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광주강의
2016-05-28 01:29:52 조회 : 1253         
등록 16052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서경수(IP:14.♡.78.242) 16-06-02 10:04 
광주 강의(2016. 5. 27) 27-1

마가복음 8장 11-13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여기 바리새인들은 인간 세계의 대표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 세대에 속한 어느 누구도 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믿을만한 건더기를 주시면 믿겠습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당신을 믿어줄 테니 우리를 설득시켜 보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깊은 탄식’입니다.

이것은 두 개의 층(2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두 개의 층이 있습니다. 수학에 위상학이 있는데, 위상이란 말을 쓰는 취지를 알아야 해요. ‘시작과 끝은 의미 없다.’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직선’입니다. 직선은 단층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은 항상 직선적인 단층만 생각합니다. 왜냐?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의미가 본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의미란 자신의 변화에 대한 해석입니다. ‘내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물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에게 의미 없는 것은 밀쳐냅니다. 밀쳐내면 무엇이 발생되는가 하면, ‘바깥’이 발생됩니다. 찌꺼기들은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쓰레기는 집 밖에 버리지요.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권역 밖으로 버리는 것이 있어요. 자신이 심사숙고해서 ‘이것은 내 의미를 구축하는데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은 바깥에 내놓습니다. 찌꺼기고 배설물이죠.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 자신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아져요. 현재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고 인간의 의미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것, 이것이 인간의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소유욕이 전제되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표적을 보여라.’고 했지요. 이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대상으로 삼는 것은 존재한다고 다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의미가 될 것 같은 목표가 대상이 되고, 여기서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들은 나의 소유로 삼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입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을 따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자신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기도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내 소유가 많아질 것을 기대하기에 교회 다니는 겁니다. 사업이 망하고, 몸이 병들고 해서 원상회복 또는 과거보다 더 좋은 것을 얻고 싶을 때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해요. 교회에 가고, 기도를 하고, 봉사도 합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내 결핍을 채울 수 있고, 내가 손해 본 것을 만회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여기에서 질문하겠습니다. “왜 당신은 원상복구 하려 합니까?” “나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왜 당신이 유지되어야 합니까?” 여기에서 말문이 막힙니다. 겨우 하는 말이 “너도 그렇잖아!”라고 공세를 펼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릅니다. 스스로에게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는 이유를 몰라요.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자신이 망해야 될 이유를 본인이 평소에 찾지를 않아요. 남은 망해도 괜찮은데 본인은 절대 망해서는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은 이 세대에서 궁극적으로 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어머니 마리아가 예상했습니까, 제자들이 예상했습니까? 아무도 예상 못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예상 못했고, 베드로는 그 일에 적극 반대했을까요? 그것이 망하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망하는 길로 가셨지요. 그 이유는 본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이것이 진리로 확정되면 우리 안에는 처음부터 망해야할 속성이 담겨있는 거예요. 따라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망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주여, 언제 저를 망하게 하시렵니까? 의미도 가치도 없는 나를 왜 아직 살려 두십니까?”라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망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망하는 이유를 탐색하며 살지 않아요.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을 궁리를 해요.

사람들은 무조건 살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기에 예수님을 만나든 무엇을 만나든 자신을 살리는 쪽으로 이용하려 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만나도 그를 이용해서 내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처음 만나는 대상은 엄마, 아빠지요. 어릴 때는 엄마, 아빠를 대상으로 삼아요. 좀 더 커면 범위가 넓어집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가면 예수님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내가 살 가치가 있고,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복 주셔서 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너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만 거기에 영생이 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설교의 결론으로 나와야 하는데, ‘이것 알면 뭘 주십니까?’ 라는 식으로 결론이 아닌 과정으로 생각해요. “우리 다같이 예수님처럼 죽읍시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가 주님과 함께 영생합니다.” 라고 설교를 끝내면 사람들은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믿으면 무엇을 주십니까?”라고 나와요.

층이 달라서 그래요. 두 개의 층이 있다는 것은 아래층과 위층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연결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두 개의 층을 두신 겁니다. 아래층에서는 인간이 자기 의미를 고수하기 때문에 항상 끝에 희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위상적으로 보면 그 끝은 지금 여기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밀실(비밀창고) 같은 것을 염두에 둡니다. TV드라마에 보면 회장님 사무실에 가면 책장 뒤에 금고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사람들이 밀실을 꿈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내가 알아서 그것을 통해 더 풍성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런 심보를 가지고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흥하려 했기에 예수님 말씀에 대해 거부감이 일어나고 충돌이 발생한 겁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주를 버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베드로는 ‘목숨 바쳐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러나 주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너는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작 말씀해 주시지 이제 와서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고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두 층이 있는데, 이 층을 점선으로 표시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 층은 없습니다. 없는 것이 예전부터 있었던 경우는 뭔가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의미가 삭제당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감잡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렇다면 나는 나의 의미를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나와요. 포기해야 본다고 하니까 포기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숨어있는 천국을 기어이 보겠다는 욕망이지요. 이건 꼼수입니다. 꼼수는 주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간에 대한 의미는 언제 삭제되는가? 예수님은 유일하게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가실 때 예수님을 따라 간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의미를 추구하다 보니 자기 의미와 무관한 것은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그 밀어냄에 의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밀어내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패쇄적 영역을 만듭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밀어낸 세력이니까 그 전체가 쓸데없는 것이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배반을 받은 예수님은 배반의 장미로 가시같은 성령을 보냅니다. 괴테는 ‘십자가에 장미로 장식하지 말라’는 말을 했어요. 십자가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인간에게 낭만은 꿈과 이상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서 뭔가를 기대하는데 그 기대하는 바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얼마나 화사하고 아름답겠습니까? 자신의 소망을 그리니까 검정색은 아니고 분홍색이 많을 거예요. 십자가가 아름다운 것입니까? 아니죠. 무섭고 두려운 곳이라 아무도 그쪽으로 얼굴을 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지신 주님을 보기 싫어했고 외면했지요.

하여튼 인간이 전력을 다해 밀어낸 찌꺼기 중에 십자가가 섞여 있습니다. 밀어낸 이유는 나를 살리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기에 밀어냈고, 그렇게 해서 밀려난 예수님이 성령을 보냅니다.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죠. 성령이 오면 세상 관점이 아닌 예수님 안목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이 왔다면 내 안에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온 거예요. 그 이질적인 것이 위상적으로 뭐냐 하면, 내가 싫어한 그분의 세계가 내 안에 들어 온 겁니다. 그러면 나의 육신은 계속 그분을 육신의 본성에 따라 끊임없이 밀어내려고 하겠지요? 우리의 밀어내는 힘과 우리를 버리지 않으려는 성령의 힘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발생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입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위상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 모습이 보고 싶은 겁니다. ‘나는 이토록 예수님을 싫어하는데 주님은 싫어한 나를 기어이 구원하겠다고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증거케 하신다.’ 성도의 입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고백됩니다.

성령이 오면 내 쪽에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계속 밀어붙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이기 때문에 어린 양이 피 흘린 의미를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냅니다. 비밀은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위해서만 드러냅니다. 나를 위해서 복음이 비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밀실을 보여주는 주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왜 밀실에 대해 궁금해 합니까? 천국이 어떤 곳인지 왜 궁금하지요? 내가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이지요. 거기에 장단 맞춰 비밀을 알려주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주님의 비밀 공개는 오직 주님의 모든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만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고백이 한결같아요. ‘예수님만 나의 주님이시다.’ 이것만 고백해요. ‘주님 때문에 내가 이익을 봤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고 주께만 영광 돌리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주님을 밀어내고, 앞으로도 밀어낼 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비밀 공개 작업에 엮여 들어갑니다. 내가 주님을 싫어하는 것마저 결국 예수님의 주 되심을 높이는데 활용됩니다. 우리는 엉망진창으로 사는데 주님은 그것을 통해 더욱 높임을 받게 됩니다.

내가 망한 것이 내가 잘못해서 망한 것이 아니고 망해야만 되기에 망한 거예요. 그래야만 주께 영광이 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철저하게 하나님 하시는 일에 동원되고 하나님은 실수가 없습니다. 덩달아 내가 하는 일도 실수가 없어요. 그리고 책임도 없어요. 왜?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는 판정은 주님이 하시고,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성도를 보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네가 무엇을 근거로 네 행위를 자화자찬 하냐?”고 묻으면, “내가 한 행동이 십자가 앞에서 모두 죄로 드러났다는 사실이 내가 있어야 할 의미의 전부다. 그래서 나는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래층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의’지요.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추구하잖아요. 자기 의를 다른 말로 하면 순수성, 순수함입니다. 오점이 없이 깨끗하고 투명한 삶을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순수함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순수함과 같은 것입니까? 다르죠.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 반대입니다.

이 순수함이 인간의 꿈이 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꿈을 꿀 필요 없어요. 인간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 세대에서 나온 꿈이에요. 꿈의 의미는 자신에게 누적이 됩니다. 인간의 모든 꿈은 하나님께는 적이 되고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내용뿐입니다. 경건, 거룩, 순수함을 아무리 표방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등록’으로 하겠습니다. 등록이란 나의 것이 나를 벗어나 어떤 구조나 체계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 세대에 등록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이 세상에 등록하지 말라. 생명책에 네 이름이 등록되었다.’고 하십니다. ‘네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등록되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이 ‘이 세대’라고 하실 때 무엇을 의식하고 하신 말씀인가 하면, 인간 개인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단체로 이 세대에 등록되었다는 안목으로 주님은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개인 구원은 성립이 안 됩니다. 구원은 집단 구원뿐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자질은 구원에 무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 죽은 아이들끼리 비교할 수 있는 자질의 차이가 있습니까? ‘어떤 아이는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고, 어떤 아이는 안 찬다. 기저귀 차는 아이는 죽이라.’ 이런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이 세대가 권력 체제로 짜여 있는 거예요. 헤롯은 두 살 아래 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죽은 자식의 어미가 통곡을 합니다. 왜 통곡합니까? 자기 자식이 죽었기에 통곡하지요. 그러면 이 부모들이 나서서 헤롯에게 시위를 해야 하잖아요? “네가 뭔데 내 자식을 죽이냐?”고 항변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대항할 수 있나요? 없어요. 왜냐? 헤롯이나 죽은 아이의 부모나 다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왕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식은 각자 부모의 자식입니다. 권력 아래 있는 사람은 뭐든지 자기 개인적 가치가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개인적 가치를 추구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집단적인 테러를 당하고 횡포를 당할 때 그들은 그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면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호에 타고 있다가 배가 침몰해서 배에 탄 대부분의 학생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몇 명은 구조되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안 죽은 부모들은 자식이 죽은 부모만큼 슬퍼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상황을 보면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자식을 잃어버릴 때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면, 물에 빠져 죽지 않고 멀쩡하게 학교 잘 다니고 있는 자식이 사실은 나의 자식이 아니고 이 어두운 세상에 소속된 자식일 수 있다는 것을 감 잡아야 됩니다.

이 말은, 내가 이 세대에서 빠져나오려야 빠져나올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 지금은 내 자식 안 죽었다고 좋아하지만 앞으로 어떤 사고가 나서 내 자식이 죽게 되면 슬퍼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왜 헤롯에게 대들지 않습니까? 정답은 간단해요. 대들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헤롯은 권력이 있고 불쌍한 여인들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권력이 왜 없습니까? 그동안 살아온 것은 헤롯의 통치 덕분에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기존의 권력에 의해서 살아왔으니까 왕이 죽이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죽은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이것이 뭐냐? 주님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태복음 2장 16-18절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당하면 당하는 대로 아무소리 못하고 ‘세상이 그런데 뭐. 재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권력의 횡포에 당해도 ‘내 새끼는 내 새끼다.’라는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만약 이 중 성도가 있었다면 어떻게 나왔겠어요? “주님이여,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했을 거예요. 왜냐?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된 일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오신 효과로 내 것은 없고 예수님의 새로운 권력에 소속된 자는 모든 일이난 일이 예수님을 위하여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기에 거기에 엮여진 것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되겠지요.

빌립보서 3장 7-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예전에는 세상 권력 속에 있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권력 속에 놓여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러면 배설물을 왜 그동안 챙겨왔습니까? 배설물마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것이었기에 내게 있었습니다. 말썽부리는 자식도 다 주님이 필요하셔서 두신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자식들도 예수님과 관련되어 내 몸을 통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괜히 믿음 있는 척, 아이에게 믿음 없다고 미워하고 욕하지 마세요. ‘아이고, 귀한 내 새끼, 고맙다.’라고 하세요. 이렇게 하되 내 새끼라서가 아니고 주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그런 눈이 있어야 내가 주님과 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이 표가 나는 거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자식과 남편, 아내도 주님께 의미가 있어서 같이 살게 하신 겁니다.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 차별 없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데 내가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할 이유가 없지요. 그것이 ‘등록’입니다. 제가 등록이란 말을 쓴 이유는, 현실은 개인이 개인을 책임질 위상학적인, 입체적 모양새가 아니에요. 내 개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체제가 전제되어 있고, 나는 체제의 의미를 보여주는 지점으로 있을 때 그것을 ‘등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와서 도 닦으면 불교 신자가 됩니다. ‘끝을 보고 싶다.’ 끝은 이미 석가모니가 이야기했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어요. 이 말의 의미는 ‘너 자신이 신이다.’라는 것입니다. ‘네가 신인데 왜 신은 믿느냐?’는 것이지요. ‘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성을 발휘해라. 그러면 되지 왜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너 아닌 다른 신을 찾는가?’ 라고 했어요.

‘인간이 얼마나 무지했기에 자신이 신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신을 찾는가?’ 라고 기독교에 대해 욕을 한 것입니다. 다음 부산 강의에서 니체를 공부할 생각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이란 인간의 펼침이다.’ 신을 펼치면 인간의 속성이 가득 담겨 있어요. 인간을 쥐포 만드는 기계 속에 넣으면 납작하게 되겠지요. 그 쥐포 된 것이 바로 신입니다. 왜냐? 내가 생각한 나의 신이라야 내가 납득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나에게 의미 있다고 해줘야 그 신을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 8장 12절에 나오는 ‘표적 구하기’입니다. 자기가 믿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거예요. ‘내가 믿어줄 테니 납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한 겁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등록’으로 대꾸했지요. ‘그런 소리 하는 것을 보니 너는 이 세대에 등록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한 통속으로 묶여 있는 겁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밀려서 죽임을 당하시고 이 세대에서 빠져 나온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바깥에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바깥 세계가 위상학 적으로는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한 통속이 되어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실 표적은 뭡니까? 십자가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메시아로 볼 표적이 뭐냐? 이것은 너희들이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안 망해야 돼.’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결국 너희를 망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는 증거는 뭡니까? ‘나는 진작 망해야 될 자인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라는 고백이 성령 받은 사람의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직업,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성령이 오기 전에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성령이 와야 비로소 이것이 성립됩니다.

10분 쉽시다.

(2016. 6. 2. 08:45 녹취 마침)
 서경수(IP:220.♡.152.15) 16-06-22 11:38 
광주 강의(2016. 5. 27) 27-2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개인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소속되어 있으면 권력이 작용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상대할 때 개인을 상대한 것이 아니고 이 어두운 권력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권력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을 모르고 나에게 손해되지 않고 이익이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비밀이 됩니다.

비밀이 공개되는 것은 비밀 자체를 위해서만 공개됩니다. 나 좋으라고 비밀을 알려주는 경우는 없어요. 비밀을 공개하는 순간 우리는 비밀에 잠식됩니다. 그래서 비밀에 대해서 알고싶어 하는 나 자신이 비밀 속에 등록이 되면 그 다음부터 주님이 귀신 들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예수 믿는 우리도 이 세대에서 귀신 들린 자로 잠식이 됩니다.

주님을 향해 미쳤다고 한다면 우리는 덩달아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주님 하시는 말씀이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고 하셨어요.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아도 개인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 구원이 없다는 것은 개인은 의미 없고 가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은 나의 유익을 생각하며 성경 말씀을 봅니다. 저는 “당신 소속은 어디입니까?”라고 묻는데 상대는 “저, 어때요?”라고 나오니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입니다.’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는 ~입니다.’라고 답해야 합니다. 소속을 밝히는 것이지요.

8장 16-17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서로 의론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론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실 때, 예수님은 이 어두운 세대를 대표하는 바리새인 집단을 두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떡을 챙겼느냐?’는 말씀으로 들은 거예요. 누룩이 이 세대의 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제자들이 말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이 세대와 전혀 무관한 새로운 세대를 구성하기 위한 말씀으로 그들은 이해를 해야 돼요. 그런데 제자들의 해석은 여전히 이 세대에 속해 있는 식으로 대꾸를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왜 표적을 구했습니까? 예수님이 진정 믿을만한 분인지 알아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주었습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그들에게 표적을 안 준 것이 아니라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대란 질소와 산소로 된 것이 아니고 수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어요. 이 세대는 이미 권력에 등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나만 잘 되면 그만이고, 내 인생은 내가 챙기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마태복음 2장을 언급하면서 설명해 드렸지요?

헤롯이 명령하니까 베들레헴에 있는 아이들이 다 죽었잖아요. 그것이 우리가 사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권력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저 자기 일을 할 때는 자기 일에 충실한 것 같지만 위에서 고함치면 우리는 꼼짝 못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어요. 북한 주민들의 사고방식은, 굶어 죽어도 김정은 지도자 동지가 최고라고 높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북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천지, 통일교, 안식교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노인들을 속이는 건강식품 판매원 주장을 들어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의미를 구할 때 그 의미는 이미 기존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 중에 골라서 저것은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델은 타인입니다. 여러 사람 중에 내가 부러운 대상이 생기면 그 사람이 나의 모델이 됩니다. ‘당신이 가진 것 나도 갖고 싶다.’는 것이지요. 이 자체가 하나의 권력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 잘 되면 그만이다.’ 라고 합니다. 사실 내가 잘 되겠다는 것은 이미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갖겠다는 것인데 이건 바로 우리가 이 세대에 등록되었다는 것입니다.

등록된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바리새인들만의 요구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마저 기대하는 바입니다. 제자들도 세상 사람들이 다 갖기를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주시기를 원했어요. 이것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 악한 것들입니다. 이것을 구하는 이유는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육’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전체가 육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둠’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 어둠 속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즉 관계성 속에 위치를 점한 것이지요. 달리 표현하면 이 세상은 장기판입니다. 장기 알은 각자 기능이 있지요. 포, 차, 마, 상, 졸 등. 자기 역할에 따라 기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예수님과 전쟁하면서 부리는 차, 또는 포입니다. 그런데 포나 차가 움직이면서 자기가 움직이는 의미를 알까요? 모르지요. 그러나 나를 움직이는 마귀는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기 위해 온갖 수작을 다 부립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묻습니다. ‘왜 더운 것을 불평하느냐?’ ‘더우면 땀이 나잖아요.’ ‘왜 땀나면 안 되는데?’ ‘땀나면 귀찮잖아요.’ ‘네가 뭔데 안 귀찮아야 되는데?’ ‘그건 모릅니다.’ ‘그럼 너는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왜? 그 누구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제가 예전에 담양 대나무 숲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는 대나무만 있어요. 똑같아요. 하나의 군집을 이루고 있어요. 그런데 자기들은 대나무인줄 몰라요. 왜? 자기는 현재 있는 세계 외에는 알지 못하기에 다른 나무가 있는지 조차 몰라요.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인간은 존엄하다고 합니다. 왜 존엄한지 물으면 답을 못합니다. 무조건 존엄하다고 우깁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밖에는 몰라요. 주님은 이 세대의 누룩, 즉 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떡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집단을 고려해서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살던 습관이 있어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론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무엇을 주의하라고 했습니까?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지요. 누룩은 뭣 하는 것입니까? 밀가루를 부풀리는 재료지요. 누룩과 연관된 것은 떡입니다.

예수님이 누룩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떡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포함해서 ‘우리’라고 하느냐, 나를 빼고 너희들끼리 ‘우리’라고 하느냐?” 물은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을 포함해서 ‘우리’지요.”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예수님이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잘못 말한 것에 대한 주님의 잔소리가 계속 이어집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계속 반복해서 들으면 짜증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아내들이 남편에게 잔소리 할 때, 처음에는 귀담아 듣는데,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지배당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짜증이 나요. 남편으로써의 내 자리가 아내에게 잠식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본능적으로 내 자리를 찾고 싶어 해요. 그 때 자기 자리를 찾는 방법은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잔소리 그만 해!” 이런 식으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했어요. 이것은 잔소리가 아니고 ‘이것이 너희의 실체다.’라고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6장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지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아 세운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말씀을 홀로 다 성취하실 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능한 제자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주님 말씀은 너무 심한 말로 오버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야지요. “사실 내가 말한 것은 떡의 누룩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얼마든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눈, 귀를 거론하면서 모욕을 주느냔 말이지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면 이것은 괴물입니다.

제자들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괴물인데,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주님만이 진정한 구원자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제자들 하나하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등록되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구원한다는 말은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본인이 뽑아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실수나 무능력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마세요. 우리 몸은 내가 조성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배급 받은 거예요. 내 요구사항을 듣고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 이 몸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걱정합니까? 주님 말씀은 ‘걱정을 해도 내가 한다.’는 겁니다. 죄인이 벌 받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죄인은 죄 값을 받는 것이 마땅하잖아요. 우리는 죄인이라 죄 값을 받아야 하는데 이정도 숨 쉬고 산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지요.

인간은 왜 몸에 집착을 하는가? 이것은 불순한 이 세대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마귀뿐입니다. 마귀에 소속된 인간은 예수님을 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마귀의 권력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 순종하는 모습이 예수님과 관계없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자아도취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오후 설교에서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보편성과 일반성을 구분했습니다. 뿌리가 다른데 결국 하나가 되면 그것은 보편성이고, 뿌리는 같은데 나중에 다양하게 되면 그건 일반성입니다. 인간은 보편성이 아닌 일반성입니다. 인간은 얼굴이 다 다르지요. 처음 태어날 때는 다 비슷합니다. 아기 사진을 보면 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성정하면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집니다.

우리는 인간이란 종, 호모 사피엔스라고 하는데, 종이란 같은 부류라는 것입니다. 종에서 존엄성이 나와요. 인간이니까 서로 사랑하자. 평등, 박애, 자유 이것이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의 모토인데, 평등은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왜냐?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이기에 남과 평등하면 약이 올라서 못삽니다. 똑같은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뭔가 달라야 합니다. 다른 만큼 행복해요. 새 옷을 입고 나갔는데 자기와 똑같은 옷을 입을 사람을 만나면 기분 나빠요.

주님은 인간을 똑같이 만들었어요. 그러니 주님 앞에 개인의 자질이나 행함을 거론할 수 없어요. 그런 인간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봅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각자 주의 일을 해도 주님은 불법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주와 함께 영원히 살 사람은 예외 없이 전부 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을 패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려 함이다(마5:17)’고 하셨고,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킴을 받은 자에 한해서 천국에 갑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역량이나 자질이나 노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혜택을 입은 집단이 주님의 능력으로 천국 갑니다. 이런 혜택을 입은 사람은 ‘내가 잘 해서 구원 받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주님 공로라는 근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주님의 공로가 되려면 자기는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잘났다면 잘만 부분만큼 주님이 안 보입니다. 아이가 야구를 하다가 유리창을 깼습니다. 조금 깨지나 왕창 깨지나 주인의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물을 수 없어요.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일점일획이 뭡니까? ‘어느 것 하나도 지킨 것이 없습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해요. ‘성경의 어느 구절도 제가 지킬 수도 없고 하나도 지킨 적이 없습니다.’이것이 정답입니다. 이것을 색깔로 표현하면 검정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색깔이 뭡니까? 다 검정입니다. 그래서 헤겔이 이런 말을 했어요. “밤중의 모든 새는 까맣다.”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가 말한 것을 헤겔이 인용한 것입니다. 밤에는 젖소, 들소 구분 없이 다 검정색으로 보입니다. 성도는 다 시꺼먼 사람들입니다. 시꺼먼 사람의 배경은 너무나 하얗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어떤 말을 했습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메시아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지요. 그것이 시꺼먼 거예요. 주님은 어떤 차원에서 봅니까? ‘제자들아, 너희들이 시꺼먼 속에 같이 있었다.’ 이런 차원에서 ‘너희들이 누룩을 주의해라.’ 즉 ‘너희들은 바리새인과 같은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주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니고, “떡 챙겼냐는 말씀이지요?”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을, ‘떡 잘 챙겨라.’는 말로 이해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고 하신 거예요. 그리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고 계속 잔소리를 하신 거예요.

20절을 보면, 떡 일곱 개를 4,000명이 먹고 남았지요. 그러면 4,000명은 4,000이 아니고 하나가 되겠지요. 그리고 떡 일곱은 7이 아니고 한 분에게서 나온 하나지요. 즉 집단 대 집단으로 보는 거예요. 집단을 위한 예수님 한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 한분 나 한 사람, 이렇게 보면 안 되고, 예수님이 새로운 집단을 만들 사람이 바로 나라는 고백을 가지고 예수님을 쳐다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를 제외한 저쪽 집단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이 통째로 누룩이 됩니다. 사단의 지배를 받는 지옥 갈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 중에서 너희 집단은 빼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친히 개입하셔서 뽑아내어 새롭게 ‘우리’를 만드신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집단화, 즉 하늘나라에 등록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손에는 큰 담요가 있는데, 이것은 1인용이 아닙니다. 이 담요는 여러 명을 덮을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함께 이 담요에 덮인 사람은 천국 갈 자들입니다. 이런 담요를 가지고 왔다는 것은 위상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지금 같이 있는 것입니다.

같이 있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있는 곳이 끝이요, 또 이곳이 시작입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끝날까? 치매 걸려서 죽을까, 아니면 평안하게 죽을까?’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추억은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조립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꿈이라고 합니다. 꿈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배열하는 것뿐 전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기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예요. 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단, 내가 이렇게 살아도 이것이 하늘나라를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식탁 위에 사과는 없고 참외만 있는가? 주께서 이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현재의 내 몸이 내 몸이 아닙니다. 왜 아픈가? 주께서 아프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 남 탓하지 마세요. 주신 자도 하나님, 취하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제발 우리 뒤에 붙어있는 라벨을 떼지 마세요. 라벨은 처음부터 있었는데 성령 받은 후에 보니까 라벨이 보입니다. 라벨은 보면 사이즈가 얼마인지 재질이 무엇인지 다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의 모든 것이 이미 다 기록되어 있어요.

이것을 모르면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의 잔소리를 계속 듣게 됩니다. 21절에 보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지요. 주님이 오버하시는 것 같아요. “누룩을 주의해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예, 떡 챙겼습니다.” 이 말 밖에 안 했어요. 이 말 했다고 예수님은 연속적으로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담요로 덮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세계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알게 됩니다. ‘주님 보고 싶어요.’ 라고 울 필요 없어요. 성령 받으면 끝난 문제입니다. 보아도 알지 못하는 눈 가지고 보면 뭣합니까?

22-26절을 보겠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님께 데려왔지요. 그러면 소경을 데려온 사람은 소경이 아니지요? 보편성도 아니고 일반성도 아니고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한 사람은 소경이고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은 소경이 아닌데, 이 소경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기대한 것이 뭐예요? 소경을 보게 해서 우리 있는 곳에 복귀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을 보게 하신 후 그에게 당부하시기를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사람 대 사람의 차이를 개인 대 개인의 차이로 인식합니다. 주위에 소경이 있다면 나는 소경 아닌 자가 됩니다. 어느 누구도 소경을 보면서 ‘나도 소경인데’라고 할 자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왜 망해야 합니까?’라고 주님께 묻는 사람이 없어요. 자신은 멀쩡하지 않아도 멀쩡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들은 어려움이 와도 나는 어려움이 오면 안 되고, 남들은 불행해도 나는 행복해야 되고. 왜 그래야 됩니까?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까?

저는 북한에 살지 않고 남한에 사는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배급도 없고,  힘들게 일해도 배고프고, 모든 삶에 통제를 받기에 자유를 누리려만 탈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남한에 태어나서 탈북 할 필요가 없잖아요. 모차르트를 부러워한 작곡가 살리에르가 있는데, 이 사람은 늘 ‘나는 왜 모차르트처럼 천재가 되지 못하는가?’ 불만이 많았어요. 그러면 모차르트는 젊어서 죽었는데 그건 왜 안 부러워합니까?

사람이 몰라도 너무 몰라요. 예수님만 세상에 대해서 알지 인간은 본인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고, 세상에 대해서도 몰라요. 그래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못 알아듣고, 주님이 내 모습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셔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소경을 예수님께 데려 왔습니다. 우리는 보는데 소경은 저주 받아서 보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우리처럼 소경을 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경에게 보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2중으로 보게 하십니다. 23절을 보면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지요. 제자들 보기에 예수님이 소경 눈에 침을 뱉으시고 곧바로 보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예수님은 침 뱉으신 후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지요. 왜 사람 감질나게 만듭니까?

첫 번째 봤을 때 만물이 보였습니까? 아니죠. 뭔가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소경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마을에서 나왔지요. 마을이라는 집단에서 나왔기 때문에 소경에서 눈을 떴을 때 그 모든 과정을 마을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데 전혀 모른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소경이란 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는 마땅히 눈 떠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단계별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 볼 수밖에 없는 예수님께 종속된 자라는 점을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눈이 보이니까 다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내가 정당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데 눈이 보이니까 죄인 아닌 의인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들은 주께서 보게 한 만큼만 본다는 이 놀라운 주님의 은총이 삭제된 체 하나의 집단을 이룬 거예요. 우리는 그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같은 대나무뿐입니다. “너는 좋겠다. 키도 커고 몸통도 굵고.” 그래봐야 같은 대나무입니다. 키 커고 몸통 튼튼한 것은 대나무 집단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간이 못 들어갑니다. 그럼 누가 들어가는가? 예수님처럼 된 사람만 들어가요.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의를 갖춰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출제하고 또 답도 냅니다. 3+2=5 참 잘했어요. 이것은 자기 세계지 주님의 세계가 아닙니다. 불교는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부처의 세계지 예수님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전부 부처의 세계가 되었어요.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처럼 되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을 받았을 때 시몬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들처럼 될 수 있습니까?” 베드로, 요한은 미안해요. 왜냐? 본인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시몬은 돈을 주며 “이 능력을 내게도 주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돈 한 푼도 안 받고 소경을 보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한 정도로만 보게 했습니다. 그 후에 다시 밝히 보게 하셨습니다. 이 때 소경이 뭘 생각하겠어요? “나는 처음부터 만물을 보아야 했는데”라고 생각했습니까? 아니죠. “나에게 만물을 밝히 보게 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며 예수님을 보겠지요. 이게 십자가만 증거하는 말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 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옹호해서는 안 돼요.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만 옹호해야 돼요. 이게 십자가의 보편성입니다. 내 개인의 보편성에서 예수님이 간섭하셔서 십자가마을을 형성해요. 이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마을에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새롭게 눈을 뜬 사람은 과거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자신이 눈 뜬 것을 설명해도 (예수님 덕분에 보게 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소경이 눈 떤 것을 보고 “나는 망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 당신도 나처럼 되었구나.” 마치 예수님 빠진 쪽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모르고 그냥 ‘너도 볼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구나.’ 라고 생각해요. 눈만 뜨면 다 정상인입니까? 아니죠.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고 이것이 천국에 속합니다. 그러면 눈 뜬 사람과 같이 섞여 있어도 위상적으로 하나는 지옥에 속한 자이고, 한쪽은 천국에 속한 자입니다. 저는 이 새롭게 눈 뜬 사람을 ‘스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비밀스런 사람. 특징이 뭔가?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냥 옆에 계시는 주께서 나를 새로운 집단에 등록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이미 등록된 사람에게만 등록된 사람의 면면을 드러내는 일에 저희들이 동원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 차이를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귀한 신분을 더욱 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6. 22. 09:44 녹취 마침)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