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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5 01:42:29 조회 : 2136         
성전의 물 140124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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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21.♡.32.194) 14-02-10 15:35 
광주 강의 (2014. 1. 24) 50-1

에스겔 47장 1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동쪽은 전에 설명했지요? 모세가 세운 성막의 출입구가 어느 쪽입니까? 동쪽이지요. 에덴동산의 가는 길도 동쪽입니다. 아담이 쫓겨난 후 에덴 동편으로 가는 길을 차단했습니다. 동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이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비정상이지만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요. ‘이 세상 외에 별다른 세상 있겠어? 남들 다 그렇게 살잖아!’ 라고.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그것 주의하라고 주님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을 이야기했습니다.

길이 있다는 것은 떠나라는 의미죠. 이 세상이 전부라면 길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냥 여기서 살면 되니까요. 여기가 광주인데, 광주에서 태어나서 광주에서 살다가 광주에서 죽으면 그만인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라고 하셨어요. 이 말의 느낌은 ‘우리가 계속 여기에서 살면 안 되잖아!’ 이런 것입니다. ‘이 동네에 계속 살아서는 안 돼. 빨리 떠나!’라는 뜻이란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곧 길이요 --”라고 했기에, ‘예수님 따라가면 되겠다.’고 여기는데, 길이 하나뿐이 아니잖아요. 물론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길이 하나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여러 길이 있잖아요. 마태복음 7장에서 두 가지 길을 말씀했습니다. A길이냐, B길이냐 할 때, 주님은 사다리 타기를 합니다.

사다리 타기의 특징은 끝에 가야 결말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주님이 할 수 있는 것이 뭔가 하면, 마지막을 먼저 얹어요. 길에다가. A길과 B길이 있는데, 둘이 같이 절대 안 모입니다. 꽝 아니면 대박입니다. 한 길은 영생으로 통하고 다른 길은 멸망으로 통합니다. 누구나 영생을 얻고 싶지 지옥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영생과 멸망의 길을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골라잡기 나름이다.’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너는 쉬운 길을 골라잡을 것인데 그것은 필히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은 멸망이고, 적게 찾는 길이 영생의 길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뭔가를 선택할 때는 다수의 의견을 진리라고 여기고 따르잖아요. 오늘 처음 공부에 참석하신 분이 계신데 “큰 교회 가고 싶어요, 작은 교회 가고 싶어요?” 질문한 제가 어리석지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것으로 봐서 진리에 가깝다고 판단할 심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한 전문가가 아니기에 스스로 판단할 능력은 없고,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이 정답일 것이다.” 이렇게 나오면, 주님은 “내가 그걸 줄 알았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가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쪽으로 간다면-- 가라지가 가는데 알곡이 섞이면 서로 소통이 안 돼요. 본인이 힘들어서 그런 교회에 못 다닙니다. 나와야 돼요. 누가 내쫓는 것도 아닌데 ‘이러다가 내 인생 망칠 수도 있겠다.’ 세상이야 여지가 많기 때문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 있지만, 만약 도착 지점에 가서 결정이 되면 두 번 다시 여지가 없잖아요.

마태복음 7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이 멸망의 길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들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진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누구한테 했을까요? 1) 유대인  2) 제자  3) 유대인과 제자들. 정답은 3번입니다.

이제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지옥 갈 유대인에게 이 말씀을 주셨는데,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조심을 했겠습니까? “야, 나는 좁은 길로 가야지.”라고 해도 그들은 좁은 길로 갈 수가 없어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로 가지 말아야지.”라고 했지만 결국은 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영생의 길로 갈 자질이 있는 사람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와요. 많은 목사들이 이 본문으로 설교해요. ‘성전에서 물이 나와서 그 물이 많은 사람을 살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죄악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해석이 나를 지옥으로 보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느냐고요? 없지요. 왜냐하면, 목사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 뿐 아니라 내가 봐도 그런 식의 해석 외에는 다른 해석이 나올 수가 없어요.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멸망의 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47장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은 생명의 물이고, 그 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면 이 해석에 동참했을 때 그 길은 영생으로 가는 길일까요, 멸망으로 가는 길일까요? 멸망의 길입니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서 이 말씀 잊지 말라고 이벤트를 벌였어요. 오순절 날 호수에서 물을 퍼 와서 성전에서 부었어요. 이렇게 함으로 율법사들은 하나님의 숨은 뜻을 이끌어내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을 창안해 내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축제를 즐기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파악한 거예요.

골로새서 2장이나 갈라디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안식일이나 어떤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다는 주장을 믿지 말라고 했어요. 이 말을 오늘 제 강의와 연관시키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구원 받고자 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그런 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이벤트를 벌일 때 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 따라간 무리가 다수를 이루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 47장 이 본문이 나올 때 이것을 안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여겨 에스겔 47장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이것이 오늘날 신약 교회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십자가를 비켜서 에스겔 47장의 내용을 지키자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돼요. 이걸 빼면 지옥 갑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납득시킨다든지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임이 나타납니다. 왜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인간들이 바로 성경 말씀으로 교육받고 훈련한 자들이었습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많은 생명들을 살립니다. 장차 세워질 성전은 물이 나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물이 나와서 삽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대로 믿고 오실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였어요. 이처럼 인간들이 아는 것으로 행하는데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지요.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을 하면 그들의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이 안 나옵니다. 어쩌면 좋아요?

이제 이 본문에서 어떻게 십자가가 나오는지 집중해 보세요. 십자가를 비껴가면 안 됩니다. 피로 구원받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십자가만 걷어치우면 “우리도 성전을 기다리자!”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되면 다 같이 멸망 길로 가는 겁니다.

제가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이 나오지요? 그리고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크게 오해해서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와 이 물이 우리를 살린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누구도 이 물이 우리를 죽인다고 해석한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주석을 보면 ‘물이 우리를 죽인다.’는 식으로 해석한 책이 없어요. 그러니 이들은 말로는 기독교인이지만 실상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전 개념은 심판 개념입니다. 심판에서 심판이 나오는 겁니다. 이 심판 덩어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이 말을 세례요한이 누구에게 했는가 하면, 에스겔 47장을 믿고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했습니다.

보통 성전은 인간이 만듭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에서는 물이 안 나옵니다. 예를 들어, 여기 고구마가 담긴 냄비가 있는데 강의를 하는 중에 보니까 여기에서 물이 흘러나와요. 이런 광경을 보면 우리는 경악해야 되고, “용서 하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고 합리적인 생각을 합니다. “집사님이 냄비에 고구마를 찌면서 물이 남아 있었고, 그 물이 구멍 난 냄비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더 추가할 것은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것에 추가를 함으로 우리가 만든 것을 심판하는 것이 공식입니다. 제사장이 양을 잡을 때 그 양은 어디서 나온 양입니까? 그 양은 자기 집에서 키운 양이에요. 그 양에 대해 인간이 추가적인 의미를 보텔 수 있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양을 잡아 드리니까 성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양을 잡는 행동에 따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과 무관하게 여분의 것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사사기에 보면 삼손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삼손은 수염소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 때 불 가운데 천사가 타나났어요. 이 천사는 어디서 등장한 것입니까?

인간이 드린 것은 수염소뿐인데 왜 불 가운데서 천사가 등장해서 불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까? “아저씨,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놔라, 나는 기묘자다.”하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에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누구와 씨름을 했지요. 야곱이 놀란 것은 상대방이 강해서 놀란 것이 아니고 그분이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람은 사람끼리 있을 때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사람이 아닌 다른 요소가 왔을 때는 기절을 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놀란 것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왔다는 점입니다. 이건 보통 충격이 아닙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이런 생각은 문젯거리도 안 됩니다.

제일 큰 문제는 나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 속에 왔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라고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거예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추가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추가적 요소에요. 사도 바울이 외친 것은 추가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여러 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서 별 감각이 없고 잊고 살지만 성령께서는 이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늘 독감 예방주사를 맞듯이 주께서는 계속 십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빼앗겼고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런 문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목사가 마누라 때문에 자살했다고? 그건 문젯거리도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살할 이유도 없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그게 무슨 문젯거리가 돼요? 십자가 때문에 놀라고 경악하기 바쁜데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거기에 신경을 씁니까?

하나님이 ‘성전을 만들어라. 양을 받치라.’고 하셔서 바쳤는데, 바친 것 이상으로 덤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심판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지난 시간에 ‘에덴 사건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단 군은 고등학교 시절에 소풍 간 적 있지요? 단양 대흥사에 갔다고? 그럼 매일 대흥사에 갔다 옵니까? 아니지요. 고등학교 소풍 때 갔을  뿐입니다.

우리의 사건은 지나가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에덴동산 사건을 절대로 지나간 사건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어요. 에덴동산은 시간이 흐르지를 않아요. 우리는 시간이 흘러서 점점 늙어가고 60년 쯤 살면 몸이 성한 곳이 없는데, 주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시간이 흐르지를 않아요. 시간이 정지되었어요. 에덴동산을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취한 조치에 대해서 너희들이 동감하라는 말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미워하지 말고 내가 따먹어서 저주 받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주받는 그 조치에 대해서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박수 치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왜 하나님은 인간을 태어나게 해서 고생시킵니까?”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왜 안 믿는 사람을 지옥 보내고, 믿는 사람을 고생시킨 후 천국 보내는가?’ 질문 자체를 바꾸면 답변이 됩니다. “하나님이 저를 더 고생시킬 수 있는데 왜 이정도로 그칩니까?”라고.

갈수록 십자가의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3살에 죽었어요. 저나 목사님이나 33살 넘었어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하십니까? 자녀도 잘 성장하게 하고 왜 이런 호사를 누리게 하십니까? 이것은 나의 죄에 비해서 말도 안 되는 은혜입니다. 왜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해야 돼요. 왜?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저주를 덜 받았어요. 분명히 성경 말씀에 따르면 저주 받게 되어 있는데, 무슨 저주가 아들 장성하고 이런 저주가 있어요? 이것은 분명히 추가적인 조치입니다. 내가 하는 짓에 대해서 그것마저 은혜로 바꾸시는 매개되시는 분의 조치, 묵묵히 십자가 지셨던 그 은혜, 그 은혜의 작용 때문에 현재 내가 한 짓에 비하면 너무나 과분한 은총을 지금 받고 있는 거예요.

2040년 2월 8일에 결혼해도 되는데, 왜 2014년 2월 8일(김을수 집사 차녀) 결혼하느냔 말이지요? 결혼식 할 때 “왜 이렇게 좋은 사위를 주십니까? 이것은 과분한 은혜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란 말이지요. 이런 기도를 한다면 이상한 질문은 아예 안 나오겠지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가 늘 불평하면서 사는데,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햇볕과 공기를 주시기에 이 모든 것이 과분한 것이라는 겁니다. 신명기 9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바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로 때문에 가나안에 간 것이지,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저주 받아 마땅한데 이렇게 주시다니’ 이런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 속에 있어야 됩니다. 심판에서 출발하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전15:10).”

창기가 울면서 예수님 발에 향수를 뿌렸을 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비웃었습니까? 그 때 주님 하신 말씀이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어요. 이분이 바로 길 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같이 이 길을 가려면 마음가짐이 주가 원하는 마음으로 달라져야겠지요.

에덴동산을 반복한다고 했는데, 그 때 거기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입니다. 또 있었지요. 뱀. 다 조연입니다. 그럼 주연은 누구입니까? 주연은 조연 속에 담긴 채 오는 거예요. ‘나’가 있다면, 나를 만드신 분은 어디 있는가? 보통은 ‘나 밖에 있다’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내 안에 흔적으로 날 만드신 분이 함께 있어요.

그래서 그 흔적이 나를 계속 죄인으로 규정하고,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인정하면서 이런 죄인과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너로 인하여 핍박받는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이지요.

조연의 역할이 있지요. 사람이 있는데 누가 응시하게 되면 사람은 마중을 나갑니다. 저쪽에서 다가오는 시선에 입각해서 내 쪽에서 다가오는 시선에 대해서 뭔가 처리해야 되고 마중을 나가야 되는데, 그 때 한 것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어요.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의 따가운 시선이 초점이라면, 이 평면이 영사기고, 영사기를 쏘아댑니다. 따갑게 응시하게 되면, 이게 뭐냐 하면 스크린입니다. 스크린에 도달된 게 인간들이에요.

이 인간들은 맨몸이 아니고 치마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식한 겁니까? 이 세상에 나 외에 다른 존재가 있고 그 존재를 응시할 때 우리는 숨을 수밖에 없고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부부면서 서로 부끄러워하니까 치마를 입었단 말이지요.

외부의 따가운 시선에 대응하는 방법은 내가 외부를 볼 때 이것이 날 응시하는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이 두 개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된 게 바로 무화과나무 잎 치마입니다. 이것이 원피스나 브라우스가 아닙니다. 치마는 하체를 가리는 겁니다. 사람이 죄 짓고 난 뒤에 부끄러워했는데 머리카락을 부끄러워했습니까, 손을 부끄러워했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뭔가 부끄러운 부분이 발생된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볼 때, 하나님이 바라보고 있다는 그 흔적이 자신의 어느 부위에서 바라봄을 느끼는 거예요? 하체부분에서 바라봄을 느끼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만들어 입은 거예요.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말은 지금 무화과나무 잎의 치마를 입었는데 또 가죽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출발할 때, 인간 쪽에서는 ‘내 존재가 정상이 아니야.’라고 부끄러움을 느꼈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기껏 한 짓이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시로 인한 인간의 부끄러움입니다. 혼자 있다면 치마를 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누가 보고 있기에 부끄러운데, 부끄러운 부위를 치마로 가려야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은 외부의 시선이 나를 응시할 때 나는 숨어야 한다는 본성이 이미 죄가 있고 난 뒤에 발생된 어쩔 수 없는 모습입니다.

교인 중에 수술 후에 한 주 교회에 안 나온 사람이 있어요. 왜냐? 수술해서 눈에 시퍼렇게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부끄럽잖아요. 사람 앞에 나설 때는 타인의 시선을 응시하고, 그 시선에 대항해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대응책을 가지고 마중을 나가는 거예요. 그것이 내 외부에 대한 최선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혔는데,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힌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의 운명에 동승한 하나님 쪽에 속한 어떤 분, 그분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하게 연결된 연결 고리로 가죽옷을 해 입인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해 입혔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은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거는 옷걸이일 뿐입니다.

가족 옷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절대로 에덴동산을 과거 이야기로 끝낸 것이 아니었고, 대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에덴동산은 반복하면서 ‘정령 죽으리라.’는 죽음의 정체를 폭로하는 작업을 주님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내 인생’이란 것이 있습니까? 내 인생은 없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활용하는 거지요.

그래서 로마서 14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죽의 것이로라.”고 했지요. 죽고 살고는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네 것이 없는데 네가 왜 걱정해?” “이렇게 되면 못 삽니다.” “살고 못살고는 네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나를 통해서 에덴동산 사건이 되풀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지 나 개인이 어떻게 살고, 한 달 소득이 얼마이고 이건 주님 앞에 문젯거리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왜 기도합니까? 자기 살기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이 지옥 갈 기도입니다. “주여, 이것이 필요합니다. 이것 주세요. 이런 기도 하지 말라. 필요한 것을 이미 주가 아신다.”

우리는 그냥 주의 것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에덴동산이 반복된다는 거예요. 에덴동산의 반복이란 ‘선악과 따먹은 것은 죽음이고, 생명나무 따먹어야 산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저주 때문에 죽었고, 부활하신 것은 생명 주시려고 부활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반복해야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속에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시간은 흐르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사건 안에서 시간은 정지되었어요. 계속 사건이 벌어지는 거예요. 주께서 하신 조치만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었고 하나의 조연으로 출연하는 겁니다.

치마로 무엇을 했습니까? 하체를 가렸지요. 출애굽기 28장 42절에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고 했지요. 지금 하나님이 아론을 상대하는 겁니까, 아니면 아론 위에 있는 주님의 흔적을 상대하는 겁니까? 주님의 흔적을 상대하는 거예요.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하체를 가렸지요. 그 사건을 지금 되풀이해서 계속 상기시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을 일으켰던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에덴동산을 벗어날 생각을 말라는 거지요.

레위기 18장 6-7절에 보면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고 되어 있어요. 어미, 계모, 자매, 손녀, 외손녀, 고모, 이모, 자부, 백수모, 딸, 처제 등등의 하체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연이어 나와요.

이 말씀의 특징은 남자의 하체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자의 하체를 누가 가로막고 있는 거죠. 누가? 그 남편이. 또 딸의 경우는 그 아버지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가정이란 인간의 부끄러움을 용서하기 위해서 가로막는 체제로 하나님이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조성물로 주님이 사용하시겠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언약이 없는 애굽에서는 상상도 못할 계명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8장에서는 ‘애굽의 풍습을 쫓지 말라.’고 해놓고, 애굽의 풍습과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진 이스라엘의 풍습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애굽을 기억하고 힘들고 고생스러우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면 이것은 추가적인 거지요. 추가적이라는 말은 행동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있는 그대로 있어도 주께서 추가적인 요소를 유발시켜요. 레위기에 보면, 오징어나 돼지고기를 먹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오징어나 돼지고기를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 죽어요. 그러면 어느 것이 추가적 요소입니까? 돼지고기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 추가적 요소지요.

모든 추가적 요소는 결국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저주 받았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이죠. 성전을 만들었다. 모든 애굽적인 사람들은, ‘성전 만들어서 그곳에서 물이 나오면 그것은 생명의 물이고, 그 물을 마시면 우리는 산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빠졌습니까? ‘우리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요소가 빠졌지요.

이것이 바로 저주 받아야 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 날 살려봐라!” 이러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 봐. 그러면 내가 하나님께 박수치고 믿을 줄게.”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런데 창기, 강도, 세리는 어떻습니까? 반대로 나가지요. “주여, 죽어야 마땅한 죄인을 왜 용서하십니까? 저는 지옥가야 되는데 왜 저를 구원합니까?” 이렇게 됩니다. 어떤 드라마를 보면, 하지원이 고려의 왕자와 하룻밤을 동침해서 임신을 했어요. 우리 같으면 젊은 여인을 임신시키고 도망쳤다고 할 텐데, “저 같은 천한 종에게 임신케 하시니 고맙습니다. 고려에 계시는 낭군님 기뻐하세요.”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었습니다.” 이런 뜻이지요. 주인이게 종속될 때 비로소 종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이면 그렇게 할 수 없지요. “하나님이여, 임신시켜놓고 낭군은 없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이게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에요. 넓은 길의 특징은 자신이 힘들다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거예요.

그런 자들을 향해 거짓 목사들이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이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저주 받을 이유가 없고, 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복 주십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진짜 목사라면, 남편에게 맞아서 상담하러 온 여인에게 “맞아도 예수 믿으면 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소리 듣고도 교회 나오겠습니까?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길로 가는 인간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우리에게 가죽옷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방진 소리 할 때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좁은 길로 가라.’고 일러주시고 다시 깨닫게 할 때, 말씀은 살아있고 나는 말씀 앞에 늘 죽을 때, 말씀이 나를 죽게 하는 식으로 질질 끌고 말씀의 완성 상태로 우리를 넣어주는 식으로 구원받습니다.

10분 쉽시다.
 서경수(IP:118.♡.139.84) 14-03-18 09:07 
광주 강의(2014. 1. 24) 50-2

성전에서 물이 나왔다는 것은, 성전만 기다렸던 사람에게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왜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가?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에덴동산의 반복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왔는데, 그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가? 7절에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바다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지중해를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사해 바다입니다. 그리고 지중해를 대해(大海)라고 해요.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라고 했는데, 아바바는 사해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성전에서 나온 물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그 외에도 여러 지명들이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곧 하맛과 브로다며 다메섹 지계와 하맛 지계 사이에 있는 시브라임과 하우란 지계 곁에 있는 하셀핫디곤이라.” 현재 이것이 산다는 것은, 그냥 있으면 사는 것이 아니고 물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것이 다시 깨어나는 거예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강이 있어요. 유브라데 강이 나옵니다. 에덴동산에 강이 있으니까 그 강물에 의해서 에덴동산이 생명을 얻고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에덴동산에서 인간들이 쫓겨났습니다. 쫓겨났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뭔가 하면 ‘네가 어디에 살래?’가 아니라, ‘너는 어떻게 해서 살게 되었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이 천국 오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희생과 수고를 했는가?’ 이것을 알아차려야 그가 구원 받은 자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급하게 천국이냐 지옥이냐 이것만 분명히 알기 원합니다. 주님은 그 틈에서 쏟아 나오는 과정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너를 살려준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살린다는 것은 내가 여겨 있고 결과적으로 내가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과정이 빠져있어요. 우리는 과정을 중요시 하지 않고 결과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 인간들이 지옥 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하나님을 보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를 보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를 보라고 했지요. ‘어쨌든 복음 믿고 구원 받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저 같은 인간을 위해 왜 십자가 지셨습니까?” 이렇게 그 과정과 우리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과정과 연결되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과정에 합류된 주님의 인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시시각각 주신 은혜에 감사하게 되지요. 만약 그것이 빠지면 천국 갈 것에 대해서만 미리 감사할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성도의 감사가 아닙니다.

내가 은근히 노렸던 것을 예수님 때문에 얻게 되면 이것은 종교가 됩니다. 신앙은 나는 희망과 구원 욕구도 전부 죄라는 것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의 의지가 나를 끌고 가는 그 과정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번 믿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항상 우리를 믿게 하시는 주님의 동행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에스겔 47장을 보겠습니다. 1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온다는 말을 예전 솔로몬이 성전 지을 때 알려줬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솔로몬 성전 때 없던 이야기가 왜 에스겔 성전 때 나오는 것입니까?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중요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다면 그 성전이 있는 나라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나라입니다.

주님이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고, 성전을 지었고, 그 전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성전이 있는 나라에 하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거예요. 정상적인 나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서는 성전도 불타고 이스라엘도 바벨론에 포로 잡힌 입장입니다. 즉 자유로운 백성도 없고, 성전도 없고, 언약궤도 불타고 없는 상태입니다.

없는 상태에서 물이 나온다는 말은, 물이 가는 곳마다 새롭게 백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즉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없던 백성들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에 나서신 거예요.

솔로몬 때는 백성이 있고, 백성들이 힘을 모아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성전을 만드는 사람이나 성전 모두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생각이 들지요? 만약 솔로몬 성전이 정상적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패물을 팔아서 헌금을 해야 하고, 그것으로 예배당을 지을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은 예배당에 주님이 계십니까? 안 계시죠. 왜냐하면, 솔로몬에서 바로 십자가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거쳤어요. 이것은 성전 지었던 자의 멸망이죠. 그러면 성전 지었다는 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짓도록 예배당 짓게 하신 거예요.

사람들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헌금 드려서 예배당 지어서 없던 예배당이 새로 생겼잖아요. 감격을 눈물을 흘리지요.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오잖아요. 젊은이들은 감격해서 울고, 늙은이들은 과거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을 생각하면서 우는데, 이런 것조차도 새 성전 앞에서는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예배당 짓는 죄, 헌금하는 죄를 짓게 하는가 하면 충분하게 죄를 지어야 거기에 맞춘 구원이 본래의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으로 물로 심판을 하신다면 우리는 예수 믿을 필요 없습니다. 방주만 만들면 돼요.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네가 부귀와 장수와 원수의 생명 멸하는 것을 기도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기에 내가 너에게 지혜를 주고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주리라(왕상3:11-13).”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도 일천번제 드리면 하나님이 필히 나타나십니까? 이게 무슨 언약이냐 하면 모세 언약입니다.

모세 언약은 율법 시대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키면 하나님이 오신다는 뜻입니까,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까? 저주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죠. 율법으로는 의로울 인간이 없다고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말씀하셨지요.

‘율법으로는 의로울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율법은 안 지키고 예수 믿는 율법을 지켜버렸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6).”고 하니까 율법 지키는 그 방식과 마음가짐으로 사랑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주는 죄입니다. 어떤 죄인가? 예수 믿는 죄.

옛날에는 방주 만들었지만 그 방주로는 안 되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쳤는데 그것으로도 안 되고, 율법 지키는 것으로도 안 되고, 성전 지어도 안 되고, 그리니 ‘오직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아야겠다’는 이 생각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죄이며 저주 받을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마음을 가졌지요. 예수님이 로마 군병에게 잡혀갈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다 도망갔어요. 결국 그들은 예수를 믿었는데 그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었어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후 엉뚱한 소리를 해서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라는 소리를 들었지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주님이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알게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했으면 그 믿음은 인정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믿음 가진 인간에게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고, 베드로는 그 믿음 가지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베드로를 향해 믿음 좋다고 칭찬했다가, 사단이라고 책망하시고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무엇입니까?

제가 첫째시간에 해답을 말씀드렸습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하나의 흔적으로 남는다고 했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후의 인간은 신을 나 바깥에 세워둡니다. “신이시여, 어떻게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정작 구원은 주께서 시킨 대로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가죽옷을 입히면서 흔적을 남겼어요.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었는데, 이 가죽옷에는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사건의 정보가 담겨 있어요. 즉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반복해야 될 팔자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무엇을 행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와 동행하고 있는 그 흔적에서 새로운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그 사건들이 아담의 팔자를 만들어가면서 구원을 시키는 겁니다.

아담은 어떻게 해도 스스로 구원 못 받아요. 아담이 구원 받는 것은 아담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 받아요. 아담의 후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고 했는데, 이 에녹이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죠. 아담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아담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흔적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약속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시루떡이 위에서 보면 빨갛게 보이죠. 팥이 붉으니까. 그런데 그 떡을 잘라 옆을 보면 몇 층으로 되어 있지요. 밑에 있는 더러운 것이 아담이라면 위의 층은 하나님의 약속, 언약입니다. 야곱이 밑에 있다면 야곱 위에는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야곱은 밑에서 어떤 흔적을 가졌느냐? 환도뼈가 박살이 나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 야곱이 손자를 축복할 때 손을 어긋맞게 얹었지요. ‘이것이 내 인생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인간들 생각으로는 장자에게 오른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은 반대로 하신다는 거지요. 인간들은 다 오른손을 장자의 머리에 얹고 복을 빕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팔을 교차하면서까지 이상한 방법으로 복을 빌고 구원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사용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되지를 않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상대가 못 알아듣고, 상대방이 하는 말은 내가 다 알아들어요. 왜냐? 내가 옛날에는 저쪽(애굽)에서 살았으니까요.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알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되고 보니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구원 받아요. 

예수님으로 구원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주님 주신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줄이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지요. 이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믿어서 천국 가겠다.’는 식으로 달려듭니다. 이렇게 되니 ‘믿음으로 구원’이 아니고, ‘믿음으로 저주’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함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에 포로 잡혀 멸망했지요. 그 멸망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고,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하나님이 멸망한 거예요. 하나님이 저주 받은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내리 친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린 거예요.

연극 무대의 주인공은 한 분이 아니고 두 분 이에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시110:1)” 여기에 보면 주가 두 분입니다. 그런데 한 분이 다른 한 분을 죽여요. 관중들은 연극을 보면서 ‘저러면 안 되는데’ 하고 있는데, 죽은 자를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십니다. 이 때 관중들 반응은 “다시 살리실 분을 왜 죽였지?” 라고 의아해 하고 있는데, 두 주인공이 관객을 향해서 “이것이 너희들 이야기다.”라고 외칩니다. “찾아갈 거야. 기다려. 내가 구름타고 찾아갈 거야.”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죠.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구름타고 인자가 온다는 말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구름타고 오시지 왜 초라하게 오신 것입니까? 십자가 지고 부활하고 번거롭게 이런 것 다 생략하고 곧바로 구름타고 오시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겁니까?

주께서 에덴사건을 경유해야 심판의 대상이 나와요. 주의 원수지요.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마귀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귀를 상대해요. 주의 원수가 인간에게 다가와서 자기편으로 만들었어요. 집에서 엄마가 말썽부리는 아이를 꾸중하려고 회초리를 들었는데 마침 아빠가 퇴근을 했어요. 아이가 좋다고 아빠에게 달려가 숨었어요. 이처럼 마귀가 인간을 앞장세워 뒤에 숨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놀랍니다. 아내가 왜 회초리를 들고 자신에게 달려오는지 몰라요.

아내는 남편에게 달려온 것이 아니라 아이를 벌주려고 달려온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실 때 마귀가 알아챘어요. 인간은 아무도 알아채지를 못했어요. 이 영적 전쟁, 이것이 여분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물이 나와서 죽은 땅이 살아난다는 것인데, 인간이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사는 땅이 살만한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보여줄 유일한 기적은 요나의 기적입니다. 요나를 니느웨에 곧바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나를 죽였다가 보내지요.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마귀가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는데 스스로 저주하고 스스로 살려내는 일은 못해요. 이것은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로 구원 받아야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리게 됩니다. 마귀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계속 우리에게 속여 왔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제가 창세기 1장 1절을 읽었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틀린 일입니까? 틀린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사도개인들도 똑같은 고백을 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다.’라고 했어요. 바울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서 죄인이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죄인 된 이유가 뭡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이유가 성경을 틀리게 읽어서 그렇습니까? 이것을 안 믿어서 그런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한 말씀을 해석할 때, 이것이 나의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은 뭐냐?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는 아무리 그 구절을 봐도 거기에서 ‘나는 죄인이다’는 것이 안 나오는데 너는 어떻게 그런 해석이 나오니?”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을 다 알아요. 창세기 1장 1절도 알고, 에스겔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그 아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요. 그러면 죄는 뭐냐?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진작하지?” 진작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 지시기 전에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다.”라고 이야기하면 전부 예수 다 믿습니다. 그러면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아요.

십자가 지신 후에 “예수 안 믿는 것이 죄다.”라고 해야 그들은 “이것이 왜 죄가 되지?”하고 십자가를 찾아가고, 십자가에 가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이미 죽은 것이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성경 100독 하라고 독려하고 있는데, 100독 아니라 1,000독을 해도 바리새인만 양산할 뿐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경유에서 구약을 본 사람이에요. 십자가를 경유하려면 고린도전서 2장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십자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 받으면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모든 말씀을 보게 되어 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조선시대 할머니도 신을 ‘조물주’라고 했어요. ‘造物主’라는 말이 천지를 만드신 분이란 말이거든요. 다 알잖아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지요.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우리가 지식이 모자라고 구약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믿어도 전부 죄가 됩니다.

믿어도 죄가 된다면 의인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추가되어야 해요. 그 추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 에스겔 47장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전 지었는데 멸망했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뭔가? 성전 짓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그 성전에서 물이 나와서 죽은 것을 살려야 해요. 따라서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말은, 이 땅의 모든 것이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자신을 꼬집어서 살려낼 수 있습니까? 죽은 자는 뭘 해도 죽은 띠만 낼 뿐이에요.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서 부으면 그것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까? 아니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먼저 성전이 되고 난 뒤에 나에게서 성령이 나온다.” 그런데 그 주님이 우리 속에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그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것이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잖아요. 여섯 사람 되어도 물이 나오고 일곱 사람이 되어도 나오고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안 믿게 되면 성령이 안 와요. 15년 되어도 안 오고, 20년 되어도 안 옵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성령이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똑바로 살아라.” 이렇게 되지요. 똑바로 사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로써 똑바로 사는 거예요.

따라서 똑바로 사는 것은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을 때 똑바로 사는 것이 돼요. 행동 잘해도 똑바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기가 있다는 흔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주님 살아있다는 티를 내는 것이 똑바로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갈라디아서 6장 19절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 이런 것이 있어요.

여기에 분쟁과 시기와 분 냄이 나오지요. 일반 교회에서 목사가 초신자에게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하면, 성도가 묻습니다. “목사님, 잘 믿는 것이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저 권사님은 40년째 믿는 분인데 저분이 잘 믿는 것입니다.”라고 할 때 갑자기 어떤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저게 무슨 잘 믿는 거야?’

예수 믿고 성령의 열매 맺었다고 자부했는데, 내게 ‘시기와 분 냄’이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데 시기와 분 냄이 나오고 있어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목사가 하는 말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이 있어야 됩니다.”라고 할 때, 성도가 묻습니다. “목사님, 어떤 것이 진짜 사랑과 온유와 화평입니까?” “여기 계신 김 권사님을 보세요. 얼마나 온유합니까?” 이 때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우끼고 있네. 저 사람 가계할 때 지독한 것 내가 다 아는데 저 사람이 온유하다고?”

이 때 김 권사가 문제가 아니고 갑자기 나에게 시기와 분 냄이 생기지요. 누가 그것을 유도했습니까? 목사가 유도한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꿈 깨세요. 저주 안 받은 것을 감사하세요.”라고 할 때, “그럼 나는 아무 쓸모없는 자네요.” 할 때 그 모습이 온유와 자비입니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담당할 문제가 아니고 ‘육체의 열매가 이렇다.’ ‘성령의 열매가 이렇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의 흔적으로 박혀 있다면 어떤 때는 육체의 열매가 나오고, 어떤 때는 성령의 열매가 나오면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관리 대상이구나. 다루어지고 있구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이렇게 개판이라도 십자가로 구원 받았구나.’를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전 지었던 이스라엘이 망했지요. 천만 다행입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그런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성전 지었다고 까불던 이스라엘이 성전은 불탔고, 처자식은 포로 잡혀 갔지요. 이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 출생 당시 베들레헴에 태어난 2살 이하의 아이들이 헤롯에 의해 죽었어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예수님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러나 그 당시 그 일을 당하고 감사한 사람이 없었어요. 나중에 십자가 지신 후에 다시 그와 같은 경우를 당할 때, ‘말씀하신 대로 되는구나. 나는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늘 말씀이 현재 살아 움직이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지요. 말씀 속에는 시간이 없어요. 영원한 현재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했지요. 그러나 말씀 읽고 돌아서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요. “하나님, 말씀대로 돈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돈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시루떡은 층이 두 개입니다. 위층은 십자가가 나와요. 십자가가 좋다고 하면 아래층이 나와요. 그러면 또 회개를 합니다. 회개한 후 괜찮은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다가 또 얻어맞아요. 영원한 현재라는 말은 성화 단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들었다 놨다 하는 상태가 성화 됨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물은 예루살렘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했다는 말은, 그 전에 다른 지역이 멸망했다는 말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마지막 멸망입니다. 다른 지역은 벌써 맛이 갔어요. 주변의 길르앗, 암몬, 모압, 블레셋 이런 나라들이 왜 배치되어 있는가?

바다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데 그물에 밍크 고래가 걸렸어요. 그래서 어부가 잡어들은 다 버리고 밍크 고래만 돋보이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나라를 두신 것은 그들에게 물들도록 하신 겁니다. 즉 우상 숭배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순서가 멀리 있는 단 지파부터 멸망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한꺼번에 다 파멸합니다. BC 722년에. 그런데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제가 대전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다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들이 서로 친밀한 사이였습니까? 고향이 같습니까? 직업이 같은 사람들입니까?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나라가 호출해서 전쟁에 참가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격도 다르고 인품도 다 달라요. 그런데 그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요.

그렇다면 그들이 전쟁에 나서기 위해 모였을 때 중심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낼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이들이 한꺼번에 죽은 것은 이들 자체 내에서는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다 거짓말입니다. 의학, 간호학도 거짓말이에요. 왜냐? 다 죽는 진리는 의학이나 물리학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18만 5천 명이 다 죽은 것은 이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을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일괄적으로 다 죽였습니다. 우리 바깥에서 기준이 들이닥칠 줄은 몰랐지요. 마지막 심판은 십자가 피가 기준이 됩니다. 십자가 피는 내가 흘린 피와는 관계가 없어요. 내 팔자를 결정하는 기준은 내 바깥에서 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유대인들 몇몇이 봤습니다. 그런데 구름타고 오실 때는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오신다고 요한계시록 1장 7절에서 말씀했어요. 이것은 십자가 안에 전체를 심판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심판권이 들어있어요. 재림하실 때는 예수님이 품고 있던 심판권을 확대시켜서 보면 그것이 바로 재림이고, 따라서 재림은 시간적으로 그 자체가 현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주로 오셨습니다. 주는 심판하시는 권한이 있는 분입니다.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말은 세례요한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심판하러 오시는데,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한다.”라고 선포한 후에 옥에 갇혀서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는데, 왜 이렇게 오래도록 천국이 오지 않는 것인지? 참다 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냈지요. 그리고 질문하기를 “혹시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했어요.

이 때 주님의 대답은 “앉은뱅이가 걷고, 소경이 보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하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생각했던 그 사고방식이 인간으로써의 한계입니다. 천국에서는 어린 아이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요. 이 땅에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세례요한이 죄인이 됩니다.

‘신천지’에서는 세례요한이 지옥 갔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인간은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죄인행세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오해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왜 세례요한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세례요한이 실수하고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브라함, 다윗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못 알아본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베드로가 배반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을 심판 가운데 있게 해서 십자가 지신 후에 죽은 자를 살려내는 성령의 역사와 성전이 관련 있음을 에스겔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 에스겔 그대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갔습니다. 여인의 질문이 “어느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주님 대답이 “내가 성전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 그 때 여인은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했지요. 순서를 안 거예요. 메시야가 먼저 와서 일을 할 경우에만 성령이 오는데, 메시야가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한다면(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죄인인데) 살려내고, 안 살려내고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가면 사는 것이고 안 가면 못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대화 내용과 상관없이 이미 바울은 구원 받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할 때의 현상입니다. 바울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고 했는데,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소리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의 모든 것이 죄였고, 악이었다는 것이 깨달아진 거예요. 바울이 죄인이면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란 말이고, 아담의 자손은 다 죄 아래서 죄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47장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다시 지도를 만들어요. 그런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오늘날의 세대주의 자들은 이 지도대로 된다고 군대를 조직해서 점령하려고 나서고 있어요. 왜냐? 성경에서 그렇게 기록을 해 놓았으니까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하면 구원 받습니까? 못 받아요. 성경이 있는 이유는 “나는 성경대로 믿고 실천했으니까 구원 받겠지.”라고 착각하게 해서 죄인 되게 만드는 거예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새인, 사두개인은 몰랐어요.

그러면 우리는 알았습니까? 몰랐지요. 12제자는 알았습니까? 역시 몰랐어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니까 비로소 구원 받은 입장에서, 이미 해답이 된 상태에서 내가 해답입니다. “내 안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 출발부터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으로 출발할 때, 이미 그것은 성령 받은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믿을 때만 오는 십자가가 아니고 이미 십자가가 나왔다는 말 자체가 우리 속에 십자가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내가 믿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 얻고, 그 믿음 증거하라고 우리를 아직 이 땅에 두신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3. 17. 10: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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