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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01:56:51 조회 : 2291         
자기애와 성령 140523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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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40.24) 14-05-30 17:28 
광주 강의(2014. 5. 23) 3-1

철학에서는 유, 무를 다 다뤄요. 그런데 그동안 무는 종교에서 다뤘고, 신학이죠. 유는 철학에서 다뤘어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다 신자이면서 교회에 안 갑니다. 어릴 때 유아세례 받고, 결혼할 때도 성당에서 하고, 장례식 때 신부나 목사 불러서 하면서도 평소에는 교회를 잘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놀러 가야하기 때문에.

국민 소득이 3만 달러가 넘으면 돈 버는 일에 너무 기를 빼앗기기 때문에 근무하지 않는 토, 일요일은 휴식하거나 취미생활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계속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가서 잔소리 들을 기력이 없어요. 그래서 소득이 높아지면 점점 교회는 안 다니면서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거지요.

20세기 이전에는 무는 신이었습니다. 신이 나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신학이 담당을 하고, 만들어진 인간이 사회와 더불어 어떻게 화합을 이루며 살 것인가 하는 윤리, 도덕은 철학에서 담당하자고 했는데, 사람들이 신학 자체를 인정을 안 하니까 철학이 무(없음)가 무엇인가 하는 부분까지 담당하기 시작했어요.

철학이 무의 영역까지 자신만만하게 다루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는가 하면, 바로 과학에 있습니다. 오단 군이 현재 공부하는 것이 자연과학이잖아요. 예전의 자연과학은 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가 어떻게 이성을 사용해서 보다 신체가 행복하도록 병의 원인을 추적해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면서, 신이 부를 때까지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기여한다는 것이 자연과학이 담당한 부분이죠.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신학의 영역이고, 그 밖의 것만 과학의 영역이라고 스스로 자기 영역을 제한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 없고, 신학에도 관심이 없으니까 자연과학에서 특히 물리학, 현대 물리학에서 어디까지 손을 대는가 하면, 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힉스 메카니즘, 힉스에서 처음으로 중력이 나오고 질량이 나왔다. 이것을 거론한 이상, 과학이 이미 진리가 되었으니까 이 진리로 종교의 세계까지 관장하겠다고 나왔어요. 이렇게 되면 세상이 너무 상막하잖아요. 인간은 하나의 물질이고 원자, 분자, 세포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소위 의료 윤리 이런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과학은 돈 벌기 위한 과학이 되었고, 그로 인해 너무 상막해 져서 여기서 윤리, 도덕, 신학을 겸해서 인간다운 의료인을 양성하자는 주장이 나왔어요. 하지만 그들은 양보할 수 없어요. 오직 자연과학만이 진리라는 것을. 오늘 마가복음 1장 12절을 공부하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통일체를 이루는 관념은 ‘자기 사랑’입니다. 돌고 돌아서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사랑의 모델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면 타인에게서 찾습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서 남을 곁눈질해서 남이 가진 좋은 것을 전부 수입해서 더욱 사랑스런 자신을 만들기를 욕망하는 겁니다.

욕구, 요구, 욕망 이렇게 세분화하기도 하는데, 욕구는 생물적인 것. 즉 지렁이, 원숭이, 개 등이 가진 본능적인 것을 욕구라 하고, 요구는 자기의 바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겁니다. 언어로 표현하기에 요구는 인간에게만 있어요. 욕망은 내가 원하는 바와 내 욕구가 일치되지 않을 때 그 차이를 욕망이라고 합니다.

목이 마른데 시원한 것이 먹고 싶어서, 자기 아내에게 “여보, 시원한 것 없나?” “시원한 것, 뭐?” “냉수가 좋겠네.” 여기에서 시원한 것과 냉수의 차이. 냉수는 욕망이고 시원한 것은 요구가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은 못하는데 시원한 것을 냉수로 바꿀 때 욕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냉수를 가져와서 마셨는데 “에이, 안 시원하네.” “그러면 뭘 줄까?” “더 시원한 것 없나?” “더 시원한 것, 뭐?” 말로 표현이 안 돼요.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차이부분이 욕망입니다. 

그러면 욕구가 고정되어 있나요? 매일 달라지고 활성화 돼요. 그러니까 우리의 요구도 달라지겠지요? ‘욕구-요구=욕망’이라면 욕망도 늘 달라지겠지요. 그러니 요구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요구는 언어로 되어 있고, 언어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 우리보다 먼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사소통 체계가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남의 것이지요.

남의 것이란 말은, 각자 자기 사랑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니 내 욕구에 충족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날 사랑하지 않아?”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은 “네가 뭔데 내가 널 사랑해야 되는데?”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인간은 결국 자기사랑밖에 모르기에 희생이란 것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됩니다.

마귀가 희생하는 것 봤습니까? 마귀는 희생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마귀를 좋아하는 거예요. 생각하는 것이 똑같거든요.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최종적으로 나의 사랑을 더욱 확장시킨다면 우리는 희생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1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려면 자기사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자기사랑을 나르시즘이라고 합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지요.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는 이미 태어나기 전에 있던 언어체계에 의해서 내 자아는 계속 채워집니다. 따라서 나는 결국 타인들 중의 하나지요.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한 것을 그대로 수입해서 내가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언어입니다. 갓난아이가 “밥 주세요.”라고 하지 않아요. 조금 자란 아이가 그 전에 엄마가 “이제 우유 먹지 말고 밥을 먹어야 해.”라고 엄마로부터 강요받은 거예요. 그래서 밥 달라는 말을 하지요.

타인이 살았던 풍습과 도덕 이 모든 것이 강요되어 나에게 왔기에 내 안에는 나의 것은 일체 없고 전부 타인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나에게 타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하는데, 내가 남이에요.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할 나도 없으면서 계속 남의 것을 끌어 모아서 나라고 여기면서 사랑을 하는 운명에 처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1장 12절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면, 이게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우상이 돼요. 마가복음은 신약시대입니다. 신약에서 어떤 문장을 쓴다는 것은 구약 전체가 이 안에 대립된 구조로 앞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할 때는 그 앞에 무엇이 나열되어 있는가? 구약 전체가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내용이 뭔가?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습니까?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십계명의 1계명이 뭔가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자기애에 빠져있는데, 무엇이든 내 욕구에 맞도록 타인의 것을 수입합니다. 타인의 것 속에 하나님이 율법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얼씨구나 하나님이 법을 주셨네. 이 법을 나의 것으로 만들면 율법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소통이 되면서 절대 자아가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법이 나를 채우는 내용물이기에 내 안을 쪼개보면 하나님의 법이 가득하기 때문에 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부심을 가진 거예요. 지금도 중동 지역의 과격 테러집단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자기 안에 신의 계시가 있기에 자기가 신입니다. 내가 신이 된다는 것은 나의 최후 욕망이었어요. 매슬로우의 욕구설에 최고 단계의 욕구가 ‘자기구현의 욕구’입니다.

자기구현이란 말은, 내가 신인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때 존재의 우월감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구원파 교주 유병언은 스스로 신이라고 여기기에 사람(검찰)에게 잡히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신이기에 스스로 사람에게 잡혀갔는데 유병언은 잡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을 다니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우상숭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수박 쪼개듯이 쪼개보니까 그 안에 하나님의 율법이 소복이 담겨 있어요. 시시한 인간들의 요구보다 신이 직접 주신 율법이 가득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절대 신이 바로 이것으로 구현된다고 생각해서 율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극치였습니다.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저를 비난하면서 이런 말을 해요. “이근호 목사는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다 죄라고 한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가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면 겉에서 볼 수 없는 속의 것을 다 볼 수 있잖아요. 주님은 우리의 엑스레이 원판을 원하는 거예요. 즉 상한 심령이지요. 다윗이 그것을 알게 된 거예요. 저희들도 이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주가 원하시는 것은 번제, 속죄제가 아니고, 십일조도 아니고, 율법 지키는 것도 아니고 상한 심령을 원해요.

그럼 번제, 속죄제는 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엑스레이 사진을 찍는데 광선같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우리 몸에다 율법을 비추니까 새까만 죄가 드러난 거예요. 광선을 쫴야 사진이 나올 것 아닙니까.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드러난 그 인화지를 그대로 주께 드리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복음을 알면 인생이 이렇게 쉽습니다.

다윗은 ‘율법을 준 것은 나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기 위함이다.’고 보고, 같은 사람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의인이 되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지켰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그렇게 된 것은 자기의 지혜가 아니고 성신이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상한 심령이 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진작 원하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아울러 깨닫게 됩니다. 방사선에 쪼여서 시꺼먼 그림이 나왔습니까? 그걸 그대로 하늘나라 건강공단에 제출하시면 영생이라는 보험금을 타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했습니다. 왜? 그들을 우상을 숭배했어요. 우상숭배의 원인은 자기애 때문이죠. 무조건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하셨잖아요.

성경은 우상숭배냐, 아니냐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자기사랑에 빠졌어요. 자기애에 빠져 있으니까 율법을 받아도 그것으로 인해 우상숭배자인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인간에게 맡겨놓으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상숭배와 싸우는데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원수가 된 셈이잖아요. 그러면 해결책이 없지요?

그런데 1장 12절에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지요. 만약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우리를 닫으면 안 돼요. 오늘 아침 TV를 보니까 어떤 냉면집에 냉면 그릇을 얼음으로 만들어서 얼음그릇에 냉면을 담아주는 집이 나왔어요. 더워서 냉면을 먹으러 온 손님이 얼음그릇에 냉면을 담아서 먹으니까 얼마나 시원하겠어요.

따라서 우리그릇 자체가 우리만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안에 무엇이 담겨도 소용없어요. 결국 우리는 우상숭배자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김성수 목사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는 우리 자신이 우상숭배자란 사실을 지적하지 못했어요. 엑스레이를 찍어서 우리가 새까맣게 나와야 될 텐데 --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갑자기 얼굴이 천사처럼 밝아지고 뒷산의 아름다운 배경과 함께 웃는 모습을 사진 찍어 하나님께 보내려고 해요. 그런 짓은 유병언에게 하라고 하세요. 사진 찍어서 500만원 받고. 어떤 작품은 2,000만원 받고.

진짜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상한 심령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김성수 목사 설교 듣는 자들은 전부 천사로 변하고 말았어요. 원래 기대했던 자기사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성경공부가 추가되는 겁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짓밟을 것은 요구하기는 참 곤란해요. 그럴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기에.

본문에서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은 구원이 안 됩니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해 줘야 합니다. 안 되는데 1장 12절에 성령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성령이 예수님께만 찾아옵니까, 구원 받을 사람에게도 성령 세례를 준다고 되어 있습니까? 구원 받을 자에게 성령이 임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되지요? 예수 믿는 나를 내가 계속 유지함으로써 구원 받는 방식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다. 그러니 오신 예수님을 붙잡아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게 바로 성령 안 받은 사람의 주장입니다.

제가 30년 넘게 강의하면서 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여러분, 예수 믿으면 지옥갑니다.’라는 것입니다. 정말 속이 후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는 신이 났어요. 물 위를 걷고, 병을 고치고,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이제는 됐다! 이제는 살았다.’ 그런데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이것을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덕이나 볼 생각을 하지 내가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인간은 태어나자 말자 자기밖에 모른다. 그래서 외부의 것을 그냥 흡수해서 그것으로 자기 주체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보니까 흡수한 것 가운데 무엇이 있었습니까? ‘모세가 단독으로 하나님과 만나서 받았다는 율법이 있으니까 그것을 빨아들여서 자기의 내용을 채우면 이방 민족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에 다 저주 받아도 언약을 받은 우리는 구원 받는다.’

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과 오늘날 교인들의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편 51편에 성신이 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다윗. 이 다윗이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라는 것을 내세울 때, 비로소 율법의 기능이 나를 신으로 만들고, 나를 절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기능이 있는 거예요.

로마서 5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율법에 십일조가 있는데, 십일조를 하란 말은 십일조를 하면 할수록 범죄를 더 저지르는 거지요. 하여튼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서 죄 안 지으려고 아예 십일조를 안 해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면 범죄가 더 심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안식일 지켰다는 것이 타인의 언어체계니까 안식일 지킴이 내 속에 들어오면 나는 안식일 지킨 사람으로서 절대자가 되지요. 그게 바로 점점 상한 심령과 멀어지게 만들죠. 나를 더욱 교만하게 만들고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지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안식일 안 지킵니다. 교회도 안 나갑니다. 십일조도 안 합니다.” 이것을 자기 의로 자랑해요. 이러나저러나 인간은 자기사랑밖에는 몰라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해결책이 생기는가? 인간이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된다면, 율법 줘도 안 되고, 율법 없어도 안 되고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성령이 오면 되는가? 성령이 예수님께 오고, 그 다음에 누구한테 오고. 이런 것이 아니고, 성령은 예수님께 먼저 오시고, 예수님 승천 후에 그 때 성령이 성도에게 영원히 주어지지요. 이 때 성령 세례가 주어지는 겁니다.

성령이 오실 때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일단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구원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예수님을 거치는 번거로운 방법 말고 바로 오셔서 구원하시면 어떤가?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바로 오시면 구원이 안 돼요.

성령이 오시면 구원 됩니까? 구원 안 됩니다.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천국 간 사람은 어떻게 해서 갔습니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경유한 내용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원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이 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내용이 우리의 내용을 바꾸치게 해 줘야 돼요.

지금 우리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날 섬기는 것이 우상이고, 우리는 자기밖에 몰라요. 이것을 해결해야 돼요.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면 구원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오지 않고 바로 예수님이 오면 구원 됩니까? 구원이 안 돼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예수 믿는 것으로 구원 받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나는 여호와를 믿으니까 참 하나님을 믿는 거야.’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에요. 그러니까 구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은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구약에서 실험이 끝났어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구원 받았잖아요? 다윗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까지 대기상태에 있었습니다. 모세, 엘리아도 그렇고. 십자가 지고 난 뒤에 구원 받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자체에 구원이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컵이 저쪽에 있는데 내가 “컵 좀 가져다 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십자가를 가지고 올 수 있습니까? 못 가져와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는데, 이것 읽으면 구원 받습니까? 안 돼요.

그럼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서 그 말씀이 믿어져야 돼요.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믿어지나 성령 없이 그냥 믿는 것이나 믿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마찬가지가 아니에요. 성령이 와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십자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자인 것을 아울러 재발견하게 되지요.

내가 엑스레이 사진에서 온통 새까만 죄인으로 나타난 상태에서 깨끗함을 입은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내가 십자가를 믿는 그것으로 내 몸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설교 후에 독일에 있는 딸이 전화를 했어요. 사위와 함께 생중계로 설교를 듣거든요. 무슨 내용인지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날 설교 내용은, 네 식구가 사는데 아버지는 퇴근해서 스마트 폰으로 주식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엄마는 텔레비전 드라마 보고 있었고, 아들은 숙제를 하면서 청일전쟁이 먼저인지 러일전쟁이 먼저인지 아버지께 질문을 했고, 딸은 음악을 듣고 있어요. 각자 자기의 일을 하고 있어요. 전혀 종교적인 모습은 없어요. 복음적인 것도 없고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찾아와서 발자국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시비를 걸어왔을 때 각자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족이 하나가 되어 침입자와 대결구도를 이룰 때 이것이 사건입니다. 사건이 터지면 숙제도 중지되고, 드라마도 그만 보게 되고, 주식 상황 살피는 것, 음악 듣기 모두가 중단되지요. 이게 바로 사건입니다.

사건이 터지면 모두는 그 사건에 몰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는데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이 우리를 사건으로 몰아넣어요. 아래층 사람이 찾아와 다투다가 돌아갔을 때, 아내가 하는 말이 “에이 씨, 드라마가 끝나버렸네.” 그 사건이 터질 때 ‘드라마가 중요해.’라는 자기만의 가치는 깨져 버리지요.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은 그 안에 출애굽 사건이 담겨 있어요. 율법은 출애굽 사건을 반복합니다. 출애굽 사건이 뭐냐 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너희들을 주님의 능력이 개입해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출애굽기를 할 것인데, 미리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출애굽할 때 주의 이름이 개입해서 구원했잖아요. 이 말은,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힘을 꺾고 스스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살이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어요.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도 했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습니다. 사건화가 되어야 출애굽이 되지요.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것이 믿는 것인가? 주님이 개입한 사건에 의해서 하나님 믿는 것조차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건에 휘말려야 돼요. “이번 주일에는 꼭 교회 가야지.” 해서 가는 곳이 교회입니까? 교회는 가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교회를 지어놓고 교회에 간다는 것은,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일상의 스케줄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건이 아니에요. 사건은 아버지가 딸을 태우고 운전하고 가다가 다른 차와 부닥친 것이 사건입니다(오 목사님이 막내 딸(다인)을 태우고 가다가 사고로 딸의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함).

사건은 예상을 못합니다. 사건이 터질 때, 내가 스스로 날 지킨다는 것이 현실이 아님을 짧은 순간만큼은 알아야 해요. ‘내가 날 지킨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구나.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는 자체가 착각이구나.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닌데 왜 나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사랑밖에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도 내용물을 다 집어넣어서 그래요. ‘나는 이렇게 살거야.’ 하면서 좋은 것들로 가득 채웠어요. 채우니까 그 안의 내용물이 너무 아름답단 말이지요. ‘나는 교회 가서 훌륭한 목사님 설교 듣고 지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거예요.

이것은 상한 심령이 아니고 멋있는 심령입니다. 남이 모르는 복음을 알았으니까 자기는 대단한 존재라는 거지요. 이건 자기 우월감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사랑에 갇혀있는 꼴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평소에 예수 믿은 것이 다 헛것인 것이 드러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성령 받은 자입니다. ‘네가 무슨 수를 써도 구원 못 받는다.’는 말씀이 믿어질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용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면,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 마땅한 존재로 드러날 때,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는 이 사고방식이 얼마나 사단적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평생을 살아도 나는 우상숭배 외에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온 이유는 광야에서 시험 받기 위해서입니다. 누구한테 시험 받습니까? 마귀에게 시험을 받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애들아, 오래 기다렸지? 늦게 와서 미안하다. 구원해 줄게.” 이것이 아니고, 먼저 마귀에게 들러요. 왜? 우리가 마귀의 나라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갇혀서 산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자기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를 채우는 온갖 내용물이 전부 우상숭배를 위한 것뿐입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은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마귀와 만났던 예수님을 우리 속에 개입시키는 겁니다. 율법이 있던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율법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리고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바리새인이고, 예수님 욕했던 자가 우리 자신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령은 예수님을 앞장세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건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미는 겁니다.

밀게 되면 바리새인만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고, 자기만 사랑하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발하면서 성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주여, 나는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지요.

‘내가 이런 인간입니다.’가 아니고, ‘이런 모습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나’를 뒤에 붙이세요. ‘예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그런 자가 나입니다.’라고 성령께서 그렇게 지적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비난해도 용서받지만 성령을 비난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마태복음 12장에 나와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2014. 5. 30. 15:25 녹취 마침)
 서경수(IP:118.♡.140.244) 14-06-13 14:47 
광주 강의(2014. 5. 23) 3-2

마가복음은 신약이고, 신약이 있다는 것은 앞에 구약이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함께 했던 민족이 멸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멸망 후 성령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에서 창조했는가, 죄에서 창조했는가? 둘 중 어느 쪽이지요? 무에서 창조했다는 것은 구약에서 나오죠. 혼돈과 어둠 가운데서 창조했다.

그렇다면 무에서 창조한 것을 쥐고 있으면 이것은 신약 시대의 사람이 아니고 구약 시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면 신약 시대의 인간상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은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죄에서 창조한 것입니다. 인간 근원이 무가 아니고 죄가 인간 근원이 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율법이 더한 것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는 거예요. 죄를 더 지으란 말이 아니고, 죄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처음부터 죄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율법은 준 거예요.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만들었기에 존재한다고 여기지요. 대자연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것이 구약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대자연을 만들었으면 여기에서는 멸망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았으면 자식을 책임져야지 ‘이제 태어났으니까 나가 죽으라.’ 이럴 수는 없어요.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어 놓았으면 그 만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데 멸망했단 말이지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다른 민족은 몰라요.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내가 너를 만들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십계명을 주셨어요. 그런데 이 계명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지키면 복이 오고, 못 지키면 저주가 오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머물고 싶어요. 그런데 여기에 율법이 주어져서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니까 황당한 거예요. 이런 것을 인간이 요구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런 부담을 주십니까? 인간은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시간에 인간의 자기애를 말씀드렸지요. 인간은 누구나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일하고 하는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전혀 그런 말씀이 없어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인간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은 너무도 달라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흙이지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사람이라고 우리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람이라고 우겼던 자들의 언어체계 때문에 우리가 그들과 어울려 살다보니까 우리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애굽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빠져나올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빠져나오면 어디로 갑니까? 갈 곳이 없는데. 우리는 살아도 애굽에서 살고, 죽어도 애굽에서 죽어야 합니다. 애굽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것은 결국 돌발적인 사태며 사건이라고 했지요.

출애굽 사건 이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는데, 출애굽하듯 율법이 튕겨 나와야 돼요. 튕겨 나온다는 말은, 돌발적이고 예상 못할 일들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홍해를 건너왔던 사람이게 두 번 다시 홍해 건너는 일은 없습니다. 알랭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이란 책에 보면, “사건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이것을 반복하게 되면 역사가 되는데 그 역사는 인간들이 자기 위주로 헤아렸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역사는 없다. 주체도 없다. 그러면 있는 것은 뭐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공집합의 연속이기에 있는 것은 없다.

지금 우리가 뭘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폼을 내기 위해서 지키는 척하는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말씀(율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말씀화 되는 겁니다. 율법이 왔을 때 우리는 마중 나가서 지키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율법의 취지가 아니고, 율법은 우리에게 침입한 것이고 덮쳐버린 거예요. 덮쳐버리면 우리가 지키든 안 지키든 간에 율법이 겨냥했던 그 방향으로 우리에게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일본 영화를 좋아하셨는데, 제가 함께 보면서 사무라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영화를 보면서 겁을 먹었어요. 사무라이들이 칼을 들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여요. 율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사람을 단칸에 베어버립니다. 이것은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투입되면서 율법 본래의 목적을 스스로 달성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들이닥치면 말씀은 우리와 의논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말씀 본래의 목적을 말씀스스로 이루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것은 구약에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서 나옵니다. 구약은 율법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모든 말씀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은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지키면 복, 안 지키면 저주를 받지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지키면 복을 받으니까 이것은 천국이고, 못 지키면 저주를 받으니까 이것은 지옥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주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그 시나리오에 따라 이미 만들어져야 되지요.

우리가 말씀을 초청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말씀이 쳐들어 온 거예요. 우리가 율법을 불렀습니까? 그냥 모세를 불러 율법을 주셨어요. 사람들은 오해했어요. “이 말씀 지키면 복 받겠다.” 율법은 지킨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그러니까 율법 지켜서 복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제사장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흠 없는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장은 나중에 늙어 죽지요. 죽는 이유가 뭡니까? 죄 값으로. 제사장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율법대로 제사를 드린 그 죄로 죽는 거예요. 율법이 온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함이라. 다른 말로 하면, ‘처음부터 너는 죄 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율법과 인간(이스라엘)의 만남인데, 신약에서는 율법 안에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숨겨진 마지막 비밀인데,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신약 성경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십자가 사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엄마는 드라마 보고, 아빠는 주식 상황 살피고, 아들은 숙제하고, 딸은 음악 듣고 있는 굉장히 단란해 보이는 가정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들이 이런 일을 하면서 자신이 죄인인 줄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모르지요. 이런 가정을 주께서 구원하시려면 십자가가 덮쳐야 되지요. 덮치게 되면 가정 전체는 사건화 되지요.

사건화 되면서 성령이 임하면 이 식구들은 주식에 관심 갖는 것도, 드라마 보는 것도, 숙제 하는 것도, 음악 듣는 것도 죄가 되고,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예상 못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네 식구는 십자가를 되풀이하는 가정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덮치는 것은,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층간 소음 때문에 찾아왔을 때 그들은 자기 일 다 버리고 침입자와 싸우면서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고 할 때 이것이 바로 자기 의고, 우상 숭배입니다. 어저께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TV에서 ‘부부 10계명’ 이런 것을 말했는데, 이런 것은 이미 종교단체에서 다 주장한 것들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온 몰몬교 선교사들을 보면, 젊은 사람이 복장부터 행동 모두가 반듯하고 모범적이에요. 이들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몰몬경만 건드리면 우상 숭배자로 돌변해 버리지요.

가족이 부부싸움하고 부모 자녀가 다투잖아요. 싸움하다가도 아래층 사람이 찾아와 언성을 높이면 갑자기 온 가족이 똘똘 뭉쳐서 내 가정을 지키는 거예요. 다윗이 이것을 알게 된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해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지요. 선지자가 “이런 범죄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했을 때, “그런 자는 당장에 죽여야지.”라고 했어요. 왜? 이스라엘은 자기의 나라니까요. 그 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했지요? “그게 바로 당신이다.”

이 순간 다윗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진작 이야기해주지. 나의 근원, 나의 뿌리를 평생 살면서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간음하면 압니까, 살인하면 압니까? 사건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다윗이 하는 모든 행동들을 다 모아 바구니에 담으니까 그것이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며, 더 놀라운 것은 그 사건이 율법 완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나를 이용해서 율법스스로 완성해 가는 겁니다. 말씀이 스스로 말씀 되게 우리를 활용한다는 말입니다. 지키긴 뭘 지켜요. 우리는 이미 주님 앞에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 활용당하는 그런 입장인데.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질문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무에서 유로 만들어졌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지요.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세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게 하기 위해 각자의 주장들을 하게 하십니다. 이 시작이 마가복음입니다.

정리합시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은 구약의 수준입니다. 신약에 들어오면 그리스도 체제이기에 우리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죄에서부터 우리가 만들어졌어요. 죄에서부터 용서 받기 위해 만들어졌으면 구원 받고, 죄에서부터 저주받기 위해 만들어졌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당황하지 말고 마가복음을 천천히 보면서 십자가로 가면 끝입니다. 깨끗하게 모든 것이 끝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진짜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를 믿게 되면 말씀을 보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보는 순간 엑스레이 찍듯이 광선이 나와서 우리의 가슴을 찍어버리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중심의 사건만 좋아하고 그것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신약시대 성도는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음을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것, 이것이 성령의 삶입니다. ‘그 때 운전 제대로 해야 했는데’ 생각하다가, ‘아하, 내가 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구나. 차에 탄 딸이 내 식구가 아니라 주님의 식구이지. 내가 또 우상숭배자가 되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로부터 시작했지요? 그냥 ‘그분’이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언어로 규정하면 언어는 이미 타인의 욕망, 나의 과거 사용하던 욕망이 오면 입만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의 이름은 함부로 안 불렀잖아요.

사도 바울이 주님을 이야기할 때 “내가 그리스도의 종 된 자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를 이야기할 때 주님을 거론하고 주님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그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내 믿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 주의 이름을 자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 구원을 위해 사용할 이름이 아니고 주의 종으로 쓰여지기 위해서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13절을 봅시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40일은 어디를 의식하는가 하면, 민수기 13장에서 정탐군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모세에게 보고하기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커서 올라갈 수 없다’고 했고, 이 불신에 대해 하나님은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 동안 유리하게 될 것(민14:34)’을 말씀하셨습니다.

40일은 결국 인간이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믿지, 왜 못 믿었어?”라고 하는데, 그래서 성경 해석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지 못할 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못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못 믿을 일만 발생시킵니다.

‘범사에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 다짐하는 순간부터 감사할 수 없는 일만 터져요. 감사한 일이 생겨서 감사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감사할 일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감사하라고 했고, 우리를 감사케 만드는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감사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사세요. 살다가 감사가 나오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제발 자책하지 마세요. 자기 처벌을 하는 것은 자기애입니다. 이것을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했어요. 우리말로 하면 ‘흥분’입니다. 반성하는데서 오는 흥분, 희열. 사람이 그냥 즐거운 것을 즐기면 한계에 도달돼요. 그래서 그 때는 반대로 나가요. 자기를 때림으로써 나오는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 기쁨을 위해서 자살을 합니다. 최후의 기쁨을 인간은 남겨뒀어요. 죽음으로 누리게 되는 기쁨은 최후까지 숨겨두었다가, 더 이상 기쁜 것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자살을 통해 자기애의 끝을 장식합니다. “자살했기에 지옥 같습니까?”라고 묻는 분이 있는데, 자살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병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는데, 병리적인 것은 두뇌에 문제가 생겨서 마치 장애자가 발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 없는 것처럼 되는 것이고, 정신적인 것은 방금 이야기한 마지막 남은 카드, 나는 끝까지 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승리했다고 인정하고 싶은 거지요.

승리했다고 하는데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누구와 싸우지요? 자기 자신과 싸워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되고 싶은 것과 거기에 미흡했던 나와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따져보세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누가 원한 거예요? 타인의 욕망들이에요. 인간은 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고 살아요.

인간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요. 남이 좋다고 인정하는 그 무엇이 발생해야 비로소 나도 욕망이 생겨요. 이 때 인생의 목표가 생깁니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하면서 의욕을 가지고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인간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주님이 십자가 지든 말든, 성령이 오든 말든 관심 없어요. 우리는 평생 우상숭배하면서 살게 될 겁니다.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죄란 사실을 미리 알려줘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에 부합되는 인간을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는 집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 버릇이 나만 생각하기에 이런 인간은 천국에 못 갑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이 천국 간 적이 없습니다. 천국은 집단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살면서 집단을 생각하게 만드는 조치를 성령을 통해서 취하게 됩니다.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를 부인한 그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향유의 대상이 되지요.

자기를 부인했을 때 그 부인하는 능력이 나에게서 나온 능력으로 자기를 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항아리에 있는 물을 떠서 다시 항아리에 부으면 항아리 안에는 늘 그 물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다시 집어넣고, ‘나는 죄인이다’고 하면서 다시 집어넣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릇을 깨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못 깹니다. 깨면 깬 자기를 또 챙겨요. 이것이 라캉의 ‘상징계’라는 겁니다. 좋은 것은 다 자기의 것으로 삼아요. 만약에 천국을 갔다고 하면, 천국 간 내 모습을 미리 당겨서 가져오면 이것은 착각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사건에 의해 진짜 와장창 깨어져야 되는데, ‘깨졌다 치고, 당황하지 말고, 그래서 나는 구원 받았다. 끝.’ 이런 식으로 나와요.

살다보면 다 깨어지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곱게 깨어지기를 원해요. 살살 깨지고, 안 아프게 깨지고, 욕 먹지 않고 깨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의 다른 버전일 뿐입니다. 성령이 오면, 그냥 살아도 ‘이것이 죄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투자하고 헌신한다는 것이 천국의 삶이 아니고 지옥의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거지라고 주님을 원망했겠어요? 원망 안 했어요. 왜냐? 지금 천국 갈 훈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 가는데 원망을 왜 합니까?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내가 거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지가 된 거예요. 내가 강도가 된 것은 강도가 되어야 하기에 강도가 된 것입니다. 창기가 천국 간다고 했지요. 이장우 감독의 [별들의 고향]에 창기가 나와요. 신성일 만나서 같이 살려고 하다가 헤어지는데, 얼마나 슬퍼요? 그런데 그 창기는 원망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에게 사랑받는 여자라면 이것으로 족해요.”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내가 창녀라 할지라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내가 묻혀버리지요. 사랑이 덮치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심판이 없고 모든 것을 용납하셨기에 주님께 그냥 감사할 뿐이지요.

이런 남편, 이런 아내를 만난 것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작업이었습니다. 이 자체가 말씀이에요.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한 거예요. 창기와 세리로.

예수님은 40일을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어요.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13).” 결국 구약은 구약대로 있으면서, 아파트에 네 식구가 있는데 네 식구라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고, 거기에서 사건이 벌어져야 되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 때 그들은 천국 가는 훈련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천국 가면 우리는 무조건 죄인이에요. 주 안에서 의인 되는 겁니다. 단독적인 나는 죄인이고, 주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의인이니까 절대로 나를 따로 내세우면 그것은 천국에 부합하지 않아요. 나는 죄인이지만 주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해야 천국에 합당한 자입니다. 거지 나사로도 그렇게 했었고. 

그런데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자기와 자기 가족만 생각해요. 자기중심이지요. 천국 가는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1장 13-14절에서 예수님 홀로 성령 받고 홀로 출발하는 겁니다.

14절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이 예수는 혼자 튀어나온 분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을 만났지요. 마귀를 만나서 홀로 사단의 시험에서 이기시고 나오신 분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외칩니다. 그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까? 당연히 못 알아듣지요. 제자들도 못 알아듣지요.

말씀을 못 알아들으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죠. 그런데 그 기적은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에요. 기적은 인간들이 얻어 챙기는 것이고 표적인 그리스도 단일 체제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세상에 사단이든 지옥이든 이단이든 전부 예수님의 단일 체제를 위해 만들어졌어요.

사고로 죽은 자들은 주님 위해서 죽어야 하고, 성도는 그것에 대해서도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훈련입니다.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이런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태어난 거예요.

14절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전파되고 하늘에서 구름이 와서 예수님을 데려가고 끝났습니까? 지금 교회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그러니까 회개하고 복음 믿자.”

그러면 구원 받습니까? 이것은 우상숭배자가 될 뿐이에요. 복음 믿었다는 사람, 회개했다는 그 자체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게 못합니다. 그러면 십자가 지신 후 성령 주셔서 구원하면 될 일을 왜 미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는가? 이것은 요한복음 2장에 나와 있지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런 모든 말씀을 통해서 인간들의 현 상태가 믿으려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배후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말씀하고 난 뒤에 기적을 줬을 때, 말씀을 이해 못했다는 증거가 표적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와 일치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선지서를 둘로 나눠 설명했지요. 엘리야, 엘리사는 기적을 보여주는 선지자에요. 그런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문서 선지자에요. 차이점이 뭔가 하면, 기적 선지자는 기적을 보여주는 거예요.

기적을 보여주는 것은 아직도 멸망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할 때마다 멸망을 연장시켜 주는 때이고, 문서 선지자 때에는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미 문서로 확정되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멸망 후에 다시 문서를 봐라. 내가 말한 것이 틀림없이 이루어졌잖아. 이처럼 문서로 확정되었다는 말은 멸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멸망 이전의 역사는 뭔가? 왜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폭로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종말 시대입니다. 종말 시대는 이미 성경으로 확정되었어요. 누가 예수 안 믿는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이미 택한 자만 받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서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종은 주인의 일에 주제넘게 관여하면 안 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다만 지켜보시고 간섭하십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이고 그 사람이 예수님의 종입니다. 세상을 그리스도 유일 체제로 보세요. 그러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회개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흘러가면서 나도 마땅히 흘러가야 되는데 어떻게 예수님 십자가가 믿어지는지 주님께 더욱 더 감사할 뿐이지요.

그런데 15절에 “때가 찼고”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 이 때다.’라는 것입니다. 왜 이 때입니까? 재판할 때 판사가 등장하면 재판이 시작된 거예요. 임시적으로 재판을 순간순간 열어버린 겁니다. 세리와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은 “저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하니까, 재판장이 “너는 지옥!” 이렇게 판결하고, 세리가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는데, 재판장이 “너는 천국!”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판결이 났어요.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했어요. 세상은 그리스도 유일 체제입니다. 교회가 이것도 모르고 자꾸 뭔가를 해야 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하라’고 했기에 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은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덮쳐 와서 우리로 상한 심령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방사선이라고 보면 됩니다. 방사선이 비춰오면 우리는 온통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16절에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님 혼자 하시면 되는데 왜 제자들을 뽑습니까? 일손이 모자랐습니까? 아닙니다. 집단 구원 때문에. 12제자는 12지파 곧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애초부터 하늘나라는 개인 구원이 아니고 단체 구원입니다. 왜? 개인을 없애기 위해서. 왜 개인을 없앱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신이 되었어요. 둘이 있어도 상대를 이용할 뿐이지 상대에게 양보할 인간은 없어요. 부부가 100년을 살아도 한 몸 안 됩니다.

17절에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부가 누구의 직업입니까? 베드로 직업이죠. 주님은 베드로의 직업인 어부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고기대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고 했어요. 이 말은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베드로는 어부 직업을 유지하되 어부 아닌 주님이 베드로의 자리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주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함께 일하겠다는 거예요. 세상 끝날까지. 마태복음 28장 24절에. 함께 있다고 했으니까 주님이 살아 있지요. 주님이 살아 있다는 말은 주님 식으로 해야 이게 진짜 주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주님 식으로 살지 못했기에 늘 죽어지내는 거예요.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주님과 함께 있기에 늘 죽어가면서 늘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주님 식으로 살아있어야 산 것이지 그냥 광주나 대구에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늙어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 살아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식으로 사는 방식을 주께서 알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사는 방식이 옳은 줄 여겼습니다. 이제는 내 방식 청산하고 주님 방식으로 올라 탈 그날까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6. 13. 09:3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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