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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9 09:12:40 조회 : 3531         
Re..광주 강의(061027) 19-1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06. 10. 27) 19-1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왜 등장해야 되느냐? 선악과가 왜 등장해야 합니까?
선악과는 하나님에 관한 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본의 아니게 개입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도와준 일이 없습니다.

그 천지창조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만이 다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념물이 선악과와 생명나무입니다. 이제 윤곽이 잡힙니까? 천지창조를 하나님 혼자 했고, 어떤 피조물도 인간도 개입한 적이 없고 심지어 악마도 개입한 적이 없어요. 천지창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겁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면서.

여기에 대해 뿔따구내고 화내는 게 뭐냐 하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마귀가, 하나님이 온전하게 하신 창조에 흠집을 냅니다. 누구도 합세하고 싶은가 하면 인간까지 동원해서 흠집을 내서, 하나님 홀로 다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피조물도 뭔가 개입을 했습니다. 하나님 당신 실패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로마서 11장에 보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36절)고 했어요. 이걸 마귀가 참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죄를 지은 우리도 참지를 못합니다.

성경이 창세기 1장 처음부터 ‘안식’이란 것을 못 박은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할 때, 어떤 인간도 뭔가 하나님께 드려서, 바쳐서, 영광 돌려서 보기에 심히 좋은 대목은 전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처음 만든 그대로가 보기에 좋은 거예요. 의도적으로 인간이 주체로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것까지 알아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후에 처음으로 나타난 현상이 주체의식인데 이게 절대주체이기 때문에 심지어 자기 마누라까지 자기의 객체로 달라져 버려요.

선악과 따먹기 전까지는 주체의식이 없다는 증거가 뭐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 둘이 있어도 이것이 둘로 분리되지 않는 현상. 여러분, 이것 느껴봅니까? 못 느낍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우리는 이미 죄를 지은 상태기 때문에, 우리 이성이 이미 선악 이성이기 때문에 둘이 하나 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어요.

그 대신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나는 나다.’ 이걸 느낍니다.
어떤 사랑을 느낄 때는 감을 잡아요. 목요일에 하는 드라마를 보면(저는 드라마를 안 봅니다만 그냥 들은 풍월로) [황진이]가 있는데, 황진이가 가락지를 준 모양이에요. 그 가락지에 ‘너는 나고 나는 너다.’라는 글자가 써 있답니다. 인터넷에 보면 그렇게 나와요. 이것을 요새 말로 하면 ‘너 안에 내 있다.’ 이런 식이 되겠지요.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헤겔이나 피히테가 연구를 해 보니까 그게 불가능하답니다. 라이프니츠나 이런 사람이 연구를 해 보니까.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단자, 모나드. 인간은 절대적인 자기 폐쇄성을 유지하고 있다. 개별성. 이것이 극대된 것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내가 목마를 때 남이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내 갈증이 없어지지 않아요. 이발을 내가 해야 되는데 내 대신 천명이 이발을 해도 나는 여전히 이발 안 한 상태에 있습니다. 안 됩니다. 내 일을 내가 주체가 되어서 시작을 해야 돼요. 그리고 설사 남이 주더라도 이것이 내 것이 될 때 나는 확인됩니다. 이것이 문제예요. 내 것이 될 때 확인된단 말이지요.

어느 무인도에 헬리콥터에서 각종 음식물과 생필품을 줬습니다. 헬리콥터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들이 ‘아버지, 헬리콥터에서 선물이 떨어졌어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물 중에 하나라도 내 입에 넣어야 내 것이 돼요.

그 말은 뭐냐, 하늘에서 떨어진 그 음식물을 먹어야 되는 어떤 그릇, 어떤 주체가 있어야 비로소 그 음식을 먹을 때 ‘헬리콥터에서 나에게 귀한 선물을 주었구나.’ 라는 고백이 내 입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고백할 주체가 없잖아요?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어요. 심지어 선물을 받더라도 선물을 받을 그 주인공은 여전히 존속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데 주님께서 나를 대신했잖아요. 이것을 철학자들은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너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하는데, 너를 대신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다. 왜냐? 한 주체가 해 봐야 대신이 안 됩니다. 뭐,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청소를 한다. 이런 것은 있지만, 인생 자체를 교체하는 인생은 없어요. 없는데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경이 엉터리라는 거예요.

대신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신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너 죄를 위해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가 이제 너에게 와서 그 피가 너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라는 겁니다. 누가요? 개혁주의가.

그러니까 개혁주의는 때려죽여도 자기 주체를 포기 안 하지요. 왜? 자기 안에 뭐가 있다? 예수의 피가 있기 때문에 ‘왜 나를 부인해!’

그러니까 철학자 입장에서는, 만약 진짜 예수가 대신해서 죽으셔서 주체가 바뀐다면, 철학자의 입장에서 뭐가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잖아요? 자기를 부인하라면 뭐 까지 부인해야 됩니까? ‘내가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까지도 부인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나 예수 믿고 구원 안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야만 자기 부인이 되는 것 아니냐고 합니다.

광주 분들, 방금 제가 말한 이 논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구원 받았다는 이것도 부인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나 예수 믿고 구원 안 받았다.’ 이렇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으니까 성경과 사도바울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든지 아니면 우리는 그렇게 편하게 내 구원 중심으로 해석을 하든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바울이 거짓말을 했다면, 마귀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19:15)라는 마귀의 말이 어떻게 됩니까? 마귀도 알고 있는데.

이 모든 악마의 논리를 다 깨부수는 방법이 뭐냐? 사도 바울의 논리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그리고 이것을 포괄적으로 크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너희는 내 몸의 지체다’(고전12:12). 그러면 몸은 몇 개이지요? 몸은 둘이 아니요, 셋이 아니요 하나. 맞잖아요? 하나뿐이지요. 주체자가 둘이다? 아니요. 한 몸 뿐입니다. 주체자가 한 몸 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몸의 지체고 그리스도 몸은 하나뿐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주도 하나이요”(엡4:4). 그런데 사람들은 몸이 하나인 것을 인정 못하는 거예요. 몸이 하나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 개별적인 내가 있는데 어떻게 몸이 하나 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하나 하나 몸이 있다는 것은 이해되는데, 우리도 그것을 느끼는데, 우리는 매일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내 몸이라는 것을 느껴요.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이 몸은 지금 죽어가고 있고, 매일같이 죽는 몸이라는 것까지는 철학자나 불신자들이 고백을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말씀 여러분 아시지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할 때,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씀인지, 지금 우리는 뭘 가지고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하는가 하면, 내가 예수 믿고 달라진 새 사람 된 어떤 모습, 예전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변화를 가지고 내 구원 받은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보고서 네가 구원 받은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내 행동이 이렇게 달라졌고, 이런 자기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내가 구원 받았다, 안 받았다를 결정하지 말고, ‘십자가 사건에 대해 네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구원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결정하는 그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불신자들에게 설명이 됩니까?

말이 너무 어려워졌는데, 쉽게 합시다.
로마서 5장 이야기합시다. 나는 선악과 안 따먹었어요.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습니다. ‘선악과 따먹지도 않았는데 왜 내가 죽습니까?’라고 할 때, 나 자신을 찾아보면 죽을 이유가 없지요. 선악과 따먹은 자 속에(그것이 아담입니다) 우리가 한 몸으로 들어있다는 것이 믿어져야 된단 말이지요. 이것이 믿어질 때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곧 나고, 내가 아담이다.’라고 느껴져야 된단 말입니다.

아담이 고생할 때, 그게 안 느껴지는 사람은 ‘아담! 당신만 고생하세요. 나는 선악과 구경도 못한 사람이 왜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되고,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죽도록 고생해야 하느냐. 아 억울해서 미치겠다.’고 나오는데, 내가 아담 당사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주여! 지극히 당연하나이다.’ 이렇게 되지요.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이 철학자들이 미치고 환장할 이야기입니다. (바울)지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사도 바울이 언제 죽었어요? 예수님 십자가 죽으실 때 그 현장에 바울은 없었습니다. 그 때 옆에 강도 2명밖에 없었습니다. 언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안 박혔습니다.

그런데 건방지게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어떻게 그렇게 건방진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의 대답은, 주의 성령이 그렇게 하셨고, 그렇게 하시는 성령을 모른다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만약 성령을 안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여전히 육체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자기 육체를 신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든 뭘 하든 항상 기대하는 것은 마지막에 육체로 시작해서 자기 육체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그 사람은 진짜 십자가는 중간에 살짝 맛만 보이다가 빠져나가야 되지요. 그러면 남은 것은 자기 육에 밖에 안 남으니까 내 잘라서 구원 받은 것 밖에 더 됩니까?

빌립보서를 보겠습니다.
녹음을 한 30, 40분 못해가지고. 꼭 녹음은 2시간 다 해야 좋습니까? 그럴 필요 없지요?
3장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라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을 볼 때 이미 기준을 뭘 가지고 들어옵니까? 십자가를 들고 와서 ‘네가 십자가의 원수냐, 아니냐’를 판단하지요. 그 말은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버렸다는 말입니까, 안 버렸다는 말입니까? 어떤 순간에도 십자가를 버릴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거든요.

‘십자가는 과거 지나간 일 아닌가?’ 라는 생각이 어떤 순간에도 사도 바울은 그런 생각이 없지요. 그러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십자가를 빼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해가 져도 분을 품는 것을 보니 너는 지옥 간다.’ 라고 지옥 가는 그 기준을 십자가가 아니라 성경의 규정가지고 들이댄단 말이지요. 이런 사람 안 많습니까? 헌금 안 한다고 지옥 간다는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들었습니까? 헌금 안 한다고 지옥 간다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자기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한 번 바쳐 보시지. 남편은 아내에게 복종해 보시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 안 하면 그 여자 어디 갑니까? 지옥 가지요.

목사들이 성경의 명령법을 설교할 때, 너무 흥분해서 심판의 기준이 그 말씀 그대로 안 지키면 지옥 간다는 말을 설교시간에 남발을 해요. 제가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 팔고 있느냔 말이지요.

심지어 산상설교부분을 설교하면서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띠를 빼려는 사람은 지옥 간다.’고 해 버리니까, 제가 만약 그 교회 교인이라면, “목사님, 제발 부탁하오니 목사님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띠만 보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는지 그 방법을 좀 이야기 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어요. 왜? 그 방법을 알아야 자기도 천당 가기 때문에. 그것 대로 안 한다고 닦달을 했으니까.

어떻게 해서 목사님은 자기 들보를 안 보고 남의 티만 보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되었는지 좀 알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십자가를 들이대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이 말에 대해 누가 ‘당신은 어떻게 해서 십자가 믿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성령님께서 믿게 하셨지요.”라고 아주 가볍게 “저는 한 것 없습니다. 성령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왜? 십자가는 감춰진 비밀인데 성령이 아니면 누구도 그것을 믿을 수 없기에.

이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모르는 사정을 성령이 오시니까 십자가를 알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이 논리 그대로 가면, ‘해가 지고 난 후에 분을 안 품었다.’ 그럴 때,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했습니까?” 하면, ‘저는 늘 분을 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분이 안 나네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모양입니다.’ 가볍게 이야기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나잖아요. 모든 것이. 이게 뭐가 이상해요? 이게 전혀 이상하지 않단 말이지요. 특히 십자가 마을 안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빌립보서 이왕 본거 그 앞에 3장 9절 봅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 했을 때, ‘내가 가진 의’니까 사도 바울이 주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사도 바울이 이 주체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해서,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주체는 이미 바울에게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주체는 율법에 죽임을 당한 자가 되기 때문에 그 주체는 없어요. 없다면 그 주체는 뭐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해서 믿음은 반드시 대상을 가리키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졌다.’는 것을 가지고와서 이것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셨다.’로 가요. 율법으로 행하는 자가 나이기에 나는 스톱이 됩니다.

나에게서 멈추지 않고 주께로 돌아가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이것을 왜 ‘믿음’이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의 행위와 대비시키기 위해서. 율법의 행위는 내가 말씀을 잡아당기는 것이지만 믿음은 믿는 주체자가 따로 계셔서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이제는 나를 내 몸으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흡수, 통합시키는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겁니다.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지요. 역으로 가요.

이렇게 해서 주어진 결과가 뭐냐, 빌립보서 3장 끝에 보니까 20절에 보면 “구원하는 자” 보세요. 구원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잖아요? 구원해 주시는 자가 있잖아요. 있는데, 어디까지 보장되어 있느냐 하면, 21절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만물을 복종케 한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을 의식하면 되지요. 여기에서 ‘보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모든 것이 복종했어요. 정상적으로. 그 상태로 주께서는 일말의 양보 없이 다시 그 영광스러운 창조로 기어이 만들고 마는 겁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사도 흠모할 정도로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우리가 죄 짓고 말고 할 것이 없고, 또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대들었던, 창조에 흠집 냈던 놈들을 따로 모아서 그것을 볼 때마다 주께서 즐거워하시고. 이것은 뭔가 사디즘적인, 남이 아픈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변태같은 느낌이 들지만, 볼 때마다 즐거운데, 왜냐하면 그들은 맞으면서 영광 돌리기 때문에 그래요. ‘역시 주님은 심판주였습니다.’ 지옥 가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옥 간 자나 천당 간 자나 모든 자들이 오직 그리스도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 그것이 영원한 고정된, 확정된 생명의 시스템입니다. 그 생명의 시스템에, 요한 1서로 돌아옵시다. 그 생명의 시스템에 지금 너희가 그런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길게 하면 힘드니까 좀 쉽시다.
(2006. 10. 29. 01.0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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