만찬 - 예수님과 함께 죽음의 현장에 동참한 사람에게만 !!

예수님의 살과 피란 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현장에 함께 있어야 죽음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예수님을 만진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살과 피가 어느 장소에서 흐르고 찢어지는지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의 현장에 동참한 사람에게만 목도되고 경험되고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는 전혀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만찬을 행한다고 아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의 죽은목숨을 살리는 생명이 되는구나" 라는 것을 알지, 자신은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면서 "나는 살아야만 되지" 라고 나온다면, 그는 예수님의 살과 피와 무관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예수님을 다 떠나버리는데,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기적을 예수님이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누구나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그런 기적을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자기 사는 형편이 나아질 때, 그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보잖아요.  물론 신의 축복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간증이랍시고 그런 것을 자랑하면서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오늘날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이러한 유대인의 기적관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기적관을 가졌거든 십자가에는 접근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기적을 믿고 지옥에나 가라는 말입니다.

◈ 사도 바울 - 약한 것이 십자가 !!

사도 바울은 약한 것이 십자가라고 합니다.  곧 약해도 괜찮다는 것이지요.  약해져라가 아니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약해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십자가는 기적과는 관계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재산을 팔아서 헌금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기적을 보여주세요" 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정신 이상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관점에서 보면, 구약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만이 기적이 아니라, 그들이 광야에서 죽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란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한테 유리한 것은 기적, 그렇지 않은 것은 숨기고 싶은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은혜인데, 그런데 잘 될 때만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지요.

여하간 십자가란 유대인의 기적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십자가란,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자기의 죽음과 동일한 것이란 생각,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자기도 같이 죽어야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십자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 헬라철학 -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  

두 번째는 헬라인의 지식인데, 이것도 많이 어려워요.  여러분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상대성 원리에 대해 너무 오해를 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애인과 같이 있을 때는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가는데, 싫은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시간이 더디 가더라. 그러니까 사람은 느끼는 시간이 상황에 따라 각자 다 다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태성 원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베르그송, 어거스틴이 이미 다 이야기 한 것입니다.  

◈ 어거스틴 - 인간에게 시간이란 없고 인간 의식이 시간을 유발할 뿐이다 !!

이것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 시간이란 없고 인간 의식이 시간을 유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분 좋은 의식이면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고, 고통이 심할 때는 시간이 늦게 가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시간은 없고 해가 떴다가 지는 사건은 있다는 겁니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것은 있지만,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시간 의식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런 생각을 부서 버립니다.  죄란 것은 나쁜 짓을 해야 죄가 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의도 거룩도 될 수가 없고,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기가 나쁜 짓을 하면 악한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착한 행위가 된다고, 이렇게 분류를 하지요.  분류하는 기준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하든 말든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요?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예수를 믿으란 말이지요.  그래서 세리가 구원받고, 창녀가 구원받고, 강도가 구원받잖아요.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린 그들이 그만 메시야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메시야를 기다린 그 자체가 곧 죄가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 오후 2시인데, 2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와보니, 어떤 시간은 2시 5분, 어떤 이는 2시 10분, 어떤 이는 2시 30분, 이렇게 각자가 시간이 다들 달라요.  왜 그렇습니까?  

애인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 1시간이 지났는데 느끼기는 10분 정도 지난 것같이 느껴지지요.  그러나 반대로 보기 싫고 상대하기 싫은 상대와 만나서 같이 있다보면, 겨우 10분이 지났는데도 느껴지기는 2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고 말입니다.  이것을 두고 루터는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다" 라고 했어요.  개인의 느낌은 어떠하든 시간은 절대라고 본 것입니다.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울 앞에서 건너편 산을 보니 두 개의 산이 있습니다.  이것은 김씨가 봐도 두개 박씨가 봐도 두개, 누가 봐도 두 개인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즉 헬라 철학은 신이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을 주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헬라의 지혜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헬라의 지혜는 무엇인고 하니까, 신이 인간에게 대자연을 주었는데, 그 대자연을 인간이 감각으로 느끼고 그 자연을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과학과도 너무나도 똑같지요?  

◈ 신(神)을 대신한 것이 곧 과학 !!

대자연이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 되기 때문에 이 대자연만 있으면 더 이상 신은 제거해도 되겠지요.  이것이 노골적인 과학이라는 말입니다.  과학은 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을 대신한 과학인 겁니다.  이제 신은 편히 쉬셔도 됩니다.  왜요?  과학이 절대공간 절대시간의 관계 방정식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을 안다는 것은 신의 뜻을 아는 것이 됩니다.

◈ 아인슈타인 - 그 사람의 속도에 따라서 시간이 변한다 !!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그 사람의 속도에 따라서 시간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속도예요.  빨리 가는 사람은 시간이 늦게 간다는 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시계는 느리게 갑니다.  이게 일반 물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나도 도저히 몰라요.  왜냐 하면, 시간이 물건 같으면 줄었다면 이해가 됩니다.  물건도 아닌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이 시간인데, 이 시간이 줄었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되지요?  대자연은 인간과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대자연은 그냥 정체된 것이 아니고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따라 관찰자 된 인간도 움직이고, 인간은 각자 본 대로 각자의 시간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시간관인 것입니다.

◈ 상대성원리 - 동시성이 깨어진다는 것이 핵심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는 동시성이 깨어진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동시성이란 이런 것인데, 여기에 일본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2시 20분에 어떤 아주머니가 설거지를 할 때, 한국에 2시 20분에 상암 경기장에서 축구를 합니다.  동일한 2시 20분에 한쪽에 설거지를 하고 한쪽은 축구 경기를 하는데,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동일한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두 쌍둥이가 있습니다.  형은 로켓을 타고 빛의 속도로 우주에 갔다오고, 동생은 지구에 있었어요.  나중에 만났는데 동생은 늙었고 형은 훨씬 젊어요.  이상해서 동생이 형에게 물었어요.  "몇 년 있었나?"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5년'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동생은 10년이 흘렀다는 겁니다.  이렇게 시간이 그 사람의 속도에 따라 각자의 세계가 따로 존재해요.  이것을 가지고 힘의 세계, 혹은 중력의 세계라고 합니다.

뉴턴은 지구하고 달이 서로 당긴다고 본 것입니다.  그 당기는 관계를 두고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에 비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기는 힘을 중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과가 떨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고 말입니다.  

몇 시에 해가 뜨고, 몇 일에 달이 어떤 모양을 하고, 이렇게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으니, 신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신이 만든 세계의 법칙, 즉 만류인력의 법칙을 인간이 다 파악했기에 더 이상 신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 마귀 - 뉴턴아, 그 당기는 힘은 어디서 나오지?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뉴턴아!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나?' 라고 하니 답변을 못했어요.  뉴턴이 답변 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만물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서로 당기고 있는데, 당기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몰랐다는 말입니다.

◈ 아인슈타인 - 중력은 힘이 없고, 꺼진 선을 따라서 지구가 돈다 !!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중력의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담요 위에 큰 쇳덩어리를 놓으면 담요가 많이 휘어지겠지요?  작은 쇳덩어리를 놓으면 조금 휘어지겠지요?  지구는 담요를 푹 꺼지도록 만드는데, 그 내려간 선을 따라서 지구가 돈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힘이 있어서 당기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이것은 뉴턴이 주장한 것이고, 아인슈타인은 그 지형을 따라 그냥 돈다는 것입니다.  

◈ 우주란 무엇인고 하니, 에너지 담요와 같은데, 이것이 바로 '중력장' !!

그러니까 우주란 무엇인고 하니, 즉 담요가 무엇인가 하면, 에너지 담요인데 이것을 '중력장'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빛의 경우 질량이 없는데도 구부러지는 것을 보면, 바로 구부러진 담요 때문에 구부러졌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 이후 뉴턴은 완전히 박살나고 아인슈타인이 떴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인슈타인이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각각 대자연을 구성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대자연을 구성하는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동양철학이고 말입니다.  자연이 움직이면 그 리듬에 맞춰 같이 춤추는 것이 인간이지, 인간이 뭐 신의 질서를 알고 어쩌고 하는 것이 박살이 났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씨 김씨가 있다면, 이씨 김씨 각자 다른 경로가 있는데, "내가 표준이니 넌 나를 따라와" 라고 하면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는 네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인데, 둘 다 합해서 우리는 대자연을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대자연의 종이다" 라는 것입니다.

◈ 아인슈타인 이후로, 인간자체가 대자연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전락 !!

그 이전까지는 대자연이 인간의 종이라 보았는데, 그런데 아인슈타인에 와서는 인간자체가 대자연을 이루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이런 작은 부분들이 합해서 대자연을 이뤄요.  이런 아인슈타인의 사상을 받아들이면, 이혼했다고 이게 뭐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혼해서 슬프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가 스스로 인생을 못 찾고 남에 의해서 끌려 다녔다고 슬퍼하지 말고, "나는 내 인생을 살고, 너는 너 인생 살고 또 새로운 사람 만나면 되지"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에 따라 편안하게 살면 되지, 진리가 무엇이고, 누가 표준이고, 누구를 본 받아야하고, 누구를 믿어야 하고 등등, 이러한 것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지혜와 십자가가 연결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아인슈타인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이미 헬라철학에서 다 이야기 한 것입니다.  지금도 대학 철학에서 이것을 가르칩니다.  자연에 순응해서 자기 몸이 요구하는 대로 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십자가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내린 기적도 십자가와는 관계없고, 인간의 지혜로 찾아낸 모든 이론도 십자가와 관계가 없고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헬라철학에 의하면 신은 오묘하고, 신비롭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부족하고, 인간이 약하다는 것은 헬라철학도 알아요.  그러나 이런 것을 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 몸 -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것이 곧 예수를 핍박한 것이다 !!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전혀 신의 오묘함도 아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도 없는 십자가의 능력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겁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것이 곧 예수를 핍박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몸의 관계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해를 못했지요.

이러한 몸의 관계는 구약의 제사 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죽기는 제물이 죽고 살기는 자기가 살고 말입니다.  문설주에 피 발라 죽은 것은 어린양인데, 그런데 문안에 있는 우리가 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딴 몸이 아니고, 주의 사자가 한 몸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양하고 우리가 한 몸입니까?  한 몸으로 간주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지금 성경이 어려운 것은, 우리 쪽에서 한 몸이 되자고 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한 몸입니까?  한쪽은 축구를 보자고 하고, 한쪽은 연속극을 보자고 싸우는데 어떻게 한 몸이란 말입니까?  

◈ 인간은 죽었다 깨나도 한 몸이 안 되는데, 한 몸으로 간주하는 다른 분이 계시다 !!

인간은 죽었다 깨나도 한 몸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한 몸이 깨졌어요.  그런데 한 몸으로 간주하는 다른 분이 계시는데, 그런데 그것을 제한테 물으면 안 되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보겠다고 하는데 누가 시비를 건다는 말입니까?  "너는 나와 한 몸이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확정된 것이지, "예수님! 어떻게 저와 한 몸입니까?" 라고 따질 수가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약속이 구체화되면 언약 !!

다시 말해서, "어린양과 내가 어떻게 한 몸입니까? 예수님이 죽는 것이 어떻게 내 죽음입니까?" 라는 것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약속'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구체화되면 '언약'이 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서는 우리 시선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너는 의인이다" 라고, 이렇게 단정을 지으면 그 단정에 의해서 영향을 입을 수밖에 없고, 그 결과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 씻음 받았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지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세상 지혜로 보면 십자가는 미련하고 또 미련 !!

십자가란 이 세상 지혜와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지혜로 보면 십자가는 미련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지혜로 통하지 않도록, 이 세상 지혜로 보면 가장 미련한 양상으로 나타난 사건이 곧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지혜로 안 믿어지도록 말입니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래서 십자가를 알게 된 사람은, 십자가는 세상 지혜로 볼 때 가장 미련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요.  십자가를 알게 되면 왜 이것이 미련한가를 덩달아 같이 알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할 때, 이것과 병행해서 증거함으로 말미암아서, 십자가는 오직 비밀이고 감춰진 것이고, 성령의 능력으로만 알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비밀이다" 라는 것은, 즉 인간의 지혜로는 모른다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십자가가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활동결과가 무엇인가요?  그것이 곧 교회인데,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라고 했는데, 누가 불러주었습니까?  우리가 알아서 성큼성큼 다가선 것입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불러주지 아니하면 십자가 앞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보면, 즉 부르심을 받았다면,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 교회 - 불러주셔서 나왔기에 예수님만 자랑 !!

결국 마지막에 뭘 자랑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만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부르심을 받은 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알아서 십자가를 믿었으면, 자기의 지혜를 자랑할 텐데, 불러 주셔서 왔기에 불러주신 분을 자랑하게 되고, 이런 무리들이 모인 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 성도 - 십자가 앞에서 계속 미련해야 한다 !!

그러므로 교회는 개혁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서 모였으면, 이제 정신 똑바로 차리자" 라고 하면 계속 개혁될 필요가 있는데, 불러주신 분이 있어서 그분 자랑하기 바쁜데 무엇을 개혁합니까?  만약에 교회를 개혁한다면, 그 교회 기준은 미련하지 않은 것이 되는데, 하지만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계속 미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의 대화에서 미련한 성도를 한번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이웃 : 당신은 집이 다섯 채나 있는데 아직 예수 믿나?  
성도 : 그래, 나는 미련해서 아직 예수 믿는다.  
이웃 : 당신은 논밭이 5만평이나 되는데 그 정도 있으면 이제 예수 안 믿어도 되잖아?  
성도 : 그것과 상관없어.  난 예수 믿어야 해.  
이웃 : 아이구 이 미련한 놈아.  
성도 : 그래, 난 미련한 놈이다.  
이웃 : 왜 예수 믿는데?
성도 : 그분이 날 불러 주셨거든.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음이 자기 속에서 자생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형편과 전혀 상관없이 그분이 불러주심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항상 미련함으로 머물게 되고, 이 미련함이 전도로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장 20절 이후에서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1장으로 고린도전서의 내용이 전부 끝나 버렸습니다.  

◈ 2장부터는, 동의하지 않는 인간들을 잘라내는 작업 !!

그러면 그 나머지 2장부터는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복음 전하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동의를 안 했지요.  이렇게 동의하지 않는 그런 인간들을 잘라내는 그 작업을 2장부터 고린도후서까지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교인들이 엉터리 교인이었는데, 고린도후서로 넘어가면 목사자체가 엉터리 목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십자가 이야기한 것으로 이미 고린도전후서가 다 끝나버렸어요.  이미 끝났는데 교회라고 하니까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이는 거예요.  이렇게 모인 자들에게, "이런 놈은 아니고, 저런 놈도 아니고, 이것도 오해고, 저것도 곡해야.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야" 라는 것을 현장에서 사건을 통해 되풀이하면서 확인시키는 작업이 2장부터 쭉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자 : 사도님, 아내와 결혼했는데 이 아내가 말썽을 피우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  도 : 아내와 만나든 헤어지든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나?
질문자 : 사도님, 집에 돈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쓰면 제대로 쓰는 것입니까?
사  도 : 돈이 있는 자는 없는 것으로, 없는 자는 많다고 여기지, 그게 천국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질문자 :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사  도 : 이혼해 주지 왜?  
질문자 : 어떤 사람을 돼지고기 먹는데요?
사  도 : 돼지고기를 먹든, 소고기를 먹든, 개고기를 먹든 감사하면서 먹어라.
질문자 : 같은 형제가 돈을 빌려가고 안 갚는데 어떻게 할까요?
사  도 : 떼인 셈 치라. 이미 구원받았는데 그게 뭐 대수냐.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사실 겁나요.  자기 믿음 없는 것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그래서 2장 후반과 3장 초반과는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주신 것 때문에 3장에 보면, 육신에 속한 자가 나오고, 또 영에 속한 사람 쭉 나오지요.  그런데 이 대목을 설명하는데 또 혼란스럽고 말입니다.

1장 2장을 정리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불러주시는 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불려온 사람은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2장 2절에 보자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을 그림으로서 그려보자면,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 이야기에 보면 예수님 재림이야기 나오고,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나오고, 감독들은 술 먹지 말라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겠다는 말과 맞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렇지요?  이 모든 밑바닥에 보면 십자가가 쫙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도대체 문제 거리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 돈을 사랑하지 마라 - 기껏 해봐야 너는 돈만 사랑하는 자이다 !!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디모데전서 말씀이 나온다면, "십자가만 알기로 했다는데 돈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이것은 기껏 해봐야 너는 돈만 사랑하는 자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 속에 결국은 "주님, 저는 십자가만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다면 되었다" 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돈을 너무 좋아하고, 자기 욕심 때문에 아내를 개 패듯이 패고 해도, 그것으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왜요?  그렇게 되면 불러 주신 분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쳐 사랑하는 것처럼 하라' 라는 말씀을 앎으로 말미암아서, "나 같은 인간은 개 같은 자다. 그런데 이런 개 같은 인간도 주님께서 십자가로 불러주시니 구원된다' 라는 것을 알라고, 그런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나는 돈을 사랑 안 해야지"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계속 어길 수밖에 없는 자인데, 이러한 나를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네가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낙심한다면 너는 육에 속한 자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육이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에 속한 자는 아무리 십자가 믿고 예수 믿는 흉내를 내도, 결국은 은혜 받은 것 없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을 다 못 지키겠다. 나는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못 다니겠다" 라고, 이렇게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영의 관계에서 떨어진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 끝 부분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을 다 이해하지요.  왜 그런가요?  그것은 바로 과거 자신의 모습이니 말입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주님이 주신 사랑이나 챙기자 !!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대해서 나오는데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나쁜 짓이 될까? 이렇게 하면 착한 일이 될까?" 라는 것이 악마의 시험이란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라는 것은 마귀의 시험이고, "되지도 않은 인간에게서 뭐 나올 것이 있다고, 주님이 주신 사랑이나 챙기자" 라고, 이렇게 나와야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자기 정당성을 계산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이것을 싫어하십니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모두 다 잘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평가하는 분은 따로 계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미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 빵점 맞아도 하늘에서는 100점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들고 졸음이 와도 조금만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것만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으로 주신 것들입니까?  그냥 은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를 관리하지 마시고 주신 것을 받아서 챙기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실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미련하고 못난 우리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자는 무엇입니까?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이 뭡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자' 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이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하며, 자기가 얼마나 큰사랑을 받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하고 또 영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육신에 속한 것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에서 제일 잘못되게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인데, 성경에 '육신에 속한 자' 라고 나오면 정죄를 하다시피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발을 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 우리 모든 인간은 육신에 속한 자 !!

사실 우리 모든 인간이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 신령한 자가 되는가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이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가, 0.2초 후에 또 다시 육신에 속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인간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신령함을 개인 소유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께서 돌봐야지 한 10년 돌봤다고 해서, 인간들이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성령께서 관여하시니, 하늘나라가 더 좋아지는 순간들이 있더라 !!

다시 말해서, "20년을 믿었으니까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다 어린아이란 것이지요.  다만 성령께서 관여하시니 그 순간에는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가 더 좋아지는 순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하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항상 어린아이와 같아서 주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즉 신령한 수준은 성경에 나오는 수준이고, 육신의 수준은 우리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 지키느냐 하면, 성령님이 지킨다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어린아이를 신령한 자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예 은혜를 못 받은 자이고 말입니다.


2005년 5월 4일 11시 42분 서경수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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