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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7 19:30:59 조회 : 2855         
Re..광주강의(실로암교회) 18 - 고린도전서 7-2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7-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끝부분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하나님은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교회 세우라고 당부한 적도 없습니다.

종말이 되면 성령님의 은사로 모든 것을 이루시지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것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속성이란 하나님을 부르지만 하나님 위주가 아니고 절대 신이 되어 있는 자기 위주로 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일체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만들기’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하십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혼자 다 하신다’고 해 놓고 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위해서 혼인할 수도 있어야 하고, 복음을 위해서 이혼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을 위해서 한다고 해 놓고는 실상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지요.  복음을 위해서와 자기 행복을 위해서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부산에서도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만, 복음을 위해서라면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있고(이 말에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그 다음 말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복음을 위해서라면 뼈 빠지게 일할 수도 있어야 해요.  ‘내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복음을 위해서 쓰겠다.’는 이런 생각을 왜 못합니까?  이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데 주께서 먹여 살리겠지 뭐.  나는 직업 안 가질래.’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복음 핑계대면서 자기 편안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어요.

복음을 위해서 땡볕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 복음을 위해 놀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일 할 수도 있는데 논다.’ 이렇게 되어야지, ‘일하기 싫어서 논다.’면 이것은 이기주의지 복음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수도 있는데 복음을 위해서 잠시 쉴 수도 있겠다는 이것은 되는데, 공부하기 싫어서 놀면서 복음을 위해서 논다고 핑계되면 안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주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4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꾸려나가는가’ 하는 점이 본격화 됩니다.  즉, 주님께서 사람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복음을 위해서 자기 사람을 어떻게 혹독하게 다루시는가를 가지고 사도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잘못되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사도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나도 고생해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정답입니다.  ‘아, 주님께서 사도를 이렇게 다루셨듯이 지금도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다루고 계시기에 지금 내가 이런 상태에 놓여 있구나.’ 라고 믿으면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가 고생하는 것을 본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도가 나를 본 받으라고 하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사도처럼 고생한다고 해서 사도를 본 받는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사도를 이렇게 다루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다루시는 모습을 살펴보아야지요.

9절에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라고 했을 때,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사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미말에 두셨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구원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 교회 만들기 위해서 사도를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개인의 구원 문제는 사도가 이야기했듯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아니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어요.

우리의 구원 문제는 2,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그 피 흘림에 있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사람이 너무 개판을 쳐도 문제지만, 너무 성실하고 착해도 문제가 많아요.  만약 구원이라는 것이 각자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직접적인 능력으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된다는 식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는데, 십자가라는 고정된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십자가의 확정된 사건을 안 믿으려 하고, 십자가 믿어서 어떻게 달라진 사람이 되는가가 초점이 되어 달라진 사람들의 리스트를 찾아요.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이런 사람을 수집해서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서 나도 그런 공통점을 가져야 그들과 함께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겨 그렇게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는 것입니까?  십자가만으로 구원된다는 진리를 가리는 무서운 짓입니다.  굉장히 주의해야 될 사항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말하는 것은 구원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구원파 박옥수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장에서 사도를 왜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는가 하면 10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이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사도를 혹독하게 다루느냐 하면, 사도로 하여금 약하게 만들어서 교회 교인들이 강하게 되고, 더 안정감을 얻고,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쪽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쪽을 약하게 함으로서 저쪽을 강하게 하고, 이쪽을 어리석게 함으로서 저쪽을 지혜롭게 하고, 이쪽을 가난하게 함으로서 저쪽을 부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주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 의의 있습니까?  없겠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이것은 구원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구원 얻는데 사도 바울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착각을 해서 초막 셋을 짓자고 하자마자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예수님만 남았는데 그 때 하늘 구름 가운데서 음성이 들렸지요.  “너희는 저희 말만 들어라.”  모세도 엘리야도 아니란 말이지요.  오직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고생하고 비천하게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겠지요.

제가 강의를 하면 어떤 오해를 받는가 하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기도할 필요 없겠네요?’ 이렇게 나옵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기도, 전도는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가만 두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내가 움직여야 주님의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대상체로 보고 자신을 주체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안 움직이면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를 삼키셨다는 그래서 주 안에서 구원 받는다는 근본적인 복음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주어야 믿는 것이지 내가 안 믿겠다고 버티면 예수가 무슨 재주로 날 찾아와’ 이런 식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오늘 아침에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올린 글 보신 분 있습니까?  [인간들의 거짓말]에 대해 썼습니다.  성경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나는 절에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해요.  그러나 성경은 거짓말 안 합니다.  ‘너희가 절에 가든 교회 가든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을 속여요.  ‘나는 하나님 모른다.’

결국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심지어 자신이 구원 받지 못한 책임도 주님께 돌려요.  주님이 성령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말을 잘 들어보면 굉장히 신학적이고 합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주님을 대상체로 보고 나를 주체로 봐서, 주님 쪽에서 뭔가가 날아와서 나를 데리고 가야 구원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은 모든 것을 ‘고마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아직 성령이 도착하지 않아 구원 못 받았으니 그 책임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책임 전가를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옥 가는데 대해 자기는 책임 안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4장 9절을 봅시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에서 “구경거리”는 놀림감이지요.  ‘복음 안다고 까불더니 꼴좋다.  저렇게 망했구만.’ 이렇게 조롱당하고 나중에는 쓰레기 취급 받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주체가 있기 때문에 이 주체가 신에게 향하든 세상으로 향하든 이 주체가 확장되어서 능력을 가져서 신도 붙들고 세상 부귀영화도 잡고 싶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주체가 확장되려면 뭐가 필요한가 하면,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에서 나온다고 여깁니다.

세상의 모든 모임은 인간의 관계망이지요.  교회든 뭐든 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착한 사람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 못 받으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이들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 전부입니다.  진리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외부에서 진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폐증 환자처럼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 인간들끼리 서로 인정해야 그것이 진리가 되고 옳은 것이 되고 그렇습니다.

인간대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힘이고, 이런 힘을 인간들이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왜 이렇게 사용하시는가 하면 ‘힘없는 힘이 너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전혀 무능하고 힘도 없는데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힘입니다.  ‘힘이 안 되는 힘을 네가 붙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사도입니다.

사도는 남 좋은 일 시킵니다.  자기가 복음 전했는데 돌아오는 이득은 하나도 없어요.  자기는 갈수록 약해져요.  갈수록 무명한 자가 돼요.  갈수록 망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싱글벙글하면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라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에서 나오는 그 힘을 얻고자 했지 정말 주님이 주시는 힘없는 힘을 붙들 마음이 있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즉 사도들의 삶을 통해서 진짜 복음을 보여주시고 인간들이 아는 복음은 가짜 복음임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왜 사도들이 고생하는가?  복음의 능력이 이 땅에서는 어떤 양태로 등장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힘없는 힘을 의지할 수 있는가?  

간음했던 여인이 돌에 맞아 죽지 않고 되살아 난 것은 힘없는 힘에 의해 용서 받았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이런 간음한 여인의 심정을 이해 못하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해졌다.’는 소리 듣고자 해서 교회 나옵니다.  이것이 또한 세상에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착해 졌다는 힘.

그런데 사도 바울은 착한 힘도 아니도 도덕적인 힘도 아니고 그냥 십자가의 힘, 용서해주시는 힘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자기에게 힘이 아닙니다.

제가 광주 강의한지도 벌써 몇 개월이 되었지요.  1월부터 했습니까?  예.  
처음 강의할 때 제가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그 때 제가 이런 염려를 했습니다.  행여나 복음을 가지고 힘으로 환산하려고 한다면 제 강의는 앞으로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십자가뿐이구나!’ 라고 나온다면 참 고맙고 감사할 텐데, ‘십자가를 믿었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힘 되는 힘을 주실거야’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 앞에 가난하게 나타난 사도 바울을 거부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난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진짜 신앙인과 가짜 신앙인을 구분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 초라한 모습 속에 진짜 우리가 구원 될 수 있는 힘없는 힘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딱 구분시키기 위해서 사도들은 비참한 모습으로 등장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4장의 결론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서 여러분의 심정은 이해를 하지요.
제 강의 듣고 묻고 싶을 거예요.  “목사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광주에 진짜 신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라고.  그러나 광주에 신자가 몇 명인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신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가 의문입니다.      

어느 인간이 힘 안 되는 힘을, 그냥 용서만 해 주시는 그 힘에 자기 목숨을, 기쁨과 행복과 전부를 걸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만약에라도 사도 바울처럼 자기가 초라하게 되고 죽은 자 같이 될 때, 자기 생을 후회하면서 ‘미쳤지 내가 왜 예수 믿었던가?  그 때 복음 강의 왜 들었던가?’ 하고 가슴 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어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빌립보서 4장을 한 번 봅시다.  12-13절입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에서 “능력”이 무슨 능력(힘)입니까?  복음의 힘이지 세상 힘이 아닙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줄려는 힘이 아니에요.  인기 있는 목회자, 세상 부귀영화, 재정적 자립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힘(힘없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힘없는 힘이 사도 바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지난 강의에서 뭐라고 했지요?  ‘밑바닥 지우기’ ‘꼭대기만 남기기’ 꼭대기에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님.  이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점차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워나간다]는 것은 죽이는 것도 되지만,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위해서 복음에 나서신다면, 이 복음을 위해서 목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놀 수도 있고 일 할 수도 있고, 결혼할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고 등등.  이것이 얼마나 큰 자유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자유를 못 누리는 이유가 뭔가 하면, 세상을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으로 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초라하게 되면 남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수건거릴까’ 하면서 아직도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질타하는 그 질타의 힘을 무서워하고, 주님의 용서하시는 용서의 힘이 별 힘으로 여겨지지 않지요.

본문으로 돌아와서 4절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에서는 내가 자책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나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토대에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5장 봅시다.
사람이 얼마 없으니까 갑자기 진도가 빨라지지요?  기분 좋습니다.
사실은 1장 2장이 그만큼 중요했었어요.  진도가 못나갈 만큼.

5장 보기전세 4장 19절을 보면,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에서 “능력”이란 것은 무슨 능력입니까?  마지막 때에 우리를 미말에 두고 우리로 하여금 거지로 만들고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예수님을 절대로 대상체로 보지 마세요.  내 건너편에 세우 두고 ‘내가 잘 믿을게’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안 믿습니다.  우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덮쳐온 거예요.  그리고는 ‘이미 너는 내 사람이야!’ 하고 확인을 반복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깔려 몸부림치지요.  

저희교회에서 지난 주일 오전 설교 후에 말이 좀 많았어요.  설교에 문제가 있어서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요.  어떤 충격인가 하면, 제가 설교할 때는 무심코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손아귀에 잡고서 마구 때린다.’고 했어요.  처음 몇 대 맞을 때는 핑계가 많아요.  ‘바빠서 교회 못나왔다.  뭐 어떻다.’ 하는데, 너무 많이 맞으면 아무소리 못하고 따운 되지요.  그 때 그 빈곳에 예수님이 자기 피를 담아서 끌고 가십니다.

교회 안 다니고, 예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른다고 했을 때에 소주 한 세병 마시고 집에 누워서 한 번 생각해 보잔 말입니다.  결국 남는 것이 뭔가 하면 ‘왜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주 마시고 결국 내 뱉는 소리가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하고 따지는 것이나, 교회 10년 다닌 사람이 기도하면서 ‘신이시여! 왜 내가 원하는 기도 안 들어줍니까?’ 하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똑 같지요.  이렇게 되면 교회 다닌 것이 헛일입니다.

세상은 원래 하나님 뜻대로 되지 우리 마음대로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말씀대로 되지 피조물 마음대로 안 되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죽을 때까지 몰라요.  자꾸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데 우겨봤자 계속 얻어맞기만 하지 안 됩니다.

5장을 봅시다.
5장에서 어려운 점이 뭔가 하면, 아버지의 첩과(그 당시 첩을 두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관계를 가졌어요.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 아비의 아내를 취한 사람이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르우벤.  이 르우벤이 빌하와 관계했고, 또 압살롬이 있지요.  다윗의 후처와 관계를 가짐으로 자신이 공식적으로 왕 됨을 공표했지요.

이것을 보면 여성단체에서 말하기를 성경이 도대체가 여성에 대한 품위라든가 존엄성을 일체 말살해 버리고 남성의 노리개, 애완용 개, 집의 가구 취급을 하니까 이것이 바로 남성 우월주의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는가 하고 성경에 대한 거부반응을 많이 나타내는데 이 점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생계문제였습니다.  사람이 배가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콜버거(Kohlberg)의 [도덕 발달이론]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기억납니까?  잠시 말씀드리면, 1단계는 어린아이 단계 - 처벌해야 말 듣고, 보상해야 말 듣는 단계.  2단계는 때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단계.  3단계는 착한 소년, 착한 소녀 되기.  4단계는 기존 질서와 조직을 존중하는 단계.  5단계는 이런 것을 개혁하는 단계.  6단계는 이 모든 법을 초월하는 단계.  이렇게 봅니다.

1단계는 자기 몸만 생각합니다.  때리면 안 하고, 안 때리면 또 하고.  옳은가 나쁜가는 모르고 내 몸이 아픈가 안 아픈가만 따져요.  이런 단계가 교회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다급해서 교회 나오면 ‘신이시여! 부탁합니다. 잘 봐주세요.’ 하면서 찾아 왔다가 다급한 일이 풀리면 교회 안 나오지요.

2단계는 어머니가 아이를 때릴 때 자기 몸이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무슨 마음 때문에 나를 때릴까를 생각해요.  C.F에 그런 것 있지요.  엄마가 우유주면서 ‘또 싸울거야?  또 싸우면 내 딸 안 해!’ 하니까, 아이가 울면서 ‘안 싸울게’ 하고 그 때 서울우유 주잖아요.
이 단계에서는 목사 말에 무조건 순종합니다.  목사님이 나를 사랑해서 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순종해야지. 라는 단계입니다.  목사님께 순종하므로 내 신앙이 우수한 것으로 여기는 단계지요.  

3단계는 엄마의 권위에 복속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 착한 사람 되는 것입니다.  자립하는 단계지요.  여기에서 자기 의 마일리지가 쌓이지요.  이 단계에서는 목사고 뭐고 내가 하나님께 잘 해서 구원 받겠다는 것이지요.  

4단계는 나 혼자만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중근처럼 내 한 목숨 바쳐서 국가와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수류탄이 터졌으면 다른 전우를 생각해서 내가 먼저 수류탄을 온 몸으로 감싸는 그런 단계지요.  이 단계에서 이웃 사랑을 하고 밥 퍼주는 단계.  

5단계가 뭐냐 하면, 기존의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단계입니다.  4단계와 5단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4단계는 기존 질서에 복종하는 단계이고 5단계는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6단계는 뭐냐 하면,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는 단계.

1단계부터 5단계까지는 어떤 기대치를 예상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나도 기뻐.  나도 존재할 이유가 있어.  6단계는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6단계의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하기 때문에 1단계부터 5단계의 기적에 대해서는 눈 깜짝도 안 하지요.  

그런데 이 여섯 가지가 성도에게는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6단계에 있다가 월급이 차압당하면 갑자기 1단계로 내려가 버립니다.  새벽기도 안 나오다가 자식이 아프면 갑자기 새벽기도 나옵니다.  ‘주여,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다시는 그런 불순종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우리는 평생을 엘리베이트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는 것은 십자가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한 단계 한 단계를 사건화 시키면 이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을 가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인간은 위의 6단계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이것이 콜버거의 이론인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신앙의 발달단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4절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도 바울이 지금 육체적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함께 있습니까?  아니지요.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주의 영으로 함께 있지요.  몸은 떠나 있어나 영으로 함께 있지요.  이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바울이 몸은 떠나 있어나 영으로 함께 있지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내 영과 함께” 모였잖아요.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4, 5절)  

여기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어요.  
“이런 자”가 누구입니까?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자입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누구의 육신은 멸한다고요?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그 육신은 멸하고,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에서의 영은 누구의 영입니까?  

육신을 사단에게 내어줘서 죽고 영은 예수의 날(재림 때)에 산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영은 간통한 사람의 영이 아니고 영과 함께 있는 우리끼리 즉 사도 바울과 복음 아는 사람만 구원 받는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아버지의 첩과 간통해서 사단에게 몸을 내어준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 이것이 용납이 되면 교회에서 자살하는 방법으로 아버지 첩과 간통할 거예요.  머리 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나쁜 짓하면 주께서 죽이시지요.  이왕 죽는 것 약 먹고 죽으나 나쁜 짓 실컷 하고 죽으나 영은 예수의 날에 구원 받을 것이 뻔한데 무엇 때문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약 먹고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5절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면 윤리적으로 너무 느슨해져서 사도 바울의 취지와는 달리 노골적으로 죄 짓겠다고 나서면 교회가 점점 더 타락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문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이 본문을 봐도 그런 해석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 해석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 갔습니까?’ 이것을 물으면 답이 나와요.  지옥 갔는지는 알 수 없지요.  다만 이들이 성령을 속이고 헌금을 해서 즉사했다는 것만 알뿐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천국 갔느냐 지옥 갔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이것이 뭘 시사해 주는가 하면, 현상적으로 그 사람이 망했다고 해서 지옥 갔다고 간주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현상적으로 이런 벌을 받으면 반드시 지옥 간다고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만약 현상적으로 망해서 벌 받아서 지옥 간다고 본다면 사도 바울은 벌 중에서도 엄청난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사도같으면 저렇게 비참하고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무슨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힘들게 살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곡해하는 사람이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와요.

바울은 지금 역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1장으로 돌아가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지 인간들의 지혜로는 안 됩니다.  현상적으로 이런 벌을 받으면 지옥 간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지혜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지혜가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 장애를 제거하는 방법 중 하나가, 간통한 자가 죽기는 죽는데 마지막 때에 구원 받는 현상을 이야기함으로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들의 지혜를 동원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교회 만들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치리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치리문제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의 결론을 맺으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지혜를 동원해서 현상적으로 교회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사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비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살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는 현재 사람들이 힘으로 여기는 그런 힘을 극복하고 진짜 구원 받는 힘은 ‘힘 안 되는 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마음껏 복음의 진리를 외치도록 한 것입니다.

(2005. 7. 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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