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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4 11:52:13 조회 : 3324         
광주 7월 23일 에스겔 8장 일그러진 모습의 하나님의 얼굴 이름 : 관리자(IP:124.59.87.52)
100723 겔8장 일그러진 모습의 하나님의 얼굴
 관리자(IP:124.♡.87.52) 10-07-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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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IP:124.♡.87.52) 10-08-14 13:22 
광주100723a에스겔8장a

광주 강의(2010. 7. 23) 9-1


에스겔 8장 1절에 보면, “제 6년 6월 5일에” 라고 시작하는데, 여기서 6년이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6년인가 하면,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즉위한 지 6년이란 뜻입니다. 에스겔은 그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 같이 잡혀갔습니다.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직접 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라는 궁금증을 가져 본 적 있습니까? 성경을 주의 깊게 보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여 줄 때는(제가 생각한 아이디어인데), 하나님의 얼굴에 거울 같은 것이 있어서 하나님을 쳐다보면 그 거울을 쳐다보는 인간이 반사되어 보이는데, 보통 거울을 보면 나의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 붙어 있는 거울을 쳐다보면 우리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진 모양으로 우리 자신에게 되비칠 때, 하나님의 모습은 여전히 거울 뒤에 감춰져 있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모습이 궁금한 사람에게는 낯설고 희한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은 안 볼 거야!’ 하면서 엉뚱한 곳을 보면, 하나님은 거울을 그쪽에 두셔서 그 거울에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보고 싶든지 말든지 항상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일그러진 우리의 자아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일그러진 우리의 자아상으로 하나님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영원히 못 보는가? 하나님이 보고 싶은데 일그러진 우리 모습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결국 하나님 모습은 우리에게 영원히 가려져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일그러진 우리의 자아상. 그런데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은  깔끔한 자아상이죠. 예쁘고 반듯한 모습. 그러나 깔끔한 자아상을 일그러진 자아상으로 변화시키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렵지요?

만약 하나님과 악수하고 싶다면, 내가 내 손과 악수하는 것이 하나님과 악수하는 것인데,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내 몸이 내 몸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 몸을 하나님이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는 겁니다. 우리는 내 몸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 얼굴 좀 보여주세요.’ 이렇게 나오는데, ‘그렇게 소리치는 네가 나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시작하는 것은 ‘나는 내 것입니다(나의 주인은 나입니다).’ 라는 그런 생각이 큰 착각이라는 겁니다. ‘나는 나입니다.’라는 소리가 “내가 네 안에 들어가서 ‘나는 나입니다.’”라고,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듯이 이야기한단 말이지요.

근본적으로 우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우리 것이라고 우기면서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죽을 때도 내 맘대로 못 죽고,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못 삽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원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고 사는 것에 대한 권한이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나이가 들면 ‘왜 빨리 안 죽는가?’ 하는 문제로 골치가 아픕니다.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노래를 불러요. “왜 하나님은 날 안 데려 가는가?” 라고.

처음부터 어머니 것은 없었습니다. 데려가고 말고는 주인이 결정할 문제인데 그 주인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주인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은 엄청난 오해를 한 거죠. 사람들이 ‘고생한다’고 하는데, 누가 고생합니까? ‘외롭다’고 하는데 누가 외롭습니까?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글을 남기면서 ‘복음 전하니까 다 떠나가고 그래서 외롭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자기 신세타령하는 거예요. 나는 없고 하나님의 몸체에서 나온 사지(팔, 다리), 또는 혹 같은 것. 이런 종류란 말이지요. 우리가.

제주도 감귤을 비유로 들었는데, 볼록볼록 튀어나온 것. 이렇게 하나 튀어나오는 것이 원래 우리가 아니고 이게 예수님 몸이고, 그 몸에서 튀어나온 것을 가지고 우리는 ‘나’라고 우깁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성경자체가 이야기하는 것은 예초부터 피조물은 예수님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깔아놓은 것으로 창조성의 일부분입니다.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그 다음 여자를 만들었지요.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 인형 속에 또 인형이 들어 있는 것)처럼, 또는 안테나를 뽑으면 작은 토막에서 또 안테나가 나오지요. 아담에서 여자가 나왔습니다. 여자가 나오니까 아담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내 몸이야!’ 라고 했어요. 듣는 여자는 굉장히 기분 나쁠 거예요. ‘어떻게 내가 너냐?’ 라고 하겠지요? ‘너는 나에게서 나왔잖아!’

피조물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피조물은 그 원형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지옥 가는 사람도 천국 가는 사람도 둘 다 예수님의 속성을 품고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공의를,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천국 가는 거예요.

에스겔 7장 27절을 보겠습니다.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를 아는 계기가 어떻단 말입니까? ‘내가 내 원하는 대로 사는데 당신이 왜 간섭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면 다야. 왜 간섭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너를 간섭할 때 비로소 여호와인줄 안다.’ 여호와는 시도 때도 없이 간섭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이지요.

내가 내 오른 손가락을 딱 치니까 손가락이 하는 말이 “네가 뭔데 나를 치냐?” 라고 하는 거예요. “내 몸이니까 내가 쳤다. 손가락아, 네 손가락은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몸이다.” 즉 몸이 손가락을 칠 때 손가락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몸의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피조물을 하나의 삐져나온 돌출부분으로 생각하면 성경 전체가 이해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 되었다고 해서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끊어진 게 아니에요. 고무줄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피조물이 까불면 여호와께서 간여하십니다. ‘하나님이 뭔데 내게 관섭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피조물은 독자적으로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피조물이 ‘나 이제 독립할래!’ 라고 해도 독립이 안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한다면 지옥 가야 합니다. 왜 지옥 갑니까? 지옥에 가서 ‘진짜 예수님이 주님이구나.’ 라는 것을 그 사람은 고백해야 되고, 믿는 자는 천국 가서 ‘진짜 예수님이 주님이구나.’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죽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어요. 처음부터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해요.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루시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이 보고 싶다.’고 할 때, 하나님은 거울을 둬서 피조물들이 보고 싶다고 하는 그것이 ‘보고 싶다’는 그 말 속에 ‘나는 이제 독자적으로 살래’ 라는 고집 때문에 하나님자체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은 그때그때 달라요. 우리가 주님의 자비가 보고 싶으면 주님은 자비로운 분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야.’ 라고 하면 무서운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왜 그런가? 우리 자체가 죄 지어서 일그러진 모습이 거울을 통해서 그 하나님도 일그러진 데서 같이 반응을 나타내면서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 5장의 산성설교 아닙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치 불교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이미 주님의 형상이 들어와 있기에 그 주님의 형상이 사랑을 드러내게 되면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형상을 볼 것이고, 저주의 형상이 들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모습으로 평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요. 모세는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궁금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나가시는데 얼굴은 못 보도록 손으로 가리고 지나간 후에 등만 보도록 하셨어요. 하나님이 얼굴이 있고 등이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모습입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5절에 보면 네 생물로 나타나요. 10절에는  사람, 사자, 소, 독수리 이렇게 네 가지 얼굴로 나타나요. 하나님의 형상이 왜 네 가지 얼굴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인간을 보는 형상 식으로 절대로 그런 형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백 번 만들어봐야 그 모습은 자기가 자기 형상을 본떠서 만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만들 이유가 없어요. 만약 하나님 형상을 따로 만들면 나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은 저기 있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단절된 식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제대로 된 형상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까불고 촐랑대면 그 촐랑대는 모습이 거울에 반사되어 그 촐랑대는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이에요.

만약 소의 기능을 해야 된다면 하나님은 소처럼, 사자의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면 사자의 모습으로, 독수리처럼 행세해야 한다면 독수리의 모습으로, 사람의 행세를 해야 한다면 사람의 모습으로 그때그때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자기 기능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봐야 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반석 틈에 엎드려 있어(출33:22).’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용하는데 인간의 형상을 통해서 사용하다 보면 하나님의 모습은 피 흘리는 모습, 십자가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서 보통 우리의 모습과 똑같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구나.’ 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기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입니까? 기괴한 모습이에요. 입에서 날 선 검이 나오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고 옛날 예수님 목소리가 아니란 말이지요.

왜 그런가? 날 선 검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기능입니다. ‘그러면 계시록 1장에 나타난 그 형상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겠네요?’ 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가 아니듯이 그런 모습의 형상은 기대하지 마세요. 형상을 말할 때는 반드시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 모습을 되비친 것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없고, 그 발휘하는 기능 하나하나가 모여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이제 오늘 공부할 분문을 봅시다. 에스겔 8장 2절에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하나님의 형상이 불같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형상은 불이다.” 라고 하신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 가운데 이런 기능에 합당한 형상이 등장한 겁니다. 불같이 심판하시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 이런 형상으로 나타난 거예요. 그러면 이 형상이 유지됩니까? 아니지요. 다른 곳에서는 해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죄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러니 인간들이 하나님을 봐서 붙잡겠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같잖은 거예요. 장님이 코끼리 만질 때 너무 덩치가 크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형상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제가 놀란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죄인이란 사실, 여기에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죄인의 형상으로 오셨다면 우리가 죄인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광주행 버스에서 TV를 봤는데, [동행]이란 프로를 보니까 15세쯤 된 소녀인데 지능이 3세 수준입니다. 그런데 어떤 병에 걸려 소경이 되었어요. 그래서 그 아이는 동물적인 본능만 있어서 자꾸 먹여줘야 합니다. 먹으면 똥 싸고, 또 먹으면 또 싸고. 아버지는 연탄 배달하고, 엄마도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고, 오빠가 고3인데 공부도 하면서 아버지를 돕고 동생도 돌보고 그래요. 그 장면을 보면서 기가 찼어요. 갓난아이가 똥을 싸면 그러려니 하는데, 15세 된 소녀가 똥을 싸고 앞을 보지도 못하고, 집도 가난하고 ---

자, 이럴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 전체가 하나님이 하시는 기능입니다. 이 가족이 가끔 웃을 때도 있는데 그게 언제인가 하면, 소녀가 밥을 흘리지 않고 먹을 때 아빠랑 오빠가 웃어요. 내가 보니까 전혀 웃음이 안 나와요. 그런데 그 가족은 그 틈새에 까르르 웃더라고요. 저는 그 웃음을 하나님이 주신 웃음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고 하면, 예수님 말고는 다른 하나님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사람들은 상상하는 거예요. 예수님 말고 다른 하나님을 상상하는데, 그것은 죄악 된 인간이 신을 조작해서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 등등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서 하나님을 만들어요.

인간들의 삶의 환경은 신의 존재가 삶의 환경입니다. 신이 계신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의 삶의 환경이었습니다. 그 삶의 환경이 결국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환경이 부서져야 돼요. 그런 삶의 환경 속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하늘나라고, 예수님 계신 곳에만 아버지가 있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에는 아버지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 오심이 하나님 오심입니다. 예수님 오신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거예요. 다른 곳에는 없는 거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하셨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천국은 다 허구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장애 소녀 가정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 처참한 가정이 1) 내 가정. 2) 남의 가정. 몇 번입니까? 나의 가정입니다. 도와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곳과 그 소녀가 사는 곳이 500Km 떨어져 있다면, 그 거리가 굉장히 멀지요. 그런데 5만분의 1 지도를 그려보세요. 몇 Cm인지? 얼마 안 되지요. 500만분의 1로 그리면 바로 옆에 있어요.

도와주라는 말이 아니고 동정하라는 말도 아니고 연민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일이 곧 나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음을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이걸 인정했으면 여기다가 하나님이 관여하게 되면 하늘나라와 우리가 한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님이 생각하는 우주라는 겁니다.

우주는 지옥 갈사람 +천국 갈사람 + 주인 되시는 하나님. 이것이 우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보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 하늘 우편에 계시고, 이곳에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세계가 있고, 이것을 합쳐서 우주로 보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도 남이고, 새도 남이고, 코끼리도 남이고, 나는 나고 저쪽은 나의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겔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겔7:27)”한다는 말은, 이렇게 뚝뚝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어서 내가 다루어야 되고, 때릴 때는 때려야 하고, 잘하면 칭찬해야 되고 그런 한 식구처럼 놓여있다는 겁니다. 죽어도 우리는 주님 바깥으로 못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을 보면서 ‘아, 원래 하나였구나.’ 생각하고 사시면 편합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그 처참한 가정과 매일 고기 먹으면서 희희낙락하는 가정이 한 가정이 될 때, 사는 형편은 불편하고 편리한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데 전혀 그들의 삶의 환경이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어서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가난해져야 비로소 예수 믿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이대로 저것은 저대로 그냥 살면서 다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관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으로 자리이동 안 해도 그냥 한 식구가 되는 겁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부자든 가난뱅이든 관계없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소위 ‘착하게 살라!’ 이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모릅니다. 이런 말은 조폭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나는 나다.’ 이것만 고집하는 거예요. 나의 경계가 허물어져야 되는데,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이렇게 살면 그게 주님 보시기에 착한 것인데,

주님 보시기에 선하다는 것은 뭐냐? 원래 구조입니다. 원래의 구조가 헤어짐이 없는 구조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죽으면 주님과 헤어지는 줄 알고 있는데 지옥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요. 그러니 헤어짐이 없는 원래 구조대로 부자면 부자로 살고, 가난하면 가난하게 살고 이 모든 것도 원래 하나님이 하시는 기능 속에 포함이 된 겁니다. 참 편하지요?

그리고 간섭하면 간섭하는 것도 다 의미가 있고, 간섭 받는 것이 당연하고. 생각해 보세요. 피조물이 죽었는데 그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누구 권한입니까? 죽은 성도를 부활시키는 것은 누구 권한입니까? 우리 주님이 하시잖아요. 보세요. 원래부터 우리는 주님과 한 가족이잖아요. 죽기는 내가 죽어도 살리기는 주님이 살리고, 그러면 평소에 우리가 안 죽으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짓이다? 헛짓이지요.

내 몸이 내 몸도 아닌데 왜 살려고 합니까? 죽어도 사는데 왜 자꾸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성경을 봤는지 안 봤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전부 내 안에 다 깔아놓았다.’ 우리는 어항 속에 있고 주님이 바깥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어항 속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겁니다. 이것이 우주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주 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제 8장 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숩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그발 강에 있는 에스겔을 머리를 낚아채서 예루살렘으로 이동시켰다는 말입니다. 중국의 무협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런 이야기를 믿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말씀을 보면서 구약성경은 참으로 황당하다고 하는데,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약 사도행전에도 보면 빌립을 번쩍 들어서 광야로 옮겨요. 축지법? 시공을 초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주님은 그보다 더 희한한 일도 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는 방식은 우리가 예상한 것 때문에 상처받은 모습으로 우리한테 되갚으세요. 사람들이 복, 복 하는데, 복 받는 비결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주를 받으면 돼요. 그게 복으로 전환됩니다. 저주 받은 자만이 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경로가 그래요.

복에서 복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저주를 거쳐서 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주를 안 거치면 우리가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복이 아니고 보상입니다. 노동의 대가가 되는 겁니다. 노동의 대가로 주는 복은 없어요. 반드시 복은 저주받아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올 때 그것이 복입니다.

사무엘하에 보면,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저 사람의 저주 덕분에 내가 산다.’고 해요. 그러니까 반드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복음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해요. 아직도 십자가마을이 해체되지 않고 있는 것은 십자가마을을 저주하는 사람이 십자가마을 사람들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저주꾼들이 있어요. 그들 때문에 십자가마을이 사는 거예요.

오 목사님이 아직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해남 지역에 오 목사님을 저주하는 무리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허리띠 붙잡혀 끌려가고 이런 일 때문에 아직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제발 저주를 좀 받으세요. 저주 받지 아니하면 복이 안 오는 이유가 뭔가 하면, 우리가 복 달라고 하면 저주가 오고,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라고 하면 복이 오는 거예요.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중에서 단을 어디에 쌓습니까? 저주(에발) 산 밑에 쌓습니다. 그러니까 건너편에서 뭐가 날아와요? 복이 날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 전체에 깔려 있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 자체가 죄악 된 우리 눈에는 저주 덩어리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저주 덩어리로 보인다는 말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저주 덩어리가 아니고 우리가 저주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저주 덩어리인데 이 저주 덩어리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본질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저주 덩어리라는 것이 표출된 것입니다.

우리는 살고 싶은데, 주님은 살고 싶어 하는 우리 때문에 죽어버렸어요. 그러니 ‘살고 싶어 하는 이것이 나일까, 내가 살려고 하다가 죽여 버린 저분이 진짜 내 모습일까?’ 한 번 비교해 보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살려고 하는 나는 허구이고 내 때문에 죽으신 그 자리가 바로 나의 자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고,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의 천국이 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사랑이 염치없지만 바로 우리가 받은 사랑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멀리 있고,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에스겔을 번쩍 들어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는 말은, 저주 받았다고 여겼던 이것이 바로 축복의 자리고, 소위 축복의 자리라고 여겼던 예루살렘은 어떤 자리가 됩니까?

하나님에 계신 자리가 저주의 자리죠. 그러면 교회라는 곳이 위험한 곳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죄악 된 모습으로 있는데 교회가 어떤 조작된 하나님을 믿는가 하면, 우리가 평소에 잘 되기를 원했던, 축복 받기를 원했던 그것을 교회가 조작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진짜 예수님은 이 교회에서 쫓겨났잖아요.

쫓겨났으니까 결국은 축복을 기대하는 이쪽은 저주의 자리이고, 저주 받은 여기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 갔지만 사실은 그것이 축복 주시려고 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걸 에스겔은 알지요. 하나님이 알려줘서. 그 대목이 8장의 내용입니다. 에스겔에게 이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에 진노 하시고 누구를 사랑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보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걸 보고 난 뒤에 에스겔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소식을 전하고 난 뒤에 뭘 느끼겠습니까? ‘역시 하나님의 조치는 항상 합당해!’

아까 15세 된 소녀가 3살 두뇌를 가지고 소경이 된 것. 그것이 하나님보기에 합당한 조치입니까, 아닙니까? 합당한 조치입니다. 이 세상에 합당하지 않은 조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하고, 저주 받은 이것이 합당한 조치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고 아벨의 제사는 받은 것이 합당한 조치지요. 이 합당한 조치에 대드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공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진노하십니다. 이것 역시 합당한 조치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 입장에서 합당하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저주 받을 자에게 저주를 하는데 합당하게 만든 것이 이 세상이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데 합당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둘을 합치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공의를 증거하기 위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합당하고 완벽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전혀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8장 1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도 분노를 갚아 아껴 보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런 구절을 보면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지옥 가면 어쩝니까?’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옥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주님과 자기가 떨어져 있을 경우에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께서 “내가 분노해서 멸한다.”고 하시면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주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잘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하나님의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주께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여기 어항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내가 있습니다. 자식, 아내, 부모 다 어항 안에 있습니다. 이 어항에 비치는 거울은, 하나님께 묻지요. ‘하나님, 내 남편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고 물으면, 그 묻는 자체 때문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주님이 보입니다.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물으니까 내가 힘들다.’ 라는 모습이 보입니다. “왜 내 남편은 구원 안 해 줍니까?” “그만 이야기해라. 짜증난다. 정말. 도대체 네 남편이 어디 있고, 네 자식이 어디 있는데?” 처나 자식이나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은 합당치 않은 것인데.

‘우리 자식은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습니다.’ 주님은 “나도 안다. 그놈이 내 새끼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그런 분이 모르는 일이 있겠습니까? “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인데,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친한 사람과 같이 술을 먹는데 나중에 취하면 서로 한다는 소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이 세상 모두는 다 독자적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남 사정을 다 모르면서 함부로 남 이야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 잘 표현한 영화입니다.

그러면 이런 현대인들이 어항에 들어 있으면서 각자의 하나님이 다 달라요. 다 다르지만 공통점이 뭔가 하면, ‘너희들의 일방적인 그 행동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자, 봐라. 피 흘렸다.” “그런 것 말고요.” 하나님을 보고 믿겠다는 그 일그러질 모습에 되비치는 것 말고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고생하고, 짜증내고 있는 이 자체가 우리 힘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짜증내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원망하고,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지옥 가고. 힘 주시고 지옥 보내고, 힘 주시고 천국 보내고.

아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대로 갚는다고 했지요. 이 말씀을 인간들은 이렇게 이해해요. 우리가 나쁜 짓하면 처벌 받잖아요. 그러면 처벌을 받는 순간 쾌락을 느낍니다. ‘아, 내가 믿는 하나님이 틀림없이 계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쾌락을 느낀단 말이죠. 그러면 쾌락을 느끼기 위해서 나쁜 짓해서 처벌받지 말고 처벌을 미리 받아버리는 거예요.

처벌을 미리 받으면 죄를 미리 지어요. 죄를 미리 지어면 처벌이 오잖아요. 처벌이 오게 되면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알겠지요. 그러면 즐겁지요. 그러다가 또 하나님이 계시는지 의심이 되면 또 죄를 지어보는 거예요. 죄 지으면 또 처벌이 주어지죠. 처벌 받을 때 기분 좋은 거예요. 왜? 자기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게 맞습니까?

하나님은 행위대로 갚으니까 나는 벌 받아도 마땅합니다. 내가 나를 칠까요? 미리 자기가 자기를 처벌하고 50%는 자기가 처벌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는 나머지 50%의 벌만 받으면 된단 말이지요.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너 지금 뭐하니?” 이게 바로 내가 만든 하나님을 자꾸 하나님이라고 우기는데, 그것은 나의 모습을 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피만 흘렸어요. 왜? 피 없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만날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지요?’ 하고 혼자 난리를 칩니다. 주님 보시기에 기가 찹니다. 주님은 그냥 피만 흘립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데, 그 앞에 마귀가 등장해서 “그래, 하나님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 맞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야지. 나쁜 짓했으면 헌금을 더 하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말은, 피 흘려야 용서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이것은 이미 확정된 것인데, 그 앞에서 뭘 죄인이 하고 말고가 있습니까?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10분 쉽시다.

(2010. 8. 9. 13:36   서경수 : 녹취)
 관리자(IP:124.♡.87.52) 10-08-18 09:32 
광주100723b에스겔8장b

광주 강의(2010. 7. 23) 9-2

레위기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이 종이가 레위기라면 ‘자, 보셨죠?’ 하고는 금방 내립니다. 레위기는 레위기 폭파용입니다. 레위기의 내용이 레위기 자체를 불태웁니다. ‘봤지?’ ‘뭔데요?’ 하고 보려고 하면, 내려버립니다. ‘봤잖아!’ ‘잘 못 봤는데요.’ ‘그럼 다시 한 번.’ 그리고 금방 내립니다.

잠시 보였다가 얼른 내림으로써 어떤 인간도 그 레위기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레위기가 해요. 어떤 인간도 거룩하게 되지 못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원래 거룩하지 않은 인간들은 거룩하지 않아야 해요. 거룩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레위기가 있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절대로 너희들은 거룩하지 못하거든.’ 이 사실을 확정하기 위해서 주었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이 맞지요. ‘이것이 거룩한 레위기다.’ ‘한 번 봅시다.’ ‘자, 바라.’ ‘좀 더 오래 보여주세요.’ ‘자, 봤지? 너희들은 이제 죽었어. 이 레위기대로 할 거야.’

레위기를 알게 되면, 거룩하지 않음에서 오는 기쁨,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데서 오는 가벼움이 있어요. ‘이래서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하구나. 괜히 복 받으려고 설쳤네.’ 아예, 우리 입에서 복이라는 단어가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 행복, 이것이 레위기가 주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때리기 전에 우리의 죄목을 써서 저주를 내리는 거예요. 마치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두고 무리들이 정죄할 때, 예수님이 그 무리를 향해 “그냥 돌아가!”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손으로 땅에다가 뭘 쓰셨어요. 레위기의 내용을 기록하듯 그냥 썼어요. 그렇게 하시니까, 손에 돌을 들었던 자들이 하나 둘씩 그 돌을 놓는 것.

레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가졌던 혈기, 오기, 자존심 이런 돌멩이들을 하나하나 놓았을 때, 모든 사람이 다 간음한 여인이 되고, 그 위에 ‘너를 정죄하는 자가 누구냐?’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여기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것을 맛보게 됩니다.

진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짜 자유를 누립니다. 진리를 잘 몰라서 어설픈 자유가 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복음을 알면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다고 하니까 ‘내가 피만 믿고 너무 방심하는 것 아닌가?’ 이런 걱정도 해요. 이게 어설퍼서 그래요.

저주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을 알면 그런 생각 안 합니다. 아직도 자신이 착한 구석이 있다고 착각을 해서 그래요.

레위기는 레위기 자체를 불태웁니다. 그렇게 태우면 레위기가 없어지지요. 그러면 레위기 해석 끝나는 겁니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을 불태우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에스겔이 있으면 그것을 자꾸 지키려고 해요. 레위기가 있으면 지키려고 해요. 그러면 지키려는 당사자가 아직도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보여주고 ‘이것 지켜라!’ 해놓고 ‘알겠습니다.’ 하면 불태워버려요. 왜 불태웁니까? 인간은 못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깐 보여줬다고 없애버리는 겁니다.

사실은 라이터 불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완성해버렸어요. 예수님의 피가 완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로 레위기 지키고 에스겔 지켜서 완성하려는 모든 시도가 거부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레위기를 말해야 하고, 에스겔을 말해야 합니다.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행하려고 하는 그 시도 자체가 아직도 에스겔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봅시다. 에스겔 9장 1절에 보면 기계가 나오는데, 어떤 기계입니까? 살육하는 기계.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육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이 살육하는 기계가 할 일은 뭡니까? 사람을 다 죽이지요. 살육하는 기계가 그냥 등장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복면을 썼다고 생각해 봅시다. 복면을 하고 사무라이들이 사용하는 칼을 들고 갑자기 북쪽에서 새벽 3시 26분에 등장해서 자는 사람들에게 이유도 말하지 않고 다 죽인다. 이 때 죽어가면서 묻습니다. ‘당신 뭐야? 내 사랑하는 가족을 왜 죽여?’ 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할까요? “I am a killer.” 나는 살육하는 기계다.

이것은 뭘 연상합니까? 유월절 밤 천사가 집집마다 방문해서 문설주에 피가 없는 가정의 장자는 전부 죽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생각나지요. 여러분, 이런 하나님이 너무 낯섭니까? 아니에요. 이 기능도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원래 이런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피조물로 만들어서 함께 살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살육 당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다. 살육 당함으로 인하여 그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사랑이란 이름으로 살아왔다는 거예요.

왜 결혼한 남편과 아내가 부부싸움으로 이혼을 하게 되는가 하면, 20년 동안 같이 살아도 어느 한 순간 지금까지 봤던 남편의 얼굴이 아니에요. 눈빛도 달라요. 그동안 내가 알았던 남편의 얼굴이 돌변해서 타인처럼 느껴지면서 한 마디 내뱉는 말이 뭔가 하면,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과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한 마디가 여자한테 날아오면, 여자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이혼서류 작성합니다. 그 때 달래려고 “여보, 미안해! 내가 어제 술기운에 한 말인데 나의 실수였어.” 아무리 변명해도 안 됩니다. “당신이 나랑 결혼한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웠다면 이제 조용히 끝내자. 당신의 그 한 마디 안에 나에 대해서 그동안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 들어있다. 법원에 가자!”

이것이 바로 에스겔 9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육하는 기계를 보냅니다. 원래 이런 분이 하나님이었어요. 새벽 3시 24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올 때, 대낮 같으면 한 번 싸워보기라도 하지요. 그런데 한 밤중에 잠든 사이에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냥 다 죽이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섬긴 하나님은 뭡니까? 우리가 만든 우상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우상이야!’ 라고 그동안 여러 차례 말해도 그 말을 안 들었어요. 왜냐? 그것이 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일그러진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선지자에게 임하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어요.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는 여호와가 아니고 우상이다. 너희들이 지어낸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교회 다닌다는 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면서도 교회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이 정말 위험해요. 삼위일체 배우고, 학습, 세례 받고, 단도리(채비, 단속) 할 것 다 했어요. 그런데 그 단도리가 문제라. 살육의 천사가 새벽 3시 24분에 찾아와서 죽일 줄 누가 알았습니까?

이렇게 살육하는데, 빠지는 사람이 있어요. 에스겔 9장 4절에 보면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보면서 ‘주님, 세상이 이렇습니다.’ 하면서 탄식하는 사람에게는 에스겔이 매직을 들고 가서 이마에 표시를 하는 거예요. 안 지워지도록.

이것은 마치 유월절 밤에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요. 그리고 여리고 성이 공격당할 때 기생 라합이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려놓아 표시를 했지요. 그래서 붉은 줄이 있는 그 집 빼고 나머지는 다 진멸했는데, 그 때 붉은 줄이 그 가정을 살리잖아요.

5절에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고 했어요.

에스겔이 지금 하는 일이 뭔가 하면,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을 봐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 뜻과 다르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울고 탄식하는 사람을 건지는 겁니다.

전도가 뭔가 하면,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람에게 형제라는 표를 하는 거예요. 둘이 서로 만날 때 ‘세상이 너무 더럽고 역겹습니다.’ ‘그렇지요. 나도 더러워 토할 지경입니다.’ 이렇게 같이 울고 같이 탄식하는 사람, 이 사람들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어리석음으로 다가옵니다. 왜 어리석음 입니까? 에스겔 8장 3절에 보면, 에스겔이 어디로 인도받습니까? 머리털을 잡고 들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요. 예루살렘을 구약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시온입니다. 원래는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시온산입니다. 어쨌든 시온입니다.

시온이 뭘 하는 곳인가 하면, 메시아가 작업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가 작업해요. 메시아는 구원될 자와 심판할 자를 가려내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될 자를 가려내면 그 나머지는 심판받을 자입니다. 그래서 구원행위가 곧 심판행위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은 나라잖아요. 그런데 천국이 오게 되면 그게 심판의 날이에요. 왜냐? 구원받을 자가 따로 분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온에 뭐가 있는가 하면, 부딪힐 돌이 있어요. 그래서 이 돌에 인간들의 행위가 다 깨어지도록 합니다.

인간은 자기 선행에 대한 보상을 원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학생이 일기를 쓰면서 매일 착한 일 한 것을 기록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 일기를 보고 찢어버렸어요. 그러면 그 학생의 착한 일이 남아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시온에 있는 돌입니다. 인간이 평생 동안 한 행위들을 다 가지고 나와서 그 돌에 부딪혀서 깨어지게 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다 깨어버리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입장이 됩니다. 그것이 시온이 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즉 시온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는 거예요.

그 시온에서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 메시아 앞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 작살납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1) 자기가 알아서 시온에 들어왔기에 구원 받는다. 2) 그냥 구원 받는다. 몇 번입니까? 2번이죠. 사람이 자진해서 ‘주님 만나러 간다.’고 하면 그것도 깨어질 행함이 됩니다.

자기가 예수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을 것이라는 이것도 시온에 있는 돌에 다 깨어져야 합니다. 하여튼(잘했든, 못했든) 모든 인간을 다 동일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뭔가? 그 사람 속에 있는 아담의 속성만 남지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입혀준 것이 뭐죠? 가죽옷입니다. ‘가죽옷을 입힌 것이 구원의 의미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네가 내 앞에서 내세웠던 자리가 바로 이 자리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살려고 나름대로의 처방을 내린 그 지점에 가죽옷을 입혀서 콘크리트를 칩니다.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결국 가죽옷은 ‘인간은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시온에서 부딪힐 돌에 부딪혔을 때에 모든 행함은 다 사라지고,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긍휼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긍휼 얻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은 긍휼을 못 받습니다. 왜? 긍휼 얻겠다고 나오는 그것이 행함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무화과 입 옷이지요. ‘내가 어떤 조치를 하면 내게 긍휼이 임할까’를 노리고 어떤 것을 하면 그 사람은 긍휼 못 받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구원 못 받습니다.

교회 다녀서는 구원 못 받고, 자신이 교회가 되어야 구원 받습니다. 자신이 걸어 다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란 말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사람이란 것이지요. 하나님의 피가 있는 사람, 미아에 표가 있는 사람은 그 자체가 교회입니다.

세상을 보고 절망하며 울며 탄식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왜냐? 예수님이 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그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탄식하는 것.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면 나오지요. 선지자 속에 예수의 영이 있어서 그들이 장차오실 예수님의 고난과 그 영광을 전파하지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몇 초 동안만이라도, 이 세상이 심판받아 멸망할 것이 보인다면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그 이마에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에스겔 9장 4절에 ‘이마에 표하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만 이마에 어린양의 표를 하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짐승의 표가 있습니다. 아무리 세수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표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린양의 표를 받으면 어린양,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는 사람입니다. ‘세상 참 더럽다. 이것도 교회라고.’ 이렇게 세상을 보고 탄식하고 우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자기 행함을 내세우는 사람은 살육 기계로 죽임 당할 사람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결국 하나님은 피조물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피조물을 만드신 이유가, 이렇게 무섭고, 이렇게 자비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피조물을 그동안 생산한 겁니다. 생산해놓고 거두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거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피조물은 주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지요.

‘제가 이렇게 된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인정할 때, 온 우주를 통해서 우리 주님이 영광을 받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간단하지요?

9장 6절 끝부터 봅시다.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을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아까 예루살렘이 시온이지요. 시온에 뭐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에 누가 계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죠. 하나님이 계신 곳을 누가 친다? 하나님이 여기서부터 치기 시작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전은 손대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이미 하나님은 성전을 빠져나왔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쥐고 있는 거예요.

빠져나온 쪽이 성전을 치는 겁니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성전에서 빠져나오신 분을 발견해야 됩니다. 빠져나가신 분이 다시 올 때는 성전 자체를 심판하러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빠져나가셨다가 다시 오실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뭔가 하면, 구약 성경을 완성하기 때문에 에스겔을 완성하기 위해서, 에스겔이 한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고집해요. 그리고 성전을 뒤집어요. ‘이곳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냐?’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역대하 6장 38절부터 보면,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과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게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 보옵시며 주께 득죄한 주의 백성을 용서하옵소서.”

6장 24-25절에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오소서.”

28-30절에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이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그렇다면 결국 기도하는 집이 어디입니까? 성전이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는 장소가 역대하 6장에 의하면 어디입니까? 성전이고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른 척 했습니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역대하 7장에 보면 영광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장소를 확보했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까 이제는 게임 끝났어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성전을 확 뒤집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은 항상 왜곡합니다. 레위기를 말씀하시면 레위기를 왜곡하고, 에스겔을 주시면 그 말씀을 왜곡하고, 어떤 말씀도 다 왜곡합니다. 그 말씀을 자기 좋아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롭고 똑똑한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은 명석하게 하나님 말씀을 해석해서 결국은 예수님을 죽였어요. 그래서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건전한 신학이라고 하는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데 왜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입니까? 외국에 유학 가서 박사가 되고, 귀국해서 신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왜 그 가르침을 받고 목사가 된 사람들은 다 이단 노릇 합니까?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아담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출발부터 왜곡되어 있습니다. 이 주장을 제가 ‘70이레’ 논문에서 밝혔습니다. 모든 해석을 우리가 엉터리로 할 때 결국 남는 것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 앞에 서면 ‘우리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밖에 안 나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렸다는 것이 모든 성경의 해석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쓸데없이 원어 연구하고,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해서 십자가 피를 모독하고 있어요.

사건과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은 그 사건들을 모아서 이미지를 만들어요. 이게 바로 영화고 드라마입니다. 드라마를 제작할 때 어떻게 합니까? 하루에 다 찍는 게 아닙니다. 한 장면 찍고 컷! 그리고 또 다른 장면을 찍고. 이렇게 해서 연결합니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볼 때는 어떻습니까?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흘러가지요.

그런데 인간은 아침에 눈만 뜨면 자신이 영화 감독이고, 드라마 PD가 됩니다. 드라마를 써요. ‘오늘은 우리아이가 시험을 쳐서 100점 받아서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남편은 회사에게 큰 거래 성사시켜서 보너스 받고 --’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요.

역사가 뭐냐 하면, 1592년에 임진왜란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중간에 있는 사람과 그 전에 있는 사람과 그 드라마를 보는 시각이 달라요.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 이준익 감독 - 그 영화를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선 사회를 그린 영화인데,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키고 그런 내용이 있어요.

1590년의 드라마와 1592년의 드라마가 달라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24살에 본 드라마와 25살에 본 드라마가 달라요. 다르다는 말은 60대에 보면 또 다르다는 겁니다. 죽기 5초전에 누가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희미하게 물체가 왔다 갔다 하고, 모든 것들이 다 흐릿하고 의식마저 가물가물할 때, 그동안 내가 평생을 썼던 모든 영화, 드라마의 감독은 이제 손을 놓게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드라마 쓰고 있어요. 성경에서 말씀하기를 ‘십자가는 세상에서 어리석은 것이다. 하지만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 했어요.

시온에서 긍휼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상한 성전은 깨지고, 그것을 깨뜨리는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그 성전에서 뭐가 나옵니까? 아까 역하대 6장에서 이야기한 모든 긍휼과 자비가 다 쏟아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했습니까? 그 답은 ‘속았지 롱?’ 왜 속입니까? 그것은 아담 자체가 이마 악마에게 속아있기 때문에 속아있는 사람한테는 그대로 하면 안 돼요. 죄 있는 사람에게 죄인으로 보여야 그게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해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죄를 말하면 자동적으로 죄 아닌 것은 의가 됩니다. 죄와 의를 가르는 이 자체가 심판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개념은 예수님 입장에서는 전부 죄가 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오신 것입니다.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한다.’

보는 사람을 소경되게 하고, 소경은 보게 한다면, 우리들이 만든 역사 드라마에서는 ‘모든 소경은 다 눈 뜨겠네.’ 이런 의미가 되지요. 이런 안목은 죄인인 우리의 안목입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은,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인간은 곡해하고, 오해해서 잘못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해석 아닌 것은 뭡니까? 아닌 것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아는 것은 똑똑한 겁니까? 십자가를 알 때,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주님의 영이 와서 십자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진짜 십자가를 아는 겁니다. 왜? 십자가는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 내 드라마, 내 역사로는 십자가를 못 알아봐요. 성령이 임해야 알아봐요.

15세나 된 소녀가 3세 IQ를 가지고 통 싸고, 오줌 싸고 하는 이런 처참한 가정에, 남자 둘이 돌아가면서 돌보는 이 상황을 복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아는 복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인데 이 가정은 정 반대니까.

그런데 만약 이런 가정이 주님이 함께 계시면서 ‘너도 이런 환경에 처해볼래?’ 라고 하시면 ‘아닙니다.’ 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당해보면 이 안에서 웃음이 나오고 행복이 나오더란 말이지요. 이런 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항상 우리 자신을 어리석게 만들고, 내가 안다고 여기는 자체가 어리석은 아담 세계 속에서 보이는 잘못된 안목인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사건들, 그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이것은 선이 아니야, 이것은 저주야.’ 라고 했는데, 돌아서서 보니까 그것이 축복임을 알 때, 그 때 비로소 와 닿는 게 ‘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주셨구나.’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기도할 때 지혜롭게 기도해요. 예를 들면, ‘하나님, 이런 죄를 지었어요. 제가 받을 벌을 선정하겠습니다. 1) 2일 감기몸살. 2) 5만원 사기 당함. 3) 아들 성적 2등 하락. 4) 남편 12시 귀가. 5) 교인 2명 다른 교회로 옮김. 이런 것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착한 일도 했어요. 그래서 1) 교인 3명 등록. 2) 길에서 돈 10만원 습득. 이런 목록을 나열해 놓고, ‘주여, 어느 것 주시겠습니까?’ 이러고 있어요.

이게 바로 소위 지혜롭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은 뭡니까? 기쁨으로 목숨 바칠 수 있는 것을 제공합니다. 얼마나 기쁜지 내 목숨은 하찮게 여기고 ‘저것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 던지겠습니다.’ 라는 그것이 응답입니다. 응답은 하나뿐입니다. ‘이미 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했을 때, 그 때 기도 응답은 내 목숨을 바칠 만큼 좋은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 제 이 기쁨을 제 아들도 맛보게 하옵소서.’ 라고 하면, 그 다음 주님의 응답은 뭘까요? 똑같아요. ‘네 아들을 위해서 네 목숨 바칠 준비 됐나?’ ‘미쳤습니까? 아들을 위해 목숨 바치게.’ 이러면 가짜가 됩니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 지셨는데, 내 목숨 바쳐서 아들 구원 얻는다면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러면 요한일서 3장 16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는 말씀이 성취된 겁니다.

그 사람은 목숨 안 바쳐도 이미 그 상태가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배후에 십자가가 깔려 있어요. 십자가에서 모든 말씀이 다 나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우리의 지혜로는 용납이 안 됩니다. 우리 지혜로는 심한 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말씀이 그 순간 완성이 되는 겁니다.

‘말세에 돈을 사랑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 쭉 나오는데,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에 자녀의 교사 임용 시험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새벽기도 나오고, 거지를 만나면 돈도 막 줍니다. 평소에는 안 줘도. 왜?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얻고자 하는 진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시험치고 막 돌아온 아이에게
‘오늘 시험 잘 쳤나?’
‘망쳤어요.’
‘아이고,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저주 받았어.’

그런데 이번에 너무 신청자가 적어서 전원 합격을 했습니다.

저주 뒤에 축복이 옵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다음에 어리석지 않은 진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다 해결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데 이것이 축복입니다.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이 생활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십자가는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바 되었다는 것,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십자가의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이 피조물인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렇게 만들어 내십니다.

이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는데, 잡혀가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잡혀가면서 비로소 내 자리가 얼마나 큰 오해의 자리였고, 나의 역사, 나의 드라마가 얼마나 곡해된 환상의 세계였는지, 내가 깨닫지 못하는 현실을 주께서 십자가 피로, 모든 나의 꿈들을 밟아 주심으로, 이미 우리는 주와 함께 있는 구원 받은 사람의 티를 내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스겔 말씀을 살펴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육하는 기계에 죽어야 마땅한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허구로 만들어서 상대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피 흘리는 모습으로 찾아와서 ‘다 이루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미 구원 받았어.’라는 그 소식이 우리의 귀한 보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8. 17. 11:40 서경수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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