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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3 16:26:52 조회 : 2979         
Re..광주 강의 14-3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4-3

셋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결국 성도라는 것은 개인적인 주체, 개인적인 자존심 같은 것은 없고 주님께서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노리개, 혹은 장난감 --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는 내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주께서 ‘내 것이 되었다’고 하셔서 우리는 소유 등기만 이전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를 헤집고 다녀요.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이리 매치고 저리 몰고 하면서 즐기시는 느낌이 들어요.

고린도후서 4장을 보면, 우리가 하고 싶은 발언이 통하지를 않아요. 우리의 소망, 꿈 이런 것이 전혀 들어가지를 않아요. ‘대한민국이 이번 월드컵 4강에 들어간다.’ 뭐 이런 것이 없어요.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일방적’이예요.

성도는 하나님의 일방적 ‘관리 대상’입니다. 상당히 어감이 기분 나쁘지요? ‘관리 대상’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제가 첫 강의에서 말씀했지요. ‘우리는 다른 종족의 사람이다’라고.
성경에 부합되는 다른 종족의 사람. 성경 내용이 누락 없이 고스란히 차고 들어와서 쌓이고 쌓여 그대로 담기는 그런 관리 대상의 특수한 종족이라고 했습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우리가 특별한 종족이며 성경 말씀이 쌓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더 이상 ‘내 것, 나, 내 인생’ 이런 것은 포기를 해야 합니다.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제 내 인생이란 것은 없구나. 끝났다.’ 라고.

이런 자기 포기를 성경에서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은사’라고 하지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몇 가지 선물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인생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너는 없어도 무방했었던 존재다.’라는 것이지요. 없어도 되는 인생인데 나왔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이 난해한 철학적 문제가 풀립니다. 그렇지 않고 일반 철학에서는 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어머니 왜 저를 이런 모습으로 낳았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 자체가 굉장히 난해합니다. ‘나는 넌 줄 모르고 낳았지. 낳고 보니 네가 나온거야.’ 라고 솔직히 답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자식은 기분이 나빠요. 엄마, 아빠는 내 인생에 대해 책임감이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나는 책임 없다.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왜 내게 따지냐?’ 이런 식으로.

그러면 자식은 ‘내 인생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당연히 이렇게 나오겠지요. 남들처럼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뭔가 결핍 요소가 있고 결핍된 요소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자기의 선악적인 양심에 균형이 잡히는데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할 사람이 없어요. ‘엄마, 왜 날 낳았습니까?’하고 엄마에게 보충을 하려고 했는데, ‘얘야, 내가 죄가 많아서 너 같은 불구자를 낳았구나.’ 뭐 이런 식의 이유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낳다 보니 너 같은 녀석이 나왔는데 왜 내게 따지냐? 어디 이런 불효자식이 다 있어’ 이렇게 나오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내 인생 이런 꼴로 된 것은 누가 책임을 집니까?

‘누가 내 인생을 이 꼴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할 때, “이 꼴”이, ‘왜 나는 월급 960만원 밖에 못 받게 하시고, 왜 나는 70평 정도의 아파트에만 살게 하시고, 나는 왜 골프만 치면 홀인 원이 되지 못하고, 왜 나는 형제가 둘 뿐이고, 나는 왜 땅을 25만평 밖에 못 가지게 했습니까?’ 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자도 자기 욕망을 채울만한 부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서울대학에 못 들어가고 왜 연세대학에 들어갔습니까? 엄마가 그 때 연세대학에 원수를 내지 말고 서울대학에 냈으면 지금은 서울대학에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어머니께 원망하고 있습니다. 자기 옆집에는 지방대학 들어가기 위해 재수가 아닌 3수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내 속에 나라는 것을 뭘로 채워야 내가 만족하는 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뭔가 하면, 이것을 채우는 방법이 아니고 나를 해체해서 없애는 방법을 취하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 4장입니다.

나를 죽여 버립니다. 있으면 채워야 하는데 후패해서 없애는 거예요. 없애도 남아 있잖아요? 천만에. 없애면 주님의 몸으로 있지요. 주님에게 걸쳐진 가지지요. 주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걸쳐있는 가지죠. 가지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몸체와 분리되었으면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는 가지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열매 맺으라고 있는 것인데, 그 열매는 가지가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고 몸체와 붙어있느냐에 따라서 그 가지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가지는 안 중요해요. 가지는 몸체에 있는 생명이 열매로 이어지는 중간역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몸체 이야기하고 열매 이야기해서 중간에 있는 가지(나)에 대한 관심사를 빠지게 만듭니다.

크리스탈 제품을 만들 때 긴 대롱에 크리스탈 원료를 묻혀서 고열에 가열한 후 대롱을 입으로 불지요. 그러면 바람의 세기에 의해서 대롱 끝에 크리스탈 모양이 결정되지요. 이처럼 주님은 입으로 불고 우리는 긴 대롱 끝에 붙어있는 크리스탈입니다. 주님의 뜻이 대롱 끝에 드러나요. 만약 주님이 불지 않으면 대롱 끝에 붙어있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실상이고, 열매도 안 보이고 주님이 입으로 불고 계신다는 것도 안 보여요. 23시간 55분 동안은 주님과 열매는 안 보여요. 그런데 성령이 함께 있는 사람은 짧은 순간이지만 ‘주님에 속한 나’라는 것, 그리고 주님이 순간순간 나를 가지고 노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제가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은 분명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자기를 부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백날 불어봐야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하고 달려드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대해 반기를 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자기도 모른다고 해요. 그냥 거부하고 달려들고 싶데요.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있어요. ‘저 인간들은 마귀에게 넘긴 자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갈라디아서 4:15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사도를 너무 좋아해서 눈이라도 빼어주려 했던 자도 있었습니다.

5장을 봅시다.
좀 난해한 대목이 있는데,
1-3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절 뒷부분에 보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누가 이렇게 하십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려면 우리는 죽을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끌어 모으는 것은 살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죽을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악역을 맡았으면 끝까지 악하게 나가야지 착한 역할로 돌아서면 감독에 의해 커트 당합니다.

엑스트라들이 자기 분수를 지켜야지 죽는 역할을 맡았으면 죽는 것으로 끝나야지 또 살아나서 대사를 읊고 그러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같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다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다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을 분류시키는데 어떻게 분류시키는가 하면, 성도에게는 기어이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아내를 믿다가 아내로부터 버림 받고, 자식 의지하다가 자식에게 외면당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믿다가 자기에게 실망하고 -- 그렇게 하십니다.

아까 다양한 기적을 말 했습니다만, 이번에 말하는 기적을 생각해 보세요.
거지 나사로. 이 사람의 프로필을 한 번 봅시다. 재산 없음. 병 앓음. 보호자 없음. 개들도 업신여김. 이런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가도록 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처지도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 질병 이런 것이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 즉 아브라함 품에는 선택된 자만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 악조건에 있다 할지라도 천국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지 나사로를 거지로 만드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나사로가 있는데, 이 나사로의 프로필을 봅시다. 예수님 믿음. 누이 2명 있음. 젊음. 이 나사로와 거지 나사로의 조건을 비교했을 때 어느 조건이 더 좋습니까? 이런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다 불쌍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다 주님 계시는 천국에 갔습니다. 그렇다면 천국 가고 안 가고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는 것이지 인간들의 조건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조건을 가졌던 주님의 능력이 찾아왔다면 인간 조건으로 우열을 논하거나 스스로의 조건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건으로 만족한다면 이 조건이 확장됩니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한 이야기인데, 이 사람은 세상을 두 속성으로 봤습니다. 사유와 연장으로 봤습니다. 물체의 속성은 연장이고 인간의 속성은 사유라고 봤거든요. 이 둘의 특징이 있어요. 둘 다 무한대로 치달아요. 이것은 병입니다. 그런데 이 병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이미 무한을 얻기 위해서 따먹었습니다. 무한대로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은, 90살 다음에 몇 살입니까? 91살이지요. 91다음에는 92살. 이런 식으로 계속 연장된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은 다른 레벨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생명이지 90에서 91, 91에서 92 이렇게 계속 산다고 해서 생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자기 지점을 생명의 지점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보같이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이 이어지면 그것이 생명인 줄 알았어요.

생명은 출발점이 이 지점이 아니고 다른 지점이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므로 말미암아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야 우리가 생명을 얻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나무 과실’이라고 했고, ‘생명의 떡’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출처가 다른 곳인데, 자기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영생은 조건이 다른 곳에서 와야 하는데, 그 다른 곳을 가리켜서 ‘말씀의 성취’라고 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여러분이 피곤하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시간 다 보고 있어요.

‘말씀의 성취’가 될 때, 모든 말씀이 성취가 되면 “의”가 생깁니다. 이 ‘의’가 있을 때 ‘생명’이 와요. 그런데 아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뭐가 없다고 했지요? 정죄함이 없다. 이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지금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왜 제게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너는 창세전에 구원되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하시지요. 그러면 ‘감사합니다.’ 하고 반응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좋다. 네가 정말 어떤 상황이 와도 감사하는지 보자. 우겨 쌈을 당해도 감사하는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감사하는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감사하는지’

예수님께서 이런 것을 다 아시고 배려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몸을 드리신바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설프고, 우리 힘으로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4절 끝부분에 다시 보겠습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대목의 해석을 위해서 앞에 고린도전서 15장을 보겠습니다. 42-50절인데, 지금까지 강의를 들었으니까, 이 본문을 제가 이야기할 텐데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이런 계획과 절차대로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보고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누가 이렇게 합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주님이 알아서 해요.

50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새 옷으로 단장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몸은 벗어야 하고 새로운 옷으로 벗은 몸을 입혀 주신다는 식으로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5절을 봅시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이 좀 어려워요.

보증으로 뭘 줬다고요? ‘성령’입니다.
비교해 봅시다. 보증으로 ‘목사증’ 또는 ‘세례증’과 성령의 차이점은 뭡니까? 한쪽은 눈에 보이지요. ‘당신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목사임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본인이 본인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라고 해 놓고 뒤에는 ‘-- 아나니’ 누가 알아요? ‘네가 알잖아.’

어떤 사람은 제게 이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제가 성령 받았습니까?’ 이것은 ‘목사님 제 신체부위 중 어느 부위가 가려운지 아십니까?’ 이런 물음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 신체 가려운 것을 내가 알 필요도 없고, 모르지요.

요즘 이런 사람이 있어서 제가 애를 먹어요. ‘목사님 제가 요즘 믿음이 없지요?’ 이러고 있어요. 내가 그 사람 믿음 있는지 없는지를 내가 왜 판정합니까? 그런데 판정을 해 달래요. 그래서 내가 판정해 보니 ‘당신은 불신자입니다.’ 왜 그래요. 판정해 달라고 요구하니까 불신자에요.

결국은 자기가 자신이 없기 때문에 목사라는 권위자에게 물어보면 남을 속일 수 있는 자격증이라도 되는 줄 생각해서 그래요.

이것을 일소에 부치고 다 허물어버리는 방법이 뭔가? “성령이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아나니” 이것은 남에게 과시할 필요도 없고, 혼자만 알고 있어라.

예인과 같이 영화를 보는데, ‘너 웃었지?’ ‘아니’ ‘너 웃었잖아?’ 이것은 웃음을 강요하는 거예요. 아무리 애인이지만 웃고 안 웃고는 자기 마음인데, 어떻게 상대가 간섭합니까?
남자들 중에는 이런 변태들이 있어요. 자기 감장에 상대도 동조하기를 바라는 사람 말입니다. 김 집사님은 이런 부류에 속합니까,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약 우습지도 않은데 웃으라고 강요하면 억지로 웃을 수는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색합니까? 성령이 임한 사람은 절대로 성령이 오심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 안 믿겠다고 작심을 해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말씀이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해요.

남들은 다 안 믿는데 본인은 믿어져요. 하나님 말씀이. 이것은 내 마음대로 믿고 말고가 안 돼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내 힘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을 본인이 믿는다는데 왜 남이 시비를 걸어요? 이런 사실을 남이 검문할 필요 없잖아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혼자 주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안 떠벌여도 조용히 사랑하는 거예요. 24시간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24시간은 편의점이나 김밥집이 24시간 이고), 그렇지만 성령이 임한 본인은 알아요.

평소에는 ‘내가 잘 해야 복 받지. 잘 하자!’ 하다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예수님 피로 구원 받지’ 이렇게 믿어져요. 반대로 평소에는 ‘내가 또 죄를 지었구나. 이러다가 지옥가지’ 이렇게 하다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는데, 내가 미쳤지. 왜 내가 나를 자책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뜨거운 것도 아니고 요란한 것도 아니고 본인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고 했어요. 남한테는 보배가 아닌데 자신에게는 보배지요.

이제 강의 맺겠습니다.
질그릇에 보물이 담겼데요. 그래서 딸랑딸랑 소리가 날 때마다 기쁘데요. 그러면 남에게 기 죽을 필요 없지요.

‘이 성경 말씀이 딱 나보고 하는 말씀이네. 나도 주님의 보배를 가졌어.’ 이런 사람은 성령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셔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도 안 보고 도망치면서 혼자 죄인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 안보면서 죄인이라고 하지 말고, 성경을 보면서 죄와 보배를 다 받아버리면 ‘나는 죄인인데 보배를 받았구나. 이 좋은 말씀을 다른 사람은 왜 안 믿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이 분명한데---’ 이런 기쁨을 서로 나누는 그런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인간들은 사실 똑같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못 되면 다 하나님 탓이고 남 탓이고, 잘 되면 자기 노력한 탓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저희들을 그런 사람과 분류시켜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몸을 소망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람이 살아봐야 결국 죽는데 영생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 공자도 석가도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보물을 영원한 보물로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6. 5. 22. 15:0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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