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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8 18:42:51 조회 : 3135         
Re..광주강의(실로암교회) 17 - 고린도전서 7-1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7-1  2005.  6.  24.   (이근호 목사)

기도 생략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고린도전서 3, 4장을 강의 하려고 합니다.
먼저 3:21-23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바울이 이렇게 하는 취지가 무엇이냐 하면, 잘라내는 작업에 들어가요.  꼭대기는 남기고 밑바닥은 잘라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어떠냐 하면, 밑바닥부터 점차 잘라내고 꼭대기만 살리는 방향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 밑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미국이란 것도 있고 영국도 있고 필리핀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학생도 있고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이고, 나머지 ‘너는 여자 나는 남자, 너는 한국 사람 나는 미국 사람’ 이것은 별로 안 중요하단 말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내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작별행사를 하고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부르면서 울고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 3장에 의하면 내가 한국 살다가 미국 간다든지 아니면 예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든지 이러한 일은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고 꼭대기처럼 느껴지지요.

말씀을 보기 전에, 고린도전서 3장을 알기 전에는 내가 최고고 내 문제가 중요하고 모든 의미는 다 내게 쏠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이 말씀에서는 용납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실 것을 다짐하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여자, 남자, 미국, 필리핀 이런 다양함, 이런 것을 지워버리고, 결국 뭐가 남느냐 하면 꼭대기만 점차 우리 눈에 크게 보이는 식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공부 시작 시간이 되었는데 여러 분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김 집사님이랑 목사님이랑 경기도 연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왜 김동민 일병이 동료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느냐?”  

나도 군 생활 했고, 나도 매일같이 고참으로부터 매 맞고 잤는데 그래도 총으로 그들을 쏠 생각은 없었어요.  이것은 내가 김일병 보다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대화에서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고참이 괴롭히고 훈련이 힘들고 해도 군 복무기간이 끝나면 밑바닥으로부터 벗어나요.  어떤 사이라도 군을 제대하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 헤어져요.  그러니까 군에서의 고참 졸병관계는 한시적인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총으로 쏘았다는 것은 그 군 생활이 자기 인생의 전부로 생각한 거예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인생이 나는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이것은 총질을 한 김 일병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도 해동되는 이야기예요.  2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이런 것들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에요.  ‘나는 80년 살았다.  나는 40년 살았다.’ 이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작업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제게 물으신다면, “하나님의 뜻은 밑바닥 지우기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안타까워하는가 하면, 밑바닥을 나의 꼭대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연천 군부대에서 8명이 죽었는데 그 부모들 실신하지요.  왜 부모들이 실신합니까?  20살 먹은 아들 그동안 키우느라 얼마나 애지중지했습니까?  그리고 부모에게 그 자식은 유일한 희망이고 요즘은 대부분이 외아들이고 그래요.  그런 아들이 죽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고전3:22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 다 의미 없어요.  여기 “바울” 대신에 여러분 이름을 한 번 넣어보세요.  “이근호”도 아무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고 마지막 꼭대기는 하나님이고 그 밑에는 예수님이고.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는 구름 위의 꼭대기에요.  이 세상에서는 안 보이는 위치에 있어요.  

그리니까 결국은 이 세상은 스스로 독립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꼭대기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세계가 조정 받고 있고, 운영되고 있고,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보이는 세상은 지금 지워나가고 있고, 제거되고 있고, 무너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을 만화로 그려 볼게요.  이런 것은 현장에 와서 들어야지 그냥 음성으로만 들으면 안 되는데.
점선으로 표현합니다.  이 지점은 두 살 때, 여기는 세 살 때, 이쯤은 열다섯 살 때 이렇게 계속 쭉 나가는데 각 시대마다 추억이 있어요.  그런데 믿는 사람들의 이 추억을 예수님이 지웁니다.  왜, 꼭대기만 남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내가 산 것도 이 모두가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었구나 하고 주님만을 남기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영적이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 눈에 보이는 내가 관리되고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육적인 사람은 뭐냐?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다.”  라이프니찌가 한 말인데요, 관계망이란 표현은 어려운 표현인데 쉽게 말하면 거미줄이란 것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인간대 인간에 의해 형성된 거미줄 같은 망으로 존재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고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부터 고린도전서 3장을 강의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뭐냐 하면 분명히 자신은 성도이고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해놓고 사도 바울이 보니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드러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 파다 나는 바울 파다.’ 이렇게 나오니까요.

그런데 바울이 이런 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당해 재미있는 것이 어떤 자가 바울 자신을 지지하고 추종하고 있는데 그런 자를 향해 바울이 어린아이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같으면 나를 지지하고 따르면 고마워서 ‘아이구 감사합니다.’ 라고 할 것 같은데.

진중권이란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들어보셨습니까?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도 썼는데, 이 사람은 시사 평론도 하고 해서 상당히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책을 내면 무조건 사서 읽는 고정적 팬이 많은데 그런데 이 사람의 약점이 뭐냐 하면, 일체 자기 팬을 관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분명히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질타하고 나서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육신적인 인간들은 교회라는 것이 분명히 주님이 머리고 우리는 지체여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증거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아닙니까.  아나니아가 땅을 팔았습니다.  그 전에 바나바란 사람이 땅을 팔아 헌금을 해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 부부도 땅을 팔았는데 그 값의 반은 숨겨두고 전체를 낸 것처럼 사도에게 내 놓았을 때, 사도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속였다.’고 했어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교회란 것도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라고 본 거에요.  그런데 베드로의 말씀은 ‘네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고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속였다.’고 하는 순간에 아나니아란 사람이 죽었고, 죽고 난 뒤에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자기 부인이 왔고 그에게 물었더니 또 거짓말을 했고 또 죽었어요.

이 때부터 사람들이 교회를 굉장히 무서워했어요.  세상 모든 관계가 인간과 인간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거든요.

바울이 게바 파고 바울 파고 이런 것을 지워버렸어요.  이런 것을 지워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추종자마저 질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지 사람들만 모인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지요.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까 어떤 이단종파에 빠진 중학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이게  이단 교리를 가르치고 자기가 지정한 음악회에 가지 않으면 때리고 해서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 이단이 어떤 것인지는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제가 오래전에 백수로 있을 때, 서울에 교사 자리 알아보고 있으면서 안암제일교회 출석했는데 그때 초등부를 가르쳤습니다.  5학년 여자 B반을 담당해서 처음 맡을 때 4, 5명 이었는데 한 달 후에 20명 정도가 되었어요.  

그렇게 된 비결이 어디 있는지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학생의 부모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자녀교육이 참 힘들고 어려운데 일단 교회에 한 번 보내 보세요.  제가 책임지고 잘 가르쳐 보겠습니다.’ 하고 설득을 했더니만 부모가 아이들을 교회에 적극적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한 달 만에 20명 만들었어요.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모였고, 그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해 줘야 해요.  교회 온다고 해서 아이들이 계속 출석합니까?  아니지요.  그래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한 두 명씩 자꾸 늘어가니까 그 집단에 같이 어울려 떠나지 않았어요.

어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은 그 학교에 자기 친구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즉 학교에 자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일학교 아이들도 친구가 친구를 좋아하고 또 다른 친구가 가세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친하게 되면 교회 오지마라고 해도 찾아와요.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교회를 안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 아이 학교를 찾아갔어요.  토요일 수업시간에 그 학교를 찾아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요.  제가 그 아이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는데, 무엇 때문에 오셨느냐고 묻길래, 아이가 교회에 오지 않아서 찾아왔다고 하니 담임이 깜짝 놀라요.  그런데 그 얘기가 그 아이 귀에 들어갔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다음 주에 그 아이가 교회에 나왔어요.  왜냐하면 자기 교회 안 나온 것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교회 선생님이 이렇게 까지 관심을 가져 주는구나 생각하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 모든 일은 제가 백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은 믿음이 있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가 믿음이 있어서 아이를 보낸 것이 아니고, 교회를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친구 만들어주고, 관심 가져주고, 재미있게 해주면 찾아오게 되어 있더란 말이지요.

그런데 담임이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안 나와요.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초부터 믿음이 없는 인간들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밑바닥부터.  뭘 위해서?  꼭대기를 위해서.  꼭대기가 꼭대기답게 증거되기 위해서는 밑바닥의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 이런 것은 지우는 방향으로 주님께서 교회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바울이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신나서 어쩔 줄 몰라요.  예초부터 교회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신나하는 거예요.  제가 여기에서 고함을 질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설교하는 자들이 이런 식으로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교회는 교회이지만 아직 육신적인 교회가 되어 사도 바울을 보내서 건전한 교회로 육성하고 개혁하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되도록 하셨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지워버리는 작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교회이긴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더 노력하자’ 이런 것이 아니라 ‘교회는 예초부터 너희들의 인간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주님에 의해서 교회 된다.  그러니까 안심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노력하라’는 말과 ‘안심하라’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은 아직도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고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신납니다.  너희들의 인간들의 관계망과는 상관없이 이미 주님에 의해 교회 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아무리 아볼라 파, 나는 게바 파, 나는 바울 파라고 쥐어뜯고 싸워도 그런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과 실제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보낸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오후 설교에  ‘하나님은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라는 그 한 마디를 해 놓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들아 나를 믿어라.’  인간들이 예수 믿으면 되고 하나님 믿으면 되지, 네가 네 행동 믿고, 네가 네 신앙 믿고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체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인간의 솜씨를 뻔히 아시는 주님이 인간을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점차 지워버리고, 잘라내고, 허물어버리면서 그렇게 나갑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사람을 어떻게 합니까?  죽여 버렸지요.  그리고 성찬식 때 자신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떡과 잔을 먹은 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여 버렸잖아요.  출애굽기에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죽였고, 무당에게 가서 점치는 사람을 죽였지요.  이렇게 죽여 버린 것을 가지고 무서워해야 합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박수를 쳐야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교회 만들기 실패해도 주님은 실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지워버리는 주님을 보면서, ‘아 주님은 우리한테 맡긴 것이 아니구나.  주님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구나.  혼자서 교회 만들기에 나서는구나.’ 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시면 고린도전서가 해석이 되지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제일 말썽 많은 구절이 14-15절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작업을 우리보고 시켰습니까?  아니면 주께서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부터 묻고 싶습니다.  대답해 보세요.  주님께서 이대로 실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알아서 자기 공력을 스스로 제거하거나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바보 같은 인간이 이발소에 가서 “기계만 빌려주세요.  제가 거울보고 제 머리 깎겠습니다.” 이런 자가 있습니까?  이것은 이발사에 대한 모독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담고 있는 자입니다.  성도를 탁 깨어보면 그 속에 그리스도의 피만 있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의 피가 없으면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통과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 있어야 사람 취급 받지 복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만 중요시 합니다.  겉포장만 코카콜라라고 해서 코카콜라가 아닙니다.  안에 코카콜라가 들어 있어야 코카콜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거룩할 수 없어요.  다만 거룩한 요소가 들어올 때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것은 어렵게 이야기하면 ‘언약이 들어 있는 사람’, 신약적으로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피가 들어있는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명이 들어 있는 복음을 절대로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연천에서 죽은 군인들의 부모가 왜 그렇게 비통해 하고 실신을 하고 그렇습니까?  자기 생명 같은 자식이 죽었으니까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볼 때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이 우리보다 더 귀하단 말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이런 것은 안 중요해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해요.  우주도 세상도 안 중요해요.  아들 예수가 중요해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땅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생명의 피만 전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자기 생명의 귀중함을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력을 이야기 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 14절을 해석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 무엇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나는 아볼라 나는 게바” 지금 이것이 무엇을 가려요?  예수님의 생명을 가리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보고 뭘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좀 전에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믿는다, 믿지 않는다?  안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로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워버렸지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이 교회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죽였습니다.  그 정도로 집요하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생명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뭘 쌓습니까?  마일리지를 쌓아요.  내가 얼마나 헌금을 했고, 얼마나 충성 봉사했고 등등.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자신이 지워져야 할 밑바닥이 아니고 영원해야 될 꼭대기로 생각합니다.  세상은 다 불타 없어져도 나는 죽기 싫다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연천의 김동민 일병은 다른 동료는 죽이고 자신은 피신할 생각을 했어요.    

바로 이러한 가짜 꼭대기 때문에 진짜 꼭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려지는 것에 대해서 교회를 만드시는 주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가짜를 지워버리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그래서 자기 공력을 많이 쌓았다는 사람은 나중에 구원 받을 때에 어떤 구원을 받는가 하면, “불 가운데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껍했다.’ 즉 ‘혼줄 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생명밖에 모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휴유 -’  나는 주님도 좋고 내 자존심도 조금은 챙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 가운데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그 동안 내 마일리지 쌓은 것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겨우 달랑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주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다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뭐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 남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7절에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 할 때,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니까 그를 무시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본문의 취지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진짜 아볼로가 중요하고 바울이 중요할 것 같으면  22절 말씀이 없어야 해요.  그런데 바울은 22절에서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다 지워져야 하고 남는 것은 꼭대기이신 예수님만 남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지난 월요일 대구 성경공부 모임에 고산에서 개척교회 하시는 박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 목사님과 사모님이 요새 죽을 지경이에요.  83세 되신 노모가 계신데 최근 이분에게 온갖 노인 질환이 다 찾아 왔어요.  중풍에 심근경색에 치매에 등등.  그래서 박 목사님 형제분들이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호흡기도 뽑고 더 이상 억지로 생명 연장책을 쓸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어머니를 계속 고통 속에 몰라 넣는 것이기에.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자신이 불효자로 낙인이 찍힐까봐 굉장히 염려를 합니다.  어머니 아픈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효자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흠집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해요.  그래서 노모를 이 병원 저 병원 끌고 다니면서 계속 돈 들여서(결국은 돌아가시겠지만)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것으로 자신이 불효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에게도 위안을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입니다.  신앙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그저 다소나마 착해져보자.  조금이나마 바울처럼 되 보자. 라는 식의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 교회라면 그 교회 불 가운데서 억지로 구원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내 공력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공력만 남기는 것이구나.’  

고린도전서 3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 공력이냐 내 공력이냐?’
16절에는 ‘구원 받는 것이 너냐 아니면 네 속에 계시는 성령님이냐?’를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전 책임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보고 성전 책임지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바울도 지워버리고, 게바도 지워버리고 결국은 그리스도만 남게 하는 이러한 작업을 예수님이 지금도 실시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2장 24-25절 말씀 보겠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여기에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고 했는데 왜 자꾸 만들려고 합니까?  이게 얼마나 불신입니까?  예수님이 알아서 다 구원하는데 왜 자꾸 우리가 예수님 앞에 폼 내려고 하느냔 말이지요.  “저 예쁘지요?  저 잘 났지요?  저 착하지요?” 왜 이런 재롱을 부르느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안 믿는데, 이미 우리는 주님의 것인데 --

좀 더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의 대상체가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을 나의 대상체로 여기면 아무리 그 인간이 노력해도 예수 안 믿습니다.  이 사람이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기 믿음을 믿지 예수를 믿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대상이란 것은 항상 뭐가 전제되어야 하는가 하면, ‘나’라는 주체가 허물이지지 않는 상태에서 대상이 생겨요.  내가 믿는 대상이 내 앞에 있는 대상이란 뜻에서 대상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뭐냐 하면, “저 사람이 누구야?” 이 말은 나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나를 허물어버린 상태에서는 “저 사람이 누구야?”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너 누구야?” 라는 것은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겠다.’ 는 뜻입니다.  나를 포기 못하고 고수한 상태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되던 예수님이 되던 그것은 항상 대상체로 남고, 대상으로 남은 한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거리를 좁히려고 얘를 쓰지만 절대로 가까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대상이 되는 한 절대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자기가 부인되어버리면 저것을 ‘너’라고 할 수 있는 ‘나’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다 삼켜버려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나 밖의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 안의 나’예요.  이렇게 될 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여”라는 말은 “이미 당신이 나를 삼켰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 밖을 못 벗어납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예수님 밖을 못 벗어납니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덮칩니다.  나는 그냥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만약에 내 힘으로 믿으려 한다면 세 발짝 다가서면 네 발짝 물러납니다.  산 넘어 산이에요.  다가갔는가 싶은데 더 멀어져 있어요.  이것을 어려운 말로 ‘지평’이라고 합니다.  

5m 밖에 철조망이 쳐 있으면 5m를 걸으면 철조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평이란 것은 지평선이 손에 잡힌 것 같은데 잡으면 저만큼 또 멀어져 있어요.  이것 이해 안 되면 곤란합니다.  인간이 자아가 있는 이상은 예수님도 지평이지 경계가 아니에요.  40일 금식 기도하면 주님이 손에 잡힐 것 같지요?  40일 금식하고 나면 주님은 저 멀리 가 있어요.

어떤 시인이 이런 시를 썼어요.  “지평선이 손에 잡히면 여행은 끝이 난다.”  참 멋있지요?  지평선이 손에 잡히면 나의 여행도 끝이 난다.  이것은 지평선이 보이는 어느 벌판에서 너무 감동되어 마치 지평선이 손에 잡힐 것 같은 황홀함을 표현한 것 같아요.

주님이 우리 손에 잡힐 것 같지만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잡으려고 계속 달려드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를 지우면서 마지막에는 우리 생명까지 거두어 가십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만 남기지요.  

굉장히 장엄하게 끝이 나네요.  좀 쉬었다가 합시다.

(2005. 6. 28. 10:1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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