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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3 02:06:07 조회 : 2261         
제사의 반복성 131122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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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21.♡.32.143) 13-12-04 08:48 
광주 강의(2013. 11. 22) 48-1

에스겔 45장 18-19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정월 초 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내용이 창세기와 예수님 십자가 사건 중간에 있지요. 중간에 있으면서 무엇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내용을 전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겠지요. 상하기 쉬운 음식물을 택배로 보낼 때, 처음 물건을 담았을 때는 싱싱했겠지만 우체국에 갔을 때는 조금 시들어졌을 것이고, 마지막 소비자에게 도착했을 때는 처음보다는 시들었겠지요.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달라지는 모양새가 에스겔에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그 시대 사람들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지요. 왜냐하면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가 모든 제사를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히브리서 10장 18절에 보면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했어요. 예배 드렸다고 죄 용서 받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성만찬 하면서 ‘이 떡과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소리는 사기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다시는 죄 씻는 예배나 제도, 형식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느냐?’ 이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이렇게 과거완료형으로 되어야 합니다. ‘무슨 근거로 제가 구원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지, ‘제가 무엇을 준비하면 구원 받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금 에스겔의 경우에는 제사를 드리라고 했기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구원은 사람이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 드려진 한 번의 제사가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을 통보받는 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통보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 내가 구원 받았지? 아, 예수님 십자가 지심 때문이구나.’ 이것을 알지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남들 보기에는 그저 종교고 기독교의 교리에 관한 문제로 들리지만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은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는 이것이 우리의 삶에 동력이 되지요.

살 때도 죽을 때도 이미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구석구석에 파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는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했지요.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일상을 만들어놓고 그 일상 속에서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예배를 받으십니다.

일상에서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방식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면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모든 것이 죄임을 안다는 것은 구약의 말씀으로는 안 되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신구약 전체가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구약의 십계명이나 신약의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모든 말씀이 십자가가 바탕이 되어 올라오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을 대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향유를 부었어요. 그 때 여자가 스스로 ‘나는 잘났어!’ 이런 생각하면서 발을 씻었습니까? 아니지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이러한 상황,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십자가가 모든 영역에 덮쳐서 조성된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나를 걷게 하셨다는 것을 알 때, 자신이 걷게 된 것이 자랑스럽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죄인이란 생각이 들었겠어요? ‘이제 걷게 되었으니까 자유롭게 살 거야.’ 이것이 아니라 ‘걷지 못할 때나 걸을 때나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았다.’는 마음, 다시 십자가로 환원되는 거예요. 앉은뱅이인 내가 걷게 된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앉은뱅이인 나를 걷게 하셨구나.’ 이것을 계기로 해서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항상 우리의 밑바닥을 보게 하는 거죠.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최초의 제사가 어디에 등장합니까? 창세기 4장이지요. 그 제사를 보면 두 사람이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과 아벨. 아벨이 먼저 제사를 드려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 아니고, 가인이 먼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거절했지요.

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을까?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미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습니다. 그러면 제사라는 것은 그 범죄한 흔적을 도드라지게 노출시키는 것입니까, 감추는 것입니까? 죄를 노출하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습니까, 감추는 제사를 받습니까? 인간이 범죄했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습니다.

그러면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것은 인간이 범죄했음을 감추려고 한 것 때문입니다. 범죄의 현장을 통과하지 않고 돌아가려 할 때 그 제사는 거절당합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신 아벨의 제사는 양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아벨에게 일어날 사건을 받으신 겁니다.

아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았다는 소문이 나면 죽임을 당하지요. 그 때 창세기 3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제사를 통해서 반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 봐, 죄 지은 것 맞잖아?”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하시는 말씀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3:17).”고 하셨어요.

제사가 전에 있었던 말씀을 재현해서 그것을 구체화시키고 현실화 시키는 것이라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죄다.’라는 것에 머물면 안 되고, 죄인에게는 필히 ‘죽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등장인물을 통해서 ‘죽으리라.’까지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 중 누가 죽었습니까? 가인이 죽은 것이 아니고 아벨이 죽지요. 오히려 가인이 살인을 했는데 살인자는 안 죽였습니다. 이건 구약 율법과 다르지요? 민수기, 신명기에 보면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살았다’는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들춰내는 죽음의 진수인 것을 산채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이 칼에 찔려 피 흘리고 호흡 중단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개념을 확대시키는 겁니다. 소위 살아있는 것조차도 곧 죽은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확대시켜 나가는 거예요. 이런 놀라운 사실을 하나님은 제사 제도에 담으려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제사 제도는 우리의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로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제사에 인간과 결부된 제사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 사람을 제물로 바쳐 죽이는 인신 공양하는 그런 제사가 등장하지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인간도 없고 이삭이란 인간도 없어요. 둘 다 없는 인간이에요. 아브람은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와서 새롭게 조성한 인간입니다. 아브람 본인이 아브라함 되려고 애쓴 적이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찾아와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많은 자의 아비)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일방적인 형식만(이름만)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시면 그 내용은 누가 채우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이 채워요. 많은 자식의 아비가 되려면 아버지가 살아있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죽어야 비로소 ‘많다’가 나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 12절을 봅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빼앗길 게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상한 말씀 하신 것 아닌가요? 아무것도 없는데 뭘 빼앗아요? 이런 말씀을 해석하려면 구약과 관련시키지 않으면 해석 자체가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란 사람은 없어요. 이삭도 없는 사람입니다.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 배후에 약속을 던져놓고 자기가 던진 약속을 자기가 되찾으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하나님. 그분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없는 이삭을 새롭게 만들어 냅니다.

없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약속 때문에 있게 되지요. 그러면 약속에 포함되지 않는 기존의 있는 것들은 뭡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없는 거예요. 없는 것인데 있는 척을 하니까 없는 것을 빼앗아서 삭제해 버려야겠지요. 제 설명이 어렵습니까? 가짜라는 말입니다.

가짜 명품 어떻습니까? 가짜 시계, 가짜 비아그라는 제 기능을 못하고, 제 성분이 없지요? 효과도 없고. 없으니까 빼앗아야죠. 이것은 없는 것을 단순히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현재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새로 등장하는 것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저쪽은 착실하게 제거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대구 강의에서 ‘성실한 방치’라고 했어요. 성실한 방치가 김장철에도 있어요. 보통 아줌마들이 김장을 하고 남편은 그늘진 곳에 구덩이를 파고 김장독을 묻을 때, 그 김장독을 방치해 두지요. 그 방치가 성실한 방치가 되는 겁니다. 늘 생각하고 있어요. 성급하게 꺼내면 안 돼요. 묵은지가 되려면 3년은 방치해 두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 작업을 차분하고 착오 없이 성실하게 수행하십니다. 성경 자체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있음으로 만들기 위한 성실한 작업의 절차와 순서를 지금 우리가 에스겔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에스겔은 창세기와 십자가 사건 사이에 있어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일단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돼요. 모든 철학과 과학이 다 그래요.

유럽의 과학자들이 ‘힉스’라는 물질을 얼마 전에 발견했어요. ‘힉스’라는 물질의 의미가 뭐냐 하면, 영혼과 물질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겁니다. 정신과 물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아내는 거예요. 이제 과학이 종교의 영역마저 점령하고 있어요. ‘힉스’를 넘어서면 ‘없음’이에요.

‘없음’에서 어떻게 ‘있음’이 나왔는가? 그 경계선에 ‘힉스’라는 물질이 있단 말입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물질의 최후 알맹이(원자)가 물질로 된 이상은 끊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걸 ‘미분’이라고 합니다. ‘微(미)’는 아주 작은 것을 ‘分(분)’은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잘게 쪼개는 것이죠.

아무리 잘게 쪼개서 마지막 점이 되었다 할지라도 점도 끊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점은 끊어지지 않는 최후의 것’이라고 했어요. 이것을 ‘공리’라고 합니다. ‘공리’는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한 거예요. 과학은 신을 도입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마지막 신의 세계로 넘어가기 직전으로 보지만, 라이프니츠는 신을 믿는 철학자이기에 그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것도 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질과 영이 함께 있는 것을 ‘모나드(단자)’라고 합니다. 이 단자의 특징이 뭔가 하면, 주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단자를 만들었어요. 단자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주름이 펴지면서 안에 감춰진 것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 주름 속에 감춰져 있던 정보는 하나님이 창조할 때 ‘너는 2013년에 광주에서 누구를 만나야 해! 어느 골목에서 교통사고 나야 돼!’라는 정보도 이미 담겨 있어요.

모든 예정된 것이 펼쳐지면 세상은 지금의 모습대로 된다고 하면서 이것을 ‘예정 조화설’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처음 창조할 때 ‘단자’와 더불어 시간도 같이 창조해서 만들어진 ‘단자’에 시간이 병행해서 펼쳐지도록 되어 있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옥상에서 돌이 떨어져 죽었다면 그 돌은 때가 되어 바람이 불어 떨어졌는데, 그 바람 부는 것도 이미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바람이 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그전까지의 신학은, 인간의 욕망은 나쁜 것이었어요. 왜 나쁜가 하면, 홉스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남이 죽든 말든 자기만 살면 된다는 것이기에 나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경에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보지 않고 주름이 펼쳐지는 것을 가지고 욕망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욕망을 나쁘게 보지 말고 욕망조차도 내가 나 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욕심내는 것도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거지요. 라이프니츠가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신학자들은 할 말이 없는 거지요.

당시의 신학자들은 뭘 했는가? 신앙고백서 만들어놓고 그것을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일만 했어요. 개신교나 천주교나 신앙고백 가르치는 일에 바빴지 말씀 연구는 없었어요. 그것은 철학자들이 했어요.

철학자들이 다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새롭게 열리지요. 그런데 문제는 ‘있음’에서 ‘없음’의 세계로 다가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있잖아요. “있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구원 받습니까?” 라고 할 때, 출발점을 나에서 시작한다는 자체가 이게 과학이 되었건 철학이 되었건 이것은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복음은 뭡니까? 복음은 단순히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고 우리 쪽에서 다가서는 그 경계선에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것이 복음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유한하다고 봐요. 한계가 있다고 본 거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한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한계가 있다고 봐요. 새처럼 날지도 못하고 또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는다는 것을 꼭 교회 다녀야만 압니까? 어떤 사람이 노름해서 돈 잃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그 사람도 높은데서 뛰어내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죽음을 아니까 죽음에서 사는 것도 생각하겠지요.

내가 여기 있는데 결국은 죽는다. 그러면 사는 방법은? 이렇게 되면, 역사에 묵시를 첨가해서, ‘역사의 생이 끝난 후 묵시의 세계를 기다린다.’ 라는 아이디어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인간이면 누구나 표현을 못할 뿐이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에요. 역사에 묵시를 추가한 생각을 복음 안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역사와 묵시도 묵살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역사와 묵시를 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 만남의 현장에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데, 주님은 그 십자가 사건을 계속 들이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 뭐였습니까? 우리 같으면 “봐, 보란 말이야! 내가 살아났잖아?” 이렇게 보여 줄 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창자국, 못자국을 보여 주셨지요.

그것은 부활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십자가가 드러나야 부활이에요. 십자가가 보여야 돼요. 도마는 뭘 봅니까? 창자국, 못자국을 보지요. 그걸 보면서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어요. 성령은 그 지점을 부각합니다. 왜? 그 십자가가 부각되어야 성령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장하시기를, ‘죄와 의와 심판의 근거는 오직 하나에게 나왔다.’ 그게 뭐냐? 인간들은 아무리 머리를 써도 예수님에 대한 판결은 잘못 되었다. 그 잘못된 지점을 한계 지점으로 우리에게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동안 내가 알았던 과학, 철학, 경험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되지요.

제가 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를 사임하고 자진해서 낙도로 간 목사 부부가 가난한 섬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예수님의 희생적 삶을 산다고 자부했는데, 여상 졸업하고 서울에 취직한 딸이 오랜만에 부모님 보러 온다고 갯벌을 건너오다가 밀물에 빠져 죽었어요. 사랑하는 딸은 죽고 딸이 신었던 장화를 발견했는데, 그 장화를 교회 강단에 집어던지면서 “주님, 저에게 어쩌라고 이런 일을 일으키십니까?”라고 울부짖었어요. 실화입니다.

제가 그 사실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서울에서 목회하지 뭣 하러 낙도로 갔나. 영적 영웅이 되기 위해 갔는가? 본인은 그런 결단적 삶이 대단한줄 알았지요. 주님이 끝까지 밀어붙이면 ‘내가 낙도까지 자진해서 내려왔습니다.’라는 자부심도 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하시는 일에 우리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들 주사 놓을 때 어떻게 합니까? ‘이 주사는 어떤 성분이 있고, 이 약을 개발한 사람은 누구다.’ 이런 설명 합니까? 그냥 간호사가 아이 엉덩이를 치면서 주사바늘을 꽂지요. 아이는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잖아요. 따끔합니다. 성령이 들어오면. “왜 저에게 이런 아픔을 주십니까?” 이런 소리가 나와요.

우리가 ‘이것까지는 내 인생이고, 죽어서 천국 가겠습니다.’할 때, 그 경계선을 누가 정합니까? 보통 본인이 정하잖아요. 그러면 이 본인은 가인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곳까지는 내 영역이고,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영역이니까 내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마음을 달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복을 받겠다.’고 하는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더욱 경건한 생활을 하고 가능하면 나쁜 짓을 안 합니다. 혹시 나의 나쁜 짓으로 중요한 일이 파토나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이게 바로 가인입니다. 경망스러운 행동을 스스로 자제하는 것. 역사와 묵시의 한계선을 자기가 정해 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그렇게 경계선을 정한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짜 경계선을 만드는데 부정적 역할로 기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경계선을 정했던 그 인간이 동생 아벨을 죽였잖아요. 그게 경계선이에요. 이 경계선은 우리가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우리는 나름대로 ‘이것까지는 성령이 인도하는 삶이고, 이것은 막 사는 삶이다.’ 나름대로의 기준이 정해져 있으면 그 기준에 의해서 맞아죽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준을 정해도 그것은 주님을 죽게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 쪽에서 뭔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될 수 있으면 비판 안 해야지’라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우리의 속성이에요.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안 꿈틀거리게 성경 보지 말까요? 우리는 안 꿈틀 거릴 수가 없어요. 성경 말씀은 우리의 모든 욕망적 꿈틀거림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방향으로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보세요. 우리의 모든 욕망은, ‘이제는 예수님 앞에 바르게 산다’는 식으로 왜곡이 작동하게 됩니다.

교회 나와야 지옥 갑니다. 그리고 교회 나와서 지옥 가야 천국 갑니다. 자신이 지옥 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 때, 그 여인은 옆에 바리새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의식할 필요도 없어요.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 있지요. 그 여자가 예수님 만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여인이 바리새인 눈에는 어떤 사람으로 보입니까? 여전히 행실 더러운 여인일 뿐이지요. 그러나 용서받은 여인의 시각에서 보면 바리새인은 아마추어도 그런 아마추어가 없어요. 자기는 프로입니다.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이것과 같은 거예요.

바라새인들은 세상이 뭐고 인간이 어떤 자인지 전혀 몰라요. 야비하고 비겁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닥에 글을 쓰니까 돌 들고 서있던 자들이 다 도망을 갔어요. 글을 쓸 때 그 글이 그들에게 찔림이 되었어요. 그러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이 안 보이는 쪽으로 얼른 도망을 갔어요.

그물로 고기를 몰듯이 하나님은 바벨론을 시켜 예루살렘 주변을 먼저 침공해서 거기서 피난민을 만들어서 그 피난민을 예루살렘에 모아서 예루살렘을 불 질러 버립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작업은 실수가 없습니다. 멸망할 자는 기어이 멸망케 하십니다.

복습해 봅시다. 제사란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는(경계선을 만드는) 작업인데, 인간이 나름대로 천국과 지옥, 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일방적으로 규정하지요. 그러나 진짜 제대로 된 분류 작업을 위해 투입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또는 약속이 주어지면 이 세상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현실은 아니고 말씀에 입각해서 모든 것이 약속의 현실로 새롭게 조성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판타지(환상)입니다. 그러면 판타지 아닌 실재를 알 수 있는가? 전혀 몰라요. 내가 계속 판타지만 만들어 내기 때문에 판타지를 실재 현실로 알고 있어요. 이걸 알기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글을 봐도 그 순간 자신이 선택한 보고 싶은 것만 모아서 그것을 현실이라고 우깁니다.

영화를 두 사람이 같이 보아도 어느 장면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서로 달라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30~40대 아저씨, 아줌마들은 전부 천사처럼 착한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그 어른들이 만드는 세상은 정말 내가 꿈꾸는 진짜 천국 같은 세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린 시절 그런 생각 안 했습니까?

어린 시절 소풍을 가서 들판을 바라보면 갈대나 나무들이 아름답잖아요. 저 들판을 건너가면 마치 영화에 나오는 유럽의 아름다운 장면이 숨어 있을 것 같고, 멀리 보이는 예배당을 보면 그곳에는 천사가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는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그런데 지금 어른이 되어 그런 것들을 보면 전혀 달리 보이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왜냐? 자기가 아름답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천둥, 번개만 쳐도 무서워서 자기 방에서 엄마 방으로 옮겨오지요. 또 꿈에 귀신이 나타나면 얼른 엄마 방으로 오지요.

[사우드 오브 뮤직] 영화를 보면 마리아 선생님이 처음에 와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 번개 때문이에요. 번개가 치니까 아이들이 무서워서 마리아 선생님 방으로 갔지요. 어린아이들은 자기와 비교해서 자기보다 월등한 존재(선생님, 또는 천사)를 의지하려 하는 거예요. 이게 아이들인데 어른이 되면 세상에서 비록 낙담해도 하나님(또는 부처님)을 의지함으로 안심을 얻는 거예요.

칸트에 의하면 이것이 최고의 악입니다. 왜냐? 자신의 책임을 자신이 믿는 신에게 미루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가장 악랄한 자라고 했어요. 대표적으로 교회 와서 하나님 믿는다고 “나는 부족합니다.” 하면서 자신이 지신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니 얼마나 뻔뻔합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죄 짓고는 “용서해 주세요.” 이런 악랄한 자는 지옥 갑니다. 저도 지옥 간다는데 한 표 던집니다.

이런 자들은 지옥 가는 것 맞습니다. 이것은 칸트가 잘 본 거예요. 그렇다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부은 여인은 천국 갔잖아요. 그 사람은 본인이 믿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믿게 하셨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한계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족하니까 용서해 달라고 할 때는 또 하나의 한계를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내가 의지할 만한 대상을 찾는 것은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아이들은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고, 그래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거예요. 어른들이 산타크로스가 없다고 하면 아이들은 웁니다. 왜냐? 산타크로스는 자신이 의지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신이 없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산타크로스 안에 본인의 이상체가 들어있는데 그것이 없다고 진실을 알려주면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허구가 그들에게는 진실인데 그 허구의 허구성을 드러내 버리면 또 다른 허구를 끌어 모아 진실을 만들어야 하기에 새로운 수고를 또 해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주 신비한 비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귀신이 있는데 거기에서 제사를 잘 드리면 복 받고, 제사를 잘 못 드리면 벌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함부로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그네가 그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 그곳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본인만 알고 있으면 괜찮은데 그 사실을 레스토랑에 가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 마을 사람이 그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왜? 허구가 허구로 드러나는 순간 그 마을 사람들은 죽어요. 허구를 진실로 믿어야 본인들이 사는데, 이방인이 와서 허구를 허구로 드러내니 그들이 믿는 것이 뭐가 돼요? 그래서 이방인을 죽였어요.

바로 그것이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진실을 이야기하니까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다’고 전하는 사람을 내쫓고 복음을 제거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그곳이 교회가 아니고 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름달을 보면서 늘 비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우주인이 달에 가서 테이프로 달을 가려 달 자체가 안 보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때는 달을 보고 비는 사람이 ‘달이 없네!’ 하고 그 행동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달을 또 만들어요.

예수를 죽이면 죽은 자리에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만들어내요.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만들어요. 그것이 있어야 교회가 돌아갑니다. 인간들은 허구로 진실을 만들어냅니다. 본인 자체가 허구이기에 진짜는 다 죽여 버리고 허구를 만들어요. 허구에게는 허구가 맞아요.

진짜를 만난 사람만 진리를 알아요. 사울이 다메섹에서 진짜(예수)를 만났지요. 그 후 사울은 자신이 허구임을 알았어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말은, 자신이 누구보다 죄를 많이 지었다는 뜻이 아니고, 죄를 지금도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거지요.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핍박한 예수를 만났잖아요. 핍박이 없으면 진짜 제사가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핍박했지요. 그 핍박이 내용이 되어 가인과 아벨 노선이 나누어지고, 아벨 노선에서 제사가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사울이 핍박한 예수를 만나고 난 뒤 (바울이 되어)그가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길인데 바울은 그 길을 아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신 여인이 예수님께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곳을 나서지 말자 바리새인에게 욕을 먹고 아마 그 동네에서 못 살았을 겁니다. 약점이 잡혀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것이기에 내게 속한 사람은 미움을 당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네가 내 이름과 복음 때문에 미움을 받거든 이미 너는 나와 함께 있는 줄 알아라.’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12. 3. 18:17 녹취 마침)
 서경수(IP:218.♡.161.6) 13-12-19 13:52 
광주 강의(2013. 11. 22) 48-2

[교회를 넘어서] 245페이지를 보면, 그 앞의 내용이 뭐냐 하면, 솔로몬 성전과 새 성전의 차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윤곽은 이렇습니다. 솔로몬 성전과 새 성전이 별 차이가 없어요. 바깥뜰이 있다는 차이 뿐인데, 여기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율법을 집어넣고 새 성전이 이것을 포위해요. 이 성전 자체를 부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잘 못 되었다고.

너희들이 전에 있던 말씀을 어겼다는 거죠. 그래서 솔로몬 성전은 마땅히 무너져야 된다는 겁니다. 무너진 그 자리가 새 성전이 만들어지는 토대가 됩니다. 기존의 것이 무너지지 않으면 새롭게 새우는 것도 없어요. 인간의 죄가 드러나는 그 자리에 새로운 성전 십자가가 피어납니다.

죄를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현장이 곧 주님이 구원하는 자리가 돼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초점을 맞춘 것은 옛날 솔로몬 성전이 있을 때의 주안점이 뭔가 하면, 7월에 집중해서 제물이 많이 투입돼요. 그런데 새로운 성전은 7월이 중심이 되는 제사 제도는 날아가 버리고 1월로 바뀌어요.

이스라엘에서 1월의 의미는 새롭게 국가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4월인데 나온 후에는 달력을 새로 만들어서 그 달을 1월로 했어요. 1월로 시작한다는 것은 과거는 잊고 이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새롭게 구원 받아서 새로운 것이 아니고 ‘기존의 것은 죄야!’ 하는 식으로 새로움이 와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선악과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에요. 선악과를 계속 우려먹어야 해요. 그래야 선악과가 있는 동네와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완전히 갈라졌다는 경계선을 부각시킬 수가 있어요. 선악과의 영향력이 있어서 절대로 생명나무로 갈 수 없다는 것이 부각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성전이 새워질 때는 왕이 개입합니다. 245페이지에 (1)상번제가 나오지요. 상번제는 매일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246페이지에 2, 3, 4 내용이 나오지요. 그 내용을 보면 앞의 것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이야기를 해놓고 끝에 보면 에스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변천되었는가를 보라는 거지요.

출애굽기에 있는 상번제와 에스겔 새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번제가 달라진 것을 보면서, 옛 성전은 왜 망해야 되며, 새 성전은 왜 옛 성전 위에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게 새 성전을 완성했는가, 이 세 가지를 다 발견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구절에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도출되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도출되면 이것은 유대교가 됩니다.

출애굽기에 상번제는 매일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는데 아침, 저녁으로 한 마리씩 드립니다. 이것은 동네 의원으로 생각하세요. 그랬던 것이 민수기는 수컷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되 아침, 저녁으로 드립니다. 이것은 종합병원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암수의 차이가 없었는데, 민수기에서는 수컷으로 명시되었어요. 에스겔에서는 아침마다 1년 된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습니다. 이것은 서울의 큰 병원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에스겔보다 더 큰 병원은 어디입니까? 에스겔 선지자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신약의 어린아이들입니다. 천국에 있는 작은 소자라도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많이 알아요. 모세, 엘리아보다 성령 받은 12제자가 더 많이 압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안다는 말은 그만큼 인간의 죄가 더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의 경우 아침,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는데 그 때는 그 제사로 말미암아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제사를 드렸기에 가인의 제사가 아닌 아벨의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했겠지요. 요즘 교인들도 주일 11시에 예배를 드리면 뿌듯해 하지요. 거기에 추가해서 오후예배까지 드리면 더 뿌듯하고, 새벽기도까지 했으면 충만합니다.

보통 교회는 매일 새벽기도가 있지요. 그러면 그 교회 신자가 되었으면 매일 가야 하는데,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매일 가요. 그런데 좀 지나고 보니까 사람들이 새벽기도에 많이 빠지는 거예요. 주일 낮에는 200명 모이는데 새벽기도는 겨우 10명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나머지 교인들은 다 어디 간 겁니까?

그래서 자기도 매일 새벽기도 가는 것은 그만두고 주일 새벽에만 갑니다. 그러다가 주일 새벽도 빠지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주일 새벽에 빠지니까 자기도 빠지게 돼요. 이러다가 어디까지 가겠어요?

민수기에는 수컷을 드리라고 했는데 암컷을 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왜? 수컷을 잡으라는 새로운 버전이 나왔는데 그 전의 것을 드리면 제사가 안 됩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죄가 더욱 깊어집니다. 우물을 팠는데 물이 안 나오면 더 깊이 팝니다. 그러면 두레박줄도 같이 길어져야겠지요. 그래야 물을 뜰 수 있으니까.

이렇게 두레박줄이 늘어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직접 건져 주셔야만 구원된다는, 우리가 그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마지막까지 다 온 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구원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때까지 가면 더 이상은 없고 다 온 거예요. 십자가까지 왔다는 것은 이제 바닥을 친 거예요.

그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그 바닥까지 안 내려가면, 사람이 죄를 지었잖아요. 자신이 죄인인줄 알잖아요. 이게 내가 지을 마지막 죄인 것을 알잖아요. 내가 지을 마지막 죄라는 말은, 진짜 마지막 죄를 지었으면 ‘내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해도 죄다.’ 이렇게 되어야 마지막 죄지, ‘지금은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사회 봉사하게 되면 다시 개과천선할 수 있다.’ 라는 식으로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아직 바닥을 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귀하지 않다고 여겨 내다버린 분을 하나님은 귀하게 받아 주셨잖아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우리가 예수님보다 귀하게 여긴 것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실망으로 바꾸는지 우리가 목격해야 됩니다. 예수님보다 귀한 것이 뭡니까? 자식이죠.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다고 하면 “누가 예수님을 죽인단 말이야!” 하면서 절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식이 죽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난리가 날 겁니다. 주께서 내 자식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의 애간장을 녹게 하시는지 충분히 경험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님은 전혀 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내가 귀히 여겼던 것을 주께서 헛되게 하고 실망케 하시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리는 방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는데,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제가 [예수는 괴물이다]라는 지젝의 책을 서평했어요. 그 내용에 ‘지젝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모른다.’고 했어요.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보다 무엇을 더 귀히 여기는지를 몰라요. 아직 인생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정답은 나와 있습니다. 귀한 것은 자식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내가 귀해요.

내가 귀하다는 조건 하에 예수도 귀하고 십자가도 귀하고 하나님도 귀한 거예요. 이런 나를 완전히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데 못 버립니다. 그래서 주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장례식입니다. 나의 장례식이 치러지기 전에는 계속 나는 내가 귀합니다.

에스겔 뒤에 십자가가 오는데, 이 십자가의 제사가 우리에게 덮치면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돌아서면 또 잊게 되지만.

우리가 제사를 드려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 사건이 벌어졌고 그 십자가의 능력이 덮쳐서 그 효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나만 귀히 여기는 쓰레기 같은 우리를 주님의 제사에 활용하십니다.

이제 (2)안식일을 봅시다.
민수기 28장 9절에는 ‘안식일에는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둘을 바친다.’고 나오지요. 그런데 에스겔 46장 4절에는 “안식일에 왕이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 양 여섯과 흠 없는 수양 하나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신약의 안식일은 뭐가 나옵니까? 마태복음 12장 8절에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셨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시비를 겁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것입니다.

문방구에서 점원을 뽑는데 후보자가 20명 정도 왔어요. 후보자가 자기 소견을 발표합니다. A는 “나는 밤새 문방구를 지키겠다.” B는 “내 돈을 들여서 경비업체를 통해 철통같이 지키겠다.” 등등 좋은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C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어요. “나는 문방구 주인입니다.”

포도원이 있는데 농부들이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이 왔어요. 농부들이 어떻게 합니까? 포도원 주인을 죽이면 자신이 포도원 주인이 된다는 환상을 품고 죽이지요.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의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문방구에 점원으로 취직해서 밥 먹고 살겠다는 그 시스템을 ‘내가 문방구 주인인데’라고 나서는 분에 의해 인간의 시스템은 모독을 받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안식일을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내가 안식일 주인이니까 너희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너는 필통 지키고, 너는 지우개 잘 간수하고--’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주인이 필통이고 지우개고 그냥 줘요. “나는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비를 원한다.”

주인이 자비를 베풀어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주고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지지 않겠느냐?”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주인의 몫이지 종들의 일이 아닙니다. 주인이 지키는 것을 받아 챙기면 됩니다. 안식일의 완성이 십자가고, 십자가에 피가 있고, 그 피를 우리가 받아 누리기만 하면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이런 내용이 [십자가를 아십니까]라는 책에 나와요.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고 노회에서 목사 제명 되었어요. “웨스터민스터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데 당신은 왜 안 지켜도 된다고 했는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다.’라는 내용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웨스터민스터 조차도 잘 몰라요.

유대인, 바리새인이 아마추어였습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그 당시에만 안식일의 주인을 안 믿은 것이 아니고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을 안 믿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자신들이 만든 교회라는 환상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3)월삭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월삭에는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되(민28:11)” 성경에 이런 내용이 나오면 짜증이 나지요? 이걸 외우란 말인지, 이렇게 시행하라는 말인지. 왜 이것을 하는가 하면, 민수기에는 수송아지 둘과 수양 일곱을 드리라고 했고, 에스겔(46:6)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양 여섯과 수양 하나를 드리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에스겔의 이 말씀 이전에 민수기처럼 드리는 그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그것이 바로 솔로몬 성전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솔로몬 성전을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이 뭔가 하면, 월삭 때(매월 첫날입니다) 수송아지 수양을 드려봤자 솔로몬 성전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양 여섯과 수양 하나를 드리면 그 성전 안 망합니까? 물론 망해요. 수송아지 둘 드리나, 수송아지 하나 드리나 다 망합니다만 이런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그 태도를 가지면서 망해야 돼요. 그냥 망하지 말고 에스겔의 계시를 받은 입장에서 망해야 돼요.

구약 율법은 안 지키고 신약의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아야 된다고 했잖아요. 그것 받아들이면서 지옥가야 돼요. 그리고 그 다음 신약에 있다면(신약에는 없지만) 무엇이 적당하겠습니까? 아까 상번제 할 때 뭐가 적당했습니까? 십자가 이야기했지요. 두 번째 안식일 할 때는 뭐가 적당하다고 했습니까?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지요.

월삭 때는 뭐가 적당한가? 히브리서에 나오는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다. 예수님이 단번에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신약이 얼마나 복된 마지막 말씀인지 감사한 생각이 들지요? 더구나 우리는 이방인으로 율법에 따라 양을 드린 적도 없는데 다 지킨 셈이 되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1월 1일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날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절. “이스라엘에 있어 시간이란 국가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이름의 일을 보좌해 주고 지시해 주는 기능이 된다.”

시간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움을 지시하는 표식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1월 1일을 지킴으로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우리는 새로운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는 위상, 자기 위치를 반복적으로 깨닫게 하는 거예요.

제사는 한계를 만들어요. 제사는 한계를 반복적으로 되풀이 해주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되풀이 한다는 것은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 제사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 죄인의 경계선을 솔로몬 성전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지요. 드렸더니 하나님이 나타났지요. 그래서 솔로몬에서 지혜도 주시고 그가 원치 않았던 부귀영화도 주셨어요.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전도서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지요. 그리고 이 모든 복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다윗 언약에 따라 다윗 자손에게 주어질 마지막 복을 맛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자신에게 온 거예요.

솔로몬은 받은 복으로 이방 신을 섬겼어요. 자기는 안 섬겼지만 부인들이 각자 자기의 종교를 섬겼잖아요. 그러니 솔로몬 성전은 그 때부터 더럽혀졌지요. 결국 나라가 둘로 나눠졌고. 그런데 그 쪼개짐을 버리지 않고 증거물로 삼는 것이 새 성전의 모습입니다. 쪼개졌다고 버리면 안 되고.

시계가 깨졌다고 새 시계를 사는 것이 아니고 깨진 시계를 안에 품고 바깥에 새로운 시계가 돌아가는 것, 그 첫 번째 돌아가는 것이 1월 1일. 그 날의 의미는 ‘과거는 우리가 잘 못 한 것이 맞다.’ 짹깍 짹깍. 다시 돌아온 1월 1일. 또 잘못한 것이 맞다. 짹깍 짹깍. 1월 1일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징벌이 내려지고 새롭게 만들어진 성전이 바로 이 성전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입니다.

부활과 십자가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해운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는다면 발자국이 생기겠지요. 이 발자국이 십자가라면, 이 발자국 모양의 모래까지 그대로 떠내는 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한계를 주고 우리를 구원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작업에 이미 합류된 사람입니다. 합류되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압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 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사실. 우리는 무능한 나에서 유능한 나로 한계를 넘어서려고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죠. 통일되면 뭣합니까? 통일되면 우리 집 밥상이 더 풍성해집니까? 더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거예요? 그냥 통일 되었다는 추상적인 기분에 불과해요. 세상의 인기라는 것도 잠시 뿐입니다. 탁재훈, 이수근 등등 인기 연예인들이 도박해서 문제가 생겼지요. 그들이 남이니까 조롱하고 비웃지 만약 내가 그렇게 되었다면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실망했다는 말은 우리의 진짜 한계성을 못 보고 있었던 거예요. 반복적으로 예배 참석해도 못 보고 있었던 거예요. 예배도 우리가 만든 예배에 참석하지 말고 십자가가 만들어준 예배를 드려야 해요. 이것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주께서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움이죠.

그 다음에 (5)1월 7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여기에 상번제, 안식일, 월삭, 1월 1일, 1월 7일, 유월절, 칠칠절 계속 나오는데,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영적 예배, 십자가가 나타난 예배, 우리의 한계를 반복하는 예배 속에 이런 절기들이 전부 농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게 바로 새 성전의 특징이에요.

246페이지에 “새로운 성전을 기약하는 에스겔에서 이 날을 절기로 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수송아지 하나를 바치는데 성소를 정결케 하고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 뜰 문설주에 바른다. 즉 성소를 새롭게 정결케 하는 속죄제의 의미가 강하다(겔45:18-19).”

이 말은, 옛날에는 7월 1일 대 속죄일에 했던 것을 새 성전에서는 1월 1일에 한다는 말입니다. “1월 7일은 에스겔에만 나오는 절기다.” 역시 1월이지요. "유월절" 유월절이 있는데 차이점이 뭔가 하면, 이 유월절은 제사장이 드려요. 그런데 에스겔에서는 유월절을 왕이 직접 드려요.

이 왕은 어떤 왕입니까? 다윗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면서 현장에 튀어나오는 왕.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오신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는 거예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절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유월절이죠. 새 언약이 여기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칠칠절, 7월 1일, 7월 10일, 7월 15일 이 모든 절기는 유월절과 동일해요. 칠칠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제물은 유월절 절기와 같다(겔46:11-12).” 이렇게 되어 있지요.

1월 1일부터 시작했던 것이 유월절로 가버려요. 새로운 성전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유월절이 되면 새로운 왕이 등장하고, 성전과 왕이 만남으로 모든 제사는 완료가 된다는 사실을 에스겔 성전이 보여주는 겁니다.

249페이지 봅시다. “레위기나 민수기 시절에 있어 제사 제물의 양이 1월보다는 7월에 보다 급증되고 집약된다. 그것은 7월에 민족 전체를 위한 대 속죄일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 레위기, 민수기 시절(솔로몬 성전 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에스겔 때에 와서 죄의 개념 속에는 인간이 만든 솔로몬 성전조차도 죄에 오염되어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모세 시절 때는 백성들의 죄 씻음과 정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초점이 모아져 있지만 에스겔 새 성전에서는 솔로몬 성전 자체에 대한 정결이 우선된다. 그래서 초창기 제사법에 나오지 않는 절기인 1월 1일과 1월 7일 절기가 있다. 1월 1일은 원래 성막이 최초로 세워지던 날이었다(출40:1). --- 이와 같이 에스겔의 새 성전은 이미 무너져버린 그 솔로몬 성전을 다시 세워놓고 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가를 회상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보여준 성전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부활되면 십자가가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고 본격화 됩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워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피로 뒤덮습니다. 그러면 그 피는 구원의 피인 동시에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심판의 피가 돼요. 계시록에서 천사들이 심판할 때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와요. 구체적 인물이에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왜 구체적 인물이 나오는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요.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왜 모든 사람인가?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이스라엘이 했다면 다른 민족들도 같이 한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겼잖아요. 처음에 이스라엘은 우상을 안 섬겼어요. 왜냐? 우상을 몰라서 안 섬겼어요.

나중에 이스라엘도 이방인처럼 우상을 섬겼어요. 그리니까 우상 섬긴 이스라엘한테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결국 모든 민족은 우상 섬긴 죄로 예수님을 죽였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이제는 심판 받아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달이 떠 있기에 그 달을 보고 빌었을 뿐이지 그것이 우상숭배인줄 몰랐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달을 보고 빈 것에 대한 심판이 아니고 이미 우리 자신에게 심판을 내렸어요. 그게 요한계시록입니다.

25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에스겔 새 성전은 정월달의 제사가 한 해의 제사 성격을 규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월에 떠는 달은 님 그리워 떠는 달’이라고 생각하세요. 김부자의 노래. 에스겔의 성전은 정월에 뜬다고 보면 돼요. 기존 솔로몬 성전은 7월에 떴고. 7월에는 백성들의 죄를 씻는 것이고, 정월에 하는 제사는 성전 자체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성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왕이 등장해야 하고, 왕에 의해서 백성이 만들어지고 이렇게 됩니다.

에스겔의 순서는 복잡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간단하게 언급했어요. 십자가로. 예수님은 먼저 왕으로 오셨고, 처음부터 인간과 상대하지 않고 인간 배후에 숨어 있는 세력과 상대를 해요. 인간 하나하나를 개체(개별자)라고 하는데, 이 개체를 하나의 별이라고 본다면, 별은 공중에 떠 있지요. 공중에 떠 있다고 본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운동의 법칙은 달 아래 있는 것만 통하고 달 밖에 있는 천체는 지상에 있는 법칙은 안 통하고 그냥 그대로 박혀 있다고 본 거예요.

이것을 깨트린 사람이 뉴턴입니다. 그 전에 갈릴레오도 알았지만. 망원경으로 보니까 달이 움직여요. 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여요. 케플러에 의하면 타원 운동이에요. 제일 완전한 운동이 원 운동인데 타원 운동이 되면 초점이 두 개가 돼요. 그래서 그 때부터 우리가 뭔가 잘 못 알았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뉴턴은 거리에 반비례하고 질량에 비례하는 만류인력의 공식을 내놓았습니다. 해, 달, 별 모두 같은 물리적 법칙이 통한다고. 이것은 과학이고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하나가 별이라면 이 인간을 묶는 것이 어둠입니다. 별에 직접 가보면 허공에 떠 있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어둠에 박혀 있지요. 막상 가보면 어둠에 박힌 것이 아니고 공중에 떠 있지요. 우리가 보기에 인간은 개별자 스스로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두운 세력에 박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일 먼저 어두운 세력과 만납니다. 악마입니다. 악마는 돈, 인기, 권력 이것에 매여 있어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악마 손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순서는 성전, 왕, 백성인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전, 왕, 백성을 한 몸에 다 지셨는데, 아까 설명한 것처럼 접혀진 것을 펼치면 거기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해야 될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때가 되면 하나씩 이뤄 가시지요.

처음에는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고, 때가 되매 예수님의 피가 포도주가 되는, 때가 되어 죽으시고, 때가 되어 부활하시고, 때가 되어 승천하시고, 때가 되어 성령이 오시고, 때가 되면 재림하시고. 접혀진 것이 펴지면서 하나하나 성취가 됩니다. 펴지는 그 때를 카이로스, 특이점이라고 하지요. 에스겔에서 늘어났던 것이 예수님 때에는 한꺼번에 집약되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강의는 어렵지 않지요? 이것만 기억하세요.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 세계와 천국 사이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이 지상에서 죽음을 매개로 해서 계속 제사를 통해서 반복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 한계를 알았다고 했더니만 그것마저 아직 한계에 미치지 못한 우리가 만든 한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마지막 한계가 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한계는 바닥을 친 거예요. 누구도 십자가를 자기 뜻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성령이 와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는데 여러분들이 알았으니까 여러분은 땡 잡은 거예요. 로또 복권 살 필요 없어요. 그것 아니어도 우리는 횡재했고, 주께서 우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횡재한 것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주께서 드러내실 거예요.

사위를 맞이하게 되면 “내 딸이 아깝다.”고 하지 마시고 “이것이 웬 횡재지.” 하고 생각하세요.

250페이지 봅시다. “언약궤는 원래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피를 뿌리는 장소이다.”  새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어요. 그러면 어디에 피를 뿌리는가? 문지방에 뿌립니다. 왜? 거기로 왕이 넘어오거든요. ‘어린양의 피가 뿌리진 문지방을 밟고 메시아여 오시옵소서.’ 그 피를 성전에 바르니까 성전은 피투성이가 됩니다. 피로 지은 성전. 사도행전 20장 28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피]라는 책이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초콜릿으로 만든 집이 있어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불이 났는데 보니까 전부 초콜릿이라. 그것을 보고 ‘야, 피가 저렇겠다.’ 피로 만든 성전. 그것이 지상에서는 피인데, 예수님의 피죠. 예수님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움에 있지요. 그러니까 성전은 보석같이 빛난다고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겁니다. 이 지상에서는 피로 된 것이고, 하늘나라에 가면 피를 흘린 그분의 몸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기껏 표현하는 것이 보석들로 표현하지만.

그 피 흘린 분이 영광스럽게 되니까 마치 신랑이 신부를 장식하는 것같이 자기에 걸맞게, 모나코 왕비처럼 왕족에 맞는 모양으로 신부를 꾸미잖아요.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신부 드레스가 16억이라는데 ---  신랑이 그만큼 신부를 귀하게 본다는 말이지요. 귀하다는 표시가 뭔가? 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세상보다 주님이 흘린 피가 귀하다는 사실을, 피가 천국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12. 19. 13:3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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