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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6 02:10:23 조회 : 1974         
관계시스템 140425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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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39.25) 14-05-02 16:08 
광주 강의(2014. 4. 25) 2-1

마가복음 1장 2-3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본인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어요. 오늘 강의는 ‘소리’라는 단어만 이해하면 쉽게 풀립니다. 소리가 있다는 말은 관계를 유발시키는 관계 망들이 먼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리가 한 두 개가 아니지요. 지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나네요. 자동차 경적 울리는 소리도 나고.

다양한 소리가 있는데, 마가복음 1장 3절에 보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다고 했어요. 이것은 이사야 40장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 소리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그냥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왜 소리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혼자 “너는 누구야?” 라고 물을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자주 질문을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왜 이렇게 살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등등. 그런데 성경에서는 “야! 소리?” 이렇게 불러요. 이것은 어떤 역할, 기능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계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주님이 불렀지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고, 그리스도의 종 된 자리, 주님과의 관계 시스템 속에서 바울은 종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은 본인의 이름인데 이스라엘은 관계 시스템 속에서 주어질 역할을 수행할 기능의 이름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지요. 사래는 사라로 바뀌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 시스템 속에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질문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저를 어디에 쓰실 겁니까?”라고 묻는 것이 정상이란 말이지요.

‘리베로’라는 말을 압니까? 배구 경기에서 수비만 전담하는 선수를 리베로라고 합니다. 경기에서 리베로는 1명입니다. 그런데 리베로가 수비수 이름입니까? 역할이죠. 야구 경기에서 ‘톱타자’가 있는데 이게 그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1번 타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5억 명이 시청을 했답니다. 중국 사람이 도민준을 알아요. 도민준 역할은 탈랜트 김수연이 했어요. 김수연은 실제 자기 부모가 있잖아요. 이것은 의미 없고 도민준으로 불러야 드라마 전체의 의미가 유지되는 겁니다. 도민준에서 김수연으로 빠져나오면 관계 시스템이 날아가는 겁니다.

복음이 뭡니까? 내가 구원 얻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이 복음입니까? 이건 구원파 무리들입니다. 구원파는 권신찬이 세운 종교입니다. 유병언은 권신찬 사위고. 구원파는 자기 구원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자기만 죄 씻음 받으면 그만이에요. 그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소유해서 구원 받습니까? 제자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 중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 대답이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너희들도 마셔야 된다.”고 했어요. 쓴 잔을 왜 마십니까? 그것이 바로 관계 시스템 속에서 구원 받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 시스템 속에 우리는 참여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구약을 잘 모르기에 신약의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고 주장하는데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주님이 동행을 했어요. 그래서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을 이기려면 그들 자체의 힘이나 신앙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보이지 않는 왕이 있어야 돼요.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주의 이름이 동행해요. 이름은 실체가 없지요. 이근호란 이름에 무슨 실체가 있습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름 뿐인가?’ 이렇게 나와요. 실체가 없으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의 이름’ 자체는 아무 실체가 없어요. 이름 석자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호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없어요. 주의 이름에 실체와 내용을 담으려면 왜 하나님이 주의 이름을 동행시키는지 알아야 해요. 언약을 이루기 위함인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미래 주실 때 모세가 묻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는 이름이 궁금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이 땅에서 하실 작업의 내용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김 집사님 학교에 급식실을 짓는다고 했는데, 목수와 건설업자들이 가만히 서 있으면 이게 무슨 내용이 있어요? 레미콘이 와야 되고, 철근이 와야 되고, 뭔가 작업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묻지요? “이스라엘 속에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주의 이름이 오셨습니까?”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친구 이름 부르듯이 부르면 된다고 생각해요.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부르라고 주신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은 실제로 작업을 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는 먼저 땅을 파고 기초 작업을 하지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 작업을 하려면 나의 이름을 파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이름이 아무 내용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입니까? 있어요. 나의 이름은 나의 전부입니다. 내 이름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까지 이뤄놓은 나의 전부를 대변해 주는 것이 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주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한 기초공사를 하시면서 파내십니다.

그 파내는 기계가 뭔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팝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어졌던 상황을 반복시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 것입니다. 그 죽는 이유는, 내 죄를 내가 사랑하는 자식을 통해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내 손으로 자식을 잡아야 합니다.

이번 진도에서 침몰한 배에 탄 학생이 아버지가 죽이기 위해서 그 아이를 태웠습니까? 아니지요. 자식을 손수 죽이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의 관계 시스템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쓴 잔입니다.

내가 예상한 고난은 쓴 잔이 아닙니다. 내가 예상할 수 없지만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일로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는 것을 파내고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의미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이름은 의미 없는 것이구나.’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없음이 분명히 드러나면서, 의미 없는 나를 주의 이름이 주어져서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존재로 바꾸시는 작업을 실시합니다.

주의 이름 안에 하나님의 언약에 담겨 있습니다. 주의 이름은 실제로 이 땅에서 무슨 작업을 해야 돼요. 그게 언약이죠. 그러면 언약이 완성되면서 나타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지요. 그럴 경우에만 이 사람은 언약의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미리 주신 이유를 알겠지요. 이스라엘을 주셨고, 그들 속에 주의 이름이 동행하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탈출했던 애굽과는 달리 약속의 백성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시고, 그 작업의 내용은 언약이며, 언약은 아버지가 손수 아들을 죽임으로 이 땅에서의 모든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죄의 저주를 미리 다 척결하고 해결해 버리는 요소, 그 공간을 제공할 때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것과 신약의 ‘소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주의 이름은 본인이 본인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내가 칠판지우개를 선택해서 잡았다면 다른 것은 지우개가 아닌 거예요. 따라서 이것이 지우개라고 선택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우개가 아닌 것과 나란히 관계 시스템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아닌 나라가 반드시 같이 상주해 있어야 해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자꾸 달라지는 것은 아시지요. 이스라엘이라고 해놓고 다 구원 받지 않고 갈렙과 여호수아만 살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제거 당하지요. 이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이 계속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데, 그 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하면, “이것은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라는 식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그럼 무엇이 계속 확장되고 번져나가는가 하면, 아닌 것이 샘솟듯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할 물이 계속 나오잖아요. 우리는 영생할 물만 계속 나온다고 생각하잖아요. 무엇이 영생이 아닌지도 병행해서 계속 나와요. 대전 성경공부에 어떤 목사님이 참석했는데 강의 후에 저는 떠나고 남은 분들이 1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집사님은 이근호 목사님 강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합니까?”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어요.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는 목사들끼리만 할 이야기인데 일반 교인들에게 왜 이야기를 한 것인지,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내용이에요.

분명히 이스라엘은 ‘무엇이 아닌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이름, 자기 직업, 자기 체면을 고수하려면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만 자꾸 반복하는 거예요. 아까 사모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이것을 제가 고치려고 애를 쓰는데 --”라고. 고치려고 하지 마시고 ‘무엇이 아니다.’라고 밀어내면 되는 거예요. “이런 나도 아니야.”라는 식으로.

그런데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이렇게 나오면 이것이 목적이 됩니다. 그러면 이 목적이 온갖 귀신이 다 달려듭니다. 사서 고생해요. 내가 누구냐를 찾는 것은 내가 사는 목적도 의미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룰 일이고,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은 아니야.” 이것만 반복하면 되는 거예요.

장을 담갔으면 뚜껑을 열어 먼지나 불순물이 있는지 보고 그런 것을 떠내면 맛있는 장이 되지요. 불순물을 끄집어내면 되지요. 하나님의 방법이 이것입니다. 무엇이 아닌가를 계속 끄집어내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했어요. 그것을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이미 용서받고 난 뒤에 주께서 우리를 손잡고 다니면서 죄가 무엇인지 알려준다.”고 했어요. 이미 간장입니다. 그런데 불순물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은 끄집어내고, 또 불순물이 생기면 또 끄집어내고 계속 그런 식으로 가는 겁니다.

‘선택’이라고 할 때, 본인이 본인을 선택하면 안 됩니다. ‘주의 이름’이 스스로 주의 이름을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만약 주의 이름이 스스로 선택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수립이 안 돼요. 그러면 예수님은 본인을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가 아니지요. 어떤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하나님이죠. 그러면 선택은 누가 해야 돼요? 아버지가 해야 되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선택했다고 하지 않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결코 나의 일이 아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하실 고백이 아니고 오늘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가 할 고백인데, 그것이 언약 관계 시스템 속에서 그 고백을 하게 하는 거예요. “나는 ~이 아니요.”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나는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나는 광야의 소리다.” 제사장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고 했어요.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면, 평소에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살아온 방법이 “나는 이런 자다.”라는 식이었어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치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구제를 하면서도 외식을 하고, 기도하면서도 큰 소리로 떠들고, 금식하면서도 금식하는 티를 내지요. 이게 바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에요. 남에게 과시하면서 기죽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름의 내용을 내가 채우려는 짓이에요.

지금 안산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에서 분향을 하면서도 속으로 “휴, 다행이다. 내 아들이 아니어서.”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아들이 같은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인데, 일주일 전에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에 수학여행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모든 것은 타이밍입니다.

원인에 원인을 따지면 끝도 없어요. 남편이 “당신은 이사할 때 왜 하필 아들이 단원고등학교로 가도록 이사했어?” 라고 하면, 아내는 “복덕방 아저씨가 이 집을 소개해 줬어요. 내가 다른 쪽에도 집을 알아보는 건데 너무 성급하게 이쪽으로 이사를 했어. 내 잘못이야.” 남편은 “아니야, 내가 이사를 좀 더 미루는 건데 당신 말을 따른 것이 잘못이었어.” 이런 식입니다.

죽은 원인을 찾는데 정확한 원인을 못 찾아요. 원인을 모르고 산다는 말은 자신들이 자기 이름으로 살 자신감을 상실해 버린 것이지요. 자원 봉사자들이 돼지고기 찌개를 끓여 유족들에게 식사를 제공해도 “안 먹습니다.” 죽을 끓여서 줘도 “먹기 싫습니다.” 무작정 바닷가에서 담요 뒤집어쓰고 계속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구축한 나의 이름의 내용에 구멍이 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름이 상실된 부분을 채울 수가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예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알아서 뭘 할 건데요? 그냥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소리로 살면 되는데, 우리는 소리에 불과한데 그런 생각은 않고 자꾸 나의 고정된 무엇을 가지려 해요.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는 것이 됩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배고프면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먹어라.’ 이것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이름의 내용은 본인이 채우는데 예수 당신도 그렇게 채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이렇게 나오시니 마귀는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지 않았기에 계속 달라붙어서 속삭입니다. “너는 바르게 살아야 해. 노력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바르게 산다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란 말이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이스라엘의 내용을 스스로 채우겠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짓이 큰 나라 애굽을 의지해서 통상을 맺고, 솔로몬 때는 이방 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아 그들의 종교까지 들어와서 나라 곳곳에 산당이 세워지고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내 나라는 내가 지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나라와 더불어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주의 이름이 동행하는 이유는 나누고 분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바탕으로 하지 아니하면 성경이 전혀 해석되지 않습니다. 나의 이름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찾아온 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그 때 우리는 ‘소리’가 될 뿐입니다. 어떤 소리? 주님 때문에 유발된 소리.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인데 진짜 이스라엘 계통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요즘 전통기술자들은 전수자가 없어서 나라에서 월급을 지급해 가면서 전통 기술의 맥을 이으려고 합니다. 이 맥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질문합니다. 세례 요한과 그 시대에 믿음 좋았던 성도의 차이점이 뭡니까? 그 시대에도 분명히 신자가 있었어요. 시므온이나 안나 같은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들과 세례 요한의 차이점이 뭐예요? 역할이 다르지요. 세례 요한은 직통의 소리입니다. 왕이 오신다고 “길을 비켜라.”하고 외치는 소리지요.

그러면 그 소리는 어디에서 외쳐야 합니까? 광야에서 외쳐야 합니다. 관계 시스템 속에서 갖춰야 할 것들이 하나하나 도착이 됩니다. 목재가 오고, 철근이 오고, 레이콘 차도 오고 그래야 건물을 지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세례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죽이려는 헤롯도 있어야 하고 다 있는 거예요. 관계 시스템 속에 있단 말이지요. ‘하늘나라가 이미 왔어. 심판 날이 왔어.’라는 요건들로 채워지는 이러한 현실은 복음적 안목으로 볼 때만 보여집니다.

선택에는 A, B, C 여러 가능성들이 있는데, 왜 지금은 B 가능성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것은 누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가 되었으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 당했지요. 선택 당하는 순간 나의 이름은 허무, 의미 없음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 강요받는 현실 속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소급해서 나 중심으로 재편성을 해요. “이럴 순 없어. 이러면 안 돼!” 그러면 누가 선택자가 됩니까? 그동안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그것이 나답다는 거예요. 이것이 무너지면서 복음이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계속 실패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진작 우리는 선택당하고 강요당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선택자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선택에 우리가 지금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면 됩니다. 하늘을 나는 참새처럼, 들에 핀 백합처럼. 내일 아궁이에 넣더라도 오늘은 주께서 아름답게 보살피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것인데 오늘 아름답게 키울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키우는지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게 키워요.

이것이 바로 욥기의 주제입니다. 욥은 자기 이름을 고수합니다. “왜 나에게 이른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주님을 원망했는데, 주님이 주신 것은 관계 시스템이었습니다.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봤어?” 평소에 욥은 염소와 자신이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고난 받고 아프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왕림에 의해서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관련성이 있어요. 프로야구가 복음과 관련성이 있어요. 내가 전혀 모르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와 내가 관련성이 있습니다. 이 관련성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너나 할 것 없이 선택자에 의해 관련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자가 주어졌을 때 그 실 내용은 뭔가 하면 선택하신 분이 아버지로부터 선택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만드는 겁니다.

모든 것은 확정된 언약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지 마세요. 일어나도록 선택했기에 일어나는 겁니다. 사모님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면 자녀들 때문에 아프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선택임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고민하고 짜증내는 것은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선택해서 주어진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살면서 우리는 영원히 죄인이 되는 겁니다.

팟핏이라는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기가 8살 때까지 철저한 기독교 분위기에서 살았는데 8살 이후에 기독교를 버렸답니다. 왜 버렸는가 하면,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구원 받지 못한 강도가 있는데 그 강도가 너무 불쌍해서 성경 말씀을 믿지 않기로 했답니다.

똑같은 경우인데, 이것을 통해서 예수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가능성 A, 가능성 B가 있습니다. 이 가능성을 누가 선택했어요?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선택 당했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 이름을 극복해서 “저에게 이렇게 강제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라고 자기 이름을 넘어서서 주의 이름까지 영역을 확장시키는 반면에, 지옥 갈 인간들은 자기 이름에 매여 있는 거예요.

불신자는 늘 자신이 최종 선택자가 됩니다. 이들은 선악과 따먹은 띠를 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처럼 자신이 최종 결정권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결국은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반칙인데, 왜 반칙인가 하면, 염소가 새끼 낳는 것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없지요? 보세요. 내가 나 되기 위해서 잘라 놓잖아요.

구원 받은 사람은 ‘내 중심의 생각은 잘못이구나.’하고 끌어당겨서 그것이 중심이 아닌 것을 깨닫는데, 불신자는 자꾸 끊어버려요. “염소와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런 식이지요. 욥도 하나님의 고난과 내가 무관한 것이라고 여기고 살았단 말이지요. 사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고 일부러 끊었어요. 사고 없는 나가 내가 선택한 나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선택자가 되고, 자기가 주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의 내용을 채우는 겁니다. 인간은 평생 동안 자기에게 좋다는 것은 다 다져 넣어요. 그 집어넣는 재료는 타인의 욕망이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으로 채워 넣지요. 그러다가 옆구리가 터지는 겁니다.

수학여행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요즘 많이 부르는 노래가 김범수의 [보다싶다]입니다.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거예요. 평소에는 그 정도로 보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른 것으로 채우기 바빠서. 변화는 보충을 유발하는데, 인간의 욕망은 항상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결여가 일어나고, 그 결여를 타인의 새로운 욕망으로 보충하는 식으로 자아를 형성하면서 수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우상숭배? 별 것 아닙니다. 내 눈에 나밖에 안 보이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세례 요한과 비교를 해 봐야겠지요.

4절을 봅시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3절에서 세례 요한을 ‘소리’라고 했지요. 그러면 소리만 지르면 되는데 왜 세례까지 줍니까? 소리의 내용은 주님의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죠. 그러면 천막치고 살면 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쓴 잔을 자신이 같이 마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몇 명입니까? 12명이죠. 12명 속에 바울이 들어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요.

사도 바울의 사도성은 이스라엘과 연관되어 있어요. 12제자는 전부 유대인들이죠.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은 현재 유대인에서 이방인들로 채우질 때 그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사도는 누구예요? 12제자가 담당을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가는 원리가 끊어졌고,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을 경유해야 연결이 가능합니다. 이 연결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지금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합니다.

여기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는 B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A는 말합니다. “너도 구원 받고 싶으면 나처럼 하면 돼!” 왜냐? 자기는 구원 받았으니까요. ‘너도 나처럼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어.’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주께서 허락하지 않는단 말이지요. 어떤 사람을 본받아서 구원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 요한을 본받아서 구원 받는 방법은 없어요.

베드로, 요한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둘 다 구원이 안 되는 상태에서 틈 사이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피입니다. 피에 의하면 둘 다 원수가 된 거예요. B가 하는 말이 “이방인들, 우리를 닮아야 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경유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피를 경유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사도 바울이죠.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에 흠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이 피를 건너와서 이방인이게 다가갈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천국을 가!”라고 하면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이 이방인을 볼 때 그냥 형제라고 보지 말고, 예수님의 피를 경유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이 복음의 최종판입니다. 베드로도 바울에게 책망 받을 것은 받아야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이라도 구원 받은 자라면 항상 십자가 피를 경유해서 상대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피를 경유해서 봐야 하고, 아내가 남편을 볼 때도 피를 경유해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타인의 욕망이 날아갑니다. 피 안에서는 의미 없어요. 우리가 원했던 타인의 욕망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의 내용을 그것으로 채우려했기에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명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나라 멋쟁이 여인들이 북한, 중국 가방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가방의 용도는 안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 것인데, 북한 가방은 안 들고 다닙니다. 왜 명품 가방을 듭니까? 타인의 욕망이 내 욕망화 되어 그렇습니다. 내 자신이 십자가 피를 경유하면 주님의 욕망만 있지 타인의 욕망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거예요. “남의 집 자식은 물에 안 빠지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 내 아이도 살아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 결핍을 무엇으로 채우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피와 상관없이 구원 받기 전의 A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구원이란 홍해를 건너와야 되는 겁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건너와야 천국을 가는데, 건너 온 적도 없는데 천국을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수시로 우리에게 죽음의 경우를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건너온 사람이기에 그런 것을 겁내지 말라고 한 거예요.

지금 그 작업을 세례 요한이 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행위는 누구를 향해 하는 겁니까? 온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행하지요. 죄 사함을 위해서 요단강에 가잖아요.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는 주님을 만나 주님의 소리가 되었는데, 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 본적도 없고. 그러면 자기의 위치를 저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되는데, 그러면 저들에게 자기와 같은 털옷을 입일까요? 그것이 세례 요한의 의미입니까? 소리의 의미가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죽었다가 살아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주님의 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죽음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만나볼 수 없음을 자기가 먼저 소리가 된 입장에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반복해서 외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 민중들은 예수님께 가기 전에 소리에 먼저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는 절차를 겪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 해야 될 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차후에 이것이 똑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제가 관계 시스템을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시스템 속에 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을 소리라고 했다. 그러면 소리만 지르면 되지 왜 세례를 베푸는가?’ 소리를 소리되게 하는 작업은, 사람이 죽음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의 일환으로 세례 요한은 소리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심판 날이 임박했다.”

소리의 작업은 물세례를 베푸는 것이고,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먼저 주어졌고, 후에 이방인에게도 성령으로 반복케 하십니다. 내가 죽었는데 주님 은혜로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날 위한 세상이 아님을 알게 되고, 따라서 어지간한 사건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습니다.

A라는 경우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왜 내가 책임을 지려고 합니까? 제가 지금 아주 무책임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닌데 왜 내가 책임지려고 나서느냔 말입니다. 모든 것은 강요당한 것이고 말려 든 거잖아요. 그런데 나가 나서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노림수가 뭡니까? 내 인생의 내용은 나 외에 달리 채울 사람이 없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에 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되고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아니지. 저것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아니지.’ 하면서 도려내시기 바랍니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라면서 자꾸 들어내야 돼요.

저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하지 마세요. 세상 모든 것은 내가 내 위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4. 5. 2. 09:58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40.182) 14-05-21 09:24 
광주 강의(2014. 4. 25) 2-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아닌데 그에게 세례 받으면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면 구원 됩니까? 아니죠.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고 기뻐했지요. 이 부분이 참 난해한데, 아브라함이 언제 예수님을 봤으며, 어디서 받으며, 왜 봐야합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드림으로 신앙이 있음을 인정받았어요. 그러면 됐는데 왜 예수님을 꼭 만나야 됩니까? 신앙 있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 아닙니까? 이것 외에 또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면 신앙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뜻이고, 미흡하다는 말이잖아요.

미흡하고 모자란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아들을 바치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살려주므로 ‘내가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알아요.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인지 아닌지는 기도해서 응답 받으면 믿는 것이고, 응답 못 받으면 안 믿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떤 사건으로 몰아넣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행함으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구나.’를 확실하게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만 받고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그들은 구원 받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노인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회개했는데 이틀 후에 죽었다면 구원 받습니까? 세례 받고,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는데, 세례만 받고 예수님 나타나기 전에 늙어 죽었다면 이 사람은 구원 받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시대에 예수님을 만났어요, 못 만났어요? 못 만났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네가 아직 50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했고, 예수님 답변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했어요. 그 때 사람들은 흥분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지요.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것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시킨 일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시켰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했는데, 막상 일을 진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하는 일이 예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예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바로 연결된다고 보고, 예수님은(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과 관련이 되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사람들이 회개를 했는데, 이 회개 자체가 하나님과 바로 연결되지 못하고 이것은 준비 절차에 머문다는 것을 본인들이 알아야 돼요.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합니다. 구약 전체가 세례 요한으로 마감이 된다면 이 전체는 예수님과 관련되어야 하는데,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 사람들이 세례 받는 후에 기다리면 예수님이 오십니까? 안 와요. 예수님은 다른 길로 갔어요. 갈릴리로 가버렸어요.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로 가셨어요.

예수님은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러면 세례 받은 사람들은 헛일을 한 것이 됩니까?

여기에서 세례가 무엇이며, 회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회개 의미와 예수님 십자가 지신 후의 회개 의미가 대조되면서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세례 받고 회개를 했으면, 그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 돼요. “나는 회개 했다.” 이런 식이 됩니다. 이것은 구원에 도움이 안 돼요. 회개했다고 해서 구원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주님을 기다린다고 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세례 속에 참여해야 됩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세례 받은 사람들이 세례 받을 때 주님이 참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어요. 심지어 세례 요한도 몰랐어요. 그래서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은 개인의 회개, 또는 개인의 세례는 주님에 의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개인의 세례에 참여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셔야 구약적 회개를 우리 속에서 발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고 회개해도 이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시면 회개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이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시켜놓고 그 자리를 세례 받는 자의 자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영역으로 접수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 받았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와서 우리를 구원의 장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그럼 누가 구원 받는가? 예수님만 구원 받아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에 그냥 걸려든 거예요.

구원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언약의 완성이 구원입니다. 그럼 인간은 언약에 개입할 수 있습니까? 언약이 있는 지도 몰랐지요. 그러면 우리는 구원과 관계없어요. 구원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성취될 일이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구원을 이루는데 그 장소를 우리로 삼으면 우리는 구원에 참여된 채로 구원되는 겁니다. 떡을 먹는데 떡을 먹다보니까 콩고물이 붙어있어요. 떡에 묻은 콩고물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떡이 맛있다고 먹는데 콩고물이 같이 묻혀서 먹히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 안에서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의인 되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마귀를 이겼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났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겁니다. 율법을 완성하고 저주에서 벗어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떡에 붙은 콩고물이라니까요. 그리스도 몸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은 생각하지 맙시다.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가씨에게 “당신은 언제 입대하십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여자는 입대 대상이 아닙니다. 대만의 어떤 아가씨는 호적에 남자로 기록되어 1개월 동안 군 복무를 했다는 해외토픽을 보긴 했습니다만 이것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지요.

구원은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은 없어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이지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들 불러 모아 세례를 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외쳤어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니까 백성들이 몰려와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 받기 위해 찾아온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주님 죽으심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일을 유발시키신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이며, 회개가 무엇이며, 세례가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세례 요한을 앞서 보내셔서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와 세례는 결국 예수님 자기 스케줄이에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죄도 없는 분이 왜 죄를 씻는 세례를 받습니까?”라고.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리고 죄 씻음의 표시인 세례도 당연히 필요치 않은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약적 한계입니다.

세례 요한이 생각할 때, ‘마지막 심판이 가까이 왔으니 죄 지은 사람(개인)은 나에게 와서 죄 씻음 받는 세례를 받아라.’ 이런 마음으로 세례를 준 거예요. “군인들은 두 벌 옷을 갖지 말고, 토색한 것이 있거든 갚아주고” 이게 무슨 관점인가 하면, 신약적 관점이 아닌 구약적 관점이죠.

개인적 심판은 세례 요한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접수하고 나중에 십자가를 믿는가, 안 믿는가? 이것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하간 세례 요한은 오해를 했지만 예수님이 본인의 구원을 위해서 접수할 거란 말이지요. 죄가 없으면서 죄 속에 들어와야 되고, 회개할 것도 없으면서 회개를 위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이 전부가 예수님이 하실 일이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죄도 없는 분이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러 오시다니요?)에 예수님 하신 말씀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은 인간들이 완성할 수 없고 예수님이 (구약 율법을)다 이루신 후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구원은 아닙니다. 주님의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시려고 주님 세계에 참여된 자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제 구원 받았다.” 이렇게 독자적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자기 세계에 끌어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심판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정립이 되는 겁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여기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물세례와 같은 방식으로 성령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물 안에 잠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안에 잠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세례 요한까지)의 구원, 즉 회개하고 물세례 받으면 구원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가 무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 새롭게 드러납니다. 죄를 알고 회개하고 물세례 받아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예수님을 경유하면 성령 안에서 죄가 무엇인지 새롭게 밝혀지는데 이것을 앞당겨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구원 받았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답변해 보세요.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구원에 참여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해요. 이 질문은 내가 나에게 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구원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언제 구원 받지?’ 이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종교가 이런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착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악하다. 그런데 착해야 될 사람이 악한 일을 하면 남는 것은 종교다.”라고.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착한 사람은 착한 일하면 되고, 악한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 되는데,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게 되면 그것을 감추고 미화하기 위해서 신을 찾는다는 거지요. 기독교를 조롱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사람 말이 맞아요.

자기를 구원 대상으로 여기면 이것은 구약적 발상입니다. 이제 구약적 발상에서 떠나야 해요.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를 묻지 마시고, 저는 어떤 식으로 구원에 참여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세례 요한은 참여됨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목이 잘려 냉반에 담겼어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스데반 집사는 죽으면서도 돌 던진 사람을 걱정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했어요. 노는 가락이 달라요.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그 중 혹시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뭘 기도했겠습니까? “주여, 제가 죽으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이 저 때문에 슬퍼할 것인데, 믿음 없는 부모님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어요.

세례 요한이 이야기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나의 일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탐내지도 말고, 흉내 내지도 말고, 세례 요한은 구약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처럼 신약적 관점에서 주께서 성도를 쓰신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적 관점이기 때문에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행할까요?’ 이런 물음은 구약에서나 통할 이야기입니다. 

이제 구약적 관점과는 작별을 해야 합니다. 작별하면 구약과 끊어진다고 염려하는 자가 있는데, 염려하지 마세요. 세례 요한의 세례 속에 예수님이 뛰어들면 구약과 신약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보고, 모세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 시대에는 예수님이 살지 않았지만, 그 시대는 자기밖에 몰랐지만 주님 오신 후에는 미리 주의 일에 참여하라고, 어떤 일에 동참할 자가 바로 본인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가 고생을 해도 그것이 나의 고생이 아니고 주님이 특별한 임무를 맡겨주신 거예요.

8절에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되어 있는데,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중간에 빠진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지요. 그런데 십자가를 언급해 놓지 않았어요. 그럼 뭔가? 물세례(이건 구약)와 성령 세례(신약이죠) 사이를 무엇으로 연결합니까? 구약과 신약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연결부분을 예수님 자신의 마당, 자기의 관계 시스템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물세례는 죄, 회개, 심판 이런 것인데, 여기에 예수님이 뛰어들었기에 예수님 가시는 곳에 죄와 심판을 둘둘 감고 있는 거예요. 이것(물세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성령 세례로 끝나는 거예요. 이것이 마가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빠져야 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그러면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 라고 물어요. 우리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언제 오시는가 하고 기다리는 자체가 마치 자신은 마땅히 구원 받아야 될 자라 여기는 것이 됩니다.

“언제 오십니까?”라고 하는 사람은 영원히 오시지 않고, 이미 만난 사람은 “벌써 오셨네요.”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이미 십자가를 알게 되었기에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계획에 휩쓸려 간다는 것만 매일 느낄 뿐입니다. 

9-11절 봅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아버지와 언약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을 만들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이미 예수님은 아들로 확정된 채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아들로써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면 아들이 왔으면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지요. 그래서 인간은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만약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다면 이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고 절망적인 소식이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개인 구원이 아님을 확인하면서 내가 구원 받겠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기쁜 소식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주 안에서 보거든요. 그러므로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 좋으라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잘 되어야 할 텐데’라는 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건강케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이 모두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것을 알아야 해요. 이제 모든 것이 아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 좋으라고 되는 일은 없고 아들 위해서 모든 일을 진행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들로 이 땅에 오심으로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 시스템입니다.

나는 없애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박근혜 정권의 시작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죠. 여기에 오 목사님이 있습니까? 없지요. 나도 없어요. 우리 이름은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 이름은 빼야 마땅하지요. 내 중심으로 생각지 말아야 마땅한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간단하지요? 걱정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걱정할 필요 없는데 걱정하고 있으니까. 사서 고생할 필요 없잖아요. 예수님 중심의 현실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12절 봅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여기서 신학적으로 어려운 대목이 뭔가 하면, 성령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언제 이것을 압니까? 십자가 지시고 오순절 날 성령이 와야 소급해서 이걸 알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의 성령은 그 때 그 당시의 성령이지만 우리가 아는 시점은 성령이 임해야 알게 됩니다.

신혼부부가 결혼식 후에 차를 몰고 신혼여행을 가는데 경찰이 잡아요. “저는 신혼여행 가는데 왜 차를 세웁니까?” “신혼여행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차 뒤에 깡통을 매달고 다니는 것은 도로 교통법 위반입니다.” 그래서 뒤돌아보니까 깡통이 매달려 있어요.

우리의 운명은 내 중심은 없었고 예수님을 위해 내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뒤돌아보면 보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사실은 우리가 다시 보니까 모든 것이 그 때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성령께서 몰아넣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은 문자로 해석해야 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해야지요.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선택을 철회하는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을 철회한다는 것은 나의 목적도 철회하는 거예요. 사람이 목적을 만들면 그 목적 아래 있는 지금의 나가 되고, 거기에 일곱 귀신이 달려들어요. 그래서 목적을 없애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허무해 지고, 허무해 지면서 아들의 목적이 솟구쳐 올라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활용하시는 주님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주님의 목적 때문에 있는 것이지 내 목적 때문이 아니란 말이지요. 주님의 의도와 목적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기 싫어도 살아야 돼요. 이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에 합치된 생각입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이라고 합니다. 영적 생활을 한다고 유난 털지 말고 그냥 사세요. 그냥 사는 것이 영적 생활이에요.

12절을 봅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보내신지라.”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보내신다는 말은, 성령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 일에 참여하라고 광야로 몰아내시는 거예요. 성령은 예수님 중심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다룰 때는 예수님 중심으로 다루기 때문에 예수님께 행한 그 일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마귀로부터 시험받는 경우를 구원파를 통해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오대양 사건’을 아십니까? 두 번이나 수사를 했는데 결론은 ‘집단 자살’로 판결났습니다. 누군가 약을 먹였는데, 먹을 때 손을 묶었어요. 손이 묶인 채 죽었어요. 그러면 누구 먹였겠어요? 마지막에 죽은 사람이 다 묶은 거예요. 그런데 먼저 죽은 사람도 기꺼이 동의 한 거예요. 왜? 죽어야 천국 가니까. 그리고 죽음 자체가 자신이 믿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구원파는 자기 구원을 자기 선택에 의해서 이룹니다. 이게 사단의 주장입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각자 책임지라고 합니다. 선택을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겁니다.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야 내가 구원 받아요. 이게 침례교입니다. 구원파는 ‘기독교 복음 침례회’가 공식 명칭입니다. 침례교의 주장은,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것만 하시고, 구원은 각자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십자가를 믿는 자는 구원 받고, 안 믿으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여기서는 십자가를 믿어도 누가 결정한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이게 사단의 말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도했고, 그 따먹은 것을 그래도 유지하라고 해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거기에서 구원을 시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은 구원을 시도할 자격조차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은 주님이 접수해서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4장 37절에 보면,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고 했고, 38절에는, “너희가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라고 했어요. 구원은 내가 시도하지 않았는데 구원되는 식이 복음이고, 내가 구원 받으려고 애를 써야 구원 된다는 것은 성령 받지 않은, 즉 사단에 속한 자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사단 밑에서 살도록 하십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구약적 안목(개인적으로 내가 죄를 지었다, 사적으로 회개하면 구원 받는다)이 아니고, 신약적으로 구원을 주면서 그 이음새는 오직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적으로 우리는 죄가 되고, 신약에서는 의가 되고, 죄인이 의인 되는 것을 십자가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제가 이런 이야기한다고 자녀들 걱정하지 마세요. 자녀들은 주님께 속했기 때문에 부모가 걱정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 자신도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기껏 한 것이 교회 다닌 거예요. 교회 다닌다고 성령 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령 받고 난 후에는 교회 다닌다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그곳은 친목 단체란 말이지요.

성경에 교회가 나오지요? 그러면 교회는 있어요, 없어요? 교회가 있는데 왜 우리가 ‘더 좋은 교회, 훌륭한 교회’를 생각합니까? 그런 걱정하면 안 됩니다. 이상적인 교회를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말려든 거예요. 성경에 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의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주님이 알아서 교회 만들면 우리는 만들어진 교회에 끌려가면 되지 왜 우리가 나서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까?

훌륭한 교회를 내가 구상하고, 그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나의 목적을 이루겠다는 사단적 생각입니다. ‘자녀를 사랑으로 대하면 자녀가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데, 사랑해서 감동받을 자녀 없습니다. 자식이 효도하면 주께서 효도하도록 시킨 것이지, 부모가 교육을 잘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여름 수련회 강의한 것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며칠 전에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한석봉은 효자다.’ 불 끄고 시합하는 것은 불공정한 게임입니다. 떡을 자르는 것과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난이도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석봉은 어머니의 말에 수긍을 했어요. “제가 아직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아들이 효자라서 이런 말을 한 거예요.

한석봉 어머니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자식이 위대해요. 자식이 잘 되어야 훌륭한 엄마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부모가 교육을 잘 시켜도 자식이 개망나니가 되면 그 엄마는 훌륭한 엄마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녀들 잘 들으세요. 훌륭한 부모 만드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접수합니다. 이제 나의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울고불고 하는 것은 나의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딸 시집보내면서 하루 종일 인상을 찡그렸어요. 사진을 보니까 그래요. 섭섭하다고. 그렇다고 딸 시집보내면서 웃는 것도 이상해요.

아무튼 성령이 왔다는 것은 모든 것이 주님의 세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하신 대로, 주님이 만났던 사단의 세계를 우리는 지금 만나야 돼요. 만나서 사단이 주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예수 믿는 자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될 수 없고, 주님의 십자가 피만이 죄인을 의인되게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달으면서 살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이 없는데 내 것이라고 우긴 것이 사단의 시험인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저희도 성령 받은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하시는 조치에 감사함으로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5. 21. 08: 3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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