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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3 11:01:38 조회 : 3498         
Re..광주강의(실로암교회) 06 - 고린도전서 3-1 이름 : 서경수(IP:)
05광주강의(실로암교회) 05 - 고린도전서3-1
                                                                05,03,10    강의: 이근호 목사


◈ 고린도전서 -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놓여있음을 잊지 말자 !!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먼저 요약해 봅시다.  고린도전서가 성경책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지요.  기억이 나십니까?  불과 2주전이었는데 말입니다.  하기는 하루가 어딘데 2주전이니, 물어보는 제가 어리석지 말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사이에 놓여 있기에, 이 고린도전서를 알려면 창세기부터 치고 올라오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또 이미 완성된 것에 비추어볼 때 고린도전서는 미리 앞당겨서 어떻게 완성된 것이 포함되어 있느냐는, 이 양쪽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 구약부터 치고 올라온 내용 -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은 인간을 구원해낼 수 없다 !!

그렇다면 구약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이 내용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그것이 결국 인간을 구원해낼 수 없다는 것을 구약의 오랜 시간동안에 다 보여 준 것입니다.  기도도 해보고, 헌금도 해봤고, 성전에서 제사도 드려봤고, 전도도 해보았고, 귀신추방도 해봤고, 율법의 생활화도 실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생활화' 인데, 특히 여기에서 개입되는 것이 잠언인데, 목사들이 심방을 하면 이 성경구절을 많이 이용하지요.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라는 것을 읽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돈도 되고, 오래도 삽니다" 라고 설교하지요.  한번도 못 들어보았습니까?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잠언에 있는 것처럼, "복 받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라는 것도,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동안에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법을 지켜보겠다는 시도, 그 자체가 결국은 죄로 나타나는 빌미였다" 라는 것입니다.  즉 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자신도 몰랐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가 드러나게 하고 죄 값으로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다시 말해서, 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심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법을 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성경말씀 -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고발하고, 법의 완성은 오직 예수님만이 !!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잠언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란 것을 알려주기 위해 주셨고, 그래서 욥기를 주셨고, 구약성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산상설교를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노출시키기 위함이고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낸 후 남의 눈의 띠를 빼라' 라고 할 때, 자기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로서, 따라서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맹세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아니 맹세를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지옥에 갈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런 말씀을 주실 때에 아예 지킬 엄두가 안 나지요.  특히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씀을 놓고 볼 때, 아니 인간이 어떻게 염려를 안 할 재주가 있습니까?  염려를 하려고 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염려가 되는 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께서는 법을 완성시키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법의 실체를 밝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더 높은 수준의 법을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완전한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주신 법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죄인이다" 라는 것을 고발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생명나무과일이 있다면, 여기로 가는 에덴의 동쪽길이 있는데, 이 길을 천사가 와서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로부터 추방된 인간을 절대 이 길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렇게 추방된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하나님은 '죄'로부터 출발하는데, 우리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발한다 !!

제가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던가요?  "하나님은 죄로부터 출발하는데,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발한다" 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했었습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은 "무엇이 죄냐?" 라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에 비해서, 우리는 성경을 보든지 교회에 오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출발점은 "내 고통을 해결해 주옵소서" 라는 것입니다.  항상 고통이 우선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라는 말은 고상한 말이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수제비를 비비듯이 열심히 신에게 비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고통과 아픔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란 말이지요.

이런 자들은 만약 고통이 없다면 기도할 이유가 없어요.  아쉬운 것이 있기에 기도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면 왜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이, 인간이 저주의 땅으로 추방되었기에 모든 것이 아쉬운 겁니다.  이마에 땀이 흘러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말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 이 저주의 땅으로 나를 보냈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비나이다' 라고 하기 이전에, "왜 하나님께서 이 저주의 땅으로 나를 보냈는가?" 라는 이유부터 제대로 알라는 차원에서 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할 때,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는데 해결책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고통만 주지 마시고 해결책도 주시옵소서. 우리가 지켜서 해결 받겠나이다" 라고 나오는데, 하나님의 뜻은 "왜 너에게 이런 고통이 왔는지 아느냐?' 라는 식으로 추궁해 들어옵니다.  

이렇게 추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법을 주신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고통을 면제해 달라고 빌기 전에 "맞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보다 더 심한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조치는 참으로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나무에서 추방시킨 조치가 너무나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피부로 마음으로 절감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님을 찬양하고 그 모든 일에 다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성도는 미친놈 소리를 들어야 !!

제가 이런 얘기하면 아마 미친놈이라고 하겠지요.  자신이 고통스러운데 그것이 어떻게 감사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했지요.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할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일이 온다 할지라도, 그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 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 역사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 17, 18절 나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것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어떠한 조치, 즉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는 분이, "왜 내가 예상치도 못한 일을 발생시키느냐?" 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누구냐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방식대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신분, 위치, 범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저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고, 마땅히 지옥가야 합니다 !!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고린도전서로 들어오게 되면, "저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고, 마땅히 지옥가야 합니다" 라는 그런 사람의 눈에는 '은혜' 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어서 마땅히 고통과 저주와 지옥을 가야하는데, 용서가 와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 이 선물이 바로 은혜인데, 이런 선물을 받은 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의인됨은 자기가 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그야말로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여전히 죄 지으면서 살고 있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용서의 은혜가 날아와서 의인되었음을 통보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전주에 사는 어떤 분이, 이 분이 우리교회 홈페이지에서 제 설교를 동영상으로 보는 모양입니다.  이분이 설이나 추석이 되면 항상 젓갈이나 김 등을 번갈아 가면서 보내줍니다.  그래서 제가 고맙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그분이 화를 내세요.  "왜 전화를 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부쳐주면 여러분과 같이 나누어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분에게 제가 김이나 젓갈을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분이 그냥 알아서 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저는 은혜의 고마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되" 라는 것이 아니라, 법을 통해서 우리는 고통과 저주를 받아야 하고 결국은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데, 그런데 어디서인지 난데없이 의가 날아와서 의인되었으니까, "아니 어째서 제가 의인되었습니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신약이라는 것입니다.

◈ 성도의 출발점 - 저는 한 것이 전혀 없는데, 왜 제가 구원되어야 됩니까?

그러니 신약은 출발부터가 달라요.  모든 인간은 어디서부터 출발한다구요?  '고통'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신약의 성도는 그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사실 이것도 자기가 살기 힘드니까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종교지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왜 제가 구원이 되어야 됩니까? 저 사람보다 제가 더 나은 것도 없고, 더 많이 헌신하고, 봉사한 것도 없는데, 왜 하필 제가 천국에 가야 합니까?" 라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생소한 것입니까?

◈ 고린도전서 - 구원을 받겠다고 성경을 펼치는 사람은 이해를 못함 !!

신약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이 곧 '고린도전서'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받겠다고 성경을 펼치는 사람은 고린도전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여 뉘십니까? -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 왜 하필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 너는 이방인에게 나를 증거할 증인이야"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하면, 간음이나 살인을, 이런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가담했고,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직접 하나님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아니, 이것보다 더 나쁜 놈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일을 열심을 다해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다 말입니까?  이런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저히 될 수 없는, 생길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한 사람의 성도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어떤 누구도 바울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가 없이는 성도라는 말도 붙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 주님이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겸손의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진실로 저는 예수를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예수의 적이 있다면 바로 저입니다. 그런데 극악무도한 저 같은 인간을 예수님이 용서했다면, 주님이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이라는 말입니다.

◈ 교회 - 바울과 같은 변화를 겪은 사람은 누구세요?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어디 간판을 세우고, 목사가 있고, 건물이 있고, 교인이 몇 명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 바울과 같이 "이러한 변화를 겪은 사람은 누구세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모인 자들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확률적으로 봐서 로또복권이 당첨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이에요.  그래서 이런 사실을 알면 개척교회를 그만두는 것이 낫지요.  아니, 언제 바울과 같이 기적적 회심을 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기겠습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울 같은 그런 사람이 생겨요.  참으로 이상하지요.  이것은 지금도 주님께서 여전히 활약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야 합니다.  "야!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50명을 목회해도 천당 가는데, 왜 골치 아프게 200명 목회를 !!

어떤 목사님에 제게 이런 얘기를 하세요.  그분은 참 훌륭한 목사님인데 5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이에요.  이 목사님에게 2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청빙제의가 왔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저는 안 가겠습니다. 50명을 목회해도 천당 가는데, 왜 골치 아프게 200명 목회를 자원해서 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대답을 했대요.

그러니까 이 목사님의 생각은, "이 못난 놈이 구원받았으면 되었지, 그 이상 뭘 더 원해?"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욕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람은 이렇게 안 나오지요.  당장 보따리를 싸서 큰 교회로 갈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그야말로 "어떻게 자 같은 놈이 구원을..." 라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말입니다.

"하나님, 왜 저 같은 인간을 구원했습니까?" 라는 것에 대한 해답은 고린도전서에서 딱 한가지입니다.  그게 뭡니까?  "십자가 때문에 너에게 혜택이 돌아갔느니라"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질문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도대체 뭐 길래, 그렇게 죄인인 저를 구원하는 능력이 나옵니까?" 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과연 십자가가 무엇이냐?" 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대화를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질문자 : 아저씨, 교회에 나가신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성  도 : 예. 맞습니다.
질문자 : 교회에서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하지요?
성  도 : 예. 그렇습니다.
질문자 : 그럼 십자가가 도대체 뭡니까?
성  도 : ? ? ?

막상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할 말이 궁해져요.  예배당에도 십자가가 걸려있고, 집에도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 목걸이도 하고, 온통 십자가 판인데, 그런데 막상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설명이 쉽지 않단 말이지요.

십자가는 죽음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딱 깨보면 그 안에 어떤 분이 죽어있어요.  그게 십자가라는 것이죠.  모든 세상은 살고자 하는 이야기잖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까? 무엇을 하면 행복하게 살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어떤 분의 죽음 이야기가 생명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분이 바로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더라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2000년 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영생이 되는가?

그런데 이것은 논리상 중간에 많이 건너뛰었지요.  "아니, 어떻게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2000년 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영생이 되느냐?" 라는 논리자체가 많이 비어 있잖아요.  이것을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죽었지요?  그런데 이분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는 능력이 되느냐는 것이, 그것이 고린도전서 1장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은 분명 죽었습니다.  그런데 삼일만에 부활하셨지요.  이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에서의 부활은 이 세상 모든 죽음을 이긴 거예요.  다른 이들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사흘만에 부활하셨거든요.  다시 말해서, 다시 생명을 얻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과 인간들의 죽음과는 완전히 차이가 나는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합시다.  

문 :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답 : 예수님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십자가가 이야기입니다.  
문 : 예수님의 죽으심과 나와 무슨 상관 있습니까?  
답 : 우리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문 : 그리고요?
답 :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으로 이어졌고, 즉 죽음을 이기는 죽음이었습니다.  

◈ 우리의 죽음 -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죽음 !!
◈ 예수님의 죽음 - 다시 생명을 얻는 죽음 !!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은 도대체 어떤 죽음이었습니까?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죽음이었다는 겁니다.  돌아가신 우리 증조할머니는 아직도 죽어 계시고, 고조 할아버지 아직도 죽어 계시잖아요.  이들은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죽음인 반면에, 예수님은 죽음조차도 극복하는 죽음이었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권력, 학식 등은 사실 죽음 밑에 노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큰 빌딩을 가지고 있다. 나는 국무총리와 친하다" 라는, 이런 것들은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지요.  아무리 많은 빌딩을 소유해도 그게 죽음을 이길 순 없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해도 그게 죽음을 이길 수 없고, 최고 권세를 가진 대통령이라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은 죽음을 이길 수 없단 말이지요.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고, 밤을 새워 열심히 기도하고 해도 죽음을 이길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삼일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단 말입니다.

우리는 빌딩을 바라고 권력을 바라면서 열심히 살아가는데, 사실 이런 것들이 기껏 죽음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것을 추구하며 살았는데,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은, 이미 생명과 부활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침투한 결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것들을 초월한 십자가를 믿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 십자가의 능력 -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

이것이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십자가의 능력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 다음부터는 제가 말하기가 좀 곤란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 같으면 이 죽음 안의 세계도 바라보고 죽음 밖의 것도 보면서, 어느 것을 더 감사히 여기느냐 하면, 돈도 좋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자기의 기대나 희망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기대하는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죽음의 세계보다도 생명의 세계를 더 사모한다면, 그 다음 산상설교에 나오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 놓아라" 라는 말씀이 성사가 되지요.  자기도 모르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고 하면, "어, 이게 어떻게 이루어지지?" 라고, 이게 되는 거예요.  "남을 비판하지 말라" 라고 하면, "너나 나나 똑 같은 놈인데, 뭐 비판해' 라고,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 설교 - 떠날 사람은 떠나도록 !!

이런 사람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두 쪽을 다 설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부활의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에는 구원받기를 갈망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기를 원해서 온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설교를 통해서 더 이상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이야기하면, 사실은 예수님을 통해서 빌딩에나 세상 것을 추구하면서 은근히 십자가만 믿는 것처럼 위장하는 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추방하기 위해서라도, "십자가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것도 같이 원하는 사람은 나가주세요" 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 가짜 목사들 - 그래도 일단 십자가는 거치시고 !!

이런 인간들의 마음을 잘 아는 목사들이 하는 말이, "예수님께 기도하면 영생과 천국도 얻고, 이 세상 것도 모두 얻는다" 라는 설교를 하지요.  물론 이런 목사들도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먼저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시오" 라고 하지요.  그것도 없이 세상 것을 달라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염치없는 일이기에, 일단 십자가를 거처서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주님만 있으면 족함이라" 라고 해놓고는, 사실은 "이렇게 내가 주님만 사모한다고 하는데, 설마 이 세상 것도 안 주시겠느냐?" 라는, 그런 식으로 은근히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제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을 내고 기도를 하고 해도, 죽음이라는 장벽을 전혀 돌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우리는 이 세상 것을 버리고 기도원에 들어가야 합니까?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니까, 깊은 산 속에 있는 기도원으로 가야 합니까?" 라고,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옛날에는 유행가를 부르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복음송과 찬송가만 부른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지요.  이런 것이 참 우습다는 말입니다.  아니, 음악에 무슨 성(聖)과 속(俗)이 있습니까?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가사가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어디에 있냐구요?  요한1서 3장 16절에 나옵니다.  사랑이란 것을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사랑은 택한 자에게만 주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주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입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의 옛 껍질을 벗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기를 !!

우리는 평생을 다 가도록 자신의 옛 껍질을 벗을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옛날 습성을 버려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옛날 껍질은 벗겨봐야 새로운 다른 껍질이 마치 성스러운 욕망인 냥 위장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성과 속을 구분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생명을 주신 그 능력이 오직 자기가 아닌 자기 밖에 있는 예수님의 공로와 피에서만 나오는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거룩해지는 그 모습에서 자기를 구원하는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던 상관없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자기 밖에 있는 예수님의 능력이 일방적으로 임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지, 즉 자기가 개과천선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속이고 남들도 속기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탤런트를 하면 될 것입니다.  카톨릭 신부들이 로만칼라를 하고 성스러운 복장을 한다든지, 목사들이 까운을 걸치고 근엄한 목소리로 '부족합니다' 라고 하는 등등 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 거룩하게 되고 싶은 충동이 있는데, 성경에선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아주 제대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자기가 역할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놀리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면서 거룩한 척 하는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것입니다.

◈ 성스러운 행동은 이제 그만 !!  

그러니까 의인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 욕망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기에 의인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성스러운 행동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스러움은 우리 말고 다른 자리에 있는데, 자꾸 다른 자리의 성스러움을 자기에게 옮겨오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걸어 다니는 성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과 비교하고 남과 경쟁해서 이기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차단하는 더러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함의 능력을 드러내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5분 동안 휴식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도대체 어떤 능력이기에, 내가 스스로 나를 관리하고, 절제하고, 노력하는 이런 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만드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005년 4월 20일 녹취 마침.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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