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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3 01:51:55 조회 : 2936         
110722 언약과 죽은 신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에스겔 19장 음성1  음성2
 서경수(IP:121.♡.190.225) 11-07-28 12:01 
광주 강의(2011. 7. 22) 20-1

에스겔 19장 1-2절에 보면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자는 수컷이 아니라 암사자인데, 이것은 밑에 있는 자식과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식들이 혼자 잘못한 것이 아니고 그 위부터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것이 연결되어 줄줄이 자기 속성을 드러내는데, 그 속성이 3절에 나옵니다. 

3절에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젊은 사자의 속성은 사람을 삼키는 것인데, 이것이 자기 어미를 닮아서 어미의 품성을 그대로 발휘하다 보니까 사람을 삼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더러운 버릇을 누가 관리를 하는가?

4절에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궤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여기서 이방은 이방인이죠. 그러면 암사자는 뭐고, 젊은 사자는 뭔가? 여기에서 동물이 나오지 않고 민족이 나오지요? 그런데 동물로 표현을 해 놓았어요. 이렇게 하면서 이것을 ‘애가(슬픈 노래)’라고 합니다.

이 슬픈 노래가 이방 민족에게는 슬픈 노래가 아니라 즐거운 노래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 애가를 지은 당사자는 그동안 자기가 지도자, 왕, 통치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통치자도 아니고 제대로 된 지도자도 아니고 기껏 성질 더러운 사자 무리였단 말이지요.

이 사자는 사람을 물어뜯는 성질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슬픈 노래’라고 하는 거예요. 왕과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슬프다는 말인데, 이것을 에스겔이 이야기합니다.

요즘 같으면 진중권씨나 촛불 집회의 주도자 이런 사람인데, 이런 자들은 국정원에서 잡아갈 수 있지요. ‘여러분은 대통령을 잘못 뽑았습니다. 여러분이 뽑은 대통령이 여러분들을 사자처럼 달려들어 여러분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이런 사자들은 누가 상대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안 되고 저쪽 북한이나 일본, 중국에서 우리를 덮쳐서 포로 잡아가면 비로소 우리는 그제야 ‘우리가 잘못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안다고 에스겔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기생 라합이 자기 민족을 배반하는 것과 같은 차원이죠. 배반하는 정도가 아니라 팔아먹었다고 볼 수 있어요. 매국노지요. 적과 내통했는데 나중에 여리고 성이 함락되면 1등 공신이 되는 거예요. 이런 라합의 행동을 야고보서 1장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로마서에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바탕(자기 자리)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믿음에 합당한 행함입니다.

기생 라합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도 있지요.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쳤는데,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쳤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바치는 제물 없이는 나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구원될 수도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겁니다. ‘주께서 시키신 일, 자식 바치라는 그런 관계가 없이 내 스스로 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그냥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러면 그 제물을 산 채로 바쳤습니까? 산 채로 바쳤다면 바치는 본인도 의미가 있을 텐데 자기가 바치는 제물을 죽이라고 했거든요. 제물로서 죽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삭인데 사실은 누가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까? 제물 바치는 본인이 죽어 마땅함을 제물의 죽음으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뭘 믿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다는 의미가 뭡니까? ‘저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이런 뜻이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 모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해놓고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모순되지요. 왜냐? ‘나는 죽으면 안 됩니다.’ 라는 것과 겹치면서 예수 믿기 때문에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이 죄가 되면, 죄 안 짓고 구원 받을 길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벌을 주게 되어 있지 죄 짓는다고 보상해 주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할 것은 십자가에서 멈춥니다. 그 이후 구원 되고 안 되고의 처분은 누구한테 맡깁니까?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주님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좋은데 문제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고, 예수님 말씀 지켜라.’ 이렇게 하면 문제는 천국에 못 가요. 그러면 예수도 모르고, 예수도 안 믿고, 예수님 말씀도 안 지키고 막 살면 그것도 천국 못 가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나저러나 천국은 못 갑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가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저울이 여기 있습니다. 이쪽에 예수님이 계시고 저쪽에 예수 믿는 자가 있다고 합시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집니까? 누가 무거워요? 예수 믿는 나를 미워해야 되겠어요, 예수님을 미워해야 되겠어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나보다는 덜 사랑하잖아요.

예수 믿는 것도 내가 잘되기 위해서 믿잖아요? 나의 이득을 위해서 믿는단 말이지요. 이득을 얻을 본인을 만약 싫어한다면 애초부터 이득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겠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도 안 믿을 거란 말이지요. 믿어봐야 소용없으니까.

예수를 알고, 믿고, 지키겠다는 것은 이것 자체가 예수를 안 믿겠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마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우리가 예수를 알고, 믿고, 그 분 말씀을 지키겠다는데 뭔가 문젠데?”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그게 죄라는 것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이득을 위해서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이득을 얻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예수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일)을 시도하지 않겠지요. 하박국 3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은, 외양간에 소를 치운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무슨 이득을 챙깁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 잘 믿을 테니까 소가 늘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는 하나님은 없어요. 이것은 인간이 조작해 낸 하나님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지만 여호와를 인하여 구원 받았다고 할 때, 그 구원 받은 사람은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물 길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이 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갑니까?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을 친히 만나니까 마tu도 다시 목마른 물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든 사마리아에서 예배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찾아오시면 예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배 내용은 뭡니까? 나는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주님 혼자 다 했어요. 혼자 다 하셨다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 가만히 있는데 천사가 숯불을 가지로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니 악이 제하여졌고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그 때부터 이사야는 입만 살았어요.

그 입을 벌려 말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25).” “오직 남은 자만 구원 받지 다른 사람은 구원 못 받는다. 그 남은 자는 자기 행위로 남은 자 되지 못하고,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고 합니다.

정작 주님과 만난 사람은 이 모든 이야기, ‘예수님 아는 것도 죄고, 예수를 믿는 것도 죄고, 예수님 말씀 지키는 것도 죄입니다.’ 라는 말을 해야만 예수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알고, 믿고, 지키는 것은 죄지요?” 라고 할 때 “그것이 왜 죄 입니까?” 이렇게 나오면 문제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저울에 예수님이 없고 자기만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성도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하면 그릇에 의미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께 받은 그릇이 자기잖아요. 그러면 그 그릇을 못 버리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냥 관심사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대상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에 걸려서 그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는 겁니다. 자신이 믿는 사람이라는 티는 냈어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흔적이 있다는 것으로 본인이 즐거워하는 것은 재미있는 취미고 오락이기 때문에 말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천국을 못 간다니까요.

이런 것들도 죄라는 것을 주님 만나봐야 알지요. 주님을 안 만났으니까 자기사랑, 자기에 대한 집착을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만난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가 24시간 자기 집착이 포기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는 이미 뒤집어 쓰였기 때문에 순간순간 자기 부인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죄인데 주께서 친히 그치게 하시는구나.’ 이것을 깨닫지요.

언제? 낙향해서 소를 키우는데 소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다 죽었을 때. 내가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 이런 경우에. 내 것이라고 여길 만한 것을 하나도 허용하지 않을 때. 그 짧은 순간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제가 지난주일 이야기했지요. 귀신 들려서 18년 동안 꼬부라진 그 여인(눅13:11). 남들이 보면 누구나 이야기했을 거예요. 18년을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교도소에 18년 복무하고 출소한 사람도 나올 때 월급이나 받아서 나오지만 18년을 아무것도 못하고 꼬부라져서 살았어요. 그런데 그것도 주께서 허락하사 마귀가 와서 그렇게 되었거든요. 그 여인에게 18년이란 세월은 의미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욥은 고난이 주님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욥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욥의 고난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게 의미가 있지 욥 자신에게는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요. ‘왜 나에게 의미 없는 세월을 보내게 했습니까?’ 라고 따지면, 주께서 ‘내가 세상을 기초 놓을 때 네가 나에게 조언한 적이 있었느냐?(욥38:4)” 라고 하시면 할 말이 없어요.

욥은 자기의 고난에 대해서 묻고 있는데 주님은 대답 대신 도리어 엉뚱한 질문을 하십니다. 간호사 시험 친다고 간호학 책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올 상반기 프로야구에서 투수 3관왕을 차지한 선수는 누구입니까?’ 이런 문제가 나오면 어쩌겠습니까? 간호사 시험 공부한다고 TV도 한동안 안 봤고, 평소에도 야구에는 별 관심도 없었는데 이런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화가 나서 ‘이런 문제를 왜 냅니까?’하고 항의를 하니까, 출제자 왈! ‘내 마음이다. 왜?’

우리가 구원 받겠다고 예수 믿는 것 자체가 죄가 됩니다. 왜? 구원 받는 방법(문제)을 내가 냈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하면 착한 일이고, 이것은 죄가 아니고.’ 자기가 선별해서 제 마음대로 죄와 의를 만들어내요. 그러니까 죄지요.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볼 때 이런 문제점이 생겨요.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 인간들이 어떤 반칙을 범하는가 하면, 인간에게 우주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우주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둘러싸서 우주가 있지요. 우주를 인간이 정했는데 인간은 그렇게 안 봐요. 자기는 빼놓고 우주를 보고, 별을 봐요.

윤동주의 [서시]에 보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늘이 보면 기가 찬 소리입니다. 윤봉길이 상해에서 일본 군인에게 도시락에 숨겨둔 폭탄을 던질 때, 자신은 잘 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윤봉길에게 방을 세로 준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밀린 방세도 다 못 받았는데, 일본으로 끌려가 죽었어요.

‘악’ 속에 ‘악’이 들어있어서 그것을 ‘악’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본인이 죄악 속에 들어있으면서 죄를 말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죄를 말하려면 죄악에 물들지 않은 죄 밖에 계신 의인에 한해서만 죄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의인 되시는 분이 죄 속에 들어오셔서 ‘이것이 죄다.’ 라고 하니까 죄인들이 그분을 죽였잖아요.

이런 행동에 대해서 성경은 ‘역시 죄인이 죄 값을 하는군.’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지요. ‘너희들이 얼마나 악했으면 나를 죽였겠는가.’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어서 주님을 못 봤고, 제자들이 도마에게 예수님 부활하신 것을 말하니까 도마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지요. 그 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시니까, 도마가 ‘보니까 이제 믿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했지요. 

뭘 버린 거예요? ‘보면 믿겠다.’고 했는데, 막상 주님을 보니까, 그 생각이 죄악에서 나온 사고방식임을 알았지요. 나의 방법(보면 믿겠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내 방법 속에 하나님도 들어오라는 식의 요청이 됩니다.

어제 대전 강의에서도 언급했는데, 베드로가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잠들어 있었고,  교회는 그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때 천사가 잠자는 베드로를 깨워서 쇠사슬이 풀리게 하고 옥문은 자동으로 열리고 해서 기도하고 있는 마가의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로데라는 아이가 베드로가 왔다고 좋아하니까 사람들이 로데에게 “네가 미쳤다(행12:15).”고 했어요.

그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를 살려달라고. 그런데 기도해 놓고 막상 풀려나오니까, 그 나오는 방법에 대해서 자기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식이 되니까 못 믿겠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은 하면서, 풍랑이 일고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니까 두려워 떨었지요. 그 때 주님은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했습니다. 이 때 그들이 얼마나 믿지 못하는 자인가가 폭로 되었지요. ‘저분이 뉘시기에 바다도 순종하는가?(마8:28)’

결국 그들이 예수를 못 믿는 것은 자기가 상상한 예수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예수는 나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예수, 나에게 축복을 주는 자비롭고 고상한 예수. 고상한 예수님도 좋고 자비로운 예수님도 좋은데 그런 예수님을 믿어서는 천국을 못 갑니다. 천국에 가려면 내가 생각한 예수님은 악마가 심어준 거짓 예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내가 살겠다는 정신 하에서는 ‘예수님은 이단’입니다.”라고 하니까 충격 받은 사람이 있었어요. 사전에 설명을 다 했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을 힘입고 귀신을 쫓아냈다(마12:24)’고 하니까 예수님은 바알세불의 모습으로 와야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은 엉터리였다는 것이 폭로될 것 아닙니까.

충격 받은 사람이 ‘오늘 설교는 은혜가 안 되더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게 충격이면 나중에 천국이나 지옥에 가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 때 그 충격은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십자가마을에 글 올리는 사람들도 주의해야 됩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죄’라고 하면 죄인 줄 알면 되는데, 자꾸 이유를 달아요. 이유를 달면 안 됩니다. 자기 운명에 대해서 진지한 것이 없어요. 죄 지어서 심판 받는 것이 아니고 심판 속에 있기 때문에 심판 값을 한다고 죄가 나와요.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옥에 있는데 주님께서 긍휼로 택한 자를 건져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곳이 지옥인가를, 왜 교회가 지옥인가를 설명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어떤 분의 글에 “십자가마을은 죄를 폭로하는 곳”이라고 섰는데 잘 표현했어요.

들뢰즈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우주관, 과학적 우주관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왜냐?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베르그송을 받아들이는데, 베르그송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저녁노을을 보면서 ‘저 태양도 빛을 잃고 점점 어두워지는구나.’ 라고 하면, 베르그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태양이 에너지를 발산해서 네 입술에 에너지를 주어서 네가 말을 한다면 저 태양이 대상이 될 수 없고 네가 태양의 혜택 속에 있음을 알아라.’

홀어머니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엄마가 잔소리를 합니다. “제발 저녁에 일찍 들어와라.”고 잔소리를 하니까, 아들이 속으로 “엄마는 그런 잔소리를 하는 것이 나의 존재에 몇 %의 이득을 챙기고 그런 잔소리를 하십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만약 내가 없다면 그런 잔소리도 못할 것이고, 그러면 어머니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엄마가 잔소리하는 그 기쁨 속에는 엄마 말을 안 듣는 내가 한 몫을 톡톡히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는 아십니까?’ 이런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 말미암아 가룟 유다는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 일에 1등 공신이 됩니다. 왜? 어떤 제자도 용기 있게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제자는 베드로가 되지 말고 가룟 유다가 되어야 해요. 왜? 예수님 목적은 십자가 죽음이고, 그 목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이 가룟 유다이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암사자’ 이 모든 이야기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서 그 안에 갇혀있는 존재는 바깥에 나와서 관찰할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죄다, 이건 의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런 소리들이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구원 받았으면, 그냥 ‘주께서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 나는 뭘 해도 죄기 때문에. ‘성경을 100독 했더니 깨닫게 되었다.’ 이런 헛소리는 하지 말란 말이지요.

그래서 들뢰즈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자연을 대상으로 보는 이 과학적 합리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는데, 그전까지는 세상을 무대로 보고 인간을 관람자로 보았어요. 무대에서 세상은 펼쳐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관람하면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챙기는 것이지요.

교회를 예로 들면, 교회가 있으니까 교회 가서 내 구원 챙기면 되고, 어려운 성경 구절은 제쳐두면 되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지켜서 복을 따내고 사람들로부터 성화되었다는 칭찬도 받고. 이런 식이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세상을 무대로 보지 않고 공장으로 봤어요. 공장은 전체가 기계인데 인간도 기계로 봐요.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해요. 냄비에 물 끓듯이, 냄비 속에 있는 물이 어디가 아래쪽이고 어디가 위쪽인지 분간도 할 수 없이 막 튀듯이 우리 속에 욕망이 끓으면서 뭔가를 생산해 냅니다.

무대는 상영을 하지요. 그러나 공장은 생산을 해요. 우주라는 공장의 생산물이 뭔가?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모든 벌어지는 일은 움직이는 공장의 결과물입니다.

이런 인간관을 가지면 어떤 점이 유리한가 하면, 특정 권력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특정 권력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고 힘이 센 자들이 되겠지요.

지라르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S(주체)는 A(타인)를 바라보는데, A를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A가 갖고 있는 O(목적, 욕망)를 욕망한다.’ 주체는 남이 갖고 있는 것을 욕망합니다. 자기가 뭘 원하는가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남이 뭘 좋아하는가를 자기가 탐을 내요. 

그러면 S는 O와 관련되어 있지요. 나는 남이 갖고 있는 목적을 내가 가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죠. 즉 A를 통해서 A의 욕망을 갖기를 원한다. 이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A는 S는 필요 없고 욕망만 가진다. 세 번째는 S는 목적을 두고 A와 경쟁한다.

지라르의 주장은, 모든 장소와 모든 영역에서 경쟁 없는 곳은 없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내가 뭘 원하는가는 자신이 몰라요. 쭉 훑어보고 남이 갖고 있는 것, 남이 욕망하는 것을 자기가 비로소 ‘나 저것 가질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애가 혼자 잘 놀다가 형이 와서 뭔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놀면 형의 것을 빼앗으려고 떼를 쓰고 난리를 치지요.

지젝이란 사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네 번째로 합시다. S가 목적을 쥐어 있는 이것을 타인이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S가 O라는 목적을 갖기만 하면 그 다음에 뭐가 공격합니까? B가 옛날 내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나에게 합니다.

그러면 S는 기성세대라고 하고 B를 20대로 본다면, 기성세대가 선배들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는 순간 누구의 표적이 됩니까? ‘저는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 라고 B가 다가옵니다. 선배님처럼 되고 싶다는 말은, ‘빨리 그것 내 놓으세요.’ 라는 말입니다. ‘이제 노틀은 가라.’는 거지요. 젊은이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겁니다.

어느 암자에 세상을 끊고 부처처럼 도를 닦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중이 ‘같이 좀 지냅시다.’ 하고 찾아와서 둘이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그 중을 찾아온 어떤 여자가 또 들어왔습니다. S와 A의 만남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A를 사모한 O라는 여자가 따라오면서 그때부터는 어떻게 됩니까? 잘 지내던 S와 A가 이 여자를 가운데 놓고 쟁탈전을 벌입니다. 왜? 여자가 없을 때에는 생각을 안 했는데 나타나는 순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에 돌입하지요.

세상 모두가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렇게 봤습니다. 나 중심이 아니고 세상 중심이 된다면, 세상 중심이라는 것은 어떻게 운동하는가? 지라르 같은 경우에는 그 중심이 S중심이기 때문에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는 설명이 안 됩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사회에도 적용을 시킵니다. 산이 있고 그 밑에 마을이 옹기종이 모여 있습니다. 이 마을은 같은 집안(씨족)입니다. 같은 집안만 모여 살면 얼마 못가서 자멸합니다. 그래서 저쪽 마을의 처녀를 데려와서 아들과 결혼을 시켜요. 이렇게 해서 관계를 넓힙니다.  이것이 생존에 유리합니다. 이렇게 관계를 맺어 놓았을 때 내가 어려우면 저쪽이 돕고, 저쪽이 어려우면 내가 돕습니다. 이것을 ‘교환’이라고 합니다.

이 교환은 어떤 식인가 하면, 수취인은 반드시 발신자 되어야 합니다. 받은 것을 주는 거예요. 만약 받은 것을 주지 않고 가지고만 있으면 정 없는 사람이라고 그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반드시 받았으면 내놓는 가운데서 관계가 돈독해져서 마을이 안정됩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코드화’라고 합니다.

‘코드’를 다른 말로 하면 규칙, 법, 질서, 잘 맺어진 관계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 코드화가 발전하면 ‘초코드화’가 됩니다. ‘초’는 ‘능가한다’는 겁니다. 초코드화는 뭔가? 주고받고 하는 가운데 남는 물자(잉여)가 있어요. 예를 들면 소를 잡았는데 자기들이 먹고 남아서 옆 동네에 주었습니다. 옆 동네는 사과를 재배했는데 남는 것을 이쪽 동네에 줍니다. 이렇게 서로 교환하는 가운데 생산물이 남아도는 겁니다. 

오늘 저녁에 먹을 시금치가 없다면 밭에 가서 시금치를 뽑아오면 노동시간이 30분이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 운동화를 사 줘야 한다면 30분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시금치를 생산하되 우리 먹을 것은 물론이고 운동화를 사기 위해(교환 물품을 만들기 위해) 시금치를 더 많이 생산(노동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해야겠지요.

옛날 수렵, 채집 생활할 때는 노동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먹을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환을 위해서 (내 먹을 것보다)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합니다. 잉여 생산물로 아들, 딸 결혼시킬 때 사돈댁에 혼수도 보내고, 그러면 그쪽에서도 답례로 또 선물을 보내고. 

잉여 물자를 어디에 소비하는가 하면, 노동력을 사는데(노예를 부리는데) 씁니다. 노예를 부리기 위해서는 나라를 지키는(전쟁을 책임지는) 기술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책임자는 왕이지요. 왕에게 남아도는 물품을 제공합니다. 이게 사무엘상 8장에 보면 나오지요. 왕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거둬드린 것으로 삽니다.

왕은 아무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잉여물을 독차지하는 집합 장소가 됩니다. 그러면 소유는 권력이 되고, 이 권력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식으로 표출됩니다. 백성들이 자기를 지켜달라고 왕을 세웠는데, 그 왕이 백성들의 것을 다 빼앗아가지요.

왕은 먹는 것도 최고로 좋은 것을 먹고 아내를 가져도 최고로 예쁜 여인을 자기 소유로 삼습니다. 모두가 백성들의 것을 차지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백성들이 함께 잘 살기 위해 법을 만들었지만 왕이 생긴 이후에는 왕의 말이 곧 법이 되고 이것이 초코드화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왕이십니다.’ 이 말에는 그리스도가 초코드화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리다.” 라고 하시면, 그분이 진리인줄 알아야 됩니다. 나는 진리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하시면 다른 데는 생명이 없어요. 예수님이 왕이시고 주가 되십니다. 초코드화 되셨어요.

인간 세상에서는 자기가 노동한 것을 왕에게 바쳐놓고 왕이 백성들에게 시혜를 주면 (자기가 준 것을 받은 것인데) “성은이 만극하옵니다.” 라고 하지요. 북한 주민들도 그렇지요. 모든 것을 탈취당하면서도 김정일 지도자에게 감사해요.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기 법을 포기한 종교단체입니다. 이들은 신앙심으로 버티는 거예요. 가뭄이 들어도 김정일 은총이고, 식량을 배급 받아도 모두 김정일 은덕이고.

김정일이 그런 식으로 세뇌시킨 것도 있지만 백성들이 그것을 원해요. 초코드화 되어 있어요. 이미 자기 법을 포기한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제갈공명같이 똑똑해도 임금님 앞에서는 무조건 “성은이 만극하옵니다.”라고 하지요. 이것은 임금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임금의 자리는 감히 우리가 범접하지 못하는 신이 주신 어떤 요소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것을 잘 이용하는 것이 한국의 큰 교회 목사들입니다. 인간 속에는 이처럼 초코드화가 되어 있으니까 종교는 영원한 거예요. 목사가 그렇게 세뇌해서가 아니라 이미 교회 들어올 때부터 특수한 영웅을 찾아왔지요.

예수님은 안 보이니까 잊혀진 존재고, 중요한 것은 예수로부터 복 받았다는 분(목사)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목사에게 욕하면 저주 받는다고 믿어요. 김홍도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목사를 대적하면 10년 내에 집안이 망한다’고. 이런 소리가 교인들은 듣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초코드화지요.

그래서 옛날 왕은 곧 신의 자녀가 됩니다. 애굽의 왕(바로)은 신의 사자예요. 로마도 그랬고. 성경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지요. 헤롯 왕이 연설할 때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행12:22).’하니 우쭐대며 까불다가 벌레가 먹어 죽었지요.

민중들이 그런 식으로 왕을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이 반대하니까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왕은 곧 신의 사자입니다. 그래서 왕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왕이 하는 일은 왕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시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천국을 주는 것이 아니고 천국(예수님)이 걸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하시지요. 그래서 제가 누차 이야기했지요.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관심사가 그냥 예수님입니다. 왜? 모두가 그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예수님은 이미 죽은 분(없는 분)이기에 자신들이 대신 예수님의 자리를 차고하고 있는 겁니다. 교인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안 믿기 때문에 목사를 믿어요. 그래서 예수님 중심이란 말의 뜻을 몰라요. 그냥 교회 충성하면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인 줄 알아요. 바로 주님을 믿으면 되는데 그것을 못해요. 왜 그런가 하면 평소에 초코드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들뢰즈는 이 ‘초코드화’가 무너지면서 ‘탈코드화’ 된다고 합니다. 한 장소에 어떤 인물이나 지점(성전)에 고정된 코드화가 이제는 움직이는 흐름 속에서 자기의 안정을 찾는 그런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그 흐름이 뭐겠어요? 자본과 돈의 흐름입니다. 이 말은 ‘돈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는 거지요. 이것이 자본주의 생리입니다.

대통령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이 있는 곳에 내가 있기 때문에 왕이나 대통령은 누구를 도와줘야 돼요? 코드가 있는 곳이 왕이 아니고, 백성이 있는 곳이 코드가 아니고, 지금 돈을 얻을 것인가 잃을 것인가 하는 그 아슬아슬한 나에게 국가가 보탬에 되면 나의 잉여를 국가에 (세금으로)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서 내가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나를 위해서 국가가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케네디가 한 말의 반대지요.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가 초코드화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초코드화가 다국적 기업에 넘어가지요.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런 나라들.

만약 우리나라에서 외국 투자자들이 개발한 원전에서 석유가 나오면 우리나라 주식에 투자한 사람, 펀드 하는 사람들 다 망합니다. 국가라는 것은 결국 내 자본을 지켜주는 시녀 역할을 할 경우에만 국가를 사랑하겠다는 것, 이것이 탈코드화의 시대라는 겁니다.

중심은 안 변했지요. 그러면서 어떤 안정된 직장, 안정된 자리에 머무는 시대는 지나갔고 움직이는 돈의 흐름을 따라 인생도 그 흐름에 실려 가야 한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1. 7. 28. 09:24 녹취 마침)
 서경수(IP:121.♡.190.225) 11-07-31 00:23 
광주 강의(2011. 7. 22) 20-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성경과 상관없는 객소리가 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로 객소리가 아닙니다. 그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망하는 이유, 그리고 이스라엘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해서 자기 딴에는 이스라엘을 살려 보려고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에스겔의 예언에 의하면 그것은 사자가 사람을 뜯어 죽이는 것과 똑같은 것이고, 그것은 무슨 벌인가 하면 이방 민족이 와서 그들을 갈고리로 꿰어서 애굽 땅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는 그 정도로 심한 범죄에 해당되는 사실을 유다 백성들 본인이 몰라요.

예를 들겠습니다. 점을 치러 갔는데 이런 점괘가 나왔습니다. ‘점치는 자는 저주받으리라.’ 이 점괘를 점치러 온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점치는 자가 저주받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점을 안치는 것이 낳을 뻔했지요. 그런데 막상 점을 쳐보니까 ‘저주 받는다.’ 이게 ‘애가(슬픈 노래)’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슬픈 노래’라는 것은 ‘우리는 복음 앞에 망한다.’는 뜻이에요. 울란 말이지요. 그러면 울상을 지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보다 더 나빠서 우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이방 민족이 울어야 할 것을 미리 앞당겨서 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말이 쉬워서 ‘역할’이지 이게 얼마나 힘든지 완전히 공황상태입니다. 동서남북, 좌우분간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지금 에스겔이 유다 나라에서 말씀을 전하잖아요. 이렇게 평평한 판이 있습니다. 지금 에스겔이 외치면 밑에서 구멍이 뚫려요. 그런데 유다 왕들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젊은 사자라는 것은 유다의 끝부분에 등장했던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들을 말하고, 암사자는 그 윗대의 대대 왕들이고.

이 왕들이 유다 나라를 지키려 한 거예요. 지난 수요일 설교한 것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남쪽, 북쪽으로 갈라졌는가? 그것은 장차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을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갈라진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로 갈라진 것은 장차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 받는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남북 둘 다 언약대로 되었지만, 언약에 두 가지 요소가 있어요. 저주할 자는 저주하고 축복할 자는 축복한다는 요소가 들어있어요. 그래서 저주의 역할을 북쪽 이스라엘이 하고, 남쪽은 저주 안 받을 정도로 착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등불이라는 하나님의 긍휼이 개입되니까 구원 받은 거예요.

장차 이방인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자신들이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긍휼을 이해하는데, 반대로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버렸는가 하면,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 받을 것이라고 우기다가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은 요나 선지자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요나가 니느웨에서 전도할 때 니느웨 백성 구원을 위해 전도했습니까? 아니지요. 심판을 선포한 후에 그들이 망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산에 올라가 팔짱을 끼고 내려보다가, 분명히 심판받게 되어 있는 그 사람들이 용서를 받으니까 졸지에 누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인데 적들의 편을 드니까 요나가 화를 내면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인데 왜 저쪽 편을 드느냔 말이죠. 그러면 나는 무슨 꼴이 되느냐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어떻게 주의 종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거지요. 그 때 하나님은 박넝쿨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요나를 기분 좋게 합니다. 그 후에는 박넝쿨이 말라 그늘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니 요나가 더워 죽겠다고 또 화를 내요.

처음에는 자기 자존심 때문에 죽으려고 하다가 나중에서 더위 때문에 죽겠다고 해요. 이 말은 살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죽었지요. 하나님이 죽였어요. 그런데 건방지게 인간이 살려고 하면서 죽은 하나님께 명령을 해요. 이런 인간이 찾는 하나님이 예수님일까요, 아니면 마귀일까요? 인간들이 크게 오해한 거예요. 신이 죽었다는 것은 너희도 따라 죽으라는 말인데, 인간들은 그게 아니고, 신이 죽은 덕분에 내가 잘 사는데 도움을 얻겠다는 것은, 이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적인 생각입니다. 십자가를 오해한 생각이란 말이지요.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하나님이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죽었다. 하나님이 살았다.’ 쉽게 말하는데, 하나님이 살았다는 말 자체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맞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았다는 개념이 아니고 원래 처음부터 계셨고, 죽는 일도 없기 때문에 살았다는 말이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시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잘못된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살리는 하나님이다. 죽은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죽은 하나님이 사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 구조에다 영생 얻고 천국 갈 것이라는 생각 전부가 엉터리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따먹겠다는 생각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선악과 따먹는 것은 생명나무는 못 따먹는 확정된 구조입니다.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는다는 것은 생명 얻는 것이고,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으면 죽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죽은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물놀이 하다가 익사하고. 이건 죽은 것에 대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건강해도 다 죽게 되어 있고. 어쨌든 생명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명나무 따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어요. 따먹을 수 없도록 죽었는데 어떻게 해요.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이 죽었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자는 스승이 존속해야 계속 제자로 있을 수 있는데, 스승이 없으면 제자도 없는 겁니다. 한진중공업 근로자가 대모를 하고 하는데, 회사가 망해버리면 대모 할 대상이 없지요.

주님은 인간이 원하는 천국을 철거해 버리고 인간들이 예상 못하는 다른 공장을 세워요. 그래서 아무도 못 들어가요. 인간이 살던 기술과 사고방식은 주께서 만든 천국과는 안 맞아요. 왜 그런가 하면, 그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들의 나라기에 아들의 마음에 없는 사람은 그곳에 가고 싶어도 못 가요. 아들의 마음이, 성령이 와야 되지요.

이 마음은 예수님만 알고 있는 마음인데, 그 마음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의 마음이거든요.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는 ‘너는 이미 죽었어.’ 그런 마음이란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 마음이 성령으로 왔다는 것은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가 되풀이 되는 마음이 예수님 마음이에요.

“너희 속에 이 마음을 품어라(빌2:5).” 십자가가 마음에 있는데 하긴 뭘 해요.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입니다. 착한 일도 주께서 하도록 만드셔야 할 수 있는데, 우리 본심은 그것을 만들어 내요. 온유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온유를 누가 만들어 냅니까? 주님이 나에게 자비를 주셔서 온유의 열매를 만들어 낸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성내지 아니하고 ~’ 이것을 주께서 만들어 내요. 주께서 만든 공장의 공장장이 주님인데 왜 내가 만들었다고 하느냔 말이지요. 주께서 공장 지을 때 자재 마련하고 모든 시스템 준비하고 우리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왜 영광을 우리가 받아야 돼요? 우리는 그냥 일하면 할수록 무익한 종임을 깨달을 뿐입니다.

늘 가출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지요? 탕자. 우리는 항상 탕자, 늘 무익한 종이고, 잃어버린 양인데, 이런 우리를 찾아 기뻐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이 복음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 기쁨을 위해서 매일 가출해야 되겠네?’ 이러고 있어요. 가출하는 행위로 구원 받는 줄 알고 있어요. 막 살면 구원 받는 줄 알고 있어요. 이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오직 자기 구원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발상이 나오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왜 죽었는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은 언약으로 나타나면 언약 백성이 누구지요? 유다 백성 아닙니까. 유다 백성은 뭘 해야 됩니까? 신이 죽은 것에 미리 앞당겨서 참여를 해 줘야 됩니다. 죄를 인하여 멸망당해야 돼요.

같은 죄를 지어도 이방나라는 안 망합니다. 유다는 우상 좀 섬겼다고 망하고, 우상 본부인 이방 나라는 안 망하고. 굉장히 억울하지요. 그러면서 하나님 하신 말씀은 “너희들이 아들이니까 때렸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장이 자기 아들을 비밀리 말단 사원으로 입사시켰을 때, 다른 사람은 사장 아들인줄 모르고 그를 대합니다. 사장한테 잘못했다고 심하게 꾸중 들으면, 다른 사람은 위로한다고 ‘너의 잘못은 별 것 아니다. 앞으로 잘 하면 되지.’ 라고 하지만, 아들은 장차 후계자입니다. 남보다 배나 혹독하게 다루고, 다른 직원은 다 퇴근해도 아들은 남아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업무까지 파악해야 나중에 남에게 지시하고 명령할 수 있어요. 

아버지의 일을 아들에게 다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은 죽을 맛입니다. 아들은 아들의 삶을 살고 싶은데 아버지의 삶이 자기에게 들어왔으니까 죽을 지경이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안 좋아합니다. 고난 받는 것이 뭐가 좋아요. 복음 전해서 인기 얻기를 바라지 누가 핍박 받기를 원해요. 하지만 아버지의 영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원치 않는 십자가의 길로 가야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십자가란 것은 항상 우리의 의견과 충돌됩니다. 그래서 진짜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어느 정도냐 하면, 스스로 알아서 일을 망치면 주님은 더 망쳐놓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주님은 우리를 만물의 찌꺼기로 만들려고 작심을 했어요. 날마다 우리를 죽게 만들고, 날마다 살려 주시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내 고난에 동참하고 있구나.” 라고 하시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참 희한한 게 있어요. 사도바울이 아주 애를 쓰며 전도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라 해서 그쪽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면 또 ‘로마로 가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전도자 개인의 계획이나 영광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은 베드로에게 반복시키고, 예수님 가신 그 길을 사도바울의 일대기를 통해서 반복해요.

바울이 성령으로 복음 전했는데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 모습. 이렇게 핍박 받으며 복음 전하다가 사도바울도 사라집니다. 왜? 사용할 대로 다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이 말은 사도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한 거예요.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것이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다.’ 라고 했어요. 그런데 신학을 많이 연구한 똑똑한 신학자들이 ‘이것은 사도바울의 주관’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주관이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는 바울의 말만 듣지 말고 베드로나 요한의 말을 다 종합해서 들어야 된다고 합니다.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리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말과 요한의 말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 기준을 물어봐야 돼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수준은 사도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아니다. 사도보다 더 높네요. 사도의 서신을 자신이 평가하고 잘 잘못을 가리니까 사도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평가하는 그 신학자는 사도가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러면 또 이런 주장을 하겠지요. ‘죄인도 성령 받으면 사도처럼 될 수 있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대해 박윤진 성도가 글을 잘 써놓았지요. 그리고 그보다 더 엄청난 내용을 자기 사이트에 올려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 그림을 보고 답변해보세요.” 라고 십자가마을에 올렸지요.

이렇게 성도가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돼요. 괜히 사적인 이야기를 사이트에 올리고 그런 것보다 말씀을 가지고 이슈를 삼고 그게 좋아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신은 죽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말은 ‘죽은 신’입니다. 신은 죽은 신 외에 다른 신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죠. 성경에는 죄인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고, 종말의 삶도 있고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왜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시인하면 구원 얻는다.’고 했을까요?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다른 것들은 뭐예요?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영도’라고 해요. ‘영도’란 말은 여기서 아무리 다양한 변화가 있더라도 위에서 보면 전부 다 같은 질에서 요동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강도 제로(0)가 되어서, 모든 것이 위에서 보면 균등해요.

땅에서는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꺾어지고 해도 비행기 타고 높은 하늘 위에서 보면 고요하잖아요. 이처럼 주님 보시기에 세상은 고요합니다. 왜? 다 죽었으니까. 아래쪽에는 변화가 무한대지요. 이것을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같은 사람이 없어요. “내가 너를 이해할 게.” 백날 이런 소리해도 이해 못합니다. 동상이몽입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사랑해서 한 몸 되면 큰일 납니다. 이쪽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뒷면을 보면 증오가 있어요. ‘내 사랑 안 받으면 너는 죽어!’ 이런 뜻입니다. 사랑은 증오와 함께 갑니다. 그러니까 사랑하지 말고 그냥 좋아하면 돼요.

사랑이란 말은 강도 제로(0)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똑같이 볼 때, 차별 없이 볼 때 강도나 세리, 창녀라도 주님 사랑이 들어가면 위에서 당기는 사랑이기 때문에 밑에서 어떤 짓을 했다 해도 다 용서되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아까 지라르의 주장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사람은 남들을 통해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지상에서 예수를 볼 때 어떻게 봅니까?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보지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구나. 예수님 말씀 잘 지켜야 되는데 내가 잘 못 지켰다.’ 평소에 양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죄 의식이 있어요. 죄 의식이 없어야 천국 간다는 선악적인 사고 속에서 완벽한 의를 추구하겠지요. 그러면 그 모델로 누구를 세우겠어요. 그 예수님이 가짜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이게 지라르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가진 것을 자기도 갖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것은 도둑질입니다. 이런 나쁜 놈이 어디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놈이 생명나무를 탐한다? 이건 애초에 주님이 금지한 거예요. 따먹지 말라만 금지가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1차 금지고, 2차 금지는 ‘선악과 따먹었나? 그러면 생명나무 못 먹는다.’ 사실은 생명나무도 졸지에 금지의 나무가 되고 말았어요.

아래쪽의 다양성이 너무 무한해서 사람들이 미쳐버립니다. 이걸 좀 설명해야겠는데, 이게 아까 탈코드화에서 이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요. 돈의 흐름을 따라 돈 있는 곳에 내가 있어요. 돈 없는 곳에 내가 있으면 자살합니다. 돈 없이 인간이 어떻게 삽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났지요. 돈이 있기 때문에 그 위에 자아를 구축하거든요. 그런데 이 돈이 자꾸 움직여요. 주식에 투자했는데 주가가 내려가고, 친척이 찾아와서 입원했다고 돈 빌려달라고 하고. 매일 돈이 왔다 갔다 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여기에서 두 가지 방법을 써요. 하나는 편집증이고, 다른 하나는 분열증입니다. 편집증은 요동을 막기 위해서 무조건 끌어 모으는 거예요. 히틀러의 부하들 특징입니다. 아우슈비처에서 500만 명을 죽여 놓고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요. 무조건 자기 자리를 고수하는 것이 편집증이고, 이게 보통 사람들입니다.

분열증은 아기 같아요. 뭘 하나 가지고 놀면 실증이 나서 또 다른 것을 찾아요. 이것은 어디로 튈지를 몰라요. 한 곳에 붙잡아 둘 수가 없어요. 나이 많은 사람은 편집증, 젊은 아이들은 분열증. 이들은 새로운 모험을 향하여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사실은 돈 맛을 알면 돈 있는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엄마는 돈을 좋아한다. 내가 돈을 벌면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자식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월 356만원은 있어야 한다고 설문조사에서 나왔어요. 이 정도 수입이 없으면 자식 노릇을 못한답니다. 이 이하의 돈을 버는 사람은 자식도 아닙니다. 목사님은 자식도 아닙니다.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이래요.

여기에서 스트레스가 생겨요. 평소에 살아온 것도 남의 욕망으로 살아왔는데, 그 남의 욕망을 내가 미처 못 가질 때 그 허탈감과 패배감 때문에 죽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흘러갈 때 그 때는 뭐가 없는가 하면 탈코드화하면서 그동안 코드화로 맺어진 (정착된)것이 고향이고 나이입니다. 그러면 탈코드화 시대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고향을 물어도, 나이를 물어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희미한 등불 밑에서. 고향이, 나이가? 어디서 본 듯한데. ‘아, 옥경이구나! 너 옥경이 맞지?’ 마지막에 ‘옥경아!’하고 부르잖아요.

온 세상이 다 옥경이처럼 살아요. 남들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미처 못 채워준 죄인이 되어서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났습니다.

제가 대전에서도 그런 강의 했습니다. [옥경이] 말고 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박강정이 부른 [문밖에 있는 그대]. 처음 사귈 때는 노을처럼 뜨겁게 사랑했는데, 떠날 때는 마지막 눈길마저 외면하고 가버렸는데, 그녀가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문 밖에서 울고 있어요. 그 때 남자가 하는 말이 ‘한번 떠난 사랑은 내게 남아있지 않아요. 가슴 아픈 사랑은 이제 잊었어요.’ 그 때 그 사람은 없는 거예요.

옛날로 돌아가도 옛날 그 사람은 없어요. 이혼했던 전 남편이 돌아와서 내가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여자가 원하는 것은 행동 고친 전 남편이 아니고 자기 상처를 매워줄 새 남자가 필요한 거예요. 돈 있고, 몸 좋고. 인물 되는 사람으로. 바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이것이 타인의 욕망이기 때문에.

남자는 그것도 모르고 전 아내를 찾아가서 울면서 ‘내가 이제 술 안 먹고 행동 똑바로 할 게.’ 행동 똑바로 하는 전 남편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내 망가지고 구멍 난 상처를 매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는데 전 남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자, 여기 판이 있는데 유다는 위쪽에서 언약을 자기가 파헤치려 했어요. 이렇게 되면 언약은 대상이 되고 자기는 언약을 관찰하지요. 밖에 있는 주의 말씀을 자기가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언약 속에 있는 것을 까맣게 몰라요. 십계명을 주셨으니까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데 ‘아마 은혜 주셔서 지키게 해 주실 거야.’ 이렇게 생각해요.

십자가 마을에 들어 와서 복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전부 이런 사람들입니다. 지키면 복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구멍을 뚫어버려요. 그래서 보니까 하나님이 죽었단 말이죠. 그러면 어떤 질문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언약을 주셨는데 왜 죽지? 왜 죽었습니까? 언약 속에 죽은 하나님이 포함되고 있고, 그 죽은 하나님과 함께 죽은 자만 천국 간다는 그런 내용을 유다에게 전달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자기가 살려고 지켜요. 예수님 죽으셨는데 따라 죽으면 되는데 안 죽고 살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집단 자살 할까요? 그것도 한 방법인데 그 방법 말고, 수박 먹고, 옥수수 삶아 먹고 이것도 죽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그 방법을 우리가 정하지 말고 주께서 계속 새로운 방법으로 죽는 방법으로 이끄실 거예요. 

현재 우리가 있는 환경이 고맙게도 주와 함께 죽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 이래서 우리가 죽는구나.’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죽더라도 즐겁게 놀다가 죽어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전9:9).”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2:14).’고 했습니다. 왜? 뭘 해도 헛되니까.

마지막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서 볼 때 인생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에 즐기면 되지, 이것을 도 닦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의 은혜를 감사하며 즐기는 자를 지혜로운 자며 이런 자는 구원 받고, 안 즐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며 지옥 갑니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도 있어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그러면 너와 상관없이 될 것이다. 왜? 주께서 흐름을 주관해서 주께서 마지막 때 거두기 때문에. 결국 인생이란 쪼개서 흩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고, 마지막에 거두고 판단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것을 솔로몬이 알았어요. 지혜는 솔로몬이 알았던 것이 전부입니다.

성경 볼 때 제일 나쁜 것이 뭐냐 하면, 매달 넣은 적금 때문에 구원 받는 것처럼 여기는 겁니다. 이런 인식을 버려야 됩니다. 50세부터 매월 9,820원 넣으면 죽을 때 5,000만원 타고(어떤 보험회사 광고). 인간의 사고방식이 이런 것 밖에 몰라요.

처음부터 우리는 죽은 존재인데 주님 알고부터 남은 것은 즐기는 것뿐입니다. 즐기는 방법까지 주께서 그때그때 다 주십니다.

에스겔 20장 5절을 봅시다.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

그 다음에 6절에 젖과 꿀이 흘렀거든요. 그런데 ‘네가 가증하게 애굽의 우상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분노했다.’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의 바탕은 난데없이 들이닥친 바탕이죠.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하면 구원 받겠다.’고 자기가 깔아놓은 양탄자가 아니고, 난데없이 애굽에서 탈출했고, 난데없는 그 바탕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당하는 은총을 누리게 된 거예요.

멸망당하면서 뭘 느끼는가? ‘아, 하나님은 계속해서 애굽에서 구원했던 그 약속을 지금도 포기하지 않으셨구나.’를 아는 즐거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느끼는 감격이 이것이잖아요. 내 행동이 이렇게 교만하여 나밖에 몰라도, 주님은 나의 수완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오직 십지가 피를 근거해서 허접스런 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

우리는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발칵 냅니다. 며칠 전부터 시커먼 종기가 났어요. “주여, 복음 전하려고 하는데 종기가 났습니다. 종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데 장해가 됩니다.” 이런 소리를 군지랑 대지요. 이런 불평이 저는 되도 않은 종기가지고 하지만 다른 분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말씀을 보고 은혜가운데 생각해 보면, 군지랑 대는 것은 우리 버릇이고 이것에 영향 받지 않는 바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가 죄를 짓고 무슨 짓을 해도 전혀 구애받지 않는 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은 주(하나님)와 주(예수님)가 맺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외부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그리고 주가 원수를 만들어서 원수를 집어넣으면 주의 원수가 된 상태에서 건져내지요. 이것은 주님이 주님과 의논한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가 요청할 입장이 아닙니다.

9절을 봅시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거하는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목전에서 더럽히지 않으려하여 행하였음이로라.”

이방인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이 된 것이 아니고, 언약의 혜택을 안 입는 것이 이방인입니다. 언약이 있는 것은 언약 백성(이스라엘)입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누가 구분했습니까? 하나님이죠. 이스라엘이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박윤진씨가 벌건 그림을 그렸잖아요. 벌건 동그라미 속에 두 부류를 나누면, 이 안에 소집된 부분이 전체를 관여할 수가 없어요.

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이 교장 선생님께 지시나 명령을 해서는 안 되지요. 언약 백성은 언약 아래 있어요. 그런데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방인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란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유월절 피가 있었지요. 이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주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는 피를 입는 이 과정에서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저쪽 피 없는 불교 집안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면 졸지에 이쪽은 뭐가 됩니까? 이쪽에 언약이 있는 것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지요.

과연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까? 언약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요. 이게 뭐냐하면,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이렇게 온다고 이스라엘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온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언약 완성자가 함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하나님이 자신들과 직거래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할 때, 십자가 안에 우리가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는 크고 우리는 작아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내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다고 하면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자칫하면 이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립니까? 내가 십자가를 소유한 것처럼 되지요. 그러면 누가 좌지우지합니까? 십자가를 믿고, 안 믿고는 나에게 달린 것이 되지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이 다 맞아요. 그런데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면 자칫 잘못 생각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조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어요.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언약의 완성자)을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을 때,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이름, 에스겔이 큽니까, 유다가 큽니까? 에스겔이 더 커요. 에스겔 이름은 인자거든요. 이걸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크신 분이 내 안에 들어온 거예요. 얼마나 겸손합니까. 크신 분이 내 대신 죽으신 거예요. 그리고 나에게 구박을 받고, 멸시 당하고.

이 사실을 사렙다 과부,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들은 알았는데 유대인들은 몰랐어요. 완성자가 들어오면 졸지에 껍데기(이스라엘)는 언약이 완성되는데서 배재당하면서 혜택은 입어 온 겁니다. 언약 완성에 관여하지는 못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그 결과물을 공짜로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오해해서 ‘우리가 말씀을 잘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예수님만 언약의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으나마나한 이방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몽땅 이방 민족에게 집어넣어요. 거기에 들어가게 되면 ‘이방 민족이나 너희나 똑같다. 다만 진짜 구원 받는 것은 지금 너희들이 어느 민족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 완성자가 계신가, 안 계신가가 중요하다.’ 만약 언약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면 졸지에 구원을 받습니다. 고넬료나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령이 임하니까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면 고넬료나 에디오피아 내시는 참 이스라엘이죠. 이게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의 원래 취지란 말이죠. 자꾸 나로 인하여 내가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이런 발상을 깨버리란 말이죠. 나는 주를 버릴지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져야 돼요.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생명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건진다(요6:39).’는 말씀이 믿어져야 됩니다.

이 말씀을 못 믿으면 자신이 설치게 됩니다. 스스로 유대인 되려고 하고, 자기가 바른 생활을 해야 된다고 여기고, 바른 생활 못하면 난리 납니다. 항상 언약 완성에서 배재된 이방인의 심정으로, 이것이 첫사랑인데, 초심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나는 이방인이다. 나는 언약도 없어. 나는 개같은 이방인이야. 그런데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구원 얻은 백성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주와 함께 낙원에 갑니다. 서울에 폭우가 내려서 리모델링 공사하다가 매몰되어 죽은 사람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주와 함께 거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귀신입니다. 유령이고 귀신이고 좀비고 그렇습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 있고,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면 성령 때문에 여러분들이 살아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사는 방식에 하나님이 동조해 달라고 얼마나 떼를 썼습니까? 다 부질없는 것임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께서 날마다 죽이시는 방법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그 말씀이 얼마나 안정감을 주고 행복을 주는지 늘 주님 앞에 감사하는 생활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1. 7. 29. 09: 0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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