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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5 02:09:58 조회 : 2528         
차이의 반복 130524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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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21.♡.190.236) 13-05-31 21:27 
광주 강의(2013. 5. 24) 42-1

에스겔 37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기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디로 들어가라는 말입니까? 무덤 속에 들어가 있으면 나오게 하신답니다. 이것은 마치 범죄자들이 동생에게 “금고 안에 잠간 숨어 있어. 나중에 경찰이 가고나면 금고 문 열어줄게.”라고 해서 금고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안 꺼내주면 어떻게 됩니까? 금고 안에서 죽겠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산 사람에게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수양을 해라!” 이러면 쉬운데, 그것이 아니고 “죽으라. 그러면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할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려 주세요.’ 이것입니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살아 있는 나’인데, 계속 살아 있으려고 하니까 굉장히 힘들어요.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게 해주세요.”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 그런데 에스겔 37장 13절에 보니까 살아 있는 나에게 여호와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덤에 들어가면 살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인간이 그냥 살아있는 체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그 버릇을 포기를 못합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오빠가 죽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어요. 오빠가 죽기 전에는 예수님이 오빠를 죽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하고 바랐는데 예수님의 그들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까, 곱게 죽었습니까? 곱게 죽었지요.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렇다면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생각할 때 우리의 범주를 넓혀 봅시다. 살아있는 나를 편하고 힘들지 않게 살게 하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죽어도 괜찮은 나’로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가서 철야 기도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나를 하나님께 부탁해서 더욱 더 활발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지 말고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도 실패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다가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니 실패지요. 긍정적인 요소가 전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실패해도 버리지 않습니다. “네가 실패했구나. 난 너와 함께할 수 없어.” 이러지 않아요.

실패를 강조하는 의도가 뭡니까? “너는 죄인이야. 항상 죄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 “예, 내가 죄인인줄 압니다.” 그래도 계속 “너는 죄인이야!” 라고 다그칩니다. 이렇게 계속 몰아넣을 때에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죽음이 아니라 주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에 갑니다.

계속 우리를 몰아세우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냥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마련해 주신 죽음의 자리(하나님에 의한 심판), 이것이 바로 언약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약의 자리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과 협상해서 산 채로 천당 가려고 생각합니다.

언약의 자리에 가 있어야 천국에 가는데 우리는 자꾸 언약의 자리가 아닌 현재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구원 받겠다는 거예요. 이런 잘못된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데, 부자 청년이 주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하면서 자기의 장점을 내세우지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갔어요. 결국 이것은 뭔가 하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은 원래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합류될 때 천국에 가는데, 우리는 그 자리로 갈 생각은 않고 현재 있는 내 자리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해요.

에스겔 37장 13절에서의 무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는 무덤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으신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보다 나중에 오셨으니까 나중에 죽는다고 생각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시간 순서를 인정하지 않고 최우선 순서가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첫’은 시간상 제일 앞선 것을 말하는데,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시간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 자체를 뒤로 미를 수 있는 첫 번째. 그래서 이번에 발행 된 책 [에스라, 느헤미야 속으로] 끝에 보면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는 말이 있어요. 초석은 맨 처음 놓이는 돌인데, 이것은 머릿돌입니다. 집을 지을 때 머릿돌부터 먼저 놓고 그 위에 건축을 합니다. 그런데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고 했어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머릿돌이 먼저지만 우리의 시간관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항상 우리가 우선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관으로 주님께 대입하면서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초석은 나중에 놓이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때, 모세와 엘리야는 벌써 구원 받았잖아요.

구원 받았는데 왜 이야기합니까? 이미 구원은 챙겼는데. 우리의 시간관으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보다 앞서기에 이미 그들은 구원 받아서 천국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구원의 초석이 놓이지 않았기에 주님과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하다가 보고 기뻐했지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받쳐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들 100번 받쳐도 구원 못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름 바뀌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양과 소가 많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구원은 초석이 놓여야 됩니다. 그 초석은 그야말로 초석(머릿돌)인데, 엘리야와 모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나중에 놓이는 거예요.

왜 제가 이런 표현을 섰는가 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에 자꾸 오해를 하고 있어요. 무덤에서 나온다고 하니까 누가 봐도 이 무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던 그 무덤이잖아요. 하지만 무덤이라는 개념이 그냥 인간 본인이 죽는 무덤은 언약적 무덤이 아닙니다.

그 무덤에 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적 무덤에 합류되어 있어야 구원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알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그리고 로마서 6장 8절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 무덤은 내가 죽어서 묻히는 무덤이 아닌 주님의 죽으신 무덤입니다.

모든 성경 개념이 다 예수님의 손맛이 배어 있어요. 구원은 주님의 손맛입니다. 언약적 무덤에 합류해야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언약적 무덤은 어떻게 되는가? 제가 수학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학에서 현실을 나타낼 때는 N으로 표현합니다. X1에서 N까지.

N은 임의의 무한한 수, 또는 임의의 수. 그런데 N이 무한대가 되면 임의의 극한이 되겠죠. 그러면 이 세상에는 많은 차원이 있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지” 그 모든 것을 포괄해서 표현한다면 그냥 N으로 할 수 있단 말이지요.

세상에 중심체가 없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세상이 N차원이라면 중심체는 N-1차원이에요. 그러면 N에서 N-1을 하면 남는 것은 1인데, 이 1이 뭔가 하면 잉여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적 개념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이 세상을 다스리지요.

비타 500 뚜껑을 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제 힘으로 뚜껑을 열었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적으로 보면 주께서 주신 힘으로 연거에요. 그 주께서 주신 힘이 뭐냐 하면, 잉여의 힘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생활에서는 내가 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떻게 살지? 그렇지 주께서 인도하실 거야.” 생각은 하는데 체험화 되지는 않아요.

모든 일을 주께서 개입하셔서 잉여의 힘으로 하는데, 그것을 생각 못하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의 값을, 주님이 빠져 있는 N-1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빼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망했구나’하는 순간, 망했는데 우리가 왜 살까요? 그 여분의 것은 누가 살게 하십니까? 주께서 살게 하십니다.

프로 야구에서 한화가 17대 1로 졌단 말이지요. 그러면 한화 팬들은 돈 내고 입장권 끊을 때 적어다 4대 3으로 이긴다든지, 2대 1로 이기든지 승리할 것을 기대하고 갔는데 넥슨에게 17대 1로 지는 과정을 자기 돈 내고 전부 다 봤을 때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그러면 그 중에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어떤 것을 느끼겠습니까?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께 달렸다.”

그런데 이기면 자기가 응원 열심히 해서 그렇고, 지면 선수들이 잘 못해서 그렇고. 즉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남(혹은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손대고 만든 모든 부분을 삽으로 떠서 몽땅 빼내는 그 틈, “아 오늘도 내 뜻대로 안 되네.”하면서 짜증부리는 그 뜸에서 잘해도 살리고 못해도 용서하는 그 꾸준한 하나님 언약의 일관된 사랑과 은혜가 엿보이는 겁니다.

이런 식이 아니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의 구원이 아니면 인간은 천국 가도서 제자랑 할 겁니다. 천국은 자기 자랑할 수 없는 세계이기에 그 조치를 주께서 미리 지상에서 실행하시는 거예요. 이 공식을 잊지 마세요. N에서 N-1. 하나님께서 평소에 개입하시는 거예요.

N은 무한이기에 우리는 손 못 대는데 N-1은 무한 빼고 눈에 보이는 것은 내 것이야 하는 이 부분을 삽으로 떠내면 남는 것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면, 고린도후서 6장 9절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이것은 N차원, 하나님 언약 차원이고, 우리 차원은 N-1 차원은 뭐냐 하면, ‘지금은 내가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신문에 이름이 날 거야.’

이런 것을 우리가 노린다는 것은 주께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언약의 삽으로 파내 버립니다. 파내서 어떻게 바뀝니까? “내가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존재지만 언젠가는 이름을 떨칠 거야.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제가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주께서 언약의 삽으로 떠냅니다.

유명해 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은 시험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인데 우리는 그것에 젖어 삽니다. 이것은 N-1차원이에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퍽 떠내는 순간 우리는 “지금은 시시하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유명해 질 거야.”라고 할 때, 그게 언약적 죽음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를 날마다 죽이기 위해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언젠가는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할거야.’라는 생각을 유지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접어야 할까요? 유지해야 되지요.

“내가 지금은 피곤에 지쳐서 볼 품 없지만 미장원에 가서 머리 예쁘며 하면 오드리 햅번같이 될 거야.”하고 미장원에 갔는데, 연습생이 와서 머리를 잘라서 끝났다고 해서 거울을 봤는데 이상한 여자가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주께서 언약의 삽으로 퍼낸 거예요. 이 때 비로소, 머리 못 나와도 구원 받는다는 주님의 언약의 자리, 우리의 무덤의 자리, 주와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을 봅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효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은 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지금부터 시작해서 영원토록 울려 퍼져야 될 고백입니다.

구원은 주께서 “너 죄인이지.”라고 몰아넣는 그 능력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이뤄집니다. 구원 받으려고 설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너 유명 인사 되려고 했지?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했지?” 계속 말씀으로 찔러 주실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며, 무명한 자며, 슬퍼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런 인간을 뜯어내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이미 영생 얻었다는 기쁨과 희열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그 길을 계속 간 것은 기쁨 때문입니다. “내가 환란 중에 기뻐한다.” N-1차원에서 N차원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 우리가 이 땅에서 발견해야 될 것은,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가? 우리 죽음의 자리를 찾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자리를 사도 바울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너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가?”를 물어보세요. 그러면 즉시 답변을 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생각하게 될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아닌데.” 분명히 자기 삶에 회의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요.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무엇을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아이도, 방금 결혼한 새댁도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도 해보다가 저것도 해보다가 온갖 것을 다 해보는데, 특히 졸부의 아들은 이것 해서 망하고 저것 해서 망하고 그래요. 

돈을 잃어버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화책에는 나옵니다. 동화의 끝은 어떻게 끝납니까? 결혼으로 끝이 납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만 하면 영원히 행복할 것이기에 잃어버린 짝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혼해 본 사람은 다 알지만 결혼했다고 행복합니까? 결혼한 후에는 조금씩 후회가 밀려오지요? 손자가 태어나면 귀엽다고 하지만 그 손자가 말썽 안 부려는 손자라면 귀엽지만 사고치고 말썽부리면 안 귀여워요. 그래서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어요. 사고 없는 평범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집안도 사고 없고 고민 없는 집안은 없어요. 따라서 평범을 원하지만 대부분 가정이 문제 한 두 개 정도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 누구한테 물어봅니까? 똑같은 입장인데. 모두 잃어버리고 사는데.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잉여. 주님의 덕으로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렬해서 이것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주님의 잉여를 달리 표현하면 은혜입니다. 또는 용서, 사랑이지요. 이것을 가장 구체화 시킨 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본향’이라고 합니다. 본향이니까 이 땅에 사는 것은 본향을 찾아가기 위한 삶이지요.

이제 38장으로 넘어갑시다. 38장 들어가기 전에 서론이 왜 이렇게 길었는가 하면, 37장에서 38장으로 넘어가면서 엄청나게 어려워요. 37장에서는 “네가 죽음에 가도 살려준다. 이것이 여호와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38장, 3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잡혀 갔다가 언젠가는 돌아옵니다.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카수스 지방에 있는 곡(또는 마곡)이라는(곡은 4개 나라의 연합국이다) 나라에서--

지도를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이탈리아 반도,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그 다음에 터키, 이쪽은 시리아, 이쪽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이라크, 이란이 있는데 이쪽에 흑해가 있어요. 흑해 쪽으로 강이 흘러가는 것이 있는데 다뉴브 강입니다. 흑해 옆에는 카스피해가 있어요. 이 사이에 있는 나라가 곡(또는 마곡)입니다.

이 나라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안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쳐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38장 이야기고, 39장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곡과 연합군들을 하나님께서 진노로 심판을 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뭐가 어렵다는 말인가? 37장에서는 ‘무덤에 있더라도 내가 건져주겠다’고 했지요.

우리 의식에 시간을 직선으로 흘러가니까, ‘지금은 이스라엘이 망한다.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무덤에 있는 자들을 주께서 건진다.’ 이 무덤이란 개념은 주님의 언약적 잉여가 담겨 있는 개념이기에 이 무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덤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죽었던 무덤이지요.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무덤이란 의미가 복잡하고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죄로 죽어야 마땅한 인간이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그 변압기 역할이 이 죽음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저는 언약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은 자는 약속에 의해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가 어제 가락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질문을 했는데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유월절에 문설주에 피를 바를 때 세 번 발랐습니까, 한 번 발랐습니까, 몇 번 발라야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것입니까? 몇 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피에 시선을 모아야 합니다. 피 바른 집안 식구도 피에만 신경 써야 되고, 심판의 사자도 피만 봅니다. 그래서 피 안에서 두 시선이 만날 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고 했는데, 목자와 양의 시선이 어디에 모입니까? 목자가 난데없이 우리 때문에 죽었다는 거기에 대해서 목자만 관심 쏟는 것이 아니고 양도 거기에 관심 기울여야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관심사는 피이기에 설교자는 말씀으로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들춰낼 필요가 있어요. 왜? 피가 무덤이라는 잉여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곧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덤에서 다시 나온다.’ 이 개념은 시간 순서로 되어 있는데, 38, 39장에서는 갑자기 위쪽에서 온다는 거예요. 주부가 선반에서 그릇을 낼 때 컵은 어디 있고, 밥그릇은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이것은 고정된 공간이에요. 늘 설거지 하면 그 자리에 두니까.

동화책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주인 아줌마가 설거지 한 후에 그릇들이 서로 대화를 해요. “얘야, 오늘은 네가 주인님의 맛있는 국을 담았구나. 너는 어떻게 주인에게 사랑을 받아서 주인의 국을 담게 되었니? 나는 그런 주인이 너무 싫어! 내 접시에는 주인이 먹다 버리는 갈치 가시만 담겼어.” 이런 대화를 하다가 “주인이 들어온다.”하면서 잠잠해 지지요.

그릇은 시간이 흘러가도 고정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우리 인생을 37장으로 봐야 됩니까, 38장으로 봐야 됩니까? 뭔가 동적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고정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고정된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37장에 있는 이스라엘은 없는 백성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만들어 냅니다. 이 37장의 경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우리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니까 언젠가는 주께서 구원하실 거야.”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천국 자손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천국 자손이 아니라는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방인이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해요.

이방인이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언약적으로 쫓겨날 만해서 그 빈자리에 들어갈 자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원래의 주인이 쫓겨나지 않으면 이방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여러분 대신 유대인 누군가가 쫓겨났다고 보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지정된 자리가 있어요. 누가 나가야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적 흐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방인이기에 고정된 자리에 있는 겁니다. 송재원 씨가 질문을 했는데, “죽은 김00 목사가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이방인들은 구원을 논할 입장이 못됩니다. 언약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구원 받고 싶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적으로 명단이 있어야 돼요. 명단에 없는 사람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이 결합이 안 되는데, 결합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7~8절을 봅시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이것이 우리가 보고자 하는 에스겔 38장의 이야기입니다. 성경 해석 참 난해하지요? 에스겔 38장에서는 사단이 없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사단이 옥에서 나와서 곡과 마곡을 모아 싸움을 붙입니다. 에스겔 38장 2절에는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하간 곡이라는 나라가 등장해서, 5절에 보면 “그들과 함께 한바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 내리리라.” 이들을 소집해서 방향을 줘요. 이스라엘을 총 공격하기 위해서 동서남북을 다 동원했어요. 이것은 결국 세계 전쟁입니다.

사방의 모든 나라를 다 동원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움직일 때는 블랙홀처럼 뭔가 중심축이 있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연탄불 위에 국자 올려놓고 거기에 각설탕과 소다를 넣으면 부풀어 올라요. 그냥 두면 안 되고 저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어떤 문양을 찍어서 그 모양대로 자르면 상품을 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이처럼 하나님이 이런 일을 시킵니다. 국자, 소다, 설탕 다 배치를 해서 이스라엘을 총 공격하게 만들어요. 왜냐? 그래야 언약이 성취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약이 성립 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방금 요한계시록 20장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 20장과 에스겔 사이에 누가 계시지요? 예수님이 계십니다. 방금 에스겔 38장 마곡 이야기 나왔지요. 방금 십자가 이야기했지요. 마지막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마곡이 등장하잖아요.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는 ‘에스겔이 처음이고, 그 다음이 십자가고, 마지막이 마곡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고정적으로 공간을 만들어 버리면 십자가가 올라서 버리고 앞뒤 양쪽은 십자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같이 돌아가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마곡 이야기를 왜 했는가 하면, 에스겔에 있던 역사적 현실이 지금 이 때도 똑같이 일어나는데, 에스겔이 BC 500년 경이라면 지금은 AD 2013년이잖아요. 2015이 되든 2300년이 되든 관계없이 십자가 안에서는 같은 현상이 반복해서 회전하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다른 점은 뭔가? 그쪽에서는 그냥 마곡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이 나오지요. 그러면 십자가 이후에 이 세상은 누구 손에 움직인다? 사단이 움직이고, 사단은 누가 움직인다? 에스겔 38장에서 여호와께서 마곡을 움직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사단을 조종해서 사단이 마곡같은 그러한 현상이 현재 십자가와 함께 오늘날 성도를 중심으로 뺑뺑 돌고 있다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5. 31. 10:06 녹취 마침)
 서경수(IP:121.♡.190.236) 13-06-13 10:52 
광주 강의(2013. 5. 24) 42-2

잃어버린 것이 있다. 뭘? 본향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지요? 현대인들은 뭘 잃어버렸는지 조차도 모르는데. 사는 것이 살수록 꼬이고, 뭔가 놓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고.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언약이란 것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기 생활 속에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미리 오는 것이 언약이니까 이 세상 전체는 그냥 물음표. 뭔지를 모르겠어요.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것이 바로 유한 세상에 무한이 들어온 것입니다. 무한이 들어오면 유한은 무한을 이해할 수가 없지요. 왜냐? 유한이기 때문에 무한도 유한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잖아.” 이런 식으로. 자신이 인간이니까 예수님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예수님이 “너희들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진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친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발생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진짜 필요한 것은 그 순교자가 필요했다는 사실인데, 그 순교자는 누가 때려 죽여 만들었는가 하면 필요한 줄도 모르는 자들이 순교자를 만들었어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주체가 개입하면 현실이 조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내가 손대면 현실이 나의 손때가 묻어서 본래 현실의 의미가 아니라 내가 다가간 것이 말썽을 일으켜서 왜곡된 현실(조작된 현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꼭 저와 같아요. 평소에는 음식물 쓰레기에 관심도 없다가 오랜만에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고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했는데 일이 잘못 되어 두 번 일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요.

인간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힘쓰면 힘쓸수록 실타래 꼬이듯이 점점 꼬여서 갈수록 난감한 사태에 이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유한에 하나님의 무한이 들어왔으면 유한에서 무한을 해석하라고 하면 안 되고, 해석 방법은 무한에서 유한으로 해석하는 방법뿐입니다. 잃어버린 언약이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무한으로 유한에게 다가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한 자체에 무한이 찾아오게 되면, 유한 자체가 플러스 알파라고 합시다. 뭔가 여분의 것이 되도록 하는 방법은 이스라엘이 편안하게 쉬는데 갑자기 주변 모든 나라가 연합해서 침략해 와서 이스라엘을 황폐화 시키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은 자기가 생각했던 유한의 의식에서 벗어나서 무한의 하나님의 뜻에 일임하는 그런 개기가 되겠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방식대로 이루려고 애쓰다가 극한을 맞이하면 ‘나의 방법 자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드는 행위만 추가했을 뿐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렇지만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나저러나 뭔가를 해야 하는데,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일은 더 꼬이고. 이렇게 될 때 ‘내가 믿는 무한, 내가 아는 무한, 내가 아는 하나님’ 이 모두는 내 주체 때문에 조작된 것임이 발각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고맙게도 곡(또는 마곡)이 등장합니다.

에스겔 38장 8절을 보면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9절에 보면 이방인이 광풍같이 쳐들어오는 겁니다. 14절 이하의 말씀을 봅시다. “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네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당하기는 이스라엘이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겨냥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일을 벌이신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정리가 되었지요? 3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덤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38, 39장은 이스라엘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변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에 본의 아니게 같이 휩쓸림으로 인하여 이방나라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예언이 에스겔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나라가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0장 8절에 보니까 이방나라는 사단이 움직인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방나라에게 악마가 존재하고 사단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뭘 짐작해야 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이상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싫어하고 미워하는데, 이것은 자기들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를 지배하는 어떤 다른 정신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39장까지 갑니다. 계속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38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치게 해놓고, 쳤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39장 1절 이하에 보면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라고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와 편안히 거할 때에 곡을 대표로 하는 주변 나라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무조건 쳐야 돼요. 사방에서 몰려와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당해야 하고, 그 후 하나님이 곡을 치게 됩니다. 시체 위에 시체 하나 더 추가하는 식입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을 쳤지.”라고 하면서 이방 나라를 하나님이 칩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억울합니까? 곡이 억울하지요. 자기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마음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치도록 하셔놓고, 이제 와서 “내 백성을 왜 쳤어?” 하면서 하나님이 곡을 치니까, 곡을 비롯한 이방 나라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얻어맞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것을 누가 시켰다고 했습니까? 사단이 시켰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사단은 어떤 운명입니까? 곡(또는 마곡)과 같은 운명이에요. 하나님이 시켜서 욥을 시험했고, 착한 백성을 유혹했고,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못 믿게 했는데 그 벌을 사단이 몽땅 받아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합당한 사단과 용과 뱀, 귀신, 불신자는 반드시 이곳으로 집결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분류 작업인데, 이것은 인간이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우리가 듣고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안목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복음도 안 받아들이고, 제 마음대로 살고, 잃어버린 것이 뭔지도 모르고 허전한 마음을 술로 채우려 하는 이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배당된 역할을 해야만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주님에 의해서.

따라서 누가 구원 받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주님이 분류작업을 안 하신다면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지만 주님이 지금도 쉬지 않고 분류 작업을 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본인들이 원한다고 가는 곳이 아니고 지옥 갈 자를 분류하는 방식으로 천국 갈 자로 분류된 자가 가는 곳입니다. 

수박을 먹든, 참외를 먹든 천국 갈 자는 천국으로 갑니다.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 그런 것들을 먹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는 천국 가고,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진다.’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책(새 언약의 주인공인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가 간다고 했지요.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만 천국 간다는 말을 왜 합니까? 그것은 지상에서 행하는 일로 천국과 지옥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잃어버린 것을 찾은 사람입니다. 찾았다고 해서 뭔가를 소유했다는 말이 아니고, 나를 포함한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할 때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을 안 사람입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기뻐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 말은,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 7절을 다시 봅시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그 말씀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의식으로 그것을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기에서 “천년이 차매”라는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는 ‘1,000년 후라는 말이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라고 했기에 ‘천년 후에 사단에 풀려나는구나.’ 생각할 것이고,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했으니까 ‘약 천년 후, 그리고 조금 더 지난 때에 세계 전쟁이 벌어지겠구나.’ 이것이 우리의 해석입니다. 이런 식의 해석을 ‘전천년주의’라고 합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9절 “저희가 사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여기에 갑자기 성도가 나와요. 에스겔 38장에서 곡과 마곡은 누구를 공격합니까? 이스라엘을 공격하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로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에스겔 38장의 이야기라면 성도를 공격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20장 이야기잖아요.

이것은 분명히 같은 취지이기에 인용된 것이란 말이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에스겔 38장에서 바로 요한계시록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사건이 있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할 때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담아야겠지요.

언약이 이루어 질 때가 예수님 부활할 때입니까, 재림할 때입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까? 분명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십자가 지신 그 순간에 성도가 살아나야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3일 후에 부활하셨어요. 그러면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아직 덜 이룬 것인가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고 했는데, 아담은 그것을 먹은 후에도 안 죽고 아이까지 낳았잖아요. 900년 넘게 살다가 죽었어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남자 갈비뼈를 세어보는 사람도 있어요. 진짜 남자 갈비뼈가 하나 모자라는지 확인한다고.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미 죽었다고 했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가 아는 십자가에서 죽는 그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잘못된 해석입니다.

에스겔 다음에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있고,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할 때는 십자가의 취지가 담긴 해석을 하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해석인가?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죽었지요.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의 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살아 있어도 죽은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으면서 뭘 하는가 하면 해석을 해요. 날마다 현실에 대한 해석을 해내요.

해석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유한에서 무한을 해석해요. 무한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기적, 영혼, 인간의 자유 등을 해석해 내는 거예요. 죄인인 주재에 무한에 있는(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해석하니까 이 해석이 옳은 해석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할 때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에스겔 38장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여기서 반드시 싸움(전쟁)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싸움이란 개념에도 역시 언약이 포함되어야 되는데, 언약이 빠지고 싸움을 해석하면 ‘나는 성도이고 나의 반대편은 적이다.’ 이렇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 전쟁에 나쁜 편에 속해 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이미 확정되었어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옆에 강도 두 사람 빼고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순교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목자를 치니까 양이 흩어져 버렸어요. 목자를 치니까 목자는 죽고, 목자가 죽는 자리에 양은 몇 마리 남았습니까? 없지요. 바로 이겁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말씀대로 전쟁하는 기능을 통해서 없던 성도가 드러나고, 없던 사단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 요한계시록 해석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 의미를 담아서 해보니까, 십자가 의미가 옳으면 우리는 항상 자기를 좋은 편에 둬요. “우리는 성도다. 그러면 우리 빼고 다른 사람은 마곡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터무니없는 해석이지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양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일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복됩니다. 반복은 동일성의 되풀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죄인들의 안목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반복인가? 차이의 반복입니다. 어떤 학생이 지난 번 시험에서 1등을 했어요. 이번 시험에도 1등을 했어요. 이것은 반복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은 반복이 아니에요. 그냥 1등한 학생이 1등을 한 거예요.

1등한 학생이 2등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차이가 발생했지요. 엄마가 어떻게 합니까? “왜 2등 했니?” “한 문제 실수를 했어.” “그럼 그렇지. 네가 2등할 아이가 아닌데. 다음에는 실수하지 마라.”

그런데 다음에 1등을 기대했는데 또 2등을 했어요. 그러면 이 학생은 처음부터 1등할 학생이 아닌데 전번에 1등한 것 자체가 수상하게 되는 거죠. 2등이 두 번 있었잖아요. 이게 동일하지요. 우리 아이는 1등할 아이가 아니고 2등할 아인데 전번에 1등한 것은 소 뒷걸음질 하다가 쥐를 잡은 것처럼 우연히 한 것이지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내가 1등을 했거든요. 선생님이 제게 상장도 안 줬어요. ‘너 같은 학생이 1등을 하다니 이건 뭔가 수상해?’ 선생님이 기대한 학생이 아니었지요. 2등한 학생이 다음 시험에서 또 2등을 했다. 그러면 이것은 반복이 아닙니다. 2등한 학생이 1등을 했어요. 그러면 부모가 헷갈리는 거예요. “야, 너는 1등이야, 2등이야? 김1등이야, 김2등이야?” “나는 김1등도 아니고, 김2등도 아닙니다. 저는 김차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마땅히 성도다.’라고 여기는 이것을, ‘너는 성도가 아니고 마곡에 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다.’라는 것을, 이 차이를 되풀이 하는 식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언약을 주시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남자가 애인을 만날 때, 그냥 서서 말하면 되는데 벽 쪽으로 밀어붙여서 도망칠 곳도 없이 하는 것처럼 주께서 자꾸 우리를 밀어붙여요. “네가 이 본문을 알아?” “저는 성도입니다.” “뭐, 네가 성도라고? 마음속에 음행하면서 성도라고?” “그것은 죄지요.” “그러니까 넌 죄인이잖아.” 이런 식으로 자꾸 밀어붙이지요.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이미 ‘너와 나는 언약을 성취하는데 같은 동업자다.’라는 거예요. 이게 차이의 반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의인인데, 의인과 죄인이 결합해서 반복되는 경우에만 십자가 의의가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죄 없는 어린양이 피를 흘린 것입니다. 왜 피를 흘렸습니까?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에서 ‘세상 죄’가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있지요. 그러면 이 문장에 ‘세상 죄를 진다’는 것도 포함하고, 세상 죄를 담당할 분이 ‘너는 세상 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로 뭉쳐지면 십자가 사건이고, 새언약이고, 이것이 십자가의 반복이 되면 우리 속에는 내가 알고 있던 성경 해석과 늘 차이가 되풀이 되는 겁니다.

‘차이의 반복’ 우리가 아는 것은 ‘똑같은 것의 반복’ “같은 행동을 왜 반복하는가?” 라는 말이 왜 틀렸는가 하면 우리는 주체를 안 건드리고 ‘어제의 너나 오늘의 너는 똑같은 인간이다.’라고 규정한 후에 “어제도 수박 사더니만 오늘도 수박 산나?” 어제의 그 인간이 오늘도 똑같이 수박은 산 것으로 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똑같은 인간으로 안 봐요. 우리를 동일 주체로 보지 않고 어떤 기능으로 봅니다.

죄 짓는 기능으로 십자가 안에 초청받는 사람으로의 존재, 우리에게는 ‘내가 어떠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언약 안에서 남이 모르는 죄의 깊이와 높이를 아는 그 기능으로 할당된 그 자리에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요한계시록 20장 8절을 누구한테 이야기한 겁니까? 성도한테만 이야기한 거예요. 불신자들에게는 말해봐야 소용없지요. 그런데 누가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습니까? 받아들인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성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서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하는 겁니다. 잊을 수가 없지요.

에스겔 38장 마곡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8장에서는 사단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모르면 전쟁은 옛날 한 때 있었던 사건이 되지요. 그러면 반복이 안 됩니다. 반복이 되는 것은 언약으로 다뤘다는 것이고, 반복이 안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에 휩쓸려 간 거예요. 과거는 기억에만 있지 이미 가버렸어요.

길을 가다고 40년 만에 초등학교 때 친구를 만났어요. 초등학교 시절 그녀는 너무 예뻤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늙었어요. 늙었다는 판정은 내가 합니다. 그러면 둘 중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그녀는 너무 예뻤다.’는 이것만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선택할 자유는 누구한테 있습니까? 내가 주체니까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이 생각을 상대가 알았다면 뺨을 맞았을 거예요. “넌 안 늙은 줄 아냐?” 라고 하면서. 그처럼 인간에게 가장 구원에 방해되는 것은 뭡니까? 마곡의 정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단으로 나와 있지만 에스겔 당시에는 그게 바로 나고,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 간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누구 마음대로 천국을 가?’ 

왜 그들은 천국을 자기 나라로 생각했을까요? 에스겔 38, 39장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나와요. 유대인 본인들이 아브라함 혈통이니까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러니 누구 봐도 자신들은 천국 간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어요.

“그녀는 너무 예뻤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내 아내를 너무 사랑해!”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가 지옥 가면 너도 지옥에 같이 갈래?”라고 물어요. 그러면 “내가 미쳤어요. 지옥가게.” “그러니까 네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주체에서 형성된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주체를 죽입니다. 이것이 언약이고 이것을 반복시킵니다. 그러니까 매일 하나님이 우리 주체를 죽이십니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결코 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니까 네가 너를 닦달하지 마라.”

TV드라마 [사랑과 전쟁]이라는 것이 있어요. 부부간의 이혼문제를 다룬 것인데, 서로 싸워요. 왜냐? 둘 다 주체를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바람피우니까 그것을 안 여동생이 오빠한테는 말하지 않고 상대 여자에게 닦달을 합니다. 왜냐? 오빠한테 알리면 여자가 오빠에게 이혼하라고 협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여동생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가 하면, 오빠가 자기 오빠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자기가 의미를 붙일 때 이것은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에게 십자가에서 살해당한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무한)입니다.

곡과 마곡이 이스라엘을 칠 때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언젠가는 우리가 복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오늘날 성도를 말하고, 성도는 성도가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언약에 같이 동참될 때만 성도가 됩니다. 성도란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현상을 표출하는 존재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고 의인 되었어요.’라고 십자가를 보여주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능력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람은 평생을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사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그런 자리를 할당 받았습니다.

할당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설거지 해놓은 국자, 그릇이 되어서 주께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빼서 쓰십니다. 그 가운데 항상 십자가는 반복됩니다.

십자가는 차이의 반복. 어떤 차이? 나는 예수 믿으니까 의인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내일이 되면 그것이 바로 죄다. 라고 바뀌게 되는 것, 죄로 지적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사용되어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게 믿게 된 것은 전부 예수님 덕분이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고백했기에 나는 신자라고 우기다가 다음 날 또 얻어터지고. 늘 이렇게 차이의 반복이 되풀이 되는 것. 이것이 주께서 날마다 성도 되게 하시는 작업입니다.

한시도 우리가 성령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속했다는 것은 공간을 의미하고, 영은 실체를 말하는데, 영이라는 공간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을 소유하고 있는 나.’ 이렇게 되어버려요.

이런 더러운 버릇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주체에서 나왔는데, 워치만 리가 이런 주장을 하지요. “성령 받았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영에 속했다.” 영은 넓고 우리는 작고, 영은 무한이고 우리는 유한이고, 무한 속의 유한은 무한을 위해 봉사하게 되어 있고.

우리가 뭘 해도 죄인 되게 하셔서 십자가 피에만 주목하도록 인도받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환경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고, 내일은 주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또 감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안 됩니다.

차이의 반복인데, 차이가 반복되면 동일성으로 바뀌고, 동일성으로 뭉쳐진 것을 주체라고 합니다. “어제 나 은혜 받았어.” 이것이 동일성입니다. 어제 은혜 받은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나이 많은 분들에게 사진 찍자고 하면 싫어해요. 왜냐하면, 그 사람 기억 속에는 젊은 시절 아름다웠던 때가 담겨 있어요. 그런데 다 늙은 지금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서 본다는 것이 끔찍한 거예요.

꿈속에 등장하는 나는 항상 젊은 모습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28세로 고정되었어요. 나이 60이 되어도 생각하는 것은 ‘젊은 내가 왜 이러지?’ 이러고 있어요. 나의 주체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반복하는데, 우리는 나름대로 고집이 있어서 선악과 따먹은 나의 주체를 늘 되풀이하면서 기억 속에서 반복합니다.

치매 걸린 분들을 보면 자꾸 옛날이야기를 반복하면서, 그 때로 돌아가서 “왜 네가 내 집 팔았어?” 이렇게 나와요. 그 집 팔아서 새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것은 생각 못해요. 옛날 그 집이 내 집인 거예요. 왜? 그 집이 있어야 그 때 살았던 내 주체가 있는 것이고, 그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지요. 늙어버린 주체는 내 기억에는 없어요.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합니다. 그것이 뭐냐?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냥 장난삼아 죽은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실 때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가 주수님의 주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은 천국 가서 그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세상은 바로 그 주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간단한데 달리 생각하면 왜 그렇게 복잡한지, 그 원인은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만족하는 잘못된 마음가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깨달았사오니 날마다 주님께 맡기고 주께서 쓰시는 대로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6. 13. 09:5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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