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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8 02:17:03 조회 : 2462         
피와 피 130927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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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218.♡.161.79) 13-10-11 09:47 
광주 강의(2013. 9. 27) 46-1

에스겔 44장 15절부터 봅시다. 앞에서 성전 설계도 이야기했고, 이제는 제사장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제사장이 하는 제사 제도, 그 다음에 땅 분배 이야기하면서 에스겔은 끝이 납니다. 성전이 먼저 있고, 거기에 종사하는 제사장을 언급하고, 제사 제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성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혜택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땅이 주어져서 성전과 제사장 덕분에 다른 사람이 덕을 보는 이 시스템을 하나님은 지속하십니다. 이런 제도를 ‘제사장 제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왕이 제사장이 되느냐, 제사장이 왕이 되느냐? 왕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왕인데 그분이 지상에 나타날 때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입장에서 출발해서 지상의 제사장 모습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보면 제사장에서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을 통해서 왕이 되는데, 이 왕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안 보이죠. 안 보이는데 제사장을 통해서 왕이 된다면 사람들이 제사장 역할을 하는 가짜 왕, 인간 왕을 염두에 두고 이쪽 길로 나가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유다 나라가 패망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왕을 허락한 것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왕을 주셨거든요. 제사장을 사모해서 제사장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했는데, 가면 갈수록 차츰 엉뚱한 길로 가는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제사장 제도로 갈 때 분명히 제사장으로 해서 왕 제도로 한다고 했는데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는 숨은 죄악 때문에 어긋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 죄악을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우상 숭배적인 성향이 발휘되어 제사장 일을 잘 하는 인간 왕을 찾았던 거죠. 하나님이 왕을 허락하신 것은 이 절차를 거꾸로 소급해서 이스라엘이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왕도 제거하고 제사장도 제거하고 백성들도 제거하고 다 제거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은 의문을 갖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제사장 나라고, 다윗 언약을 통해서 왕을 주신다고 약속해 놓고 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파멸케 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내려오는 왕과 제사장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따로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기존의 우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제사장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왕과 제사장이 보이겠지요. 이것을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회개는 자기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을 반성하는 겁니다. 내가 긍정하고 내가 속해있는 시스템 자체가 나를 망치게 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형성된 이 모든 것들이 애초부터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이 알게 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원초적으로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도성’인 것을 천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아브라함도 이것을 기도하면서 알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살려하다가 결국은 자신이 나그네요 행인인 것을 깨닫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의인 50명만 있으면 하나님이 이곳을 살만한 땅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여기고 50명부터 출발했습니다. 당시 소돔, 고모라 성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 성에 벌을 내려서 죄인이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곳에 있는 의인이 죽는다면 억울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소수겠지만 그곳에 있는 의인을 위해 이 도성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기도를 한 거예요. 그런데 소돔 성에 의인 50명이 있나요? 없어요.

만약 소돔, 고모라 성에 의인 50명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 성을 심판하시면 의인을 심판하시는 것이 되기에 정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땅에 의인이 있습니다.’라는 것으로 심판을 면하기 위해 ‘의인 50명이 있으면’하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5명으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초등학교 전교생이 500명이라면 ‘이 500명 학생 중 착한 학생 5명쯤은 있겠지’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없다는 거죠. 그러면 ‘4명?’ 아브라함은 45명, 다음에 40명, 자꾸 내려가다가 마지막에는 10명까지 내려갔어요. ‘의인 10명만 있으면 심판을 행하지 마옵소서.’라고 했는데, 10명이 없어요. 1명도 없어요.

지금 광주를 심판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 의인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이 말은 뭔가 하면,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의인)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뭔가? 저 나라 가서 살 의인이 있지요. 어쨌든 이 땅에서 살 권리가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 땅을 떠났지요. 이 사실을 눈치 채면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아하, 내 고향이 따로 있구나. 이 동네가 내가 살 곳이 아니구나. 떠나야할 곳이구나.’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는데 그러면 자녀들은 어떻게 하지요? 인생은 기회입니다. 인생에게 젊음을 허락한 것은 아직도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즐기면서 살라고 준 것이 회개하라고 준 기회기 때문에 젊다는 것은 그만큼 회개할 기회를 많이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백날 잔소리해도 안 듣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을 보니까 회개할 기회를 아직까지 부여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 오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특징을 알 수 있는데, 특징이 뭐냐? 사라짐과 나타남. 이것을 가지고 제대로 된 제사장 시스템을 설명합니다. 사라짐과 나타남 이 경계 선상에 피가 있습니다. 피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나는 그리스도가 죽은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는 ‘죽음’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너는 교회에서 뭘 믿는데?”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이러면 안 돼요. 누가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모두가 살고 싶어 환장한 이 세상에서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 죽으심을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을 우리 능력으로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은 산 자의 세계에 포함이 안 되기 때문에 치워버려요.

죽은 시체를 집안에 둘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인간들이 치워버린 그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들어서 우리 가정에 주인으로 두십니다. 우리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는 순간 누구를 만나는가 하면 내 대신 죽으신 그분을 만나는 거예요. 지금 스포츠 채널을 켜보면 기아와 SK가 야구를 하고 있는데 이 모두가 살려고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모든 일을 살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죽으신 거예요. 왜 죽었느냐? 사라진 것이 나타날 때는 오직 피로만 역사 속에 등장합니다. 44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피와 기름’으로 나타납니다. 기름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기름 부은 자는 보통 인간이 아닌 차별된 자를 말합니다. 그분이 피를 흘리는 것,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피와 기름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사람 손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언약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른 민족에는 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런 흔적이 없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없는데서 새롭게 생겨난 민족이기 때문에 그 민족은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피 중심으로 나라가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 납니다. 이번에 파키스탄에 지진이 일어났지요. 바다에서 지진이 났는데 없던 섬이 새로 생겼다는 거예요.

언약이 발생되면 없던 피가 흐르게 되고, 기름 부은 자의 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사람 손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거로 보여지는 겁니다. 그것을 새 성전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제사장들이 종사하게 되면 그것이 반복해서 진행됩니다. 반복해서 진행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주기성을 만들어 내요.

이 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룰 때는 항상 시작과 끝에 담긴 내용으로 역사를 스캔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훑어보고 펼쳐 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옛날 창조이야기가, 출애굽이야기가 이미 지난 이야기인데 또다시 제사라는 주기성 속에서 살아나지요. 홍해사건은 지나간 일이잖아요. 출애굽 때 유월절에 어린양이 죽었다는 것은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반복하고 제사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매일 어린양을 죽이지요.

숨은 것이 나타날 때는 피의 주기성 속에서 이 세상은 결국 율법이란 그림자의 실체가 나타나는 데까지 계속해서 스캔하고 반복하는 주기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제사는 이제 끝났다고 하지요. 죄 씻을 수 있는 제사는 이 세상에 없다고 했습니다. 천주교가 이것을 몰라요. 죄 씻는 제사는 없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성상 파괴운동이 벌어지는데, 성상을 파괴할거냐, 말거냐의 논쟁이 붙었어요. 만약 하나님의 성상을 폐기한다면 주기적인 예배도 폐기되어야겠지요. 그런데 성상이나 제사를 폐기하는 것이 옳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어요. 복음적으로 볼 때. 틀린 이유가 히브리서의 단번의 제사는 하나님의 조치인데, 인간이 형상을 깨고 제사 안 드리는 행위로 대체될 성질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번에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너희가 드려서 죄 씻는 방법은 없다.’고 하는 것은, 제사 안 드리면 용서 받는다는 이야기입니까, 못 받는다는 이야기입니까? 상관없어요.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나, 안 드리나 양쪽 다 구원과 상관없어요. 십일조 안 하면 십일조 한 것입니까?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것이 아닙니다. 주일날 교회 안 나오면 주일 성수한 것입니까?

하나, 안 하나 그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말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내가 구원받느냐, 내가 용서받느냐 하는 시절은 끝났고, 주님 쪽에서 늘 하는 조치가 나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하는 조치는 단회성 속에 구약에 있는 모든 주기성과 반복성이 다 담겨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게 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반복성이고 주기성입니까?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해서 매일 농약을 마십니까? 주께서 바울을 주기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그런 삶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삶은 숨어있는 것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각자 삶이 다 다르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삶입니다. 프로야구를 잠시 보니까 양현종 선수가 공을 던지고 있어요. 후반기 성적이 5승 3패인데, 그가 성령을 받았다고 칩시다. 경기에서 지든 이기든 경기가 끝났습니다. “주여, 오늘도 죄인입니다.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오늘도 내 영광만 생각했습니다. 승패에 신경 쓴다는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보다는 내 자존심을 먼저 챙겼습니다.”하고 회개 기도하면서 숙소에서 잠을 잤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음 날부터 야구 그만둡니까? 다음 날 또 연습하고 경기에 나서겠지요. 그리고 경기를 하면 또 승리하려고 힘쓰겠지요. 그래야 연봉이 오르니까.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야구 선수는 주기적으로 야구를 합니다. 무엇이 주기적인가 하면, 공을 잘 던지든 못 던지든 나를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의 주기가 나를 구원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아직도 남아있고 육신이 남아있는 이상은 늘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지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모친과 동생들이 왔습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평소에 그들이 내 가족 위주로 산다는 것을 티를 낸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이냐?”라고 했어요. 그 말 들은 모친(마리아)이 굉장히 섭섭했을 거예요.

제가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우리교회를 욕하니까 “왜 목사님은 다른 곳에 가서 우리교회를 욕합니까?”라고 항변하는 분이 있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사람들 앞에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이냐?” 이런 소리 했습니까? 중요한 것은 숨어있는 것을 드러낼 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우리가 무엇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내 대신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동시에 우리는 그분의 숨은 증인으로 존재하면서 반복적으로 용서받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우리는 반복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20절을 봅시다.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그리고 22절에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들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족속의 처녀나 혹시 제사장의 과부에게 장가 들 것이며” 이것은 제사장이 장가가는 이야기인데, 이걸 보면서 제가 문득 생각하는 것이, 옛날 제사장들은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 20대, 30대 남자들은 장가가라고 애원을 해도 못가잖아요. 여자가 없어서 못가는 것이 아니고 돈이 없어서 못가요. 아파트 전세 얻을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해요. 옛날 제사장은 아무 여자나 안 되고 골라서 아내를 얻었어요. 이런 이야기 들으니까 은근히 화가 나지 않습니까?

자, 그럼 여기서 제사장은 결혼 할 때 이혼한 여자나 과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 이야기가 에스겔 44장 이전에 레위기 17장에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이렇게 되어 있고, 14절에 보면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여기 피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피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레위기 20장 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1절에는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 17장에 ‘피를 먹지 말라’고 해놓고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어요. 여기서 피는 두 종류가 되고 말았어요. 하나는, 피가 용서해주는 유일한 매체가 되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이런 짓을 할 때 너희를 죽여 버린다.’ 죽일 때 피가 나옵니다. 이 피는 ‘네가 피 흘릴 짓을 했기에 마땅히 그 피 값은 너에게 돌아간다.’고 했어요.

피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죄 지은 자가 흘리는 피가 있고, 다른 하나는 죄 없는 깨끗한 피가 있어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숨어있는 것을 드러낼 때는 이렇게 두 종류의 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하십니다.

아베로에스(1101-1185)라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BC 500년 경에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라 철학을 해석하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신학자 알베르투스에 의해서 12~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전 유럽에 퍼졌습니다.

아베로에스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이 세상은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그냥 가는 것이다. 신은 없다.’고 했어요.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신적 영혼이 있다고 했어요. 신적 영혼에서 신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냈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를 하면, 아베로에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이 뭔가 하면, ‘신은 없고,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옛날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모든 변화는 서로 우연히 만나서 이루어지는 현상이기에 변화는 별 의미가 없고, 다만 인간이 신을 거론하는 것은 인간에게 신적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했을 때, 그 당시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이단이니 어쩌니 했는데 사실 이 말이 맞잖아요. 더구나 이 사람은 ‘인격 신’은 없다고 했어요. ‘신적 영혼’에서 끄집어낸 신은 인격 신이 아니고 그냥 목적어로써의 신이 있다는 것뿐이란 말이죠. “인간에게는 신적 영혼이 있지 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은 신적 영혼에서 창안해 낸 것이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서 신자들은 상당히 흥분하고 화를 냈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사람이 대신했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차라리 세상이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신이 있으면 간섭을 할 텐데 신이 없으면 간섭할 사람이 없으니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잖아요.

나는 불교의 중들이 ‘신은 없다.’고 하면서 도를 닦는 것을 보면 이상해요. 신이 없으면 마음대로 살면 되지 왜 도를 닦아요?

알베르투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주장이 대부분 옳지만 그는 ‘인격 신’을 몰랐다.”고 했어요. 제가 보기에는 알베르투스도 틀렸어요. 왜냐하면, 인격 신이란 나중 19세기 후반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인격 신이라는 것도 우리의 신적 영혼이 만들어낸 거예요.

결론을 내립시다. 신은 없어요. 신이라는 것은 전부 우상이고 신은 없어요. 이것이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없는 신이 나타난 거예요. 언약으로. 단지 있는 것은 언약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을 주시면 그 언약이 일관성 있게 되풀이되어 어떤 현상을 낳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피를 가지고 계속 이야기하십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여라. 그 피는 그에게 돌아가리라.’ 자꾸 피를 이야기해서 너희들이 이 땅에서 죽는 것은 너희들의 죄에 합당한데 그 피는 오직 다른 피에 의해서만 생명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피 흘려 죽어도 마땅합니다.’라는 사람만 언약의 피와 관계가 맺어진 사람입니다.

레위기 17장에서 피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피만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네 피는 더러워!’라는 것을 같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8장에 보면 ‘너는 이방 나라의 풍습을 좇지 말라.’는 말이 나오고, 19장에서 이방 나라와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다가, 20장에 피 이야기가 나오고, 21장 4절 이하에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피 이야기하면서 ‘내가 피 이야기할 때 듣고 있는 너희들은 애굽 사람들과 다른 족속이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애굽의 풍습과 차이점을 이야기하다가 21장에서는 드디어 제사장 이야기를 하면서 ‘제사장은 너희들 중에서도 달라야 할 새로운 부류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백성들의 어른이니까.’

지금 이야기의 흐름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언약은 숨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아베로투스의 말이 맞아요. 인간에게는 신적 영혼, 신을 만들어서 섬기고자 하는 영혼이 있을 뿐이지 신은 없어요. 신이 없는데 자꾸 만들어내니까 신이 많아진 거예요. “원숭이의 신은 원숭이처럼 생겼고, 지렁이가 섬기는 신은 지렁이처럼 생겼다.”고 옛날 회의론 철학자들이 주장했어요.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뭔가 신을 만들고 싶은데, 그 만들고 싶은 충동을 신적 영혼이라고 하잔 말이지요. 신을 만나본 적도 없는데 모든 민족은 신을 섬기니까 전부 가짜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는 신은 없는데 언약이 주어진 거예요. 언약이 주어지면서 주기성을 보여주지요. 어떤 주기성? 자꾸 피를 내는 거예요. ‘이 피가 무슨 피지?’ 하는데, 그 뒤에 말씀이 “만약 네가 안식일을 어기면 돌로 쳐 죽인다. 그리고 그 피는 네가 마땅히 흘릴 피다.”라고 하면서, 우리 인간이 쏟아내는 피와 언약의 피를 비교 시킵니다.

[터미네이트 3] 영화를 보면, 미래의 로봇이 나오는데, 이 로봇이 아주 뜨거운 물이 되는데  어느 새 그 물이 변해서 경찰 복장을 하고 따라옵니다. 아가씨 킬러로 변신해서 따라오고. 터미네이트도 결국은 물로 녹아 없어집니다.

피가 뭉쳐져서 사람이 된 거예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일단 내가 있어요. 나란 인격체가 있어요. “모든 것을 부정해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한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했지요. “내가 ‘이것이 과연 컵일까?’라고 의심하는 나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 근대 주체사상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사실은 어거스틴이 먼저 이야기했어요. 데카르트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되풀이 한 거예요. 엄밀히 따지면 저작권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요. 의심을 함으로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자각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있고 난 뒤에 “신이여!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것을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제사도 드리고 하지요.

내가 먼저 있고,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헌금과 제사를 받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제사를 받지 않고 새로운 피가 우리를 마중 나오면서 “너는 애굽의 풍습과 달리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죠. 우리 몸의 모든 습성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 이미 해오던 일을 계속 하기 마련입니다.

브레이크도 없는데 브레이크를 밟고 돌아서라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우리는 자기 의, 자기 자랑, 자기 사랑만 하는데, 이런 우리에게 “너를 미워하라. 그러면 산다.” 이런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인격체는 죽어 마땅한 피 덩어리인데 주님께서는 이 피에 주님의 용서의 피를 섞어 여기에서 새로운 인격체를 만들어낸 첫째 인물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입니다. 즉 백성의 대표자지요. 대표자이기에 애굽에서 나왔던 취지를 몸으로 표현한다면 제사장처럼 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약 애굽에서 나온 취지를 연극처럼 보고 싶다고 한다면 제사장을 보면 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하는 모든 것, ‘머리털을 손질하라.’ 이것은 애굽과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제사장의 모든 모습은 겉모습을 챙기라는 것이 아니고 그 모습으로 우리를 용서하는 피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그 상황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어른은 누구십니까? 목사입니까? 장로입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사장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사장도 예수님, 성전도 예수님, 제물도 예수님. 이 말은 제사장도, 성전도, 제물도 필요 없다는 겁니다. 헌금도 필요 없고, 교회도 필요 없고, 목사도 필요 없는 거예요.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트장으로 예배당 만들고, 목사 세우고, 장로를 세운 겁니다. “목사가 하는 짓을 봤냐? 봤거든 믿지 마라.”

그래서 목사 비판하고 교회 비판하는 것은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목사 비판하는 것을 보고 있는 나를 비판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미워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님 말씀을 깨달은 것이 언제인가 하면, 닭이 울 때입니다. 그 때 자신을 미워했어요.

물론 성령 받으면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미워할 가치도 없어요. “차라리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언정 너희들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 이런 말을 담대하게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신약 시대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을 위해  쓰임 받는 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안 끊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안 되지요.’라고 바울에게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작 하나님의 목적인 이스라엘을 드러내는 것에는 관심 없고, 자신이 구원받고 싶어서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차라리 내가 저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한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 믿는 목적이 뭡니까? 자기 살려고, 자기 구원 받으려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단 말이지요. 진짜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이스라엘이 현상적으로 부각되고 나타납니다.

헌신예배에 가서 이 본문을 가지고 바울처럼 설교하면 교인들 깜짝 놀랄 겁니다. “여러분, 성도 맞습니까? 사도 바울도 성도 맞지요? 그러면 우리 모두 바울의 주장처럼 형제를 살리기 위해 우리는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집시다.”라고 하면 아무도 ‘아멘’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런 소리를 했는데 우리는 왜 그런 소리를 못하냔 말이지요. 노림수가 영혼 불멸설, 자기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기에 그런 소리를 감히 못하는 겁니다. 그걸 바울이 이미 알아채고 그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주님의 구원은 집단적 이스라엘에 있지 개인적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가르친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3. 10. 11. 09:13 녹취 마침)
 서경수(IP:218.♡.161.113) 13-10-24 09:32 
광주 강의(2013. 9. 27) 46-2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잠시 정리해 보면, ‘숨어 있는 것이 나타날 때는 피로 나타난다.’고 했고,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 ‘피가 인격화 되죠.’ 그러면 당시에는 제사장이 됩니다. 하나님은 왕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하나님은 없지요. “‘없다고 하지 말고 안 보인다.’라고 하지?” 라고 할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민족에게나 신은 안 보이지요.

불교 신자들이 부처를 믿는 줄 아세요? 아닙니다. 부처는 상징물입니다. 무신론자는 있어도 무신자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이고, 신을 찾아가는 방식에서 신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제사장 형식으로 오니까 사람들은 제사장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합니다. 이 관계가 틀려먹었단 말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제사장을 주셨다.’라는 인간이 돌에 맞아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는데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면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사람이 구원 받겠다는 자체가 이미 신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없어요. 인간들이 ‘신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신적 영혼에 불과하고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워도 여호와와 다른 신이 싸워야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나가면 그것이 정답인줄 알았어요. 나중에 보니까 다른 신도 신이 아닐뿐더러 지금 자기들이 믿는 여호와도 진짜 여호와가 아니었어요.

그러면 처음부터 여호와는 어디에 있느냐? ‘여호와가 어디 있는가?’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된 생각은 뭡니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자’는 자체가 이미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된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며칠 전에 소설가 최인호씨가 죽었어요. 초반에는 잘 팔리는 책을 썼어요. 그런데 후반에는 점점 ‘진리가 무엇인가’를 파고드는 책들이 나왔어요. 그래서 잘 팔리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어요. 이 사람의 후반기 책들을 제가 보니까 ‘인간의 모든 종교가 더 썩었다’는 거예요. 천주교, 기독교, 불교 전부 다 썩었는데 썩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죽었어요.

나쁜 것을 지적하는 것은 좋은데, 그럼 나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에스겔이나 레위기의 정답은 뭡니까? 그런 것을 염두에 둔다는 자체가 아직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전혀 하나님 말씀을 이해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걸레 꿰매봐야 넝마지요. 걸레 깨끗하게 삼는다고 행주로 바뀌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의 어른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착합니까? 제사장은 거룩합니까?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싸해 보이는 것을 세우는 거예요. 세트장처럼.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제사 지내면서 그 제사가 효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했으니까 영적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드리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영적 예배를 드리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땅에서도 말고 저곳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목사들이 이 말씀을 보고 ‘예배가 성도의 목적이구나.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자.’라고 주장해요.

그런 마음 가진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 그것이 예배입니까? 그것은 숨어있는 진짜를 드러내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입니다. 진짜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뭔가를 깨뜨리면서 나타나요. 그 깨뜨려야 될 것들을 주께서는 마구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도록 유지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의와 신과 인으로 드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울 서신에는 일체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지요. 오히려 십일조를 드리는 그것이 십자가 복음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히브리서에 보면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르고 십일조를 해요.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뜻을 안다고 십일조를 안 해요. 어쨌든 둘 중 하나를 하기 마련인데, 어떤 쪽을 택하든지 그것은 ‘진짜 숨어있는 십자가 피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라는 그런 모습이나, ‘했으니까 나에게 벌주지 마세요.’ 라는 모습 둘 다 구멍이 나야 돼요.

지난 수련회에서 변곡점 이야기를 했는데, “내 인생은 이렇게 갔다가 저렇게 갔다가 왔다 갔다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하면, 하나님은 볼펜으로 그 그림에 구멍을 뚫어버리겠지요. 이것 자체가 없어진 것입니다. 없어지지만 우리는 매일 이것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눈만 뜨면 밥 먹고 살려고 설쳐야 돼요. 왜? 우리를 위해 만든 세트장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세트장이거든요. 이 세트장의 특징은 자신이 주인공입니다.

이제 레위기 21장을 보겠습니다. 5절에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제사장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면 어떻겠어요? 길러도 안 돼요. 대머리로 깎는 것은 애굽의 풍습이라 안 되고, 길게 땋는 것도 안 됩니다.

민수기 6장 5절에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고 했지요. 삼손의 스타일이 다른 사람과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머리카락이 길었어요. 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머리카락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알고, 삼손도 알고, 나중에는 블레셋 사람도 그 비밀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비밀, 머리카락이 세트장이었습니다. 그 머리카락 잘리고 난 뒤에 더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나는 이래서 안 돼.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천국에 못가.”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가장 성도다운 순간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천국 간다면 천국 못가는 사람 아무도 없겠다.”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주님 앞에 모든 무기를 다 내려놓은 거예요. 이런 사람은 자기 구원을 포기한 사람이고, “나는 돌에 맞아 죽어도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네가 바로 의인이다.”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지요.

옆에 사람은 바쁩니다. 이레에 두 번 십일조하고, 하루 세 번 기도하고, 구제하고. 그 당시에는 이런 것이었는데 요즘은 더 많은 항목이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딴 것 보지도 않습니다. “나는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살려고 수녀원에서 주님만 찬양하며 살았고,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건강식을 만들어 제공했습니다.”이런 소리해도 주님은 듣지도 않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세리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면서 가슴을 치는 세리를 향해 주님은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눅18:14).”고 하셨지요. 여하간 주님이 구원하실 때는 아슬아슬하게 구원해요. “나는 지옥 갈 뻔했다.”고 한숨을 내 쉴 정도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의아해서 오히려 주님께 묻습니다. “내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 그 때 주님은 “어린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런 답변이 돌아오지요. 이것은 우리가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졌기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아야 될 자이기에 그런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것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이면 이것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신은 안 보인다.’고 하지만 그대로 그 신은 가짜입니다. ‘안 보이지만 계신다.’는 것도 가짜입니다. 왜냐? 주께서 나타나실 때는 ‘내가 여기 있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피가 있고 언약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때 거기에만 아버지가 계신 거예요. 

아버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신(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저주 받고 지옥 갑니다. 그러면 하나님 안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지옥 갑니다. 관심사가 하나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나타내셨는가? 나타내는 방법은 십자가 피를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피는 나를 찌릅니다. 나로 하여금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면 나는 뭡니까? 임시직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척하고, 노력하는 척하게 만들어놓고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깨닫게 하는 식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이 나오는데 나실인은 사라지는 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있어도 없는 자’입니다.

5절에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머리카락을 기르지요. 시간이 중지된 겁니다. 새로운 시간에 돌입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주기성에서 열외 된 거예요. 나실인이 뭐냐 하면, 서원한 자인데, 서원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바치기 때문에 나실인은 뽑혀 나온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과는 달라요.

나실인은 인격체인데, 그 나실인이 길렀던 머리카락이 서원이 끝날 때 번제물에 포함되어 드려집니다. 7절에 보면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라고 했어요. 이것은 혈육으로부터의 격리입니다.

에스겔 44장 25절을 봅시다. “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시집가지 아니한 자매를 위하여는 더럽힐 수 있으며”라고 했어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제사장들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돼요.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부모나 자식, 또는 형제가 죽으면 시체를 가까이 해도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민수기 6장 7절에는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라고 했어요. 장례식 참석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네가 있어도 결석처리 된다.’는 것이지요.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존재 속에 포함이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머리카락이 제물에 포함된다는 말은, 장차(신약 시대에) 제물이 인격체(메시야)로 나타났을 때에 그는 우리와 함께 있어도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니에요.

같은 죽음, 죄 속에 있는 사람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 바깥에 있는 사람이 죄 속에 있는 사람을 건질 수 있는데 바깥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죄 속에 들어와서 죄인을 건져 냅니다. 우리는 죄인이어서 꼼짝도 못하는데 메시야가 찾아와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건지는 것이나 강도를 구원하는 것이나 세리와 창기를 구원하는 것, 남들은 금식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이유는 “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 속에 있으면서도 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거예요. 이것의 그림자로 나실인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보다 더 기가 센 사람이 나실인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하지 말고 ‘나실인 나라’라고 하면 좋겠는데 왜 ‘제사장 나라’입니까? 제사장은 바로 이런 현상에 대한 해석자요 목격자로 백성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백성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이 몸을 바칠 수는 없거든요. 그러나 나실인은 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민수기 6장 7절에서 부모 형제로부터 끊어졌다는 것은 애초부터 나실인 되겠다는 그 약속은 부모에서 허락을 받는다든지 누구하고 의논할 사항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그 사람에게 지시한 사항입니다.

그때부터 머리카락에 손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머리카락은 세상에서 떠난 조치이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시간은 여기에 적용이 안 되니까 머리카락은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는 거예요. 시간의 중지를 선언하는 것이지요. 나실인이 서원한 그 기간만큼은 시간이 중지됩니다. 시간이 중지된다는 말은, 나를 위한 세월은 다 삭제해 버립니다.

군대 가면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어요. ‘너는 속세를 떠났기에 바깥세상에서 아버지가 환갑하건 누나가 결혼을 하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쳐라.’ 그런 뜻에서 머리를 자릅니다.

제사장이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아야 될 이유는, 머리카락 길러야 할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44장 20절에 보면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이렇게 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독 계열은 다윗의 친척입니다. 그러니까 숨어 있는 왕과 한 집안이 제사장이 되는 거죠. 이것은 다윗 언약이 주어지기 전과 달라요. 다윗 언약이 주어지고 난 뒤에는 모든 제사장은 사독 제사장으로 규정이 되고, 그 전에는 사독 계열이 아닌 모세 계열을 통해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다윗 언약 이후에는 제사장이 왕 수하에 있게 됩니다. 정확히는 왕의 언약 안에 있어요. 따라서 이 사독 계열의 제사장이 하는 모든 것은 ‘제사 잘 드리면 구원 받습니다.’라는 차원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에 제사를 드립니다.’라는 차원이 되는 겁니다. 완성차원에서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삼스럽게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가 아니라 ‘이미 구원 받았기에 너에게 그런 현실이 일어나게 될 거야.’라고 통보해 주는 차원이에요. 이미 면역체계가 깨어진 사람은 “이번 가을에는 알레르기 비염에 한 번 걸려볼까.”라고 해서 비염에 걸리는 것이 아니고, 환절기가 되면 벌써 코가 간질간질하고 눈이 따갑고 기침이 나고 콧물이 흐릅니다. 제 경우에는 8월 초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됩니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라는 징후가 내가 원치도 않는데 8월 초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럴 때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코에 뿌리면 그 증상이 사라집니다. 그 약을 사용하기 전에는 설교할 때 애를 먹었어요.

이미 사독 계열의 제사장이 되면 사독 계열이 다윗 언약의 일부로 포함이 되기 때문에, 지금 여호와가 왕이기에 구원 받은 징후로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토지가 있고, 제사장이 있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이 에스겔 시대인가? 그건 아니고, 이 이야기는 장차 메시야가 오면 이 성전, 이 제사, 이 땅 전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자신들이 사독 제사장만 골라서 세웠습니다. 그 이야기가 [에스라, 느헤미야 속으로]라는 책에 보면 나와요.

사독 계열만 세우고, 다윗 혈통만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일으킨 혁명이 ‘마카비 혁명’입니다. 이게 진짜입니까, 세트장입니까? 세트장입니다. 기껏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그 정도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에요. 에스라, 느헤미야에 사독 계통이 나오니까 자기들도 그 혈통을 찾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혈통과 상관없는 백부장에게 “아브라함 본 자손은 다 쫓겨나고 네가 바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마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지요.

그러니까 다윗 언약의 에스겔 이 내용에 대해서, 이 언약을 받고 난 뒤에 인간 자체가 엉터리 세트장이니까 자기가 이 에스겔을 보고 엉터리 해석을 해서 엉터리 망상을 만들어놓고 이것을 현실화 시킨 것이 유대 나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오셨을 때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소경을 보면서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이 질문이 뭔가 하면, 질문하는 제자들은 아무리 나빠도 저 정도 죄는 안 지었기에 아직 눈이 멀쩡하다고 여긴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내 눈이 멀쩡하다고 하는 자가 소경이고 오히려 안 보인다는 자가 본다.”고 했어요.

이것만 따져도 예수님이 하신 모든 해석은 우리 인간을 뭉개는 식입니다. 우리가 한 것은 일단 다 밟아요. 우리가 열심히 인생의 밭을 갈았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그 밭을 밟고 지나갑니다. 자근자근 밟아서 부수고, 그것을 보고 우리는 화를 내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어 놓고 그 때 성경 말씀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껏 밟힙시다. 우리는 매일 주님께 밟히면서 살아가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에스겔 44장 28절을 봅시다.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했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제사장인데, 어떤 제사장입니까? 포도주 안 마시고,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들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히 여기고, 시체를 가까이 아니한 이런 제사장에게는 하나님이 기업이 된다고 했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29절을 봅시다. “그들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먹을지니”라고 했어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내가 곧 그 기업’이라는 말은, ‘내가 너희를 먹여 살려 줄게.’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당시 사람들이 이해했을까요? 이해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행할 때 그 떡은 그냥 떡이 아니고 예수님의 축복을 경유했습니다.

축복받은 떡은 어떤 떡입니까? 먹으면 우리가 곧장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축복하신 떡을 먹었음에도 그들이 주님을 떠났어요. 그러면 주님이 축복한 의의가 없어지잖아요?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기업이 된다는 말은, 옛날에 기업이라는 것은 재산 상속권입니다. 상속권은 토지를 물려받는 겁니다.

봉건주의가 있는데, 이것은 8세기 프랑스 칼로링 왕조시대에 처음 시작이 되었는데, 토지를 놓고 주군과 신하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신하는 사무라이와 같습니다. 사무라이는 농사를 안 짓습니다. 평소에 낮에는 칼 연습하고 밤이면 기생집에 가서 술 마시고 --- 일종의 조폭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언제 제 역할을 제대로 하는가 하면, 나이트클럽 뺏길 때 그동안 연습할 칼 솜씨를 발휘합니다.

이들 사무라이를 먹여 살리는 것이 주군입니다. 주군이 된다는 말은 내가 조폭생활 하는 거예요. 옛날 모든 농부는 주군 밑에 있는 하인들이었고, 그 하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기사들이 했습니다. 이것이 봉건사회입니다.

왕이 토지를 영주에게 하사하면, 영주는 왕에게 세금을 내고 그 토지를 기사들에게 분배해서 관리합니다. 기사는 그 토지를 남에게 줄 권한은 없습니다. 즉 기사는 하급 귀족이 되고, 이것이 영국에서는 나중에는 하원이 되고, 영주는 상원이 됩니다. 이것이 의회 제도입니다.

어쨌든 봉건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토지를 분배받아야 합니다. 토지에서 양식이 나오기에. 그런데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기업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토지를 주는 것이 아니고 토지 가진 자로 하여금 십일조를 받고 제물을 받아서 그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이 받아서 “우리는 하나님 없으면 못 삽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런 제사장이 요즘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없는데 있어요. 모든 교인들이 다 하나님 때문에 사는 겁니다. 여러분의 직업을 주군이 주신 겁니다. 교사는 사무라이입니다. 학생들 앞에서 사무라이로 있습니다. “그런 짓하면 매 맞는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사람이 오늘날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뭔가? 기사들이죠. 사무라이입니다.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제물을 가져오면 그 제물의 일부는 제사장 몫이 되고,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이 방식을 가지고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행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떡으로 생각했어요. 그들은 예수님이 양식을 주신다고 여기고 찾아오니까,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왜 따르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나를 찾은 것이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영생을 모르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예수님이 주는 떡이 떡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떡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지요. “주님, 좋은 직장 주세요.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왜? 그 돈으로 먹고 살겠다는 거지요. 그러면 그 예수는 자기 살기 위해 이용하는 이용물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줄 것은 내 살과 내 피다.”

우리는 주님 살과 피를 먹기 위해 주님을 찾지는 않지요?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주님을 안 믿어요. 진짜 우리가 성도라면 주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습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라 제공되는 겁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명령하셨잖아요. 그러나 이 명령의 실행자는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살과 피를 먹게 함으로 내 대신 주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이 오늘도 우리를 영생 속에 있게 만드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 놓고 사 먹을 때, 비로소 내가 부자인 것을 깨달았다.’ 상당히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가 하면, 번데기를 먹고 싶어요. 대구 칠성시장에서 4,000원 주면 중국산 한 바가지를 줘요. 다슬기도 중국산은 굉장히 커요. 값도 싸고.

이것이 옛날 음식인데 이런 것이 먹고 싶을 때 그것 살 돈은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부자입니다. 얼마나 그 사람은 마음을 낮췄습니까? 소말리아 같은 나라 이야기를 들으면 기차 찹니다. 돈 주고 먹고 싶은 음식을 사먹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부자인지 좀 알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군 밑에서 사는 사무라이들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해요.

45장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주었고, 그 다음에 제사장 줬고, 다음에 땅을 줘요. 땅의 중심에 성소가 있고, 제사장 땅이 있고, 레위인 땅이 있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뭡니까? 성소 유지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옛날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지상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천상에도 그런 계급이 있다는 이야기다.” 순 엉터리 주장입니다.

분명한 것은 천국에 가도 바로 이 모습(에스겔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소 중앙에서 면류관 반납하면서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만큼 이 모든 것이 완성상태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완성되면 거기에는 생명나무가 있기 때문에 다시는 우는 것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죄도 없고, 에덴동산은 비교도 안 되고, 영원한 축복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 이런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그 혜택이 이스라엘에게도 주어지는 거예요. 에스겔 당시에. “조금만 기다려. 메시아가 오게 되면 성소가 되고, 제사장이 되고 그 때에는 그 땅에서 잘 사는 거야.”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인 줄 오해를 한 거예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이 땅도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십자가 안에서 말씀이 완성되었으니까, 에스겔 45장이 완성되었으니까) 올라간 거예요. 올라가서 처소가 어디 있습니까? 하늘에 처소가 있잖아요. 그 처소가 에스겔 45장이에요. 성령이 와서 “너, 너, 너 올라와!” 하면, 이미 처소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성령이 통보해 주고, 성령이 온 사람은 ‘웬 떡이냐.’하고 성령을 따라 가는 노정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한꺼번에 성령을 통해서 “네 자리는 저쪽이야.” 하고 좁은 길,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그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이라는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 덕분에 다른 사람이 덤으로 살아요. 이 구조를 천국 가서 보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말씀이 여러분 속에 그대로 작용해서 짧은 순간이지만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기에 그 혜택을 입었기에 내가 지금도 주님을 믿게 되었구나. 그러니까 성도 맞구나.’라는 것을, 이미 다 용서받고 구원 되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주신 사랑을 말로 다 어찌 표현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일방적으로 창세전에 택하시고, 주님 아는 식으로 이끌어주시니 이 은혜를 한 순간도 잊지 말고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10. 24. 08:5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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