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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3 02:24:44 조회 : 1945         
귀신의 질서 150522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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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40.185) 15-06-05 15:48 
광주 강의(2015. 5. 22) 15-1

누가복음 5장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이렇게 시작되지요.

먼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귀신이 떠나간 상태가 어떻겠습니까? 1)덜 피곤하다. 2)허전하다. 몇 번이겠습니까? 허전하겠지요. 왜? 친하게 지냈으니까. 담배를 끊을 때도 허전하겠지요. 귀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단짝이 되어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인간을 둘로 분리시킨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이 등장해서 아무 설명 없이 사람들에게 ‘당신을 둘로 쪼갠다’고 하면 신체를 둘로 쪼개는 줄 알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신체는 그냥 두고 정신 층을 둘로 쪼갭니다.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 층은 처음부터 단일 층이 아니고 두 개의 층으로 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 오실 때 광야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에 세움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축소판으로 광야를 설정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했어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허송세월을 보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달리 언약으로 규정된 세상입니다.

광야가 세상의 축소판인 이유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에 거할 때 하나님의 언약이 등장했어요. 그러니 광야는 약속의 무대라고 할 수 있어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적들이 패배했지요. 아말렉이 물러갈 때 이스라엘이 계명을 잘 지켜 그들이 물러간 것입니까? 계명 지켜서 물러간 게 아닙니다. 지팡이 때문이었지요.

지팡이가 대표 계명입니다. 대표 계명을 중계인을 세워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되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을 보여주는 장치가 광야가 됩니다. 광야가 있어야 인간들이 원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광야의 특징은 황량함이죠.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언약은 원망의 절차가 있어야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희한한 표징들이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원래 창조 때 없는 데서 말씀으로 있게 했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약을 안다는 것은 창조 이전 상태로 그들이 초대받은 것입니다. 창조 이전 상태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피조물은 없고 언약만 있지요. 왜? 언약대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언약만 있고 아무것도 없을 때 그들이 언약이 있던 자리에 가게 되면 이건 창조 이전의 상태에 참여한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여기에서 출발한다면 그들은 언약 백성이 됩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요소는 창조했던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창조 이전 없었던 것에서 출발한 요소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자이길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언약)으로 살 것이라”고. 떡으로 사는 방식은 이미 인간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인간의 안목과 인간의 세상살이 수완으로 농사짓고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광야가 세상의 축소판이 되려면 그곳에 등장한 예수님도 창조 이전 언약으로 계신 분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여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현실화 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창조가 됩니다. 그러니까 신약 때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앞세워 새로운 창조에 나서시는 겁니다. 새로운 창조에 나서시면 광야가 세상의 축소판이니까 그동안 세상을 세상 되게 유지했던 배후의 인물(사단)이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같이 등장하지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사단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는 순간 사단도 같이 등장합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시장에서 콩나물을 사고, 시금치를 살 때는  전혀 사단을 의식 못합니다. 그런데 콩나물 파는 아줌마가 “혹시 교회 다니는 분입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 때는 이단인 것이 들통 나지요. 나는 콩나물 사러 갔는데 주님은 그 만남을 복음 전파의 현장으로 만드신 겁니다.

전도할 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해야 전도지 상대가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전도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상대에게 소개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는데 상대가 믿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주께서 일을 벌이신 겁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처럼.

이것을 제가 ‘소외를 통한 참여’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나를 소외시키는 방법으로 주님은 나를 복음에 참여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하는 일이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는 일이 아니고 창조 이전 언약의 내용대로 내가 언약의 사람으로 새 창조에 참여된 자임을 알게 되지요. 물론 그 과장에서 우리는 핍박을 받지만 어쨌든 우리는 창조 이전 언약에 참여된 자로써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지요. 종이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달란트가 종을 예속시켜 버립니다. 달란트는 주님이 주셨기에 주님께 속하고, 주인은 멀리 타국에 갔지만 그 주인의 징후로 남아있는 것이 달란트이기에 우리는 주인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주인이 없다고 제 마음대로 달란트를 처리해 버리지요. 능력이 없다 할지라도 주인이 타국에 가지 않고 현장에 있었다면 “주인님, 저는 능력이 없어요. 그냥 은행에 저축해서 이자나 받을게요.” 이 정도로는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것도 안 했고 달란트를 흙에 묻었지요. 주인이 없다고.

주인이 없고 나만 있으면 그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왜 사는지?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이 문제가 밝혀지지 않아요. 꼭 청소년들처럼. 이들은 자기만 있어요.

주님은 귀신들린 자와 만남으로 ‘왜 인간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무엇 하는 존재인가?’를 보여주십니다. 내가 왜 있는가? 무엇 때문에 있는가? 누구를 위해 있는가? 이런 것은 전혀 생각 못할 때 그는 귀신 들린 자입니다.

귀신과 만난 예수님이 현장에서 하신 일은 이 세상 창조 이전의 목적과 이유가 연결된 체 언약의 성취자로 활동하십니다. 그럼 귀신 들린 자가 거라사에 있는 이 사람 뿐이겠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귀신 들린 자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

인간은 자기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 몰라요. 왜냐? 궁극적 원천지와 선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마치 어릴 때 타국에 양자로 팔려가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너희 아버지 뭐하는 분이냐?”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현대인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귀신 들린 자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두 층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내 속에 있는 귀신이 추방되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을 때의 느낌은 허전합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가볍습니다. 존재의 가벼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 질문에 아이들이 난처해합니다. 분명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솔직히 말 못하는 것은 내가 아빠를 좋아한다고 하면 나 몰래 엄마를 제거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에요. 내가 엄마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말을 잘못해서 경찰이 와서 아빠를 잡아가면 어쩌나 불안해서 함부로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 현실 사회가 없애버린다는 식으로 아이들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모래로 두꺼비 집을 만들어 놓고 나중에는 심술을 부리면서 자기가 만든 두꺼비 집을 발로 밟아 부셔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9. 11 테러로 미국의 110층 빌딩이 무너졌어요.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내가 난폭한 짓을 해서 높은 빌딩이 무너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 순진한 생각인데 옳은 마음은 아닙니다. 옳아야 천국 가지 순진하다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것은 아이들에게는 참 난처한 질문인데, 이제 어른들에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내가 좋습니까, 나만 아는 내가 좋습니까?” 이 둘을 주님이 분리시키고, 나만 아는 나를 아담의 죄와 연결된 상태로 보십니다. 아담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요.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왜냐? 과거의 것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내 안의 내가 좋았는데 10년이 지나도 내 안의 내가 좋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은 흘러가지 않았어요. 그냥 내 감각이에요. 내 속에 시간 의식이 10년이 흘렀다고 느껴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바뀐 것이 없어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주님은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공격합니다.

이것을 공격하기 전에 두 층으로 분리시켜 진짜 중요시 하는 내 안의 나에 십자가로 침범해 옵니다. 그러면 누가 상처를 받습니까? 내가 귀하게 여기는 내 자존심이 상처를 받지요. 상처 받으면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흔적이 됩니다. 상처가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이것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요. 예수님이 안 찾아오시면 상처가 아닌데 찾아오셨지요. 그러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잊을 수가 없지요. 잊을 수 없는 그곳이 바로 십자가가 늘 작용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 질문에 세 번씩이나 고사하잖아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시네요. 뻔히 아시면서 왜 자꾸 묻습니까?”

성도는 이질적인 것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신앙생활은 뭔가? 낯선 것을 찾는 것입니다. 뭔가 특이한 것을 찾으세요. 그것이 내 속에 있는 묵시입니다. 그런데 그 낯선 것은 남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계속 자기를 포장해 왔다는 거죠. 포장했다는 것은 진짜는 따로 숨겨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내 가치, 내 자존심, 내 존재의 의미는 따로 챙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십자가마을에서 봉사도 많이 하는 분인데 가끔 대화를 나눠보면 아직도 자기 자존심을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자기 자존심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은 자기 방어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 평소 자기 방어 자체가 주님을 힘들게 했던 트라우마가 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려는 것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내가 또 나를 방어하면 주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나를 의롭게 하신 것에 주목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순간 주께서 치워버린 일곱 귀신을 다시 불러들이는 꼴이 됩니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 받습니까?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사수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5년 전에 예수 믿은 것을 사수하려면 ‘나’가 두 개 있어야 합니다. 믿었던 ‘나’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보초서는 ‘나’가 또 있어야 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런 자를 향해 주님은 십자가로 그들의 지키려는 자아를 찌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10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구절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먼저 언급하지요. 그러면 우리의 겉 사람은 누구를 의식합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의식하지요. 우리의 내부에 또 다른 나가 있는데 그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네가 장애자가 되더라도 나머지 신체로 지옥 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와 관련 됩니까? 남에게 보여주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에 내가 따로 챙겨놓은 그것으로 인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됩니다. 그 결정을 내가 하기 전에 먼저 침입해 오셨잖아요. 침노하는 자가 하늘나라를 빼앗으니까. 주님이 내 허락도 없이 십자가 영으로 나에게 쳐들어오셔서 나의 의미를 주님 일에 참여된 자의 의미로 바꿉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자랑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자랑해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 자랑하는 나를 자랑하려고 내 내부에 들어와 보니까 주님께서 “어디 곁눈질 해. 정신 차려. 이미 너는 내가 접수했어. 이제 너의 것은 더 이상 없어.” 이럴 때 바울은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는 겁니다.

귀신들린 자는 존재의 이유나 천지 창조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뭔가를 행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 같아요. 그냥 행해요. 동대구터미널에서 광주행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중학교 여학생 7명이 백지영의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요. 그들은 왜 노래를 부르는지도 몰라요. 그냥 기분에 따라 흥해 취해 노래를 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40, 50, 60이 되어도 이 아이들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냥 뭘 할 뿐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 앞에 서면 그 안에 귀신이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어떤 특정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귀신들린 자에게 꾸중하면 “잘못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맞으면 아프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한 거예요. 아담이 범죄한 후 인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내부에 나 외에 다른 세력이 장악하고 있기에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잘난 척 할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베드로야, 네 눈에는 안 보이지? 사단이 너를 삼키려고 내게 요청했는데 내가 거절했다. 사단이 너를 삼키기 전에 내가 기도해서 너를 기어이 구원해 낸다.”고 했지요. 그리고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도 했고.

그러면, 닭 울기 전의 베드로와 닭 울고 난 뒤의 베드로가 다른 사람입니까? 동일 인물이죠. 그런데 동일 인물 되게 한 것이 베드로의 능력입니까, 주님의 능력입니까? 당연히 주님 능력이죠. 그것을 묻는 거예요. 성도는 내가 동일 인물로 유지하는 것이 내 힘이 아니고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동일 인물을 죽은데서 살려내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나오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지요. 그러면 나는 이미 죽었잖아요. 죽은 자가 걸어 나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척 한 것이지요. 제가 틀린 소리 했습니까? 죽은 자의 뺨을 때렸는데 아프다고 반응한다면 그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나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그냥 갑시다.”라고 하는데 이건 아닙니다. 이미 죽었고, 그 다음에는 모든 권한이 주의 이름으로 넘어가 버렸어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살아요. 먼 산에 부엉이가 있지요? 그 부엉이의 잠을 누가 재웁니까? 주님이 재우고, 주님이 깨웁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16-30)”고 하셨지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 은혜로 사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에서는 ‘너희 생명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했어요. 그냥 내가 살면 안 돼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함을 보증해 주는 분이 따로 있어야 해요. 그분이 누구냐? 주님이지요.

주님은 인간을 둘로 분리해 버립니다. 좀 전에 예를 들었는데, 아이가 “잘못했어요.”라고 한 것은 진짜 잘못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자기 아지트로 도망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있는 귀신 들린 자가 고랑과 쇠사슬에 묶어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많은 귀신이 들어가 있어요.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요.

만두 피가 얇으면 만두 속이 투명하게 비쳐 나오지요. 잘못하면 만두 피가 찢어져 만두 속이 밖으로 나옵니다. 지금 이런 상태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통제가 되는데, 이 말은 자기 안에 숨어 피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라사 지방에 귀신 들린 자는 자기 안에 귀신이 너무 많아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입니다.

만약 교회 성찬식을 하면서 우연히 목사가 포도주를 과하게 마셔 취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이, 김장로. 내가 평소에는 말을 안 했는데--” 하면서 그동안 억눌렀던 것이 다 나옵니다. 자기 속에 감추어 둔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가 내린 교회 정의에 의하면, 성도와 성도 사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 매개가 되어 서로 교제하지요. 이것이 우리가 아는 이론이잖아요.

그런데 술에 취해서 “김장로, 당신은 나와 동갑인데 헌금 많이 한다고 목사인 나를 무시하나?” 이렇게 나오는 것은 평소 술 안 취했을 때의 매개가 무엇이었습니까? ‘김장로 너는 진짜 나와 교제한 것이 아니고 내가 대타로 내세운 나의 마네킹과 그동안 상대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만두 피가 얼마나 얇은 지, 얼마나 귀신이 많이 들어가 있는지 쇠고랑으로 묶어도 소용이 없어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귀신을 예수님이 추방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색을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으로 구원하는 절차를 밟게 하시는 분입니다.

구원 받을 자는 제자들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아니지만. 구원 받을 자는 12명인데 구원 작업은 오직 예수님 혼자 하십니다. 왜냐? 내 속에 있는 나로부터의 구원, 즉 사단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어요. 이 작업은 주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하셔도 누가 마중을 나옵니까?

평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대외용 내가 마중을 나가서 다른 사람 사귀듯이 주님을 마중 나갑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가 영접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님 영접할 때 그 당사자가 누굽니까? 다른 사람(손님) 영접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영접해요. 그런 식으로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니까요.

이런 것은 연극으로 하면 실감이 날 텐데. 아파트 문을 열고 누가 들어왔는데, 이 집사님이 늦게 왔다고 합시다. “집사님, 이제 오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는데, 뒤따라 형사가 들이 닥쳤다.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내가 숨겨놓은 보물을 이 사람이 가져갔다.” 이게 바로 도적같이 오신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는 영접할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나쁜 분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분으로 영접합니다. 왜냐? 주님을 좋은 분으로 영접할 정도로 나는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서 오실 메시아만큼이나 우리가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영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우라고 본 것입니다.

‘영접’이란 말은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거든요. 그 방식을 오늘날 교회에서 똑같이 사용합니다. 교회 올 때는 정장을 입고 오고, 꼭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대하듯이 주님을 대합니다. 왜?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있도록 내 안에 있는 내가 부추긴 것입니다. 하여튼 교회가 희한한 곳입니다. 자기 자랑하는 곳이 되었어요.

자기 자랑정도는 귀신이 적게 들은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술 취한 것 이상으로 자기 본색을 노출합니다. 고함을 치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난동을 부릅니다.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고 했어요. 귀신이 한 마리가 들어오나 열 마리가 들어오나 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암이 일곱군데 걸리나 한군데 걸리나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잖아요? 이처럼 율법 중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이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축약하면 ‘구원은 없다.’ 더 줄이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언약만 있고 우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언약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귀도 천사도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가라지도 있고 알곡도 있고.

우리는 방금 이런 성경 말씀을 들었지요. 듣는데 어디까지 듣는가 하면 우리의 겉사람에서 멈춰요. ‘나는 오늘도 새로운 지식 하나 배웠다.’ 그런데 이걸 듣고 난 뒤에는 내 속에 있는 귀신이 이야기합니다. “너 오늘 새로운 것 들었나? 그것 가져와.” “왜요?” 내가 더 좋은 말씀을 하나 더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더 우수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경공부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 하면 점점 더 지혜로운 뱀이 되어가지요. 요령이 더 늘어난 뱀. 가식하고 포장하는 지혜. ‘나는 부족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지요. 요령만 늘었지 전혀 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성도는 언약만 있고 나는 없어요. 그러면 내가 있는 것은 날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작업장으로 있습니다. 언약 사건이 유발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리니까 예수님이 언약 완성자고, 그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났다는 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언약이 오늘날 우리에게 덮여서 일생 반복적으로 나오지요.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귀신이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들락거립니다. 들어오면 성령께서 쫓아내고, 그리면 또 덜어오고 또 쫓아내고.

우리는 잠들면 없어집니다. 잠들기 전에는 있어요. 그러나 잠이 들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주체가 없어요. 그런데 다시 잠에서 깨면 ‘아, 잘 잤다.’고 하면서 나를 인식하게 되지요. 그런데 뭔가 상실되었어요. 무엇이? 잠들고 난 후부터 잠에서 깰 때까지의 내 역사는 끊어져 있어요.

그러면 꿈은 뭔가? 잠에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 부분만 기억나요. 그게 꿈입니다. 제가 운동하거나 산책하면서 전할 말씀을 위해 예화 1, 2, 3을 생각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마지막 것만 기억에 남고 앞의 것은 다 사라집니다. 어떤 분은 휴대폰에 메모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메모하려는 순간 잊어버려요. 그래서 설교하는 것이 어려워요. 그야말로 설교는 다 털리는(빼앗기는) 겁니다. 털릴 때 허전하면서도 존재는 가볍습니다.

10분 쉽시다.

(2015. 6. 5. 08:59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40.185) 15-06-12 08:07 
광주 강의(2015. 5. 22) 15-2

첫째 시간에 제가 드린 말씀은 동질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잠들 때의 나와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내가 같은 사람이란 증거가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증거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제 잠들 때 나 바깥에 있는 내가 느끼는 나, 자면서 내일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나. 그리고 그 나는 조금 더 늙었다 뿐이지만 늙었다는 시간 의식과 상관없이 일곱 살 때나 열두 살 때나 나중에 80세가 되더라도 항상 싱싱하게 젊은 나는 따로 있지요. 

영원히 늙지 않는 나, 나의 자존심이 만들어 낸 진짜 나. 이건 괴물입니다. 할머니들이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자신의 꽃다운 시절의 모습이 없고 주름투성이가 된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은 겁니다. 내가 봐도 보기 싫은데 남들은 얼마나 보기 싫을까? 따라서 남이 보기 싫어할 때 누가 싫은가? 내 속에 있는 영원한 청춘인 내가 싫으니까 사진 찍지 말라고 합니다.

동질성 문제에 대해 이렇게 해결했지요. 지금 내(a)가 시간이 지난 내(b)가 될 때 이 동질성 유지는 부정을 통해서 유지된다고 했습니다. 부정이란 ‘아니다’라는 말도 되지만 ‘없음’의 의미도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미처 몰랐기에 없다고 간주했던 숨어있는 무엇에 의해서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일치된다.’고 합니다. 정, 반, 합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이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 강의에서 ‘상처’라는 말을 사용했어요. 지금의 나와 내일의 내가 동일하면 안 되고, 지금 내가 내일도 나처럼 되기를 원하는 숨어있는 나가 있어요. 아까 이야기한 귀신이죠. 쉽게 말해서 괴물입니다. 괴물을 주께서 바꿔치기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상처를 입었지요.

상처 입은 분이 그 자리를 접수해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다’고 말하면 안 되고, 그러면 예수님이 존재가 되지요. 따라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오늘도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데, 이것이 ‘성령 안’입니다. ‘예수 안’이지요. 또 ‘하나님 안’이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작용하는 유일한 원리가 돼요. 아담이 범죄했지요. 그래서 아담은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지옥 갔습니까? 아니지요. 천국 간 이유가 아담이 죽기 전에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지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그 약속 때문에 죽은 아담이 다시 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죽었는데 왜 하늘나라에 갑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라고 하셨어요.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산 자의 하나님이 죽은 아브라함의 내부를 장악하게 되면 아브라함은 ‘죽어도 살겠고’가 돼요. 이것을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무익함을 폭로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에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알 때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 일의 결과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동질성으로 갈 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고 좋아하지 말고 이렇게 건너오게 된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될 때 그는 성령 안의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느낀다는 말은 곧 내가 죄인의 역할을 하도록 주님이 이끄셔서 어제의 죄인이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살게 되었고, 그 배후에는 예수님이 개입했기에 ‘나 자체가 주님 일하심의 결과물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물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목사님은 신앙생활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합니까?” 제 답은 “범사에 감사하세요.” 감사하는데 그냥 감사만 하면 안 되고 감사의 근거를 제시해야 되지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곤고한 나 + 주 예수 그리스도. ‘주’는 기능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주의 기능으로 인하여 나는 감사한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이처럼 주님을 통한 감사가 있는 반면에 가짜 감사도 있어요. 뭔가? 내 속에 있는 귀신이 기대했던 내가 될 때 우리는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런 감사의 대표적인 예가 ‘구원론’입니다. ‘나는 구원 받고 싶었는데 구원 받았다.’ 누가 구원 받았어요? 내가 구원 받았습니다. “네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있지?” “없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말이 왜 성경에 없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산 자로 행세하면 안 됩니다. 내가 살아서는 안 되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산 자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죠. ‘주님 덕분에 살았다’고 하면 그는 산 자가 아닙니다. ‘주님 덕분에 나는 죽어 있었다’고 할 때 그가 진정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사람만 주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안’이고, ‘주 안’이고, ‘하나님 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귀신의 내력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내력’이란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닌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서 ‘내력’이라고 했습니다. ‘귀신의 연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에게 들어온 귀신이 계속 연속되는 겁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고 했지요.

우리가 귀신의 연속성을 발췌하는 이유는 예수님 일의 연속성과 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5년 전에 은혜를 주셨는데 지금은 안 주신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왜? 5년 전 귀신이나 지금 귀신이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은 귀신이라면 그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면 이미 구원 받은 자에게 왜 귀신이 들어오게 하시는가? 베드로로 하여금 사단을 허락(사단아 물러가라)하신 이유는 베드로 구원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너 같은 인간도 구원되잖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귀신의 연속성을 따진다는 것은 예수님 일의 연속성을 위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 귀신들린 자가 있다는 것은 이곳에 오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완벽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 동네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 차례의 폭격이 있지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폭격하는 지점은 어딘지 모르지만 폭격을 어디다 한 것인지는 알아요. 왜냐하면 그 폭격을 맞고 기어 나오는 두더지가 있어요. 그것이 이 세상에 숨어 있는,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오점이고 딜레마(dilemma)고 상처가 돼요. 인간은 이미 상처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문제투성이입니다.

넓은 세상 한 모퉁이에 작은 암세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점선인 큰 암조직 안의 각 사람에게 귀신을 파견했어요. 그러면 주님은 어디를 찾아가야 됩니까? 거라사인에게 들어간 귀신을 추방하면서 점차 점선(점선은 보이지 않습니다)속으로, 악마의 소굴로 들어갑니다. 악마의 소굴인 것을 안 들키기 위해서 마귀가 맨홀 뚜껑으로 덮어 놓았어요.

이 맨홀 뚜껑이 바로 국가입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짐승이라고 했어요.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유대 땅은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성전을 불태워졌습니다. 성전 기구는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BC 586년에 포로로 끌려왔고, 그 전에도 잡혀왔어요. 그러면 본부가 바벨론으로 이동한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디로 이동한다? 아까 연속성이라고 했지요? 옛날 사단이나 지금 사단이나 동일한 사단입니다. 그 동일한 사단은 최후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정체가 폭로됩니다. 그러면 그 바벨론 자리에 하나님의 소집령이 떨어진 셈이죠. 다니엘도, 제사장도, 유대 사람도 그곳으로 집결을 했습니다.

집결했는데 그곳에 느부갓네살 왕이 있어요. 그 왕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진짜 자아는 따로 숨겨놓고 왕노릇 하는 제2의 자아가 백성들 앞에 보이지요. 모든 인간이 다 이런 식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늙습니까, 안 늙습니까? 안 늙어요. 그래서 안 늙는 내가 가끔 꿈에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꿈을 꾸면 청춘으로 돌아갑니다. 현재의 나이가 60세라도 꿈에 20대가 되기도 하고, 30대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내 안의 나는 형체가 없어요. 형체를 보고 알아 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었기에 딱 나에요. 이 말은 뭐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단은 이사한 적이 없어요. 다만 사단의 외형만 바뀌었을 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단의 외형만 알 뿐 사단의 속성은 모릅니다. 나라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면 그것에 충성하며 살아갈 뿐이지요. 우리가 직장에 다니는데 직장의 본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회사의 본질은 없어요. 그냥 현재 회사 건물에 있는 사장, 임원, 사원들이 현재 있는 회사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 회사는 역사가 100년 되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나타난 현상이 전부에요. 인간은 그것밖에 몰라요. 신약 성경에도 바벨론, 짐승이 나오는데 그것은 옛날 바벨론인가?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바벨론은 온 나라가 다 바벨론 한 나라입니다. 곧 짐승의 나라지요.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기고만장했지요. 자신들이 믿는 마르둑 신이 여호와 신을 이겼다는 겁니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내부로 침투하셨어요. 그러니까 꿈으로 나타났어요. 꿈에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되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지금 느부갓네살 왕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언약 때문에 생겼지요. 그런데 느부갓네살 본인은 자신이 왜 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다만 나타난 현상(자기는 바벨론의 왕이고 자신이 믿는 신이 유대인들이 믿는 여호와를 이겼다)만 믿는 거예요. 왕은 통치하는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왜 통치를 못하지요?

자신이 꾼 꿈도 알지 못하고 남들에게 알아내라고 협박하는 그런 짓을 했지요. 이건 너무 심한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했어요. 왜냐? 현상에서는 너와 나 사이에 동질성이 없어요. 나는 나와 동질이고 너는 너와 동질일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면 왕이 꾼 꿈을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있겠지요. 옛날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찌르면서 “이 못된 황후야 죽어라.”고 하면, 잠자고 있던 황후에 악몽에 시달리다가 죽습니다. 이것을 ‘공감의식’이라고 하는데, 흑마술에 해당됩니다.

일부를 통해서 전체를 말하는 것을 ‘환유’라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상징입니다. 왜냐? 인간의 표현은 실체와 일치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참외가 맛있다.”고 했을 때, ‘맛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억수로 맛있다.” 그러면 “억수로 맛있는 것과 그냥 맛있는 것의 차이점은?” 아무리 말을 계속해도 사실과 표현이 일치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 사물이 먼저 있는데 이 사물은 자연에 속합니다. 자연에 언어를 주입하면 문화가 됩니다. 문화가 되면 인간은 문화를 제 2의 현실로 삼아서 자신이 만들어낸 문화를 자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환상, 환유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꿈꾸면서 살아요. “비가 안 온다.” “오줌을 누면 비가 온다.” 이게 전부 환유법입니다.

왕의 아들 세자가 오줌을 누게 되면 일주일 후에 비가 내립니다. TV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그래서 왕은 신과 인간의 매개자라고 하면서 왕은 높이고, 세자 역시 신이 인정한 자라고 백성들이 받들게 되는 겁니다.

법의 제정자는 절대 법에 구속되면 안 돼요. 그래서 왕은 법을 초월해서 생활합니다.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근친상간을 해도 백성들은 입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 서민들이 지켜야 할 법을 왕에게까지 강요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은 초법적 존재가 되어야 법과 법이 교류가 됩니다. “임금님! 누가 옳습니까?” “네가 옳다.”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권위와 권한은 법을 초월한 자에게 있습니다.

비행기를 너 마음대로 회항시켰다고? “너는 집행유해다.” “엄벌을 내려 주옵소서.” “까불지 마!”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렇게 조정함으로써 질서가 잡혀요. 각자 똑똑하다고 설치면 무법천지로 힘 쌘 놈이 이기게 되거든요. 그러면 표피가 얇은 만두가 됩니다. 귀신들이 설쳐서 안 돼요.

귀신의 대장은 점잖아야 되고, 인품이 있어야 되고, 부동산 투기하지 않아야 됩니다. 지도자급 사단은 인격자라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라야 합니다.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란 것만 빼고 다 있어야 됩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왕은 우리보다 월등한 인격과 품위를 가진 사람이 되겠지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그래야 질서가 잡히니까. “우리 임금님을 본받아야 돼. 어떤 신하들도 임금님같은 분은 없어. 우리 임금님이 최고야! 진짜 하나님 같아.”라고 할 때, 그 국가는 오점, 상처. 딜레마가 흔적 없이 소멸되지요.

윤리, 도덕적으로 우수한 나라(바벨론)가 죄 많은 유다 나라를 점령했잖아요. 그러면 계속 점령을 해야 할 텐데 느부갓네살 왕이 문제가 생겼어요. 나라는 통치했는데 자기 꿈을 어찌할 수 없었어요. 신하가 왕의 꿈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감은 잡았어요. ‘이것은 분명 사람의 힘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해석을 할 때 꿈을 알려주고 해석하는 것은 땅에 있는 인간들 차원이지요.

그러나 내가 꾼 꿈이 신이 내려주신 꿈이라면 해석하는 방식도 초월적 방식이라야 한다는 감을 잡았어요. 그래서 꿈도 모를뿐더러 억지를 부린 거예요. “내 꿈을 너희들이 알아내고 해석해라”고. 그런데 인간이 다른 사람이 꾼 꿈을 알 수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왜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에게 개입해서 귀신을 쫓아냈는가?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능력이 많은 분이니까 귀신 쫓아내는 것도 간단한 일이라고 여겨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는 반응이 나와야 해요. 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셨으니까. 그럼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신 예수님이 반갑습니까, 무섭습니까? 낯설어서 무서워요.

우리와 같이 살 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서워야 됩니다. “몸과 영혼을 지옥으로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지요. 그런 차원에서 두려워해야 되는 거예요. 인간끼리는 힘이 조금 더 세고 약한 정도이기에 서로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지만,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 끼어들면 무섭습니다.

6살 여자아이가 [겨울 왕국] 주제가를 영어로 부르니까 방송국 PD가 일본어로 된 노래를 들려줬어요. 그 노래를 듣고 이 아이가 일본어로 정확히 노래를 불렀어요. 무섭지요? 이런 경우에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거예요. 엄마는 그냥 평범한 아이로 키우려고 “애야 연속극 시간이다. 보러가자.”라고 하는데, “엄마, 싫어! 난 책 볼 거야!”

사실 이 엄마도 어릴 때 특이한 점이 있어서 영재로 키우려고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교육을 다 시켜서 본인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아이를 그냥 평범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아이가 평범한 쪽으로 안 가고 특별한 쪽으로 가니까 엄마가 근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귀신이 등장한 것이 충격이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자의 등장이 충격입니다. 귀신의 나라에게서는 귀신들린 자는 양성하고 귀신을 추방하는 자는 추방해야 돼요. 그러면 귀신에 의해 추방된 자가 누구입니까? 왠지 존재가 가볍고, 왠지 허전한 자가 누구입니까? 성도지요. 성도는 예수 믿는 나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랑하니까 이것이 무섭고 두려운 거예요.

“목이 마르니까 물을 마셔야겠다.” 이렇게 말하면 같은 편이 되겠는데, “주께서 목마르게 하셨구나. 그런데 주께서 물을 마시게 하셨네.” 이런 말 하는 사람은 무서워요. 왜 이렇게 유별나지요? 이것은 전 세계가 다수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숨어있는 한 인물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 인물은 하나냐 하면, 그 인물에 깊숙이 개입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다니엘 시대에는 다니엘을 집어넣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꿈 속에. 꿈을 꾼 현장에 다니엘이 투입됩니다. 지금 여호와와 마르둑 신의 전쟁이 끝났습니까? 진행 중입니다. 일단 잡혀줬어요. 그러나 그것이 덧이에요. 바벨론은 미끼를 덥석 문 거예요.

다니엘은 언약을 갖고 있습니다. 언약을 멈출 능력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없습니다. 왜냐? 인간은 언약대로 창조가 되었기에 창조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어요. 따라서 우주는 언약 안에 놓여 있기에 폐쇄적입니다. 그럼 언약 밖에는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도 언약 안에 있어요.

제가 수요일 고함치면서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데나 계신 것이 아니고 성전에만 계신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늘에 계신다’는 구절도 있고, ‘바다 깊숙이도 계신다’고 했고,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 모든 곳을 성전으로 만드시면 그곳에 계실 수 있지요. 온 우주를 주님의 성전으로 만드십니다.

새로운 운주가 생깁니다. 천국이라는 우주, 그리고 주님이 따로 관리하는 지옥도 있고. 주님의 속성은 공의와 자비로 나눠져 있는데, 즉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이 모이는 곳이 지옥이고, 긍휼의 그릇이 집합하는 곳은 천국인데, 어쨌든 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왕의 왕’이고 ‘보이지 않지만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나오지요.

이 말은, 우리가 그 안에 속했지 우리가 그 세계를 다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쪽에서 다루는 대로 우리는 다뤄집니다.

바벨론은 하나인데 그 하나 중 하나는 느부갓네살이죠. 그 느부갓네살 인생이 구멍이 났습니다. 꿈을 꿨는데 그 꿈을 자신이 몰라요. 그런데 만약 누가 이 꿈을 알고 해석한다면 그는 꿈꾸게 하신 그쪽에 속한 자가 되겠지요. 그쪽에 속한 자가 다니엘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알지 못하는 꿈을 다니엘이 알았다면 느부갓네살의 모든 것은 이미 다니엘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의 하나님이 바벨론을 이긴 거지요.

그런데 꿈의 내용이 확대되면 바벨론이 짐승이 됩니다. 꿈에 금 신상이 나오지요. 하나인 바벨론이 다양하게 균열이 생깁니다. 네팔에 힌두교 신전이 있는데 지진이 일어났어요. 그러면 여러 개의 금(균열)이 생겼겠지요. 백 개로 갈라져도 원래는 한 개였지요. 결국 인간이 국가를 염원한다는 것은, 광야에서 세 번째 시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온 천하를 다 주겠다.

천하는 몇 개입니까? 하나죠. 그러면 사단이 미국 사람이나 러시아 사람이나 동일한 귀신을 보냅니다. 동일한 귀신이 왔다면 모든 인간은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한 나라, 한 겨레, 한 민족이에요. 그 한 나라, 한 겨레에서 다니엘같이 구멍을 내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상대하는 나라는 몇 나라입니까? 한 나라죠. 그러면 예수님이 상대하는 왕도 한 명.

결국 예수님이 상대하는 것은 모든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세상 신, 세상 권세 잡은 사단인데, 그 사단의 하수인 귀신이 지금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님과 만난 거예요. 모든 사람은 이 언약의 무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성도들을 만나면서 제가 답답한 것이 있어요. “목사님, 제가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했어요. 앞으로는 정신 차려야 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답답합니다. 왜냐? 주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무엇을 믿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주님 행동보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내 행동이 잘못되면 내 운명이 틀어진다고 생각합니까? 주님은 우리 몰래 우리 운명을 바꿔치기 하신 분입니다. 이미 바뀐 운명이 있는데 왜 헌 운명을 쥐고 있습니까? 우리 문화의 차원, 의미의 차원에서 생각했던 그것이 현실이라 여기고 그 현실의 일원으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현실에 신경 쓰면서 내 운명을 걱정하는데, 이건 심각한 착각입니다.  

우리에게 실패는 없어요. 성도가 실패를 한다면 그것은 주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실패했습니까? 십자가로 다 이루셨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죽은 것도 성공했어요. 주님이 성공하셨기에 우리는 주 안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실패했다고 좌절하고, 실패할까봐 근심하는데, 걱정거리와 걱정 안 해도 될 것이 싸우면 걱정 안 해도 되는 것이 항상 승리합니다.

7절을 봅시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게 사람의 말입니까, 귀신의 말입니까? ‘귀신의 말’ 이것 5점 만점에 3점입니다. ‘귀신의 말로 사람의 말’ 5점 만점입니다. 모든 인간의 말은 귀신의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말은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늘 궁시렁거립니다. 

귀신의 내력은 인간 세상에 오점을 남깁니다. 성도에게 십자가의 오점이 있지요. 그 십자가가 처음에 어디에서 만들어졌습니까? 인간 현실이라는 문화적 차원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지요. 그 인간적 차원을 위해 모든 언약이 집결했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아니면 죽을 수 없다.’

예루살렘에 집결했는데, 예루살렘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성전이 있었지요.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예수님에 의해서 가짜로 판명이 났어요. 그러면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짜로 판정을 내린 그 당사자가 성전이죠. 모든 율법을 다 알고 계신 분(예수님)이 모든 율법이 집결했다는 그곳(가짜 성전)에서 만나서 구멍을 낸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상처를 받지요. 그리고 인간세상이 건전하게 잘 돌아간다고 여겼는데 그 세상도 상처가 났어요. 그러면 십자가는 뭡니까? 십자가는 양면성을 다 이야기해야 제대로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있어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봅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를 두고 세상과 그리스도의 세계가 나눠져 있지요? 양쪽 가운데 십자가가 있지요. 그러면 십자가로 들어가는 방법은 사실 없어요. 없는데 들어왔던 사람은 있지요. 그 사람은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죽였고, 내가 죽인 그리스도가 나를, 죽은 자신의 세계에 넣어주셨기에 이곳에 왔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그 세계가 천국임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살았다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알고 있는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십자가 세계에서만 통하는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왜냐? 살아난 후에 살았다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자랑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제자들에게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이건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아는 소생의 의미와 주님이 아는 생명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느부갓네살처럼 구멍 뚫린 사람만 삽니다. 십자가의 상처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 상처는 이미 너는 살았다는 것을 확정해 주는 상처입니다. ‘나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무엇을 자랑했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랑을 했지요.

그 자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변하지 않는 자기. 바깥은 늙어 가는데 그것 말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질성을 유지하는 자기, 내 안에 있는 그 무엇, 그것이 사단의 자리, 나만의 자리죠. 그 나만의 자리는 하나가 아니고 두 명 있으면 둘, 네 명 있으면 넷이 되지요. 각자 자기의 자리를 꿰차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너에게 넘어갈 수 없고, 너도 나에게 넘어올 수 없어요. 그러나 주님의 세계에서는 너와 나 상관없이 공동적으로 갖춰질 요소가 있어요. 귀신의 자리요. 그 귀신의 자리에 십자가가 점령한 사람이 되면 너는 나와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작업은 앞으로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 시킬 동일한 사건을 먼저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를 몰랐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비로소 우리 자리가 전에는 귀신의 자리였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거하시는 자리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6. 11. 09:1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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