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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5 01:00:01 조회 : 2987         
Re..광주강의(실로암교회) 16 - 고린도전서 6-3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6-3

세 번째 시간 시작해 봅시다.

성경 한 구절 찾아봅시다.
3장 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 이것입니다.
사람을 자랑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지옥 가느냐, 천당 가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린 아이같이 세상을 좁게 보는 것이 육신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것은 영에 속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 자랑 안 할게요.’ 이렇게 나오면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23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 뒤에 나오는 결과가 어떠해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야하는 것이 나와야 해요.

‘하나님의 것’이란 말은, 그 뒤에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나와야 해요.  
이런 사람은 엉터리지요.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만큼 믿음 좋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자아’는 타락된 이후에 나온 죄악 된 속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제 생각과 제 얘기를 자꾸 오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행위의 주체자가 내가 되어야지 나 말고 누가 한단 말이냐?’  

‘이 목사는 주체를 없앤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주체를 없애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면 이것은 불교입니다.  ‘자기를 반성하는 자기를 반성한다.’고 하면 반성의 되풀이에 불과해요.  그러나 ‘주님을 자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할 때에는 영적인 거예요.

그런 점에서 고린도전서의 ‘터’ 비유를 봅시다.  3장 10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이라면 무엇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나 어떻게 구원 받아요?”라는 소리가 나오면 안 되지요.  “나 그러면 구원 받는 것 맞네요.” 라고 해서도 안 되지요.  지금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거기에서 왜 자기 구원을 거론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14-15절에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했을 때, 이것은 내가 구원 받는가 못 받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이런 식으로 일하는구나.’ 라고 받아드리는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세상 좀 넓게 보라는 것입니다.  

아직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데 개가 막 짓고 있습니다.  이 때 아이는 개가 무서워서 ‘엄마 저 개 발로 차버릴까’ 아니면 ‘딴 길로 가’ 할 때, 엄마가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라고 합니다.

그러면 얘가 그냥 ‘아, 엄마가 곁에 계시는구나’ 하고 개가 짓든 말든 그냥 가면 될 텐데, ‘엄마가 있으니까 개를 한 번 차야지’ 라든가 ‘엄마가 있으니까 개에게 안 물렸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나 엄마의 취지는 개가 짓든 말든 그냥 아름다운 공원 산책하고 즐기자는 것입니다.
엄마가 있어서 개를 찬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엄마가 있어서 개에게 안 물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여전히 개를 의식하고 개를 상대하려고 하고 그기에 신경을 쓰고, ‘나는 이제 저주 안 받았어’ ‘나는 복 받았어’ 이런 식으로 자꾸 생각하는 자체가 이 본문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취지는 뭔가 하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인데 더 이상 내편 네편 나누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답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구원 받았네, 안 받았네 이렇게 따지고,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야 복 받지 안 그러면 공력이 다 불탄다는 식으로 말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터를 닦았는데 그기에 예수 그리스도 말고 사람이 한 것은 다 없애버린다는 것은 ‘더 이상 너 자신의 행함에 대해 신경 꺼’ 여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뜻 아니에요.  개인적인 구원을 따져서는 아니 되고, 눈을 크게 떠서 우주적인 원리를 보자는 것입니다.  

이제 3장 끝부분을 보면 이해가 되겠지요?
21절에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는 구절에서 어떤 사람은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는 구절을 오해해서 ‘만물이 다 내 것이구나’하고 나오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물은 다 주님의 것인데 우리가 그 안에 포함 되었다’는 뜻입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는 구절 이후에 2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나와 있잖아요.  
아시겠습니까?

3장 끝부분을 보면 모든 것을 다 통달한 느낌이 들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여겨 성경책을 덮고 싶어요.  ‘다 뗐다.  이제 4장 이후는 잔소리밖에 안 된다.’

그런데 4장에서 ‘우리는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할 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3장 끝에서 ‘모든 것을 다 알았다.  그러니까 4장을 볼 필요가 없다.’ 라고 했는데 4장에 보니까 ‘우리는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나올 때 우리가 단박에 갖는 불만이 뭡니까?  “하나님이여! 만물을 다 아는 우리한테 기껏 하나님께서 이걸 축북이라고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대하면 섭섭하지요.  천하를 아는 우리가 어떻게 만물의 찌끼가 됩니까?”  했을 때,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이렇습니다.  남의 희생자가 되고 남보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천하를 알게 되었다는 그 기쁨을 증거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진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보통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3장만 보고 책 덮는 사람은 어떤 경우냐 하면, 아마 지식적으로 ‘더 이상 들을 것 없다.  들을 것은 다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우리 모임이 처음에는 많이 나오다가 나중에 몇 명 안 남는데, 안 나오는 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제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상황에서 아는 사람에게 남보다 더 낮은 위치에 몰아넣으면 반발이 일어납니다.  ‘기껏 우리한테 해 주신 것이 이것밖에 안 됩니까?’하고 따지게 됩니다.  이럴 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이렇게 약한 자가 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더 풍성히 아는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다.’ 라고 이야기 하지요.

예수님은 내가 당한 것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에 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은 '우리의 눈을 더 크게 넓히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4장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천한 몸으로 좁혀왔는가를 거꾸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못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예수님은 더 못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큰 사랑을 네가 얼마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염치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신 분의 그 크신 사랑을 입 싹 닦아 버리고 전혀 사랑 안 받은 것처럼 행세하고, 자기 챙길 것만 챙기고 휘파람 불면서 자기 이익만 따지고 있을 때, 이런 자를 ‘싸가지 없다.’고 합니다.  ‘싸가지 없다.  염치없다.’고 해서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것이 바로 육신적이란 말이지요.  

사람이 인품이 좋다.  예의 바르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터져 나와야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속에서는 자기 의나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만을 자랑하게 되지요.  

행복한 가정이 뭐냐 하면, 상대방에게 서로 감사할 때 수입이 적더라도 그 가정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랑할 때는 상대의 장점을 찾기 바쁘고, 미워질 때는 상대방의 약점을 크게 부각시키지요.  교회 처음 개척할 때는 서로 사랑해서 서로 고마워서 서로의 장점을 자랑하기 바쁘다가, 교회 마음에 안 들고부터는 서로의 약점을 보게 되지요.  

‘고마움’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유주의 쪽에서는 이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찾아오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닫게 되면 자신은 불의를 행치 않고, 온유하며, 화평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되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은 은사입니다.  주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나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오게 되면 고마움이 터져 나오고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마움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도둑놈 심보를 가졌는지 자기 챙길 것만 챙기고 도망치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줄 때 까지만 고맙고, 그 고마움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소유주가 됩니다.  받을 때는 고마움을 가지지만 일단 받고 나면 내 것이 되고 이것의 소유주가 되지요.  이러니까 사랑이 중간에 싹뚝 끊어지지요.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랑을 쳐다보며 모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잘남으로 모였기에 여기에는 경쟁과 시기가 있습니다.  

4장 9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뭐라고 했는고 하면,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도 자신을 뭐라고요?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했다’고 했으니, 이 운명이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바뀔 턱이 없지요.  잠시 죽이는 폼만 잡다가 살리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죽이기로 작정을 했지요.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을 했으면, 사도는 그것을 받아들여야지 여기에서 다른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죽이기로 작정되어 있는데 아직도 살아 있으니 이것도 사랑이고, 자기는 굶어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교회에서 봉급 주니까 이것도 사랑이고, 자기는 마땅히 추방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설교를 시키니까 이것도 사랑이고, 주위의 모든 여건이 사랑이지요.    

제가 여러분을 만난 이것도 사랑이고, 여러분이 저를 만난 이것도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밑바닥 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죽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밑바닥이 밑바닥이 아니었습니다.  4장에서는 분명히 밑바닥인데 6장에 보면 천사를 재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천사가 어떤 존재입니까?
천사는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사의 특징은 한 마디로 자유입니다.  천사는 세금을 낼 필요가 있습니까?  교통 법규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천사는 구애받을 것이 없어요.  죽지도 않아요.  천사처럼 산다는 말은 붕붕 날아다니는 거예요.
천사만큼 세상을 초월해서 사는 그런 존재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천사마저 누가 재판한다고요?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자입니까?  정말 대단한 존재입니다.

천사는 배를 째도 그 안에 피가 없습니다.  생명의 피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안에는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할 목적으로 주님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천사는 성도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성도 속에는 주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형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이고 양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보통 신분이 아닙니다.

우리야 맨날 실수하고 죄짓고 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요.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천사까지 재판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밑바닥까지 자연스럽게 내려가도 상관없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어른스럽고 영적인 사람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보고 어린아이 같다고 하고 육신적인 생각이라고 책망 받아 마땅하지요.  ‘성경대로 지키자’가 아니라 우리는 계속 어린아이로 남는 거예요.

빌립보서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내가 몸을 떠나 일찍 죽고 싶다.’ 왜, ‘나도 숨 좀 쉬자’ 이 말입니다.  하지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너희들에게 증거할 것이 있어 아직 못 떠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바울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자유로운 사람의 글을 우리는 지금 겁도 없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되고 싶지도 않으면서 그의 글을 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참 우끼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미천하다’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백날 얘기 해봐야 사도 바울은 웃으면서 이야기 합니다.  왜냐, 세상에 대한 그 무엇도 부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이 끝난 ‘신입사원’이란 TV드라마가 있었어요. 강호라는 사람이 나와서 연기를 하는데, 입사할 때 0점으로 들어와서 나중에는 자기 회사를 살린다는 그런 내용인데, 그것을 보면서 뭘 느꼈는가 하면, 인생의 의미와 목적 같은 것은 그 드라마에서는 하나님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끼리 서로 게임을 만들어 그 게임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누가 성공했느냐 하는 그 성공의 의미를 하나님이 주신 그런 기준은 다 없애버리고  자기를 끼리 모여서 자기들 끼리 정해서 이것은 성공이고 이것은 실패라고 하자. 고 게임을 만들었어요.

축구가 11명이 한다는 것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러나 축구는 11명이 해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들끼리 만들어서 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연적 조건에서 나타난 관습적인 것 인데 이것을 가지고 가치로 보고 진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진리와 가치를 적어도 초월해 주는 단체가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에 얽매인다면 이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초월케 하는 복음은 무슨 복음?  진짜 복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고린도전서를 한 번 읽어 보셨습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 고린도전서를 읽어도 ‘하나님! 제가 지금 성경 2장 읽는 것 보고 계시지요?  성경 읽었으니까 복 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성경 2장 봤으니까 그에 대한 노동의 대가를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복음을 전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성경을 안 봐요.  복음 전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읽으면 복 주는 줄 알고 읽었는데 그것 때문에 복이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부터는 아예 성경 안보기 운동으로 들어가요.  

박주영 선수가 진짜 복음을 안다면 상대방이 꼴을 넣었을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천사들의 동네에서는 골을 넣으나 안 넣으나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해요.

성경에 축구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이 어디에 나옵니까?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기도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결국 교회라는 것이 사람 모집해서 자기를 끼리 스스로 만든 안도감입니다.  성경과는 무관하게 자기를 끼리 모여서 규율을 만들어서 이렇게 하면 영광이고 이정도 하면 믿는 것이고 구원 얻을 것이라고 서로 위안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기입니다.  

4장 19절을 봅시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여기에서 ‘능력’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을 하나님이 만물의 찌끼같이 취급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 줄 아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런 능력이 너희에게 있는지를 내가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5장 1절에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음행’이 왜 생기느냐 하면, 교만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교만이 왜 생기느냐 하면,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왜 겸손하지 않느냐 하면, 세상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과연 구원 받았느냐?’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남들에게서 확인하려고 할 때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도 확인하려고 하고, ‘구원 안 받았다.’는 것도 확인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교만’이란 예수님과 관련을 맺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가에 관심 기울이면서 그 소리에서 내 구원을 확증 지으려 하고 점검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인해서 구원 못 받았다고 여겨지면 그 때부터 금욕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어떤 사람은 먹는 것을 골라서 먹어요.  결혼을 안 하려고 하는 자도 있어요.  이런 짓 하는 것도 교만이에요.

반대로 구원 받았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나오는 것도 교만입니다.

여러분!  천사가 자기 구원 받은 것 확인하기 위해서 음행하겠습니까?  죄이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구태여 할 이유가 없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축구를 해서 구원 받는다고 하면 축구를 하겠는데, 구원은 축구와 관계없고 십자가와 관계있어요.  그런데 꼭 축구를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교만이란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 간: 주님이여!  저, 축구 국가대표 감독입니다.
하나님: 그래서?
인 간: 저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것은 받은 것이고요, 이번에 우리 팀이 4강에 올라가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팀이 3전 전패를 해도 네가 그것을 수용하겠느냐?’고 묻지요.

‘이왕 구원 받았는데, 남자가 되어서 한 번은 바람피워 봐야지’ 라고 할 때 하나님은 ‘남자가 되어서 바람 한 번도 못 피워도 너 내가 감사할래’ 이렇게 묻습니다.
‘이제 구원 받았으니까 술 먹어도 괜찮지.’ 라고 나오는데 주님은, ‘평생가도 술 한 번 못 먹도록 만들어도 너 나한테 감사할 수 있느냐?’ 이것을 묻는단 말이지요.

그리니까 구원의 기쁨보다도 구원 받았으니 은근히 내 하고 싶은 것 한 번 해보겠다는 그 기대 자체가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지옥 갈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음행’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음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술 취한 것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뭐냐 하면, 지금 너희들이 갖고 있는 신분은 일부러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 세상과는 관계없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네가 알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 가는 길을 생각하고 예수님 가는 길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걱정하고 짜증내는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들 잘 되는 것만 생각하고 사도 바울이 고생한 것, 주님이 고생하신 것은 자꾸 잊어버리는지요.  이것이 다 우리가 못난 탓이고, 우리가 죄악 된 탓인 줄 압니다.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소식보다, 누가 부자 됐다는 그 소식보다,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그 소리보다 주님의 소식과 사도 바울의 고생했다는 소식을 더 가까이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5.  6.  24.  16: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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