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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12:49:20 조회 : 3258         
광주 8월 27일 에스겔 9:9 먹 물 든자 (탄식하며 우는 자) 이름 : 김대식(IP:124.59.87.52)
100827 겔 9:9 _먹 물 든자
 김대식(IP:124.♡.87.52) 10-08-28 12:52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광주/광주100827a에스겔9장9절a.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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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IP:220.♡.41.203) 10-09-05 09:53 
광주100827a에스겔9장9절a 광주 강의(2010. 8. 27) 10-1

에스겔 9장 3절을 보겠습니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룹’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전 문지방’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지성소에서 누구를 호출했는가 하면 베옷 입은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사람 이마에 먹물을 묻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너무나 인간적으로 행동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탄 것처럼 하나님이 그룹을 타시고 지성소에 오셨습니다. 성전이 이렇게 있으면 동쪽에 문이 있어요. 남쪽도 북쪽도 문이 있는데 서쪽에는 문이 없어요. 마당이 있고, 출입구 기둥이 있지요. 그 기둥을 통과하게 되면 지성소가 있고, 이 주변에는 문지기의 방이 있고, 제사장들이 기거하는 작은 방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가셔서 베옷 입을 사람을 불러서 먹물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시를 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마에 표시를 하는가 하면, 4절에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고 했어요.

5-6절에 보면,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지금 여호와께서 오셔서 두 노선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한쪽은 이마에 먹물이 찍힌 자들이고, 그리고는 그 나머지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런데 이마에 먹물이 찍힌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탄식하며 우는 자들입니다. 무엇 때문에 울며 탄식합니까? 예루살렘에서 가증한 일로 탄식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이 뭡니까? 날씨가 더워서 탄식합니까, 물가가 너무 비싸서 탄식합니까?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주인공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성전에 계실 때 성전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거주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일을 합니다.

그 조건을 레위기에서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세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준행하게 되면 거기에서 뭐가 발생되는가 하면 거룩이 발생됩니다. 여호와께서 거룩하신 분이니까 거룩한 백성과 함께 살 수 있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오실 때 그룹을 타고 성전을 방문했지요. 그리고는 지시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이마에 표시를 하라고. 어떤 사람입니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전혀 그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로 인해 울며 탄식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회사가 망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자식 성적이 떨어져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의 탄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아파트에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하신다면 정말 즐겁겠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떠나가신다면
그 때는 마땅히 울어야겠지요. 교회에서 복음이 안 나오면 그 교인들은 탄식해야 됩니다.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 소식 듣고 그분과 함께 살고 싶어서 왔는데, 교회 목사가 복음은 이야기하지 않고 교회 부흥을 위한 것이나 부자 되는 비결을 이야기한다면 탄식해야 합니다. 탄식할 때마다 이마에 먹물이 칠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지 않은 환경을 주시는 것도 다 뜻이 있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탄식하는 사람은 평소에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살았다는 표가 나는 거예요. 그 기준에 뭔가 하면, 에스겔 당시에는 언약이 되는 겁니다. 에스겔 당시에 언약이 기준이라면 오늘날 기준은 뭡니까? 새언약입니다.

에스겔은 이름이 있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부릅니까? ‘인자’라고 하지요. 이와 똑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를 ‘인자’라고 했어요. 이름이 뭔가 하면, 이름 속에 해야 될 기능과 역할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놓고 그에게 ‘아담’이라고 이름을 불렀어요. ‘아담’에게는 두 가지의 역할이 있어요. 너는 본질이 흙이라는 것과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면 도로 환원되잖아요? 그러면 나오나마나 인데, 왜 인간 되게 했습니까?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면 아무 의미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뭔가를 창조했는데 도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창조 무효가 되지요. 그러니 인간 입장에서는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니까 ‘에이, 우리는 괜히 왔다가 사라지네.’ 이렇게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 하나님은 뭘 보여주는가? ‘내가 창조한 것은 창조의 원리에 부합될 경우에만 계속 창조로 남긴다. 만약 창조의 원리대로 안 되면 창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을 적절하게 사용하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흙에서 인간 됐다. 창조지요. 창조 원리가 뭔가? 인간은 몰랐어요. 그런데 죄 짓고 난 뒤에 흙으로 되돌아가니까 ‘아하, 창조 원리가 이것이구나!’ 라고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로 흙으로 돌리면서 인간에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지 않고 이 창조에 숨어 있던 원리, 모든 것이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그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주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지으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담이 각 피조물의 이름을 지을 때 자기 마음대로 지었습니까, 하나님 지시에 따라 지었습니까? 지시대로 지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 이름 하나하나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이름은 숨겨져 있습니다.

이름을 주시고는 나중에 그 이름이 취소되고 사라질 때 숨어있던 진짜 이름이 등장하지요. 그 이름은 신약에서는 ‘인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으실 때는 사람 좋으라고 이름 지은 것이 아니고 누구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직 한 분, 여호와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에 보면 이런 것이 있지요.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여러 가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모든 것이 한 곳으로 모아집니다. 어디로? 아름다운 주의 이름으로. 모든 이름들은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는데, 당신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적이란 것이 없어요. 암이 걸린 사람이 나았다고 기적이라고 하는데, 인간에게는 기적이 없고 사실만 있습니다. 숨은 사실이 등장하는 것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해요.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라고 했고.

표적은 숨어 있던 진짜 현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소경이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이 이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그러니까 소경은 그냥 눈 뜨는 기적만 바라지요.

우리 몸이 아프지요. ‘아, 아프다.’ 이것이 실제가 아니고, ‘왜 내 몸이 아픈가?’ 라는 이유와 목적을 알 때, 즉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이 기적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이것을 몰라요. 성령을 받아야 우리와 예수님이 연결됩니다.

최근 십자가마을에 질문이 올라왔는데, 개혁주의자들은 자기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해요. 여기에 온통 마음이 가 있어요. 자신의 성장으로 완성단계에 이르는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성령 안 받은 육신의 사람들이 이런 소망을 가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육신의 사람은 죄, 의, 심판에 대해서 몰라요.

사람이 완전해 지려고하면 ‘옛날에는 죄인이지만 지금은 의인 되었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들이 말하는 의는 성령을 받기 전에 자기가 죄라고 여긴 그것을 죄로 여기고, 그 죄에 비해서 좀 더 뭔가 행실이 나아진 것을 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면, 성령이 오시게 되면 ‘네가 알고 있는 죄는 죄가 아니야, 그것은 네 중심의 죄야.’

성령이 오면 인간 중심으로 생각했던 죄와 의와 심판을 누구 중심으로 돌립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중심으로 돌리지요. 예수님 중심의 죄, 의, 심판을 알려주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란 말이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동안 내 중심의 죄, 의, 심판을 생각했던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그들의 교리를 따라 살면 그것이 의롭게 되는 것(성화)으로 여겼던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절대 모르지요.

김성수 목사가 정석훈 목사에게 보낸 메일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한 때는 개혁주의에 몰입했었다가 벗어났다고 했는데, 그것은 믿을 수 없어요. 개혁주의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도망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게 되면 자연적으로 ‘내가 있던 자리는 죄였구나.’를 아는 거죠. 탈출을 시도한다고 탈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윤리, 도덕 이런 관점에서 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리, 도덕적 관점은 선악적 관점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전한 말씀을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았어요. 그런데 그 전에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지요? 하와. ‘생명의 어머니’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나님이 저주해도 생명의 어머니를 통해서 복 받을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자식을 낳았는데, 가인.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자기는 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인은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생명을 가진 자를 죽여야 될 그런 역할을 해야 될 사람으로 먼저 태어난 거예요.

가인만 있으면 가인이 생명인줄 알아요. 그런데 뒤에 아벨이 왔어요. 아벨 뜻이 뭡니까? 허무함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얻었다.’ 라고 기뻐했는데, 얻은 그 자식이 원래의 생명노선과 반대에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 중 어느 것이 먼저 와야 됩니까? 어두움이 먼저 오고, 사람들이 그 어두움을 빛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뒤에 온 빛을 어둠이라고 착각하게 해서 빛이라고 우긴 어둠이 참 빛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피가 나오고, 그 피가 바로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오늘날 교회라는 이스라엘이 나오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떼에 와서 보았다.”고 할 때에,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하지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행자로써의 소자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항상 예수님만 붙들어요.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것처럼, 온 천하를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자기 재산을 붙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소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자가 어둠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바보, 병신으로 보입니다. 이 땅의 육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자식보고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의 오기, 자존심과 관련될 수가 있어요. 왜냐? 자식이 예수님만 붙드는 것을 부모가 교육하고 권면한다고 될 수가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러면 방치해 두면 되는가? 방치한다고 될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그냥 증언할 뿐이지요. ‘네가 백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도 지옥가면 헛수고다.’ 이런 식으로. ‘그럼 나 공부 안 할래요.’ ‘공부 안 한다고 해서 천국 못 간다.’ 이런 식으로.

진짜 중요한 것은 예수님 이름 앞에 우리 이름은 사라지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근호에게 무릎 꿇는 것이 아니고, 이근호라는 이름을 준 것은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어라고 준 이름입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기 이름 포기하고 예수 이름에 무릎을 꿇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면 예수님께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것을 자식들에게 증언하는 거예요.

‘이 아버지는 누구 앞에서 무릎 못 꿇는다. 하지만 생명 되시는 예수님 앞에는 내가 무릎 꿇는다.’ 그러면 자식들은 “그래서 어쩌라고요?” (부모)‘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야!’ 이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하게 되면, 자식들이 교회 출석하고, 기도하는 흉내를 내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기 싫어. 나는 결코 내 이름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눈만 뜨면 모든 세상이 전부 내 이름이 영광 받는 환상을 갖는데, 기적이란 뭔가? 그것이 날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나 마당을 뛰어다니는 닭 모두가 내가 무릎 꿇어야 할 예수님께 말없이 먼저 무릎 꿇고 있습니다. [The Sounds of Silence]라는 노래도 있지요. 폴 사이먼, 아트 가펑클이 부른 노래. ‘침묵의 소리’ 시편 19편에 나오지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소리가 우리에게는 안 들리는 거예요. 안 들리니까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닭이 찾아온 것은 닭은 누구 조종 받았습니까? 주님의 조종을 받았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바다는 누구 말을 들었습니까? 주께서 “잠잠해!” 하시니까 잠잠했어요. 물고기도 예수님 말씀을 들었어요. 세금을 내야하는데 물고기는 동전을 물고 제자들에게 잡혔습니다. 무화과나무도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말라 죽었어요.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 가면 다 알겁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여 적제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소경에게 “당신이 소경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된 것이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건강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만약 당신이 아프면 그런 소리 못해. 교회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귀찮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야. 당신은 안 아프니까 그런 소리 하는 거야.’

소경이 왜 그런 마음 안 가졌겠습니까? ‘남들은 다 보는데 왜 나는 날 때부터 소경입니까?’ 얼마나 원망을 했겠습니까?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요한복음에 있으니까 그렇구나 생각할 수는 있는데, 지식이 체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진짜로 체험될 때는 눈물이 팍 쏟아져요. ‘내가 소경된 것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된 것이구나. 그동안 내가 원망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릴 겁니다.

그러니까 그 소경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눈 떠서 본다는 사람들이 다 소경입니다. 스스로 본다고 여긴 그 모든 것이 환상입니다. 이 환상을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 전부 환상입니다.

환상 속에 있는데 그것을 실재로 여기면서 여러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 중에 ‘교회 가서 예수 한 번 믿어 볼까?’ 추가적으로 뭔가 자식을 확보한다고 그 환상이 실재가 되는 게 아닙니다.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실재가 앞에 나타나면 내가 그동안 실재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 마르다가 자기 딴에는 주님을 대접했는데 그것도 환상이었습니다. 다른 세계가 있는 줄 몰랐어요. 오빠가 죽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그동안 환상 속에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예수님께서 죽은 오빠를 살려 낼 때 비로소 ‘내가 그동안 세상을 너무 좁게 봤구나.’ 내 자체가 환상이기 때문에 환상이 보는 세상은 여전히 환상이었고, 나의 오빠도 환상적 안목에서 본 오빠에 불과한 거예요. 진짜 오빠는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으면 죽어도 나흘 만에 되살아 올 수 있는 이런 연결 고리 이게 바로 실재입니다. 그동안 실재는 환상 때문에 가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십자가가 뭔가 하면, 환상 속에서 보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 되고, 이쪽에서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요. 피가 곧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피는 우리 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죽인 한 남자의 피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새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 죄를 지는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 할 때는 우리의 삶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왜냐? 나 자신이 환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 하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 하고, 자기 자랑에 몰두해 있고. 예수님의 피만 자랑해야 될 텐데 자신의 열심, 선행 이런 것을 자랑할 때 그것이 바로 멋진 환상입니다.

이 환상의 결정체가 뭐냐? 구약에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에스겔 9장)성전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베옷 입은 사람, 먹물 튕길 사람을 불렀지요. 먹물 없는 사람과 먹물 튕길 사람의 구분은 성전에서 이뤄지는데, 성전은 인간들의 환상의 극치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모든 사람들이 천국 가려고 교회에 나오는데, 이 교회가 환상이죠.

오늘 어떤 분이 메일로 질문을 했는데, 어떤 단체의 열두 가지 신학에 대해서 평을 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이런 답변을 했어요. ‘교회가 환상이라고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가 비로소 보입니다.’ 기존의 모든 신학이 교회를 운영, 발전시키는데 초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는 내가 돈을 내고, 내 열심과 노력, 기도로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환상이고 허구인데, 허구가 열심히 돈 내면 그것도 허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부동산 교회도 역시 허구입니다. 이런 허구들을 다 버릴 때 비로소 내 땀과 피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세운 교회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기적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교회를 부정함으로써 진짜 교회를 만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지요. 그 교회가 에스겔 9장에서는 성전입니다. 왜? 그 당시 유대나라는 모두가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유일한 장소가 성전이라고 믿었기에, 하나님이 그 성전을 일부러 방문하시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그룹을 타고 오셨는데, 그룹은 천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창조의 원형입니까, 그룹들이 원형입니까? 그룹들이지요. 이 그룹을 여호와께서 타고 오셔서 먹물 튕긴 사람은 살려두고, 나머지는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먹물은 어떤 사람에게 튕깁니까? 예루살렘을 보고 울며 탄식하는 자입니다.

예루살렘을 보고 탄식하는 이유는 뭡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예루살렘의 풍조를 보고 탄식하고 우는데, 이들에게만 먹물을 튕겨서 그 사람만 살리고 나머지는 전부 죽이라고 했어요. 늙은 자, 젊은 자, 처녀, 어린 아이, 부녀 가리지 말고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9장 6절에 나오지요.

이들을 왜 다 죽입니까?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여겼단 말이지요. 요즘 말로 하면, 술집에 가서 “당신은 십자가의 피를 아십니까?” 하고 물으면, 술 마시고 있던 사람이 불쾌한 표정으로 “나는 그런 것 몰라!” 할 때, 그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술집 옆 미장원에 가서 대기하며 여성잡지 읽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아줌마, 십자가 피에 대해 아십니까?” 라고 하면, 그 아줌마가 놀란 표정으로 “나는 절에 다니는데요?” 라고 하면, 그 사람도 죽어 버려요.

왜 십자가 피를 무시하느냐?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이라는 말은 쉽게 표현하면 ‘심판’이지요. 그러면 심판하는 이유는 원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했던 원형은 이 그룹들 안에서 펼쳐지는 거예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에스겔 10장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룹이 날개로 에스겔을 태워서 그발 강가로 이동시켜 줍니다. 전세기입니다. 멋있지요? 여호와께서 그룹을 타고 성전에 오셔서, 원형이 떴으니까 가짜는 필요 없지요. 그래서 모조리 죽이되 누구는 제외한다? 예루살렘을 보고 울며 탄식하는 사람들만 먹물을 튕겨서 살려주고 나머지는 다 죽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난 후 10장 끝부분에 가면 에스겔을 데리고 다시 그발 강가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그룹의 구조가 나옵니다. 그 구조를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룹을 타고 오셔서 성전 문지방(지성소)에서 먹물 튕긴 사람만 살리고 나머지는 죽이라는 명령을 베옷 입은 사람에게 했지요. 그 이야기하는 음성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10장 6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 그룹 안에 계시는데, 이 그룹이 뭘 보여주는가 하면, 예수님의 기능과 역할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룹이 한 종류가 아니고 네 종류로 되어 있어요. 첫 번째는 그룹의 얼굴, 두 번째는 사람 얼굴, 셋째는 사자 얼굴, 넷째는 독수리 얼굴. 이 네 가지 모습으로 여호와께서 타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말하기를 이 그룹들에 창조의 원형이 있다고 했지요. 원형이 있다는 말은 이것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창조가 아니니까 심판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그룹에 바퀴가 있고, 바퀴 안에 또 바퀴가 있어서 움직이는데, 그 바퀴 사이에서 불이 나오지요. 이 불의 용도는 태우는 것입니다. ‘꼴 보기 싫다. 저것들이 왜 있어. 다 없애버려.’

불은 다 태어버리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다 태우면 하나님의 창조는 어디에 있습니까? 심판을 감행할 때는 새로운 창조를 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헌 하늘과 헌 땅은 반드시 새 하늘과 새 땅과 교체됩니다.

지금 그룹에서 불이 나오지요. 그러면 그 밑은 불바다가 되지요. 이 불이 예루살렘에 떨어지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묻지요. 예루살렘에 불이 떨어지면 저 필리핀이나 알레스카는?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고 온 인류의 대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불이 떨어졌다는 말은,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온 세상의 체질이 다 불이 녹아진다.’고 했어요. 옛날에는 물로 심판했지만 이제 불로 심판한다.

노아 홍수 때 다른 나라에는 멀쩡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즉 노아 홍수 때 전 이류가 죽은 것이 아니고 그 동네만 홍수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 주장 들어보셨어요? 이런 주장은 이스라엘의 기능을 몰라서 그래요. 언약의 기능은 전체를 대표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물로 심판 받았지만 이제 불로 심판 받는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물로 심판한 영역은 불로 심판 받을 영역과 일치되는 겁니다. 홍수가 제한된 장소에만 임했다면 앞으로 불심판도 특정한 지역에만 내리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퀴에서 불이 나오면 이 그룹은 창조의 원형을 품고 있어야지요. 불로 태우는 것은 쉽지요. 그러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원형은 어디 있는가? 이것은 그룹 안에 있어요. 원형을 시작할 때 인자를 품고, 땅은 죽여도 아까 탄식하는 사람들과 인자는 남겨두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남은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냐 아니냐는 항상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세상이 언약 중심으로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모세 언약, 옛 언약. 지금은 새언약. 요즘 사람들이 구원 받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삼아서 ‘과연 이 땅에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를 찾는 사람, 그것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  하는 사람.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남은 자입니다. 이마에 어린양의 표를 받은 자이지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 아침에 눈을 뜨면 실재 되시는 분이 나를 움직입니다. 식사 준비를 하면서 콩나물을 무친다면, 실재 되시는 분이 일하시고 나는 환상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콩나물도 못 무칩니다.

우리의 발걸음 하나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면 우리가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게 기적이에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음 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느껴진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면 기적이 아니고 환상이 됩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닌데 몸소 그것이 느껴져요. ‘아,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지 내 힘이 아니야.’ 이것을 수천 번 읽고 외워도 몰랐던 것이 어느 한 순간에 ‘참 그렇지. 그 말이 맞네.’ 라고 느껴질 때 이것은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게 됩니다.

좀 쉬었다가 합시다.

(2010. 9. 3. 16:09 녹취 마침)
 관리자(IP:124.♡.87.52) 10-10-06 07:39 
광주100827b에스겔9장9절b


광주 강의(2010. 8. 27) 10-2

두 번째 시간입니다.

여호와께서 타고 오셨던 그 그룹을 10장 20-22절에 보면, 이제 에스겔이 타고 그발 강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룹이라는 이 구조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이 에스겔 10장에 쭉 나오는데, 기존의 많은 주석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언급이 없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손을 못 대고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룹은 운반(운송)기구인데, 왜냐하면 바퀴가 달려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에 특징이 있어요. 날개도 있고, 바퀴도 있는데, 이 날개와 바퀴에 눈이 있어요. 눈은 뭐냐? 관찰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쉬지 않고 영원토록 이 세상을 관찰해 온 겁니다. 그 관찰의 기준은 언약이 됩니다. 언약의 입장에서 관찰해 온 겁니다.

심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준으로 봤을 때 전혀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하는데, 바퀴와 날개에 눈이 달려있어서 그동안 모든 것을 관찰해 왔어요. 눈이 달린 바퀴와 날개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기괴하고 소름이 끼칩니까? 끔찍하지요. 즉 하나님은 모르는 구석이 없이 다 아신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그룹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되어 있어요. 사방의 특징은 어디든지 가는데 날개나 바퀴가 가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동할 때는 머리 되시는 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입니다. 눈을 달고 세상을 관찰하는데 언약을 기준해서 관찰합니다. 

그러면 이 언약을 기준으로 관찰을 하는데, 네 가지 기준이 바로 그룹, 사람, 사자, 독수리로 되어 있지요. 사실은 전부 천사예요. 사람 모습의 천사, 사자 모습의 천사, 독수리 모습의 천사. 1장에서는 그룹의 모습을 소, 사자, 독수리, 사람의 형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그룹들이 사람이면 사람, 사자면 사자 이렇게 통일하지 않고 왜 네 가지로 구분지어서 차이를 두면서 이런 면을 가지고 그룹들이 온통 눈으로 범벅되어 있으면서 움직이느냐?

독수리라는 이 대목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높은 곳에서 관찰하는 기능을 해요? 독수리가 하늘을 나르면서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계8:13).”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것은 독수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천사라고 했지요.

인간의 모습은 지혜 또는 지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성이 있는 천사. 그 다음에 사자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옥문을 열어주는데 천사가 열어주고, 자고 있을 때는 깨워서 손을 잡고 끌고 가지요.

결국 사자, 독수리, 사람 이것은 모두 천사들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데, 즉 언약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사리분별해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예고도 하고 살피기도 하고 정찰도 하면서 지금도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고,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진짜 권력입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는 모르고 현재 유대나라에게만 이것을 미리 앞당겨서 대표자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에스겔 10장에서 좀 더 보아야 할 것은, 사실은 다 읽어야 되는데 골치 아프니까 생략하고, 이 그룹들 사이에서 불이 나오는데, 이 불은 예루살렘을 태워버린다는 겁니다. 태우면 성전이 타지요. 그러면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10장 8절에서 사람 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런 기능을 하고 있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되겠지요.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역할과 기능을 미리 앞당겨서 하나님이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신 겁니다. 장차 올 메시아가 바로 이 모습, 이 기능을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뭘 하신다? 이 세상을 심판하신단 말이지요. 요한복음 5장에서 모든 심판을 아버지께서 누구에게 맡겼다고 합니까? 나(예수)에게 맡겼잖아요. 내가 바로 그 인자다. 그래서 에스겔 그 모습대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에스겔 당시의 이런 이야기가 이질적인 것의 공존,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신과 (이질적인)천사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에스겔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스겔을 읽으면서 그냥 넘어갑니다. 왜? 너무도 이질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뭘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하면 이것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보는데, 천사가 활동한다고 하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하란 말인지 혼란이 옵니다. 천사가 활동하는데 밥이나 해 주란 말인지, 잡채로 대접하란 말인지?

이 천사들의 활동 속에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해야 될 일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성전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스겔 11장입니다.

11장 1절에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그발 강에 갔다가 또 성전으로 도로 와요. 그룹을 타고 왔다 갔다 합니다. 이보다 더 멋진 운송 수단이 없어요. 에스겔은 시차에 잘 적응해야 될 겁니다.

10장 11-12절을 봅시다.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되 돌이키지 않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행하며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이게 뭡니까? 이 전체가 관찰하고 세상을 심판 할 때 빈틈없이, 저 사람이 진짜 먹물 튕길 사람인지 그런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 관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만 쳐다보는 소자인지, 아니면 십자가 복음을 무시하고 모독하는지 지금도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질적인 사실이 왔을 때, 이질적인 것을 배척해 버리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나는 실재가 되고, 이런 이질적인 것(에스겔 10장의 내용)을 수용하면 내가 환상, 허상, 허구가 되는 겁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다 허상이에요. TV 켜보세요. 전부 허상입니다. 어떤 채널을 켜도 다 허상입니다. [자이언트, 김탁구, 이웃집 웬수] 전부 허상입니다. 심지어 뉴스(김정일이 중국 방문했다는 소식)도 전부 허상입니다. 불교 방송, 기독교 방송, 천주교 방송 전부 허상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피가 없어요. 생명이 아닌 허상을 통해서 허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들이 그 모든 과정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TV에 천사 이야기가 안 나오고, 누가 관찰한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고, 예수님의 언약대로 모든 것을 심판한다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만약 케이블 TV에서 저보고 나와서 강의를 하라고 하면(그런 일이 없겠지만), 오늘 강의한 이런 내용으로 강의할 겁니다. 기독교도 전부 허상이라고.

10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이제 성전을 떠났지요. 베옷 입은 사람에게 먹물 튕기라고 하고, 다시 그룹을 타시고 성전 문지방을 떠나는데, 그러면 성전은 이제 끝입니다. 이제 이 성전은 더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불타야 됩니다. 이것을 에스겔이 본 거예요.

19절에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그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바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래 있던 생물이라.”

그발 강에서 온 거예요.

11장 1절에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그러면 동문에 누구와 누가 만납니까? 여호와께서 그룹을 타시고 오시는데 여기에 누구를 만납니까? 성전 동문에서 누굴 만나요? 에스겔(인자)과 만나지요. 그러면 인자도 그룹을 타고 그발 강으로 가요. 그러면 성전이 어디로 이동한 거예요? 이쪽 성전이 포로 잡혀 갔던 그 동네가 새로운 성소가 되고 여호와께서 거기 계십니다. 거기서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일컬어 제 2의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원래 출애굽은 어디서 나와야 출애굽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출애굽인데, 여기서는 반대로 이스라엘 땅이 애굽이 되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 출애굽이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가셨을 때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하지요. 그러면 어디가 애굽입니까? 이스라엘에 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은 무엇의 대표입니까? 전 세계의 대표지요. 그러면 에스겔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전 세상이 애굽이며, 다 불태워져야 하고, 여기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서 장차 인자 되시는 분이, 에스겔 같은 기능을 하실 분이 이 땅에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성전 동편에 인자가 올 때, 인자가 누구 때문에 오는가 하면, 여호와의 신 때문에 오는 거예요. 요즘 말로하면 성령. 그렇다면 에스겔은 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 ‘인자 +성신’이 되겠지요. 이것이 에스겔이 해야 될 기능이라면, 예수님이 인자가 되시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는 공식이 신약 성경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에스겔을 공부하면서 ‘아하,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가셨고, 그래서 성령이 오셔야 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그리심 산에서 제사하지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성령이 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어요. ‘그 때가 지금이다.’ 라고 할 때 메시아(예수님) 자신을 두고 한 이야기지요.

이것을 에스겔을 보고 유대인들도 알았어요. 반드시 메시아가 오고 성령에 와야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메시아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성령을 끌고 오시는데, 메시아가 성령을 주게 되면 에스겔 37장 말씀같이 죽은 해골이 성신 받아서 군대가 됩니다. 이것을 이미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에서 붓지요. 이것은 구약 에스겔 47장의 재현입니다. 장차 성령이 임하시면 발목, 무릎, 허리로 해서 점점 물이 차올라 가득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온 이스라엘 땅이 생명으로 가득 차는 날을 기대하면서. 이것이 초막절 행사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등장해서 “너희들 뭐하는데?” “성령 오시기를 기다리는데요?” “내가 줄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고 하셨지요.

그래서 에스겔과 성신 이것이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와 인자와 성신이 하나가 되어서 성전을 이루고, 이 성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 2의 출애굽입니다. 제 2의 출애굽은 율법(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 메시아의 영이 와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이제 문제 냅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왜 있는 겁니까? 가인이 왜 있습니까? 아벨 속에 피의 제사가 있다는 것을 가인이 와서 아벨을 죽여 피를 흘려야 가인이 생명이 아니고 아벨 안에 있는 피가(아벨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인 것을 알게 되듯이, 솔로몬 성전은 깨어져야 됩니다.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이 왜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또 사람들은 묻지요? 그러면 아예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용하지 말지 왜 짓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주  되심은 창조가 원형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조 세계가 있으면 그 배후에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는 창조 세계를 깨고 등장할 때 비로소 그 원리가 드러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괴물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진짜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그 사람은 깨어져야 되고 죽어야 돼요. 그런데 자살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죽을 때, 십자가가 이 사람을 죽일 때 이 사람은 십자가에 딸려 들어가서 그 때부터 제대로 된 새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들어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 취급을 해요. 다른 사람은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그냥 흙으로 여기지요. 그러니까 현재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오직 복음이 있어야 그것이 사람이죠. 철학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는데, 생각을 많이 해도 스스로 신이라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없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일 뿐이지요.

모든 피조물들은 배후에 피조물이 있게 된 그 창조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2-3).”는 보이지 않는 소리를 품고 있단 말이지요.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언제 드러나는가? 깨어질 때 등장합니다. 레위기 공부할 때 했지요? 레위기의 진짜 본질은 언제 드러난다고 했습니까? 누구 문둥병 될 때. 문둥병 걸리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병 안 걸리면 재수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진 밖에 있다가 진 안으로 들어오면서 성전 안에서 어떤 행사가 벌어질 때,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아하, 나도 문둥병 걸려야 마땅하지만 긍휼을 입었구나.’하는 창조의 원리.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그 원리에 의해 내가 사는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대신 누구 한 사람 문둥병에 걸려야 하는 겁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한테 대들다가 문둥병에 걸렸지요. 진 밖에서 일주일 벌섰어요. 이것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지.’하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미리암은 남매입니다. 가족이에요. 온 가족이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하는 일은 숨어있는 창조의 원형을 보여주는 겁니다. 피조물은 누굴 위해서 만들어졌다? 주님 위해서. 그러면 미리암의 문둥병을 ‘까불지 말자.’ 이런 식으로 보지 말고, 그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문둥병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모든 성경 해석은 이렇게 해야 됩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시켜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됩니다. 또 하나, 한나가 아기가 없지요. 왜 아기를 없게 했습니까? 아기 없으면 그냥 살면 되는데, 첩(브닌나)이 아들을 낳고 본부인 한나를 핍박해요. 아들 없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하니까, 그 때 독이 올라서 울면서 성전에서 기도하지요. 이 때 하나님이 한나에게 아들을 주지요.

그러면 첩(브닌나)는 뭡니까? ‘나는 아들이 있고 형님은 아들이 없기 때문에 나는 복 받았고 형님은 저주 받았다.’ 이런 생각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태가 닫히면 저주다. 창세기에 그런 장면이 나오지요.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오해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브닌나는 자식 있는 것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키지만, 한나는 자식 없는 것을 창조의 원형과 연결합니다. 즉 예수님과 선이 닿은 겁니다. 어느 것이 복이겠습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사는 그 아브라함 언약 계통의 인간은 메시아를 만난 거예요. 한나가 아들을 낳은 후 그 아들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받치지요. 그러면 한나는 허상인데 기도해서 아들을 낳고 난 이후 자기가 실상이 되지요. 그러면 아들 가는 곳에 따라가야 돼요. 아들 가는 곳이 천국이라면 한나는 그곳으로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나 브닌나는 자식 키우다가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은 뭐냐? 어떤 사람은 지옥 가고, 어떤 사람은 천국 가야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어떤 이는 진노의 그릇, 어떤 이는 긍휼의 그릇이죠. 긍휼의 그릇의 특징은 뭐냐? 긍휼과 선이 닿아야 돼요. ‘나는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계셔서 이렇게 산다.’는 그런 선이 연결되어 있어야지, 내 힘으로 산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원망하고 복수하는 사람이 됩니다. 긍휼의 증거는 십자가에서 드러나지요.

가을에 빨간 고추를 따서 말린다고 시골 마당에 늘어놓지요. 다 말리면 자루에 담아서 농협에 납품하지요. 이 넓게 퍼진 것이 한 곳으로 모이지요. 이것이 바로 성경 해석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와 있지요. 그러니까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있는 모든 구절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성화주의가 아닌 바른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께로 갔다가 도로 우리에게 오면 안 돼요. 우리에게 오면 우리는 또 허상을 쥐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놓고는 ‘은혜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단 말이지요. 이렇게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옵니다.

그런데 나의 날개에는 눈이 없어요. 나는 피동적으로 관찰을 받아야 될 사람이지 내가 스스로 관찰한다는 것은 환상에서나 통할 이야기입니다. 나에게는 눈이 없어요. 우리는 소경입니다. 우리의 눈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 있고, 귀가 있는 것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달려 있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관찰 대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을 나는 열기구를 보았겠지만 그것을 보면 둥근 공은 위에 떠있고 그 밑 부분에 열을 발산하는 바구니같은 것이 있지요. 우리가 둥근 공이라면 주님은 열을 발산하는 바구니에 해당되는 겁니다. 떠 있는 공과 밑의 바구니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은 항상 바구니를 바라봐야 되는데, 즉 주님을 쳐다보는 이것이 바로 온유와 화평입니다.

주님을 보다가 갑자기 우리 자신을 보면 또 하나의 환상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잘 했고, 무엇을 잘 못했고 이렇게 또 다른 환상이 만들어집니다. 잘, 잘못의 기준은 누가 정합니까? 내가 정하지요.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기준이라면 나의 잘, 잘못과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기준이 된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난 여름수련회에서 레위기를 강의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아파트가 20층까지 있다면 집집마다 찾아가서 물어보라고요. 각 가정에 가서 물어보세요. 다 인생 고달프고 억울하고, ‘왜 나는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불평하지 않는 집이 있는지?

다른 사람들의 고민들을 들어보면 나의 고민거리는 고민할 문제도 아닙니다. 남들의 아픔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지극히 사소한 내 문제를 가지고 ‘우울증 거리겠다. 자살하고 싶다.’ 이러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자살하고 싶어도 약 살 돈이 없어서 자살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는 열기구 밑에 달려 있는 바구니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위쪽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쪼다가 되는데, 이런 자를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소자’라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열기구를 타고 같이 왔는데, 인상이 안 좋다고 해서 형제들끼리 싸우고 난리를 쳐요. 나중에 은혜를 받고 보니 둘 다 같은 열기구인데. 예수님의 피만 쳐다본다면 형제우애가 저절로 돼요. 왜냐하면 거쳐서 오기 때문에. 그런데 인상이 더럽다는 것은 내가 관찰해서 상대를 평가해서 그래요. 교회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아요.

기도하는데 목소리가 크다고 싫어하고, 옷 이상하게 입고 온다고 짜증내고. 산상설교에 나오지요. 내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띠만 본다고.

에스겔 10장에 있는 이 네 가지의 기능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체적이고 실재적이고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이 모아져서 심판의 힘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악마을 보았다]라는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유심히 봤는데 그 영화에 악마가 안 나와요. 그 영화에 사람을 죽여서 그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고 하는데, 그것을 악마로 본 거예요. 나쁜 짓하는 것을 악마로 보았다는 것은, 죄와 의를 구분하는 기준을 인간이 다른 인간과 비교해서 세웁니다. 이것은 내가 나에게 눈이 달려 있고,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가 된 거예요.

개혁주의의 문제점이 뭔가 하면, 내가 완성되고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판단합니까? 어제 내가 본 나와 오늘 내가 본 나를 자꾸 비교합니다. ‘어제는 술 마셨는데 오늘은 술 끊었다. 그러니까 나는 착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기준은 누가 정한 겁니까? 내가 정한 거예요. 그래서 이 개혁주의가 이단입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누가 정한다고요? 자꾸 사람과 비교하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와 비교해야 됩니까? 에스겔 10장에 나오는 그룹들과 하나님과 비교해야지요. 그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심판의 대상일 뿐이고,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죄인을 보고 ‘악마를 보았다’는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다 같은 악마인데. 둘 다 악마인데 뭘 악마를 봐요. 악마라고 규정하는 것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란 말이지요. 예수님만이 ‘너는 악마야. 그런데 내가 너를 구출해 내어서 구출된 거야!’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인자’라는 한 분의 이름에 전부 다 무릎을 꿇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때 그림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 모든 피조물의 다양한 이름은 오직 한 분의 이름 앞에서는 다 빛을 잃어야 됩니다. 박주영이 골을 넣을 때만 기도하지 말고, 자책골을 넣었을 때도 기도하고.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다 주님에게서 내려온 능력(열기구 바구니에서 나온 열)로 가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만 이것이 환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환상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실재가 되는 거지요. 예수님의 끈을 놓치는 순간(우리가 예수님께 눈을 떼는 순간)부터 우리는 환상 속에 빠집니다.

제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목사님, 어제 밤에 제 꿈이 이상했는데 그 꿈이 맞는 꿈입니까? 그 꿈 내용을 해몽해 주세요.’ 뭐 이런 종류의 이야기. 꿈을 꾸든 안 꾸든 우리 몸 자체가 환상인데 꿈은 당연히 환상이죠. 우리 자체가 꿈인데 뭘 더 따져요.

그러면 왜 우리는 꿈속에서 사는가? 꿈속에서 살면서 탄식하고 울라고. ‘아이고, 이 인간들아! 주님의 창조 원리도 모르고 자기를 기준으로 남과 비교하고---’ 어떤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을 아프리카에 보내보세요. 자살 하는지. ‘나는 가난해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 보니까 나는 부자네.’ 이렇게 되지요.

서울에 가난한 사람의 최저 생계비가 60만원이라고 하는데, 60만원으로 소말리아에 가보세요. 대단한 부자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문제는 자신에게 눈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눈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매일 성경을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 물어야지, 자기가 거울을 보면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이런 식입니다. 그러다가 기분 나쁘면 거울을 깨고.

이제 11장으로 넘어갑니다.
6-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살육하여 그 시체로 거리에 채웠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살육한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려니와 너희는 그 가운데서 끌려 나오리라.”

이게 뭐냐 하면, 남은 자가 예언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잡혀가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16절에 보면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합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새 언약은 문자대로 우리에게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는 겁니다. 앞에 심판 이야기 나오고 새 신이 나왔기 때문에 이 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 너무나 합당합니다.’ 라는 마음을 가질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마음을 가질 때, 이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개혁주의고, 목사고 모르겠고 ‘나는 저주 받을 사람입니다.’ 라는 말이 나올 때, 그 사람은 성령 받은 목사고, 성령 받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개혁주의가 어떤 신학인데 너희들이 함부로 말해!’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70이레’ 논문 발표할 때 제 옆에 앉은 교수가 하는 말이 “나는 그래도 역사적 해석법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어야지 역사적 해석법을 믿으면 안 됩니다. 제 논문의 결론은 ‘우리는 다 쓰레기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그 주장에 동의를 해야지요. 내가 보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교수고 박사고 다 소용없어요. 우리는 다 쓰레기입니다. 왜? 쓰레기 되어야 비로소 긍휼이라는 의미가 생깁니다. 이게 환상이 아닌 실제입니다. 외국에 유학 가서 철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해도 그것은 전부 쓰레기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긍휼을 고백해야 되고 자랑해야 됩니다. 성도라면.

A도 긍휼을 말하고 B도 긍휼을 말한다면 이 두 사람은 서로 소통이 되겠지요. 그것이 일치된 마음인데, 서로 환경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성격이 달라도 일치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 된다는 것은 억지로 친교하고 같이 식사하고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 입었음을, 그 은혜로 살아감을 고백할 때 하나 된 것입니다.

교회가 육적으로 일치된 것이 있어서 모이고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긍휼이라는 것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을 해도 육적인 욕심으로 했다면 서로 일치된 마음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둘 다 성령이 임했다면 그 때부터는 이혼해도 괜찮아요. 왜? 일치된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심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일치된 마음을 주십니다. 그럴 때 내 육신의 일치됨이라는 생각을 아예 싹을 잘라 버립니다. 어느 누구도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피를 나눈 것 때문에 우리는 다 같이 죄인 중의 괴수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공짜로 받은 자로써 우리는 한 형제라는 새로운 성소가 여기에 성립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멀리 각 지역에 흩어져 있지만 일치된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시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늘 환상을 찾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늘 기적적으로 숨어있는 진실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모든 것이 예수님 덕분이고 주의 은혜인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9. 15. 10:04 녹취 :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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