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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5 02:06:35 조회 : 1381         
시선 150724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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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4.♡.98.169) 15-07-28 16:29 
광주 강의(2015. 7. 24) 17-1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귀신이 들어와서 다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된 원인을 찾지요. 이것을 ‘시선’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는 시선이 현실을 해석해요. 내가 키우던 돼지가 죽었다. 이런 손실을 입힌 자가 누구인가?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손실을 입혔다.

지금 이 현실이 돼지 주인들에게는 좋은 현실입니까, 나쁜 현실입니까? 나쁜 현실이죠. 이처럼 현실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가치에 의해서 현실을 규정하는데 이것이 나의 시선입니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것은 ‘너희들이 예수님의 시선을 아는가?’라고 묻는 겁니다.

우리가 고수하는 것은 ‘내가 바라본 예수’인데, 이것은 나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십자가 사건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지요. 다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은 큰 의미가 없어요. ‘나는 미국을 이렇게 본다.’ 괜찮아요. 이 모든 것은 나의 시선입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볼 거야. 관여하지 마!’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시선을 보낼 때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해.’ 라고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누락시키고 하나님을 보기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시선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귀신을 쫓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시선을 고수하다보니 귀신이 나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두지 않는 겁니다. 누가 귀신을 보냈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내 돼지가 바다에 빠졌다고 분통을 터드리죠. 17절에 “저희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고 했어요.

제가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떠난 현장에는 어떤 현실이 남을까요? 자기 시선으로 바라본 자기 현실만 남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분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예수님이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알게 됩니다.

잠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예수님이 떠나가시지요. 왔다가 사라져 버리죠. 그 다음에 보세요. 그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겠습니까? 안 믿습니다. 왜냐? 그 사람들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예수 믿습니까?” “예, 예수 믿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봤습니까?” 이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적당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적당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억지로 답변을 끄집어내게 되면 그 답변은 본인이 생각해도 궁색합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봤다.’는 말은, 나의 시선이 출발해서 보게 되면  ‘내가 믿는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본다. 보인다. 믿는다.’ 1) 본다. 2) 보인다. 3) 믿는다. 이 셋이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누락되었습니까? 십자가. 십자가가 누락되면 이것은 귀신들린 자입니다.

마귀의 작전은 보는 것을 믿게 함으로 예수님을 못 믿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9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 믿지?” 이런 염려하지 마세요. 예수님 시선에서만 그 말이 타당해요.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 말씀을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 받는가? 내가 소경인 것을 받아들이면 돼요. 예수님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실 때 우리는 “제가 죄인입니다.”하고 나서면 됩니다. 그래서 세리가 의인 되었잖아요. 그런데 옆에 있는 바리새인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은 인생 최대를 실수를 했어요. 천국 가는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지옥갈 수밖에 없잖아요.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요. 지옥 갈 사람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천국 보내는 사람이 지옥 갈 사람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 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보고 지옥 갈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판단 근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천국 갈 사람인데, 너는 나처럼 행하지 않으니까 지옥 간다.’는 거예요. 바리새인의 시선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시선입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한 시선이 또 있어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에 대해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되물어요. 이에 대한 예수님 답변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청년을 근심하며 떠나지요.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 중 자신의 것을 가지고 오는 사람은 예수님이 반기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온 사람만 주께서 반깁니다. 예를 들면, 욥이 언제 인간 되는가 하면, 욥이 하나님께 상처를 받을 때 인간이 됩니다. 개구리와 인간의 차이점이 뭡니까? 개구리는 상처를 줘도 하나님의 형상이 안 나와요.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이 상처를 주시면 “주여!”하면서 주님을 찾게 됩니다.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처를 “주님이 주신 상처입니다.”라고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주께서 받아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남긴 상처를 주님이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 상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이 단정되었을 경우에만 ‘피’가 됩니다.

히브리인이 죄인일 때 피를 바름으로 살았습니다. 피가 없으면 애굽인, 히브리인 가리지 않고 다 죽습니다. 주님은 약속에 의해 죄인이란 사실을 규정하기 위해서 피를 발라요. ‘우리는 너무나 못난 자들이기에 약속의 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전제로 피를 바른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믿고 애굽인들은 여호와를 안 믿은 이유가 뭡니까? 애굽인들에게는 자신의 신들이 있었어요. 그 신들은 누구의 시선에서 납득이 됩니까? 그 신은 우상인데, 우상은 인간의 시선으로 납득이 됩니다. 시선, 보인다는 말은 존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존재하는 나에게 보이니까 그 보이는 것을 믿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신도 존재해. 신의 존재를 나는 믿는다. 그래서 믿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시선은 약속에서 나오는데, 여호와는 보이지 않는 신이에요. 보여주면서 못 보게 하는 방식으로 보여주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이런 식이었어요.

두 제자와 나란히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며 길을 갔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요. 왜냐? 예전에 자신들이 알았던 예수님이 아니에요. 지금의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인데, 그 전에는 죽음이 있었어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은, 부활 전 세계를 죽음으로 간주합니다. 왜? 본인은 죽음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지요.

공무원 시험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을 했습니다. 합격 후에 예전 자신이 공부했던 노량진에 찾아갔습니다. 합격한 사람의 입장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은 합격자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네가 합격하려면 이런 식으로 공부하고 이런 문제를 풀어야 돼.”라고 조언을 할 수 있지요.

이 말은, 본인은 이미 합격했다는 이야기잖아요. 예수님은 죽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를 대할 때 “너는 죽었는데, 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씀만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다른 말씀은 안 합니다. 그런데 꼭 합격되지 않은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이렇게 하면 건강을 회복하고, 이렇게 하면 부자 됩니다.”라고 하지요. 속지 마세요.

합격하신 주님은 그런 것은 시험에 안 나온다고 했어요. 좋은 상대 만나서 결혼하는 것, 가족 화목한 것, 건강한 것, 이런 것은 합격의 요소가 아닙니다. 천국 갈 요소가 아니라니까요. 딸을 낳는가, 아들을 낳는가? 이것은 천국 갈 요소와 무관한 거예요. TV를 보면 전부 영생과 무관한 이야기들만 해요. 국제 기름 값이 51달러로 내린다. 서울 집값이 2% 올랐다. 이런 것은 영생과 관계없는 말들입니다.

영생과 관계없는 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하면서 ‘영생과 관계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관심 두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 시선과 주님의 시선을 비교해 보는데 차이가 너무 커요.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나와요. 이 말씀이 어렵습니까? 유치원 아이가 들어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씨를 먹었다.’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씨가 돌밭에 떨어져 뿌리가 제대로 내리지 못했다.’ 또 ‘어떤 씨는 옥토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셨는데, 묻는 분이 이상합니다. 뭐가 어렵다고 이것을 묻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천국과 연결시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하시면서.

지금 마가복음 5장을 공부하고 있는데, 분명히 현실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지요?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서 돼지들이 물에 빠져 죽었잖아요. 그러면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귀신이 나갔다’는 것에 포인트를 잡아야 하는데, 돼지 주인들은 ‘내 재산 바다에 다 잃었다’는 것에 포인트를 잡습니다.

그래서 돼지 주인들은 예수님께 “우리 동네에서 나가주세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 내셨는데,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잠시 예수님이 다녀갔던 상황인데, 이제는 예수님이 없지요. 지금까지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잠시 만났지만 헤어졌지요.

이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 또는 “예수님을 봤어”라고 할 때, 다른 제자들은 “우리는 네 말을 못 믿겠다. 우리는 안 봤어.” 이렇게 나오겠지요. ‘나는 보았다.’고 하면 시선이 누구에게서 나옵니까? 나로부터 시선이 나와서 “나는 보았다.”는 것이고,  보았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나는 그것을 믿는다.’ 이렇게 되겠지요.

‘나는 본다, 보인다, 그래서 믿는다.’고 했을 때 이 믿음이 믿음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 “우리 동네에서 나가주세요.”하는 사람들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자 하지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나는 본다, 보인다, 그래서 믿는다.’는 이 체제가 허물어져야 돼요.

이 말은,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을 믿는다.’ 앞에 ‘내가’를 넣으면 안 돼요. ‘주님이 예수를 믿게 했다. 나를.’ 이런 식으로 뒤에 ‘나’를 집어넣어야 해요. 그래서 이렇게 돼요. 주님께서 나를 뒤에 집어넣기 위해서 내가 믿는 믿음을 날마다 없애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안 되고, ‘예수님이 나를 믿게 하셨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순서가 있어요. ‘나는 예수 믿어서 예수님께 깨어졌어. 그 후 예수님이 나를 믿게 하셨어.’ 이게 7월 15일 상황이라면, 7월 16일에는 ‘예수님이 나에게 믿게 해서 내가 믿었는데 그런 나를 또 주께서 깨어버렸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복잡한데, 이것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미래에 나는 예수를 믿었다.’이렇게 돼요. 왜냐? 이 작업이 사후적으로 가게 되면 미래를 위하여 처음부터 일을 시작하신 분이 중간중간 나에게 그 일을 실시했다는 것을 미래에 가면 총괄적으로 파악이 되니까요. 그 미래가 앞당겨 나에게 주어집니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가 있을 뿐 현재는 없습니다. 현재는 주님이 쥐고 있어요. 현재 속에 우리의 미래와 과거가 다 들어있어요. ‘미래에 너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현재에 집어넣는 역할을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은 육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지금 믿는다.’가 아니라 ‘미래에 믿었다.’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미래에 계신 분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미래까지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 현재 일입니다. 미래에서 과거에 한 일이 지금 현재의 일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나를 미래에 밀어 넣는 일이 아니고, 미래에 가도 그것이 현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나의 시선으로 출발해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꾸죠. 나의 시선으로 출발하면 ‘내가 예수를 믿었다.’가 되지요. 그런데 이것을 주께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꾸면 ‘주님이 나에게 믿게 하셨다.’가 됩니다. 믿게 하시는데 그 절차 가운데 하나가 귀신을 추방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면 귀신 쫓아내지 않고 구원되는 일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은 다 귀신이 나간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근거해서. 여러분들에게서 나간 귀신에 돼지에게 들어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간 것은 분명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않고 예수 믿는 방법은 없어요. 이것의 일반적 모델로 본문의 청년이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귀신 일곱이 들어가는 것이 힘들까요, 2,000이 들어가는 것이 힘들까요? 그 숫자가 상관이 없습니다. 아들이 “엄마, 큰 암소가 내 마음에 들어왔어요.”라고 한다면, 엄마가 묻지요. “그 암소가 얼마나 큰데?” “나보다 더 커.” “너보다 더 큰 것이 어떻게 너 속에 들어가?”

나 보다 더 큰 것이 어찌 나에게 들어올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아들이 말을 잘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엄마가 질문을 잘 못한 것입니까? 그러면 엄마가 어떻게 질문해야 됩니까? 상당히 난해한 문제지요. 마음이란 크기에 상관없습니다. 크기에 상관없으면 크다, 작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청년의 몸에 2,000의 귀신이 들어왔으니까 얼마나 비좁겠어요? 나의 시선에 의한 몸은 크다, 작다가 됩니다. 그런데 이 몸을 주님 시선으로 본다면 귀신 2,000이 아니라 2만도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이 몸을 내 몸으로 여기면 정신과 몸 사이에서 언어적 모순이 발생됩니다.

내 마음에 암소가 들어왔는데 그 암소가 내 몸보다 더 크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이 뽑혀 바다에 빠진다.’고 할 때 제자들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물었고, 예수님은 ‘너는 아직도 너의 시선으로 너의 현실은 고수하고 있구나.’라는 식으로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내 몸이든 산이든 바다든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의 소유라면 주님의 몸은 이 우주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합니까? 주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는 생각을 왜 못해요? 이것을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허공에 떠 있는 컴퓨터 화면’이라고 표현했어요. 집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 말고, 허공에 창이 떠서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있어요.

이처럼 지금 천국이 공중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수하다 보니 ‘이 몸이 죽어서 천국에 어떻게 들어가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에서 나온 천국은 귀신에게 장악된 자의 이미지에 불과해요. 이 귀신이 나가야 됩니다.

내 몸은 주가 값으로 산 것이기에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앞에 ‘내’가 붙어 있으면 안 돼요. 근심, 걱정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근심해도 주님이 근심하고, 걱정해도 주님이 걱정하지 내가 왜 걱정합니까? 그래서 신앙에 가장 방해되는 요소가 바로 행함입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했을 때 받은 구원도 무효가 되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태산입니다.

대구 강의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함의 끝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예수 믿어도 나쁜 행동 했을 때 지옥 간다는 걱정이 다시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분명히 심판 때는 행함에 묶여 있는 사람은 전부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구원 받는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은 미래의 책입니다. 여기서는 일체 인간의 행함을 묻지 않습니다. 왜냐?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모든 성도의 행함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현재로 나에게 집어넣어준 행함이거든요. 예수님의 행함이란 말이지요.

예수님의 행함은 나의 시선을 주님의 시선으로 바꿉니다. 내가 포도를 먹는다면, 포도를 먹게 하신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주님이 먹게 하신 거예요. 나는 그냥 주께서 먹여주셔서 먹은 것뿐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은, 포도를 먹으면서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한 후에 먹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모든 시작과 모든 시선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런 생각이 머리가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시선에 메인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지요. 다시 말합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방해되는 것은 내가 행동이 게으르고 성경도 보기 싫고 기도도 하기 싫을 때, ‘이러다가 내가 천국과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주께서 성경을 보기 싫게 해서 안 봤는데, 본인은 자신이 성경이 보기 싫어서 안 봤다는 거예요. 겸손해 보이지만 자기 시선을 고수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뭐냐? ‘내가 주님 말씀대로 안 살면 천국에서 탈락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나의 현실이 없습니다.

내 컴퓨터는 내가 한 작업이지만 허공에 떠있는 창은 전부 주님의 언약에 따라 움직입니다. 내 현실은 없어요. 몇 월 며칠 누구는 죽어야 하고, 누구는 죽는 것처럼 보이다가 살아나고. 이 모든 것을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님 허락이 있어야 떨어지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노무현씨가 부엉이 바위에서 죽을 때도 주님 허락이 있어서 떨어진 거예요. 부인되시는 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허락 때문인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운동하고 몸을 관리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모든 인간은 자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나갔으면 시선이 바뀝니다. 어떻게? ‘주님이여, 돼지 없어도 좋으니까 주님 저와 함께 있어 주십시오.’ 이렇게 나옵니다.

17절과 18절이 대조가 되지요. 17절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고, 18절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구합니다. 이 청년이 과거에 2,000귀신이 들렸다는 것도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주께서 잠시 귀신 들게 했다가 빼내주신 거지요. 그러니까 일종의 그림 그리는 도화지죠.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른 그림을 그렸지요. 그런데 종이가 “전에는 도자기 그렸다가 왜 이번에는 화분을 그립니까?” 이렇게 대들 필요 없어요. 그것은 그림 그리는 화가 마음대로 그리는 겁니다. 주께서는 귀신 주고, 귀신 쫓아내고 그런 가운데 “너는 내가 사용하는 피조물이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 이야기하면서 주님은 자기가 남긴 상처만 회수한다고 했지요. 욥에게 상처를 줌으로 욥이 인간이 돼요. “주님이 그렇게 했지요.”라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개구리와 인간의 차이라고 했잖아요. 욥은 ‘주께서 하셨다’는 고백이 나오는데, 사람이 아닌 자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이처럼 하나님이 하셨다는 반응이 없을 때, 하나님이 회수할 것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던져 봐서 “내가 왜 죄인인데?” 이렇게 나오는 그는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군요.”하게 되면 “이것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입니다.”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의 입장에서 실로암 못은 전에 아무 상관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와서 소경된 자와 실로암 못을 연관을 시켰지요.

실로암의 뜻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갑자기 소경 된 이유가 생겨버렸어요. 뭡니까?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거예요. 어떻게 소경에서 눈을 떴는데, 눈 뜨게 하신 분을 몰라요. 그러니 여전히 소경이죠.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되니까 소경이라도 예수 믿으면 소경 아니라는 것을, 주께서 이 사람이 소경에서 눈을 뜨는 과정 속에 양쪽 다를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도 나를 믿는 사람은 소경 아니다.’ 라는 것을 이 사람을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이 그림 그리는 도화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19-20절에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여기에 “기이히 여기더라.”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 당시 병 고친다고 인기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보고 기이히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 중요한 분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병 나은 사람이 자신의 놀라운 일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이 설명을 어떻게 합니까? 소상하게 납득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합니까? 아니에요. 그냥 “내가 귀신 들렸는데 주님이 그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의 주체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체였는데 지금은 예수님으로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기이히 여긴다는 것은 아직도 그 이야기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모든 사건은 장차 십자가가 합류하고 있는 의미를 미리 앞당겨 사건화 시킨 거예요. 십자가가 있다면, 십자가의 그림자를 사건화 시킨 겁니다. 이 그림자 속에 귀신 쫓아내는 일이 있었지요.

귀신 쫓아내는 일을 제가 무엇으로 설명했습니까? ‘시선 바꾸기’라고 했지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나로부터 출발한 시선을 주님으로 바뀌었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체 바꾸기’입니다. 주체가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내 속에 주께서 남기신 것이 있고, 주님은 내가 예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남긴 것을 회수하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것을 회수하다보니 우리는 딸려가는 겁니다. 이것의 예를, 주일 설교에서 치과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했습니다. 썩은 이에다 심을 2개 박았다고 했지요. 1개  심을 때마다 30만원이에요. 썩은 이 위에 심을 박아요. 그 심 위를 덮어서 온전한 이 모양을 만든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내가 썩은 대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러면 죄를 지어서 썩었습니까, 아니면 썩을 수밖에 없어서 썩었습니까? 썩을 수밖에 없어서 썩었지요.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의 대상이 되면 그동안 우리를 죄 짓게 한 것이 마귀였습니다.

마귀, 귀신을 편하게 생각합시다. 이미 우리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에. 삼성 회사에 다니다가 현대 회사로 직장을 바꾸었으면 편하게 이건희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소속이 달라졌으니까요. 마귀는 마귀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게 보이는 것만 현실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과학입니다.

내가 보는 것만이 전부라고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왜? 나 외에 다른 주체를 상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귀신이 나를 지배한다.’ 귀신 들린 자는 이런 소리를 안 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지 귀신이 왜 관여합니까. 내가 역사를 만들고,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실적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고 이게 마귀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한 시선을 고수하도록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럼 마귀가 언제 등장합니까? 이런 내 시선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주님의 시선으로 나를 다시 보니까 그동안 악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시선을 주님이 바꾸십니다. 나의 시선을 뭉개고 ‘내가 너에게 십자가 사랑을 심었다.’ 십자가 피를 회수하면서 우리의 시선이 바뀌는 현상,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10분 쉽시다.
 서경수(IP:14.♡.98.169) 15-08-12 16:10 
광주 강의(2015. 7. 24) 17-2

모든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긴 그림자이기에 십자가가 함유한 내용을 여러 가지 기적과 말씀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결국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인데 부활하시면 시간과 공간의 창조 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면 그 성령 안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묵시세계가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역사도 있고 묵시도 있어 두 세계가 중첩되면서 묵시에 의해 역사가 지배받는 구조가 됩니다. 따라서 묵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마귀에 속한 사람’으로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청년을 볼 때 귀신 들린 청년이지 그냥 청년이 아닙니다. 똑바로 행동하면 귀신이 안 들린다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들려야 했기에 귀신이 찾아온 거예요.

주님의 시선을 사도 바울이 알게 되었고, 12제자가 알게 되었고, 성령 받은 성도도 예수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 세상 끝이 끝이 아니고, 끝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이 세상은 이미 종말이 된 것입니다. 종말이기 때문에 잠을 자도 깨어있는 상태가 돼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먹을 것 다 먹으면서도 늘 깨어있어요. 왜냐?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주께서 지배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무엇을 해도 상관없어요.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를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에 자유하지 않으면 채찍 맞아요. 자유하지 못한 대표적인 예가, ‘내가 이런 행동하면 저주 받고 내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뭔가를 주저하는 모습입니다.

자유하게 된 성도에게는 걱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의 근심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걱정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란 타인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그래서 내 사랑은 없고, 남이 왔을 때, 또는 주님이 왔을 때 주님과 나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의 것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자기의 것으로 환원됩니다. ‘내가 온 정성을 다해 너를 사랑했는데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이런 사랑은 타인이 자기에게 종속된 사람이라고 여길 때만 성립되는 사랑입니다. ‘너는 내 자식이니까 내 말 들어야지.’ 이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은,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라고 주신 것인데, 내가 자식을 내 것으로 만들면 주님이 자식을 주신 취지와 배치가 됩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뭔가를 요구하면 무조건 들어주면서 모성애라고 하는데 이것이 마귀적 발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려면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도망쳐야 돼요. 그래야 내 것이 안 됩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요? 백지영의 노래 가사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사랑 안 해.” 배신을 당하고 난 뒤에 이제 질렸다는 거예요. 어떤 장로가 교회에 갔는데 교인들에게 환영을 못 받았다면, 그 교회에 안 가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마음은 은근히 자기 소유화 시킨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화 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타인을 보내서 나를 속상하게 합니다. 그러면 타인이 등장함으로 내가 상처를 받지요. 주님이 등장해서 나에게 상처가 생깁니다. 그 상처를 주님이 가져감으로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내 소유로 만들어 내가 아쉬울 때 기도만 하면 즉각 응답하는 그런 분이기를 원해요.

나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 아이가 대학에 떨어지고, 기도도 안 한 옆집 아이는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 질투가 발생하지요. 마치 가인의 제사는 안 받고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이 열납해서 가인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아벨을 죽인 것처럼. 이것이 사랑을 못해서 그래요. 사랑은 내 손에 잡히지 않고, 상처만 남기고 떠나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사랑이 되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듭니다.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이런 상황을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결혼도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부부가 없기에 부부 싸움을 할 일도 없어요. 이 땅에서 천국을 맛 본 자중에는 스스로 고자가 되어 결혼을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지요.

결혼해도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 아니기에 온전한 사랑이 아닌 것에 메여서 주님의 온전한 사랑의 기쁨을 훼손할 이유가 없다고 결혼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사도 바울 정도 되는 분이 하면 좋은데, 좋은 상대 만나려고 욕심 부리다가 결혼 못한 노처녀, 노총각이 ‘나는 주님만 사랑해!’라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 사랑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상처를 냅니다. 23절에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멀쩡하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그 아버지 야이로는 상처를 입었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했지요. 큰 상처입니다. 방랑했지요. 얼마나 큰 상처겠어요? 그 상처로 말미암아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는데, 상처를 아는 마지막 테스트가 뭔가 하면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는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처럼 되지 않으면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에 있는 아들을 아브라함처럼 다 제물로 드려야 구원 받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분이 성도 누구에게나 그런 상처를 주신단 말이지요. 본문에 보면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어요. 그래서 야이로는 주께 간구합니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야이로에게 이런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까?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내 딸이니까 내 딸을 건강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곡된 모습이죠.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사실을 알까요, 모를까요? 몰라요.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남의 딸이 아니고, 내 딸이 죽어가고 있어요.

내 딸은 내게 속했고, 내 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뭔가?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능력도 행한다고 하니까 그 예수님께 찾아가 ‘내 딸을 살려주세요.’라고 간구한 거예요. 이런 마음 자세가 자기 시선이죠. 자기 시선은 자기 현실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현실은 다 눈에 보입니다. 보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나는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십자가는 나의 믿음을 부숩니다. 예수 믿는 것을 없애는 것이 십자가 능력이에요. ‘네가 뭔데 날 믿어? 날 믿지 마! 마귀에 속한 인간이 왜 날 믿어?’ 이게 주님입니다. 믿음이란 주체가 바뀐 상태를 말합니다. 주께서 일을 할 때 믿음이지 내가 시작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같은 원인을 넣으면 동일한 결과가 나올 때 이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식사량을 줄이고 하루에 30분씩 운동하면 뱃살 빠집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보세요. 뱃살 빠졌잖아요. 원인을 집어넣으니까 반드시 동일한 결과가 나왔어요. 이게 과학이기에 인간은 ‘내가 예수 믿으면 반드시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이게 과학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행함을 집어넣으면 반드시 천국 가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지요. 이건 과학이기에 성령이 필요치 않아요. 성령 없이도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하니 얼마나 반복음입니까? 내가 믿어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신앙이 아닌 문화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문화생활 했지요?

문화생활은 원인을 집어넣으면 결과가 나옵니다. 충분히 납득되고 이해가 되지요? 교회 목사가 이런 사례를 설교시간에 나열합니다. 감사헌금 해서 복 받은 것, ‘장로가 십일조 안 해서 벌 받아 사업이 망했는데 회개하고 십일조 해서 복 받았다.’ 이런 이야기. 다 사기입니다.

반대 경우가 더 많아요. 십일조 해서 망한 사람이 더 많다니까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리새인이잖아요. 그들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어요. 기독교 방송에서 간증한다는 사람들의 내용을 들어보면 다 충성해서 복 받았다는 소리입니다.

혹시 간증하는 분 중에 십일조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살다가 저주 받았다는 소리 합니까? 방송국에 초청 받아 간증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대로 된 간증을 하세요. 누가 불러주면 그것은 주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뿐이잖아요.

그렇다면 구원 받는 시선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고 주님에게서만 나오지요.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허수아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어디서 ‘갑’질을 해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교역자가 당회장 눈치를 본다는데, 저는 눈치 보는 부교역가 더 미워요. 얼마나 신앙이 없었으면 당회장 눈치를 봅니까?

회당장이 지금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게 아니에요. 다만 주님께 걸려든 거예요. 자기 딸이 나았다고 좋아할 수 있어요. 그러나 딸이 낫고 난 뒤에 생각해 보세요. 차라리 딸이 아프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괜히 병 주고, 약 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제일 부러운 사람은 건강하게 병원을 청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퇴원하면 아니겠지요. 어쨌든 회당장은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심각한 상황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상처라고 했습니다. 해결책도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 모여서 위로하는 친목 단체가 교회입니다. 해결책도 없는 인간들이 모여서 마치 자신들 때문에 교회가 커진 것처럼 위로를 받는 자들이 교인들입니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가 되어야 해요. 공동체에서 쫓겨났다고 신자가 아닙니다. 쫓겨난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동체를 만드는데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다.’ 이것이 지방교회입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해도 공동체가 안 됩니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어디 있든지 주님이 주체가 된 사람입니다.

어쨌든 주께서 낫게 해 주면 좋겠는데 그 뒤에 끼어드는 사람이 있어요. 25-27절에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12년 된 이 병자는 야이로와 대비가 됩니다. 야이로는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내 딸을 낫게 해 주세요.’라고 했지만, 혈루증 환자는 자신이 너무 더럽고 미천한 존재이기에 주님께 누가 되지 않게 하려고 뒤로 와서 주님 옷에 손을 댔을 뿐입니다. 이 여인은 야이로보다 예수님의 주체 됨에 훨씬 가깝지요? 

모든 사건들은 십자가를 함유하고 있다고 했는데, 십자가 사건 후 예수님은 공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 전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고, 우리에게 반복되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데 딸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마가복음 5장이 나의 현장이 됩니다. 이건 허공에 있는 창에서 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마가복음 5장의 계시를 펼쳐 보이시는 겁니다. 그래서 완성된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창조하십니다.

완성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말씀을 창조하십니다. “너는 인간이 아니고 말씀이다.”라고. 그래서 성도는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근거로 이런 일이 터졌는가?’를 말씀으로 확인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자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모든 행동이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적용시키는 증인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12년 된 혈루증 환자는 십자가의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는 오직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사실을 혈루증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십자가 안에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을 때 이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제가 어제 아내에게 온 카톡 동영상을 봤는데, 세 살 된 쌍둥이가 할머니 흉내를 내는데 찬송가를 불러요.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에 ‘주여!’하고 부흥회 흉내를 내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제 아내는 우겨 죽겠다고 난리에요.

부흥회 흉내를 낸다고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몸이 아파봐야 돼요. 내 몸, 내 재산, 내 젊음이 다 나의 것인데 이 나의 것에 상처가 나야 돼요. “누가 내 것을 건드려? 감히 누가 내 인생에 흠집을 내. 누구야, 마귀야?” 주님은 “네가 바로 마귀다.”라고 하십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는데?”

상처가 났을 때, ‘주께서 상처를 회수해 가시는구나.’ 욥에게 상처를 주시고 그 상처를 회수해 가시잖아요. 가져가면서 잊었던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혈루증 여인이 어떻게 주님께 처신했는지 보게 되지요.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몰래 뒤에서 옷을 만졌지요. 그 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어요.

누구의 믿음입니까? ‘네 믿음.’ 그러면 이 여인의 믿음은 어떻게 해서 생긴 믿음입니까? 12년 동안 안 아팠으면 나올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12년 동안 아프게 하신 그분이 믿음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것이 총괄적으로 십자가를 믿게 하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했지요.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십자가가 모든 것의 마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이 결국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난 거예요. 오늘 치과에 간 것도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에요.

치과에 가서 의사에게 들은 말이 “혀에 힘주지 마세요.”라는 거예요. 일부러 혀에 힘을 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입을 벌였는데 이가 아프니까 자동적으로 혀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의사가 혀를 강제로 눌러요. 주님 앞에 우리가 살아갈 때 자꾸 우리의 행함이 나옵니다. 이 행함을 성령으로 꾹 누르면 그 때 십자가가 보입니다.

‘아, 십자가를 내 행함으로 가렸구나.’ 그런데 행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과거를 염두에 두니까 행함이 나오는 거예요. ‘과거보다는 더 나아야 해.’ 이런 생각이죠. 그런데 성령이 와서 우리의 행함이 상관없다는 것을 알려주면 ‘아, 내가 십자가를 잊어버렸구나.’ 혀에 힘을 줬는데 강제로 혀를 누르니까 ‘내 행함이 불필요한 것을 또 잊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예상 외로 일이 잘 풀릴 때는 십자가를 잊어버려요. 내가 행동을 잘 해서 복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쳤습니다. 이것은 ‘죽은 아들 때문에 네가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란 자격으로 미리 앞당겨 이 땅에 잠시 등장한 거예요.

아들을 낳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아버지가 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가 아니라, 이삭이 아브라함을 낳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 때문에 마리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왜냐? 예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니까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주를 위하여 지어졌습니다.

5장 30절에서 예수님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십니다. 이게 지금 예수님이 연기하시는 겁니까? 예수님은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 나간 것을 자신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인간들이 보기에 12년 혈루병 앓은 여인은 아무것도 아닌 비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이 자기 시선으로 보니 혈루병 여인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내가 잘났다’는 사람은 비켜가고 우리들이 보기에 못난 사람을 찾아갑니다. 타인은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자입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은 이미 나에게 환원된 사람이에요. 시시해서 보기도 싫어요.

그런데 내가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사람, 영원히 나의 것이 되지 못할 사람을 제자들 앞에 주님이 세웁니다. ‘내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야?’라고 물으니까 제자들은 뻔한 대답을 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주님은 지금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특수한 사람을 찾습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특수자의 신분에서 특수자를 위해 죽는다는 사실을 제자들도 몰랐어요. 왜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은 보통 사람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배반했잖아요.

베드로에게 특수자는 권력자들뿐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보다 못해 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된 자가 체포하는 자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자란 사실을 베드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보다 못한 분이 나를 구원하실 분이란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나보다 못한 분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보다 못한 존재보다 나는 더 못난 존재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 나의 자리인 것을 잠시나마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한 형편에서는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보다 더 못한 존재인 것을 인정해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음을 받아들여야 해요. 비록 저 여자는 청소부이지만 건강에 대해서는 나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교회도 의사들이 있는데 어제 저희교회 성도님 병원에 가서 공짜로 링거를 맞았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그 여 성도가 내과 전문의인데 자기도 다른 내과에 가서 치료중이랍니다. 자기 병원에 많은 환자들이 찾아와요. 내시경을 한 달에 200건 넘게 한답니다. 그러니 그 의사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과 의사들끼리 서로 상담하면서 치료를 한답니다. 항상 나보다 못한 소자가 우리에게 십자가를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무시하는 자보다 더 무시당한 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뜻이 함유된 것이 바로 12년 혈루증 앓은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병이 나았지요. 그 이후 예수님은 회장당 집으로 가지요. 그런데 회당장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불고불과 난리가 났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니까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비웃음을 살만한 요인을 제공하신 거지요.

죽은 아이를 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경험한 바이지만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비웃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 제대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을 방송국에서 초청하거든 방송국 PD가 비웃는 말을 하세요. 시청자가 비웃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복음 전한 것입니다.

비웃지 않고 여러분을 존경한다면 뭔가 잘못 된 거예요. 비웃음을 당하도록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아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술어가 달라야 합니다. 주어 뒤에 오는 술부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술부가 와야 돼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복음을 이미 들었잖아요. 본문을 보면 어떤 설교가 진행될 것인지 예상을 하는데 그 예상을 비켜가야 해요. 그 설교를 비웃고 다시는 그 설교를 듣지 않겠다는 사람이 생겨야 해요.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약아서 ‘저는 이 설교를 듣고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압니다. 그 잘못된 부분은 목사님이 채워주세요.’ 이렇게 나오니까 저는 그 부분을 채워줘야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

죽은 자를 향해 ‘잔다’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용어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 다 ‘잔다’고 하지는 않아요. ‘잔다’고 하셨을 때는 예수님이 반드시 깨워줄 자라는 말입니다. “주님 만나기 전에는 영원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소급에서 처음 죽은 것도 죽음이 아니었고 잠자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님 오기 전에는 ‘잔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을 몰랐는데 주님이 등장해서 잔다고 하시면 자는 것이고, 죽었다고 하면 죽은 것이다.” 이렇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어요. 이것을 누가 비웃어요?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이 다 비웃었지요. 주님이 비웃음을 유발하는 말씀을 계속 하셨어요.

사람들의 관심사는 죽은 야이로의 딸이 어떻게 사는가, 죽은 나사로가 어떻게 사는가 이 점에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관심 둔다는 자체가 결국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야이로라는 동그라미 속에, 이것이 야이로의 현실입니다. 야이로의 시선으로 봤을 때 딸이 죽었습니다. 안타깝고 괴롭지요.

그런데 이 경계선에 누구를 초청했습니까? 예수님을 초청했지요. 야이로는 지금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예수님을 초청하는 순간 이 경계선이 예수님이 주체가 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현실에 예수님이 잠시 도와주러 온 것으로 생각한 거지요. 이 야이로의 오해는 오늘날 우리들의 오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당 증축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합시다.” 이게 무슨 뜻입니다. 교회 증축은 자기들 현실이고, 여기에 예수님을 초청해서 자기 뜻 이뤄 달라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있는데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진짜 ‘역사하는 힘’은 이 경계선 자체가 인간의 문젯거리인데, 이 문젯거리를 구겨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이 종이가 자식이 가져온 성적표라고 한다면, 무서운 엄마는 성적표를 보고 자식에게 “회초리 가져 와!”라고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엄마는 성적표를 찢으면서 “학교 가지 마!” 이렇게 나옵니다. 이 때 자식은 놀라지요. 부모님이 자식을 교육할 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얘들이 주체잖아요. 그들이 예상 못할 술어를 달아줘야 얘들이 겁을 냅니다. 그런데 얘가 예상하기를 1) 회초리로 때릴 것이다. 2) 화를 낼 것이다. 3) 엄마가 실망하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처럼 얘들이 예상하는 범위 내에서 엄마가 행동하면 엄마는 얘들 손아귀에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4번까지 번호를 제시하면 엄마는 5번으로 답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상 못하는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남편이 술 먹고 놀다가 새벽 3시에 귀가하면서 예상을 합니다. 아내가 화를 낼 것이다. 이불 뒤집어쓰고 못 본 척 할 것이다. 나가라고 고함을 칠 것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뭘 해야 하는가? 남편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큰 충격을 받을 때 그 효과는 30년 갑니다.

왜 아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남편을 사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네 인생은 네가 살아라. 내 인생은 내가 살게.’ 이런 식이지요. ‘우리 피차 선은 지키면서 살자.’ 이렇게 나오지요.

주님은 ‘잔다’는 표현으로 야이로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자들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은 비웃었지요. ‘죽은 것이 확실한데 잔다고?’ 이 때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잔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깨웁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명하셨습니다.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후 소녀와 야이로, 그리고 그 광경은 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 전부터 이 딸과 이 집은 예수님께 속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로의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아쉬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특이한 사건들을 유발시켜서 그 사건의 의미를 주님이 해소해 가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나의 일은 없고 모두가 주님의 숙제입니다. 이 말은 앞으로 숙제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모든 것이 완료되었는데, 이제 그 절차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이 십자가를 위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일이 십자가 중심이라는 간단한 공식만 우리가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8. 12. 08:2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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