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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5 01:50:10 조회 : 1552         
실패 속의 구원 150424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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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39.133) 15-05-07 09:49 
광주 강의(2015. 4. 24) 14-1

마가복음 4장 35-41절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던 중에 큰 광풍이 일어났고, 배가 요동치며 물이 배에 들어와 배가 가라앉게 되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깨웠습니다. 그 때 잠에서 깨신 예수님을 바람을 꾸짖으시니 바람이 그쳐 잠잠하게 되었고, 그 후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런 꾸중을 듣지 않으려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았다면 행동을 잘 못 했다는 뜻이고, 그러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잘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서워한 것에 대해 질책을 하십니다. 그리고 무서워한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때 우리는 제 3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칭찬이 아닌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 처했어도 제자들처럼 행동했을 거예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실패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실패의 현장 속으로 끌어당겨서, 주님으로부터 믿음 없다는 판정을 받은 후에, 구원은 예수님 소관으로 넘어갑니다.

여러분들은 늘 실패를 하고 계시지요? 제자들의 실패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믿음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 자체가 우리의 실패를 유도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 제자들이 믿게 되면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죄고,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믿음 속에 예수님의 행함만 들어가면 안 되고,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함에는 어떤 대상이 있어요. 소유를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을 믿음 없음으로 드러내는 작업이 있습니다. 그 대상에 우리가 뛰어들어 ‘저도 믿음 없어요.’하고 손들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안 믿네. 나 같으면 믿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을 주께서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도외시하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했지요. 그러면 ‘반갑다 친구야!’하면서 얼른 그 실패 현장에 뛰어드세요.

실패 현장이 중요합니다. 왜? 그 실패는 본인이 알아서 실패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조성된 실패의 장이기 때문에 그곳이 구원의 현장입니다. 그런 기회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백화점에서 명품을 싼 값에 파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광고 유심히 잘 봐야 돼요. 언제 할인 판매를 하는지.

우리가 알아서 실패를 반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성을 해도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특징이 뭔가 하면 ‘스스로 반성하면 신께서 귀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스스로 반성하면 그 반성한 존재가 괜찮은 존재, 즉 의인이 됩니다.

그래서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용서를 일흔 번의 일곱 번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에 부합되지 못합니다.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실패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실패는 본인이 만든 실패가 아닌 주님이 의도적으로 실패자로 규정하시기 위해 일으킨 실패여야 합니다. 그 실패 현장이 구원의 현장입니다. 성경이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것은 똑같은 상황이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의 상대자를 간택하십니다. 이 간택된 사람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본의 아니게 참여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세트가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이 세트(혹은 묶음)는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구원 받을 사람에게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루었던 그 방식은 그대로 반복시킵니다.

이것이 일상이 되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제자들이 당했던 책망과 실패를 우리도 공감하면서 주님과 우리가 연결된 자라는 것을 느끼는 감격을 맛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실패 합시다. 믿음에 실패합시다. 이것이 첫 번째 관문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실패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여하간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주께서 다 주십니다. 아이들 키트 놀이하는 것 있지요? 문방구에서 사서 가위로 자르고 본드로 붙여서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로봇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어른들도 이런 일을 합니다. 조립식 가구나 택배로 물건을 구입한 경우 설명서를 보면서 꿰  맞추는 것을 해야 완제품이 됩니다. 그런데 맞추다가 짜증나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다 맞춘 것 같은데 부속이 하나 남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 조립한 것입니다. 제대로 조립하면 남는 것도 없고 설명서에 나온 대로 완전한 모양의 제품이 됩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만나면서 장차 제자들이 구원 받는데 꼭 필요한 부속품들이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도바울의 편지를 설명하면서 ‘그냥 보지 말고 공관복음서를 거쳐 봐야한다’고 말했지요. 왜냐하면 공관복음에는 예수님 곁에 12제자가 있어요. 그게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12제자에게 하신 일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십니다.

첫 번째로 믿음에 실패하세요. 내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가 뭔가 하면, 실패한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40-41절에 보면, 무서워하고 두려워했지요. 두 번째 세팅된 부속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제자들이 주님보시기에 불합격한 이유가  무서워한 요소가 있어요. 왜 무서워했을까요?

배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풍랑이 일었어요. 즉 죽을까봐 무서워한 거예요. 그러면 왜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요?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겠습니다. 아들이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성적이 내려갔어요. 그래서 엄마가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는 것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축구하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지는 것이 더 아파요. 그러나 학교에서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요. 아픈 것보다 창피한 마음 때문에 아파도 참아요. 그런데 엄마한테 매를 맞을 때는 아픈 것 이전에 두려운 거예요. 이게 왜 그런가 하면, 애들은 엄마를 자기가 찾고 있는 사랑 덩어리로 봐요. 손바닥이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아픈 거예요. ‘엄마가 혹시 나를 미워하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죽는 것이 무섭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살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터에 못 나가지요. 사람은 죽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에요. 나를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더 무서워해요. 그리고 외로운 것을 무서워해요. 날 예쁘다고 해줄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워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간이 단순한 생물적인 존재라면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위험을 의미합니다. 버림받음. 천시. 이런 식으로 자기 죽음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치매 걸린 노인들이 제일 겁내는 것은 자기 몰래 자식들이 떠날까 두려워합니다. 어린아이 시절로 퇴행하는 겁니다.

아이들의 자아는 밥을 먹인다고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때 그것이 자아(나)입니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로부터 사랑받는 나에요. 이것을 관계성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에게 “너 누구니?”라고 물으면 “나는 이 집 아들이에요.”라고 답해요. 요즘 딸 바보인 아빠들이 많은데, 딸이 자랑하기를 “우리 아버지 힘세다.” 이걸 친구들에게 자랑해요. 이게 자아상이에요.

‘우리 집은 잘 산다. 너희 집은 못 살지?’ 아이들 다툼이 이런 것입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잣집 아이들의 특징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침착하고 여유롭고 사랑이 많아요.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인격적이에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까칠해요. 그리고 정서적으로 불안해요. 외부가 불안정하니까 안정을 찾지를 못해요. 인간은 원숭이나 코끼리와 달리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요. 사단에게 퍼붓는 하나님의 최고 형벌이 무엇인가 하면, 절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아파도 못 죽어요. 만약 여러분이 딸이 보는 앞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딸이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문을 지속하지 말고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반드시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나의 가치를 상실할까 두렵습니다. 인간은 죽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사단을 죽이지 않습니다. 사단을 살려놓은 채 계속 저주를 퍼부어요. 사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징벌을 사단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것을 그대로 인간에게 흘려버렸어요.

사단이 죽는다는 것으로 인간을 협박, 공갈할 때 인간은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목격해요. 그러면서, 누가 나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라는 마음을 주었는지 그 배후를 몰라요. 물론 성경에는 나오지요.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사단이 그 배후 세력이라고 하지만, 인간들에게 개인적으로 질문하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주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사단과 붙여줘요.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사단과 한 편이 되게 하시고, 사단과 한 편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그 현장에서 주님은 십자가 피로 구원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실컷 무서워하세요. 괜찮습니다. 왜? 그것이 구원 과정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풍랑 이는 바다로 몰고 가시지요? 그러면서 본인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모릅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는가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마치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다고 여기고 예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복음 아는데 왜 자꾸 집안에 어려움이 생깁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복음을 알면 어려움이 안 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것과 같아요. 주님과 동행하는데 왜 풍랑이 일어나지요? 제자들은 그 이유를 지금 몰라요. 제 강의에 의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구원을 위한 과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동행하고 있지만 인간 세계와 주님 세계가 분리되어 있어요. 인간 세계는 사단과 한 편입니다.

사람이 악한 자를 복수하고 싶지만 악한 자가 사형당하면 동정을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예수님 편에 서있지 않고 사단 편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데 주님이 그를 거절하시면 우리는 사단 편에 섭니다. 왜냐? 우리 마음이 사단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한 자를 동정함으로 우리는 순간적으로 천사가 되고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는 방식에 부합되는 것입니까? 틀렸습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고통 속에 놓여 있으면 동정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고통 속에 넣은 주님의 조치가 무색해지지요. 학창시절에 이런 경험을 많이 했지요. 친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아이가 있어요. 그래서 다들 그 친구를 미워했는데, 괴물 같은 선생님이 전근을 오셔서 그 아이를 개 패듯이 때려요.

교무실에 불러서 때리면 되는데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이 보는데서 때리니까, 처음에는 그 친구는 좀 맞아야한다고 생각했던 아이들도 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때리니까 마음이 바뀌어서 그 학생보다 선생님이 더 싫어요. 그때부터 선생님 별명이 ‘김광기’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폭력에 대해서 아이들 모두 분노해요. 친구의 잘, 잘못을 떠나서 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때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갑자기 동정심이 발동해서 친구를 불쌍히 여깁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10개 팀이 있습니다. 그 중 KT는 올해 처음 생긴 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늘 져요. 많은 사람들이 신생 팀이 이기기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투수 장시환이 잘 던지라고 외칩니다. 왜 다른 팀에 비해서 너무 약하니까. 이 순간 우리에게 선악의 기재가 작동합니다.

우리는 왠지 선하고 싶어요. 사기치고 도둑질하는 사람도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과감하게 만원짜리 지폐를 줍니다. 이게 뭔가? “신이여, 내가 비록 사기 치며 살지만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기본 양심은 살아있으니 체포되지 않게 하옵소서.” 끝까지 인간들이 포기 못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

이게 다 사단의 전략이고 우리는 그 전략에 말려든 거예요. 요한계시록을 읽고 주님의 자비를 느끼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해도 너무 심하게 심판해요. 일곱 대접, 일곱 나팔, 일곱 인 이야기 기억납니까? 끔찍한 심판이 펼쳐지지요.

이 장면을 보면 은근히 심판받는 인간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지요. 인간들을 편들고 싶어요. 하나님의 너무 심하게 심판을 하시니까.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고 난리가 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사단을 응원하지 주님을 응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단은 우리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꾸준히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민수기에는 안식일을 어긴 사람을 돌로 치라고 되어 있지요. 미운 사람이면 안식일을 빙자해서 돌로 칠거예요. 그러나 내 딸이 다른 사람에게 돌로 맞는다면 극렬하게 하나님께 시위할 거예요. ‘하나님 너무합니다.’ 라고. 사실 우리는 늘 ‘너무합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제발 내 인생 망치지 마세요. 힘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간섭하지 마시고.’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주님 원망하고, 비바람 불면 날씨가 왜 이런가 하고 불평하고. 여하간 늘 주님께 극렬히 저항하고 싶어요. 그 때마다 주님은 박수를 치십니다. ‘그래, 넌 불평해야 돼.’ 이처럼 신앙에 실패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너는 내 편이 아니고 애초부터 사단의 편이었다.”

주님은 주무시고 우리는 주님 덕분에 ‘고요히 바다를 건너게 하옵소서.’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마음입니다. 무사히 바다를 건너면 실패가 없게 되고, 실패가 없으면 구원을 못 받아요. 사람은 안 죽기를 원하지 죽음 이후에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우리의 신앙으로 통과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워요. 왜 무서운가? 우리의 보호자가 사단이기 때문에. 사단에게 우리는 이걸 배운 적이 없어요. 사단은 늘 죽으면 안 된다는 소리만 했지, 죽어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죽음 속에 놓여 있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사단의 세계가 죽음입니다.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가 생명입니다. 우리가 죽음과 생명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이유는 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숨을 계속 쉬면 살아있고, 숨을 못 쉬면 죽었다고 여깁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제일 큰 오해가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죽음이 뭔지도 몰라요. 이 사람은 죽음 속에 있기 때문에 죽음도 생명도 모르는 거예요. 자기 고통이 끝나면 안식이 오는 줄 착각합니다.

지금 주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요. 예를 들면, 주와 함께 있어도 풍랑은 온다. 아니 특별히 풍랑이 심하게 온다. 왜? 그래야 그들의 믿음 없음이 노출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잘못 된 개념입니다. 죽음 개념이 바로 되면 두려움도 공연히 한 것이 됩니다.

뉴스에 보니, 노인들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에 속아서 돈을 주고 사 먹고 몸에 부작용이 생겨 소란이 일어났어요. 만병통치약은 없어요. 왜 노인들이 이 약을 먹었습니까? 죽음 개념이 잘못 되었기에 더 오래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병통치약을 먹어나 안 먹으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생명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지금 죽음 안에 있습니까, 생명 안에 있습니까? 생명 안에 있잖아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중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생명인데 왜 무서워하느냐’ 이런 안목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만약 우리가 제자들 입장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겠어요?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은 기간이 몇 년입니까? 안 타먹은 기간이 1년이든 100년이든 의미 없어요. 왜냐? 따먹는 순간부터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먹는 순간, 따먹었기에 그 이전 시간은 안 따먹은 것이 아니고 따먹기를 준비한 시간이 돼요.

5만원 지폐가 엘리베이트 안에 떨어져 있습니다. 운 좋게 나 혼자 봤으면 그냥 집어넣으면 되는데, 함께 탄 사람 5명이 같이 발견했을 때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면 그 돈을 즉각 줍지는 않습니다. 0.3초 정도는 참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지요. 그러니까 선악과가 있고 아담이 있다면 아담이 선악과 따먹으려고 눈치 보는 시간이 얼마인가? 1년? 10년? 이건 의미 없어요. 어차피 따먹을 거니까.

따먹는 순간 선악과가 비로소 의미의 기지개를 폅니다. 선악과가 따먹히는 순간 선악과는 생명나무와 함께 먹을 수는 없는 나무로 등장합니다. 선악은 애초부터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선악과를 왜 두었는가? 사단을 심판하기 위한 기준으로 마련 된 거예요.

뱀이 유혹하기 전에 아담이 먼저 따먹었습니까, 뱀이 유혹한 후 따먹었습니까? 뱀의 유혹 후 따먹었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적이 누구입니까? 인간입니까, 사단입니까? 사단이에요. 처음부터 사단을 의식하고 선악과를 심은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제외되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 구원에 대해 집착하지 마세요.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성경책을 내 쪽으로 향하지 말고 주님 쪽으로 돌려놓으라고. 그래서 내가 말씀을 지키려 달려들지 않고, 주님이 이것을 하시려 하는구나. 이렇게 되지요.

첫 번째는 실패합시다.
두 번째로 두렵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사단과 한 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오셨어요. 여자의 후손이 노리는 것은 남자가 아니고 뱀의 후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사단과 한 편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은 “나는 사단 싫어합니다.”라고 하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살려고 하는 짓입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두려워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이유는 살고 싶어서 깨운 거예요. 살고 싶다는 말은 죽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고, 죽는 것이 두렵다는 말은 죽음(사단의 세계) 속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했어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를 믿으면 복권에 당첨된다.” 또는 “네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지 않고.

인간은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는 안 죽어야 된다.’는 것을 사단에게 배웠지만, 인간은 그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만나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끌고 어디론가 가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사단이 너를 달라고 하는데 내가 기도해서 너는 살았다.”

사단은 자기 수하에 있는 인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합니다. 계속 사로잡는 방법이 뭔가 하면, 제자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을 고수하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는 개념으로 자아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천국? 내가 알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곳이잖아.

인간은 나를 살리는 의미 체계를 현실로 봅니다. 이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이 땅에서 너무 장사가 잘 된다면 이민을 갈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내가 하는 장사가 안 될 때 다른 나라로 갈 생각을 합니다. 왜냐? 나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존재밖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누가 인간을 이런 상태(자기 밖에 모르는)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실체에 대해 몰라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 실체를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끌고 사단에게로 가서 “이 사단이 지금까지 너를 장악했기에 네가 이런 꼴로 살았어!”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 받은 자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 말고 큰 아들을 옆에 두지요. 탕자는 가출했다가 집에 되돌아옵니다.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는, “네가 사단인 이유를 알겠어?”하고 돌아온 탕자에게 보냅니다. “동생은 떠났다가 돌아와서 내가 기쁜데 너는 내 기쁨에 왜 동참하지 못하니?”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사단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죽는 것을 그렇게 무서워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어째서 너희들은 네 존재 의미밖에 모르는가?”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10분 쉽시다.

(2015. 5. 6. 09:25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39.13) 15-05-19 08:05 
광주 강의(2015. 4. 24) 14-2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잠시 정리해 봅시다. 첫째는 믿음에 실패하세요. 둘째, 우리는 두려워하는 존재이기에 영적 존재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큰 세력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우리는 그 쪽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 그쪽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그 배후 세력에게 데려갑니다. 데려가면서 주님은 의도적으로 주무시지요.

불가능성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나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지경에 오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바깥세계에 기대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여름수련회는 사사기를 살펴볼 계획인데, 여기도 보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도 안 될 경우에 여호와를 찾지요.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는데 안 되기에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님이 안 계실 때 자신들은 할 도리를 다 했는데 안 되었기에 자신의 존재의미는 무너졌지요.

보통 사람들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에게도 돌아오는 폐쇄된 현실에서 살아요.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개입하시면 나의 현실에 구멍이 뚫리고, 나는 그 구멍 바깥으로 살짝 얼굴을 내밀면서,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외칩니다. 평소에는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가능성을 확인한 후에는 주님을 찾지요.

제자들이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해도 풍랑이 잠잠하지 않고 계속 배에 물이 차니까 어쩔 수 없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어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세계바깥에 주님이 계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면 자기들의 세계가 어디로 확장되었습니까? 나의 세계에 처음에는 주님이 없었는데 나중에는 주님도 같이 일하는 세계로 확장이 되지요. 그러면 이것은 주님의 세계입니까, 나의 세계입니까? 이게 나의 세계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보고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겁니다. 얼마나 빡세게 믿느냐를 보는 게 아니에요. ‘너는 왜 너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하느냐?’하는 겁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만 해소되면 다시 주님을 떠납니다. 주님은 이 상황을 ‘너를 위한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주님께 의미를 두는 그런 안목으로 왜 보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어요.

주님이 “내가 여기 있잖아.”라고 하시고,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데 왜 풍랑이 일어납니까?”라고 해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거예요. 들을 귀가 없고, 볼 눈이 없어요. 주님이 원하시는 눈과 귀는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눈과 귀입니다.

인간들의 눈과 귀는 오직 자신을 위해서 보고 듣는 감각들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 총집합되는 것들입니다. 풍랑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두려워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믿음이 있었다면 풍랑을 보면서 이런 대화를 나눠야 돼요. “마귀가 풍랑을 일으켜 주님을 흔들고 있네. 우리 주님은 어떻게 대항하시는지 한 번 보자.”하면서 자신들은 그 싸움에서 뒤로 물러나 있어야 돼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현실입니다. 그러면 그 싸움에서 우리는 빠져 있어야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물을 뒤집어쓰긴 하겠지만 그건 큰 일이 아니고 주님이 이기느냐, 사단이 이기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그렇게 보는 사람이 없어요.

이런 사람은 언제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시면 성령 받은 자는 이런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은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스스로 할 도리를 다해도 안 되니까 주님을 깨워 도와달라고 요청했지요. 사단적인 요소를 그대로 노출했습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난 후 먼저 바람을 꾸짖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바람을 설명한다면, 공기의 기압 차이에서 발생하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시각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 바라보는 시각이고, 이것은 배후에 예수님을 극렬히 거부하는 사단이 심어준 생각입니다.

예수님 시각으로 바람을 생각해 보면, 바람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가 만드신 것이니까요.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은 이런 안목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과학자라고 해서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자들 중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과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과학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주님, 제가 지금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이 모두가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겠지요. 그러면 옆에 있는 다른 과학자가 “그러면 자동차 안 만들면 되지 왜 만들어서 죄라고 하냐?”라고 하겠지요. 신앙인의 답변은 이것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죄를 짓게 하셨다.” 자동차를 새롭게 만드는 죄를 지어야 죄 짓는 가운데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교사는 교사 일을 하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 죄짓는 현장에서 구원이 이뤄집니다. 그 장소가 주님이 함께하신 갈릴리 바다입니다. 그 장소에서 우리는 내 중심으로 주님을 잡아당기는 죄를 범하고 있을 겁니다. 출근하면서 “오늘도 학교에서 별 탈 없이 잘 지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주님은 “그래, 내 언약을 네 삶 속에서 이룰게.”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것입니다.

“주님, 이것 안 됩니다. 이건 정말 나쁜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셔서 그 모든 현장을 주님 중심으로 끌고 가십니다. ‘풍랑이 일었다. 물이 배에 들어왔다. 배가 가라앉는다. 죽을 뻔했다.’ 이 모든 일을 내가 살려고 하는 관점으로 보지 말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리기 위한 조치로 보면 안 될까요?

우리는 사단의 세계에 갇혀 있으니까 동그라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여기에 침투하셔서 A지금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A지점은 우리에게 낯선 곳이고 다른 지점은 익숙한 곳이지요. 12제자는 지금 낯선 지점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때 첫 번째는 두려워한다. 두 번째는 죽게 되었다. 세 번째는 빨리 예수님을 깨워 문제를 해결하자. 이런 식으로 나오겠지요.

두 번째, 세 번째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나에게 익숙한 종교행위에 속한 거예요.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 왜? 날 지켜주시는 분이니까. 이것이 종교 행위에 속한 거예요. 설마 이것까지 죄가 될까? 예, 이것까지 죄입니다. 이것까지 죄라면 죄 아닌 것이 없겠네? 바로 그것이 정답입니다.

우리에게는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쁜 짓을 했나요? 나쁜 짓은 한 것이 아니고, 나쁜(죽음) 세계에 태어났어요. 왜 우리는 죽음의 세계에 태어났지요? 그건 아담에게 물어봐야 돼요.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만남을 위해서. 그러니 아담의 자손들은 기존 세계 안,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식들은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몰라요. 기껏 생각하는 것이 ‘죽고 나면 영생 얻겠지’ 라고 하는데, 그 영생은 죽음입니다.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모르는 이유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인간은 영적 존재잖아!’ 영적이라는 것은 자기가 어려울 때 신을 찾는데 그 신이 바로 여호와 이름의 사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때 누구 좋으라고 부릅니까? 제자들이 잠자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과 같은 취지입니다. 잠자는 예수님을 왜 깨웠습니까? 살려달라고 깨운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단의 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 믿으면 평생가도 구원 못 받습니다. 왜냐? 그것이 사단의 짓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봤어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보디가드로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시니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라고 했지요. 이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 속에서 사단의 요소를 계속 뽑아내시는 겁니다. 왜냐? 주님은 사단만 상대하면 됩니다. 우리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시녀에 불과하기에 사단이 시키는 대로 나만 위해 삽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살면 돼요.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사람이 뭔가 모라자서 채우려 할 때는 옛날 내 위주로 살던 것으로 채우지 낯선 것으로 채우지는 않습니다. 낯선 것으로 채우면 무늬가 안 맞아서 새롭게 도배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살다가 가끔 도배하는 이유가 뭡니까? 새로운 냄새를 맡고 싶어서 합니다. 찌든 냄새가 아닌 새로운 향기를 맛보려고 하는 거예요.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서 새롭게 도배를 해요.

기분을 전환한다는 것은 그 안에 내가 있어서 내 기분을 전환하려는 거예요. 우리는 이글루 안의 에스키모 같은 존재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 팀, 연예인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글루처럼 나를 감싸고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감사하는 그 바깥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니 내가 감사했던 그 하나님은 사단입니다.

최근 미국에 계시는 어떤 목사님이 삼위일체를 부정했다가 주변 목사들로부터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께 메일을 보내 답했어요. ‘삼위일체는 철학입니다. 다른 목사들이 이단이라고 해도 그것에 기죽지 마세요.’라고.

삼위일체를 보면 하나님이 3위로 존재한다고 해요. 이 존재 개념이 엉터리에요. 존재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고, 이것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누구 안에 갇혀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어요. 죄 안에 갇혀 있는 거지요. 그러니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의미 없지요.

그런데 삼위일체는 존재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3위로 존재함을 믿으면 정통이고 이단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주장 자체가 이단입니다. 두 번째 존재 개념은 탈존인데, 이것은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존재함으로 패쇄 된 의미를 갖췄을 때 이것을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존재가 있어요. 이 존재에 의하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고, 진짜 존재는 우리를 존재케 하신 분만 존재합니다.

하이데거는 첫째 개념을 ‘존재자’라고 했고, 둘째 개념을 ‘존재’라고 해서 분리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존재의 모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모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여기 귤이 있네. 딸기도 있네. 나도 있다.” 여기 있다는 것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서 그것을 하나님께 갔다 붙이면 그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서술에 의해서 조작된 주체가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존재 개념으로 하늘에 까지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살았다고 해야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란 말이 맞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분명히 죽었어요.

이 말은, 이 땅에서 통용되는 죽었다, 살았다는 말을 그대로 하늘나라까지 끌고 갈 수가 없어요. 누가 막고 있어요.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우리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 중간을 가로막고 있단 말이지요. 가로막고 있으면서 사단이 더 못된 짓을 하고 있어요.

사단이 인간들에게 ‘네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도 존재한다’고 가르친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하나님 존재를 쉽게 받아들였어요. ‘내가 여기 있지. 내가 있듯이 주님도 계시겠네. 그러면 내가 주님이 계신 것을 믿으니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네.’ 이런 식이 됩니다.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책에 보면 나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용어로 삼위일체를 만들어놓고 그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정통 신앙이고 이것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킨 것이 교회 2,000년 역사입니다.

삼위일체는 이처럼 존재에도 문제가 있지만, ‘위’라는 개념도 문제입니다. ‘위’가 뭡니까? 아무도 답을 못합니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재가 아닌 방식으로 계시는 것’을 ‘위’라고 한답니다. 이 말은 “이발소가 어디 있습니까?” 물으면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라고 하고, “미장원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면, “이발소 옆에 있습니다.”라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구사하는 모든 단어 자체가 어디에서 통용되는 겁니까? 인간에게 적용되거든요. 인간은 뭡니까? 인간은 인간 본인만이 우수함을 변명하는 의미 체계 안에서만 소통하고 있습니다. 내가 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오 목사님께 “반갑습니다.”라고 악수를 청하면 오 목사님은 놀라겠지요. ‘갑자기 이 목사님이 이상해졌네. 혹시 치매가 온 것은 아닌가? 예전에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이 때 오 목사님은 뭘 생각하겠습니까? 컴퓨터를 켜서 악수가 무슨 의미인지를 찾아봅니다. ‘친밀한 사이에 손을 잡고 정을 나누는 것이다.’ 아 그렇다면 악수를 해도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하던 짓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내가 악수를 청할 때의 뜻이 오 목사님에게는 이미 다른 뜻으로 변경 되었지요. 그 다른 뜻이 뭡니까? 통념화 된 뜻에서 하나를 차용한 것이지요. 갇힌 세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언어가 있지요. 언어 안에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언어를 사용할 때는 보통 사람들이 이 말을 할 때는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지를 경유해서 ‘예, 아니오’를 답하는 거예요.

하지만 언어는 결국 상대를 속이는 기술의 일종이에요. 상대가 나를 만나 ‘반갑습니다.’라고 할 때 그 말이 상투적인 표현인지 정말로 반가워서 하는 소리인지 우리는 몰라요. 알 필요도 없어요. 왜냐? 나는 나만의 절대성을 가지고 있기에 반갑다고 한 사람에게 욕만 안 먹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의 말에 친절과 예의를 갖추면 되지 그의 진심을 알 필요는 없어요.

용어는 통용화 된 용어를 빌려오되 그 용어를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나의 뜻과 상대의 뜻은 따로 존재해요. 나는 내 세계가 따로 있습니다. 그럼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다 그래요. 부부가 같이 잠을 자도 동상이몽이잖아요. 한 집에 같이 있어도 각자 다릅니다. 그런데 왜 같이 있습니까? 아내는 아내의 명예를 위해서 헤어지면 안 되고, 남편은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 헤어지면 안 돼요.

그런데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그때는 주저하게 되지요. 3일 동안 말미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자 쪽에서 재산의 반을 달라고 요구하고, 남자는 내 자산은 다 유산으로 받은 것인데 당신이 한 것이 뭐가 있는데 반을 달라고 해? 이렇게 나오지요. 이게 [압구정 백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인간이 하는 것은 좋은 것, 괜찮은 것 차곡차곡 모아서 예쁜 나의 세계를 꾸미는 겁니다. 그런데 죽으면 아깝다고 여깁니다. 죽으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에 하는 짓들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꾸면 세계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주여, 도와주소서!” 빌고. “주여, 주무십니까?” 깨우자. 주님 깨운다고 철야기도하고 난리 치고.

첫 번째로 실패하자고 이야기했고, 두 번째는 두려워하는 이유가 이미 죽음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세 번째로 죽음을 피하는 방법이 잠자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사단이 어떤 존재를 알게 하는 접촉성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 가지를 했지요. 첫째는 믿음에 실패했고, 두 번째는 두려워했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깨웠지요. 깨우는 짓이 사단의 속성에 가장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꾸짖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꾸짖습니까? 바다와 바람을 꾸짖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고 예수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왜 갑자기 예수님이 두려운 것입니까? 아내가 남편과 함께 잠을 자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남편이 두려운 적이 있습니까? 남자들은 신혼 초에 아내가 두려운 적이 있어요. 화장 안 한 민낯을 보았다거나 하는 경우 두려울 수 있지만.

낯설지요. 갇혀 있는 세계는 익숙한 세계입니다. 익숙한 세계에 구멍을 뚫고 나왔지요. 왔는데 온 과정부터가 낯설어요. 예수님의 자리는 낯선 자리. 낯선 자리는 그냥 비어있는 자리가 아니고 여기에 12제자도 함께 있어요. 12제자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익숙한 세계의 일부로 소속되어 있지요. 여기에 주님의 주되심의 사건을 유발시켰습니다.

주님의 사건은 여자가 후손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일.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면 상대는 누구입니까? 뱀의 후손. 여기에서 사단을 꾸짖는 일이 벌어져요. 그러면 제자들은 현장에 같이 있으면서 예수님이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이 익숙한 분이었어요.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 이 모든 것을 제자들은 보았고 그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어요. 그래서 여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았고, 예수님은 익숙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익숙한 메시아가 사단이 심어준 가짜 메시아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메시아는 사단이 심어준 것입니다.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삼위일체는 사단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어요. 왜냐? 여호와를 믿기 때문에. 이 여호와는 나의 보디가드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영적 세계를 이야기해도 인간들이 말하는 것은 나의 세계의 확장일 뿐 그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에 갇혀있다는 말은 율법, 죽음, 심판, 저주에 갇혀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갇혀있다는 것은 빠져나온 자의 안목에서 봐야 갇혀있다는 의미를 제대로 밝힐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아무리 천국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내가 상상한 세계의 확장이지 빠져나간 세계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풍선 안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풍선에서 빠져나가지는 못하고 풍선의 벽면을 밀어댈 뿐입니다. 나만 생각하다가 일이 잘 안 되니까 영적 세계까지 나에게 포함을 시키지요. 구색을 맞추듯이.

평일에는 직장가고, 공휴일에는 놀러 가고, 일요일에는 교회 가는 거예요. 교회 간다고 직장을 버리지는 않지요. 이렇게 구색을 맞추는 거예요. 나의 범위가 소위 말하는 영적 범위까지 확장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영적 세계가 사단의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예수, 성령, 교회, 천국이 다 들어 있어요. 그리니 예수 믿고, 성령 믿고, 교회 믿는 사단을 믿고 있는 거예요. 누가? 모두 다.

그러나 특별히 선택 된 사람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주님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소급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12제자는 ‘내가 택하여 세웠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것을 가락교회 강의에서 저는 페이프(paper)를 줬다고 했고, 이 페이프가 12제자입니다. 이 페이프는 새까맣게 됩니다.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 죄 위에다 예수님 피를 발라 용서를 해요. 그러면 이 페이프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페이프가 되어 천국에 반드시 합류하게 되어 있어요.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할 때 수행원이 따라 가지요. 이 수행원은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증거하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선택 받았다는 말은 주님이 가신 나라까지 수행원으로 계속 따라가야 돼요. 정상 회담 할 때 대통령 옆에 앉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통역관입니다.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상대자가 있어요. 주님께 까불다가 얻어맞은 자들이 주님의 주되심을 더욱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반드시 실패해야 됩니다. 우리 구원에 실패해야 되고, 그 실패의 내용이 점점 구체화 됩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들이 일어나야 돼요.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평소에 하던 행동대로 하나님께 빌고 도움을 요청하는 마귀 짓을 해야 되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된다’(딤전4:5)고 성경에 나와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을 보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마귀 짓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십니다(마19:26). 말씀 앞에 “주여, 저는 도저히 할 수 없네요.” 할 때, 주님은 “내가 했다. 그래서 너는 구원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과 점점 멀어지는 이유는, 내 행동에 모든 것이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점점 바보가 돼요. 내가 한 것만 남아있고 주님이 하신 것은 보이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이 전체가 나의 존재 가치를 놓여주는 사단의 세계로 돌변하고 말지요. 물론 누구나 그렇게 합니다만 그 때 주님은 이 전체를 바꿔버립니다.

인생이 하나의 직선이라면, A지점에서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주님은 A지점에서 지은 죄를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B지점에서 또 죄를 지었어요. 그러면 A에서 B지점까지의 죄를 용서해 줄까요, 아니면 전체를 다 용서해 줄까요? 전체를 용서주십니다. 왜냐하면 A가 B지점에 오면, 이 의로운 일이 반드시 죄로 바뀌어져야 돼요.

죄가 없는 곳에서는 주님이 일을 안 합니다. 주님은 죄를 만들어내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의 방법이 아주 특이해요.

자,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면 C지점에 가게 되면 A, B가 다 죄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나중에 죽을 때가 되면 이 전체가 용서와 사랑과 긍휼의 한평생이 됩니다. 그러면 어느 한 순간도 주께 영광이 안 되는 순간은 없어요. 죄를 짓는 시점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가렸고 죄를 짓지 않은 시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오해했는데 나중에 B지점에 오니까 A지점 올 때까지의 전부가 죄가 되고, C지점에 오니까 그 이전의 모두가 죄가 되고, 죽을 때가 되면 인생 전체가 죄였고, 전체가 다 주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인생을 볼 때 기관차 앞에서 보지 말고 제일 마지막 칸에서 지나온 길을 회고하면서 보세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주님의 열차에 실려서 계속 미래로 가는데 그 길이 사단의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이왕 빠져나가는 것 구경 한 번 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세상의 죄란 죄는 다 구경하고 빠져나가면 어떻겠어요?

그리고 그 죄의 극단, 가장 사단에 가까운 죄가 뭔가 하면, 자기 의를 세우려고 성경을 이용하는 죄, 이것이 바로 로마서 10장에 나오지요. 자기 의를 위해 성경을 보기 때문에 힘써 주의 일을 복종치 아니합니다. 이 모습은 극렬하게 십자가를 거부하는 몸짓입니다. 왜? 자기가 잘났거든요. 그리고 죄인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흔히 그런 경우가 많은데 똑같은 짓을 해도 내 자식은 용서하고 싶고, 남의 자식은 용서할 마음이 없어요. 왜 그렇지요? 유치원 운동회를 하면서 달리기를 하는데 남의 자식이 앞서다가 넘어지고 내 아이가 앞서가면 넘어진 아이를 안타까워합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여기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유를 몰라요. 이게 정답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가운데 행동은 남겨요.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면서 여하간 행동은 남겨요. 그러니까 그냥 주께 맡기자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님이 내 행동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고 열심히 하는데, 주님은 우리의 방법을 피해 가십니다. 절대로 우리의 방식대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가 무지한 자임을 폭로하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계획한 일에 주님이 동조하시면 그 순간 우리는 아는 자가 됩니다. 유대인들이 성경 연구한 것이 뭡니까? 어떤 정보를 소유함으로 그 정보로 구원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알아낸 정보(십자가, 예수, 천국 등)는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울 뿐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안 십자가가 죄가 되지요? 모르지요? 모르면 손을 놓으면 돼요. 내가 어떤 정보를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주님 능력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면 그것을 소급해서 아는 거예요. 안다는 것이 죄로 변했다고 다시 돌아서게 되면 그것이 마땅히 죄로 변해야 될 것이라고 알게 되지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안다고 까불다가 그것도 죄가 되고 결국 마지막에는 전부 죄였음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은 나의 의미 구조가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뱀과 싸우는 투쟁의 현장이고, 주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지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뛰어드세요. 우리 역시 제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러면 주께서 마가복음 4장부터 마지막 십자가까지 다 이루십니다. 그리고 주가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시면 ‘제자들이 바로 나다. 나도 똑같은 입장이구나. 나도 실패할 수밖에 없지. 두려워 떨고’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 보고 돌아서면 또 두려워 떨게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서도 “주여, 믿음 없는 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런 마음을 주십니다. “너는 너밖에 모른다.” 예 맞습니다. “그러니 너는 내가 구원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주님 손아귀에 있고 주께서 다 이루셔서 걱정할 것이 없는데 우리는 사서 고생하는 힘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를 알 수 있기에 주께서 내린 조치인 것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5. 15. 08:3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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