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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6 13:42:28 조회 : 2989         
광주 6월 25일 에스겔 6장 선지자의 일 - 해석선포 아닌 심판선포(미래완료확정)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625 겔6장 선지자의 일 - 부수기 (미래완료확정)
 관리자(IP:124.♡.87.52) 10-06-26 13:42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광주/광주100625a에스겔6장a.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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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광주/광주100625b에스겔6장b.pdf
 관리자(IP:220.♡.41.203) 10-06-30 17:01 
광주100625a에스겔6장a

광주 강의(2010. 6. 25) 8-1

에스겔 6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에스겔이 선지자라는 것은 아시죠? 보통 사람과 선지자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선지자가 머리가 명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입수해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남보다 먼저 알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그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외치는 소리가 변동이 가능할까요? 변동이 안 되지요. 그러면 선지자가 자신이 전하는 그 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선지자가 이 세상 사람들 때문에 주저하거나 낙망하거나 이러지를 않겠지요? 주저하거나 낙망한다는 말은 ‘내가 전하는 대로 되어야 할 건데. 혹시 그대로 안 되면 내가 조롱거리가 될 텐데.’ 이런 걱정은 안 하겠지요. 왜냐하면 자신이 지어낸 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에 “선지자를 본받자.”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고, 선지자가 전하는 변동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는 같이 참여하면 될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에 참여하면 된다. 그러면 선지자의 구조를 알아야 되는데, 무대가 있고 여기에 선지자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뒤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잡아당겨서 뭔가를 시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선지자는 차두리고 뒤에는 차범근이 있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잡아당기는 분이 없어요. 왜? 자기 인생 자기 몸뚱이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나 진짜 선지자는 외치면서 뒤(자기를 당겨서 말씀하시는 그분)를 돌아보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선지자를 놓아주면 그냥 좋다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붙잡고(차두리에게 차범근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자꾸 계시를 주니까, 남들은 “너 미쳤어? 왜 그런 엉뚱한 소리 해!” 라고 비웃지만 선지자 본인은 알잖아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는 것을 알지요.

선지자는 내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이렇게 전할 때 사람들은 선지자만 보면 됩니까? 만약 A, B, C가 있다면 그 중 A라는 사람이 선지자 배후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까지 알아챈다면 이 사람은 또 하나의 그 시대에 남은 7,000명이 되겠지요. 엘리야 시대의 남은 7,000명이 된단 말입니다.

제가 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 방식 외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다른 방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말만 듣고 그 말을 인간이 해석하는 방식은 신학교에서 하는 짓이고, ‘이 사람 말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같이 볼 수 있을 때, 선지자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그런 안목을 갖는데, 이것은 주님의 손이 그 사람을 같이 묶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사로잡힌 자가 되지 아니하면 선지자는 될 수 없을뿐더러 성도도 아닙니다.
 
주님의 계시를 모르는 사람을 ‘이 세상사람’이라고 하고, 주님의 택함 받은 사람을 ‘저 세상 사람’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 세상 사람과 저 세상 사람이 섞이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자꾸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 땅에 속한 사람이고, 선지자나 사도처럼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인데, 이 땅에서는 이들이 같이 섞여서 살게 됩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선지자나 사도처럼 주께서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새로운 현실을 아는 사람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과 선지서가 이 그림 하나로 다 설명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론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그림을 확대해 보겠습니다. 여기 선지자가 입을 벌려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들을 때 “저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야. 저 사람 배후에 하나님이 계셔.”라고 느끼는 사람(성도)과 그것을 못 느끼는 B라는 사람(불신자)과의 충돌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상당히 고생합니다. 이 반대하는 사람이 동네 목사면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어요.

왜 하나님께서 원수를 저 멀리 두지 않고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두느냐 하면, 혈육은 떼고 싶어도 안 떨어집니다. 호적에서 지워도 될 문제가 아니고, 갈라서자고 해도 해결되지 않아요. 인간의 힘으로는 떼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뭘 보는가 하면, 선지자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는 자체가 내 지혜로 안 것인가, 아니면 진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아는가 하는 것을 성령과 혈육을 대비시켜요. 그렇게 해놓고 이 자체를 성경책에 기록해 놓은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식 중에 이스마엘이 있지요. 또 한 자식 이삭이 있어요. 보세요. 이게 대결 구도잖아요. 이삭의 아들 에서가 있고 야곱이 있어요. 역시 대결 구도지요. 혈육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정(情)’입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인 경우에는 자식을 낳게 되면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아 붓습니다. 자식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만약 A라는 사람이 성령을 받았고 B라는 자식은 성령을 안 받았어요. 그러면 이것은 안 떨어집니다. 왜? 혈육은 떨어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하나님의 손이 “빨리 와! 세상 대충 살고 빨리 와!” 하고 잡아당기면 이 당기는 손길이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면, 떨어질 수 없다고 여긴 혈육 사이를 자르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잘린 혈육은 의아해 하지요. “우리아버지 미쳤나?”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당사자 A 성도도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냉철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계시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성경 전체가 해석이 돼요.

출애굽 할 때 장소는 애굽으로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에 보쌈 당해서 나왔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죽지 아니하면 애굽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혈육의 관점으로 보면 내 자식도 살아 있고, 나도 살아 있어서 산 사람끼리 평생 붙들고 사랑하면서 살려는 생각이 철석같은데 주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면 혈육 사이를 끊어버리면 졸지에 A라는 사람은 “하나님, 저를 죽여주셔야 제가 살 수 있습니다.” 라는 출애굽 고백을 하게 돼요.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안 믿는 아내와 이혼하고 기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하지 말고 그냥 사시고, 평소대로 그냥 직장에 다니세요.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직장에 다니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한다? 그 인간은 산 인간으로 보지 않고 어린양에 의해서 죽여버리는 거예요.

어린양 자체가 세상에서 볼 때 피가 나오겠지요. 그러면 어린양은 산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죽은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사자는 칼을 들고 집집마다 장자를 죽이려고 다닌단 말이지요.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산 자가 등장하면 다 죽어요.

SBS 아침 드라마에 [당돌한 아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나를 살지도 못하게 하고 죽지도 못하게 하면 나는 어쩌란 말이야?” 라고.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주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왔을 때는 살아있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산채로 있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죽어야 되는데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자살한다고 구원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죽는 방법이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방법으로 죽어야 됩니다. 어린양의 피를 발아야 돼요.

온 몸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서 “나는 산 자 아닙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함께 죽었습니다.” 라고 그 안에 있어야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회에서 제가 논문 발표 할 때 바로 옆에 앉아있던 교수가 뭐라고 평가를 했는가 하면, “당신처럼 그렇게 주장을 하면 구약에서의 땅이 연속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되는데, 다니엘이 본토로 안 돌아오면 땅의 약속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어요.

제 답변은 듣지도 않았는데, 혼자 이야기했어요. 구약의 땅 문제가 신약에 오면서 구약은 애굽이라는 기업의 개념을 확장시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보면서도 참 어려워요. 그 땅 그대로를 사용하면 될 텐데, 흙이 있는 땅을 개념을 바꿔버려요. 의미를 확장해서 애굽이란 의미가 예전에 있었던 나라 애굽이 아니고, 이 애굽을 세상 전부로 확대를 시켜요. 온 천지를 애굽으로 만들었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그리고 십자가란 것도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이 죽은 그 십자가 하나로 말하면 얼마나 해석이 쉽겠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가 고난당하는 장소가 전부 십자가가 됩니다. 십자가의 다수성, 또는 반복성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고난 받는 곳이 전부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예루살렘 갈보리 언덕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광주 이 땅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가 되게 하신다니까요.

우리가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 자체가 그렇게 확장해서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확장시킨 해석을 따라가야 합니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서론을 이야기해야 돼요.

선지서에서 옛날 개념들이 어떻게 확장되어(엿가락 늘어지듯이 늘어져서) 그 때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어떤 확장된 새로운 개념으로 나왔는가를 지금 설명하는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 분명히 어린양의 피로 나왔다고 하니까, 그 이후 유월절 절기에 사람들이 뭘 생각하겠습니까? ‘어린양의 피 때문에 애굽에서 나왔으니까 그러면 양 잡아서 제사 지내면 되겠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제사 지내면 구원 받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선지자(모세)가 외친 것을 우리가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모세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기에 인간끼리는 언어가 소통되니까 당신이 말한 것을 문법적으로 잘 맥락을 파악해서 수용하게 되면 모세가 간 천국에 나도 갈 수 있다.’ 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문법적, 역사적 해석은 틀린 것입니다. 모세가 말을 할 때는 뒤에(내면에) 있는 것이 붙들어 줘서 한 거예요. 그러면 듣는 사람들도 모세처럼 모세가 느낀 것을 같이 받아줄 때 모세의 개념을 문자적이 아니고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성경 해석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성경을 볼 때 문자로 보니까 그 문자가 너희를 죽인다.’고 했어요. 그처럼 모세를 문자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을 다 죽이는 말씀입니다. 영으로 들으면 모세의 말씀은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희는 죽은 자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말을 들을 때는 듣는 사람들은 현재 다 살아있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나는 이 말씀을 듣는다.’ 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모세의 말을 듣고 뭘 느끼는가 하면 ‘아하, 나는 율법을 지켜도 죽은 자고, 안 지켜도 죽은 자구나.’를 깨닫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지만.

그러면 이 A라는 사람 뒤에 뭐가 있다? 모세와 동일하게 ‘이미 너는 죽은 자야.’ 라는 어린양의 능력이 함께 임한 사람입니다. 에스겔을 해석할 때도 똑같이 이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이렇게 긴 서론을 한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다.’ 좀 더 나가면 ‘바로 여기가 지옥이다.’

간음한 여인을 주님은 못 본 척하지 않고 불러내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어요. 왜 그런 절차를 밟습니까? ‘진작 너는 지옥 가야할 여인이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사실은 여인만이 아니지요. 전부 지옥에 있고 ‘예수님 외에는 다 죽은 자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알려주는데 ‘진작 죽은 자다.’라는 것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내는 그 힘을 가진 분에 의해서 용서해 줄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지옥에 있는 자가 지옥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무엇이 비정상적인 일인가 하면, 지옥에 있는 자가 하나님께 용서 받는 이 사실이 횡재를 한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는데, 여기에서 자유라는 개념은, 우리는 그냥 지옥에서 살다가 지옥 가면 돼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런 대화 자체가 전부 어디에서 나온 대화냐? 다 예수님께서 살려주기 위한 대화거든요.

그러면 모세가 말한 것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주기 위함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를 해서 ‘나 살았어요.’라고 나오니까, 그 말이 와 닿습니까, 안 와 닿습니까?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나는 살았어요. 내가 말씀 지킬게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살려줄게.’ 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는 지금 죽어 있어. 내가 살려주지 않으면 너는 희망 없어.’ 라는 의미지요. 그래서 ‘살려줄게’라는 말로 들으면, 그 말은 ‘아하, 나 같은 것은 진작 죽은 자인데 살려 주시는 구나.’ 여기고, 율법을 보면서 ‘죄 아닌 것이 없네.’ 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정죄함이 없다는 자유를 선포하는 그것이 새롭게, 새롭게 이어지는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항상 출애굽 할 때는 어떻게 나온다고 했습니까? 그냥 애굽 땅에서 벗어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에 보쌈을 당하기 때문에, 이 안에 있는 우리는 진작 죽은 자가 되고 바깥의 피가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려고 애썼는데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죽은 자로써 구원 받은 거예요.

어제 대전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교회는 인간이 못 세운다.’ 그 이유가 뭡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이 피는 내 피가 아니고 하나님의 피로 교회가 되기 때문에 부흥사 불러서 헌금 거두고 그 돈으로 건물 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이 못 세워요. 못 세우기 때문에 가짜 교회냐, 진짜 교회냐를 분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피를 가지고 교회를 흔들어 봐요. 그 때 ‘우리가 돈 내서 세운 교회를 왜 흔드느냐?’고 나오면 그것은 무너질 가짜 교회고, ‘주의 피로 세운 교회가 무너질 리가 있습니까? 우리는 주의 피만 바라봅니다.’ 하면 그것은 진짜 교회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흔들어요. 교회를 깨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깨어지면 그것은 가짜 교회고, 온 교인이 목이 날아가는 순교를 해도 계속 십자가 피만 높이면 진짜 교회이고 그렇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이 못 세웁니다. 인간의 노력과 땀은 하나님의 피가 아닙니다. 십자가 피로 교회가 세워지지 사람의 노동으로 건물을 세우고 정성을 아무리 기울여도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워봅시다. 1) 진작 우리는 죽은 자다. 2) 살려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3) 혈육과의 끊어짐. 왜 혈육과 끊어집니까? 혈육이 끊어질 때 인간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생생하게 알 수 있어요. 친구가 끊어지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혈육이 끊어지면 자신의 근본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이 임해야 되지만.

일반적으로 목사와 목사 사모의 관계를 보면, 사모는 남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어요. 그냥 일반 부인들처럼 목사일 잘해서 유명세를 타고 돈을 많이 벌어서 남들처럼 자식들 잘 교육시키고 그런 수단으로 목사를 생각하지요. 이걸 속에 감춰놓고 겉으로는 복음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살지요. 이 사람은 남편을 볼 때 혈육으로 보는 거예요. 영으로 보지 않고 혈육으로 보는 겁니다.

항상 이런 원리에 따라 주님은 일하시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혈육이 끊어지면 죽은 자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어도 괜찮으냐?” 라고 늘 물으십니다. 이런 사건들이 늘 성도에게 발생합니다. 이런 관점 아니면 우리가 에스겔을 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6장을 보겠습니다. 2-4절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를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훼파될 것이며 내가 또 너희 중에서 살육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서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고 했어요.

지금 무대에서 에스겔이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각자 자기 뒤에(차두리처럼 뒤에서 차범근에 조종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이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고 반박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우리는 진작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선지자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지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 아까워 죽겠습니다. 좀 봐주세요.” 이런 것이 있으면 자기가 초조하고 전하면서도 주저하겠지만 그런 것이 없어요. 선지자는 자기가 전하는 내용을 자신이 수정하거나 바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변동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그냥 “예, 알겠습니다.”하고 외치는 겁니다. 외칠 때 선지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진작 죽은 자인데, 잘 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은 자가 될 때, 또 하나의 출애굽이 에스겔 시대에 시작되는 겁니다.

한 시대가 있다면 각 시대마다 사람이 있고, 어떤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 생존을 위해 자기 역사를 만듭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외치는 말씀은 현재 인간이 생존하려고 애쓰는 역사, 시간, 공간을 깨버립니다. 그러면 ‘맞습니다. 나는 진작 죽어야 마땅한 자입니다.’ 이런 소리가 나오도록 발가벗깁니다. 그런데 어느새 또 울타리가 생겨서 “하나님, 이정도 믿음 같으면 이제는 고생 좀 적게 해도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또 선지자가 말씀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면 또 자기 울타리가 깨져요. 이것이 반복됩니다.

목사가 금방 안수 받고 개척교회 해서 6개월 정도는 신나게 복음전하고 합니다. 새벽기도 없는 운 좋은 교회에 가면 좀 더 오래가요. 일주일에 세 번 만 설교하면 되니까 밑천이 조금 더 오래 가는데,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면 일주일에 열 번 설교해야 되기 때문에 금방 밑천이 바닥납니다. 그렇게 되면 간증거리를 주워 모아 설교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동행해서 잡아당기고 끌려가고 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신학교에서 많이 배웠으니까 이 배운 것으로 나의 생존과 나의 역사를 지속하기 위해서 마음껏 실력을 펼치려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미사일을 쏘아서 다 깨버립니다.

그러면 ‘나는 신학교 나와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진작 죽은 자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지요. 이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으로 사로잡았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너의 것을 전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것만 전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대전 강의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차두리가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데 차범근이 뒤에서 조종합니다. 이렇게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도 있고, 주께서 동행하시면 같이 나란히 서게 되는데 내가 입을 열어서 말하려고 하니까 주께서 입을 막아버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보다 앞장서서 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확보하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못 전하게 만들고, 지금 내가 확보하고 있는 생각은 엉터리고 잘못 되었다고 꾸짖는, 두 발짝 앞서서 이야기해 버리니까 내가 전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깨어지는데, 그러면 자기는 발가벗은 자가 되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이렇게 될 때 앞장서서 주님의 말씀만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교인들을 주님 계신 곳으로 날마다 새롭게 더 깊이 있게 이끄시는 그러한 행운을 잡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이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틀이 있는데, 이것을  미사일을 쏘면 과거가 폭파됩니다. 이 틀이 폭파되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이 우리에게 덮치면 우리는 [미래소년 코난]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미래의 일을 바라봅니다.

에스겔 6장에서 쉬운 것은, 주께서 전부 다 부순다는 거예요. 왜 부숩니까? 진작 우리는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몇 명 안 됩니다. 유구한 예루살렘의 역사, ‘주께서 은혜를 주셔서 세운 이 성전을 왜 부숩니까?’ 라고 과거의 역사를 또 붙들겠지요. 그것이 자기의 울타리가 될 것이고, 하나의 권력이 될 것이고, ‘이것 쌓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것을 부수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 온 것도 우리 힘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부숴서 내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당겨주시면 우리의 관심사는 ‘오늘은 또 어디로 이끌어 주실까?’ 하고 말씀에 이끌려 사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3절 끝에 보면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라고 했는데, 산당 앞에 ‘너희’라는 말이 있어요. 산당을 하나님이 만들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만들었지요. 산당을 지은 취지는 산당을 지은 사람 좋으라고 세운 거예요.

그러면 산당과 예루살렘 성전의 차이는 뭡니까?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피가 있고, 산당은 인간의 땀과 노력이 있는 거예요. 교회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산당 같은 교회가 있고, 진짜 교회가 있어요. 진자 교회의 특징은 인간의 노동이 눈곱만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이 교회를 내가 애쓰고 기도 많이 해서 이루었다고 한다면 그 교회가 몇 년의 역사가 되었든지 관계없이 그것은 산당입니다. 산당 같은 교회가 안 되려면 날마다 산당 같은 교회를 부숴버리면 ‘나는 진작 죽어야 돼.’ 라는 사람이 남겠지요. 그것이 바로 예언하신 주의 말씀에 보쌈 당한 새로운 교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내 자식은 서울대학 가야 됩니다.’ 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산당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세상 심판하신다고 하시는데 서울대학 나왔다고 불에 안타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 알아서 해주세요.’ 이렇게 하면 그 자식은 하나님 자식이 되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말씀이 오게 되면 진짜 교회고, 말씀이 없이 내 것을 내 노력으로 지키면 그것은 곧장 산당이 되는 겁니다. 그 산당을 하나님께서 부수는데, 그 산당을 부수다가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까지 다 부숴버립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산당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산당을 부술 때 원칙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지요. 근대 이후에는 자기밖에 모르지만 옛날 사람들은 항상 ‘신’ 다른 말로 하면 ‘대자연’의 변화에 맞춰서 살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할 필요도 없이 대자연에 비는 겁니다. 지금도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의 부모님들이 많이 빌어요.

그런데 신을 바꾸라는 겁니다. 이 말은 신은 이미 있다는 거지요. 신은 나를 지배하는 모든 환경이 신이 되는 겁니다. 뭔가 주고받는 대화의 상대가 돼요. 환경이. 이것을 ‘일월성신’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보통 뜨는 달과 보름에 떠는 달과 다르고, 보통 나무와 천년 된 비쩍 마른 고목이 다릅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깨끗한 양복에 키 커고, 멋지게 잘 생기고, 목소리도 무게가 있고 하면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고, 잠바 입고 비쩍 말라 못생기고, 목소리도 개미소리 내면 목사로 인정도 안 하지요.

구약 성경에서의 죄는 딱 한 곳에서 나옵니다. 현재 너는 환경에 적응하려고 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그것을 바꿔야 됩니다. 현재 네가 환경에 적응해서 살려고 하는 것을 바꾸라는 겁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광주에 있는 양동시장에 지금 늦은 밤이지만 시금치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에스겔 이 말씀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없지요.

밤늦도록 시금치 파는 이유는, 집에 아이들 공부시키고 밥 먹고 살려고 늦도록 시장에 죽치고 앉아 있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의 신은 뭡니까? 현재 주위에 있는 환경, 자식이죠. 이게 바로 신이에요. 16세기 근대 주체사상에서는 내가 누구냐를 묻는데, 그 이전에는 왕이 있었어요. 성경 전체가 왕이 있던 시절에 쓴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왕의 말을 잘 들으면 자기 생존에 유리합니다.

양동시장 난전에서 시금치 파는 순박한 아주머니도 만약 대한민국에 왕이 있다면 ‘오늘도 임금님 은덕으로 시금치 팔았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조선시대 사람들 그랬어요. 그래서 한성(서울)에서는 선배 왕들을 모시는 제단 ‘종묘’가 있었어요. 지금도 ‘종묘’가 있어요. 종묘가 뭐냐 하면, 전 백성들의 사고방식을 한 종교로 모으기 위한 이데올로기, 사상 체계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요구해요. 그게 신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왕을 요구하는 것은 여호와 나의 왕 됨을 거부하고 이방 사람들이 신이라고 여기는 것과 바꿔치기 했다. 오냐, 왕 줄게. 왕 때문에 망해봐라.’

왕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주 받게 하는 거예요. ‘내가 왕인데 어떻게 나 외에 다른 왕을 섬기느냐?’ 그래서 산당에 벌 내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종교가 없어. 교회도 절에도 안가. 그렇지만 어렵고 힘들 때는 빌고 싶어.’ 라는 환경 자체가 현실이 아니고,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 그것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산당이 폭파되고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수는 그 현실이, 네가 그저 ‘천지신명이여, 내 자식 좋은 대학가게 해 주세요.’라고 비는 그 신을 대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안 나오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서 지금도 의사로 일하고 있는 그 의사의 문제점이 뭡니까? 자기를 의사로 만든 그 환경이 신이 되기 때문에 그 신을 에스겔의 예언으로 바꿔야 됩니다. 이것을 칼빈이 몰랐어다. 칼빈은 교회 와서는 여호와 섬기고 세상에 나가면 자기 소명(직장 일) 잘 감당하면 된다고 했어요. 아닙니다. 그게 다 바뀌어야 돼요.

예를 들어서, 치과 의사라고 한다면 ‘내가 치과를 해도 주께서 오늘 부르시면 다 그만두고 가는 거야.’ 왜? 하나님의 예언이니까. ‘내가 치과 병원 세웠지만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면 다 탈 것이야. 왜? 그것이 에스겔의 예언이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실제와 매치를 시켜야 됩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당 지어놓고 그것이 뭐냐? ‘나 외에 다른 신’이 되는 거예요. 목사에게 예배당 건물과 교인들이 자기를 지켜주는 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는 자기가 장만한 산당이 더 크게 되기를 위해서 여호와께 기도하지요.

그래서 에스겔은 처음에는 산당을 치고, 나중에는 사람을 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혈육을 쳐요. 산당을 치면서(외부의 건물을 치면서) 직접 가정을 파탄시킵니다. 사람을 쳐버려요. 건물이야 불타면 그만이지만, 유다 나라가 망할 때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잖아요. 그게 하이라이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왜? 진작 죽어야 될 사람이거든요.

끌려가면서 끌려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냥 남은 사람은 저주 받고.

10분 쉽시다.

(2010. 6. 30. 11. 24 녹취 마침)
 관리자(IP:124.♡.87.52) 10-07-08 10:15 
광주100625b에스겔6장b
  
광주 강의(2010. 6. 25) 2강 녹취록

2010-07-08 08:26:52   이름 : 서경수
 
 
광주 강의(2010. 6. 25) 8-2

지난 시간에 산당을 이야기하다가 끝이 났는데, 6절에 보면 “산당으로 황무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태양 상들이 찍히며 너희 만든 것이 다 멸하며”라고 했는데, 산당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사는 환경, 신은 계시는데 내가 정성을 다하면 감동받는 그런 신, 그러니까 신과 나 사이에는 보편적인 동질성이 있지요. 이 동질성이라는 파이프를 타고 연락이 가능한 그 신, 그 신이 바로 나의 삶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이 환경을 어떻게 바꿉니까?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가인인데,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 있어서 가인은 자기 환경 속에서 신과 자신이 내통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가인이 제물을 드렸는데, 드린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의 속성과 진짜 신과 일치가 된다고 본 거예요.

신이 자신(가인)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내 속에 하나님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를 죽이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것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더구나 내가 신에게 제물을 드리면, 드린다는 이 자체는 신이 주신 속성이기 때문에(흔히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형상을 깨는 것은 모순되기에 그럴 리 없다고 여기고 자신만만하게 가인은 신에게 제사를 드린 거예요.

가인의 생각은 다 착각이었지요. 엄청난 착각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진작 죽어야 될 자입니다. ‘너는 죽어야 될 자야.’ 라고 하시면서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제사를 드리니까 너는 죽어야해.’ 라는 것을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시므로 나타낸 거예요.

아벨 제사를 받음으로써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이 아니잖아요. 가인은 가인일 뿐이고 아벨은 아벨일 뿐인데,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했다는 말은 --

첫 번째, 인간과 하나님은 공통점이 있다, 없다?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것을 보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두 번째, 인간과 하나님은 공통점이 있다, 없다? 있다. 왜? 아벨 제사를 받는 것을 보니까 있는 거예요. 만약 아벨의 제사도 안 받았으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겠어요, 안 죽였겠어요? 안 죽였지요.

‘ 1) 인간은 똑같다. 2) 아벨의 제사를 받는다. 3) 고로 나의 제사도 받아야 된다. ’ 라는 생각은 가인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안 받으니까 1)번이 문제예요. 인간은 똑같습니까? 인간이 똑같다는 것을 수용해도 문제고(아벨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 제사는 안 받았으니까), 인간은 똑같지 않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똑같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한쪽은 받으시고(축복), 다른 쪽은 안 받는다면(저주), 나는 저주에 해당되지 않고 무조건 축복에 해당되는 식으로 인간은 똑같지 않다는 말이 나와야 된다니까요.

모든 신학이 가인의 생각에서 다 나온 것입니다. ‘내가 제사 드리면 받아야지 네가 뭔데 안 받아?’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나와 저의 차이점이 뭔데?’ 그래서 현재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아벨을 제거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을 때, 인간은 1)안 따먹으면 된다. 2)따먹지 말라고 한 건방진 것을 따 먹어버리면 된다. 어느 쪽입니까? 나에게 따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를 꺾어버리면서 ‘누가 나에게 따먹지 말라고 했어?’ 하면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는 이게 바로 악마의 생각인데, 이것이 인간에게 전수된 거지요. 아담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모든 인간에게 다 임하는 겁니다.

대구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프랑스 빵 긴 막대기처럼 생긴 것이 뭐지요? ‘바게트’인데, 여기에 칼집을 내놓고 그곳에 쨈도 넣고 채소도 넣고 고기 다진 것도 넣고 하는데, 이 바게트 위에다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엎어버립니다. 그러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같이 주님이 흘러가는데 예수님의 속성인 공의와 사랑을 여기다 심어줘요. 사랑이 심어지면 이 바게트는 천국 가는 바게트고, 공의가 심어지면 이것은 지옥 가는 바게트지요.

가인과 아벨이 왜 서로 다른 종류인가? 예수님 자신이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속성을 담으라고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관계가 뭐냐? 하나님 형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아는데 두 종류가 있어요. 인간에서 출발해서 하나님 형상으로 가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에서 출발해서 인간에게 오는 형상이 있어요.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2번이 맞지요. 세 번째는 뭐냐? 진짜 숨어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형상.

1, 2, 3번 중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3번이 맞겠지요.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보세요. 인간들에게 형상이 있다면 인간들이 동물과 다른 점, 인간들의 공통점을 찾아내겠지요. 금으로 이를 한 사람 다 모인다면 금리 한 사람의 집합이 되겠지요. 그러면 금리 한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여기에서 가인의 문제점에 발견되는 거예요.

인간이 신을 아는 것은 공통적으로 다 알 수 있다. 왜? 산당에서 기도하든 일월성신을 섬기든 신에게 정성을 다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신을 찾으면 다 구원해줘야 돼.’ 라고 생각한다면, 인간 대 인간의 구원은 성립이 안 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다 구원을 해야 되고 지옥은 아예 없애고(여호와증인처럼), 인간의 종교심으로 신을 찾는다는 그 공통점만으로 인간을 구원해야 된다는 요구가 나오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인간은 신을 찾는다는 그 공통점에서, 그 신을 찾는 공통점을 따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인간은 신을 찾는다.’ 여기에서 ‘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인가?’ 라는 것입니다. 신을 찾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신을 찾는 성질도 하나님의 형상이냐?’ 라는 문제가 생기지요.

두 번째로 가 봅시다. 하나님 쪽에서 오게 되면, 하나님은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심어줬다. 이렇게 되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1번과 2번 다 인간이란 이유 때문에 다 구원 받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베풀어야 돼요. 1번은 인간의 공통점을 끄집어냈고, 이것은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 앞부분만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즉 하나님의 형상이 사랑이니까 모든 인간은 사랑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지옥은 왜 있어야 됩니까? 저주란 말이 없어야 되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으면, 그 뒤에 ‘그래서 저주는 없다.’ 이렇게 나와야 앞뒤가 맞아요. 1번과 2번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사람들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3번은 뭔가 하면, 진짜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의 생각 속에 진짜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오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진짜 하나님 형상 되시는 분과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어요. 여기에서 나온 것이 뭐냐? ‘죽은 하나님.’

지젝이란 사람이 이것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죽은 자의 하나님’인가 그런 책도 있지요? 죽은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이 땅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같은 형상을 받은 우리도 이 땅에서 같이 죽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동일한 형상이 될 수 없겠지요. 왜?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지젝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산 하나님이 아니고 이 땅에 와서 죽은 하나님이니까 우리가 죽어줘야, 죽은 채로 있어야 죽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말이 맞는 것 같지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죽은 척을 하면 되는가, 진짜 죽어야 되는가?’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에게 맞아 죽은 것처럼 동일하게 우리도 맞아 죽어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도 죽었고 사람도 죽으면 되는데, 하나님 죽고 우리도 죽으면 삽니까? 못 살아요.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옆에 나도 약 먹고 나란히 죽었습니다. 살려줍니까? 사흘 후에 부활되어 있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 하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옆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죽어있어요. ‘살려 줄까?’ 생각하다가 ‘그냥 두자!’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지젝의 생각도 괜찮은 상상력에 불과해요. 그냥 죽어있으면 돼요. 죽어 있으면 하나님이 구원하든 그냥 두든 그것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내가 죽은 척하든 죽었든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 되는가? 주님이 살려주시면 구원 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가 죽어도 못 사는데 주님이 살려주면 죽어도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행함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그냥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의 1번 2번을 업고 나타납니다. 모든 인간이 다 1번 2번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3번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3번으로 진입이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1번 2번 3번의 생각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야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

찾아올 때 사랑으로 오는데, 그 사랑이란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죄의 요소가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용서입니다. 정죄하면서 용서하는 식으로. 정죄를 하되 용서를 빌면 용서 비는 그것을 통해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 안에는 반드시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정죄 받아도 마땅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지요. 그런데 1번 2번은 뭡니까? ‘우리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서 주님을 섬기자.’ 이렇게 나오지요. 이렇게 되면 정죄 받을 것이 아니고 칭찬 받을 일이잖아요. 칭찬 받을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이 안 되지요.

‘주님의 용서 없이는 구원이 안 됩니다.’ 라는 생각을 가지려면, 모든 성경 말씀을 보면서 ‘이래서 내가 가짜 하나님을 섬겼구나.’라는 것을 늘 깨닫는 가운데서 용서라는 의미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아, 용서해서 구원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구나.’ 라고. 왜요? 우리는 눈만 뜨면 우상을 섬깁니다. 바꿔 말하면, 내게 속한 환경만 생각해요.

성룡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있는데, 어릴 때 남자아이들이 그런 장난을 치는데, 언덕이 있는데 그냥 뛰어내리면 아프잖아요. 그래서 대나무를 엮어 큰 공을 만들어서 그 속에 들어가서 구르면 언덕에서 잘 굴러 내리지요. 실제로 이런 놀이기구도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정죄라는 공 안에 용서를 담아서 굴려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성경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해요. 왜? 전부 다 나를 정죄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냥 흘려보지 않고 유심히 보게 됩니다. 예전에 십자가마을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손00 목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방종하게 한다.’고 했지요. 성도는 방종할 수가 없어요. 성경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내가 정죄 받을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 질 수가 없어요. 성경을 안 보면 교만해져요. ‘이만하면 됐다.’ 라는, 정죄 받을 환경이 아니고 ‘나의 의’를 갖추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나의 의’가 산당이고 우상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발각이 되면 즐거워야 됩니다. 우상이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시거든 다 쳐다보세요. 무엇 때문에 나를 우상화 시켰는지 보세요. 집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 ‘이것 처음 가졌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저건 내 딸이 전국 대회에 가서 받은 상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괜찮은 환경 속에서 나를 포근히 감쌀 수 있는 그런 우상 숭배의 장으로 인생을 꾸리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전부 우상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을 탐심이라고 하고, ‘탐심은 우상숭배(골3:5)’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환경 숭배입니다. 이 모두가 우상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이것이 달라지지 않아요. 정죄 받아야 마땅한 것을 그냥 굴리세요. 굴리되 안에는 뭘 집어넣는가? 주님께서 피로써 우리를 용서했다는 것을 가지고 굴리란 말입니다.

불신자와 결혼하기 힘든 이유가, 불신자와 결혼하면 자기는 용서 받을 일인데, 상대방 배후자는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자기가 잘났다고 하니까 만날 싸우게 되는 겁니다. 제가 대전에서 강의하면서 부부이야기를 했어요. 아내가 미워질 때가 있을 겁니다. 마누라 죽고 젊고 돈 많은 처녀하고 결혼하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현재의 아내와 비교가 되면서 미워집니다. 이렇게 아내가 미워질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예요. 왜? 내 환경이 정죄되고 미워질 때, 그 때 아내가 어디 갔다가 집에 돌아오게 되면 아내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겁니다.

아내 때문에 내가 정죄 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살지 말고 결혼하라.’고 합니다. 상대가 있어야 상대가 자꾸 미워지고, 미워져야 내가 남을 미워하고 살인하는 죄인이라는 것이 발견되고, 이런 살인자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피가 감사함으로 다가오고, 이게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속으로는 미워죽겠는데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하고, ‘이번 생일날 뭐 해줄까?’ 이런 위선을 떨지요. 이게 진짜 나쁜 거예요. 원래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걸 아닌 것처럼 감추고 숨기는 것이 악한 짓입니다.

“여보, 당신을 보니까 미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래도 당신 때문에 나의 완악한 마음을 발견하게 되니까 당신의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지네. 당신 없었으면 내가 얼마나 잘난 척 했겠나? 당신한테 내가 할 말이 없다. 오늘 뭐 해줄까?”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미워 죽겠는데,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그래서 자신은 괜찮은 남편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미혼 여성들은 이 강의 듣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남자의 심보를 알면 결혼할 마음이 싹 사라질 건데 ---

그래서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계속해서 다 부숴버립니다. 이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7장 20-21절 봅시다.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내가 그것으로 그들에게 오염물이 되게 하여 외인의 손에 붙여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붙여 그들로 노략하여 더럽히게 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8장 보면,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빠져나오게 하셔서 그들과 동행해요. 동행하게 되면 어떤 것이 출애굽입니까? 원래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출애굽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역 출애굽이 되지요. 무엇이 구원입니까? 이 저주스런 땅을 버리고 포로 잡혀 나오는 것이 출애굽이죠.

마태복음 2장 15절을 보겠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고 하지요. 그런데 실제 지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가요. 이게 바로 환경이 바뀌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나로 하여금 우상 숭배하게 하는 환경, 현재 우리가 광주에 있다면 이곳이 우상이 있는 환경, 우상의 세계입니다.

우상의 세계에서 여호와 계신 곳으로 가는데, 이렇게 될 때는 반드시 우상을 부수는 작업을 선행하고 난 뒤에 우리가 포로로 잡혀 나오는 식으로 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에 살면서 늘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식이 되기 위해서는 이 광주에 의미를 두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꾸 일어나는 거예요.

자식 믿다가 자식에게 실망하고, 남편 믿다가 남편에게 실망하고 이런 식으로 뭔가 내가 믿을 만한 요소는 전부 다 부수는 작업이 계속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개념의 확장입니다.

이스라엘 당시에 에스겔의 환경이 바뀌듯이, 지금은 우리가 사는 환경이 더러운 세상이고 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겁니다. 믿었는데 또 실망하고, 의지했는데 또 실망하고. 그런 일들이 자꾸 발생할 때 비로소 에스겔의 의미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7장 2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사람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 졌지요? 그러면 광주에서 사람이 살면서 경쟁을 하는데 무엇 때문에 경쟁합니까? 화려한 장식을 해서 ‘내가 얼마나 성공한 자인가?’ 그런 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식으로 교만을 품고 경쟁을 합니다.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크게 지으면 검소하게 짓지를 않습니다. 크게 짓는 만큼 화려하게 장식해야 되고, 화려한 만큼 그곳에 출석하는 사람은 마음이 교만해 지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것들이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인간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상 섬기는 모습의 연장입니다.

21절에 보면 “외인의 손에 붙여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붙여 그들로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과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을 고생해서 얻어놓으니까 사기꾼이 와서 몽땅 빼앗아 가고.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평생을 살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고.

24절을 봅시다.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으로 이르러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악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결국 우리가 믿는 종교는 우상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우상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 아닌 것은 ‘이것이 우상이다.’ 라고 하시면서 뒤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진짜 예수님입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뭐냐? 현재의 우리 환경을 부수고 새로운 땅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서 가지요. 그렇다면 이것을 그대로 예수님께 적용시키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동행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근심하며 길을 갔습니다. 왜 근심했습니까? 그동안 자신이 누렸던 환경, 주님과 함께 있었던 환경이 날아가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근심하면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야기를 나누고 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들어 설명해 주시고 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식사를 같이 하면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시면서 저희 눈을 밝혀 보여주실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어요(눅24:13절 이하 참조).

예수님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세상살이를 실망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눈을 떠보니까 예수님이 동행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그런 조치를 하시는 가운데서 그 장소가 바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만약 에스겔 말씀으로 설교를 한다면, “지금도 에스겔의 예언은 죽지 않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로 세상에 대해서 믿다가 교만케 되고, 그러다가 실망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그렇게 실망케 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군요.’ 하고 눈을 뜨니까 또 주님은 사라져 버립니다.”

왜 사라져야 됩니까? 주님을 붙들면 그것이 또 새로운 나를 위한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또 우리를 교만케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에스겔 예언과 다르게 되니까 안 되지요. 에스겔 말씀 그대로 예수님이 실천에 옮기시면 우리는 항상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을 계속 우리의 사건으로 번복되는 겁니다.

26절을 봅시다. “환란에 환란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여기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사람들이 한 조가 되어서 사람들을 교만케 했지요. 교회 다니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게 하는 것이 아니고 교만케 했지요. “나는 교회 다닌다. 너는 안 다니지? 난 죽으면 천당 갈 거야.” 이게 교만이란 말이지요. 교회 다니는 것이 오히려 교만케 되었어요. 교회 가서 좋은 소리 듣고, 자기 환경을 긍정해 주니까.

교회를 다니지 말고 주께서 우리를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그 교회 안에 있으면 돼요. 주께서 어떻게 만드십니까? 세상을 보면서 교만하다가 남한테 얻어터지는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예배당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보이지 않는 예배당’이란 표현을 썼어요.

사람이 자기 죄를 알게 되면 불평, 불만이 없어져요. 불평, 불만이 감사와 기쁨으로 바뀝니다. 만약 학생을 예로 들면 “내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이런 고생 안 해도 되는데” 라고 불평하다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이 재미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고 정신없이 여기에 몰두해 버려요. 그러면 자기를 잊어버려요.

자기를 잊어버리면 우울증,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 버려요.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는 반드시 뭣과 결부되어 있는가 하면, 자기의식과 결부될 때 찾아옵니다. 항상 뭔가 일할 것이 없을 때는 우울증이 와요. 도둑이 도둑질 할 때 우울증 걸리는 것 봤습니까? 지금 급해요. 빨리 물건 훔쳐 도망가기 바빠요. 정말 바쁘면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도둑질 하는 것이 좋은 점이 뭔가 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죄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 무슨 희괴한 소리를? 학생 때 가장 겸손한 순간이 언제인가? 커닝할 때입니다. 고개 숙여 커닝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고함을 치면 나에게 한 것이 아닌데 내게 한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라지요. 이정도 겸손한 사람 봤습니까? 남을 꾸중하고 있는데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정도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날마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에스겔의 예언입니다. 이 사람들이 고만운줄 알아야 돼요. 그들은 그 당시에 성전도 있고, 제사장 있고(요새 말로 하면, 목사 있고, 큰 교회 다니고) 이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성전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된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을 자기가 깨달으면 안 돼요. 깨달으면 깨닫게 된 것 때문에 교만하게 돼요.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주께서 하십니다.

이제 8장으로 넘어갑시다.

1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집에 앉았고” 그런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임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까?

제가 강의 초두가 뭐라고 했습니까? 선지자는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직업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냥 주께서 뒤에서 떠밀어요. 자기는 그냥 집에 앉아있는데 여호와의 권능이 임했어요. 1절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에스겔은 앉아 있고, 그 앞에 유다 장로들이 앉아있고.

유다 장로들이 왜 앉아 있습니까? 누가 이런 만남을 주선했어요? 하나님이 하셨지요. 장로와 에스겔이 만났는데, 그 다음에 주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나왔어요. 그러면 이 예언은 누구 좋으라고 한 거예요? 에스겔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 장로들에게 전할 말을 에스겔을 통해서 전달하는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것이 우상이 아닌 진짜 현실입니다.

옷 가게를 하시는데 손님이 왔다면 누가 이렇게 하신 겁니까?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열 두 벌을 입어보더니 그냥 갔습니다. 이런 분을 보면서 이전에 세 번만 입어보고 간 그 손님이 고맙게 여겨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낮아진 마음입니다.

인간은 항상 뭔가 되면 다 자기 잘나서 되고 못되면 하나님 탓인데, 이것을 반대로 바꾸기 위해서 주님의 권능이 임합니다. 주님의 권능이 임하면 반대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주님 어디 계십니까? 주님 보여주세요.” 요청하지 마세요. 가만히 있으면 여러분 마음이 뒤집힐 겁니다. 주님이 마음을 낮추는 역사가 있고, 그래서 선지자로 하여금 자기 할 일을 마음껏 하게 하십니다.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할게.’하는 주님의 뜻이 그대로 전달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3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우상이 뭡니까?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자기 환경이 우상입니다. 환경이 우상이기 때문에 절에 안 간다고 해서 우상이 없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은 다 부숴도 이것만큼은 제발 손대지 마세요.’ 라는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바뀌어서 ‘나는 이것을 붙잡기 위해서 평생을 달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죄입니다.’ 라고 자기 죄를 알 때, 그것이 바로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드러내기 위한 환경입니다.

로마서 5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이 지었다고 합니다. 이 하나에게 다수로 어떻게 나아갑니까? 철학에서는 이것이 설명이 안 돼요. 기껏 신학자들이 하는 주장은 유전적인 요인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만약 유전적 요인으로 하나가 다수로 되면 이삭은 어디에서 태어났어요? 이삭은 약속에서 태어났어요.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이 태어났단 말이지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DNA는 혈육입니다. 혈육적으로 다수가 하나가 된다면, 이 다수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로 모아져야 맞지요? 쉽게 말하면, 한 사람에게서 여러 명이 나왔으면 여러 명이 다 한 사람의 공통점을 물려받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공통점을 끄집어내 보자는 말이지요. 끄집어내 보니까 하나로 소급이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아이가 셋 있으면 다 성질이 달라요. 하나가 안 돼요. 자식 셋 모아봐야 부모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부모로부터 받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개입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인간은 죄가 개입 되면 죄 중의 일부를 받은 거예요. 열 개의 죄가 있다면 한 사람이 열 개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은 이런 대목을 담당하고,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대목을 담당했는데 전부 합쳐보면 아담의 죄가 돼요.

가인은 살인죄를 지었지만 아벨은 살인죄를 안 지었지요. 물론 아벨의 마음속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실제적으로 볼 때 인간들의 공통점을 다 발견해서 하나로 모을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죄가 개입되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다수를 연결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다수 인간 사이에 죄가 있습니다.

죄가 죄를 낳고, 또 죄가 죄를 낳는데 이 죄는 외부에서 왔는데 사람들은 이 죄를 본인이 짓는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선악과 안 따먹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선악과 따먹기는커녕 구경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피를 흘려서 의인이 되었지요. 한 사람이 순종하므로 다수가 의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졌지 우리가 십자가 졌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 죄가 사함을 받는가 말이지요. 유전자 때문에 가능합니까? 혈통적인 요소로 가능합니까? 아니지요.

아담이 죄를 지을 때는 죄가 왔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는 하나님의 의가 온 거예요. 의가 오는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선물이에요. 선물을 갚으면 선물 값이 떨어져요. 우 집사님이 제 아내의 옷을 만들어 줬는데 이것을 받고 아내가 제봉 틀을 사서 바느질해서 다시 집사님께 드리면 이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거래가 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선물로 받은 거예요. 아담이 죄를 지어서 우리는 그냥 죄를 물려받은 거예요. 물려받은 죄를 인간들은 싫다고 해서 ‘내가 죄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 즉 내가 결정하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죄를 내가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고 해버리면, 아담에서 벗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관하게 내가 의인 되고 안 되고를 결정할 수 있다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것을 말렸어요. ‘제발 죄인 좀 되어다오. 부탁한다. 의인이라는 소리 하지 말고 평생 죄인이라고 간주해 다오.’ 왜요? 그래야, 그 원리를 알아야 예수님 혼자 의인인데 우리가 덩달아 선물 받아서, 은혜 받아서, 은혜가 왕노릇 해서 의인 되었다는 것을, 이 원리가 우리에게 왔다는 것이 표가 나잖아요.

하나님께서 에스겔 시대에 벌 내렸어요. 그러면 벌 받으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 유다 백성이라면, 예루살렘 성전 깨지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잖아요. 그냥 잡혀 가세요. 그리고 집과 산당이 다 깨지잖아요. 그냥 깨어지면 됩니다. 무엇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깨어지듯이 우리가 공짜로 하나님의 의를 얻어먹는 그 시절이 온다는 약속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유다 백성들이 포로 잡혀 간 곳에 동행해서 과거에 예루살렘에서 세운 그 전을 이방 나라에서 새롭게 전을 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이야기 하겠다는 겁니다. ‘옛날에 다 깨졌지. 잘 깨졌어.’ 왜? 새롭게 은혜를 받았으니까.

자,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은혜로 우리에게 오는데, 은혜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은혜라는 것은 십자가가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지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1)진작 우리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2)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다. 이 용서가 우리에게 오지요. 그러면 이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옵니다. 이것이 오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해서 아담의 육체를 가지고 그대로 죄를 드러내야 됩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그냥 걸어 다니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이런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뭘 해도 죄니까 내가 의를 만들어 낼 생각은 아예 하지 마세요. 만약에 일기를 쓰면서 착한 일하면 동그라미, 나쁜 일 하면 가위 표를 했다면, 20년 일기를 미리 쓰세요. 가위 표, 가위 표, 가위 표 ----. 20년 일기를 다 쓰세요. 아, 시원하다. 전부 가위 표네.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용서 받아 구원 되는 겁니다. 이 말 하려고 오늘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습니다. 누가 나를 용서해서 구원 받은 거예요. 내가 착한 일해서 용서 받고 구원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용서 그 자체, 이것이 선물인데 이 선물을 다시 갚아줄 필요 없어요.

이 용서가 남아 있으려면 우리는 그냥 평소에 살아가는 대로 죄인으로 살게 되면 내가 미처 몰랐던 죄를 은혜를 내리셔서 알게 하지요. 은혜를 내려서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하면 말이 안 되고, 은혜가 내려오면 ‘아, 이것도 죄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서 그것이 한 세트가 되는데, 앞면에는 죄, 뒷면에는 용서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 은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 대해서 감사하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스겔에서 처참하게 유다 나라를 심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사랑이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진짜 하나님이 이렇게 찾아오신다고 알려주신 그 사랑,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슨 죄라도 이미 다 용서된, 용서 받은 죄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용서를 잊지 말고, 용서해 주신 주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7. 7. 17:41 녹취 :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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