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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8 12:08:56 조회 : 3256         
Re..광주 강의(060721) 17-3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3 (06. 7. 21) - 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 제가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가지고 나오고, ‘피 안에서 우리가 사귀자’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죄 씻어주는 사랑으로만 너에게 접근했고,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형제라고 결정해서 그 형제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주님께서 자기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지요.

자, 2장 2절에 보면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세 번째 시간 정신 좀 차려주시기 바랍니다. 좀 복잡하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분명히 이 세상에는 사도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택한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C라는 사람 있단 말이지요. 여기서 동일하게 사도뿐만 아니고 피로서, 피의 사랑이 다가갔다면 이 피를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사랑으로 전부다 A, B, C 다 사랑으로 주셨잖아요.

따라서 각 사람들이 A라는 사람이 개별적인 자기의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이유가, 내가 받은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하게 형제에게도 주어졌다고 하면 이 피로 인하여 우리는 한 형제가 되고, 그리고 사도에게 주신 그 사랑이 나에게도 임하듯이 동일하게 다른 형제에게도 임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귄다’고 할 때, 제가 아까 이상한 예를 들었습니다. ‘보증서지 마라, 돈 빌려주지 마라’라고 했는데, 형제에게서 뭘 찾느냐 하면 주님의 피와 주님의 사랑만 발휘하면 형제가 되고 서로 한 형제로서 이미 확증되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돈 빌려줄까, 뭘 해 줄까’해서 형제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형제를 사랑하려고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미 형제 안에서 주의 사랑이 발견되거든 형제가 만든 사랑이 아니고 주님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마땅히 같은 사랑을 가지고 당연히 사귈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렇데 되면 이것은 바로 빛에 거하는 족속이 되고, 그 외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어둠에 속한다는 것을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피 흘린 것이 뽄떼가(모양이) 나고 가치가 드러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교인이나 성도라고 할 때는 그 사람을 무시할 수 없지요. 다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를 모를 때는 마음껏 무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원히 멸망 받을 것은 아니고 혹시 예수의 사랑을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사람에 대해 무서워한다든지 두려워한다든지 겁을 집어먹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주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 사랑이 어떤 징후를 드러내는가?
그 징후 중 하나가 2장 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야! 이것 순복음 교회 가서 설교하면 기절할 겁니다.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순복음 교회가 세워진 이유, 순복음 아니라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교회 가는 이유가 뭐냐? 내 몸뚱아리 하나 잘 되기 위해서, 어디에서? 이 땅에서 비까번쩍 빛나기 위해서. 주의 빛이 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빛나기 위해서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하는데, 만약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이렇게 나오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랑이란 것이 이미 확증적이고 결정적이라면, 사랑으로 충분하다면 다른 것을 사랑할 틈이 없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고 하면, 주님이 주신 피의 사랑은 추가 용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추가적으로 딴 것을 더 보태서 더 크게 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로 완결된 사랑이란 말이지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다 끌어 모아도 주님의 사랑과는 족히 비교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사람을 사랑하지 말란 말입니까?” 이 완전한 사랑이 있기에 이 사랑이 흘러넘쳐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요. 그렇게 사랑해야지 ‘내가 저 여자를 사랑하려고 하오니 주여 사랑을 주옵소서’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신부감을 생각하면서 키는 몇 센티고, 대학은 어느 정도 나와야 되고, 가정은 기독교 가정이어야 하고, 시집와서 부모한테 효도 잘 해야 되고, 뭐뭐 해야 되고 이렇게 조건을 달아요. 남자들이 조건을 다는데 몇 가지 안 달아요. 예쁘고, 건강하고, 착실하고, 남편 말 잘 듣고,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보테면 돈 벌어오고 이렇게 다섯 가지만 되면, 더 큰 욕심 없이 간단하게 다섯 가지만 되면 ---

그런데 사랑이 포함되면, 사랑이 예쁨을 능가해서 사랑스럽게 되고, 건강을 능가해서 몸이 좀 안 좋아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게을러서 아침 10시에 일어나도 사랑이 되고, 남편한테 바가지 긁어도 그것이 귀엽고 이렇게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예쁘고,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이런 것을 추가적으로 더 보텔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따로 떼어서 사랑하지 말라고요. 주님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이런 것들도 다 사랑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 사랑하게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예쁘고, 건강하고, 착실하고 이런 것을 원했던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서 사랑했던 그 사랑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쳐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에 못났고, 게으르고 하다면 주님이 ‘못났고 게으른 것을 보니까 너를 사랑 못해.’ 이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영원한 사랑을 얻겠습니까? 어디서 사랑을 맛보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받았잖아요. 피로써 모든 조건에 관계없이 용서 받고,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어떤 조건 따져서 사랑할 필요 없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을 아는 형제를 찾아 나서면 이런 조건을 초월하고 능가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게 형제간의 사랑이에요.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서 혼자 머리 깎고 중 되어서 기도하란 말이 아니고, 세상에 나갔을 때에 이 넘치는 사랑으로 들어가면 구태여 세상에서 새삼스럽게 세상적인 사랑을 따로 구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저는 TV드라마를 그의 안 봐요. [주몽]인지 주먹인지 그의 잘 안 보는데,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뭐 그런 것도 있는데, 그 모든 드라마가 뭐냐 하면, 자기가 이미 설정해 놓은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써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라고 합니다. 집착은 남을 나의 종으로 만들어요.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그냥 있어라. 내가 사랑할게. 내 앞에서 변신 안 해도 주께서 만들어주신 그대로 흘러가라.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사랑해 줄게. 어디를 어떻게 가더라도 끝까지 따라가서 기어이 사랑해 줄게. 그냥 그대로 사랑해 줄게.

왜 그런 사랑이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우리를, 인간 같지도 않은 우리를 끝까지 따라와서 사랑하고, 지금도 장난치듯이 그렇게 사랑을 주시니까 그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내놓게 되면 상대방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두려움 없이, 심판 날을 걱정 안 해도 되고, 그냥 속에 있는 것을 쏟아내는 거예요. 너나 나도 똑같은 꼬라지(꼴)인데 주님 사랑 받았구나. 하고 형제로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랑할 것이 없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16절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런 것들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적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너무나도 육신적이라는 겁니다. 육신적으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 육신적으로 확증된 것을 얻고자 하는 것, 자기 정욕이지요.

자, 여기서 하나님하고 하나님 맞은 편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정욕이 있지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런 정욕이 있지요. 세상으로부터 오는 정욕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공동점이 뭐냐 하면 끝없이 나온다는 거예요. 둘 다. 우리가 말릴 수가 없습니다. 계속 쏟아 나와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육신의 정욕은 항상 내 몸뚱아리로 돌아와요.

이런 말이 있어요. “그리운 사람은 시간이 가도 늙지 않는다.” 사진에 있는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리 봐도 늙지 않아요. 늙지 않는 그 사람을 늘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이 상당히 좋은 말이지만,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당사자가 와도 싫어요. 그 사진에 있는 사람 내 놓으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같이 늙어 가는데.

그래서 옛날 애인 만나면 참 곤란해요. 왜? 너무나 실망스러워.
청소년 때 만났던 사람은 내 앞에서 짜장면도 먹기를 거부했어요. 짜장면 먹으면 얼마나 호들갑스럽습니까? 그것이 부끄러워서. 그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만나면 짜장면 곱빼기 시켜 먹을 겁니다. 얼굴에 짜장 다 묻히고.

내가 되고 싶은 나. 사람들이 나를 보거든요. 내가 원했던 나를 타인에서 찾습니다. 찾는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랑이라는 건사한 말을 붙여요. 사실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너를 대체해서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그런 위치에 없으면 그 타인을 죽이려고 하지요. 나의 이상, 꿈을 빼앗아갔으니까.

이렇게 되면 사랑이 돌변해서 증오로 바뀝니다. 이게 성경에도 나오지요. 이복동생 사랑해서 취한 후에 버린 다윗의 아들 암논.

사랑한다는 것은 증오와 함께 있어요. 사랑하는데, 내 뜻대로 안 되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는 증오가 뒤에 숨어 있어요. 그런 무서운 증오가 뒤에 깔려서 안 보이고 앞의 사랑만 보이면서 접근해 갑니다.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가 못하는 것을 뭔가 대체해 주기 위해서 상대방을 원했던 거예요.
특히 아버지를 좋아하는 딸이라든지 엄마를 좋아하는 아들 같은 경우에는 결혼할 때 엄마 같은 여자를 찾아서 미흡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 됩니다.

이런 현상이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진짜 주님의 사랑이 오면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 이 모든 것을 능가한다니까요. 사마리아 사람이 미쳤다고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줍니까? 자기는 강도도 아닌데. 자기가 왜 책임져야 됩니까? 왜 아까운 돈을 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을 예로 든 거예요. 예수님께서.

있을 수 없는 일을 예로 든 것은, 지금 있을 수 없는 짓을 예수님이 너에게 해 준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예상치도 못한. 아마 강도만난 사람이 미안해서 못살 거예요.

수해를 만나 집이 떠내려갔어요. 정부에서 집만 다시 지어주면 고맙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건축설계사와 목수 등이 와서 대궐 같은 집을 지워 준다면 미안해서 그 집에 못 삽니다. 지금 그런 식이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런 식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안 해주고 비딱하게 우리가 원치 않는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그 사랑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으로 변한 거예요. 그것이 우리 속에 이미 숨어있어서 그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세상을 좋아하지 않는 그런 것. 3초 정도 밖에 안 가지만.

조금만 더 하고 강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워 죽겠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네.

18절에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제가 집착과 사랑의 차이를 이야기했습니다. 집착이라는 것은, 집착에서 나오는 사랑은 내가 설정해 놓은 조건, 그 조건에 부합될 때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증오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 인간은 나를 알기 위해서 행동하니까, 내가 이상적인 내가 되고 싶어서 그 사람을 이용한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피 그런 것 관계없이 내가 좋아하니까 무조건 너는 내꺼야 하는 식으로 가는 것은 뒤에는 무서운 증오가 깔려 있어서 보복이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좋았던 남편도 술 먹도 들어오면 개 패듯이 패잖아요. ‘이게 반찬이가’ 하면서 밥상을 차고 난리를 치다가 아침이 되면 ‘모르겠다. 나는 하나도 기억 안 난다.’ 이러고. 아내는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데 ‘너 왜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제가 이런 소리 하면 ‘그런 남편과도 같이 살아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데, 본인이 자기 미흡함을 메꾸기 위해서 그런 남편을 만나놓고, 그런 남편과 누가 강제로 결혼하라고 했습니까? 본인이 좋아서 결혼해 놓고 이제 와서 사네 못사네 하고 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프라이펜은 왜 샀는데요? 그럴 때는 프라에펜으로 대가리를 때리라니까. 그게 사랑이라. 네가 증오하면 나도 증오로 나온다 이 말이지요.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가 뭐냐?
적그리스도지 적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반대하는 거예요. 마귀는 하나님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귀가 항상 막는 것은 복음, 복음에 대해서 반대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지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마귀로 하여금 지옥 가는 근거를 마련해 줘요. ‘마귀 너는 지옥가도 싼 존재야.’ 이 증거는 십자가 복음뿐이지 딴 것에서는 안 나와요. 그러니까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십자가 복음이지, 나쁜 짓하고 이런 것으로는 마귀의 정체를 못 드러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문제지 적하나님, 즉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다 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라는 작자는 하여튼 메시아는 아니야. 네가 아무리 설득해서 예수 믿도록 해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심껏 사는 놈인데 나사렛 예수라는 그 청년을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실 그 사람은 아니야. 라고 반대하지요.

그러면 성도는 뭡니까? 누가 뭐래도 예수님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구세주야. 나사렛 예수 그 청년이 바로 나의 구세주야. 이것이 바로 형제입니다. 그분의 피 때문에 살지 뭐 내가 잘해서 사나? 이것이 확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발각하느냐 하면 복음만 전하면, 예수 그리스도 일변도로 나가면 적그리스도가 군데군데서 막 튀어나와요. 개혁주의라는 이름의 적그리스도, 이런 것이 막 튀어나와요.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목회자가 이단으로 자기 정체를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내요.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백날 믿어봐라. 이단이 이단 안 되는 줄 아냐?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끼고 있네.
예수님이 우리를 만든 거예요. 예수님 영광 돌리라고 만든 거예요. 예수님만 증거하라고 만든 거예요. 이삭처럼 없는데서 약속으로 생기게 하셔서, 약속은 예수님이고, 이삭이 없는데서 생긴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 증거하라고 준 거예요. 하나님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기 피를 증거하라고 우리를 세워준 거예요. 그것이 사랑이라고. 다른 사랑은 없어요.

이처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마지막이 되는데,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22, 23절)

야,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아들을 낳으신 게 압니다. 이것은 이단들이 하는 소리고,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얼굴을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 안에 계세요. 예수님과 하나님이 더불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하나님 알아서 예수님 아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면 그 하나님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마귀들이 만든 가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통해서 아들 예수를 알면 이 하나님은 전부 가짜였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소위 하나님 아는 자들이잖아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을 모르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생명과 성령의 법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죽은 것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고, 그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진짜 하나님이란 것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 알게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중심이지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믿으세요가 아니라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는 석가모니하고 같은 레벨인데 나는 예수 안 믿고 석가모니 믿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당신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하면 믿었을 텐데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상처받고 안 나오잖아.

여러분, 복음을 확실하게 해야 가짜가 스며들지를 않습니다.
우리 오 목사님이 그걸 참 잘해요. 복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가짜가 못 스며들고 교회 부흥이 안 되잖아요. 화평교회가. 가짜가 겁이 나서 듣고 다 가버려요. 어차피 천국 같이 갈 것도 아닌데 괜히 짐만 무겁고 기름값만 더 들고, 차가 가는데 방향이 틀린 사람 타면 중간에 내려줘야 하는데, 미리 내리게 해서 걸어가도록 해야지 뭣 때문에 같이 데리고 가겠습니까? 갈 사람만 가야지.

24, 25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너희 속에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징후를, 사랑이란 징후, 그것을 믿게 된 징후 이런 징후가 있으면 이미 너희 속에 거대한 사랑이 들어갔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안 든,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직접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마지막 때를 장식하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 일이 바쁘다 보니까 내 위주로 살아갔는데, 이제부터는 예수님 생각해서 기쁨이 충만한 그런 안도감을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6. 8. 28. 11:0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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