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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8 01:48:53 조회 : 1828         
두 현실 140627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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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39.31) 14-07-03 09:46 
광주 강의(2014. 6. 27) 4-1

마가복음 1장 21절에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전반부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평범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잡혀 가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예수님을 지키려고 했고, 이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이라도 천사를 동원해 나를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자가 바로 나다.’라는 겁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인가 하면,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사람들의 군집인데 그 중에 예수님도 있고.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지금도 열 두 영(1개 사단 병력)의 천사를 동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사를 동원할 수 있다면 사람과 함께 천사가 들어올 수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는 현실이죠.

예수님이 보는 현실은 세상에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 활동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는 현실에서는 천사는 없습니다. 천사가 빠진 현실이죠. 그러면 구분해 봅시다. 현실은 두 종류가 있는데, 예수님의 현실과 인간들의 현실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현실은 인간들만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현실은 천사가 추가된 현실이죠. 마가복음 1장 26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나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현실 속에는 예수님 계시고, 사람이 있고, 천사, 그리고 귀신도 있는 이 전체를 현실로 보는데, 우리는 예수님, 천사, 귀신을 빼고 인간들만 있는 세상을 현실로 간주합니다.

이처럼 현실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를 때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간단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전체 현실을 감안해서 주신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곡해해서 천사 없고, 귀신 없고, 인간들만 있는 상태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 국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뭔가 하면, ‘행함으로 복(구원) 받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관 자체가 잘못되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현실관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죠. 어느 쪽이 맞습니까? 좁은 현실이 맞습니까, 넓은 현실이 맞습니까? 당연히 좁은 것보다 넓은 현실을 봐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진리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이번 월드컵 경기에 200여 나라가 예선전에 참가를 했어요. 전 세계 나라가 미국 정보부의 발표에 의하면 225개국입니다. UN에 가입한 나라는 200개국이 안 됩니다. 민족은 2,000개가 넘지만. 여하간 국가가 얼마나 되든 민족이 얼마이든 그들 다 모아봐야 거기에는 천사도 없고 귀신도 빠져 있어요.

그러기에 KBS, MBC등 모든 방송에서 나오는 현실에 관한 뉴스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현실관을 배척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현실관이 정당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교육하고 유포시키는 그런 현실 속에 놓여 있어요. ‘인간들만 있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출세할 수 있나?’ 이렇게 현실관을 좁게 만들어 놓았기에 여기에서 도출되는 모든 진리관, 구원관은 비현실적이죠.

인간들만 있는 현실은 잘못된 현실인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있는 현실로 옮겨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옮겨 타려면 1) 공부한다. 2) 기도한다. 3) 봉사한다. 4) 전도한다. 몇 번이 정답입니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정답이 없다고만 하지 말고, 왜 정답이 없는가를 이야기해야겠지요. 예수님이 언급하신 모든 내용이 나중에 사도들에 의해서 다시 요약되어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면 무엇을 만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셔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의 경계선인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 말씀에 의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오는 사람은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갈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론은 나왔는데 이 이론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에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집합론에 보면 명제되는 것과 되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을 명제라 하고, 참과 거짓이 구분 안 되면 명제가 아닙니다. ‘바람이 분다. 밥 많이 먹어라.’ 이런 것은 명제가 아닌 거예요. 명제가 안 되는 것의 특징은 명령입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옳아서 시키는 것이 아니고, 옳든 싫든 명령 받은 사람은 그것을 따지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시킨 대로 하란 말이지요. 그래서 수학의 집합론에서는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명제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제 2의 다른 근거가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신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가 그것을 증명해줘야 하는데 그런 존재가 없어요.

지금 들어오신 분이 계셔서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일찍 오신 분은 복습한다고 생각하면서 들어주세요.

마가복음 1장 21절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는데, 그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랐어요. 가르침에 놀란 것은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상식선에서 말씀하셨으면 놀랠 일이 없지요. 그런데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데,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서기관들은 어디에서 도출된 인물입니까? 인간의 테두리 안에서 도출된, 인간들이 권위를 인정해 준 사람 중 일부가 서기관입니다. 인간들이 피라미드를 쌓았다면 그 중 하나를 빼서 보면 서기관이 되는 거예요.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고 인간들 중에서 뽑지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은 내 속에 있는 요소와 타인 속에 있는 요소가 공통적인 부분이 있을 때 결합이 되고, 이것을 소통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하는 이야기가 내 내부에도 이미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전체는 일치되지 않더라도 일부는 동의합니다.’라고 할 때, 소통이 돼요. 즉 의사소통이 되는 거예요.

의사소통이 되면, 상대의 말에 놀란다거나 “당신의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습니다.” 이런 소리 안 해요.

노인이 목욕탕 탕에 몸을 담그고 유행가를 불러요.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 왜 탕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적당한 울림이 생겨서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러요. 이것을 ‘공명’이라고 합니다. 공명은 결합력 때문에 일어나요.

월드컵 경기 본다고 전 세계 젊은이들이 밤에 잠을 안 잡니다. 이게 공명의 요소가 있는 거예요. 공명 요소의 특징이 뭔가 하면, 음파가 부딪쳐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갇혀 있다는 겁니다. 갇혀 있으니까 음파가 증폭이 되잖아요.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잡혀 가시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칼을 뽑아 들고 맞설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했어요. 얼마든지 적들을 물리칠 힘이 있는 분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6절).”는 것 때문이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현실 1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현실은 현실 2라고 합시다. 예수님 현실에는 예수님과 천사, 더러운 귀신, 사람이 있고 이 모두를 아울러 현실로 봅니다. 그런데 인간의 현실에서는 인간들만 있어서 인간들끼리 유대를 이루고 소통하는 것입니다.

유대감을 이루는 것은 혈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부 자기 가문, 자기 종족, 자기 혈족을 절대화 시키는 일에 소비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행하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는 말씀을 듣고 누가 할례를 행합니까? 유대인들만 행하지요.

그러니까 할례가 없는 이방인은 자연적으로 개가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율법을 사용했기에 그들은 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보내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너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운다.”고 하셨어요. 유대인들은 이 말이 납득이 안 됩니다.

분명히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혈통 중심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 자손도 아닌 자에게 구원이 옮겨지려면 건너가는 다리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제시된 다리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봅시다. “기독교 신자는 구원 받는다.”고 해놓고 “불교 신자 너도 천국 가라.”고 한다면 앞의 이야기가 허물어지고 뒤의 것이 성립되는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논리가 유대인들이 수용할 수 없는 논리였어요.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할례를 행했잖아.”라고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육체의 할례를 행했지 마음의 할례는 안 행했잖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음식을 담은 보자기를 내려 보냈는데, 이 음식은 구약 율법에 따르면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했고, 베드로는 못 먹는다고 했고, 세 번이나 신간을 한 후 그 보자기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세 번씩이나 못 먹는다고 버틴 베드로의 내면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율법대로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것, 바꿔 말하면 구원 받은 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거예요. 베드로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나중에 바울에게 면박을 당하고 혼이 납니다.

그 이후 베드로는 깨닫게 됩니다.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그동안 베드로는 육신에 갇혀 있었어요. 육신의 공통분모가 가족을 만들었고, 가족이 커지면 종족이 되고, 종족이 커지면 국가가 되고, 그 국가 전체를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현실로는 주의 말씀은 이해 못합니다. 주님의 현실은 따로 있습니다.

현실 2에서 말하는 예수님, 천사, 마귀 이런 것까지 고려해서 나온 말씀이 현실 1에 주어졌을 때 인간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으려면 현실 1에서 벗어나서 현실 2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 방법이 뭐냐 하는 겁니다.

무슨 수로 들어갑니까? 제가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개방되어 있으면 그냥 넘어올 수 있는데, 갇혀 있어요. 갇혀 있을 때는 가둔 사람의 허락 없이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현실 1에서 현실 2로 넘어오는 것은 인간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시니까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는데 3일 동안에 일으킨다고?”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똑같은 건물을 3일 만에 다시 세운다.’ 이것 외에 다른 이야기로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 들고 제자들도 놀랐어요. 46년 걸려 지은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부활 후에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은 건축물 성전이 아니고 예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그 예수님 몸이 바로 성전임)을 깨달은 거예요.

이 사실이 성경에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이 설명도 이상한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들었던 그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보고 있어도 그 말씀 속에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내용이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의 말씀 해석이 이상한 거예요. 미친 거예요. ‘46년 동안 지은 성전 헐어버려라. 내가 3일 만에 짓겠다.’ 이게 예수님 말씀이죠. 이 말씀 듣고 그 누구도 예수님 죽고 부활한다는 것으로 들을 사람은 없어요.

그냥 성전 건물 부순 후 천사들 동원하든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똑같은 건물을 3일 만에 다시 짓겠다는 소리구나. 이렇게 들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뒤늦게 알았어요. 예수님의 말씀은 건물 부순 후 다시 짓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자세히 기록해 놓았어요.

그런데 이 설명 자체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쪽 논리에서 저쪽 논리로 가려면 비약해서는 안 됩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옮겨가서 납득이 되어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납득 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론은 무엇인가? 사도들은 미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미치기 싫지요? 그러면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처럼 미치든지 아니면 미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요? 그 말은 ‘나는 미친놈입니다.’라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 스스로 미쳤다고 여긴다면 예수 믿는다는 말도 인정하겠는데 정상적인 상태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서로 연결이 안 되는 말입니다. 미쳐야 믿을 분을 안 미치고 믿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실 1에서 현실 2로 옮겨 가는데 어떤 경로로 가는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미리 길을 닦아 놓았어요. 예수님이 길을 까는 작업을 진행 할 때는 사람들은 그것이 길인지 못 알아봤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 길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사도바울이 말한 현실 1에서 현실 2로 옮겨가는 방법은 뭔가 하면, ‘죽음’입니다. 깔끔하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되는 거예요. 부자 청년이 맛보지 못한 것. “주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 대답은 “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불교 신자들은 ‘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만 순종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와 비슷한 짓하는 사람이 신부, 수녀들입니다. 그러나 버리는 것으로 안 되고, 그 후에 주를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말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죽음이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현실이 힘들면 죽어요. 자아의 굴레가 너무 힘들면 자살합니다. 김성0 목사가 자살했다고 하지요. 보통 병은 마지막까지 ‘나는 건강해야 돼.’ 라는 것이 남아 있기에 약도 먹고 치료 받을 때 자기를 침대에 눕힐 수가 있지만, 정신병은 내 자신이 지금 정상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해결책이 난감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저주 받았지요. 따라서 고생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여자는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하고. 생산은 기쁨인데 그것이 아픔을 동반하는 생산이기에 엄마의 아픔에 포함된 자식들은 엄마의 아픔을 전수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죽고 또 죽어요.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고통 가운데 죽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 유다입니다. “내가 스승을 팔다니” 하면서 죽습니다. 이런 죽음은 소용이 없어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예수님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아버지의 말씀에 입각해서 죽는 죽음이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 죽음에 동참해야 돼요.

자살은 죽으면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천국을 못갑니다. 죽어가면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죽는다면 이것은 아버지의 뜻에 의해 천국 갑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조건에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자백할 때 주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너 죄인이야?” “예, 죄입니다.” “아이구, 이런 착한 것. 내가 용서해 줄게.” 이렇게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구나.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구나.’

마치 치료제가 먼저 있고 나중에 병이 있는 것처럼 ‘내 병은 치료제가 얼마나 유효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병에 걸렸구나.’라고 생각하게 하시는 그것이 주의 계획과 말씀에 입각해서 주신 것으로 믿으면 그것이 영생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방법을 찾다가 죄인노릇해서 예수님 피를 찍어 바르는 그런 식의 구원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내가 죄인 되게 하는 것, 심지어 예수님 믿게 하는 것조차도 나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 계속해서 느껴질 때 ‘내 인생 내가 다루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다루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기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뿐입니다.
인간이 구원 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주께서 그냥 덮쳐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그 명령은 우리가 실천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명령인데 이 명령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지킬 수 없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것도 명령이라면, 이 명령이 왔을 때 지킬 수 없었는데, 명령이 명령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우리를 믿게 하셨다는 고백이 나올 때 우리는 결과물이 되지요. 말씀이 작용한 결과물이 되지요. 그러면 원인은 내가 아니죠. 원인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내가 구원 받는데 어떻게 할까?’ 라고 원인을 나에게서 꺼내면 원인자가 내가 되고 우리는 필요한 것만 내가 뽑는 셈이 돼요. 이것은 종교에 불과한 거예요.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기독교란 이름의 종교입니다.

원인을 예수님에게 두어야 합니다. 제가 어제 대전 강의에서 한 이야기를 다시 해 보겠습니다. 1+1+1+1=4지요. 그런데 1+1+1+1=1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1을 네 번 더하면 4인데, 이 4 안을 쪼개보면 1이 네개 다 살아있어요. 각자의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다 합쳐도 1이 되는 것은, 1속에 있는 다수의 것이 다 0입니다. 그런데 이 0은 1을 거쳐서 모이고, 또 다른 0도 1을 거쳐서 모이니까 1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 했어요. ‘나는 눈이다, 나는 발이다.’ 할지라도 눈과 발을 0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경유하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눈이 되고, 예수님에 의해서 발이 될 때 그 전체가 100이 모이든, 1,000이 모이든 이 교회는 하나(1)의 교회가 됩니다.

자기 자랑을 할 수가 없어요. 기도 경쟁을 할 수 없고, 헌금 누가 많이 했는지 따질 수 없어요. 군에 갔다 왔는지 공익요원을 했는지 이런 것으로 다툴 수 없어요. “당신은 군에 왜 갔는데?” “주께서 가라고 해서 갔다 왔습니다.” “너는 왜 군에 빠졌는데?” “주께서 못 가게 해서 빠졌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다 결과물입니다. “집사님은 왜 여자입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얻어맞을 질문입니다. 사람을 모독하는 질문이 돼요. DNA가 어떻고, 유전자가 어떻고 이런 설명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러면 “왜 DNA가 그런가?” 라고 물으면 답은 원천으로 돌아가요.

인간의 현실은 인간들끼리 공감대로 연결시킨 거예요. 철학자 칸트는 이것을 ‘이성’이라고 했어요.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을 ‘양심’이라 했고, 그 이전 신학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가진 것 중에 하나님처럼 거룩해 보이는 것을 뽑아내서 이것으로 사회를 유지하면 천국이 된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겁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그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양심들을 가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면 그 나라는 곧 지상의 천국이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이런 주장을 해요. 전혀 아닙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과학이고 철학이고 인문학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세상의 모든 철학과 학문은 그리스도 앞에서 배설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사나 판사가 자기 직업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자기 일을 하면서 그 직업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면 돼요. 내가 어떤 일이 종사하면서 내 일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인생 자체가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고생하는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왜 고생하는가? 이 세상에는 인간 이상의 것이 있다. 마가복음 1장 26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게 들어가 있던 귀신이 예수님 명령으로 그 사람에게서 나왔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귀신이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본인이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신을 자아와 육신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사실 자아는 없고 몸만 있어요. 몸만 있는데 이 몸 안에 귀신이 들어가서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버렸어요. 그래서 자아와 몸이 일치가 안 되기에 인간은 여기에서 고민에 빠집니다. 한 여학생이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성형외과 의사인데, 나는 예뻐지고 싶어서 아버지께 쌍꺼풀 수술을 해 달라고 해서 쌍꺼풀 수술을 했다.’ 이 소리를 들은 많은 여학생들이 자기 부모에게 쌍꺼풀 수술 해달라고 해서 야단이 났습니다. [유자식 상팔자]라는 프로에 나왔어요.

눈꺼풀을 겹쳐 꿰매면 쌍꺼풀이 되고, 예쁘다는 것은 자아가 다른 자아와 비교하든지, 아니면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서 자아가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아는 어디에서 나온 자아입니까? 이 자아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나온 후유증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만족하는데, 이것이 욕망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욕망을 이루려는 것인데, 열심히 노력해서 욕망을 채우게 되면 이제 욕망은 사라져야 하는데 그렇게 됩니까?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불리 먹음으로 배고픔의 욕망을 없애려고 하는데, 이게 없어집니까? 잠시 뿐입니다. 약 4시간 정도 갑니다. 그 욕망의 틀은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요한복음 4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여인이 물 길러 왔는데 이 사람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꿔가며 살았어요. 자아가 난데없는 욕구에 쫓기고 있어요. 그래서 자아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것이 뭔가 하면, ‘인간은 왜 두려워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애착에서 옵니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을 때 할머니가 그 장난감을 달라고 하면 절대 안 줍니다. 그러나 그 때 번개가 치면 장난감을 버려두고 할머니에게 달라붙지요. 번개는 음전자와 양전자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두렵지요? 요란한 소리의 원인을 알아도 잠든 밤에 요란하게 번개가 치면 겁나요.

인간의 갇힌 현실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공명, 목욕탕에서 노래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듯이 자기들 아는 이야기만 주고받고, 우리들끼리 살자는 갇힌 세계에서 주님은 다른 면을 봅니다. ‘누가 너희를 그렇게 만든 줄 아냐? 그것은 바로 귀신이다.’ 귀신은 숫자가 많고 그 중 우두머리가 있어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옛 뱀’이라고 했어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그 뱀입니다. 다른 말로 ‘사단, 악마.’

문제는 이런 용어를 인간 세계에서는 왜곡해서 수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멀쩡한 귀신을 귀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이런 분위기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간질병 환자는 귀신 들렸고, 건강한 사람은 귀신 안 들린 것으로 여기는 이 왜곡된 사고방식.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은 간질병 환자였습니까? 아니지요. 아주 건강하고 똑똑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살인마 바나바는 풀어줬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인간은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 말씀대로 됩니다. 인간 세계는 하나님 말씀에 말려든 거예요. 심지어 귀신까지 말려든 거예요.

오늘 강의는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진행되었는데, 진행 과정에서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권세 있다’고 이야기했고, 두 번째는 귀신들린 자가 나오는데, 귀신과 그 사람의 몸이 분리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의 몸은 누가 차지했습니까?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 사람은 귀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압니까, 모릅니까? 알 길이 없지요. “나 귀신 들렸어요.”라고 하는 사람 봤어요? 본인은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신체의 변화는 느꼈지만 본인이 귀신에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은 몰라요. 귀신은 누가 귀신을 끄집어내 줄 때 그 전과 후의 차이를 통해서 비로소 “내가 귀신에 들렸었구나.”라고 알 수 있어요.

그러면 귀신을 뽑아내 줄 분이 누구입니까? 귀신보다 권세가 더 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귀신을 빼내 줄 때 귀신이 빠져나간 사람(구원 받은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귀신 들렸던 사람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 원칙 이전에 예수님은 부분적으로 테스트하는 식으로, 귀신들린 사람 전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전체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특정한 사람에게 귀신을 뽑아낸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4. 7. 3. 09:02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39.123) 14-07-14 09:57 
광주 강의(2014. 6. 27) 4-2

24절에 보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라는 발언을 귀신 들린 어떤 사람이 했어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무덤에서 헤매는 청년이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을 볼 수 있어요. 귀신들린 자와 보통 사람들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둘 다 지옥 가는 것은 같은데,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복음에 대해서 발작을 일으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24절을 봅시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여기를 보면 귀신들린 자는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지요. 그 다음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즉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고, 그리고 ‘우리를 멸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는 자기 자신을 이미 인간의 대표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됩니다. 인간의 현실에 외부인 하나님이 들어오니까 여기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는데 유독 귀신들린 자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귀신에게 ‘인간에서가 나오라’고 명하심으로 말미암아 귀신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을 들락거리면서 지배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것에 대한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요한계시록 12장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아들과 옛 뱀의 전쟁인데, 땅의 전쟁은 후반전이고 전반전에서는 하늘의 전쟁이 이미 있었고, 그 전쟁에서 패한 용(마귀 또는 사단)이 쫓겨 패잔병 노릇을 하면서 뱀의 모양으로 에덴동산에 침투해서 인간을 유혹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성경에서는 귀신들린 자가 이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면, 어떤 집 딸이 제주도로 수학여행 간다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떠났는데 들려오는 소식에 그 배가 바다에 침몰했다. 그런데 그 학생과 엄마는 평소에 집 근처에 있는 개척교회에 새벽기도를 자주 나왔다. 그러면 그 엄마는 한을 토해내야 되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의 주관자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나사렛 예수여, 우리 집안과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딸을 이렇게 멸하십니까?” 이런 기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코카콜라 공장에서 콜라가 켄베어벨트 위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동하잖아요. 완제품으로 뚜껑이 닿기는 지점에서 ‘Why me?’ 하면서 죽어가는 거예요. 지구상의 60억 인구가 다 이런 식으로 ‘나를 왜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내 팔자가 왜 이렇습니까?’

우리의 24시간이 ‘Why me?’의 연속입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귀신들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주목한 것은 인간은 빠지라는 겁니다. 왜 빠져야 되는가? 인간이 인간 구원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말고, 천국 가느냐 못 가느냐는 하나님 뜻이니까 인간은 개입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사할 권세는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부탁한다고 해서 주님이 듣는 분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시기에 인간들은 빠지라는 것입니다. 어른들 노는데 애들은 끼어들지 말란 말이지요. 아담이 처음 누구에게 유혹을 받았습니까? 마귀잖아요. 그러면 그 문제의 해결은 마지막 아담이 알아서 합니다.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잖아요. 이것을 아는 자가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나는 구원 받을 생각도 없었는데, 다른 분이 날 대신해서 일을 처리해 놓고 그 혜택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구약에서는 이것을 ‘유산 또는 기업’이라고 하지요.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넘길 수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이지요.

아합 왕이 강제로 남의 포도원을 빼앗았는데 그렇게 해서 그 포도원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포도원의 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결국 아합은 죽어서 그 시체를 개가 핥아먹는 비참한 상황이 되지요. 하나님의 것은 인간에게 등기 이전이 안 됩니다. 우리 몸이 주의 것이잖아요. 마귀가 들락거릴 수는 있는데 그가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선점했기 때문에.

주님께 잡힌 사람의 특징은 절대로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지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 자신은 그냥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여!’라고 했는데, 인간들 생각에 예수는 여러 사람 중 1명입니다. 4대 성인 중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우리는 신자이기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분도 있지만. 만약 아내는 밖에서 일을 하고 남편은 집에서 논다면, 아내가 일하면서 늘 남편 생각을 합니까? 일 할 때는 일에 몰두하지 남편생각 안 합니다. 그 때 자기 남편은 보통 남자 중 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내 남편이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집에 가면 내 남편이 됩니다. ‘집에서 놀면서 반찬도 안 해놓고, 청소도 엉망진창이고, 그래도 내 남편이니까 그냥 살아야지.’ 라고 합니다. 집에 가야 보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를 늘 신경 쓰는 것은 귀신뿐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현실감이 없어요. 음식을 먹을 때 식감이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는 현실을 씹는 감이 없어요.

마귀는 식감을 느껴요. 그래서 마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항상 나사렛 예수를 의식하며 살아야 되니까 골치 아픈 거예요. 그래서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들과 성도들도 공격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마귀가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복음 전하는 자를 핍박합니다. 이것이 말씀대로 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고난 받는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로마서 8장을 봐도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고, 빌립보서 1장에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 모두는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이미 말씀하신 거예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이미 말씀하신 것이 점점 확대되고 적용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관심 없습니다. 대신 돈 벌이에 관심 있고, 돈 쓰는데 관심 있고, 여하간 돈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습니다. 애가 공부를 못하면 나중에 돈 못 벌까 걱정되어 공부하라고 하고, 모든 것에서 돈을 경유해서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 사람 참 잘 됐더라.”는 말씀 들을 때 느끼는 것은 ‘돈 많이 벌었구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참 잘 됐더라.”는 말을 듣고 ‘그분이 예수 믿고 고난 받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요. 만약 누가 어떤 분에게 “축하합니다.”라고 했다면, 그 이후 소리는 들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인데 그렇지 않는 기적도 있어요. 대전 공부에 나오신 어떤 분인데, 그분이 기쁨의 메시지를 보내 왔어요. “목사님, 너무 기뻐요. 친정 엄마가 드디어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어요.”라고. 그래서 제가 “감사한 일이네요.”라고 답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대전 공부에 가서 그분께 “구체적으로 어머니가 뭐라고 하든가요?”라고 질문을 했더니, 그분 답이 “이제 내가 너를 용납하겠는데 네가 그런 복음 듣고 네가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었니?” 라고 했다는 거예요. 실적을 내 놓으라는 것이지요. 실적 없으면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 모양이라.

‘나사렛 예수’라고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관심 없는데 유독 관심을 둘 때 이것은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내려 갈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고, 예수님 답변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8절(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이 말씀이 구체화 된 것이지요.

나사렛 예수님을 언급함으로써 둘 중 하나입니다. 귀신이거나 성도이거나. 잠자고 있는 인간들 중 깨어난 자가 성도인데, 깨어나면 ‘나사렛 예수가 누구시지?’ 이쪽으로 관심이 모입니다. 그러면 일반인들이 하루 24시간을 살면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관심 있습니까? 관심 없어요.

교회 가서도 말씀 들을 때뿐이고 돌아서면 다 잊어요. 돌아서면 돈 벌기에 매진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 존재와 거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사는데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나사렛 예수께 관심 두는 사건과 사태를 유발시킵니다. 1년분 믿음을 왜 한꺼번에 안 줄까요? 그것은 믿는 내가 나의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내가 나의 교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잘 믿는 나를 신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믿는 것이 자기 자존심으로 굳어져 버립니다. ‘잘 믿는 나, 은혜 받은 나, 기적 받은 나’가 자랑거리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항상 이야기합니다. “네가 핍박하든 나사렛 예수!” 따라서 예수님과 바울의 관계는 ‘핍박’이라는 관계가 영원히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 가서 면류관을 받으면 도로 반납합니다. 주님을 핍박했던 것조차 주님의 의도된, 주께서 날 구원하기 위한 기획이었기에 그것마저도 찬양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강도는 자신이 강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강도가 되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못 만날 뻔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고,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건진다.’

‘나사렛 예수여’라고 언급함으로 이제부터 예수님의 전쟁은 나사렛 예수로 살아갈 모든 것을 이 세상에 펼칩니다. 왜냐? 그래야 귀신을 계속 자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사렛 예수를 다른 말로 하면, ‘인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에요.

예수님이 ‘인자’지요. 사람의 아들이니까 이건 결국 이 세상에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아니면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죠? 사람들은 죄 짓고 난 뒤에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지요. 그러면 이것은 무기물에서 무기물로 가는 겁니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요소가 없어요. 힘들고 어려우면 자살하면 된다니까요. 왜냐? 우리는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가니까. 힘들게 고통 받다가 죽을 이유가 뭐 있습니까? 내가 알아서 죽지. 이왕 흙이 될 것 앞당겨서 가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흙에서 흙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흙은 장치에 불과하고 거기에다 정신적인 요소인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놓은 거예요. 형상을 심어놓으면 이 인간은 지옥, 저주, 천국, 영생을 무기물에서 뽑아내는 하나님의 솜씨가 나와요. 흙인데 천국 보내는 솜씨도 주의 솜씨고, 흙인데 지옥 보내는 솜씨도 주님의 솜씨고. 그 솜씨를 부리는 당사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고, 그분이 인자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결국 사람대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구름타고 왔으면 인간들이 무시하지 않습니다. 얼굴도 현빈처럼 잘 생겼으면 사람들이 매력을 느꼈을 것인데 주님은 전혀 매력이 없어요. 인간 속에 섞여 버리니까 이분이 어떤 분인지 분별을 못하는 겁니다. 왜 구분을 못해야 되는가? 인간은 구분할 수 있는 역량이 없고, 역량 있는 악마가 구분해주면 우리는 뒤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운데 귀신이 작용하는 자가 있으면, 다 귀신 들렸지만 마귀에 의해서 때에 따라 작용이 되거든요. “네가 나가서 예수 반대해!” 하고 지명된 자가 발짝을 일으키면서 “나사렛 예수여, 아직 당신의 때가 안 되었는데 왜 오셨습니까?” 이런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할 때, 우리는 멍청이 바보가 되는 거지요.

‘나사렛 예수여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하고 외친 사람이 박사입니까? 공부 많이 한 학자입니까? 그냥 귀신에 장악된 사람이고 공부를 특별히 많이 해서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해서 못 알아보는데 고맙게도 간헐적으로 귀신이 나와서 복음에 대해서 발짝을 일으킬 때 이것은 주님께서 의도하신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 그 길로 가서 결국 무시당해서 강도 바나바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세계에서 밀어냈습니다. 이걸 제가 어떤 강의에서 말했지요. ‘판사가 예수님을 피고로 몰아서 사형시켰을 때, 피고(예수)가 도리어 세상을 판결하는 판사가 되어서 자기를 판결한 그 모든 자를 피고로 만들어서 심판에 나서는 그것이 예수님의 작전이다.’

판사와 피고의 자리가 바뀌었어요. 여러분은 중립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못 알아 봤습니다. 우리는 귀신과 한 편이었어요. 우리가 귀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신의 귀신 됨은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만 그 정체를 드러내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우리와 한 통속이고 우리 편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볼펜 중 [모나미]가 있는데, 모나미의 뜻이 뭔가 하면 ‘나의 친구’입니다. 저는 이 볼펜을 보면 귀신이 생각나요. 귀신이 우리의 친구에요. 설교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믿는 값을 해야 합니다. 예수 믿었으면 성화되고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요.” 이런 소리는 설득력이 있어요. 이게 유대인들의 신학입니다.

유대인들 신학은 ‘은혜로 홍해를 건넜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자.’ 이것이 유대인 신학입니다. 유대인 신학을 따르는데 교회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사두개파고, 말씀을 실천하고 옮겨야 된다는 것이 바리새파고, 사두개파 + 바리새파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서기관이 합작해서 죽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 사두개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성도는 교회 중심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돈 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교회 충성해야 하고, 말씀을 생활화 하자.’ 이 아이디어가 마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왜냐? 이런 이야기는 이성으로 납득이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양심이 있다면 구원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지.’ 이런 주장이 호소력이 있잖아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홈파기를 하십니다. 빌라에 여러 가구가 사는데, 어떤 집에 검찰이 수색 영장을 가지고와서 범인을 잡으려 한다면 난장판이 되겠지요? 검찰이 수색을 하면서 책상을 뒤지고 집안을 살피면서 미안해합니까? 그런 것 없어요. 자신들이 수집하려는 정보를 얻기 위해 난장판을 칩니다. 히브리서 6장에 보면, 말씀이 와서 우리를 난도질해서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요. 이것은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내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명예나 학력이나 감투 이런 것으로 자신을 숨겨 왔습니다. “넌 누구야?”라는 물음에, 자신은 이러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이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직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자신을 위장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들을 난도질해서 벌거벗은 자 되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말씀의 완성이 십자가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드러내서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옛 부대에 옛 술을 담는 방식이라면, 난도질하는 방법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홈을 판다는 말은 유대인의 율법으로 정돈된 세계를 칼로 찢어버린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버려요. 그 때 안식일 지키는 사람들이 병 나은 자를 향해 “너는 왜 안식일이 담요를 들고 가는가?” 라고 했고, 병 나은 자가 대답하기를 “나를 낳게 하신 분이 일어나 가라고 했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안식일 지켜도 내 병이 낫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안식일과 무관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38년 된 나의 병을 낫게 했다. 당신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완성된다고 가르쳤는데 주님은 이미 목표 지점에 와 있는데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고 힘써도 지키지 못한 것을 주님이 다 지켜놓고 그 공로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다면 여기에 대해 누구 이의를 제기합니까? “너는 이방인이다. 너는 창기다. 너는 세리다. 그래서 구원 못 받아.”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느 포도원에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이 처음에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다가 불순종했고, 작은 아들은 아버지 말씀에 거부 의사를 보이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순종했단 말이지요.

처음에 가겠다고 했다가 안 간 사람은 유대인들이고, 안 간다고 했다가 간 사람은 세리와 창기로 보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 그러면 세리와 창기가 회개하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 말씀을 남긴 주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까? 주님의 공로지요.

지금 우리가 마가복음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것은, 마치 경찰이 수색영장을 가지고 온 집안을 뒤지고 난장판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어요. 아이 돌 잔치 할 때 여러 가지 중 하나를 골라잡게 합니다. 마이크 잡아서 아나운서 될래, 실 잡아서 오래 살래, 청진기 잡아서 의사되어 부자로 살래, 책 잡아서 박사나 교수가 되어 살래?

혹시 돌잔치에서 성경 책 두고 선택할 것을 기대하는 부모 봤습니까? 혹시 아이가 실수해서 손님이 가지고 온 성경을 잡는다면 부모는 깜짝 놀라서 ‘십자가 길로 가면 안 돼!’ 하면서 얼른 그 손에서 성경을 떼어놓을 거예요. 십자가 길로 가지 말라고 말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심, 이것은 바로 귀신의 정체입니다.

귀신을 새롭게 받을 필요가 없어요. 태어나면서 이미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이곳에서 끄집어내는 식으로 구원하지, ‘네가 알아서 빠져 나와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어떤 도독이 담을 넘고 들어와서 주인을 꽁꽁 묶고 난 뒤에 세간을 담 밖으로 옮기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는 집에 있는 냉장고처럼 가만히 있어야 돼요. 집 주인이 ‘내 냉장고 잘 있네.’ 하면서 한 번 쳐다보고. 우리는 죽기가 무서워 주인 앞에 벌벌 떨고 있고. 죽는 것이 무섭지요? 그러면 안 무서우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죽으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바보처럼 안 죽으려고 애를 쓰면서 죽음을 지연시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힘 있고, 돈 많은 자를 찾아가서 거기에 넙죽 절하고 기어들어갑니다. 우리 몸이 마귀를 기억해요. 우리 몸이 귀신을 기억하고 권력을 기억해요. 돌이 떡 되는 것을 기억하고, 기적적인 존재를 기억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미국의 맨하탄에 가면 15억 하는 고급 빌라가 있는데 그 빌라에 영화배우 송혜교가 살고 있답니다. 그걸 보고 ‘송혜교는 망했네.’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돈 벌어서 저런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지. 이것이 바로 귀신 친화적인 거예요. 우리에게 귀신은 가깝고 예수님은 멀어요. 24시간 귀신과 더불어 살고, 주님과는 교회 잠시 나오는 시간에만 생각하고. 이런 식입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귀신한테 양육 받고 귀신과 놀도록 만들어 놓고, 그 다음 주님이 할 일은 거기에다 홈을 파버려요. 우리에게 난도질을 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균열이 나겠지요. 그 균열 속에서 십자가 복음을 드러내게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매일 새로운 복음이 나와요.

그런데 이런 식이 아닌 지식으로 복음을 이해하면 3년 전의 은혜를 계속 쥐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나의 우상이 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사태와 사건을 일으켜서 ‘너 같은 죄인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수시로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지금도 매일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는 겁니다. 이런 말씀의 취지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고 하십니다. 오늘 해가져서 밤이 되었으면 오늘 염려는 끝내고 다리 뻗고 자면 됩니다. 내일이 되면 또 하루의 고민거리를 주십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돈 벌러 나가는데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됩니다. 이 때 다시 ‘이런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또 잠자리에 들고.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요. 하여간 그날 염려는 그날로 마감하면 됩니다. 이처럼 주님은 늘 우리 존재를 끊어서 사건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런 식으로 보지 않으면 옛날이야기처럼 되고 맙니다. 에피소드가 돼요.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예수님이 고생 많이 하셨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여러 성인 중 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을 과거에 한 번 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매일 적용을 시킵니다.

처음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는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주님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이렇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주님으로 창대하리라.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이 나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합력하여 선은 이루심을 깨닫게 됩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는’ 그 사랑을 다 잊어버리고, 마귀한테 교육 받아서 늘 내 것, 내 재산, 내 자식, 내 집안 잘 되기만 챙기다가 주님께 호되게 당하지요. 그러면 회개하고 또 평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면, ‘그날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라.’는 말씀이 응하게 되는 거예요. 잘 때는 죽었다고 생각해야 돼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하나님이 남의 동네에 왜 왔습니까?’ 라는 의미지요.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안히 쉬시고 우리가 드리는 제사와 정성만 받으시고 그에 대한 보상만 우리에게 내리시면 됩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은 왜 개거품을 물지 않는가? 분명히 요한복음 8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어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마귀 자식)에게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전부 다 마귀 손아귀에 있고 죄 아래 있는 겁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된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 죄 아래 있는 이것이 구원 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사는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가 아니고, 기도원에 모여 기도한다고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가 아니고, 우리가 죄 짓고 있을 때 구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구원에 대해서 제발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민한다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왔으니까 고민하게 되는 거죠. “주님이 왜 부르셨지? 세상 일이 왜 내 마음대로 안 되지?” 찾아왔으니까 고민하는 것이지, 고민한다고 구원해 주는 법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자리는 우리가 정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귀에 장악되어 있고, 마귀는 예수님이 장악하고 있어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3-23).” 하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렇게 나오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계속 하지요. “여호와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거룩한 백성의 본분입니다.”라는 식으로 마귀를 아비로 모시는 자들이 우리에게 훈육했고, 우리는 그 말에 전혀 흠 잡을 수 없는 진리라고 여겨 순응했고, 그래서 마귀와 한 통속이 되었는데, 이것에 주님은 균열을 일으켜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세리와 창기가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왔고, 이상하게 우리는 그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그냥 믿어진 거예요. 이것은 팔자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강의 서두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성전이라고 우기는 사도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했지요? 사도들은 미친 사람이에요. 우리도 같이 미쳤고.

27절을 봅시다.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왔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 위의 권세를 느꼈어요.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권세 위의 권세는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쪽이 태권도 3단이라면 주님은 태권도 5단이라야 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귀신을 안 섬기고 예수님을 섬기겠죠? 3단 보다는 5단이 더 높기 때문에.

이런 동질성을 십자가로 끊어버립니다. ‘교회 와서 부자 되었다. 따라서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이것은 마귀들의 속삭임입니다. 교회가 넓어진다고 복이 확장된 것이 아니라 큰 절이 되는 거예요. 당회장 목사는 큰 스님이 되고. 인간들이 바라는 것(돈 잘 벌고, 자녀 출세하고, 무병장수하고)을 힘으로 본다면, 주님의 힘은 이것과 질적으로 다른 힘인데, 주님의 힘은 세상 힘으로부터 희생당한 힘이고, 이것을 십자가로 보여주고, 그 권세 이전에 그들은 어떤 힘을 느낀 거예요. 뭔가 이질적인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들은 그 힘이 그냥 귀신 좇아내고, 병 고쳐주는 그런 힘의 연장선에서 봤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놀랐던 그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매일 우리가 주님을 무시하고 주님을 생각지 않는데도 주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찾아주시고 ‘너 같은 죄인도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을 통보해 주는 성령의 역사가 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7. 14. 08:5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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