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광주강의
2006-06-16 11:50:03 조회 : 3182         
Re..광주(060526) 15-1 고후 6장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2006. 5. 26) 15-1
이근호 목사

오늘은 고린도후서 6장을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5장을 하면서 미진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18-19절에 나오는 “화목”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화목”이란 것이 뭐냐 하면, 구약에 보면 전쟁할 때 항복을 의미합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기생 라합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 이전에 라합이 먼저 손들고 항복을 했지요?

“평화”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 평화냐 하면, 전쟁이 종결된 상태를 평화라고 합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아채고 그 전쟁의 끝자락에서 현재 나 자신을 볼 때 미리 항복을 해야 된다. 이것이 기생 라합의 경우거든요. 이것은 구약의 경우이고,

신약에 보면, 우리는 항복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항복하지 못하도록 이 세상 신이(고후 4:4에서 세상 신이란 말이 나오는데 ‘사단’이지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적하고 반항하도록 해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게 되어 있지 그리스도에게 항복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악마를 묶어 놓으시고, 그 안에 있는 우리를 끄집어 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고 항복하도록 그런 마음을 줄 때 이런 결과를 가지고 “화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 너에게는 전쟁이 없어. 이제 전쟁은 끝났어.’ 라고 하지요.

제가 오늘 6장을 시작하면서 6장 처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2절) 하면서 “은혜”라는 말이 나오지요. 여기 은혜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간은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

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가 하면, 우선 관심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나’입니다.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있다’ ‘없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가 이것입니다. ‘있음’에서 과학이 나오지요. 뭔가 있으니까 분석하고, 없는 것을 발명하고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있다가 부서지면 없어지잖아요. 사람이 늙어 죽으면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있다’와 ‘없다’ 사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있는데 나이 많아서 죽으면 나는 없어진다. 없어지는 것은 괴로운 것이고 있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하는 것도, 소유가 결국은 ‘있음’입니다. 있는데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있음’, 이렇게 많이 있는 것은 현재 나를 더욱더 오랫동안 있게 만듭니다.

항상 사람들의 관심은 ‘나와 내가 가진 것’, ‘소유와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기본이 되어서 매사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죽음과 생명’으로 이야기합니다. ‘있다, 없다’를 존재라고 한다면, ‘죽음과 생명’은 하나님의 언약이지요.

예를 들면, 노아 방주의 경우 방주에 타지 않은 사람들, 방주에 들어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요. 분명히 있는데, 이들은 지식도 있고, 학식도 있고, 인품도 있고 가족도 있어요. 자기라는 몸도 있고(이것을 존재에서는 속성이라고 하는데 - 내 머리카락은 검다, 나는 몸무게가 얼마다, 키가 얼마다) 분명히 이런 속성들이 있어요.

아가씨들이 거울을 보면서 자기의 속성들을 다듬습니다. ‘머리를 길에 할까, 파마를 할까’ 이렇게 현재 자기의 있는 것을 관리하는 거지요. 노아 시절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이 비 오는 그날도 분명히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했을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모든 ‘있음’이 방주가 등장하고부터는 그 ‘있음’은 죽음을 표시하는, 죽음을 나타내는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있다’ 있으니까 계속 ‘있음’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있는 것은 맞는데 그 ‘있음’이 무엇을 위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있음’인 줄 네가 아느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모르지요. 나는 ‘있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간다. 이것이 전부라는 말이지요. 몸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약을 먹고 몸이 나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습니다. 왜 상쾌하냐 하면, ‘아픈 몸’이 이제는 ‘건강한 몸’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현재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고, 그것도 ‘건강하게 있다’는 것은 보너스로 더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있음’ 자체를 굉장히 좋게 생각합니다.

초여름이 되어 비가 촉촉해 내리고 습기가 적당히 있고 기온이 15-6도쯤 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면 온 피부에 오는 그 느낌이 굉장히 상쾌합니다. 시원하고 밝은 날씨에 잔디에 누워 푸른 하늘을 쳐다보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기분 좋게 있다는 것이 자기를 더욱더 기분 좋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있다는 거지요. 제가 방금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여러분들이 아침에 눈떠서 해 질 때까지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습니까? 내가 있는 것 때문에 기분이 좋잖아요.

어떨 때 기분 나빠요? 나의 ‘있음’이 위협을 받을 때는 기분이 나빠요. 몸이 아프다든지 갑자기 차 사고가 일어난다든지 가족 중 누가 다쳤다든지 이렇게 되면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기분 좋고, 나쁘고 한 것이 ‘있음’에서 나오는데, 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좋은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고 “네가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 줄 아느냐?”고 하십니다. 그것은 모르지요?

그런데 성경은 보면 언약을 위하여 우리가 있습니다. 언약을 쪼개 보니까 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심판(혹은 저주)과 생명(혹은 구원)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가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방주 안에 안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도 비 오는 그날 아침에 분명히 화장대에 앉아 자기의 ‘있음’에 대해서 아주 기분 좋게 화장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주가 등장하고부터 그들의 ‘있음’은 뭐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있음을 보여주는 ‘있음’에 불과했다는 것이 방주가 등장하니까 비로소 들통이 난 것입니다.

만약 방주가 없었다면 그들은 ‘자기가 있다’는 그것으로 인생의 모든 행복을 그 안에서 다 발굴하고 캐내고 즐겼을 것입니다.

자기가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얻는다고 제가 간단히 이야기를 했는데, 듣는 여러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루 24시간 아니 평생을 다하면서 결국 내가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썼던 그 목적, 이유, 어떤 보람 같은 것이 다 어디로 쏠리기 위함입니까? 있는 나를 더욱더 있게 만들고, 많이 가진 있음이고 아름답게 있기 위해서 찬란한 영광을 듬뿍 머금은 나의 있음을 위해서 온 평생을 다 매진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강의하면서, “여러분은 내가 있다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라고 그것을 문제시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그렇다면 목사님, 사람이 사는 것이 그것 말고 뭐가 있는데요?’ 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구원 받아 천국 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다 ‘나’라는 있음을 위하여 ‘나’에게 충실히 봉사하고 ‘나’ 자신을 섬기기 위해서 열심히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전에는 노아의 방주이지만 지금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노아 시절에는 방주 안에 들어가야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온 능력을 받아서 십자가 안에 있을 때만 구원 받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지요.

십자가가 어려우면 방주를 생각해 봅시다.
이웃집에 노아라는 할아버지가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화장을 하고 내가 한 화장에 스스로 대 만족을 하면서 길을 나서는데 노아를 봅니다. “할아버지! 뭐 하세요?” “응. 방주를 만든다.” “그것 왜 만드는데요?” “장차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시거든.” “심판이 오면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구원 받을 수 있지요?” “아니야! 착하고 안 착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방주 안에 들어온 자만 살고 나머지는 다 심판이다.”

노아가 이런 소리 한 것이 얼마나 극단적인 사고방식입니까? 아주 도발적이지요.
제가 지금 길게 이야기 한 것이 뭐냐 하면, 결국 방주가 뭘 공격한다는 말입니까?
방주라는 것은 인간의 ‘있음’을 공격하는 식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신학이 문제가 뭔가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과 나를 비교해서 “구원은 내가 예수님을 섬길 때 구원 받는다.” 이렇게 알고 있어요. 이것이 정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섬길 때 구원 받는다.”

이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받는데, 왜 예수님이 아니고 십자가냐 하면,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내가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만 계신 것이 아니고 나의 있음이 뚜렷해야 되요.

만약에 십자가를 지워버리면 ‘나’라는 인간이 또렷해서 또렷한 예수님을 섬겨야 내가 구원 받는다는 식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루 선한 일 3가지를 한다면, 날마다 나를 점검해야 됩니다. 아, 오늘은 2가지만 착한 일 했구나. 내일은 4가지를 해서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야지.

예수님을 섬긴다는 빌미로 예수님을 섬겨야 할 주체인 나를 포기를 할 수가 없어요. 섬기는 주체가 ‘나’인데 나를 포기하면 예수님을 섬기는 행위의 주동자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을 하면 할수록 누구를 더욱더 관리하고 누구를 더욱더 집착해야 합니까? 나 자신에게 더욱 집착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기존 교회의 신학입니다.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참 죄송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섬기라’가 아니라,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 오느라’고 하지요.
이 말은, 예수님 만나기 전에 우리가 뭐부터 만나야 된다? 십자가를 만나야 해요. 십자가를 만나게 되면 십자가 안에서는 ‘내 있음’이 내가 예수를 섬기려 하는 ‘나’이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나’이든지 간에 ‘내가 있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어’라는 내가 주동자가 된 이러한 생각들이, 나 있음에 기초한 생각들이 십자가에서 거부당합니다.

이 이론이 어려우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방주 밖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평소에 착한 일 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주 엉뚱한 사건, 방주라는 그런 물체가 등장했다는 이 사건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이 사건의 의미에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섬겼어도 그 사람은 물에 의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까짓것 방문 문 열고 들어가면 되지’ 말은 쉬운데.

사람들이 방주 문 열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보니까 아무도 안 들어가잖아요. 그렇게 되면 본인이 들어가고 싶어도 안 들어갑니다. 식당에 들어갈 때도 차가 몇 대나 주차해 있는가를 보고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여럿이 갈 때 묻혀서 같이 가야 실수나 오류가 적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아무 눈치 보지 않고 방주 문 열고 들어가는 사람 같으면, 이 순간은 자신의 일가친척과 다 결별하는 순간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 따를 때에 누구와 의논했습니까?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노아 방주 때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간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적이 일이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식구만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내가 알아서 두리번거리면서 삼촌 교회 다니고 아버지 교회 다니고 해서 들어가자. 이런 식이라면 아직도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기적이란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삼촌이 “그 교회 가지마.” 이렇게 하면 언제든지 “예 알겠습니다.”하고 떠나올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씨를 뿌리는데 씨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공중에서 새가 와서 씨를 먹을 때, 씨가 “새야 나를 먹지마.”하고 반항할 수 있습니까? 그냥 먹으면 먹히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돌이 많은 곳에 떨어진 씨는 아무리 본인이 자라고 싶어도 돌에 막혀 못 자랍니다. 또 씨가 밭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가시 넝쿨이 주위에 많으면 그것을 헤쳐 나올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중 삼중의 악마의 방어 막을 자기 힘으로 뚫고 주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를 하면서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베들레헴을 찾아가 이새와 그의 아들을 초청해 불렀습니다. 이새의 아들 기름 부을 왕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려주셨기에 기름을 붓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새가 데리고 온 7명의 아들이 차례로 사무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이 그 누구에게도 기름 부을 것을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물었습니다. “혹시 여기 있는 7명 외에 또 아들이 있습니까?” 하고. “한 놈이 더 있기는 한데 그놈은 시원치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 아이를 부르세요.” 그래서 그 아이를 불러왔는데, 그를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기름을 부르라고 지시하셨지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이 장면을 보며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은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신 사람은 이 땅에서 어느 구석에 심지어 지하 1,000m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기어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소위 목회가 잘 안 되는 목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기어이 구원하시는데 왜 우리가 걱정하느냔 말입니다. 주님이 능력 없는 분이 아닌데. 택한 백성은 기어이 건져 내시는데.

이 건져 내시는 방식이 어떠하냐 하면, 일가친척, 자식, 부모 전혀 고려치 않고 담대히 방주 문 열고 “나 혼자라도 구원 받겠습니다.”하고 뛰어들게 만드는 그러한 기적을 일으킵니다.

내가 부모와 의논하지 않고, 누구하고도 의논하지 않고 그냥 오는 거예요. 엘리사처럼.

여러분들이 고린도후서 6장을 보고 “은혜 받을만한 때에 은혜 받자.” 이런 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이것은 ‘은혜’라는 의미도 모르고, ‘화목’이란 의미도 모르고, 앞에 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전부 다 빼버린 것이 됩니다.

이것을 따 빼게 되면 남는 것이 뭔가 하면, 나라는 ‘있음’을, 나중에 영생 얻는 ‘있음’으로 만들기 위한, ‘있음’을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보려는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가짜 신앙입니다.

진짜 신앙은 노아 때는 방주를 만나듯이, 오늘날은 예수를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부터 먼저 만나요. 예수를 섬기려면 내가 더욱 더 훌륭해야 되요. 그리고 예수 믿는 내가 아침 9시에도 믿음 유지해야 되고, 10시에도, 11시에도 유지해야 되요. 만약 어떤 시점에 믿음이 떨어졌는데, 교통사고 나서 죽는다면 지옥 가야 합니다.

나의 ‘있음’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박살이 나야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 속에는, 나의 ‘있음’은 하나의 환상에 불구하고, 악마가 심어준 허구입니다. 나의 ‘있음’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허구입니다.

그러면 허구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왜 있는가?”부터 나올 때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는 있다.” 이렇게 나오면 안 돼요. “내가 왜 있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있음”이 주가 아니고, 그 앞에 주인공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왜 있어, 왜 살아야 돼. 오늘 왜 밥을 먹었어.” 이렇게 “왜”가 따라 다녀야 하는데, 나 있으니까 밥 먹고, 나 있으니까 잠을 자고, 나 있으니까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해야 되고. ‘내가 있음에 나는 의미 있다.’ 이런 것은 바로 방주에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인품이 고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요.

‘내가 있으니까 있는 내가 하나님 잘 섬기면 될 것 아닌가?’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 잘 섬겨서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했는데,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초반에 ‘은혜’라는 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이는데, 이 전쟁은 이 세상에서의 ‘있음’과 ‘없음’ 이것으로 모든 가치를 논해요. 왜 우리 집에는 고급 차가 없느냐? 없는 것 때문에 있음이 화를 냅니다. 나는 왜 쌍꺼풀이 없어? 없는 것 때문에 화를 냅니다. 나에게 없는 것이 자꾸 발각되면서 현재 있는 내가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왜 나에게는 100명의 교인이 없는가? 100명 모이는 교회에서 오라고 하지 않는가? 오늘이라도 부른다면 마늘 밭이고 뭐고 다 잊고 당장 달려갈 텐데. 왜 나는 없는가? 없는 것 때문에 ‘있음’이 고달픈 거예요.

‘있음’ ‘없음’이 전쟁을 하지요. 이 대표적인 예가 여리고 성인데,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리, '있음' '없음'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있음’ ‘없음’을 걷어치우고, 내가 심판을 위한 ‘있음’인가, 구원을 위한 ‘있음’인가 새로운 관점에 대해 자기 ‘있음’을 평가하게 되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다가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나는 무엇 때문에 있느냐? 왜 있느냐? 그냥 ‘있음’이 아니라, 왜 있느냐를 생각해 볼 때, 아하!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에게 그런 믿음이 왔구나를 알고 그 사람은 여리고 성에서 구원을 받았지요.

고후 5장 20절에서 ‘화목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화목할 수 없는 시점이 지금 들이닥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상태가 화목할 수 없는 시점에 네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노아 시절에는 방주가지고 화목하라고 했거든요. 방주에 안 들어오면 무조건 죽어요. 제가 여러 번 이 이야기를 해도 속이 다 시원합니다. “목사님, 성경 몇 장 읽어야 구원 받습니까?”라는 소리가 방주 앞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있는 내가 있는 나의 능력을 발휘해서 성경을 몇 장 읽느냐에 따라서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물체에 의해서 내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물체에 의해서, 방주 시대 때는 말이지요.
내 ‘있음’에서 출발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나에게 없는 어떤 다가옴에 의해서 결정이 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날에는 뭐냐? 십자가입니다.
방주는 내 힘으로 문 열고 발로 걸어서 들어가면 되는데, 이 십자가 앞에서는 문 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발걸음을 옮기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방구석에 앉아 있어도 구원 받습니다. 가만 앉아 있어도 십자가로 인해, 그냥 ‘있음’이 아니고,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증거하기 위해서, 왜 있지? 라는 것이 여기에 진리로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하!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여기에 있구나.

이 십자가가 화목제물 아닙니까.
이제 윤곽이 좀 잡힐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화물제물의 증거로써 십자가를 주었다는 말은, 자기 ‘있음’에서 출발하는 사람 같으면 화목제물이 화목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안경을 쓰시고 나타나셨다는 말은 이런 안경을 안 쓴 사람은 화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말은, 자기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 된 적이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지요.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는 뭉개지고 십자가 안에서 박살이 나는 겁니다.

그냥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무엇 때문에 있느냐? 십자가가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화목제물이란 말은, 십자가는 사건이지요. 어떤 인물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라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존 신학과의 차이라고 했지요.

제가 너무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노아한테 떡 사주고 뇌물 쓴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무슨 사건입니까? 방주라는 사건이잖아요. 나한테 오지 말고 방주 안에 들어가면 나도 들어갈 거니까 그 방주 안에서 만납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예수만 믿습니다. 어허! 내가 만든 사건이 뭔데? 날 믿으려고 아부하고 날 붙들지 말고 십자가 안에 들어오면 거기서 나를 만난다는 말이지요.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것이 아니고, 사건 안에서 나의 ‘있음’이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 안에서. 그 부여받게 하는 그 일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라는 것은, 제가 가만히 있는데 잡자기 지붕이 내려앉아서 콘크리트가 나를 박살내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했다는 것은 십자가가 내 위에 떨어져서 나는 이제부터 ‘나 있음’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내가 왜 있느냐?’로부터 출발해야 될 그러한 팔자를 지니고 살게 된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있다’가 아니라 ‘왜 있느냐?’ 나에게 주어진 사건을 증거하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되풀이해서 강조해도 또 강조해야 될 중요한 대목입니다.
제가 이렇게 당부를 해도 결국은 뭐와 같은가 하면,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일은 모두 푸른색 체육복을 입고 등교합니다.”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하는 말이 “나는 체육복 입고 학교에 가지 않고 원피스 입고 가서 학교에서 갈아 입을 건데, 내 원피스 예쁘지?” 이렇게 나오고, 어떤 학생은 “나는 어제 백화점에서 청바지 하나 쌌는데 이것 입고 가면 아이들이 다 주목하겠지? 내 바지 어때?” 이렇게 나오더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푸른 체육복을 입어야 할 시점에 유독 나는 예쁜 원피스 입었고, 너는 못생긴 바지 입었다고 비교하는 것.

십자가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직 여전히 자기 자신이 살아 있는 거예요. 십자가 받아들이는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거예요. 십자가로 인해 이제 모든 가치가 달라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받아들이는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가운데서 십자가를 받아들였다고 하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사건이 아니고 소유가 되지요.

소유라는 것은 소유자가 있고, 소유가 덧붙여 가지요. 십자가 사건은 소유자를 깨는 것인데, 그냥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십자가가 추가적으로 받는 하나의 소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선거’는 날 찍어달라는 것 아닙니까? 나 있고, 또 표를 소유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있는데, 십자가를 소유함으로 구원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가 아니고 ‘소유’입니다. 이런 모습은 여전히 자신이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은혜’라는 것은, 노아 시절에 방주에 들어가는 것처럼, 방주 안은 낯선 영역이지요. 이런 낯선 영역에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 나라는 입장은 여기에서 가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낯선 세계가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의 가치는 그 속에서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깡패 세계에서 보스 밑에 있는 녀석이 사람을 죽였어요. 그런데 보스가 그 혐의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인한 녀석은 보스에게 가서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죄 없는 보스가 자신을 대신해서 감옥에 갔으니까 그저 미안할 뿐이지요. 이것이 바로 대신 값을 치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하면, 대신 죽으심입니다. 고후 5장 21절에 나오지요. 죄 없으신 분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로 하여금 의롭게 하기 위해서 대신 갔던 낯선 영역이 바로 십자가 속이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나의 가치를 새삼 거론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가치가 없기 때문에 대신 죽으셨거든요.

만약 조금의 가치라도 있다면 우리의 장점을 개발하도록 격려하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에 대신 죽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마땅히 죽여야 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나의 있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히 확인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만 대신이 될 정도로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그 영역에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집어넣어요. 그렇게 되면 나라는 존재 ‘있음’의 가치는 없고, 오직 내 대신 돌아가신 그분의 가치만 여기서는 통용이 되지요.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 15절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신하여 죽은 자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임할 때는 기존의 나 ‘있음’에서 출발하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박살내면서 옵니다.

그 박살내는 힘이 그 뒤에 고후 6장 4절부터 나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란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기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하나하나를 보면, 하나님의 일군인데 주위에서 많은 오해와 곡해 그리고 친한 사람들의 등 돌림 등등. 인간은 사회가 없으면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지독하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6절부터 보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은혜를 주시는데,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처럼 은혜는 양쪽 다 샌드위치처럼 오는 것이 은혜입니다. 한쪽만 오는 것이 아니고. 같이 와서, 나는 내 있음 위주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입장인 것을 그 현장에서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이것이 은혜입니다.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말로만 하고, 예수님이 어떤 길을 가셨고, 얼마나 힘든 일을 하셨는가를 깊이 있게 체험을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생했던 그 고생을 체험하게 해서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이 내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셨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고생 많이 해야겠구나!’하고 앞이 캄캄하고 기가 죽을 것인데, 걱정하지 마세요. 6절 이하의 은총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이 언제 나오는가 하면 바로 ‘나 있음’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어려움이 가득한 것이 아니고, 사랑과 능력이 가득 찬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 있음’에서 출발되면 뭐든지 고생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성립이 안 되는 것이, 고생한다고 할 때 그 고생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 있음’이지요. ‘나 있음’을 안 놓치고 계속 쥐고 있으니까 매사가 고생입니다.

내가 왜 있지? ‘왜’만 하나 집어넣으면 될 터인데, ‘왜’ 하나 집어넣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어서 ‘왜’를 빼버리고 ‘나 있다’ 그런데 이런 고생이 있으면 안 되지. 내가 힘들면 안 되지. 하나님이 날 이런 식으로 대하시면 섭섭하지.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 있음을 포기하면 될 텐데, 이것이 안 되니까 환란과 배고픔과 고난 이런 것 속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고 ---
배고픔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알아야 될 텐데.

사람이 언제 제일 기쁜가 하면, 제 경험으로 보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느낄 때 기쁨이 옵니다. 특별하게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 고통과 아픔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자격도 없습니다. 라는 것이 동반됩니다. 이런 마음이 찾아 올 때 원망, 불평은 어디로 갔는지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요즘 선거철인데 만약 시장, 구청장, 의원 후보자들이 자신이 죄인인줄 안다면 ‘제가 한 표만 받아도 감사합니다.’ 라는 생각으로, 선거운동이 고통과 환란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한 평생 후보자입니다. 한 표만 주셔도 감사합니다. 왜? 죄인이기 때문에 한 표만도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 받은 사람이 홍수 시절 방주에 들어간 사람이 있듯이, 이 마지막 때에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기어에 찾아내십니다.

그러기에 이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마시고(이것을 지키려고 하면 또 나의 있음이 되지요), 은혜가 오게 되면 모든 것에 감사하고 동의하는 새로운 나를 말씀이 만들어 내고, 창조하고 있습니다.

첫째시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에 [다빈치 코드를 보고]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읽어 보셨습니까?
[다빈치 코드]의 내용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연애를 해서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프랑스 왕가에 살고 있는데, 이 작가의 주장은 뭔가 하면, 예수님의 피가 유전인자에 의해 계속 전해지면 그 피를 받은 자가 예수님의 피를 머금고 있다는 것입니다. 혈관 속에 예수님의 진짜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의 후손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반발하면서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막다가 안 되니까 ‘영화는 영화일 뿐 성경 진리를 왜곡할 수 없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말하는 것이 뭔가 하면, 기독교가 바로 오락이라는 것입니다. 오락에는 반드시 ‘나 있음’이 중심이 됩니다. 나 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오락입니다. 골프, 야구, 고스톱 이런 것 전부다.

현재 있는 내가 세상 일로 스트레스가 쌓여 있는데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뭔가 오락을 찾는데 그 중 하나가 기독교라는 오락이에요.

제가 쓴 글이 굉장히 어려운데, 왜 어려운가 하면, [다빈치 코드] 작가가 하는 말이, “예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왜 자꾸 신으로 탈바꿈 시키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뭘 모르는가 하면, 오락에는, 특히 종교 오락에선 신성이 있어야 되요. 하나님이 어려움에 처한 나를 지켜준다는 그런 오락이 있어야 이것이 재미가 있어요. 모든 오락은 죽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종교 오락은 죽고 난 후에도 즐겁게 해 줍니다.

기독교에서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했지만, 저는 이렇게 주장했어요. ‘종교는 인간이 만든 오락이다’는 것이지요. 그냥 하나의 취미생활인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나라는 인간이 ‘왜 나는 십자가 사건 앞에 서 있어야 하는가?’ 라는, 십자가 사건과 나의 만남. 나는 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가? 이러한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상은 그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왜 나는 서 있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과 화목 된 백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잠시 쉬겠습니다.
(2006. 6. 16. 10:35 녹취 마침)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