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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5 10:30:02 조회 : 3291         
광주 4월 23일 에스겔 5장 비현실에 양보없는 현실 이름 : 관리자(IP:220.81.41.203)
100423 겔5장 비현실에 양보없는 현실
 관리자(IP:220.♡.41.203) 10-04-2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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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IP:220.♡.41.203) 10-05-03 14:18 
광주100423a에스겔5장a

광주 강의(2010. 4. 23) 6-1

에스겔 5장 1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삼분지 일은 온역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지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지 일은 내가 사방에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심판하시려면 한꺼번에 다 하시지 왜 삼분지 일, 삼분지 일, 삼분지 일 나눠서 심판하시는가? 이 의문점을 가지고 13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삼분지 일씩 나눠서 심판하시는 것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분노하심이 원인이 되지요. 노하심이 원인이고, 어떤 일을 했더니만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마음이 시원하려면 삼분지 일, 삼분지 일, 삼분지 일 나눠서 심판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분이 풀려서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우리의 주체와 하나님의 주체를 비교시켜요. “내가 이렇게 심판해서 내 마음이 시원한데 너도 시원하냐?” 라고 묻는 식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삼분지 일씩 나눠서 심판해서 내 마음이 시원한데 너도 시원하냐?” 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묻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가지고 있는 세상관을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관으로 옮기겠는가?’ 하는 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온역, 기근, 전쟁 이런 것들을 통해서 혹독하게 다뤄줌으로 말미암아 ‘아하,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 현실은 완전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내 현실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현실이기 때문에 완벽한 거예요.

그러면 노하시고 분을 풀기 위해 심판을 내릴 때, 이 현실은 어떻습니까? 완전합니까, 불완전합니까? 역시 이 현실도 완전하지요. 하지만 당하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이것은 내가 예상 못한 현실입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면 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라고 짜증내고 원망을 하겠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 주어진 현실을 주님의 현실로 보지 않고 나의 현실로 본 거예요. 나의 현실로 봤기 때문에, 나의 현실에서는 ‘내가 벌 받아야 해.’ 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 이 현실은 나를 사랑해 줘야 하고, 나를 위해야 하고, 나로 하여금 사는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하고 --- 이런 것은 은근히 기대했는데 이 기대대로 잘 안 되면, 기도도하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너는 나(하나님)의 현실에 동조하면 그만이지 네가 따로 너 위주의 현실을 챙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을 성경은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5장 1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털은 누구의 털입니까? 인자라 불린 에스겔 털이지요. 에스겔의 머리털과 수염입니다. 그러면 인자라는 에스겔의 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삼등분을 해서 처리하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에스겔과 하나님 사이를 한 번 봅시다.

에스겔의 털이 삼분지 일씩 잘리는 현실을 에스겔 자신의 현실이라고 봅니까, 하나님의 현실이 본인이게 임했다고 봅니까? 하나님의 현실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보지요. 그렇다면 에스겔은 이 현실에 대해서 불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만이 있을 수 없어요. 이렇게 쓰임 받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그렇다면 유다 나라의 입장에서 봅시다. 삼분지 일씩 온역과 기근, 전쟁으로 멸망 받아야 할 이것을 이해를 할까요, 못할까요? ‘저양반이 수염을 왜 칼로 잘라 날리고 야단이지?’ 이해가 안 되지요.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은 심판을 받아야 될 그 사람들이 보는 현실은 그저 자기를 위한 현실을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현실을 수용하는 방법은 누가 모델이 되는가 하면, 에스겔처럼 이렇게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과 에스겔 사이에 정성적인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인자’라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자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현실은 하나님 위주의 현실인데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저 사람이 십자가에 왜 달리지?”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어떤 스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 갔잖아요. 그게 심각한 거예요. 무소유를 주장하면서 자기를 부인했는데 따라갈 모델이 없는 거예요. 인자가 없고, 인자를 안 믿는 거예요. 그냥 스스로 도를 닦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아버지도 있다.” 라는 것을 이루기 위한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에스겔을 앞장세운다는 이 현실 자체가 현재 인간들이 아무리 꿈을 꿔도 절대로 하나님은 이 현실을 우리 자신들에게 빼앗긴 일이 없습니다. 이게 어제 수요일 설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직접 상대하셔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환경이 주어지는데, 그 환경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생각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기 위한 환경을 만듭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육이 육을 조작해서 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환경, 우겨 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가운데서도 이 현실마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현실이라고 눈치 채는 그 사람이 영적 사람입니다. 이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았을 때 얼마나 힘들게 살았습니까. 힘들게 살았지만 예수님은 그 현실을 아버지께서 뜻을 이루기 위한 현실로 봤잖아요.

그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령인데, 그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육에 속한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되게 했던 그 관계성이, 그 현실이 그대로 우리에게 덮치게 되고 우리는 이것마저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현실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아직 삼분지 일을 설명 안했고, 왜 이런 벌을 내려야 하나님 마음이 시원한지 그것은 이야기 안 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면 될 텐데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을 왜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내 주변에 펼치진 환경(나와 멀리 떨어진 것 말고)은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우깁니다. 이것이 벗겨져야 됩니다. 이것마저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현실에 무엇이 있느냐? 이제부터 무섭지요? 그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주어진 현실을 무엇을 가지고 해석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해석이 가능해요. ‘아, 이 경우는 이 말씀에 해당되는구나.’ 갑자기 아이가 죽었다면, 욥기에 나오는 ‘주신 자도 하나님이고 거두어 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바로 이것이구나. 말씀대로 된 현실이 내 현실이라고 우길까 싶어서 찾아와서 ‘이 현실이 네 현실이야, 내(하나님) 현실이야?’ 라고 물으시는구나. 이 현실에서 ‘이것은 주님의 현실입니다.’ 라고 고백하면 그것이 바로 욥의 인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서 나온 수염과 털을 하나님께서 잘라내서 무슨 용도로 사용했지요? 아직도 이 현실을 하나님의 현실로 보지 않고 내 현실로 보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는 분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스겔의 털을 잘라서 세상을 심판하고 저주하는 용도로 쓰지요.

그러면 성도에게는 어떤 요소가 있습니까? 성도를 모델 삼아서, ‘너희들이 성도처럼 살지 아니하면 지옥 간다.’는 모델로 삼아 성도를 그 현장에 세우는 겁니다. 에스겔의 수염이 칼로 잘리고 불에 태워지는데, 이것처럼 우리 곁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고, 만약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장 당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것은 에스겔은 자신의 수염과 털을 본인이 잘라서 칼로 치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진 운명은(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외부인들이 핍박을 해요. 즉 성도를 못살게 굴면 성도는 탄식하게 되고, 그것이 세상에 대한 저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계시록에 ‘성도의 기도가 향로에 담겨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향로를 부으면 이 세상이 심판 받는 형국이 펼쳐집니다.

요한계시록 8장을 보겠습니다. 6-7절입니다.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여기에도 삼분의 일씩 나눠지지요?

8-9절에 보면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여기서도 삼분의 일이 나눠지지요.

10-11절에 보면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절에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침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결국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방금 보았던 에스겔 5장에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할 때는 그냥 우리에게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에스겔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외부에 심판을 하죠. 에스겔의 털을 통해서 하잖아요.

그러면 이 시대에 에스겔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는 분이 누구냔 말이지요. 그 당시 에스겔 때문에 누가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온역을 받았습니까? 에스겔을 둘러 싼 유다 나라가 심판 받았지요. 유다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이 에스겔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현실로 보다가 혼나잖아요.

그처럼 지금은 어린양 예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인자되시는 예수님 중심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 모든 것이 전부, 옛날 에스겔을 통해서 심판하듯이 지금 에스겔 같은 인자가 이미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삼분의 일씩 똑같이 징벌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유 없는 징벌은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미워하십니까? 에스겔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져야 마음이 시원해요. 마음이 시원한 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거예요. 이 전체를 두 자로 말하면 오늘날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심판하는 현실에 대해서 아주 기쁘게 영접합시다. 그리고 나를 위한 현실은 아예 없다고 여기세요. 애가 아프고,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등등의 어떤 현실도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건드려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고 있는데, 화를 내고 그 화대로 심판해야 하나님 마음이 시원하기 때문에, 그 시원함에 우리가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이 때리면 우리 애는 어떻게 되지?’ 이렇게 걱정하시면 이것은 주님의 현실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내 현실을 챙기는 것이 되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수염 내 놓으라고 할 때 안 내놓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현실을 믿으면 얼마든지 우리 몸을 하나의 도구로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현실이 아니고 주님의 현실이라면 이 몸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님의 현실의 일부로 포함이 되어 있어요.

주님이 쓰시려고 만든 몸인데 쓰실 때 마음껏 쓰시도록 내 놓아야 될 것 아닙니까. 내 놓는데 내 놓는 목적이 뭔가 하면, 이 세상이 우리가 있어야 징벌을 받아요. 징벌이 있어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이 세상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모든 현실은 말씀대로 짜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내용은 뭔가? 하나님께서 화가 나시면 진노를 퍼부어서 마음을 시원케 하는 그 목적으로 현실이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것 때문에 에스겔을 통해서 이런 진노를 내리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여호수아 23장 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취우치지 말라.” 그 다음 12-13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하나님의 관심사가 뭡니까? 자기 백성의 행복입니까? 아니죠. 6절에 나오지요.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여기에 있어요. 하나님의 법대로 되는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은 꿈도 꾸지 맙시다. 예초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현실을 남겨두지를 않았어요. 우리 현실은 단 1%도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방 민족은 모세의 율법이 없어요. 바꿔 말하면 언약이 없지요. 이스라엘 땅 주변의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니까 그들이 보는 현실은 내 생존을 위한 현실이고 이 현실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가거든 절대로 이방 민족과 혼인하지 말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 왜? 이스라엘의 현실은 하나님의 언약밖에 없는데 이방인과 친하게 지내면 자기를 위한 현실이 침투가 되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가시가 되게 하고, 올무가 되게 하여 멸절시킵니다.

하나님은 융통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자기의 법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처음 듣는 소리라고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못 아셨습니다. 오해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일단 내 중심의 현실을 먼저 챙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언제 가슴에 밀려오는가 하면, 모든 한국교회가 다 사기였다는 것을 아는 순간. 지금까지 사기당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속이 시원하고 마음이 굉장히 편해집니다. 건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저곳은 아닐까? 이렇게 찾아다니다가 아예 몽땅 다 엉터리라고 깨닫고 성경을 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다시 보게 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무더운 여름에 목이 말랐는데 냉수에 얼음하나 넣어서 마시듯이 속이 시원해요.

그동안 엉터리로 배웠다는 것을 아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펑 뚫리는 느낌이 들면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구나!’ 하고 정리가 돼요.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밖에 모르는 분입니다. 우리가 울든지 웃든지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약속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어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다 뚫려요.

제가 20여 년 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처음 시도한 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단어들 중에서 출애굽기까지 이어지는 개념만 따로 골라서 뽑아내고, 그 다음 창세기에도 있고 출애굽기에도 있고 레위기에도 있는 개념을 뽑고, 이렇게 계속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개념이 뭔가를 골라내는 거예요.

골라낸 이유는, 그 골라낸 개념 가지고 다시 창세기를 보게 되면, 창세기에 열 가지 개념이 나온다면 그 중 계시록까지 계속 이어지는 개념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개념을 위해 나머지 아홉 가지 개념은 보조 역할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만약 출애굽기에 아홉 가지 개념이 있다면 아홉 가지 다 아는 것이 아니고 그중 어떤 개념이 나중 신약까지 이어진다면 그 이어지는 개념을 가지고 다시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하나 빼고 나머지 여덟 개는 하나를 받들어주는 보조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면 창세기 따로, 출애굽기 따로, 레위기 따로가 아니라 전체를 하나로 관통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이 만들어지지요.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복음의 회복]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죄 씻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인간은 죄를 지어야 했던 겁니다. 죄를 지어야 생명나무가 돋보이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는지 이유가 드러납니다.

선악과를 심어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생명나무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 생명나무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끝까지 나오는 개념이잖아요. 출애굽기에는 바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 이것이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 그렇다면 디모데전.후서에서 교회에 집사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지요.

로마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경건치 않은 우리를 의롭다 한 것.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목제물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린도전서에도 나오는 십자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그 십자가.

그렇다면 내가 설교자가 되어서 이 핵심을 전하고, 듣는 분들이 만약 그 말씀에 동의하게 되면 그가 오늘 밤 죽어도 주님과 더불어 영생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진리를 모르고는 강단에 설 수 없는데, 이렇게 해서 진리를 뽑아내면 강단에 설 수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간증하는 것 같네.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총신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기생들이 뚝뚝 떨어지고, 선후배들이 떨어지고, 교회 식구들도 다 떨어져요. 로켓을 발사하면 처음에는 큰 뭉치가 같이 올라가는데 나중에는 옆에 붙은 것들이 하나하나 떨어지고 최후에는 캡슐만 올라가지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이 그 사람 안에 내주하게 되면, 그 사람 자체가 복음화 되어 복음과 더불어 붕 떠서 외롭게 하늘나라로 올라가야 됩니다.

복음 아는 사람은 남들 보기에는 외로워보여도 본인한테는 ‘됐어!(희열) 바로 이것이구나!’ 이런 탄성이 나오지요. 얼마나 복음이 좋았으면 외로워도 울지 않지요. 모두가 떨어져 나가도 그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보상이 될 정도로 풍성함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 그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주저하게 됩니다. ‘알긴 알겠는데 이것으로 목회 성공하겠나? 목회 성공 못하면 진리 아닐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성경에서 점차 떠나서 교회에 사람 모으는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천국은 좁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이 좁은 문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보면 외롭고 슬프고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십자가를 신학교에서 배웠어요. 그러나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아요. 그냥 십자가를 이용해서 목회해서 천국 밖에서 예배당 크게 지으려 해요.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면 희한한 세상이에요. 내가 십자가 밖에서 그토록 걱정했던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자식을 잘 키워야 합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교회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 이런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나의 현실은 일체 없고 주님의 현실에 나는 하나의 포지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요.

말씀의 구조 안에서 나는 한 분야를 맡은 거예요. 어떤 사람은 눈이고, 어떤 사람은 코, 어떤 사람을 발. 즉 지체인데 지체가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지체 되게 하신 머리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되지요. 머리되시는 주님이 일하시니까 지체는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 안에 있는 자는 항상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고, 주 밖에 있는 자들은 “내가 뭘 할까요?” 라며 자기의 의미를 찾지요. ‘내가 뭘 하면 성경이 원하는 현실을 내가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성경의 현실이 아니고 인간의 현실이지요.

십자가 안에서는 내 현실이 없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지요. 지금까지 주께서 쓰셨고, 앞으로도 쓰실 것이고 나는 계속 그분의 도구로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다 맡기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에스겔처럼 이 현실 속에 그냥 맡깁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이 현실은 우리가 어떻게 다룰 현실이 아니고 맡겨졌음을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께서 인도하신 대로 이렇게 흘러왔다.” 이것만 계속 말하면 됩니다.

여호수아 23장 15절을 봅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불길한 일이 우리에게 임할 때, 나의 현실이 있는 사람한테는 불길한 일이 될 것이고, 나의 현실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것도 전혀 불길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요. 자기 현실이 없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오’가 없기 때문에 불길하지 않지요.

‘불길하다’는 말은 이미 나의 것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이 나의 것은 하나님도 손대면 안 돼.’ 이런 마음. 나의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면 불길하다고 여깁니다. 이처럼 나의 나 됨을 유지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 놔! 네 몸은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야.” 라고 빼앗지요.

16절에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

이제 에스겔에 나오는 진노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진노가 나오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한 것을 간추리면, 하나님의 현실을 나의 현실로 우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 다시 한 번 여호수아 23장 16절을 기억해서 정신 차리게 하지요. ‘아하,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우겼기에 주님께서 소식을 전해 왔구나!’ 라고 회개하면서 주님의 현실을 주님의 현실로 내 놓을 수 있어야 되지요.

하나의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자기의 현실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내 놔.” “안 됩니다. 제 겁니다.” “내 놓아야 살아.” “아닙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살겠습니다.”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하지요. 그러면 주님이 손 놓으면 반발력에 의해 우리는 꽝 넘어지지요. 그래서 다 깨지고. 그러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으켜 줄게.’ 하시면서 주님이 찾아오시지요.

주님은 자기의 법밖에 몰라요. 그런데 아직 그 법에 대해서는 말씀 안 드렸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가?

여호수아 24장 14절을 봅시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멸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는 뭡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이 안 됐기 때문에 진노하셨고, 어떤 상태가 되면 하나님 마음이 시원한가 하면, 여호와만 섬기라. 신약으로 하면 주님만 섬기라.

변화산에서 구름 사이로 하늘의 음성이 들렸지요. “너희는 저의 말만 들어라.” 하나님의 뜻은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쉬워요. “너희 죄를 용서할 내 아들 보낸다. 너희는 그만 섬겨라. 그러면 산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평생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절대 우리 힘으로는 안 되고 말씀대로 우리의 현실을 주님의 현실로 빼앗아갈 때 빼앗기는 그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느끼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내 현실이라고 우겼는데 몽땅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덕수궁 돌담만 돌다가, 덕수궁(천국)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는 세리 아닌 자도 세리가 되어야 하고, 창기 아닌 자도 창기가 되어야 하고, 강도 아닌 자도 강도가 되어야 합니다. 강도가 되었다는 말은 뭘 빼앗겼단 말입니까? 모든 자기 의를, 자기가 내세울 만한 모든 장기와 주특기를 몽땅 다 빼앗긴 채, 여기서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되어서 아무것도 자기 것 없이 진짜 주님만 섬기는, 이것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다.” 라고 했지요.

10분 쉽시다.

(2010. 4. 28. 10. 26 녹취 마침)
 관리자(IP:220.♡.41.203) 10-05-03 14:19 
광주100423b에스겔5장b

광주 강의(2010. 4. 23) 6-2

둘째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9-20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시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이것이 아마 결정적인 것 같아요.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그렇다면 이 복이 계속 쭉 이어지는 복이 아니고 이 복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복 내리시는 분이 화도 내릴 수 있고 멸할 수도 있는 분이 복을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그러면 뭐가 복입니까? 복음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복이 누구한테서 왔으며, 그 오신 분에 대해서, 오신 분의 현실로 우리가 들어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항상 이 복을 내 소유로 여깁니다. ‘나 복 받았다.’ 이렇게 까불다가는 화가 임하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복이 되는 겁니다.

이 복 안에 화도 들어있고 멸망도 들어있고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복과 화, 멸망을 통해서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수아는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결단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 그래서 너희는 복 받았지만 화도 받고 멸망 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방금 했던 이 이야기를 확실하게 심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여호수아 24장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라고 했지요.

이정도 준비 단계를 거쳐야 에스겔이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복을 줘도 얼마든지 화와 멸망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 받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뭐가 잘못되었어요? 그 사람은 곧 화 받을 사람이고 멸망당할 사람이에요. 정말 복 받은 사람은 ‘복 받았다. 그 복을 누가 주셨는가? 그분만 섬기자.’ 이렇게 되지요.

복은 복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았으면 ‘누가 주셨습니까?’ 라고 묻고, 그 복 주신 분을 섬기는 거지요.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일단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복 주신 분이 누구인지 물어야 하고, 다음은 복을 주신 분이 언제든지 우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성소를 만들어서 거기에 안치해서 증거물로 삼은 겁니다.

이제 에스겔 5장 1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여기에서 ‘성소를 더럽혔다’고 합니다. 복을 주시는 분이 화도 주시고 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로 성소가 있는데, 성소를 더럽혔기에 복 주신 분이 화와 멸망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성소는 인간이 더럽힌다고 해서 여호와께서 그 성소를 포기하는 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라도 복, 화, 멸망 이 과정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제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보면 혼란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한 번 믿음은 영원한 믿음이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진짜 하나님이 복 주시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화도 주시고 멸하게 하시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영원한 구원이 아니고, 영생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성령 받고도 나중에 지옥 가는 경우가 생기지 않습니까? 목사님 답변해 주세요.’

하여튼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중요한 핵심은 빼놓고 자기가 원하는 내용만 골라 챙기기 때문에 그런 요해가 생깁니다. 항상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에서 구원이 주어지면 이 구원은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선악과 따먹은 다음 날 십자가가 오면 되잖아요. 왜 구약의 긴긴 시간이 있습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주체(나)를 위한 십자가는 십자가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 받아 놓고 하는 말이 ‘이제는 걱정 없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구원 받는다.’ 이러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십자가는 결국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나는 복 받았다.’고 하는 것처럼 ‘나는 이제 구원 받았다.’로 끝나지, 누구를 위한 구원인지 관심도 없어요. 구원을 주신 분(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될 사람이 구원 받은 본인을 섬기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식입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육에서 영으로 옮기는 것이 인간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까 그림 다시 한 번 그리겠습니다. 덕수궁 돌담. 덕수궁 안이 영이라면, 육에서 영으로 들어갔으면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물을 것도 없어요.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고백만 나온단 말이지요.

그런데 안으로 안 들어가고 바깥에 있으니까 만날 구경만 하는 거예요. 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이 다 보인다면, 안에 있는 바울이나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밖에서 흉내를 내는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주의를 해서 성경을 알기는 얼마나 많이 아는지,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아요. 그냥 바깥에서 개혁주의 주장하면서 먹고 사는 거예요. 이것은 목사뿐 아니라 장로,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육인데, 이들이 섬기는 것은 이방 신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이방 신들이 있는데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했잖아요. 요즘 이런 말하면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친다’는 소리 나와요. “이근호 목사 이상해. 주님만 섬기라는 말은 맞는데, 그것은 반만 이야기한 것이다. 주님을 섬기면 우리한테 이런 복이 온다는 것도 이야기해야지, 왜 복 온다는 소리는 안 하고 주님만 섬기라고 하는가?” 

하나님 이용해서 복 받으려고 하다가 멸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기 주체가 펄펄 살아있고, 자기 현실만 고수했으면 복에 환장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교회 오실 때는 ‘주여, 제가 어떤 인간이기에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까?’ 이런 입장에서 교회에 와야 합니다.” 라고. 아마 이런 이야기를 100번도 더 했지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회개하면 복 받습니까?” 만날 자기 주체를 더 키우고, 자기가 자기 현실을 만들어서 멋있고 품위 있는 현실을 소유하려 하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빙자해서 자기 자신을 섬기는 모양새입니다. 이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주의할 것은, 그들이 그 땅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지옥 갔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이 땅을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비록 땅을 잃어버렸지만 다니엘처럼 진짜 여호와가 누구냐를 알게 된 사람은 땅 잃어버리고 쫓겨나면서도 구원 받았습니다. 구약은 하나의 모형이니까 지옥 가는 것과 연관시키면 안 돼요.

여호수아는 한 군데 더 보고 에스겔로 넘어가겠습니다. 여호수아 22장 19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라는 말씀이 있지요. 단을 쌓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제단에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는데, 복을 받아도 우상을 섬기고 패역하면 화내고 멸망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기죠.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라고 했지요.

단을 쌓게 되면 단 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안에 언약과 말씀이 있지요. 그러면 앞으로 단을 중심으로 한다는 말은 인간이 여기 있으면 단에서 언약과 말씀이 흘러나와서 이 언약과 말씀대로 땅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만 섬긴다’는 말은 ‘모든 것이 주님의 약속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잉크를 쏟으면 잉크가 어떻게 됩니까? 주인 좋으라고, 청소하기 힘들 것을 생각해서 잉크가 가만히 있습니까? 아니죠. 잉크가 퍼지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퍼집니다. 지금 에스겔의 위치는 뭐냐 하면, 잉크병이 깨지듯이 성소가 깨어지면 그동안 담겨 있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뒤쫓아 가겠지요. 장차 예수님 때문에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은 뜻이 뭐냐 하면, 하늘, 땅, 바다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현실이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겁니다.

계시록에서 일곱 나팔을 불었다는 말은 나머지 삼분의 이는 어떻게 됩니다.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 세 차례에 의해서 세상이 심판 받잖아요. 그러면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이라는 것은, 결국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주님의 성전이 깨어질 때 이미 확정되었어요. 이 각본대로 되는 거예요.

잉크병이 깨지면서 여기에서 복을 받은 자가 화를 당하고 멸망 받지요.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삼분의 일 아까 봤지요. 삼분의 일이 누구를 따라 갑니까? 멸망당해야 될 유다 백성을 따라 가죠. 유다 백성은 지금 어디에 가 있죠? 이방나라 전 세계에 퍼지잖아요. 그렇게 퍼지면 누가 따로 옵니까? 주님이 따라오지요.

그렇다면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유대인으로 그들은 남은 역사를 이방인들에게 보여줘야 됩니다. 하나님의 전략이 멋지지 않습니까? 자기 백성 저금통 안에 두었다가 저금통을 탁 깨니까 동전이 우루루 흩어지고 굴러가서 침대 밑으로 들어가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안 나와 이놈아!” 하고 침대 밑으로 가서 동전을 꺼내면서 그 유대인 곁에 있는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은 참 지독하구나!” 라고 알지요.

‘유대인 = 멸망 받아야 될 자들.’ 이게 기본 청사진 또는 밑그림입니다. 에스겔의 밑그림은 인자의 털이 잘리는 것을 통해서 복 준 자도 화를 당하고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에스겔에서 성전이 깨어지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 그들이 멸망 받잖아요. 그러면 왜 성전 깨지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멸망 받습니까?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 즉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깨어졌다는 것은 잉크병이 깨진 거예요. 성전이 깨지면서 성전 안에 있던 말씀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거예요. 저금통이 깨지면 동전이 흘러나와서 사방으로 흩어지지요. 이 원칙이 뭐냐? 에스겔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유대 백성을 멸망시키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인자지요. 에스겔 자리에 누구를 대입시킵니까?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대입시키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유대인이 있던 곳이 이방인의 세계죠. 옛날에는 유대인을 갉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관여한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갉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관여한 모든 세계를 주께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고.

그 다음 두 번째는, 심판이 전제될 때만 구원이 성립 됩니다. “왜 저는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까?”를 아는 사람은 이미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심판 받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면 이방인들은 알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면 이방인인 우리는 당연히 심판 받겠구나.’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유대인을 심판하시면서 그것을 통해서 진짜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이방인이 있어요. 이런 이방인을 통해서 ‘우리가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구원 받는구나!’ 라는 그 본래의 말씀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하도록 하고 이제 다른 말씀을 좀 하겠습니다.

공간 전체는 하나입니까, 아닙니까? 미국에 있으나 한국에 있어나 우리는 한 지구 공간에 있지요. 그렇다면 시간은 전부 하나입니까, 아닙니까? 이게 어려워요. 과거와 우리는 딴 동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흐르는 강물’이라고 해요. 강둑에서 보면 강물이 흘러가잖아요. 그처럼 현재의 물은 과거로 흘러가고 미래의 물이 현재로 오고 이렇게 되잖아요.

만약 우리 자신이 강에 뗏목을 타고 들어갔다고 합시다. 강둑에서 보면 이것이 다 보이지요. 이런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네모난 식빵이 있습니다. 이것을 칼로 자릅니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런 면이 있어요.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61년 5월 16일, 5.16혁명.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

우리가 이쪽에서 보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 덩어리가 되겠지요. 만약 햇볕을 쪼이는 기계가 있어서 빵 한 조각을 뽑아낸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뽑아낸 단면들을 다 모으면 전체의 시간이 되겠지요. 하나하나 뽑아내면 하나하나가 기억나겠지요. ‘아, 이건 이순신 장군. 이건 5.16 혁명.’

그러면 우리 자신의 면은 누가 봅니까? 이것을 내가 들여다보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흐르는 강물의 뗏목을 내가 타고 있다면 그것을 보는 나는 어디 있습니까? 강둑에 있습니까? 뗏목 타고 강가에 있습니까? 강가에 있지요. 그러면 이것이 뭐냐 하면, 누가 강둑에 서서 강가에 흐르는 나를 볼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본다 한들 그런 것을 본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봐요? 내가 둘이 되어서 하나는 뗏목을 타고 있고, 또 하나는 뗏목을 타고 있는 나를 보고 있고.

빵이 흘러가는 강이 아니고 하나의 굳어진 하나의 전체 시간이 되는 거예요. 어느 인간도 시간 밖을 나올 수가 없고 모든 인간들은(시간이 이렇다고 우기는 그 인간도) 시간의 단면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까 공간적으로는 하나가 맞지요. 미국에 있으나 한국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의 공간입니다. 문제는 시간적으로도 그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을 이루는데 있어서 말씀이 A라는 사람에게 적용할 때 B는 그냥 팔짱끼고 구경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 세계에서는 허용이 안 돼요.

만약 제가 광주에서 강의할 때 이곳에서 몇 백억 광년의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에 어떤 아저씨가 있다면 그 아저씨가 기침을 하게 되면 여기 있는 나도 기침을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물리학에서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 모든 것이 공간뿐만 아니고 시공간적으로 어느 한쪽이 살아가는데서 모든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 + 시간’이 아니라 합쳐서 ‘시공간’입니다. 이 시공간 세계에서는 시간, 공간이 전부다 흐르는 강물이 아니고 얼어붙은 얼음. 미래까지 전부 얼어붙은 얼음이 되면 어느 시점도 서로서로 한 통속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걸 누가 증명했는가?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내가 오기 전에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나를 보냈다.”는 겁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이 사실은 나보다 먼저 계셔서 “요한아, 내 앞서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례요한은 독자적인 자기만의 세계는 아예 없고, 주님께서 이미 예상한 현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보다 6개월 앞서서 세상에서 활동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뿐만 아니고 구약에 있는 아브라함이나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45장 7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전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라고 했는데, 이것이 요셉의 겸손입니까, 새로운 현실을 본 겁니까? 이것이 사실이고 현실이죠. 요셉은 이런 현실을 봤는데 우리는 왜 이런 현실을 못 봅니까?

요셉의 형들은 이런 현실을 못 봐요. 그래서 요셉만 붙드는 거예요. 요셉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못보고. “요셉아, 제발 살려다오. 그때는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 이러고 있어요. 요셉은 자신이 더 미안해해요. “형님들, 이러지 마세요. 하나님이 당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면 ‘나는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복을 주셨으면 이 복이 어디서 왔는가를 봐야 돼요. 어디서 왔는가를 보게 되면 그분은 복을 주실 뿐만 아니고 화도 주시고 멸망케도 하실 분이란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망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믿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상실함으로써 “나는 죄인 중에 괴수며, 내가 알았던 하나님은 엉터리였고 진짜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했다.” 이런 말을 바울이 해요.

바울이 예전에는 몰랐어요.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알게 되었어요. “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를 안다고요. 모든 것이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고 이미 냉동실에 굳어 있는 얼음 덩어리. 그 안에서 공간이 하나인 것처럼 시간도 결국은 하나가 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한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된 시간관입니다. 그 시공이 덕수궁(천국) 안에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안에 안 들어온 사람은 이 세계를 몰라요. 만날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이런 소리만 하는데, 그 복 받아봐야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니까 그 받은 복 때문에 저주 받지요. 

덕수궁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사실은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못 들어오도록 막고 있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줘놓고는 못 들어오도록 막아요. 막는 것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막으시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인자, 에스겔은 뭘 관여했습니까? 유대인을 끝가지 잡아서 유대인을 다 멸망시키는 일에 관여했다면, 이 에스겔의 자리가 인자의 자리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 아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과정을 통해서 에스겔 예언대로 세상을 삼분의 일씩 나눠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치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속이 시원하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제가 강의에서 안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가 나오고 용서가 나오는가? 그 이야기는 아직 안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오늘 본문대로 이스라엘을 추적해서 끝까지 멸망시키는 진노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지금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원과 자비와 용서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자리, 멸망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를 위한 현실만 현실로 봐요. “하나님, 저 교회 왔습니다. 복 주세요.” 이렇게 하면서 오잖아요. 복 달라는 말은 ‘내가 왔으니까 나에게 복 달라’는 것입니다. 주체가 나입니다.

내 자체가 스스로에게 저주와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 같은 인간은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어떤 증거물이 먼저 주어져야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주님을 버렸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옛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버리고 포기했습니다. 그게 우리한테는 무척 다행스럽지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저주했기 때문에 우리끼리 복 많다 적다가 성립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이미 이방인들은 자체가 언약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성소가 없어요. 성소가 없다는 말은 이미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 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죄지요. 이미 저주 받기로 작정된 인간들이기 때문에 아예 없고, 이스라엘 같은 경우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지만 멸망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성소의 자리, 땅의 자리가 이스라엘 때문에 장소가 비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에스겔 6장 4절을 보면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육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게 하신 이유가,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추방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뭘 보존하겠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깨끗하게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이렇게 쫓아내면 이 땅은 비어있는 땅이 되겠지요. 여기에 인자가 오게 되면, 인자는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함이라.”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왔다고 해놓고는, 정작 믿음이 있는 자는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나라의 본 자손은 쫓겨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는 온단 말이지요. 올 때 인자되시는 분이 어떤 언약을 맺는가 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의 마음속에 율법을 심어 넣어요. 성령을 통해서.

이렇게 해서 그 마음에 뭔가 꽂힌 사람은 주도권이 껍데기(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안에 들어 있는 분에 의해 주도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모든 현실은 껍데기의 나를 위함이 아니고 안에 계신 분을 위하여 모든 것이 성취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에게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옴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은 졸지에 의인이 됩니다. 그 사람의 행함이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믿음) 때문에 의인이 돼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려고 생각 안 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 때문에 된 것이지 아브라함 본인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는 것도 누구 뜻입니까? 아브라함은 애 없이 그냥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아기를 준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질질 끌려가는 거죠.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면 모든 현실이 겉에 있는 나는 내 현실이라고 우기고, 속에 계신 주님은 ‘너의 현실이 아니고 내 현실(예수님께서 우리를 쓰시는 현실)이다’라고 하고, 이 투쟁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벌어집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1)우상을 추방하고 2)여호와만 섬기죠. 그런데 우상을 누가 섬겼습니까? 이스라엘이 섬겼죠. 언약을 버렸기에 우상을 섬겼죠. 그러면 이방인인 우리들은 우상 섬기는 자였습니까, 여호와 섬기는 자였습니까? 이스라엘도 우상 섬기는데 우리 같은 이방인이야 뻔하지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을 누가 만들었어요. 이방인들의 종교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날 때부터 이방인이죠. 우상 섬기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나만 섬기는 거예요. 이것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뭘 분명히 해야 된다? 나는 날 때부터 나만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돼요. 이걸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올 때 ‘주여, 제가 어떤 죄목 때문에 죽어야 마땅한 죄인입니까?’를 싱글벙글 웃으면서 들어보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 이래서 우리는 우리만 섬기는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작업을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이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이 벌어진 사람은 주님만 섬기게 되지요. 주님이 아니면 나에게 그러한 차이점을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 힘으로 주님을 섬기면 이것은 누구의 주님입니까? 주님의 주님이 아니고 내 좋아라고 하는 내 현실의 주님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까 말한 덕수궁(천국) 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돌담만 평생을 서성이면서 ‘나는 목사네, 나는 장로네’ 하면서 빙빙 돌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오면 “주여,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창세전부터 모든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주님만 믿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구약으로 말하면 ‘오직 주님만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게 성소요 성전입니다. 주의 말씀이 집결되어 있는 곳, 거기서 성취를 보는 곳.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저주와 심판을 확대시킵니다. 우리는 나만 생각하고 나만 섬기는데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강제로 어디에 집어넣는가? ‘너는 심판 받아야 마땅하고 너는 저주 받아야 마땅해.’ 라는 자리에 넣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 같은 인간을 왜 구원 하십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지요.

이것은 낯선 현실입니다. 내가 생각한 현실을 주께서 주시지 않고 나로 하여금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고 깨우치는 그런 현실 속에 왜 저를 집어넣었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네가 바로 남은 자다.’라고 하시지요.

하박국 3장 17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이 말씀과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저주 받는다는 말씀을 비교해 보세요. 왜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까? 신명기로 하면 저주 받아서 열매가 없지요. 그러니까 하박국 3장의 이 말씀은 뭐냐? 우리는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저주 속에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8).” 이것이 바로 복과 저주와 진노를 다 거쳐서,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한 그 자리에 우리 이방인들을 초대해서 ‘바로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혹시 먹다 남은 부스러기 없습니까?(눅7:28)’ 라고 하는 이런 사람이 구원 받는 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항상 심판과 저주로 인도하지만 말씀이 없는 곳에서는 “여러분, 성공해야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해야 되고, 양떼가 많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계속 멸망당할 수밖에 없도록 끌고 갑니다.

복 받으려고 오면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복 받은 것에 머물면 큰 일 납니다. “누구십니까? 나 같은 자에게 복을 주시다니” 라고 그분을 믿어야 됩니다. 주 여호와를 믿어야지 복 받은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그런 일이 있었지요.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어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하게 한 뒤에, 풍랑이 문제가 아니고 “누구십니까?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분이” 이런 식으로 “누구십니까?” 라고 말하는 순간 잠시 누구를 잊었어요? 나의 현실을 잊지요.

에스겔 7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발하여 네 행위를 국문하고 너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끝났다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보면 비슷한 말씀이 나와요. 독수리가 날아다니면서 큰 소리로 하는 말이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에스겔 7장 4절을 봅시다.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기 끝부분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했지요. 여호와는 자기 현실밖에 몰라요. 자기가 만든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착각해서 한 모퉁이를 떼서 가까이 있는 이것은 나의 현실이라고 우기다가 혼나는 거예요. 이처럼 나의 현실로 우기다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놀라운 은총이 우리에게 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살아온 현실이 우리 현실이 아닌데 내 현실이라고 우기면서 살았습니다. 내 것과 주님의 것을 구분하며 흘러가는 강물을 쳐다보듯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시공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자로, 갇힌 자로, 배치되어 있는 자로, 주님의 일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4. 30. 11:15 녹취 :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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