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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8 02:00:16 조회 : 1515         
기린 아저씨 150327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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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39.133) 15-04-03 07:56 
광주 강의(2015. 3. 27) 13-1

마가복음 4장 21-22절입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등불의 조명이 얼마나 밝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온다는 시간적 요소는 여기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등장하면 시간적 요소는 사라집니다. ‘언제 오십니까?’라는 물음이 성립이 안 돼요. 주님 입에서 하나님 나라가 말해지는 순간,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어디(어떤 장소)로 가려고 합니다. 가뭄이 들어 바짝 마른 논에 양수기를 동원해서 저주지 물을 끌어와 물을 댑니다. 그러면 논에 물이 넘치게 되지요.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뭔가로 채워지면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논에 물을 대듯이 하나님 나라 요소가 차고 들어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언제 오십니까, 어디로 가면 됩니까?”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등경 위에 두려 함’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 여기에 와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찢어져 버렸습니다. 애초에 그런 하나님 나라는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3절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요. “여러분은 등불을 켜서 상아래 숨겨놓지 않고 환희 비치도록 높은 곳에 두지요? 내 말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압니다.” 이렇게 나오면, 오히려 듣는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들을 귀가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아닌가요?

시간문제에 있어서 인간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함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론할 때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인간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왜 다른 나라를 찾는가? 그 이유는, 나는 변하지 않고 세상만 바뀌면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걸치듯이 내가 그냥 들어가면 되잖아요.

천국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나는 그냥 은혜로 그곳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곳은 아니고 나중에 천국 간다. 왜냐? 지금 이곳을 천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불 품 없으니까 지금 말고 나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이유는, 메시아가 오면 천국을 그분이 거느리고 오실 것이니까 메시아를 통해서 우리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죽음을 갖고 왔어요.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사망이 2개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죠. 첫째 사망에서 죽은 사람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첫째 사망을 모르는 사람은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데, 두 번째 사망이 뭔가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망이 둘로 나눠져 있을까요? 이 문제를 풀지 아니하면 ‘빛을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빛이다. 내가 빛을 가지고 왔다.’는 말씀에 사람들은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예수님만 빛이라고 하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어둠에 속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인간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어둠이라고 여기고, 인간들이 어둠 속해 있다고 증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등불을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높은 곳에 두어 환히 비치게 한다는 것은, 주님이 빛이라고 등장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의견은 모두 거부합니다. 인간의 생각 중에 천국은 이러이러한 곳이고 우리는 그곳에 몸만 가면 된다는 생각도 포함이 돼요.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22절).”고 했는데, 이 말씀은 마치 삼손이 낸 수수께끼 같아요. 계속 비유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빛을 억압한다 할찌라도 그 일은 성공하지 못한다. 빛은 어두움의 어떤 훼방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두움은 강력하게 빛을 억압하고 빛이 비추지 못하게 하는 힘으로 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그냥 듣기만 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너희들은 나를 싫어하지? 정말로 밉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아.”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우리가 뭐라고 했어요? 우리는 주님을 싫다고 한 적 없는데요. 주님혼자 지나친 상상을 하시는 것 아닌가요?” 이런 심정이지요.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21절)” 이 말씀은, ‘나는 기어이 내 말을 드러내겠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제자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아무도 말리는 사람 없어요.” 라고 하고, 주님은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지금 못 알아듣고 있어.”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등불이다. 훤하지?” “예, 밝습니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주님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내가 기어이 빛을 드러내고 말거야.”라고 하시면, 제자들은 “그렇게 하세요. 말리는 사람 없어요.” 이렇게 나오죠.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의 반응은 다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시려는 것은 죽음의 2중 구조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지요? 주님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하신다고 해도 우리들은 그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왜냐? 죽음의 2중 구조 때문입니다. 죽음은 2개의 층이 있어요. 1층 죽고, 2층 죽고.

죽음은 시루떡처럼 2중 구조로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키가 커서 두 층 모두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 위쪽은 두 번째 죽음을 내다보시고, 아래쪽은 인간들이 죽는 죽음을 보십니다. 인간들은 2층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 안목(너희들은 죽었다)은 없고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예수님만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2중 구조를 말씀하신 이유는, 천국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제자들은 2중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알아듣지 못함을 알려주시기 위해 상자 속에 가두십니다. 그 후 주님이 공생애를 성공해서 상자를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1층 죽음과 2층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완성하신 상태를 빛,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등불이 등불 되려면 사람들의 협조가 있어야 돼요. 어떤 협조냐 하면, 등불을 감추려 하고,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시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 안 하고 우리끼리만 알기. 왜? 복음은 내가 천국 가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에 남에게 구태여 말할 필요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상자 안에 우리를 넣어 둔 상태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천국이 이뤄집니다. 거기에 대해 인간은 협조를 해야 되는데 어떻게 협조하는가 하면, 주님 말씀을 훼방하고, 그 말씀을 이해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사태가 발생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을 알았으니까 죽으면 천국 갈 것이고 그곳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착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죽음 안에 모든 인간은 가둬져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죽음에서 부활에 참여해야 되는데, 주께서 열어 준 사람만 구원 받게 되어 있어요. 주님이 열어 주실 때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됩니다. 등불은 영원한 비밀은 아니고 현실화 되고 드러나는데 과거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등불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지요.

지금까지의 강의 내용을 요약해 봅시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등불)을 테이블 밑에 두는 셈이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놓아두는데 주께서는 기어이 등불을 환히 밝혀는 높은 곳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십니다. 이 때 제자들이 하는 일은 뭡니까?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오해해서 등불을 감추는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 말씀을 제대로 알게 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짓은 전부 말씀을 감추고 빛을 어둠으로 둔갑시키는 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짓은 용서받을 짓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말썽부리는 일만 하면 됩니다. 이게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믿는 내가 들어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상자 속에 가둬진 우리를 상자를 열고 빼내 준 사람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천국은 인간이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빼내 줄 때 천국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나는 천국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는 깨달음과 함께 천국에 갑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2중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에 죽은 티를 낼 수밖에 없는데, 주의 말씀을 왜곡하는데 모든 말씀을 내 잘되는 쪽으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오늘 하루를 살았는데 누구 덕분에 살았습니까? 주님 덕분에 살았는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주님의 수모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웃고 있습니다.

인간 피라미드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은 국기를 펄럭이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맨 밑에는 자기 위의 모든 사람들을 바치느라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단 말이지요. 우리가 평소에 웃고 가족이 화목하게 잘 먹고 지내는 모든 것은 주님이 밑에서 희생하신 덕분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올려 세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조금이라도 주의 일에 순종하고 협조한 공이 있어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자신은 죽은 자로 여기지 않고 산자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은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어떤 요소가 있는가 하면, 잃어버린 요소가 있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요소가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잃어버린 요소로 가야 주님이 건지시는데, 우리가 잃어버린 요소로 가면 뭘 잊어버리는가 하면, 우리 자아를 잊어버려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에서 멈춥니까? ‘나는 구원 받아야 돼!’하는 그 순간까지는 아직도 내가 살아 있어요. 그런데 진짜 잃어버리면 내가 구원 받아야 된다는 의지도 함께 없어집니다.

제가 수면 내시경 할 때 어떤 식으로 내 속을 들여다보는지 궁금해서 눈을 부릅뜨고 의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어나니까 모든 검사가 끝난 거예요. 왜 내 몸을 검사하는 순간을 놓쳤는지--. 그 순간 자아가 날아가 버렸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데 생각이 없으니까 존재가 날아가 버렸어요.

수면 내시경 할 때 의사가 마취약을 주사했잖아요. 그 마취약이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 피의 능력이 나로 하여금 잃어버리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깨어나서 하는 말이 “누구세요? 나를 완전히 잊고 잠들게 하신 분이 누구세요?” 이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잠자는데 자신이 스스로 최면을 걸지 않았어요.

우리가 천국에 오게 되었는데 내가 기여한 바가 있나요? 일체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제자들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주님의 전제 작업 중 하나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들을 귀가 없는데 내가 들을 귀가 있도록 조치해서 결국은 천국으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말씀을 알아듣게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수모 당하심 때문에 죽은 자가 산자가 된 것입니다.

제가 죽음의 2중 구조를 말씀드렸습니다. 두 개의 죽음이 있기에 두 개의 부활도 있습니다. 이 둘은 다른 위상입니다. 같이 있지만 같은 평지가 아닙니다. 첫째 부활, 둘째 부활은 시간 순서가 아니고 같이 있으면서 다른 층에 있는 거예요. 이것을 위상적 존재, 위상적 지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잃어버렸다가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 안에 위상적 존재가 들어와요. 나는 죽었기에 비로소 산자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7장, 고린도후서 5장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지위가 바로 위상적 존재입니다. 두 개의 사망과 두 개의 부활을 다 알고 있어요.

왜 그런가? 잃었다가 얻은 그 커튼에 우리가 같이 수놓아져 있기 때문에 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면 같이 펄럭이는 거예요. 여기 포도가 있는데 이건 누가 주신 것입니까? 주님이 주신 거지요. 우리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점을 그냥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자아를 따로 상정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은 간단히 요약한다면, ‘천국은 자리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는 누가 마련하는가? 예수님이 먼저 위상적 존재로 오셔서 그것이 본인의 자리인 동시에 본인이 구원할 사람들의 자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현재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 받겠다는 그 자리에서 주께서 새로 만든 자리로 옮겨 갈 수 있는 방법은 인간 쪽에서는 없습니다.

없는데 사람은 육신이기 때문에 시도를 합니다. 나를 예수 안에 집어넣는 시도를 합니다. 그런 시도를 하면서 실행되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를 천국에 집어넣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가?

내가 여기 있다면 내가 나를 상상합니다. 그러면 나는 두 개가 됩니다. 여기 있는 나를 ‘나1’, 생각하는 나를 ‘나2’라고 한다면, ‘나2’가 있기 때문에 ‘나1’이 실수하고 실패해도 실망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반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공부를 못했어요. 성적표를 보니 최하위권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퇴근하고 들어와요. 그러면 아이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집안 청소를 깨끗하게 해 놓았어요.

청소할 때 뭘 생각합니까? 엄마가 와서 깨끗하게 청소된 집을 보면서 기뻐하겠지. 그런데 성적표를 보여주면 ‘그래,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뭐.’ 라고 말하는 것까지 상상을 합니다.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내가 주인공 되는 세상과 함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나2’도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했던 멋진 나를 생각하겠지요.

자, 여기에서 반성을 해야 되는데, 순서가 이렇습니다. 반성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도입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보니까 ‘예수 믿으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하튼 인간들은 예수를 몰라요. 하지만 언어는 있어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 언어는 알잖아요. 언어는 어디서 생긴 겁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어의 세계인데, 이 언어의 세계에서 성경 말씀이 주어졌으니까 성경 말씀대로 예수 믿는 행동을 하면 내가 천국 가 있는 상상을 하게 돼요. 여기에서 질문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요? 그러면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나1’은 항상 있으니까 또 반성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면 됩니다.

신명기에 '말씀대로 살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어요.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뭘 생각합니까? 벌써 머리가 되어 큰 소리 치면서 사는 것을 상상합니다. 현재는 꼬리가 되어 있어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인간은 반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칸트는 인간의 이성중에 동물과는 달리 분석하고 판단하고 반성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실천적 이성’이라고 했는데, 하여튼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계속해서 무엇을 만들어 냅니다. 현재의 나에서 더 괜찮은 ‘나2’를 항상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서 건전한 나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게 틀렸다면 어떻게 하겠느냔 말입니다. 

이렇게 반성하는 것 자체가 죽어야 마땅한 짓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반성 없는 인간은 없는데, 반성하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죽을 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은 누구나 반성하며 더 나은 나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신이 구원 받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숨겨져 있던 죄가 만개를 하는 거예요. 반성을 하든지 회개를 하든지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나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나1’을 없앨 방법이 없는 이상 천국은 무관한 곳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구원 받고자 하는 내가 나의 구원을 훼방합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살다가 지옥가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지옥가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말은 지옥 간 사람만 하는 이야기지 천국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질문 안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인간은 다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없다면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는 어떻게 천국 갔습니까?” 주님 은혜로 갔지요.

이제 주님 십자가의 능력을 아시겠습니까? 십자가의 효과는 우리에게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재 파악을 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주재 파악하라고 이렇게 모이게 하셨잖아요.

주님 말씀은 우리가 반성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지키는 담당자는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이 담당해서 말씀대로 어둠의 상자 안에 있는 우리를 꺼내 주십니다. “얘야, 나와라. 빛이다.” 그런데 이 빛은 내가 생각한 빛이 아니었고, 이 빛을 보고 난 뒤에 할 말은 “제가 어둠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뭘 해도 어둠이고 빛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 일 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나1’부터 출발해요. 그리고 ‘나2’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구원의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뭘 해도 어둠의 상자를 열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한계가 어디인지 몰라요. 한계를 안다면 한계까지 가서 열면 됩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는데, 출생부터 평생 몰래 카메라가 있어서 한 사람의 삶을 전 세계에 생중계를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바다라고 여겼던 것이 바다가 아니라 그림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국 세트장을 열고 처음으로 세트장 밖으로 나갑니다. 이 사람은 결국 자기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그곳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한계를 모릅니다. 그러니 탈출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한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한계는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요. 그 한계는 이미 주님께서 만들어 주셨지요. 십자가가 한계입니다.

이 십자가가 두 번째 죽음입니다. 첫 번째 죽음과 두 번째 죽음이 함께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육신의 죽음이고, 우리가 지옥 불에 가는 것은 두 번째 죽음입니다. 주님은 이 두 번째 죽음을 한계점으로 잡아서 성도에게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자체가 한계고, 부활이 그 한계를 넘어섰다는 증거가 되고. 이미 부활 세계, 성령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안에 갇혀 있습니다. 밖으로 못 나갑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한계점 밖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4장 21-22절을 다시 봅시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기어이 드러내야 될 것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숨은 것처럼 보일 것이고, 기어이 나타날 것은 지금 숨어 있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뜸 들이지 말고 지금 다 드러내시면 될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그러니까 너는 들을 귀가 없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천국은 내 몸이 가는 곳이 아니라 논에 물을 대듯이 그냥 우리에게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물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고 내 힘으로 천국 가려고 반성과 회개와 충성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헛된 일이 주님이 하늘나라 만드는 일에 부정적 협조가 됩니다. 우리의 헛된 짓이 주님 말씀 성취의 일부로 가담이 된단 말이지요.

우리는 이미 죽었는데 마치 안 죽고 살아있기에 빨리 죽음을 극복해서 두 번째 죽음을 피해 두 번째 부활로 가야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 자체가 죽은 자의 티를 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이미 십자가를 넘어선 것입니다. 철학과 복음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철학은 자꾸 한계를 찾아갑니다. 왜? 한계를 찾아야 그것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과학, 천문학도 한계를 찾으려고 달려갑니다. 한계를 찾기 위해 망원경을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한계선을 더 넓혀 놓았어요. 

개미를 잡기 위해서 개미구멍을 팠는데, 파다 보니까 구멍이 더 넓어져서 온 천지가 개미의 세계입니다. 일을 더 크게 만들고 말았어요. 인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일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하늘나라에 협조하는 일로 받아주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이 일을 해서 구원 받겠다고 나오면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요.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나의 자리를 대체해야 됩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십니다.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체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을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두꺼운 이불로 자기 얼굴을 덮으세요. 제 딸이 어릴 때 저랑 장난치면서 이런 놀이를 했어요. 딸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제가 이불을 확 열어젖히면서 제 얼굴을 들이밀면서 ‘까꿍’ 하면 깔깔깔 웃었어요.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불이 열리면서 갑자기 아빠 얼굴이 보이니까 아이가 좋았던 모양이에요. 이처럼 주님이 ‘까꿍’ 작업을 하시는데 우리는 그 때마다 영광돌리고 찬양합시다. 그냥 사세요. 그러면 주님이 ‘까꿍’하고 찾아오시면, 우리는 ‘아, 주님이 말씀대로 나를 사용하고 계시는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 안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요.

24절을 봅시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말해놓고 듣지 말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할 때 네가 이해했다는 식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해하지 말라는 말인가, 이해하라는 말인가?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이해하고 그것을 가위표 하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아, 이런 뜻이구나.’라고 알았다면 네 자신이 알았다는 그것이 ‘내가 또 무식한 소리를 했구나.’라고 평가 받을 것이다.”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는 이 간단한 이야기, 이건 아이들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안다는 그것이 우리가 어둠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는 말씀을 하실 때, ‘아, 나는 빛이구나.’라고 여긴 그것이 바로 어둠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빛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않는다는 것이 신앙인이고, 믿는다는 것이 불신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나는 불신자입니다.’라고 떠들면서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사람 앞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하면 그가 신자입니다.

첫째시간 결론을 맺는다면, ‘너희들은 단독으로 살 수 없고 내 앞에서 비로소 규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 4. 2. 08:36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39.133) 15-04-10 08:07 
광주 강의(2015. 3. 27) 1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위상적 존재는 위아래로 순환구조가 있어요. 이미 죽은 자라고 규정하는 살아있는 세계와 아래가 예수님 몸 안에는 하나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위상이 하나의 혜택을 입는데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의로 인하여 살려내리라.’는 이것이 그리스도 몸 안에서 순환되면서 계속 혜택을 입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을 것이 죄밖에 없고, 나올 것은 의밖에 나오지 못하지요. 이것이 신앙인인데, 신앙인의 특징은 믿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이런 순환이 일어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이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아브람 때는 이스마엘이 생겼고, 아브라함 때는 이삭이 생겼죠. 이것은 본인이 원한 게 아니에요. 순환구조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현상은 ‘행함의 거부당함’입니다. 아브라함의 행함은 거부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특징을 말한다면 ‘아무 행한 것 없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행함이 없이 의롭게 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똑같은 순환구조로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성령을 주시면 똑같은 순환 구조의 제2, 제3의 아브라함이 주님 말씀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계속 내놓게 되어 있어요. ‘나는 나로 인하여 죽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주님의 죽음이 나를 죽게 하고, 주님이 사심으로 내가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짧은 문장이지만 엄청난 내용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설명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냥 말씀대로 살면 구원 받잖아!” 이런 소리를 해요. “당신은 왜 항상 죄만 거론하는가?”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죄를 아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죄밖에 모르는 겁니다. 단독으로 있으면 선악과 따먹은 티를 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으면 죄밖에 모릅니다. 어떤 목사는 설교시간에 저를 비난하면서 “이근호 목사는 죄밖에 몰라.”라고 고함을 치면서 화를 냈답니다. 이 소리 듣고 얼마나 감사한지.

4장 24절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말씀이 있어요. 여기에서 ‘삼가라’는 말은 ‘너희는 불안정 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완전으로 향하라는 뜻이 아니라 불완전함이 완전의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완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 혜택을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직도 덜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는 네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고 아직도 네가 죄인인 것을 몰라.’ 이런 뜻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하나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꾸중하십니다. “그것도 죄야! 넌 아직 멀었어. 아직도 네게 의가 섞여 있어. 안 돼! 그 정도로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야. 더 불완전해야 돼.”

내가 불완전하다는 말은 구조상 아래쪽이 불완전할 때 점점 용서받은 사랑이 많이 나오잖아요. 아래쪽에 군불을 때야 방이 따뜻하지요. 불완전을 때야 완전이 피어올라요. 이렇게 해석하니까 주님 말씀이 어렵지 않지요? 위상적 존재 안에서 순환구조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했어요. 이 말은 하늘에 있는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니라 땅에 있는 사람에게 한 말입니다.

땅에 있어도 순환구조 때문에 구름 위에서 아래를 보고 있습니다. 목이 긴 기린처럼. 아래는 서늘하고 위는 따뜻하고 매일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육신에 속해서 죄를 짓지만 머리되시는 주님이 아랫쪽의 모든 죄를 해결하면서 온수가 아래까지 내려가는 거예요. 내려가면 우리는 감사하다가 또 자아가 등장해서 “역시 나는 믿음이 좋아.”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나는 신앙이 좋다.’에 다시 자아를 가져다 붙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말씀을 주셔서 ‘삼가라’고 하시면, ‘아,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것이 또 확인되는 겁니다. 우리는 말씀의 이불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상적 구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가 하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예요. 남녀가 연애를 할 때 여자는 남자를 멀찍이 띄워놓고 연애를 하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여자의 관심은 남자를 사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다.’는 보람을 위해 행동합니다.

남자는 소유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반면, 여자는 남자가 자기 쪽으로 끌려오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여자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반면 남자는 목적 달성이 중요합니다. 만약 캠핑을 간다면 여자는 출발부터 가는 길 내내 즐겁습니다. 가로수도 보고 꽃도 보면서 웃지요. 그런데 남자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랄뿐 과정을 즐길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상대할 때 멀찍이 놓고 봐요. 주님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어서 나의 가치와 의미를 주님이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을 가까이서 바로 본다면 괴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을 빛으로 못 알아봅니다. 이건 본인이 문제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게 뭔가 하면, ‘네가 문제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데 주님이 괴물로 보인다는 것은 본인이 괴물이기에 그렇게 보입니다. 주님이 외계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소통이 안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화해했다고 하잖아요. 화해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죽어야 마땅함을 놓고 화해하는 겁니다. 인간들끼리의 화해는 서로의 가치와 자존심이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화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신 후에 화해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화해는 우리와 화해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화해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얻으심이죠.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고 다시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될 때 말씀이 완성되는데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위상적 존재로써 장착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거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겁니다.

어항 속에 보면 산소통이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산소방울이 오르락내리락하지요. 여기서의 산소방울 하나하나가 우리들입니다. 항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 되었다가 다시 의인으로 인정받았다가 다시 죄를 짓고 또 용서하시고, 마치 폐수 처리장 같아요. 이런 식으로 우리 몸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발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존재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살면 주께서 죄짓게 하실 겁니다. 어떤 죄냐? 우리가 예상 못한 죄를 짓게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의를 행해야 기뻐하실 것 같은데 우리가 죄를 알 때 도리어 기뻐한다는 것은 시편 51편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잃음과 얻음이 교차되고 반복되는 현장이 천국이고 이스라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천국에도 여우, 소, 사자가 있습니까?” 묻는데, 인간 외에도 다른 피조물이 있을 것인데 이 땅에서처럼 그런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하셨으니까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거예요.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봅시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게 됩니다. ‘없는 자는 빼앗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여기에 뭔가 생략되었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생략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생략이란 말은 앞에 무엇이 빠지고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있다는 것을 시작으로 보지 말고 결과로 보잔 말입니다.

있는 것을 있게 하신 분이 주님이란 사실을 알잔 말이지요. “주여, 있으니 더 주세요.”라고 요청할 권리나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시작을 우리로부터 하면 안 돼요. ‘신앙이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이렇게 해석하고 싶은데, 이렇게 되면 이 신앙은 누구의 신앙입니까? 나의 신앙이 되지요. 그러면 결국 구원의 나의 구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잃음과 얻음의 순환구조 안에 있지 않고 그 바깥에서 자기 혼자 흉내 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첫째 시간에 인간은 ‘자아1’에서 ‘자아2’로 가면서 반성한다고 했지요. 반성은 더 나은 나를 만들려고 하는 모든 행동의 집결이잖아요. 그런데 그 반성 중 하나가 마가복음 4장의 말씀까지 반성 작용에 집어넣습니다. “야, 있는 사람은 더 받는데. 믿음 준비하자.” 이렇게 되면 이건 아니죠. 이런 모습은 어두움입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해서 천국 가겠다는 꼼수에 불과한 겁니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주께서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예상치 못한 일에 이끌려 가는 겁니다. 내가 죄를 알고 싶다고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예상치 못한 가운데 죄를 깨닫게 될 때 이 사람은 주님의 작업 속에 담겨 있는 자입니다. 만약 예상 된 일이라면 그것은 주님과 무관한 내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예상 못하는 것을 어떻게 기다립니까? 예상을 못하기에 기다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26-27절에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게 얼마나 이상한 말입니까? 씨를 뿌리는 사람이 뿌려놓고 잠을 자도 그 씨는 자란다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알지 못한다고 해요. 하늘나라의 특징이 뭔가 하면, 항상 예상 밖의 일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속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주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74세 할머니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 20세로 변했어요. 그런데 자녀들도 엄마를 못 알아봅니다. 왜? 예상 밖이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경을 덮으면 다른 사람과 똑같아요. 몇 년 생입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미 우리는 죽었어요.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납니다. 사도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납니다.

예상 밖의 것이 왔다는 말은 우리 행동과 무관하게 주님이 주도적으로 나를 구원시키신다는 기쁨을 주는 겁니다. 우리는 계획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고 주님은 주님대로 자기 일을 하시는데 결과적으로는 말씀대로 모든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26절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농부고 우리는 뿌려진 씨인데, 우리는 늘 계산하고 계획하며 삽니다. 그런데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을 주께서 일으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이게 주님이 동행하시는 방식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데,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열립니다. 이렇게 북치고 장고치고 주님 혼자 다 하십니다.

주님 혼자 다 하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해서 제게 많이 물어요. “그럼 나는 뭐합니까?”라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세요. 하시면 예상 밖의 다른 노선이 와야 우리가 위상적 존재로써 위, 아래로 움직입니다. 잃고 얻음을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의 버릇은 내가 안 잃고 주님과 손잡고 뭔가 하려고 합니다. 이건 안 됩니다.

외국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이 제일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뭔가 하면, 주님과 자신이 동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교는 밤낮으로 씨 뿌리는 농부가 하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을 방해합니다. 이 소리 듣고 ‘그럼 방해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방해하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주님 나라에 협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 당신 말대로 하면 죄를 더 지으면 더 큰 협조를 하는 것이잖아.”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죄 안 짓습니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 못하는 죄를 알게 하지요. 착한 행실, 바른 설교는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이 다 죄인 것을 예상 밖에 깨닫게 하지요.

만약 설교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미리 알면 설교를 안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설교 안 하면 그 시간은 다른 것을 하겠지요. 그 시간이 바로 설교 안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순환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 타는 보일러입니다. 위에서 태우고 아래에서 또 태우고.

천국은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농부가 다 알아서하는 겁니다.

28절을 다시 봅시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방식으로. 구원은 받았는데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이 알아서 다 하셨어요.

그럼 이것을 언제 아는가? 주의 뜻대로 우리가 죄를 알았을 때 비로소 눈치 채지요. 주의 뜻대로 우리가 죄를 알게 될 때 주님의 용서도 같이 오면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행실 나쁜 여자가 향수를 주님 발에 뿌렸지요. 그러면 그 여자가 향수 생길 때마다 쫓아와서 주님 발에 부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렇게 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히스테리라고 하지요. 이들은 내가 누군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미진한 것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버스를 탔는데 자리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서서 왔는데, 버스 손잡이에 세균이 1억 개 이상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집에 오자말자 손을 씻었는데 돌아서서 혹이 세균이 남아있지 않은가 의심이 되어 한 번 더 씻고 이런 자들이 히스테리 환자입니다. 늘 불안한 거예요. 이것과 반대로 강박증 환자가 있는데, 이들은 하나에 미친 듯이 매달립니다.

30절 봅시다.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제자들이 전혀 못 알아들으니까 주님 혼자 답답해하십니다.

31-32절에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 이해하겠습니까? 이건 앞의 구절보다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겨자씨 안에 하늘나라가 다 들어간다는 자체를 이해 못해요. 하늘나라는 우주보다 커야 됩니다. 왜냐? 우주는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이 우주를 덮치고도 남아요.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안에 들어가야 된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면 겨자씨 안에 다 들어간다면 누구도 같이 빨려 들어가야 됩니까? 겨자씨라는 병에 깔대기를 꼽고 우주와 천사와 모든 것을 깔대기에 붓습니다. 이 때 우리 자신도 포함시켜서 넣습니다.

겨자씨가 관찰 대상이면 우리는 관찰자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겨자씨는 작고 우리는 겨자씨를 볼 수 있다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데, 보고 있는 우리를 겨자씨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한계를 알지 못합니다. 한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성장’을 이해 못합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내 눈이 관찰할 수 있어야 해요. 싹이 1cm 정도 되네. 3일 후에는 2cm쯤 되네. 이런 식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성장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교사를 오래 하다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했던 아이가 5년 후에 만나면 키도 몸도 예전에 비해 훨씬 커져 있지요. “00야, 많이 컸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밖의 대상으로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제가 컸다고요? 아닌데. 원래 나는 이만했어요.” 라고 합니다. 왜냐? 자기는 늘 자기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자기 몸의 성장을 본다는 것은 밖의 특정 기구가 없는 이상은 자기가 못 느껴요.

사람들이 꿈을 꿀 때 현재의 자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가장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그 때를 원하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꿈에서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프로이드는 ‘꿈도 편집한다.’고 했어요. 인간은 항상 편집을 해요. 반칙이지요.

성장이란 하나의 관찰 대상이 있을 때 성립합니다. 그런데 나를 겨자씨 속에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되어 있지 성장을 모릅니다. 우주가 점점 커간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몰라요. 만날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천문학자들은 빛의 거리가 적색 편향을 띠면서 도플러 효과에 의해서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우주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압니다.

천문학자들은 알지만 보통 사람들은 늘 그 별이 그 별입니다. 왜냐? 우리는 그 풍선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풍선 표면의 한 지점에 자신이 있는데 풍선이 부풀어 커져도 자신은 늘 같은 자리에 있기에 커진 것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반갑습니까, 부담됩니까? 부담되지요. 평소에 전화라도 하고 서로 소식이라도 알았으면 덜한데,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오면 왜 찾아왔는지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자주 전화를 해도 그것도 귀찮습니다.

겨자씨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겨자씨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면 겨자씨가 커졌다고 했을 때는 크게 한 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고 겨자씨라는 천국을 크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이 말씀이 이해되는 거예요. 내가 겨자씨를 판단하고 이해하면 선교한다고 설치게 돼요. “주여, 하늘나라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제가 확장하기 위해 떠나겠습니다.”

하늘나라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했을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철거되어야 합니다. 성장, 발전은 다 버려야 돼요.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나라로 많이 퍼져나가고 그 이방인들이 많이 예수님께 돌아올 때 하늘나라가 확장되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이런 생각은 철거해야 됩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관찰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간다면, 크고 작고의 문제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자기 자리에서 선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밥 먹고 살고 있는 자체가 선교라고 믿는 자가 진짜 선교사입니다.

주의 나라는 말씀대로 확장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서서 확장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것은 선교단체가 되지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선교하러 갔습니까? 정답은, 선교하러 갔지요. 어떻게 갔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이 들통 나면서 가게 되었지요. 이게 바로 순환구조입니다. 위, 아래, 위, 아래.

본인은 그 안에 죄인으로 들어갔고 선교는 누가 했습니까? 선교하라고 주신 말씀이 선교했어요. 이것을 ‘언술 주체’라고 하는데, ‘언술 주체’와 ‘언표 주체’가 있어요. ‘언술 주체’란, 말을 풀어내는 주체를 말하고, 그 주체가 나라면 내가 말한 것이 녹음되어 녹취되어 있는 그것을 ‘언표 주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표 주체’는 아무리 분석해도 여기에서 ‘언술 주체’가 안 나온다는 말입니다. “나는 키가 170cm, 몸무게는 70kg이다.” 이 말 속에 정확한 내가 나올 수 없습니다. 170cm, 70kg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아무리 ‘언표 주체’를 모아놓아도 ‘언술 주체’가 안 나온다고 할 때 이 두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진 속의 나는 내가 아니란 말입니다. 유사성이 있지요. 하지만 사진 찍는 순간 이미 시간은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1분 뒤에는 그만큼 늙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밋밋해요. 그러나 직접 사람의 모습을 보면 입체적이고 냄새와 표정이 있고 교감이 되기에 사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생중계로 보는 것과 예배 장소에 참석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나 자신이 표현하는 하늘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철거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33-34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그러면 해석하면 제자들은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듣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너희가 기대하는 하늘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오면 내가 영접하겠다는 그런 하늘나라는 없고, 일방적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생각한 하늘나라는 포기해야 됩니다. 날마다 그것이 삭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뱉은 ‘언술 주체’와 ‘언표 주체’는 안 되고, 예수님이 ‘언술 주체’가 될 경우에는 우리라는 ‘언표 주체’는 이해도 해석도 불가능합니다. 나타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셔야 됩니다. 우리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고 적용시켜 주셔야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포함된 체로 확인될 뿐이지요. ‘아,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내가 납득하고 이해했다’고 하면 안 되고, ‘납득 당했다. 이해 당했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 내가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 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죄를 폭로시킬 때 내가 주와 동행하고 있는 중인 줄 알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무리 살아도 나밖에 모르고 모든 것이 나로 귀결되는 이런 몸을 가졌는데 이런 나를 기어이 천국으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우리가 소상히 알기를 원합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주님의 희생과 수고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4. 9. 09:1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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