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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00:24:32 조회 : 639         
잃어버린 하나님 19012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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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1-27 22:27 
광주강의20190125a 마가복음13장 14-23절(잃어버린 하나님)-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14-23절

14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 할지어다
15절,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절,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절,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절,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절,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절,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23절,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가복음 13장 14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한다. 멸망할 것이 서야 될 공간과 절대로 멸망할 것은 서지 말아야 될 공간이 이중으로 나누어지죠. 이 세상의 공간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상당히 오늘날 현대적 공간개념에서는 의아해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든지 거기 거하면 거기서 공간개념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텅텅 비어있는 화성, 멀리 있는 화성도 안에 사람이 살게 되면 화성인이 되어버리죠. 사람이 거기에 거주하게 되면 공간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먼저 있고 거기에 공간이 들어가는 것으로 공간의 선택이 결정된다고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생각대로라면 여기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것에 선 것’이라고 하니까 절대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공간이 따로 있다고 하는 거죠.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공간, 영원한 공간이죠. 영원한 공간이 되려면 이 공간에 누가 점유하고, 차지하고 있어야 되요. 영원한 분이 차지하고 있어야 되죠. 영원한 분이 차지하고 있으면 영원한 공간이 됩니다.

그러면 이 영원한 공간이 테두리 안이라면, 테두리 안이 영원한 것이라면 이 테두리 밖은 자동적으로 멸망의 공간이 되겠죠. 한쪽이 절대적의미를 부여하면 나머지기는 부수적인 의미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절대적이 아니고 절대적인 것을 받쳐주기 위해서 그냥 보조적인 역할을 할 공간이 되는 겁니다. 멸망의 공간은 영원한 것을 비춰주기 위한 종속된 공간이죠. 종속된 공간. 영원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기에 부스러기로, 그냥 시다바리 노릇을 해야 될 그러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공간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반드시 동반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은 종속된 공간, 멸망의 공간이 병행하게 되는, 짝이 되게 되어 있어요. 짝이. 가라지를 알곡이라고 하지 않죠. 알곡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좋은 고기만 있으면 안 되겠죠. 그냥 고기가 있으면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모르지만 좋은 고기가 있으면 반드시 뭐를 불러오게 되어 있어요? 나쁜 고기가 짝을 이루어서 이것은 좋은 고기고 이것은 나쁜 고기다. 좋다는, 하나의 좋은 고기를 위해서 이게 부수적으로 있는 겁니다.

천국 갈 사람이 있다. 이거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 땅에 지옥 갈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그렇게 말해주는 거예요. 천국이 있다는 말은 지옥이 있다는 겁니다. 천국만 있고 그 다음에 지옥은 없는 그런 것은 없어요.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빛이 왔으되 사람들이 빛으로 오지 않나니, 이 말은 곧 이 세상은 빛이 없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전부 다 어둡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영원한 것을 구약에서는 묘사했는데, 구약에서는 영원한 것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영원한 공간, 거룩한 공간을 성전으로 본 겁니다. 성전을 영원한 공간, 거룩한 공간이라 했어요. 그러면 성전은 뭣이 있기 때문에 영원하냐 하면은 성전은 사람을 모시기 위한 공간이 아니겠죠. 그만큼 인간이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럼 영원한 공간에 들어있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주의 이름, 구약적으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 다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다. 이게 영원한 공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다면, 아까 처음에 강의한 것을 적용시켜봅시다.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온다면 여기에 그냥 덜렁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등장한다고 했어요? 부수적인 것, 종속된 것이 함께 오겠죠. 그럼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에 반대되는 이름은 무슨 이름이겠어요? 사람의 이름이겠죠. 그럼 공간을 둘로 나누면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고,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 있겠죠. 그럼 하나님을 위한 공간은 절대로 사람을 위한 공간은 아닌 거예요. 사람을 위한 공간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은 이 공간을 만들 때 설계도가 있는 거예요. 그 설계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 자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제단 뜰을 쌓을 때 사람이 정釘으로 쪼개서 제단 돌을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럼 주의 이름의 성전은 누가 친히 만들겠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만드시겠죠. 사람이 만들지 못하고.

그럼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에 멸망한 것이 들어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누구의 손때가 묻어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공간을 세우려고 시도했을 때, 이거는 멸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멸망한 것이 침투한 겁니다.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우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아닌 요소가 인간의 의지겠죠.

인간의 욕구, 욕망, 종교적인 욕구라든지, 이런 의지가 이 안(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에 스며들면 이거는 멸망할 것이 드디어 영원한 것에 스며 든 게 돼요. 스며 든 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달성돼야 되는데, 인간이 개입해버리면 뭣이 깨집니까? 하나님의 언약, 이것이 깨지겠죠. 하나님의 언약이 깨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대로 하면 완전하고 완벽한데, 어떻게 그 연약하고 대수롭지 않은 인간이 끼어든다고 해서 그걸 왜 용납하느냐는 그런 생각이 들겠죠. 힘센 분이 계시는데, 되지도 않는 인간이 왔을 때에 그걸 한방에 쳐버리지 어떻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을 허용하느냐 하는 것이죠. 그게 우리의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선악과나무를 아담이 심었습니까? 하나님이 심었습니까? 하나님이 심었죠.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도 하나님이죠. 그럼 우리 생각에는 어떤 조치가 뒤따라야하느냐 하면은 이 선악과나무는 절대로 훼손되지 않을 조치를 뭔가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그 선악과 열매를 어떻게 했습니까? 따먹었죠. 따먹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이 멸망의 것이 있잖아요. 이 멸망의 것. 이 멸망의 것의 출처가 어디냐, 이 멸망의 출처가 하나님의 언약에 출처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우리 인간보기에는 대단하고 거룩하지만 그 뒤에 어두운 구석이 딱 숨겨져 있는 거예요. 어두운 구석이. 화투 패를 두 개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어두운 구석이 딱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거룩한 선악과가 인간에 의해서, 또는 악마의 부추김에 의해서 쉽게 허물어졌다는 말은,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단단함, 하나님 그 자체로의 완벽함, 그 모든 개념에 대해서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세계와 무관한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이 허약하다, 쉽게 무너진다, 약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다, 피조물의 손에 죽는 창조주다, 이런 개념들을 인간들이 만들어냈다면 과연 그런 하나님이 만들어냈겠습니까?

로봇을 만드는데, 간담브이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외계에서 온 천하무적의 외계인들을 쳐부술 수 있다. 이게 바로 간담브이고 로봇 태권브이라면, 이렇게 만들어놨는데 애가 모르고 다리를 쳤더니만 와장창 다 무너졌다. 어린애 하나가 건드렸는데 다 무너졌다. 이거는 단단하고 대단한 히어로적인, 영웅적인 그러한 태권브이라는 이미지가 다 없어지잖아요. 너무너무 허술해 보인다 말이죠. 그 허술함이 그게 뭐냐 하면 빈공간입니다. 빈 공간.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빈 공간 속으로 벌써 사라져버리죠. 인간 쪽에서 찾을 때.

선악과 따먹으면 신처럼 된다고 악마는 인간에게, 우리에게 알려줬거든요. 선악과 따먹으니까 신처럼 됐습니까? 아니면 더 비참하게 된 거예요? 더 비참하게 된 겁니다. 그걸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죽으리라는 것은 손에 아무것도 쥘 수 없는 게 ‘죽으리라’에요. 아무것도 쥘 수 없는 것.

그래서 이사야에서 우상을 가지고 뭐라 했느냐 하면 빈껍데기라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야가 정상인데,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뭔가 있어 보인다는 것. 신체가 있고, 근육이 있고, 주먹이 있고, 이게 현실과 다른 비극적인, 불행적인 망상에 인간은 놓여있습니다. 허구이면서 허구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생활을 보내는 것이 인간이에요. 자기가 허깨비이면서도 허깨비가 아니라고 애써 부정해야 되는, 그런 내부적인, 정신적인, 심리적인 균열, 찢어짐, 이런 것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체험해가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다시 말해서 인간은 허공 속에 놓여있으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허공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뭘 찾았습니까? 성전을 불태웠잖아요. 그때 바벨론이 성전을 불태워야겠다는 것과 그래서는 안 된다고 버텼던 히스기야부터 해가지고 시드기야까지. 성전을 갖고 있었던 남쪽 유다나라 왕들이, 그 성전을 갖고 있어야 우리나라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그걸 버텼던, 구약에서 이사야나 거기에 그 내용들을 비춰보세요. 결국 유다나라는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을 가지고 지키고 바벨론은 부술 필요도 없는 것을 부수는 거예요.

잘 이해가 안 되십니까? 십자가마을에서 십자가마을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교회가 우리교회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짓이에요. 교회를 지킨다는 말이 있지도 않은 허깨비를 지킨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소위 종교생활이랍시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모든 행동의 집결이 어디에 총집결됩니까? 교회라는 데에 집결되죠. 마치 그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허상인데.

인간은 아무리 땀 흘려 노력해서 만들어 놓은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 외에는 내놓을 작품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왜냐, 교회가 허상인데, 기껏해야 허상만 만들어놓는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 이성과 생각과 합리적인 모든 상식이 어디에 방향성을 갖고 있는데, 그 방향성은 무엇을 만들어내느냐 하면 모두 허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허상으로.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허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근데 그 자식이 교통사고가 났을 때에 비로소 자식이라는 것도 내가 쥘 수 없는 허상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부모가 마음에 들 때, 오래오래 사시고 저의 효도를 받으세요, 라고 했는데, 그 부모가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신다면 자식이 그 부모를 위해서 얼마나 웁니까? 왜 그렇게 잘해주셨던 어머니, 아버지 어디에 계십니까? 이게 원래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이게. 모든 인간의 개체는 없어져야 되는 겁니다.

없어져야 될 것, 없어질 것, 허구적인 것을 희망으로 삼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국가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학교, 가정, 모든 교회, 모든 것이 이게 다 허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자체가. 허구가 되는 이유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대목을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디서 어디를 만들어냈습니까?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냈죠.

근데 하나님이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낸 그 원리에 하나님 본인이 그걸 적용시켜버려요. 없는 하나님이 나오는 식으로 주의 이름은 나타납니다. 없는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나타낸다? 안 나타낸다? 그거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거예요. 있는 것은 어떻게 될까요? 없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해요.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은 새롭게 나오는 것으로.

그게 대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누가복음 15장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탕자이야기가 있죠. 탕자이야기의 핵심은 뭐냐 하면 잃어버린 자를 내 아들로 삼는 거예요. 탕자이야기 그 전에 두 개의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하나는 어떤 처녀가 동전을 잃어버린 이야기, 또 그 앞에 보면 양이 100마리 있었는데 1마리 잃어버린 양이 있죠. 그러면 99마리를 놔두고 어디를 찾아갑니까? 1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죠. 잃어버림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잃어버림이.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거예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현장에 있다? 없다? 없어서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 현장에 없어서 의미가 있는 겁니다. 100마리 양 중에서 다 모든 것이 있는데, 없는 양은 1마리뿐이에요. 그러면 99마리는 있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 하면은 없어진 데에 의미를 두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나님 자체가 이 땅에 있다? 없다? 하나님 자체가 이 땅에서 사라져야 되고 없어야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멸망의 가증한 것은 영원한 것에 같이 합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합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의 원리는 잃어버림이에요. 잃어버림. 여러분들, 뭔가 잃어버렸다가 찾은 경우기 있죠. 그럴 때 참 좋죠. 앞으로 연세가 더 들면 깜빡깜빡 그런 경우가 더 생길 거예요. 지갑을 어디에 뒀더라? 어쩔 때는 안경을 위에다 쓰고 있으면서 안경을 찾는다고, 안경이 바로 위에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안경이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는 그게 색다른 창조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거예요. 가끔씩 감사가 나오고 그렇죠. 건강도 잃어버렸다가 얻을 때 기쁨이 있는 겁니다. 안 그러면 자기가 늘 건강한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없다는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문제에요. 없다는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하실 때는 우리를 잃어버린 자, 없는 자로 간주해서 영원한 공간, 천국이죠. 천국에 가려면 매일같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우리가 있게 된다는 그러한 체험을 날마다 경험케 하는 그런 경우가 앞으로 계속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계속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영원한 공간을 설명할 때,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여러분들이 잘 들으셨다면 영원한 공간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진다. 그렇게 되겠죠.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성전이라는 것이 구약에 보면 가시적인, 눈에 보이는 건물로 이렇게 만들어 놨다 했죠.

근데 그 건물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불타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성전에 어떤 의미를 부여받느냐 하면, ‘성전+성전 잃어버림’이라는 의미를 부여받는 거예요. 그리고 바벨론이라는 이방민족은 시다바리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예요. 보조적인 역할.

이방민족, 자, 바벨론 다음에 나온 제국의 이름이 뭐죠? 바사나라죠. 바사. 중국을 3대0으로 이겼던 이란이 바사나라에요. 페르시아. 그 다음에 나온 나라가 헬라. 헬라는 지금의 그리스에요. 그리스 마케도니아 또는 그리스. 그리스하고 마케도니아에서 지금 국민투표하고 있어요. 나라이름 바꾸자고. 마케도니아는 따로 있거든요. 따로 하지 말고 그리스로 통합하자고 하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나라가 대표적으로 이 보조역할, 보이는 가시적인 국가, 시다바리 역할 하는 가시적인 국가, 성경에서는 바벨론부터해서 바사, 헬라, 그 다음에 가시적인 국가로 마무리 짓는 나라가 어디냐 하면은 로마죠. 로마.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름을 부정적인 이름을 붙입니다. 짐승이라고 해요. 짐승.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눈으로 보면 인간들의 집합체거든요. 국가라는 게. 그러나 인간들의 집합체에 플러스알파+α가 있어요. 알파α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모든 정신을 세뇌하고 통제하는 어떤 힘이 그들 위에 녹아져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런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는 국가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들의 국회, 대통령이 행정을 어떻게 하든 간에 그 결정은 무엇의 결정이다? 보이지 않는 악의 결정에 그냥 그들이 순응하고 있는 겁니다. 악의 결정에.

그 악의 결정에 순응하는데, 순응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주님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를 다 쥐고 있으니까. 악을 통제해서 그 악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어떤 하나님으로 보이느냐 하면은 잃어버린 하나님, 어디서? 이 땅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이니까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없는 하나님이에요.

천지를 창조했는데 없어요. 천지를 창조했는데 없다면, 그럼 천지는? 천지창조 했으니까 있잖아요. 해와 달 있잖아요. 근데 그게 없어진다는 거예요. 누굴 닮아서? 하나님을 닮아서. 피조물은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이 없어지니까 천지창조 이것도 하나님을 닮아서 없어지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성경이야기입니다. 사람 없어지는 마냥으로 없어지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한다면 ‘잃어버린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자체를 잃어버렸어요.

그럼 천국 간 사람은 어떤 사람만 가느냐 하면은 닮은 사람이 가죠. 어떤 사람? 이 땅에서 잃어버린 사람.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누굴 잃어버려요? 본인을 잃어버려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거예요. 더 나아가서 지금의 나는 가짜고 진짜 나는 잃어버렸다는 자각을 갖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천국백성입니다.

어디 갔지? 나 어디 갔어? 너 있잖아. 아니야. 너는 가짜야. 진짜 너 어디 갔어? 진짜 자기 자신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요. 없는 거예요. 너 거기 있잖아! 라고 하는 것은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짐승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있으니까 잘해! 우리 엄마 어디 갔어? 엄마 있잖아! 아빠 있잖아! 동생 있잖아! 집에 강아지도 여기 있네! 이거는 짐승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짐승들이.

짐승들이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잃어버리자? 잃어버리지 말자?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자. 있음에서 있음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이게 문명이고 과학이잖아요. 있음에서 계속 있게 하자. 있음에서. 내 건강, 천식 걸린 내 목숨 어디 갔지? 있잖아! 누워서 링거 맞고 약 먹고. 계속 있게 하자는 거예요. 계속 있게 하자. 병원에 누워서 월요일에 또 주사 맞습니다. 빨리 살려내서 계속 있게 하는 거예요. 기침 덜하게 하고.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내가 보고 있는 나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옛날에 친근하게 봤던 것, 내게 친숙한 것이 계속 내 주변에 있을 때에 나의 나와바리가 돼요. 나의 삶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럼 나의 삶의 공간이 되면 그게 언약일까요? 아니면 멸망의 가증한 공간이 될까요? 멸망의 가증한 공간이 되는 거예요. 왜? 있음이 계속 주主가 되니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대표적인 사건을 아시죠?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사건이죠. 십자가사건. 그러니까 성전이 불탈 때, 뭐 유대인들이 얼마나 애통해 했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아람사람 헤롯이 유대인들을 제대로 달래줘서 통치하려고 46년간 헤롯성전을 지은 거예요. 헤롯성전. 그 헤롯성전의 모델이 뭐냐, 그 모델이 바로 솔로몬성전을 기초로 해서 에스겔에 나오고 예언서에 나오는 것을 전부 다 이렇게 한 겁니다.

자 헤롯성전, 제가 가봤거든요. 면적을 크게 해서 보면 헤롯성전 주변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어요. 이방인의 뜰. 이방인의 뜰을 해놓고 안에 건물로 주위를 맞춰버려요. 사실은 이방인의 뜰이 좀 더 커요. 성전은 이방인의 뜰보다 작습니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것은 고유의, 에스겔 성경에 나오는 거룩이라는 것, 속된 공간과 성스러운 공간을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인 겁니다. 이방인이라고. 이방인은 여기 계세요, 라고 우대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여기까지, 라는 배척의 의미를 가지고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성전을 반으로 나누면 여자의 뜰, 여자의 뜰은 여자는 여기까지, 라는 뜻이에요. 방이 4개 있어요. 방이 아니라 사실은 창고에요. 창고인데, 나무창고, 나실인 창고, 여기는 포도주저장하는 창고, 문둥병자창고 해서 여자의 뜰에는 여기까지, 애들도 여기까지. 그 다음에 남자의 뜰도 있겠죠. 남자의 뜰을 같은 말로 이스라엘의 뜰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의 대표는 남자기 때문에. 이거는 뜰이 아니에요. 그냥 경계선이에요. 계단이 몇 개가 있느냐 하면은 15개가 있어요. 15개 계단이 있고, 그 다음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있고, 솔로몬 성전의 본체가 모형으로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전체가 제사장의 뜰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어디에 섰겠어요? 제사장 옆에 있는 거예요. B.C 168년경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짐승 가운데서 헬라장군이 여기에 뭘 세웠느냐 하면 제우스 우상을 여기다가 세워버렸습니다. 제우스 우상을 세웠어요. 그 세웠다는 성경구절을 피곤하시더라도 한번 봅시다. 다니엘서 9장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성전에서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 그 자리에다가 미운 물건을 세웠다 했습니다. 다니엘서 11장 31절을 봅시다.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군대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라고 하니까, 아까 우리가 봤던 본문이 뭡니까?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하게 하는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막13:14)이라는 말씀이 생각되겠죠. 그 다음에 다니엘 12장 11절을 봅시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그렇게 되어 있죠. 미운 물건.

다시 이야기합니다. 처음에 헬라장군이 공간적으로 와서 성전에다가 미운 물건을 세우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웠던 성전은 무슨 성전이냐 하는 겁니다. 성전은 이미 불타버렸는데. 성전을 다시 짓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이 뭐냐 하면 느헤미야 6장 15절에 보면 “성 역사가 오실 이일 만에 에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근데 이 성전은 별로 규모가 작아요. 규모가 작습니다. 어쨌든 규모가 작든 말든 느헤미야가 와서 성전을 세웁니다.

성전을 세웠는데 세울 때의 의미가 예레미야라는 선지자가 약속을 한 게 있어요. 이 성전이 불타지만 70이레가 지나면 다시 이 성전을 세울 때가 올 것이다. 7+62+1하면 70이레가 되죠. 7이레는 성전이 세워지는 기간, 포로 잡혀가서 70년 포로가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돌아와서 그때부터 7이레 동안 성전이 세워지고, 62이레는 성전에 시달리고, 1이레는 며칠이죠? 7일이죠. 7일인데, 이 1이레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이 등장하는 거예요.

아까 하나님의 이름은 어떤 경우에 거룩한 공간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죠.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데 이 1이레에 이루어져요. 1이레니까 이거는 7일이잖아요. 7이레는 다니엘에 보면 반으로 나눕니다. 그럼 뭐가 돼요? 3.5가 되죠. 3.5, 3.5가 되겠죠. 한때, 두때, 반때가 여기서 나온 이야기에요. 한때, 두때, 반때(3.5)는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운 언약을 시도하는 것이고, 그 뒤에 한때, 두때, 반때(3.5)는 시도한 그것을 드디어 완성시키죠. 이 시도할 때에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잃어버린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잃어버린 하나님.

아, 지금 여러분들이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일을 너무 복잡하게 하신다 하는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주시잖아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주실 때, 예를 들면 제가 어떤 물건을 줄 때 내 물건이 여기 있잖아요. 있죠. 있는 사람이 물건을 주게 되면, 내가 있고 물건을 줄 때, 줄곧 물건이 있다는 말은 준 사람이 있다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버리면 하나님은 있는 하나님이 돼요? 없는 하나님이 돼요? 있는 하나님이 되죠.

그러면 없는 하나님이 되려면 이 언약이 있는 언약이 아니고 소멸되어야 되겠죠. 언약이 소멸되게 되면 이 언약을 준 하나님도 없어질 수 있는, 없어지는데 성공할 수가 있어요. 없어지는데. 예수님이 메시아로 왔잖아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없애버리면 되는 거예요. 자,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한 것에 대해서 여기에 악마의 대처는 아주 간단합니다. 1번, 선악과 앞에서 벌벌 떤다. 2번, 안 따먹고 뺑뺑 돈다. 3번, 선악과 따먹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4번, 파내버린다. 몇 번이에요? 그냥 없애버리면 되는 거예요. 간단한 문제죠.

“에이씨! 누구한테 감히 명령해?” 이러면 명령자가 사라지죠. 명령자체를 개무시 해버리면 뭐도 사라진다? 명령자도 사라진다. 선생님이니까 잘 알잖아요. “몇 페이지까지 숙제해주세요.” 학생들이 “야, 이거 무시하자.” 그러면 그 학급에 선생님이 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없어요. 명령을 자기가 찢어버렸기 때문에 명령자가 없는 거예요. 없어지는 방법은 말씀을 안 들으면 되는 거예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성경말씀을 안 들으면 그만이에요.

하나님은 제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제발 그래야만 너희들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작전에 너희들이 옴팍 말려드는 자들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 오늘 본문 마가복음 13장 14절에 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가증한 것이 아니고 앞에 뭐가 붙어요? 멸망이죠. 그냥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가 누구냐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자기가 사라지는 방식을 취하시는 겁니다. 나를 사라지게 했을 때에 너희는 뭐다? 그야말로 멸망될 자로 부각이 되고 확정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아주 유명하고 아주 제가 좋아하는 말씀인데, 요한복음 15장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이래 되어 있죠.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그들의 죄가 없어요.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해석할 때 어쨌든 간에 우리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는 쪽으로 해석을 다 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말씀 할 때 교회가 하는 일이 뭡니까? 이런 일을 한 거예요. 성경말씀을 두고 그래서 우리 스스로 박수칩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왜? 오늘도 이 말씀처럼 안식일 지키라고 해서 교회 예배 나오고, 십일조 하라고 해서 십일조 했고, 복음 전하라고 해서 복음 전했고, 계속해서 자기들은 무슨 목표를 두고 말씀을 해석하겠어요? 우리만큼은 말씀을 안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유일하게 지키는 자인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 그 말씀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말씀이 있어줘야 자기가 의롭고 정당하니까.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들이. 교회가 의미가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딱 왔을 때에, 십자가가 딱 왔을 때에 주님께서 옆에 누굴 두셨습니까? 강도, 세리, 창기. 세리는 마태고. 아무것도 모르는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베드로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라고 했잖아요. 주님보고 떠나라고 하는 베드로. 세리자리에  앉아서 돈 챙기고 있는 마태. 그냥 부른다고요. 12년 동안 앓은 혈루증 여인, 강도, 문둥병자, 그냥 부르는 이유가, 그들의 특징이 앞서서 이야기한 사람들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세리 같은 경우에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자꾸 세리하니까 박세리가 생각이 나는데, 그 세리 말고, 그 세리라는 사람과 바리새인하고 배틀이 붙었잖아요. 배틀. 성전에서 배틀이 붙었죠. 차이점이 뭡니까? 바리새인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했잖아요. 근데 세리는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감히 얼굴을 못 들죠. 자기를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는 뭐다? 죄인입니다.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습니다. 어떤 처분도.

나를 없앤다고 할지라도 제가 거기에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없앤다, 죽인다고 할지라도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천식으로 나를 죽여도 나는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없어지게 되면 이 성전도 없는 거죠. 내가 없어지면 이 성전도 없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허상이에요.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없어져야 마땅한 그런 환경 속에서, 나와 같이 없어질 세상 환경 속에서 같이 없어집니다. 그럼 그 안에, 그 앞에 누구만 있으면 되죠? 예수그리스도만 있으면 되죠.

예수그리스도가 있든지, 세상이 있든지 둘 중의 하나에요. 세상이 있으면 예수님은 없고, 예수님이 나타나면 세상은 그 앞에서 없어지는 것이 마땅하고.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대접처럼 다 없애버리죠. 몽땅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아끼고 우리에게 친숙했고 우리에게 과학의 관찰의 대상이었던 모든 것은 다 없어질 것들이에요. 왜? 거룩한 곳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침노했기 때문에. 점령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점령하도록 누가 옆에서 다 유도했습니까? 하나님 자신이죠. 왜? 하나님 자신을 어떤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해서? 없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나는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없으면 뭐도 없습니까? 천국도 없죠.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여기 있다고 저기 있다고 말하지 마라.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눅 17:21).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다. 없는 데서 있는 곳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계신 분이, 계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초대해야 되고 내 사람으로 만들어줘야 해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가 없는 겁니다(요6:44). 자기가 원하는 자는 친히 택해요. 손들고 저요! 저요! 하지 마세요. 손 다 내려라! 다 내려! 내가 뽑아서 세울 거야! 잃어버린 자로.

잃어버린 자 되게 하신 그런 경험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상실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성경공부 했는데, 점점 그런 자신이 상실되는. 키가 점점 작아져서 꼬마가 되어 없어지는 것처럼. 어디서 키 작은 것이 멋있는 척... 갑자기 뒤끝이 있는 것 같은데. 감히 주의 종을...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아임낫씽I'm Nothing이거든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방식으로 주님만 높일 수 있는, 방식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만 계신 것으로만 족한 성도. 그런 관계가 앞으로 우리가 천국 가서 사는 삶의 방식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천국의 삶의 방식이에요.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경험하지 않으면 죽어서 천국에 못 가거든요.

지금 첫째시간에 하는 것은 어디에 집중했느냐 하면은 공간에 집중했죠. 공간. 공간에 거룩한 것과 성전이 불탄 것, 그래서 성전에 가증한 것이 섰을 때, 이런 의미가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스스로 철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했죠. 스스로 철수하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가 있던 이름,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을 불태우도록 바벨론을 부추긴 거예요. 이란한테. 스스로 자기 몸에 기름 붓고 완전히 분신자살 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 내 몸에 기름 붓고 불태워버려라!

성전이 없다고 난리에요. 성전이 없다고 난리를 치니까, 그 성전 없는 것을, 왜 내가 스스로 불태워지는가를 공간이 사라지는 그 다음에는 그와 유사 공간을 만들어요. 70이레를 통해서. 그럼 70이레는 시간일까요? 공간일까요? 그건 시간이죠. 시간 속에서 성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게 약간은 복잡해요.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그게 70이레를 통해서, 아까 7이레에 보면 뭡니까? 7이레가 둘로 쪼개지죠. 3년 반이죠. 3년 반 플러스 3년 반이 아니고, 3년 반 뒤에 3년 반이 들어있어요.

3년 반은 성전이 부서지는, 메시아가 죽어가는 동시에 그 기간이 오히려 이 세상이 상상도 못할 진짜 메시아가 등장하는 기간이 동일한 기간이 되는 거예요. 3년 반, 3년 반을 종이를 접어버리자 이 말입니다. 한 장의 종이가 7이레라면, 이걸 반으로 접으면 뭐로 보입니까? 3년 반으로 보이죠. 이걸 펼치면 7이레에요. 너무 약 올리는 것 같아서 제가 둘째 시간에 할 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9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여기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이 사흘 동안 죽었다고 하는데, 여기는 사흘 반 동안 십자가에 죽어있었다고 되어 있죠. 물론 두 증인입니다. 두 증인이 사흘 반 동안. 물론 사흘 반 동안, 11장 2절에 보면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아까 이방인의 뜰 나왔죠. 제가 이방인의 뜰을 그림으로 한 이유를 알겠죠.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방인의 뜰, 뭔가 성과 속을 구분한다는 것은 거룩을 거룩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속된 것이 옆에 배치가 돼 있어줘야 해요. 배치가. 공간적으로 우리가 쉽잖아요. 수도원 생각하면 간단해요.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제의를 치르는 공간이에요. 제의가 뭐냐 하면 예배, 제사, 축복, 성수뿌리고. 그러면 수도원 바깥은 성수를 안 뿌렸잖아요. 그럼 속된 거죠.

그럼 수도원들이 제의를, 제의, 보통 제사, 제례라고 하는데, 제의를 뿌리는 이유는 이 자연 속에 있는 악한 기운들이 이 공간에는 침범하지 말라는 거예요. 가뭄이나 도적이나 병충해나 이런 것이 우리가 성수를 뿌리고 축복을 해준 그런 공간에는 오지 말라고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테두리를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해놓은 거예요. 옛날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이런 데에 보면 그런 수도원들이 많이 있었어요. 

수녀들 신부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진짜 정신병자들 같아요. 자기가 거룩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고요. 뭔가 제사제도를 동원해서 자기를 완전 무장했으니까.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1-27 22:28 
광주강의20190125b 마가복음13장 14-23절(잃어버린 하나님)-이 근호 목사

70이레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70이레를 이야기해놓고 70이레라는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에 의해서 망하도록 부추겨서 멸망한 그 성전을 잃어버렸잖아요.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름이 계신 곳. 영원히 거룩한 하나님의 거주지를 잃어버린 거예요. 주의 이름이. 근데 주의 이름의 특징이 잃어버려야 주의 이름다워요. 잃어버려야. 참된 인간은 뭐냐, 참된 인간은 현재 아담의 몸을 잃어버려야 참된 인간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에게 속한 새로운 몸이 돼요. 그 잃어버린 과정이 중요해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잃어버리고 새사람 되었다가 아니고.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야 하는가? 그게 내 식으로 잃어버리고 내 식으로 얻은 것은 안 됩니다. 반드시 주의 이름이 개재가 되어야 해요. 내가 알아서 자살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들어와서 잃어버려야 되고 되찾는 것도 나를 잃어버리게 한 주의 이름의 잃어버린 내부에, 나를 잃어버리게 했던 주의 이름 안에 잃어버린 자를 찾는 시스템이 가동되어 있거든요. 이 시스템에 걸려들어야 ‘잃어버림=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 이게 같은 뜻으로 쓸 수가 있어요.

그것이 성전이 불탈 때 성전을 잃어버렸죠. 성전을 잃어버리고 다시 성전이 세워질 때 예레미야에서 70년 만에 다시 온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70년이 아니고 70이레라고 되어 있어요. 70이레. 70이레에서 이 이레를 70×70=490년, 이것으로 하면 안 되고 70+α로 해야 돼요. 왜? 여분의 것. 미지의 것. 예상 못한 것. 성전이 불타기 전까지는 미리 예측도 못하는 것. 성전이 불탈 때 이런 것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도 못한 거예요. 다른 현실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딱 붙어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뗄 때에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뗀다는 그 작용에 의해서 본격화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겁니다. 안 죽는 예수님은 결코 뭐가 될 수 없다? 주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사망의 음부의 권세에 들어가지 않는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부처, 소크라테스, 공자, 메시아가 아닙니다. 죽어야 부활이 있어요.

그러면 성도는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난다가 성도입니다. 죽었다가. 죽었다고 해서 그냥 물에 빠지지 마시고. 목포 북항에 빠지지 마시고. 죽을 때 하나하나가 적용되는 그 의미가 하나님의 죽음과 결부가 된 채 계속 죽어줘야 해요. 십자가의 능력의 지속적인 제공으로 죽어줘야 된다고요. 여러분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아시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십자가고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기 위한 십자가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단독적으로 죽었지만 사실은 그 안에 자기백성이 잠복되어 있어요. 마치 명태 알 품듯이 십자가 안에 자기 백성을 품고 돌아가신 거예요. 그걸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바늘 가지고 그 부풀은 배를 톡 치면 창세전에 예정된 알들이, 구원받은 성도의 알들이 보글보글 다 거기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목포에 굴러 떨어진 사람이 있고 광주에 떨어진 사람이 있고, 다 떨어진 거예요. 그 사람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 경유하신, 이 땅에 오셔서 왜 죽어야 하고 왜 살아나셔야 하는지 그것을 자기의 평생을 통해서 증언해야 될, 증거 하는 사명을 지닌 겁니다. 그런 기능을 벌이신 사명이에요.

그래서 70이레는 플러스알파+α, 잉여분이 있어요. 미지의 것이. 이 미지의 것을 어떻게 뽑아내는가? 이것은 바로 성전을 다시 만들고, 다시 성전재건해서 그 다음에 핍박을 받음으로서, 눈에 보이기는 바벨론이라는 국가가 성전을 불타게 하지만 이 플러스알파니까, 이 ‘70+α’를 세상에다가 적용시켜보면 ‘국가+α’가 돼요. 세상의 모든 국가는 알파α적인 요소를 내장하고 있어요. 이 알파는 뭐냐, 바로 4마리(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의 짐승의 요소에요. 이 세상의 국가적인 요소가 짐승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짐승의 지배.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이 +α가 드러나지 않아요. 그냥 인간들의 협의체, 인간들이 국회나 행정, 또는 사법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전하고 이성적인 제도처럼, 사회적인 제도처럼 그렇게 보이죠. 그게 아니고 짐승에 의해서 그렇게 조종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α가 70이레니까, 이 70은 공간이에요? 시간이에요?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할 때 이 70년이니까 공간이 아니고 시간이죠. 시간에 플러스알파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시간+α’를 어떻게 하느냐, 70이레가 내부적으로, 시간이 내부적으로 확산이 돼요. 70이레라는 틀로 해놓고 그걸 내부적으로 조각조각 나누는 겁니다.

조각조각 나누니까, 내장이 터져서 표면적인 시간이 더 넓어진 거죠. 옛날에 우리 집에서 닭을 잡을 때 봤는데, 닭은 이만하거든요. 닭을 잡아서 내장을 꺼내놓으면 이만큼이에요. 안에 들어있는 것이 포장한 몸체보다 양이 더 많아요. 그래서 다시 쑤셔 넣으려고 하면 잘 안 들어가요. 그렇잖아요. 시간도 마찬가지에요.

70이레에 담아놓으면 그냥 70이레가 되지만 그걸 째서 놓게 되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7+62+1, 7과 62이레는 성전이 완료되고 또 왕이 등장하고, 다니엘 9장 25절에는 “그러므로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고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성전이 얼추 모양새를 갖추는데 그것도 우여곡절이 많아요.

어쨌든 여기서 중건이 되고 난 뒤에, 다니엘서 9장 26절,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1이레가 끊어지고. 27절, “그 이레의 절반에” 근데 이 1이레를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3일 반, 3일 반이죠. 3일 반의 내장을 터트리면 여기는 3년 반이 되고 또는 42달이 되고 날짜로 하면 1260일 되고. 날짜로, 달로, 해로, 한다고 해도 원칙은 뭐냐 하면 한 때, 두 때, 반 때가 돼요. 1+2+½=3½, 3년 반이 되는 겁니다. 3년 반을 가지고 계속 우려먹는 거예요. 3년 반을 가지고.

이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성전을 가지고 묘사할 때 3년 반에서 모든 것이 다 표현될 수 있다는 거예요. 3년 반으로. 이 3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를 전부 다 축소시켜버리자 이 말이죠. 축소시켜버리면 아까 첫째시간 끝에 봤죠. 요한계시록을 다시 한 번 볼까요? 11장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럼 이게 두 증인의 시체인데요. 이 시체, 8절에 보게 되면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갑자기 인간들이 사는 공간적인 지명이잖아요. 소돔 또는 애굽이 같은 지역이 아니잖아요. 애굽은 이집트고 소돔은 현재 이스라엘 땅이에요. 거리가 멀어요. 지역적인 차이 같은 것이 붕 날아서 어디에 전부 다 자석에 끌리듯이, 자석에 끌린다는 말은 종이 위에다가 철 조각을 놓은 거예요. 철 조각. 여기는 애굽이라는 철 조각, 소돔이라는 철 조각이 있다면 그 위에 지남철을 하나 두는 거예요. 지남철은 하나의 몸체잖아요.

철조각이 지남철에 붙으면, 애굽이라는 철조각이 지남철 여기에 붙을 수도 있고, 소돔이라는 철조각이 또 이쪽에도 붙을 수도 있고, 애굽이 여기 붙으나 소돔이 저기 붙으나 전부 다 어디에 붙어있습니까? 큰 자석에 붙어있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사건의 우연성이에요. 사건. 하나의 십자가 사건이 세상에 있는 시간과 공간의 원천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십자가사건은 원래 인간 세계에서 예상이 된 겁니까? 예상이 안 된 겁니까? 없죠. 이 십자가사건은, 원래 인간세계에서 이 십자가사건을 구상하지 않아요. 원래 없어요. 없는 데서 뭐가 나왔어요? 없는 데서 사건이 나온 거예요. 사건. 사건의 우연성이에요. 사건을 위해서 두 증인이 사건을 드러내는데 동원이 된 겁니다. 두 증인이.

사건이라는 것은 거기에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그냥 없어요. 인간들이 있는데, 어떤 인간들의 특이성이 가미가 되니까, 두 증인이죠. 그 인간들에게 린치(법에 의하지 않는 잔인한 형벌이나 폭력)를 당해서 죽게 됐는데, 시신이 사흘 반 동안이나 있었고, 그것이 뭐다? 그 죽었던 장소가 갑자기 뭐가 돼요? 무엇과 갑자기 결부가 돼버립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돼버려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전 세상에 있는 모든 이 지역과 공간이 어디에 매달리게 된 거예요? 전부 다 십자가사건 하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동안 계속해서 사건이 일어나 왔다는 것이 돼요. 부수적인 사건으로서. 최종적인 사건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 왔다는 겁니다.

자,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있을 곳은 언약에 있어야 돼요. 근데 언약은 인간들이 할 수 있다? 없다? 인간들이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언약이 성사되는 곳에만 계시는데, 그 언약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거든요. 근데 인간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곳은 자기가 있으니까, 이 있음의 의미를 계속 유효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거룩한 공간을 항상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거룩한 공간이 있는데 거기서 내가 우리 가족과 함께 들어갔다. 이곳이 천국이다.” 이러고 싶어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뭐가 잘못됐다고 했던가요? 이 생각이 뭐가 잘못되었어요? 그 중의 무슨 요소가 빠져야 되는데, 어떤 요소가 누락이 되어 있죠? 잃어버림이 누락된 거예요. 원래 하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인데, 잃어버리지도 않은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의 잃어버림을 잃어버림으로 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했고, 그 창조된 피조물에게 도리어 되레 당하신 겁니다. 당하시면서 하나님은 손해를 봤습니까? 아니면 진짜 하나님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습니까? 진짜 본래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예요. 잃어버림을 통해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후에 거기에 어떤 후속조치가 없어요. 그냥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결국 따먹히고 마는 거예요. 악마한테. 인간한테 따먹혔잖아요.

근데 그거는 미끼였어요. 따먹힘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완전히 다르죠. 피조물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하나님은 언약이고 그 언약 안에는 무슨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 스스로 잃어버림의 경로에 자기 자신을 거기다가 적용시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린 하나님, 쉽게 말해서 죽으시는 하나님.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누구보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죽음을 마치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이거는 마치 하나님에게 해당이 안 되고 인간에게 해당이 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은 인간이 따먹어서 죽는다는 그 죽음의 요소를 하나님 자신의 요소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겁니다. 이거는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거죠. “제발 나를 괴롭혀라!”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나를 없애버려라!” 이 말입니다. “나를 괴롭혀서 없애버려라! 그럴수록 나는 참된 하나님으로 변신된다.” 이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으로 변신되는 거예요.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 말씀을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은 잃어버림과 되찾음에서 언약이 구성되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언약이 완성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전을 만들 때는 이거는 잃어버릴 용도로 만든 거예요. 선악과를 만들 때는 잃어버릴 용도로 선악과를 만든 겁니다. 아담을 만들 때는 잃어버릴 용도로 아담을 만든 거예요. 아담의 잃어버림 속에서 진짜 아담이 나오니까요.

잃어버린 그 아담의 육신을 누가 짊어졌습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아담의 몸을 지니시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매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몸이니까 죽어야 되잖아요. 죽고 난 뒤에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새 몸으로 태어났잖아요. 그럼 새 몸은 어디서 태어나는 겁니까? 잃어버린 그 현장에서만 있어요.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새 몸이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인간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시간은 없어요. 전부 다 어디에 복속되어 있느냐, 70이레, 언약을 이루기 위한 시간에 일부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세계가. 3년 반 동안 그들은 심하게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에 하나님에 의해서 공격을 해야 해요. 3년 반 동안. 그럼 3년 반 후에 됩니까? 자, 여기서 제목을 잃어버린 하나님도 좋지만 이 제목으로도 요약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 ‘시간의 지층’ ‘시간의 단층’ 원래 지층, 단층이라고 하는 것은 목포자연사박물관에 나오지만, 단층이 압력 받아서 어긋났죠. 눈에 단편으로 보일 때, 단층, 지층이 눈에 확 들어오잖아요. 근데 시간 자체가 카스텔라처럼, 케이크처럼 있다는 말은 잘 안 느껴지죠. 현실의 중첩이 잘 느껴지지 않잖아요.

그러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보면 증강 현실이라고 나오죠. 증강 현실(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환경에 가상의 사물이나 환경을 덧입혀서,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 주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로 조성된 현실). 게임 속에서 칼 들고 설치는데, 다른 길가는 사람이 보면 무기도 없어 혼자서 설치고 있는 거예요. 여기 증강현실에 버그(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착오)가 일어나면 게임 속에서 죽었는데 실제로 죽는 일이 일어나요. 그 버그가 현빈이라니까요. 드라마이야기니까 몰라도 되고요.

시간의 단층, 지층, 중첩이 있다는 말은, 이거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성경에 보면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 13장 봅시다. 14절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 할지어다” 분명히 제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B.C168년경에 있었던 그 사건이라고 했잖아요. 그 사건인데 이미 지나간 사건이다 이 말이죠. 과거사건이거든요.

이미 과거사건인데, 그게 과거사건이 아니고 반복적으로 진행되어야 될 사건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순신장군이 죽었잖아요. 근데 이순신장군이 다시 광화문에 나타났다. 목포 앞바다, 또는 진도 울둘목에 나타나서 전쟁한다고 하면은 신문기자들이 와하고 달려들 거예요. 진짜 이순신인지, 그리고 그 적들이 왜적인지, 안 그러면 일본군의 총대장인지, 그걸 분명히 조사해야 될 거예요. 안 그러면 하나의 연극인지. 그럴 일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과거는 비가역적(다시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성격을 띤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에서. 갔던 것이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이 시간이에요. 시간은 화살 같아서 가게 되면 뒤로 안 돌아오고 그냥 앞으로 계속가요. 한번 죽으면 다시 애가 될 수 없듯이. 이거는 니고데모가 정리를 했잖아요. 어른이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비가역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고 했죠. 뭐로 태어납니까? 뭐로 태어나야 돼요? 육으로는 안 되는데 영으로는 되잖아요. 거기서 말하는 영이라고 하는 것은 누굴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육신을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육신이 영이에요. 왜? 영이 거기서 나오니까.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시간의 단층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두 개의 다른 종류의 몸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는 아담이고 또 하나는 새 아담. 두 육신이 있어요. 그러나 모양새는 똑같아요. 예수님이나 예수님도 뭐 마리아의 아들이니까. 다 육신이다 이 말이죠. 육신인데, 근데 거기에 작용하는 사건들이 달라요. 특이성이, 한쪽은 특이성이죠. 예수님에 의해서, 거기서 나온 영에 의해서 태어난다.

그럼 엄마가 누가 돼야 돼요? 엄마가? 보통 육체의 엄마는 누가 돼야 됩니까? 여자가 애기를 낳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애기를 낳아버리면 예수님은 무슨 역할을 해야 돼요? 예수님은 여자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그렇게 자기를 규정하잖아요.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 여자의 자손인데, 여자라고 하는 것은 아까 여성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성성은 임신이 가능한 거예요.

아가서 수련회에서 여성성을 뭐로 강조했습니까? 남성에게 없는 요소가 뭐예요? 돌출된 젖가슴이라고 했죠. 내게 없는 것. 내게 없다는 말은 나에게는 더 원천적인 것. 나에게는 더 근원적인 것. 그걸 여성성속에서 찾는 거예요. 여성성속에서. 젖가슴이 있다는 말은 애기를 낳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동침을 어디서 하자고 했습니까? 아버지의 집이 아니고 누구 집에서입니까? 어머니의 집. 우리 오빠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의 집에서 하자. 어머니의 집에서.

여자에서 어머니로 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우리 어머니는 어디에 있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그 어머니의 기능을 가진 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어머니의 여성성의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왜 예수님께서 우리가 납득이 되는 이야기로, 우리의 육으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방금 그런 이야기를 납득이 되는 개념을 가지고 동원해서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은 인간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플러스알파+α가 있다고 했죠. 국가+α에서 국가는 뭐로 둘러쳐져있습니까? 짐승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짐승.

인간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지만 누구는 관심이 있어요? 짐승은 오직 누구에게만 관심이 있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에만 관심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악마를 멸하려 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악마가 설치해놓은, 악마가 인간세계에 건설한 모든 것을, 모든 개념들을, 시간과 공간을 전부 다 폭격해버리는 거예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간다. 이것도 찢어버려요. 공간도 어디가 애굽인지, 어디가 소돔인지, 어디가 십자가에 죽으신 곳인지, 그것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아요. 예수님에 의해서 전부 다 새로운 개념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소돔이든 애굽이든 십자가 죽으신 곳이든 전부 다 한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 한 장소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안 되지만 동일한 사건이 발생된다면 그 동일한 사건 안에서 그게 어떤 지점이든 어떤 시간이든 전부 다 십자가 안을 증거하고 보여주는 일로,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새로운 시간을 형성한다는 이 말입니다.

자, 이 이야기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영원한 곳에 뭐가 침투했습니까? 멸망한 것이 침투했죠. 그런데 멸망한 것이 침투했다고 영원한 것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고, 멸망한 것과 만남을 통해서 숨어있는 영원함이 더 깊이를 더하고 비로소 그 내막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거예요. 멸망한 것이. 악마가 있어줘야, 악마가 노골적으로 있어줘야 영원함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영원함의 수준이 아니고 엄청난 수준에, 인간들이 감히 상상도 못하는 영원한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악마로 하여금 부추겨서 그걸 파헤치는, 그게 개봉되는 계기로 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에는 손해 보는 일을 안 합니다. 남는 장사를 해요. 제가 강의에서 여러 번 했습니다만, 인간이 보는 현실이라는 것은 사실은 자기가 보는 현실이에요. 내가 보는 현실이에요. 왜? 사람들은 자기가 보는 경험들이 자기의 기억에 담기고, 기억이 있어서 남들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노래하나, 남들 보기에는 그냥 나무하나, 그냥 스쳐가는 어떤 건물하나, 이것이 거기에 추억이 있는 사람한테는 굉장히 자기한테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목포의 창성장(일제강점기에 고급 요릿집과 여관으로 사용되던 창성장을 개조한 숙박시설)은 손혜원한테 그런 의미인 거예요. 손혜원한테는 정말 이거는 기부하더라도 다 사고 싶은 20채인가? 오늘 그 역사적인 현장에 가봤잖아요. 거기서 어떤 사람이 투기할 사람은 아니라고 메가폰 들고 설명하는, 역사적인 우연한 마주침이 있었죠. 어떤 사람이 관광객들을 데리고 설명한단 말이죠.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왜 투기라고 하느냐는 식으로. 그걸 우리가 봤잖아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의미를 재배치하는 겁니다. 투기다. 아니야, 투기 아니다. 이쪽 관점에서 보면 전혀 투기가 아닌 거예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것이 사건입니다. 새로운 관점을. 자기가 봤던 것은 투기처럼 보이지만 손혜원 입장에서는 투기가 아닌 거예요. 그럼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떻게 봤는가를 과연 우리가 관심을 둡니까? 우리는 내가 더 존재하고 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 자꾸 예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붙드는데, 입장 바꿔서 나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는가를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그리고 성경을 보게 되면 뭔가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그냥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어디서 배운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개무시 하는 그러한 인식론에 의해서 학교에서 교육받은 거예요. 그리고 가정에서 교육받은 거예요. “예수님 같으면 무시해도 괜찮아. 십자가 복음 몰라도 인간이야.”라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는 습득해온 겁니다.

찬송가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주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이 없다고요. 주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이 없을 때는 언제냐 하면은, 마태복음 8장에도 나오지만, 어떤 제자가 와가지고 “예수님 따라가기는 가겠지만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셔서 장례 치르고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예요? “그러려무나”라고 하지 않았죠.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이 없다고 할 때 우리가 뭘 포기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그 제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그리고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떤 부자청년이 와서 어릴 때부터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부하면서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다 주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때, 부자도 놀랐지만 누가 더 놀랐는가 하면 그걸 듣고 있던 제자들이 더 놀랐어요(마19:25). 지금 우리가 예수 따른다는 것이 저런 의미였었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우리들 입장에서는, 과거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미래가 좋다고 해도 미래는 불확실성이고 과거는 확실한 거잖아요. 불확실성한 미래를 위해서 이것을 버린다는 것은, 이거는 엄청난 도박입니다. 그거는 무모한 일로 보이죠.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이라서 무모하기 싫어요. 왜냐하면 무모한 결과는 뭐였습니까? 만약에 무모하다면 그 결과는 저수지에 빠져죽든지, 차로 자살하든지, 번개탄피우든지, 우리한테는 자살 외에는 없잖아요. 서울대 의대에 들어가지도 못할 애를 서울대 의대에 들어가게 하려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하더니만 나중에 총가지고 뻥하고 목에 쏘아서 죽었다는 SKY캐슬의 그 애. 애 공부를 억지로 시켜가지고 서울대 의대만 들어가면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게 드라마다 싶어서 무모하다고 하지만, 우리 인생은 도박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라는 것은 과거에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지금 더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이걸 잃어버리게 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어떤 인간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주님의 몸에다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누구냐 하면 우리 자아에요. 몸은 주님의 것인데 악마로부터 세뇌 받은 자아를 주님의 몸에다가 심어놓은 거예요. 우리가 이런 입장에 있어요. 어디 이거 갈라내야 되겠죠. 갈라서야 되겠죠.

갈라서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일이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되풀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70이레. 7+62+1로 분해가 되고, 1은 다시 3.5, 3.5로 분해가 되고, 이것이 42달(계11:2, 13:5) 1260일(계11:3) 1290일, 1335일, 다니엘 12장 11절-12절에 나오는 이런 숫자로 계속해서 이것이 갈라지고 갈라진다는 말은, 이건 초단위 분단위로 갈라진다는 것을 예비해야 돼요.

어떤 시간이 됐든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없어져야 될, 잃어버려야 될, 지금은 종말의 시기. 다시 말해서 악마의, 짐승의 모든 전략과 작전이 활성화해야 될 시점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마음껏 그걸 누려라. 주저하지 말고 악마가 벌이는 그것을 똑똑하게 목격하라. 그것이 헛된 것이 아니고, 악마의 모든 활동이 절대로 복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복음을 복음답게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는 대책이 있다? 없다? 이 망하는 데서 인간은 어떤 대책도 없는 겁니다. 이미 구멍 난 거예요. 완전히 우리는 허황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자 마가복음 13장 14절을 봅시다.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 할지어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한테 당했던 그 일이 단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그보다 더 심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게 로마의 티투스장군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을 때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죽었느냐 하면은 100만 명이 죽었어요. 포로 잡힌 사람은 10만 명이 포로 잡혔어요. 요세푸스 역사서에 보면 나와요. 100만 명이 죽었으니까 이거는 보통 사건이 아니죠. 그때 죽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들 중에 열성분자들이 죽었어요.

그들이 죽었을 때에 그냥 유대인들이 멸망 받은 민족이라고 하지 말고, 그들이 왜 멸망당했던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들에게 어떤 믿음 같은 게 있어요. 여러분 구약에서 바벨론에 잡혀가라고 예레미야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해도 시드기야 왕은 극구 반대했죠. 왜 반대합니까? 군인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자기 자존감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존감이 자아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나는 그냥 지켜질 때 가치가 있다고 착각한 거예요. 내 자식과 내 재산과 내 모든 것, 지킨 것이 있기 때문에 인생의 보람을 여기에 다 건 겁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요셉이나 바로 왕이 요셉의 형들에게 충고한 것이 뭡니까? 다 버리고 빈손으로 오너라! 너희들 것을 좋다고 해도 애굽에 있는 것이 더 좋다. 다 버리고 오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요셉의 형들이 그동안 모았던 것이 뭐예요? 그들이 자기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자기인생을 꾸려온 거예요. 내 인생을. 이거는 남 좋아라고 한 것이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자기 자존심을 걸고, 제발 이것만큼은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지켜왔던 거예요.

그래서 이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예상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까? 예상을 못했으니까 자꾸 연속성을 두는 거예요. 내가 노력하고 내가 꿈꾸고 희망한 것의 연장선 끝에, 그 무한한 연장선 끝에 뭐가 있을 것이다? 천국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거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하게 되면 나는 천국에 갈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분명히 이야기를 했죠. 천국 가는 조건을 누가 만들었어요? 본인들이 만들었죠. 본인들이. 내가 기도도 이만큼하고 헌금도 이만큼 했으니까 구원될 조건에 부합될 것이라고 본인이 조건을 만들었잖아요. 그 조건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 버려야죠. 이렇게 경건하고, 착하고, 목사 말대로 했으니까, 주위에서 믿음이 좋다고 했으니까, 이정도 되면 나는 갖출 것을 얼추 갖췄으니까,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노력하고 있는 괜찮은 마음을 주께서 인정해주겠지.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연출하고 있는 겁니다.

작가요, 각색자요, 연출자요, 편곡, 음악, 전부 다 자기가 다 하고 있어요. 무대공연까지. 마마~~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처럼 프레디 머큐리 자기가 다 꾸미고 있는 겁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이 왜 그렇게 됐어요? 자기인생을 누가 연출했어요? 본인이 연출한 거예요. 본인이. 우리는 거기와 다릅니까? 뭐 달라요? 달라야죠.

왜냐하면 내 인생은 누가 연출한다? 몸은 멀쩡한데 나는 잃어버렸으니까, 그러면 이 몸은 주인이 알아서 연출할거라 이 말이죠. 주인이 알아서 연출하면서 그때그때 발생되는 게 주님이 주신 새로운 자아죠. 새로운 자아. 그게 두 증인이에요. 나는 죽고 날마다 살고 있다. 주께서 나를 잃어버리고 날마다 되찾고 주께서 나를 잃어버리고 되찾고, 잃어버리고 되찾고. 왜?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니까. 하나님이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이 몸을 통해서 평생토록 마음껏 보여주는 겁니다.

마가복음 13장 15절,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절,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이거는 완전히 옛날의 바벨론을 재탕하는 거예요. 바벨론이 왔을 때에 바벨론에게 잡혀가면서 처참하게 당했죠. 바벨론에게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 몰살당했어요. 그걸 그들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무서웠던 거예요. 뭐가 무섭다? 유대나라는 뭐가 무서워요? 바벨론이 무서운 거예요.

그런데 무섭다는 말은 뭘 안 본 거예요? 짐승을 다루시는 분이 자기가 믿는 여호와라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이 악마 빼놓고 자기하고 직접 이야기를 한 줄 알았죠. 악마를 통해서 나를 잃어버린 자로 만든다는 그 전략을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몰랐던 거예요. 사도행전 2장을 한번 볼게요. 2장 3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어찌 할꼬’가 나오죠.

어찌 할꼬의 의미가 뭡니까? 뭘 놔버렸다? 자기가 연출하고 의도했던 것을 전부 다 완전히 다 놔버렸죠. 주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죽이지 말아야 될 메시아를 죽여 버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디 편에 섰다? 악마의 사주를 받았다. 악마 편에 섰다. 그러면 악마 편에 섰다는 것을 계속 유지할까요? 그 인생 계속 끌고 갈까요? 아니죠. 놔야 되죠. 놔야 되는 것이 뭐냐, ‘어찌 할꼬’ 이 말입니다.

어찌 할꼬, 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거는 자백을 이야기하거든요. 이게 자백인데, 이 자백은 뭐냐 하면 이미 모든 일이 완료가 되었음을 자백이라는 형식으로 지금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더 수를 쓴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질 게 없음에서 오는 자기포기. 이게 자백이라니까요. 그럼 우리는 매일 자백해야 돼요. 어찌 할꼬. “밥이나 먹어라!” “예. 어찌 할꼬” “골프나 쳐라!” “예.” “놀러나 다녀라!” “예.” 늘 ‘어찌 할꼬’의 마음으로 사는 거예요. 어찌 할꼬.

그게 성령의 세례에요. 성령은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어찌 할꼬. “애들 영어나 가르쳐라!” 그렇게 사는 거예요. 이게 내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니까. 그게 성령의 세례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회개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회개라는 말은 뭐냐 하면 회개하면 뭐 이렇고, 그게 아니고 이것은 이미 완료된, 끝난 상태죠.

그러니까 내가 시간을 만들어 나갔던 그 시간보다 나를 있게 한, 먼저 시간이 따로 중첩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중첩. 다른 시간에 의해서 나는 그 시간에 조종되고 있는 거예요. 타이밍에 의해서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시간은 내가 앞으로 잘 되기 위해 구사한 시간이 아니고, 모든 게 완료된 언약에서 나온 시간. 그 언약의 시간에 맞추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가서 17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니까 내 자식, 내 아이, 우리는 얼마나 애지중지하고 그것을 키운다고 얼마나 공을 들였습니까? 하지만 그 공들인 그 모든 것이 공들여봤자 나온 결과가 뭐냐, 자아에 대한 집착과 미련밖에 없어요. 이게.

다시 말해서 영원한 것에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계속 버티겠다는 그 고집밖에 안 나온다고요. 내 몸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사나죽으나 누구의 것입니까? 값을 주고 사신 주의 것인데, 자꾸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강제로 떼찌떼찌! 하고 떨쳐놔야 될 것이 아닙니까? 자식도 네 자식이 아니라고. 그런 일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19절,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절,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절,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자, 이점에서 보게 되면 옛날 바벨론에 있었던 그리고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헬라 짐승이 왔던 그때 그 상황을 지금 유대에 적용을 시켰잖아요.

근데 이 유대에 적용시켰던 이 상황을 우리가 보고 있으면 지금이 뭡니까? 이미 이 세상 그릇에 담긴 음식 재료가 갖출 것은 다 갖춰진 거예요. 여기에 계란찜이 있어요. 계란찜. 계란찜을 할 때 파도 좀 송송 썰어 넣죠. 근데 파가 중간에 있을 수도 있어요. 그거는 셰프들이나 하는 것이고. 어설픈 아마추어들은 파가 그릇 옆으로 있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자, 이것을 옛날 바벨론을 보니까 계란도 먹히고 파도 먹힐 거예요. 그 다음에 이 본문처럼 로마 티투스에 의해서 유대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니까 역시 그날도 참혹한 날이라 말이죠. 그럼 2019년도에 여기도 보니까 계란도 먹히고 파도 먹히는 거예요. 왜? 같은 도가니그릇 안에 있으니까. 재료가 다 구비됐다는 이 말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잃어버린 세상으로 만들 재료는 아무리 세월이 발달해도 다 구비된 거예요. 시간적으로는 단회성으로 반복시키지만 크게 보면 모든 것이 단회성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단회성이라는 의미를 두 개로 사용합시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단회성은, 한번 지났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두 번 다시 안 온다는 것이 단회성이지만, 주님 보시기에 단회성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고 애굽이 되고 소돔이 되고. 소돔과 애굽이 시대가 다른데, 시대가 달라도 어떤 사건이 일어났느냐, 그 사건 안에는 이미 확정된 원리원칙이 그대로 퍼부어지는 그런 단회성적 구조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구조에.

그 다음에 22절을 봅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이적과 기사인데, 이적과 기사를 여러분들이 알았으니까 답변해보세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말하는 이적과 기사를 내세울 때 어떤 원리가 있다면 그거는 뭡니까? “너희들은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잘 될 거야. 잘 풀릴 거야. 복 받을 거야.”이런 것. “여러분 자아가 잘 되고 여러분 집안이 잘 될 겁니다. 기도하시면 응답받아 잘 될 겁니다.” 이게 적그리스도에요.

그러면 이 적그리스도의 말을 곱게, 친하게, 오늘 너무 은혜 받았다고 듣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다? 우리 안에 멸망할 가증한 것이 든든하게 들어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아까하고 뭐가 다르죠? 사도행전 2장의 유대인의 태도하고 다르죠. 유대인의 태도는 ‘어찌 할꼬’죠.

‘어찌 할꼬’는 어떻다고 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나에서 나를 놔줘야 돼요. 내가 내 인생 끌고 가려고 억지로 멱살 쥐고 흔들고 자책하고 때리고 벌주고 벌세우고 나한테 질책하고 심판하고, 이런 것은 계속 자기한테 희망을 건다는 것이고. ‘어찌 할꼬’에서는 나 자신에게 일체 희망을 건다? 안 건다? 일체 희망도 안 걸고 목표도 없고 목적도 없고. 그냥 막사는 거죠. 그냥. 되는대로 사는 거예요. 되는대로.               

여기 보세요.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어떤 사람을 미혹해요?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한다는 말은 누구한테는 환영받는다? 택하지 않은 사람한테는 이런 적그리스도가 환영받겠죠. 이 모든 구절은 뭡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가신 길,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런 현상들이 십자가 중심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너희들에게는 가시적인 것, 뭐만 보인다? 십자가만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 자랑할 것은 뭐밖에 없다? 오직 성도가 자랑할 것은 부활이 아니에요? 뭡니까? 십자가뿐이라.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어디에 간다? 십자가에서 죽는다.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자꾸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자꾸 자기 자신이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죽고 산다는, 자꾸 자신을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죽을 육체에 온 것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육체에서 나타나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나오죠. 

그래서 어떻게 그걸 지킬까요? 막 살까요? 막 살게 되면 그렇게 돼요. 막 살게 되면. 근데 막 살아도 십자가 복음이 안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건 애초부터 택한 백성이 아니니까. 남 흉내 내는 거죠. 막 산다고 해서 막 살면 지옥 가죠. 막 사니까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본성대로 살면 지옥 가잖아요. 왜? 본성대로 산다는 말은 갈 길이 달랐다 이 말입니다. 둘 다 애써도 갈 길이 다르고, 막 살아도 갈 길이 다르고. 이래도 다르고 저래도 달라요.

방법은 뭐냐 하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온 것처럼 십자가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복음을 전하게 되게 되면, “잔소리하고 있네.”라고 하면 짐승이에요. 세상 신이 복음을 막게 하기 때문에 개한테 진주를 줄 수가 없는 거고. “아, 그 십자가복음이 이상하게 믿어지네.”하면 그거는 주께서 택하신 백성이고. 따라서 우리는, 성도는 지옥과 천국의 기준만 제시하면 그만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다 십자가지신 일과, 일을 통해서 그것을 전개하는 일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십자가부활만이 그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원한 천국인 것을, 십자가 안에 천국이 들어있고 그 속에 참여하는, 초청받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주여,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만 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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