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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9 02:03:03 조회 : 3120         
110218 우상이란?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110218 우상이란?


음성1   음성2

 박온정(IP:211.♡.16.177) 11-03-26 11:26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광주/광주110218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광주/광주110218b.MP3
 서경수(IP:121.♡.190.225) 11-04-11 13:28 
광주 강의(2011. 2. 18) 15-1

오늘은 에스겔 14장을 하겠습니다.
14장의 내용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상 숭배의 죄 때문에 유다가 멸망했어요. 자, 그러면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겠지요.

먼저 우상 숭배의 죄가 뭔가를 생각해 봅시다.
십계명의 1계명과 2계명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이게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그리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러면 이 유다 나라가 우상 숭배를 안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이 우상이 뭐냐고 할 때 그 사람들은 오해를 한 거예요. 우상 타파가 우상을 섬기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감히 생각도 못한 겁니다. 즉 우상 부수기가 곧 우상 섬기기가 됩니다.

이단을 고발하고 이단이라고 폭로하는 그것이 곧 이단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을 그들은 십계명 받을 때 감히 생각도 못한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상을 공격하는 이것이 곧 우상 숭배로 이어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우상을 무엇과 비교해야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해야 되겠지요. 여호와 하나님과 비교하면 여기에서 우상이 나타나겠지요.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을 가지고 우상을 공격한다든지 우상을 철거하면 이것도 우상 숭배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여호와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우상 숭배를 안 했다고 우기는 그것이 곧 우상 숭배가 되는 겁니다.

구약을 보면 ‘우상 숭배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선지자에 의해서 그렇게 많이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상의 나라가 된 거예요. ‘우상 숭배 하지 말라.’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들은 자기가 우상인 줄도 모르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킨다고 행하는 하나하나가 곧 우상의 나라로 변한 거예요.

로마서 3장(19절)에 보면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지요. 그러면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우상 숭배 하지 말라.’는 것이 들어 있지요.

만약 정훈씨에게 “우상 숭배 하지 마!” 라고 했다면, 정훈씨는 우상을 부처 또는 조상 제사 이런 종류로 생각해서 교회 가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고 절에 가서 부처를 섬기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게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우상 숭배인 것을 정훈씨는 모르는 거예요.

교회 다님이 우상 숭배며, 더 나아가서 예수 믿는 것이 곧 우상 숭배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자기는 기존의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예수께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성경(행14:15)에도 있잖아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이것을 그대로 흉내 내는 거예요. 우상을 버리고 예수 믿는 것이 우상 숭배가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한 겁니다. 그러면 이들이 우상을 버리고 예수 믿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것을 생각 못한 이유가 뭘까요? 본인이 예수에 대해서 알고 여호와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된다.’ 이 조건을 주님께서는 우상 숭배라는 계명을 통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고 기록된 글에서의 ‘나’와 ‘나는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그 ‘나’는 같은 ‘나’일까요? 다릅니다.

‘내가 밥을 먹는다.’하고, ‘내가 밥을 먹는다고 말하는 나’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다. 밥을 먹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나가 또 있어요. ‘나’가 달라요.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나는 예수 믿습니다.’ 라고 자부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누가 주장합니까? ‘나’라는 우상이 주장한다니까. 예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기에 구원 받는다.” 라고.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스겔 14장)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가 뭔가? 한 가지 이유뿐입니다. 우상 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가 십계명 중 몇 계명입니까? 1계명과 2계명이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을 제대로 지키려면 우선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의 차이를 아는 사람에 한해서만 그 말씀을 지킬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에 식혜와 딸기가 있는데 “정훈씨는 식혜 먹지 말고 딸기 먹어.” 라고 한다면, 정훈씨는 식혜와 딸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면, 여호와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요. 하나님은 하나님만 알지 인간은 몰라요. 그런데 인간들은 여호와를 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알고 있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전부 우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가 아는 여호와와 백성들이 아는 여호와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그 다른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지요.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죄, 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이 책망의 대상이 되지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죄, 의, 심판 이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이 누굽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누구와 비교한 것입니까? 예수님 몸과 비교한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김을수 집사님의 넥타이가 보라색입니다. 그런데 오늘 김 집사님이 참석을 안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김 집사님 넥타이는 빨간색이야.” 또 다른 사람은 “아니야, 검정색이야.” 서로 싸운단 말이지요. 그런데 김 집사님이 직접 나타나니까 넥타이 색깔이 보라색입니다. 두 사람 다 틀렸어요.

이것이 단순히 넥타이 색깔이라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점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10명이 있으면 10명의 하나님이 다 다르다니까요. 그런데 10명 모두 진짜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녹매교회 어떤 성도님의 글에 “쓰레기 속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쓰레기로 노출시키는 그 자체가 보물이다.”라고 했어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지혜인지 모릅니다. 나로 하여금 내가 우상인 것을 누가 알려주겠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아는 것이 옳고 남이 아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상인 것을 알려주는 그 자체,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책망하지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는 우상을 어떤 모습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모습이 아니고 기능(죄인을 부르러 오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죄인 여기 있습니다.’라고 나서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왜냐? “저 죄인입니다.” 라고 나서는 것은 누구 기능입니까? 예수님 기능입니까, 내 기능입니까? 자기 기능이잖아요.

내가 어떤 기능을 발휘해서 그 기능 때문에 내가 구원 받고자 할 때 그게 바로 우상 숭배라니까요. 예수님이 구원해야 되는데 예수님 말씀을 듣고 우리는 그 말에 내가 (행동해서)맞추려고 할 때 그게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지금 중요한 대목이 나왔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형상은 하나님답지 않은 것을 우상이라고 봅니다.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지요. 산 밑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아론이 있었지요. 아론은 무슨 일 했습니까? 여호와를 만들었지요. 여호와의 속성, 자비로움, 능력, 위엄을 생각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었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내산에 있는데 위에는 모세가 올라갔고, 산 밑에는 아론이 있습니다. 그 아론은 여호와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바알을 섬긴 것도 아니고 부처를 섬긴 것도 아니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이것을 만든 이유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성품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황소가 우상입니까, 모세가 아는 여호와를 모르는 것이 우상입니까? 모세가 알고 있는 여호와를 모르는 것이 우상입니다. 이 말은, 아론과 그 밑에 있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우상 숭배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이 우상 숭배자란 것을 언제 압니까? 모세가 여호와를 만나고 위에서 내려왔을 때 비로소 “아하, 우리가 우상을 숭배했구나!”를 알지요. 이 만남을 언약이라 하고, 이 언약을 ‘모세 언약’이라고 합니다.

자, 질문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가 우상이라는 것을 모세가 산에서 내려온 후 일단 인정했지요. 하지만 그들이 뭘 모르는가 하면, 어째서 인간이란 육 안에서 자꾸 가짜 여호와가 새록새록 만들어지는지를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모르지요. 언제까지 갑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나눠져서 나중에는 둘 다 멸망당했을 때, 그 때 우상 숭배라는 개념을 새롭게 이해를 해야 되지요. 우리는 출생 자체가 우상 숭배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에게 오면 우리는 평생 할 일이 있어요. 죽을 때까지 ‘우상 숭배는 이런 것입니다.’라고 내놓는 작업을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데 이것이 우리의 남은 인생입니다.

‘아비나 어미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마10:37)’ 라고 하시면서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있어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내 남편 내 자식을 왜 사랑합니까? 엄마가 훈이를 왜 좋아합니까? 남의 자식이면 좋아하겠습니까? 내 자식이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좋은 거예요.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아름답게 보이잖아요.

결국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상 숭배의 죄가 터져 나오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가장 놀랄 일은 ‘내가 바로 우상 숭배자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내가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우치도록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이 일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의 재미입니다.

이것을 평생 폭로시켜주시는 그 고마움, 그래서 죽을 때 ‘내가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구나.’라고 하면서 죽는 거예요.

아까 조 집사님과 식사 중에 나눈 대화에, 사경을 헤매는 시어머니가 다른 것은 기억 못해도 아들과 며느리 이름은 기억한다고 해요. 왜 그런가? 그것이 구원의 마지막 밧줄이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결코 아들 사랑도 아니고 며느리 사랑도 아니고 자기에 대한 집착입니다.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해.’ 주변에 이용할 사람이 두 사람(아들, 며느리)밖에 생각이 안 나니까.

그래서 예수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님 왈 “그런 자기를 부인하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떡을 얻어먹고 예수님을 안 떠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된다.” 다시 말하면, 떡 먹은 관계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암 결렸는데 안수해서 암 나았다. 그것으로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개척교회 5년 만에 3,000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것으로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분명히 떡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문제는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예수와 관계있는 나를 우상화 시키는 이유가 됩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예수 믿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라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할 때 앞에 뭐가 붙지요. 믿음의 주체 누가? ‘내가.’ 그래서 내가 예수 믿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죠. 이 말은, 내가 예수 믿는 것은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괜히 예수 믿어서 행운이나 따 내겠다는 심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장악하게 되면 ‘내가 우상 숭배자다.’라는 모세 율법도 완성체로 우리에게 와요. 그때부터 왜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인이며, 우리의 구원은 율법 외에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게 되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이 피 안에 ‘다 이루었다.’가 들어 있어요. 이 다 이루심이 우리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그 ‘다 이루었다.’ 속에 모세 율법이 들어있어요. 다른 많은 것도 들어 있지만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주제가 우상 숭배잖아요.

‘우상 숭배하지 말라.’가 모세 율법이고,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이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오게 되면, 우리 안에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상숭배 하지 말란 말이야.’라고 죄를 지적하는 것이 오겠지요. 그리고 죄가 더해지면 그 죄인이 자기 행함으로 구원 되는 것이 완벽하게 차단되겠지요. 왜? 계속 죄를 지적하니까.

죄인이 자기 구원 받는데 기여한 것이 있을까요? 없지요. 왜? 계속해서 죄인으로 지적 받으니까. 그러면 남는 것이 뭡니까? 오직 이 사람을 구원한다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만 계속 드러나겠지요. 바로 예수님의 사랑, 은혜, 용서만 계속 드러나는 것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기능입니다. 이 기능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한테 우상이 됩니다. 왜냐? 존재 대 존재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예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이것이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존재가 문제가 아니고 존재가 기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기능?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말씀에 준에서 죄 아닌 것이 없음을 낱낱이 지적해 내는, 쓰레기를 쓰레기로 드러내는 그 모든 활동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런 죄도 정죄함이 없느니라.’ 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퍼내는 거예요. 그런 기능만이 우상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 그림, 예수님 액자, 예수님 십자가 이 모두가 우상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나, 예수 믿는 너, 전부 우상이 되겠지요.

이것을 우상이라 하는데, 현대인들은 이런 표현을 잘 안 쓰는데 이것을 철학적 용어로 하면 ‘환상’이라고 하고, 성경에서는 ‘허망한 것, 헛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모든 존재’ 또는 ‘존재를 존재로 보는 것.’ “저 사람은 신자일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우상이고 그 사람도 우상이고 다 우상입니다. 주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니까 나오는 결론이 뭔가? 현대판 우상은 바로 교회가 되겠지요. 우상이 곧 교회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 안 나가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교회 나가야 교회가 우상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였다는 그것이 곧 우상인 것을 주의 이름으로 모여 봐야 아는 거예요. 화평교회처럼 이렇게 모여 봐야 아는 겁니다. ‘화평교회도 허상이고 환상인데 그곳에 왜 가?’ 라고 합니다.

이번에 구정(설) 사태에서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어요. ‘십자가마을이 허상인데 왜 자꾸 붙들려 하는가?’ 이 말이 얼마나 무식하기에 나온 말입니까? ‘십자가마을이 우상인데 왜 이 목사는 그것을 지키려 하는가?’ 교회 안 나가면 자기가 우상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해요. 우리교회에 그런 분 많습니다. 교회 안 다녀도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교회 안 나와요.

우상이 곧 교회고 교회가 곧 우상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우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상인 교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고, 우상 숭배자인 인간들이 교회에 모였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우상 아닌 것이 뭡니까? 바로 이렇게 하게 하는 그 기능. 그런 기능을 하시는 분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결국은 눈에 안 보이는 주님.

주님은 누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이야기하잖아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이 바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행22:8).”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 인물 맞지요? 나사렛 예수가 주님이 되었지요. 주님이 되었으니까 주님은 나사렛 예수 맞습니까, 아닙니까? 같은 분이죠.

같은 분인데 이 땅에 나타날 때는 나사렛 예수로 나타났는데, 그렇게 나타나게 하시는 모든 기능이 주 되심의 기능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이 땅에서 어떤 역사도 없다는 말은 잘못된 거예요. 이 땅에 역사가 있어요. 있는데, 그 역사마저도 주님의 기능 되게 하시는 그 기능을 누가 발휘한다? 주 되시는 분이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제가 개혁주의 신학회에서 논문 발표할 때 어떤 분이 질문했지요. ‘그러면 역사는 없단 말입니까?’ 라고. 이게 오해입니다.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역사가 있지만 그 역사에 얽매이지 않는 그 기능이 있어야 그게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울과 예수님의 만남은 역사적 사실 맞지요? 그러면 사울과 예수님이 만난 장소를 성지순례 해야 되나요? 아니지요.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으면 우리도 다메섹에 가야 예수님 만납니까? 주님의 기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에 참여하는 분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식으로, 저 사람에게는 저런 식으로.

이수정 집사님이 설거지 하면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요.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그런 내용이 있었지요. 주께서는 (포로 잡혀)고난 받는 사람과 함께 가면서 그 자체를 계시로 만듭니다. 우리는 계시를 지키려고 해요. 우리가 지켜봐야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지켜서 뭐 할 건데요? 지키면 비로소 ‘나는 예수를 안다.’ 이렇게 되지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를 알아요. 그래서 이 우상숭배라는 것이 이렇게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아직 안 끝났어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우리 인간 자체가 우상입니다. 사도바울은 ‘우상 숭배’를 ‘육’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육’이 ‘육’되게 드러나게 하는 그 기능은 뭐라고 합니까? ‘영’이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 인생은 육의 순환구조를 갖고 있고, 주님은 영의 순환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순환구조라는 것은 회전목마를 생각하면 됩니다.

먼저 육의 순환구조를 봅시다. 육의 순환구조는 육부터 시작합니다. 나부터. 나(내)가 누굴 믿는다? 나(내)가 예수를 믿는다. 예수 믿을 때 잘 믿는지 아닌지 확인을 누가 합니까? 내가 하겠지요. 그러면 이미 나는 ‘예수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에 대한 기준’이 서 있지요. 그 기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지요.

모세가 알았던 것 말고 밑에 아론이 알았던 것이 우상 숭배잖아요. ‘잘 믿는가, 못 믿는가?’를 판별하는 기준은 선악 기준입니다. 선악 기준이니까 자기가 보기에 ‘선하다, 악하다.’로 나눠서 예수를 잘 믿으면 선한 것이고, 예수를 잘 못 믿으면 악한 것으로 보겠지요. 이런 순환구조를 가지고 자기에게만 적용합니까, 남에게도 적용할까요? 남에게도 하지요. 이게 육의 순환구조입니다.

딸기와 식혜가 여기 있는데, 전기 불을 꺼서 깜깜하면 어느 것이 딸기고 어느 것이 식혜인지 모르지요. 그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딸기가 식혜에게 “내가 식혜야. 넌 딸기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식혜가 “내가 식혜야!” 라고 소리칩니다. 어떻게 판단합니까? 그 때는 불을 켜면 빛이 오게 되고, 그러면 둘 다 각자 자기 기준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을 알지요. 빛 앞에서.

빛 앞에서 우리는 모두(요한 3장) 어둠이죠. 그러면 진짜 빛을 본 사람은 빛을 보고는 ‘우리는 둘 다 어둠이네.’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둘 다 어둠이면 누가 누구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따질 수가 없지요. 이걸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너희를 송사 하리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귀가 누구를 정죄할 때는, (마귀는 빛을 싫어하니까) 빛을 끊어버리고 선악과 차원에서 정죄를 합니다. 마귀는 생명나무 동네에서는 안 놀고 선악과에서 놀라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죄인이다.’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어떻게 죄의 종이 될 수 있는가?’ 라고 했지요. 그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 아비가 악마기 때문에 너는 악마 짓을 할 수밖에 없다.” 주님은 우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악마와 상대하고 계십니다.

육의 순환구조는 결국 악마의 뜻입니다. 이 신학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잘 믿고 있는지, 잘못 믿고 있는지를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다는 그 순환구조가 바로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이단입니다.

확인을 누가 한단 말입니까? 자기가 납득이 되도록 확인하겠다는 거지요. 그래서 박00 목사의 경우에는 예수 잘 믿는지를 날마다 윤리 도덕으로 확인해 보라고 하잖아요. 확인해 보면 결국 육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영의 순환구조가 있어요.
육의 순환구조는 ‘나’라는 존재가 ‘예수’라는 존재를 믿고 의지한다고 해요. 여기서 존재가 나오지요. ‘나’라는 존재가 없어집니까, 안 없어집니까? 안 없어지지요. 왜? 내가 믿어야 하니까. 내가 믿어야 하는데 내가 없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예수’의 존재는 뭐가 되는가 하면, 대상이 돼요. 마주보는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여기 딸기 참 예쁘다.”라고 하면, 만약 딸기가 살아 있다면 “네가 뭔데 날 예쁘다고 해?” 라고 나올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묵살하지요. “내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아!” 이렇게 되잖아요. 우리가 상대방을 미워할 때 뭐라고 합니까? ‘이런 것 때문에 미워한다.’고 하지 않잖아요. “나는 당신이 미워!” “왜 미운데?” “내가 밉다니까.” 이것을 ‘대상의 살해.’라고 합니다. 죽이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와 관련이 있어요.

예수님을 왜 죽이는가 하면, 내가 우상 숭배자이기 위해서는 하늘아래 신이 둘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사랑의 대상이 둘이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자기만 사랑하라.’고 한 예수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 사랑을 찾을 길이 없다니까.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내 사랑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를 죽여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요.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아벨이 제사 안 드렸으면 죽일 일이 없었어요. 문제는 자기(가인)도 제사 드리고 동생도 제사 드렸는데 두 제사 다 하나님이 안 받았으면 아무 문제없었어요. 내 것은 안 받고 동생 제사만 받으니까 동생이 없어져야 내 존재가 의미가 있잖아요.

하유미라는 탤런트를 압니까? 홍콩으로 시집간 사람이 있어요. 하유미가 눈이 좀 튀어나오고 해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하유미가 연평도 폭격할 때 연평도 주민을 위해 구제금을 많이 기부했어요. 미워했던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위선 떨고 있네.” 이렇게 나오지요. 왜? 하유미를 싫어하니까 그가 한 일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죽이는 주체가 누굽니까? 나라는 존재가 상대방을 죽여 놓아야 비로소 그 사람을 내가 다룰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다루는 신이 바로 ‘우상’이에요. 예수도 우상이고 여호와도 우상이고. 왜? 결코 나는 내 스스로 죽을 의사가 없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오직 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거지요.

10분 쉽시다.

(2011. 3. 1. 16:48 녹취 마침)
 서경수(IP:121.♡.190.225) 11-04-11 13:28 
광주 강의(2011. 2. 18) 15-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14장 7-8절을 봅시다.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그 사람을 대적하여”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그 사람을 대적’한다고 합니다. 즉 ‘자기를 위하여 여호와께 나오는 자를 대적’한다고 하십니다.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거지요.

사람이 여호와께 묻는다는 것은, 출발점이 자기가 아쉬운 것, 미흡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여호와께 나오지요. 그러면 자기라는 그릇을 깰 용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체 없지요. 자기라는 그릇을 더욱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사람을 하나님이 대적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여호와의 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뭘 요구하십니까? 자기를 위해 살지 말 것을 요구하지요. 그러면 여호와의 적이 아닌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자지요. 그리고 여호와를 위해 사는 자입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살아난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아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자기 존재도 사라지고 자기 존재를 대신한 존재,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이 자기 존재의 대신이지요. 그러면 나의 존재가 없어지면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예수님 몸이 되게 하시는 기능(일)만 계속 일어나겠지요. 그게 느끼지는 거예요. 아침에 출근했으면, ‘오늘도 주님께서 출근케 하셨구나.’ 모든 기능이 주께서 주를 위한 기능으로 다 움직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해당되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롭다는 것은 아주 특이하다, 이상하다는 말이죠. 세상에 이런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손댈 경우에만 발생되는 희귀종이 ‘새로운 피조물’인데, 이들의 특징은 자기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를 이용해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그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이죠.

이 사랑은 우리 사랑이 아니고 주께서 날마다 살게 하시는 사랑, 영원히 살게 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들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여호와의 적이 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날마다 ‘나를 위해 살게 하심’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성령 못 받은 사람은 이 말을 이해 못합니다. ‘막 사는 것’과 ‘나는 막 산다.’가 같은 말이 아니에요. 내가 막 산다고 할 때는 이 사람은 뭘 압니까? ‘막 사는 것’과 ‘막 살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사람이죠. 구분하는 자체가 이 사람은 막 사는 사람이 아니죠. 자기 기준에 맞춰서 막 사는 것이지 남들 기준에 막 사는 것은 아니죠. 진짜 막사는 사람은 기준이 없이 막 사는 사람이잖아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항상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막 사는 모습으로 느껴지게 되어 있어요. 왜?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막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행동과 윤리에 따라서 구원의 근거를 쥐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데모할까, 말까?’ 이것을 가지고 강요된 선택이라고 합니다. ‘강요된 선택’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강도가 와서 하는 말이 “돈을 내 놓을래, 생명을 내 놓을래?” 라고 했습니다. 훈이 대답해 보세요. “돈 내 놓겠습니다.” 그렇지. 왜냐하면 생명 내 놓으면 가진 돈도 소용이 없잖아요.

분명히 강도는 선택을 하라고 했습니다. ‘돈이냐, 생명이냐?’ 라고 했지만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강요된 선택이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죄인이다.’라고 하실 때는 ‘죄 지을 거냐, 안 지을 거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너는 어떻게 살아도 막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살아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너는 내가 끄집어내지 않으면 마귀 집에서 못 벗어나는 가구였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니면 너는 죽었어!’ 라는 것이지요.

새로운 피조물이 뭡니까? ‘나는 예수님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어!’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아니면 나는 벌써 죽었어.’라는 말을 할 때, 이 사람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산다는 말입니까? 벌써 죽은 사람을 위해 살 필요는 없잖아요.

만약에 내가 죽은 자로 살아 있다면 나는 강요된 선택이 아니고 날마다 그냥 선택하겠지요. 주께서 무엇이든 주시면 ‘나는 죽어야 마땅한 자입니다.’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뭔가? ‘죽어야 마땅한 자를 예수님이 살리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신약에 나오는 이런 고백들을 영글어 내기 위해서 구약 때 에스겔이 쫙 깔려 있는 겁니다. 에스겔에서 여기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다.’라고 한 것은 ‘이제 그러면 나를 위해 살지 말라야지.’ 이런 뜻이 아니고, 이것은 강요된 선택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이 말씀 하나하나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우상숭배자며 나는 평생을 살면서 날 위해 사는 자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되고,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으면 이것은 강요된 선택이 아니고 나의 의지로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취지와 다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미 강요된 팔자입니다. ‘너는 나가 죽어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우상이란 예수님 아닌 자가 벌이는 기능입니다. 그러면 우상중에 어떤 것이 포함됩니까? 1) 예수 믿기  2) 교회 다니기  3) 기도하기  4) 전도하기. 이 모두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면 이런 반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우상 숭배라면 교회 안 다니고 전도도 안 할 거야.’ 라고.

이렇게 되면 ‘내가 바로 우상이구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내가 우상숭배자이고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기피해 버리는 겁니다. 떡이나 얻어먹고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예수님과 같이 다니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개척교회 목사들이 항상 하는 소리가 있어요. ‘왜 복음대로 했는데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이것이 제대로 된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구조인가 하면, 내가 아쉬운 것, 내가 필요한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복음을 믿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챙기면 그것은 복음이고, 그래도 내 원하는 것이 안 채워질 때는 복음이 아니라고 자기가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육의 순환구조입니다.

육 자체가 아무리 영을 뚫으려고 해도 되지 않아요. 그래서 육에서 육으로 끝나고 말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 ‘역시 복음은 개혁주의 신학의 최고다.’ 라고 합니다.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이 최고지요. 왜?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었다고 믿고 싶어서. 예수님 죽은 것도 날 위하여, 부활하신 것도 내 구원을 위해서. 즉 ‘자기를 위해서’를 포기 못하는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에스겔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은 우상 숭배자니까 이제 우상 숭배자답게 곱게 포로 잡혀 가다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로 잡혀 가면 누가 동행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동행합니다. 이 말은, 죄 속에 거룩한 분이 함께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저주받는 곳이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사울(예수님 만나기 이전)은 그 의미를 몰랐어요. 그저 사람 손에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죽였던 그 사람들은 자신이 우상 숭배자가 아니라고 여겼던 거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면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행5:30)를 거론합니다. 출발점이 뭔가 하면 육의 순환구조가 아니고 영의 순환구조거든요.

육의 순환구조는 나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거쳐서 나로 돌아오지요. 영의 순환구조는 예수님의 몸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몸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영이라 해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음 중 옳은 것은? 1) 성부로 시작해서 성부로 돌아온다.  2)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로 간다.  3) 성령으로 시작해서 삼위일체로 간다.  4)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삼위일체 영광으로 간다. 여기에 정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2번이 정답인 것 같은데 이것은 칼 바라트 신학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존재로부터 시작해서 존재로 가는 겁니다.

성경에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께로 가는데, 이 주 안에는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기능이 있습니다. 십자가지지 아니하면 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복음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그 예수를 하나님이 개입해서 주가 되게 하신 거예요(행5:30-31).

그러면 주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십자가가 포함이 된 거예요. 십자가지지 아니하면 결코 주가 될 수 없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 6-11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번(성부로부터 시작해서 성부로)은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2번은 칼 바르트 신학이라고 했죠. 3번은 러시아 정교회의 주장이고, 4번은 천주교, 감리교, 기장측입니다. 이 모두는 정답이 아니죠.

정답은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것은 로마서 11장(36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라는 것입니다.

육의 순환구조가 따로 놀고 영의 순환구조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영의 순환구조는 영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으로부터 출발하지요. 이 육의 순환구조가 예수님의 몸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영의 순환구조가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겁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다는 겁니다. 영의 순환구조에 누가 개입한 겁니까? 인간이 개입하는데 개입할 때 어떻게 하는가? 감사로? 찬양으로? 아닙니다. 사람을 나무에 달아 못 박는 거예요.

얼마나 미웠으면 못 박았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미워도 사람을 못 박아 죽이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지독히 미워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걸 교회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인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 그러면 교회 다니는 것이 죄가 되니까.

사실은 늘 우리가 예수님을 못 박으면서. “예수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 늘 이렇게 미워하고 못 박잖아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가 되는데, 하물며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죄가 되겠지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미워하니까.

예수님 지신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너는 지금도 살 자격이 없어. 하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사는 거야. 죄가 더한 곳이 이렇게 은혜가 넘치는 거야.’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으로 살게 하십니다.

육의 순환구조와 영의 순환구조가 항상 이렇게 충돌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들이 유발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에스겔의 취지는 하나님의 이름이 포로 잡혀 간다. 이름이 포로 잡혀 가면-- 성전은 무엇이 있는 곳?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는 곳.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이 임한 곳이 성전이 됩니까? 이름이 임하는 곳이 성전이 됩니다.

주께서 졸지에 오시게 되면 나는 천하의 죄인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포로 잡혀 가지요. 주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가 죄에 포로 잡혀 있던 인간인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짓이 날 위해 한 마귀 짓이었구나. 앞으로도 육이 있는 한 계속 그 짓이 나오겠네.’ 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모독하다니’ 라고 느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을 일깨워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포로 잡혀 감으로 써 포로 잡혀 가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포로 잡혀 간 사람이 구원 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포로 잡혀 간 사람이 구원되는 겁니까? 후자지요. 서울대학 들어 간 후에 공부 잘 한 거예요,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 간 거예요? 후자지요.

넣어 주신 분이 누굽니까? 우리가 넣어 달라고 부탁해서 넣어 준 것입니까? 포로 되게 하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포로 되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포로 잡히게 하신 것도 하나님 이름 뜻이고, 거기서 건지는 것도 하나님 이름 마음대로. 이것이 바로 새롭게 건설 될 성전입니다.

이 성전에는 구석구석 주의 이름만 높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묻지요? ‘너희가 누구 이름 부르지?’ ‘저희는 주의 이름 부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의 속속들이 주의 소유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좋은 편]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점은 뭔가? 마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예수님을 강제로 끼워 넣으려 했고(예수님은 내 일의 일부고), 마리아는 자기 일이 없어요. 지금 예수님 앞에 말씀 듣고 있는 이것이 장차 구원 받을 자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님 턱 앞에 있는 것 자체가 자기 일이 아니고 예수님 일의 일부로써 살아가는 그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알게 된 거예요. 자기 일에 분주한 것이 주의 일이 아니고 그 새로운 질서에서는 그냥 주의 일을 주의 일이라고 느끼는 자체가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에스겔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확실해 집니다. 구약이 신약과 별개의 것이 아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공통성이 같은 일을 하시는 거예요. 선지자 중에 예수님의 영을 받지 않은 선지자는 없습니다.

에스겔은 1) 포로 잡혀가게 한다.  2) 이 포로 잡힌 것을 하나님의 이름이 구원한다. 

포로 잡혀 가는 이유가 뭡니까? 우상 숭배지요. 그러면 우상 숭배로부터 구원하게 되면(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나 바깥의 대상으로 봅니다)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 되지요. 이 기능이 율법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이(바깥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역사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포로 잡혀 갈 수밖에 없는 죄인(우상 숭배자)인데, 매일 포로 잡혀 가고 매일 구원 되고, 다음 날 되면 우리는 또 세상에 포로 잡혀가고, 주가 구원하시고.

14장 14절을 봅시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말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체 구원입니다. 개인 구원은 아니에요. 그런데 노아, 다니엘, 욥 개인이 튀어나왔다는 말은 무엇이 와해되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은 잊어버려라. 전부 개판이다.’ 라는 겁니다.

왜 단체인가? 왜 개인 구원은 안 되는 겁니까? 신약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되어 있지요. 왜 단체인가 하면, 노아, 다니엘, 욥은 의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의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전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영향력도 못 미칩니다. 처음 이스라엘 만들 때는 아브라함 한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아브라함: 많은 백성의 아버지).

언약 구조 안에 아브라함 본인만 구원 되게 되어 있습니까? 이게 아브라함 언약입니까? 아니지요. 아브라함이 의로우면 아브라함 밑에 있는 자식들도 전부 자동적으로 의롭게 되어 있어요. 그게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한 사람만 의로워도 다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그런 혜택이 아브라함 언약의 요소입니다.

이스라엘이 12지파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두 개로 나눠졌습니다. 밑에 유다는 두 개 지파, 북쪽 이스라엘은 열 개 지파. 어느 것이 질이 더 셉니까? 북쪽이 더 세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북쪽을 일찍 멸망시켰어요. 유다에는 뭐가 있습니까? 다윗의 등불이지요.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와 합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알아서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이들은 다윗 언약을 무시했어요. ‘다윗이 의롭게 된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다윗과 자신들의 차이점을 몰랐어요. ‘다윗이 열심히 하면 자신들도 열심히 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어요. 다윗이 열심히 해서 내가 혜택을 받는 것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할 때, 예수 잘 믿는 나 때문에 내가 구원 받지요?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나는 전혀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데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오직 예수만 자랑하지요.

언약 자체가 단체로 구원 받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오직 단체 그 자체가 영광 받기 위함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케 하는 여호와 이름만 영광 받기 위해서 이렇게 다수를 깔아놓은 거예요. 오직 한 분만 쳐다보도록.

에스겔에서 다시 오실 메시아를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다윗’이 다시 온다고 했어요. 그러면 현재 포로 잡혀 가는 이스라엘은 다윗의 혈통입니까, 아닙니까? 혈통은 다윗 혈통이지만 구원 받을 사람인지 아닌지 모호하지요?

다윗이 다시 오게 되면, 여기서 중요한 개념 하나 집어넣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형상’ 이것을 이사야에서는 ‘창조’ 라고 했습니다. 이 창조는 어떤 창조인가 하면,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지요. 이 창조력이 미치는 사람만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창조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이 창조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 예수님께서 주가 되셔서 창조력이 나오는 거예요.

로마서 4장 25절을 봅시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 범죄 때문에 자기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달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스스로 창조를 했고, 스스로 생산력을 발휘 했지요. 그 다음 우리 의로움을 위해 살아났지요.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입니까? 예수님 소관이죠. 예수님 소관인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구원 받아요.

이삭이란 존재는 아브라함 생각 속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이삭이 올 때 아브라함의 혈통(또는 육신)과 상관이 없지요? 그러면 이삭은 무엇과 상관이 있습니까? 약속과 상관이 있어요. 이삭은 없는데서 생겼지요. 그 다음 죽은데서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지요.

이 이삭의 모습이 뭘 보여주는가 하면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메시아. 이 메시아는 어떤 기능을 한다? 없는 분이 오셨고, 십자가 죽으셨는데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절차를 밟는 사람만이 하늘나라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옛날에 우리가 상상했던 그런 피조물이 아니에요. ‘나는 예수 믿고 교회 충성해서 집사, 장로 되어서 봉사하다가 천국 가야지.’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내가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지?’ 라고 느낄 때, 없는데서 있게 하고, 예수님 때문에 같이 죽고 예수님 살아나실 때 같이 살아난 것이 믿어질 때, 누구의 생산력이 우리에게 닥쳐온 것입니까? 주님의 생산력이 찾아온 거예요. 이것이 예수 믿는 시점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한평생에 죽고, 또 살고 --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에서는 우리를 살았다고 하는데 왜 당신은 자꾸 죽었다고 하는가?’ 라고 따집니다. 늘 죽고 늘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살았으니까 죽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는데 그것은 ‘살게 된 나를 쥐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살아난 내가 좋아서 그것을 쥐려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에스겔 전체의 흐름에 보면, 방금 이야기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질문 드립니다. 왜 우리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가요? 사법 연수원에 학생들 열심히 공부하지요. 의과대학 학생들 공부 많이 하지요. 음악대학 학생들 악기 많이 연습하지요. 그게 왜 죄입니까? 가수 지망생에 노래 연습하는데 왜 죄가 될까요? 이상하지요? 우리가 열심히 직장생활 하는 것이 왜 죄가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과 의와 영광이 생산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과 의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땀 흘리고 노력해도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왜?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기능이기 때문에. 기껏 그 기능은 이 척박한 환경에서 그냥 밥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도 신기해요. 지금까지 무슨 재주를 부려서 밥 먹고 살았는지 신기합니다. 요즘같이 직장 구하기도 힘든 세상에. 오 목사님은 더 신가하지요. 사모님과 이혼하면 어떻게 살지 궁금합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교육할 때 어떤 것을 가르칩니까? ‘이것 열심히 배워야 앞으로 밥 먹고 산다.’ 이것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것이 우리 뜻이지 하나님 뜻입니까? 아무리 애써도 우리 영광은 되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과 의와 영광은 우리 이름으로 생산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신 것은 주의 이름이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의 이름이 벌이시는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십자가 지실 때 주님 보시기에 영광 안 되는 존재로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주께서 성령 주셔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고 영광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 3. 11. 17:4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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